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5

 

 

리처드 맥과이어의 여기서를 읽었다. 한 공간의 여러 시간대를 보여주는 그래픽 노블이다. 그 시간대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넘나든다. 그래서 우리가 농담하며 웃고 떠드는 현재, 인간이라는 종이 있기 전인 몇 십 억 년 전의 과거, 앞으로 다가올지도 모를 미래까지 시간대가 비선형적으로 왔다 갔다 한다. 글자가 거의 없이 그림으로 압도하는 책이며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생각해볼만한 주제를 잘 표현했다. 책을 보며 최근에 봤던 영화 고스트 스토리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어떤 식으로든(누가 먼저일지는 모르겠다.) 서로의 작업에 영향을 받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처드 맥과이어, <여기서> , 미메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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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4

 



휘영은 세계에 신이 없다면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따위의, 내가 딱 싫어하는 류의 화제를 자꾸 테이블에 올렸다.(60p)

 

 

이런 환경에서 어지간한 인간들은 좀스럽고 추한 모습을 보인다.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수업이 있기 몇 시간 전부터 강의실 앞 복도에 신문지를 깔고 기다리는 녀석들과 내가 같은 급이라는 게 한심했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자습실에서 제대로 앉아 공부를 하는 게 낫지 않나? <정재준 한국사><황남기 헌법>이니 하는 책들에 밑줄을 그으며 중얼중얼 법 조항들을 외우고 있다 보면 이런 공부에 정말 젊음을 바쳐야 하나 싶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134-135p)

 

 

나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마음 놓고 내 처지를 하소연할 만한 마땅한 사람이 없을까 생각했다.

휘영이라면 혹시 학교 도서관에서 아직까지 공부하고 있지 않을까? 술 한잔 사달라면 사주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결국 아무에게도 전화를 걸지 않았다.(158-159p)

 

 

술에 취하고 싶었지만 돈도 없고 같이 마실 사람도 없었다. PC방으로 출근해 7급 공무원 시험용 국어 공부를 두어 줄 하다 중학생들에게 과자를 팔고 초등학생을 두들겨 팬 내 꼴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170p)

 

 


 

장강명, <표백> ,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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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7

 

 

영웅과 악당이 고통에 무감각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은 이런 사람이 부당한 취급을 당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매우 흉악한 범죄자에게 우리는 그만큼 엄한 처벌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처벌을 통해 그 죄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 할 뿐만 아니라 지각된 범죄의 부당함을 극복하고 범죄자에게 충분한 고통을 안기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잔인한 사람에게 특히 잔인하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편 우리는 때로 존경하는 영웅의 희생을 망각함으로써 영웅을 홀대할 때가 있다. 이를테면 부모의 감정, 스승의 시련, 지도자의 고통 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기계에 관한 3장에서 살펴본 도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설명하자면, 영웅을 이해하는 우리의 도식은 도덕적 유형 고착에 근거한다. 즉 선행을 베푸는 사람은 우리보다 강인해 보이고 삶의 고난을 더 잘 견딜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오로지 도덕적 행위자로만 본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 비해 영웅의 고통이 덜 눈에 띄고 공감을 덜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통 사람이 얻어맞으면 우리의 심장이 요동친다. 그러나 슈퍼맨이나 배트맨이 얻어맞으면 곧 반격할 것이라고 예상하기 때문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만약 영웅이 대다수 사람들보다 더 강인해 보인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영웅에게 더 고통을 안길 가능성이 높다. 물론 성자 같은 사람을 배신하면서 즐거워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다른 방도가 없다면, 어차피 누군가피해를 입어야만 한다면 사람들은 종종 영웅에게 피해를 안긴다.

(...)

물론 당신은 테레사 수녀가 이런 고통을 정말 잘 이겨낼 것이라고 합리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직장에서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고객들을 관리할 사람을 뽑는 회의가 열렸다고 상상해보라. 아마도 두툼한 외투를 집게 될 사람은 과거에 힘들기만 하고 보상은 못 받는 고된 일을 묵묵히 했던 사람일 것이다. 만약 당신이 과거에 선한 행동을 한 적이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당신이 아무도 원치 않는 무거운 짐을 짊어질 능력이 있다고 볼 것이다. 이런 지각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다음번에 사람들이 당신의 헌신적 태도를 칭찬하거든 경계심을 늦추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남을 위해 희생하면 남이 당신을 희생시키기가 그만큼 쉬워지기 때문이다.(156-159p)

 

 

이런 자기 통찰의 결여는 때때로 친구들의 연애 생활에서 뚜렷이 드러나곤 한다. 누구는 자신이 그동안 사귀었던 여러 명의 남자 친구를 거론하면서 첫 번째 남자는 잘 생기고 옷도 잘 입어서 사랑했고, 두 번째 남자는 친절하고 따뜻한 눈을 가져서 사랑했으며, 세 번째 남자는 성격이 활달하고 재미있어서 사랑했다고 설명할지 모른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통계 분석을 돌려본다면, 대다수 차이가 수입으로 설명된다는 사실(즉 그녀는 돈 많은 남자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 사실을 그녀에게 말한다면 그녀는 당신의 실리만 따지는 설명을 전적으로 부인하면서 돈을 자신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할 것이다. 어쩌면 돈이 중요하지 않다고 그녀가 생각하는 것은 사실일지 모른다. 그러나 키스는 말보다 더 정직한 법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특별한 짝을 찾아 헤매는 온라인 데이트를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누구에게 메세지를 보내겠다는 결정을 어떻게 내릴까? 상대방의 재치 있는 프로필을 살펴볼까? 아니면 별자리가 무엇인지 따져볼까? 온라인 데이트를 하는 사람들은 이런 것들이 정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대다수 차이는 여자의 경우 젊고 매력적이며 사교적인지에 의해 설명되고, 남자의 경우에는 키가 크고 근육질이며 부자인지에 의해 설명된다. 우리는 덜 천박하게 느껴지도록 다른 이유들을 꾸며낼 뿐이다.(374-375p)

 

 

 

대니얼 웨그너, 커트 그레이, <신과 개와 인간의 마음> , 추수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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