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9/25

 

 

 

 

국화는 알고 보면 선배가 굉장히 유아적이라고 했다. 자기 말만 떠드는 것, 타인을 박하게 평가하는 것, 그러면서 자신에 대한 평가에는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것, 애정을 갈구하는 것, 오토바이를 샀다가 중고로 팔고 또다른 오토바이를 타는 것, 소비에 열을 올리는 것, 거기에는 돈부터 사람까지 다 해당하는 것. 그리고 국화가 가장 못 견뎌한 건 함께 무언가를 먹고 더치페이할 때 잔돈을 돌려주지 않는 선배의 습관이었다.(21-22p)

 

 

나는 사랑에서 대상에 대한 정확한 독해란, 정보의 축적 따위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완수였다.(26-27p)

 

 

어떠냐고····· 은수가 어떻긴 뭐가 어떤가. 그냥 잘생기고 가난하고 우울하고 뭔가 일이 안 풀리고 불안정하고 종종 죽고 싶고 그런데도 일은 나와야 하고 꿈은 멀고 다 귀찮고 때론 내 몸이라는 것 자체가 귀찮아서 버리고 싶고 길바닥에 버리고 줄줄 새어나오게 심장이랑 머리랑 손톱이랑 발목이랑 벗어두고 홀가분해지고 싶지. 그렇게 젊은 게 좋으면 니들이나 가져라, 하면서 젊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버리고 눕고 싶지. 아무데나 누워서 구름이나 세고 싶지.(46-47p)

 

 

 

ㅡ 김금희, <오직 한 사람의 차지>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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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9/10

 

몇 권 읽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읽어본 은희경의 작품 중 ‘태연한 인생’이 가장 좋았다. 그 생각은 이 책을 읽고도 변함이 없다.

 

 

 

남자친구의 부탁으로 미팅할 여학생들을 물색 중이었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다. 남자의 외모나 조건을 따지지 않고 지성인의 양심과 진실함에 더 가치를 두는 현명한 여성이어야 하며 그 현명함 안에는 남자들이란 타고나기를 여자의 외모를 따지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지혜로움도 포함되어야 했다.

“그러니까 결국 예쁘고 똑똑한 여자를 찾는다는 거야? 남자 쪽은 전혀 아니면서?”(80-81p)

 

 

늘 자기 체격보다 작은 사이즈의 옷을 찾고 자기 나이보다 귀여워 보이는 스타일을 추구하는 그녀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많이 먹었다.(83p)

 

 

혼자라는 건 어떤 공간을 혼자 차지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익명으로 존재하는 시간을 뜻하는 거였다.(84p)

 

 

사실 사는 2학기 들어 학보사 일에 더욱 의욕을 잃었다. 내 능력 이상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하지만 새로운 영역에 도달하도록 더욱 노력해야 하는 건지, 내 길이 아니라는 결론을 받아들이고 한시바삐 그만두는 게 시간 낭비에서 벗어나는 일인지는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247p)

 

 

젊고 희로애락이 선명하고 새로 시작하는 일도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인생이 더 나았을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욕망이나 가능성의 크기에 따라 다른 계량 도구를 들고 있었을 뿐 살아오는 동안 지녔던 고독과 가난의 수치는 비슷할지도 모른다. 일생을 그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해도 나에게만 유독 빛이 들지 않았다고 생각할 만큼 내 인생이 나빴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이 뭔가 잘못됐다면 그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나의 수긍과 방관의 몫도 있다는 것을 알 나이가 되었다.(277-278p)

 

 

비관은 가장 손쉬운 선택이다. 나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적게 소모되므로 심신이 약한 사람일수록 쉽게 빠져든다. 신체의 운동이 중력을 거스르는 일인 것처럼, 낙관적이고 능동적인 생각에도 힘이 필요하다. 힘내라고 할 때 그 말은 낙관적이 되라는 뜻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낙관과 비관의 차이는 쉽게 힘을 낼 수 있는지 아닌지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역설적인 점은 비관이 더 많은 희망의 증거를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어둡고 무기력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관을 일삼는 사람이야말로 그것이 깨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자신 같은 비관론자도 설득될 만큼 강력한 긍정과 인내심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 유일하게 그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히게 된다.(319-320p)

 

 

정확한 관찰력은 그게 결여된 사람들이 흔히 냉소주의라고 부르는 그것이다.(329p)

 

 

열여덟 개의 식기와 마흔두 개의 접시를 사용하며 자신의 사교성에 만족감을 느꼈던 그날 밤 그녀는 자신이 그와 같은 부류라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그녀가 어떤 권력을 부조리하다고 생각한 것은 단지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330p)

 

 

우리가 아는 자신의 삶은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334p)

 

 

우리 둘 중 누군가의 기억이 틀린 것일까. 아닐지도 모른다. 기억이란 다른 사람의 기억을 만나 차이라는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한 사람의 기억도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차이 나는 것만이 반복되어 돌아온다”라는 말처럼.(337p)

 

 

 

ㅡ 은희경, <빛의 과거> 中,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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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9/1

 

재치 있는 대사로 인해 밝고 경쾌한 느낌이 드는 한편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한 편의 소설이 끝나고 나면 먹먹한 느낌이 든다. 좋다.

 

 

 

원래 집단의 속성이라는 게 웃겨서 한때 그 집단의 일부였다 튕겨져 나온 사람이 더 맛 좋은 제물이 되기 마련이었다.(13p)

 

 

철구 미친 새끼가 나한테 자자고 하는 거 있지. 뒤에서 내 욕하고 다니는 거 뻔히 아는데, 얼굴과 마음이 골고루 역겨운 새끼·····(19p)

 

 

재희의 말을 들은 의사는 피임과 정결한 삶의 중요성에 대해 20분도 넘게 일장 연설을 했다고 했다. 차트를 넘겨보며 주기적으로 방광염에 걸리는 것도 무분별한 성관계가 원인일 수 있다며 재희의 느슨한 순결 의식과 주색에 경도된 망나니 같은 삶 전반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재희는 벽에 걸린 십자가를 보며, 분노를 꾹꾹 눌러 삼키며, 말했다.

ㅡ저같은 애도 있어야 선생님이 먹고살죠.(37p)

 

 

재희 역시 때때로 내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문자를 보냈는데, 나는 재희가 도대체 무엇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53p)

 

 

재희가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누구보다 평범하지 않게 자라난 여자라고 생각했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사회적 통념 같은 것을 코 푸는 휴지처럼 여기며 자라날 수 있었던 건 어쩌면·····(62p)

 

 

나라는 존재로 말미암아 인생이 예상처럼, 차트의 숫자처럼 차곡차곡 정리되는 않으며, 오히려 가장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핏줄이 연결된 것처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존재가, 실은 커다란 미지의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는 포기해야 하는 때가 온다는 것을. 그래서 인생의 어떤 시점에는 포기해야 하는 때가 온다는 것을.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생각을 멈추고, 고작 지고 뜨는 태양 따위에 의미를 부여하며 미소 짓는 그녀를 그저 바라보는 일. 그녀의 죽음을 기다리는 일.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 채 죽어버리기를 바라는 일뿐이다.(181p)

 

 

다른 술은 다 잘 마셔도 맥주만큼은 약한 내가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인생에서 그래선 안 될 일 빼면 남는 게 없다. 술 취하면 쓸데없이 솔직해지며, 불필요하게 개가 되곤 하는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아무도 묻지 않은 얘기를 털어놓았다. 그중 최악은 내 지난 연애사를 구구절절 읊어대며 신세한탄을 한 거였다.(199p)

 

 

뭐야, 계곡물이야? 뭔데 이렇게 투명해. 또 내가 복잡한 가정사에 약하다는 건 어떻게 알고 갑자기 훅 들어와. 왜 다 보여줘.(215-216p)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으니까.(228p)

 

 

최저 시급을 받으며 일하는, 찢어지게 가난한 나를 위해 주로 규호가 밥을 사주고는 했다. 빨리 성공해서 갚으라고 말하는 규호에게 언제나 큰소리로 당연하지,라고 대답했지만 우리 둘 다 그럴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231p)

 

 

반짝, 애틋한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나는 감히 규호를 따라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설렘도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에. 밤이 끝나는 시점과 해가 뜨는 시점은 이어져 있으니까. 지금 이렇게 설레는 감정이 이는 것은, 결국 우리가 완벽히 끝날 때가 되어간다는 의미겠지.(248-249p)

 

 

규호가 침대에 앉아 초밥을 집어 먹다 (평소처럼) 접시를 엎어, 내가 얼른 옷자락으로 간장을 닦는다. 찰나의 순간이었음에도 매트리스에 얼룩이 남아버린다.(258p)

 

 

가끔은 내가 모든 걸 다 잘못한 것만 같고, 때로는 이유 없이 모든 게 다 억울했다.(273p)

 

 

ㅡ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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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29

 

단편은 그냥 흔한 한국 단편소설이었다. 좀 아쉽네.

 

 

밤의 결심은 아침의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낮의 후회만을 몰고 왔다. 밤의 나는 아침의 나를 증오했고 낮의 나를 겨우 견뎠고 밤을 두려워했다. 시간은 의미 없이 흘러가 해는 금세 저물었고 쉽게 밤이 되었다.(60p)

 

 

ㅡ 서유미,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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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27

 

 

25년쯤 지난 책이라 2019년인 지금 읽기에는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문제들이 현재에도 형태만 달리하여 아직도 많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가 빠르게 변하는 것 같다가도 어떤 부분에서는 굉장히 더디 바뀐다는 생각을 했다.

등장인물이 너무 매력이 없고 납작했다. 특히 화자인 강민주는 좀 우스꽝스럽고 읽는 내가 민망해지는 구석이 있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세상의 보통 사람은 사랑도 하고 결혼도 한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결코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나는 세상 그 자체를 초월해 있다. 나는 그 위에 있는 것이다.”

 

“나는 슈퍼마켓에서 영화배우에 대해 떠들고 있는 저런 여자들과는 확실히 다른 존재다. 나는 결코 굳은 살 하나 없이 인생을 공짜로 살고 있는 그런 부류들과 같은 궤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신의 자식이었다.”

 

“이미 여러 차례 말한 바가 있지만 나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두뇌의 소유자이다. 게다가 최근에 나는 심리학으로 석사학위까지 받은 사람이다.”

 

“백승하에게 폭력을 휘두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인간의 가학 취미에는 어마어마한 가속력이 따라붙는다는 사실이다. 나처럼 스스로를 통제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그 상승하는 가속력을 제어하는 데 늘 당혹감을 느끼는 편인데 범상한 족속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나머지 인물들은 철저히 기능적인 역할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집착과 오지랖을 기본으로 깔고 가는 한남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적절한 것이다.

 

 

 

 

얼굴이 예쁜 여자들이 빠지기 쉬운 세상의 함정은 또 오죽 많은가. 그녀들이 풍겨주는 그 백치미는 또 어떤가. 평생 자신의 외모를 가꾸며 살아가도록 태어나지 않고 평생 자신의 두뇌를 의지하며 살도록 운명 지워진 것은 나는 하늘에 감사한다.(38p)

 

 

그 누구도 어떤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방식대로 살뿐이다. 선각자는 있어도 지도자는 없는 것이다. 자신을 내던져 새로운 것을 깨우치는 일은 존중받을 수 있으나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채 남을 지도하려 드는 일은 업신여김을 받아 마땅하다.(85p)

 

 

남자가, 이미 검은 발톱을 드러내고 있는 남자가 ‘뜻밖에’ 회개하는 경우는 결코 많지 않다. 아니, 절대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남자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나면 여자의 마음에 기대보려는 것이 남자들의 속성이다.

검은 발톱은 부러진 것이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부러진 발톱은 다시 자란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특히 남자는 여자에 대해 스스로 반성할 줄 모른다. 알고 있더라도 실천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것이 남자란 존재들이다.(106p)

 

 

“하지만 요즘에 와서는 많이 달라진 것도 사실 아니오? 예를 들면 여자들이 경제권을 쥐고 있는 핵가족 형태의 가족 구성도 그렇소. 우리 남자들은 그동안 많이 내주었다고 보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오? 남자들이 지난날처럼 일방적으로 횡포를 부리지 못하도록 법적인 장치도 많이 고안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소만.”

“달라졌지요, 물론. 그러나 그것은 개량하고는 거리가 멀어요. 보다 은밀하고 교활해졌다고나 할까. 그리고 여자들이 쥐고 있는 것은 경제권이 아니라 소비권 정도겠지요. 법적인 장치도 확실히 예전에 비하면 나아진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법은 인간의 정서를 일일이 반영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어요. 여자와 남자의 문제만큼 심정적인 것이 또 있을까요? 사회의 지배심리가 남자에게 유리하게 통용되고 있는 한은 어떤 완벽한 법도 여자들의 고통을 보상해줄 수 없는 거예요.”(211p)

 

남자들이란 정말 피곤한 존재다.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인간의 필수적인 기능조차 습득하지 못한 미개인들, 큰 일을 도모하다 결국은 작은 이익에 빠져 일을 그르치는 반란자들, 이것이 바로 남자들이란 존재의 속성이다.(222-223p)

 

 

조금만, 아주 조금만 깨어나면 되는 것이다. 어려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갖춰야 할 사전 지식이나 배움도 필요없다. 단지 아주 조금만 이 세상을 바로 보면 된다. 남자가 여자의 위에 있다는 논리가 허위사실의 유포였다는 것만 알아도 반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언제나 시작이 어렵다는 말은 진리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역시 새겨둘 만하다. 누군가 시작을 해야한다. 언제까지나 책상 앞의 토론으로 머물러 있을 것인가. 언제까지나 시기상조론에 파묻혀 있을 것인가. 기회는 누군가 시작할 때, 바로 그때가 적당한 시기인 것이다.(256p)

 

 

강민주는 백승하를 납치한다. 그는 인기 절정의 영화배우이다. 그는 뭇 여인의 우상이기도 하다. 여성을 향해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았다고 소문난 애처가인 그가 강민주의 제 1의 공격 대상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모순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가장 적절한 공격 대상이다. 그는, 남성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 자체를 은폐하면서, 이미 남성이라는 사실 자체로 그 폭력에 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직접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자보다 더욱 교활하게 폭력을 행사한다. 후자는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반항을 유발시키지만 그는 여자들로 하여금 남자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게 하고, 여성에게 주어진 가혹한 운명이 단지 남성을 잘못 택했기 때문일 뿐이라는 환상을 갖게 한다. 백승하라는 인간을 굴복․변화시키고 그에 대해서 세상이 갖고 있는 환상을 깨버릴 수만 있다면, 남성에 대한 복수와 아울러 여성이 남성에 대하여 갖고 있는 환상을 깨버릴 수 있는 이중의 효과를 낳을 수 있다.(340-341p)

 

 

 

ㅡ 양귀자,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中,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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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27

 

자르기에서는 ‘알바생 자르기’, 싸우기에서는 ‘현수동 빵집 삼국지’, 버티기에서는 ‘모두, 친절하다’가 좋았다.

2010년대의 한국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 누군가를 쉽게 비난하고 욕할 수 있다면 속이 후련해지겠지만 일이라는 게 그렇게 쉬울 리가. 저마다의 사정과 입장이 존재하고 그 중 누구하나를 편들기 애매하다. 효율과 편리함을 추구하려고 만들어놓은 시스템이 도리어 인간을 소외 시키고, 화를 내게 만들며, 불편을 겪게 한다는 아이러니한 상황.

 

 

 

“상사가 부정행위를 저지르면 어떻게 하겠느냐 따위를 묻는 면접관 말입니다. 지원자들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트집 잡히지 않을 답을 합니다. 그걸 듣고 면접관은 ‘모범 답안 열심히 외워 왔네, 요즘 애들은 말하는 게 죄다 똑같아.’라며 고개를 젓고요. 어쩌란 말입니까?”(233-234p)

 

 

그렇다고 인턴 경험을 다른 데 써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금융권이 아닌 회사 입사 지원서에 K 은행 인턴 경력을 써내면 ‘얘는 1지망은 금융권인데 우리 회사도 한번 찔러 보는 거구나.’라고 여길 겁니다. 반대로 금융계 회사에서는 ‘왜 우수 인턴에는 뽑히지 못했느냐.’라고 물어볼 테고요.(242p)

 

 

“걔네들한테 나는 건 오히려 힘든 일 아닐까? 비둘기들 보면 날아도 되고 걸어도 될 때에는 걸어가잖아. 그렇게 오래 걷다 보면 타조나 닭처럼 되는 거 아닐까?”

(...)

나는 외려 새들이 날 때 상당한 기쁨을 맛볼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너무 어린 새나 늙은 새, 다친 새는 날 수 없다. 많은 새들이 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실제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때는 한정되어 있다. 놓칠 수도 있었던 잠재력을 깨닫고 목적에 맞게 쓴다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 아닐까?

(...)

사람은 대부분 옳고 그름을 분간하고, 그른 것을 옳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능력을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

(어머니는 세상에는 정말 불의가 많고, 그 무수한 불의를 한 사람이서는 도저히 다 바로잡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조금씩 생겨날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언제 그 기회가 올까? 내게 맞는 기회가 왔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직접 덤벼 보기 전에 그게 적당한 기회인지 과연 알아챌 방법이 있을까?(377-378p)

 

 

 

ㅡ 장강명, <산 자들>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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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15

 

 

마음에 든다. 작가의 다른 작품 한 권 더 읽어봐야지.

 

 

 

그는 사과하고 화해하면 그 싸움의 페이지를 다시 들춰보지 않는 타입이었다. 대신 싸움의 원인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면서 바꾸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13p)

 

 

날이 선 말을 주고받는 동안에는 감각이 무뎌지지만 화해하고 난 뒤에는 상대가 했던 말이 남긴 상처 때문에 욱신거렸다. 그 말과 함께 이혼 얘기를 꺼낸 건 어떤 의미일까. 지원과 영진 모두 자신의 말끝에 묻은 독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상대가 뱉은 말에서 나온 독이 자신의 상처 위에 번져나가는 것만 아파했다. 화해한 뒤에도,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을 때도, 한 침대에서 잠이 드는 순간에도 다정한 얼굴 뒤에 숨은 목소리가 문득 소리쳤다.(26p)

 

 

불행과 비극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는 편이 견디기 수월하다. 딸꾹질을 하다가 죽었다거나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었다는 것보다 교통사고나 암 투병 끝에 죽었다는 얘기가 모두를 의심 없이 안전한 비극으로 이끈다.

잘 지내는 것 같던 연인이나 부부의 관계가 깨질 때 상대의 불륜이나 변심, 파산, 폭력, 중독은 선명한 파경의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로 명명하기 어려운 이유들이 자잘하게 집 여기저기에 곰팡이처럼 번져버린 경우도 있다. 볼 때마다 닦고 주기적으로 꺼내서 말리는데도 은밀하고 깊숙하게 번져나간 곰팡이를 목격할 때면 어느 순간 맥이 탁 풀리며 손을 놓고 싶어진다. 곰팡이가 관계를 삼켜버리는 것이다.(47p)

 

 

누군가에게 호감이 생긴다 싶으면 그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그러느냐는 자문이 생겼고 좀 더 알게 되면 그 앎이 초반에 생긴 호감을 지워나갔다. 어떤 앎은 무감을 호감으로 바꾸기도 하지만 애당초 무감한 사람을 알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일은 없었다.(85p)

 

 

부부싸움 앞에서 인간적인 장점은 대체로 무용했다. 결혼 전에는 장점으로 꼽히던 것들이 하나의 두드러지는 단점을 이기지 못하거나 덩달아 단점으로 변해갔다.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단순한데 함께 살 수 없는 이유는 구질구질하게 길었다. 그래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사연들을 하나로 묶어 사람들이 성격차이라고 명명하는 것 같았다.(121-122p)

 

 

싸움이 반복되면서 지원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발을 닦지 않는 영진이 괘씸한 만큼 너그럽게 기다려주거나 쿨하게 넘겨버리지 못하는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131-132p)

 

 

지원과 영진이 알면서도 자주 잊어버리고 간과하는 것이 있다. 서로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 상대의 치명적인 단점을 바꿀 수 없다는 것. 일시적으로 변하게 하거나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완전히 바꿀 순 없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우선 자신을 바꿔보려고 노력한다. 상대의 단점 때문에 화내거나 싸우는 것보다 이 관계를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순간 그 단점을 외면하거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바꾸는 것도 어렵다. 우리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 문제로 다시 싸우지 않을 자신도 없다. 둘 다 바꿀 자신이 없다.(144-145p)

 

 

제 마음을 알 수 없고 자신할 수 없어 상대에게 솔직하게 얘기해달라고 당부한다. 사소한 감정의 변화가 존재와 관계 자체를 바꿔버릴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 결정이 일시적인 감정의 영향 속에서 이루어진 건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책임의 끈을 나누어 쥐려는 노력이 구차하게 느껴지지만 어쩔 수 없다.(151p)

 

 

요즘 지원은 매 순간 자신이 형편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에 직면하고 빠져드는 게 괴로웠다. 평범한 사람들이 만나 서로의 특별함을 알아보고 세상에 둘뿐인 것 같은 마음이 될 때 사랑에 빠진다면, 둘이 함께 지내고 싶다는 열망이 강해질 때 결혼한다. 그리고 서로에게 가장 형편없는 사람이 되었을 때 헤어지게 된다. 지원이 생각하는 이혼이란 그랬고 자신이 거기 서 있었다.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거나 삿대질하며 할퀴거나 물어뜯지 않아도, 돈과 시간을 들여 소송하지 않아도 이혼은 마음에서 진행된다. 조심스레 상대의 의견을 묻고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면서 조율해나가도 서로에 대한 마음이 빛을 잃고 마모되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점잖게 말하며 배려해도 서로에게 형편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164-165p)

 

 

선배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지원은 결혼이 왜 생활이 되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랑이 충만한 시기와 완전히 고갈된 것 같은 시기와 미움이 창궐하는 시기와 다른 욕망을 품은 채 바깥을 힐끔거리고 서성대다가 발길을 돌리는 시기까지 모두 합쳐 결혼생활이 되는 것이다.(216p)

 

 

살다 보니 누군가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러서 신뢰가 깨지고 그 때문에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고 부수고 머리끄덩이를 잡고 서로 죽일 듯이 싸워야만 헤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같은 집에 살면서도 대화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않고 서로의 뒷모습을 보며 적의가 담긴 눈길을 쏘아대는 순간 헤어짐이 시작되는 것이었다.(229p)

 

 

그때 무리해서 집을 사지 않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영진이 아이를 원했을 때 낳았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잔소리쟁이가 아니었다면······.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렇게 하는 게 지원이고 지원은 그런 사람이었다. 영진이 영진인 것처럼.(231p)

 

 

 

ㅡ 서유미, <홀딩, 턴> 中,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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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2

 

 

어느 쪽이든 상수는 참아야 했고 참을 수 있었다. 어차피 문제는 굴욕의 대가이지 굴욕 자체가 아니지 않아. 상수는 옅은 후회마저 느꼈다. 왜 그때 좀 더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당할 것을 모르지도 않았는데.(9p)

 

 

꼬투리 하나 남기지 않으면서 그런 기대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지점장이었다. 꼬투리 하나 없는데 그런 기대감을 품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수영 자신이었다. 줄 듯 줄 듯할 수 있는 것은 지점장의 유력(有力) 때문이었고, 안 줄 것을 알면서도 줄 듯 줄 듯할 때마다 입을 뻥긋거릴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의 무력(無力) 때문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격차, 그래서 더 아프고 굴욕적인 위압, 모멸감, 창피스러움, 수영은 화장실로 갔다.(83p)

 

 

사실 수영의 말이 맞았다. 망설였다. 관계를 더 발전시킬지 말지. 수영이 텔러, 계약직 창구 직원이라는 것, 정확히는 모르지만 변두리 어느 대학교를 나온 듯한 것, 다 걸렸다. 일도 잘하고 똑똑한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그 두 가지가 상수 자신의 밑천이었기 때문에, 상수가 세상에서 지금까지 따낸 전리품이자 직장과 일상생활에서 위력과 차별을 나날이 실감하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93p)

 

 

미경은 좋은 여자였다. 좋은 연애 상대였고 아마 좋은 결혼 상대일 터였다. 좋다고 다 갖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갖고 싶지 않다고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좋다는 것은 그런 뜻이었다.

(...)

다들 개성, 특색, 자기만의 어떤 것이나 남들과는 다른, 하고 말들 했다. 하지만 상상하는 성공과 행복의 장면은 우스꽝스러울 만큼 엇비슷했다. 어차피 같은 목적지라면 왜 굳이 험한 길을 택하거나 그런 길을 택한 척 가식을 떨어야 할까.(108-109p)

 

 

사람들 남의 일에 그렇게 관심 없다고 말했지만 종현은 차갑게 웃었다. “남의 일이라서 더 잔인하고 적나라하게 벌거벗기는 게 사람들이에요. 자신과 다를수록, 위가 아니라 아래에 있을수록 더 뻔뻔하게, 무자비하게.”(116-117p)

 

 

악착같이 붙들고 버텨서 차라리 뺏길지언정 순순히 내줘서는 안 된다.

제법 살던 집이 하루아침에 망가져 가는 꼴을 보면서 수영이 몸으로 배운 것이었다. 하지만 엄두가 안 났다. 차바퀴 옆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새끼 고양이조차 한번 데려오면 돌이킬 수 없다. 종현과 함께 간다는 것은 끝까지 함께 가야 한다는 뜻이었고 종현이 쥔 것을 놓지 않게 한다는 것은 대신 수영 자신이 쥐고 있던 것을 놓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먹고 사고 쓰던 것을 한 등급씩 낮추고 한 푼 두 푼 쓰는데도 세 번 네 번씩 생각하는, 수영이 지긋지긋하게 잘 알고 있고 가까스로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생활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더는 어리숙하지조차 않은 채. 할 수 있을까?(127p)

 

 

상수는 내키지 않았다. 200만 원이 넘는 패딩을 받는 것도, 나중에 그만한 선물을 해야 하는 것도 모두 부담스러웠다.(145p)

 

 

종현은 아주 피곤한 날에도 종종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이 집이 아니면 이 넓은 서울에서 갈 곳이 없었다. 이 침대가 아니면 몸을 누일 곳도 없었다. 물 위에 뜬 이파리 한 조각, 자신의 처지였다. 불안은 자신을 매일 규칙적으로 움직이게 했지만 조금씩 부식시키기도 하고 있었다.(152p)

 

 

“남자란 간사하네. 착실하고 열심히 잘 살고 남보다 똑똑한 남자도 간사하지. 똑같거든, 멀쩡히 잘 살다가도 꼭 한 번씩 똥밭에 알몸으로 굴러 보고 싶단 말이지. 꼭지가 돼지 꼬리처럼 꼬불꼬불하게 돌아가도록 퍼마시고 지 아비, 어미도 몰라보고 싶어진다 이 말이야. 근데 또 말이지. 그렇게 퍼마시고 나면 그러는 거야. 내가 다시는 술을 마시나 봐라. 술은 쳐다도 안 본다. 술은 냄새도 맡기 싫어하고 몸에 좋고 순한 것만 먹고 마시지. 운동도 하고 등산도 다니면서 다시 멀쩡히 잘 살아. 알만 보고, 열심히 착실하게. 한동안은 말이야. 슬금슬금 이 향긋한 똥밭이 생각나기 전까지.”(173-174p)

 

 

결국 미경의 사촌오빠는 뒷조사를 한 것이고 미경의 아버지는 관계에 충실할 것을 조건으로 내 건 것이었다. 예상했고 가족의 새 일원을 맞아들이는 입장에서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뒤집어 보자면 진짜 가족은 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가족이란 무엇보다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니까. 아무도 면접보고 시험해서 가족을 고를 자격은 없었다. 자신도 동물병원 유리 상자 안의 강아지가 아니었다.(180p)

 

 

그런데 차이가 뭔지 알아? 못나고 잘난 게 아니야. 바닥이야. 디디고 선 바닥!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나처럼 유리 한 장이 바닥인 놈은 못 뛰어. 더 높게 뛸수록 와장창 박살이 나니까. 굴러떨어지면 어디로 굴러떨어질지 환히 보여서, 서 있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니까. 콘크리트 바닥인 애들은 달라. 걔네들한테는 뛰든 말든 하고 싶고 말고의 문제야. 뛰고 뛰다가 다 싫어지면 관두고 딴 거 해도 돼. 우리 엄마 같은 사람 자르고 자기네 건물 청소나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차라리 부러워나 하지.(234-235p)

 

 

상수는 홧홧한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이 치밀었지만 짜증만도 아니었다. 아팠다. 사랑한다면서, 늘 우리 애인이라고 하면서 어쩌면 이렇게 몰라줄까? 차분히 물어봐 주지조차 않을까? 서운하면서도 한편 이것도 자격지심인 것 같아 입안이 썼다.(269p)

 

 

“절대로 안 그런 남자가 어디 있어? 넌 절대로 그럴 여자였고? 똑같아, 그 문제에 있어서는 남자나 여자나 다 빈민처럼 똑같아. 기회, 외모, 돈, 능력, 시간 그 차이지 다른 거 없어. 우리 다 거지새끼들이야.”(321-322p)

 

 

늘 짓눌리고 답답하던 굴레는 미경이 자신에게 씌운 것이 아니라 지신이 스스로 뒤집어쓴 것이었다. 뭐라도 되는 줄 알고, 뭐라도 돼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렇게나 자기는 다르다고, 그저 그런 남자새끼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처참하게 똑같았다. 미경을 속였고 자신을 속인 것이었다. 행복이라는 마네킹을 비추는 것 같던 거짓의 그 밝고 좁은 조명은 기실 처음부터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325p)

 

 

다시 현실적인 걱정들이 엄습해왔다. 미경과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아 헤어지고 나면 어떻게 될까?

(...)

후회가 된다는,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 후회가 된다는 선배의 말이 귓가에서 되살아났다. 생각할수록 점점 알 수 없기만 했다. 더욱더 무력해지기만 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뭘까, 사랑이란 뭘까. 상수는 사랑하면서도 사랑일수만은 없는 자신이 나약하고 남루해 견딜 수 없었다.(326p)

 

 

 

ㅡ 이혁진, <사랑의 이해>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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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7/20

 

 

또 이렇게 됐네. 목숨이라도 빼줄 것처럼 굴다 일순간에 나를 잘라낸 사람들이 이름을 오천 명쯤은 댈 수 있으니까 괜찮았다.(108p)

 

 

혼자 있을 때 술이 더 맛있다. 이럴 때 보면 나는 정말 술을 사랑하는 것 같다. 술이 아니라 술자리를 즐긴다는 개소리를 하는 족속들이 없어져야 세상이 더욱 아름다워질 텐데.(116p)

 

 

그럴 일은 아니었고, 그러려고 했던 일도 아니었는데 역시나 술이 문제였다. 술이 문제인 것을 알면서도 술을 끊지 못하는 걸 보면 역시나 내가 문제인 거겠지.(121p)

 

 

누나는 좋은 사람이에요.

얘는 좋은나라운동본부에서 나왔나, 다 좋은 사람이래.(126p)

 

 

태혁은 꼭 예전의 나 같았다. 상대방에게 내 가장 약한 부분을 드러내고, 상대의 아픈 부분을 알게 되는 것이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믿는 것. 일종의 신앙과도 같은 믿음. 그 순진한 믿음이 거울을 보는 것처럼 소름 끼치게 싫었다.(128p)

 

 

즐기는 사람은 그저 즐길 줄 아는 사람일 뿐이고 잘하는 사람은 그저 잘할 뿐이며, 정작 잘되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153p)

 

 

당신에게 예술이란, 창작활동이란 무슨 의미인가요?

오감독은 골똘히 생각하더니 특유의 진중한 말투로 답했다.

자위입니다.

오감독의 특기인 촌철살인을 가장한 개소리가 나왔다. 관객들 중 일부가 재채기를 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오감독은 그런 관객들의 리액션을 의식하지 않는 척하며 누구보다 연극적인 어조로 말했다.

어떤 자위는 기록해놓은 만한 가치가 있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

 

 

 

때때로 어떤 함몰 유두는 나를 미치게 한다·····

마이크를 타고 흐른 내 웃음소리 때문에 스피커에서 고음의 노이즈가 흘러나왔다. 나는 마이크를 끄고 고개를 돌렸다. 중학생인가. 중학생 학부형에 가까운 나이인데. 어깨를 들썩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웃음을 참았다. 온몸에 너무 힘을 줘 혈압이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174p)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

 

 

실패는 인간을 성숙하게 한다.

개소리다. 실패는 인간을 한껏 구겨지고 쪼그라들게 만든다. 날카로운 끄트머리로 살갗을 찢어 낱낱이 해부해버린다. 보지 않아도 될 내장 속 시꺼먼 부분까지 기어이 들여다보게 만드는 것이 실패라는 경험이다. 실패에 그럴듯한 의미를 붙이는 사람들치고 제대로 된 성공을 해본 사람이 없다(고 나는 믿는다).(252p)

 

 

 

ㅡ 박상영,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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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7/17

 

 

박상영, 정영수, 김희선

 

 

 

ㅡ꿈 그거 좋지. 그러나 이거 하나는 기억하게. 기회는 기차와도 같아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지.

기차는 매일 매시간 돌아오는데 도대체 무슨 개같은 소리일까 생각하며, 그렇게 나의 첫 번째 회사생활을 정리했다.(16p)

 

 

그렇게 한참 동안 의미 없는 메시지를 보내다보면 갑자기 바람 빠진 풍선처럼 모든 게 다 부질없어지곤 했는데, 그가 나에게 (어떤 의미에서든)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벽에 대고서라도 무슨 얘기든 털어놓고 싶을 만큼 외로운 사람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그런 외로운 마음의 온도를, 냄새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때의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으니까.(24p)

 

 

왜 나이든 꼰대들은 자기보다 어린 사람만 만나면 자기가 아는 사람의 이름을 백 명쯤 불러대고, 자신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어젠다를 천 개쯤 대며,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는 걸까. 알아서 뭐하게. 알면 뭐가 달라져. 비슷한 것을 알고 있고, 비슷한 생각을 하면 나이 차이가 줄어들기라도 해? 다른 생각을 하면 어쩌게. 역시 애 같은 생각을 하는군, 내가 살아온 세월이 헛되지 않았군, 여기며 엉망진창이 된 얼굴이며 몸 같은 것들을 자위질해대려고?(54-55p)

 

 

그와 만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삶을 알아갈수록 그가 나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연했다. 애초에 그는 나와 뭔가를 맞출 생각이 없었고, 다만 아무도 없는 칠흑 같은 밤마다 순진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어린애인 나에게 뭔가를 가르쳐주고 나와 몸을 섞는 일을 즐거워했을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나를 바꾸고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여겼으나, 불행히도 나는 누군가에게 의해 쉽게 바뀌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에 젖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 많았다.(70p)

 

 

사랑은 정말 아름다운가.

내게 있어서 사랑은 한껏 달아올라 제어할 수 없이 사로잡혔다가 비로소 대상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추악하게 변질되어버리고야 마는 찰나의 상태에 불과했다.(82p)

 

 

“우리 매년 여름마다 여기 올까?”

우리가 단 한 번도 이야기해본 적 없는 다음 여름에 대해 이야기할 만큼 현수는 그곳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우리가 단 한 번도 이야기해본 적 없는 다음의 다음, 또 다음의 여름에 대해 이야기할 만큼 현수는, 그리고 우리는 그날의 분위기가 좋았던 것이다. 그 이후 잠시 동안, 결코 길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하게 정적이 흘렀다. 매해 여름이란, 이런 아름다운 계절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이 지속될 여름이란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아득하고 눈부신 말이었다. 그동안 우리가 종종 나누기도 했던 조금은 과장된 약속들과 달리 그건 우리 모두를 미몽에서 깨울 만큼 강력한 주문이었다. 물론 그 짧은 정적 이후에 우리는 다시 활기를 되찾았고, 문학과 삶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 뒤로는 모든 게 공허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 주문이 내게 준 실감은 언젠가 우리가 서로를 잃을 거라는 것이었고, 그 상실에 대한 두려움만큼 내가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 그때 느낀 공허함은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닌 분명 나의 것이었다. 그 공허함은 정은의 것이고 현수의 것이었지만, 그 만큼이나 나의 것이기도 했다.(259p)

 

 

 

ㅡ 박상영 외, <2019 제 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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