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4/2

 

 

나는 돈이 필요한 게 아니다. 죄책감 같은 것도 모른다. 내가 지나온 평생과 앞으로의 시간에 각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무엇을 하면 평판이 깎이는지, 무엇을 하면 감옥에 가는지, 무엇을 하면 돈을 잃는지, 무엇을 하면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지, 이 모든 감점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뿐이다. 그런 종류의 앎은 도덕이나 예의나 타산처럼 쓰일 수도 있지만 실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내게 중요한 것은 이 순간의 마음뿐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나는 너무 유아적이고 이기적이라서, 추해지지 않거나 영예로울 까닭조차 알지 못해서, 찰나의 기쁨보다 더 중요하고 복잡한 것을 느낄 능력이 없다. 나는 오래전에 지나간 선택지를 다시금 마주치고, 또 다른 기쁨을 꿈꾸기로 마음먹는다.

 

 

 

ㅡ 단요, <개와 소금의 왕국> 中, 우주라이크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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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4/1

 

크게 말을 보탤 게 없이 뻔한 작품이었다. 한때 김애란을 좋아했던지라 에세이를 포함해서 그의 모든 글을 읽어왔다. 그러나 '두근두근 내 인생'을 읽으며 내가 좋다고 느끼는 그의 글은 단편에 한정되는 게 아닐까라는 의문을 가졌었고, 이번 작품을 읽으며 그 생각은 더 굳어졌다. 무색무취의 청소년 문학인 줄 알았다.

 

 

 

ㅡ그래? 넌 이야기가 왜 좋은데?

지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ㅡ끝이······ 있어서?

소리가 신기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ㅡ난 반댄데.

ㅡ뭐가?

ㅡ난 시작이 있어 좋거든. 이야기는 늘 시작되잖아.

지우가 잠시 먼 데를 봤다.

ㅡ이야기에 끝이 없으면 너무 암담하지 않아? 그게 끔찍한 이야기면 더.

소리도 시선을 잠시 허공에 뒀다.

ㅡ그렇다고 이야기가 시작조차 안 되면 허무하지 않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잖아.

ㅡ그런가?

ㅡ응.(66-67p)

 

 

누군가 집을 떠나 변해서 돌아오는 이야기, 지우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알았다. 하지만 그 결말을 잘 믿지는 않았다. 누군가 빛나는 재능으로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 재능이 구원이 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에 몰입하고 주인공을 응원하면서도 그게 자신의 이야기라 여기지는 않았다. 지우는 그보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 이야기, 그래도 괜찮음을 알려주는 이야기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떠나기, 변하기, 돌아오기, 그리고 그사이 벌어지는 여러 성장들. 하지만 실제의 우리는 그냥 돌아갈 뿐이라고, 그러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당시 자기 안의 무언가가 미세히 변했음을 깨닫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 삶의 나침반 속 바늘이 미지의 자성을 향해 약하게 떨릴 때가 있는 것 같다고. 그런데 그런 것도 성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는데다 거의 표도 안 나는 그 정도의 변화도? 혹은 변화 없음도? 지우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다만 거기에는 조금 다른 이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고. 지우는 그 과정에서 겪을 실망과 모욕을 포함해 이 모든 걸 어딘가 남겨둬야겠다 생각했다.(232-233p)

 

 

 

 

ㅡ 김애란, <이중 하나는 거짓말>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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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31

 

이 소설에서는 어떤 의미나 상징을 내포하는 식으로 동물을 의인화 하지 않고 말이 통하지 않고 결코 상호 이해에 도달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긴다. 그 점을 새롭게 평가하는 듯.

 

 

 

그랬던 내가 어떻게 두희의 죽음을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양심에 관한 속담을 예로 들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양심이 삼각형 모양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낄 만한 행동을 하면 삼각형은 마음속에서 회전하며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하지만 계속해서 양심을 저버리는 행동을 하다 보면 뾰족했던 모서리가 닳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 얘기를 들은 후로 내 마음 속에는 크고 작은 삼각형들이 생겨났다. 그중 죽음에 관한 삼각형은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아빠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소식이 궁금하던 중학교 동창이 사고로 운명을 달리하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서서히 모서리가 닳아갔다.

한동안 나는 삼각형의 모서리가 다시 자라길 기다렸다. 첨예하고 날카로운 감각이 다시 자라나 나를 떠나지 않기를 밤마다 기도했다. 하지만 삼각형은 다시 자라나지 않았다. 내가 그토록 지키고 싶었던 삼각형은 내 삶의 모양에 맞춰 모양이 변했다.

한때 삼각형이었던 마음들을 떠올리며 나는 내가 비로소 어른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평생 알고 싶지 않던 어른들의 마음을 저절로 이해할 수 있었다. 보편적인 굴레에 무사히 안착했다는 사실과 마주할 때마다 나는 무척 분했지만, 한편으로는 편안했다.(103-104p)

 

 

세월이 지남에 따라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시간은 착실하게 나를 따라붙었다. 한동안 나는 시간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계절이 바뀌고, 강산이 변했다. 17년간 이어지던 두희의 시간이 끝났을 때, 나는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동안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는 말에 의지했다. 시간이 모든 걸 말끔하게 해결해주리라 믿었다. 이마에 남아 있던 수영모의 밴드 자국이 눈치채지 못한 사이 사라져 있는 것처럼.

하지만 이제 나는 망설이지 않고 말할 수 있었다. 시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건 아니라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거라면 왜 우리는 저절로 행복해지지 않는 것일까. 시간이 내 문제를 떠안고 멀리로 흘러가는데 왜 나는 여전히 가슴이 답답한 것일까. 끊임없이 시간이 흐르는데 어째서 두희의 방바닥에 남은 패인 자국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두희의 물건을 하나도 남김없이 정리한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두희의 흔적은 장판 위에 남은 자국뿐이었다. 비바리움을 올려놓았던 선반의 귀퉁이가 몇 년간 장판을 눌렀던 흔적이었다. 장판을 교체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가도 눌린 자국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141-142p)

 

 

두희와 함께했던 시간은 두희의 죽음으로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 시간들은 여전히 내 곁에 남아 있었다. 조금 더 다양한 기쁨과 슬픔, 행복과 외로움, 상실과 위안 들이 나의 경험으로 남으면서 나에게는 더 많은 것들을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182-183p)

 

 

"근데,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게 뭐가 나쁜거야? 우린 인간이잖아. 얘네도 타란툴라적인 생각으로 세상을 이해할 텐데."

"사람들이 가진 힘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너무 강력하잖아."

비바리움들을 전부 돌아본 나는 J가 데리고 있는 타란툴라들이 어째서 오랫동안 블루프로그에 남아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너무 흔해서, 은신처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아 관찰이 어려워서, 움직임이 지나치게 빨라서, 발색이 애매해서, 다리 부절을 회복하지 않아서. 타란툴라 사이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문제처럼 여겨지는 건 확실히 균형 관계가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219p)

 

 

내 인생에 블루프로그가 없었다면 어쩌면 내 삶은 훨씬 평탄했을지 몰랐다. 두희가 없는 삶 속에서는 두희로 인해 엄마와 척을 지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소리와 사이가 틀어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또 타란툴라에 대한 편견으로 나를 대하는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확실히 지금보다 단조로운 삶이 분명했다. 나는 단순하지 않은 삶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내 인생에 블루프로그가 있었기 때문에 포포를 지키고 싶어하는 원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고.

나와 당신이 참 많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이 통하지 않는 무언가와 함께 산다는 건, 그래서 서로를 관찰할 수밖에 없고 그럼에도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남아 있다는 건 내게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였다.(225p)

 

 

 

ㅡ 정덕시, <거미는 토요일 새벽> 中,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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