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4/8
하기야 모두를 순전한 마음으로 아끼고 용서하고 이해하기란 천사나 할 일이지 사람의 태도는 아니다. 천사처럼 군다는 것은 상대를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고기가 말을 모르고 규칙을 모르는 것에 화내지 않듯이 기대가 없고 하찮은 존재에게만 한없이 너그러울 수 있다.(109p)
ㅡ 단요, <다이브> 中, 창비
2025/4/8
하기야 모두를 순전한 마음으로 아끼고 용서하고 이해하기란 천사나 할 일이지 사람의 태도는 아니다. 천사처럼 군다는 것은 상대를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고기가 말을 모르고 규칙을 모르는 것에 화내지 않듯이 기대가 없고 하찮은 존재에게만 한없이 너그러울 수 있다.(109p)
ㅡ 단요, <다이브> 中, 창비
2025/4/7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환대보다 적대를, 다정함보다 공격성을 더 오래 마음에 두고 기억한다. 어떤 환대는 무뚝뚝하고, 어떤 적대는 상냥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게 환대였는지 적대였는지 누구나 알게 된다.(29p)
살아오면서 알던 이들의 변신을 많이 보아왔다. 그들의 변화를 접할 때마다 자동적으로 그걸 설명할 수 있는 '도발적 사건'을 찾곤 했다. 누군가의 변절, 누군가의 타락, 누군가의 성공, 누군가의 추락, 누군가의 돌변을 말할 때 '걔가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그 일이 있고 나서······'로 설명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러지 않으려 노력한다. 우주의 만물이 그러하고, 내가 그러했듯, 그럴듯한 이유 없이도 인간은 얼마든지 변하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오히려 변화보다 더 어려운 것은 변화하지 않는 것이니 이 자연스러운 결과에 굳이 '도발적 사건'을 갖다붙여 설명할 필요는 없다. 모든 지도에 축척이 있듯이 실제 세계는 이야기의 세계를 초과한다. 다만 이해가 잘 되지 않을 뿐.(79-80p)
ㅡ 김영하, <단 한 번의 삶> 中, 복복서가
2025/4/6
‘개와 소금의 왕국’이라는 단편에 나오는 쌍둥이 테마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확장하여 만든 걸로 보이는 범죄 소설. '피와 기름'의 우혁도 등장한다(?). 꽤나 재밌고, 만족도 높은 시간이었다. 등장인물이 말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기계적이고 계산적이라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고 일견 동의한다. 다만 그걸 감안하고도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이 펼쳐놓는 생각의 흐름이 충분히 흥미로웠다. ‘다이브’도 그냥 읽어야겠다.
“최 선생님이 보기엔 그 노인들이 바보 같지요?”
“그렇다기보다는, 이해가 어려운 면이 있죠. 그 정도면 스스로도 몸이 망가졌다는 걸 느낄 텐데 기어코 스테로이드제나 받아 가려는 게 말입니다.”
“그거는 본능이에요.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려는 특질, 즉 항상성은 사람 몸만이 아니라 정신에도 적용된다 이겁니다. 늙을수록 더더욱 그래요. 큰 병원에 간다면 수술을 마음먹어야 하지만 스테로이드제가 있으면 내일도 모레도 살던 대로 살 수 있지요.”
“그러나 어쨌든 중병으로 병원에 가는 것은 마찬가지 아닙니까? 때가 언제냐, 얼마나 심각해졌느냐의 차이일 뿐이라고 봅니다만.”
대표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 대하듯 껄껄 웃었다.
“죽음이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처하는 과정은, 죽음 자체보다 두렵기 마련이에요. 아까 내가 바보라는 말을 썼지요. 이 두려움을 이기지 못 하면 어리석은 삶을 살게 됩니다."(8-9p)
"그 기전이 미스터리라서 그래.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는 것보다 그게 낫다고 생각하는 심리가 이해가 안 가. 잡일이야 돈 내고 사람 쓰면 되고, 말은 그냥 하면 나오는 거 아닌가?"
"솔직히 말해 줘?"
"가급적이면."
"당신은 성격이 악랄한데 인간 자체는 순해서 손해만 보고 살아. 학생들 중에 그런 유형이 있잖아. 규칙 안 지키는 애들은 잡아먹을 것처럼 굴고, 특히 공부까지 못하면 죽어라 싫어하고, 남이 벌을 안 받으면 자기가 손해 본 양 억울해하는 애들. 그러면서도 맡은 일은 거의 강박적으로 하는 애들. 그런데 인간관계는 어째야 하는지를 몰라서, 괜히 돈은 돈대로 내면서 인망 깎아먹고 그러지."
"모범생들의 행동 습성이지. 의사들 중에 모범생 아니었던 사람 얼마나 있기에."(73p)
어릴 적부터 겪어 온 바에 따르면 민호는 최선이라는 개념에 기묘한 진정성을 부여하는 녀석이었다. 중학생 시절, 민호 녀석이 운동부 선배의 여자친구와 사귀면서도 정작 그 선배에게는 무척이나 깍듯하게 대하는 걸 보고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났다. 도대체 무슨 심리냐, 사람 놀리는 재미 때문이냐 하고 묻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자기는 상대가 바라는 대로 한다는 거였다. 여자애가 양다리를 원하는 그래 주는 것이고, 선배는 공손한 후배를 원하니 그것도 따라 준다고 했다. 자신은 둘 모두가 좋으며 둘은 자신에게 잘해 주니까, 들키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셈이니까,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리라는 대답 앞에서 민형은 낯선 충격을 받았다.
모두를 동등하게 아끼며 서로 나누는 관계로부터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인간 유형이란 세인들의 상상과 달리 아름답지 않았다. 멀쩡한 줏대를 갖추지 못한 상태라면 재난이나 다름없었다. 진상이 돌출되기 전까지는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환상이 주어진다는 점, 그래서 도리어 진상을 묻어 두게 된다는 점이 그 재난을 더욱 변칙적이고 위험하게 만들었다.(94-95p)
순수한 헌신과 친절로 가장한 처세술의 경계를 묻자 묘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우리가 본질적으로는 같다고 생각해······ 전문 분야가 다를 뿐이지."
"받을 거 받고, 줄 거 주면서 살겠다는 게 형 신조잖아. 나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나는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니는 것과 별개로 거절이 어려운 사람이거든. 돈이 아니라 인간 마음이 얽힌 문제라면 특히 그래. 그러니까 일단 어지간하면 남이 바라는 건 다 해 주고, 나한테 필요한 게 생기면 그때 말을 꺼내. 그중 누구든지 한 명이라도 해 주면 되는 일이야. 연대책임 후불제란 말이야. 이해하지?"
"전혀 모르겠는데."
"마음의 빚이란 그런 거야. 마음의 빚이라는 건······ 그게 정확히 얼마인지는 나도 상대도 모르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찔러 보고 아니면 마는 식으로 수금하는 거지. 그중에서 더 많이 납부하는 사람이 있으면 고마운 일이고.“
"심약하고 소심한 사람 건수 잡아서 등쳐먹는다는 소리를 고상하게 하는군."(136-137p)
대화에서 거듭 확언되는 사실이란 썩 확실치 못 한 것들이다. 가건물이 매 순간 흔들거리고 있음을 잊기 위해 억지로 고정못을 박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서로가 서로의 주장을 강경하게 앞세울 때는 특히 그렇다. 그러니까 가장 확실한 사실들은 말해지지 않는 영역에, 만약 입에 오르더라도 그렇게나 이렇게 쯤으로 호명되는 영역에 존재한다. 그것들은 너무나도 치명적인 진실이기 때문에 감히 발음할 수 없고, 발음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안다. 대화의 역설은 이러한 행태가 순전한 뜬소문에도 적용된다는 점에 있다. 치명적이지만 매혹적인 허구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똑같이 한다. 상대를 감싸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책임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그 일 때문에 딸이 그렇게 됐대요. 그렇게가 무엇인지, 그 일은 또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 하는 상태로 수근대는 말들. 침묵 아닌 침묵이 계속되는 동안 각자에게는 각자의 이야기가 생기고, 그건 대개 진상과 다르다. 다른 편이 차라리 낫다.(153-154p)
사람들은 말로 풀어낸 부분만을 아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언어에 앞서 복받치는 충동이야말로 가장 명료하다. 혼자 죽으려다가 그 소식에 기뻐할 누군가를 상상하고, 차라리 남을 죽이길 택하는 데에는 무엇보다 올곧은 마음이 필요할 터였다.(159-160p)
ㅡ 단요, <트윈> 中, 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