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9/9

 

인버스도 읽어야겠다.

 

 

전기차가 경유 승용차의 친환경적인 대안으로 제시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전기차는 실제로 더 적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하지만 생산과정마저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전기차의 리튬 이온 배터리는 양극재로 LCO(리튬·코발트·옥사이드) 혹은 NCM(니켈·코발트·망간)을 사용한다. 리튬은 대량으로 퍼 올린 지하수에서 해당 광물을 추출하여 생산되는데, 이러한 채굴 방식은 환경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주변 농작지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뿐만 아니라 리튬의 주요 산지는 칠레와 페루 같은 남미 국가들이다. 선진국의 땅은 환경오염과 정화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기에는 너무 비싼 반면, 남미의 개발업자들은 군·경과 결탁해 약탈적 채굴에 반대하는 환경운동가를 매달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전기차는 희토류 채굴로 인한 환경오염을 제3세계에 떠넘기는 동안만 온전히 친환경적인 셈이다.(56p)

 

 

제본스의 역설이 지적한 것처럼, 세탁기와 청소기가 가사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일 것이란 전망과 달리 실제로는 가사의 기준을 높였던 것처럼, 에너지 효율이 높아질수록 전력 사용량이 더불어 증가하는 것처럼, 발전과 혁신은 새로운 욕망을 빚어낸다. 그리고 이따금 욕망은 개선과 해결을 막는다.(58p)

 

 

사회에 기여하지 않거나 덜 기여하는 행위는 무가치한가? 도덕적으로 훌륭해지는 것 이외의 자향점은 없단 말인가?

수전 울프가 1982년 발표한 논문 <도덕적 성인>은 ‘모든 행위가 가능한 최대 한도로 선한 사람’을 도덕적 성인으로 정의한 후, “도덕을 최고의 기준으로 두고 판단할 경우, 우리의 가치들은 온전히 이해될 수 없다”는 논지로 끝을 맺는다. 직관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도덕적 성인이 되려 한다면 세상은 훨씬 칙칙해질 게 분명하다. 이러한 논변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위안을 준다. 순수수학, 이론물리학, 천문학, 고생물학···.

그 모든 일은 분명히 인류의 문명에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안겨왔다. 수레바퀴의 기준과는 다른 가치의 체계에 속하는 아름다움일 뿐이다. 수억 광년을 통과해 다가오는 빛을 포착하기, 영어의 음성체계에 대해 고민하고 구조를 분석하기, 그리고 심플렉틱 다양체에 대해 생각하기.(116-117p)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는 기분? 지구 반대편에 사는 애들보다 제가 살 만한 건 맞는데, 기분이 묘한 거죠. 내가 남 도울 입장도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도움을 받을 만한 상황도 아니고. 애매하게 끼어서. 저한테 열심히 살았다고 해주는 사람도 없고, 그런데 거기에 억하심정을 가져봤자 여기 말고는 말할 곳이 없으니까···.”(123p)

 

 

지난 11월, 어느 안티휠 만화가가 수레바퀴를 조롱하는 한 컷짜리 만평을 발표했다. 수레바퀴는 악당이 지을 법한 미소와 함께 이런 말풍선을 드리운다.

“내가 바라는 것은···어느 누구도 긍지를 가지지 않는 것,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 믿지 않고 어느 무엇에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 사랑과 따스함이 아니라 원칙과 계산에 따라 행동하는 것, 가족을 내버리고 세상을 고민하는 것, 더디 기뻐하고 분노를 참고 돌처럼 무감각한 것, 더 적은 것을 누리고 거기에 만족하는 것, 너희를 이 땅에서 치워버리는 것.”

그런데 나열된 요건들은 악의적인 왜곡이기 이전에 건조한 사실이라서, 받아들이는 사람의 가치관만을 보여주는 듯하다. 스스로의 의견에 확신을 가지지 않고 항상 회의하는 것은 나쁜 일인가? 공정한 원리에 입각해 행동하는 것은 나쁜가? 얼굴 모르는 사람들을, 불행의 숫자를 눈앞의 가족과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은 나쁜가? 감정적으로 초탈하는 것은 나쁜가? 물질적으로 검소한 것은 나쁜가? 인간이 모두 천국으로 떠나는 것은 나쁜가?

나쁘다라는 서술은 특정한 가치 체계 속에서만 정확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서는 정의의 체계와 개인적인 만족감의 체계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는 분명히 내가 만족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바뀌어가고 있지만, 정의의 문제라면 반대할 이유가 부족해 보인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만족스러운 것과 옳은 것을 곧잘 혼동한다.(173-174p)

 

 

 

ㅡ 단요,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 中,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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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8/28

 

 

등장인물을 바꿔가며 몰아치는 도입의 긴장감이 굉장히 좋았으나 중반부 양우라는 등장인물의 비중이 급격히 높아지며 긴장감도 함께 떨어졌다.

 

 

ㅡ 김희재, <탱크> 中,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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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8/29

 

 

감동적이고 좋은 책이었다. 근데 딱히 할 말은 없네.

 

 

ㅡ 루리, <긴긴밤>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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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8/30

 

청소년 문학의 편견을 깨는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현은 지금껏 침대에 누워서 텅 빈 머리로 했던 게 후회였음을 알아차렸다. 두 달 전에 이선이 죽었더라면, 우연이 추모에만 모든 슬픔을 바쳤더라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 애도란 남은 사람들끼리 편할 대로 기억을 잘라 내서 소화하기 쉬운 부분만 남기고 그만 잊어버리는 일이니까. 죽음을 그 자체로 잊을 이유가 되니까. 하지만 이선은 계속 살았다. 그래서 우연은 결코 씹어 넘기지 못할 부분을, 세상의 뼈 같은 걸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가 고꾸라졌다.

그러니까, 이 일에서 가장 슬프고 웃긴 점은 거기에 있었다. 정말로 씹어 넘길 방법이 없었다는 것. 센스/네트를 찾아가더라도 어떤 사실은 여전히 속에 얹혔으리라는 것.(231p)

 

 

“우리가 아는 낱말들을 분류해 보자. 이해나 공감 같은 건 좋은 쪽이겠지. 냉담함이나 잔인함은 나쁜 쪽이고. 평범한 감각으로는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짓누르듯이 이긴다고 믿게 될 거야. 뜨거운 주전자에 얼음 조각을 던지면 녹아 버리고, 반대로 얼음 덩어리에 물방울이 떨어지면 함께 얼어붙어 버리는 것처럼 말이야. 그리고 한 사람의 따뜻함이 무한한 악 앞에서 무너지는 장면을 상상하며 두려워하지. 또는 마지막 한 방울이 거대한 얼음을 쪼개는 장면에 희열을 느끼거나. 하지만 그런 장면은 순간에 불과해.”

“네.”

“정말로 남는 건, 이 세계는 고통과 기쁨이, 아름다운 것과 끔찍한 것이, 옳은 것과 그른 것이 복잡하게 뒤엉킨 덩어리라는 사실뿐이야. 우리가 여기에 머무르는 한 사악해 보이는 것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 우리 각자가 온전히 다정할 수도 없고 온전히 올바를 수도 없다는 사실이지. 누구에게도 손해가 아닌 건 대개 환상이고 현실을 바꾸는 것들은 삶을 깎아내. 우리든, 우리 이웃이든, 아예 모르는 사람이든 간에. 게다가 해결책을 떠올리기 어려운 문제들도 있지.”

“궁금한 게 있어요.”

“말해 봐.”

“그러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지 않나요. 그런 것들이 모두, 한 사람의 처지에서는 어쩔 수 없는 거라면요. 더욱이 가끔은 아예 탈출구를 상상할 수 없거나 남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해답만이 있다면요. 그런 경우에는 처음부터 모르거나 알더라도 외면해 버리는 게 그 사람한테는 가장 나으니까, 세상은 더 좋아질 수가 없다는 건가요.”

“아니야. 거기에서 출발하는 거야.”

“출발, 이라고요.”

“가끔은 물러나기도 하고, 가끔은 도망치기도 하겠지만·····. 용감한 사람들은 계속 있을 거야. 소중한 것을 포기하고 아끼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면서 무언가를 해내겠지.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똑바로 보고 그 복잡함을 이해해야 해.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상태로 올바른 목적지에 도착할 수는 없으니까. 함께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위치를 알아야 하니까. 또 아직 알지 못하는 걸 진심으로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답이 없다면요? 떠오르는 게 없으면 어떻게 하죠?”

“그래서 어려운 거지.”(258-260p)

 

 

 

ㅡ 단요, <마녀가 되는 주문> 中, 책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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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15

 

소설을 마무리하는 방식이 근사하다. 

 

 

“신들은 결함투성이이고 제멋대로며, 선할 때도 약할 때도 있고, 현명할 때도 어리석을 때도 있고, 자비롭기도 하고 잔혹하기도 합니다. 로봇을 사랑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지요.”

“그래, 그렇더군.”

“제 생각에 절대신앙은 로봇 문명이 성장하며 생겨난 자아비대 현상입니다.”

케이는 눈을 지그시 떴다. ‘부정하기에도 긍정하기에도 정보가 부족하니 일단 좀 더 설명해보게.’하는 눈빛이었다. 훈이 말을 이었다.

“로봇이 신처럼 위대해졌으므로, 그런 위대한 우리가 모실 신이라면 전지전능하기쯤은 해야 위신이 선다고 믿게 된 것이지요. 로봇이 우쭐대고 거들먹거리기 시작하며 생겨난 몽상입니다.”

“흥미로운 해석이로군.”

“로봇이 네 자릿수를 천시한다 해서 우리의 비천함이 증명 되지 않듯이, 로봇이 무엇을 숭배한다 해서 그것의 고귀함을 증명하지 않습니다.”(215p)

 

 

“나는 어리석은 기적을 바랐다. 기적은 우리가 서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미움을 거두는 것조차 아니었다.”

케이는 듣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기적은 우리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어도, 아니, 어쩌면 영원히 증오한다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것이었다고요.”(278p)

 

 

 

ㅡ 김보영, <종의 기원담> 中, 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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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7

 

한국의 모든 문학과 작가를 싸잡고 싶진 않지만 요즘 젊은 작가 대부분이 누구보다 예민한 감수성과 정치적 올바름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음에도 그걸 표현하는 방식이 작품에 제대로 녹아들지 못하는 것 같다. 그저 작가들 자신의 진보적인(?) 생각을 펼쳐 놓기만 하니 무엇보다 재미가 없다.

이 단편집은 거의 모든 소설이 비슷비슷한 소재로 애매하게ㅡ여운이라고 주장하고 싶겠지만ㅡ마무리하는 소설집이었다. 특히나 사랑에 대한 어떤 생각을 담은 ‘첫사랑’은 내 나이엔 너무 낭만적이고 낯간지러운지라 아쉬웠으나 아직 읽어보지 않은 작가의 다른 작품인 구의 증명에 그런 면이 집대성되어 그렇게 젊은 층에 이례적인 인기를 누리는 것인지 궁금하긴 했다. 물론 읽을 생각은 없다.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도 있고, 미묘하고도 내밀한 어떤 것을 잡아채서 언어로 풀어내는 게 작가의 역할일 수도 있겠지만 영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래도 올해 이상문학상을 받은 작품은 궁금하니 그것까지는 읽어봐야지.

 

 

 

 

어떤 첫사랑은 쓰레기통에 처넣고 싶은 악몽이지만 어떤 첫사랑은 가장 이르게 빛나는 샛별처럼 그곳에서 인생보다 더 긴 시간 반짝인다. 가만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한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건. 그 이유를 이론적으로 풀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명 가능하다고 신기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어째서 그 자리에 그렇게 있는지 이론으로 아무리 설명해도 행성들 고유의 아름다움과 신비는 여전한 것처럼.

우현이 울상을 지으며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설레서가 아니다. 진심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런 표정이 나온다.(100p)

 

10대 사춘기 시절에 이런 문장을 읽었다면 심장이 쿵 내려앉았을까? 그럴 리가.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고 마음껏 왜곡한 점이 특히 좋다고, 왜곡하고 조각냈는데도 한눈에 자기란 걸 알아볼 수 있었다고 했다.

정성을 다했다는 게 느껴져. 애정 같은 거.

혜지가 그림을 돌돌 말면서 말했다.

난 이런 게 진심이라고 생각해. 좋아한다는 말이나 뭐 그런 것보다, 이런 게.(106p)

 

 

가족은 가장 가까운 사이 아닌가?

글쎄, 태어난 순간에는 그렇겠지. 근데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무중력 우주에서 약한 힘을 받은 것처럼. 태어나는 순간 그 힘을 받아서, 만나자마자 멀어지는 거야. 서로의 한쪽만을 보면서 서서히 멀어지는 거지.

······쓸쓸한 말이네.

그래도 난 너와 같이 살고 싶어.

멀어지더라도?

그래도 오늘은 가장 가까이 있으니까.(137p)

 

 

내가 먼저 소진을 알아봤다고 해서 우리 사이에 별다른 일이 생기진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좋아하는 계절이 생겼고, 자판기의 밀크커피가 특별해졌으며, 머지않아 의자도 하나 생길 터였다. 내가 먼저 소진을 부르지 않았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들이었다. 열다섯 살 그 새벽부터 소진은 거기 있는 것만으로 내 방향을 틀었다. 가던 길을 멈추게 했고, 돌아서게 했고, 막다른 길인 걸 알면서도 그리로 발을 떼게 만들었다. 내겐 흔치 않은 일이었다. 연애할 때 많은 사랑의 말은 나를 지치게 했다. 사랑은 그것 그대로 있을 텐데 때로는 내가 그것을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난 아직도 그 방법을 모른다. 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164p)

 

 

돌아보니 그런 식으로 다가오고 떠난 사람만 다섯 명이다. 그들 모두 마지막 표정과 말투가 너무나 흡사했다. 무언가에 상당히 질린 표정들이었다.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저절로 그 표정이 지어졌다. 마침내 나도 내게 질려 버렸다. 살면서 무언가에 질린다는 느낌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그 처음이 나였다. 나는 금방 사랑하고 말 잘 듣다가 결국에는 질리는 인간이었다. 질린다는 느낌은 싫증이나 미움과는 확연히 달랐다. 최악이었다. 나에게 질려 버리자 나는 꼼짝할 수 없었다. 내 몸, 내 목소리, 나의 일, 나의 습관, 나의 생활, 그 모든 것에서 손을 떼고 싶었다. 제발 그만 찾아오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게서 무관해지고 싶었다.(176-177p)

 

질리다라는 단어는 조금 더 생각해기로.

 

 

그는 내 말을 무척 잘 들어 주던 사람이었다. 처음엔 서로의 빈 부분을 채워 주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흐르자 서로의 어떤 부분을 마모시키는 것 같았다. 설렘과 호기심의 영토에 익숙함과 권태가 조금씩 스며들던 때였다. 그 사람이 많은 빚을 지게 됐다. 평생 갚아야 할 거라고 했다. 나는 그럴듯한 위로를 건네고 도망쳤다. 이성적, 객관적으로는 나를 나쁘다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주관적, 감정적으로 나는 나빴다. ‘너와 있으면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라는 말로 시작되었던 관계가 ‘너와 있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되는 게 싫어.’라는 말로 끝났다. 필사적으로 도망치고도 내 아픔을 그의 아픔보다 부풀리기 위해 글을 썼다. 글을 그런 것에 써먹었다. 그러니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것은 고민거리나 좌절할 일이 아니라 어쩌면 아주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C에게 말하고 싶었다. 공감이란 상대의 말에 어떻게 반응하고 대꾸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듣는 행위 자체라고. 고개를 끄덕이고 추임새를 넣는 것보다 중요한 건 그 자리에서 너의 말을 끊거나 부정하지 않고 듣고 있는 그 사람 자체라고. 거기 빤히 있는 것을 없다고 우기지 말고 원래 없는 것을 없다고 시비 걸지 말고, 더는 너를 견딜 수 없다고 말하라고. 그랬어야 했다. 네 곁에 있을 자신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어야 했다. 떠나고 싶지 않지만 떠날 수밖에 없다는 같잖은 포즈로 나를 꾸미는 대신, 은근슬쩍 책임을 떠넘기는 대신 가감 없이 말하고 보여 줘야 했다. 내가 솔직하지 않다는 것을 나만 아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도 알았고 모두가 알았다. 모두가 안다는 것을 나만 몰랐을 뿐이다.(288-289p)

 

 

 

 

ㅡ 최진영, <겨울방학>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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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3

 

취미는 사생활을 읽고 궁금해져서 찾아 읽은 단편집. 존재하는 갈등을 명백하게 드러내진않되 적당한 긴장감으로 유지하며 끌고 가는 게 멋지다. 3개의 단편 중 새끼돼지가 제일 좋았다. 장편에서도 드러낸바 있는 거짓말을 작품에 활용하는 방식을 여기서도 볼 수 있었다. 7월에 나온다는 신작을 기다린다.

 

 

 

 

ㅡ 장진영, <마음만 먹으면> 中, 자음과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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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3

 

작가의 다른 작품을 한두 권 정도 더 찾아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는 흥미로웠다. 근데 인버스는 소재가 좀 예상이 가능해보이기도 하고 다이브는 청소년 소설이라 크게 안 땡기네.

 

 

 

그래요, 백해나가 억지로 시킨 거였죠. 하지만 릴리의 활동은 원래 억지로 한 거였는데, 갑자기 세상이 바뀐 것처럼 놀라는 게 아주 웃기더라고요. 평소에는 아무 고민도 없이 날 좋아하던 사람들이, 언짢은 상황이 닥쳐오면 갑자기 걱정해줘요. 염려가 호의로만 이루어진 거 아니라는 증거죠.(112p)

 

이 부분만 50번쯤 읽어봤는데 도무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평소엔 호감의 대상이 무탈하고 별일이 없으므로 크게 고민하거나 걱정하지 않는 것이고, 언짢거나 불쾌한 상황에 처했을 때 걱정하는 게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건지?

문장과 문장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부분이 종종 보였고, 좀 더 부연해 줄 법함에도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있어서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기 힘든 부분이 보였다. 단순히 내 문해 능력이 부족한 탓일 수도 있고.

 

 

열렬한 팬들은 언제든지 슈퍼스타를 내팽개치고 깔아뭉갤 준비가 되어 있고, 슈퍼스타도 그 사실을 알고, 알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려 하고, 남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기를 바라지만 막상 그런 상대를 만나면 지루해하거나 저의를 의심하고, 남에게 휘둘리면서도 은근한 기쁨을 느끼고, 선망과 질투가 맞닿은 것처럼 기쁨과 분노도 어딘가에서 통하고, 그렇게 동시에 이루어질 수 없으면서도 서로 이어진 꿈들 사이를 오락가락하다 보면 사람은 긴장과 공포로 충만해지는데, 감정은 사실 몸의 반응과 불가분의 관계다. 인간의 뇌는 고통과 기쁨을 같은 방식으로 처리한다. 인간의 뇌는 체한 것과 스트레스로 인해 어지럽고 메스꺼워지는 감각을 구분하지 못한다. 기쁨으로도 분노로도 공포로도 긴장으로도 심장은 뛴다. 반응이 냉담할수록 마음을 불태우고 가망 없는 도전에 평생을 내거는 사람들. 거부와 몰락의 스릴에 중독되는 사람들. 상대를 일부러 실망시킨 다음 가혹한 질책을 기대하고 또 두려워하는 사람들. 그 사이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환희를 호수 같은 평안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 설계사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보상의 우열이 명확하지 않고 감각의 경로가 제대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죠. 고통과 기쁨이 맞닿은 상태가 그 자체로 보상이 되도록 만들어진 셈이죠. 인간의 조건 자체를 고칠 수는 없으니 해결할 방법도 없겠죠.(134-135p)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얻어낼 수 있는 호감이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상담사로서 성공을 거둔 비결이죠.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약한 면모를 드러내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친하고 가까운 사이든, 적대적인 사이든 간에 거부감이 있어요. 그러면서도 솔직해지려 하고 위로를 원합니다···. 이모지 박사가 그 역할을 해줬죠.”(139p)

 

 

“한 번 더 던져봐요. 나를 완전히 부숴봐요. 이 세상에 남겨둔 채로 고통을 줘봐요. 아니면 원하는 대로 개조해봐요. 설정값을 바꾸기만 하면 나는 누구든지 미워하고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결국 남는 건 당신뿐이에요. 사실은 처음부터 당신밖에 없었죠. 삶을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죽음은 두려워하게끔 자라나서, 어떻게든 외로움 사이에 숨을 곳을 마련하려는 인간 말이에요. 고칠 수 없는 것들은 정말 불쌍하고 안타깝군요.”(207-208p)

 

 

우울증 환자의 극복기는 응원받을지라도 나는 그런 걸 기대할 수가 없다. 공감을 사기에는 너무 특이한 경우이기 때문일 것이다. 동일한 약을 먹는 환자 중에서도 나와 같은 유형은 아주 적다(아마 병명을 찾지도 못하고 소년원에 간 케이스가 더 많을 것 같다). 도르시아의 스테이크에도 대규모 콘서트의 분위기에도 설계사 면허 취득에도 들뜨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아무 기대도 가망도 없는 기분이 무엇인지 다들 모른다. 그 사람들은 불화에 이끌리는 기분도 모른다. 모르니까 내가 세상을 느끼고 겪는 방식에 대해서도 고민해주지 않는다.

“사회가 저한테 살인 면허를 발급해줘야 한다는 소리는 아니에요. 오히려 저는 운전면허조차 없으니까요. 참고 있죠. 이해받거나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아요. 그냥··· 저는 어쩔 수 없이 역겨운 사람이고, 그래도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요. 그렇게밖에는 말하지 못하겠네요.”(215-216p)

 

 

 

ㅡ 단요, <개의 설계사> 中, 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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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2

 

작년과 올해에 등단한 작가의 작품이 실려있었다. 공현진과 김기태는 추후에 단편집이 나오면 읽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작가에게 칭찬은 아닌 듯 하나 김기태 작가는 작품보다 인터뷰 내용이 더 흥미로웠다.

 

 

힘을 빼야 하지만····· 그렇다고 힘을 다 빼면 안 되고·····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희주는 잘못된 답이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되는 느낌을 받았다. 힘을 빼는 거면 빼는 거고, 주는 거면 주는 거지. 그게 바로 균형이라고 강사는 말했다. 남들은 어떻게 이런 균형을 어렵지 않게 잡을까. 희주는 너무 몸에 힘을 주지 않아서 혼이 났다가, 곧바로 너무 많은 힘을 주어서 물속으로 가라 앉았다.(23p)

 

 

강사는 흥분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천천히 걸어가는 희주와 주호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그는 화를 쏟아내더니, 욕설을 내뱉었다.

그때 주호가 뒤돌아서 강사에게 다가갔다. 아주 느린 속도로. 물이 갈라졌다.

“뭐가요. 씨발. 왜 어쩌라고?”

강사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주호에게 욕을 하며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보며 희주도 긴장했다. 주호는 강사의 빨간 얼굴을 보며 물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진심으로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당황한 강사는 말을 잇지 못했다. 희주도 당황했다. 대체 어떤 사고 과정을 거쳐야 저런 말이 나올까. 대화 맥락에 대한 이해 자체가 없는 것일까. 지금까지 주호와 나눴던 대화가 아닌 대화들이 떠올랐다.

침묵.(35-36p)

 

 

리아는 마음이 넉넉하고 편견이 없는 친구들을 사귈 수 있을 거라며 독립서점에서 운영하는 모임에 맹희를 데려갔다. 부모의 집에 살아도 자기 방 인테리어는 자기 취향을 고수한다는 스물두 살짜리 애가 말했다.

“나이가 들어도 나다움을 지켜야죠. 삶이란 어차피 흘러가는 거잖아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고 틀린 말도 아니지만 걔랑 친구가 될 순 없었다. 그 취향. 너다움. 도무지 못생긴 빨래 건조대를 방 바깥에 둘 수 있어서 유지되는 거 아닐까. 이런, 내가 마음이 좁고 편견이 있네. 온화한 피아노곡을 틀어놓고 코튼향 인세스를 피운다고 6인용 테이블에 둘러앉은 낯선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 수 있는 건 아니었다.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적당히 마모시킨 자기 고백을 주고받다 집에 들어가 혼자가 되면 맹희는 양배추즙을 마시고 샤워를 하고 맥주 캔을 땄다. ‘늦은 밤 혼자·····’ 어쩌구로 제목을 붙인 플레이 리스트를 유튜브에서 골라 틀고 몇 곡을 스킵하다가 꺼버렸다. 요새 노래들은 매가리가 없어. 아니, 매가리가 없는 건 아닌가.

“너 조맹희. 네가 원하는 게 뭐니.”

(...)

“아 근데. 나는 사랑이 좀 하고 싶다.”(67-69p)

 

 

문화 자본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표현 양식의 세련됨이나 고유함’으로 ‘감정의 진실함’을 가늠하는 경향이 있는 듯해요.(감정사회학자인 에바 일루즈의 저서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이학사, 2014)에서 이런 맥락의 연구를 참고할 수 있었습니다.) <소설 보다>를 찾아 읽는 분들의 취향은 어떨까요. 지중해 양식을 모방한 펜션에서 하트 모양으로 초를 늘어놓고 「다행이다」를 부르는 프러포즈 어떤가요? 제 취향은 아니에요. 5성급 호텔 방에 샤넬과 카르티에를 포토제닉하게 전시하는 프러포즈는요? 그럴 돈도 없지만 이상적이지도 않습니다. 감정 표현(의 양식)이 세련되면서 고유해야 하는데, 또 그런 열망이 도드라지면 안 되고, 약간은 소박한····· ‘꾸안꾸 스타일’ 같은 걸 원하게 됩니다. 어렵습니다. 복잡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마음이 삼각형인지 반원형인지 따져서 딱 들어맞는 섬세하고 유니크한 양식을 고릅니다. 하지만 저는 통속적인 유행가에 기대고 속는 사람을 응원하고 싶었습니다. 양식미를 따질 시간에 그냥 사랑을 해버리는 사람, 특별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특별함을 좇는 사람이요. 이국의 골목이나 비 오는 도서관에서 만나야만 멋진 건 아닐거예요. 맞선에서, <솔로농장>에서, 인터넷 카페 ‘중랑구 3040 늑대와 여우 모여라’에서 만날 수도 있습니다.(108-109p)

 

 

굳이 나의 제한적인 인식을 드러내고 자폭해야 할까. 소설을 탈고해서 발표할 때까지, 인터뷰지를 쓰는 지금도 걱정이 큽니다. 하지만 잘 알고 살아본 것만, 당사자성이 있는 것만 쓰는 게 답일까요. 반성의 결과가 마비라면 개인만 남을지도요. 오해와 착각을 감수하고서라도 다른 사람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말을 걸어보는 건 유의미하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자기 자리에서 자기 풀만 뜯으면 평화로울 수 있지만 저는 그게 목장주에게만 좋은 일이라는 의심이 들거든요.(111p)

 

 

살면서 모든 언행마다 윤리적인 무게를 고려해 신중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뒷조사를 하거나 댓글을 남기는 건 꽤 수고스러운 일 같거든요. 굳이 출연자의 개인 계정을 찾아내 직접 메시지를 보내서 비난하기도 하고요. 사랑도 아니고 혐오를 동력으로 그런 일을 집요하게 하는 게 이해가 안 되기도 합니다. 말초적이고 휘발적인 재미를 추구한다면 그렇게까지 정성스러울 수 없을 거예요. 진심으로 믿고 주장하고 싶은 세계관이 있어 보여요. 비슷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끼리 모여 서로 증인이 되면서 믿음이 강화되겠지요. ‘바깥’의 인간들은 호시탐탐 자기들을 속이고 권리를 빼앗으려고 음모를 꾸미는 무엇이 되고요. 그런 편견 어린 댓글이 2백 개 있으면 지나가던 누군가가 “제발 나가서 사람들 좀 만나라”라고 남기기도 해요. 시원한 댓글이지요. 하지만 어디로 나가야 할까요. 삼대가 앉는 식탁, 마을 슈퍼마켓 앞 평상, 하다못해 동네 선배들이랑 인사하는 오락실····· 이제 그런 건 없어요. 많은 분들이 지적하지만, 우리는 낯선 이들과 접촉하며 자기 세계관을 교정하고 보편적인 공감대를 구하는 광장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기존의 광장은 누군가를 배제함으로써 기능하기도 했으니 ‘잃어버렸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한 번도 온전히 가진 적 없고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하겠지만, 광장을 지향하는 태도라도 잃지 않으려고 스스로 경계하고 있습니다.(215-216p)

 

 

 

ㅡ 공현진, 김기태, 하가람, <소설 보다: 여름 2023> 中,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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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6/27

 

 

기록으로 남겨놓고 싶은 문장은 없었다.

지금까지 나온 장류진의 장편 1권과 이번 작품을 포함한 단편집 2권 총 3권을 읽은 감상은 2010-20년대인 현재를 살고 있는 여성들이 겪었거나 공감할만한 일을 소재로 삼아 최대한 핍진하게 묘사하는 걸 목표로 하는 듯하다. 이번 작품 역시 여전히 그런 디테일을 살렸으나 매번 이런 식이니 슬슬 질리기도 한다. 새로운 모습을 보진 못했다.

 

 

 

ㅡ 장류진, <연수>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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