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0

 

 

어떻게 하면 자극적으로 쓸 수 있을까 기를 쓰고 노력하는데 존나 재미없다. 올해 본 최악의 소설이다. 모든 추리물이 이런 식인가.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우라시마라는 모든 시간선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초월적인 인물이나, 딱 5시간이라는 시간 역행이나, 분기된 모든 시간선의 연쇄나 참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한 편리한 설정이다. 그 연쇄라는 작용도 어떤 일은 연쇄적으로 다른 모든 시간선에 영향을 주지만 어떤 일은 영향을 주지 않는다. 가령 누군가가 죽으면 다른 시간선의 그 누군가도 같은 시간에 죽는다. 그런 식이라면 어떤 시간선의 누군가가 임신을 하면 다른 시간선의 누군가는 왜 임신을 하지 않나? 적어도 신체 내부의 반응은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아야지. 누군가에게 칼에 찔려 죽는 일이 특정한 시간선에서만 일어나도 다른 시간선의 같은 인물이 똑같이 칼에 찔려 죽으면서 왜 임신이라는 상황은 연쇄적으로 적용되지 않나. 

 

 

 

 

 

ㅡ 시라이 도모유키, <엘리펀트 헤드> 中, 내친구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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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7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기계가 있었다. 80억 명의 소식을 한데 모아 전해주는 웹사이트가, 설명을 듣고 상상한 그림을 그려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생각만으로 사물을 움직이는 시대를 열겠다며 장담하던 사업가가, 사람의 머리에 칩을 꽂아 넣으려는 과학자들이 있었다. 생각하는 기계들과 어디에도 없던 생물이 있었다. 그 모든 기술과 욕망이 만들어낸 시대가 있었다······. 사악할 만큼 게걸스럽고 충격적으로 다양한 시대였다······. 새 휴대폰을 얻지 못해 죽음을 꿈꾸는 아이와 굶어 죽어가는 아이가 같은 공기를 호흡하는 시대였다.

걷기부터 계단 오르기까지 일상의 모든 움직임을 기계에게 맡긴 다음 건강 산업에 돈을 가져다 바치고, 어떤 나라의 공장에서는 매일 새로운 티셔츠가 찍혀 나오는데 바로 그 나라의 빈민가에서 누더기의 산이 자라고, 아이들은 그 산을 타고 오르며 입을 만한 옷을 줍고, 유명인들의 삶, 꾸며진 삶, 화면 속에만 존재하는 삶을 탐내느라 모두가 불행해지고,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어디에도 없었던 사진이 마법처럼 생겨나고, 그 사진들은 거짓말하는 정치인에게 투표할 이유가 되고,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을 믿을 수 없으니 기쁨과 고통 또한 무의미하고, 진실과 거짓이 그 자체로 헛소리가 되면 끝내 남는 것은 찰나의 쾌락과 갈망, 갈망, 갈망······.(7-8p)

 

 

아이들은 자유에 무슨 나쁜 점이 있느냐며 묻고, 선생들은 이런 예시를 댄다.

 

서론: 외관상으로는 전혀 구분할 수 없는 사탕 두 개가 있는데, 하나에는 독약이 들어 있고 다른 하나는 무해하다고 하자. 이때 어떤 사람이 독약이 든 사탕을 골라 죽게 되었다고 해서, 그가 자유롭게 죽음을 선택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어떤 행동이 자유의 산물이기 위해서는 올바른 정보에 근거해 결과를 추론하고, 그에 따라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상태가 전제 되어야 한다.

 

정신질환자의 예시: 약을 정기적으로 먹지 않으면 망상과 환각을 겪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망상에 시달리는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온전히 돌아볼 수 없기 때문에, 그 스스로는 꾸준한 복약을 장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강제로라도 약을 먹여야 할까, 아니면 스스로 결정하도록 내버려둬야 할까?

 

혹은 이런 것도 있다.

 

마약중독자의 예시: 어떤 사람이 마약에 중독되어서, 마약에 대한 충동과 갈망 외에는 어떤 것도 떠올리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자. 그대로 내버려둘 경우 이 사람은 가진 약을 모두 써버린 다음 다른 약을 구하려 할 것이고, 그만큼 재활에서 멀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한편 본론은 이렇다.

 

욕망과 기술의 문제: 인류의 역사는 기술과 욕망의 역사다. 욕망은 기술을 발전시키며 기술은 다시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낸다. 편히 일하려는 욕망이 증기기관을 발명한 것처럼, 기관차와 철도의 도입이 광범위한 물류 배송을 가능케 한 것처럼, 그에 따라 시장의 규모가 확대된 것처럼······. 하지만 이런 순환이 반드시 좋은 것인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인류는 그 순환을 지배하는 대신 그저 휘둘리지 않았던가? 그게 과연 자유인가?(9-10p)

 

 

"여자애보다는 나 자신을 비웃었던 거죠. 내 처지 말예요. 머릿 속의 생각들이 그대로 전해지면 여자애는 도망갈 게 분명했거든요. 반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여자애가 계속 나를 좋아한다면, 그 애는 내 곤란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그게 아주 지겹더라구요. 나한테 남은 문제는 그 지겨움이에요. 3호가 시키는 대로 하고, 순순히 몸을 넘겨주는 일에 익숙해지더라도 끝나지 않는 문제죠. 아니, 오히려 더 커지기만 해요.“

"그 지겨움을 자세히 읊어봐라.“

"말 그대로예요. 아무나 붙잡고 이렇게 떠든다고 생각해봐요. 내 머릿속에 살인마인지 방화범인지 모를 게 사는데, 미친 짓거리를 말리느라 아주 지친다고요. 보통은 내가 허세를 부리는 줄 알죠. 반사회적인 걸 멋지다고 생각하는 애들이 종종 있잖아요. 그런데 상담 일지를 보여주고 증인들을 데려다놓으면, 비웃던 사람들이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져서 도망가는 거예요. 거리를 두려 하죠. 머릿속에 그런 목소리가 있거니와 가끔 유혹에 흔들리는 사람은 가까이할 상대가 아니니까요.“

"평범한 방법으로는 이해를 구할 수 없고, 이해받더라도 손해란 말이구나.“

"무슨 패를 내더라도 질 수밖에 없는 게임 판에 선 셈이죠. 크게는 세 가지 결말이 있는 것 같아요. 페널티가 다를 뿐이지 셋 다 패배고요. 하나는 완전히 이해받은 다음 모두와 멀어지는 거고, 다른 하나는 아무것도 이해받지 못한 상태로 이해한다는 눈빛을 받거나 비웃음거리가 되는 거고, 마지막 하나는 침묵하는 거죠. 기대도 하지 않고요. 기권을 선언하는 거예요."(171-172p)

 

 

"심리검사라거나 상담이라거나, 그런 건 아무 소용도 없어요. 심리검사에 나오는 문장들, 그러니까 작은 동물을 괴롭히고 싶다거나, 아이들을 돌보는 걸 좋아한다거나 하는 문장들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사실 똑같은 거예요. 그렇다에 체크하면 그런 사람처럼 보이고, 아니다에 체크하면 아닌 사람처럼 보이죠. 그뿐이에요. 말은 그냥 하면 나오는 거고 검사지는 체크한 대로만 결과가 나오는 거예요.“

"멀쩡한 사람 흉내를 내고 있다 이거지?“(183p)

 

 

"기억은 감각과 한 묶음이지. 감각이 라벨 역할을 하는 거야. 내가 빗소리를 들으면 사고를 떠올리듯이.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비가 세차게 오고 있었거든. 마찬가지로 고통은······ 고통을 선택하고 간직하는 작업은 나를 과거에 붙들고 내 삶을 완성시키지. 이 통증이 없으면 흉터를 남겨둘 이유도 없을 테고, 그렇게 사건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다면 그 순간을 계속 생각할 이유도 사라질 테니 말이다.“

"살면서 들은 이야기 중에서 손꼽힐 정도로 정신 나간 소린데요."

"성장에는 상처와 아픔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포함되지. 지나간 기억은 희미해지고, 평생토록 타오를 것만 같던 감정도 어느 순간 보면 불이 꺼져 있단 말이다. 그건 즐거운 일만은 아니야. 감정을 지탱할 힘이 사라진다는 의미니까. 나이가 들수록 근육이 헐거워지는 것처럼 마음도 느슨해져서, 더 이상 분노하거나 원망할 수 없게 된다. 답을 알기 전까지는 결코 눈을 감을 수 없을 듯한 의문도, 복수심도, 아무려면 괜찮은 문제들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시간에 빼앗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미워하는 나를 세상에 남겨두려면?"(228-230p)

 

 

나이가 들면 모든 고난과 역경을 그러려니 넘기게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법했다. 그런 태도는 종교적이거나 영적인 깨달음과는 다르며 휴머니즘과도 거리가 먼 것이다. 그냥 지치고 힘들고 귀찮아서 눈감아버리는 일을, 느물거리는 미사여구로 장식하는 것이다. 꾸미지라도 않으면 비참하고, 눈을 감지 않으면 고통스러우니 어쩔 수가 없다.(281p)

 

 

 

 

ㅡ 단요, <목소리의 증명> 中,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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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6

 

https://www.khan.co.kr/world/world-general/article/202406191329001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24/09/09/how-to-give-away-a-fortune

위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인물이 언급한 책이 궁금했던 차에 번역되어 나왔길래 읽어봄.

1~5장 보다는 6~10장이 더 흥미로웠다. 이래저래 생각해 볼 만한 주제.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부에는 상한이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이것을 부의 제한주의라고 부른다.

(...)

하지만 부의 제한주의가 모든 것을 한 방에 해결하는 마법의 정책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먼저 밝혀두어야겠다. 부의 제한주의는 규제적 이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그곳에 도달하고자 우리가 노력을 경주하는 지향점이되, 세상이 현재 조직되어 있는 방식을 생각할 때 그곳에 정말로 도달할 수 있을 법하지는 않은 어딘가 인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이상으로 삼고 있는 것 대부분이 그렇다. 빈곤 타파라는 이상도 그렇고 차별 철폐라는 이상도 그렇다. 빈곤 타파나 차별 철폐가 규제적 이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들의 중요성이 적어지는 것은 전혀 아니다. 개인이 축절할 수 있는 부가 어느 정도를 넘지 않게 하자는 이상도 마찬가지다.(21-22p)

 

 

극도의 빈곤은 대체로 모든 이에게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노숙인의 형태이든, 늘 같은 옷을 입고 학교에 오고 학교에서 무상으로 주는 급식에 의존해야 하는 아이의 형태이든, 또 그밖의 어떤 물질적 결핍의 형태이든 말이다. 하지만 극도의 부는 종종 비가시적이다. 많은 나라에서 부자들과 슈퍼 부자들은 다른 이들의 시야에 드러나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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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불평등에는 양쪽이 있다. 불평등은 가난한 사람들이 더 가난해져서도 생기고 부자들이 더 부유해져서도 생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가난해지거나 중산층이 쪼그라들어서 불평등이 생길 때는 우리 눈에 더 잘 보이고 많은 사람이 피부로 이를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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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매우 부유한 사람들이 더 부유해지는 경우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별로 없고 우리 대부분의 일상도 적어도 곧바로는 달라지지 않는다. 1년에 한 번 나오는 '부자 순위'를 보거나 언론이 부의 분포에 대한 최신 통계를 보도하기로 했을 때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을 뿐이다. 즉 우리는 언론이 이 이슈를 보도하기로 결정했을 때만 상황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이 20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 불평등이 증가하기 시작한 것을 알아차린 사람이 매우 적었던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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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불평등은 눈송이처럼 계속 불고 있어서 다루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피케티의 책이 나오고서 10년 동안 부자들은 더 부유해졌다. 옥스팜은 매년 글로벌 불평등 통계를 발표하는데 이 숫자는 매번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린다. 일례로 2020년에서 2022년 사이에 전 세계 상위 1%는 나머지 99%가 얻은 소득과 부의 두 배 이상을 얻었다.(42-44p)

 

 

과거에는 다들 너무 가난했지만 그 뒤에 전 세계적으로 극빈곤이 크게 줄었다는 지배적인 내러티브는 틀렸거나 오도의 소지가 있다. 이 내러티브에 대해 우리가 시급히 고려해보아야 할 반박 내러티브가 존재하며, 이 논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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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데이터로 보는 우리 세계'와 동일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일단 정보가 충분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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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과거 사람들의 소득이 어느 정도였을지에 대한 추측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수치는 매우 정교하지 못하다. 그리고 경제학자 로버트 앨런이 지적했듯이 더 유의미한 데이터를 사용하면, 예를 들어 얼마를 버는지보다 무엇을 소비하는지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사회가 진보해왔다'는 내러티브는 붕괴한다.

둘째, '데이터로 보는 우리 세계'가 빈곤 통계를 낼 때 사용하는 빈곤선이 극단적으로 낮다. 이 빈곤선은 구매력 평가로 보정한 2011년 기준 하루 1.90달러다.

(...)

우리는 이 빈곤선의 의미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것은 빈곤이 아니라 극빈곤이다. 또한 우리가 사회 발전의 주요 지표로 이 빈곤선을 사용한다면 기준을 너무 낮게 잡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65-67p)

 

 

우리 대부분은 계급이 우리 사회와 삶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른다.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민권 운동과 해방 운동이 성공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이제는 모두가 동등한 기회를 누린다고 믿게 되었다. 모두가 동등한 기회를 갖고 있다면 계급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안 그런가?

이와 함께, 거의 모든 곳에서 노조가 꾸준히 쇠락하고 노조 파괴까지 자행되면서 계급 간 차이에 대해 대중의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하던 주요 제도 하나가 약화되었다. 더 은밀한 변화도 있는데, 서로 다른 계급 사람들이 섞일 기회가 점점 더 없어지는 방향으로 사회가 달라진 것이다. 주거, 교육, 의료 등이 대체로 계급선을 따라 분절되어 있고, 유럽에서는 탈종교화가 진전되면서 모든 사회 계층이 모이던 곳 중 하나가, 즉 교회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이 오는 곳이 아니게 되었다. 보편 징집의 폐지도 상이한 계층 사람들을 한데 모이게 하던 몇 남지 않은 제도 하나를 없앤 격이 되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삶과 그들이 직면하는 제약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도 이러한 변화 때문에 우리가 불평등 정도를 실제보다 더 낮게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실제보다 높게 평가하고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른 이들보다 얼마나 더 많이 가졌는지를 실제보다 작게 생각한다.(80p)

 

 

물론 전쟁 범죄나 국가 부패는 슈퍼 부자들이 타인의 삶에 피해를 끼치면서 막대한 돈을 버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또 다른 유형의 부정한 돈으로는 기업이 소비자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면서 버는 돈이 있다.

새클러 가문을 보자. 이들은 미국 제약회사 퍼듀파마의 소유주이고, 이 회사는 옥시콘틴이라는 오피오이드 진통제를 판매했다. 1990년대 말에 퍼듀파마는 오도의 소지가 있는 마케팅을 공격적으로 전개하면서 1차 의료기관의 일반의들에게 옥시콘틴을 판촉했다. 옥시콘틴이 식품의약국 승인을 받고서 6년간 퍼듀파마는 사실이 아닌 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이 약이 다른 진통제보다 중독성이 적다고 광고했다.

(...)

기업인이 버는 부정한 돈은 이게 다가 아니다. 내가 저지른 잘못의 비용을 다른 이들이 치르게 함으로써 부정직하게 돈을 버는 방법도 있다. 물론 기업은 때로 실패를 한다. 사업을 영위하는 데는 리스크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사업에서 나오는 돈은 기꺼이 취하면서 무언가가 잘못되었을 때의 비용은 다른 사람들이 지게 한다. 어떤 경우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비용이 너무나 큰데, 종종 이 비용은 납세자를 포함해 모든 시민에게 퍼지고 기업 소유주의 평판에 대한 피해는 흩어져버린다.(111-113p)

 

 

법의 테두리 안에서 세금을 회피해 납부를 최소화하도록 도와주는 산업이 존재한다. 금융 전문가, 법률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이 산업은 재산 방어 산업이라고 불린다.

(...)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세금을 안 내는 개인과 조세 당국 사이의 이슈도 아니다. 이것은 '사회 계약'의 핵심과 관련한 문제다. 정부가 조세 회피와 포탈로 세수를 잃으면 모든 사람이 손해를 본다.

(...)

재산 방어 산업을 고용할 만큼 부자가 아닌 사람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족한 세수를 메우기 위해 세금을 더 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는 자신이 '똑똑해서' 세금을 안 냈다고 말했지만 세금 회피는 똑똑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이기적이고 비애국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이것은 부의 극단적인 집중과 매우 관련이 크다.

(...)

즉 그들은 로비를 하고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해서 법이 한층 더 금권정치적 속성을 갖게 했다. 첫째, 조세 부담을 자본에서 노동으로 옮기고, 둘째, 최고세율을 낮추고, 셋째, 더 많은 구멍과 맹점을 도입하면서 말이다.

(...)

이제 미국에서는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의 실효 세율이 같다. 아주 부자인 경우는 예외인데, 근로 소득이 없고 재산 방어 산업의 도움을 최대로 받기 때문에 이들은 심지어 세율이 가장 낮다.(131-133p)

 

 

미래에 도움을 얻을 것을 기대하면서 제공하는 거액의 후원금은 명백히 정치적 평등의 원칙을 훼손한다. 하지만 미국 정치철학자 토머스 크리스티아노가 지적했듯이 위험에 처한 민주적 가치는 이것만이 아니다. 돈으로 표를 샀을 때, 선출된 정치인은 돈을 댄 사람의 이해관계를 보호하는 정책들을 추진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정책들을 추진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모든 사람이 부담한다. 돈으로 표를 사는 것은 사회 전체가 지출하는 비용에 무임승차하는 것이다. 소수의 거액 기부자에게 득이 되는 입법을 하는 과정에 우리 모두가 돈을 대고 있는 것이다.(151p)

 

 

누군가가 자신의 부를 진정으로 온전히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만 벌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부의 제한주의 주장의 핵심이자 기본적인 철학적 원칙들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부의 제한주의는 근본적인 철학적 통찰 하나에 토대를 두고 있다. 시장과 재산은 사회적 제도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본래의 세상에는, 즉 사회적 맥락을 떠나서는, 재산도 없고 시장도 없다는 의미다. 재산과 시장은 공유된 규칙과 규범의 시스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는 그것을 조율하는 기관, 일반적으로는 정부가 큰 역할을 한다. 대개 우리는 재산을 시장 교환에서 얻는데, 그 시장은 정부에 의해 구성되고 정부에 의해 보호되며 정부에 의해 작동이 가능해진다. 시장에서 우리가 갖는 이해관계를 보호해주는 정부가 없다면, 우리는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1651년 저서에서 '자연 상태'라고 묘사한 상태로 가게 될 것이다.

(...)

그런데 정부가 존재하려면, 그리고 이러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으려면 자원이 필요하다. 정부는 반드시 세금을 걷어야 한다. 세금 없이는 정부가 우리 재산을 보호할 수도 없고 시장에서 사기나 절도를 막아 시장 거래가 제대로 이뤄지게 할 수도 없다.

여기에서 근본적인 철학적 논지는 조세 없이는 재산권 보호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국가가 없다면 우리가 아는 대로의 재산은 존재할 수 없고 세금이 없다면 국가가 존재할 수 없다. 제도가 존재하기 전에는 재산도 존재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조세 제도와 정부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동일한 사회경제적 시스템의 일부다.

(...)

과세에 반대하거나 과세가 '도둑질'이라고까지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금 없이는, 즉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사회 계약 없이는 소득도, 재산도, 안정적 거래도, 매끄럽게 작동하는 시장도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 계약이 없다면 위험과 혼란만 있을 것이다.

(...)

많은 자유지상주의자, 경제적 보수주의자, 신자유주의자들이 믿는 것과 달리 세전의 소득과 부의 분포는 정부의 개입과 지속적인 사회적 협력 없이 나타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정부가 손대지 말고 내버려두어야 할 '자연스러운' 재산의 분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소득과 부에 대한 어느 정도의 과세는 늘 합당하고 정당하다.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얼마나 많이 걷어야 하고 누구에게 걷어야 하는지, 그리고 시장의 공정성을 보장하고, 공정하고 포용적인 사회 계약이 유지되게 하려면 그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다.(202-205p)

 

 

상속받은 재산을 자신이 마땅히 가질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상속으로 무엇을 얼마나 갖게 되는지는 단순히 운으로 정해진다. 당신이 수백만 달러를 상속받는다면 이는 운 좋게 슈퍼 부자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재산에 대해 당신에게 도덕적으로 자격이 있다고는 어떤 의미로도 말하기 어렵다. 누구도 부모를 선택하거나 태어난 장소와 시대를 선택할 수 없다. 철학자들은 많은 주제에서 의견이 다르지만 상속받은 재산이 가질 자격이 없는 재산이라는 데는 일반적으로 일치를 보인다. 상속받은 그 부에 대해 어떤 노력이나 의사결정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몰수적 성격의 과세를 엄격하게 적용해 상속을 완전히 철폐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 질문을 기꺼이 던져보아야 한다. 철학자 D.W 해슬릿이 언급했듯이, 우리는 정치 권력의 상속을 철폐했다. 경제 권력의 상속 또한 철폐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상속세(또는 유증세)에 반대하는 표준적인 논리는 물려주는 사람이 자기 돈을 자기 마음대로 쓸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맞는 논리가 될 수 없다. 사회는 자유가 다른 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행사될 경우 다양한 방식으로 제한을 가한다. 우리는 단지 그러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스토킹하거나 납치할 수 없다. 피해자의 기본적인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액의 상속은 다른 사람들에게, 또한 사회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기회의 평등을 훼손한다. 사회의 계층 이동성도 훼손한다. 또한 [상속받는 사람에게] 역인센티브를 발생시킨다. 평생 쓸 돈이 있는데 왜 힘들게 일하겠는가?

(...)

문제는 상속이 막대하게 불평등하다는 점이지 상속 자체가 아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대규모 상속이 문제다. 작은 액수를 물려받는 것은 사회적 계층 이동성이나 기회의 평등을 저해하지 않고, 당신이 재능을 낭비할 기회를 주지 않으며, 모두를 위한 복지나 번영에 기여해야 할 돈을 해변에서 테킬라를 마시는 데 쓰게 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상속세에 대해 더 자주 제기되는 또 다른 반대는 상속세가 '이중 과세'라는 주장이다. 상속하는 사람은 그 돈을 벌었을 때 이미 세금을 냈는데 나중에 자녀에게 이전할 때 세금을 또 내야 한다. 같은 돈에 두 번 세금을 내는 것이니 불공정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상속[물려받는 것]에 과세하는 것과 유증[물려주는 것]에 과세하는 것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상속은 받는 사람 입장에서 소득이며(그리고 불로소득이다), 원칙적으로 모든 소득에는 세금이 붙는다. 교사는 봉급을 받고, 여기에는 세금이 붙는다. 가게 주인은 수익을 올리고, 여기에도 세금이 붙는다. 음악가는 음반을 팔고, 여기에 세금이 붙는다. 소득에 세금을 물리지 않는 경우는 소득이 아주 낮을 때뿐이다. 대개 소득이 매우 낮은 사람은 세금이 면제된다.(206-210p)

 

 

매우 재능이 있는 사람들끼리 경쟁할 때는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재능의 작은 차이보다 운이 훨씬 더 중요하다.

(...)

능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은 실증근거로도 확인된다. 능력이 뛰어나야 높은 자리에 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노력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능력도 있고 노력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의 수가 최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자리의 수보다 훨씬 많다. 누가 그 업계의 꼭대기를 차지해 막대한 보수를 받을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운, 그리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이 서로를 판단할 때 갖게 되는 편향이다.(217p)

 

 

이 모든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몇몇 고려 요인에 따른 어느 정도의 보수 격차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사회가 특정한 직무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가, 그 일을 하기에 필요한 능력이 얼마나 희소한가, 그 능력과 숙련이 그 사람에게 얼마나 잘 발달되어 있는가, 그 일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이는가, (...) 아마도 10배 정도까지는 정당화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돌봄 노동자와 1년에 수백만 달러를 버는 CEO 사이의 막대한 간극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222p)

 

 

하지만 더 큰 정부가 늘 사람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 정부는 너그러운 복지 국가 정부만큼 큰 정부일 수 있고(국민소득 대비 정부지출 비중 기준), 그러면서 재분배와 사회적 지출에 들어갔던 돈을 복지 수급자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데 쓰고 있을 수 있다. 이는 몇몇 유럽 정부들이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한 이후에 실제로 나타나고 있는 일이다. 그들은 공공 영역과 복지시스템 전반에서 규제와 모니터링을 켜켜이 늘렸다. 표방된 목적은 무임승차나 '복지 사기'를 막는다는 것인데, 실제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거짓이 없는지 따져봐야 할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정책은 복지 수급자들에 대한, 또는 공무원의 직업 의식에 대한 과도한 불신을 보여준다.

(...)

어떤 '큰 정부'들은 납세자의 돈을 공공의 후생과 재분배에 사용하지만, 어떤 '큰 정부'들은 매우 비효율적이며 통제 메커니즘이나 지정학적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군사 인프라에 많은 돈을 사용한다. 이 모두가 그들이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느냐의 문제다.

아마도 이 모든 요인 때문에, 어떤 부유한 자선가는 정부에 맡겼을 때 정부가 자신의 부를 잘 분배해주리라는 신뢰를 갖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

다른 말로, 일부 슈퍼 부자들이 정부가 작아야 한다고 믿는 한 가지 이유는 경악스러울 정도로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계급적 편견이 그들 자신과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정당성 있는 리더이며 자신의 부가 그 증거라고 생각한다.

(...)

이들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에 스스로의 문제를 탓해야 하며, 다시 이는 그들이 정책 결정에 참여하기에는 부적합한 사람들임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또한 정부는 엘리트 계층이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으로 선출되어 대중이 운영하므로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신뢰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정책 결정은 매우 부유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권력을 주어서 그들 손에 맡기는 게 더 낫다. 그들이 막대한 부는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가끔 자선 기부로 부의 일부를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주사놓듯 찔끔찔끔 흘려 넣게 하면서 말이다.(274-278p)

 

 

'너무 많은 돈'이 저주의 다른 형태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아주 많다. 애비게일 디즈니는 부자가 되는 것이 그 사람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부유한 사람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행사하게 되는 권력이 일으키는 정신적 부담을 이야기했다.

(...)

그런 계산은 내 자아에서 무언가를 떼어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너무나 나를 소진시킵니다. 정서적으로 너무 지치게 돼요. 어떤 사람을 돕고 어떤 사람을 돕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고 이런 계산 자체를 하지 않기로 해버리면, 길거리의 노숙인을 무언가 인간이 아닌 존재로 낮추어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당신은 당신에게서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는 사고를 발달시키게 됩니다. 도움을 달라는 요청은 정말 말도 못하게 많습니다. 어떤 공간에 들어갔을 때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내가 도와주기를 원하는 사람, 그리고 그러한 필요를 발생시키는 상황을 내가 바꿔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없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303-305p)

 

 

미국인들이 현재와 같은 불평등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왜 더 많은 재분배를 위해 투표하지 않을까? 다른 나라에서 이루어진 연구들에서도 동일한 패턴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실제의 자산 불평등을 대폭 과소평가하고 있었고 그렇게 축소해서 생각하고 있는 정도보다도 더 작은 불평등을 원했다. 임금 불평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불평등의 정도를 실제보다 낮게 생각했고 그것보다도 더 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임금 불평등을 작게 인식하는 정도는 현저했다. 한국 연구에서 응답자들은 CEO가 저숙련 노동자보다 10배 정도 더 벌 것이라고 생각했고 4.6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데이터가 존재하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연구 당시에 CEO 임금과 저숙련 노동자 임금의 비는 10대 1보다 훨씬 높았다. 미국은 354배, 독일과 스위스는 거의 150배였다.

(...)

이것이 왜 중요할까? 불평등이 높다고 인식하고 있으면 사람들은 재분배를 강하게 요구할 것이다. 반면, 지금처럼 불평등이 실제보다 작다고 잘못 생각한다면 재분배 요구는 미미할 것이다.

(...)

이를 염두에 두면, 부자들이 돈에 대해, 특히 부자와 슈퍼 부자들이 얼마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왜 꺼리는지 알 수 있다.(320-321p)

 

 

극단적인 부를 (또한 빈곤도) 한 방에 없앨 수 있는 마법의 약은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를 잘 알고 있으며, 대부분의 활동가와 단체들은 다양한 수준에서 광범위한 제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도 부의 제한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 또는 평등을 향한 어떤 종류의 진보에도 반대하는 사람들은 부의 제한주의나 평등주의를 마치 그것이 단 한 가지 제안인 것처럼 과장해 단순화한다.(332-333p)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지식인, 기업인, 정치인들이 우리로 하여금 정부는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공무원들은 이기적이고 자유시장은 다른 모든 것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믿게 만든, 잘 조직화되 노력의 결과였다. 이러한 노력은 주류 미디어의 내러티브를 바꾸었고, 학생들이 학교와 사회에서 배우는 내용을 바꾸었으며, 기업인과 공직자들이 사용하는 어휘를 바꾸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인 사회·경제 조치들이 구체적으로 도입되면서 우리 세계는 경쟁과 탐욕이 지배하는 사회로 바뀌었다. 신자유주의는 나라마다 다른 형태를 띠었지만, 그것이 자연스럽거나 불가피하게 온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추동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실행하고 강화하기로 의도적으로 선택한 데서 나온 결과였다는 점은 모든 곳에서 같았다.

좋은 소식은, 우리가 선택을 통해 신자유주의를 바꿀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점이다.(335p)

 

 

노동 소득에 자본 소득보다 높은 세율이 적용되는 것이 불공정하다는 데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많은 국가의 현실이다. 네덜란드에서는 가장 최근의 굵직한 세제 개혁이 있었던 2001년에 노동 소득과 자본 소득에 동일한 세율이 적용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작은 수정이 야금야금 이뤄져 자본 소득에 예외가 몇 차례 적용되면서 노동 소득이 자본 소득보다 세율이 11% 높아졌다.

(...)

이러한 내용은 2022년에야 대중에게 알려졌다. 정부의 의뢰로 진행된 한 연구가 모든 관련 기관과 정당에서 정보를 확보해 분석한 결과였다. 이러한 정보가 없는 국가에서도 비슷한 연구를 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면 평등주의적이라는 평판을 가지고 있는 국가에서조차 조세시스템이 노동보다 자본에 유리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346-347p)

 

 

나는 상속을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에게 각각 해당될 도덕적 고려 사항들을 감안해 위와 같은 제안의 약간 변형된 버전을 제안하고자 한다. 도덕적인 관점에서, 상속받는 사람은 그 부를 상속받을 자격이 전혀 없고, 상속하는 사람은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 자신의 소비를 줄여가며 저축을 늘린 것에 대해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모두 고려해서, 내 제안은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받을 수 있는 상속과 증여에 제한을 두고 그것을 넘으면 모두 조세 수입으로 귀속시켜 그 국가의 시민들에게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국가는 상속세 세수를 다른 세원에서 나온 것과 함께 일반 세수로 합쳐서 도로, 학교 등 공공 지출에 쓸 수도 있지만, 또 다른 그리고 아마도 더 나은 대안도 있다. 상속세고 들어온 돈은 국가의 모든 젊은이에게 재분배하는 용도로 지정해 모든 젊은이가 이전 세대의 부를 나누어 받게 하는 것이다.

(...)

두 번째 이유는 상속세 수입은 젊은 층에게 재분배하면 현재 심각한 수준인 세대 간 불평등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많은 연구자가 세대 간 불평등 때문에 젊은이들이 크게 불리한 처지에 있게 되었다고 우려한다. 종종 상속은 80대인 사람이 사망하면서 50대인 자녀에게 물려준다. 상속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들은 상속 재산을 실제로 받기 전에 이미 상당한 이득을 누린다. 나중에 돈이 생길 것을 알기 때문에 학자금 대출이나 모기지 대출을 더 쉽게 결정할 수 있다. 또 이들은 부모 생전에 상당한 증여도 이미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상속세로 거둔 세수를 20대 중반인 사람들에게 재분배하면 전체 인구의 번영에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모든 젊은이가 성인으로서의 삶을 돈에 대한 부당한 걱정 없이 시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348-349p)

 

 

 

ㅡ 잉그리드 로베인스, <부의 제한선> 中,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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