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7/13

 

1. 한승태의 두 번째 노동에세이. 인간의 조건을 냈을 때는 지면으로만 간략한 정보를 알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팟캐스트에 직접 출현해서 저자에 대해 가졌던 평소의 궁금증이 제법 해소되었다. 지금은 선거 관련 일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다음에 나올 책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 앞선 두 책과 같이 에세이의 형태로 나올지 다른 형태로 나올지 모르겠으나 무조건 기대된다.

 

2. 책을 읽으며 계속 머리 속에 맴돌았던 생각은 공장제 축산업의 폐해(물론 이것도 중요하다)에 대해서라기보다는 내가 평소에 어떤 사람이라고 남들에게 떠들고 실제로도 자신이 그러하다고 믿는 것과는 별개로 자신이 마음껏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 절대적으로 약한 상대에게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를 보면 본인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같은 인간을 대할 때는 이를 비교적 잘 인식한다. 부모가 자식을, 교사가 학생을, 화가 난 소비자가 애꿎은 상담원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볼 때 우리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건 같은 종인 인간에 한해서다. 그 대상이 종의 범위가 달라지는 순간 더 이상 이런 생각은 들지 않는다.

피터 싱어의 종 차별주의를 넘어서자는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과 똑같은 종에 한해서만 완벽한 공감 능력을 발휘하지 말고 종을 떠나 우리와 같은 고통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존재를 떠올려보고 그들의 고통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실천가능한 일이다. 다행히도 많은 사람들이 점점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듯하다.

 

 

 

 

동정심도 그저 호감을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닭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대신 이것들을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짓밟은 다음 저 산 너머로 차버리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만약 내가 이 닭들에 대해서 책으로 읽었다면, 누군가에게서 전해 들었다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내 눈앞에서 있었고 너무나도 역겨워 보였기 때문에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것 말고는 다른 태도를 취할 수가 없었다. 케이지란 도구는 갇힌 쪽이나 가둔 쪽 모두에게서 최악의 자질을 이끌어내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19P)

 

 

찰스 부코스키는 어디엔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건 커다란 사건이 아닐 수 있다고 썼다. 오히려 사람을 정신병원으로 보내는 건 연달아 구두끈이 끊어지는 식의 ‘사소한’ 불행의 연속 때문일 수 있다고 말이다.(35P)

 

 

무감각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10동에서부터 차례대로 작업했는데 얼마나 많은 닭을 죽였는지 모르겠다. 수백 마리는 될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정말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손에 ‘투두둑’하고 닭의 명줄이 끊어지는 느낌이 전해져도 정말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나무젓가락을 부러뜨릴 때만큼의 감정도 소모하지 않고 닭의 목을 비틀었다. 내 발 주위는 무도병에 걸린 것처럼 사지를 흔들어대는 닭으로 가득했다. 잠깐, 정말 찰나의 100분의 1 정도의 순간 동안 예전의 일기에 적어놓은 그런 감정들, 미안함, 불편함, 찝찝함 같은 것들이 느껴질 것 같았지만 금세 짜증과 피로에 묻혔다. 이런 식이면 사람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154P)

 

 

팀장은 내가 농장을 돌아다니면서 만난 사람들 중 가장 모성애가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 흥미로웠다. 그녀는 작업 중에도 틈만 나면 자식들 얘기를 들려주고 내가 안쓰럽다며 일주일에 한두 번씩 반찬이나 국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게다가 그녀는 숙소에서 작은 몰티즈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런 팀장이 (비쩍 마른 몰티즈보다 100배는 더 귀여워 보이는) 자돈을 아무런 동요 없이 죽이는 걸 보면 일이란 것이 사람을 얼마나 무뎌지게 만드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187P)

 

 

결국 차별은 혐오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완성된다. ‘다른’ 존재에 대한 혐오와 ‘우리 편’에 대한 사랑. 농장장이 어떤 식으로 남에게 비춰지든 간에 그가 나에 대한 호의에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겨우 3일 전에 알게 됐을 뿐이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같은’ 한국 사람에 대한 도리였다.

차별에 구체적인 형태를 제공하는 것은 혐오지만 그것에 끈질긴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사랑이다. 게다가 그런 사랑을 통해 얻은 이익을 거절하겠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등의 원칙에 공감하지만 자신이 혜택을 누릴 가능성이 명백한 경우엔 노골적으로 차별을 요구하기도 한다. 문제를 어찌해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만드는 것도 이런 지점이다.

사람들에게 그들의 혐오가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입을 삐죽거리고 속으로는 딴소리를 할지언정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이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에 그들의 사랑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센 항의가 터져 나온다. 뒤틀리고 날이 서 있긴 하지만 그것 역시 사랑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218P)

 

 

자돈사에서 폐사한 몸집이 제법 컸던 돼지를 촬영한 오래된 동영상 파일이 있었다. 죽은 지 시간이 꽤 지난 후여서 배가 잔뜩 불러 있었다. 화면은 빵빵해진 돼지의 배 주위를 비추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돼지들이 번번이 화면을 가렸다. 잠시 후 화면 아래서 보라색 고무장화가 튀어나와 돼지들을 걷어차기 시작했다.

“아, 좀 비키라고, 저리 좀 비켜!”

내 목소리였다.

“꺼져 이 새끼야! 꺼지라고 좀. 썅!”

화면 속 목소리가 사장의 목소리와 너무 비슷하게 들려서 끝까지 볼 수 없었다.(235P)

 

 

강경의 사장은 (이런 식으로 야비하게밖에 표현할 도리가 없는데) 돈밖에 모르는 인간이었다. 그에게는 사람보다 상품이 더 중요했다. 그는 우리가 절대 돼지를 때리지 못하게 했다. 상품에 흠집이 생기면 안 되니까. 그가 감시하는 동안뿐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농장의 원칙은 그랬다. 하지만 횡성의 사장은 사람을 물건처럼 대하지 않았다. 그가 물건처럼 다루는 것은 돼지뿐이었다. 그는 진심에서 우리가 너무 힘들게 일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에 돼지를 때리는 것도 전기 충격기를 쓰는 것도 막지 않았다. 전자는 법적 책임을 피할 수만 있다면 누구든지 두들겨 팰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돼지에게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게 했다. 후자는 뺨을 얻어맞으면 자기가 뭘 잘못했나부터 고민할 사람이었지만 돼지에게 전기 충격 주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고대 로마의 귀족들은 이성의 노예들이 보는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성적으로 문란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노예는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횡성의 양돈장에서 보았던 일들도 같은 논리도 이해한다. 그건 그들이 폭력적이어서가 아니라 동물은 물건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어느 과학자의 말을 바꿔서 표현해보자면 생명관에 상관없이 좋은 사람은 동물을 아끼고 악한 사람은 동물을 학대한다. 그런데 좋은 사람이 동물을 학대하는 경우, 그것은 대부분 동물은 물건이라는 믿음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262-263P)

 

 

매일 아침 자리에서 몸을 일으킬 때면 바위 아래 깔려 있다가 그걸 밀어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푸드 파이터가 핫도그를 삼키듯 그날그날 작업을 소화했다. 직장에서 살아남는 비결은 기업계의 유명 인사들이 아니라 먹기 대회 선수들에게서 찾는 게 더 적절할 것 같았다. 그들은 이걸 왜 먹어야 하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맛이 어떤지 음미하는 법도 없이 그냥 목구멍 속으로 밀어 넣는다. 나도 어제를 오늘로 밀어내고 오늘을 내일로 밀어내고 일하는 날을 쉬는 날로 밀어내고 다시 일하는 날로 밀어냈다. 이 경기에는 대상도 특별상도 없었다. 모두가 보잘것없는 참가비만 손에 쥐고 물러날 뿐이었다.(373P)

 

 

어느 날 아침 강아지사에서 밥을 주고 있을 때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개들이 흥분해서 짖기 시작했다. 강아지사는 천막 안에 있어 소음이 가장 심했다. 다른 곳은 개방되어 있어 소리가 흩어지는 반면 이곳은 소리가 울렸다. 분만사도 천막 안에 있었지만 다 자란 암컷들은 성격이 차분해서 어린 개들처럼 심하게 짖지 않았다. ‘컹! 컹! 컹! 컹! 컹! 컹!’ 쇠파이프로 쇠파이프를 칠 때 나는 것과 같은 울림이 강한 금속성 소음이었다. 그런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귀가 아프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막대기로 케이지를 후려쳤다. “조용 해! 조용!” 개들이 움찔하며 울음을 멈췄다.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조음의 변화가 너무 극적이라 순간 귀가 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수리얀이 멀뚱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막대기를 쥔 손이 여전히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런 짓이나 하려고 개 농장까지 왔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을 때 나는 생각했다. 그래 흥분해서 한 번 실수한 것뿐이야. 이제 다시는 오늘 일 같은 건 없어. 하지만 개 짖는 소리 한가운데 있을 때의 달콤한 정적은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나는 이미 맛을 알아버린 것이다. 이틀 후에 다시 케이지를 쳤다. 그리고 다음 날도.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이번에야 말로 정말 마지막이야’하고 다짐해놓고서 또 다음 날도. 후회와 폭주를 오가는 간격도 점점 짧아져서 오전에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중얼대다가 오후에 또 그러는 식이었다. 케이지를 때리면 ‘깡’ 하고 알루미늄 배트로 홈런을 때린 듯한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개들은 즉시 바닥에 바싹 엎드리고는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개 농장에서 뜻하지 않게 노예 상인의 위엄을 갖춰가고 있었다.(376-377P)

 

 

한 번 짖을 때마다 대패로 두개골을 한 겹씩 깎아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스트레스에는 두 가지 결말밖에 없다는 것을. 도망치거나 터져버리거나. 나는 물줄기를 개에게 돌렸다. 개는 즉시 케이지 구석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개는 오른쪽 구석에 얼굴을 처박았다가 왼쪽으로 갔다가 그래도 소용없자 다른 개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표적을 놓친 물줄기는 이제 다른 개들에게로 향했다. 흠뻑 젖은 개는 나를 등진 채 앞발로 철창을 벅벅 긁어댔다. 그러면서 올가미에 묶여 끌려가는 개처럼 낑낑대는 비명을 간간이 내뱉었다. 더 이상 케이지에 약을 뿌리지 않았다. 나를 향해 짖어대는 개들에게 소독약을 쏘아댔다. 물줄기를 맞는 개들을 제외한 모든 개들이 합창하듯 짖어댔다.

“짖지 마! 짖지 말라고! 내가 너네한테 뭘 어쨌다고 짖는 거야?! 나는 전태일이 누군지도 알고 촘스키가 어느 대학 교수인지도 아는 사람이야! 나는 저 사람들이랑 다르다고. 나는 너희를 도와주러 온 사람이란 말이야!”

나는 다른 개들 틈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려는 개의 엉덩이에 대고 소독약을 쏘아대면서 소리쳤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누군가 거칠게 호스를 빼앗았다.

“아, 개장 소독하라고 했더니 이게 뭐하는 거야?!”

봉휘 아저씨였다.

“이거 독한 거라고! 개한테 쏘지 말라고 하는 거 못 들었어? 이 벽이랑 똥 쌓인 데 쏘라고. 내가 그만하라고 소리치는 거 못 들었어?”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이거는 내가 수리얀 불러와서 할 테니까 한 씨는 가봐. 개가 아무리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그러면 안 되지. 아, 가! 가라고!”(393-394P)

 

 

“인생 최고의 날을 상상해봐, 승태. 너는 방금 한승태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뉴스를 듣고 집을 나섰어. 대통령이 하도 애걸복걸하며 매달리는 바람에 내키지는 않지만 청와대에 가서 차도 한잔 마시고 사진도 좀 찍고 나왔지. 밖에는 교황이 보낸 차가 기다리고 있어. 로마에서 널 만나러 날아온 거야. 너는 추기경과 주교들에게 둘러싸여서 식사를 해. 교황이 따라준 와인과 교황이 찢어준 빵을 먹으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너는 트럭에 치일 뻔한 아기를 몸을 날려 구해내. 그리고 아기를 구하기보다는 핸드폰 만지작거리길 선택한 선량한 시민들 덕분에 너의 놀라운 활약상이 전 세계로 전파되는 거지.

온 나라가, 온 세계가 승태에게 열광해. 너를 찼던 모든 여자들이, 한 중대 병력쯤 되냐? 한승태를 찼던 건 내 인생 최대의 실수였다는 제목으로 신문에 장문의 기고문을 올리기 시작하지. 베스킨라빈스는 너의 아이스크림 취향을 존중하는 취지에서 더 이상 슈팅스타를 생산하지 않겠다고 결정해. 그리고 아마도 이게 승태를 가장 기쁘게 만들 것 같은데, 드디어, 마침내, 국립국어원에서 승태 의견을 인정하고 공식 발표를 하는 거야. ‘정확하다’와 ‘적확하다’의 차이는 적확하다를 썼을 땐 대학물이 좀 든 것처럼 들리는 것뿐이라고 말이야.

너는 그 모든 승리를, 그 모든 성취를 몸으로 느낄 수 있어. 손으로 이 폰을 쥐고 있는 것처럼. 빗방울이 피부에 닿는 것처럼. 그 모든 성공이 네 몸에 느껴져. 사람들이 한승태를 외쳐대던 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메아리치고 있어.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니가 불 꺼진 텅 빈 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사라질 거야. 그중 어떤 것도 니가 울리지 않는 전화기를 붙들고 잠 못 이룰 때 너를 도와주지 못할 거야. 그중에 어떤 것도, 상대가 너의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결국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하는 새벽에 니가 베란다 창문을 열고 뛰어 내리는 걸 막아주지 못할 거야.”(400-401P)

 

 

시작은 어떤 우월감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개들을 그렇게 대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장을 보면서 나 자신을 윤리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대단히 높은 위치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농장 전체에 증거가 산적해 있었기 때문에 생각을 바꿀 이유도 없었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개들과 나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시기도 있었다. 개들에겐 간간이 고기를 먹여주고 지루함을 달래줄 사람이 생겼고 나는 밤마다 곤경에 처한 동물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고 자부하며 잠들 수 있었다.

내가 당당하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실제로 선량한 면이 조금은 있었기 때문이다. 틈날 때마다 개들과 놀아줬던 것도 자투리 고기가 생기면 개들에게 먹였던 것도 정말로 개들이 안쓰러워서 한 일이었다. 철망에 발바닥이 끼어서 꼼짝 못 하는 개를 보며 안타까워한 것도 모두 진심이었다. 나는 그런 행동의 의도가 속임수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개들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당연하게도!). 온갖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다. 나는 개들 때문에 힘들고 괴로웠다. 나는 선량한 존재인데 고통 받는다면 문제는 상대에게 있는 것이다. 사장이 나를 화나게 하는 것만큼이나 개들도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사장을 보며 느꼈던 우월감을 이제는 시끄럽고 냄새나는 개들을 대하며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너희들을 위해 이렇게 애썼는데 너희들은 나를 이렇게나 힘들게 한단 말이야? 이건 너희들이 잘못하는 거야, 너희들은 벌을 받아야 돼!

개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였다면 개와 거리를 두면서 스스로를 추슬러야 했다. 하지만 나는 미련하게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는 쪽을 택했다. 그래, 나는 좋은 사람이니까 이 정도는 참아야 돼. 스트레스가 쌓이는 것과 비례해서 나 자신이 대단히 선량한 존재라는 생각은 확신으로 변했다. 아마도 이런 점이 감상적인 인간의 특징이 아닌가 싶다.

나는 한계를 인정하고 하려고 마음먹었던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평형을 찾는 대신 스스로를 순교자의 자리로 몰아붙이는 데서 희열을 느꼈다. 그렇게 나는 임계치를 향해 조급하게 달려갔다. 마침내 더 이상 개들을 참을 수 없게 됐을 때 내가 사장보다 더 지독하면 지독했지 조금도 덜 하지 않았다.

 

인간은 천사도 짐승도 아니다.

불행하게도 언제나 천사가 되려던 자들이

짐승이 되고 만다.

(파스칼, <팡세>)

 

이것이 감상주의의 불가피한 운명인 것이다.

그의 견해는 현실과 최초로 맞닥뜨리는 순간

정반대의 것으로 변해버린다.

(조지 오웰, <위건 부두로 가는 길>)

 

과거 가톨릭 교회에선 교황을 'Infallible'이라고도 칭했다. 사전에서는 이 단어를 “(판단, 언행 따위가) 전혀 잘못이 없는, 절대 틀림없는”이라고 정의한다. 교황은 절대 무류, 즉 잘못된 행동을 하는 일이 없으며 그가 하는 일은 모두가 옳다는 것이다. 개농장에선 내가 절대 무류였다. 따라서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무슨 일이든 개에게 득이 되고 복이 되는 일이어야 했다. 나는 내가 선량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나 자신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비록 개들이 비명을 지르고 달아나려고 발버둥을 치더라도 말이다.

 

선량한 사람들은 언제나 스스로의 선량함을 의심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선량한 사람이 된다.

(폴 오스터, <폐허의 도시>)

 

개농장을 나아가 공장식 농장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만든 것 역시 ‘의심하지 않음’이 아닌가 싶다.

(...)

전통도 스스로를 의심해볼 수 있어야 한다. 효율성도 스스로를 의심해볼 수 있어야 한다. 이윤 추구도 스스로를 의심해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의심해보지 않는 존재는 그것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시스템이든 언제든지 괴물로 변할 수 있다.(442-445P)

 

 

닭이나 돼지는 얼마든지 먹어도 좋지만 개만큼은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뭔가 하나만 특별히 여기는 것은 위선 아니냐는 말을 들었어요. 하지만 모든 일에 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죠. 모든 비극에 참여하려 했다간 역으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 가지만이라도 관여할 수 있으면 되는 겁니다.” 당장 모두가 채식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식량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고 생물학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인간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는 동물부터 고기가 되는 운명에서 구제하자는 주장이 위선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가 이런저런 윤리나 논리에 대해 고민하는 이유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잔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야기하는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닌가?(455P)

 

 

ㅡ 한승태, <고기로 태어나서> 中, 시대의 창

,

2018/6/23

 

 

작가 이름을 알게 된 건 제법 오래 됐는데 드디어 한 권 읽었다. 기대했던 것만큼 소름끼칠 정도는 아니었으나 좋은 작품이었다.

 

 

자고 있는 손자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긴 속눈썹과 둥근 뺨이 아이들 어릴 때 모습을 닮았다. 문득 아카시가 어른이 되는 건 보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카시가 중년이 되는 걸 볼 수 없다는 사실, 자신이 늙었다는 단순한 사실에 서글퍼졌다. 몇 년이 지나면 아카시가 바로 이 방을 차지하고, 루마와 로미가 했던 식으로 문을 닫아놓을 것이다. 그건 피할 수 없을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자신도 부모에게 등을 돌려 미국으로 건너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더 이상 개의치 않게 된, 야망과 성취라는 것 때문에 그들을 저버렸었다.(65p)

 

그는 갑자기 못 견디게 떠나고 싶어졌다. 앞으로 남은 24시간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내일이면 펜실베이니아로 돌아간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리고 2주 후면 박치 부인과 함께 프라하를 여행 하면서 매일 밤 그녀 옆에서 자게 될 거라고. 딸이 여기서 함께 살자고 했지만 그건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제 자신을 위해서였다. 전에는 딸이 그를 필요로 한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딸은 평생 그가 해준 것에 더하여 그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딸의 제안이 더 언짢았다. 자신의 일부는 언제나 아버지라는 사실 때문에 그 제안을 뿌리쳐선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건 달랐다. 즐거운 경험이긴 했지만 일주일을 지내보니 그 사실이 더 확실해졌다. 그는 다시 가족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 복잡함과 불화, 서로에게 가하는 요구, 그 에너지 속에 있고 싶지 않았다. 딸 인생의 주변에서, 그 애 결혼 생활의 그늘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딸 인생의 주변에서, 그 애 결혼 생활의 그늘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아이들이 커가면서 잡동사니로 가득 찰 커다란 집에서 사는 것도 싫었다. 그동안 소유했던 모든 것, 책과 서류와 옷가지와 물건을 최근에 정리하지 않았던가. 인생은 어느 시점까지 규모가 불어난다. 그는 이제 그 시점을 넘겼다.(68p)

 

 

나이가 들수록 엄마의 삶이 얼마나 황폐한지 알게 되었다. 엄마는 일을 한 적이 없었고 낮에는 드라마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엄마의 유일한 일은 아빠와 나를 위해 청소하고 밥을 하는 것뿐이었다. 외식은 드물었다. 아빠는 싸구려 음식점에서조차, 집에서 먹는 것보다 얼마나 비싼지 항상 지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엄마가 교외에서 사는 게 얼마나 싫고 얼마나 외로운지 불평을 할 때마다 아빠는 위로의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렇게 불행하면 캘커타로 돌아가지”라고 하면서, 떨어져 있어도 자긴 별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나도 아빠에게 엄마를 다루는 방법을 배웠고, 그래서 엄마를 두 배로 외롭게 했다. 내가 전화를 너무 오래 하거나 방에만 있다고 엄마가 소리를 지르면 맞받아 소리치는 걸 배웠다. 엄마가 한심하다고, 나에 대해선 아는 게 없다는 말도 했다. 내게 더 이상 엄마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 엄마와 내게 모두 갑작스레 분명해졌다. 프라납 삼촌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96p)

 

 

“아이들을 데리고 L.A.에 와. 바닷가에 있는 라이언의 별장에 놀러 와야 해.” 팸은 웃으며 말했다. “아니, 우리 별장.”

“정말 가보고 싶어요.” 메건이 말했다. 하지만 아밋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게 마지막이고, 팸의 세상에 다시 발을 들여놓은 이유는 별로 없었다.(130p)

 

 

그래도 아밋은 자기가 맞는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모니카가 태어나고부터, 함께 시간을 보낼 궁리보다는 어떻게 하면 각자 혼자 시간을 보낼까 궁리하지 않았던가? 쉬는 날 아내가 아이들을 볼 동안 그는 공원에 가서 조깅을 했고, 또 거꾸로 아내가 서점에 가거나 네일 살롱에 갈 수 있도록 그가 아이들을 보았다.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지 않은가. 혼자 있는 그 순간을 그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오죽하면 혼자 지하철을 타고 있을 때가 하루 중 최고의 시간이라 생각했었는지 말이다. 인생의 짝을 찾는다고 그렇게 헤매고서, 그 사람과 아이까지 낳고서, 아밋이 메건을 그리워한 것처럼 매일 밤 그 사람을 그리워하면서도, 그렇게 절실하게 혼자 있길 원한다는 건 끔찍하지 않은가. 아무리 짧은 시간이고, 그조차 점점 줄어든다 해도 사람을 제정신으로 지켜주는 건 결국 혼자 있는 시간이라는 사실이.(140-141p)

 

 

수드하는 엄마가 불쌍하고 한심했다. 자기가 모르던, 불쾌하고 인정하기 힘든 사실이라는 이유로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아들을 탓하는 대신 미국과 그 법을 탓하고 있었다. 아빠는 이해한듯했지만 대화에 끼려고 하지 않았다.

(...)

그녀의 부모는 자식들이 괴로워하는 일은 언제나 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학교에서 피부색 때문에 놀림을 받거나 엄마가 점심 도시락으로 이상한 음식을 싸주어서 비웃음을 사는 것도, 감자 카레 샌드위치를 싸면 원더브레드가 초록색이 된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세상에 불행하다고 생각할 게 뭐가 있느냐? 부모님은 이렇게 생각했다. ‘우울증’이란 단어는 외국어였고 미국의 것이었다. 고생과 부당함은 그들이 인도를 떠날 떄 두고 왔고, 자기 자식들은 절대 그런 일을 겪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소아과 의사가 아이들에게 평생 고통 없이 살라고 면역 주사라도 놔주었다는 식이었다.(173-174p)

 

 

“런던에 언제라도 놀러와.” 이렇게 말했지만 진심이 아니라는 사실에 슬퍼졌다.(185p)

 

 

발목에 뭔가 스쳐서 내려다보니 닐의 식탁에 묶여 있던 풍선이었다. 이제 줄 위에 떠 있지 못하고, 다시 부풀어 오르지 못할 정도로 바람이 빠진 채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줄을 가위로 잘라 통째로 쓰레기통에 구겨 넣었더니 놀랍게도 그 속에 쏙 들어갔다. 그녀는 더 이상 자기를 신뢰하지 않을 남편과 이제 막 울기 시작한 아이와 그날 아침 쪼개져 열려버린 자기 가족을 생각했다. 다른 가족들과 다르지 않은, 똑같이 두려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210p)

 

 

“미안해, 폴.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네가 키스하는 스타일이 마음에 안 들어.”(226p)

 

 

그녀가 그의 선물을 사는 걸 떠올리니 우울해졌다. 그들은 친근하게 지냈지만 친구는 아니었다.(241p)

 

 

 

ㅡ 줌파 라히리, <그저 좋은 사람> 中,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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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6/17

 

 

세상에 만두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내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른다. 어떤 음식이든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게 당연한데도, 그게 만두인 경우에 한해서는 내 이해력이 딱 정지하고 만다. 어떻게 만두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시판되는 냉동만두나 포장마차에서 파는 속이 한 티스푼 정도밖에 안 들어간 ‘피’투성이 만두밖에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 분명하다. 집에서 빚은 만두나 장인이 만들어 파는 수제만두를 못 먹어본 사람이 틀림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만두에 관한 한 누가 뭐래도 나는 단호하다. 기본적으로 만두는 매우 맛있을 수밖에 없는 음식이다. 이건 변하지 않는다. 만두가 맛없어지기 위해선 굉장히 만두스럽지 않은 일이 벌어져야 한다.(30p)

 

 

ㅡ 권여선, <오늘 뭐 먹지?> 中,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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