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3/8

 

 

그로부터 얼마쯤 지난 늦은 여름. 어쩌면 다음해 늦은 봄. 의외로 늦은 가을이나 늦은 겨울이었을지도 모르는 그날. 우리는 곰팡이가 피기 시작해서 지도가 태워지기까지의 과정을 순서대로 차근차근 복기했다. 그러고는 문득 대화를 멈추었다. 우리는 머릿속에만 남아 있을 뿐인 한창때를 그리워하는 노인들처럼 아득한 시선으로 베이지색 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벽은 마냥 산뜻했다.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그렇다고 하자 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은 얼마든지 가능해.”(15p)

 

 

“unknowing the known, knowing the unknown. 미지는 기지로, 기지는 미지로.”(180p)

 

 

 

 

ㅡ 황여정, <알제리의 유령들>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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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8

 

 

읽는 내내 가라앉았다. 변화는 극적이지 않다. 이 여성이 딸의 성정체성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럴지라도 한숨 자고 일어나면, 하루하루가 지나면, 조금, 아주 조금의 변화라도 생기지 않을까.

 

 

 

 

하긴 나이가 많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다. 젊었을 때는 선을 긋고 담을 쌓고 그래서 영원히 못 볼 것 같은 부류의 사람들도 이토록 쉽게 만날 수 있게 된다.

모두 별다를 게 없는 늙은이가 되는 탓이겠지. 그런 늙은이들을 받아 주는 곳이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탓이겠지.(13p)

 

 

고요하고 어두운 방에 누워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끝이 없는 노동. 아무도 날 이런 고된 노동에서 구해 줄 수 없구나 하는 걱정. 그러니까 내가 염려하는 건 언제나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는 동안엔 끝나지 않는 이런 막막함을 견뎌 내야 한다. 나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 버렸다. 어쩌면 이건 늙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문제일지도 모르지. 이 시대. 지금의 세대. 생각은 자연스럽게 딸애에게로 옮겨 간다. 딸애는 서른 중반에. 나는 예순이 넘어 지금, 여기에 도착했다. 그리고 딸애가 도달할, 결국 나는 가닿지 못할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아무래도 지금보다는 나을까. 아니, 지금보다 더 팍팍할까.(22-23p)

 

 

언젠가부터 나는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천천히 시간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뭐든 무리하게 바꾸려면 너무나 큰 수고로움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 걸 각오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거의 없다. 좋든 나쁘든. 모든 게 내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내가 선택했으므로 내 것이 된 것들. 그것들이 지금의 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과거나 미래 같은, 지금 있지도 않은 것들에 고개를 빼고 두리번거리는 동안 허비하는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지. 그런 후회는 언제나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들의 몫일지도 모른다.(30p)

 

 

딸애에게는 직장이 없다. 일은 하지만 직장이 없는 사람들. 열 명 중 하나. 열 명 중 셋. 그런 식으로 늘어나더니 이제는 열 명 중 여섯, 일곱이 그런 사람이다. 그들에겐 자격이 없다. 대출을 받을 자격도, 공공 주택에 들어갈 자격도.(32p)

 

 

나는 눈앞에 보이는 이 장면을 구겨 버리고 아주 작게 만들고 멀리 던져 버릴 수 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고 모른다고 여기면 얼마간은 편해질지도 모른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들. 아무것도 모를 때엔 너무나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들. 그러나 뭐든 제대로 알게 되는 순간. 그것들은 발톱을 세우고 마침내 본색을 드러내는 것 같다. 진실과 사실. 그런 명백한 것들의 속성. 언제고 그것들은 사납게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다.(62p)

 

 

나는 좋은 사람이다.

평생을 그렇게 하려고 애써왔다. 좋은 자식. 좋은 형제. 좋은 아내. 좋은 부모. 좋은 이웃. 그리고 오래전엔 좋은 선생님.

정말 힘들었겠구나.

나는 공감하는 사람.

최선을 다했으면 됐다.

나는 응원하는 사람.

다 이해한다. 이해하고말고.

나는 헤아리는 사람.

아니. 어쩌면 겁을 먹은 사람. 아무 말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 뛰어들려고 하지 않는 사람. 깊이 빠지려 하지 않는 사람. 나는 입은 옷을, 내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사람. 나는 경계에 서 있는 사람. 듣기 좋은 말과 보기 좋은 표정을 하고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뒷걸음질 치는 사람. 여전히 나는 좋은 사람이고 싶은 걸까. 그러나 지금 딸애에게 어떻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68-69p)

 

 

이런 순간 삶이라는 게 얼마나 혹독한지 비로소 알 것 같다. 하나의 산을 넘으면 또 하나의 산이 나타나고 또 다름 산이 나타나고. 어떤 기대감에 산을 넘고 마침내는 체념하면서 산을 넘고. 그럼에도 삶은 결코 너그러워지는 법이 없다. 관용이나 아량을 기대할 수 없는 상대. 그러니까 결국은 지게 될 싸움. 져야만 끝이 나는 싸움.(91p)

 

 

참담함이 정수리를 타고 온몸으로 흘러내린다. 이걸 뭐라고 불러야할까. 실은 이런 것들이 호시탐탐 삶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삶에서 결코 마주치고 싶지 않은 모습들이 이 골목을 빠져나가면, 저 모퉁이를 돌면 정확히 바로 그때에 짠, 하고 나타나는 것. 언제 어디서나 득시글거린다는 것. 왜 아무도 이런 것들을 미리 말해 주지 않는 걸까.(113-114p)

 

 

사람들은 그게 무엇이든 예민하게 알아채고, 알게 된 것을 말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긴다. 뭐든 모른 척하고 침묵하는 것이 예의라고 여겨지는 이 나라에서 나는 태어나고 자라고 이렇게 늙어 버렸다.(127p)

 

 

내 나이대의 사람들 중에도 여전히 20-30대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언제 물러날지 말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들. 시간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들. 그만한 자격을 갖춘 이들. 그러고 보면 나는 매사 너무 나이가 많은 사람처럼 굴고 있는지도 모른다. 늙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어떤 가능성들을 하나씩 베어 내면서 일상을 편편하고 밋밋하게 만드는 데에만 골몰하는지도 모른다. 무성하게 자라난 것들을 다 제거하고 마침내 평평해진 삶 너머로 죽음이 다가오는 모습을 주시하려고 애쓰는지도 모른다. 이제 다시 뭔가 시작하고 맞서고 싸우고 이길 만한 자신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세뇌시키면서 무료하지만 안전하고 무력하지만 차분한 일상을 유지하고 싶은지도 모른다.(129-130p)

 

 

이건 이해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에요. 이해해 달라고 사정해야 할 문제도 아니고요. 이건 그냥 권리잖아요.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갖는 거요. 그리고 사생활은 일과 별개예요. 제가 요구하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요? 일과 사생활을 구분해 달라는 것. 강사의 기본적인 권리를 지켜 달라는 것. 그건 너무 당연한 거잖아요.(156p)

 

 

그럼에도 불구하고 했어야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나는 간신히 삼킨다. 내 잘못이 아니지. 너의 잘못이 아니지.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 그렇게 말한다면 세상의 수많은 피해자들은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사과를 받아야 할까. 이렇게 생각하는 나도 예외가 아니다.(162p)

 

 

훌륭한 삶요? 존경받는 인생요? 그런 건, 삶이 아주 짧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에요. 봐요. 삶은 징그럽도록 길어요. 살다 보면 다 똑같아져요. 죽는 날만 기다리게 된다고요.(173p)

 

 

완벽한 오후.

그러나 내가 상상한 순간은 끝내 오지 않는다. 그런 순간은 늘 너무 이르거나 늦게 도착한다.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치거나 기다리다가 포기하게 만든다.(188p)

 

 

한숨 자고 나면, 아주 깊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면, 이 모든 일이 다 거짓말처럼 되어 버리면 좋겠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와 있으면 좋겠다.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순조롭고 수월한 일상. 그러나 이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끊임없이 싸우고 견뎌야 하는 일상일지도 모른다.

그런 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견뎌낼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물으면 고집스럽고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늙은 노인의 모습이 보일 뿐이다. 다시 눈을 감아 본다. 어쨌든 지금은 좀 자야 하니까. 자고 나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삶을 또 얼마간 받아들일 기운이 나겠지. 그러니까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건 아득한 내일이 아니다. 마주 서있는 지금이다. 나는 오늘 주어진 일들을 생각하고 오직 그 모든 일들을 무사히 마무리하겠다는 생각만 한다. 그런 식으로 길고 긴 내일들을 지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볼 뿐이다.(197p)

 

 

 

 

김혜진, <딸에 대하여>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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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4

 



휘영은 세계에 신이 없다면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따위의, 내가 딱 싫어하는 류의 화제를 자꾸 테이블에 올렸다.(60p)

 

 

이런 환경에서 어지간한 인간들은 좀스럽고 추한 모습을 보인다.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수업이 있기 몇 시간 전부터 강의실 앞 복도에 신문지를 깔고 기다리는 녀석들과 내가 같은 급이라는 게 한심했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자습실에서 제대로 앉아 공부를 하는 게 낫지 않나? <정재준 한국사><황남기 헌법>이니 하는 책들에 밑줄을 그으며 중얼중얼 법 조항들을 외우고 있다 보면 이런 공부에 정말 젊음을 바쳐야 하나 싶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134-135p)

 

 

나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마음 놓고 내 처지를 하소연할 만한 마땅한 사람이 없을까 생각했다.

휘영이라면 혹시 학교 도서관에서 아직까지 공부하고 있지 않을까? 술 한잔 사달라면 사주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결국 아무에게도 전화를 걸지 않았다.(158-159p)

 

 

술에 취하고 싶었지만 돈도 없고 같이 마실 사람도 없었다. PC방으로 출근해 7급 공무원 시험용 국어 공부를 두어 줄 하다 중학생들에게 과자를 팔고 초등학생을 두들겨 팬 내 꼴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170p)

 

 


 

장강명, <표백> ,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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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5

 

 

너무 말을 많이 한 날엔 혹시 실수를 하진 않았는지 염려가 들기도 하지.(67p)

 

 

바퀴가 다시 움직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거. 나쁘게 변한 세계보다 사람들을 더 무기력하게 만드는 건 사슬에 묶여서 꼼짝하지 않는 바퀴니까. 아무것도 변하는 것 없이 모든 게 제자리에만 멈춰 있다면 인간은 도대체 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지?(179p)

 

 

정원사가 무안해할까 봐 그 자리에서는 아무 내색도 안 했지만 니스는 집으로 들어와서 혼자 웃음을 터뜨렸다. 도련님이라니, 언제 적 어휘를. 그러나 정원사의 순진한 태도를 재미있어하던 니스는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옮기면서 차츰 웃음을 잃었고, 방에 들어와 거울 앞에 섰을 때는 완전히 굳은 얼굴이 되었다. 어린 시절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너희들은 아무 괴로움도 없는 1직 도련님들이라서 좋겠어.’

열여섯 살 때 자신 역시 제이와 버즈를 보며 속으로 그렇게 혼잣말을 하곤 했다. 친구들을 도련님이라고 느꼈던 그때 그 마음을 웃음거리로 삼을 수 있을까.(183p)

 

 

자신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한 아버지도 다윈을 생각해 그 일을 다신 꺼내지 않을 것이다. 우습지만 가정의 평화란 상당 부분 이렇게 한쪽의 묵인과 다른 쪽의 동조로 유지되는 것인지도 모른다.(220p)

 

 

진실의 가치는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 그것이 내가 믿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진실이다.(429p)

 

 

그렇다고 제이가 꽉 막힌 고리타분한 인간이었던 것은 아니다. 제이는 기본적으로 장난꾸러기였다. 특히 동생인 조이에게는 어리다는 이유로 짓궂은 장난도 자주 쳤다. 한번은 밧줄로 동생을 나무에 묶어 놓은 적도 있었다. 조이가 우는 것을 보고 내가 제이, 이런 건 죄가 되지 않는 거야?”라고 물었더니, 제이는 길에 몰래 쓰레기를 버리는 건 죄가 되지만 야구를 하다가 남의 집 유리창을 박살 내는 건 죄가 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제멋대로식 재판같이 여겨지기도 했지만, 제이는 유리창을 박살 내는 것엔 숨길 의도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숨길 의도가 있는 일만이 벌을 받는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야구를 하다 남의 집 창문을 깨뜨린 일이 여러 번 있었는데, 공을 찾으러 가서 사과하면 화를 내는 집주인들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잘못을 고백하러 온 우리를 오히려 기특하게 여겼다. 제이는 우리가 잘못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라면서 동생을 놀리는 것 역시 숨길 의도가 전혀 없는 순수한 놀이이므로 죄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현명한 제이는 인간의 죄의식이 숨김에서 태동한다는 것을 벌써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468p)

 

 

박지리, <다윈 영의 악의 기원>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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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7/20

 

 

K-조국에서 여성으로 살며 겪는 무수한 차별을 소설로 풀어냈다. 많이 읽히는 건 바람직한 현상으로 보이지만 대다수가 여성 독자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주변의 한남에게 가볍게 권해 봄직한 책.

 

 

 

 

할머니는 자신의 허망하고 비참한 처지를 이해할 수 없는 논리로 위안했다.

그래도 내가 아들을 넷이나 낳아서 이렇게 아들이 지어준 뜨신 밥 먹고, 아들이 봐 준 뜨끈한 아랫목에서 자는 거다. 아들이 못해도 넷은 있어야 되는 법이야.”

뜨신 밥을 짓고, 뜨끈한 아랫목에 요를 펴는 사람은 할머니의 아들이 아니라 며느리이자 김지영 씨의 어머니인 오미숙 씨였지만 할머니는 늘 그렇게 말했다. 살아온 역경에 비해 마음이 여유롭고 또래 시어머니들과는 달리 며느리를 아끼던 할머니는 진심으로 며느리를 생각해 입버릇처럼 말했다. 아들이 있어야 한다, 아들이 꼭 있어야 한다, 아들이 둘은 있어야 한다······.(26-27p)

 

 

하지만 김지영 씨는 그날 아버지에게 무척 많이 혼났다. 왜그렇게 멀리 학원을 다니느냐, 왜 아무하고나 말 섞고 다니느냐, 왜 치마는 그렇게 짧냐······ 그렇게 배우고 컸다. 조심하라고, 옷을 잘 챙겨 입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라고. 위험한 길, 위험한 시간, 위험한 사람은 알아서 피하라고. 못 알아보고 못 피한 사람이 잘못이라고.(68p)

 

 

멀리 생각해. 여자 직업으로 선생님만 한 게 있는 줄 알아?”

선생님만 한 게 어떤 건데?”

일찍 끝나지, 방학 있지, 휴직하기 쉽지. 애 키우면서 다니기에 그만한 직장 없다.”

애 키우면서 다니기에 좋은 직장 맞네. 그럼 누구한테나 좋은 직장이지 왜 여자한테 좋아? 애는 여자 혼자 낳아? 엄마, 아들한테도 그렇게 말할 거야? 막내도 교대 보낼 거야?”(71p)

 

 

스포츠에 문회한인 김지영 씨를 위해 남자 친구는 경기 시작 전에 주요 선수와 중요한 룰에 대해 간단히 알려 줬고 경기 도중에는 둘 다 경기에만 집중했다. 김지영 씨는 왜 경기를 보면서 바로바로 설명해 주지 않느냐고 물었다.

너도 영화 볼 때 나한테 대사 한마디 한마디, 장면 하나하나 다 설명하지 않잖아. 경기 중에 계속 여자한테 설명하는 남자들, 뭐랄까, 거들먹거리는 거 같달까. 경기 보러 온 건지 아는 척하러 온 건지 모르겠어. 하여튼 좀 별로야.”(86p)

 

 

, 됐어. 씹다 버린 껌을 누가 씹냐?”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만 남에게 억지로 권하지는 않고, 후배들에게 밥을 잘 사 주지만 되도록 함께 먹지는 않는 선배였다. 태도가 단정하고 깔끔해서 김지영 씨도 항상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설마 싶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더 유심히 들었는데, 아무래도 그 선배의 목소리가 맞았다. 취했을 수도 있고, 쑥스러운 것일 수도 있고, 친구들이 괜한 짓을 할까 봐 더 과격하게 말했을 수도 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김지영 씨의 처참한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일상에서 대체로 합리적이고 멀쩡한 태도를 유지하는 남자도, 심지어 자신이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여성에 대해서도, 저렇게 막말을 하는구나. 나는, 씹다 버린 껌이구나.(93p)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회사에서도 부담스러워 해. 지금도 봐, 학생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줄 알아?”

어쩌라고? 부족하면 부족해서 안 되고, 잘나면 잘나서 안 되고, 그 가운데면 또 어중간해서 안 된다고 하려나?(97p)

 

 

나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 태우는데, 딱 보니까 면접 가는 거 같아서 태워 준 거야.”

태워 준다고? 김지영 씨는 순간 택시비를 안 받겠다는 뜻인 줄 알았다가 뒤늦게야 제대로 이해했다. 영업 중인 빈 택시 잡아 돈 내고 타면서 고마워하기라도 하라는 건가. 배려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항의를 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고, 괜한 말싸움을 하기도 싫어 김지영 씨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100-101p)

 

 

새로운 남자 친구는 윤혜진 씨와 어릴 적부터 친구였다. 김지영 씨보다 나이는 한 살 많은데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해 아직 학생이었다. 김지영 씨의 상황과 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공감해 주는 사람이었다. 잘될 거라는 막연한 낙관도, 그깟 취직 좀 늦어지면 어떠냐는 무책임한 위로도, 왜 이 정도 스펙밖에 갖지 못했냐는 흔한 질타도 하지 않았다. 준비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고,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돕고, 안 좋은 결과가 나오면 술을 사 주었다.(104-105p)

 

 

회사에서는 임신한 직원들의 안전을 위해 출근과 퇴근 시간을 30분씩 늦출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는데, 김지영 씨가 임신 사실을 알리자마자 남자 동기가 대뜸 말했다.

, 좋겠다. 이제 늦게 출근해도 되겠네.”

그럼 너도 계속 구역질하고, 제대로 먹지도 싸지도 못하면서, 피곤하고, 졸립고, 여기저기 아픈 상태로 지내든지. 겉으로 말하지는 못했다. 임신으로 인해 겪는 모든 불편과 고통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동기의 말이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남편도 아니고 가족도 아닌 사람이 다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김지영 씨가 조용하자 오히려 같이 있던 또 다른 남자 동기가 나무라듯 말했다.

, 30분 늦게 오는 대신 30분 늦게 퇴근하잖아. 똑같이 일하는데 왜 그래?”

우리가 칼퇴하는 회사도 아닌데 뭐. 그냥 30분 날로 먹는 거지.”

(...)

주어진 권리와 혜택을 잘 챙기면 날로 먹는 사람이 되고, 날로 먹지 않으려 악착같이 일하면 비슷한 처지에 놓인 동료들을 힘들게 만드는 딜레마.(138-139p)

 

 

그놈의 돕는다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살림도 돕겠다, 애 키우는 것도 돕겠다, 내가 일하는 것도 돕겠다. 이 집 오빠 집 아니야? 오빠 살림 아니야? 애는 오빠 애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일하면, 그 돈은 나만 써? 왜 남의 일에 선심 쓰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144p)

 

 

예전에는 방망이 두드려서 빨고, 불 때서 삶고 쭈그려서 쓸고 닦고 다 했어. 이제 빨래는 세탁기가 다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다 하지 않나? 요즘 여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더러운 옷들이 스스로 세탁기에 걸어 들어가 물과 세제를 뒤집어쓰고, 세탁이 끝나면 다시 걸어 나와 건조대에 올라가지는 않아요. 청소기가 물걸레 들고 다니면서 닦고 빨고 널지도 않고요. 저 의사는 세탁기, 청소기를 써 보기는 한 걸까.

의사는 모니터에 뜬 김지영 씨의 이전 치료 기록들을 훑어 본 후, 모유 수유를 해도 괜찮은 약들로 처방하겠다고 말하며 마우스를 몇 번 클릭했다. 예전에는 일일이 환자 서류 찾아서 손으로 기록하고 처방전 쓰고 그랬는데, 요즘 의사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종이 보고서 들고 상사 찾아다니면서 결재 받고 그랬는데, 요즘 회사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손으로 모심고 낫으로 벼 베고 그랬는데, 요즘 농부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라고 누구도 쉽게 말하지 않는다. 어떤 분야든 기술은 발전하고 필요로 하는 물리적 노동력은 줄어들게 마련인데 유독 가사 노동에 대해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 씨는 살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고 난이도를 후려 깎고,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떠받들면서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 하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겠지.(148-149p)

 

 

머리만 좀 지끈거려도 쉽게 진통제를 삼키는 사람들이, 점 하나 뺄 때도 꼭 마취 연고를 바르는 사람들이, 아이를 낳는 엄마들에게는 기꺼이 다 아프고, 다 힘들고, 죽을 것 같은 공포도 다 이겨내라고 한다. 그게 모성애인 것처럼 말한다. 세상에는 혹시 모성애라는 종교가 있는 게 아닐까. 모성애를 믿으십쇼. 천국이 가까이 있습니다!(151p)

 

 

가정이 있고 부모가 있다는 건, 그런 짓을 용서해 줄 이유가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156p)

 

 

물론 딸, 여학생, 여자친구, 여직원, 아내, 며느리로의 삶이 녹록했던 적은 없다. 그러나 엄마라는 정체성은 단연 압도적이다. 하나의 생명을 키워야 한다는 어려움 때문이 아니다.

엄마가 되면서 개인적 관계들이 끊어지고 사회로부터 배제 돼 가정에 유폐된다. 게다가 아이를 위한 것들만 허락된다. 아이를 위해 시간감정에너지돈을 써야 하고, 아이를 매개로 한 인간관계를 맺어야 한다. 엄마가 아닌 자신을 드러내면 엄마의 자격을 의심 받는다.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 아이를, 다음 세대를 키우는 것은 여성의 의무가 아니라 사회의 의무인데, 개별 가정에서 대부분 엄마가 독박육아를 하고 있는 현실에 분노가 치민다. 출산 후 독박육아 몇 개월 만에 겨우 집을 나와 1500원짜리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맘충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타인에 대한 돌봄이 사라진 시대에 거의 유일하게 타인을 돌보고 있는 존재인 엄마가 남편이 힘들게 벌어온 돈으로 카페나 다니면서 자기 아이만 위하는 이기적인 벌레라고 손가락질 받는 것이다. 여성혐오 시대에 모성애라는 종교조차 침탈되는 양상이다. 모성에 대한 신성시도, 맘충이라는 혐오도 여성을 옭아맬 뿐이다. 그러니 어떻게 를 온전히 지킬 수 있겠는가.(188-189p)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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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7/11

 

 

침묵의 미래가 가장 좋았다. 소설집에서 가장 먼저 보게 된 작품으로 도입부터 심상치 않아 함께 실려 있는 다른 작품들에 대한 기대치가 마구 올라갔지만 모든 작품이 고르게 좋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늙는다는 건 육체가 점점 액체화되는 걸 뜻했다. 탄력을 잃고 물컹해진 몸 밖으로 땀과 고름, 침과 눈물, 피가 연신 새어나오는 걸 의미했다.’와 같은 문장으로 나이듦의 과정을 즉물적으로 드러내며, 너무나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수도 있을 삶이란 도대체 무엇이냐 묻는 ‘노찬성과 에반’, 독자를 울리기 위해 작심하고 쓴 신파조의 작품이 아님에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마음의 한 지점을 건드리는 ‘풍경의 쓸모’와 같은 작품을 읽는 동안은 즐거운 시간이었다.

 



도화가 침착한 얼굴로 이수를 바라봤다. 오래전, 이수가 현관을 나설 때면 '저 사람 저대로 사라져버리면 어쩌지, 길 가다 교통사고라도 당하면 어떡하지'가슴이 저렸던 기억이 났다.

ㅡ이수야.

ㅡ응.

ㅡ나는 네가 돈이 없어서, 공무원이 못 돼서, 전세금을 빼가서 너랑 헤어지려는 게 아니야.

······

ㅡ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 같아.(115p)



그들은 잊어버리기 위해 애도했다. 멸시하기 위해 치켜세웠고, 죽여버리기 위해 기념했다.(132p)

 

 

어느 때는 너무 흐릿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누군가를 향해, 그 누군가가 원한 미래를 향해 해상도 낮은 미소를 짓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사진 속에 붙박인 무지, 영원한 무지는 내 가슴 어디께를 찌르르 건드리고는 한다. 우리가 뭘 모른다 할 때 대체로 그건 뭘 잃어버리게 될지 모른다는 뜻과 같으니까. 무언가 주자마자 앗아가는 건 사진이 해온 일 중 하나이니까. 그러니 오래전, 어머니가 손에 묵직한 사진기를 든 채 나를 부른 소리, 삶에 대한 기대와 긍지를 담아 외친 “정우야”라는 말은, 그 이상하고 찌르르한 느낌, 언젠가 만나게 될, 당장은 뭐라 일러야 할지 모르는 상실의 이름을 미리 불러 세우는 소리였는지 몰랐다.(151p)

 

 

옆자리의 학생들이 몇십 분째 누군가를 맹렬히 헐뜯는지라 나는 그만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걔가? 그 교수랑? 어머, 어떻게 그래? 타인이 아닌 자신의 도덕성에 상처 입은 얼굴로 놀란 듯 즐거워하고 있었다. 나도 잘 아는 즐거움이었다.(153p)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종종 버스 창문에 얼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어떤 사건 후 뭔가 간명하게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을 불만족스럽게 요약하고 나면 특히 그랬다. ‘그 일’ 이후 나는 내 인상이 미묘하게 바뀐 걸 알았다. 그럴 땐 정말 내가 내 과거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화는, 배치는 지금도 진행중이었다.(173p)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가을 풍경 속에 안긴 두 사람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쩐지 두 사람이,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순간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사람들 같아서였다.(182p)

 

 

일터에서건 집에서건 밥 짓는 건 말 그대로 노동이고 어느 땐 중노동이었다. 아주 단순한 요리라도 그 안에는 장보기와 저장하기, 씻기, 다듬기, 조리하기, 치우기, 버리기 등 모든 과정이 들어가야 했다. 수백 명의 밥을 차리고 집에 와선 녹초가 돼 정작 나 자신은 컵라면이나 빵으로 끼닐 때울 때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영양사는 매일 ‘만인의 반찬 투정’을 듣는 직업이었다. 급식 메뉴에 핫도그나 돈가스를 넣어 아이들 입맛에 맞추면 선생들이 꺼리고, 아욱국이나 취나물 등 교사들 식성에 맞추면 아이들이 싫어했다. 예산 문제로 반찬을 검소하게 꾸리면 누군가 내 도덕성을 의심하는 투로 불평해 마음을 다친 적도 있다.(198p)

 

 

가끔 엄마가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활달함이랄까 생명력이 실은 무례와 상스러움의 다른 얼굴이었나 싶어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내 사촌언니 두 명이 한 달 새 나란히 사고로 아이를 잃자, 엄마는 ‘어쩌다 이런 일이 동시에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며 ‘우리 집안 죄받았다 할까봐 부끄러워 어디 가서 말도 못 꺼낸다’고 했다. 그것도 상복 입은 사촌언니 앞에서. 엄마가 늙었나? 그새 분별력과 자제심을 잃었나? 얼굴이 달아올랐다.(202p)

 

 

드문드문 솟은 풍력발전기를 보자 ‘평화로운 해양성기후’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이 섬나라 하늘이 언젠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본 하늘, 전쟁에 지친 병사가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그리며 회상한 풍경과 닮아서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내 앞의 ‘청명’이 남의 집에서 떼다 붙인 커튼처럼 느껴졌다. 눈앞에서 아름답게 펄럭이는 ‘현재’가 좋았던 과거 같고, 다가올 미래 같기도 한데, 뭐가 됐든 내 것 같진 않았다.(227p)

 

 

ㅡ 김애란, <바깥은 여름>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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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7/10

 


책을 읽는 중에 크게 감탄한 순간은 없었다. 물 흐르듯이 읽었다. 내 집중력으로 소음 가득한 서점에서 다 읽었으니 크게 집중력을 요하는 소설집은 아니었다. 이 말은 문장이 유려하다는 말일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큰 특색이 없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번역서가 아닌 모국어로 된 글을 읽을 때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만 꼽아보자면 밤낮으로 말과 언어를 조탁하여 작품을 내놓는 직업 작가들의 문장을 음미하는 것이다. 그 즐거움은 친숙하다고 생각했던 어휘를 낯선 상황에서 생경하게 사용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으로, 일상에서 빈번하게 사용하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어휘를 찾아내어 적확하게 사용하는 것을 보는 것으로 느낄 수 있다. 아쉽게도 이 소설집에서는 그런 즐거움을 느낀 순간이 (거의) 없었다. 문장의 밀도도 아쉬웠다. 밀도 있는 문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은 좋은 소설이고, 여백이 많은 소설은 나쁜 소설이라는 이분법적인 논리에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뭔가 좀 아쉽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아쉬운지 얘기를 해야 될 텐데 그러면 글이 길어지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그만 적기로 한다. 적당히 재미있고, 적당히 뻔했다.





아빠와 다니던 식당들에 비하면 남자와 가게 되는 곳은 늘 수준 미달이었어요. 물론 그럴 수밖에요. 중산층 집안의 대학생 남자가 용돈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어떤 곳이겠어요? 들큰한 조미료맛 말고는 아무 맛도 없는 음식들. 가짜 모차렐라 치즈를 얹은 피자 같은 것을 먹는 거죠. 한번은 테마파크에 놀러갔는데 유치하기만 할 뿐, 아무 감흥이 없었어요. 너구리 복장을 한 알바생들이 재롱을 떠는 유럽풍 거리에서 소프트아이스크림을 핥아먹는 것은 열 살 이전에 해야 할 일 같았어요. 아빠 때문에 내가 너무 겉늙어버린 걸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재미가 없는 건 어쩔 수가 없었어요.(23p)

 

 

어쩌면 그 말은 저에게라기보다 엄마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을 거예요. 그래요.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은 어떤 말을 남에게 하고 살지요.(38p)

 

 

다들 충고들을 하지요. 인생의 바른길을 자신만은 알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서요. 친구여, 네가 가는 길에 미친놈이 있다니 조심하라.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전화를 받는 친구가 바로 그 미친놈일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미친놈도 언젠가 또다른 미친놈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거예요. 인생을 역주행하는 미친놈이 있다는데 너만은 아닐 줄로 믿는다며. 그 농담의 말미처럼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미친놈은 아마 한둘이 아닐 거고 저 역시 그중 하나였을 거예요.(39p)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불행에 짓눌린 인간의 냄새를 용케도 잘 맡았다. 아이를 잃은 어미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사람들은 밝고 명랑하고 활기찬 사람과 함께일 때 미구에 다가올 위험에도 더 잘 대비할 수 있을 것처럼 느꼈고, 계약서에도 더 흔쾌히 사인했다.(54p)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힘든 순간을 겪을 때마다 서진은 돌아가고 싶었다. 인생의 원점, 자신이 떠나온 곳, 사람들이 흔히 고향이라 말하는 어떤 장소로. 그가 누구인지 모두가 아는 곳으로.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지점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떠돌이의 인생을 살았다. 어려서는 부모를 따라 전국을 돌아다녔고, 커서도 한곳에 오해 머물지 못하고 여기저기 옮겨다녔다. 사람에게도 비슷해 묵은 관계라고는 없었다. 오래전에 본 어떤 영화에서 인생이 망가진 주인공이 “나 돌아갈래!”라고 외칠 때, 서진은 그에게 동정심이 생기기는커녕 가벼운 질투가 일었다.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 그것은 그가 영원히 갖지 못할 값진 성취처럼 보였다. 그런 성취가 누군가에겐 기본으로 주어지고, 자신 같은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이라니 참으로 불공평하지 않은가.(87p)

 

 

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큰 차이가 있어. 대부분의 사람이 그래. 지금은 날 위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겠지만 말야. 물론 그 마음이 진심이란 것 알아. 하지만 진심이라고 해서 그게 꼭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법은 없어.(92p)

 

 

제가 잘못했다고 말해야 되는 상황입니까?(93p)

 

 

“잠깐 그런데 그 여자, 뭐하는 사람이라고 했지?”

“너한테 얘기해준 적 없는 것 같은데.”

유도신문은 나의 장기이지만 단련된 사람에게는 잘 안 먹힌다.(125p)

 

 

“내가 이렇게 병상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면서 느끼는 게 뭔지 알아?”

“무슨 자기계발서에 나오는 것 같은 개소리 할 거면 집어치워. 죽을 때 죽더라도 약은 팔지 말자.”

“살아오는 동안 내 영혼을 노렸던 인간들이 너무 많았다는 거야.”(199p)

 

 

“사장님께 정말 부탁드리고 싶었던 게 그거예요. 제가 존경하는 사장님이 제 아이의 대부가 되어주세요.”

“나는 불굔데?”(209p)

 

 

“근데 너무 찌질하지 않아? 바로잡긴 뭘 바로잡아. 어떤 과거는 그냥 흘려보내야 되는 거야.”

“사람들은 죽을 날이 다가오면 모든 것을 용서하고 뭐 그럴 줄 아나본데, 천만의 말씀. 새록새록 떠오르는 일들은 전부 이런 일들이야. 괜히 남한테 좋은 사람 노릇하기 시작한 기원이 언제인가 따져보니 바로 그때부터야. 병도 옮고 나쁜 남자까지 돼주었잖아?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어딨어?”(216p)

 

 

그냥 감당해. 오욕이든 추문이든. 일단 그 덫에 걸리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 인생이라는 법정에선 모두가 유죄야.(230p)

 

 

“태준씨네 냥이들이 속죄 같은 걸 하겠어? 한다 해도 어느 주인이 그런 걸 원하겠어. 우리를 가둔 신, 혹시 그런 존재가 있더라도 속죄 따위 원하지 않을거야.”

“왜요?”

수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전적으로 물었다.

“우리를 사랑하고 예뻐한다면 죄 같은 거 알고 싶지 않을 거야. 그게 아니라 그냥 고통받는 걸 보고 즐길 심산이라면 회개하고 반성해봐야 뭔 소용? 끝없이 시련이나 내리고 어떻게 하나 구경하겠지.”

“언니, 속죄는 우릴 가둔 놈들 보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하늘에 계신 진짜 신, 나의 주님께 하는 거라고요.”

“나도 그 얘기거든. 자기가 창조한 인간에게 벌이나 내리는 신, 난 필요 없어.”

수진도 지지 않았다.

“인간은 결코 신을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신인 거죠. 인간의 지혜로 신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 자체가 죄란 말이에요.”

강재가 끼어들었다.

“정은씨는 좀 무임승차 아니에요? 그래도 수진씨는 뭐라도 하잖아요? 여길 나가기 위해서요.”

할말이 많았지만 정은은 입을 다물었다. 아, 수진은 속죄를 믿고, 강재는 자기 덩치를 믿고, 태준은 인과관계라도 믿는데, 나만 아무것도 믿지 않기 때문에 무임승차자가 된 것이로구나. 나도 믿는 것이 있어, 지리산 도령 강재씨. 나는 우울을 믿어. 인간은 천둥이 치고 비가 퍼붓는 궂은 날씨에는 울적하도록 진화했어. 가만히 동굴에 틀어박혀서 날씨가 좋아지길 기다리는 게 유리하거든. 에너지를 아끼면서 말이야. 인류가 이렇게 진보한 건 섣불리 움직이지 않고 끝없이 자신의 과오에 집착해온, 사실 나 같은 우울증 환자들 덕분이야. 그들은 헛된 희망을 품지 않아. 스스로를 과신하지도 않고. 그래서 살아남은 거야. 알잖아.

(...)

인류의 역사는 신의 뜻을 알고 있다고 확신한 이들이 저지른 악행으로 가득차 있다. 구약의 여호수아가 그랬고, 중세의 십자군이 그랬고, 가깝게는 알카에다와 ISIS가 그랬다.(246-248p)

 

 

“정은씨, 난 언제나 현재가 내 인생에서 제일 힘든 시기라고 생각했거든요. 여기만 지나가자. 그럼 나아질 거야. 그런데 늘 더 나빠졌던 것 같아요. 돌이켜보면 나이가 어릴수록 더 행복했어요. 그럼 지금 이 순간도 최악이 아닐 수 있다는 거잖아요? 지금이 그래도 앞으로 내가 살아갈 인생에서는 가장 젊고, 제일 괜찮은 순간일 수 있다는 건데······ 우리 모두 여기서 늙어가다가는 언젠가 이런 말을 하게 될지도 몰라요. 처음 들어왔던 때가 그래도 좋았어. 그땐 젊었고, 희망도 있었다.”

정은은 눈을 떴다.

“고등학교 때 담임이 만날, 우리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원했던 내일이다, 같은 헛소리를 칠판에 적어놓곤 했어요. 그 시절 노트에 보니까 내가 이렇게 적어놨더라구요. 그토록 원했던 내일도 막상 오면 헛되이 보낸 어제보다 나을 게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너무 비관적인가요?”(257p)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아이를 잃어버림으로써 지옥에서 살게 됩니다. 아이를 되찾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짜 지옥은 그 아이를 되찾는 순간부터라는 것을 그는 깨닫게 됩니다. 이제 우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한 일이 인생에는 엄존한다는 것, 그런 일을 겪은 이들에게는 남은 옵션이 없다는 것, 오직 ‘그 이후’를 견뎌내는 일만이 가능하다는 것을.(269p)

 

 

 

ㅡ 김영하, <오직 두 사람>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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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4/12

 

 

일단 정해지면 다들 지킨다. 왜냐면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는 게 더 귀찮은 일이니까.(47p)

 

 

지난여름 동안 아무도 조중균씨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으면서 조중균씨가 사라지자 모두들 조중균씨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들 조중균씨에게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모두가 기억하는 모두의 조중균씨가 있었다.(69p)

 

 

그 시절 나는 큰오빠를 괴물이나 마귀, 악당이라고 생각했고 좀 커서는 그냥 샐러리맨이라고 생각했다. 마귀에서 샐러리맨까지는 간격이 큰 듯해도 살다보면 거기서 거기라는 걸 알게 된다. 그렇게 못 되면 그것이 더 나쁜 일이다. 내 경우가 그렇다. 여덟 살부터 마흔 다 된 지금까지 학교를 다니니까. 물론 학생이기만 하지는 않고 가르치기도 한다. 대학에서 가르치고 싶지만 지도 교수가 죽지 않고 선배들도 죽지 않아서 내 차례는 안 온다. 그래서 공부방을 한다.(207p)

 

 

그렇게 물이 남아도는 목욕탕에서도 불이 나 죽을 수 있다는, 사는 게 그렇게 우습다는 언니 말은 매번 아주 지독한 농담처럼 들렸다.(212p)

 

 

 

 

ㅡ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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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4

 

 

저의 궁극적인 목적은 극우파에게 유머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남을 웃기는 데는 선수지만 정작 자신은 어디에서 웃어야 하는지 모르죠.(32p)

 

 

나는 가끔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했다. 아무 말이나 하고 싶지만 아무 말이나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 했다. 에리크는 자신도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모두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내게 글을 쓰라고 말했다. 글을 쓰면 삶이 조금 더 비참해질 거라고, 그러면 기쁨을 찾기가 더 쉬울 거라는 게 그의 말이었다. 나는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고 했다.(34p)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약속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책은 어디서나 읽을 수 있고 언제나 덮을 수 있다. 나는 책을 한 번에 세 페이지 이상 읽는 일이 드물다. 좋은 책은 대부분 세 페이지 안에 좋은 부분이 나온다. 또는 세 페이지 안에서 좋음을 얻는다. 그렇다면 더 이상 독서를 지속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책을 덮는다. 좋지 않은 책은 세 페이지가 넘도록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책을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있을까. 나는 책을 덮는다. 책과 달리 영화와 공연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공간으로 가야 하며, 표를 끊고(심지어 대부분 예매를 해야 한다!) 줄을 서서 모르는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정해진 시간 동안 작품을 관람한다. 이런 특성은 점점 나를 지치게 했고, 최근에는 참지 않게 되었다. 다행인 것은 지난 시대에 비디오가 나왔고, 지금은 컴퓨터로 영화를 보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하루에 십 수 편의 영화를 보는데, 한 영화당 짧게는 30초, 길어도 10분 이상 보는 일이 드물다. 나는 서재에서 책을 꺼내 보듯 하드에 담긴 영화를 보며 영화를 보다가 다른 영화의 장면이 생각나면 그곳으로 옮겨간다. 좋은 부분이 느껴지면 플레이를 정지하고 방 안에 잠시 서 있거나 귤을 꺼내 손 위에서 가지고 논다. 어떤 영화감독이나 소설가도 임의로 작품을 펼쳐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공들여 보길 바란다. 나는 그런 태도가 강하게 배어나는 작품일수록 지루함을 느낀다. 책은 내 손안에 있다. 나는 언제든 책을 열거나 덮을 수 있고, 책 역시 언제나 내게서 달아날 수 있다.(125-126p)

 

 

나는 여행을 잘 가지 않는데 누군가와 여행을 갔다 오면, 그 뒤로 그 사람이 다시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더욱 갈 일이 없는데, 내게는 이곳과 저곳이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또한 멀리 가면 피곤함을 느끼고 피곤함을 느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늘 가까운 곳만 가는 편이며 어딜 가든 곧 돌아오곤 했다.(137-138p)

 

 

영화는 어떤 이미지에 대한 어떤 이미지에 대한 어떤 이미지입니다. 무슨 말이야. 나는 이것도 책에 나오는 말이라고 했다. 부르주아적인 쓰레기에 대한 말이야? 아니. 나는 이건 삶에 대한 말이라고 했다. 삶은 어떤 이미지에 대한 어떤 이미지고 고다르에 따르면 영화는 현실과 차이가 없고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라는 현실이기 때문에 어떤 이미지에 대한 어떤 이미지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영화라면 삶이 곧 그 어떤 이미지라고 말했다. 친구는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자신이 왜 책을 읽지 않거나 책 읽는 걸 좋아하지 않는지 너를 보면 알겠다고 말했다.(144p)

 

우리는 모두 자신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 순간 자신이 생각했던 종류의 사람이 아님을 깨닫지 않는가, 내가 생각하는 나는 가장 왜곡된 형태의 나 아닌가 따위의 생각을 했다.(206p)

 

 

케이프타운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 중 하나로 대부분의 사람이 총을 들고 다니며 수틀리면 총질을 하고 도적질을 하는 곳인데,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이를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지만 자신은 이미 애틀랜타의 현대건설 지점에서 일할 당시 살던 아파트 입구에서 자그마한 흑인에 의해 강도질을 당한 경험이 있었고, 그때 자신의 등에 권총으로 생각할 만한 차가운 금속 물체가 닿았다며 총이 몸에 닿는 것을 상상해보았는지 자신은 오직 한 가지만 생각했다고 혹시 이 멍청한 새끼가 실수로 방아쇠를 당기면 어떡하나, 얘가 나를 죽이려 한다면 어차피 나는 죽는 거지만 죽일 생각도 없는데 오발 사고가 나서 죽으면 어떡하나, 총은 생각이 없고 총은 의지가 없고 총은 실수와 의지를 동일하게 받아들이는 기계니까 이 새끼가 내 지갑을 받아 들다가 아이코 이러면서 방아쇠를 당기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때문에 오금이 저렸다고,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아찔하다고, 그러니까 너도 케이프타운에 올 거면 각오하라고, 너는 의도적으로 죽을 수도 있지만 실수로 죽을 수도 있다고, 꽃가루처럼 날아든 총알에 비명횡사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말했다. 나는 재경에게 비명횡사 따위는 전혀 두렵지 않고 케이프타운에 가고 싶다고 답했지만 어쩌면 한 번도 그런 상황에 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223p)

 

 

 

ㅡ 정지돈, <내가 싸우듯이> 中,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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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4

 

 

할아버지는 돈 대신에 미래를 선택했어. 어떤 선택을 해야 할 때마다 할아버지를 생각해. 미래는 돈이 될 수 있지만, 돈은 절대 미래를 보장해 주지 않거든.(78-79p)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어요?(139p)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랑은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아, 진짜 명언입니다. 사랑을 해 본 사람이면 이 말에 동의할 거예요. 왜 같은 곳을 바라보는가. 마주 앉아서 얼굴 보는 게 지겹기 때문이죠. 서로 얼굴을 계속 보다보면 싫증이 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같은 곳을 보게 되는 겁니다. 섹스를 할 때도 나이가 들수록 뒤로 하는 걸 좋아하게 되는 겁니다. 같은 곳을 바라보잖아요. 지금 커플들이 나란히 앉아서 제 얼굴을 바라보는 것, 이게 사랑입니다.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웃잖아요. 제가 무대를 끝내고 들어가도 여러분은 텅 빈 무대를 계속 보세요. 같은 곳을 보는 게 바로 사랑입니다.(178p)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감정이나 편지는 다락에 넣어 두는 게 아니야. 무조건 표현하고 전달해야 해. 아무리 표현하려고 애써도 30퍼센트밖에 전달 못 한다니까.(212p)

 

 

 

ㅡ 김중혁, <나는 농담이다>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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