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6/16

 

 

작가가 자신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인물의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이 허용되는가? 아니면 오직 작가 자신이 아는 것에 관해서만 글을 써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이 사적인 글쓰기의 경제성을 높이고 있음을 간파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리고 거기에는 작품의 출처를 향한 불필요한 관심 또한 반드시 포함된다. 작가는 자신에 관한 글을 씀으로써 다른 사람의 진실을 자신의 것인양 썼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할 권리에 대해서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자전적 소설'이라는 꼬리표 혹은 온라인 기사에 붙는 '사적인 에세이'라는 수식어는 독자와 작가 모두에게 안전망을 제공하며, 작가가 타인의 문화나 정체성에 대해 부적절한 발언을 하는 실수는 없을 거라고 보장한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다양성이 부족한 출판과 예술 분야에서 이러한 질문은 특히 중요하다. 백인 작가가 유색 인종의 관점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역사적으로 억압당한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출판계의 현재 여건에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목소리의 다양성 없이 이야기 자체의 다양성만을 추구하는 것은 불평등을 고착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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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모르는 작가가 고정관념을 고착하거나 귀중한 지면을 점령하지 않도록 아는 것만 써야 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인다고 하자. 두 번째 문제는 그것이 다른 작가들의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특정 정체성을 가진 이들에 관한 글이 그 정체성의 영향을 직접 체험한 이들에게만 허락된다면, 오히려 그들이 '정체성 글쓰기'에 갇힐 위험이 있다.(77-79p)

 

 

 

전 세계 80여 개국에 3만 2000개의 매장을 보유하고 있는 커피숍 체인 스타벅스는 '진정성 없는' 브랜드의 교과서 같은 예시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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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스타벅스가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스타벅스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한때 스타벅스는 진정성 있는 분위기를 가장 중시하고 제품의 특이성보다는 본질을 우선하는 브랜드였다.(101-102p)

 

 

힙스터리즘은 자신들이 표방하는 '진정성'이 '진정성없음'으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쇠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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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서 진정성을 연기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 진정성은 그 의미를 잃는다. 자기 인식이 없어도 진정성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저 주류의 취향에 순응하며 살고 자기만의 길을 개척하지 않는다면, 진정성 있는 자아로 살아가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더 나아가서, 대중적 흐름에 의존하건 거부하건 간에 당신의 진정성이 오직 그것만을 위해 구축된다면? 그것을 진정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당신은 여전히 당신 자신인가?(106p)

 

 

ㅡ 에밀리 부틀, <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 中,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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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16

 

 

시간이 흐른 뒤에는 '사람은 죽었다'라는 문장의 사이를 길게 채우는 것이 삶이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은 죽어 있었다'로 끝나야 하지 않나. 내가 죽더라도 나는 죽었다에서 끝나지 않고 응급차에 실리고 관에 들어가고 누군가 장례식을 치러줄 테니까. 그런 와중에도 계속해서 나는 죽어 있을 테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서현은 '사람은 있었다'로 문장을 수정했다.(142p)

 

 

ㅡ 강보라 외, <소설 보다 봄 2025> 中,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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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16

 

 

물론 그러한 결론은 분명한 거짓이다. 왜냐하면 야심은 타고난 재능 같은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비-재생산의 제 1원인으로 고려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야심은 다른 모든 감정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행위 역량이 취할 수 있는 다양한 양태들 가운데 하나다. 감정은 그것을 규정하는 원인들을 통해 설명되어야 한다. 만약 야심이 명예의 욕망 혹은 결과를 향해 뻗어 나가는 에너지에 기초한다면 과연 무엇이 행위 역량이 그러한 형태를 취하도록 규정했는지 알아내야 한다. 야심이 관성을 이겨 내고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이 목표를 향해 뻗어 나가게 하는 에너지를 만들어 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요컨대 야심은 구성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야심만으로는 비-재생산에 관한 충분한 설명이 이루어질 수 없다.

실제로 그것이 사회적인 것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혹은 지적인 것이든 예술적인 것이든 모든 야심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야심이다. 야심은 달성하고 싶은 모델, 이상, 목표에 대한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비-재생산의 경우에서 야심은 출신 환경에서의 지배적 모델과는 다른 모델에 대한 표상과 그 모델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망의 존재를 함축한다. 다시 말해서 야심이 최초의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이유는 이 감정이 어떤 모델에 대한 관념과 그 모델처럼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이 합쳐진 결과, 즉 인식적 규정성과 감정적 규정성 사이의 혼란스러운 합성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재생산의 뿌리가 야심이라고 믿는다면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 야심이 무엇인가에 대한 야심이라면, 이러한 야심을 가능하게 해 주는 그 무엇인가가 먼저 있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야심가들을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셈이다. 무로부터 일어나는 기적적인 창조처럼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생겨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한 사람에 관해 "그는 스스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해냈다"라고 말하는 것은 실상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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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야심은 표면상의 원인에 불과하며 비-재생산의 궁극적 이유는 아니다.(63-65p)

 

 

스탕달의 소설은 치밀하게 계산된 모방의 한 가지 사례만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사례는, 모든 비-재생산이 언제나 주체의 자유로운 결정으로부터 유래하며 주의주의적 형식에 따른다고 믿지 않는 한 일반화되기 어렵다. 오히려 사실은 그 반대이다. 우리의 행동 양식을 통제하는 모방은 대개의 경우 부지불식간에 실행된다. 이때 모방은 의식적인 결단에 따른다기보다 오히려 자동기계 장치가 움직이는 것과 더 가까운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

예를 들자면 우리는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이 울거나 웃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울거나 웃을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행동 일반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모든 것을 자연발생적이고 전적으로 무반성적인 방식으로 흉내 낸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스피노자적 논리에 따른다면 이러한 현상은 아이들의 어린 신체가 아직 평형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아이들의 신체는 매우 큰 가소성을 지니고 있으며 아직 고정된 습관이 확고하게 자리 잡지 않은 상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의 신체는 자신의 고유한 기질에 구애받지 않고 남들이 하는 다양한 동작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웃거나 울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경우조차 아이들은 별생각 없이 심지어는 자기 행동의 내적 동기조차 알지 못한 채로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흉내 낸다. 이러한 유아의 모방은 의지 혹은 정신적 과정의 결과라고 볼 수 없으며, 신체와 신체적 유사성의 차원에서 각인된 이미지들과 반사적 행동에 기초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유아의 모방은 인간 신체가 외부 물체에 의해 한차례 변용되고 난 뒤에 신체가 그렇게 변용된 흔적 혹은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다가 과거와 유사한 상황에서 그것들을 재생산하도록 배치되기 때문에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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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모방이 유년기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신체적 흔적의 결과라면 이러한 모방은 반성 행위보다는 반사 행위에 해당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계급 혹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주변의 감정적 반응과 행동 양식을 모방하는 것은 그 본질상 의식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대개의 경우 모방은 명시적인 선택이나 의식적인 학습의 결과라기보다는 거울처럼 주변을 반영하는 신체 도식에서 나온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물론 모방이 의식적인지 비의식적인지가 주어진 문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두 경우 모두에서 문제는 어떻게 한 개인이 출신 환경의 모델이 아닌 다른 모델을 모방할 수 있게 되는지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 사회의 일반 사회 규칙은 개개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지배적인 모델을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해서 그들이 직접 볼 수도 없고 그들은 지속적으로 자극하지도 않는 어떤 다른 사례를 모방할 수 있게 되는가?(67-70p)

 

 

이처럼 학업 모델은 적절한 교육적·경제적 장치가 동반되었을 경우에만 비-재생산을 산출하는 모델로서 작동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도적 지원이 동반된 학업 모델이 비-재생산의 주춧돌로서 기능하도록 해 주는 체계적 방안이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분명 그러한 제도는 뛰어난 학생들에게는 상당히 유용할 수 있다. 하지만 애초부터 탁월성이란 그 정의상 언제나 예외적인 것을 의미한다.(96-97p)

 

 

비-재생산은 이 원인과 저 원인이 교착되고 뒤엉킨 역사들을 사유하기를 권한다. 비-재생산은 일반 원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 단 하나의 가장 결정적인 제 1원인으로부터 나온 산물이 아니라 복수의 원인들이 뒤엉킨 독특한 배치 속에서 하나의 궤적이 산출된 결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 어떠한 원인이든지 단독으로는 결코 결정적 원인이 될 수 없다. 야심도 대안적인 가족적 혹은 학업적 모델의 현전도, 재정적 지원이나 호혜적인 사회경제적 조치의 존재도 단독으로는 비-재생산을 설명해 줄 수 없다. 분명 수치심, 정의감 혹은 인정 욕구 같은 특권적 감정은 비-재생산을 만들어 내는 원초적 원인으로서 제시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정은 언제나 양가적이다. 감정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강렬함으로 인해 그리고 감정과 결합하거나 길항하는 힘들의 작용으로 인해 똑같은 감정일지라도 상반된 방향으로 사람들을 밀어 넣을 수 있다. 디디에 에리봉 역시 수치심의 근본적 이중성에 주목한 바 있는데 이 감정은 때로는 침묵 속에 갇혀 입을 다물고 있도록 만들거나 기존 질서에 맞선 반항보다는 질서에 순응하게 만드는 공포를 낳기도 하지만 때로는 과감함을 낳을 수도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과 규정의 계열 가운데 그것이 어떤 것이든 단 한 가지만 떼어 놓고 본다면 그것은 엄밀히 말해 계급횡단 출현의 필요조건을 죌 수 있으나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비-재생산은 결합적 사고방식과 협력 혹은 연결에 대한 사유를 불러오며 인과의 그물 혹은 인과의 다발에 대한 분석을 요구한다.(142-143p)

 

 

그런데 계급횡단자들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인간 존재는 마치 신분증과 같은 하나의 정체성을 소유하며 그것을 통해 서로 간의 식별이 가능하고 그에 맞는 지위를 부여받게 된다는 명제가 확실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재생산에서 벗어난 개인들은 단순히 출신 환경 속에 맞는 정체성을 부여할 수 없으며 같은 출신 환경 속 다른 이들로부터 돌출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계급횡단자들은 필연적으로 유동적인 정체성 혹은 불안정한 정체성을 지닌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계급횡단자들의 존재를 지배하는 것은 바로 변화와 변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급횡단자들의 특징은 오히려 탈정체화와 출신 가족 및 계급으로부터 이탈하게 되는 과정에 있다.

이러한 탈정체화는 계급횡단자들이 새로운 정체성을 획득하는 동안의 일시적 국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도착 환경에서조차 '끝내' 동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출신 환경의 흔적을 어김없이 지니고 있으며, 지나간 역사의 흔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급횡단자들이 새롭게 정착한 환경의 사람들과 같은 조건을 공유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그들과 똑같은 공통 자산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점에서 계급횡단자들은 개인들을 제한된 사회적 범주로 분류하는 통계적 원리 및 고정된 정체성의 지위에 관한 비판을 불러온다. 계급횡단자들에게는 일단 지니고만 있다면 이 계급 혹은 저 계급에 속한다는 지표로서 이용될 수 있는 성질이나 특성을 할당하기가 무척 까다롭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윤리적·정치적 영역에서 사용되는 인정 개념 역시 그것이 앞으로 성취해야 하고 확립해야 할 무엇인가로서 설정된 정체성을 상정할 때는 문제적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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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 속에서 그러한 정체성 정치에 기초한 사회운동은 개인을 고정된 추상적 규정성, 예컨대 여성, 동성애자, 노동자, 부르주아지, 기업가 등등의 범주 속에 가두는 위험을 치르게 된다. 물론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정체성 개념의 깃발 아래 결집하는 것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여러 개인들을 묶어 주고 그들의 조건을 정의해 줄 수 있는 공통의 특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 개인들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효과적으로 조직하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인정 개념이라는 문제틀은 그것이 개인들을 하나의 고정된 정체성에 고착시키고 개인들을 단지 하나의 유형이나 그들의 독특한 본질을 표현해 주지 않는 보편적인 하나의 공통 통념으로 환원시키게 될 때 그 불충분성을 드러낸다.(160-161p)

 

 

그러므로 결국 '자아'는 신용하기 어려운 것이다. 모든 것이 차용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파스칼은 사람들이 이러한 자아의 덧없음을 잊기 위해 잘못된 조롱에 몰두한다는 사실을 꼬집는다. "그러므로 직위나 직무에 대해서 명예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비웃지 마시라! 사실 우리는 빌려온 특성을 제외한다면 그 누구도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허영심 많은 사람들은 존재와 소유 그리고 내면과 외면을 혼동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은 사람들이 자신을 떠받들어 주기를 바라지만 진정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보다는 그저 우월한 지위와 직업적 명성에 대한 찬사를 받기 원할 뿐이라고 비웃는다. 그런데 사실 이 허영심 많은 사람들이 보여 주는 태도야말로 인간적 조건의 진실을 드러내 주고 있다. 우리가 지닌 모든 것은 사실 잠시 빌려 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따라서 내실은 갖추지 못한 채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는 조롱은 허영심 많은 사람이 아니라 그들을 무턱대고 비웃는 맹목성을 향해야 마땅하다. 가령 우리는 부르주아지인 척 행세하는 벼락부자들이 실제 교양은 없으면서 부자연스럽게 부르주아지를 따라 하는 우스꽝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비웃는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행동과 모든 정체성은 금박을 입힌 도금품과 같은 것이고 금박은 언젠가 닳아 소모되기 마련이다. 이 점에서 계급횡단자가 어딘가 동떨어져 있는 것 같은 어색한 분위기를 풍기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닌데 그 역시 다른 모두와 마찬가지로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닌 빌려 온 특성들을 떠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신이 걸치고 있는 옷을 유독 불편하게 여기는데,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자신이 입고 있는 복장이 관습에 따라 부과된 것이라는 점을 완전히 잊고 자신이 처음부터 그러한 옷을 입고 태어났다는 가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아 개념에 대한 파스칼적인 탈신비화는 내재적 특성을 신분이나 사회적 직분과 같은 성격의 외재적 특성으로 동일시함으로써 개인적 자아를 해체한다.

(...)

모든 정체성은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언제나 일종의 사칭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정당하게 소유하고 있지 않은 빌려 온 것에 불과한 특성들로 우리 자신을 꾸미고 그 특성들이 마치 원래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착복하기 때문이다.(170-171p)

 

 

적응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이전의 아비투스를 해체하는 법을 익히고 또한 낯선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기존의 관습들을 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과거를 내려놓고 그동안 얻은 것들을 처분하는 것, 요컨대 자신이 물려받은 유산들을 청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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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적응은 자신의 허물로부터 벗어나는 일종의 탈피 과정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변신은 결코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급횡단자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아가게 된다. 새로운 습속에 곧바로 부합하게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계급횡단자들은 적응한 존재인 동시에 도태된 존재이다. 그들은 아무것이나 그 즉시 채워 넣을 수 있는 빈 서판 같은 존재가 아니며 그들이 데카르트적인 극단적 회의를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행동 양식을 일순간에 중지시킨다는 것도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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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가정에서의] 부모 자식 사이 예절은 여전히 내게 하나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교육을 잘 받고 자란 사람들이 소소한 안부 인사 속에서마저 보여 주는 극도의 친절함을 '이해'하는 데까지 내겐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나는 부끄러웠다. 내가 그러한 존경을 받을 자격이 없었으며, 그들에게 나의 처지에 대해 매우 특별한 공감을 받았다고 상상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그들이 매우 열렬한 관심을 보이는 얼굴로 던진 질문들과 그 미소들이 식사할 때 입을 다물고 먹거나 코를 풀 때는 안 보이는 곳에서 푸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기호를 해독하는 작업은 매우 까다롭다. 왜냐하면 중간중간 출신 환경의 코드가 끼어들고 가로막아 해독 작업에 훼방을 놓기 때문이다.(183-184p)

 

 

쥘리앵은 푸른 옷을 입을 때도 검고, 검은 옷을 입을 때도 푸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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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그 형태와 모습 혹은 그것을 물들인 염료가 무엇이든지 간에 계급횡단자의 기질은 잡종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의 짜임새는 이종교배를 통해 나왔다. 계급횡단자는 태어난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숱한 전정 작업과 수선 작업을 통해 구성된다. 그 작업이 잘 이루어졌다면 겉으로는 그에게서 푸른색만이 보이겠지만 말이다. 계급횡단자의 구성은 한 편의 역사와 변천의 과정 속에서 구성되며 이 구성 과정은 단순한 누적이나 하나의 층위의 다른 층위로의 대체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계급횡단자의 구성을 출신 환경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면서 점차 도착 환경에 가까워지는 식의 연속적 시간성의 법칙에 따라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출신 환경과의 거리 두기, 새로운 삶의 방식에의 적응, 도착 환경 속으로의 동화 등의 과정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단계별로 구별하는 일은 당연히 가능하다. 그렇지만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이 결코 선형적인 진보의 궤적을 그린다고 볼 수는 없다. 과거는 현재 속으로 끊임없이 되돌아오며 그때마다 현재의 삶에 변형을 일으키는 밀물과 썰물을 동반한다. 출신 환경의 경험이 정확히 유년 시절에 국한되고, 새로운 세계로의 변화와 입문의 과정은 오직 청소년기에만 일어나는 것이며, 새로운 세계로의 완벽한 통합은 은퇴 후 마침내 되돌아갈 자리를 찾게 되는 성인기에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각각의 상이한 국면들은 결코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각각의 단계들은 서로 중첩되어 있으며 또한 각각의 단계는 긴밀하게 얽혀 있는 상호 관련 속에서 전개된다.(200-201p)

 

 

그러나 계급횡단자가 새로운 세계에 안착하여 격차가 점차 줄어들고 가장 큰 결여가 채워지더라도 거리의 에토스는 여전히 그의 행동 양식을 지속적으로 지배한다. 그는 새로운 아비투스를 습득했지만 그 아비투스는 여전히 그에게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

말하자면 계급횡단자는 언제나 경계 주변에서만 맴돌고 있다. 왜냐하면 사회적 코드에 알맞게 행동하고 상황에 어긋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그에게는 잠시 물러나 생각해 보는 시간이 필요하고, 따라서 그의 생각과 실천 사이에는 항상 거리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급횡단자는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운 채 경계 태세 속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는 상황과 자연스럽게 동화될 수도, 일치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 상황이 바로 자신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믿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관찰자로서의 이 거리는 계급횡단자를 행위자보다는 구경꾼으로 만들곤 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고 난 뒤에 행동한다. 계급횡단자의 행동은 상황에 대한 즉각적인 반사 행위라기보다는 긴 반성 끝에 알맞은 행동 양식을 채택한 결과이며, 그는 한 박자 늦게 행동하고 있는 자신을 지켜보게 된다.

(...)

계급횡단자의 이러한 망설임과 불일치는 역설적이게도 그를 경계에 더욱 강하게 붙들어 놓음으로써 악순환 속으로 밀어 넣는다.(208-209p)

 

 

심지어 계급횡단자가 상류 사회에 기꺼이 받아들여지는 때조차 그의 예외적인 이력에 쏟아지는 경탄과 그의 능력과 도전 정신에 대한 찬양은 오히려 계급횡단자로 하여금 거리를 느끼게 만든다. 그 경탄과 찬양이 계급횡단자로 하여금 '오직 태어나는 고생만 했던' 사람들과 힘겨운 투쟁으로 그 자리를 쟁취해야만 했던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는 후발 주자로서 선두를 따라잡아 같은 대열에 올라왔다는 것을 인정받지만 그저 한 명의 아웃사이더로서 인정받을 뿐이다. 그의 통합 가능성 여부는 전적으로 그에게 호의를 베풀지 말지를 결정하는 서클의 후한 인심에 달려 있다. 이때 계급횡단자란 해당 모임이 그릇된 계급의식을 타파하고 관용과 사회적 다양성에 열린 정신을 가질 수 있는 기회에 불과하다. 계급횡단자는 기껏해야 한 명의 생존자 혹은 이례적인 현상으로 여겨질 뿐이며 심지어는 다른 화제로 넘어가기 전에 딱 질리지 않을 정도로만 활용될 뿐인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던져 주는 비범한 사람 혹은 이국적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다.

(...)

요컨대 그에게 주어진 안락의자 따위는 없다. 그에게 허락된 것은 단지 간이 의자뿐이다.

하지만 설령 계급횡단자가 자신의 뿌리를 되찾고자 시도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다시 자신의 출신 환경에 속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더 이상 예전과 동일한 존재가 아니며 그의 기질은 변했기 때문이다. 멀어짐에서 생겨난 출발 지점과의 거리는 그 거리를 다시 거슬러 가 보는 귀환 과정 속에서 오히려 더욱 고착된다. 그의 귀환은 눈물겨운 재회와는 거리가 멀다. 예전 세계와의 만남은 대개 파투 난 만남과 같다. 이제 만남은 단지 간극이 얼만큼 벌어졌는지 측정하게 되는 기회에 불과하다.

(...)

역설적이게도 다가가는 일이 멀어짐의 거리를 정확히 측정하는 일이 된다. 지리적 거리가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역사적 거리는 결코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 지리적 거리는 되돌아갈 수 있는 것이지만 역사적 거리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계급횡단자들은 더 이상 한때 친숙했던 세계에서도 온전히 발붙일 수 없다. 그곳에서조차 그는 어디에선가 옮겨 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계급횡단자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는 여전히 떠난 자와 머무른 자라는 차이가 남아 있다. 그렇게 계급횡단자는 모국으로 돌아온 이민자의 운명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긴 체류를 마치고 돌아온 이민자는 자신의 나라에서도 외국인이나 다름없는 것이다.(214-217p)

 

 

계급횡단자는 역설적이게도 상당한 겸손과 극도의 오만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계급횡단자는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자리를 차지했으나 타고난 특권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에 부적격함의 느낌과 진정한 정당성을 소유했다는 확신을 동시에 겪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계급횡단자는 자신이 그저 상속자에 불과한 사람들보다 위에 있는 동시에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 결과 그는 스스로를 가장자리로 내몰리게 한느 계속 견지하기 어려운 태도를 지닌 채 살아간다.

그러나 경계를 넘나듦으로써 계급횡단자는 규칙을 준수하는 동시에 위반하려는 모순된 욕망에서 유래하는 내부와 외부의 변증법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계급횡단자는 그렇게 반항적인 순응주의자라는 형용 모순적 형태를 체화한다. 계급횡단자는 상류 사회에 받아들여지고 그 속에서 인정받기를 원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속에 완전히 통합되는 것은 그에게 견디기 어려운 일이 된다.(227-228p)

 

 

어머니가 세상의 시선에서는 '가사도우미'로 인식되며 고용인 신분에 속한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된 순간 자크에게 갑자기 어머니가 보잘것없는 존재로 보이기 시작했고, 자크는 자신의 어머니가 가사도우미라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꼈다. 하지만 이 나쁜 감정은 이내 그를 향해 다시 돌아왔다. 사랑하는 자신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의 위치에 대한 사회적 판단을 단지 서류상에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받아들여 버린 스스로에 대해 경멸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즉 자크는 자신의 수치심에 대한 수치심을 느끼게 되었고 그의 고통은 자신을 향한 분노로 더욱 배가되었다. 만약 수치심이 멀어짐의 증거라고 한다면 수치심에 대한 수치심은 가까움을 드러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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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에 대한 수치심, 이 감정의 힘은 마치 한번 중심을 잃게 되면 아무리 평형을 되찾으려 해도 넘어지게 되는 것처럼 자신으로부터 타인에게로 기울었다가 이윽고 타인으로부터 자신에게로 다시 한번 되돌아오면서 최초의 수치심을 배가시킨다. 자크는 수치심가 수치심을 느꼇다는 수치심을 동시에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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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수치심은 자가 증식의 폐쇄 회로 속에서 계속 재생산된다. 왜냐하면 수치심을 느꼈다는 죄책감을 비롯한 모든 것이 수치심을 떠올리게 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수치심은 끝이 없어 보이는 마음의 동요가 시작되도록 만든다. 자크는 수치심으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는 수치심을 자기 자신 안에서 계속해서 다시 마주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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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수치심은 생각, 행동 또는 자신이 보여지는 방식이 나쁜 것으로 지적ㅡ 그 지적이 옳건 틀렸건 간에ㅡ받는 데서 생겨나는 모욕감이다. 수치심의 원천은 다양할 수 있겠지만 이 감정은 언제나 평가하고 판단하는 자의 시선ㅡ이 시선이 외부의 것이든 혹은 내면화된 것이든ㅡ에 대한 표상을 함축하고 있다.

사실 수치심이 반드시 타인이 실제로 제기한 도덕적 비난에 관한 내적 반향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치심은 자신과 대립하는 외부 시선을 상상하는 것에서 가장 빈번하게 생겨난다. 따라서 주체는 타인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바라보게 되는데, 그로 인해 설령 쥐구멍으로 달아나 숨고 싶을 때조차 그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주체 자신이 판단하는 자와 판단되는 자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법이다. 이것이 스피노자가 수치심을 우리에 대한 외부의 비난의 결과로 국한시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비난한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우리의 어떤 행동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으로 정의하는 까닭이다. 요컨대 스피노자의 정의에 따르면 수치심은 어떠한 사실적 기반도 가지지 않은 순전히 상상적인 것일 수도 있는데 다만 이러한 상상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주입되어 몸에 새겨진 도덕적 판단과 관련한 이미지와 그 흔적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미지와 흔적은 우리 안에서 계속해서 일련의 결과들을 부산스럽게 산출하며 외부의 비난이 없는 경우조차 끊임없이 재활성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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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합리적 근거로도 단지 그것만으로는 감정을 억누르는 데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감정은 신체와 정신에 새겨진 흔적들에 기초한 신체적·정신적 변화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스피노자는 실제로 좋거나 혹은 나쁜 것에 대한 참된 인식도 단순히 참으라는 이유로 감정을 제거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만약 참된 인식이 다른 감정을 제거할 수 있는 효력을 가진다면 그것은 그 인식 자체가 하나의 감정인 경우일 때뿐이다. 간명한 논증을 통해 누군가를 무가치한 인간이 아니라고 변호해 주는 것은 헛수고에 불과하다. 우리는 논증만으로는 감동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감정이 그런 것처럼 수치심 역시 그것보다 더 강력한 다른 상반된 감정을 통해서가 아니라면 억제될 수도 파괴될 수도 없다.

사회적 수치심의 경우에도 이와 동일한 도식이 나타난다.(233-237p)

 

 

그렇다면 과연 미슐레를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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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여러 흠결에도 불구하고 미슐레의 행보는 새로운 기질을 직조하기 위해서는 신화를 만들어 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미슐레는 민중 그리고 신념과 열정으로 사회를 변혁하는 전진하는 천재에 대한 서정적 형상을 그려 내고 또 아래 세계 사람들이 자긍심을 회복하고 살아가고 싸울 수 있는 데 필요한 힘을 깨워 내도록 역량과 위대함을 그들에게 부여함으로써 그들이 활력을 되찾게 해 준다. 정치적 변화는 단순히 정치 현상을 합리적으로 분석하는 것으로는 생겨나지 않는다. 변화는 스스로의 힘과 가치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주는 상상적 표상들에 의존한다. 이러한 상상력은 적어도 변화를 위한 운동의 초기에는 매우 유용한 전략적 무기를 구성한다. 사실 가장 먼저 무찔러야 할 대상 가운데 하나는 바로 우리를 움츠러들게 하고 체념 속에서 계속 작아지게 만드는 우리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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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점에서 병적인 수치심으로부터 그래도 건강한 점이 있는 수치심에 대한 수치심으로의 이행은 변화를 위한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물론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고개를 똑바로 들고 다니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어떤 감정이 오직 그와 상반되는 더 강력한 다른 감정에 의해서만 제압될 수 있다면 크나큰 수치심은 오로지 그만큼 큰 자긍심을 통해서만 물리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실제적인 변화는 우선 말과 행동을 가로막고 금지하는 빗장을 끊어 내기 위한 상상적 변화에서 시작된다.(266-267p)

 

 

계급횡단자와 관련하여 낙인을 뒤집는 일은 균열을 잘 마름질하고 과거의 조작들을 모아서 그것을 재전유하는 작업에 기초한다. 이러한 재전유는 자신의 출신을 수용함으로써 출신 환경을 더 이상 지울 수 없는 치욕의 표지가 아니라 자신을 구성하는 역사적 계기들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함축한다. 계급횡단자의 균열된 기질을 통합하려는 시도는 파열을 통합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때의 통합이란 이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먼저 그것은 변화한 환경으로의 통합을 의미하며 또한 도착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속에 출신 환경을 통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269-270p)

 

 

1910년, 빅토르 세르주는 잡지 「무정부」에 외곬이라는 필명으로 기고한 글에서 노동자주의를 시각의 상실과도 같은 질병으로 취급하며 노동자에 대한 과잉된 이상화를 매우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식자층 사이에서 퍼진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찬양"과 노동의 순교자들에게 작품을 바치는 주례사 문학의 진부함을 비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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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주의? 그것은 진보적이라고 불리는 거의 모든 지식인을 괴롭히는 기이한 질병이다. 마르크스주의와 생디칼리즘은 노동자주의의 치유 불가능한 두 가지 형식이다. 수많은 무정부주의자들이 이 병에 시달리고 있다. 이것은 지각 능력과 사유 능력의 상당히 막심한 손상을 가져오는데 이 병에 걸리면 노동자들은 그저 아름답고 건실하기만 한 존재로 보이게 되며 그들의 추하거나 사악한 면, 쓸모없고 심지어는 해롭기까지 한 면은 결코 볼 수 없게 된다. 선량한 시민의 무리 가운데 하나를 이루고 있는 후줄근하고 알코올중독에 줄담배를 피워 대는 결핵에 걸린 슬픈 얼간이는 이러한 마법을 통해 노동자가 된다. 그의 '신성한'노동은 인류를 먹여 살리고 진보시키며, 그의 고결한 노고는 인류에 휘황찬란한 미래를 보장한다.··· 노동자주의자에게 바로 그 프롤레타리아트가 병역과 투표 그리고 일상적 노동을 통해 자본과 권력의 그 가증스러운 체제를 지지하고 뒷받침하는 가장 확실한 지지자라는 점을 일깨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약 그랬다가는 그 즉시 부르주아적 편견에 빠져 사회과학이라고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으로 취급될 것이다.(276p)

 

 

사실 어떠한 규정성도 단독으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며 충분한 효력을 발휘하지도 않는다. 어떤 규정성이든 오직 다른 규정성과의 교차와 협력을 통해서만 결과를 산출할 수 있다. 하나의 규정성을 다른 규정성들로부터 떼어 놓고 단독으로 고려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비-재생산의 씨실을 이룰 수 있는 선들 가운데 하나이긴 하겠지만 그 선이 실제로 하나의 직물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규정성들과 함께 엮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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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러한 이유에서 계급의 이행은 수평적인 기계적 인과성의 형태가 아니라 기질이 매듭지어지는 입체적 형태하에서 고려해야 한다.(302p)

 

 

마지막 분석을 하면서 과연 사회적 비-재생산을 더 유리하게 만들어 주는 규정성 혹은 그러한 비-재생산에 심각한 장애물이 되는 규정성이 따로 있는지 탐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사회를 고려한다면 우리가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그리고 이성애자보다는 동성애자에게, 백인보다는 흑인에게 불리한 요인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에 근거해서 그러한 정체성이 중첩되어 있을수록 넘어야 할 사회적 장벽이 계단처럼 쌓여 더욱 극복하기 어려워진다고 상상하기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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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떤 규정성들, 예를 들어 젠더, 성적 지향성 또는 인종 같은 규정성들이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효과와 그 실제적 영향력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러한 규정성들이 사회적 계급의 변화에 선험적으로 절대적인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결론짓는 것은 성급할 것이다.(303p)

 

 

 

ㅡ 샹탈 자케, <계급횡단자들 혹은 비-재생산> 中, 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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