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2/21

 

 

저자가 처한 상황과 그에 대한 그의 말과 행동을,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 물으며 읽었다. 많이 배웠다.

 

 

, 나중에 하율이가 커서 음악 한다고 하면 허락할 거야?” 하고 묻기에 내가 뭐라고 허락을 해. 아이 인생이 내 것은 아니잖아하고 대답했었다. 실제로 나는 아이의 직업이나 배우자나 진로에 대해 내가 허락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 대답에 감탄하는 친구를 보며 , 이렇게 열린 생각을 가진 부모라니!’ 하고 스스로 뿌듯했는데, 20년 뒤 아이의 선택을 존중할 자신은 있으면서 오늘 아침 아이가 고른 옷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나의 현실이다.(39p)

 

 

출산 후 한동안은 먹는 걸 조심해야 한다. 엄마가 먹는 게 그대로 젖이 되어 아이에게 가기 때문에 특히 초기엔 매운 음식이나 커피를 거의 먹지 못한다. 오히려 임신기보다 수유기에 더 제약이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수유에 대해 지나치게 무지했던 나는 아이만 낳으면 열 달 동안 참았던 맥주를 마음껏 마시리라고 생각했었다. 맥주는커녕 커피도 못 마신다는 걸 알고 망연자실해 있는 내게 빛나 선배가 말했다. “마셔! 마시고 짜서 버려. ,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한 거야.”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오랜만에 친구들과 함께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1년여 간의 금주를 끝내고 목구멍으로 맥주를 넘기던 순간, 그 기분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정말이지, 내가 평생 마셨던 술 중 가장 맛있는 술이었다. 집에 돌아와 서너 번쯤 유축기로 모유를 짜서 버리면서 생각했다. ‘아가야, 엄마가 미안해. 그래도 우울한 엄마가 주는 모유보단 행복한 엄마가 주는 분유가 맛있지 않겠니?’(50p)

 

 

그런데 왜 그런 이성적인 생각은 끓어오르는 분노 앞에 속수무책인 것일까. 스스로에게 질문 해보았다.

 

뭐가 이렇게 못마땅하지?

-그 사람이 예의 없게 행동했잖아.

다른 사람이 예의 없게 굴었을 때도 화가 났었나?

-물론 그렇지.

회사 선배나 상사가 널 화나게 할 때도 그 화가 3일씩 가고 그랬나?

-그건 아닌 듯.

그때도 어떻게 하지?’를 끊임없이 생각했나?

-그것도 아니지.

그럼 왜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화가 가라앉을지를 계속 생각하고 있지?

-왜냐하면····· 내가 어떻게 할 수있으니까.

 

이거였다. 계속 화가 났던 이유는 내가 그녀에게 어떻게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가 화내도 되는대상이었던 것이다. 내가 화를 내도 내게 크게 해를 끼칠 일이 없는 사람. 마치 식당의 진상 손님이나 콜센터 직원에게 분풀이하는 저열한 고객처럼. 생각해보면 회사 상사와 같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상대일 경우에는 부스스 화가 가라앉게 마련이었다. 비겁한 나의 감정이여.

어떻게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 약자에게 힘을 드러내지 않는 것, 그게 성숙한 인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내 아이에게 나는 절대자다. 먹을 걸 주고 옷을 입힌다. 내가 물리력으로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이며, TV를 볼지 말지 따위의 사소한 것도 내가 허락해야 가능하다. 그럼에도 부모들은 자식에게 조심스럽다.

(...)

아이를 낳아 기르는 건 우리가 조금 더 나은 인간이 될 기회인 것 같다. 우리가 자동적으로 훌륭해진다는 게 아니라 그럴 기회를 얻는다는 뜻이다. 절대적으로 강자인 내가 철저히 약자인 누군가에게 가슴 깊이 우러나는 존중감으로 최선의 배려를 하는 것, 자식이 아니면 내가 누구를 상대로 이런 사랑을 해보겠는가. 화낼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 것, 힘으로 누를 수 있지만 그러지 않는 것,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74-77p)

 

 

애덤 그랜트의 책 <오리지널스>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래드클리프 칼리지(어디 있는 학교인지는 모르겠지만 문맥상 유명한 명문 대학인가 보다)를 졸업하고 30대가 된 여성 수백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이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도록 헌신하는데 부모의 영향은 1퍼센트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반해 정신적 스승(롤모델)14퍼센트 정도 기여했단다.

(...)

부모의 영향력은 1퍼센트 미만이라는 대목에서 나는 환호했다. 어느 시점이 되면 하율이에게 가르침을 주는 부모는 필요 없어진다는 말이 아닌가. 내 경우를 생각해봐도 10대에 들어서서는 이미 엄마의 말이 잔소리였던 것 같다. 솔직히 말해 나는 빨리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 내가 하율이와 동등한 입장에서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날.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내 자식의 삶이 달라진다는 무거운 책임을 비로소 벗는 날. 내가 내 인생 앞에 선 개인일 뿐이듯, 너 역시 네 삶을 짊어지는 단독자라고 말할 수 있는 날. 그때가 오면 내 역할은 여기까지야. 이제부터는 네가 스스로 찾아가야 해. 경영학 책에서 과학적으로 연구한 결과야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할 것이다. 롤모델로 삼을 만한 책들이나 적선하듯 툭툭 던져줘야지.(78-80p)

 

 

영화 초반, 주인공 팀이 자신의 가족을 소개하는 내레이션에도 아버지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아빤 좀 더 평범하셨다. 항상 시간이 남아도는 분이셨다. 50세 생신 때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면서 이젠 얘기도 하고 나한테 탁구도 져주시면서 여생을 여유롭게 사시게 됐다.” 팀의 아버지가 누리는 여유로운 삶은 그가 자신의 죽음을 알고 과거로 돌아가 다시 산 버전이다. 첫 번째로 살았던 삶은 어땠을까. 영화에 나오지는 않지만 아마도 나나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최대한 오래, 끝까지 일을 하지 않았을까. 쉰 살의 나이에 은퇴할 수 있는 사람은 암에 걸린 시간 여행자뿐이라는 말, 순식간에 지나가는 대사지만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는다.(82p)

 

 

동생이 나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에 빤해 나는 동생에게 참 무신경했다. 동생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내 갈 길을 갔던 내 모습이, 그런 악의 없는 무심함이 더더욱 동생을 괴롭혔을 것임을 지금은 안다. 무지가 상처를 주는 메커니즘이 늘 그렇듯 내게 악의가 없었기 때문에 동생은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93p)

 

 

1. 집안일은 공동의 일이다. 당신이 남자 룸메이트와 같이 산다고 생각하면 절반 분담을 당연히 여기지 않겠는가. 하물며 나는 당신보다 물리적으로 힘이 약하다. 당신이 더 많이 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은가. (외벌이에 전업주부라고? 그렇다면 전업주부에게도 직장 다니는 남편처럼 출퇴근과 휴일과 휴가의 개념을 적용해야 하지 않나. 그걸 요구하지 않는 아내라면, 고마워해야지.)

2. 나도 당신과 결혼하기 전까지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엄마가 빨아서 개어준 속옷을 입었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집안일에 특별한 기술있지 않다는 말이다. 나도 잘 못 한다. 많이 해서 익숙해졌을 뿐이다.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나도록 집안일에 서툴다면 아내에게 미안해해야 한다.

3. 아내가 남편을 칭찬할 때 대개는 잘 달래서 이거라도 하게 해야지하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웃는 경우가 많다.

4. 당신이 아무리 집안일을 많이 한다고 생각해도 아내가 그보다 많이 하고 있다. 억울해할 것 없다.

5. 시댁에 갔을 때 조카들이랑 놀아준다고 방에 들어가 있지 마라. 당신이 블록을 맞추는 동안 거실과 주방에선 많은 일이 일어난다.

6. 아이의 옷, 장난감, 유모차를 사는 게 내 쇼핑이냐? 도끼눈 좀 뜨지 마라. 정작 내 옷은 사지도 못했다. 뭘 사야 하는지 찾아보는 것도 육아에 속한다. 얼마나 시간과 품이 드는지, 당신도 한번 해보고 얘기하자.(129-130p)

 

 

나는 기억한다. 내가 감기에 걸려서 감기약을 지어왔을 때 친정엄마는 얼른 먹어라하시고, 시어머니는 애기 젖 주고 먹어라하셨던 걸. 그런 건 참 잊히지가 않는다.

나는 기억한다. 늦은 밤 술자리에서 내게 어떻게 아기 엄마가 이 시간에 술을 마셔요?”라고 묻던 그 남자의 말투를. 그날 내가 불쾌감을 표시하여 술자리의 흥을 깨뜨린 것에 대해, 기어코 당신에게 사과를 받은 것에 대해,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133-134p)

 

 

<채식주의자>의 중요한 테마 중 하나가 폭력성이라고들 하고 특히나 어떤 평론가는 소설 속 아버지의 행동을 남성적 폭력이라 칭했는데, 나는 이들의 모습이 한국적 폭력’, 혹은 한국 부모의 폭력으로 읽혔다. 이를테면 그것은 자식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을 계속 입을 때 그 옷을 가위로 잘라버리는 폭력이다. ‘저대로 두면 몸이 상할 텐데라면서 입에 억지로 고기를 쑤셔 넣는 모습의 연장선에 저러다 겉멋이 들어 공부를 안 하는 것은 아닐까걱정하며 바지를 잘라버리는 내 엄마가 있었다. 자식을 위해서 자식의 인생에 개입할 수 있다는 태도, 아니 개입해야 한다는 믿음, 그것도 아주 깊숙이, 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달려들어 자식의 잘못된 면모를 바로잡아주려는 공격적인 모성 혹은 부성.(136p)

 

 

요 며칠, 내가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나는 왜 이럴까?’.

나는 왜 이렇게 말이 많을까. 나는 왜 방금 전에 하지 말아야지다짐한 말을 또다시 하고 있을까. 내가 망한다면 뭘로 망할까 생각해봤는데, 결론은 분명하다. 난 말로 망할 것이다.

나는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떨까. 이야기하고 보면 사실 별것 아니라 머쓱해지면서.

나는 왜 이렇게 흥분을 잘할까. 없어 보이게.

나는 왜 이렇게 감정적일까. 화내지 않고 조곤조곤 차분히 말하고 싶다. 제발.

나는 왜 이렇게 집중력이 약할까. 편집하다 막히는 부분이 나오면 왜 좀 더 버티지 못하고 바로 페북을 열고 딴짓을 할까. 그러다 시간이 휙 지나 결국 허둥댈 거면서.

나는 왜 내 단점을 알면서 고치질 못할까. “수연아, 너는 흥분 하지만 않으면 돼라는 애정 어린 충고를 선배에게 듣고 감동했던 게 벌써 몇 년 전인데, 그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내 모습에 스스로 지긋지긋하다.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관심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어서 덥석 하겠다고 해놓고는 나중에 닥치고 나서야 깨닫는다. 내 능력을 상회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다른 사람에게 넘겼어야 하는 일임을. 철회하기 쪽팔려 꾸역꾸역 하면서 내 경솔함을 후회하겠지.

나는 왜 이렇게 거짓말을 잘할까. 게다가 대부분의 거짓말은 잘난 척이다.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를까. 운동을 시작하겠다고 다짐한 지가 언제고 영어 공부를 하겠다는 결심만 벌써 몇 번째냔 말이다.

나는 왜 나이를 서른다섯이나 먹고도, 입사 9년 차가 되고도, 애를 둘이나 낳고도 나는 왜 이럴까라는 쓸데없는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할까.

 

요즘 하율이에게 자주 하는 말. 왜 엄마가 한 번 말하면 안 듣니? 엄마가 아까부터 양말 신으라고 했는데, 아직까지 안 신었니? 만화는 두 개만 보기로 약속해놓고 왜 징징대니? 두 개만 보기로 했으면 두 개 끝나고 딱 꺼야지. 이렇게 말하는 순간의 나는 진심으로 짜증이 나 있다. 하율이의 교육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짜증을 못 이겨 하는 말이다.

내 못나고 한심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과연 하율이에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싶다. 내 삶은 하율이보다 훨씬 엉망이지만 하율이는 여섯 살이고 나는 서른다섯 살이라는 이유로 아무도 내게 뭐라고 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 나는 하율이에게 너도 네가 네 마음대로 안 되지? 엄마도 그래라고 말하는 게 옳다. 너는 왜 그러냐고 답답하다는 듯이 말할 게 아니라.

사실 제일 답답한 건 나잖은가. 나는 대체 왜 이럴까, 이 말이 지금도 사무치게 올라오는걸.(143-145p)

 

 

내가 밥을 먹으라고 하면 하율이는 바로 와서 밥을 먹어야 하나? 내가 조용히 하라고 하면 조용히 해야 하나? 하율이는 나에게 화를 내면 안 되나? 왜 그렇지·····? ‘내가 강아지를 돈 주고 샀으니까가 말도 안 되는 대답이듯이, ‘내가 너를 낳았으니까도 아이가 내게 복종해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내가 너를 먹이고 키우니까’, ‘내가 너의 부모니까’·····. 그 무엇도 내가 아이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지배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애초에 그럴 이유란 없다. 우리는 각자의 생각과 감정을 서로에게 표현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익혀야 할 뿐이다. 아이는 거기에 서투니 내가 알려준다혹은 우리에게 맞는 방식을 찾아간다가 맞는 말일 것이다.

(...)

아이에게 혼을 내거나 교육을 시키는 게 아니라 그저 화를 내고 있을 뿐임은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이 책을 읽고 반성했다고 해서 내가 갑자기 하율이에게 화를 내지 않게 될 리는 없지만, 최소한 그게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기준은 갖게 되었다. ‘이건 이상이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라고 덮어두지 말고, 내가 지향해야 하는 모습으로 계속 떠올리고 싶다.(148-149p)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남편은 진지하게 퇴직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사실 남편이 휴직, 이직, 퇴직을 고민한 건 꽤 오래된 이야기다. 여러 번 망설였지만 결론은 늘 같았다. 일하는 시간이 너무 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다그만둘까? 옮겨볼까?결심을 굳힐 때쯤 바쁜 시즌이 끝나 퇴근이 조금 빨라지거나 보너스가 들어온다그래도 이만큼 월급을 주는 회사도 드물지, 옮겨봐야 다른 데도 퇴근 시간은 비슷하잖아? 일단은 그냥 좀 더 다니자다시 바쁜 시즌이 돌아온다이렇게는 못살겠다, 돈을 좀 덜 받아도 일찍 끝나는 데로 옮기자그럼 어디 한 번 알아볼까?여기저기 알아보며 고민하는 사이 월급이 들어온다·····. 이런 과정이 무한 반복된다. 그사이 아이들은 자랐고 하율이의 시력은 완성되었으며 우리는 기회를 놓쳤다.(189p)

 

 

결혼이 사랑의 완성이 아니듯 아이는 행복의 증명이 아니며, 당신이 선택에 따르는 무게를 감당하는 딱 그만큼 나 역시 내 선택의 대가를 치르며 살고 있다. 내가 아이를 낳아 기르는 행복을 늘어놓듯이, 비혼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들 역시 그만의 행복을 나열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229p)

 

 

<옥자>를 보며 생각했다. 하율이와 하린이가 주인공인 영화에서 나는 조연일 거라고. 내가 주인공인 영화에서 내 부모님의 비중이 크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나는 기를 쓰고 자식을 먹이고 키우겠지만 바로 내가 하율이와 하린이가 세상을 향해 모험을 떠나는 계기가 될 것이며, 그들에게 벌어지는 중요한 일들을 나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다 알 수 없다. 어쩌면 당연한 얘기다. 인간이 타인을 완벽히 이해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할진대, 유독 자식에 대해서만 내가 너를 다 안다고 자신하는 건 오만이다. 다만 이 오만이 사랑에서 비롯됐다는 게 슬프다. 자식이 철이 들수록, 그러니까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될수록 부모에게 말하지 않는 영역이 늘어간다. 서로를 사랑하고 배려할수록 비밀이 늘어가는 모순.(234-235p)

 

 

 

장수연,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 ,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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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8

 

 

읽는 내내 가라앉았다. 변화는 극적이지 않다. 이 여성이 딸의 성정체성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럴지라도 한숨 자고 일어나면, 하루하루가 지나면, 조금, 아주 조금의 변화라도 생기지 않을까.

 

 

 

 

하긴 나이가 많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다. 젊었을 때는 선을 긋고 담을 쌓고 그래서 영원히 못 볼 것 같은 부류의 사람들도 이토록 쉽게 만날 수 있게 된다.

모두 별다를 게 없는 늙은이가 되는 탓이겠지. 그런 늙은이들을 받아 주는 곳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탓이겠지.(13p)

 

 

고요하고 어두운 방에 누워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끝이 없는 노동. 아무도 날 이런 고된 노동에서 구해 줄 수 없구나 하는 걱정. 그러니까 내가 염려하는 건 언제나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는 동안엔 끝나지 않는 이런 막막함을 견뎌 내야 한다. 나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어쩌면 이건 늙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문제일지도 모르지. 이 시대. 지금의 세대. 생각은 자연스럽게 딸애에게로 옮겨 간다. 딸애는 서른 중반에. 나는 예순이 넘어 지금, 여기에 도착했다. 그리고 딸애가 도달할, 결국 나는 가닿지 못할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아무래도 지금보다는 나을까. 아니, 지금보다 더 팍팍할까.(22-23p)

 

 

언젠가부터 나는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천천히 시간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뭐든 무리하게 바꾸려면 너무나 큰 수고로움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 걸 각오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거의 없다. 좋든 나쁘든. 모든 게 내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내가 선택했으므로 내 것이 된 것들. 그것들이 지금의 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과거나 미래 같은, 지금 있지도 않은 것들에 고개를 빼고 두리번거리는 동안 허비하는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지. 그런 후회는 언제나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들의 몫일지도 모른다.(30p)

 

 

딸애에게는 직장이 없다. 일은 하지만 직장이 없는 사람들. 열 명 중 하나. 열 명 중 셋. 그런 식으로 늘어나더니 이제는 열 명 중 여섯, 일곱이 그런 사람이다. 그들에겐 자격이 없다. 대출을 받을 자격도, 공공 주택에 들어갈 자격도.(32p)

 

 

나는 눈앞에 보이는 이 장면을 구겨 버리고 아주 작게 만들고 멀리 던져 버릴 수 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고 모른다고 여기면 얼마간은 편해질지도 모른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들. 아무것도 모를 때엔 너무나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들. 그러나 뭐든 제대로 알게 되는 순간. 그것들은 발톱을 세우고 마침내 본색을 드러내는 것 같다. 진실과 사실. 그런 명백한 것들의 속성. 언제고 그것들은 사납게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다.(62p)

 

 

나는 좋은 사람이다.

평생을 그렇게 하려고 애써왔다. 좋은 자식. 좋은 형제. 좋은 아내. 좋은 부모. 좋은 이웃. 그리고 오래전엔 좋은 선생님.

정말 힘들었겠구나.

나는 공감하는 사람.

최선을 다했으면 됐다.

나는 응원하는 사람.

다 이해한다. 이해하고말고.

나는 헤아리는 사람.

아니. 어쩌면 겁을 먹은 사람. 아무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 뛰어들려고 하지 않는 사람. 깊이 빠지려 하지 않는 사람. 나는 입은 옷을, 내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사람. 나는 경계에 서 있는 사람. 듣기 좋은 말과 보기 좋은 표정을 하고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뒷걸음질 치는 사람. 여전히 나는 좋은 사람이고 싶은 걸까. 그러나 지금 딸애에게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68-69p)

 

 

이런 순간 삶이라는 게 얼마나 혹독한지 비로소 알 것 같다. 하나의 산을 넘으면 또 하나의 산이 나타나고 또 다름 산이 나타나고. 어떤 기대감에 산을 넘고 마침내는 체념하면서 산을 넘고. 그럼에도 삶은 결코 너그러워지는 법이 없다. 관용이나 아량을 기대할 수 없는 상대. 그러니까 결국은 지게 될 싸움. 져야만 끝이 나는 싸움.(91p)

 

 

참담함이 정수리를 타고 온몸으로 흘러내린다. 이걸 뭐라고 불러야할까. 실은 이런 것들이 호시탐탐 삶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삶에서 결코 마주치고 싶지 않은 모습들이 이 골목을 빠져나가면, 저 모퉁이를 돌면 정확히 바로 그때에 짠, 하고 나타나는 것. 언제 어디서나 득시글거린다는 것. 왜 아무도 이런 것들을 미리 말해 주지 않는 걸까.(113-114p)

 

 

사람들은 그게 무엇이든 예민하게 알아채고, 알게 된 것을 말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긴다. 뭐든 모른 척하고 침묵하는 것이 예의라고 여겨지는 이 나라에서 나는 태어나고 자라고 이렇게 늙어 버렸다.(127p)

 

 

내 나이대의 사람들 중에도 여전히 20-30대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언제 물러날지 말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들. 시간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들. 그만한 자격을 갖춘 이들. 그러고 보면 나는 매사 너무 나이가 많은 사람처럼 굴고 있는지도 모른다. 늙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어떤 가능성들을 하나씩 베어 내면서 일상을 편편하고 밋밋하게 만드는 데에만 골몰하는지도 모른다. 무성하게 자라난 것들을 다 제거하고 마침내 평평해진 삶 너머로 죽음이 다가오는 모습을 주시하려고 애쓰는지도 모른다. 이제 다시 뭔가 시작하고 맞서고 싸우고 이길 만한 자신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세뇌시키면서 무료하지만 안전하고 무력하지만 차분한 일상을 유지하고 싶은지도 모른다.(129-130p)

 

 

이건 이해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에요. 이해해 달라고 사정해야 할 문제도 아니고요. 이건 그냥 권리잖아요.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갖는 거요. 그리고 사생활은 일과 별개예요. 제가 요구하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요? 일과 사생활을 구분해 달라는 것. 강사의 기본적인 권리를 지켜 달라는 것. 그건 너무 당연한 거잖아요.(156p)

 

 

그럼에도 불구하고 했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나는 간신히 삼킨다. 내 잘못이 아니지. 너의 잘못이 아니지.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 그렇게 말한다면 세상의 수많은 피해자들은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사과를 받아야 할까. 이렇게 생각하는 나도 예외가 아니다.(162p)

 

 

훌륭한 삶요? 존경받는 인생요? 그런 건, 삶이 아주 짧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에요. 봐요. 삶은 징그럽도록 길어요. 살다 보면 다 똑같아져요. 죽는 날만 기다리게 된다고요.(173p)

 

 

완벽한 오후.

그러나 내가 상상한 순간은 끝내 오지 않는다. 그런 순간은 늘 너무 이르거나 늦게 도착한다.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치거나 기다리다가 포기하게 만든다.(188p)

 

 

한숨 자고 나면, 아주 깊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면, 이 모든 일이 다 거짓말처럼 되어 버리면 좋겠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와 있으면 좋겠다.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순조롭고 수월한 일상. 그러나 이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끊임없이 싸우고 견뎌야 하는 일상일지도 모른다.

그런 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견뎌낼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으면 고집스럽고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늙은 노인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다시 눈을 감아 본다. 어쨌든 지금은 좀 자야 하니까. 자고 나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또 얼마간 받아들일 기운이 나겠지. 그러니까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건 아득한 내일이 아니다. 마주 서있는 지금이다. 나는 오늘 주어진 일들을 생각하고 오직 그 모든 일들을 무사히 마무리하겠다는 생각만 한다. 그런 식으로 길고 긴 내일들을 지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볼 뿐이다.(197p)

 

 

 

 

김혜진, <딸에 대하여>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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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

from Life 2018. 2. 7. 13:38

https://www.youtube.com/watch?v=yewjuezPa00&feature=youtu.be

 


페미니즘과 여성혐오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남자들은 지겹도록 같은 패턴의 질문이나 문제제기를 한다. 위 영상은 그렇게 반복되는 질문들에 대해 논리적인 답변을 제시한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문답을 소개.

 

Q: 모든 사람들이 그런 건 아니야. 왜 모든 사람들을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하냐? 난 살아가면서 단 한 번도 여혐을 하지 않았고, 단 한 번도 성차별적인 발언을 한 적이 없었고, 단 한 번도 성희롱이나 성추행이나 이런 것도 한 적이 없었고, 몰카 야동을 본 적도 없고, 몰카를 찍은 적도 없다. 근데 나 정말 억울하고 성평등을 위해서 정말 노력하는 사람인데 내가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나를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는 게 싫다.

 

A:모든 사람들은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취급받으면서 살아간다. 항상! 우리를 잠재적 범죄자로 보기 때문에 길거리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감시를 하고, 우리를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보기 때문에 공항의 보안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그동안 이렇게 숱하게 잠재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취급받아 왔으면서 여성들이 이러한 부분에서 목소리를 낼 때만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그냥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기 싫으니 말을 하지 말라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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