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8/14

 

너무 늦게 읽었나? 근데 하도 많이 들어서 읽기 전부터 이미 다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풍자극이자 우화를 읽으니까 풍자로 유명한 다른 작품도 읽고 싶어졌다.

 

 

그는 식량이 풍부해질 것이라는 주장도, 풍차가 노동을 줄일 것이라는 주장도 믿지 않았다. 풍차가 있건 없건 삶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나쁘게 굴러갈 것이라 그는 말했다.(49p)

 

 

지금의 사정이 옛날보다 더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고 앞으로도 더 나아지거나 더 못해지지 않을 것이며 굶주림과 고생과 실망은 삶의 바꿀 수 없는 불변 법칙이라는 것이었다.(114p)

 

 

 

ㅡ 조지 오웰, <동물농장>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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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8/8

 


-책 전반에서 인간의 관계를 중시하는 저자의 의견이 느껴졌다. 

-책만 많이 읽어 지식만 비대해지는 걸 경계하고 깊은 사색의 시간과 더불어 실천이 뒷받침되어야 제대로 된 앎이라는 참으로 당연한 말을 이 책에서도 또 듣게 되었는데 결국은 실천이 관건인 것이다.

-몇 십년 전에 쓰인 오래 된 책이다보니 문장이나 단어에서 확실히 시대가 느껴졌다. 좋게 말하면 예스러운 느낌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조금 고루했다.

-옥중에서 쓴 편지를 떠올리면 당장 오스카 와일드의 '심연으로부터', 서준식의 '옥중서한', 그람시의 '옥중수고'가 있다. 아 사드 후작의 '소돔의 120'도 있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글을 쓰던 양반이 감옥에 갇혔을 때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우면서 보람된 일은 자신의 사유를 정리하여 기록하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 자리에 땅을 파고 묻혀 죽고 싶을 정도의 침통한 슬픔에 함몰되어 있더라도 참으로 신비로운 것은 그처럼 침통한 슬픔이 지극히 사소한 기쁨에 의하여 위로된다는 사실이다. 큰 슬픔이 인내되고 극복되기 위해서 반드시 동일한 크기의 커다란 기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47-49p)

 

 

우리는 거개가 타인의 실수에 대해서는 냉정한 반면 자신의 실수에 대하여는 무척 관대한 것이 사실입니다. 자기 자신의 실수에 있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 우여곡절, 불가피했던 여러 사정을 잘 알고 있음에 반하여, 타인의 그것에 대하여는 그 처지나 실수가 있기까지의 과정 전부에 대해 무지하거나 설령 알더라도 극히 일부밖에 이해하지 못하므로 자연 너그럽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115p)

 

 

작년 이맘때의 생일연이 어제 일같이 가깝게 기억되는데 그것이 벌써 일 년이나 전의 일이고 보면 저희들은 세월의 흐름에 어지간히 무디어진 것 같습니다.

(...)

이런 버릇은, 특별히 절실한 일에 쫓기지 않는 데다 또 생활이 단조로워서 다양한 경험을 가질 수 없음에 연유하는 듯합니다. 절실한 일이 없으면 응달의 풀싹처럼 자라지 못하며, 경험이 편벽되면 한쪽으로만 굴린 눈덩이처럼 기형화할 위험이 따릅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 살면서 성격의 굴절을 막고 구김살 없이 되기란 무척 어려운 것 같습니다.(136p)

 

 

비록 여름이 아니더라도 저는 책에서 무슨 대단한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설령 책에서 무슨 지식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사태를 옳게 판단하거나 일머리를 알아 순서 있게 처리하는 능력과는 무관한 경우가 태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인 특유의 지적 사유욕을 만족시켜 크고 복잡한 머리를 만들어, 사물을 보기 전에 먼저 자기의 머리 속을 뒤져 비슷한 지식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그만 그것으로 외계의 사물에 대치해버리는 습관을 길러놓거나, 기껏 ‘촌놈 겁주는’ 권위의 전시물로나 사용하면서도 그것이 그런 것인 줄을 모르는 경우마저 없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을 지식이라 불러온 것이 사실입니다.(139p)

 

 

최근의 몇 가지 경험에서 자주 생각키우는 느낌입니다만 선행이든 악행이든 그것이 일회 완료의 대상화된 행위가 아니고 ‘좋은 사람’ 또는 ‘나쁜 사람’과 같이 그것이 ‘사람’인 경우에는 완전한 악인도 전형적인 선인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극히 평범한 상식이 확인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추상된 도식이기 때문에 도리어 인간 이해를 방해하는 관념이라 생각됩니다. 전형적 인간을 찾는 것은, 없는 것을 찾는 것이 됩니다.(174p)

 

 

영위하는 일상사와 지닌 생각이 한결같지 못하면 자연 생각이 공허해지게 마련이며 공허한 생각은 또한 일을 당함에 소용에 닿지 못하여 한낱 사변일 뿐이라 믿습니다. 저희들이 스스로를 통찰함에 특히 통렬해야 함이 바로 이런 것인즉, 속빈 생각의 껍질을 흡사 무엇인 양 챙겨두고 있지나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190p)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오진을 스스로 깨닫도록 은밀히 도와주고 끈기 있게 기다려주는 유연함과 후덕함을 갖추는 일입니다. 이런 경우는 주장과 주장의 대립이 논쟁의 형식으로 행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잘 아는 친구가 서로 만나서 친구 따라 함께 강남 가듯, 춘풍대아한 감화의 형태로 나타납니다.(216-217p)

 

 

해마다 가을이 되면 우리들은 추수라도 하듯이 한 해 동안 키워온 생각들을 거두어봅니다. 금년 가을도 여느 해나 다름없이 손에 잡히는 것이 없습니다. 공허한 마음은 뼈만 데리고 돌아온 ‘바다의 노인’ 같습니다. 봄, 여름, 가을, 언제 한번 온몸으로 떠맡은 일 없이 그저 앉아서 생각만 달리는 일이 부질없기가 얼음 쪼아 구슬 만드는 격입니다. 그나마 내 쪽에서 벼리를 잡고 엮어간 일관된 사색이 아니라 그때 그때 부딪쳐오는 잡념잡사의 범위를 넘지 못하는 연습 같은 것들이고 보면 빈약한 추수가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위에 정직한 최선을 다하지 못한 후회까지 더한다면 이제 문 닫고 앉아 봄을 기다려야 할 겨울이 더 길고 추운 계절로만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숱한 가을을 보내고 맞는 동안 가을에 갖는 우리의 회한이 결코 회한으로만 끝나지 않음을 압니다. 풍요보다는 궁핍이, 기쁨보다는 아픔이 우리를 삶의 진상에 맞세워주는 법이며, 삶의 진상은 다시 위대한 대립물이 되어 우리 자신을 냉정하게 바라보도록 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냉정한 인식은 일견 비정한 듯하나, 빈약한 추수에도 아랑곳없이 스스로를 간추려보게 하는 용기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가을에 흔히 사람들은 낙엽을 긁어모아 불사르고 그 재를 뿌리짬에 묻어줍니다. 이것은 새로운 나무의 식목이 아니라 이미 있는 나무르 ㄹ북돋우는 시비입니다. 가을의 사색도 이와 같아서 그것은 새로운 것을 획득하려는 욕심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다짐하고 챙기는 ‘약속의 이행’입니다.

이 평범한 일상의 약속들이 다짐되고 이행된 다음, 나중에야 비로소 욕심이 충족되더라도 되는 것이 응당한 순서이리라 생각됩니다. 가을에 갖는 우리들의 공허한 마음이란 기실 조급한 욕심이 만들어놓은 엉뚱한 것이라 해야 하겠습니다.(225-226p)

 

 

사람은 나무와 달라서 나이를 더한다고 해서 그저 굵어지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젊음이 신선함을 항상 보증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노’가 원숙히, ‘소’가 청신함이 되고 안 되고는 그 연월을 안받침하고 있는 체험과 사색의 갈무리 여하에 달려 있다고 믿습니다.(229p)

 

 

바늘 구멍으로 황소를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대상이 물건이 아니라 마음을 가진 ‘사람’인 경우에는 이 바라본다는 행위는 그를 알려는 태도가 못됩니다. 사람은 그림처럼 벽에 걸어놓고 바라볼 수 있는 정적 평면이 아니라 ‘관계’를 통하여 비로소 발휘되는 가능성의 총체이기에 그렇습니다.(245-246p)

 

 

낯선 환경을 배우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자신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주는 것이란 점에서 사소한 생활의 불편 그 자체까지 포함해서 하나의 기쁨입니다. 익숙한 환경과 친분 있는 사람들의 양해 속에서는 미처 발견되지 못하던 자신의 작풍상의 결함이 흡사 백지 위의 묵흔처럼 선연히 드러납니다. 저는 이러한 발견이 지금껏 무의식중에 굳어져 온 안이한 습관의 갑각을 깨뜨리고 좀 더 너른 터전 위에 저의 자세를 다시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344p)

 

 

그 많은 싸움들을 보고 느낀 것입니다만, 싸움은 큰 싸움이 되기 전에 잘게 나누어서 미리미리 작은 싸움을 싸우는 것이 파국을 면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 작은 싸움은 잘만 관리하면 대화라는 틀 속에서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소화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책은 못되고 중책에 속합니다. 상책은 역시 싸움에 잘 지는 것입니다. 강물이 낮은 데로 낮은 데로 흘러 결국 바다에 이르는 원리입니다. 쉽게 지면서도 어느덧 이겨버리는 이른바 패배의 변증법을 터득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실 진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기기보다 어렵습니다. 마음이 유해야 하고 도리에 순해야 합니다. 더구나 지면서도 이길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이 경우에 어긋나지 않고 떳떳해야 합니다. 경우에 어긋남이 없고 떳떳하기만 하면 조급하게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할 필요도 없고, 옆에서 보는 사람은 물론 이긴 듯 의기양양하던 당자까지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는 완벽한 승리가 되어 돌아옵니다.(392p)

 

 

 

ㅡ 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中,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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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8/3

 

 

1. 영어 공부하는 셈 치고 시간을 들여서라도 원서로 읽어볼까 했는데 결국은 번역본으로 읽었다. 핑계를 대자면 원서는 안 그래도 짧은 영어 실력이라 한 글자 한 글자 신경 써서 읽어야하는 데다가, 해나 베이커의 녹음 부분과 클레이가 말하는 부분까지 구분하며 읽어야 했는데 그게 너무 헷갈렸다.(기울임으로 구분할 수 있게 해뒀지만 내가 글씨의 형태에 무딘 건지 그리 명료하게 구분되지 않았고, 이거 핑계 맞음) 번역본은 아예 다른 색으로 구분하여 훨씬 알아보기 수월했다. 뭐 그렇다는 얘기다. 시간이 나면 넷플릭스 드라마도 볼 의향이 있다.

 

어떻게 보면 책에 등장하는 13명 각각은 해나의 죽음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을 그 계기들이 모이고 연결되자, 더 이상 사소해지지 않았고 종국에는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 미스터리 구조를 띠고 있는 흔한 서사라고 할 수 있다. 13개의 이유라고는하나 이 테이프를 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 밖의 침묵하고 방관하던 대다수 학급 친구들 역시 해나가 죽는데 동조했을 것이다. 무난하게 읽을 수 있는 틴에이저 소설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후반부에 해나가 상담 선생을 찾아가는 부분에서 너무나 짜증이 났다. 교우 관계는 뜻대로 되지 않고, 이상한 소문만 퍼지고, 다들 나를 안 좋아하는 것 같고, 급기야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힘든 청소년기의 정서 상태인 거 백번 이해하고, 알겠는데 그래서 상담 선생에게 도대체 뭘 원하는 건지?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그럼 뭐 어쩌자고? 더 가관인 건 330p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언덕을 내려가는 중이야.

선생님 사무실 문은 닫혀 있어. 여전히 닫혀 있어.

선생님은 따라 나오지 않았어.

선생님은 나를 가도록 내버려뒀어.

나는 확실히 표현을 했는데. 그러나 아무도 내 앞을 가로막지 않았어.

다들 나름대로 호의를 베풀었지만, 내가 원하던 만큼은 아니었어. 진작···그걸 알았더라면 좋았을걸.

그런데 이제야 확실히 알았어.

그래서 미안해.

 

하. 지금 싸이월드 하세요? 제발 일기는 일기장에 쓰고 본인만 봤으면 한다. 침착하게 가능성 있는 대안을 알려주고 해결을 모색하려는 선생에게 지금 어리광 부리는 건지? 그럼 만약 선생이 따라 나왔다면 자살을 안 했을 거란 말인가. 그 정도로 자살에 대해 얄팍하게 생각하는 양반이 과연 자신의 과거를 더듬으며 특정 인물을 떠올리고, 테이프로 녹음까지 하는 수고스럽고도 번거로운 과정을 거칠 필요가 있었을까. 이건 뭐 일이 이렇게 된 건(=내가 죽은 건) 마지막까지 한 줄기 빛과 희망으로 믿고 있던 상담 선생 당신 때문이라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자살, 왕따 등등의 청소년 문제는 심각한 수준이고 그 고통을 경시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 인물의 행동거지가 참으로 거지같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자신의 힘든 상황으로 상담을 청하는 모든 학생이 바른 인성과 합리적 사유의 소유자가 아닐 것은 분명할진대, 그런 학생을 주로 상대해야 하는 상담 선생도 또 하나의 극한직업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 참 많이 다루는 주제이고, 그에 대해 생각도 해봤지만 나는 자신이 없다. 그저 웬만하면 최악의 상황까지는 처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치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말이나 글로야 괴롭힘이나 왕따 문제가 발생했을 때 침묵하지도 방관하지도 말자라고 되뇌고 떠들 수 있겠으나 실제 상황으로 맞닥뜨렸을 때 내가 알고 있는 대로 행동할지 자신이 없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마음의 과학이라는 책에서 필립 짐바르도가 썼던 구절이 생각나서 옮겨본다.

 

 

이 모든 이야기에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방치의 악’이다. 나는 가해자에게 초점을 맞추어왔지만, 내 연구와 앞으로의 저술에서 더욱 초점을 맞추고 싶은 두 중요한 집단이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지켜보면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어떠한가? 아부그라이브에는 의사, 간호사, 기술자도 있었다. 두 군인이 죄수들을 피라미드처럼 쌓아올리고 찍은 사진을 보면 주위에 둘러서서 지켜보는 사람이 12명이나 되었다. 이런 짓을 지켜보면서 “이건 잘못된 일이야! 당장 그만둬! 너무 끔찍해!”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암묵적인 동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그 끔찍한 일을 용인하는 침묵하는 다수에 속한다. 내가 뉴욕에서 택시를 탔는데 운전사가 인종차별적이거나 성차별적인 농담을 꺼낸다고 생각해보자. 내가 그의 말을 중단시키지 않는다면, 그는 승객이 그런 농담을 좋아한다고 짐작하고서 계속 떠들어댈 것이다. 그는 내 침묵을 자신의 인종차별주의를 승인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방치의 악은 그 교도소에 있던 모든 사람들만이 아니라, 악을 보면서도 반대하지 않아서 그것이 계속되도록 허용하는 사회 전체의 사람들에게도 존재한다.

 

ㅡ 스티븐 핑커 외, <마음의 과학> 中, 와이즈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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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활 전부를 너희들은 알 리가 없지. 집에서. 심지어 학교에서도. 자기 일을 제외하고 남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내기란 어려우니까. 그런데 누군가의 인생 한 부분을 망가뜨리면 너희들은 한 부분만 망가뜨린 게 아니야. 불행하게도 너희들은 정확하고 선택적으로 망가뜨릴 수는 없어. 한 부분을 망가뜨렸다면 삶 전체를 망가뜨리는 거야.

모든 것은···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지.(241-242p)

 

 

굳이 사건이랄 수도 없는 옛날 집의 장면은 그날 밤 가장 멋진 순간에도 영향을 미쳤어. 나에 대한 그의 무관심은 암시였어. 내가 그 집에 있었던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도, 아무 의미가 없다니.(246p)

 

아 진짜 혼자만의 망상에 빠져 이상한 의미부여하고 자기연민에 빠지는 거 너무 싫다.

 

 

난 해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해나에게 고통을 더해 주거나 상처주지 않았다. 그러나 방에 유기한 채로 떠났다. 손을 내밀어서 해나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는데도. 그녀가 터벅터벅 가던 발걸음을 되돌릴 수 있었는데도.(263p)

 

 

그래, 네 말도 그럴 듯 해. 넌 강간하지 않았어. 나도 강간하지 않았어. 그놈이 했어. 그렇지만 너···그리고 나···우리가 그렇게 만들었어.

그게 다 우리의 잘못이지.(274p)

 

 

 

ㅡ 제이 아셰르, <루머의 루머의 루머> 中, 내인생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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