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6

 

https://www.khan.co.kr/world/world-general/article/202406191329001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24/09/09/how-to-give-away-a-fortune

위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인물이 언급한 책이 궁금했던 차에 번역되어 나왔길래 읽어봄.

1~5장 보다는 6~10장이 더 흥미로웠다. 이래저래 생각해 볼 만한 주제.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부에는 상한이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이것을 부의 제한주의라고 부른다.

(...)

하지만 부의 제한주의가 모든 것을 한 방에 해결하는 마법의 정책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먼저 밝혀두어야겠다. 부의 제한주의는 규제적 이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그곳에 도달하고자 우리가 노력을 경주하는 지향점이되, 세상이 현재 조직되어 있는 방식을 생각할 때 그곳에 정말로 도달할 수 있을 법하지는 않은 어딘가 인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이상으로 삼고 있는 것 대부분이 그렇다. 빈곤 타파라는 이상도 그렇고 차별 철폐라는 이상도 그렇다. 빈곤 타파나 차별 철폐가 규제적 이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들의 중요성이 적어지는 것은 전혀 아니다. 개인이 축절할 수 있는 부가 어느 정도를 넘지 않게 하자는 이상도 마찬가지다.(21-22p)

 

 

극도의 빈곤은 대체로 모든 이에게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노숙인의 형태이든, 늘 같은 옷을 입고 학교에 오고 학교에서 무상으로 주는 급식에 의존해야 하는 아이의 형태이든, 또 그밖의 어떤 물질적 결핍의 형태이든 말이다. 하지만 극도의 부는 종종 비가시적이다. 많은 나라에서 부자들과 슈퍼 부자들은 다른 이들의 시야에 드러나지 않으려 한다.

(...)

당연한 말이지만 불평등에는 양쪽이 있다. 불평등은 가난한 사람들이 더 가난해져서도 생기고 부자들이 더 부유해져서도 생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가난해지거나 중산층이 쪼그라들어서 불평등이 생길 때는 우리 눈에 더 잘 보이고 많은 사람이 피부로 이를 경험한다.

(...)

반면, 매우 부유한 사람들이 더 부유해지는 경우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별로 없고 우리 대부분의 일상도 적어도 곧바로는 달라지지 않는다. 1년에 한 번 나오는 '부자 순위'를 보거나 언론이 부의 분포에 대한 최신 통계를 보도하기로 했을 때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을 뿐이다. 즉 우리는 언론이 이 이슈를 보도하기로 결정했을 때만 상황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이 20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 불평등이 증가하기 시작한 것을 알아차린 사람이 매우 적었던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

그리고 불평등은 눈송이처럼 계속 불고 있어서 다루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피케티의 책이 나오고서 10년 동안 부자들은 더 부유해졌다. 옥스팜은 매년 글로벌 불평등 통계를 발표하는데 이 숫자는 매번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린다. 일례로 2020년에서 2022년 사이에 전 세계 상위 1%는 나머지 99%가 얻은 소득과 부의 두 배 이상을 얻었다.(42-44p)

 

 

과거에는 다들 너무 가난했지만 그 뒤에 전 세계적으로 극빈곤이 크게 줄었다는 지배적인 내러티브는 틀렸거나 오도의 소지가 있다. 이 내러티브에 대해 우리가 시급히 고려해보아야 할 반박 내러티브가 존재하며, 이 논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

첫째, '데이터로 보는 우리 세계'와 동일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일단 정보가 충분하지 않다.

(...)

특히 과거 사람들의 소득이 어느 정도였을지에 대한 추측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수치는 매우 정교하지 못하다. 그리고 경제학자 로버트 앨런이 지적했듯이 더 유의미한 데이터를 사용하면, 예를 들어 얼마를 버는지보다 무엇을 소비하는지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사회가 진보해왔다'는 내러티브는 붕괴한다.

둘째, '데이터로 보는 우리 세계'가 빈곤 통계를 낼 때 사용하는 빈곤선이 극단적으로 낮다. 이 빈곤선은 구매력 평가로 보정한 2011년 기준 하루 1.90달러다.

(...)

우리는 이 빈곤선의 의미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것은 빈곤이 아니라 극빈곤이다. 또한 우리가 사회 발전의 주요 지표로 이 빈곤선을 사용한다면 기준을 너무 낮게 잡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65-67p)

 

 

우리 대부분은 계급이 우리 사회와 삶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른다.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민권 운동과 해방 운동이 성공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이제는 모두가 동등한 기회를 누린다고 믿게 되었다. 모두가 동등한 기회를 갖고 있다면 계급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안 그런가?

이와 함께, 거의 모든 곳에서 노조가 꾸준히 쇠락하고 노조 파괴까지 자행되면서 계급 간 차이에 대해 대중의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하던 주요 제도 하나가 약화되었다. 더 은밀한 변화도 있는데, 서로 다른 계급 사람들이 섞일 기회가 점점 더 없어지는 방향으로 사회가 달라진 것이다. 주거, 교육, 의료 등이 대체로 계급선을 따라 분절되어 있고, 유럽에서는 탈종교화가 진전되면서 모든 사회 계층이 모이던 곳 중 하나가, 즉 교회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이 오는 곳이 아니게 되었다. 보편 징집의 폐지도 상이한 계층 사람들을 한데 모이게 하던 몇 남지 않은 제도 하나를 없앤 격이 되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삶과 그들이 직면하는 제약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도 이러한 변화 때문에 우리가 불평등 정도를 실제보다 더 낮게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실제보다 높게 평가하고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른 이들보다 얼마나 더 많이 가졌는지를 실제보다 작게 생각한다.(80p)

 

 

물론 전쟁 범죄나 국가 부패는 슈퍼 부자들이 타인의 삶에 피해를 끼치면서 막대한 돈을 버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또 다른 유형의 부정한 돈으로는 기업이 소비자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면서 버는 돈이 있다.

새클러 가문을 보자. 이들은 미국 제약회사 퍼듀파마의 소유주이고, 이 회사는 옥시콘틴이라는 오피오이드 진통제를 판매했다. 1990년대 말에 퍼듀파마는 오도의 소지가 있는 마케팅을 공격적으로 전개하면서 1차 의료기관의 일반의들에게 옥시콘틴을 판촉했다. 옥시콘틴이 식품의약국 승인을 받고서 6년간 퍼듀파마는 사실이 아닌 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이 약이 다른 진통제보다 중독성이 적다고 광고했다.

(...)

기업인이 버는 부정한 돈은 이게 다가 아니다. 내가 저지른 잘못의 비용을 다른 이들이 치르게 함으로써 부정직하게 돈을 버는 방법도 있다. 물론 기업은 때로 실패를 한다. 사업을 영위하는 데는 리스크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사업에서 나오는 돈은 기꺼이 취하면서 무언가가 잘못되었을 때의 비용은 다른 사람들이 지게 한다. 어떤 경우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비용이 너무나 큰데, 종종 이 비용은 납세자를 포함해 모든 시민에게 퍼지고 기업 소유주의 평판에 대한 피해는 흩어져버린다.(111-113p)

 

 

법의 테두리 안에서 세금을 회피해 납부를 최소화하도록 도와주는 산업이 존재한다. 금융 전문가, 법률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이 산업은 재산 방어 산업이라고 불린다.

(...)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세금을 안 내는 개인과 조세 당국 사이의 이슈도 아니다. 이것은 '사회 계약'의 핵심과 관련한 문제다. 정부가 조세 회피와 포탈로 세수를 잃으면 모든 사람이 손해를 본다.

(...)

재산 방어 산업을 고용할 만큼 부자가 아닌 사람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족한 세수를 메우기 위해 세금을 더 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는 자신이 '똑똑해서' 세금을 안 냈다고 말했지만 세금 회피는 똑똑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이기적이고 비애국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이것은 부의 극단적인 집중과 매우 관련이 크다.

(...)

즉 그들은 로비를 하고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해서 법이 한층 더 금권정치적 속성을 갖게 했다. 첫째, 조세 부담을 자본에서 노동으로 옮기고, 둘째, 최고세율을 낮추고, 셋째, 더 많은 구멍과 맹점을 도입하면서 말이다.

(...)

이제 미국에서는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의 실효 세율이 같다. 아주 부자인 경우는 예외인데, 근로 소득이 없고 재산 방어 산업의 도움을 최대로 받기 때문에 이들은 심지어 세율이 가장 낮다.(131-133p)

 

 

미래에 도움을 얻을 것을 기대하면서 제공하는 거액의 후원금은 명백히 정치적 평등의 원칙을 훼손한다. 하지만 미국 정치철학자 토머스 크리스티아노가 지적했듯이 위험에 처한 민주적 가치는 이것만이 아니다. 돈으로 표를 샀을 때, 선출된 정치인은 돈을 댄 사람의 이해관계를 보호하는 정책들을 추진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정책들을 추진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모든 사람이 부담한다. 돈으로 표를 사는 것은 사회 전체가 지출하는 비용에 무임승차하는 것이다. 소수의 거액 기부자에게 득이 되는 입법을 하는 과정에 우리 모두가 돈을 대고 있는 것이다.(151p)

 

 

누군가가 자신의 부를 진정으로 온전히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만 벌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부의 제한주의 주장의 핵심이자 기본적인 철학적 원칙들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부의 제한주의는 근본적인 철학적 통찰 하나에 토대를 두고 있다. 시장과 재산은 사회적 제도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본래의 세상에는, 즉 사회적 맥락을 떠나서는, 재산도 없고 시장도 없다는 의미다. 재산과 시장은 공유된 규칙과 규범의 시스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는 그것을 조율하는 기관, 일반적으로는 정부가 큰 역할을 한다. 대개 우리는 재산을 시장 교환에서 얻는데, 그 시장은 정부에 의해 구성되고 정부에 의해 보호되며 정부에 의해 작동이 가능해진다. 시장에서 우리가 갖는 이해관계를 보호해주는 정부가 없다면, 우리는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1651년 저서에서 '자연 상태'라고 묘사한 상태로 가게 될 것이다.

(...)

그런데 정부가 존재하려면, 그리고 이러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으려면 자원이 필요하다. 정부는 반드시 세금을 걷어야 한다. 세금 없이는 정부가 우리 재산을 보호할 수도 없고 시장에서 사기나 절도를 막아 시장 거래가 제대로 이뤄지게 할 수도 없다.

여기에서 근본적인 철학적 논지는 조세 없이는 재산권 보호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국가가 없다면 우리가 아는 대로의 재산은 존재할 수 없고 세금이 없다면 국가가 존재할 수 없다. 제도가 존재하기 전에는 재산도 존재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조세 제도와 정부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동일한 사회경제적 시스템의 일부다.

(...)

과세에 반대하거나 과세가 '도둑질'이라고까지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금 없이는, 즉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사회 계약 없이는 소득도, 재산도, 안정적 거래도, 매끄럽게 작동하는 시장도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 계약이 없다면 위험과 혼란만 있을 것이다.

(...)

많은 자유지상주의자, 경제적 보수주의자, 신자유주의자들이 믿는 것과 달리 세전의 소득과 부의 분포는 정부의 개입과 지속적인 사회적 협력 없이 나타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정부가 손대지 말고 내버려두어야 할 '자연스러운' 재산의 분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소득과 부에 대한 어느 정도의 과세는 늘 합당하고 정당하다.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얼마나 많이 걷어야 하고 누구에게 걷어야 하는지, 그리고 시장의 공정성을 보장하고, 공정하고 포용적인 사회 계약이 유지되게 하려면 그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다.(202-205p)

 

 

상속받은 재산을 자신이 마땅히 가질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상속으로 무엇을 얼마나 갖게 되는지는 단순히 운으로 정해진다. 당신이 수백만 달러를 상속받는다면 이는 운 좋게 슈퍼 부자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재산에 대해 당신에게 도덕적으로 자격이 있다고는 어떤 의미로도 말하기 어렵다. 누구도 부모를 선택하거나 태어난 장소와 시대를 선택할 수 없다. 철학자들은 많은 주제에서 의견이 다르지만 상속받은 재산이 가질 자격이 없는 재산이라는 데는 일반적으로 일치를 보인다. 상속받은 그 부에 대해 어떤 노력이나 의사결정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몰수적 성격의 과세를 엄격하게 적용해 상속을 완전히 철폐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 질문을 기꺼이 던져보아야 한다. 철학자 D.W 해슬릿이 언급했듯이, 우리는 정치 권력의 상속을 철폐했다. 경제 권력의 상속 또한 철폐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상속세(또는 유증세)에 반대하는 표준적인 논리는 물려주는 사람이 자기 돈을 자기 마음대로 쓸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맞는 논리가 될 수 없다. 사회는 자유가 다른 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행사될 경우 다양한 방식으로 제한을 가한다. 우리는 단지 그러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스토킹하거나 납치할 수 없다. 피해자의 기본적인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액의 상속은 다른 사람들에게, 또한 사회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기회의 평등을 훼손한다. 사회의 계층 이동성도 훼손한다. 또한 [상속받는 사람에게] 역인센티브를 발생시킨다. 평생 쓸 돈이 있는데 왜 힘들게 일하겠는가?

(...)

문제는 상속이 막대하게 불평등하다는 점이지 상속 자체가 아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대규모 상속이 문제다. 작은 액수를 물려받는 것은 사회적 계층 이동성이나 기회의 평등을 저해하지 않고, 당신이 재능을 낭비할 기회를 주지 않으며, 모두를 위한 복지나 번영에 기여해야 할 돈을 해변에서 테킬라를 마시는 데 쓰게 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상속세에 대해 더 자주 제기되는 또 다른 반대는 상속세가 '이중 과세'라는 주장이다. 상속하는 사람은 그 돈을 벌었을 때 이미 세금을 냈는데 나중에 자녀에게 이전할 때 세금을 또 내야 한다. 같은 돈에 두 번 세금을 내는 것이니 불공정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상속[물려받는 것]에 과세하는 것과 유증[물려주는 것]에 과세하는 것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상속은 받는 사람 입장에서 소득이며(그리고 불로소득이다), 원칙적으로 모든 소득에는 세금이 붙는다. 교사는 봉급을 받고, 여기에는 세금이 붙는다. 가게 주인은 수익을 올리고, 여기에도 세금이 붙는다. 음악가는 음반을 팔고, 여기에 세금이 붙는다. 소득에 세금을 물리지 않는 경우는 소득이 아주 낮을 때뿐이다. 대개 소득이 매우 낮은 사람은 세금이 면제된다.(206-210p)

 

 

매우 재능이 있는 사람들끼리 경쟁할 때는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재능의 작은 차이보다 운이 훨씬 더 중요하다.

(...)

능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은 실증근거로도 확인된다. 능력이 뛰어나야 높은 자리에 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노력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능력도 있고 노력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의 수가 최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자리의 수보다 훨씬 많다. 누가 그 업계의 꼭대기를 차지해 막대한 보수를 받을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운, 그리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이 서로를 판단할 때 갖게 되는 편향이다.(217p)

 

 

이 모든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몇몇 고려 요인에 따른 어느 정도의 보수 격차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사회가 특정한 직무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가, 그 일을 하기에 필요한 능력이 얼마나 희소한가, 그 능력과 숙련이 그 사람에게 얼마나 잘 발달되어 있는가, 그 일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이는가, (...) 아마도 10배 정도까지는 정당화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돌봄 노동자와 1년에 수백만 달러를 버는 CEO 사이의 막대한 간극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222p)

 

 

하지만 더 큰 정부가 늘 사람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 정부는 너그러운 복지 국가 정부만큼 큰 정부일 수 있고(국민소득 대비 정부지출 비중 기준), 그러면서 재분배와 사회적 지출에 들어갔던 돈을 복지 수급자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데 쓰고 있을 수 있다. 이는 몇몇 유럽 정부들이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한 이후에 실제로 나타나고 있는 일이다. 그들은 공공 영역과 복지시스템 전반에서 규제와 모니터링을 켜켜이 늘렸다. 표방된 목적은 무임승차나 '복지 사기'를 막는다는 것인데, 실제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거짓이 없는지 따져봐야 할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정책은 복지 수급자들에 대한, 또는 공무원의 직업 의식에 대한 과도한 불신을 보여준다.

(...)

어떤 '큰 정부'들은 납세자의 돈을 공공의 후생과 재분배에 사용하지만, 어떤 '큰 정부'들은 매우 비효율적이며 통제 메커니즘이나 지정학적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군사 인프라에 많은 돈을 사용한다. 이 모두가 그들이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느냐의 문제다.

아마도 이 모든 요인 때문에, 어떤 부유한 자선가는 정부에 맡겼을 때 정부가 자신의 부를 잘 분배해주리라는 신뢰를 갖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

다른 말로, 일부 슈퍼 부자들이 정부가 작아야 한다고 믿는 한 가지 이유는 경악스러울 정도로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계급적 편견이 그들 자신과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정당성 있는 리더이며 자신의 부가 그 증거라고 생각한다.

(...)

이들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에 스스로의 문제를 탓해야 하며, 다시 이는 그들이 정책 결정에 참여하기에는 부적합한 사람들임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또한 정부는 엘리트 계층이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으로 선출되어 대중이 운영하므로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신뢰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정책 결정은 매우 부유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권력을 주어서 그들 손에 맡기는 게 더 낫다. 그들이 막대한 부는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가끔 자선 기부로 부의 일부를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주사놓듯 찔끔찔끔 흘려 넣게 하면서 말이다.(274-278p)

 

 

'너무 많은 돈'이 저주의 다른 형태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아주 많다. 애비게일 디즈니는 부자가 되는 것이 그 사람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부유한 사람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행사하게 되는 권력이 일으키는 정신적 부담을 이야기했다.

(...)

그런 계산은 내 자아에서 무언가를 떼어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너무나 나를 소진시킵니다. 정서적으로 너무 지치게 돼요. 어떤 사람을 돕고 어떤 사람을 돕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고 이런 계산 자체를 하지 않기로 해버리면, 길거리의 노숙인을 무언가 인간이 아닌 존재로 낮추어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당신은 당신에게서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는 사고를 발달시키게 됩니다. 도움을 달라는 요청은 정말 말도 못하게 많습니다. 어떤 공간에 들어갔을 때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내가 도와주기를 원하는 사람, 그리고 그러한 필요를 발생시키는 상황을 내가 바꿔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없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303-305p)

 

 

미국인들이 현재와 같은 불평등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왜 더 많은 재분배를 위해 투표하지 않을까? 다른 나라에서 이루어진 연구들에서도 동일한 패턴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실제의 자산 불평등을 대폭 과소평가하고 있었고 그렇게 축소해서 생각하고 있는 정도보다도 더 작은 불평등을 원했다. 임금 불평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불평등의 정도를 실제보다 낮게 생각했고 그것보다도 더 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임금 불평등을 작게 인식하는 정도는 현저했다. 한국 연구에서 응답자들은 CEO가 저숙련 노동자보다 10배 정도 더 벌 것이라고 생각했고 4.6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데이터가 존재하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연구 당시에 CEO 임금과 저숙련 노동자 임금의 비는 10대 1보다 훨씬 높았다. 미국은 354배, 독일과 스위스는 거의 150배였다.

(...)

이것이 왜 중요할까? 불평등이 높다고 인식하고 있으면 사람들은 재분배를 강하게 요구할 것이다. 반면, 지금처럼 불평등이 실제보다 작다고 잘못 생각한다면 재분배 요구는 미미할 것이다.

(...)

이를 염두에 두면, 부자들이 돈에 대해, 특히 부자와 슈퍼 부자들이 얼마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왜 꺼리는지 알 수 있다.(320-321p)

 

 

극단적인 부를 (또한 빈곤도) 한 방에 없앨 수 있는 마법의 약은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를 잘 알고 있으며, 대부분의 활동가와 단체들은 다양한 수준에서 광범위한 제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도 부의 제한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 또는 평등을 향한 어떤 종류의 진보에도 반대하는 사람들은 부의 제한주의나 평등주의를 마치 그것이 단 한 가지 제안인 것처럼 과장해 단순화한다.(332-333p)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지식인, 기업인, 정치인들이 우리로 하여금 정부는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공무원들은 이기적이고 자유시장은 다른 모든 것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믿게 만든, 잘 조직화되 노력의 결과였다. 이러한 노력은 주류 미디어의 내러티브를 바꾸었고, 학생들이 학교와 사회에서 배우는 내용을 바꾸었으며, 기업인과 공직자들이 사용하는 어휘를 바꾸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인 사회·경제 조치들이 구체적으로 도입되면서 우리 세계는 경쟁과 탐욕이 지배하는 사회로 바뀌었다. 신자유주의는 나라마다 다른 형태를 띠었지만, 그것이 자연스럽거나 불가피하게 온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추동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실행하고 강화하기로 의도적으로 선택한 데서 나온 결과였다는 점은 모든 곳에서 같았다.

좋은 소식은, 우리가 선택을 통해 신자유주의를 바꿀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점이다.(335p)

 

 

노동 소득에 자본 소득보다 높은 세율이 적용되는 것이 불공정하다는 데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많은 국가의 현실이다. 네덜란드에서는 가장 최근의 굵직한 세제 개혁이 있었던 2001년에 노동 소득과 자본 소득에 동일한 세율이 적용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작은 수정이 야금야금 이뤄져 자본 소득에 예외가 몇 차례 적용되면서 노동 소득이 자본 소득보다 세율이 11% 높아졌다.

(...)

이러한 내용은 2022년에야 대중에게 알려졌다. 정부의 의뢰로 진행된 한 연구가 모든 관련 기관과 정당에서 정보를 확보해 분석한 결과였다. 이러한 정보가 없는 국가에서도 비슷한 연구를 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면 평등주의적이라는 평판을 가지고 있는 국가에서조차 조세시스템이 노동보다 자본에 유리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346-347p)

 

 

나는 상속을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에게 각각 해당될 도덕적 고려 사항들을 감안해 위와 같은 제안의 약간 변형된 버전을 제안하고자 한다. 도덕적인 관점에서, 상속받는 사람은 그 부를 상속받을 자격이 전혀 없고, 상속하는 사람은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 자신의 소비를 줄여가며 저축을 늘린 것에 대해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모두 고려해서, 내 제안은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받을 수 있는 상속과 증여에 제한을 두고 그것을 넘으면 모두 조세 수입으로 귀속시켜 그 국가의 시민들에게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국가는 상속세 세수를 다른 세원에서 나온 것과 함께 일반 세수로 합쳐서 도로, 학교 등 공공 지출에 쓸 수도 있지만, 또 다른 그리고 아마도 더 나은 대안도 있다. 상속세고 들어온 돈은 국가의 모든 젊은이에게 재분배하는 용도로 지정해 모든 젊은이가 이전 세대의 부를 나누어 받게 하는 것이다.

(...)

두 번째 이유는 상속세 수입은 젊은 층에게 재분배하면 현재 심각한 수준인 세대 간 불평등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많은 연구자가 세대 간 불평등 때문에 젊은이들이 크게 불리한 처지에 있게 되었다고 우려한다. 종종 상속은 80대인 사람이 사망하면서 50대인 자녀에게 물려준다. 상속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들은 상속 재산을 실제로 받기 전에 이미 상당한 이득을 누린다. 나중에 돈이 생길 것을 알기 때문에 학자금 대출이나 모기지 대출을 더 쉽게 결정할 수 있다. 또 이들은 부모 생전에 상당한 증여도 이미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상속세로 거둔 세수를 20대 중반인 사람들에게 재분배하면 전체 인구의 번영에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모든 젊은이가 성인으로서의 삶을 돈에 대한 부당한 걱정 없이 시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348-349p)

 

 

 

ㅡ 잉그리드 로베인스, <부의 제한선> 中,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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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

 

이 책을 통해 궁금해 진 책은 존 케이지의 '사일런스', 롤랑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 일레인 스캐리의 '고통 받는 몸'. 그 중 존 케이지 책이 제일 궁금함.

 

 

 

 

예전에 현대소설강독 수업을 들었을 때가 기억난다. 에세이는 아니고 소설가에 대한 얘기였지만, 소설가에게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강렬한 원체험 같은 것이 있는데, 그 자전적인 요소를 너무 성급하게 소설로 써버리면 이제 다음 소설을 써 나가기가 난망하다는 것이었다. 교수님은 그것을 '씨암탉 잡기'에 비유했다. 크게 대접해 보겠다고 집에 하나 있는 씨암탉을 잡고 나면 더 이상 대접할 게 남아 있질 않는 것이다.(15p)

 

 

쓸 것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써야 한다. 그런데 왜 쓰고 있는 거지?

이 '왜'라는 질문이 늘 골칫거리다. 누군가는 돈 때문이라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즐거움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단 나는 돈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는 아직 그 단계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고 싶긴 하다······) 글쓰기가 전혀 돈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

그렇다면 즐거움 때문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고통과 불안, 초조함, 답답함, 민망함과 절망, 기타 등등을 섞은 이 감정이 마냥 즐거움인 것 같지만은 않다.

최근에는 더욱 글쓰기의 즐거움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돈이나 문학적 명성, 권위 등에서 자유로워져야 하며, 글쓰기라는 활동이 주는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즐거움이라는 것을 별로 믿지 않는다. 물론 나도 글쓰기를 비롯한 이런저런 일들에서 때때로 즐거움을 느끼며 그럴 때 매우 기쁘고 만족스럽다. 내가 의심하는 것은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즐거움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즐거움 때문에 한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내적인 충만함, 즉 외부의 간섭 없이 주체적으로 시작되며 동시에 그것 자체만으로 만족스러운 어떤 활동이라는 환상이 필요하기 때문일 때가 많다.

'스스로의 즐거움이 가장 큰 동력이어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어떤 활동을 하는 사람을 북돋아 주는 말이라기보다 순수한 즐거움을 동력으로 삼지 못하는 주체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말일 가능성이 높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는 익숙한 호통과도 닮아 있다. 그런데 왜 하지 말라는 것일까? 사람들은 때때로 하기 싫은 것을 하고 싶어 한다. 더 단순히는 하기 싫어서 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때때로 우리는 괴로움을 원하며 그것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다.

동시에 그런 말은 행위에 내재한 어떤 근본적인 이유 없음을 은폐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유라는 건 뭔가를 하지 않으려고 할 때 필요한 것이다. 뭔가를 하는 데에는 큰 이유가 필요하지 않고 사실 이유가 거의 혹은 전혀 없을 수도 있다. 글을 쓰는 사람한테 왜 이런저런 종류의 글을 쓰냐고 물어보면 이런저런 이유들을 열심히 떠올려 보고 짜맞춰 보지만 잘 맞아떨어지지가 않고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글을 쓰지 않는 사람에게는 항상 완벽한 이유들이 있다. 그 이유들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언제나 맞아떨어진다.

(...)

어디서 어떤 경로로 글쓰기의 의무가 찾아오는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느 순간 글을 쓰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글쓰기라는 의무를 부여하며, 그 이후로는 의무에 충실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선택이 남아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무의 특성은 그것이 나에 의해 부과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일단 부과되고 난 후에는 나의 타자가 되어 나의 바깥에서 나를 강제한다는 점에 있다. 그것이 나의 바깥에 있기에, 나는 내가 왜 그러한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의무는 여타의 이유 없이도 글쓰기라는 행위를 지속할 수 있게 해 준다. 푸코는 글쓰기의 즐거움이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질문에 대해서는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는 다만 글쓰기란 그것이 존재하는지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글쓰기의 동기가 자신의 즐거움이나 괴로움, 기쁨, 슬픔 등의 감정과 무관한 층위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27-31p)

 

 

재능이란 질리기의 능력이다. 질린다는 건 아주 중요한데, 왜냐면 사람은 질리지 않으면 절대 다른 것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뭔가를 패배 때문에 그만둔다는 건 낭설이다. 나는 패배 때문에 그만두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질리지만 않으면 아무리 많이 져도 그것을 계속한다. 때문에 빨리 질리는 것만이 다른 것을 시도해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천재들은 뭔가를 해 보기도 전에 벌써 질려 한다. 벌써 재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재미있는 부분으로 곧장 진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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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노력은 무엇인가? 극장에 가는 걸 싫어한다는 정지돈에게 금정연은 묻는다. “싫어하는 것치고 극장에 너무 자주 가는 거 아니에요?” 그러자 정지돈은 이렇게 대답한다. “정연 씨,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사는 사람은 없어요.” 이게 노력이다. 하기 싫어도 하는 것.(41-42p)

 

 

나는 모든 글쓰기가 그 자체로 소중하며 가치 있다는 식의 말이 그다지 사실에 가깝지 않고 별로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글쓰기는 그 반대의 사실에 접근해 가는 과정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존 케이지는 연주자들에게 자유를 부여한 자신의 작업이 종종 형편없이 연주되는 것을 듣는다고 이야기한다. 자유롭게 하면 되는 것인데 거기에 어떻게 좋고 나쁨이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아무렇게나 한다는 것은 결국 신중하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만약 연주가 잘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연주자들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자신의 익숙한 취향이나 기억에 의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49p)

 

 

사실 예전에 나는 꼰대와 호구라는 주제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당시 내게는 사람들이 가장 되기 싫어하는 두 개가 꼰대와 호구인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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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이 바뀌어서 요즘에는 자신을 꼰대라고 부르는 것이 어느 정도는 스스럼없는 분위기도 생겨난 것 같다. 물론 자신을 ‘젊은 꼰대’라고 부르는 경우는 대부분 좋지 않다. 어떤 사람이 사십 대인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영 포티’에는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기에는 말하자면 체리피킹을 하려는 얄미운 셈속 같은 것이 느껴진다. 어쨌든 내가 꼰대와 호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꼭 남들과 다른 방향을 무조건적으로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다. 거기에는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

 

꼰대의 좋은 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감각이 있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다.

·····장점이 두 개면 충분히 많은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정말 만족을 모른다. 정말이지, 이래서 세상이·····

 

하지만 장점이 두 개뿐이라도 꼰대적인 것은 글쓰기에 필수저인 어떤 측면을 가지고 있다. 사실 많은 작가들이, 아니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꼰대였다.(106-107p)

 

 

그것이 우리가 또한 호구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일단 여기에는 늘 그렇듯 실용적인 장점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호구가 되기 너무 싫어하는 나머지, 호구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피해마저도 감수하려 한다.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기꺼이 감수하는 피해의 양은 가끔 보면 기가 질릴 정도이다. 내 생각에는 그냥 호구가 되는 것이 낫다·····

그리고 그건 전혀 나쁜 일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이다.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호구의 사례를 참조해 보자.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내놓으라고 한 사람, 그러니까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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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말을 하면 지금은 시대가 훨씬 삭막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럴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말하자면 예전에는 한쪽 뺨을 맞았을 때 다른 쪽 뺨을 내놓으면 상대가 거기서 더 때리지 않을 정도의 도리라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 존재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그러니까 어떤 좋은 것이 예전에는 가능했지만 이제는 가능하지 않으므로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변명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존재해 왔던 사람의 유형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다른쪽 뺨을 내놓으라고 했을 때도 이미 그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그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향해 말을 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때도 사람들은 그렇게 착하지 않았다. 착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으면 애당초 예수님이 그렇게 죽지 않았겠지····· 그렇지 않나?

구체적으로 호구의 덕목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는 우선 수용하는 사람(자신의 뜻을 현실로 관철할 힘이 없음)이다. 그리고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귀가 얇고 잘 속아 넘어감)이며, 용서하는 사람(복수를 할 역량이 결여되어 있음)이다····· 물론 조금 그렇다. 딱 보기에 별로 좋아 보이지만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원치 않게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좋은 일 아닐까?(111-112p)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에는(한국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단지 내가 외국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뭘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심지어 뭘 하는 방법을 알아보려고 유튜브를 찾아봐도 태반이 하지 말라는 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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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는 출판을 전제로 쓴 일기가 언제나 보기 흉한 나르시시즘으로 빠질 수밖에 없으니 하지 말라는 요지의 글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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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싫어하는 것이 있고 거기엔 아무 문제도 없다. 출판을 의식하며 쓴 일기에는 실제로 위와 같은 단점이 어느 정도는 있을 것이다. 물론 꼭 출판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하더라도 타자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문제 제기도 가능하겠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 이전의 문제이다. 말하자면 글을 쓰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싫어하는 것에 아주 거창한 이유를 붙이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 같다. 마치 내가 무엇을 싫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윤리적이거나 미학적인 근거가 있어야 하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내가 무엇을 싫어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윤리적이거나 미학적인 근거가 있다고 말하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이러저러해서 난 별로던데'라고 쓰는 경우는 별로 없다. 언제나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심각하고 중대하며 근본적인 문제가 숨겨져 있다. 하지만 정말 늘 그런 것일까? 일레인 스캐리는 한 글에서 예술가들이 괴로움을 표현하는 일에 대한 경계를 표현한 적이 있는데, 나는 그것이 보다 일반적으로 글을 쓰는 이들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스캐리는 이렇게 썼다.

 

예술가들이 성공적으로 괴로움을 표현한 탓에 예술가 집단이 가장 진정으로 고통받는 사람들로 여겨지고, 그래서 도움이 절박하게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서 의도치 않게 관심을 빼앗을 위험이 있음을 창작자는 인지해야 한다.(125-127p)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세상에는 사소한 일들도 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들ㅡ그중에서도 특히 비평가라고 불리는 이들ㅡ에게 사소한 것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내가 겪었던 일이기도 한데, 예전에는 누군가가 무슨 글이나 생각을 옹호하면 곧바로 그 사람을 아우슈비츠의 옹호자로 만들어주는 일종의 거대한 비평적 미끄럼틀 같은 것이 있었다. 잘 세워진 도미노처럼 작은 블록 하나를 건드리면 그것이 다른 블록들을 무너뜨리면서 곧장 대학살의 현장으로까지 향하는 것이다. 이 도미노는 완벽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어서 결코 도중에 멈추는 법이 없다. 은유를 좋아한다고요? 은유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아시나요?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 그러한 작동 방식을 옹호하던 사람들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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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무엇이 정말 나쁜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구제할 수 없이 불의에 속할 것이 매우 확실한 몇몇 사례나 억압의 장치들이 있기는 하지만, 전면적이고 근본적으로 악을 단언할 만한 것이 얼마나 많을까? 미셸 푸코는 이 주제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해 온 사람 중 한 명이다.

나는 어떤 것은 '해방'의 층위에 속하고 또 어떤 것은 '억압'의 층위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강제수용소처럼 확신을 가지고 그것이 해방의 도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주어진 체계가 얼마나 공포를 부추기든 간에, 어떠한 저항도 사전에 막아 버리는 고문과 처형을 제외한다면, 언제나 저항과 불복종, 대항 세력화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ㅡ이는 일반적으로 간과되는데ㅡ고려해야만 합니다.(128-129p)

 

 

우리는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플로베르에게 이 자가당착은 다름 아닌 예술과 글쓰기가 시작되는 곳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결코 피할 수 없는 어떤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가 종종 사용하고는 하는 '내로남불'이라는 비난은 대부분 적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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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비난의 문제는 우리가 마치 자가당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 준다는 데에 있다.

결국 모두가 똑같으니 누군가를 절대 비판해서는 안 된다거나, 혹은 손바닥 뒤집듯 그때그때 마음 편하게 말을 바꿔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나는 우리가 자가당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 달라지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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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맞다. 문제는 누가 태도를 바꾸고, 이전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 혹은 자신이 하는 말과 들어맞지 않는 행동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그런 일은 결국 누구에게나 일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무엇이 싫다고 하기 전에 내가 언젠가 그것을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 비판은 어딘가 다르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그것은 어쨌든 사태에 대해 조금 더 다각도로 생각하는 한 방법일 것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언제나 그 조금의 차이가 매우 중요하게 느껴진다.(133-135p)

 

 

어떤 작가가 작품집을 내고 나면 뭔가 다음 작품집에서는 다른 것을 보여 주기를 바라는 심리가 있다. 자신이 '이미 본 것'에는 더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심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대의 경우 또한 고려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볼 때 그것이 달라지기를 바라면서 보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실제로는 보았던 것을 또 보고 싶어서 보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예컨대 부코스키의 새로운 책을 읽을 때 나는 그 사람이 뭔가 다른 걸 보여 주리라 생각하기보다는 저번 책에서 보여 줬던 걸 또 보여 주기를 바란다. 종종 도가의 일화를 인용하기 좋아하는 존 케이지는 이렇게 쓴다. "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무언가를 하다가 2분 후 지루해지면 4분을 더 시험해 보아라. 그래도 지루하다면 8분, 16분, 32분 등등으로 시간을 늘려라. 마침내 그것이 절대 지루하지 않으며 아주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는 꼭 감상의 영역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글쓰기가 자신의 고유성을 주장하는 방식, 즉 우리가 스타일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반복과 관계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역시 한 벌의 옷만 입고 다녔다.

(...)

나는 체구가 아주 작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자들이 입는 옷을 입지 못한다. 평생 동안 그 난관, 그 문제와 싸웠다. 너무 작은 여자라는 사실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도록 옷이 절대 눈에 띄지 않게 할 것. 늘 똑같이 입어서 사람들이 나의 키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도록 할 것. 늘 똑같이 입어서 사람들이 나의 키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도록 할 것. 똑같이 입는 이유가 아니라 그냥 똑같이 입는다는 사실이 눈에 띄도록 할 것. 이제 나는 가방도 들지 않는다. 늘 같은 옷을 입고 다닌 뒤로 삶이 달라졌다.

종종 변화에 대한 압박감은 새로운 글을 쓰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뒤라스에게 스타일의 반복은 스타일 그 자체를 달라지게 하지는 않지만, 그것 외의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157-159p)

 

 

조금 이상한 말일 수 있지만, 나는 나와 관련된 것이라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위험한 것 같다. 그러한 생각은 자체로 권리라는 개념을 가리키고 있는데, 시몬 베유는 이 개념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에겐 권리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겐 그런 것을 표현할 단어들이 없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정의라는 단어로 만족을 했지요." 시몬 베유는 우리가 그리스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 지점에서는 나도 그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현재 우리의 상황에서 중요한 건 오히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늘어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혹은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영역을 축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사례에 한정해서라면, 나는 작가가 자신의 텍스트에 대해서 그 정도의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작가가 텍스트를 써서 발표한 이상 어떤 통제 불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영역이 있다고 생각한다. 저작권이란 좋게 봐주더라도 편의상의 조치에 가깝지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일 수 없다. 더군다나 사후까지 자신의 텍스트가 자신이 생각했었던 방식으로만 유통될 수 있어야 한다는 발상은······ 아무래도 누군가의 작가적 세계라는 것이 그 정도로까지 중요한 것일 수 있을까 싶은 것이다. 물론 이것이 어느 정도는 이상적이고 또 위험성도 있는 생각이라는 것은 나도 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통제해야 할까?(175-177p)

 

 

그런데 통제를 하지 말라는 말이 꼭 무엇인가를 더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말,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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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은 반대에 가깝다.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자연스러운' 경향성이며,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작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연스럽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지면 가라앉는다.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물에 뜨게 만들어져 있는데도 말이다. 자유라는 말도 비슷한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해야만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들이야말로 거기서 거기이며 대개 비슷하고 진짜로 흥미롭지 않다. 우리는 종종 어딘가에 갇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문제는 대개 같은 곳으로 탈출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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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 말씀드리지만 내가 폭력적이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일반적으로 평가라는 것은 꼭 자동차와 같죠. 차종을 선택할 수도, 나아갈 방향을 택할 수도 없어요. 제일 먼저 도착하는 걸 빼앗아 잡아타야 해요. 폭스바겐이면 폭스바겐을 타고, 택시면 택시를 타고 가는 거예요. 비행기가 도착하면 비행기를 타야 하죠. 중요한 것은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나에 대한 첫 평가는 말하자면 폭력적이라는 일련의 해프닝을 통해 이루어진 거예요. 그건 오해죠. 하지만 차가 없다면, 먼저 오는 차를 탈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만약 백남준이 자신의 작업이 오해받는 것을 두려워했다면 그는 계속 기다려야 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 상태로 영영 움직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즉 오해 가능성이란 이동 가능성이기도 하다ㅡ우리는 오해 가능성으로부터 열린 공간 속에서만 움직인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오해가 진실과 대립하는 것이라기보다, 진실이 표현되는 특정한 형식 중 하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해는 가장 자주 오는 차이고 진실은 그 차를 잡아탄다ㅡ오해는 진실을 훼손한다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삶이 우리의 통제 바깥에 훨씬 많은 것처럼, 진실은 오해 속에 훨씬 더 많다.(183-185p)

 

 

 

 

ㅡ 강보원, <에세이의 준비>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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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

 

제목 그대로 일급의 사회학자와 역사학자가 다섯 번 만나 나눈 대담을 묶은 책.

이 책이 부르디외의 생각을 느껴보기 가장 좋은 입문서(?)라니... 말랑말랑한 책들만 읽다가 이런 책을 오랜만에 읽어서 어려웠다.

5번의 대담을 묶은 책이라 분량이 많진 않으나 밀도가 상당했다. 하비투스니 사회적 자본이니 몇몇 개념은 평소에 주워들은 적이 있었는데 장(field)은 처음 들어보는 개념이라 신선했다.

 

 

 

부르디외의 관점에서 사회학은 사람들에게 그릇된 환상을 심어 주는 오인을 걷어 내면서 지배와 예속을 작동시키는 매커니즘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게 해 준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환상에서 벗어나는 고통을 겪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학자는 참을 수 없는 인간이다." 그런데 사회학자는 다른 사람들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참을 수 없는 인간이다. 자신이 분석하는 사회공간에 그 자신 또한 위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르디외의 말에서, [사회공간에 대한] 인식을 생산하는 주체가 인식의 대상 속에 갇혀 있는 사회과학이 벗어날 수 없는 이런 위치를 알게 되며, 바로 그런 위치에서 부르디외 자신이 언급하듯 고통스런 '정신분열'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18-19p)

 

 

제가 보기에 선생님의 작업 속에는 푸코식으로 말해서 확실성의 껍질을 벗겨 내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사회학의 문제들」에서 그런 주장과 거의 비슷한 문장이 발견됩니다. "언어적이고 정신적인 자동성을 파괴하기." 사회세계에서 외견상 당연해 보이는 모든 사실을 문제화한다는 것이죠. 이는 이를테면 "이것은 지금과 다르게 존재할 수 없어. 이것은 언제나 그래 왔어·····" 같은 식으로 자명성을 전제하는 모든 주장과 단절하게 합니다. 선생님이 증명하듯이 자명성은 언제나 특수한 내기물 및 세력관계와의 관련 속에서 구성됩니다.

(...)

아무튼 확실성의 껍질을 최대한 벗기는 작업에서 선생님이 취한 방식 중 가운데 하나는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된 경계, 분할, 구획들이 사실은 언제나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드러내면서 말이죠.(35p)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반드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사회학자는 이런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지요. 사회학자의 모든 작업은 행동의 관찰, 담론, 문서 자료 등에 기초해서 진실의 도출에 필요한 조건을 구축하는 데 있습니다. 물론 언제나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그들은 민중이 다른 사회집단에 비해 훨씬 더 참된 말을 한다고 믿지요. 사실 민중은 각별한 피지배 상황에 처해 있는데, 특히 상징적 지배의 메커니즘에 의해 지배받고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광부들의 입에 마이크를 들이대고는 그들이 진실을 수집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의 발상이 좌파가 권력을 잡은 시기에 한창 유행했지요.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수집한 것은 앞선 30년 동안 노동조합이 유포한 담론들에 불과합니다. 한편 농부들을 상대로 똑같은 일을 한다면, 우리는 약간의 변형이 있긴 해도 초등학교 교사들의 담론을 수집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회세계 안에서 지식인의 것이건 프롤레타리아의 것이건 혹은 다른 누군가의 것이건 간에 일종의 본원적인 [진실의] 장소를 찾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이 같은 발상 속에는 일종의 신비주의적 사고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57-58p)

 

 

엘리아스는 저에 비해서 훨씬 더 연속성에 민감합니다. 제가 볼 때는 그렇습니다. 스포츠 사례를 들자면, 고대의 올림픽에서 현재의 올림픽까지 연속적 계보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스포츠사가가 그렇게 하는데요, 저는 이런 작업에 위화감을 느낍니다. 외양상 연속성이 존재하지만, 이는 19세기에 일어난 거대한 단절을 은폐합니다. 그 당시 영국에서 엘리트 기숙하교가 유행했고, 교육체계가 변화했으며, 스포츠 공간이 출현했습니다···· 달리 말해, 술과 같은 전통 게임과 근대 축구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습니다. 전혀 없어요. 이는 완전한 단절입니다. 예술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동일한 문제를 발견합니다. 정말 놀랍게도 이것은 사실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미켈란젤로와 율리우스 2세 사이의 관계가 피사로와 강베타 사이의 관계와 같다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엄청난 불연속이 존재하며, 불연속성의 기원 또한 존재합니다.(106-107p)

 

 

문학 분야에 대해서도 우리는 동일한 분석을 할 수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플로베르 이전에는 예술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지요. 여기서 저는 의도적으로 과장을 하고 있습니다. 역사학자들이 충격을 받도록 말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예술가라는 식의 주장은 시대착오[의 오류]를 범하는 일입니다. 물론 역사학자들이 그렇게 순진하지는 않겠죠.

(...)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장인은 언제부터 예술가로 변모했는가?" 그런데 예술가는 사실 장인에서 탄생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하나의 소우주에서 다른 소우주로의 이행이 일어난 것이죠. 이행 이전의 소우주에서 사람들은 경제의 규범에 따라 무언가를 생산합니다. 거기에서는 일반적인 [상품] 생산의 규범을 따릅니다. 반면에 이행 이후의 소우주는 경제세계 내부에서 하나의 고립된 독자적 소우주, 일종의 전도된 경제세계입니다. 거기서는 사람들이 시장 없이 무언가를 생산합니다. 즉 그들은 어떤 경우엔 평생동안 한 작품도 팔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생산합니다. 또 그들은 작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자본[특히 문화자본]을 충분히 갖춰야 합니다. 말라르메를 비롯한 수많은 시인의 경우가 그랬죠. 좀 더 깊은 분석이 필요하지만, 대체로 1880년대 이전의 시기에 예술가나 작가라는 개념을 투사할 때, 우리는 엄청나게 부정확한 용어를 쓰는 야만을 저지르는 셈입니다.

 

 

 

ㅡ 피에르 부르디외, 로제 샤르티에,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中, 킹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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