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는 거짓말이었다. 그는 이 점을 어렸을 때 인식했다. 그는 모든 종교가 불쾌했으며, 그 미신적인 허튼 수작이 의미없고 유치하다고 생각했고, 그 지독하게 어른스럽지 못한 면-그 젖비린내 나는 이야기와 독선과 양떼, 그 게걸스러운 신자들-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죽음과 신에 관한 야바위나 천국이라는 낡은 공상이 통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 몸만 있을 뿐이었다. 태어나서 우리에 앞서 살다 죽어간 몸들이 결정한 조건에 따라 살고 죽는 몸. 그가 그 자신을 위한 철학적 틈새를 찾아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틈새였다. 그는 일찌감치 직관적으로 그 철학과 마주쳤으며, 그것이 아무리 초보적이라 해도 그에게는 그게 전부였다. 만에 하나 자서전을 쓰는 일이 생긴다면, 그 제목은 『남성 육체의 삶과 죽음』이라고 부를 터였다. 그러나 그는 퇴직 후에 작가가 아니라 화가가 되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일련의 추상화에 그 제목을 붙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저지 턴파이크 바로 옆에 있는 황폐한 공동묘지의 어머니 곁에 묻히던 날에는 그가 무엇을 믿느냐 또는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p57~58)


조수가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것을 한참 지켜보다보면, 바다를 바라보며 백일몽에 빠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렇듯이 자신에게도 삶이 우연히, 예기치 않게 주어졌으며, 그것도 한 번만 주어졌으며, 거기에는 알려진 또는 알 수 있는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p130~131)



ㅡ 필립 로스, <에브리맨>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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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개인으로, 집단의 일원으로 꾸는 꿈은 단지 우스울지 모르나, 인간이라는 경계를 벗어날 수 없는 우리에게, 인간의 꿈 전체를 한데 모아 보면 서글프기 짝이 없다. 천문학자들이 밝히는 우주는 끝없이 광활하다. 망원경에 잡히지 않는 우주가 얼마나 광대한지 알 수 없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함이라는 사실 하나는 분명하다. 가시적 세계에서 우리 은하계는 작은 부분이고, 이 작은 부분 안에 있는 태양계는 눈에 겨우 띄는 반점만 하고, 이 반점에서 우리 지구는 현미경으로 잡힐까 말까 하는 점과 같다. 질소와 물의 불순물, 물리․화학 물질 덩어리들이 몇 년간 이 지구라는 점 위에서 돌아다니다가 다시 자신들을 구성한 원소들로 분해된다. 이 덩어리들은 분해 시점을 되도록 늦추려는 자기 보존 욕구와, 반대로 자신과 구...성 성분이 비슷한 다른 원소들로 서둘러 분해되려는, 다시 말해 ‘타자를 위한 열렬한 몸부림’사이에서 싸우다 수명을 마친다.
천재지변으로 수천 개의 덩어리들이 주기적으로 파괴되고, 질병으로 인해 그보다 많은 숫자가 일찌감치 사라져 간다. 이런 물리적 사건을 우리는 ‘불행’이라고 평가하지만, 막상 우리가 우리 손으로 이런 파괴적 행위를 할 때는 기뻐하며 신에게 감사의 기도까지 바치곤 한다. 태양계라는 시계로 쟀을 때, 인간이 물리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최장 기간은 전체 중에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자연 수명이 다하기도 전에 인간은 서로 파괴하기 위한 ‘헌신적 노력’으로 미리 삶을 마감해 주는 ‘친절’까지 베푸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외부에서 바라보았을 때 드러나는 인간의 삶이다.
삶에 대한 이런 서글픈 관점을 그냥 받아들이면 인간은 견디지 못하고 생존할 수 있는 본능적 에너지마저 잃게 될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종교와 철학에서 그 탈출구를 찾았다. 외부 세계가 아무리 무심하고 낯설게 느껴져도, 우리의 ‘종교 위안부들’은 겉으로 보이는 갈등의 저변에는 ‘화합’이 존재한다는 말로 우리를 안심시키려 한다. 이들은 최초의 성운으로 시작된 오랜 역사의 진보가 인간에 와서 최고 단계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햄릿>은 많이 봤지만, 거기서 첫째 선원의 역할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의 역할은 “신이여, 당신을 축복하소서.”라는 세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역할이 인생에서 유일한 직업인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을 생각해 보라. 그리고 그 사람들이 햄릿이나 허레이쇼, 길덴스턴 같은 주인공들과 접촉도 없이 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상상해 보라. 이들은 첫째 선원의 말 세 마디(“신이여, 당신을 축복하소서.”)가 전체 드라마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문학 비평 체계를 고안해 내지 않겠는가? 그리고 다른 부분도 그 부분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말을 하는 이들을 모욕하고 추방하는 식으로 벌하지 않겠는가? 인간의 삶이 우주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햄릿 전체에서 첫째 선원의 대사가 차지하는 부분보다 훨씬 미미하지만, 우리는 우주라는 무대 뒤에서 우리 삶이 속한 희곡의 후반부를 들을 수 없고, 또 다른 등장인물이나 구성을 알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인류를 대표한다고 생각하기에, 인류 전체에 호감을 가지고 인류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여긴다. 비국교도신자이며 일개 식료품점 주인인 존스 씨는 자신이 영생을 누릴 만하다고 여기기에, 이것을 허락하지 않는 우주는 매우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도 설탕에 몰래 모래를 섞고 일요일에 신자 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자신의 앙숙 로빈슨 씨를 떠올리며 우주의 자비가 도를 넘어섰다고 여긴다. 결국 존스 씨의 완벽한 행복을 위해서는, 로빈슨 씨 같은 사람이 가야 할, 불이 이글이글 타는 지옥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인간은 우주적 존엄성은 가지지만, 우주의 약한 자비 때문에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것이 불분명해지지는 않는 것이다. 로빈슨 씨 역시 존스 씨에 대해 내용만 다르지 비슷하게 생각할 것이고,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행복을 유지한다. (p32~34)



ㅡ 버트런드 러셀, <우리는 합리적 사고를 포기했는가> 中,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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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이유가 있어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날 오후 늦게 그는 의사에게 말했다. "우리는 잃기도 하고 얻기도 해요. 전부 종잡을 수 없는 일이죠. 종잡을 수 없음이 지닌 무한한 힘. 반전 가능성. 그래요, 예측 불가한 반전과 그것이 지닌 위력이죠."(25~26p)


"아니요. 내 얘기 좀 들어봐요. 난 스스로에게 정말 솔직해질 때면 이런 생각을 해요. '그래, 맞아. 난 약간은 재능이 있어. 아니면 재능 있는 사람인 척할 수 있거나.' 하지만 그런 건 둘 다 요행이에요, 제리. 재능이 주어진 것도 요행, 빼앗긴 것도 요행이라고요. 이놈의 인생은 시작부터 끝까지 요행이에요."(42p)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을 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한 외로움을 느끼기에 충분할 만큼 오래. 달이 바뀌고 계절이 바뀌는 동안 여기 앉아서 내가 없어도 시간은 계속 흐르리라는 생각을 하면 때로 놀랍기도 해. 내가 죽었을 때도 그럴 테지."(63p)


'내가 뭘 걱정하는데? 난 그 사람이 하루하루 더 늙어간다는 게 걱정돼. 그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예순다섯에서 예순여섯이 되고, 그다음엔 예순일곱이 되고, 그런 식으로 계속돼. 몇 년 후에는 일흔이 되겠지. 넌 칠십 먹은 노인이랑 살게 될 거고. 그런데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란다.' 어머니가 계속 말했어요. '그 다음에 그는 일흔다섯 노인이 될 거야. 절대 멈추지 않아. 계속 돼. 노인들한테 으레 생기는 건강 문제도 나타나기 시작할 텐데, 어쩌면 상황은 그보다 더 안 좋을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그 뒤치다꺼리는 네 책임이겠지. 그 사람을 사랑하니?'(86p)


남자가 가는 길에는 수많은 덫이 갈려 있었는데, 페긴이 그 마지막 덫이었다. 그는 허겁지겁 그 덫에 발을 들였고,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포로처럼 미끼를 물었다. 파국 외에 다른 길은 없다는 사실을 그는 마지막에야 알았다. 있을 법하지 않았냐고? 아니, 예측 가능했다. 한참 후에 버림받았다고? 분명 그녀에겐 그가 느꼈던 것만큼 긴 시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를 매혹했던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고, 때가 되자 그것은 그녀가 "이제 끝내요."라고 말하게 만들었으며, 그는 살고자 하는 욕심도 비운 채 혼자 그 막대 여섯 개만 지니고 그의 굴로 들어갈 운명에 처했다.
페긴은 차를 몰고 떠났다. 붕괴 과정은 채 오 분도 걸리지 않았다. 스스로 자초한 몰락으로 인한, 이제 결코 회복할 길 없다는 사실로 인한 붕괴.(140p)



ㅡ 필립 로스, <전락>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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