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7/9

 

기억의 외부 아웃소싱과 매개된 경험의 가속화, 극단적 효율 추구라는 오늘날의 흐름에 대해 우려하고 비판하는 책들은 이미 많다. 이 책도 그런 부류에 속하며, 특별할 건 없다. 다만 장점이라면 다양한 최신 사례들을 성실하게 수집해 놓았다는 점이다.

 

 

 

로드 레이지의 뿌리에는 성급함이 있다. 우리처럼 결점이 있고, 피곤하고, 정신이 산만해진 다른 사람들에게 참을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줄을 서는 것에 대한 불만이 늘어나는 것처럼, 운전 중에 인지된 사소한 모욕에 과잉반응(때로 치명적인)을 하는 것은 우리의 기대가 얼마나 많이 변화했는지 알려준다.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 부분적인 이유는 일상생활의 끊임없는 가속화에 있다. 일상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기다릴 수 있는 것, 기다려야 하는 것에 대한 기대가 변하고 있다. 우리는 기다리지 않고 서로에게 바로 연락할 수 있는 것에 익숙해졌다(140p)

 

 

기대를 아웃소싱하는 것은 가본 적이 없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기 전에 옐프의 리뷰를 샅샅이 뒤지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일 것이다. 우리는 놀라움을 좋아하지만 불쾌한 놀라움은 반기지 않는다. 기대는 놀라움의 가까운 친척이며, 기대가 즐거운 경험으로 이어질 때면 기다림이 즐거움을 한층 더 키운다. 그러나 기대와 놀라움이 실망으로 이어질 때면 우리는 거기에 할애한 시간을 낭비로 보는 경향이 있다.

아주 짧은 틈새 시간도 채울 수 있는 너무나 많은 방법이 있다 보니, 기대 심리에 미묘한 변화가 나타났다. 기다림을 기대보다는 지연으로 경험할 가능성이 더 높아진 것이다. 이제 기다림은 정상적인 인간 경험이 아닌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되었다. 시간을 쉽게 채우는 데 익숙해지면 기대의 기회는 사라진다. 백일몽의 기회처럼 말이다.

지연delay은 오늘날 부정적 뜻을 내포하고 있다. 더 이상 미덕(의지력이나 인내력의 발휘)이나 기회(반성이나 기대)를 암시하지 않는다. 지연은 불편을 의미한다.(163-164p)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온라인에서 보내는 우리에게 이런 종류의 오프라인 참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증거가 늘어나고 있다. 미시간대학교 사회연구소의 연구 결과, "오늘날 대학생의 공감 능력은 20~30년 전의 대학생보다 약 40퍼센트 낮으며, 가장 급격한 감소세는 스마트폰 보급과 추세가 일치한다. 한 연구원은 "온라인에서 '친구'를 쉽게 사귈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문제에 반응하고 싶지 않을 때 무시해버릴 가능성이 높아지며, 이런 행동은 오프라인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런 경향을 악화시켰다. 2022년 대학생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 팬데믹의 여파로 대학생들의 불안과 우울증이 증가했고 공감 능력도 크게 감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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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활동이 오프라인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많은 연구에서 다루어지는 논란 많은 연구 주제다. 폭력적인 비디오게임이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는 하위 연구 장르가 있을 정도다. 이런 연구는 대개 모의 폭력에 대한 노출이 다른 곳에서의 폭력에 둔감해지게 하는지를 다룬다. 그에 대해서는 합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폭력적인 게임을 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폭력적인 행동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지만(사실 폭력적인 비디오게임을 하는 사람은 증가했지만 폭력 범죄율은 감소했다), 폭력적인 범죄보다 측정하기 어려운 결과, 즉 공감 능력의 저하는 나타난다는 것이다. 임상심리학자 진 브로크마이어는 <뉴욕타임스>에 "장기적으로 폭력적인 비디오게임에 더 많이 노출된 사람들은 폭력에 대한 낮은 공감 능력 등의 특징을 보인다는 것이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브로크마이어는 10대들이 폭력적인 이미지에 장기간 노출될 경우 공감 능력과 관련된 뇌 영역이 약화된다는 것을 발견했다.(188-190p)

 

 

자신의 감정적인 삶을 얼마나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이런 기술은 양의 탈을 쓴 디지털 늑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인식을 돕는 기술로 마케팅되고 있지만, 원치 않는 노출을 야기하는 기술로 쉽게 변질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기술에는 사회적 상호작용을 방해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 어떤 동료가 직원 회의에서 발언할 때마다 당신의 심박수가 올라가고 호흡이 가빠지는 것을 포착하기 전까지는 당신이 그를 싫어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라. 아니면 아내가 사랑한다고 말할 때 스마트폰이 그녀의 어조가 불안한 것을 파악하고는 거짓이라고 인식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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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셔피로는 감정을 드러내는 기술은 감정을 숨기는 기술의 개발도 촉진하리라는 점을 인정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감정 은폐 장치"는 일상을 감정적 가면을 쓴 사람들이 오가는 스크린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204-205p)

 

 

매개는 쾌락을 균질화한다. 마치 모든 경험이 똑같은 몇 개의 필터를 통과한 것처럼, 마치 모든 사람이 똑같은 도전이나 곡예를 하고 촬영을 하고 공유를 하는 것처럼 쾌락을 순응적으로 만든다.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쾌락과 경험을 공개하는 플랫폼들은 시청자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우리 경험에서 불쾌한 부분을 제거할 것을 장려한다. 당신의 쾌락은 다른 모든 사람의 쾌락과 마찬가지로 앱과 플랫폼을 통해 여과되고 같은 방식으로 소비된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순간들이 잘 조정된 끊임없는 흐름으로 소비되는 것이다. 이것은 소심한 형태의 쾌락으로서 그 증가세는 너무 강렬하거나 너무 현실적이거나 너무 위험하거나 너무 통제할 수 없거나 너무 육체적이거나 너무 비순응적인 경험으로부터의 집단적인 후퇴를 암시한다. 쾌락은 디지털 형태로 더 쉽게 소화되고 공유될 수 있도록 치명성이 제거된다. 그러면 쾌락이 완전히 탈바꿈된다. 때로 쾌락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더 조작된 경험, 즉 위험보다는 통제, 우연보다는 검색, 변덕보다는 알고리즘, 개인 정보 보호보다는 편의를 우선한다. 다시 말해 쾌락의 가장 큰 변화는 쾌락의 상당 부분이 데이터화된다는 점이다.(222-223p)

 

 

베리는 경험을 보존하려는 남자의 동기를 지적한다. 그가 촬영하는 것은 "그것을 가진 후에도 여전히 그것을 갖기 위해서다. 그것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스위치를 한 번만 누르면 그것은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 시는 이런 기록의 대가를 떠오르게 하는 말로 끝난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는 결코 거기에 있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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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예술가 코린 비오네는 이탈리아 피사를 여행하면서 관광객들이 피사의 사탑을 몇 가지 같은 각도에서 촬영하는 것을 봤다. 이후 사진 공유 사이트들을 뒤져보고 이런 의도하지 않은 시각적 동조visual conformity가 관광지에서는 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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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사진을 다시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습니다. 우리는 사진의 사진을 재생산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닐까요?"(235-236p)

 

 

비트 로트의 문제는 극복한다 해도 온라인에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남기는 유일한 기억은 메타 같은 기업의 소유가 될 것이다. 이는 경험의 기록이 경험의 보존보다 훨씬 쉽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오늘날 성장하는 아이들은 이전 세대처럼 물리적 형태로 기억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사진 앨범도, VHS 테이프도, 편지도 없다. 그들은 더 덧없는 유산, 다시 말해 말소된 인스타그램 게시물과 틱톡 휴면 계정 형태의 디지털 무덤을 남길 것이다.

그런 세상에도 기억을 위한 공간이 있을까? 사진에서부터 편지와 책에 이르기까지 기억을 보존하는 물건들이 디지털 세계로 이동하면서 우리는 검색과 연결 같은 새로운 힘을 얻었다. 하지만 잃는 것들도 있다.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들이 메타나 구글 같은 대기업 소유의 플랫폼에 있는 경우 우리는 그들에 대한 통제력을 잃는다. 조상이 만진 물건이나 다른 사람이 우리를 위해 만든 물건을 손에 쥐는 촉각적 경험을 잃는다. 기억의 많은 물리적 단서를 잃는다. 우리의 취약성과 한계에 대한 감각을 잃고, 그 결과 육신 있는 인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329-330p)

 

 

 

ㅡ 크리스틴 로젠, <경험의 멸종> 中,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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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7/3

 

 

영화의 고민은 '내면의 외면화' 문제로 모아집니다. '내면'이란 영화감독의 세계관, 지식, 성향, 인식, 관점, 철학, 사유, 정치성 등이 포함된 추상적 관념입니다. '외면화'란 바로 그 추상적인 관념을 소통 가능한 대상으로 구체화해서 겉으로 드러내는 작업입니다.(12p)

 

 

이런 점에서 볼 때 내면의 외면화에서 중요한 것은 '내면'도 '외면'도 아닌 '모양이 바뀌다'라는 의미의 '화(化)'인지도 모릅니다. 세계와 마주한 인간의 치열한 사유, 즉 내면도 중요합니다. 대중의 감각을 자극하는 작품, 즉 외면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피사체를 선택해서 특정한 렌즈가 달린 카메라로 찍은 후 그것을 다시 이어붙이는 지난한 '화'의 과정이 없으면 영화 감독의 내면은 결코 관객에게 전달될 수 없습니다. 영화감독이란 '화'의 전문가입니다. 영화에서 '화'란 내면과 외면을 매개하는 방법론적 고민, 즉 영화 언어입니다. 영화감독은 자신의 세계관을 주장하기 전에 그것에 부합하는 대사, 상황 설정, 이미지, 움직임 등을 쌓아가고 대중은 메시지에 공감하기 전에 영화감독이 쌓아올린 대사, 상황 설정, 이미지, 움직임 등에 반응합니다.(14p)

 

 

교수가 강의실에 도착했고 지금 그는 짜증이 나 있는 상태입니다. 이때 교수의 상황이 내면이고, 그것이 강의실의 학생들이나 스크린 밖의 관객에게 전달되는 과정이 외면'화'입니다. 이것은 영화로 찍는다면 어떨까요? 다양한 영화 언어가 가능할 것입니다. 첫 번째, "학생 여러분, 오늘 제가 너무나 짜증이 납니다"라는 식으로, 교수 역을 맡은 배우의 입을 통해 해당 상황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 "나는 오늘 너무 짜증이 난다"라는 교수의 독백을 삽입하는 방식입니다.

(...)

다섯 번째, 얼굴을 붉히는 교수의 표정 직후 짜증이 나게 된 상황을 플래시백으로 보여주는 것도 가능합니다.

(...)

여덟 번째, 교수는 열심히 강의를 하는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학생들 대부분이 딴청을 부리거나 엎드려 자고 있는 상황을 연출할 수도 있도 있습니다. 아홉 번째, 강의실 안의 에어컨 소음이나 강의실 밖 복도 소음을 활용해 관객의 청각을 자극하는 방식도 가능합니다. 열 번째, 교수를 포착할 때와 학생을 포착할 때의 렌즈, 앵글, 쇼트 등을 차별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열한 번째, 카메라가 강의실 끝에서부터 교수가 있는 교탁 쪽으로 조금씩 흔들리면서 다가오다가 기어이 교수의 식은땀 맺힌 목젖에 도달하는 방식도 가능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동일한 내면에 대한 다양한 외면화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다양한 외면화 방식을 통과할 때 동일한 내면은 전혀 다른 성질, 질감, 무게, 부피로 변환될 것입니다. 이 다양한 '화'의 양상 중 방법론적 고민의 강도가 높은 것은 무엇일까요? 영화의 본질과 가까운 것,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것에 근접한 것은 무엇일까요? 방금 언급한 사례로 생각해볼 때 나는 뒤로 갈수록 고민의 강도가 높아지고 영화의 본질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렇게 설명하고, 설득하고, 주장할 것입니다.(16-18p)

 

 

백 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훨씬 명쾌할 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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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고 표정이나 동작을 보여주며 생각과 마음을 전달하는 놀이, 즉 대사 이외의 비언어적 수단을 시각화하며 내면을 외면화하는 방식이 셔레이드입니다.

약간의 부연이 필요합니다. '셔레이드의 시각성'과 '카메라 시선의 시각성'의 구분이 애매하기 때문입니다. 영화감독의 방법론적 고민은 결국 '무엇을 어떻게 찍느냐'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여기서 셔레이드의 시각성은 '무엇'에 해당됩니다. 카메라 시선의 시각성은 '어떻게'에 해당됩니다. 셔레이드의 시각성은 카메라 시선이 아니라 피사체의 시각성에 방점을 찍습니다. '피사체의 지형도'가 셔레이드인 것입니다.

(...)

'지형도'란 무엇일까요? 피사체들의 시각적 상황입니다. 얼굴의 표정, 신체 상황, 제스처, 시선의 방향과 상태, 인물 사이의 거리, 공간의 색감과 뉘앙스, 소품의 위치와 특징 등이 어우러진 상태가 피사체의 지형도입니다.(61-62p)

 

 

 

ㅡ 박우성, <영화 언어> 中, 아모르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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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7/1

 

2024 부커상 수상작.

우주에서 지구 궤도를 열여섯 번 도는 과정을 따라가는 소설이다. 세계 지리에 관심이 없다면, 최소한 지구본이라도 옆에 두고 읽어야 지금 어느 지역을 지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매일 지구를 열여섯 번 돌며 일출과 일몰을 반복해서 본다는 것, 그 반복 속에서 시간 감각이 서서히 흐려진다는 점은 꽤 흥미로운 상상거리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 흥미가 전부다. 우주의 시선으로 지구를 바라보며 경이로움을 느끼거나, 인간의 걱정이 얼마나 사소한지를 깨닫는 감정은 오히려 천문학 대중교양서를 통해 더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서사나 플롯의 재미를 원한다면 읽지 말기를.

 

 

로만은 선실에 둔 기록지에 88번째 줄을 더할 것이다.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고 셀 수 있는 것으로 묶어 두려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중심마저 떠내려간다. 우주는 시간을 조각낸다. 그러니 일어나면 매일을 기록하라고, 지금은 새날의 아침임을 되뇌라고 훈련 때 들었다. 이를 명심해야 한다. 지금은 새날의 아침이다.

오늘도 그렇다. 그렇지만 이 새 날에 이들은 지구를 열여섯 번 돌 것이다. 열여섯 번의 일출과 열여섯 번의 일몰, 열여섯 번의 낮과 열여섯 번의 밤을 볼 것이다. 로만은 창가 난간을 부여잡고 균형을 잡는다. 남반구 별들이 스쳐 지나간다. 당신들은 협정 세계시를 따르는 거라고, 지상 근무원들은 말한다. 이를 늘 명심해야 한다. 자주 시계를 들여다보며 마음을 정박시키고 일어날 때마다 스스로 되뇔 것. 지금은 새날의 아침이다.(12-13p)

 

 

참 이상한 일이다. 모험과 자유와 발견을 향한 꿈이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은 열망으로 이어져 지금 이곳에 이렇게 갇혀 있다는 게. 물건들을 쌌다가 풀었다가 하면서, 실험실에서 완두콩 싹과 목화 뿌리를 만지작거리면서, 어디로도 가지 않지만 돌고 또 돌면서 나날을 보낸다. 변함없이 오래된 생각도 곁을 맴돈다.(35p)

 

 

달 착륙 날. 어릴 적 치에는 바닷가에 서 있는 엄마가 달에서 벌어지는 일을 올려다보고 있는 게 틀림없다고 믿었다. 엄마가 맨눈으로 그걸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엄마가 어떤 식으로든 그 사건과 관련이 있는 줄 알았다. 이번 임무를 맡아 떠나오기 전 엄마에게 이 사진을 건네받지 않았더라면 치에는 그런 생각을 까먹고 살았을 것이다. 새삼 그런 생각의 무게와 과거의 힘을 느꼈고, 과거가 얼마나 은밀하게 미래를 만드는가를 실감했다. 돌이켜 보면 치에가 처음으로 우주를 생각했던 계기가 바로 이 사진이었다.(104-105p)

 

 

얼마큼 밀폐 공간을 견딜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일주일 동안 깊은 동굴 훈련장에서 극도로 적은 식량을 가지고 네 사람과 함께 지내며 몸보다 아주 살짝 큰 구멍들을 몇 시간씩 기어 지나다니고 세상에서 가장 강인한 사람들조차 패닉에 빠지는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반 시간 후의 일은 생각도 하지 않게 된다. 하물며 미래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은 아예 생각하지 않는다. 우주복을 입고 거동도 힘든데 아프게 쓸리고, 간지러운 곳을 몇 시간 동안이나 긁을 수 없고, 몸이 따라 주지 않고, 벗어날 수 없는 곳에 파묻힌 듯하고, 관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상태에 적응하려고 애쓰다 보면 바로 다음 호흡에만 신경 쓸 수밖에 없다. 산소를 너무 많이 쓰지 않도록 얕게만 호흡하되 너무 얕으면 안 된다. 그다음 호흡도 신경 쓸 처지가 아니다. 오직 이번 호흡에만 집중한다. 달이나 핑크빛으로 물든 화성을 볼 때도 인류의 미래는 생각나지 않는다. 당신이나 당신이 아는 사람이 운 좋게 저곳까지 갈 수 있는 논리적 확률을 생각할 따름이다. 이기적이고 집요하며 뻔뻔한 자신의 인간성을 생각해 본다. 발사대까지 오르려고 수천 명을 밀쳐 낸 자신에 대해. 자기 의지대로 밀고 나가면서 그 길에 있는 모든 걸 태워 버리겠다는 신념이야말로 당신에게 우위를 주지 않았던가?(181-182p)

 

 

우주력이 아직 대부분 일어나지 않은 시간까지 다 아우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앞으로 두 달 안에 구슬 같은 근사한 지구에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다. 생명체의 관점에서 희망찬 일은 하나도 없다. 떠도는 별 하나가 태양계 전체와 지구를 뒤흔들 수도, 운석 충돌로 대멸종이 벌어질 수도, 지구의 자전축 기울기가 커질 수도, 궤도가 휘고 밀려나 몇몇 행성이 쫓겨날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대략 넉 달 후, 그러니까 50억 년 후에는 연료를 다 소진한 태양이 적색 왜성으로 팽창해 결국 수성과 금성을 집어삼키리라는 것이다. 지구는 그때까지 살아남는다고 쳐도 바짝 시들고 건조해져 바다가 끓다 메말라 버릴 것이고, 그렇게 백색 왜성 흑색 왜성 죽어 가는 태양이 있는 지긋지긋한 궤도에 갇힌 잉걸불로 남을 것이다. 그러다 끝내 궤도가 쇠하고 태양이 우리까지 먹어 치우면, 쇼는 모두 끝이다.

이것은 국지적인 장면에 불과하다. 작은 소동, 미니드라마다. 우리는 충돌하고 부유하는 우주에 갇혀 있다. 최초의 빅뱅으로 우주가 쪼개지며 길고 느리게 퍼져 나간 잔물결 속에 우리가 있다. 가까이 있는 은하들은 서로 충돌하고, 남은 은하들은 서로를 피해 흩어진다. 그렇게 홀로 떨어지고 나면 스스로 팽창하는 공간, 저절로 탄생하는 공허만이 남는다. 그때도 존재할 우주력에서 인간이 무엇을 했고 존재했는가는 1년 중 딱 하루, 찰나에 깜빡였다 사라지는 빛이어서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무상하게 피어난 삶을 살고 있다. 광란의 존재가 딱 한 번 손가락을 튕기면 모두 끝나리란 것도 안다. 여름에 터져 나오는 이 생명은 새싹보다 폭탄에 가깝다. 이 풍요의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200-201p)

 

 

 

ㅡ 서맨사 하비, <궤도> 中,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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