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

 

 

 

이 책은 이렇게 반응이 나뉘는 주된 이유가 여러분이 받은 음악 훈련의 수준이나 10대에 어울렸던 친구들, 심지어 여러분이 태어난 연도도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여러분에게 최고의 만족을 선사하는 음악은 음악 청취의 중요한 일곱 가지 차원으로 정해진다. 진정성, 사실성, 참신성, 멜로디, 가사, 리듬, 음색이다. 이런 각각의 차원에 여러분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합쳐져서 여러분만의 독특한 '청취 프로필'이 만들어진다. 여러분의 청취 프로필은 여러분이 음악을 들을 때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몸으로 반응하는지를 결정한다.(36-37p)

 

 

사실적 예술을 선호하느냐 추상적 예술을 선호하느냐가 그 사람의 지성이나 성숙도, 세련된 문화적 소양에 관한 뭔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각자의 뇌가 만족스럽게 여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정신적 활동을 비출 뿐이다. 슬프게도 그리고 부정확하게도 인상파나 입체파 같은 여러 추상예술 운동을 문화의 '진전'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전기자동차와 아이폰이 기술의 진전을 나타내는 것처럼 말이다. 앞서 있었던 것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추상화가 사실주의 회화보다 지적으로 뛰어나다는 말을 종종 하는데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은 소리다. 얀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고 절묘하게 세공한 디테일에 놀라든, 피터르 몬드리안의 「구성 10」에 표현된 번뜩이는 기하학적 구성에 감탄하든, 그것은 회화가 내 안에 불러일으킨 감흥을 나의 신경 연결망 배치가 어떻게 즐기는지 반영하는 것이다.

(...)

개인의 성향을 연구한 흥미로운 자료를 보면 사실성에 대한 욕구는 예술 형식마다 다르다고 한다. 인간의 시각 회로는 미각 회로와 대체로 독립적으로 발달하며, 미각 회로는 청각 회로와, 청각 회로는 후각 회로와 대체로 독립적으로 발달한다. 이 말은 여러분이 시각적 자료에서 얻는 보상이 맛, 촉감, 냄새, 소리를 통해 경험하는 보상과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생물학적 사실은 우리의 개인 성향에서 놀랍도록 모순적인 대목을 설명할 수 있다. 내 경우를 말하자면 사실적 음반을 대단히 선호하는 편이지만, 장미셸 바스키아와 사이 트웜블리의 추상적인 그림을 무척 좋아한다.(101-102p)

 

 

음악에 한정시키자면 익숙함과 참신함은 주관적인 속성이다. 여러분에게 음악적으로 익숙한 것이 나에게는 전례 없이 새로울 수 있으며, 반대도 마찬가지다. 특정 문화의 음악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그 문화에 속하는 곡을 듣고 일반적인 쪽인지 아방가르드한 쪽인지를 분류하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각각의 음반은 동일한 음악 규칙을 따르는 다른 음반들과의 관계로 듣게 된다. 특정한 음악 체계에 익숙하지 않은 청자라면 그런 양식으로 된 모든 곡이 참신하게 들릴 것이다.

중동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전설적인 레바논 가수 파이루즈의 음울하고 딴 세상 같은 노래들은 미국인의 귀에 이국적으로 들린다. 인도의 라가 음계는 미분음(피아노에서 인접한 검은건반과 흰건반 사이에 놓이는 음)을 사용하는데 서양 음악에서는 극도로 드물다. 라가에 익숙한 청자라면 이를 듣고 참신성의 정도에 따라 쉽게 분류할 수 있겠지만, 서양의 청자에게는 모든 라가가 똑같이 낯설게 들릴 것이다.(110p)

 

 

지금까지 우리는 청취 프로필의 세 가지 차원인 진정성, 사실성, 참신성을 알아보았다. 이 셋은 음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진정성, 사실성, 참신성은 감각 양식에 특화된 단일한 연결망을 가동하는 것이 아니라 뇌의 여러 연결망을 동시에 가동하여 처리된다. 각각을 처리하는 뇌의 연결망은 비단 우리가 음반을 들을 때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영화, 소설, 춤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창작 예술에 대한 반응에 관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성, 사실성, 참신성을 청취 프로필의 미적 차원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어지는 네 개의 장에서 우리는 음악에 국한된 청취 프로필의 네 가지 차원을 살펴볼 것이다. 멜로디, 가사, 리듬, 그리고 과소평가되는 차원인 음색이다. 미적 차원과 음악적 차원 사이에는 두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미적 차원은 두 개의 항으로 구성된다. 우리는 각각의 미적 차원에서 최적 지점이 양쪽 극단(목 위와 목 아래, 사실성과 추상성, 참신성과 익숙함) 사이를 오가는 하나의 축에 놓인다고 상상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음악적 차원은 두 개의 항이 아니다. 우리는 멜로디를 별개의 여러 특질을 가진 것으로 인식하며 특질마다 나름의 축이 있다.(엄격히 말하자면 청취 프로필의 네 가지 음악적 차원은 실은 '음악적 공간'이라고 해야 옳지만, 명료함과 일관성을 위해 차원이라고 하겠다.) 예를 들어 멜로디는 넓은 음역을 가질 수도, 좁은 음역을 가질 수도 있다. 스타카토 양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레가토 양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말소리를 흉내 내서 특정한 감정을 부를 수도 있고, 모호하게 들리는 방식으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둘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멜로디의 차원에서 여러 특질에 대응하는 여러 개의 최적 지점을 갖는다. 마찬가지로 가사, 리듬, 음색의 차원에서도 여러 개의 최적 지점을 가질 수 있다.(144-145p)

 

 

송라이터나 프로듀서가 새로운 노래를 평가하면서 이런 음악적 차원 중 어느 것을 앞세워야 청자에게 최고의 보상을 안겨줄지 알아보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샤워하면서 흥얼거리기 쉬운가? 그렇다면 이 노래는 멜로디가 좋은 것이다. 종이에 써놓고 봐도 좋은가? 그렇다면 가사가 괜찮은 것이다. 운동하면서 들을 때 머릿속에 들어오는가? 그렇다면 이 노래의 으뜸가는 특징은 그루브가 된다.(146p)

 

 

음악을 듣는다는 기대도 안 했는데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소음의 불협화음에서 아무렇지 않게 피아노 음만을 따로 떼서 듣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복잡한 소리의 망에서 특정한 음색 하나를 골라내는 것은 시야에서 어디에 집중할지 선택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정신적 도전이다. 시야에 있는 대상들은 각자의 위치가 있다. 빛이 여러 대상의 표면에 맞고 반사되면 그 위치에 따라 망막의 여러 부위가 활성화된다. 뇌는 위상적으로 구별되는 이런 시각적 경계들을 가지고 시각적 광경을 구성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청각적 대상들ㅡ달그락거리는 식기, 잡담하는 목소리, 멜로딕한 피아노ㅡ은 하나의 복합적인 음파로 묶여 여러분의 고막에 도달한다. 만약에 시각이 청각과 같다면, 여러분은 고양이, 자동차, 신발, 입, 노트북, 피아노의 이미지가 모두 한데 겹쳐진 모습으로, 마치 여러 장의 슬라이드 필름을 겹쳐서 프로젝트에 영사하는 것처럼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소리의 속성들은 음파에 담긴 세 가지 유형의 정보로 추출된다. 멜로디, 가사, 리듬, 음색, 세기, 공간의 위치, 움직임 모두 주파수, 진폭, 위상으로 결정된다.

(...)

이제 여러분의 뇌는 어떤 흐름에 집중할지 선택해야 한다. 음향의 출처 가운데 일부, 예를 들어 교통, 에스프레소 기계, 에어컨, 보행자는 혼란스럽고 체계적이지 않은 소리 패턴을 만들어낸다. 여러분의 뇌는 평범한 환경 소음은 무시하도록 배운다. 하지만 흐름에 정렬된 주파수 패턴이 들어 있으면 여러분의 뇌는 주목한다. 일차 청각피질은 체계적인 소리 패턴을 더 주목해서 처리할 대상 후보로 올려둔다. 더 강력하게 나서는 다른 흐름이 없다면, 체계적인 흐름은 의식적으로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선택된다. 전경의 흐름foreground stream이 되는 것이다.

음악을 듣는 것이 옆자리의 대화를 엿듣는 것보다 흥미롭다면 피아노 소리가 전경의 흐름이 된다. 피아노 흐름은 이제 음악적 차원(멜로디, 가사, 리듬)를 처리하고 소리 위치를 파악하는 일을 전담하는 고차적인 뇌 연결망으로 보내지고, 마침내 미적 평가(진정성, 사실성, 참신성)를 전담하는 연결망으로 넘어간다. 그 전에 먼저 전경의 흐름이 가는 곳은 음색 지각 연결망이다. 여기서는 여러 가지 소리(예컨대 '삐걱거리는 의자' '화난 고객' '짹짹거리는 참새')를 학습하고 범주화하는 일을 맡는다.

음색 연결망은 전경의 흐름을 일으킨 출처가 악기임을 알아본다. 이렇게 흥미로운 소리의 출처가 확인되고 나면 우리는 "피아노 소리가 들려!" 하며 소리를 의식하게 된다. 소리가 의식 속으로 뛰어들어 책을 향하던 우리의 주목을 낚아채고 다른 소리의 출처들을 모두 잠재우는 것이다.(273-277p)

 

 

 

 

 

ㅡ 수전 로저스, 오기 오가스, <당신의 음악 취향은> 中, 에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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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22

 

 

소세키의 미완성 유작. 소세키의 어느 작품보다 분량이 많아 두어번 시도했다가 포기하곤 했었는데 이번 주말에 마음 먹고 읽었다. 읽어 본 소세키 소설 중 가장 심리묘사에 치중하고 관념적이었다. 소세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화를 좋아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각 인물들이 본론을 얘기하기까지 말을 빙빙 돌리는 게 지나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너무 질질 끈달까. 기존의 소세키 소설이 남성 화자의 심리만 묘사되고 상대방의 심리는 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낼 뿐이었다면, 이 소설에서는 화자의 아내인 여성의 심리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는 게 특기할 만한 점.

 

 

실제로 세상에 나가서 단적인 사실과 격투를 하며 일한 경험이 없는 숙부는 한편으론 당연히 어두운 인생비평가여야 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론 매우 예리한 관찰자였다. 그리고 그 예리한 부분은 모두 그의 어두운 곳에서 파생되고 있었다. 바꿔 말하면 그는 세상물정에 어두운 덕택에 기발한 말을 하기도 하고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의 지식은 풍부한 대신에 조잡하였다. 그래서 그는 많은 문제에 참견을 하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방관자의 태도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의 위치가 그를 제약할 뿐만 아니라 그의 성질이 그를 그쪽으로 몰아넣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어느 정도의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혹은 방법이 있어도 그것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팔짱을 끼고 그대로 있고 싶어 했다. 일종의 노력가임과 동시에 일종의 게으름뱅이로 태어난 그는, 결국 활자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운명의 소유자에 지나지 않았다.(57p)

 

 

"그렇게 싫은가? 나와 함께 술을 마시는 게.“

실제로 그렇게 싫었던 츠다는 이 말을 듣자 그대로 멈췄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반대의 결단을 외부로 나타냈다.

"그럼 마시자."(91p)

 

 

 

ㅡ 나쓰메 소세키, <명암> 中,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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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19

 

 

작가 이름 좀 통일해. 이게 뭐야.

 

 

특히 도시빈민 최후의 피난처라 불리는 쪽방의 역사는 미국에서 슬럼을 착취해온 역사와 닮았다. 서울 등 대도시의 쪽방은 감옥보다 좁고 열악하나, 건물주들은 노숙 외에 대안이 없는 세입자들의 처지를 악용해 (평당 기준으로) 일바 아파트보다 훨씬 비싼 임대료를 현금으로 챙긴다. 정부나 기업의 쪽방 리모델링 사업은 임대업자에게 보조금을 주는 수단으로 전락했고,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가 받는 주거급여가 인상되면 임대료도 동반 상승했다.(23p)

 

 

가난에 대한 책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책일 때가 많다. 100년 넘게 이런 식이었다. 1890년 제이컵 리스는 뉴욕의 세입자들이 처한 혹독한 환경을 기록하고 골목에서 잠든 꼬질꼬질한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서 "세상의 절반은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글을 남겼다.

(...)

거부할 수 없는 증거를 내세운 이런 책들은 우리가 가난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왜?라고 하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사실 대답할 수 없다. 미국에는 왜 이 모든 가난이 존재하는가? 나는 이 질문은 다른 접근법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가난의 원인을 이해하려면 가난한 사람들 너머를 들여다봐야 한다. 특권과 풍요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스스로를 살펴봐야 한다. 우리ㅡ안정되고 보장된 삶을 사는 사람들, 집이 있고 대학을 나온 사람들, 보호받고 운이 좋은 사람들ㅡ가 이 모든 불필요한 시련에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 이 책은 이 "우리"를 중심에 놓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는 나의 시도다. 그러므로 이 책은 가난에 대한 책이지만 가난한 사람들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대신 가난하지 않은 반대편 절반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어떤 이들의 삶을 살찌우기 위해 어떻게 다른 이들의 삶을 위축시키는지에 대한 책이다.(38-40p)

 

 

크리스털, 그리고 그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가난은 물론 돈 문제이지만 온갖 문제들이 가차 없이 눈동이처럼 커지는 것이기도 하다.

가난은 통증, 육체적 통증이다. 몸을 굽혀서 노인과 환자를 침상과 변기에서 들어 올려야 하는 재택 간병인과 공인 간호조무사에게는 허리통증으로 체감된다. 우리의 주문을 받고 물건의 바코드를 찍는 동안 서 있어야 하는 계산원들에게는 발과 무릎의 고통으로 체감된다. 암모니아와 트리클로산이 들어 있는 제품으로 우리의 사무실 건물, 집, 호텔 객실을 청소하는 청소원들에게는 피부발진과 편두통으로 체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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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그런데 사회는 그걸 치료하는데 투자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고통에 대처할 때가 많다. 내 친구 스콧은 어릴 때 성폭력을 당했다. 성인이 된 그는 알약들을, 그 다음에는 펜타닐을 발견했다. 그는 한 번에 20달러를 내고 평화를 구입했다. 40대가 된 그는 약을 끊고 몇 년을 그렇게 버티다가 다시 약에 빠져서 호텔 방에서 혼자 죽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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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통증일 뿐만 아니라 불안정이기도 하다. 지난 20년동안 임차인들의 소득은 하락했지마 임대료는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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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선 이하인 임대주택 가정 대부분은 최소한 소득의 절반을 주택비로 지출하고, 네 곳 중 한 곳은 임대료와 공과금에만 소득의 70퍼센트 이상을 지출한다. 이런 여러 가지 요인들이 겹치면서 미국은 저소득 임차인들이 퇴거를 비일비재하게 겪는 나라가 됐다. 아비규환이 일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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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질 거라는 끊임없는 두려움이다. 미국인의 3분의 1은 버스 운전사, 농부, 교사, 계산원, 요리사, 간호사, 경비,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이렇다 할 만한 경제적 안정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 아직도 많은 이가 "빈민"으로 공식 집계되고 있지 않은데, 그렇다면 마이애미나 포틀랜드에서 1년에 5만 다러로 두 아이를 키우려고 발버둥 치는 이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주택바우처를 받을 자격은 안 되지만 주택담보대출도 받을 수 없을 때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임대료가 월급의 절반을 가져가 버리고, 학자금대출을 갚느라 월급의 4분의 1을 써야 하는 상황은? 어떤 달엔 빈곤선 저 아래로 추락했다가 다음 달에는 뭐가 더 나아졌다는 느낌도 없이 그 위로 조금 올라갈 때는? 실제 현실에서는 빈곤선 위에도 숱한 가난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훨씬 아래에도 많은 가난이 있다.

(...)

최신 국가 데이터에 따르면 미국인은 열여덟 명 중 한 명꼴로 "지독한 빈곤"속에 살고 있다. 이는 지면을 파고들어 가는 수준의 결핍을 말한다. 빈곤선의 절반 이하에 해당하면 지독한 빈곤으로 간주한다. 2020년에는 이 지독한 빈곤의 기준선이 1인의 경우 연간 6380달러, 4인 가족의 경우 1만 3100달러였다. 그해에 미국인 약 1800만 명이 이 조건 밑에서 목숨을 부지했다. 미국에서 지독한 빈곤을 겪는 어린이는 500만 명 이상으로 그 비중이 다른 어떤 선진국 보다도 많다.

(...)

가난은 당혹감과 수치심을 일으킨다. 과거 프랑스 사회학자 외젠 뷔레는 비참함은 "가난이 안긴 도덕적 감정"이라고 말했다. 한나절을 기다렸는데 당신이 등장하자 짜증을 부리는 사회복지사와는 10분짜리 면담을 하는 게 고작인 복지 사무소의 새로울 것도 없는 수모 대행진 속에서, 당신은 비참함을 느낀다. 창문에는 금이 가고 찬장에는 바퀴벌레가 버글대는데 집주인은 그 책임을 당신에게 뒤집어씌우는 아파트로 귀가할 때, 당신은 비참함을 느낀다.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손쉽게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대중음악과 아동 도서에서 누락되는지를 볼 때, 그리고 이런 말소가 당신이 더 넓은 사회와는 무관한 사람임을 상기시킬 때 당신은 비참함을 느낀다. 사위가 적막해지면 당신은 당신에 대한 거짓말을 믿기 시작할는지 모른다. 당신은 공공장소가 당신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고 믿고 공원과 해변을, 쇼핑 지구와 스포트 경기장을 피한다. 가난은 당신의 삶을 소진시킬 수 있지만, 가난이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은 거의 없다. 오늘날에는 누군가에게 당신이 파산했다고 털어놓는 것보다는 차라리 정신질환을 고백하는 게 사회적으로 더 용납받을 만한 행동이다.

(...)

가난은 쪼그라든 삶과 인성이다. 그것은 당신의 사고방식을 바꾸고 당신이 잠재력을 온전히 발현하지 못하게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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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앞에선 누구든, 결핍에 시달려 본 적이 없는 우리에게는 무분별해 보이는, 심지어는 명백히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병원 대합실에서 시계를 쳐다보며 좋은 소식이 전해지기를 기도하며 앉아 있어 본 적이 있는가? 그렇게 응급실 앞에 붙들려 있다 보면 다른 모든 걱정과 책임은 사소하게 느껴진다(실제로도 그렇다). 이런 경험은 가난한 삶과도 비슷하다. 행동과학자 센딜 멀레이너선과 엘다 섀퍼는 이것은 "대역폭 세금"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가난함은 밤을 꼬박 새우는 것보다 사람의 인지능력을 더욱 감소시킨다"라고 말한다. 가난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삶의 나머지 부분에 마음을 쓸 여력이 없다". 가난은 사람들에게서 안정과 안락만 박탈하는 게 아니라 지적 능력 역시 앗아 간다.

하지만 가난은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인종적 약점 때문에 심해지거나 인종적 특권 때문에 약화될 수도 있다. 흑인의 가난, 히스패닉의 가난, 미국 선주민의 가난, 아시아계 미국인의 가난, 백인의 가난은 모두가 다르다. 흑인과 히스패닉계 미국인은 백인 미국인에 비해 가난할 가능성이 두 배 높다. 켜켜이 누적된 인종적 유산도 문제지만 오늘날의 차별 역시 무시 못 할 원인이다.

(...)

가난은 물질적 결핍과, 만성통증과, 투옥과, 우우증과, 중독 등등이 겹겹이 누적된 형태일 때가 많다. 가난은 직선이 아니다. 사회적 병폐들이 단단하게 엉킨 매듭이다. 가난은 범죄, 건강, 교육, 주택 등 우리가 관심을 갖는 모든 사회문제와 관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가난이 끈질기게 이어진다는 것은 수백만 가정이 세계 역사상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안전과 안정, 품위를 거부당한다는 뜻이다.(49-62p)

 

 

하지만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됐다고 해서 빈곤이 줄어들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40년 전에는 돈이 많은 사람들만 핸드폰을 살 수 있었지만 지난 몇십 년을 지나며 핸드폰 가격은 전보다 감당할 만해졌고, 이제는 많은 빈민을 포함해서 미국인 대부분이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 점차 핸드폰이 일자리, 주택, 연인을 찾는 데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부 관찰자들은 "일부 소비재에 대한 접근은 가난한 사람이 어쨌든 그렇게까지 가난하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건 오해다. 핸드폰은 먹을 수 없다. 핸드폰을 생활임금과 맞바꿀 수도 없다. 핸드폰은 안정된 주택, 적정가격의 의료서비스, 적합한 양육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사실 핸드폰과 세탁기 같은 물건의 가격이 떨어지는 동안 생필품 중에서도 의료비와 임대료 같은 가장 필수적인 항목들의 가격은 올랐다.

(...)

마이클 해링턴이 60년 전에 표현한 대로 "미국에서는 괜찮은 집에 살거나 괜찮은 음식을 먹거나 괜찮은 치료를 받는 것보다는 괜찮은 옷차림을 하는 게 훨씬 쉽다".(66-67p)

 

 

미국에서는 결혼이 사치품 비슷한 것이 됐다. 결혼은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런 "결혼 관문"을 넘지 못하면 결혼의 연을 맺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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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 보유는 경제적 안정으로 귀결되는 게 아니라, 더 큰 경제적 안정으로 귀결된다. 보통은 자신이나 부모가 어느 정도 돈을 모은 뒤에야 집을 살 수 있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결혼은 이미 안정된 사람들의 안정을 더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양친으로 이루어진 가정이라는 부르주아적 모델은 부르주아를 만들어 낸 바로 그 물건, 그러니까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

만일 우리가 실제적인 경제 기회를 가난한 미국인들에게 확대할 경우 결혼은 보통 자연스럽게 뒤따른다.(81-83p)

 

 

이주나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빈곤에 대한 다양한 설명 방식들의 장점을 평가하는 것은 유용한 훈련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다 보면 언제나 다른 모든 곁뿌리들의 근원인 중앙의 원뿌리로 돌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책에서 그 원뿌리란 바로 가난이 상처이고 고난이라는 단순한 진실이다. 수천만 미국인이 가난해진 것은 역사의 실수나 개인적인 행동 때문이 아니다. 가난이 끈질기게 이어지는 것은 그걸 바라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86p)

 

 

우리는 보통 가난이 누군가에게는 이익이 되는 상황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보다는 책임 소재를 흐리는 이론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

미국의 빈곤을 설명하는 인기 있는 이론으로는 공장폐쇄와 그 주변 지역공동체의 황폐화를 유발한 탈산업화가 있다. "탈산업화"라니 이런 유체 이탈 화법이 또 있을까. 이 표현은 마치 숲이 나무좀의 공격을 받듯 미국에서 탈산업화가 이루어졌다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뭐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식의 인상을 준다. 이런 화법에서 가난은 사회학자 에릭 올린 라이트의 표현을 빌리면 "사회적 원인의 부산물"이다. "누구도 이 재난을 의도하지 않았고, 사실상 그 누구도 여기서 이익을 얻지 않는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불리한 환경이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다면 의도적으로 설계된 거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시스템 차원의"문제들ㅡ시스템 차원의 인종주의, 빈곤, 여성혐오ㅡ은 결국 현실적이든 관념상이든 자기 이익이라는 동기에서 조용히 내려진 숱한 개별 결정들로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시스템"은 우리로 하여금 웨이터에게 팁을 주지 않거나, 우리 동네에 저렴한 주택이 들어서는 걸 반대하는 투표를 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가난에서 온갖 방식으로 이익을 얻는다. 이보다 명백한 사회적 진실은 없다. 하지만 누군가 이런 말을 입에 올리면 긴장감이 가득해진다. 그걸 거론한 삶은 무례한 사람이 된다. 사람들은 의자에서 자세를 고쳐 앉고,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을 조용히 시키려 할 것이다. 마치 공공장소에서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무언가를 지적하는 어린이를 어머니가 쉿 하며 조용히 시키려 하듯, 또는 유리창에 던져진 벽돌처럼 난폭할 정도로 선명하고 깊은 도덕적 진실을 헤집는 포괄적인 자본주의 비판을 들먹이는 청년을 진지한 어른들이 조용히 시키려 하듯.

(...)

과거애 일어난 착취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토론할 수 있으면서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쥐어짜고 있는가로 대화가 넘어가면 자꾸 버벅대며 난감해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아마 우리가 매우 화가 나고 극단적인 형태의 착취만 떠올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농장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나, 광산에 보내진 어린 소년들이나, 면직물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 소녀들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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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등록 노동자들이 그런 노동조건을 스스로 선택했을까? 성인일 때 이주했다면 그렇다, 자신들이 선택한 게 맞다. 하지만 절박한 삶들이 착취적인 조건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그걸 찾아 나선다고 해서 그 조건이 착취가 아닌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의자에서 더욱 들썩인다. 어떤 사람은 그것보다 더 복잡한 문제, 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사회문제 대부분이 복잡하지만 복잡함 속에 몸을 숨기는 것은 비판적 지성의 증거라기보다는 사회적 지위의 반영에 더 가깝다. 배고픈 사람들은 빵을 원한다. 부유한 사람들은 전문가 집단을 불러 모은다. 복잡함은 강자의 피신처다.(89-93p)

 

 

미국에서 뇌에 여유 공간이 있고 목소리가 큰 일부 대중은 빈곤에서 벗어나려면 당사자들이 행동을 바꿔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 더 좋은 일자리를 얻어라. 아이를 그만 낳아라. 돈 문제에 대해 더 똑똑한 결정을 내려라. 하지만 실은 그와 정반대다. 더 나은 선택의 발판은 경제적 안정이다.(117-118p)

 

 

 

 

 

ㅡ 매슈 데즈먼드, <미국이 만든 가난> 中, ar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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