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5/25

 

 

독서가 취미라는 학생, 그건 정말 우습다. 노동자나 정치인이나 군인들의 취미가 독서라면 모르지만, 책을 읽고 거기에서 배우는 것이 본업인 학생이 그 독서를 취미쯤으로 여기고 있다니 정말 우스운 일이 아닌가.(18p)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언론 자유에 속한다. 남이 나를, 또한 내가 남을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이해하고 싶을 뿐이지.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타인이다.(31p)

 

구도의 길에서 안다는 것은 행에 비할 때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 사람이 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지식이나 말에 의해서가 아님을 그는 깨우쳐 주었다. 맑은 시선과 조용한 미소와 따뜻한 손길과 그리고 말이 없는 행동에 의해서 혼과 혼이 마주치는 것임을 그는 몸소 보여 주었다.(78p)

 

 

 

ㅡ 법정, <무소유> 中,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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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5/24

 

정확히 10년 전 이맘때쯤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10년 전 대학교 1학년 때 내게 이 책은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나의 20대 초반은 대학생이라면 으레 그래야 당연하다는 듯 사회의 제문제에 관심과 열정이 충만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을 담아낼 만한 지식이 부족했다. 생경한 용어가 수시로 나오고 사회에서 당연시하던 용어, 관념, 사고방식 등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사유하도록 끊임없이 촉구하는 이 책은 내게 잠깐이나마 일상생활에서 말 한마디 하는 것조차 조심스럽게 만들고 내 생활 전체를 반추하게 했다.

 

이번에 읽었을 때는 어땠을까? 10년의 세월이 흐른 탓도 있고, 내가 그때보다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이 많아졌는지 그때만큼 어렵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슬픈 건 일부 개정되었으나 무려 10년 전 이 책에서 논의했던 문제들 대부분이 해결되긴커녕 오히려 심화되는 모습을 보이며, 낡아 보여야 마땅할 이 책이 2016년의 현재를 사는 많은 사람에게 여전히 새로울 책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이 책에 대한 칭찬이 결코 아니다. 당대의 현실, 과학기술 등을 다루는 책은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낡아 보이고 그래야 마땅하다. 가령 뇌과학을 다루는 책은 하루가 멀다고 새로운 연구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1년 전의 연구 성과를 담은 책을 1년 후에 읽어보면 옛것으로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노예제라는 당대의 현실 문제를 다룬 책도 그 시대에는 첨예한 논쟁을 낳았겠지만, 지금이야 ‘인권’이라는 개념 아래 한 인간이 인종과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인간을 노예로 삼는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을 모두가 동의한다. 사회가 변화하면 사람들의 인식이 그에 걸맞게 바뀌는 것이 당연할진대 10년 전의 논의가 지금도 유의미하게 언급되고 쇄를 거듭하여 읽힌다는 사실은 사회에도 우리 자신에게도 결코 좋은 징조라고 할 수 없다.

 

최근에 일어난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한 남자들의 반응을 보자니 도대체가 이천십몇 년의 문명국이라 불리는 나라에서 살고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사회의 무시와 냉대로 인한 열등감과 열패감으로 여자를 수차례 찔러 죽여 놓고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죽였다.’고 하는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지 모르겠고, 처음에는 인터넷 댓글만 그런가 했더니 직접 그 장소까지 방문하여 ‘여자들 조심하라, 남자가 화나면 이렇게 힘으로 보여 준다.’ 같은 포스트잇을 붙이는 자가 내 주변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만 아연해진다. 살인자의 정신병력만 문제 삼아 단순히 정신이상자의 묻지마 살인사건으로 치부하는 것은 너무 안일한 처사이며, CCTV를 보면 누가 봐도 여자로 대상을 정하고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명백한 여성혐오를 기반으로 한 살인을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불러야 하나.

 

 

 

혁명은 사회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재정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6p)

 

세상에 하나의 목소리만 있을 때는 다른 목소리는 물론이고, 그 한 가지 목소리마저도 알기 어렵다. 의미는 차이가 있을 때 발생하며, 인식은 경계를 만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44p)

 

완벽한 어머니 일 수행의 합격선은 어머니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도달 불가능하다.(66p)

 

 

 

ㅡ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中, 교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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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5/11

 

 

내가 상대적으로 성공한 위치에 있으면 남의 실패를 안타까워하기가 더 쉬워진다. 내가 상대적으로 실패한 입장이라면 남의 성공을 기뻐해주기가 어렵다.(117p)

 

 

근본적 귀인 오류를 저지르는 우리의 성향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른 사람에게 불행이 닥쳤을 때 종합적인 상황을 판단하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황적 요인과 기질적 요인을 동등하게 놓고 고려한다면 남의 불행에 아무 생각 없이 웃음을 터뜨리거나 미소 짓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282p)

 

 

“난 그 사람이 싫어. 그러니까 그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겠어.”(288p)

 

 

 

ㅡ 리처드 H. 스미스 , <쌤통의 심리학> 中,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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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패터슨은 남부인들의 자유에 대한 사랑 역시 노예제의 효과라고 보았다. “명예와 자유에 대한 남부인들의 고도로 발달된 감각에는 기만적이거나 비정상적인 데가 하나도 없다. 타인에게 속박과 굴욕을 가하는 자들일수록, 그들이 남들에게 갖지 못하게 한 것을 자기들은 갖고 있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깨닫고 있을 테니 말이다.” 이것은 에드먼드 모건이 미국의 노예제도, 미국의 자유의 마지막 장에서 피력한 견해이기도 하다. 버지니아 식민지의 초기 역사를 세밀하게 그린 이 책에서 모건은 자유와 평등에 대한 공화주의적 열정이 어떻게 노예제도에 대한 지지와 양립할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그가 보기에 워싱턴과 제퍼슨을 비롯하여, 미국의 독립에 사상적 기초를 제공했던 버지니아인들이 모두 대농장주이자 노예 소유주였다는 사실에는 어떤 역설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노예제도가 도입된 후 버지니아에서 성장한 많은 사람들이, 그 이전 세대와 달리 열렬한 공화주의자가 되었다는 사실에는 단순한 우연 이상의 무엇이 있는데, “적어도 법률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뜻에 거의 전적으로 굴종하는 사람들의 존재는,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제군주에 지배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노예의 존재는 버지니아인들에게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웠을 뿐 아니라, 평등의 감정을 북돋우었다.(62~63p)

 

 

의례적 평등의 실현은 경칭의 인플레이션을 수반하곤 한다. 몇 해 전 뉴욕에 갔을 때 길에서 핫도그를 파는 남자에게 손님들이 sir’라는 경칭을 붙이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한국의 경우, 마트의 계산원이나 중환자를 돌보는 간병인들이 여사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평등의 제스처에는 현실적인 불평등을 은폐하는 효과도 있다. 간병인들을 여사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들이 처한 열악한 노동조건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153p)

 

 

한국 사회가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다루는 또 하나의 방법은 효도나 돌봄 같은 전통적인 가치를 강조하면서 가족에게 짐을 떠넘기는 것이다. 조금 전에 생활보호 대상자를 애완동물에 비유했지만, 한국에서는 애완동물이 될 자격조차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폐지를 주워 팔면서 혼자 사는 노인이 장성한 자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초생활수급권을 얻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이런 사례를 조명할 때 언론은 이 장성한 자녀에게 실제로 부양 능력이 있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만일 부양 능력이 있는데도 노인을 모시지 않는 거라면, 그 자녀는 인륜을 저버렸다는 비난을 받는다. 요컨대 문제는 시스템이 아니라 도덕과 풍습이라는 것이다. ‘시스템의 한계가 논의되는 것은 자녀 역시 막노동을 하거나 몸져 누워 있는 등 극단적인 빈곤 상태에 처해 있을 때뿐이다.(184p)

 

 

부모는 아이가 자기들로부터 나왔고, 한때 자기들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잊어야 한다. 부모는 무엇보다 아이에게 생명을 준 사람이 자기들이고, 그들이 아이를 죽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야 한다. 이 망각으로부터 사회의 가능성이 생겨난다.(217p)

 

 

즉 벌은 계약의 일부이며, 벌을 받는 동안에도 계약은 유지된다. 이것은 축구 경기에서 레드 카드를 받은 선수가 운동장 바깥으로 나간 뒤에도 여전히 규칙의 지배 아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벌이 보복이라고 말한다면, 벌이 지니는 이 계약적인 속성이 깨어진다. 보복이란 본래 보복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보복은 상대방의 인격에 대한 공격을 내포한다. 그 결과, 보복당한 사람은 보복한 사람과 예전의 관계로 완전히 돌아갈 수 없다(복수가 복수를 부르는 건 그 때문이다. 보복당한 사람이 다시 반격하지 않으면, 그는 상대방보다 낮은위치로 떨어진 채 남아 있게 된다). 반면 현대 사회에서 형벌은 규칙의 위반에 대해서만 책임을 묻고, 위반한 사람의 인격을 문제 삼지 않는다. 형기를 마친 사람은, 레드 카드를 받은 선수가 다음 경기에 출전하는 것처럼, 명예에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고 자연스럽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그 사람이 사회계약에 계속 참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모든 계약은 주체들의 인격적 동등성을 전제하는 까닭이다.(232p)

 

 

우리는 죽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야말로 도덕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죽은 사람은 우리가 무엇을 준들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맺었던 관계의 본질은 우리가 더 이상 남들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게 되는 시점에 받게 될 대접을 통해 확인된다.(256p)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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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읽음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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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읽음

 

데이비드 보더니스, <시크릿 하우스> , 생각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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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읽음.

 

얄고도 얕다. 내가 대단한 교양인이라서 얕다고 생각하는게 아니라 도대체 겨냥한 독자층이 누구인지 궁금할 정도다.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 읽기에는 어려워 보이고 고등학생이나 성인이 읽기에는 애매하다. 게다가 설명이 너무나도 도식적이고 이분법적이다. 세금, 국가, 자유, 직업, 교육, 정의 미래 등으로 구색을 갖추어서 설명하고 있으나 결국 주된 논지는 시장주도냐 아니면 정부의 개입이냐로 나눈다. 그러나 세상 돌아가는 일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나눠지는 게 결코 아니다. 이천십몇년을 대한한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사실을 누구한테 배우지 않아도 알고 있다. 딴소리를 조금 늘어놓자면 이 책을 읽고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사실은 이런 곳이었구나. 난 이 책을 읽었으니 이제 사회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를 이해했고 시민으로서의 기본적인 교양과 덕목을 갖췄군.”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있을 거라고 본다. 나꼼수나 황우석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이 썰전의 청취자들이 이 프로그램을 보는 자기네들만 정치에 대한 엄청난 식견과 지식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빤하다. 광자여 자신을 돌아보라.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네가 아는 것을 왜 남들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나? 겨우 너조차도 아는 사실을 남들은 자신보다 접할 수 있는 정보가 부족해서, 무식해서, 팟캐스트(자기들이 듣는 팟캐스트)를 듣지 않아서, 관심이 없어서 그럴 거라고 본다. 과연 그럴까? 네가 아닌 특정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데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을까? 한국의 정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TV프로그램, 팟캐스트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채사장, <시민의 교양> , 웨일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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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그러므로 독자들이여, 안심하시라. 열 권의 책을 읽든 같은 책을 열 번 읽든, 똑같이 교양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단지 전혀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나 걱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런 걱정을 전혀 하지 않는 유일한 사람들이다.(130p)

 

 

무엇이 이 단어를 혐오스러운 것으로 만들었을까? 처음에는 속물근성으로, 다음에는 집단 심리로 인해, 필요하지 않을 때도 그 단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러저러한 전시회에 방문객이 많았다고 말해도 충분한데, 많은 향유자들이 방문했다고 말하는 경우이다. 단어가 혐오스러워지는 까닭은 바로 대중 사회가 그것을 소유하여 아무 때나 마구 사용하기 때문이다. 베토벤 역시 콜택시 회사의 주제곡으로 사용될 때는 혐오스럽게 된다.

언젠가 계단에서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그가 당신을 바에 초대하여 커피 한 잔을 대접하고, 너무 지나치지 않으면서도 불쾌하지도 않은 우스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상상해 보라. 당신은 그가 호감을 주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를 매일, 하루에 세 번 계단에서 만나는데, 그때마다 당신에게 커피 한 잔과 우스개 이야기를 강요한다고 상상해보시라.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신은 그의 목을 조르고 싶을 것이다. 단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147~148p)

 

조금은 사그라든 감이 있기는 개뿔 아직도 어디에나 갖다 붙이는 그 놈의 힐링타령과 멘토타령을 보노라면 1992년의 에코가 지적한 이런 면이 비단 2016년의 한국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는 고정불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사용하는 시대와 맥락에 따라 용례가 변화되고 확장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건 해도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이 나라는 뭐 하나가 긍정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싶으면 어디에나 갖다 붙인다. 이런 걸 보고 단어의 의미가 변화되고 확장된다고 할 수는 없다. 돌아가는 일이 누가 봐도 비정상적인 경향을 띄면 오히려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며 조심해야지 누구보다 앞장 설 일인가?

 

 

움베르토 에코, <미네르바의 성냥갑 1> ,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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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교양을 쌓은 사람들은 안다. 불행하게도 교양을 쌓지 않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으나, 교양인들은 교양이란 무엇보다 우선 오리엔테이션의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 교양을 쌓았다는 것은 이런 저런 책을 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전체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줄 안다는 것, 즉 그것들이 하나의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각각의 요소를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내부는 외부보다 덜 중요하다. 혹은, 책이 내부는 바로 책의 외부요, 각각의 책에서 중요한 것은 나란히 있는 책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저런 책을 읽지 않았다는 건 교양인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비록 그가 그 책의 내용을 정확히 모른다고 하더라도, 종종 그 책의 상황’, 즉 그 책이 다른 책들과 관계 맺는 방식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책의 내용과 그 책이 처한 상황의 이러한 구분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교양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별 어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덕택이기 때문이다.(31p)

 

 

그럴 듯한 말이다. 영화에 빗대어 볼까? 나만 해도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를 보지 않았지만 최초로 상영된 영화이니 뭐니 떠들 수 있다. 그 뿐인가. 나는 푸도프킨과 에이젠슈타인의 영화를 단 한편도 보지 않았고 앞으로도 볼 생각이 없지만 그들이 지향했던 몽타주의 개념과 서로 간의 차이점에 대해서 떠들 수 있다. 재밌는데 계속해볼까. 트뤼포, 고다르 같은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감독의 작품의 보지 않고도 점프컷이나 브레히트가 말했던 소격효과와 같은 것을 이야기 할 수 있다. 히치콕의 작품을 대략적으로 듣기만 했어도(대표적으로 싸이코의 샤워씬) 그가 그토록 강조했던 서스펜스를 쌓아올리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피스, 장 르누아르, 오손 웰즈, 존 포드, 타르코프스키, 루이스 부뉴엘, 잉마르 베리만,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 등등 이름만 들어도 아는 감독들의 목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책도 비슷하지 않을까? 플로베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마담보바리, 감정교육, 부바르와 페퀴셰 등의 저작들을 꼭 다 읽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의 본문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 각각의 목록에서 길을 잃지 않고 위치를 파악하기만 해도 그 책에 대해 충분히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피에르 바야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 여름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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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4/8

 

 

 

밑줄 그을 만한 책은 아니고 나중에 과학분야의 책을 읽을 때 뒤에 실린 리스트가 도움이 될 것 같다.

 

 

 

ㅡ 이정모, 이명현, 이한음, 조진호, <판타스틱 과학책장> 中, 북바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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