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9/6

 

 

2017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고두’를 읽고 작가에 관심이 생겨서 찾아 읽었다.

 

 

그러나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은 대부분 설명하기 어려운 것일 뿐, 알고 나면 뚜렷한 인과관계로 엮여 있다. 우연이란 아직 모르거나 그중 한 부분이 누락된 것일 뿐이고. 소설가의 역할이 무엇이겠는가. 그런 신비하고 모호한 부분을 필연으로 만드는 것. ‘왕이 죽고 왕비가 죽었다’의 빈 곳을 채우는 것 아닌가. 자연사한 왕족의 이야기를 누가 읽고 싶어하겠나. 바람난 남편을 독살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왕비의 비참한 최후를 그려내는 것. 그러므로 그럴듯한 원인을 찾아서 불분명한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일 아닌가.(69-70p)

 

 

어떤 책은 누군가의 삶을 완벽히 뒤바꾸어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경우, 저자의 능력보다는 독자의 잠재력이 더 요구되는 것 아닙니까. 제아무리 훌륭한 고전이라 한들 그걸 읽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평가가 다른 것 아니겠습니까. 「잠언」시집 한 구절에 새삼 감동을 받았을 때는, 그 책의 무게감 때문만이 아닙니다. 마침 그런 위로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아버지도 그랬던 게 아닐까. 아마 그런 말을 필요로 했던 게 아닐까.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제법 지난 뒤의 일이었습니다.(81p)

 

 

생각해보면 나는 그런 식으로 사람들과 자주 멀어지는 편이다. 어느 순간 견딜 수 없는 점을 발견하고 결국엔 그걸 참지 못했다. 거기에 대해서라면 그 사람들과 내가 달랐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서로 너무 닮아서였다고 생각한다. 아마 우재와도 같은 이유로 멀어진 게 아닌가 싶다. 우리가 너무 닮았던 게 아닐까. 그걸 알아보고 우재나 나나 결국 참지 못했던 게 아닐까.(96p)

 

 

그 사람이 나를 보더니 전공이 뭐냐고 묻는 거예요. 내 친구가 고졸이다, 상고 나왔다고 대신 대답했어요. 질문한 사람이 민망해하는데 나도 따라 민망하더라고요. 다른 누가 그게 뭐가 중요하냐, 술이나 마시자, 해서 그런 식으로 넘어갔는데 괜히 미안해지더군요. 나 때문에 그 자리가 어색해진 거 아닌가. 그런데 뭐랄까 시간이 지나는 동안 점점 기분이 나빠지더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 친구의 말에는 하나도 기분이 상하지 않았는데 이후로 흘러가는 상황이나 분위기 같은 게 이상하게 불쾌한 거예요. 사람들이 무언가 조심스러워하는데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로 왜 나를 배려하나. 왜 나를 장애인이나 노인처럼 보살피려고 할까.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면서 왜 중요한 사람 대하듯 그 자리에 내가 이 대화를 이해하고 있는지 살피고, 모를 만한 주제는 피하려 드는지, 나를 두고 미안해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게 너무 빤히 보여서 불쾌하더란 말입니다. 왜 함부로 나를 배려하려 드나.(103p)

 

 

생각해보면, 그것은 아주 사소한 문제였음에도 그 남자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어버렸던 것 같다. 그때의 기분 같은 것은 정확히 무엇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인데도 나중에는 물들고 착색되어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그 남자가 진짜를 이야기했는데 우리가 그것을 오해했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확인할 수 없는 일이고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왜 그런 행동들이 그토록 나쁘다, 라고 느껴졌냐는 것이다. 관대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137p)

 

 

미혼모라든가, 장애인 같은 말들이 나는 무서워요. 그런 것들은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인데 그게 내가 될까봐 무서운 거지. 그 여자가 거기서 그런 걸 먹는데 나는 또 그 생각이 들었어요. 저 여자는 남들 눈에 자기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으로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언젠가 버스에서 기사와 다른 운전자가 싸우는 것을 보았는데 그 사람이 기사에게 평생 버스나 운전해라, 라고 말하는 거예요. 나는 그 말이 너무 슬퍼서 이봐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화를 내고 싶었지만 못했어요. 그 버스 기사도 슬펐을 거야. 이제껏 버스를 모는 일이 불행한 일에 속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더더구나 그랬을 거고. 어쩌면 정말 평생 버스 모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일 수도 있는데 그래서 그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는 사람이라면 어떡하겠어요. 얼마 전에는 고작 중학교 2학년밖에 안 된 녀석이 그러더라고요. 주의가 산만하고 수업에 방해가 되길래 단순히 경고 차원에서, 자꾸 이러면 부모님 모시고 오라고 한다, 겁을 주려고 했던 건데, 그 녀석이 조금도 기죽지 않고 생글생글한 얼굴로, 선생님은 계약직이잖아요, 하는 거예요. 제법 좋은 아이라고 생각했어요. 성적도 좋고 가정교육을 잘 받고 자라 예의가 바르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아이 입에서 나온 선생님과 계약직이라는 단어가 나는 너무 멀게 느껴지는 거예요. 선생이라는 것이 생선처럼 비리고 값싼 말처럼 느껴졌어요. 그리고 이제껏 그 아이가 나를 어떻게 보고 있었나 생각하니 무섭더라고요. 정말 비참하고 무서운 기분이 들었어요.(160-161p)

 

 

연경은 종각역으로 통하는 지하도에서 신문지를 덮고 앉아 첫차를 기다렸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신문지와 종이 박스를 구해 자리를 잡았는데 누구도 홈리스처럼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돌아갈 곳이 있었고 진짜 홈리스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있었다면 그럴 수 없었을 거다, 라고 연경은 나에게 말했다. 있었다면 진짜 홈리스처럼 홈리스들이랑 몸을 붙이고 누워 있을 수는 없었을 거라고. 옆에 있는 사람은 진짜 홈리스도 아니고 다시 볼 사람들도 아니었기 때문에 불쾌할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고.(164p)

 

거실 소파에 가만히 앉아서 그러는 거예요. 고등학생 때까지는 의사가 되고 싶었다고요. 아니면 법조인이나 세무사처럼 남들이 보기에도 성공한 사람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고. 대학에서 만난 친구에게도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다들 그렇잖아요. 무언가 대단한 미래가 있을 것 같잖아요. 그런데 상대 쪽에서는 트럭을 몰고 싶어 하더라고 했습니다. 트럭 뒤에는 선반을 달아 헌책을 사고팔기를 원했으며 그것으로 경비를 마련한 뒤에 여행을 하면 좋지 않겠냐고 남편에게 되물었다고요. 또 복권을 한 번도 사본 적이 없는데 만약 산다고 하더라도 2등이면 좋겠다고도 했어요. 그쪽이 보다 현실적이고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면서요. 그 순간 남편은 어딘가 부끄러워졌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가 바라는 것들은 남편이 한 번도 원해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으나 원한다면 어렵지 않게 이룰 수 있을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자기와는 아주 다른 사람 같기도 한 반면에 그 친구가 꿈꾸는 미래는 소박했고 당시의 남편으로부터도 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기분이 나빴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모님 모두 공무원인 그 친구가 절대 그런 일을 하지 않을 것처럼 자기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게 너무 명확해 보였다고요. 그리고 나는 그때 남편이 무얼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215p)

 

 

“그런데 왜 곧바로 신고하지 않았습니까?”

(...)

“내가 지켜보고 있는 걸 그 사람도 봤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그냥 도망갈 거라고 생각했겠습니까? 거기에 사람이 죽어 있다고 어떻게 생각했겠어요?”(218-219p)

 

 

“그냥, 운이 나빴을 뿐이에요.”

기운 없이 담담한 반응에 나는 도리어 미안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정확히는 그 여자의 삶이 나와 그렇게 멀어 보이지 않더라고요. 지금까지 내가 불행하게 살아왔다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나대로 그냥 살았을 뿐인데 내가 된 거잖아요. 별다른 노력도 없이 저 여자가 되지 않은 거잖아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우연한 사고들이었어요. 무얼 특별히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다만 운이 나빴을 뿐입니다.(222p)

 

 

“그날 나는 그 애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버렸어요. 월요일이 지나고 화요일이나 수요일쯤에 그 애 반을 찾아가서 미리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가지 못했다고 둘러댔는데 그 애는 나를 빤히 쳐다만 보더라구요. 괜찮다거나, 다음에 다시 오라거나 그런 말 없이 그냥 보고만 있었어요.”

(...)

“아마 그날, 나를 보았던 게 아닐까 생각해요. 그 빌라를 급하게 ᄈᆞ져나와 골목 밖으로 달려가던 나를 어딘가에서 보았을 거라고요. 그래서 그 애의 무언가를 건드려버렸구나····· 그 집에서 내가 보았던 빈하거나 누추한 사정을 정작 그 애는 모르고 살았던 건데, 이제까지 한 번도 부끄럽거나 숨겨야 될 일이 아니라고 여겼을 텐데, 나 때문에 그걸 알게 되었다고·····. 그걸 생각하니까 내가 너무 부끄러워지더라구요.”(247-248p)

 

문영은 말하기 어려운 것들을 말하고 싶어 했고 그게 무엇일까,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궁금해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이르러 나는 그런 문영을 참을 수가 없었는데 너는 왜 그런 것들만 궁금해? 여름에 더운 집과 겨울에 추운 집 중 어느 것이 더 나은지, 돈을 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왜 그런 건 묻지 않아? 궁금하지 않아도 되니까, 너는 그냥 그런 건 몰라도 되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는 다른 거 아니냐고, 그런데도 왜 너는 남의 불행을 다 이해하는 사람처럼 구나, 왜 그게 네 것인 양 남의 걸 탐내나, 언젠가 내가 문영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나. 했다고 하더라도 그게 온전히 전달되었을까.(248-249p)

 

 

“그리고 문 앞에서 내가 뭘 봤는 줄 알아? 그 냄새의 근원지 말이야. 거기에 행색이 초라한 중년 여자가 서 있는데 나로서는 무척 안심이 되는 장면이었어.”

(...)

“자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여자가 말을 걸어왔을 때 소진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지금 이 냄새 때문에 그러시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나를 계속 보고 있는 거죠?”

소진은 아니라고, 아는 사람이라고 착각해서 그런 것뿐이라며 급하게 변명했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 하지만 이런 일은 자주 겪는 것도 아니고 나는 평소에는 정말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요. 오늘은 정말 예외적인 날이에요.”

그 말에 뭐라 대답해야 했을까. 소진은 민재에게 그 순간에 겪었던 난처함에 대해, 주변 사람들 모두가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어딘가 자신을 비난하고 있다는 생각에 몹시 부끄러웠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여자가 다시 물어왔다고도 했다.

“지금 몇 시쯤 됐냐고. 그렇게 묻더니 미안하대 고맙다 아니고 미안하다. 하루 종일 이 말이 떠나질 않는 거야. 시간도 모를 만큼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고 있던 걸까. 도망치고 있었을지도 몰라. 그냥 나쁜 일을 겪었던 것뿐인데 그런 사람을 내가 미안하게 만든 거잖아. 뭐랄까, 내가 그 사람의 어떤 부분을 들춰버려서 슬프게 만든 게 아닐까, 그 사람은 그때 내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계속 들어.”

(...)

“내가 그 여자였을 수도 있어. 그 일에 휘말린 사람이 당신일 수도 있었다고. 그때도 정말 그렇게 말할 수 있어?”(263-265p)

 

 

무슨 소리야, 당신은 지금 저 여자가 일부러 그랬다는 거야? 저 애를 처음부터 죽이려고 작정이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정말 그렇게 믿는 거냐고. 지금 제정신이야? 이건 그냥 사고일 뿐이잖아. 누구도 원하지 않고 의도라곤 전혀 없던 거라고. 알아? 그게 더 무서운 일이야. 우리는 어떠한 조짐이나 징조조차 발견할 수가 없어. 그래서 아무도 그걸 막을 수가 없는 거라고.(279p)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어?”

아주 오래전에, 민재는 소진과 헤어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사소한 문제에서 시작하여 결국엔 끝장을 보게 되는 날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대다수의 경험적인 근거들이 그들의 연애가 단지 서로의 차이점을 확인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음을 명백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해본 적은 없었으나 소진도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280-281p)

 

 

 

ㅡ 임현, <그 개와 같은 말> 中,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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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9/5

 

 

그러나 그와 예술가들, 좁게 말해서 시인들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보들레르의 열정을 이어받은 현대의 시인들은 ‘무덤 뒤의 찬란함’에 자주 도취하면서도, 현실에서는 그 빛을 일상적 실천의 등대로 삼는다. 언제나 물질의 제약을 받는 이 세상에서 그 찬란한 빛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도달할 수 없는 곳을 향해 가는 발걸음은 바로 그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결코 멈추어지지 않는다. 시인들에게는 다른 세계의 빛이 이 세계의 실천을 지시한다. 저 불행한 청년은 이 실천이 두렵고 세상의 온갖 장애가 두려워, 이 세상을 파괴하고 저를 파괴하였으며, 마침내 저 찬란한 빛을 꺼버림으로써 자신이 가고 싶어했던 죽음 뒤의 세계마저 지옥으로 만들었다. 그가 어떤 글을 써서 어떻게 자신을 과시하건 그는 패배한 사람일 뿐이다.

문제는 이 패배가 그에게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흉악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반복되는 일이지만, 폐지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형 제도를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없애버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같기에 우리의 패배를 증명하는 꼴이 된다. 게다가 문제는 없어지지 않는다. 흉악범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일상이기 때문이다.(34-35p)

 

 

자기가 만든 것은 그 결함이 제 눈에 보이지만 남의 창작품은 늘 완벽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완벽함의 주인이 되는 것은 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과 같으니, 그에 대한 욕망은 다른 모든 욕망을 압도할 수 있다.(130p)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전하는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저마다 직면했던 운명과 그 선택을 깊은 자리까지 뜯어보아야 한다는 뜻도 된다.(166p)

 

 

구의역의 젊은 수리공을 제 자식처럼 여기거나 여기려 한 사람들과 나향욱들의 차이는 위선자와 정직한 자의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과 갖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이며, 슬퍼할 줄도 기뻐할 줄도 아는 사람들과 가장 작은 감정까지 간접화된 사람들의 차이이다. 사이코패스를 다른 말로 정의할 수 있을까.(179p)

 

 

불행한 일을 당하면 누구나 그 불행을 책임져야 할 사람을 찾아내고 싶어한다. 탓할 사람을 찾아내지 못한 불행은 지금 눈앞에 닥친 불행보다도 더 고통스럽다. 미국 사회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는 중하류층 백인들에게 샌더스는 그 책임이 그들에게서 돈을 빼앗아간 월가의 부자들에게 있다고 말하고, 트럼프는 그들에게서 일자리를 빼앗아간 이민자들에게 있다고 말한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한국의 젊은 남자들은 잘나가는 여자들과 페미니스트들에게 그 책임을 돌리려 한다. 그러고는 다시 왜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여성혐오의 혐의를 둘러써야 하느냐고 묻는다. 물론 그 혐오는 그 혐오가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설명을 거치고 나면 말은 얼마나 힘을 잃는가. 여전히 바뀌지 않은 남성 중심 사회에서 우리가 어머니에게, 아내에게, 직장의 동료에게, 길거리에서 만나는 여성에게, 심지어는 만나지도 못할 여자들에게 특별히 기대하는 ‘여자다움’이 사실상 모두 ‘여성혐오’에 해당한다. 나는 한 사람의 번역가지만 ‘여성혐오’라는 번역어의 운명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고통의 시대에 더 많은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불행을 그 오해 속에 묻어버리려는 태도가 비겁하다는 것은 명백하게 말할 수 있다.(185p)

 

 

루쉰은 그의 단편소설 「고향」에서 수구주의자들이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터부의 자리에 인간의 가치가 들어서기를 희망하며 다음과 같은 말로 그 끝을 맺었다. “희망은 길과 같은 것이다. 처음부터 땅 위에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다보면 길이 만들어진다.”(197p)

 

 

정염의 세계에서는, 정염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바로 그 정염입니다. 정염은 욕망에 소망을 붙여놓지요. 욕망하는 한은 행복함이 없이도 살 수 있어요. 행복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행복이 전혀 찾아오지 않으면, 희망이 연장됩니다. 공상의 매력은 그 원인이 된 정염만큼 깊어지지요. 따라서 이 상태는 스스로 충족되며, 거기서 비롯한 불안은 현실을 보충하는 쾌락의 일종으로 어쩌면 현실보다 더 낫지요. 더 이상 아무것도 욕망할 것이 없는자 불행하구나! 그런 사람은 말하자면 자신이 지닌 것을 모두 잃지요. 인간은 자기가 얻은 것보다 희망하는 것으로 더 즐거워하며, 행복해지기 전까지만 행복합니다. 사실 인간은, 갈구하나 유한하며, 모든 것을 원하나 얻는 것은 적도록 만들어져 있지만, 어떤 위로의 힘을 하늘로부터 받았으니, 그 힘은 그가 욕망하는 모든 것 가까이 그를 데려가고, 어떤 점에서는 욕망하는 것을 그에게 안겨주고, 그를 그의 상상력에 복종시키고, 그에게 욕망하는 것을 대령해 감각할 수 있게 하고, 그를 그의 정염에 따라 변화시키지요. 그러나 이 모든 마력은 그 대상 자체 앞에서 사라집니다. 이 대상을 그 소유자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게 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누구도 자기가 보는 것을 머릿속에 상상하지는 않습니다. 향유가 시작되는 곳에서 공상은 사라지니까요. 망상의 나라는 이 세상에서 깃들 가치가 있는 유일한 나라이며, 인간적인 것들의 허무가 이와 같아서,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자가 아니라면,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건 존재하지 않는 것일 뿐이지요.

(...)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염’이라고 불리는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이루어지지 않을 어떤 것에 대한 마음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나탈리는 이 구절을 해설한다. “쥘리는 지난날의 정염, 생프뢰와 못 이룬 정염을 회상한다. 그와 함께 할 행복을 희망하다가 희망 그 자체로 행복해진다. 꿈을 현실로 대체함으로써 만족할 수 있으니까.” 나탈리는 상상력의 권능을 말한다. “상상력은 순전히 정신적인 쾌락을 통해 사랑하는 이의 부재를 보충해줄 수 있다.” 그는 이런 말이 비현실적으로 들릴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쥘리나 루소 그 자신처럼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가상의 만족이 위안을 주고 그 위안은 관능적 쾌락을 보충하고 대체하는 것이다.” 희망이 희망하는 것을 대신해줄 수 있다는 말이다.

(...)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보다 더 꾸준한 실천은 없기 때문이다.

가질 수도 누릴 수도 없지만 잊어버리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고 보면 우리가 시에 요청하는 모든 것이 이 짧은 말 속에 들어 있는 것 같다. 시는 누릴 수 없는 것을 희망하는 뛰어난 방식이자 그 희망을 가장 오랫동안 전달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

우리가 희망하는 그 대상은 언제까지나 거기에 확실히 존재하나 아직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 “있음과 있지 않음의 기쁨”이다. 철학자들은 아마도 ‘관념은 현실이 되지 않는다’라는 말로 이 구절을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시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의 욕망과 그에 결부된 희망이 관념으로 떨어지기 전에 지금 이 자리에 붙잡아 이 현실과 그것과의 관계를 확인하고, 그 관계 자체 속에 들어 있는 약속을 쉬지 않고 되새기는 확실한 미학적 장치에 관해 말할 것이다.(254-260p)

 

 

 

ㅡ 황현산, <사소한 부탁> 中,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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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8/31

 

그때 나는 처음으로 모든 게 한순간에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모든 게 한순간에 날아 가버릴 수 있다는 걸 말이다.(29p)

 

 

나이를 먹으면 대개 지혜로워지는 게 아니라 시야가 좁아진다.(39p)

 

 

살다보면 고칠 수 있는 것도 있지만(몸무게, 외모, 심지어 이름까지 그렇다) 아무리 기도하고 애를 쓰고 열심히 노력해도 안 되는 것도 있다. 그런 것들이 우리를 규정한다.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라 바꿀 수 없는 것들이.(66p)

 

 

어렸을 때는 친구가 세상의 전부다.(205p)

 

 

내 인생은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 내가 하지 않은 말에 의해 결정되어왔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누락 되었는가가 우리를 규정한다. 거짓말이 아니라 밝히지 않은 진실이 우리를 규정한다.(212p)

 

 

나는 지금까지 니키의 인생이 해피엔딩으로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빠에게서 벗어나고. 엄마를 되찾고. 현실에서는 해피엔딩은 없고 지저분하고 복잡한 엔딩만 있는 걸지 모른다.(296p)

 

 

예단하지 말 것.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할 것.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우리가 예단을 하는 이유는 그게 좀 더 쉽고 게으른 방법이기 때문이다. 떠올리면 마음이 불편해지는 일들에 대해 너무 열심히 생각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을 하지 않으면 오해가 생길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비극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375p)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루려고 애를 쓰는 모든 것이 결국에는 무용지물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다들 가독을 위해 근사하고 널찍한 집을 장만하고 최신형 사륜구동 컨트리사이드 디스트로이어를 몰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한다. 그러다 아이들이 다 커서 독립하면 좀 더 작고 환경 친화적인(하지만 뒷좌석에 반려견을 태울 만큼은 되는) 차로 갈아탄다. 그러다 은퇴를 하면 널찍한 주택은 닫힌 문 뒤로 방마다 먼지만 쌓이는 감옥으로 바뀌고 온 가족이 모여서 바비큐 파티를 벌이기에 좋았던 마당은 관리하려면 손이 너무 많이 가는데, 어차피 가정을 일군 아이들은 각자의 집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다. 그래서 집도 작아진다. 건사할 사람이 나 하나밖에 안 남는 순간이 예상보다 빠르게 찾아올 때도 있다. 그러면 이사하길 잘했다고 혼자 중얼거린다. 집이 작을수록 외로움으로 채우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운이 좋으면 혼자 뒤를 닦지도 못해서 독방의 철책이 달린 침대에서 잠을 청하는 신세로 전락하기 전에 이승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378p)

 

 

ㅡ C. J. 튜더, <초크맨> 中, 다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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