2026/5/28

 

상반기에 읽은 비문학 책 중 기억에 남는 책

 

 

신자유주의에서는 성별과 세대를 막론하고 경쟁을 절대화하는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과로와 자기 학대에 가까운 자기 계발이 만연한 이 사회, 재능 있는 이들이 경영학과 컴퓨터공학 전공을 택하도록 반강제로 권하는 이 사회는 (정신) 건강, 진정성, 행복 같은 가치를 어느 때보다 강조하는 온정적 문화가 만연한 바로 그 사회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문화의 주된 특징 중 하나는 감정적 건강과 치유를 대단히 중시하고 정신적 건강을 자아와 타인, 삶을 이해하기 위한 주된 틀로 여긴다는 것이다. 사회학자들은 현대 사회에서는 심리학과 정신의학이 종교가 대표하는 전통적 도덕관을 대체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지적해 왔다.

건강, 행복, 진정성 같은 가치의 중요성이 커지고, 일상에서 일어나는 점점 더 많은 사건을 심리학과 정신의학의 치유적 세계관을 통해 해석하는 것이 현대문화의 주요한 특징이다. 마치 상담사가 치료요법을 시행하듯이, 심리학과 정신의학의 개념적 틀과 어휘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성찰적으로 들여다봄으로써 건강과 행복을 달성하는 것은 오늘날의 사회에서 중요한 문화적 과제가 되었다. 심리학과 정신의학이 지식이기 이전에 하나의 문화현상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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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문화는 특히 코로나-19 팬데믹과 소녈 미디어 시대의 도래와 함께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해, 자기 자신을 넘어 타인과 관계를 이해하는 패러다임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게 되었다. 정신 건강과 행복, 치유에 집착하는 이 문화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현대인이 맞닥뜨린 외로움 위기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의 문제의식이다.(26-27p)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에 권력의 작동은 노골적 강제가 아닌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권력의 욕망을 우리의 욕망과 일치시키는 방식으로, 우리의 자유 자체를 착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무해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건강과 행복의 언어는 우리가 소위 자발적으로 깊이 있는 관계를 멀리하고 외로움과 고독의 길을 택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치료요법 문화는 외로움 위기를 만들어낸 유일한 원인도, 어쩌면 가장 중요한 원인도 아니다. 하지만 치료요법 문화는 다른 문화와 제도, 기술과 시장 등과 상호작용하면서 현재의 외로움 위기를 파괴적 수준으로 가속화하는 역할을 한다. 치료요법 문화 그리고 이 문화가 다른 제도 및 문화와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내는 역학이 인간적 유대와 연대에 관한 우리의 생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려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28p)

 

 

자아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한 외적 의미체계와 유대감의 기회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 사회에서, 치료요법은 특히 청년들에게 정체성 구축을 위한 대안적 기회를 제공한다. 현대 사회의 청년들은 HSP, ADHD, 우울증 같은 진단명들을 일종의 대안적 정체성으로 여기기도 한다.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진정한 나, 그러니까 이상적인 심리적 특성을 갖춘 나를 회복하는 행위를 정체성 구축을 위한 대안적 서사로 활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체성을 대화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독백적으로 이해하는 문화에서, 타인은 나를 더 잘 알기 위한 통로가 아니라 진정한 나를 오염시키는 존재로만 이해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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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치료요법 문화는 만족스러운 감정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돌보고, 행복이라는 감정적 이상향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의 중요성을 대단히 강조한다. 그러나 자신을 돌보는 행위에 집착하는 문화에서 서로를 행위의 중요성은 희미해지고, 행복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문화는 자신과 타인, 사회의 즐겁지만은 않은 부분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훼손한다.

게다가 행복이 삶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주장하는 치료요법적 행복의 윤리는 타인과 공동체를 행복의 한 요소나 행복을 위한 도구로 보게 만든다. 감정적 행복을 가장 중시하는 문화에서 행복은 거의 모든 소비를 정당화할 수 있는 마법의 말처럼 사용된다. 점점 더 소비주의적으로 변화하는 사회에서 그리고 더 외로워지는 사회에서, 상품은 타인과 공동체를 대신하는 정체성의 원천을 제공하고, 심지어는 인간적 유대감과 연대감을 제공하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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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요법 문화는 유연하고 서구화된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감수성이며 세대와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나 경쟁주의 문화가 특히 사회성이 없고, 냉정하고, 이른바 '도전 정신'을 갖췄다는 백인 남성의 얼굴로 다가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문화는 특히 여성, 진보적인 젊은 여성의 얼굴로 다가온다. 아이러니하게도, 더 주체적인 삶과 더 진보적인 사회에 대한 갈망, 그중에서도 젊은 여성들의 갈망은 타자를 자신의 건강을 위한 도구로 대우하는 문화의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31-33p)

 

 

'죽음 없는 전쟁'과 '위험 없는'사랑은 같은 시나리오를 따른다.

우연한 일도, 뜻밖의 만남도 없다.(38p)

 

 

당신 자신을 경영하라는 신자유주의적 명령이 깊이 체화된 결과물이 바로 이러한 전문가 예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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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는 아이를 키우고 개를 훈련시키는 일상적 일마저도 식당 같은 사업체를 경영하듯이 수행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일상마저 경영의 대상이 되는 신자유주의 자기 향상 문화의 중요한 특징은 심리학적 부분에 대한 향상과 최적화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인간 자체가 상품, 곧 '인적 자본'의 총체라면, 인간의 심리적 특성 또한 하나의 자본이자 중요한 투자와 계발, 최적화의 대상이 된다. 마음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이자 모든 성공의 기본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심리적 특성의 최적화는 오늘날 수도 없이 많은 미디어와 문화 상품이 다루는 인기 있는 주제로 부상하게 되었다.(41p)

 

 

오늘도 틱톡에는 '나르시시스트의 특징' '회피형 남자의 특징' '가스라이팅 구분법' 등 관계에서 타인을 분류하고 평가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수많은 심리학적·정신의학적 어휘에 관한 동영상이 끝도 없이 업로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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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련의 심리학적·정신의학적 평가 행위의 종착역이 관계의 돌연한 단절이라는 것 또한 한국과 마찬가지다.(46-47p)

 

 

우리는 타인들로 인한 '스트레스'와 '트라우마'폭격에 시달리며, 우리를 '트리거'하는 것들을 피하려고 애써야 한다. '바운더리'를 설정하고, 나를 '가스라이팅'하는 '에너지 뱀파이어'들과 '나르시시스트'들과의 '유해한'관계로 인해 떨어진 '자존감'을 '회복하며' '건강한'관계를 맺으려 노력해야 한다. 관계를 구축하기 이전에 '진정한 나'를 알고 '자아를 실현'하며 '행복'을 찾기 위해 '마음의 근육'을 단련해야 한다. 또한 상처받은 '내면아이'에 대한 돌봄과 치유를 실천하며 안정적 '애착'을 구축해야 한다.(49-50p)

 

 

이처럼 특히 청년들을 중심으로 인간관계로 인한 고통을 회피하고 무해한 인간을 찾으려는 성향이 점점 두드러지는 데에는 복잡한 사회적 이유가 있으며, 이는 이 책 전체에서 탐구할 주제이기도 하다. 분명한 점은 일상적 사건을 건강의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하는 심리학과 정신의학의 어휘 및 사고방식의 확산이 이러한 문화적 감수성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일상의 문제를 병리와 치유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치료요법적 감수성은 문화의 어휘 목록뿐 아니라 암묵적 전제 자체를 바꾸어낸다. 치료요법의 어휘와 평가 도식은 일상의 모든 갈등과 고통을 치유의 대상이 되는 병리로 구성함으로써, 타인의 고통과 타인으로 인한 고통 모두를 피하는 것을 중요한 문화적 과제로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고통과 고통을 주는 사람을 단지 유해한 것으로만 이해해야 할 이유는 없다. 고통은 단순히 피하고 제거해야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나름의 기능을 수행하며, 그렇기에 우리가 관여할 수 있는 복합적 사건이기 때문이다.(57p)

 

 

그러나 현대 치료요법 문화는 정신적 고통을 우리가 관여하고 성찰할 수 있는 것, 떄로는 우리를 성장시키는 것으로 보거나 최소한 일상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대신, 삶에서 경험하는 모든 정신적 고통을 피해야만 하는 병리, 정신 건강과 자아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평면화한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는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갈등과 부침을 '스트레스' '트라우마' '상처'같은 어휘로 이해하는 관점이 확산하면서,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고통 또한 점점 더 관여보다는 회피나 치유의 대상이 되는 무언가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갈등이나 고통을 성찰과 성장의 계기로 삼을 사건이라기보다는 단지 정신 건강에 해로운 무언가로 일원화하여 받아들이는 관점이 보편화함에 따라, 괴로운 사건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기보다는 회피하려는 심리가 일반화하는 것이다.(59-60p)

 

 

현대문화의 흥미로운 특징 중 하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트라우마'라는 단어의 의미가 끊임없이 확장된다는 것이다.

최근 몇십 년에 걸쳐 트라우마라는 단어의 용례는 이 단어가 처음 출현할 당시에는 상상도 못 했을 수준으로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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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요즘음에는 폭력, 빈곤, 사회적 배제, 자연재해 피해는 물론 부모의 이혼이나 죽음, 집단에 적응하지 못해 겪는 어려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등 일상에 널리 퍼진 경험에도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사실상 깊은 괴로움을 주는 사건이라면 무엇이건 트라우마로 지칭하는 현상이 보편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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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건들이 트라우마를 낳을 수 있는 잠재적 위협으로 여겨지게 되자, 트라우마 반응을 유발하는 사건이나 상황 등을 뜻하는 '트리거'라는 단어도 함께 일상화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내용(사실상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내용이라면 무엇이든 해당된다)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리는 '트리거 워닝'을 삽입하는 것은 점점 더 많은 콘텐츠에서 의무 아닌 의무로 변해간다. 심지어 서구권에서는 대학 강의안이나 자료에까지 트리거 워닝이라는 문구를 삽입하는 추세다. 이제는 나와는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마저 기피해야 마땅한 트라우마로 여겨지는 것이다.(64-66p)

 

 

앞으로 계속해서 보겠지만 신자유주의와 치료요법 문화는 여러 층위에서 공명한다. 신자유주의가 원하는 이상적인 노동자상은 언제나 긍정적인 인간, 그래서 끊임없는 생산에 원활히 참여할 수 있는 인간이다. 이 체제에서 정신적 고통이란 원활한 생산 활동의 장애물일 뿐이며, 고통을 통해 이루어질 수도 있는 성찰과 인간적 유대, 사회적 연대 같은 인간적 성장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신자유주의는 타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인간적 유대를 맺고 성장하기보다는 긍정적 기분, 즉 생산 가능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치료요법 문화가 우리에게 권장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생활 태도다.(68p)

 

 

첫 번째 문제는 어떤 관계가 건강하고 어떤 인간이 건강한지가 모호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거의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유해한' 또는 '무해한'이라는 이분법으로 나눌 수 없는 어떤 회색지대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제에 대한 환상을 판매하는 각종 심리학, 정신의학, 자기 계발 매체가 내세우는 심리적 건강의 공식이란 그지없이 단순하고 이분법적이다. 고통스러운 감정은 건강에 좋지 않으며 긍정적 감정은 건강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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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의 인간관계 경험에는 아무리 괴로워도 단순한 스트레스나 유해함으로 일축할 수만은 없는 복잡성이 존재한다. 치료 요법 문화는(외부의 억압을 받는다고 가정되는) 개인의 감정을 유일한 진실이자 판단 기준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함께 살아가는 삶에서 벌어지는 여러 감정은 한 사람의 마음속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특정한 맥락 속에 존재하는 것이자 만들어지고 변화되는 무언가이다.(88-89p)

 

 

게다가 이런 평가는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일에도 방해가 될 따름이다. 타인을 잠재적 유해함의 요인으로 대상화하여 의식적으로 평가하는 데 몰입해 있는 사람을 좋아하기란 어렵다.(99p)

 

 

어떤 자기 개념이 확고해지면 설사 그것이 부정적일지라도 사람들은 이러한 자기 개념의 변화를 유도하는 사람이나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적극적으로 저항하기까지 한다. '나는 내향적이다' '나는 계획적이다' '나는 예민하다' '나는 우울하다' 등의 성격 명칭에 몰입하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 모습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게 되고, 그 결과 다양한 역할과 상황 그리고 그 속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여러 면모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120p)

 

 

그러나 치료요법 문화는 그렇게 단절을 실천하고 난 다음 단계에 무엇으로 자아를 채워야 하는지 알려주는 바가 거의 없다.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따를 것을 가장 강조하는 문화가 주는 가르침에는 타인이나 공동체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된 정체성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자원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외부와 단단히 연결되지 못하는 정체성은 여전히 불안정한 기반에 놓일 수밖에 없다.(169p)

 

 

현기증 날 만큼 빠르게 움직이는 사회에서 멈춤과 고독을 위한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만족스러운 기분의 달성이고,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행동이 오로지 혼자서 하는 행동뿐이라면, 우리가 관계의 단절을 그처럼 쉽게 말하게 된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집에서 마스크팩을 붙이고 거품 목욕을 하며 넷플릭스를 보는 것이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이라면, 바깥에 나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은 매력적이지 못한 대안일 수밖에 없다.(178p)

 

 

오늘날의 사회에서 개인적 노력, 즉 소비를 통해 달성해야 하는 문화적 과제는 부정적 감정을 관리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단순히 감정적 항상성을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은 감정 상태, 즉 행복을 달성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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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의 평자가 관찰하듯이, 사실 현대 사회에서 행복은 단순히 성취될 수 있는 것을 넘어 거의 강박에 가까운 의무가 되어버렸다. 이제 사람들은 자존감이나 애착 유형 같은 심리적 특성이라는 차원뿐만 아니라 감정적 차원에서까지 이상향을 달성하려고 애쓴다. 심리학자 에드가르 카바나스가 지적하듯이, 행복은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좋은 것, 바람직한 것, 무엇보다 건강한 것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184-185p)

 

 

우리의 내적 삶은 쾌와 불쾌, 세로토닌과 세로토닌의 부재, 무언가의 빈도와 강도로 환원할 만큼 단순하지 않으며, 개인의 노력만이 아니라 타인, 나아가 공동체나 사회와 맺는 관계의 양상에 좌우되는 대단히 복잡한 사회적 경험이다. 그리고 이 관계는 사회와 문화가 무엇을 장려하고 기능하게 하는지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194p)

 

 

 

 

ㅡ 이승연, <손절사회> 中,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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