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17

 

soso.

 

희영이 가진 장점들의 상당수는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몇 가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타인의 상처에 대해 깊이 공감했고, 상처의 조건에 대한 직관을 지니고 있었다. 글쓰기에서는 빛날 수 있으나 삶에서는 쓸모없고 도리어 해가 되는 재능이었다.(59p)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편집부 할 때, 나는 어느 정도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79-80p)

 

 

다희씨는······ 그녀는 머뭇거리면서 말을 골랐다. 저는······ 다희씨 좋아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조금은 좋아하게 됐어요.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에요.

그 말을 할 때 자동차가 인안대교에 들어섰다. 그곳에서, 둘은 언제나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득 그녀는 말하고 싶었다. 다희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다희의 눈썹. 다희가 얘기할 때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눈썹을 보면서, 사람에게 눈썹이라는 게 있었구나. 눈썹이라는 게 꼭 마음과 통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그리고 사실 그녀는 귤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말도. 그렇게 껍질을 까서 하나하나 손바닥에 올려주던 마음이 고마워서 그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고, 결국엔 귤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말도. 다희가 더 깊은 이야기를 할까 한편으로는 두려웠다는 말도. 사람들은 때로 누군가에게 진심을 털어놓고는 상대가 자신의 진심을 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상대를 증오하기도 하니까. 애초에 그녀는 깊은 이야기를 할수록 서로 가까워진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는 말도. 그렇지만 다희가 그녀로 하여금 말하게 했고, 그 사실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말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에게서 멀어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는 사실도. 하지만 그녀는 그중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120-121p)

 

 

그때 내 마음에서 나는 옳고 언니는 그르고, 나는 맞고 언니는 틀리고, 나는 알고 언니는 모르고, 나는 할 수 있고 언니는 할 수 없고, 나는 용감하고 언니는 비겁하고, 나는 독립적이고 언니는 의존적이고, 나는 떳떳하고 언니는 비굴하고, 나는 배려하고 언니는 이기적이고, 나는 언니를 지켰고 언니는 나를 버렸지. 모든 것이 분명해서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믿었어. 하지만 긴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그중 어느 하나도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아.

너에게 너희 엄마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질 때가 있어. 내가 네가 모르는 언니의 모습을 알고 있듯이 너는 내가 모르는 언니의 모습을 알고 있겠지. 그리고 우리 둘 다 아는 모습도 있을 거야. 이를테면 무언가에 집중할 때면 미간을 찌푸리는 표정, 낮은 웃음소리, 빠른 발걸음, 잠들기 전에 크게 기지개를 켜는 모습, 모로 누워 조용히 자는 얼굴, 중요한 말을 하기 전에 음······ 하고 한 박자 뜸을 들이는 버릇, 신 음식을 먹을 때 찡그리는 표정, 할말을 속으로 ㅅ삼킬 때의 얼굴, 뒷짐을 지는 버릇······(175p)

 

 

엄마에게 이모는 책임감이 강하고 엄격한 언니였고 아빠에게 이모는 어려움을 겪는 가족을 도와주지 않는 냉정한 사람이었다. 데이케어 센터의 복지사는 이모가 평상시에는 조용하다가 한 번씩 화를 내는 충동적인 성격의 노인이라고 말했다. 그 모든 평가와 판단을 모두 모은다고 해도 그것이 이모라는 사람의 진실에 가닿을 수는 없을 것이다.(263-264p)

 

 

마이클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기남은 그애가 한 계절만 지나도 오늘의 일을 잊을 거란 걸 알았다. 그리고 더 많은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그애에게 그저 말고 낯선 혈육이 되리라는 것도. 하지만 그 사실이 자신을 더는 슬프게 하지 않는다고 기남은 생각했다.(320p)

 

 

 

ㅡ 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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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2/8

 

총 열 권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마무리. 시리즈가 이어질수록 함께 일하는 유능한 동료들과의 착착 맞아떨어지는 협업이 돋보였다. 시리즈의 시작이었던 ‘로재나’를 다시 읽어보면 느낌이 어떨지 궁금하다.

 

 

 

 

“와줘서 고맙습니다.” 브락센이 말했다. “이런 일에 와줄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생각을 알 것 같았습니다.” 마르틴 베크가 말했다.

“그게 문제죠.” 브락센이 말했다. “남의 생각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걸 지지하고 나서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91p)

 

 

 

ㅡ 마이 셰발, 페르 발뢰, <테러리스트> 中, 엘릭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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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2/2

 

제일 재밌어 보이는 ‘올림픽공원 산책지침’만 읽었다. 혹시나 타이밍이 맞으면 다른 작품도 읽어볼지도.

 

 

 

“인간의 가장 강력한 감정은 노스탤지어라고 학교에서도 배우지 않아? 아니 너희 때는 아직 미래에 대한 희망이라고 배우려나. 지수야, 너는 실제로 희망으로 움직이는 사람을 본 적 있어? 잠깐이면 가능할지 몰라도 희망은 장기적 동력이 될 수 없어. 의외로 휘발성이 강한 감정이라고.”

인류사 대부분의 위대한 발견은 고칠 수 없게 된 과거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에서 비롯됐고, 그중에서도 가장 강한 것은 날씨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얘기였다.(54-55p)

 

 

선물도 못 주고받게 하면서 무슨 크리스마스야. 지수는 몇 번 불평한 터였다. 사실 지수는 에이와 반대였다. 상습적 불평쟁이였다. 하지만 불평하지 않는다고 아쉬워하지 않는 게 아니듯 불평한다고 해서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62p)

 

 

 

ㅡ 지동섭 외, <제3회 문윤성 SF 문학상 중단편 수상작품집> 中, 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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