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6/21

 

진짜 '연민' ㅡ그런 게 존재하는지 모르겠으나ㅡ이 아니라  단순히 초조한 마음에 불과한 가짜 '연민'을 지닌 한 사내의 이야기. 재밌게 잘 읽었는데 그를 둘러싼 환경이나 인물이 지나치게 작위적이긴 했다. 

 

 

 

물론, 이 열성적인 지인이 이상하다거나 불쾌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본래 그런 사람이었다. 어린아이가 열심히 우표를 수집하듯 열성적으로 사람들과 친분을 쌓고, 그렇게 해서 구축한 인맥을 그 무엇보다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 사교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 약간 별나긴 하지만 온순하기 그지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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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인생의 유일한 낙은 이따금씩 신문에 오르내리는 이름을 보면서 "이 사람, 내가 잘 아는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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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지인들의 공연은 빠짐없이 찾아가 박수갈채를 보내주고, 생일 이튿날이면 어김없이 축하 전화를 걸어주고, 절대로 남의 생일을 잊는 법이 없었으며, 신문에 난 혹평은 전하지 않는 대신 호평만큼은 진심을 담아 전해주는 사람이었다.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진정성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했고, 누군가가 자신에게 작은 부탁을 하거나 자신의 인맥에 한 사람만 더 늘어나도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처럼 오지랖 넓은 그 지인에 대해서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누구나 이런 부류의 사람을 알고 있고, 거칠게 밀어내지 않고서는 결코 이들의 정성 어린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8p)

 

 

도입부의 한 인물에 대한 이 묘사부터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 자유로운 사람과 감금되어 있는 사람의 관계가 아무런 문제없이 지속되기란 힘든 법이다. 불행한 사람은 쉽게 상처받고, 끊임없이 고통받는 사람은 모든 것을 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쪽은 주기만 하고 한쪽은 받기만 하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가 불편할 수밖에 없듯이, 늘 보호를 받기만 하는 환자는 조금이라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마음에 대해서도 언제나 속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상처받기 쉬운 그녀에게는 때로는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 그녀를 달래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주는 것이었다. 그렇기 떄문에 우리는 그 애매모호한 경계선을 넘지 않도록 언제나 주의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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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해 한 가지를 이해하고 나면 다른 것들도 이해하게 되는 법이다. 한 가지 고통을 진심으로 연민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와 같은 마법의 가르침에 따라 다른 고통도, 심지어는 낯설고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고통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나는 이따금씩 나타나는 에디트의 심술에 현혹되지 않았다.

(...)

병이 장기간 지속되면 환자뿐만 아니라 측은해하는 주위 사람들도 또한 지치게 마련이다. 절실한 감정은 끝없이 지속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에디트의 아버지와 일로나는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이 가엾은 소녀와 함께 가슴 깊이 고통을 나누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지치고 체념한 상태였다.(74-75p)

 

 

처음으로 나는 진정한 관심은 전기 스위치처럼 마음대로 켰다 껐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남의 운명에 관여한 사람은 자신의 자유가 제한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88p)

 

 

나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어요. 낯선 사람이 나를 처음 보고 실제로 어떻게 느끼는지 처음으로 알게 되어서 정말로 기분이 좋았답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언제나 그 거짓 배려로 나를 보호해야 한다고 여기고 심지어 그 빌어먹을 배려가 나를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죠. 내가 장님이라고 생각하나요? 당신들의 잡담과 변명 뒤에도 그 용감하고 솔직한 아주머니가 보여준 혐오스럽고 불편해하는 마음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내가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나요? 내가 목발을 만지는 순간 당신들의 숨이 멎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서둘러 대화를 시도하려 한다는 것을 내가 모를 것 같나요? 언제나 달콤한 말로 나를 진정시키려 한다는 것을 내가 모를 것 같아요? 당신들이 나를 짐슴의 시체처럼 침대에 눕혀놓고 방을 나서면서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내쉴지 나도 잘 알고 있어요. 눈을 위로 치켜뜨고 '저 불쌍한 것!'이라고 하면서 한숨을 짓겠죠. 그러면서 당신들이 한 시간, 두 시간을 '불쌍하고 아픈 아이'를 위해 희생했다는 것에 대해 만족감을 느끼겠죠. 하지만 나는 희생을 바라지 않는다고요! 나는 당신들이 날마다 나를 동정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싫단 말이에요. 연민은 필요 없어요. 그러니 앞으로 연민은 거부하겠어요! 오고 싶으면 오고, 오고 싶지 않으면 오지 마세요! 하지만 군마 심사 같은 엉터리 이야기를 꾸며대지 말고 솔직하게 말하란 말이에요! 나는······ 나는 당신들의 거짓말, 당신들이 그 끔찍한 배려심은 더 이상 못 견디겠어요!(102p)

 

 

부당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은 피해자도 잘못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하는 법입니다. 피해자도 잘못이 있다고 믿으면 양심의 가책이 덜어지기 때문이죠. 하지만 카니츠는 이번 피해자에게서는 조금의 잘못도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피해자는 손이 묶인 채로 그에게 항복했고,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모른 채 푸른 눈동자로 끊임없이 그에게 감사하다는 눈빛을 보내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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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의 곁에 있는 피해자도 불안해하는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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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하지만, 제가 내일 아침 일찍 떠나기 때문에 그 전에 모든 일을 정리하고 싶어서요······ 애써주신 것에 대해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가 수고비로 얼마를 드려야 하는지 알려주시면 고맙겠어요. 저 때문에 시간을 너무 많이 뺏기셨잖아요. 저는 내일 아침 일찍 떠나니까······ 계산을 끝냈으면 해서요."

카니츠는 그 자리에 굳어버린 채 심장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그녀의 말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겁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말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던 거죠. 마치 개에게 화풀이를 하며 마구 때렸는데, 그 개가 엉금엉금 기어와서는 애걸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의 잔인한 손을 핥아줄 때처럼 부끄러운 마음이 밀려왔습니다.

(...)

그는 언제나 모든 일을 치밀하게 계산하고 상대의 반응까지 예상하는 철저한 사람이었는데, 그런 그에게 뜻밖의 일이 벌어진 겁니다. 중개인 시절 그는 사람들이 그의 코앞에서 문을 쾅 닫아버리거나 인산조차 받아주지 않는 경험도 해봤고, 심지어 그가 담당하던 구역에는 피해 다녀야 할 골목들도 몇 곳 있었습니다. 하지만 감사인사를 받아보는 것은 그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그를 철저하게 믿어주는 최초의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던 겁니다.(172-173p)

 

 

나는 마음이 가벼워진 것이 즐거웠고 다른 사람들이 기뻐할 것을 생각하며 행복해했다.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도 모두 행복하다고 생각하게 마련인 것이다.(207-208p)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했는지 너무 적게 했는지 걱정할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내가 필요 이상으로 말을 많이 했다 할지라도 연민에서 비롯된 그 거짓말 때문에 에디트가 행복해하지 않았던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일은 결코 죄나 불의가 될 수 없었다!(216p)

 

 

연민이라는 것은 양날을 가졌답니다. 연민을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거기서 손을 떼고, 특히 마음을 떼야 합니다. 연민은 모르핀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환자에게 도움이 되고 치료도 되지만 그 양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거나 제때 중단하지 않으면 치명적인 독이 됩니다. 처음 몇 번 맞을 때에는 마음이 진정되고 통증도 없애주죠. 그렇지만 우리의 신체나 정신은 모두 놀라울 정도로 적응력이 뛰어나답니다. 신경이 더 많은 양의 모르핀을 찾게 되는 것처럼 감정은 더 많은 연민을 원하게 됩니다. 결국에는 옆에서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을 원하게 되죠. 언젠가는 '안 돼'라고 말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오게 마련입니다. 그 거절 때문에 환자가 처음부터 도와주지 않은 사람보다도 자신을 더 증오하게 될지라도 그렇게 말해야 하는 순간이 반드시 옵니다. 그래요, 소위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연민은 무관심보다도 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

"그렇지만······ 그렇지만 어떻게 절망에 빠진 사람을 그냥 모른 척합니까? 저는 그저······ “

갑자기 콘도어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게 아니에요! 책임감을 느껴야죠! 엄청난 책임감이요! 연민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면, 그건 엄청난 책임이 따르는 일이라고요! 성인이라면 어떤 일에 관여하기 전에 자신이 어디까지 함께 갈 건지부터 먼저 생각해봐야 합니다. 남의 감정을 가지고 장난치면 안 돼죠! 물론 당신이 좋은 의도로 그 사람들을 기쁘게 해준 건 압니다.

(...)

하지만 연민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인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그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합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는 것이 아닌 남의 고통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연민이란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연민을 말합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갈 수 있는 사람만이, 비참한 최후까지 함께 갈 수 있는 끈기 있는 사람만이 남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235-236p)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는 사람이다. 자신이 상대의 열정을 통제할 수 없을뿐더러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지가 있다 할지라도 자신을 탐하는 상대의 욕망 앞에서는 그 의지조차 무기력해지는 법이다.(282p)

 

 

우리가 내리는 결정은 생각 이상으로 상황과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것은 생각의 상당한 부분이 이미 오래전에 새겨진 인상과 오래전에 받은 영향을 그저 자동적으로 작동시켜나가는 역할만을 하기 때문이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규율을 통해 군인으로 성장한 사람은 명령에 거역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끼게 된다. 그에게 군령은 논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힘, 자신의 의지를 없애버리는 힘을 의미한다. 군복만 입고 있으면 그는 명령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몽유병자처럼 아무런 저항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명령을 따르게 된다.(440p)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서 다시 살아가기 시작했다. 나의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나 자신도 내 죄를 잊었다. 사람의 마음에는 절실하게 잊고자 하는 일은 쉽게 잊을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나는 내 죄를 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딱 한 번 옛 기억을 떠올리는 일이 있었다.

(...)

그러나 그날 이후로 나는 양심이 기억하는 한 그 어떤 죄도 잊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461-463p)

 

 

 

ㅡ 슈테판 츠바이크, <초조한 마음> 中,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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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5/8

 

 

맡겨진 소녀보다는 좋았지만 여전히 잘 모르겠다.

 

 

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ㅡ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버터와 설탕을 섞어 크림을 만들면서도 펄롱의 생각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일요일, 아내와 딸들과 함께 있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내일, 그리고 누구한테 받을 돈이 얼마인지, 주문받은 물건을 언제 어떻게 배달할지, 누구한테 무슨 일을 맡길지, 받을 돈을 어디에서 어떻게 받을지에 닿아 있었다. 내일이 저물 때도 생각이 비슷하게 흘러가면서 또다시 다음 날 일에 골몰하리란 걸 펄롱은 알았다.(29p)

 

 

좋은 사람들이 있지, 펄롱은 차를 몰고 시내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주고받는 것을 적절하게 맞추어 균형 잡을 줄 알아야 집 안에서나 밖에서나 사람들하고 잘 지낼 수 있단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특권임을 알았고 왜 어떤 집에서 받은 사탕 따위 선물을 다른 더 가난한 집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늘 그러듯 크리스마스는 사람들한테서 가장 좋은 면과 가장 나쁜 면 둘 다를 끌어냈다.(102-103p)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ㅡ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120-121p)

 

 

 

 

ㅡ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中,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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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27

 

 

 

내 트위터는 끔찍했다. 물론 트위터 전반이 끔찍하긴 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2014년 후반부에 누군가 트위터에 있는 모든 걸 끔찍하게 만드는 버그를 풀어버린 것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트위터 덕분에 많이 웃었는데’하고 한탄했다. 더 이상 트위터로 웃을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때 트위터에는 웃기고 흥미로운 트윗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지루하고 끔찍한 헛소리밖에 없었다.

(...)

예민하고도 뚱했던 10대 시절 내게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가 트위터였다. 나는 진심으로 트위터가 특별하고 또 선하다고 믿었는데, 이제는 진실이 내 앞에 드러나 있었다. 트위터는 기생충 같은 떠버리들로 바글거리는 소름 끼치는 지옥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아닌 군주가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으며 오직 파괴하고 해체하고 불평하고 화내고...(24-25p)

 

 

삶은 현재형 시제로 살면서 미래를 곁눈질하는 동시에 과거형으로 해석하는 것이었음에도 일인칭 시점이란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여기서 문학과 삶의 핵심적인 차이가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독자가 평소 자신의 고뇌 어린 일인칭 시선에서 벗어나 또 다른 일인칭 의식에 이입할 수 있었다. 실제 삶의 일인칭 시선을 규정하는 요소들은 제거되고, 의심과 결단을 반복하는 실질적 일인칭 의식은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러고 나서 일시적으로나마 소설이라는 다른 일인칭 시점에 이입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부엌 식탁에 앉아 만약 삶에서의 일인칭 시점을 특징짓는 요소가 고뇌이며 그것이 일인칭 소설을 읽을 때 제거되고 만다면, 소설에는 근본적으로 일인칭적인 요소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얼굴을 만지며 생각했다. 그런 의미로 ‘문학에서 일인칭이란 근본적으로는 삼인칭이지 않은가’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내 소설의 두 버전은 서로 같다고 말이다.(103p)

 

 

나는 늘 사람들이 생각과 행동을 나란히 진행하거나, 혹은 그 둘이 우연히 연결되는 방식으로 자기 행동을 제어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러기는 불가능했다. 우리는 불가해한 경험을 한 뒤 최선을 다해 언어와 이미지를 이용하여 그 경험을 자신에게 설명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다음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으려 애쓰듯 우리의 마음을 읽는 것이었다. 우리는 생각한 다음 행동하지 않는다. 생각과 행동의 관계가 결코 직선적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인간은 총체적으로 행동하는데ㅡ그중 오직 일부분만이 의식적인 생각이다ㅡ, 이때 해석이라는 행위를 하려면 사람은 스스로를 관찰해야만 했다.(108p)

 

 

 

ㅡ 조던 카스트로, <노블리스트> 中, 어반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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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2/25

 

화제의 책을 읽었다. 감상은 글쎄 이걸 뭘 이렇게나 좋아하는지... 그래도 짧으니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읽어봐야지.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28p)

 

 

ㅡ 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 中,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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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2/8

 

총 열 권의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마무리. 시리즈가 이어질수록 함께 일하는 유능한 동료들과의 착착 맞아떨어지는 협업이 돋보였다. 시리즈의 시작이었던 ‘로재나’를 다시 읽어보면 느낌이 어떨지 궁금하다.

 

 

 

 

“와줘서 고맙습니다.” 브락센이 말했다. “이런 일에 와줄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생각을 알 것 같았습니다.” 마르틴 베크가 말했다.

“그게 문제죠.” 브락센이 말했다. “남의 생각을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걸 지지하고 나서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91p)

 

 

 

ㅡ 마이 셰발, 페르 발뢰, <테러리스트> 中, 엘릭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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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4

 

 

나는 종이책을 증오한다. ‘눈이 보이고, 책을 들 수 있고, 책장을 넘길 수 있고, 독서 자세를 유지할 수 있고, 서점에 자유롭게 사러 다닐 수 있어야 한다’라는 다섯 가지의 건강성을 요구하는 독서 문화의 마치스모를 증오한다. 그 특권성을 깨닫지 못하는 이른바 ‘서책 애호가’들의 무지한 오만함을 증오한다.

(...)

짜증이나 멸시라는 건 너무 멀리 동떨어진 것에는 던지지 않는 법이다.

내가 종이책에서 느끼는 증오도 그렇다. 운동 능력이 없는 내 몸이 아무리 소외를 당하더라도 공원 철봉이나 정글짐에 증오감을 품지는 않는다.

(...)

종이책 한 권을 읽을 때마다 서서히 등뼈가 찌부러지는 것만 같은데도, ‘종이 냄새가 좋다, 책장을 넘기는 감촉이 좋다’라는 등의 말씀을 하시면서 전자서적을 깎아내리는 비장애인은 근심 걱정이 없어서 얼마나 좋으실까.

(...)

‘종이 냄새가’, ‘책장을 넘기는 감촉이’, ‘왼손에서 점점 줄어드는 남은 페이지의 긴장감이’라고 문화적 향기 넘치는 표현을 줄줄 내치비기만 하면 되는 비장애인은 아무 근심 걱정이 없어서 얼마나 좋으실까.(37-46p)

 

 

 

ㅡ 이치카와 사오, <헌치백> 中, 허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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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0

 

 

“사람이 원한 것이 곧 그의 운명이고, 운명은 곧 그 사람이 원한 것이랍니다. 당신은 곰스크로 가는 걸 포기했고 여기 이 작은 마을에 눌러앉아 부인과 아이와 정원이 딸린 조그만 집을 얻었어요. 그것이 당신이 원한 것이지요. 당신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면, 기차가 이곳에서 정차했던 바로 그때 당신은 내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기차를 놓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 모든 순간마다 당신은 당신의 운명을 선택한 것이지요.”

“그건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의미없는 삶이 아니에요. 당신은 아직 그걸 몰라요. 당신은 이것이 당신의 운명이라는 생각에 맞서 들고 일어나죠. 나도 오랫동안 그렇게 반항했어요. 하지만 이제 알지요. 내가 원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이후에는 만족하게 되었어요.”

(...)

나는 곰스크로 갈 때를 대비해 항상 돈을 저축했다. 일이년 후에 아이가 좀더 자라면 출발하려고 했다. 적당한 일자리를 구하는 동안 배를 곯지 않을 정도의 돈도 충분히 모았다. 물론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우리의 둘째가, 이번에는 여자아이가 태어나자 내 계획은 좀더 뒤로 밀려났다.

(...)

오늘까지도 여전히 그것은 나를 사로잡는다.(59-62)

 

 

 

ㅡ 프리츠 오르트만, <곰스크로 가는 기차> 中, 북인더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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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

 

 

올해 노벨상 수상 작가의 작품 성향이 딱 봐도 내가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아 보여서 읽지 않으려다가 마침 모임 책으로 선정되어 읽어보았다.

아침과 저녁의 순환을 인간의 삶과 죽음으로 빗대며 담담하고도 차분하게 풀어나가는 짧은 소설이었다. 크게 재밌다거나 와닿지는 않았다. 저자의 다른 소설인 멜랑콜리아는 안 읽어도 되겠다. 영화 멜랑콜리아는 정말 재밌는데...

 

 

 

ㅡ 욘 포세, <아침 그리고 저녁>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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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4

 

하루키 신간 읽고 나서 뭔가 허전해서 옛날 작품 중 한 권과 비교하며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알아봤다. 데미안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감상과 비슷한 느낌이 이 책에 들었다. 어떤 책은 특정한 시기에 읽는 것이, 아니, 오직 특정 시기의 독서에서‘만’ 영향을 발휘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나는 항상 가벼운 혼란에 휩싸인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명제에 따라다니는 고전적인 패러독스에 발목을 붙잡히기 때문이다. 즉, 순수한 정보량을 두고 말한다면 나 이상으로 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내가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 거기에서 설명되는 나는 필연적으로 그 설명을 하는 나에 의해(그 가치관이나 감각의 척도, 관찰자로서의 능력, 여러 가지 현실적 이해 관계에 의해) 취사 선택된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설명되는 ‘나’의 모습에 어느 정도의 객관적 진실이 있을까? 나는 그 점이 늘 마음에 걸린다. 아니, 예전부터 일관성 있게 마음에 걸렸던 문제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공포나 불안을 거의 느끼지 않는 듯하다. 사람들은 기회가 있으면 놀라울 정도로 솔직한 표현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하려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나는 바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정직하고 개방적인 사람입니다.”

“나는 쉽게 상처받기 때문에 사람들과 유대 관계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상대의 마음을 간파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하지만 나는, 쉽게 상처받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히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다. 정직하고 개방적인 사람이 자기는 깨닫지 못하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변명과 거짓말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사람의 마음을 간파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교언영색에 너무나 쉽게 속아넘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런 점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만약 그럴 필요가 있을 경우라 해도)보류하고 싶어진다.(79p)

 

 

나는 그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멋진 여행의 동반자이지만 결국 각자의 궤도를 그리는 고독한 금속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것은 멀리서 보면 유성처럼 아름답지만 실제로는 각자 그 틀 안에 갇힌 채 그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죄인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두 개의 위성이 그려 내는 궤도가 우연히 겹쳐질 때 우리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볼 수 있죠. 또는 마음을 합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잠깐, 다음 순간에는 다시 절대적인 고독의 틀 안에 갇히게 되는 거예요. 언젠가 완전히 연소되어 제로가 될 때까지 말이에요.(161-162p)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물의 이면에는 우리가 모르는 사항이 거의 같은 비율로 감추어져 있으니까.

 

이해는 항상 오해의 전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여기에서의 이야기지만) 내가 세계를 인식하는 작은 방법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은 사실 샴쌍둥이처럼 숙명적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혼돈으로서 존재한다. 혼돈, 혼돈.

대체 누가 바다와, 바다가 반영시키는 그림자를 구분할 수 있을까? 또는 비와 외로움을 구분할 수 있을까?(182p)

 

 

 

ㅡ 무라카미 하루키, <스푸트니크의 연인> 中, 자유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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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8

 

장편은 7년 만에 읽는 듯.

 

 

 

“뭐가 있었냐고? 아아, 그걸 설명할 수 있다면 오죽 좋겠나.”

(...)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ㅡ거기 있던 게 결코 사람이 봐서는 안 되는 세계의 광경이었다는 걸세. 그러나 한편으로는 누구나 자기 안에 품고 있는 세계이기도 하지. 내 안에도 있고, 자네 안에도 있어. 그럼에도 역시, 사람이 봐서는 안 되는 광경이라네. 그렇기에 우리는 태반이 눈을 감은 채로 인생을 보내는 셈이고.”

(...)

“이해하겠나? 그걸 보면, 사람은 두 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해. 일단 눈으로 보면····· 자네도 모쪼록 조심하게나.”102p)

 

 

매일 먹을 음식을 직접 만들고, 헬스장에 가서 건강을 챙기고, 일상을 청결히 유지하고, 남은 시간에는 책을 읽는다. 독신 생활에는 규칙성을 중시하는 것이 제일이다ㅡ규칙성과 단조로움 사이에 선을 긋기가 가끔 어렵다 해도.

주위에는 내 생활이 자유롭고 속 편하게 비쳤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나는 그 자유를, 일상의 평온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라는 인간이 어찌어찌 감당할 수 있는 유의 삶이지, 다른 이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삶이었을 것이다. 너무 단조롭고, 너무 고요하고, 무엇보다 고독했으므로.(193-194p)

 

 

“나는 내 그림자가 아무래도 신경쓰여. 특히 최근 들어서. 자기 그림자에 대해 인간으로서 져야 할 책임 같은 걸 느끼지 않을 수가 없어. 과연 나는 내 그림자를 지금껏 정당하게, 공정하게 대해왔을지.”(247p)

 

 

“기다리는 것엔 익숙해”라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내뱉는 숨이 딱딱한 물음표가 되어 허공에 하얗게 떠오른다.

나는 기다리는 것에 익숙한 게 아니라, 그저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런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았던 게 아닐까?

게다가 애당초 나는 지금껏 대체 무엇을 기다려왔다는 건가?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정확히 알고나 있었을까?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명확해지기를 그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게 전부인 건 아닐까? 나무상자 하나에 들어간 더 작은 나무상자, 그 나무상자에 들어간 더 작은 상자. 끝없이 정묘하게 이어지는 세공품, 상자는 점점 작아진다ㅡ그리고 또한 그안에 담겨 있을 것도. 그것이야말로 내가 지금껏 사십몇 년을 살아온 인생의 실상이 아닐까?(681p)

 

 

“어느 쪽이 본체고 어느 쪽이 그림자냐 하는 건 큰 문제가 아니라고?”

“그렇습니다. 그림자와 본체는 아마 서로 교체되기도 할 겁니다. 역할을 교환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본체가 됐건 그림자가 됐건, 당신은 당신입니다. 그 사실은 틀림이 없어요. 어느 쪽이 본체고 어느 쪽이 그림자인가를 따지기보다, 각자 서로의 소중한 분신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오히려 맞을지도 몰라요.”(751-752p)

 

 

 

 

ㅡ 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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