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22

 

 

 

결국 부서에서 사용하고 관리하는 서류란 서류 자체의 필요, 불필요에 따른 것이 아니라 부서장의 입맛과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부서장이 자주 들춰보는 것들만 서류로 남아 있다 보니 불출 대장처럼 매일 쓰는 기초 자료는 엉성하거나 아예 없는 곳이 허다했고 공정 진도율처럼 고급 자료 역시 부서에서 작업 관리를 위해 사용하는 것, 부서의 담당 임원이 사용하는 것, 그 자료를 모두 취합해 주간 공정 회의에서 보고하는 생산관리 팀에서 사용하는 것이 제각각이었다.(32p)

 

 

회사란 집단이 원래 포기가 빠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돈이 나가도 내 돈이 아니고 책임을 져도 나 혼자 지는 책임이 아니니까요.

(...)

잘 생각해보십시오. 책임은 나중 일이고 나중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겁니다. 또 나중에 책임을 지더라도 그때는 자기만 책임지는 게 아니라 자기 위 지사장까지, 조직 전체가 나눠 지는 겁니다. 뭐하러 지점장이 긁어 부스럼 만들겠습니까? 이래서 내가 회사란 포기가 빠른 집단이라고 말한 겁니다.(43-44p)

 

 

이것으로 나도 회장의 줄 안에 들어간 것이었다. 안심이 됐다. 그 힘, 눈먼 힘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경멸했지만 두려워했고 혐오했지만 동경했다. 팀장과 팀이 그렇게 된 것은 슬프고 갑갑했지만 내가 이렇게 된 것은 기쁘고 다행스러웠다. 나는 두 겹으로 나뉘어 있었다. 힘에 사로잡힐 때 사람은 그렇게 되기 마련 아닐까? 갇힌 기분은 들었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견디고 버티는 회사 생활, 그것밖에 없었다. 당연한 귀결이었다. 나는 도망쳐왔다. 도망친 곳에 자유가 있을 리 없다고 말들 하지 않는가? 실은 도망쳐온 것조차 아닐지 몰랐다. 상관없었다.(141p)

 

 

나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위에 있는 늙은이들은 모든 것이 지금처럼 흘러가기만을 바라고 연급 받듯 월급을 받으려 들고 그렇게 돌아가지 않으면 되려 분노하고, 두려움으로 주름진 몸을 부들부들 떨며 원칙을 뭉개고 규칙을 악용하며 쥐어짤 수 있는 것을 모두 쥐어짜 단 즙만 빨아먹으려고 하는 거라고. 또 젊은이들은 일의 의미와 즐거움을, 남들의 욕망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한 기대와 희망을 인생이 주는 진짜 꿈이라는 걸 잃어버린 채 어서 편해지기를, 저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늙은이들의 높은 연봉과 권세를 부러워하며 쾌락을 보상이 아닌 목적으로, 생활의 한 부분이 아닌 근거로 삼은 채 어서 늙어가기만을 바라느라 인생의 금화 같은 젊음을 지폐 몇 장에 너무나 쉽게 바꿔버리는 거라고 말입니다.

(...)

사장실을 나서기 전, 나는 황사장에게 왜 불쑥 자기 얘기를 했는지 묻고 싶었으나 짬을 찾지 못했다. 인생의 많은 순간처럼, 그 순간도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278-230p)

 

 

책임이 모든 사람에게 있었으므로 어느 한 사람도 책임질 필요가 없었고 책임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문제로 모습을 바꾸며 다시 예전처럼 묻히고 덮였으며 그 위로 다른 문제들이 또 쌓였다.(286p)

 

 

그래서 가는 것이기도 했고 그런데도 가야 하기도 했고 어쨌든 가야 했다.(293-294p)

 

 

월급이란 젊음을 동대문 시장의 포목처럼 끊어다 팔아 얻는 것이다. 월급을 받을수록 나는 젊음을 잃는다. 늙어간다. 가능성과 원기를 잃는 것이다. 존재가 가난해진다. 젊음이 인생의 금화라던 황사장의 말 역시 수사가 아니다. 이대로 10년, 20년 또 어느 회사에서 삶을 보내든 그 회사가 모두 이렇다면 내 인생의 금화는 결국 몇 푼 월급으로, 지폐로 바뀌어 녹아버릴 테고 나는 그저 노인이 돼 있을 터였다. 그다음은 끔찍하다. 명예퇴직, 권고퇴직, 그런 말 아닌 말로 수십 년 회사 일에만 길들고 늙은 사람인 채 양계장에서 풀어준 노계처럼 세상에 나올 것이다. 남는 것도 끔찍하기는 마찬가지다. 잘해야, 그것도 아주 잘해야 조 상무나 곽 상무 같은 사람이 될 터였다. 그 사람들은 그 방면에서 운과 능력이 모두 탁월한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그 나이가 되도록 그 지위와 권세로 회사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황 사장은 어떤가? 불굴의 투사, 불요의 혁신가는? 결국 싸움에서, 이 끝없는 전쟁에서 내쫓기고 내쫓겨 패배하고 실패한 것이 황 사장의 종말이었다. 그래도 어떤 사람이 된다면, 황 사장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렇게 쫓기든, 저렇게 쫓기든 다 그만 아닌가? 모두 늙고 쭈그러든다. 희미하게 옅어지고 사라진다. 그렇지 않은가? 결국 모든 것이 허무할 따름이고 그 허무야말로 모든 것을 축축하게 짓누르고 있는 현실의 중량이었다.(301-302p)

 

 

회사가 그저 월급이나 주고 괴롭기만 한 곳처럼 말하고 떠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정말 그렇기만 한 걸까? 하루에 열 시간 넘게 붙박여 있는 곳에서 푼돈에 그저 인생을 끊어 파는 것에 불과하다면, 아무 정도 남기지 않는 것이라면 얼마나 쓸쓸하고 허망할까?(320p)

 

 

 

ㅡ 이혁진, <누운 배> 中,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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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1

 

 

어떤 사람이 제멋대로 나를 침범하고 휘젓는 것을 묵묵히 견디게 하는 건 사랑이지만, 또 그 이유로 떠나기도 하지.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31p)

 

 

막 엄마가 된 당신을 위한 임신과 출산의 모든 것은 집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사이에 그들은 네다섯 번의 이사를 했으므로 책이 언제 어떤 경로로 분실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미숙아에 대한 설명이 그 어디쯤에 나왔는지도 이제 지원은 가물가물했다. 아니다. 조산을 막기 위한 운동법에 대해서라면 몰라도, 미숙아에 대해 다루는 부분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기를 기다리는 여자 중에서 미숙아의 삶에 관심이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건 운전면허를 따려는 이들이 교통사고 피해자의 사고 이후의 삶에 무관심한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58p)

 

 

그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구체적으로 말한 적이 없었고 나도 묻지 않았다. 아버지라면, 내 아버지에 대해서도 전혀 궁금하지 않은데 남의 아버지를 궁금해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77p)

 

 

내가 잠시 한눈을 팔아도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죄가 또 유예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하고 절망했다. 극적인 파국이 닥치면, 속죄와 구원도 머지않을 텐데.(97p)

 

 

새로운 부임지를 기다리면서 엄마는 신혼 시절 살았던 에든버러에 대해 부쩍 자주 이야기했다. 무엇보다 자유로워서 좋았다고 했다. 자유로웠다는 게 무슨 뜻인지 묻지 않았다. 그녀가 대뜸, 네가 없었다는 뜻, 이라고 말할까 보아서였다. 그러면 나도, 아예 태어나지 않았을 때가 제일 자유로웠다고 응수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땐 영원히 지속될 줄 알았어, 행복이, 우린 참 사랑했거든. 젊은 시절의 부모가 얼마나 뜨겁게 사랑했는지, 무엇에 이끌려 국적과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결합하게 되었는지 미안하지만 나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과거의 정열과 무관하게 현재 그들의 삶은 몇 모금 마신 다음 뚜껑을 열어놓고 방치한 페트병 속 탄산수 같았다.(106p)

 

 

박이 그녀의 인격을 비하하거나 비아냥거리는 태도를 취한 적은 없었다. 그는 도우미에게 아무런 태도도 취하지 않았다. 말년의 그가 모든 사람에게 그러했듯이. 타인에게 아무 태도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태도를 완성시키는 방법은 오랫동안 몸에 밴 박의 습관처럼 보였고, 번번이 타인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많은 이들이 박의 과묵을 고압적이거나 권위적인 성격의 일단이라고 받아들였다. 그의 그런 모습은 노회한 정치인의 한 전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136p)

 

 

 

정이현, <상냥한 폭력의 시대> ,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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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8

 

 

삶에서 취소할 수 있는 건 단 한가지도 없다. 지나가는 말이든 무심코 한 행동이든, 일단 튀어나온 이상 돌처럼 단단한 필연이 된다.(136p)

 

 

자기가 달을 용서하고 말고 할 계제가 못되는 애송이 소설가에 불과하다는 것과 자신이 때로 낯선 이들의 삶에 깜짝 놀라곤 하지만 낯선 눈으로 보면 허구한 날 술만 마시는 그녀 자신의 삶이야말로 가장 경악할 만한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157p)

 

 

“이를테면 과거라는 건 말입니다.”

마침내 경련이 잦아들자 그가 말했다.

“무서운 타자이고 이방인입니다. 과거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도 수정이 안되는 끔찍한 오탈자, 씻을 수 없는 얼룩, 아무리 발버둥쳐도 제거할 수 없는 요지부동의 이물질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기억이 그렇게 엄청난 융통성을 발휘하도록 진화했는지 모릅니다. 부동의 과거를 조금이라도 유동적이게 만들 수 있도록, 육중한 과거를 흔들바위처럼 이리저리 기우뚱기우뚱 흔들 수 있도록, 이것과 저것을 뒤섞거나 숨기거나 심지어 무화시킬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의 기억은 정확성과는 어긋난 방향으로 그렇다고 완전한 부정확성은 아닌 방향으로 기괴하게 진화해온 것일 수 있어요.”(167-168p)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176p)

 

 

자기 취향에 충실할 때 사람들은 그만큼 한가한 것이고, 부고나 채무, 마감 같은 긴급성이 앞서면 누구라도 메시지를 남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180p)

 

 

 

ㅡ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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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6

 

 

앎이나 깨달음은 늘 그렇게, 한발짝 늦게 그녀를 찾아왔다. 똑같은 거리가 등하교 때마다 오분가량 차이나듯, 그녀가 아무리 아등바등 따라잡으려 해도 삶과 그녀의 박자도 그렇게 어긋났다.(19p)

 

 

나는 벗을 고르는 데 까다로운 편이다. 물론 내가 남들의 까다로운 기준을 충족시킬 만한 좋은 벗이 못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내 덕목이랄 수 있는 것은, 별 볼일 없는 인간들과 사귀느니 차라리 혼자 있는 게 낫다고 자위할 줄 아는 능력에 있다. 눈은 다락같이 높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는 자의 외로움을 견딜 줄 안다는 뜻이다. 그렇듯 하는 일이 없이 만나는 사람 없이 빤하고 투명한 삶을 살았는데도 내 서른 즈음이 그녀들과의 만남을 피하지 못했다는 건 차라리 경이롭다.(44-45p)

 

 

죽음을 앞둔 사람이 곰곰이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리라는 생각, 그 사람의 눈앞에 지나온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가리라는 편견은 참으로 낭만적인 상상이었다. 살아갈 날이 충분할 때에만 무엇인가를 열심히 지키고 보존하는 일이 중요했다. 미래가 적은 사람들에게는 과거나 기억도 적었다. 상욱이 이제껏 지켜봐온 노인이나 폐인 들은 집요하게 현재적이었다. 죽음에 가까울수록 그들은 현재에만, 오직 찰나에만 집착했다.(102p)

 

 

 

ㅡ 권여선, <분홍 리본의 시절>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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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8/24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들의 재능과 행운과 친화력을 질투했고 그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을 품었다. 중심으로부터 일정한 거리 밖에 물러나 있기를 자청한 것은 욕망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패배자가 되기 두려웠던 것이다. 전략적이지 못했을 뿐 타협도 했다. 힘있는 자들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애썼고 명백한 오류임을 알면서도 그들이 주도하는 방향에 따랐다. 싸움이 벌어질 때는 아무 입장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중간자의 이득을 취했다. 경쟁이 될 만한 상대에게서 약점을 찾아내기 위해 예민했고, 그에 대한 험담이 나오면 사실이 아님을 알면서도 침묵으로 그 오해를 부추겼다. 유리한 위치에 있을 때는 충분히 이기적으로 굴었다. 불안해서 비겁했다.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거만하거나 초탈한 척했다. 수긍한 게 아니라 회피한 것이었다. 자기를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논리도 익혀갔다. 그 논리란 권위를 추종하고 인기를 탐내면서 아닌 척 자신을 기만하는 기술이었다. 자신을 포함해서 주변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가 논문을 빨리 끝내지 못한 것 역시 완벽주의자여서라거나 학문 욕심 탓이 아니었을 것이다. 기대 이하의 결과일까봐 두려웠고, 모자란 실력이 탄로나는 상상만으로도 악몽에 시달렸다. 의미없이 책장을 차지하고 있던 수많은 책들이, 그 무너짐이, 그가 허세에 찬 그 인생을 얼마나 위태로운 마음으로 지키려 애써왔는지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162~163p)

 

 

나쁜 뉴스를 보고 내 일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면 남의 행운 역시 부러워해서는 안된다.(168p)

 

 

 

ㅡ 은희경, <중국식 룰렛> 中, 창비

,

2014

 

책 모임에서 첫 번째로 읽은 책. 평생 잊히지 않을 듯.

 

불행에 익숙해진 사람은 운명의 무게를 받아들인다. 그런 점에서 내 고향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운명론자들이었다. 그들은 도대체 진보라고 하는 것을 믿지 않았다. 내 유년의 고향 마을은 물처럼 고여 있었다. 운명은 방죽에 고인 물과 같은 것이었다.(19p)

 

 

회고컨대 학교가 파하고 두 개나 되는 재를 넘어 마을로 돌아가는 일이 즐거움이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집은 그런 곳이어선 안 될 것이다. 아니, 그런 곳일 수가 없을 것이다.(77P)

 

 

고향이란 하나의 산천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이 만들어 낸 관계이다. 인연이다. 그 때문에 고향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82P)

 

 

고향, 곧 관계의 늪. 그 파리지옥 같은 인정의 끈끈함. 늪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사람은 세상을 보지 못한다.

그만한 매정함, 그만한 모욕을 감당할 체질을 익히지 못해서 대개의 사람들은 고향(의 인정)을 끌어안고 산다.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82~83P)

 

 

사람은 현실에 대해 절망하면 신화에 기대고 싶어한다. 신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의 부드러운 왜곡이다. 반영이라면 왜곡의 반영이다. 개별적인 무의식의 꿈을 공식화함으로써 현실을 넘어가려는 욕망, 그것이 신화를 탄생시키고, 신화를 받아들이게 만든다. (...) 신화는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에 있다. 여기서는 진짜냐, 가짜냐 하는 논쟁은 의미를 잃는다.(84p)

 

 

노동력을 제공하면 언제든 숙식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도시에 대한 믿음에도 조금씩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 그는, 오래지 않아 자신의 노동을 제공할 자리를 스스로 가려 택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또 그는 깨달았다. 어울림의 유무와 상관없이 그가 손쉽게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취직 자리가 중국 음식점이라는 사실을.(94p)

 

 

충격이나 통증은 빈도와 반비례한다. 처음이 가장 어렵다. 익숙해지는 단계를 거치면서 충격이나 통증은 저절로 내면화한다.(95p)

 

 

아름다움에 대한 반응이 전적으로 인간 종족의 본능이며 따라서 선천적이라는 생각에 나는 동조하지 않는다. 그 감각 역시 상당 부분은 길러지는 것이다.(113p)

 

 

기억은 사실의 편이 아니라 편들고 싶은 자의 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을 사실이 아니라는 이유로, 편들고 싶은 자를 편들고 있다는 이유로 거부하여서는 안 된다.

진실이 반드시 사실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사실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내가 어떤 글을 읽다가 붉은 볼펜으로 줄을 그었으며, 그 붉은 줄을 여태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책의 저자가 조이스라고 할 때, 제임스 조이스를 빌려서 발언한다는 뜻이다. 조이스를 읽음으로써 비로소 세상이 악몽임을 깨달은 것이 아니다. 나는 붉은 볼펜으로 줄을 그었다. 그것은, 그를 알기 전부터 이 세상에서의 나의 삶이 바동거리는 악몽에 다름 아님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제임스 조이스를 빌려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임스 조이스에게서 내 말을 발견한 것이다. 그가 내 말을 먼저, 대신해 버린 것이다.

글들은, ‘내 말’의 대언일 때만, 진실로 의미를 가진다. 그 밖에 다른 글들은 쓰레기거나 허수아비이다. 쓰레기는 용도가 폐기되어 버려진 것이고, 허수아비에게는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다. 삶, 곧 악몽, 눈 뜨고 꾸는, 그래서 더 끔찍한.(139~140P)

 

 

언제나 상황이 더 힘이 세다. 어떤 일은 예정 없이 일어나지만,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은 있게 마련이다. 특정한 상황이 특정한 목적지를 향해 내모는 것이다.(143P)

 

 

언제나 표현된 것이 전부는 아니다. 아니, 어차피 전부는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안다. 때로는 감추기 위해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쨌든 표현된 것들을 통해서만 진실에 이를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지, 전체가 아니다. 크든 작든 모든 역사는 의미와 진실에 대한 기록이지,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이 아니다. 입장과 세계관에 따른 선택과 배제, 굴절과 왜곡의 과정을 우리는 해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말한다. 역사는 결국 해석이다. 우리는 그 진실을 안다.(196P)

 

 

고향이란,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낱 산천이 아니라 사람인 것이다.(207P)



따라서 어디에 자리를 잡고 있든 언제나 떳떳할 수는 없었다. 한곳에서 치켜세워지는 자는 다른 자리에서 내리깔릴 것을 각오해야 했다. 모든 자리에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환영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거니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도 없었다. (227P)

 

 

종교는 신념과 믿음의 영역이다. 그 안에 나름대로의 체계가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 무엇보다 정교한 체계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체계는 엄밀하게 말해서 주관적인 것이다. 절대적 신뢰와 전적인 헌신을 전제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 없이 신앙인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나는 알지 못한다. 특정한 종교에 몰두한다거나 그렇지 않다고 할 때에는, 이 전제가 지켜지고 있다. 요컨대 자신의 신념과 믿음을 바칠 수 있다거나 또는 그럴 수 없다는 차원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신과 인간, 영혼과 육체, 하늘과 땅 사이에 갈등과 회의가 생기고 반항과 구원의 드라마가 탄생한다.(234p)

 

 

그는 종종 학자의 자세를 내세우곤 하는데, 학문이란 신념이나 믿음의 영역이 아니다. 합리성과 이성을 유일한 규칙으로 삼는 이 영역은 믿음의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고, 믿음의 내용이 어떠한지만을 해부하려고 한다. 학자는 모든 형태의 믿음에 관심을 보이지만, 그 관심은 해부용 칼을 손에 쥔 의학도의 그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종교에 체계가 없지 않지만, 그것은 지극히 사적이고 주관적일 뿐 아니라 신봉하는 자의 절대적 헌신을 전제로 하고 있는 체계이기 때문에, 합리와 이성의 칼날 앞에서는 당황하게 마련이다. 종교에 몰두한 자는 전부를 본다. 그러나 종교를 해부하는 자는 부분을 본다. 부분을 보는 자는 부분의 결함에 눈이 가면 끝내 전부를 보지 못한다. 그리하여 신봉자에게는 모든 것이지만, 해부자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235P)

 

 

생각이 한쪽으로 몰리면 다른 출구들이 닫혀 버린다. 이게 아닌데, 이럴 필요가 없는데,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길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 있다. 그곳 말고는 달리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갈 길이 아닌 줄 알면서도 막무가내로 내달린다. 그리하여 고무지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 상식은 선 위에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안전하다. 그러나 그 선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파격이 상식이 된다. 편집적인 생각은 편집적인 길을 뚫는다. 그런 일이 발생하려는 순간에도 자각이 아주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렴풋하지만,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또는 하려 한다는) 걸 인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힘을 막으려는 희미한 반동도 일어나기는 한다. 그런 뜻에서 술꾼들이 경험하는 ‘필름이 끊어지는’상태와 이것은 다르다. 여기서는 필름이 돌아간다. 단지 필름을 중지시키기가 어려울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문제다. 길이 아닌 곳을 향해 몸을 던지는 난처한 상황을 빤히 목도하면서도 말리지 못하는 상황이란 절망이다.(254~255P)

 

 

그는 그 순간에 자기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멈출 수가 없었다. 마음과는 상관없이 거친 행동이 가속화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의 몸속에 악마가 들어 있는 것일까, 하고 질문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그것은 모든 악덕의 책무로부터 인간을 건지고 그 짐을 모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악마라는 추상에게 지우려는 목적으로 사람들이 고안해 낸 간교한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 악마라면, 그 악마는 인간일 것이다. 인간보다 더 악마다운 악마가 어디 있겠는가.(256P)



 

ㅡ 이승우, <생의 이면> 中, 문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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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6/21

 

골고루 재미있게 읽었는데 화라지송침이 가장 좋았다.

 

 

 

ㅡ 이기호, <김 박사는 누구인가?> 中,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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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5/31

 

 

그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어떤 표정, 어떤 진실, 어떤 유려한 문장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았다.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95~96p)

 

죽음은 새 수의같이 서늘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때 생각 했습니다. 지나간 여름이 삶이었다면, 피고름과 땀으로 얼룩진 몸뚱이가 삶이었다면, 아무리 신음해도 흐르지 않던 일초들이, 치욕적인 허기 속에서 쉰 콩나물을 씹던 순간들이 삶이었다면, 죽음은 그 모든 걸 한번에 지우는 깨끗한 붓질 같은 것이리라고.(122p)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색 전구가 하나씩 나가듯 세계가 어두워집니다. (...)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 우리들은 단지 보편적인 경험을 한 것뿐입니까?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날마다 만나는 모든 이들이 인간이란 것을.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선생도 인간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 인간입니다. (...)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134~135p)

 

기억해달라고 윤은 말했다. 직면하고 증언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수십번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짧은 입맞춤,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 여름에 팔과 종아리를 내놓아 누군가의 시선이 머무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몸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모든 따뜻함과 지극한 사랑을 스스로 부숴뜨리며 도망쳤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더 추운 곳, 더 안전한 곳으로. 오직 살아남기 위하여.(166~167p)

 

그 여름 이전으로 돌아갈 길은 끊어졌다. 학살 이전, 고문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174p)

 

 

 

ㅡ 한강, <소년이 온다>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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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5/14

 

 

읽음.

 

 

 

ㅡ 이기호,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中,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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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2/15

 

아포리즘으로 가득한 소설로 단숨에 읽을 수도, 작가가 하루에 한 두 문장만 썼다고 말한 것처럼 천천히 읽을 수도 있을 소설이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절인 미당의 신부전문을 옮겨본다.

 

신 부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가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십년인가 오십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이 마지막 폭삭 내려앉아 버렸다는 말은 너무나 적확한 말이다. 시에서는 화자인 내가 아닌 부인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는다고 하는데 실은 내려앉은 것은 화자인 내가 아닐까. 그러니까 이 소설은 한 인간이 무너져 내리는 이야기다. 평생에 걸쳐 타인을 부정하며 자신이 진짜라고 믿어왔던 것이 하루아침에 송두리째 사라져버리는 이야기.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우연히 부여받은 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게 좋을까를 고민하는 나에게 여러 가지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소설이었다. 소설 속 화자와 달리 한 순간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하면 될까. 우선 고립된 삶을 살지 않는 것이다. 최근에 봤던 영화 빅쇼트의 오프닝이자 마크 트웨인의 명언이 생각난다. “곤경에 빠지는 건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다. 뭔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소설 속 화자는 타인의 감정, 표정 등을 이해하지 못 할 뿐만 아니라 귀찮아하며 자신만의 세상에 갇힌 채 외골수로 산다. 독학의 문제와도 유사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사안에 대해 타인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만의 사고방식이 굳어지면 타인의 비판은 비난으로 들려서 무시하기 일쑤고 왜곡된 현실인식과 착각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 왜곡된 현실인식과 착각이 본의 아니게 문제를 만들어내고 자신을 망칠 것이다. 그러므로 행복의 조건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늙어서도 계속 배우고, 유머를 즐기며, 친구 및 가족과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비관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다. 내가 자주하는 말이 있다. 단정적이며 이분법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비관적인 사람들이 매사에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들에 비해 오히려 자살률도 더 적고 더 행복한 삶을 영위할 것이라는 말이다. 비관적인 사람들은 최악을 생각한다. 어차피 삶은 우연히 주어졌으며 가족은 피바다이자 인생은 지옥이며 앞으로 세상이 더 나아질 거라는 한갓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어차피 별 볼 일 없는 인생이므로 아주 사소한 즐거움만으로도 행복함을 느낄 수 있다. 문제는 반대다. 긍정적인 사람들은 지내온 삶이 비교적 무탈했을 것이고 별다른 어려움도 없었을 것이다. 늘 세상 사람들의 환대 속에서 자라왔으니 실패를 경험해본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연유로 그런 성향을 지녔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단 한 번의 실패로도 무너질 수 있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을 해보지만 솔직히 삶은 계획하고 의도한 대로 이루어지는 법이 없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살라는 말은 아니지만 살인자에게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선사하는 운명의 장난이 어느 누구에게도 올 수 있다고 생각하면 웃기지도, 웃을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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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의 표정은 풀기 어려운 암호와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법석들을 피우는 것처럼 보였다. 울면 짜증이 났고 웃으면 화가 났다. 시시콜콜 얘기를 늘어놓을 때는 참기 힘들 정도로 지루했다.(41p)

 

세상의 모든 전문가는 내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 말할 때까지만 전문가로 보인다.(42p)

 

나는 살아오면서 남에게 험한 욕을 한 일이 없다.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욕도 안 하니 자꾸 예수 믿느냐고 묻는다. 인간을 틀 몇 개로 재단하면서 평생을 사는 바보들이 있다. 편리하기는 하겠지만 좀 위험하다. 자신들의 그 앙상한 틀에 들어가지 않는 나 같은 인간은 가늠조차 못 할 테니까.(51p)

 

오이디푸스는 길을 가다 홧김에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잊어버렸다. 처음 읽고는 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잊어버리다니.

나라에 역병이 창궐하자 왕이 된 그는 신들을 분노케 한 범인을 찾아내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런데 채 하루도 지나기 전에 그 범인이 자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순간 그가 느낀 것은 수치였을까. 죄책감이었을까. 어머니와 동침한 것은 수치요, 아버지를 죽인 것은 죄책감이었겠지.

오이디푸스가 거울을 보면 내 모습이 거기 있을 것이다. 닮았지만 좌우가 뒤집혀 있다. 그는 나와 같은 살인자였지만 자기가 죽은 사람이 아버지인지도 몰랐고 나중엔 그 행위마저도 잊어버렸다. 그러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자각하면서 자멸한다. 나는 처음부터 내가 아버지를 죽인다는 것을, 죽이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후에 잊은 적도 없다. 나머지 살인들은 첫 살인의 후렴구였다. 손에 피를 묻힐 때마다 첫 살인의 그림자를 의식했다. 그러나 인생의 종막에 나는 내가 저지른 모든 악행을 잊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를 용서할 필요도, 능력도 없는 자가 된다. 절름발이 오이디푸스는 늙어서 비로소 깨달은 인간, 성숙한 인간이 되지만 나는 어린아이가 된다. 아무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유령으로 남으리라.

오이디푸스는 무지에서 망각으로, 망각에서 파멸로 진행했다. 나는 정확히 그 반대다. 파멸에서 망각으로, 망각에서 무지로, 순수한 무지의 상태로 이행할 것이다.(128~129p)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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