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7/21

 

무미건조하다.

 

 

카니가 떠난 뒤로 칼은 딴 사람이 돼버렸어요. 집 밖이나 사무실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저 괜찮아 보였지만 사실은 변했던 거예요. 딸을 무척 사랑했어요. 나보다, 진보다요.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칼은 진에게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이따금 비판적인 역할을 할 때만 빼놓고요. 아이를 꾸짖어 바로잡는 것 말이에요. 그런 문제에 대해 내가 여러 번 이야기해봤지만 그때마다 앞으로 고치겠다고 했을 뿐, 결코 전처럼 회복되지 않았고 그것은 진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어요. 분명히 그랬어요. 나라도 보상해주려고 노력해봤지만 도무지 효과가 없었어요.(122p)

 

 

진과 그 일이 있은 뒤로도 애디와 루이스는 계속 만났다. 그는 밤에 그녀의 집에 왔지만 이제 전과 달랐다. 예전의 편안한 즐거움과 발견의 분위기가 없었다. 차츰 루이스가 오지 않는 날이 생겼고 애디 또한 루이스와 함께 누워 있기보다는 혼자서 책을 보고 싶은 밤이 늘었다. 그녀는 옷을 벗고 그를 기다리기를 멈췄다. 그가 오는 날이면 아직도 손을 잡긴 했지만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습관과 쓸쓸함, 그리고 예감된 외로움과 낙심 때문이었다. 마치 다가올 무엇에 대비하여 이런 순간들을 비축해두려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깨어 말없이 함께 누워 있을 뿐 이젠 사랑을 나누지도 않았다.(180p)

 

 

 

ㅡ 켄트 하루프, <밤에 우리 영혼은> 中, 뮤진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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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20

 

확실히 요즘 점점 짧고 쉬운 컨텐츠를 즐기다보니 이 책의 장식적이고 장황한 문장에 적응이 안 되어서 여러 번 포기할 뻔했다. 모임 책이라 억지로 붙잡고 읽었는데 후반부에는 적응이 되어 그런지 읽기가 조금은 수월해지긴 개뿔 ㅋㅋㅋㅋ

그나마 대략 300p부터는 등장인물의 정체가 밝혀지는 반전(?)이 등장하며 조금은 읽는 재미가 있었다. 책에 대한 메타적인 소설이자 기록된 사실이 실제의 현실을 결코 반영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돌이켜보니 좋았던 구절이 종종 있었다만 그걸 즐기기 위해 많은 시간 고통을 감내해야 할 걸 생각하면 누구에게든 쉬이 읽어보라고는 못 권하겠다. 다만 비평가들은 딱 좋아할 만한 책이다.

 

 

 

관광객들은 돈이 있었고 우리는 그것이 필요했다. 그 대가로 그들이 요구한 것은 그저 거짓말을 들려달라. 자기를 속여달라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하게는 자신들이 안전하며, 이ㅡ국가적, 개인적, 영적으로ㅡ안전하다는 기분이 권태에 지친 변덕스러운 운명의 허튼 농담이 아니라고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자신들은 권력과 부를 지녔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검은 완장을 두를 필요가 없다고, 몇몇 사람의 부가 숱한 사람의 비참에 그토록 기묘하게 의존하고 있는 이유를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혹은 설명하지 않는 일에 대해 찜찜한 기분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친절하게도 우리는 이런 거래가 어디까지나 의자를 사고파는 일인 척, 그들이 가격과 유래를 물으면 그에 맞장구쳐 응대해주는 일인 척 행동했다.

하지만 그것은 가격과 유래에 관한 일이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다.

관광객들은 무언의 질문을 집요하게 품고 있었고, 우리는 위조한 가구를 가지고 가능한 한 최선의 답을 내놓아야 했다. 사실 그들은 ‘우리는 안전한가요?’라고 묻고 있었으며, 사실 우리는 ‘아뇨, 하지만 쓸모 없는 상품들로 바리케이드를 치면 시야를 가리는 데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요’라고 답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만은 그저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단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틀림없는 본능으로 보는 편이 나을 만큼 인간에게 뿌리깊은 감각인 까닭에 그들은 ‘이것이 우리의 잘못이라면 고통을 겪게 될지’까지 알고 싶어했는데, 과연 우리는 ‘네, 서서히요. 하지만 가짜 골동품 의자가 당신과 우리 둘 다 기분을 좀 가볍게 해줄지도 모르지요’라고 응수하는 셈이었다. 생계가 걸려 있었고, 이러는 게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썩 나쁘지도 않았고, 내다팔 의자야 힘닿는 데까지 많이 들어 옮길지언정 세상의 무게를 들어 옮길 생각은 없었으니까.(21-22p)

 

 

훙 선생이 말한다. 한 권의 책이란 최초에는 삶을 이해하는 새로운 길ㅡ독창적인 우주ㅡ일 수도 있지만, 머잖아 아첨꾼들의 과찬과 동시대인의 경멸을 받으며 두 편 중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는, 저술사의 각주로 전락한다고. 책의 운명은 가혹하며 책의 숙명은 부조리하다. 독자들에게 무시당하면 사멸하고, 후대의 승인을 받으면 영원히 곡해될 운명에 처하는 것이다. 또 그 저자들은 처음에는 신이 되고, 그다음에는 필연적으로, 그들이 빅토르 위고가 아니라면, 악마가 된다.(44p)

 

 

나는 또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표적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ㅡ정확히 말하자면 장바뵈프 오듀본 자신이 아니라 장바뵈프 오듀본이 쏘아맞히지 못한 새들로부터ㅡ배웠다. 사람들은 자기와 상반되는 것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에 있을 때 나는 암흑가의 영국인으로 사는 것이 유용하다는 것을 익혔고, 나중에 영국의 암흑가로 돌아갔을 때는 미국인 모험가로 행세했다. 또 이곳 밴디먼스랜드에서는 설령 삼류라 할지라도 ‘외지에서 온 예술가’ㅡ물론 여기서 외지란 유럽을 뜻한다ㅡ만큼 환대받는 존재가 없는듯하다. 만에 하나라도 내가 유럽으로 돌아가는 날에는, 부당하게 학대받은 순진하고 촌티나는 식민지인을 연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78p)

 

 

나는 먼 데서 바라봐 세부를 뭉개버리고 삶을 모욕하는 허랑한 그림을 그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팝조이 같은 이들이 너무나 사랑하는 저 풍경화, 마치 거리를 두고 보아야만 어떤 장소나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듯이 하늘로 높이높이 치솟으며 진실을 훼손하는 저 풍경화ㅡ그것은 땅의 거짓말이다. 진실은 절대로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운 먼지 속에, 불쾌한 점액과 딱지와 오물 찌꺼기 속에, 악마와 더불어 천사와 더불어 존재하며, 이 모두가 지상과 우리 안에 사로잡혀 있고, 이 모두가ㅡ나와 여러분과 우리의ㅡ한차례 맥박 속에, 또한 내가 물고기 육신을 가지고 구현하고 이루려는 모든 주제 안에 담겨 있다.(111p)

 

 

나는 책이 이야기의 본줄기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조금도 동의할 수 없다. 하느님도 나와 생각이 다르지 않으리라. 그분은 스물 여섯 글자로 당신이 원하는 것을 다 만들어냈으며, 그분의 이야기는 A-B-C로도 Q-E-D로도 문제없이 잘 통하지 않는가.

곧은길을 믿는 자는 장군들과 우편마차의 마부들뿐이다. 내가 보기에 이 점에서는 킹도 내 편이다. 그가 굽이와 우회와 유람에 온몸으로 동의함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여행이란 언제나 끝없는 실망의 예술이지만 마땅히 기억할 만한 것이어야 하며, 이것들은 여행을 기억할 만한 일로 만들어준다.

생각에 열중한 나는 이 길에 대한 질문이야말로 고대 그리스 문명과 로마 문명을 근본적으로 가르는 차이라고 킹에게 역설했다. 로마인들처럼 곧은길을 닦으면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세 단어를 얻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반면에 그리스인들처럼 아크로폴리스 곳곳에 염소가 다니는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내면 무엇을 얻는가? 「오딧세이」전권과 「오이디푸스 왕」전체를 얻는다.(184p)

 

 

요르겐 요르겐센의 배후에 있는 어떠한 동기ㅡ내가 사령관에게 끼치고 있다고 여겨지는 영향력에 대한 질투, 혹은 명확한 인과관계를 추구하는 서기로서의 욕망ㅡ를 찾아낸다 해도 그것은 실제 삶이 아니라 문학에 불과할 것이다. 삶에는 사람의 행동에 대한 설명이나 동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그것은, 톱상어의 본성과 마찬가지로 단지 그의 본성이었다.

나중에ㅡ너무 늦게야ㅡ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령관처럼 요르겐 요르겐센도 상상과 실제가 어긋나 있다는 감각에 시달렸다. 그는 책을 너무 많이 읽었고 열여섯의 나이에 로맨스와 모험담에 고취되어 1798년의 어느 날 고향 코펜하겐을 과감히 떠나 거친 세상으로 나갔지만, 세상은 자기가 읽은 그 무엇과도 일치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사물들은 파열했고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책은 견고했지만 시간은 녹아 흘렀다. 책은 원인과 결과를 다루었지만 삶은 불가해한 무질서였다. 아무것도 책과 같지 않았다.(275p)

 

 

빌리 굴드는ㅡ너무 부끄러워서 여기서는 나 자신을 삼인칭으로밖에 부를 수 없다ㅡ욕지기를 느꼈다.

(...)

내가 읽은 모든 것이 사령관이 꿈꾼, 그야말로ㅡ유럽의 앤 양조차 감히 꿈꾸지 못했던ㅡ하나의 감옥으로서의 이성적 사회상이라는 무시무시한 인식이었다. 이 최후의 창조물, 아마도 여러 면에서 그의 가장 가공할ㅡ설령 의도치 않았을지언정ㅡ이 업적이야말로, ‘구세계’에 대한 무의식적이고도 기괴한 숭배라는 점에서 ‘마작의 전당’과 국영철도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

그것은 이 역사 전체에서 그가 보고 알았던 모든 것, 그가 목격하고 겪었던 모든 것이 마치 잠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흩어지는 꿈처럼 이제 사라지고 무의미해졌다는 사실이었다. 자기 과거의 정신을 펄에일 병에 담아 가지고 다니는 카푸아 데스의 주장처럼, 만일 자유가 기억의 공간에서만 존재한다면, 빌리 굴드와 그가 아는 모든 사람은 영원한 징역을 선고받은 셈이었다.(316-317p)

 

 

아주 많은 면에서 시체는 산 사람과 대비되는 이미지다. 아주 많은 면에서, 나는 이 허물어져가는 살덩이가 그 안에 한때 거주했던 사람보다 오히려 낫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르겐 요르겐센이 이 세계를 자기 욕망에 맞추어 만들고자 했던 반면, 그의 시체인ㅡ사령관의 가면 인장이 그나마 남은 살점과 더불어 떨어져나가면서 그에 대한 예속으로부터도 해방된ㅡ킹은 서구적 순응의 모범 그 자체다. 요르겐 요르겐센이 후손들에게 자기 생각을 말하고 싶어했던 반면 킹은 묽은 수프 같은 내 횡설수설을 조용히 곱씹는 선에서 만족한다.(326-327p)

 

 

인생이란 역사화에서 관습적으로 묘사되는 식의 진보도 아니고, 적절한 순서에 따라서 열거되고 이해되는 사실의 연속도 아니다. 그것은 변형의 연속이다. 어떤 변형은 즉각적이고 충격적이며, 어떤 변형은 감지되지 않을 정도로 느리지만 너무나 철저하고 무시무시해서, 우리는 삶이 끝날 때쯤 노망든 자아와 어린 시절의 자아가 일치하는 순간을 찾아 기억을 헛되이 더듬게 된다.(333p)

 

 

하지만 사령관의 눈물도 그의 흐려진 시야를 지극히 명백한 사실로부터 가리지 못했으니, 드퀸시의 필적과 앤 양의 필적이 동일했던 것이다.

그의 누나는 그녀의 남동생과 잿더미로 화한 그의 국가만큼이나 가짜였음이 드러났다. 사령관은 향기나는 수건을 내팽개치고, 휘몰아치는 매캐한 연기를 너무 깊이 들이마신 나머지 헛구역질을 했다. 다가올 황금시대, 한 겹 아래 도사린 몰락, 모독당한 유토피아, 오로지 결연한 망각으로만 말살 가능한 지옥, 그는 불타는 궁전의 연기 속에서 마침내 이 모든 관념의 냄새를 맡으며, 삶을 받아들이지 못한 자의 어리석음이 거기 배어 있음을 느꼈다.

돌연 그는 자신이 꿈이 아니라 그 공포스럽고 무시무시한 역인 현실로부터 깨어나, 제대로 깨친 거라면 모든 삶이 흉포한 꿈이라는 감각에 눈뜨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꿈에서 사람은 파도와 바람에 붙들려, 또한 자신이 경외에 떨며 매일매일의 경이를 목격하는 증인에 불과하다는ㅡ언제라도 망각될 위험에 처한ㅡ인식에 붙들려 질질 끌려다니고 있었다.

그가 생각한ㅡ짜증나게 빌리 굴드가 그의 생각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따져 묻지 말기를. 굴드가 여태껏 털어놓은 것보다 훨씬 아는 게 많다는 사실을 지금까지도 의심한다면 뭐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테니까ㅡ몇 가지 시시한 것들을 여기에 특별한 순서 없이 재생한다.

ㅡ복제할 가치가 있는 유럽은 없다. 내 궁전을 집어삼키는 화염을 뛰어넘는 지혜도 없다. 오로지 우리가 아는 이 삶, 이 모든 경이로운 먼지와 오물과 장려함으로 가득찬 삶만이 있을 뿐.

ㅡ과거의 관념이나 미래의 관념이나 매한가지로 무용하다. 둘 다 누구든 무엇으로든 불러일으킬 수 있다. 지금 있는 것 이상의 아름다움은 없다. 지금 있는 것 이상의 기쁨이나 슬픔이나 경이도 없다. 또한 지금 있는 것 이상의 완벽함도 선이나 악도 없다.

ㅡ내가 이제껏 무의미한 삶을 살아온 것은 이 의미 있는 한순간과 지금 깨달은 이러한 것들을 위해서였다. 이 깨달음은 내 머리와 마음으로 불현듯 들어왔듯이 불현듯 떠나갈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조향사 샤르댕이라 해도, 과연 이처럼 코를 찌르는 계몽의 향으로 볼테르의 머리를 채울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는 이 모두를 온전히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이는 은총이자, 그러지 않았다면 완전히 무의미했을 삶의 완성으로 느껴졌다. 또한 그는 자신의 생각이 최후의 무용한 허영임을, 자신의 궁전처럼 자신의 생각도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있음을, 자신이 사사프라스 차가 담긴 컵을 든 채로 혼자 남겨졌으며, 그 컵이 소름 끼치게도 점점 뜨거워지고 있음을 깨달았다.(404-405p)

 

 

나는 어째서 정반대의 두 가지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지? 좀 설명해달라. 설명이 안 되더라도 어째서인지 알고 싶다ㅡ내 삶의 모든 증거는 이 세상이 늙은 덴마크인의 둥둥 뜬 시체보다 더 지독한 악취가 진동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어째서 나는 아직도 이 세상이 좋은 곳이고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밖에 믿을 수 없는지?

내 기다란 코로 저 잠수부들의 물안경을 톡톡 두드리고 이렇게 말하고 싶을 때도 있다. 이 나라가 무엇이 되었는지 알고 싶은가? 나한테 물어보라ㅡ어쨌든, 만약 거짓말쟁이와위조범, 매춘부와 밀고자, 살인범 죄수와 도둑을 신뢰할 수 없다면 당신은 이 나라를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 모두가 권력과 나름의 타협을 하며, 우리 대부분은 약간의 평화와 고요를 얻기 위해 우리 형제자매를 팔아넘길 터이기 때문이다. 윤리적으로 비겁한 삶을 살도록 훈련받았으면서도 항상 우리는 ‘자연’의 반항아라며 자위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무엇에 대해서도 화를 내거나 흥분해본 적이 없다. 우리는 애버리지니를 쏘아 죽이고 얻은 땅에서 유순히 풀을 뜯다가 결국 도살되는 양떼와 똑같다.

(...)
그래서 이 두 가지, 이 둘을 나는 도저히 화합시키지 못하고, 그것이 내 몸을 둘로 찢어놓는다. 세상이 너무나 끔찍하다는 인식, 삶이 너무나 특별하다는 감각ㅡ이 두 가지 감정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433-434p)

 

 

 

 

ㅡ 리처드 플래너건, <굴드의 물고기 책>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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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15

 

소설을 마무리하는 방식이 근사하다. 

 

 

“신들은 결함투성이이고 제멋대로며, 선할 때도 약할 때도 있고, 현명할 때도 어리석을 때도 있고, 자비롭기도 하고 잔혹하기도 합니다. 로봇을 사랑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지요.”

“그래, 그렇더군.”

“제 생각에 절대신앙은 로봇 문명이 성장하며 생겨난 자아비대 현상입니다.”

케이는 눈을 지그시 떴다. ‘부정하기에도 긍정하기에도 정보가 부족하니 일단 좀 더 설명해보게.’하는 눈빛이었다. 훈이 말을 이었다.

“로봇이 신처럼 위대해졌으므로, 그런 위대한 우리가 모실 신이라면 전지전능하기쯤은 해야 위신이 선다고 믿게 된 것이지요. 로봇이 우쭐대고 거들먹거리기 시작하며 생겨난 몽상입니다.”

“흥미로운 해석이로군.”

“로봇이 네 자릿수를 천시한다 해서 우리의 비천함이 증명 되지 않듯이, 로봇이 무엇을 숭배한다 해서 그것의 고귀함을 증명하지 않습니다.”(215p)

 

 

“나는 어리석은 기적을 바랐다. 기적은 우리가 서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미움을 거두는 것조차 아니었다.”

케이는 듣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

“기적은 우리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어도, 아니, 어쩌면 영원히 증오한다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것이었다고요.”(278p)

 

 

 

ㅡ 김보영, <종의 기원담> 中, 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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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13

 

너무 억지스럽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영상화를 염두에 둔 시나리오 같은 느낌.

 

 

 

“푸르니에는 아주 착한 사람이었죠.” 알랭은 범죄를 마주한 대다수의 인간은 사건의 주인공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온갖 성품을 가져다 붙이며 그들을 포장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새겼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살인범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으며 틀림없이 과묵하고 그러면서도 마을에 기여하는 이웃으로 묘사되는 반면, 희생자는 화목한 가정을 수호하고 회사에 충성하며 언제나 타의 모범이 되는 존재다. 알랭은 살인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걸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그 개자식이 칼을 빼 들었다는 게 놀랍지도 않아요. 아주 못된 후레자식이거든요!” 희생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등신은 인사 한마디 안 하고 차도 아무 데나 갖다 세워 두는 데다 마누라와 자식들에게 고함지르는 게 일상인 놈이었어요.”(164p)

 

 

 

ㅡ 앙투안 로랭, <익명 소설> 中, 하빌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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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11

 

 

피해자다움이나 피해호소인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사용하는 시대를 비판, 강간 사건에서 피해자가 기쁨을 느낄 수 있으나 그렇다고 그 사실이 그의 모든 고통을 상쇄하는지에 대한 고민, 그리고 그루밍 성범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복잡 미묘한 성격을 스릴러의 형식으로 잘 풀어냈다. 읽는 동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와 ‘더 테일’, ‘화차’가 생각이 났다.

 

 

비밀이란 그런 것이다. 비밀의 존재를 숨기고 없는 척할수록 그 비밀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진다. 어디를 가도 그 비밀이 따라온다. 시간이 쌓이면서 그 비밀을 지키고 싶기도 하고 없애버리고 싶기도 한 두 가지 생각이 끊임없이 경쟁을 벌이며 우리를 기진맥진하게 만든다.(111p)

 

판옌중은 장궈구이가 한번쯤 시간을 내어 의뢰인의 말에서 진위를 가려내는 방법을 교육해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담당 사건이 늘어나면서 장궈구이가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자신이 피해자라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죄상을 부인하는 것은 단순히 심성이 악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선량하고 정직한 일면에 미련을 버릴 수 없어 뻔뻔스레 사실과 다른 말을 하는 것이었다.(131p)

 

 

웃기는 소리!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긴 하나? 판옌중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따. 사람이 평생 거짓말을 가장 많이 하는 대상은 배우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많은 이들이 결혼을 ‘울타리’에 비유한다. 그 울타리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특수한 외형과 생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거짓말은 결혼생활에서 윤활제이지 걸림돌이 아니다.(133p)

 

 

친구의 상황이 자신보다 훨씬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사람들은 곧잘 질투심에 사로잡혀 불행감을 느낀다. 팔자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던 친구에게 불운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그 친구도 결국 비슷한 처지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친구의 불운을 떠올리며 은밀한 행복감까지 느낀다. 이럴 때 그들의 우정은 허위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더없이 진실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156p)

 

 

눈을 크게 뜨고 있으면 가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것을 목도하면 뒤돌아갈 수 없다. ‘어린 시절’에서 강제로 쫓겨난다. 문을 여는 암호를 잃어버린 그들이 문 밖에서 아무리 울부짖어도 다시 돌아갈 수 없다. 그때부터는 어른이다. 오드리는 열 살 때 어른이 되었다.

오드리는 린 선생님을 사랑했다. 그 사랑에 대해 어쩌고저쩌고 토론할 마음은 없다. 그 감정에 다른 요소들, 말하자면 존경이나 숭배, 감사함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고 해도 그게 뭐 어떻다는 말인가? 그 모든 것을 합치면 결국 사랑이었다. 오드리는 린 선생님을 사랑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오드리를 붙잡고 그 사랑의 ‘속성’이 무엇인지 정리해서 알려주려 했다. 오드리는 그런 모든 위로를 통해 오히려 자신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오드리의 사랑은 가짜라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했다. 그때의 내가 바보 멍청이라고 생각해요?(184-185p)

 

 

여자애가 그런 일을 겪고도 다음 날 쑹화이쉬안과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눈다고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쑹화이구 선배는 인기가 정말 많았어요. 그 선배를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정말 많았죠. 그런 남자가 뭐하러 굳이 그런 짓을 저지르겠어요?(195p)

 

남성 입장에 감정이입을 하는 전형적인 사람의 발언인데, 재밌는 건 이 소설에서는 그 선배를 짝사랑했던 '여자'의 발언이다.

 

 

더는 희망을 품지 않기로 했다. 희망이 절망의 친구라서 둘은 언제나 같이 움직인다. 희망이 마음에 깃들면 절망이 부르지 않아도 다가온다. 그가 희망을 버리자 절망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는 기나긴 평온의 길로 들어섰고, 더는 원망의 마음 없이 아버지를 간병할 수 있었다.(253p)

 

 

우신핑이 사건 다음 날 그 남자 여동생과 함께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똑똑히 봤다.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신핑이 웃을 수 있었을까?(263p)

 

 

그게 절말이면 왜 린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고 했어?

열일곱 살의 오드리는 그 말에 대항하지 못했다. 엄마의 추궁이 합당해 보여 아무 대꾸도 못 했다. 열 살 때의 나는 왜 린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했을까? 내가 그를 미워했다면, 그가 나에게 한 짓이 싫었다면, 나는 왜 린 선생님이 간식과 홍차를 사주는 것을 그냥 받아들였을까? 그가 내 중학교 생활에 관심을 보이도록 내버려 둔 이유는 무엇일까?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로 린 선생님은 다시는 그런 행위를 하자고 요구하지 않았고, 사진들에 관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오드리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런데 린 선생님과 만났다가 헤어질 때마다 왠지 허전한 기분이었다. 린 선생님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지만 오드리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잃는 느낌이었다. 스물일곱 살이 되어서야 당시 자신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어떻게든 정리해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녀는 린 선생님에게 집착했고, 린 선생님이 자신을 버리지 않기를 바랐다. 열 살이었던 오드리는 갑자기 너무 높은 의자 위에 올려졌다. 그리고 자신을 거기에 올려놓은 사람만이 도로 내려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264-265p)

 

 

판옌중은 장씨 아주머니의 딸 장전팡이, 심지어 신핑의 어머니인 황칭롄까지 신핑을 멸시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신핑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피해자였다. 그날 신핑의 옷차림이 그랬고 술에 취해 의식이 없었던 것도 그랬다. 성폭행 사건에서 피해자에게 문제가 있었다고 몰아가기 쉬운 요소다. 사건이 일어난 이후의 정황도 그랬다. 신핑은 처음에 힘들어하면서 눈물을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판옌중은 불안한 심정으로 생각했다. 신핑이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 너무 짧았다······.

(...)

제가 다시 물었죠. 경찰에 신고한 뒤에 벌어질 일을 감당할 수 있겠니? 신핑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세요? 선생님, 제가 낯선 사람에게 얻어맞았다면 지금처럼 몇 번씩이나 신고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298-299p)

 

 

오빠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은 자신의 출신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할지 말지조차 결정하지 못한다.

오빠, 이것 좀 봐. 나는 내가 죽을지 말지 결정하지 못해. 물론 다른 사람을 살릴지 말지도 결정하지 못해. 모든 상황이 정해진 궤도를 벗어났다. 가면 갈수록 비뚤어진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다. 멈출 수도 없다.(350p)

 

 

“지금도 그때의 감각이 기억나. 옌아이써가 가끔 책상이나 책꽂이 같은 걸로 보일 때가 있었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몇 초 정도 짧게 그렇게 보이는 거야. 옌아이써가 물건으로 보일 때면 걷어차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사람들이 화가 나면 책상을 차는 것처럼 말이야.

(...)

당신하고 같이 지낸 몇 년 동안 나는 계속 두려웠어. 당신도 물건으로 보일까봐. 방금 당신이 말한 것처럼 과거의 dfl이 언젠가는 나를 찾아올 거라고 예감하고 있었어······. 당신이 실종되기 전날 우리가 크게 싸웠잖아? 그날 나는 아주 긴장하고 있었어. 혹시라도 내가 또······. 솔직히 거의 그럴 뻔했어. 당신이 비명을 지르거나 나를 저주하면 얼른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은 나한테 사과를 했지. 미안하다고, 그렇게 말하면 안 됐던 거라고, 당신이 그렇게 말해줘서 정신을 차렸어. 어, 그러니까 내가 당신한테 고맙게 생각한다는 거야. 일이 더 커지지 않게 막아줬으니까. 고마워. 당신 덕분에 나란 사람이 완전히 쓰레기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어. 내가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고.”(430-431p)

 

 

어떤 여자의 성격이 순진하고 선량하다고 해서 그녀가 반드시 무고하지는 않다.(440p)

 

 

우샤오러가 회의한 것은 ‘피해자가 기쁨을 느꼈다면, 그 사실이 그의 고통을 상쇄하느냐’였다.(444-445p)

 

 

 

ㅡ 우샤오러,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中, 한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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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7

 

https://www.donga.com/news/It/article/all/20230608/119682722/1

필즈상을 받은 수학자 허준이는 자극을 피하고자 몇 달째 같은 식사를 했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떠올라서 링크를 남겨준다.

읽기 전에 대략적인 내용을 들었지만 그래도 읽어보길 잘했다. 다만 각종 사례를 바탕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후반부는 너무 처지고 일반화가 심하다. 이 책을 읽기 전 노년내과 의사인 정희원이 ‘불교는 왜 진실인가’가 이 책의 상위호환(?)이라고 해서 일단 이것도 빌려두긴 했음.

 

 

 

 

유아기의 경험이 오랫동안 잊히거나 의식적인 자각에서 벗어나 있다고 해도 평생 심리적 악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는 프로이트의 설명은 정신 분석에 획기적인 기여를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유아기의 트라우마가 성인의 정신병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프로이트의 통찰은, 모든 도전적인 경험이 우리를 심리치료용 소파로 데려갈 수 있다는 확신으로 변질됐다.

 

생각해 볼 만한 말인 것 같다. 결국은 정도의 문제겠지만 그 정도란 건 사람마다 다른 것이고 그걸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도 없는 일이라 어려운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양육과 교육 과정에서 발달심리학과 공감이 강조되는 것은 긍정적인 변화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가치를 성취도와 별개로 인정하고, 학교 운동장을 비롯한 모든 곳에서 신체적·정신적 야만 행위를 삼가며, 사고하고 배우며 논의할 수 있는 안전한 영역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완충재를 가득 채운 독방 같은 곳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유년기를 너무 질병처럼 대하고 과하게 관리하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이러면 아이들은 상처받을 일이야 없겠지만 세상에 대처할 방법도 모르게 된다.

 

 

하지만 저울에 관한 중요한 속성이 하나 있다. 저울은 수평 상태, 즉 평형equilibrium을 유지하려고 한다. 한쪽이나 다른 한쪽으로 오랫동안 기울어져 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울이 쾌락 쪽으로 기울어질 때마다, 저울을 다시 수평 상태로 돌리려는 강력한 자기 조정 메커니즘self-regulating mechanism이 작동한다. 이러한 자기 조정 메커니즘은 의식적 사고나 별도의 의지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저 반사 작용처럼 균형을 잡으려 한다.

 

 

1970년대에 사회과학자 리처드 솔로몬Richard Solomon과 존 코빗John Corbit은 이러한 쾌락과 고통의 상호 관계를 대립-과정 이론opponent-process theory이라고 칭했다. “쾌락적 혹은 정서적 중립으로부터 오랫동안 혹은 반복해서 벗어나면 … 그만큼의 대가를 치른다.” 그 대가란 자극과 반대되는 가치를 갖는 이후 반응after-reaction이다. 그러니까 옛말처럼 올라가는 건 반드시 내려와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쾌락 자극에 동일하게 혹은 비슷하게 반복해서 노출되면, 초기의 쾌락 편향은 갈수록 약해지고 짧아진다. 반면 이후 반응, 즉 고통 쪽으로 나타나는 반응은 갈수록 강하고 길어진다. 과학자들은 이 과정을 신경 적응neuroadaptation이라 부른다. 다시 말해, 쾌락을 추구할수록 우리의 그렘린은 점점 더 커지고 빨라지고 많아지며, 우리는 이와 동일한 효과를 얻기 위해 앞서 선택한 쾌락을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된다.

 

 

고통 쪽으로 기울어진 쾌락-고통 저울은 앞서 상당한 절제 기간을 거친 사람들도 다시 중독에 빠지게 만든다. 왜 그럴까? 우리의 저울이 고통 쪽으로 기울어 있으면, 그저 평범한 기분(수평 상태)을 느끼려 해도 중독 대상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신경과학자 조지 쿱George Koob은 이러한 현상을 “불쾌감에 따른 재발dysphoria driven relapse”이라고 표현한다. 중독 대상에 과거와 같이 다시 의존하게 되는 이유는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랜 금단에 따른 신체적, 심리적 고통을 완화하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인간이라고 다를까? 상담을 하면서 나는 심각한 중독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수년 동안 의존을 멈추고도 단 한 번의 노출로 다시 강박적인 의존에 빠진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보아왔다.

 

 

하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다. 인간은 궁극적인 추구자다. 쾌락을 좇고 고통을 피하는 세상의 시험에 너무나 잘 대응해 왔다. 그 결과 우리는 이 세상을 결핍의 공간에서 지나치게 풍족한 공간으로 바꿔 놓았다. 그러나 우리의 뇌는 이 풍요로운 세상에 맞게 진화하지 않았다. 만성적인 좌식 식사 환경에서의 당뇨병을 연구한 톰 피누케인Tom Finucane 박사는 이를 두고 “인간은 열대우림의 선인장입니다”라고 말했다. 건조기후에 살아가는 선인장이 열대우림에 던져진 것처럼 우리는 과도한 도파민에 둘러싸인 환경에 살고 있다.

 

 

둘째, 젊은 사람들은 심각한 중독자라 해도 의존으로 인한 부정적 결과로부터 영향을 덜 받는다. 어느 고등학교 선생이 내게 얘기한 것처럼 “정말 뛰어난 학생이라도 매일 대마를 피우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만성적 의존에 따른 의도치 않은 결과는 늘어난다.

 

 

마음챙김은 절제의 초기 단계에서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 중 다수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고도의 도파민 물질과 행동에 기댄다. 그러나 중독 대상에서 탈피하려고 도파민 사용을 멈추면 처음엔 고통스러운 생각, 감정, 감각 들이 몰려든다. 이때 고통스러운 감정에서 벗어나려 하지 말고 이를 인내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이 마음챙김의 가르침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경험은 새롭고 예기치 못한 다채로운 조화를 만들어낸다. 고통은 계속 그 자리에 있지만 다양하게 변화하고, 결국 자기만의 고통으로 남는 게 아니라 모두의 고통을 대승적으로 아우르게 한다.

 

 

내 환자 중 중독 대상을 스스로 조절하는 데 성공한 이들도 계속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힘들다고 얘기했다. 결국 그들은 최종적으로는 중독 대상과의 이별을 택했다. 하지만 음식에 중독된 환자들은 어떨까? 아니면 스마트폰? 완전히 끊을 수 없는 중독 대상이라면? ‘어떻게 조절하느냐’는 현대인들의 생활에서 점차 중요한 질문이 되고 있다

 

 

자기 구속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물리적 전략(공간), 순차적 전략(시간), 범주적 전략(의미). 그러나 자기 구속은 완벽한 안전장치가 아니다. 심각한 중독을 앓는 사람들에게는 특히 그렇다. 자기 구속 역시 자기기만, 불신, 엉터리 과학의 희생양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

 

 

범주적 자기 구속은 도파민을 여러 범주로 나누어 사용을 제한하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허락하는 하위 유형, 그리고 허락하지 않는 하위 유형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는 중독 대상뿐 아니라 그 대상을 갈구하게 만드는 계기도 금지하는 방식이다.

 

 

수년 동안 만난 다양한 환자의 이야기에 따르면, 향정신성 약물은 고통스러운 감정을 단기적으로 완화하는 것을 넘어서 감정 자체를 제한한다. 비탄과 경외심 같은 강렬한 감정을 특히 무디게 한다. 어떤 환자는 항우울제 덕분에 조울증의 고통에서 해방됐다고 기뻐했지만 한편으론 자신이 올림픽 광고를 보고도 더 이상 울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면서 웃음을 보였다. 그녀는 우울과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격 중 감성적인 부분을 기꺼이 희생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도 울 수 없자 나를 다시 찾아왔다. 내 처방에 따라 그녀는 항우울제를 끊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많은 우울과 불안을 비롯해 상대적으로 더 넓은 폭의 감정을 받아들이게 됐다. 그녀는 바닥에 가까운 감정도 인간다움을 느끼게 하기에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오해는 없길 바란다. 약물 치료는 구명 도구가 될 수 있고, 나 또한 약물을 환자 치료에 활용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하지만 인간의 온갖 고통을 약물로 없애려면 댓가를 치러야 한다. 앞으로 함께 보겠지만 더 효과적인 대안이 있다. 바로 고통 받아들이기다.

 

 

고통이 우리가 쾌락에 지불하는 대가인 것처럼, 쾌락 역시 우리가 고통을 통해 얻는 보상이다.

 

우리의 뇌는 쾌락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내성을 갖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통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뇌는 고통 쪽에 내성을 갖게 된다. 스카이다이버들을 대조군(뱃사공들)과 비교한 연구에 따르면, 스카이다이빙을 반복적으로 즐긴 이들이 기쁨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무쾌감증을 경험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있는 그대로 말하기는 주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자신의 약점을 서슴없이 드러낼 때 특히 그렇다. 이는 반직관적이다. 우리는 자신의 바람직하지 못한 면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떠나갈 거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내 성격적 결함이나 일탈 행위를 알면 거리를 둔다는 게 논리적으로는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반대다. 솔직할수록 사람들은 더 가까이 다가온다. 당신의 엉망인 모습을 통해 자신의 약점과 됨됨이를 돌아보고 의심, 두려움, 나약함이 자신만의 약점이 아님을 알게 되면 안심하고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한 번에 몇 주 동안 술을 안 드실 수 있는데, 술을 드시기만 하면 안 좋죠

 

내 얘기 하는 것 같아서 좀 찔림.

 

 

 

일반적으로 종교 단체나 사회적 집단이 여러모로 관대하고 규칙과 제한이 적을수록 더 많은 추종자를 끌어들일 것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더 엄격한 교회들’이 무임 승차자를 걸러내고 더 탄탄한 집단선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분방한 단체들보다 더 많은 추종자를 거느릴 뿐 아니라 성공적으로 안착할 확률도 더 높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친밀감을 만드는 방법은 완벽함이 아니다. 실수를 바로잡는 데 다 같이 노력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가 친밀감을 높인다.

 

 

 

 

ㅡ 애나 렘키, <도파민네이션> 中, 흐름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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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7

 

한국의 모든 문학과 작가를 싸잡고 싶진 않지만 요즘 젊은 작가 대부분이 누구보다 예민한 감수성과 정치적 올바름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음에도 그걸 표현하는 방식이 작품에 제대로 녹아들지 못하는 것 같다. 그저 작가들 자신의 진보적인(?) 생각을 펼쳐 놓기만 하니 무엇보다 재미가 없다.

이 단편집은 거의 모든 소설이 비슷비슷한 소재로 애매하게ㅡ여운이라고 주장하고 싶겠지만ㅡ마무리하는 소설집이었다. 특히나 사랑에 대한 어떤 생각을 담은 ‘첫사랑’은 내 나이엔 너무 낭만적이고 낯간지러운지라 아쉬웠으나 아직 읽어보지 않은 작가의 다른 작품인 구의 증명에 그런 면이 집대성되어 그렇게 젊은 층에 이례적인 인기를 누리는 것인지 궁금하긴 했다. 물론 읽을 생각은 없다.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도 있고, 미묘하고도 내밀한 어떤 것을 잡아채서 언어로 풀어내는 게 작가의 역할일 수도 있겠지만 영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래도 올해 이상문학상을 받은 작품은 궁금하니 그것까지는 읽어봐야지.

 

 

 

 

어떤 첫사랑은 쓰레기통에 처넣고 싶은 악몽이지만 어떤 첫사랑은 가장 이르게 빛나는 샛별처럼 그곳에서 인생보다 더 긴 시간 반짝인다. 가만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한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건. 그 이유를 이론적으로 풀어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설명 가능하다고 신기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어째서 그 자리에 그렇게 있는지 이론으로 아무리 설명해도 행성들 고유의 아름다움과 신비는 여전한 것처럼.

우현이 울상을 지으며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설레서가 아니다. 진심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런 표정이 나온다.(100p)

 

10대 사춘기 시절에 이런 문장을 읽었다면 심장이 쿵 내려앉았을까? 그럴 리가.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고 마음껏 왜곡한 점이 특히 좋다고, 왜곡하고 조각냈는데도 한눈에 자기란 걸 알아볼 수 있었다고 했다.

정성을 다했다는 게 느껴져. 애정 같은 거.

혜지가 그림을 돌돌 말면서 말했다.

난 이런 게 진심이라고 생각해. 좋아한다는 말이나 뭐 그런 것보다, 이런 게.(106p)

 

 

가족은 가장 가까운 사이 아닌가?

글쎄, 태어난 순간에는 그렇겠지. 근데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무중력 우주에서 약한 힘을 받은 것처럼. 태어나는 순간 그 힘을 받아서, 만나자마자 멀어지는 거야. 서로의 한쪽만을 보면서 서서히 멀어지는 거지.

······쓸쓸한 말이네.

그래도 난 너와 같이 살고 싶어.

멀어지더라도?

그래도 오늘은 가장 가까이 있으니까.(137p)

 

 

내가 먼저 소진을 알아봤다고 해서 우리 사이에 별다른 일이 생기진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좋아하는 계절이 생겼고, 자판기의 밀크커피가 특별해졌으며, 머지않아 의자도 하나 생길 터였다. 내가 먼저 소진을 부르지 않았다면 생겨나지 않았을 것들이었다. 열다섯 살 그 새벽부터 소진은 거기 있는 것만으로 내 방향을 틀었다. 가던 길을 멈추게 했고, 돌아서게 했고, 막다른 길인 걸 알면서도 그리로 발을 떼게 만들었다. 내겐 흔치 않은 일이었다. 연애할 때 많은 사랑의 말은 나를 지치게 했다. 사랑은 그것 그대로 있을 텐데 때로는 내가 그것을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난 아직도 그 방법을 모른다. 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164p)

 

 

돌아보니 그런 식으로 다가오고 떠난 사람만 다섯 명이다. 그들 모두 마지막 표정과 말투가 너무나 흡사했다. 무언가에 상당히 질린 표정들이었다.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저절로 그 표정이 지어졌다. 마침내 나도 내게 질려 버렸다. 살면서 무언가에 질린다는 느낌을 받기는 처음이었다. 그 처음이 나였다. 나는 금방 사랑하고 말 잘 듣다가 결국에는 질리는 인간이었다. 질린다는 느낌은 싫증이나 미움과는 확연히 달랐다. 최악이었다. 나에게 질려 버리자 나는 꼼짝할 수 없었다. 내 몸, 내 목소리, 나의 일, 나의 습관, 나의 생활, 그 모든 것에서 손을 떼고 싶었다. 제발 그만 찾아오라고 말하고 싶었다. 내게서 무관해지고 싶었다.(176-177p)

 

질리다라는 단어는 조금 더 생각해기로.

 

 

그는 내 말을 무척 잘 들어 주던 사람이었다. 처음엔 서로의 빈 부분을 채워 주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흐르자 서로의 어떤 부분을 마모시키는 것 같았다. 설렘과 호기심의 영토에 익숙함과 권태가 조금씩 스며들던 때였다. 그 사람이 많은 빚을 지게 됐다. 평생 갚아야 할 거라고 했다. 나는 그럴듯한 위로를 건네고 도망쳤다. 이성적, 객관적으로는 나를 나쁘다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주관적, 감정적으로 나는 나빴다. ‘너와 있으면 좋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라는 말로 시작되었던 관계가 ‘너와 있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 되는 게 싫어.’라는 말로 끝났다. 필사적으로 도망치고도 내 아픔을 그의 아픔보다 부풀리기 위해 글을 썼다. 글을 그런 것에 써먹었다. 그러니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것은 고민거리나 좌절할 일이 아니라 어쩌면 아주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C에게 말하고 싶었다. 공감이란 상대의 말에 어떻게 반응하고 대꾸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듣는 행위 자체라고. 고개를 끄덕이고 추임새를 넣는 것보다 중요한 건 그 자리에서 너의 말을 끊거나 부정하지 않고 듣고 있는 그 사람 자체라고. 거기 빤히 있는 것을 없다고 우기지 말고 원래 없는 것을 없다고 시비 걸지 말고, 더는 너를 견딜 수 없다고 말하라고. 그랬어야 했다. 네 곁에 있을 자신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어야 했다. 떠나고 싶지 않지만 떠날 수밖에 없다는 같잖은 포즈로 나를 꾸미는 대신, 은근슬쩍 책임을 떠넘기는 대신 가감 없이 말하고 보여 줘야 했다. 내가 솔직하지 않다는 것을 나만 아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도 알았고 모두가 알았다. 모두가 안다는 것을 나만 몰랐을 뿐이다.(288-289p)

 

 

 

 

ㅡ 최진영, <겨울방학>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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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3

 

취미는 사생활을 읽고 궁금해져서 찾아 읽은 단편집. 존재하는 갈등을 명백하게 드러내진않되 적당한 긴장감으로 유지하며 끌고 가는 게 멋지다. 3개의 단편 중 새끼돼지가 제일 좋았다. 장편에서도 드러낸바 있는 거짓말을 작품에 활용하는 방식을 여기서도 볼 수 있었다. 7월에 나온다는 신작을 기다린다.

 

 

 

 

ㅡ 장진영, <마음만 먹으면> 中, 자음과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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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3

 

작가의 다른 작품을 한두 권 정도 더 찾아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는 흥미로웠다. 근데 인버스는 소재가 좀 예상이 가능해보이기도 하고 다이브는 청소년 소설이라 크게 안 땡기네.

 

 

 

그래요, 백해나가 억지로 시킨 거였죠. 하지만 릴리의 활동은 원래 억지로 한 거였는데, 갑자기 세상이 바뀐 것처럼 놀라는 게 아주 웃기더라고요. 평소에는 아무 고민도 없이 날 좋아하던 사람들이, 언짢은 상황이 닥쳐오면 갑자기 걱정해줘요. 염려가 호의로만 이루어진 거 아니라는 증거죠.(112p)

 

이 부분만 50번쯤 읽어봤는데 도무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평소엔 호감의 대상이 무탈하고 별일이 없으므로 크게 고민하거나 걱정하지 않는 것이고, 언짢거나 불쾌한 상황에 처했을 때 걱정하는 게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건지?

문장과 문장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부분이 종종 보였고, 좀 더 부연해 줄 법함에도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있어서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기 힘든 부분이 보였다. 단순히 내 문해 능력이 부족한 탓일 수도 있고.

 

 

열렬한 팬들은 언제든지 슈퍼스타를 내팽개치고 깔아뭉갤 준비가 되어 있고, 슈퍼스타도 그 사실을 알고, 알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려 하고, 남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기를 바라지만 막상 그런 상대를 만나면 지루해하거나 저의를 의심하고, 남에게 휘둘리면서도 은근한 기쁨을 느끼고, 선망과 질투가 맞닿은 것처럼 기쁨과 분노도 어딘가에서 통하고, 그렇게 동시에 이루어질 수 없으면서도 서로 이어진 꿈들 사이를 오락가락하다 보면 사람은 긴장과 공포로 충만해지는데, 감정은 사실 몸의 반응과 불가분의 관계다. 인간의 뇌는 고통과 기쁨을 같은 방식으로 처리한다. 인간의 뇌는 체한 것과 스트레스로 인해 어지럽고 메스꺼워지는 감각을 구분하지 못한다. 기쁨으로도 분노로도 공포로도 긴장으로도 심장은 뛴다. 반응이 냉담할수록 마음을 불태우고 가망 없는 도전에 평생을 내거는 사람들. 거부와 몰락의 스릴에 중독되는 사람들. 상대를 일부러 실망시킨 다음 가혹한 질책을 기대하고 또 두려워하는 사람들. 그 사이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환희를 호수 같은 평안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 설계사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보상의 우열이 명확하지 않고 감각의 경로가 제대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거죠. 고통과 기쁨이 맞닿은 상태가 그 자체로 보상이 되도록 만들어진 셈이죠. 인간의 조건 자체를 고칠 수는 없으니 해결할 방법도 없겠죠.(134-135p)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얻어낼 수 있는 호감이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상담사로서 성공을 거둔 비결이죠.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약한 면모를 드러내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친하고 가까운 사이든, 적대적인 사이든 간에 거부감이 있어요. 그러면서도 솔직해지려 하고 위로를 원합니다···. 이모지 박사가 그 역할을 해줬죠.”(139p)

 

 

“한 번 더 던져봐요. 나를 완전히 부숴봐요. 이 세상에 남겨둔 채로 고통을 줘봐요. 아니면 원하는 대로 개조해봐요. 설정값을 바꾸기만 하면 나는 누구든지 미워하고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결국 남는 건 당신뿐이에요. 사실은 처음부터 당신밖에 없었죠. 삶을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죽음은 두려워하게끔 자라나서, 어떻게든 외로움 사이에 숨을 곳을 마련하려는 인간 말이에요. 고칠 수 없는 것들은 정말 불쌍하고 안타깝군요.”(207-208p)

 

 

우울증 환자의 극복기는 응원받을지라도 나는 그런 걸 기대할 수가 없다. 공감을 사기에는 너무 특이한 경우이기 때문일 것이다. 동일한 약을 먹는 환자 중에서도 나와 같은 유형은 아주 적다(아마 병명을 찾지도 못하고 소년원에 간 케이스가 더 많을 것 같다). 도르시아의 스테이크에도 대규모 콘서트의 분위기에도 설계사 면허 취득에도 들뜨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아무 기대도 가망도 없는 기분이 무엇인지 다들 모른다. 그 사람들은 불화에 이끌리는 기분도 모른다. 모르니까 내가 세상을 느끼고 겪는 방식에 대해서도 고민해주지 않는다.

“사회가 저한테 살인 면허를 발급해줘야 한다는 소리는 아니에요. 오히려 저는 운전면허조차 없으니까요. 참고 있죠. 이해받거나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아요. 그냥··· 저는 어쩔 수 없이 역겨운 사람이고, 그래도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가요. 그렇게밖에는 말하지 못하겠네요.”(215-216p)

 

 

 

ㅡ 단요, <개의 설계사> 中, 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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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2

 

작년과 올해에 등단한 작가의 작품이 실려있었다. 공현진과 김기태는 추후에 단편집이 나오면 읽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작가에게 칭찬은 아닌 듯 하나 김기태 작가는 작품보다 인터뷰 내용이 더 흥미로웠다.

 

 

힘을 빼야 하지만····· 그렇다고 힘을 다 빼면 안 되고·····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희주는 잘못된 답이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되는 느낌을 받았다. 힘을 빼는 거면 빼는 거고, 주는 거면 주는 거지. 그게 바로 균형이라고 강사는 말했다. 남들은 어떻게 이런 균형을 어렵지 않게 잡을까. 희주는 너무 몸에 힘을 주지 않아서 혼이 났다가, 곧바로 너무 많은 힘을 주어서 물속으로 가라 앉았다.(23p)

 

 

강사는 흥분을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천천히 걸어가는 희주와 주호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그는 화를 쏟아내더니, 욕설을 내뱉었다.

그때 주호가 뒤돌아서 강사에게 다가갔다. 아주 느린 속도로. 물이 갈라졌다.

“뭐가요. 씨발. 왜 어쩌라고?”

강사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주호에게 욕을 하며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보며 희주도 긴장했다. 주호는 강사의 빨간 얼굴을 보며 물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진심으로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당황한 강사는 말을 잇지 못했다. 희주도 당황했다. 대체 어떤 사고 과정을 거쳐야 저런 말이 나올까. 대화 맥락에 대한 이해 자체가 없는 것일까. 지금까지 주호와 나눴던 대화가 아닌 대화들이 떠올랐다.

침묵.(35-36p)

 

 

리아는 마음이 넉넉하고 편견이 없는 친구들을 사귈 수 있을 거라며 독립서점에서 운영하는 모임에 맹희를 데려갔다. 부모의 집에 살아도 자기 방 인테리어는 자기 취향을 고수한다는 스물두 살짜리 애가 말했다.

“나이가 들어도 나다움을 지켜야죠. 삶이란 어차피 흘러가는 거잖아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고 틀린 말도 아니지만 걔랑 친구가 될 순 없었다. 그 취향. 너다움. 도무지 못생긴 빨래 건조대를 방 바깥에 둘 수 있어서 유지되는 거 아닐까. 이런, 내가 마음이 좁고 편견이 있네. 온화한 피아노곡을 틀어놓고 코튼향 인세스를 피운다고 6인용 테이블에 둘러앉은 낯선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 수 있는 건 아니었다.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적당히 마모시킨 자기 고백을 주고받다 집에 들어가 혼자가 되면 맹희는 양배추즙을 마시고 샤워를 하고 맥주 캔을 땄다. ‘늦은 밤 혼자·····’ 어쩌구로 제목을 붙인 플레이 리스트를 유튜브에서 골라 틀고 몇 곡을 스킵하다가 꺼버렸다. 요새 노래들은 매가리가 없어. 아니, 매가리가 없는 건 아닌가.

“너 조맹희. 네가 원하는 게 뭐니.”

(...)

“아 근데. 나는 사랑이 좀 하고 싶다.”(67-69p)

 

 

문화 자본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표현 양식의 세련됨이나 고유함’으로 ‘감정의 진실함’을 가늠하는 경향이 있는 듯해요.(감정사회학자인 에바 일루즈의 저서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이학사, 2014)에서 이런 맥락의 연구를 참고할 수 있었습니다.) <소설 보다>를 찾아 읽는 분들의 취향은 어떨까요. 지중해 양식을 모방한 펜션에서 하트 모양으로 초를 늘어놓고 「다행이다」를 부르는 프러포즈 어떤가요? 제 취향은 아니에요. 5성급 호텔 방에 샤넬과 카르티에를 포토제닉하게 전시하는 프러포즈는요? 그럴 돈도 없지만 이상적이지도 않습니다. 감정 표현(의 양식)이 세련되면서 고유해야 하는데, 또 그런 열망이 도드라지면 안 되고, 약간은 소박한····· ‘꾸안꾸 스타일’ 같은 걸 원하게 됩니다. 어렵습니다. 복잡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마음이 삼각형인지 반원형인지 따져서 딱 들어맞는 섬세하고 유니크한 양식을 고릅니다. 하지만 저는 통속적인 유행가에 기대고 속는 사람을 응원하고 싶었습니다. 양식미를 따질 시간에 그냥 사랑을 해버리는 사람, 특별한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특별함을 좇는 사람이요. 이국의 골목이나 비 오는 도서관에서 만나야만 멋진 건 아닐거예요. 맞선에서, <솔로농장>에서, 인터넷 카페 ‘중랑구 3040 늑대와 여우 모여라’에서 만날 수도 있습니다.(108-109p)

 

 

굳이 나의 제한적인 인식을 드러내고 자폭해야 할까. 소설을 탈고해서 발표할 때까지, 인터뷰지를 쓰는 지금도 걱정이 큽니다. 하지만 잘 알고 살아본 것만, 당사자성이 있는 것만 쓰는 게 답일까요. 반성의 결과가 마비라면 개인만 남을지도요. 오해와 착각을 감수하고서라도 다른 사람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말을 걸어보는 건 유의미하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자기 자리에서 자기 풀만 뜯으면 평화로울 수 있지만 저는 그게 목장주에게만 좋은 일이라는 의심이 들거든요.(111p)

 

 

살면서 모든 언행마다 윤리적인 무게를 고려해 신중하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뒷조사를 하거나 댓글을 남기는 건 꽤 수고스러운 일 같거든요. 굳이 출연자의 개인 계정을 찾아내 직접 메시지를 보내서 비난하기도 하고요. 사랑도 아니고 혐오를 동력으로 그런 일을 집요하게 하는 게 이해가 안 되기도 합니다. 말초적이고 휘발적인 재미를 추구한다면 그렇게까지 정성스러울 수 없을 거예요. 진심으로 믿고 주장하고 싶은 세계관이 있어 보여요. 비슷한 세계관을 가진 사람끼리 모여 서로 증인이 되면서 믿음이 강화되겠지요. ‘바깥’의 인간들은 호시탐탐 자기들을 속이고 권리를 빼앗으려고 음모를 꾸미는 무엇이 되고요. 그런 편견 어린 댓글이 2백 개 있으면 지나가던 누군가가 “제발 나가서 사람들 좀 만나라”라고 남기기도 해요. 시원한 댓글이지요. 하지만 어디로 나가야 할까요. 삼대가 앉는 식탁, 마을 슈퍼마켓 앞 평상, 하다못해 동네 선배들이랑 인사하는 오락실····· 이제 그런 건 없어요. 많은 분들이 지적하지만, 우리는 낯선 이들과 접촉하며 자기 세계관을 교정하고 보편적인 공감대를 구하는 광장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기존의 광장은 누군가를 배제함으로써 기능하기도 했으니 ‘잃어버렸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한 번도 온전히 가진 적 없고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하겠지만, 광장을 지향하는 태도라도 잃지 않으려고 스스로 경계하고 있습니다.(215-216p)

 

 

 

ㅡ 공현진, 김기태, 하가람, <소설 보다: 여름 2023> 中,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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