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7

 

 

이게 2018년에 나왔으니 요즘과는 스타일이 조금 바뀐 것 같기도 하다. 이야기에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 쓰고 보니 로맨스 조가 생각나네.

 

 

 

ㅡ 정지돈, <팬텀 이미지> 中, 미메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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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9/24

 

 

페이지가 줄어드는 걸 아쉬워하며 읽었다. 칙칙하지 않고 산뜻하니 좋다.

 

 

 

심시선: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구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에 간절히 필요로 하는 모든 요소를 한 사람이 가지고 있을 확률은 아주 낮지 않을까요? 그리고 규칙적인 근사한 섹스의 가치를 너무 박하게 평가하지 마세요. 스트레스 핸들링에 그만큼 도움되는 것도 잘 없습니다. 제법 괜찮은 섹스는 감은 눈에 존재하지 않는 색깔이 떠오르게 하니, 그림일기를 쓰고 싶어질지 몰라요.

질문자: 육체적 관계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사람은요?

심시선: 사흘에 한 번씩 섹스를 하고 싶은 사람들 말고는 결혼을 안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21p)

 

 

현장에서 순순히 자수하여 삼 개월간 구금 생활을 한 기민철은 초범이며, 반성하고 있고, 희석한 염산을 사용했다는 점이 참작되어 징역 이 년에 집행유예 삼 년을 받았다. 그리고 피해자들이 민사를 막 시작하려고 할 때 자살했다. 염산을 쓰지는 않았고, 욕실 수건걸이에 목을 매달았다.

죗값을 치르지 않고 도망쳤다. 그건 도망이었다. 화수는 잊을 수 없었고 늘 화가 나 있었고 이제 그 화는 화수만을 해쳤고·····(110p)

 

 

21세기 사람들은 20세기 사람들을 두고 어리석게도 나은 대처를 하지 못했다고 몰아세우지만, 누구든 언제나 자기방어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온전한 상태인 건 아니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그러니 그렇게 방어적으로 쓰지 않아도 된다고, 기억을 애써 메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111p)

 

 

“억울해? 억울해 죽겠어?”

최근의 쉬는 시간에 한빛은 규림을 몰아붙였다. 처음에는 규림도 억울했다. 만약 그날 일찍 메신저를 잘 확인했으면 규림도 도영에게 화를 냈을 것이고, 한빛도 규림이 한빛의 편이란 걸 오해없이 알았을 것이다. 한빛에 대한 억울함이라기보다는 상황에 대한 억울함이었다. 그러나 한빛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규림은 억울함을 잃었다.

“매번 멍한 얼굴이었잖아. 걔가 깽판을 치게 내버려뒀잖아. 남자애들끼리 방을 만들었을 때 초대를 수락했잖아. 뛰쳐나온 적 없다고, 너. 다른 애들이 알려줄 때 너는 아무것도 안 했어. 김도영은 원래 그런 새끼지만····· 아, 못 봤다고? 산에 있었다고? 그렇다 치자. 그냥, 나는 지난 몇 년간 너희랑 이 좁고 창문도 없는 방에 갇혀 있었던 게 너무····· 더러워. 더러워 죽겠어.”

한빛은 그렇게 느낄 수 있다. 규림은 자신의 해명이 힘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음을 이해했다. 화수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죽은 남자가 사촌 큰누나에게 염산을 던졌을 때, 가해자가 피해자인 척할 때의 역겨움을 온 가족이 똑똑히 이해할 수밖에 없었고 규림 자신은 도저히 같은 짓을 할 수 없었다. 가해와 피해의 스펙트럼에서 스스로가 가해에 더 가까웠음을 인정해야 했다. 방전된 배터리와 나쁜 타이밍 이전에 멍청하고 멍하게 방조하고 있었음을 말이다.(173-174p)

 

 

어떤 말들은 줄어들 필요가 있었다. 억울하지 않은 사람의 억울해하는 말 같은 것들은.(175p)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그가 죽이고 싶었던 것은 그 자신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도 나의 행복, 나의 예술, 나의 사랑이었던 게 분명하다. 그가 되살아 날 수 없는 것처럼 나도 회복하지 못했으면 하는 집요한 의지의 실행이었다.(178p)

 

 

“그 모든 걸 꿰뚫어보던 사람이 왜 자기한테 일어난 일을 소화하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렸지?”

“그야 그렇잖아.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들을 할머니는 몰랐을거니까.”

“이름들?”

“가스라이팅, 그루밍 뭐 그런 것들. 구구절절 설명이 따라붙지 않게 딱 정의된 개념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시작선이 다르잖아.”(182p)

 

 

특별히 어느 지역 사람들이 더 잔인한 건 아닌 것 같아.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에겐 기본적으로 잔인함이 내재되어 있어. 함부로 굴어도 되겠다 싶으면 바로 튀어나오는 거야. 그걸 인정할 줄 아는지 모르는지에 따라 한 집단의 역겨움 농도가 정해지는 거고.(235p)

 

 

여자도 남의 눈치 보지 말고 큰 거 해야 해요. 좁으면 남들 보고 비키라지. 공간을 크게 크게 쓰고 누가 뭐라든 해결하는 건 남들한테 맡겨버려요. 문제 해결이 직업인 사람들이 따로 있잖습니까? 뻔뻔스럽게, 배려해주지 말고 일을 키우세요. 아주 좋다, 좋아. 좋을 줄 알았어요.(269p)

 

 

빛나는 재능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사실 그들은 계속 같은 일을 했다. 그리고 조각하고 빚고 찍고····· 아득할 정도의 반복이었다. 예외는 있지만 주제도 한둘이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질문 하나에 온 평생으로 대답하는 것은 질리기 쉬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대가들일수록 질려하지 않았다. 즐거워했다는 게 아니다. 즐거워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드물다. 질리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므로 만약 당신이 어떤 일에 뛰어난 것 같은데 얼마 동안 해보니 질린다면, 그 일은 하지 않는 것이 낫다. 당장 뛰어난 것 같지는 않지만 하고 하고 또 해도 질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시도해볼 만하다.(288-289p)

 

 

그 점은 나도 싫은데 외부의 충격에 영향받지 않는 인생이 어딨겠어? 그렇지만 내가 그날 이후로 곱씹고 있는 건 내 불행, 내 상처가 아니야. 스스로가 가엾고 불쌍해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라고. 그보다는 세상의 일그러지고 오염된 면을 너무 가까이서 보게 되면, 그 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는 거야. 그걸 설명할 언어를 찾을 때까지는. 어떤 건지 이해가 가?(305p)

 

 

 

 

ㅡ 정세랑, <시선으로부터>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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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8/29

 

 

 

쇠락의 상징 같은 악취나 숨 막히는 먼지, 진득한 웅덩이 따위는 사실 활발한 생명 활동의 증거이다. 악취는 왕성한 미생물 활동의 결과이고 먼지의 상당수는 동물의 분변이나 생물의 죽은 세포이며 웅덩이는 그것들이 순환한다는 증거다. 이끼나 곰팡이, 거미줄 같은 것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생명 활동의 기준에서 본다면 그런 것들은 쇠락은커녕 오히려 번성의 증거일 때가 많다. 사막이나 극지, 달 표면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 그래서 그곳들은 황량하지만 지저분하지는 않다.(57p)

 

 

하늘엔 체렌코프복사에 대한 LSD 복용자의 묘사 같은 빛에 휘감겨 있는 형체들이 있을 뿐이었다.(137p)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목깃과 소맷부리를 잘 여미는 것이 좋다. 바람에 날려 온 모래와 흙먼지로 옷 안쪽이 낮은 수준의 아이언 메이든처럼 되는 걸 즐기지 않는다면, 그리고 가축 떼가 이동하면 당연히 흙먼지가 부옇게 일어나는 법이다.(139p)

 

이런 묘사가 군데군데 등장하는데 예전 같으면 다방면에 지식이 많다는 생각을 했겠지만, 지금은 크게 감흥이 없다.

 

 

 

ㅡ 이영도, <시하와 칸타의 장> 中,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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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8

 

 

재미없다.

 

 

승호는 빤한 굳이 표현하는 애였다. 꼭 자기 영화처럼 나이브했다. 예전에는 그게 촌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게 내가 갖지 못한 승호의 재능이라는 것을 안다.(168p)

 

 

 

ㅡ 정대건, <GV 빌런 고태경> 中,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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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7/1

 

 

감탄이 나오는 작품은 없었다. 무난무난. 다만 이현석 작가의 다른 작품은 좀 궁금하다. 김초엽 작가와 장류진 작가의 작품집을 재밌게 읽었던 터라 기대하고 읽었는데 이전에 이미 했던 이야기를 새로울 것 없이 변주하는 느낌이라 식상했다.

 

 

 

절대적인 권력은 자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권력을 의식해야 하는 이는 권력의 피지배자들이다. 권력이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력이 행사되는 곳에서는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힘이다.

가부장이라는 권력이 절대적인 사회에서 앎은 온전히 젠더화되어 있다. ‘나’가 생전 처음 치르는 시댁 제사 자리에 가서 식사 한 끼만 해도 삼대손 집안의 알력 관계를 능히 꿰뚫어볼 수 있을 때, 평생을 나고 자란 집에서 일어나는 가내 정치에 대해 까맣게 모를 수 있는 남편의 그 산뜻하고 안온한 무지가 바로 권력이다.(44p)

 

 

“절대 모를 수 없는 이야기”를 모르는, 자신을 향한 미움의 에너지조차 감지하지 못하는, 온 집안을 표표히 떠도는 그 모든 사랑과 증오의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그 구김살 없이 해사한 면상이 바로 권력의 얼굴이다.(49p)

 

 

“·····임신중지를 겪은 모든 여성이 동일하게 경험하리라 가정되는 비감은 그들에게 생명을 폐기시켰다는 자기 인식을 갖게 해 스스로를 비윤리적인 존재로 획일화화도록 만든다.” 전해지지 않더라도 전할 수밖에 없는 진심이란 게 있지 않을까. “·····임신중지가 언제나 예외 없이 한 여성의 절실한 고민 끝에 나온 결정이라는 고정관념은 그것이 항상 절박한 상황에서 절박하게 취해져야만 하는 조치처럼 여겨지게 만들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천천히 써내려갔습니다. “·····이러한 논리 끝에 임신중지가 고통을 수반하는 행위로만 가정된다면 우리의 주체성은 지워질 것이며, 타인의 선의에 의해 구조받는 나약한 존재로만 재현될지도 모른다.”(195-196p)

 

 

 

ㅡ 강화길 외,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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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6/10

 

 

soso

 

 

 

ㅡ 정지돈, <야간 경비원의 일기> 中,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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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5/7

 

실린 작품 중 표제작과 스펙트럼이 가장 좋았다. 요즘 책도 많이 읽지 않고 있고 그나마 읽는 책도 비교적 호흡이 긴 작품이라서 독서가 지지부진했는데 앉은 자리에서 한달음에 읽었다. 분량은 300p가 넘지만 자간과 여백이 넓어서 그런 것이고 열린책들 느낌으로 편집했으면 200p초반 정도였을 듯. 그리고 읽기 싫었겠지. 

독서 모임의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에게 가장 도움이 건 강제성이다. 특히 읽으려고 찜해뒀지만 계속 미루고 읽지 않은 책을 모임원이 골라주면 그렇게나 고맙고 반가울 수가 없다. 자발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이 아니라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지 않을까? 이 책 역시 그랬다. 작년에 화제가 되었을 때부터 읽어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최근에는 심지어 빌려놓기까지 했지만 역시나 방치하고 있다가 좋은 기회ㅡ강제성ㅡ를 통해 읽을 수 있었다. 모임원에 고마움을 전한다. 

 

 

‘스펙트럼’은 흔한 주제일 수도 있지만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무엇을 내 능력 밖이라고 쉬이 놓아버리거나 포기하는 대신 어떻게든 이해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조금은 감동적이기도 했다.

'나의 우주적 영웅에 관하여‘의 한 대목은 소수자가 처한 현실을 잘 짚었다고 생각한다. 작년에 본 ’우먼 인 할리우드‘에서도 비슷한 대목이 나오는데 남자들은 실패를 해도 다시 기회가 주어지지만 여성은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이래서 여자는 안 되는거야.”라는 말로 과대대표되어 필요 이상으로 비난 받고 도태된다는 말이었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상황 설정이 참 재밌었다. 기술의 개발로 가족을 먼 곳에 보낼 수 있었지만 같은 이유로 가족과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다는 것.

 

다음 책은 정지돈이 유튜브에서 언급했던 살라미나의 병사들.

 

 

 

 

 

“정하야, 우리 관계는 결혼의 예행연습이 아니야.”(199p)

 

 

그때 나는 문득 얼마 전 오만상을 찌푸리며 보았던 신파 영화를 떠올렸다. 정확히는, 내 옆자리에서 세상이 무너진 듯 엉엉 울며 손수건으로 코를 닦던 한 중년 여성을 떠올렸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나는 영화에 대한 메모를 하고 있었고, 그녀는 내 옆에서 한참이나 훌쩍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이런 억지 신파 영화에 그렇게 감동을 했을까 생각하던 찰나였다. 그녀가 가방에서 영화 포스터를 꺼낸 다음 신경질적으로 구겨 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돌아보지도 않고 자리를 떠났다.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 여자에게 영화의 내용은 중요했을까? 그 순간이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다.

의미는 맥락 속에서 부여된다. 하지만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담긴 눈물이 아니라 단지 눈물 그 자체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215p)

 

 

재경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데 사람들은 재경을 닮은 다른 약한 사람들을 난도질하고 있었다. 이래서 결함이 있는 존재를 중요한 자리에 올리면 안 된다고, 표준인간의 기준을 다시 세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비난들은 분명히 재경의 잘못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의 실패는 그가 속한 집단 전부의 실패가 되는데, 어떤 사람의 실패는 그렇지 않다.(308p)

 

 

우주 정거장에서 우주선을 기다리는 안나의 이야기는 ‘가짜 버스 정류장’에 대한 기사를 보고 떠올렸다. 독일에 있는 이 정류장은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데, 요양원 노인들이 시설을 나와 길을 잃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되었다고 한다. 해가 저물고 노인들을 데려가는 것은 버스가 아닌 시설 직원이다.(338p)

 

 

ㅡ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中, 허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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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4/24

 

G. K. 체스터턴은 말했다. 근엄해지기는 너무도 쉽다. 실없어지기는 너무도 어렵다.(작가의 말)

 

 

그와 친해진 건 둘 다 별 볼일 없는 존재인 데 반해 내면에서는 스스로를 별 볼일 있다고 여기는 특성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둘 다 인기도 없고 성적도 그만그만, 외모도 평범했지만 책은 꽤나 읽었다.(179p)

 

 

인스타그램 프로필: 김희정, 작가. “전지적 자기계발 시점” 희정은 각종 레퍼런스를 이용해 자기계발 메시지를 전파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자기계발, 백 년 동안의 자기계발, 자기계발을 공부하는 자기계발, 자기계발의 온도, 두근두근 자기계발, 알려지지 않은 자기계발과 자이툰 파스타·····.(181p)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ㅡ 정지돈, <농담을 싫어하는 사람들> 中,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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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30

 

그는 이미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모든 죄과를 참회하고 그 주님의 용서와 사랑 속에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하였다. 뿐더러 그는 참회의 증표와 주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사후의 신장과 두 눈알을 다른 사람에게 바칠 약속까지 해놓고 있었다 하였다. 그는 그만큼 평화로운 마음으로 오히려 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마지막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였다.(71p)

 

 

그래요. 내가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싫어서보다는 이미 내가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된 때문이었어요. 집사님 말씀대로 그 사람은 이미 용서를 받고 있었어요. 하지만 나보다 누가 먼저 용서합니까. 내가 그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나 먼저 그를 용서하느냔 말이에요. 그의 죄가 나밖에 누구에게서 먼저 용서될 수 있어요? 그럴 권리는 주님에게도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주님께선 내게서 그걸 빼앗아가버리신 거예요. 나는 주님에게 그를 요서할 기회마저 빼앗기고 만 거란 말이에요. 내가 어떻게 다시 그를 용서합니까.(75p)

 

 

ㅡ 이청준, <벌레 이야기> 中,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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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24

 

 

 

나는 언니의 프로필 사진을 볼 때마다 대체 왜 저렇게 하지, 하고 생각했다. 정말 왜 저렇게 할까. 나라면 그러지 않을 텐데. 하루에도 몇 번씩 회사 사람들과 메신저로 업무를 주고받는데. 거기에 남자친구와 얼굴을 맞대고 있는 사진이 떠 있으면 얼마나 프로답지 못해 보일지, 한번쯤 생각을 해볼 텐데. 나라면 내가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할 수 있는 사적인 인간이라는 거, 최대한 떠올리지 못하게 할 텐데. 매일 오분씩 지각하지 않을 텐데. 어차피 오분 동안 일을 더 하거나 덜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나라면 그냥 오분 일찍 일어날 텐데. 나라면 머리를 좀 짧게 자를 텐데.(25p)

 

 

빛나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본데, 여기가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 거. 월세가 싼 방에는 다 이유가 있고, 칠억짜리 아파트를 받았다면 칠억원어치의 김장, 설거지, 전 부치기, 그밖의 종종거림을 평생 갖다바쳐야 한다는 거. 디즈니 공주님 같은 찰랑찰랑 긴 머리로 대가없는 호의를 받으면 사람들은 그만큼 맡겨놓은 거라도 있는 빚쟁이들처럼 호시탐탐 노리다가 뭐라도 트집 잡아 깎아내린다는 거. 그걸 빛나 언니한테 알려주려고 이러는 거라고, 나는.(28p)

 

 

감사합니다, 선생님. 사시는 동안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세요.(63p)

 

 

“우리 대화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어요?”

“네.”

“음····· 제가 말을 잘하는 게 아닐까요?”(96p)

 

 

우리 부부는 아이를 가지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아이는 마치 그랜드 피아노와 같은 것이었다. 평생 들어본 적이 없는 아주 고귀한 소리가 날 것이다. 그 소리를 한번 들어보면 특유의 아름다움에 매혹될 것이다. 너무 매혹된 나머지 그 소리를 알기 이전의 내가 가엾다는 착각까지 하게 될지 모른다.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임감 있는 어른,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그걸 놓을 충분한 공간이 주어져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집 안에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기 전에 그것을 놓을 각이 나오는지를 먼저 판단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부족해도 어떻게든 욱여넣고 살면 살아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집이 아니라 피아노 보관소 같은 느낌으로 살면 될 것이다. 그랜드 피아노가 거실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테고 패브릭 소파와 소파스툴, 원목 거실장과 몬스테라 화분은 둘 엄두도 못 낼 것이다. 거실을 통해 부엌으로 가려면 한가운데로 가로지르지 못하고 발뒤꿈치를 들고 피아노의 뒷면과 벽 사이로 겨우 지나가거나, 기어서 피아노 밑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우리 부부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여태까지 단 한번도 충분하다거나 여유롭다는 기분으로 살아본 적 없는 삶이었다. 삼십대 중반, 이제야 비로소 누리게 된 것들을 남은 인생에서도 계속 안정적으로 누리며 살고 싶었다. 이십평대 아파트에는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지 않는다. 그것이 현명한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142-143p)

 

앞서 세 번의 회사를 절대 허투루 다닌 게 아니었다. 처음 한달이 중요했다. 이때 일찍 출근해두면 그 이후부터는 아무리 늦게 와도 ‘원래 일찍 출근하는 앤데 오늘은 좀 늦네’가 되고, 초반 한달을 늦게 출근해버리면 그다음에는 아무리 일찍 와도 ‘원래 늦는 앤데 어쩐 일로 일찍 왔대?’ 소리를 듣는다.(161-162p)

 

 

 

ㅡ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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