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9/12

 

피식피식 웃기다.

 

 

가난뱅이가 사랑에 빠지게 되면,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은 온통 위법성을 띠기 마련이다.

그 무렵 내 성적은 형편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샤는 예전에도 성적불량이었다. 교학과에서는 우리의 도덕성을 들먹였다.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빚까지 지게 되면, 그의 도덕성 문제가 거론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19p)

 

 

쉬지 않고 질문을 해대는 사람은 언젠가는 답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37p)

 

 

편집장은 선량한 사람이었다. 월급을 많이 받으면 선량함과 같은 사치는 스스로에게 허용할 수 있는 법이다.(72p)

 

 

“머리가 정상이 아니라고? 그래도 도둑질할 머리는 돌아가나 보지? 자네 서류에 집단 절도라고 돼 있던데. 대체 뭘 훔친 거야?”

죄수는 당황해 하며 어물쩍거렸다.

“별거 아냐·····. 트랙터를·····.”

“트랙터를 통째로?”

“물론이지.”

“그걸 어떻게?”

“아주 간단해. 철근 콘크리트 제조 콤비나트에서 한 일이지. 내가 심리전을 썼거든.”

“어떻게 했다는 거야?”

“어떻게 했다는 거야?”

“콤비나트에 들어갔어. 트랙터에 앉았지. 뒤쪽 기름통 밑에 철로 된 큰 통을 묶었어. 당직실 쪽으로 몰고 갔지. 통이 시끄럽게 덜그럭거렸을 거 아냐. 경비가 나와서 <통을 어디로 끌고 가는 거야?>하고 묻더군. 그래서 <개인적으로 좀 필요해서요.>하고 대답했지. <서류 있어?>, <아니오.>, <그럼 풀어놔.>·····나는 통을 풀어놓고 그냥 쭈욱 타고 갔어. 어쨌든 심리전이 통한 거지. 그러고 나서 트랙터 분해 작업을 했고·····.”(110-111p)

 

 

나는 내가 겪었던 가난을 슬퍼하지 않는다. 만약 헤밍웨이의 말을 믿는다면 가난은 작가에게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학교이다. 가난은 사람을 명민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식의 교훈은 얼마든지 있다.

흥미로운 점은, 헤밍웨이가 부자가 되자마자 이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139p)

 

 

무언가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정상적인 사람이었을 때 그들은 나를 무시했다. 그런데 내가 거의 반병신이 된 지금은 여자들이 나한테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내 눈을 서로 치료해 주려고, 말 그대로 치고받고 싸우기까지 했다.(201p)

 

 

“...결과는 예상치 못한 것이 될 수도 있어요. 그러니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동의하십니까?”

“생각해 보라면서요.”

“얼마나 생각을 해야 합니까? 그냥 동의하세요.”(225p)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ㅡ 도블라또프, <여행가방> 中, 뿌쉬낀하우스

,

2018/9/4

 

 

무슨 잘못을 진짜 하긴 했는지, 그걸로 미안한 감정을 가졌는지의 여부는 아무 상관 없단다. 핵심은 그런 말을 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뿐이거든. 나는 그걸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가식적이라고? 진정성이라든가 진심 같은 말을 나는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 그걸 무엇으로 판단할 수 있겠니? 진짜는 머리를 조아리는 각도. 무릎을 꿇는 자세에서 오는 것들 아니겠니? 너를 때리긴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만은 진심이다, 같은 건 없단다. 호소력 같은 것이 다 무엇이겠니. 그것은 형식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잘못을 했다면 더 오래 무릎을 꿇고 더 낮게 엎드리는 자세, 그게 가장 필요하단다. 일종의 의무이며 책임지는 자의 태도 같은 것이지. 사랑해서 그랬습니다, 사랑해서 아내를 때리고, 우리 가정을 파탄냈습니다, 같은 건 없어. 사랑을 증명하려 했다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나도 맞고 자랐어요, 폭력 가정에서 나고 자라 그랬습니다, 하는 변명과 뭐가 다르겠니? 둘 중 어느 말이 더 진짜일까. 대답해보렴.(15-16p)

 

 

문제는 사과하는 쪽이 언제나 먼저 사과한다는 점이란다. 그게 자기 이야기인 줄도 모르는 사람은 언제나 모르지.(17p)

 

 

나를 비난하고 싶겠지. 비열하고 졸렬한 인간이라고 욕하며 세상에 진실을 밝히겠다고 정의로운 척 떠들어대고 싶은 거 아니니? 그런데 다들 그래. 다들 그러고 사는 거거든. 들키지 않을 만한 허물은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거든. 그러면서도 정작 자기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는 몰라. 그러니까 아무나 쉽게 비난하고 혐오하고 그게 정의인 줄 아는 거지. 정치인을 혐오하고 가정폭력범과 강간범을 혐오하고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혐오하는 게 정의라고 생각하는 거야. 인터넷에 올리고 퍼뜨리고 그걸로 무언가 바로잡는 줄 알아. 그러면서도 정작 그게 자기 모습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거든.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거나 고학력자라는 사람들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겠니. 키보드 앞에 앉아서 뭐에 그리 화가 나 있는 거냐고. 그게 다 도덕이고 정의이고 올바른 세계라고 믿는 거거든. 삐뚤어진 세상을 바로잡는 일에 지금 내가 참여하고 있다고. 더구나 적극적인 혐오를 통해 자기는 그런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받고 싶어하거든. 진짜를 말하자면 누구든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모른다는 거야. 인간이란 본래 이기적인 존재고 그러므로 부단히 경계해야 하는데도 부도덕하고 불의한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줄로만 알아. 그런 세계에 사는 자들의 전형이 있고 그것은 자기와 다르며 그러므로 그래서 그랬을 거라고 상상하는 거야. 여전히 어려워하는구나. 너라면 다를 줄 아는 거겠지. 그러나 네가 다른 게 아니란다. 다만 그런 상황이 너에게 없었을 뿐.(26p)

 

 

소설을 읽는다는 건 누군가의 ‘나쁨’에 대한 지겨운 고백을 듣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울어야 할 일과 절대 울고 싶지 않은 일, 되돌려주고 싶은 모욕과 부끄러움, 한순간 광포한 것으로 변해버리는 후회들이 차창 밖처럼 연속된다. 나는 누구나 아주 나빠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고 믿고 나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한계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소설은 어느 나쁘지 않은 오후에 누군가의 문상을 가듯이 읽어주었으면. 우리는 언젠가 이 세계에서 지워져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이들이 되겠지만 아직은 내가 나빴습니까, 하고 더 물어야 하는 사람들이니까.(119p)

 

 

이경은 서서히 깨닫게 됐다. 수이가 자신에 대해 별로 말하지 않았던 건 수이의 그런 성향 때문이라고. 수이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에 대해 이경만큼의 생각을 하지 않는지도 몰랐다. 수이는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었고, 선택의 순간마다 하나의 선택을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는 것이 수이의 방식이었다. 수이는 자동차 정비 일을 하면서 그것이 자기 인생에 어떤 의미로 작용하는지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선택한 일이니까 최선을 다해 수행할 뿐이었다. 반명 이경은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려고 했고, 어떤 선택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전전긍긍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조차 알지 못했는데,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결국 후회가 더 크리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242-243p)

 

 

“수이 네가 없는 곳에 행복은 없어.”

그 말을 하기 전까지 이경은 수이가 없는 곳에 행복은 없다고 진심으로 믿었었다. 하지만 막상 그 생각을 말로 표현하고 나니 그 말이 껍데기만 번지르르한 거짓처럼 느껴졌다.(252p)

 

 

 

ㅡ 임현 외, <2017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中, 문학동네

,

2018/9/6

 

 

2017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고두’를 읽고 작가에 관심이 생겨서 찾아 읽었다.

 

 

그러나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은 대부분 설명하기 어려운 것일 뿐, 알고 나면 뚜렷한 인과관계로 엮여 있다. 우연이란 아직 모르거나 그중 한 부분이 누락된 것일 뿐이고. 소설가의 역할이 무엇이겠는가. 그런 신비하고 모호한 부분을 필연으로 만드는 것. ‘왕이 죽고 왕비가 죽었다’의 빈 곳을 채우는 것 아닌가. 자연사한 왕족의 이야기를 누가 읽고 싶어하겠나. 바람난 남편을 독살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왕비의 비참한 최후를 그려내는 것. 그러므로 그럴듯한 원인을 찾아서 불분명한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일 아닌가.(69-70p)

 

 

어떤 책은 누군가의 삶을 완벽히 뒤바꾸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경우, 저자의 능력보다는 독자의 잠재력이 더 요구되는 것 아닙니까. 제아무리 훌륭한 고전이라 한들 그걸 읽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평가가 다른 것 아니겠습니까. 「잠언」시집 한 구절에 새삼 감동을 받았을 때는, 그 책의 무게감 때문만이 아닙니다. 마침 그런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아버지도 그랬던 게 아닐까. 아마 그런 말을 필요로 했던 게 아닐까.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제법 지난 뒤의 일이었습니다.(81p)

 

 

생각해보면 나는 그런 식으로 사람들과 자주 멀어지는 편이다. 어느 순간 견딜 수 없는 점을 발견하고 결국엔 그걸 참지 못했다. 거기에 대해서라면 그 사람들과 내가 달랐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서로 너무 닮아서였다고 생각한다. 아마 우재와도 같은 이유로 멀어진 게 아닌가 싶다. 우리가 너무 닮았던 게 아닐까. 그걸 알아보고 우재나 나나 결국 참지 못했던 게 아닐까.(96p)

 

 

그 사람이 나를 보더니 전공이 뭐냐고 묻는 거예요. 내 친구가 고졸이다, 상고 나왔다고 대신 대답했어요. 질문한 사람이 민망해하는데 나도 따라 민망하더라고요. 다른 누가 그게 뭐가 중요하냐, 술이나 마시자, 해서 그런 식으로 넘어갔는데 괜히 미안해지더군요. 나 때문에 그 자리가 어색해진 거 아닌가. 그런데 뭐랄까 시간이 지나는 동안 점점 기분이 나빠지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친구의 말에는 하나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는데 이후로 흘러가는 상황이나 분위기 같은 게 이상하게 불쾌한 거예요. 사람들이 무언가 조심스러워하는데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로 왜 나를 배려하나. 왜 나를 장애인이나 노인처럼 보살피려고 할까.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면서 왜 중요한 사람 대하듯 그 자리에 내가 이 대화를 이해하고 있는지 살피고, 모를 만한 주제는 피하려 드는지, 나를 두고 미안해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게 너무 빤히 보여서 불쾌하더란 말입니다. 왜 함부로 나를 배려하려 드나.(103p)

 

 

생각해보면, 그것은 아주 사소한 문제였음에도 그 남자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어버렸던 것 같다. 그때의 기분 같은 것은 정확히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인데도 나중에는 물들고 착색되어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그 남자가 진짜를 이야기했는데 우리가 그것을 오해했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확인할 수 없는 일이고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왜 그런 행동들이 그토록 나쁘다, 라고 느껴졌냐는 것이다. 관대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137p)

 

 

미혼모라든가, 장애인 같은 말들이 나는 무서워요. 그런 것들은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인데 그게 내가 될까봐 무서운 거지. 그 여자가 거기서 그런 걸 먹는데 나는 또 그 생각이 들었어요. 저 여자는 남들 눈에 자기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으로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언젠가 버스에서 기사와 다른 운전자가 싸우는 것을 보았는데 그 사람이 기사에게 평생 버스나 운전해라, 라고 말하는 거예요. 나는 그 말이 너무 슬퍼서 이봐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화를 내고 싶었지만 못했어요. 그 버스 기사도 슬펐을 거야. 이제껏 버스를 모는 일이 불행한 일에 속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더더구나 그랬을 거고. 어쩌면 정말 평생 버스 모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는데 그래서 그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사람이라면 어떡하겠어요. 얼마 전에는 고작 중학교 2학년밖에 안 된 녀석이 그러더라고요. 주의가 산만하고 수업에 방해가 되길래 단순히 경고 차원에서, 자꾸 이러면 부모님 모시고 오라고 한다, 겁을 주려고 했던 건데, 그 녀석이 조금도 기죽지 않고 생글생글한 얼굴로, 선생님은 계약직이잖아요, 하는 거예요. 제법 좋은 아이라고 생각했어요. 성적도 좋고 가정교육을 잘 받고 자라 예의가 바르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아이 입에서 나온 선생님과 계약직이라는 단어가 나는 너무 멀게 느껴지는 거예요. 선생이라는 것이 생선처럼 비리고 값싼 말처럼 느껴졌어요. 그리고 이제껏 그 아이가 나를 어떻게 보고 있었나 생각하니 무섭더라고요. 정말 비참하고 무서운 기분이 들었어요.(160-161p)

 

 

연경은 종각역으로 통하는 지하도에서 신문지를 덮고 앉아 첫차를 기다렸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신문지와 종이 박스를 구해 자리를 잡았는데 누구도 홈리스처럼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돌아갈 곳이 있었고 진짜 홈리스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있었다면 그럴 수 없었을 거다, 라고 연경은 나에게 말했다. 있었다면 진짜 홈리스처럼 홈리스들이랑 몸을 붙이고 누워 있을 수는 없었을 거라고. 옆에 있는 사람은 진짜 홈리스도 아니고 다시 볼 사람들도 아니었기 때문에 불쾌할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고.(164p)

 

거실 소파에 가만히 앉아서 그러는 거예요. 고등학생 때까지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고요. 아니면 법조인이나 세무사처럼 남들이 보기에도 성공한 사람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고. 대학에서 만난 친구에게도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다들 그렇잖아요. 무언가 대단한 미래가 있을 것 같잖아요. 그런데 상대 쪽에서는 트럭을 몰고 싶어 하더라고 했습니다. 트럭 뒤에는 선반을 달아 헌책을 사고팔기를 원했으며 그것으로 경비를 마련한 뒤에 여행을 하면 좋지 않겠냐고 남편에게 되물었다고요. 또 복권을 한 번도 사본 적이 없는데 만약 산다고 하더라도 2등이면 좋겠다고도 했어요. 그쪽이 보다 현실적이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면서요. 그 순간 남편은 어딘가 부끄러워졌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가 바라는 것들은 남편이 한 번도 원해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으나 원한다면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을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자기와는 아주 다른 사람 같기도 한 반면에 그 친구가 꿈꾸는 미래는 소박했고 당시의 남편으로부터도 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빴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모님 모두 공무원인 그 친구가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처럼 자기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게 너무 명확해 보였다고요. 그리고 나는 그때 남편이 무얼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215p)

 

 

“그런데 왜 곧바로 신고하지 않았습니까?”

(...)

“내가 지켜보고 있는 걸 그 사람도 봤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그냥 도망갈 거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거기에 사람이 죽어 있다고 어떻게 생각했겠어요?”(218-219p)

 

 

“그냥, 운이 나빴을 뿐이에요.”

기운 없이 담담한 반응에 나는 도리어 미안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정확히는 그 여자의 삶이 나와 그렇게 멀어 보이지 않더라고요. 지금까지 내가 불행하게 살아왔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나대로 그냥 살았을 뿐인데 내가 된 거잖아요. 별다른 노력도 없이 저 여자가 되지 않은 거잖아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우연한 사고들이었어요. 무얼 특별히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다만 운이 나빴을 뿐입니다.(222p)

 

 

“그날 나는 그 애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버렸어요. 월요일이 지나고 화요일이나 수요일쯤에 그 애 반을 찾아가서 미리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가지 못했다고 둘러댔는데 그 애는 나를 빤히 쳐다만 보더라구요. 괜찮다거나, 다음에 다시 오라거나 그런 말 없이 그냥 보고만 있었어요.”

(...)

“아마 그날, 나를 보았던 게 아닐까 생각해요. 그 빌라를 급하게 ᄈᆞ져나와 골목 밖으로 달려가던 나를 어딘가에서 보았을 거라고요. 그래서 그 애의 무언가를 건드려버렸구나····· 그 집에서 내가 보았던 빈하거나 누추한 사정을 정작 그 애는 모르고 살았던 건데, 이제까지 한 번도 부끄럽거나 숨겨야 될 일이 아니라고 여겼을 텐데, 나 때문에 그걸 알게 되었다고·····. 그걸 생각하니까 내가 너무 부끄러워지더라구요.”(247-248p)

 

문영은 말하기 어려운 것들을 말하고 싶어 했고 그게 무엇일까,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궁금해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이르러 나는 그런 문영을 참을 수가 없었는데 너는 왜 그런 것들만 궁금해? 여름에 더운 집과 겨울에 추운 집 중 어느 것이 더 나은지, 돈을 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왜 그런 건 묻지 않아? 궁금하지 않아도 되니까, 너는 그냥 그런 건 몰라도 되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는 다른 거 아니냐고, 그런데도 왜 너는 남의 불행을 다 이해하는 사람처럼 구나, 왜 그게 네 것인 양 남의 걸 탐내나, 언젠가 내가 문영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나. 했다고 하더라도 그게 온전히 전달되었을까.(248-249p)

 

 

“그리고 문 앞에서 내가 뭘 봤는 줄 알아? 그 냄새의 근원지 말이야. 거기에 행색이 초라한 중년 여자가 서 있는데 나로서는 무척 안심이 되는 장면이었어.”

(...)

“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여자가 말을 걸어왔을 때 소진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지금 이 냄새 때문에 그러시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나를 계속 보고 있는 거죠?”

소진은 아니라고, 아는 사람이라고 착각해서 그런 것뿐이라며 급하게 변명했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 하지만 이런 일은 자주 겪는 것도 아니고 나는 평소에는 정말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요. 오늘은 정말 예외적인 날이에요.”

그 말에 뭐라 대답해야 했을까. 소진은 민재에게 그 순간에 겪었던 난처함에 대해, 주변 사람들 모두가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어딘가 자신을 비난하고 있다는 생각에 몹시 부끄러웠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여자가 다시 물어왔다고도 했다.

“지금 몇 시쯤 됐냐고. 그렇게 묻더니 미안하대 고맙다 아니고 미안하다. 하루 종일 이 말이 떠나질 않는 거야. 시간도 모를 만큼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고 있던 걸까. 도망치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냥 나쁜 일을 겪었던 것뿐인데 그런 사람을 내가 미안하게 만든 거잖아. 뭐랄까, 내가 그 사람의 어떤 부분을 들춰버려서 슬프게 만든 게 아닐까, 그 사람은 그때 내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계속 들어.”

(...)

“내가 그 여자였을 수도 있어. 그 일에 휘말린 사람이 당신일 수도 있었다고. 그때도 정말 그렇게 말할 수 있어?”(263-265p)

 

 

무슨 소리야, 당신은 지금 저 여자가 일부러 그랬다는 거야? 저 애를 처음부터 죽이려고 작정이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정말 그렇게 믿는 거냐고. 지금 제정신이야? 이건 그냥 사고일 뿐이잖아. 누구도 원하지 않고 의도라곤 전혀 없던 거라고. 알아? 그게 더 무서운 일이야. 우리는 어떠한 조짐이나 징조조차 발견할 수가 없어. 그래서 아무도 그걸 막을 수가 없는 거라고.(279p)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어?”

아주 오래전에, 민재는 소진과 헤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사소한 문제에서 시작하여 결국엔 끝장을 보게 되는 날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대다수의 경험적인 근거들이 그들의 연애가 단지 서로의 차이점을 확인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음을 명백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해본 적은 없었으나 소진도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280-281p)

 

 

 

ㅡ 임현, <그 개와 같은 말> 中, 현대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