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9/7

 

첫 감상은 무난하고 평범한 소설이었는데, 모임을 위해 이것저것 떠올려오니 제법 공들여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쁘진 않았지만 누구에게 권할 만큼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겨우 몇 주가 아니라 몇 년은 알고 지낸 사이처럼 하워드에게 자신의 좌절감과 괴로움을 털어놓았던 자동차 안의 대화 이후로 진은 시간이 날 때마다 용납할 수 없을 만큼, 또는 현명하지 않을 정도로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182p)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도 자신의 속얘기를 털어 놓으면 상대와 급격히 친해졌다고 착각을 하는 경향이 있다. 한술 더 뜨면 상대방 역시 그런 얘기를 나에게 해주길 원하고 그러지 않으면 섭섭해한다.

 

 

진은 슬론 광장에서부터 걸어가면서 가게 진열창에 비친 자기 모습을 흘깃 보았다가 낡은 레인코트를 입은 구부정한 중년의 여성을 보고 당황했다. 유행에 뒤떨어지는 쥐털 같은 머리카락은 곧지도 곱슬거리지도 않고 군데군데 흰머리가 있었다. 진은 스스로 활기차고 착실한 직장 여성이라고 생각했지만, 어깨가 둥글고 칙칙한 모습은 정반대였고 평소에 그녀가 왜 거울을 피하는지를 상기시켜 주었다.(305p)

 

 

“잠깐, 움직이지 말아요.” 두 사람이 소파에 반쯤 앉고 반쯤 누운 채 진이 그의 무릎을 베고 있을 때 하워드가 말했다. “들어 봐요.”

레코드가 끝나서 바늘이 판을 긁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왜요?” 진이 말했다.

“행복이에요. 안 들려요?”(389p)

 

낯 간지러. 에릭인 줄...

 

 

“비키예요, 아프기 전이죠.” 앨리스가 말했다. “정말 사랑스런 아이였답니다.”

“그런 것 같네요.”

“비키를 괴물이라 생각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비키도 그냥 아이였을 뿐이에요. 그 애가 무슨 짓을 했든, 나쁜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아파서 그런 거예요.”(444p)

 

진짜 무슨 개소리를 하는건지? 그냥 아이는 나쁜 짓을 할 수 없을거라고 생각하나? 그리고 아파서였든 뭐든 범죄를 저질렀는데 그 보호자가 저렇게 얘기를 한다고? 범죄 행위에 대해 장애로 인한 심신미약을 주장할 수는 있을지라도 저렇게 얘기라면 곤란하지.

 

 

그녀는 틸버리 가족을 만나기 전에, 겨우 6개월 전의 삶이 어땠는지 기억하려 애썼다. 그때는 감정의 정점도 바닥도 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계절마다 직장과 집에서 해야 하는 정해진 일들은 적당히 다양하고 보람이 있었기 때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작은 즐거움들ㅡ하루의 첫 담배, 일요일에 점심식사를 하기 전에 마시는 셰리 한 잔, 일주일 동안 쪼개 먹는 초콜릿 바 하나, 아직 다른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도서관의 새 책, 봄의 첫 히아신스, 단정하게 잘 다려서 개어놓은 여름 향기 나는 빨래, 눈 덮인 정원, 보물 서랍에 넣으려고 충동 구매한 문구ㅡ로 충분히 기운을 낼 수 있었다.

그녀는 몇 년이 지나야 이미 깨어난 갈망의 괴물을 잠재우고ㅡ잠재울 수 있다면 말이다ㅡ억제된 삶을 다시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생각했다. 사랑에 빠져드는 여정은 너무나 쉽고 우아했지만, 사랑에서 빠져나오는 여정은 너무나 길고 힘든 오르막길이었다.(456p)

 

“세상에, 무슨 일 있어?”

진이 열심히 눈을 깜빡거렸다. 아무 일도 없다고 하고 얼른 나갈 수도 있고 멜섬 부인이 내미는 동정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기억이 그녀를 쿡쿡 찔렀다ㅡ리밍턴 호텔에서 만났던, 진이 내민 우정의 손길을 거절했던 만신창이의 딸. 그녀는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는 자랑스러움을 포기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날 밤 두 사람 모두 움츠러들었다. 늦었지만 눈부신 통찰 덕분에 진은 도움을 받아들이면 양쪽 모두가 더욱 풍성해진다는 사실에 눈을 떴다.

(...)

이 만남으로 인해 진의 상황이 실제로 조금 더 나아졌다. 진은 최근 틸버리 가족 때문에 겪은 슬픔을 자세히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연애가 끝나서 외롭고 후회된다고 내비쳤다.

(...)

물론 멜섬 부인은 진의 실연에 대해서 어떤 치료법도 제안할 수 없었고 그러려고 하지도 않았다. 유서 깊은 방법들ㅡ인내, 기분전환, 일ㅡ뿐이었는데, 그런 방법이라면 진도 잘 알고 있었고 예전에 프랭크와 헤어졌을 때 기대기도 했지만, 지금은 떠올려 봐도 별로 자신이 없었다. 예전의 경험은 고통이 끝없이 계속되지는 않는다고ㅡ그러나 매끄럽게 점점 더 빨리 가라앉지도 않는다고, 무서운 파도를 연달아 일으키며 가라앉는다고, 몇 번의 파도는 그녀를 쓰러뜨릴 수도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458-460p)

 

 

 

ㅡ 클레어 챔버스, <스몰 플레저> 中, 다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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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21

 

무미건조하다.

 

 

카니가 떠난 뒤로 칼은 딴 사람이 돼버렸어요. 집 밖이나 사무실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저 괜찮아 보였지만 사실은 변했던 거예요. 딸을 무척 사랑했어요. 나보다, 진보다요.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칼은 진에게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요. 이따금 비판적인 역할을 할 때만 빼놓고요. 아이를 꾸짖어 바로잡는 것 말이에요. 그런 문제에 대해 내가 여러 번 이야기해봤지만 그때마다 앞으로 고치겠다고 했을 뿐, 결코 전처럼 회복되지 않았고 그것은 진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어요. 분명히 그랬어요. 나라도 보상해주려고 노력해봤지만 도무지 효과가 없었어요.(122p)

 

 

진과 그 일이 있은 뒤로도 애디와 루이스는 계속 만났다. 그는 밤에 그녀의 집에 왔지만 이제 전과 달랐다. 예전의 편안한 즐거움과 발견의 분위기가 없었다. 차츰 루이스가 오지 않는 날이 생겼고 애디 또한 루이스와 함께 누워 있기보다는 혼자서 책을 보고 싶은 밤이 늘었다. 그녀는 옷을 벗고 그를 기다리기를 멈췄다. 그가 오는 날이면 아직도 손을 잡긴 했지만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습관과 쓸쓸함, 그리고 예감된 외로움과 낙심 때문이었다. 마치 다가올 무엇에 대비하여 이런 순간들을 비축해두려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깨어 말없이 함께 누워 있을 뿐 이젠 사랑을 나누지도 않았다.(180p)

 

 

 

ㅡ 켄트 하루프, <밤에 우리 영혼은> 中, 뮤진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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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20

 

확실히 요즘 점점 짧고 쉬운 컨텐츠를 즐기다보니 이 책의 장식적이고 장황한 문장에 적응이 안 되어서 여러 번 포기할 뻔했다. 모임 책이라 억지로 붙잡고 읽었는데 후반부에는 적응이 되어 그런지 읽기가 조금은 수월해지긴 개뿔 ㅋㅋㅋㅋ

그나마 대략 300p부터는 등장인물의 정체가 밝혀지는 반전(?)이 등장하며 조금은 읽는 재미가 있었다. 책에 대한 메타적인 소설이자 기록된 사실이 실제의 현실을 결코 반영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돌이켜보니 좋았던 구절이 종종 있었다만 그걸 즐기기 위해 많은 시간 고통을 감내해야 할 걸 생각하면 누구에게든 쉬이 읽어보라고는 못 권하겠다. 다만 비평가들은 딱 좋아할 만한 책이다.

 

 

 

관광객들은 돈이 있었고 우리는 그것이 필요했다. 그 대가로 그들이 요구한 것은 그저 거짓말을 들려달라. 자기를 속여달라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하게는 자신들이 안전하며, 이ㅡ국가적, 개인적, 영적으로ㅡ안전하다는 기분이 권태에 지친 변덕스러운 운명의 허튼 농담이 아니라고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자신들은 권력과 부를 지녔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검은 완장을 두를 필요가 없다고, 몇몇 사람의 부가 숱한 사람의 비참에 그토록 기묘하게 의존하고 있는 이유를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혹은 설명하지 않는 일에 대해 찜찜한 기분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말해달라는 것이었다. 친절하게도 우리는 이런 거래가 어디까지나 의자를 사고파는 일인 척, 그들이 가격과 유래를 물으면 그에 맞장구쳐 응대해주는 일인 척 행동했다.

하지만 그것은 가격과 유래에 관한 일이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다.

관광객들은 무언의 질문을 집요하게 품고 있었고, 우리는 위조한 가구를 가지고 가능한 한 최선의 답을 내놓아야 했다. 사실 그들은 ‘우리는 안전한가요?’라고 묻고 있었으며, 사실 우리는 ‘아뇨, 하지만 쓸모 없는 상품들로 바리케이드를 치면 시야를 가리는 데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요’라고 답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만은 그저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단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틀림없는 본능으로 보는 편이 나을 만큼 인간에게 뿌리깊은 감각인 까닭에 그들은 ‘이것이 우리의 잘못이라면 고통을 겪게 될지’까지 알고 싶어했는데, 과연 우리는 ‘네, 서서히요. 하지만 가짜 골동품 의자가 당신과 우리 둘 다 기분을 좀 가볍게 해줄지도 모르지요’라고 응수하는 셈이었다. 생계가 걸려 있었고, 이러는 게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썩 나쁘지도 않았고, 내다팔 의자야 힘닿는 데까지 많이 들어 옮길지언정 세상의 무게를 들어 옮길 생각은 없었으니까.(21-22p)

 

 

훙 선생이 말한다. 한 권의 책이란 최초에는 삶을 이해하는 새로운 길ㅡ독창적인 우주ㅡ일 수도 있지만, 머잖아 아첨꾼들의 과찬과 동시대인의 경멸을 받으며 두 편 중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는, 저술사의 각주로 전락한다고. 책의 운명은 가혹하며 책의 숙명은 부조리하다. 독자들에게 무시당하면 사멸하고, 후대의 승인을 받으면 영원히 곡해될 운명에 처하는 것이다. 또 그 저자들은 처음에는 신이 되고, 그다음에는 필연적으로, 그들이 빅토르 위고가 아니라면, 악마가 된다.(44p)

 

 

나는 또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표적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ㅡ정확히 말하자면 장바뵈프 오듀본 자신이 아니라 장바뵈프 오듀본이 쏘아맞히지 못한 새들로부터ㅡ배웠다. 사람들은 자기와 상반되는 것을 그 무엇보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에 있을 때 나는 암흑가의 영국인으로 사는 것이 유용하다는 것을 익혔고, 나중에 영국의 암흑가로 돌아갔을 때는 미국인 모험가로 행세했다. 또 이곳 밴디먼스랜드에서는 설령 삼류라 할지라도 ‘외지에서 온 예술가’ㅡ물론 여기서 외지란 유럽을 뜻한다ㅡ만큼 환대받는 존재가 없는듯하다. 만에 하나라도 내가 유럽으로 돌아가는 날에는, 부당하게 학대받은 순진하고 촌티나는 식민지인을 연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78p)

 

 

나는 먼 데서 바라봐 세부를 뭉개버리고 삶을 모욕하는 허랑한 그림을 그리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팝조이 같은 이들이 너무나 사랑하는 저 풍경화, 마치 거리를 두고 보아야만 어떤 장소나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듯이 하늘로 높이높이 치솟으며 진실을 훼손하는 저 풍경화ㅡ그것은 땅의 거짓말이다. 진실은 절대로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운 먼지 속에, 불쾌한 점액과 딱지와 오물 찌꺼기 속에, 악마와 더불어 천사와 더불어 존재하며, 이 모두가 지상과 우리 안에 사로잡혀 있고, 이 모두가ㅡ나와 여러분과 우리의ㅡ한차례 맥박 속에, 또한 내가 물고기 육신을 가지고 구현하고 이루려는 모든 주제 안에 담겨 있다.(111p)

 

 

나는 책이 이야기의 본줄기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조금도 동의할 수 없다. 하느님도 나와 생각이 다르지 않으리라. 그분은 스물 여섯 글자로 당신이 원하는 것을 다 만들어냈으며, 그분의 이야기는 A-B-C로도 Q-E-D로도 문제없이 잘 통하지 않는가.

곧은길을 믿는 자는 장군들과 우편마차의 마부들뿐이다. 내가 보기에 이 점에서는 킹도 내 편이다. 그가 굽이와 우회와 유람에 온몸으로 동의함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여행이란 언제나 끝없는 실망의 예술이지만 마땅히 기억할 만한 것이어야 하며, 이것들은 여행을 기억할 만한 일로 만들어준다.

생각에 열중한 나는 이 길에 대한 질문이야말로 고대 그리스 문명과 로마 문명을 근본적으로 가르는 차이라고 킹에게 역설했다. 로마인들처럼 곧은길을 닦으면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세 단어를 얻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반면에 그리스인들처럼 아크로폴리스 곳곳에 염소가 다니는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내면 무엇을 얻는가? 「오딧세이」전권과 「오이디푸스 왕」전체를 얻는다.(184p)

 

 

요르겐 요르겐센의 배후에 있는 어떠한 동기ㅡ내가 사령관에게 끼치고 있다고 여겨지는 영향력에 대한 질투, 혹은 명확한 인과관계를 추구하는 서기로서의 욕망ㅡ를 찾아낸다 해도 그것은 실제 삶이 아니라 문학에 불과할 것이다. 삶에는 사람의 행동에 대한 설명이나 동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그것은, 톱상어의 본성과 마찬가지로 단지 그의 본성이었다.

나중에ㅡ너무 늦게야ㅡ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령관처럼 요르겐 요르겐센도 상상과 실제가 어긋나 있다는 감각에 시달렸다. 그는 책을 너무 많이 읽었고 열여섯의 나이에 로맨스와 모험담에 고취되어 1798년의 어느 날 고향 코펜하겐을 과감히 떠나 거친 세상으로 나갔지만, 세상은 자기가 읽은 그 무엇과도 일치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사물들은 파열했고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책은 견고했지만 시간은 녹아 흘렀다. 책은 원인과 결과를 다루었지만 삶은 불가해한 무질서였다. 아무것도 책과 같지 않았다.(275p)

 

 

빌리 굴드는ㅡ너무 부끄러워서 여기서는 나 자신을 삼인칭으로밖에 부를 수 없다ㅡ욕지기를 느꼈다.

(...)

내가 읽은 모든 것이 사령관이 꿈꾼, 그야말로ㅡ유럽의 앤 양조차 감히 꿈꾸지 못했던ㅡ하나의 감옥으로서의 이성적 사회상이라는 무시무시한 인식이었다. 이 최후의 창조물, 아마도 여러 면에서 그의 가장 가공할ㅡ설령 의도치 않았을지언정ㅡ이 업적이야말로, ‘구세계’에 대한 무의식적이고도 기괴한 숭배라는 점에서 ‘마작의 전당’과 국영철도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

그것은 이 역사 전체에서 그가 보고 알았던 모든 것, 그가 목격하고 겪었던 모든 것이 마치 잠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흩어지는 꿈처럼 이제 사라지고 무의미해졌다는 사실이었다. 자기 과거의 정신을 펄에일 병에 담아 가지고 다니는 카푸아 데스의 주장처럼, 만일 자유가 기억의 공간에서만 존재한다면, 빌리 굴드와 그가 아는 모든 사람은 영원한 징역을 선고받은 셈이었다.(316-317p)

 

 

아주 많은 면에서 시체는 산 사람과 대비되는 이미지다. 아주 많은 면에서, 나는 이 허물어져가는 살덩이가 그 안에 한때 거주했던 사람보다 오히려 낫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요르겐 요르겐센이 이 세계를 자기 욕망에 맞추어 만들고자 했던 반면, 그의 시체인ㅡ사령관의 가면 인장이 그나마 남은 살점과 더불어 떨어져나가면서 그에 대한 예속으로부터도 해방된ㅡ킹은 서구적 순응의 모범 그 자체다. 요르겐 요르겐센이 후손들에게 자기 생각을 말하고 싶어했던 반면 킹은 묽은 수프 같은 내 횡설수설을 조용히 곱씹는 선에서 만족한다.(326-327p)

 

 

인생이란 역사화에서 관습적으로 묘사되는 식의 진보도 아니고, 적절한 순서에 따라서 열거되고 이해되는 사실의 연속도 아니다. 그것은 변형의 연속이다. 어떤 변형은 즉각적이고 충격적이며, 어떤 변형은 감지되지 않을 정도로 느리지만 너무나 철저하고 무시무시해서, 우리는 삶이 끝날 때쯤 노망든 자아와 어린 시절의 자아가 일치하는 순간을 찾아 기억을 헛되이 더듬게 된다.(333p)

 

 

하지만 사령관의 눈물도 그의 흐려진 시야를 지극히 명백한 사실로부터 가리지 못했으니, 드퀸시의 필적과 앤 양의 필적이 동일했던 것이다.

그의 누나는 그녀의 남동생과 잿더미로 화한 그의 국가만큼이나 가짜였음이 드러났다. 사령관은 향기나는 수건을 내팽개치고, 휘몰아치는 매캐한 연기를 너무 깊이 들이마신 나머지 헛구역질을 했다. 다가올 황금시대, 한 겹 아래 도사린 몰락, 모독당한 유토피아, 오로지 결연한 망각으로만 말살 가능한 지옥, 그는 불타는 궁전의 연기 속에서 마침내 이 모든 관념의 냄새를 맡으며, 삶을 받아들이지 못한 자의 어리석음이 거기 배어 있음을 느꼈다.

돌연 그는 자신이 꿈이 아니라 그 공포스럽고 무시무시한 역인 현실로부터 깨어나, 제대로 깨친 거라면 모든 삶이 흉포한 꿈이라는 감각에 눈뜨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꿈에서 사람은 파도와 바람에 붙들려, 또한 자신이 경외에 떨며 매일매일의 경이를 목격하는 증인에 불과하다는ㅡ언제라도 망각될 위험에 처한ㅡ인식에 붙들려 질질 끌려다니고 있었다.

그가 생각한ㅡ짜증나게 빌리 굴드가 그의 생각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따져 묻지 말기를. 굴드가 여태껏 털어놓은 것보다 훨씬 아는 게 많다는 사실을 지금까지도 의심한다면 뭐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테니까ㅡ몇 가지 시시한 것들을 여기에 특별한 순서 없이 재생한다.

ㅡ복제할 가치가 있는 유럽은 없다. 내 궁전을 집어삼키는 화염을 뛰어넘는 지혜도 없다. 오로지 우리가 아는 이 삶, 이 모든 경이로운 먼지와 오물과 장려함으로 가득찬 삶만이 있을 뿐.

ㅡ과거의 관념이나 미래의 관념이나 매한가지로 무용하다. 둘 다 누구든 무엇으로든 불러일으킬 수 있다. 지금 있는 것 이상의 아름다움은 없다. 지금 있는 것 이상의 기쁨이나 슬픔이나 경이도 없다. 또한 지금 있는 것 이상의 완벽함도 선이나 악도 없다.

ㅡ내가 이제껏 무의미한 삶을 살아온 것은 이 의미 있는 한순간과 지금 깨달은 이러한 것들을 위해서였다. 이 깨달음은 내 머리와 마음으로 불현듯 들어왔듯이 불현듯 떠나갈 것이다.

그는 생각했다. 조향사 샤르댕이라 해도, 과연 이처럼 코를 찌르는 계몽의 향으로 볼테르의 머리를 채울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는 이 모두를 온전히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이는 은총이자, 그러지 않았다면 완전히 무의미했을 삶의 완성으로 느껴졌다. 또한 그는 자신의 생각이 최후의 무용한 허영임을, 자신의 궁전처럼 자신의 생각도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있음을, 자신이 사사프라스 차가 담긴 컵을 든 채로 혼자 남겨졌으며, 그 컵이 소름 끼치게도 점점 뜨거워지고 있음을 깨달았다.(404-405p)

 

 

나는 어째서 정반대의 두 가지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지? 좀 설명해달라. 설명이 안 되더라도 어째서인지 알고 싶다ㅡ내 삶의 모든 증거는 이 세상이 늙은 덴마크인의 둥둥 뜬 시체보다 더 지독한 악취가 진동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어째서 나는 아직도 이 세상이 좋은 곳이고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밖에 믿을 수 없는지?

내 기다란 코로 저 잠수부들의 물안경을 톡톡 두드리고 이렇게 말하고 싶을 때도 있다. 이 나라가 무엇이 되었는지 알고 싶은가? 나한테 물어보라ㅡ어쨌든, 만약 거짓말쟁이와위조범, 매춘부와 밀고자, 살인범 죄수와 도둑을 신뢰할 수 없다면 당신은 이 나라를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우리 모두가 권력과 나름의 타협을 하며, 우리 대부분은 약간의 평화와 고요를 얻기 위해 우리 형제자매를 팔아넘길 터이기 때문이다. 윤리적으로 비겁한 삶을 살도록 훈련받았으면서도 항상 우리는 ‘자연’의 반항아라며 자위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무엇에 대해서도 화를 내거나 흥분해본 적이 없다. 우리는 애버리지니를 쏘아 죽이고 얻은 땅에서 유순히 풀을 뜯다가 결국 도살되는 양떼와 똑같다.

(...)
그래서 이 두 가지, 이 둘을 나는 도저히 화합시키지 못하고, 그것이 내 몸을 둘로 찢어놓는다. 세상이 너무나 끔찍하다는 인식, 삶이 너무나 특별하다는 감각ㅡ이 두 가지 감정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433-434p)

 

 

 

 

ㅡ 리처드 플래너건, <굴드의 물고기 책>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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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13

 

너무 억지스럽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영상화를 염두에 둔 시나리오 같은 느낌.

 

 

 

“푸르니에는 아주 착한 사람이었죠.” 알랭은 범죄를 마주한 대다수의 인간은 사건의 주인공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온갖 성품을 가져다 붙이며 그들을 포장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새겼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살인범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으며 틀림없이 과묵하고 그러면서도 마을에 기여하는 이웃으로 묘사되는 반면, 희생자는 화목한 가정을 수호하고 회사에 충성하며 언제나 타의 모범이 되는 존재다. 알랭은 살인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걸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다. “그 개자식이 칼을 빼 들었다는 게 놀랍지도 않아요. 아주 못된 후레자식이거든요!” 희생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등신은 인사 한마디 안 하고 차도 아무 데나 갖다 세워 두는 데다 마누라와 자식들에게 고함지르는 게 일상인 놈이었어요.”(164p)

 

 

 

ㅡ 앙투안 로랭, <익명 소설> 中, 하빌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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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11

 

 

피해자다움이나 피해호소인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사용하는 시대를 비판, 강간 사건에서 피해자가 기쁨을 느낄 수 있으나 그렇다고 그 사실이 그의 모든 고통을 상쇄하는지에 대한 고민, 그리고 그루밍 성범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복잡 미묘한 성격을 스릴러의 형식으로 잘 풀어냈다. 읽는 동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와 ‘더 테일’, ‘화차’가 생각이 났다.

 

 

비밀이란 그런 것이다. 비밀의 존재를 숨기고 없는 척할수록 그 비밀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진다. 어디를 가도 그 비밀이 따라온다. 시간이 쌓이면서 그 비밀을 지키고 싶기도 하고 없애버리고 싶기도 한 두 가지 생각이 끊임없이 경쟁을 벌이며 우리를 기진맥진하게 만든다.(111p)

 

판옌중은 장궈구이가 한번쯤 시간을 내어 의뢰인의 말에서 진위를 가려내는 방법을 교육해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담당 사건이 늘어나면서 장궈구이가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자신이 피해자라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죄상을 부인하는 것은 단순히 심성이 악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선량하고 정직한 일면에 미련을 버릴 수 없어 뻔뻔스레 사실과 다른 말을 하는 것이었다.(131p)

 

 

웃기는 소리!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긴 하나? 판옌중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따. 사람이 평생 거짓말을 가장 많이 하는 대상은 배우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많은 이들이 결혼을 ‘울타리’에 비유한다. 그 울타리 안에 머물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특수한 외형과 생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거짓말은 결혼생활에서 윤활제이지 걸림돌이 아니다.(133p)

 

 

친구의 상황이 자신보다 훨씬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사람들은 곧잘 질투심에 사로잡혀 불행감을 느낀다. 팔자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던 친구에게 불운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그 친구도 결국 비슷한 처지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친구의 불운을 떠올리며 은밀한 행복감까지 느낀다. 이럴 때 그들의 우정은 허위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더없이 진실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156p)

 

 

눈을 크게 뜨고 있으면 가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것을 목도하면 뒤돌아갈 수 없다. ‘어린 시절’에서 강제로 쫓겨난다. 문을 여는 암호를 잃어버린 그들이 문 밖에서 아무리 울부짖어도 다시 돌아갈 수 없다. 그때부터는 어른이다. 오드리는 열 살 때 어른이 되었다.

오드리는 린 선생님을 사랑했다. 그 사랑에 대해 어쩌고저쩌고 토론할 마음은 없다. 그 감정에 다른 요소들, 말하자면 존경이나 숭배, 감사함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고 해도 그게 뭐 어떻다는 말인가? 그 모든 것을 합치면 결국 사랑이었다. 오드리는 린 선생님을 사랑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오드리를 붙잡고 그 사랑의 ‘속성’이 무엇인지 정리해서 알려주려 했다. 오드리는 그런 모든 위로를 통해 오히려 자신이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했다. 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오드리의 사랑은 가짜라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했다. 그때의 내가 바보 멍청이라고 생각해요?(184-185p)

 

 

여자애가 그런 일을 겪고도 다음 날 쑹화이쉬안과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눈다고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쑹화이구 선배는 인기가 정말 많았어요. 그 선배를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정말 많았죠. 그런 남자가 뭐하러 굳이 그런 짓을 저지르겠어요?(195p)

 

남성 입장에 감정이입을 하는 전형적인 사람의 발언인데, 재밌는 건 이 소설에서는 그 선배를 짝사랑했던 '여자'의 발언이다.

 

 

더는 희망을 품지 않기로 했다. 희망이 절망의 친구라서 둘은 언제나 같이 움직인다. 희망이 마음에 깃들면 절망이 부르지 않아도 다가온다. 그가 희망을 버리자 절망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는 기나긴 평온의 길로 들어섰고, 더는 원망의 마음 없이 아버지를 간병할 수 있었다.(253p)

 

 

우신핑이 사건 다음 날 그 남자 여동생과 함께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을 똑똑히 봤다.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신핑이 웃을 수 있었을까?(263p)

 

 

그게 절말이면 왜 린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고 했어?

열일곱 살의 오드리는 그 말에 대항하지 못했다. 엄마의 추궁이 합당해 보여 아무 대꾸도 못 했다. 열 살 때의 나는 왜 린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했을까? 내가 그를 미워했다면, 그가 나에게 한 짓이 싫었다면, 나는 왜 린 선생님이 간식과 홍차를 사주는 것을 그냥 받아들였을까? 그가 내 중학교 생활에 관심을 보이도록 내버려 둔 이유는 무엇일까?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로 린 선생님은 다시는 그런 행위를 하자고 요구하지 않았고, 사진들에 관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오드리 역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런데 린 선생님과 만났다가 헤어질 때마다 왠지 허전한 기분이었다. 린 선생님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지만 오드리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잃는 느낌이었다. 스물일곱 살이 되어서야 당시 자신의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어떻게든 정리해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녀는 린 선생님에게 집착했고, 린 선생님이 자신을 버리지 않기를 바랐다. 열 살이었던 오드리는 갑자기 너무 높은 의자 위에 올려졌다. 그리고 자신을 거기에 올려놓은 사람만이 도로 내려줄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264-265p)

 

 

판옌중은 장씨 아주머니의 딸 장전팡이, 심지어 신핑의 어머니인 황칭롄까지 신핑을 멸시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신핑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피해자였다. 그날 신핑의 옷차림이 그랬고 술에 취해 의식이 없었던 것도 그랬다. 성폭행 사건에서 피해자에게 문제가 있었다고 몰아가기 쉬운 요소다. 사건이 일어난 이후의 정황도 그랬다. 신핑은 처음에 힘들어하면서 눈물을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판옌중은 불안한 심정으로 생각했다. 신핑이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 너무 짧았다······.

(...)

제가 다시 물었죠. 경찰에 신고한 뒤에 벌어질 일을 감당할 수 있겠니? 신핑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세요? 선생님, 제가 낯선 사람에게 얻어맞았다면 지금처럼 몇 번씩이나 신고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298-299p)

 

 

오빠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은 자신의 출신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할지 말지조차 결정하지 못한다.

오빠, 이것 좀 봐. 나는 내가 죽을지 말지 결정하지 못해. 물론 다른 사람을 살릴지 말지도 결정하지 못해. 모든 상황이 정해진 궤도를 벗어났다. 가면 갈수록 비뚤어진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다. 멈출 수도 없다.(350p)

 

 

“지금도 그때의 감각이 기억나. 옌아이써가 가끔 책상이나 책꽂이 같은 걸로 보일 때가 있었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몇 초 정도 짧게 그렇게 보이는 거야. 옌아이써가 물건으로 보일 때면 걷어차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사람들이 화가 나면 책상을 차는 것처럼 말이야.

(...)

당신하고 같이 지낸 몇 년 동안 나는 계속 두려웠어. 당신도 물건으로 보일까봐. 방금 당신이 말한 것처럼 과거의 dfl이 언젠가는 나를 찾아올 거라고 예감하고 있었어······. 당신이 실종되기 전날 우리가 크게 싸웠잖아? 그날 나는 아주 긴장하고 있었어. 혹시라도 내가 또······. 솔직히 거의 그럴 뻔했어. 당신이 비명을 지르거나 나를 저주하면 얼른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은 나한테 사과를 했지. 미안하다고, 그렇게 말하면 안 됐던 거라고, 당신이 그렇게 말해줘서 정신을 차렸어. 어, 그러니까 내가 당신한테 고맙게 생각한다는 거야. 일이 더 커지지 않게 막아줬으니까. 고마워. 당신 덕분에 나란 사람이 완전히 쓰레기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어. 내가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고.”(430-431p)

 

 

어떤 여자의 성격이 순진하고 선량하다고 해서 그녀가 반드시 무고하지는 않다.(440p)

 

 

우샤오러가 회의한 것은 ‘피해자가 기쁨을 느꼈다면, 그 사실이 그의 고통을 상쇄하느냐’였다.(444-445p)

 

 

 

ㅡ 우샤오러,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中, 한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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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5/19

 

조금 뒤죽박죽인 순서였지만 이제 출간된 9권은 다 읽었다. 인물들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니 너무 재밌네. 마이클 코널리의 시리즈를 시작할지 헨닝 만켈의 시리즈를 시작할지 생각해봐야겠다.

 

 

ㅡ 마이 셰발, 페르 발뢰, <잠긴 방> 中, 엘릭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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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5/11

 

 

‘잠긴 방’ 한 권 남았다. 테러리스트는 내년에 나올려나?

 

 

그런데도 콜베리는 두 사람을 가급적 빨리 붙잡아야 할 것 같다는 직감을 떨칠 수 없었다.

왜?

나도 어느새 경찰관의 직업병에 잡아먹힌 거지, 콜베리는 우울하게 생각했다. 이십삼 년 동안 일하다 보니 인간이 완전히 망가진 거지. 더는 보통 사람처럼 생각하지 못하는 거지.

이십삼 년간 매일같이 경찰관들과 접촉하다 보니, 이제 그는 다른 세상과 제대로 된 관계를 유지할 능력을 잃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에도 솔직히 완벽하게 자유로운 기분은 아니었다. 마음속에 늘 뭔가 찜찜한 것이 있었다. 콜베리가 가족을 이루기까지 아주 오래 기다렸던 건 경찰이 여느 직업과는 다르기 때문이었다. 경찰은 전적으로 헌신해야 하는 일이었다. 한순간도 맘 편히 쉴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비정상적인 상황에 놓인 사람들과 매일 대면하다 보면 결국 자신도 비정상이 되기 마련이었다.

압도적인 다수의 동료들과는 달리 콜베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명료하게 꿰뚫어 보고 분석할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놀랍고 또한 안타깝게도, 그는 또렷한 시각으로 그렇게 했다. 콜베리의 문제는 관능주의자인 동시에 책임감 있는 인간이라는 점이있다. 그럼에도 감수성이나 개인적 관여 따위는 열의 아홉의 경우에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없는 직종에서 일한다는 점이었다.

왜 경찰관은 대체로 다른 경찰관하고만 어울릴까?

그러는 편이 더 쉽기 때문이다. 그래야 시민들과의 거리를 지키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경찰 내부의 기괴한 동료애를 간과하기도 쉬웠고, 실제로 그런 현상이 오랫동안 억제되지 않고 커져만 왔다. 그것은 곧 경찰관들이 자신이 보호해야 하는 사회, 무엇보다 자신도 그 일원이어야 하는 사회로부터 동떨어져서 산다는 뜻이었다.

예를 들면, 경찰관은 다른 경찰관을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예외가 있어도 극소수였다.(205-206p)

 

 

 

ㅡ 마이 셰발, 페르 발뢰, <폴리스, 폴리스, 포타티스모스!> 中, 엘릭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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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5/4

 

 

처남은 말짱한 상태에서는 이렇다 할 특징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취하면 견디기 힘든 사람으로 변했다. 그러나 한 가지 바람직한 면이 있었으니, 원칙적으로 절대 혼자선 마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75p)

 

 

두 사람은 오래 알아온 사이로 수많은 회의에 함께 참석했다. 둘은 좋은 친구였으며, 상대 언어를 얼마나 쉽게 익혔는지를 과장되게 떠벌리곤 했다. 보통의 스칸디나비아인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다소 냉소적으로 덧붙이는 것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이윽고 그 순간이 왔다. 회의나 다른 고위층 모임에서 어울리기를 십여 년, 두 사람은 함마르의 시골 별장에서 주말을 함께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막상 만나고 보니 지극히 간단한 일상 대화마저 나눌 수 없었다. 덴마크인이 지도를 빌려달라고 말하자, 함마르는 자기가 찍힌 사진을 가져왔다. 그걸로 끝이었다. 두 사람의 세계 중 한 부분이 무너졌다. 한심한 오해로 점철된 형식적인 파티를 몇 시간 보낸 뒤 두 사람은 영어로 대화하기 시작했고, 알고 보니 서로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것도 깨달았다.(363-364p)

 

 

ㅡ 마이 셰발, 페르 발뢰, <사라진 소방차> 中, 엘릭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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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27

 

나한테는 역시 별로. 예상했던 딱 그대로라 읽는 재미가 전혀 없다.

아니 에르노는 더 안 읽을 듯.

 

 

 

요즘은 ‘한 남자와 미친 듯한 사랑’을 하고 있다거나 ‘누군가와 아주 깊은 관계’에 빠져 있다거나 혹은 과거에 그랬었다고 숨김없이 고백하는 사람을 보면, 나도 내 마음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고 공감에서 느끼는 행복감이 사라지고 나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었더라도 그렇게 마구 이야기해버린 것을 후회했다. 대화를 나누면서 “맞아요. 나도 그래요. 나도 그런 적이 있어요”하고 남의 말에 맞장구를 치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이런 말들이 내 열정의 실상과는 아무 상관 없는 쓸데없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 알 수 없는 감정 속에서 무언가가 사라져가고 있었다.(21p)

 

 

일상생활에서 가끔 일어나는 귀찮고 짜증스러운 일에도 나는 무덤덤했다. 두 달이 넘도록 계속되는 우편 집배원들의 파업에도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A는 절대로 내게 편지를 보내지 않았으니까.(물론 결혼한 남자로서의 신중함 때문이었다.) 나는 도로가 막히거나 은행 창구가 붐벼도 조용히 기다렸고, 직원들이 불친절해도 화를 내지 않았다. 어떤 일에도 초조해하지 않았다. 또 나는 사람들에 대하여 연민과 고통과 우정이 뒤섞인 묘한 감정을 느꼈다. 일없이 공원 벤치에 누워 있는 사람들, 그리고 통속소설에 정신이 빠져 있는 여자들을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그렇지만 내 안의 무엇이 그 사람들과 닮았는지는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다.)(24-25p)

 

 

이런 이야기들을 숨김없이 털어놓는 것을 나는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글이 씌어지는 때와 그것을 나 혼자서 읽는 때,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읽는 때는 이미 시간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을 터이고, 어쩌면 남들에게 이 글이 읽힐 기회가 절대로 오지 않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남들이 읽게 되기 전에 내가 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전쟁이나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런 시간상의 차이 때문에 나는 마음놓고 솔직하게 이 글을 쓸 수가 있다. 열어섯 살 때 일광욕을 한답시고 하루 종일 몸을 태우고 스무 살 때는 피임도 하지 않은 채 겁 없이 섹스를 즐겼던 것처럼, 나중 일을 미리 두려워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겪은 일을 글로 쓰는 사람을 노출증 환자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노출증이란 같은 시간대에 남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하는 병적인 욕망일 뿐이니까.)(38-39p)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같은 것을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사치가 아닐까.(74p)

 

 

 

ㅡ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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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24

 

 

경찰의 일은 현실주의, 정해진 절차, 집요함, 체계에 바탕을 두고 이뤄진다. 물론 까다로운 사건이 우연히 해결되는 경우가 많긴 하지만, 우연이란 융통성 있는 개념이고 요행이나 운과는 다르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범죄 수사의 성패는 우연의 망을 가급적 촘촘히 짜내는 데 달려 있다. 번득이는 육감보다는 경험과 성실함이 더 많이 기여한다. 명석한 두뇌보다는 좋은 기억력과 건전한 상식이 더 귀한 자질이다.

현실에서 경찰이 하는 일에는 육감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육감은 애초에 자질이라고 볼 수도 없다. 점성술과 골상학을 과학이라고 볼 수 없는 것처럼.(61p)

 

 

만약 당신이 정말로 경찰에 붙잡히고 싶다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경찰관을 죽이는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통하는 진실이고, 스웨덴에서는 특히 더 그랬다. 스웨덴 범죄 역사에는 해결되지 않은 살인 사건이 무수히 많지만 경찰관이 살해된 사건 중에는 미해결 사건이 한 건도 없었다.(88p)

 

 

마르틴 베크의 주머니에 든 보고서에는 새로이 밝혀진 흥미로운 사실이 몇 가지 적혀 있었다. 일례로, 경찰 일이 다른 직종들 보다 더 위험하다는 생각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대부분의 다른 직종들이 경찰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 했다. 건설 노동자나 벌목 노동자의 삶이 경찰관의 삶보다 더 위험하다고 했다. 항만 노동자, 택시 기사, 주부도 그렇다고 했다.

그렇지만 경찰 일이 다른 직업보다 더 위험하고 더 거칠고 봉급도 적다는 건 일반적으로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상식이 아닌가? 아쉽게도 그 질문에는 단순한 대답이 있었다. 물론 그런 고정관념이 퍼져 있지만, 그것은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경찰관들만큼 역할 고착을 심하게 겪지 않고 자신의 일상을 드라마틱하게 과장하지도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은 통계가 엄연히 증명하는 사실이었다. 이를테면, 매년 부상을 입는 경찰관의 수는 경찰에게 학대당하는 사람의 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스톡홀름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가령 뉴욕에서는 매년 평균 7명의 경찰관이 살해되는 데 비해 택시 기사는 한 달에 2명, 주부는 일주일에 1명, 실업자는 하루에 1명씩 살해된다고 했다.

(...)

심지어 어느 스웨덴 연구진은 영국 경찰의 신화를 깨부수는 데 성공하여 그들에 대한 인상을 현실화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무기를 소지하지 않는 영국 경찰이 다른 몇몇 나라의 경찰에 비해 폭력적인 상황을 유발하는 비율이 낮다는 걸 보여준 거였다. 덴마크 당국도 이 사실을 깨달아서, 이제 덴마크 경찰관들은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무기 소지가 허용되었다.

하지만 스톡홀름은 그렇지 않았다.(90-91p)

 

 

마르틴 베크도 내심으로는 이 작업이 무의미해 보인다는 것을 인정했다.

(...)

하지만 마르틴 베크는 오랜 경험을 통해서 자신들이 하는 일은 대부분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았고, 장기적으로는 소득이 있는 작업이라도 처음에는 거의 모두 무의미해 보인다는 것도 알았다.(173p)

 

 

 

ㅡ 마이 셰발, 페르 발뢰, <어느 끔찍한 남자> 中, 엘릭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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