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그러므로 독자들이여, 안심하시라. 열 권의 책을 읽든 같은 책을 열 번 읽든, 똑같이 교양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단지 전혀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나 걱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걱정을 전혀 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들이다.(130p)
무엇이 이 단어를 혐오스러운 것으로 만들었을까? 처음에는 속물근성으로, 다음에는 집단 심리로 인해, 필요하지 않을 때도 그 단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러저러한 전시회에 방문객이 많았다고 말해도 충분한데, 많은 향유자들이 방문했다고 말하는 경우이다. 단어가 혐오스러워지는 까닭은 바로 대중 사회가 그것을 소유하여 아무 때나 마구 사용하기 때문이다. 베토벤 역시 콜택시 회사의 주제곡으로 사용될 때는 혐오스럽게 된다.
언젠가 계단에서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그가 당신을 바에 초대하여 커피 한 잔을 대접하고, 너무 지나치지 않으면서도 불쾌하지도 않은 우스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상상해 보라. 당신은 그가 호감을 주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를 매일, 하루에 세 번 계단에서 만나는데, 그때마다 당신에게 커피 한 잔과 우스개 이야기를 강요한다고 상상해보시라.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신은 그의 목을 조르고 싶을 것이다. 단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147~148p)
조금은 사그라든 감이 있기는 개뿔 아직도 어디에나 갖다 붙이는 그 놈의 힐링타령과 멘토타령을 보노라면 1992년의 에코가 지적한 이런 면이 비단 2016년의 한국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는 고정불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사용하는 시대와 맥락에 따라 용례가 변화되고 확장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건 해도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이 나라는 뭐 하나가 긍정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싶으면 어디에나 갖다 붙인다. 이런 걸 보고 단어의 의미가 변화되고 확장된다고 할 수는 없다. 돌아가는 일이 누가 봐도 비정상적인 경향을 띄면 오히려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며 조심해야지 누구보다 앞장 설 일인가?
ㅡ 움베르토 에코, <미네르바의 성냥갑 1권> 中, 열린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