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8/3

매일 대하는 그 많은 책들이 담고 있는 언어가, 단지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것들이 내 나날 속으로 전혀, 한치도 뚫고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 스스로 돌연한 영감이라 여겼던 것이 실은 헛된 언어의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 사실을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나날이 낡아가는 상상력처럼 그 깨달음도 서서히 왔습니다. 작가라는 사람들의 책을 읽을 때면 어찌 이리도 용감한가, 싶을 때가 점점 잦아졌습니다. 그 부류에 내 이름을 보태는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훌륭한 소설도 없지 않았지만 저와는 상관없는 것이라는 자각 정도는 제게 있었습니다. 물론 허망 했습니다. 요트 여행, 그 오랜 꿈이 좌절된다면 남편도 허무해지겠지요. 그렇지만 곧 잊고 살아갈 것입니다. 꿈이란 본래 그런 것이니까요.(29p)

ㅡ 서하진, <요트>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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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2

 

나오키상 수상작 



이십 년 전 옛날 일을 바로 어제 일처럼 되새기는 건 죽은 시어머니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거품 속에 몸을 묻고 있으려니 메구미는 돈이 없어도 행복하다는 착각이 가능했던 그 시절의 자신이 지독히 슬프게 느껴졌다.(109p)

그러고 보니 요즘은 한참이나 부부 싸움도 하지 않았다. 싸우지도 않는 관계에서는 무엇을 밑천으로 화해를 시도해야 할지 알 수 없다.(202p)

행복하게 해주겠다니, 그런 무책임한 말은 대체 어디서 배웠나? 그런 말은 제대로 먹고살게 해준 다음에 해야지. 행복이란 과거형으로 말해야 빛이 나는 거 아닌가. 앞일은 섣불리 입 밖에 내지 말고 묵묵히 행동으로 증명하는 수밖에 없어.(208p)

ㅡ 사쿠라기 시노, <호텔로열> 中,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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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1

“표를 사려고 기다리시는 중인가요?”
나는 “아니요, 그냥 줄을 더 길게 만들려고 여기 서 있답니다”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물론 “그런데요”라고만 대답했다.(94p)

지난 한 주 동안 나는 멍청하게 집안을 돌아다니며 농구공이나 큰아이가 달리기 대회에서 탄 트로피, 오래 전의 명절 때 찍은 사진 등을 쳐다보는, 그리고 그 물건들을 통해 의미 없이 흘려보낸 시간들을 생각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가장 나를 힘들게 한 것은 아들이 여기 없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예전의 그 아이도 영영 가고 없다는 갑작스런 깨달음이었다. 아들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나는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삶은 계속되며, 아이들을 자라서 집을 떠나기 마련이다. 아직 이것을 모르시는 분이 있다면 내 말을 믿으시기 바란다. 아이들이 집을 떠날 날은 여러분이 상상했던 것보다 빨리 온다.(151p)

ㅡ 빌 브라이슨,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학> 中,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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