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4

 

대단한 하루키 열풍에도 불구하고 하루키통이 아니라 몇 권의 소설과 몇 권의 에세이를 읽은 게 다다. 인상적인 구절들이 있지만 대단한 사유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거나 이런 건 아니다. 이건 하루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루키는 그런 작가가 아니다. 오히려 내가 하루키에게 감탄하는 점은 성실성이다. 다른 예술 분야에서 이런 성실성을 보여주는 사람으로 바로 떠오르는 사람은 우디 앨런이 있다. 이들은 짧지만 빛나는 전성기에 뛰어난 작품을 남기고 금방 사그라드는 것이 아니라 전성기에는 못 미칠지라도 오랜 세월동안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한다. 이게 그들이 일하는 방식이다. 그러기 위해서 하루키는 담배를 끊고, 일찍 자고, 달리기를 한다. 그럼 우디 앨런은? 에스콰이어와의 인터뷰에서 우디 앨런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A corned-beef sandwich would be sensational, or one of those big, fat frankfurters, you know, with the mustard. But I don't eat any of that stuff. I haven't had a frankfurter in, I would say, forty-five years. I don't eat enjoyable foods. I eat for my health.” 이것만 봐도 이 양반이 어떻게 살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성실함이 작품의 완성도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일을 위해 이렇게나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한편 달리기를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잠깐이나마 생겼는데 겨울이라서 쏙 들어갔다.

 

 

그래서 나는 달리기를 주위의 누군가에게 권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달리는 것은 근사한 것이니까 모두 함께 달립시다.” 같은 말은 되도록 입에 담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 만약 긴 거리를 달리는 것에 흥미가 있다면, 그냥 놔둬도 그 사람은 언젠가 스스로 달리기 시작할 것이고, 흥미가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권한다고 해도 허사일 것이다.(73~74p)

 

 

무라카미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문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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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9/23

 

 

기계의 생산력으로 인류에게 혜택을 준 발전된 경제 조직이 여가를 파격적으로 증대시키는 것으로 이어져야 마땅하지만 여가가 많아지면 상당한 지적 활동과 관심사들을 보유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루해하기 십상이다. 여가를 가진 인구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교육받은 인구이며, 또한 그 교육은 직접적 유용성을 가진 과학기술적 지식뿐 아니라 정신적 기쁨도 목표로 했음이 틀림없다.(45p)

 

이런 단락을 보면 단순히 여가시간이 주어진다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은퇴 후 넘치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서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괜히 노년기에 우울증이 찾아오는 게 아니다. 러셀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꼭 교육을 통해서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하며 보낼지 충분한 고민과 숙고가 필요한 걸로 보인다.

 


숙고하는 습관의 이점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가장 심오한 것에 이르기까지에 폭넓게 걸쳐 있다. 우선 벼룩 때문에 괴롭다든지, 기차를 놓쳤다든지, 함께 사업을 하는데 걸핏하면 싸움이 일어난다든지 하는 작은 번민들부터 생각해 보자. 이런 고민거리들은 영웅적 행위의 뛰어남이나 모든 인간적 불행의 덧없음에 비하면 별로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들로 보이기 쉽다. 그렇지만 바로 그런 일들에서 생겨나는 짜증들이 많은 사람의 좋은 성격과 즐거운 인생을 망쳐 놓는 것이다.

그럴 경우, 그 순간의 문젯거리와 약간의 연관이 있을 뿐인 동떨어진 지식(실제로 연관이 있든 그렇게 생각한 것이든 간에)에서 의외로 큰 위안을 받을 수 있다. 설사 그 문제와 아무 연관이 없는 지식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현재의 골칫거리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는 데는 큰 도움이 된다.

격분해서 안색이 하얗게 된 사람이 마구 공격해 올 때는, 데카르트의 열정에 관한 논문에 나오는, ‘분노로 안색이 하얘지는 사람이 안색이 빨개지는 사람보다 두려움을 더 많이 타는 이유란 제목의 장을 돌이켜보면 즐거워질 것이다.(48~49p)

 

숙고하는 습관의 이점에 대한 러셀의 위트 있는 문장

 


죽음이 떠오르면 다소 금욕주의적인 태도로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다. 다시 말해 죽음의 중요성을 최소화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것을 초월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냉정하게 사고해야 한다.

이런 원칙은 다른 공포감도 마찬가지다. , 공포를 일으키는 대상을 단호하게 주시하는 것이 유일한 처치법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래, 좋아. 그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지?”

사람들은 전쟁터에서 죽음에 직면했을 때 이런 방법으로 대처한다. 그렇게 하고 나면 자신들이 생명을 바치려 하는 명분이나 자신이 아끼는 사람의 중요성이 확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느끼는 방법은 어느 경우에든 바람직하다.(87p)

 

이런 식의 생각은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러셀이 언급하는 것처럼 단지 죽음의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힘든 스트레스 상황이나 공포를 일으키는 대상에 대해 그래, 좆도 이게 뭐라고'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는 것. 만사가 이런 식이면 곤란하겠지만.

 


과거에는 훈육의 개념이 대단히 무시무시해서 교육이 잔인한 충동의 통로가 되었다. 아이에게 고통을 주면서 쾌감을 느끼는 일이 없이 최소한의 징벌을 내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물론 옛 관습에 젖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런 쾌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부인할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회초리로 후려치며 다음과 같이 말했던 일화는 누구나 알 것이다.

얘야, 맞는 너보다 때리는 내 마음이 더 아프단다.”

그러자 아들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아버지. 제가 대신 아버지를 매질하게 해주시겠어요?”(237p)

 

 

인생에서 만나는 고통스런 일에 대한 지식을 아이들에게 숨기려 해서도 안 되고 강요해서도 안 된다. 상황이 불가피할 때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고통스런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땐, 있는 그대로 감정을 넣지 말고 얘기해야 한다. 단 가정에서 누군가 죽었을 경우엔 예외다. 이때 슬픔을 감추려드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어른들은 슬픔 속에서도 쾌활한 용기를 보여 주어야 하며 그것을 보고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배워나갈 것이다.

청년기에는 사사롭지 않은 많은 관심사들이 젊은이들 앞에 제시되어야 하며 자기 외부의 목적을 위해 사는 삶이 있다는 것을(드러내놓고 훈계하는 방법이 아닌 암시의 방법으로)깨쳐 주어야 한다. 불행이 닥쳤을 땐 아직도 살아야 할 이유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그것을 견뎌내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일어나지도 않은 불행에 깊이 파고들게 두어선 안 된다. 설사 그것이 불행에 맞설 준비를 하기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젊은이들을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혹시 자신이 교육에 필요한 훈육적 요소들로부터 가학적 쾌감을 느끼고 있지나 않은지 스스로를 엄밀하게 감시해야 한다. 훈육의 동기는 항상 품성이나 지성의 발달에 두어야 한다. 지성에도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훈련 없이는 결코 정확함을 얻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성의 훈련은 좀 성격이 다른 문제여서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난다.

이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훈육은 내적 충동에서 솟아나올 때가 가장 좋다는 얘기다. 그러기 위해선 아이나 청년에게 어려운 무엇인가를 달성하고자 하는 야심이 있어야 하고 그 목적을 위해 노력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와 같은 야심은 흔히 주변의 누군가로부터 제의받는 수가 많다. 결국 자기 단련조차도 교육적 자극에 의해 좌우된다는 얘기다.(239~240p)

 

 


버트란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 사회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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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26

 

 

왜 사냐고 묻는 것이 뜬구름 잡는 소리라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묻는 것이 제대로 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 그렇다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할까?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저자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중에서도 책의 제목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후자에 대해 더 초점을 맞춘다. 전자에 대해서는 버트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 조지 베일런트의 행복의 조건같은 책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인간은 모두 한 번은 죽는다. 나의 부모님도 죽고, 나의 친구들도 죽을 것이며, 물론 나 역시 죽을 것이다. 슬프게도 이 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디 앨런은 이런 말을 했다. “we're just temporary people with a very short time in a universe that will eventually be completely gone. And everything that you value, whether it's Shakespeare, Beethoven, da Vinci, or whatever, will be gone. The earth will be gone. The sun will be gone. There'll be nothing.”

 

사람들은 성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것 만큼이나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조차 두려워하고 싫어한다. 자기에게는 벌어지지 않을 일인 것처럼 부정하는 것이다. 상담기법 중에 직면이라는 기법이 있다. 내담자로 하여금 지금까지 직면하기를 거부해 왔던 자신의 감정, 경험 그리고 행동의 영역들을 탐색하도록 돕는 것이다. 정확히 같은 용례는 아니겠지만 이 책을 통해 죽음을 거부하지 않고 직면함으로써 인간답게 죽는 것에 대해 알 수 있었고,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할까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몸의 쇠락은 넝쿨이 자라는 것처럼 진행된다. 하루하루 지내면서는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대로 적응해 가며 산다. 그러다가 뭔가 일이 벌어지면 모든 게 예전 같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73p)

 

운이 좋고 꼼꼼하게 자기 관리건강한 식습관, 운동, 혈압 조절, 필요할 때 의학의 도움을 적절히 받는 것를 한 사람은 오랫동안 그럭저럭 잘 살아 나갈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나이가 들면서 점점 많은 것들을 잃어 가다 보면 일상적인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충족하기에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버거운 상태에 이르게 된다.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는 경우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우리 대부분은 삶의 상당 기간을 독립적으로 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쇠약해진 상태로 보내게 될 것이다.

언젠가 벌어질 일임에도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기를 싫어한다. 그 결과 대부분 아무런 준비 없이 그 단계에 도달한다.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어떻게 살 것인지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지내다가 뭔가 해 보기에는 너무 늦은 시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94~95p)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어 하는지는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가설이다. 젊고 건강할 때는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믿는다. 가지고 있는 기능과 능력을 잃을까 봐 걱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세상은 네 손 안에 있다.” “마음만 먹으면 못 해낼 일이 없다.” 젊은이들은 현재의 즐거움을 기꺼이 뒤로 미룬다. 이를테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기술과 자원을 얻는 데 몇 년이고 시간을 투자하는 것이다. 그들은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더 큰 물결에 연결되고 싶어 한다.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친구를 비롯한 사회적 관계를 넓히는 일에 더 몰두한다.(...)그러나 삶의 사야가 축소되어 눈앞의 미래가 불확실하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삶의 초점은 지금, 여기로 변화하게 된다. 일상의 기쁨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로 옮겨 가게 되는 것이다.(155~156p)

 

스스로는 자율권을 원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안전하길 바라는 게 인간이라는 거예요.” 바로 이 점이 노쇠한 사람들에게 가장 크고 역설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가 애정을 가진 사람에게 바라는 일들 중에는 정작 자신은 단호히 거부하는 것들이 많다는 거죠. 자아감을 침해하는 일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에요.”(168p)

일반적인 의료 행위와 호스피스 케어의 차이점은 치료하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에 있는 게 아니라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있다는 것이었다. 보통의 의료 행위는 생명 연장에 목적을 두고 있다. 지금 당장은 수술, 화학요법, 중환자실 입원 등으로 삶의 질을 희생하게 되더라도 시간을 좀 더 벌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한다. 호스피스 케어는 간호사, 의사, 성직자, 사회복지사 등을 동원해서 치명적인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현재의 삶을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돕는다.(248p)

 

이것이 바로 수백만 번 반복되는 현대의 비극이다. 우리가 풀 수 있는 생명의 실타래가 정확히 얼마나 남았는지를 알 길이 없는 상황이라면, 그리고 실제보다 더 많이 남아 있다고 상상한다면 우리는 싸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혈관에 화학약품을 투여하고, 목구멍에 관을 삽입하고, 살에 수술로 꿰맨 자국을 가진 채 죽어 가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더 단축시키고, 삶의 질을 악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는 의사들이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말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사들에게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효과가 밝혀지지 않은 독성 약품을 줄 수도 있고, 종양 일부를 제거하는 수술을 할 수도 있고, 환자가 먹지 못하면 영양 공급관을 삽입할 수도 있다. 언제나 무언가 할 일은 있다. 우리는 선택 가능성이 주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이 스스로 선택하고 싶어 한다는 걸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우리는 대부분 아무 선택도 하지 않는다. 자동 모드를 켜고 그 뒤에 숨어 버리는 것이다.(266p)

 

그러나 선택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삶 자체가 끊임없이 밀어닥치는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을 하나 하고 돌아서자마자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할 상황이 생기는 것이다.(327p)

 

 

 

아툴 가완디, <어떻게 죽을 것인가> , 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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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21

 

 

경마가 없는 날. 정상이라는 느낌이 드는 게 묘하다. 헤밍웨이에게 투우가 필요했던 까닭을 난 안다. 그에게 투우는 삶이라는 그림을 끼울 액자 같은 것으로, 자기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를 일깨워주었으리라. 때때로 그걸 우린 잊어버린다. 기름 값을 지불하고 엔진오일을 교환하는 등등에 정신이 팔려서. 대다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준비가 없다, 제 자신의 죽음이건 남의 죽음이건. 사람들에게 죽음은 충격이고 공포다. 뜻밖의 엄청난 사건 같다. 염병, 어디 그래서 되겠나. 난 죽음을 왼쪽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때때로 꺼내서 말을 건다, “이봐, 자기, 어찌 지내? 언제 날 데리러 올 거야? 준비하고 있을게.”

꽃이 피어나는 것이 애도할 일이 아니듯, 죽음도 애도할 일이 아니다. 끔찍한 건 죽음이 아니라 인간들이 죽기까지 살아가는 삶, 또는 살아보지 못하는 삶이다.(17p)

 


암만 컴퓨터라고 해도, 제아무리 많은 정보를 입력해도, 우승마를 점칠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의 제안을 듣는 대가로 돈을 낼 때마다, 우린 손해를 보게 된다. ‘어떤 사람엔 상담 정신과 의사나 심리학자, 중개인, 강습회 강사 등등도 다 포함된다.

실패 뒤 자신을 추슬러 움직여나가는 것보다 더 큰 가르침을 주는 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 두려움에 시달린다. 사람들은 실패를 너무 두려워한 나머지 실패하고 만다. 그들은 너무 길들여졌고, 뭘 할 건지 지시받는 데 너무 익숙하다. 그게 가족에서 시작해서 학교를 거쳐 사회생활로 이어진다.(71p)

 


젊었을 땐 나았다. 아직 뭔가를 찾고 있었으니까. 난 밤거리를 어슬렁대며 찾고 또 찾고...사람들과 어울리고, 쌈박질하고, 또 찾았다...아무것도 찾아내진 못했다. 그러나 그 전체적인 광경, 그 아무것도 없음이 날 그다지 압도하진 않았다. 친구를 제대로 찾지도 못했다. 여자로 말하자면, 새 여자를 사귈 때마다 희망을 품었지만, 그것도 풋내기때만 그랬다. 일찍부터도 난 사정을 알아채고, ‘꿈의 아가씨찾기를 그만뒀다. 그저 악몽 같은 여자만 아니길 바랐다.(163~164p)

 


사람들에겐 그런 게기득권 세력에 대한 반대, 부모에 대한 반대, 이런저런 것에 대한 반대가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성공한 백만장자 록그룹은 그들이 뭐라 말하든, 그들 자신이 기득권 세력이다.(165p)

 

 


찰스 부카우스키,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 모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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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1

“표를 사려고 기다리시는 중인가요?”
나는 “아니요, 그냥 줄을 더 길게 만들려고 여기 서 있답니다”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물론 “그런데요”라고만 대답했다.(94p)

지난 한 주 동안 나는 멍청하게 집안을 돌아다니며 농구공이나 큰아이가 달리기 대회에서 탄 트로피, 오래 전의 명절 때 찍은 사진 등을 쳐다보는, 그리고 그 물건들을 통해 의미 없이 흘려보낸 시간들을 생각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가장 나를 힘들게 한 것은 아들이 여기 없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예전의 그 아이도 영영 가고 없다는 갑작스런 깨달음이었다. 아들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나는 무슨 일이든 할 것이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삶은 계속되며, 아이들을 자라서 집을 떠나기 마련이다. 아직 이것을 모르시는 분이 있다면 내 말을 믿으시기 바란다. 아이들이 집을 떠날 날은 여러분이 상상했던 것보다 빨리 온다.(151p)

ㅡ 빌 브라이슨, <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학> 中,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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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7/24

어디선가 이탈리아에 움베르토 에코가, 미국에는 빌 브라이슨이, 일본에는 츠지야 켄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흥미가 일어 읽었다. 읽고 난 생각은 저 얘기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시답지 않은 에세이를 재미있게 읽은 거로 됐다.

 


환자는 병원에 가는 것만으로도 불안해서 가슴이 벅차게 된다. 마치 아내가 “말할 게 있다.”며 곁으로 다가오는 것 같은 심정이다.
의사 앞에 다가갈 때에는 아내가 “거기에 앉아.”라고 할 때처럼 불안과 긴장감이 고조된다.(99p)
...
더 이해할 수 없는 명령문도 있다. 위독한 상태에 있는데 ‘죽지마!’,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살아 있어 줘!’라고 부탁 받는다거나 출산을 앞두고 있는데 ‘이번에는 딸을 낳아 줘!’하고 명령받았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를 것이다. 말도 모르는 갓난아이에게까지 ‘자라. 착한 아기야!’하고 명령하고 있다.(108p)

실패를 피할 수 없는 이상 실패를 직시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린이 교육부터 고쳐야 할 필요가 있다. 어린이는 매일 부모나 선생님으로부터 ‘이거 해라.’, ‘이런 인간이 되어라.’는 말을 듣고 있다.(나는 지금까지도 듣고 있다.) 그 내용도 ‘게임을 하지 마라.’, ‘손수건을 잊어버리지 마라.’, ‘거짓말을 하지 마라.’ 등 어른이라도 이룰 수 없는 목표뿐인 것이다.
목표를 나타내는 것은 좋지만 목표를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고 인간은 결점투성이라는 것도 가르쳐야만 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린이는 어려운 문제에 자신감을 잃고 거짓말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개의 부모나 교사는 완벽한 인간을 연출하고자 한다. 10년 동안 스포츠센터에 다니면서 체중을 200g도 줄이지 못하는 여자가 ‘결정한 것은 꼭 끝까지 해내세요.’하고 어린이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이걸로 봐서는 어린이가 신뢰를 버리지 않고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이다.(다음의 남동생과 그 아들의 대화를 참조. “링컨은 네 나이 때에 10마일정도나 되는 길을 걸어서 학교에 다니고, 장작을 패고, 촛불로 공부를 했었단다.”, “케네디는 아빠 나이 때에 벌써 대통령이었어.”)
오히려 나는 부모나 교사가 자기의 결점이나 실패를 여러 사람에게 보이고 주변 사람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보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른이라도 실패할 수 있고, 결점이 고쳐지기 쉽지 않다는 현실을 가르치는 것이다.(165p)

어쨌든 낫또를 좋아한다. 특히 겨자소스랑 날계란을 넣어서 뒤섞고, 그것을 따뜻한 밥에 섞지 않고 밥만 먹는 것을 좋아한다. 또 낫또에 된장과 새순을 무쳐, 딸기 얹힌 쇼트케이크에 두껍게 바른 것을 다른 사람이 먹는 것을 더 좋아한다. 게다가 그 낫또가 든 쇼트케이크를 먹고 있는 사람한테 멀리 떨어져서 비프스테이크를 먹는 것을 더욱 좋아한다.(198p)

 


ㅡ 츠지야 켄지, <홍차를 주문하는 방법> 中, 토담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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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7/22

읽음

ㅡ 기타노 다케시, <다케시의 낙서 입문>, 세미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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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7/15

정치적 올바름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듯이 쾌남의 자세로 솔직하게 지르는 글쓰기가 일품이다. 역자가 후기에서 말하듯이 어느 누구의 심기도 불편하게 하지 않으려고 아무런 정치적 입장도 견해도 없이 쓴 글이라는 게 과연 가능하기나 하며, 그런 글이 있다고 한들 과연 글 읽는 즐거움을 줄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미국의 스탠드업 코미디만 봐도 기함하며 쓰러질 것이다. 본디 유머란 누구나 풍자와 희화화의 대상이 될 수 있고 희화화는 원래 'fair'하지 않다.

진지하게 생각하지 말자. 이 글은 여행기라기보다는 코미디다. 유럽 여행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얻으려고 이 책을 집어 들었다면 얼른 내려놓고 다른 책을 찾아보는 게 옳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에서 유럽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었...고 카프리 같은 경우는 꼭 가보고 싶기도 하다.

움베르토 에코는 워낙 글을 화려하게 쓰고 곳곳에 인문학적인 레퍼런스와 비유가 많지만, 빌 브라이슨은 아주 쉽게 쓴다. 빌 브라이슨의 대표적인 대중교양서인 ‘거의 모든 것의 역사’외에도 여행기를 빙자한 ‘투덜 에세이’들이 생각보다 많이 출간되어 있으므로(절판이 많아서 빌려 읽어야 하겠지만) 더 읽어봐야겠다.

함메르페스트는 준비 운동치고는 다소 오래 걸린 감이 있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할 참이다.(나에게 본격적인 여행이란 한곳에 오래 머무르는 게 아니라 이동하는 여행을 말한다.) 나는 돌아다니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다. 유럽 전역을 떠돌아다니면서 영국에는 도저히 들어오지 않을 영화의 포스터도 구경하고 움라우트(독일어의 특수 기호)와 세디유(대개 c 밑에 붙는 s 모양의 기호)가 잔뜩 붙은 각종 상품과 상점 안내문, 그리고 주차금지 표지판 비슷하게 생긴 문자를 신기한 듯 들여다보고 싶었다. 아무리 너그럽게 생각해도 그 나라를 제외한 다른 곳에서는 전혀 히트할 가능성이 없는 대중가요도 듣고, 나와는 평생 연이 닿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전화 박스 사용법부터 저 식품의 정체가 무엇인지까지 도무지 친숙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국적인 곳에 가고 싶었다.
낯선 곳에서 어리둥절해하는가 하면 매료되기도 하고, 실타래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근사한 대륙의 다양성을 경험하고 싶었다. 기차를 타고 한 시간만 가면 주민들의 말도, 음식도, 업무 시간대도 다르고, 주민들은 한 시간 전에 만났던 사람들과 너무나 다른 삶을 살면서도 묘하게도 비슷한 곳, 나는 이런 근사한 대륙의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p57)

나는 흐르는 물을 보면서 변기에 앉아 여행이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생각했다. 집의 안락함을 기꺼이 버리고 낯선 땅으로 날아와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애초에 잃지 않았을 안락함을 되찾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돈을 쓰면서 덧없는 노력을 하는 게 여행이 아닌가.(383p)

ㅡ 빌 브라이슨,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 산책> 中,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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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6/19

처음 말했듯이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지요. 지행합일이라고 아는 바를 행동하면 사람은 바뀝니다. 그런데 아는 걸 행동하는 게 너무 어려워요. 이젠 책을 더 안 읽어도 될 정도로 아는 것은 무척 많은데요, 머릿속의 그 아는 것들은 저를 조금도 바꾸지 못해요. 현미밥에 채소를 먹으면 건강해진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잖아요. 하지만 매일 그렇게 먹어야 바뀌는 거죠. 매사에 정직한 삶이 좋은 삶이라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없죠. 하지만 그렇게 살지 않는 한은 그대로예요.(154p)

‘역대 영웅 군왕들이 다 잠시 소유하다가 두고 간 땅을 놓고, 자신도 두고 갈 일이 애달파서 눈물 흘리는 일은 어질지’못한 게 분명하리라. 그러니 꽃이 피면 그 한 조각 같은 봄이나마 즐기면 되는 일이지, 봄이 짧은 것을 굳이 서러워할 일은 아닌 듯하다.(188p)

피는 꽃이 좋았던 시절에는 그 꽃잎들이 지는 걸 굳이 지켜보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나도 나이가 들고, 이제는 지는 꽃은 모두 화려한 옛 시절을 품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두보의, 또 임방울의 가슴을 흔들었던 ‘낙화소식’은 수많은 세월이 지난 오늘날 청춘의 가슴도 똑같이 뒤흔든다. (...) 어쩌면 인생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알지 못해서 몰랐던 게 아니라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모르는 척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배워가는 것.(191p)

ㅡ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中,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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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6/13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라”. 이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시대의 황금률로 여겨지고 있지만 나는 여기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나를 구성하는 자잘한 취향들만 봐도 그렇다. 어떤 것은 대놓고 으쓱거리며 자랑하지만, 어떤 것은 너무 저질스러워 남에게 들통 날까 걱정되어 죽겠다. 그 스펙트럼 사이에 여러 종류의 취향들이 흩어져 있다. 나는 이들이 평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중 일부가 남의 취향이라고 해서 내가 그걸 다르게 평가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왜 그들이 취향이라는 이유만으로 비판 대상에서 벗어나야 할까? 취향은 그렇게 신성한 것이 아니다. 같은 이유로 나는 내 모든 취향을 옹호하거나 변호할 생각이 없다.(91p)

지금과 같은 시대에 지구의 나이가 6천 년밖에 안 된다고 믿는 얼간이들이 위험할 정도로 많이 존재한다는 걸 생각해보라. 과학업적이 쌓이는 것과 사회 구성원이 그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무지가 억지를 부리기 시작하면 온갖 일들이 다 일어날 수 있다.(213p)

어처구니없다고 모두 틀리다는 말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들고 있는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처음에는 헛소리라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가 사는 우주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조악하고 유치해서 삼류 SF작가들의 헛소리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 위의 리스트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두자.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믿는 어처구니없는 것들 대부분은 어처구니없는 엉터리다. 우리가 어쩌다가 정곡을 찌를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곡을 찌른 운 좋은 소수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254p)

ㅡ 듀나, <가능한 꿈의 공간들> 中, 씨네21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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