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0

 

 

어떻게 하면 자극적으로 쓸 수 있을까 기를 쓰고 노력하는데 존나 재미없다. 올해 본 최악의 소설이다. 모든 추리물이 이런 식인가.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우라시마라는 모든 시간선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초월적인 인물이나, 딱 5시간이라는 시간 역행이나, 분기된 모든 시간선의 연쇄나 참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한 편리한 설정이다. 그 연쇄라는 작용도 어떤 일은 연쇄적으로 다른 모든 시간선에 영향을 주지만 어떤 일은 영향을 주지 않는다. 가령 누군가가 죽으면 다른 시간선의 그 누군가도 같은 시간에 죽는다. 그런 식이라면 어떤 시간선의 누군가가 임신을 하면 다른 시간선의 누군가는 왜 임신을 하지 않나? 적어도 신체 내부의 반응은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아야지. 누군가에게 칼에 찔려 죽는 일이 특정한 시간선에서만 일어나도 다른 시간선의 같은 인물이 똑같이 칼에 찔려 죽으면서 왜 임신이라는 상황은 연쇄적으로 적용되지 않나. 

 

 

 

 

 

ㅡ 시라이 도모유키, <엘리펀트 헤드> 中, 내친구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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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7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기계가 있었다. 80억 명의 소식을 한데 모아 전해주는 웹사이트가, 설명을 듣고 상상한 그림을 그려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생각만으로 사물을 움직이는 시대를 열겠다며 장담하던 사업가가, 사람의 머리에 칩을 꽂아 넣으려는 과학자들이 있었다. 생각하는 기계들과 어디에도 없던 생물이 있었다. 그 모든 기술과 욕망이 만들어낸 시대가 있었다······. 사악할 만큼 게걸스럽고 충격적으로 다양한 시대였다······. 새 휴대폰을 얻지 못해 죽음을 꿈꾸는 아이와 굶어 죽어가는 아이가 같은 공기를 호흡하는 시대였다.

걷기부터 계단 오르기까지 일상의 모든 움직임을 기계에게 맡긴 다음 건강 산업에 돈을 가져다 바치고, 어떤 나라의 공장에서는 매일 새로운 티셔츠가 찍혀 나오는데 바로 그 나라의 빈민가에서 누더기의 산이 자라고, 아이들은 그 산을 타고 오르며 입을 만한 옷을 줍고, 유명인들의 삶, 꾸며진 삶, 화면 속에만 존재하는 삶을 탐내느라 모두가 불행해지고,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어디에도 없었던 사진이 마법처럼 생겨나고, 그 사진들은 거짓말하는 정치인에게 투표할 이유가 되고,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을 믿을 수 없으니 기쁨과 고통 또한 무의미하고, 진실과 거짓이 그 자체로 헛소리가 되면 끝내 남는 것은 찰나의 쾌락과 갈망, 갈망, 갈망······.(7-8p)

 

 

아이들은 자유에 무슨 나쁜 점이 있느냐며 묻고, 선생들은 이런 예시를 댄다.

 

서론: 외관상으로는 전혀 구분할 수 없는 사탕 두 개가 있는데, 하나에는 독약이 들어 있고 다른 하나는 무해하다고 하자. 이때 어떤 사람이 독약이 든 사탕을 골라 죽게 되었다고 해서, 그가 자유롭게 죽음을 선택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어떤 행동이 자유의 산물이기 위해서는 올바른 정보에 근거해 결과를 추론하고, 그에 따라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상태가 전제 되어야 한다.

 

정신질환자의 예시: 약을 정기적으로 먹지 않으면 망상과 환각을 겪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망상에 시달리는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온전히 돌아볼 수 없기 때문에, 그 스스로는 꾸준한 복약을 장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강제로라도 약을 먹여야 할까, 아니면 스스로 결정하도록 내버려둬야 할까?

 

혹은 이런 것도 있다.

 

마약중독자의 예시: 어떤 사람이 마약에 중독되어서, 마약에 대한 충동과 갈망 외에는 어떤 것도 떠올리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자. 그대로 내버려둘 경우 이 사람은 가진 약을 모두 써버린 다음 다른 약을 구하려 할 것이고, 그만큼 재활에서 멀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한편 본론은 이렇다.

 

욕망과 기술의 문제: 인류의 역사는 기술과 욕망의 역사다. 욕망은 기술을 발전시키며 기술은 다시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낸다. 편히 일하려는 욕망이 증기기관을 발명한 것처럼, 기관차와 철도의 도입이 광범위한 물류 배송을 가능케 한 것처럼, 그에 따라 시장의 규모가 확대된 것처럼······. 하지만 이런 순환이 반드시 좋은 것인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인류는 그 순환을 지배하는 대신 그저 휘둘리지 않았던가? 그게 과연 자유인가?(9-10p)

 

 

"여자애보다는 나 자신을 비웃었던 거죠. 내 처지 말예요. 머릿 속의 생각들이 그대로 전해지면 여자애는 도망갈 게 분명했거든요. 반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여자애가 계속 나를 좋아한다면, 그 애는 내 곤란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그게 아주 지겹더라구요. 나한테 남은 문제는 그 지겨움이에요. 3호가 시키는 대로 하고, 순순히 몸을 넘겨주는 일에 익숙해지더라도 끝나지 않는 문제죠. 아니, 오히려 더 커지기만 해요.“

"그 지겨움을 자세히 읊어봐라.“

"말 그대로예요. 아무나 붙잡고 이렇게 떠든다고 생각해봐요. 내 머릿속에 살인마인지 방화범인지 모를 게 사는데, 미친 짓거리를 말리느라 아주 지친다고요. 보통은 내가 허세를 부리는 줄 알죠. 반사회적인 걸 멋지다고 생각하는 애들이 종종 있잖아요. 그런데 상담 일지를 보여주고 증인들을 데려다놓으면, 비웃던 사람들이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져서 도망가는 거예요. 거리를 두려 하죠. 머릿속에 그런 목소리가 있거니와 가끔 유혹에 흔들리는 사람은 가까이할 상대가 아니니까요.“

"평범한 방법으로는 이해를 구할 수 없고, 이해받더라도 손해란 말이구나.“

"무슨 패를 내더라도 질 수밖에 없는 게임 판에 선 셈이죠. 크게는 세 가지 결말이 있는 것 같아요. 페널티가 다를 뿐이지 셋 다 패배고요. 하나는 완전히 이해받은 다음 모두와 멀어지는 거고, 다른 하나는 아무것도 이해받지 못한 상태로 이해한다는 눈빛을 받거나 비웃음거리가 되는 거고, 마지막 하나는 침묵하는 거죠. 기대도 하지 않고요. 기권을 선언하는 거예요."(171-172p)

 

 

"심리검사라거나 상담이라거나, 그런 건 아무 소용도 없어요. 심리검사에 나오는 문장들, 그러니까 작은 동물을 괴롭히고 싶다거나, 아이들을 돌보는 걸 좋아한다거나 하는 문장들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사실 똑같은 거예요. 그렇다에 체크하면 그런 사람처럼 보이고, 아니다에 체크하면 아닌 사람처럼 보이죠. 그뿐이에요. 말은 그냥 하면 나오는 거고 검사지는 체크한 대로만 결과가 나오는 거예요.“

"멀쩡한 사람 흉내를 내고 있다 이거지?“(183p)

 

 

"기억은 감각과 한 묶음이지. 감각이 라벨 역할을 하는 거야. 내가 빗소리를 들으면 사고를 떠올리듯이.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비가 세차게 오고 있었거든. 마찬가지로 고통은······ 고통을 선택하고 간직하는 작업은 나를 과거에 붙들고 내 삶을 완성시키지. 이 통증이 없으면 흉터를 남겨둘 이유도 없을 테고, 그렇게 사건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다면 그 순간을 계속 생각할 이유도 사라질 테니 말이다.“

"살면서 들은 이야기 중에서 손꼽힐 정도로 정신 나간 소린데요."

"성장에는 상처와 아픔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포함되지. 지나간 기억은 희미해지고, 평생토록 타오를 것만 같던 감정도 어느 순간 보면 불이 꺼져 있단 말이다. 그건 즐거운 일만은 아니야. 감정을 지탱할 힘이 사라진다는 의미니까. 나이가 들수록 근육이 헐거워지는 것처럼 마음도 느슨해져서, 더 이상 분노하거나 원망할 수 없게 된다. 답을 알기 전까지는 결코 눈을 감을 수 없을 듯한 의문도, 복수심도, 아무려면 괜찮은 문제들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다면, 나 자신을 시간에 빼앗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미워하는 나를 세상에 남겨두려면?"(228-230p)

 

 

나이가 들면 모든 고난과 역경을 그러려니 넘기게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법했다. 그런 태도는 종교적이거나 영적인 깨달음과는 다르며 휴머니즘과도 거리가 먼 것이다. 그냥 지치고 힘들고 귀찮아서 눈감아버리는 일을, 느물거리는 미사여구로 장식하는 것이다. 꾸미지라도 않으면 비참하고, 눈을 감지 않으면 고통스러우니 어쩔 수가 없다.(281p)

 

 

 

 

ㅡ 단요, <목소리의 증명> 中,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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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6

 

https://www.khan.co.kr/world/world-general/article/202406191329001

https://www.newyorker.com/magazine/2024/09/09/how-to-give-away-a-fortune

위 기사를 통해 알게 된 인물이 언급한 책이 궁금했던 차에 번역되어 나왔길래 읽어봄.

1~5장 보다는 6~10장이 더 흥미로웠다. 이래저래 생각해 볼 만한 주제.

 

 

 

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부에는 상한이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이것을 부의 제한주의라고 부른다.

(...)

하지만 부의 제한주의가 모든 것을 한 방에 해결하는 마법의 정책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먼저 밝혀두어야겠다. 부의 제한주의는 규제적 이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 그곳에 도달하고자 우리가 노력을 경주하는 지향점이되, 세상이 현재 조직되어 있는 방식을 생각할 때 그곳에 정말로 도달할 수 있을 법하지는 않은 어딘가 인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이상으로 삼고 있는 것 대부분이 그렇다. 빈곤 타파라는 이상도 그렇고 차별 철폐라는 이상도 그렇다. 빈곤 타파나 차별 철폐가 규제적 이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들의 중요성이 적어지는 것은 전혀 아니다. 개인이 축절할 수 있는 부가 어느 정도를 넘지 않게 하자는 이상도 마찬가지다.(21-22p)

 

 

극도의 빈곤은 대체로 모든 이에게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노숙인의 형태이든, 늘 같은 옷을 입고 학교에 오고 학교에서 무상으로 주는 급식에 의존해야 하는 아이의 형태이든, 또 그밖의 어떤 물질적 결핍의 형태이든 말이다. 하지만 극도의 부는 종종 비가시적이다. 많은 나라에서 부자들과 슈퍼 부자들은 다른 이들의 시야에 드러나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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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말이지만 불평등에는 양쪽이 있다. 불평등은 가난한 사람들이 더 가난해져서도 생기고 부자들이 더 부유해져서도 생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가난해지거나 중산층이 쪼그라들어서 불평등이 생길 때는 우리 눈에 더 잘 보이고 많은 사람이 피부로 이를 경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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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매우 부유한 사람들이 더 부유해지는 경우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별로 없고 우리 대부분의 일상도 적어도 곧바로는 달라지지 않는다. 1년에 한 번 나오는 '부자 순위'를 보거나 언론이 부의 분포에 대한 최신 통계를 보도하기로 했을 때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을 뿐이다. 즉 우리는 언론이 이 이슈를 보도하기로 결정했을 때만 상황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것이 20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 불평등이 증가하기 시작한 것을 알아차린 사람이 매우 적었던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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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불평등은 눈송이처럼 계속 불고 있어서 다루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피케티의 책이 나오고서 10년 동안 부자들은 더 부유해졌다. 옥스팜은 매년 글로벌 불평등 통계를 발표하는데 이 숫자는 매번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린다. 일례로 2020년에서 2022년 사이에 전 세계 상위 1%는 나머지 99%가 얻은 소득과 부의 두 배 이상을 얻었다.(42-44p)

 

 

과거에는 다들 너무 가난했지만 그 뒤에 전 세계적으로 극빈곤이 크게 줄었다는 지배적인 내러티브는 틀렸거나 오도의 소지가 있다. 이 내러티브에 대해 우리가 시급히 고려해보아야 할 반박 내러티브가 존재하며, 이 논의는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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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데이터로 보는 우리 세계'와 동일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일단 정보가 충분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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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과거 사람들의 소득이 어느 정도였을지에 대한 추측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수치는 매우 정교하지 못하다. 그리고 경제학자 로버트 앨런이 지적했듯이 더 유의미한 데이터를 사용하면, 예를 들어 얼마를 버는지보다 무엇을 소비하는지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사회가 진보해왔다'는 내러티브는 붕괴한다.

둘째, '데이터로 보는 우리 세계'가 빈곤 통계를 낼 때 사용하는 빈곤선이 극단적으로 낮다. 이 빈곤선은 구매력 평가로 보정한 2011년 기준 하루 1.90달러다.

(...)

우리는 이 빈곤선의 의미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것은 빈곤이 아니라 극빈곤이다. 또한 우리가 사회 발전의 주요 지표로 이 빈곤선을 사용한다면 기준을 너무 낮게 잡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65-67p)

 

 

우리 대부분은 계급이 우리 사회와 삶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른다.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민권 운동과 해방 운동이 성공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이제는 모두가 동등한 기회를 누린다고 믿게 되었다. 모두가 동등한 기회를 갖고 있다면 계급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안 그런가?

이와 함께, 거의 모든 곳에서 노조가 꾸준히 쇠락하고 노조 파괴까지 자행되면서 계급 간 차이에 대해 대중의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하던 주요 제도 하나가 약화되었다. 더 은밀한 변화도 있는데, 서로 다른 계급 사람들이 섞일 기회가 점점 더 없어지는 방향으로 사회가 달라진 것이다. 주거, 교육, 의료 등이 대체로 계급선을 따라 분절되어 있고, 유럽에서는 탈종교화가 진전되면서 모든 사회 계층이 모이던 곳 중 하나가, 즉 교회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이 오는 곳이 아니게 되었다. 보편 징집의 폐지도 상이한 계층 사람들을 한데 모이게 하던 몇 남지 않은 제도 하나를 없앤 격이 되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삶과 그들이 직면하는 제약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도 이러한 변화 때문에 우리가 불평등 정도를 실제보다 더 낮게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실제보다 높게 평가하고 부유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른 이들보다 얼마나 더 많이 가졌는지를 실제보다 작게 생각한다.(80p)

 

 

물론 전쟁 범죄나 국가 부패는 슈퍼 부자들이 타인의 삶에 피해를 끼치면서 막대한 돈을 버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또 다른 유형의 부정한 돈으로는 기업이 소비자에게 의도적으로 해를 끼치면서 버는 돈이 있다.

새클러 가문을 보자. 이들은 미국 제약회사 퍼듀파마의 소유주이고, 이 회사는 옥시콘틴이라는 오피오이드 진통제를 판매했다. 1990년대 말에 퍼듀파마는 오도의 소지가 있는 마케팅을 공격적으로 전개하면서 1차 의료기관의 일반의들에게 옥시콘틴을 판촉했다. 옥시콘틴이 식품의약국 승인을 받고서 6년간 퍼듀파마는 사실이 아닌 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이 약이 다른 진통제보다 중독성이 적다고 광고했다.

(...)

기업인이 버는 부정한 돈은 이게 다가 아니다. 내가 저지른 잘못의 비용을 다른 이들이 치르게 함으로써 부정직하게 돈을 버는 방법도 있다. 물론 기업은 때로 실패를 한다. 사업을 영위하는 데는 리스크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사업에서 나오는 돈은 기꺼이 취하면서 무언가가 잘못되었을 때의 비용은 다른 사람들이 지게 한다. 어떤 경우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비용이 너무나 큰데, 종종 이 비용은 납세자를 포함해 모든 시민에게 퍼지고 기업 소유주의 평판에 대한 피해는 흩어져버린다.(111-113p)

 

 

법의 테두리 안에서 세금을 회피해 납부를 최소화하도록 도와주는 산업이 존재한다. 금융 전문가, 법률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이 산업은 재산 방어 산업이라고 불린다.

(...)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세금을 안 내는 개인과 조세 당국 사이의 이슈도 아니다. 이것은 '사회 계약'의 핵심과 관련한 문제다. 정부가 조세 회피와 포탈로 세수를 잃으면 모든 사람이 손해를 본다.

(...)

재산 방어 산업을 고용할 만큼 부자가 아닌 사람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족한 세수를 메우기 위해 세금을 더 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는 자신이 '똑똑해서' 세금을 안 냈다고 말했지만 세금 회피는 똑똑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이기적이고 비애국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이것은 부의 극단적인 집중과 매우 관련이 크다.

(...)

즉 그들은 로비를 하고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해서 법이 한층 더 금권정치적 속성을 갖게 했다. 첫째, 조세 부담을 자본에서 노동으로 옮기고, 둘째, 최고세율을 낮추고, 셋째, 더 많은 구멍과 맹점을 도입하면서 말이다.

(...)

이제 미국에서는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의 실효 세율이 같다. 아주 부자인 경우는 예외인데, 근로 소득이 없고 재산 방어 산업의 도움을 최대로 받기 때문에 이들은 심지어 세율이 가장 낮다.(131-133p)

 

 

미래에 도움을 얻을 것을 기대하면서 제공하는 거액의 후원금은 명백히 정치적 평등의 원칙을 훼손한다. 하지만 미국 정치철학자 토머스 크리스티아노가 지적했듯이 위험에 처한 민주적 가치는 이것만이 아니다. 돈으로 표를 샀을 때, 선출된 정치인은 돈을 댄 사람의 이해관계를 보호하는 정책들을 추진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정책들을 추진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모든 사람이 부담한다. 돈으로 표를 사는 것은 사회 전체가 지출하는 비용에 무임승차하는 것이다. 소수의 거액 기부자에게 득이 되는 입법을 하는 과정에 우리 모두가 돈을 대고 있는 것이다.(151p)

 

 

누군가가 자신의 부를 진정으로 온전히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만 벌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부의 제한주의 주장의 핵심이자 기본적인 철학적 원칙들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부의 제한주의는 근본적인 철학적 통찰 하나에 토대를 두고 있다. 시장과 재산은 사회적 제도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 본래의 세상에는, 즉 사회적 맥락을 떠나서는, 재산도 없고 시장도 없다는 의미다. 재산과 시장은 공유된 규칙과 규범의 시스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는 그것을 조율하는 기관, 일반적으로는 정부가 큰 역할을 한다. 대개 우리는 재산을 시장 교환에서 얻는데, 그 시장은 정부에 의해 구성되고 정부에 의해 보호되며 정부에 의해 작동이 가능해진다. 시장에서 우리가 갖는 이해관계를 보호해주는 정부가 없다면, 우리는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가 1651년 저서에서 '자연 상태'라고 묘사한 상태로 가게 될 것이다.

(...)

그런데 정부가 존재하려면, 그리고 이러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으려면 자원이 필요하다. 정부는 반드시 세금을 걷어야 한다. 세금 없이는 정부가 우리 재산을 보호할 수도 없고 시장에서 사기나 절도를 막아 시장 거래가 제대로 이뤄지게 할 수도 없다.

여기에서 근본적인 철학적 논지는 조세 없이는 재산권 보호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국가가 없다면 우리가 아는 대로의 재산은 존재할 수 없고 세금이 없다면 국가가 존재할 수 없다. 제도가 존재하기 전에는 재산도 존재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조세 제도와 정부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동일한 사회경제적 시스템의 일부다.

(...)

과세에 반대하거나 과세가 '도둑질'이라고까지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금 없이는, 즉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사회 계약 없이는 소득도, 재산도, 안정적 거래도, 매끄럽게 작동하는 시장도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 계약이 없다면 위험과 혼란만 있을 것이다.

(...)

많은 자유지상주의자, 경제적 보수주의자, 신자유주의자들이 믿는 것과 달리 세전의 소득과 부의 분포는 정부의 개입과 지속적인 사회적 협력 없이 나타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정부가 손대지 말고 내버려두어야 할 '자연스러운' 재산의 분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소득과 부에 대한 어느 정도의 과세는 늘 합당하고 정당하다.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얼마나 많이 걷어야 하고 누구에게 걷어야 하는지, 그리고 시장의 공정성을 보장하고, 공정하고 포용적인 사회 계약이 유지되게 하려면 그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다.(202-205p)

 

 

상속받은 재산을 자신이 마땅히 가질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상속으로 무엇을 얼마나 갖게 되는지는 단순히 운으로 정해진다. 당신이 수백만 달러를 상속받는다면 이는 운 좋게 슈퍼 부자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 재산에 대해 당신에게 도덕적으로 자격이 있다고는 어떤 의미로도 말하기 어렵다. 누구도 부모를 선택하거나 태어난 장소와 시대를 선택할 수 없다. 철학자들은 많은 주제에서 의견이 다르지만 상속받은 재산이 가질 자격이 없는 재산이라는 데는 일반적으로 일치를 보인다. 상속받은 그 부에 대해 어떤 노력이나 의사결정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몰수적 성격의 과세를 엄격하게 적용해 상속을 완전히 철폐해야 하는가? 우리는 이 질문을 기꺼이 던져보아야 한다. 철학자 D.W 해슬릿이 언급했듯이, 우리는 정치 권력의 상속을 철폐했다. 경제 권력의 상속 또한 철폐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상속세(또는 유증세)에 반대하는 표준적인 논리는 물려주는 사람이 자기 돈을 자기 마음대로 쓸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맞는 논리가 될 수 없다. 사회는 자유가 다른 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행사될 경우 다양한 방식으로 제한을 가한다. 우리는 단지 그러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스토킹하거나 납치할 수 없다. 피해자의 기본적인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액의 상속은 다른 사람들에게, 또한 사회 전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기회의 평등을 훼손한다. 사회의 계층 이동성도 훼손한다. 또한 [상속받는 사람에게] 역인센티브를 발생시킨다. 평생 쓸 돈이 있는데 왜 힘들게 일하겠는가?

(...)

문제는 상속이 막대하게 불평등하다는 점이지 상속 자체가 아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대규모 상속이 문제다. 작은 액수를 물려받는 것은 사회적 계층 이동성이나 기회의 평등을 저해하지 않고, 당신이 재능을 낭비할 기회를 주지 않으며, 모두를 위한 복지나 번영에 기여해야 할 돈을 해변에서 테킬라를 마시는 데 쓰게 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상속세에 대해 더 자주 제기되는 또 다른 반대는 상속세가 '이중 과세'라는 주장이다. 상속하는 사람은 그 돈을 벌었을 때 이미 세금을 냈는데 나중에 자녀에게 이전할 때 세금을 또 내야 한다. 같은 돈에 두 번 세금을 내는 것이니 불공정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상속[물려받는 것]에 과세하는 것과 유증[물려주는 것]에 과세하는 것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상속은 받는 사람 입장에서 소득이며(그리고 불로소득이다), 원칙적으로 모든 소득에는 세금이 붙는다. 교사는 봉급을 받고, 여기에는 세금이 붙는다. 가게 주인은 수익을 올리고, 여기에도 세금이 붙는다. 음악가는 음반을 팔고, 여기에 세금이 붙는다. 소득에 세금을 물리지 않는 경우는 소득이 아주 낮을 때뿐이다. 대개 소득이 매우 낮은 사람은 세금이 면제된다.(206-210p)

 

 

매우 재능이 있는 사람들끼리 경쟁할 때는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재능의 작은 차이보다 운이 훨씬 더 중요하다.

(...)

능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은 실증근거로도 확인된다. 능력이 뛰어나야 높은 자리에 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노력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능력도 있고 노력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의 수가 최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자리의 수보다 훨씬 많다. 누가 그 업계의 꼭대기를 차지해 막대한 보수를 받을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운, 그리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이 서로를 판단할 때 갖게 되는 편향이다.(217p)

 

 

이 모든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몇몇 고려 요인에 따른 어느 정도의 보수 격차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사회가 특정한 직무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가, 그 일을 하기에 필요한 능력이 얼마나 희소한가, 그 능력과 숙련이 그 사람에게 얼마나 잘 발달되어 있는가, 그 일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이는가, (...) 아마도 10배 정도까지는 정당화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돌봄 노동자와 1년에 수백만 달러를 버는 CEO 사이의 막대한 간극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222p)

 

 

하지만 더 큰 정부가 늘 사람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 정부는 너그러운 복지 국가 정부만큼 큰 정부일 수 있고(국민소득 대비 정부지출 비중 기준), 그러면서 재분배와 사회적 지출에 들어갔던 돈을 복지 수급자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데 쓰고 있을 수 있다. 이는 몇몇 유럽 정부들이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한 이후에 실제로 나타나고 있는 일이다. 그들은 공공 영역과 복지시스템 전반에서 규제와 모니터링을 켜켜이 늘렸다. 표방된 목적은 무임승차나 '복지 사기'를 막는다는 것인데, 실제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거짓이 없는지 따져봐야 할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정책은 복지 수급자들에 대한, 또는 공무원의 직업 의식에 대한 과도한 불신을 보여준다.

(...)

어떤 '큰 정부'들은 납세자의 돈을 공공의 후생과 재분배에 사용하지만, 어떤 '큰 정부'들은 매우 비효율적이며 통제 메커니즘이나 지정학적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군사 인프라에 많은 돈을 사용한다. 이 모두가 그들이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느냐의 문제다.

아마도 이 모든 요인 때문에, 어떤 부유한 자선가는 정부에 맡겼을 때 정부가 자신의 부를 잘 분배해주리라는 신뢰를 갖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

다른 말로, 일부 슈퍼 부자들이 정부가 작아야 한다고 믿는 한 가지 이유는 경악스러울 정도로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계급적 편견이 그들 자신과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정당성 있는 리더이며 자신의 부가 그 증거라고 생각한다.

(...)

이들 대부분은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에 스스로의 문제를 탓해야 하며, 다시 이는 그들이 정책 결정에 참여하기에는 부적합한 사람들임을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또한 정부는 엘리트 계층이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으로 선출되어 대중이 운영하므로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신뢰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정책 결정은 매우 부유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권력을 주어서 그들 손에 맡기는 게 더 낫다. 그들이 막대한 부는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가끔 자선 기부로 부의 일부를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주사놓듯 찔끔찔끔 흘려 넣게 하면서 말이다.(274-278p)

 

 

'너무 많은 돈'이 저주의 다른 형태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아주 많다. 애비게일 디즈니는 부자가 되는 것이 그 사람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부유한 사람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행사하게 되는 권력이 일으키는 정신적 부담을 이야기했다.

(...)

그런 계산은 내 자아에서 무언가를 떼어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너무나 나를 소진시킵니다. 정서적으로 너무 지치게 돼요. 어떤 사람을 돕고 어떤 사람을 돕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고 이런 계산 자체를 하지 않기로 해버리면, 길거리의 노숙인을 무언가 인간이 아닌 존재로 낮추어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당신은 당신에게서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는 사고를 발달시키게 됩니다. 도움을 달라는 요청은 정말 말도 못하게 많습니다. 어떤 공간에 들어갔을 때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내가 도와주기를 원하는 사람, 그리고 그러한 필요를 발생시키는 상황을 내가 바꿔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없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303-305p)

 

 

미국인들이 현재와 같은 불평등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왜 더 많은 재분배를 위해 투표하지 않을까? 다른 나라에서 이루어진 연구들에서도 동일한 패턴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실제의 자산 불평등을 대폭 과소평가하고 있었고 그렇게 축소해서 생각하고 있는 정도보다도 더 작은 불평등을 원했다. 임금 불평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불평등의 정도를 실제보다 낮게 생각했고 그것보다도 더 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임금 불평등을 작게 인식하는 정도는 현저했다. 한국 연구에서 응답자들은 CEO가 저숙련 노동자보다 10배 정도 더 벌 것이라고 생각했고 4.6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데이터가 존재하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연구 당시에 CEO 임금과 저숙련 노동자 임금의 비는 10대 1보다 훨씬 높았다. 미국은 354배, 독일과 스위스는 거의 150배였다.

(...)

이것이 왜 중요할까? 불평등이 높다고 인식하고 있으면 사람들은 재분배를 강하게 요구할 것이다. 반면, 지금처럼 불평등이 실제보다 작다고 잘못 생각한다면 재분배 요구는 미미할 것이다.

(...)

이를 염두에 두면, 부자들이 돈에 대해, 특히 부자와 슈퍼 부자들이 얼마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왜 꺼리는지 알 수 있다.(320-321p)

 

 

극단적인 부를 (또한 빈곤도) 한 방에 없앨 수 있는 마법의 약은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불평등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를 잘 알고 있으며, 대부분의 활동가와 단체들은 다양한 수준에서 광범위한 제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도 부의 제한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 또는 평등을 향한 어떤 종류의 진보에도 반대하는 사람들은 부의 제한주의나 평등주의를 마치 그것이 단 한 가지 제안인 것처럼 과장해 단순화한다.(332-333p)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지식인, 기업인, 정치인들이 우리로 하여금 정부는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공무원들은 이기적이고 자유시장은 다른 모든 것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믿게 만든, 잘 조직화되 노력의 결과였다. 이러한 노력은 주류 미디어의 내러티브를 바꾸었고, 학생들이 학교와 사회에서 배우는 내용을 바꾸었으며, 기업인과 공직자들이 사용하는 어휘를 바꾸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적인 사회·경제 조치들이 구체적으로 도입되면서 우리 세계는 경쟁과 탐욕이 지배하는 사회로 바뀌었다. 신자유주의는 나라마다 다른 형태를 띠었지만, 그것이 자연스럽거나 불가피하게 온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추동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실행하고 강화하기로 의도적으로 선택한 데서 나온 결과였다는 점은 모든 곳에서 같았다.

좋은 소식은, 우리가 선택을 통해 신자유주의를 바꿀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는 점이다.(335p)

 

 

노동 소득에 자본 소득보다 높은 세율이 적용되는 것이 불공정하다는 데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많은 국가의 현실이다. 네덜란드에서는 가장 최근의 굵직한 세제 개혁이 있었던 2001년에 노동 소득과 자본 소득에 동일한 세율이 적용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작은 수정이 야금야금 이뤄져 자본 소득에 예외가 몇 차례 적용되면서 노동 소득이 자본 소득보다 세율이 11% 높아졌다.

(...)

이러한 내용은 2022년에야 대중에게 알려졌다. 정부의 의뢰로 진행된 한 연구가 모든 관련 기관과 정당에서 정보를 확보해 분석한 결과였다. 이러한 정보가 없는 국가에서도 비슷한 연구를 해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면 평등주의적이라는 평판을 가지고 있는 국가에서조차 조세시스템이 노동보다 자본에 유리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346-347p)

 

 

나는 상속을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에게 각각 해당될 도덕적 고려 사항들을 감안해 위와 같은 제안의 약간 변형된 버전을 제안하고자 한다. 도덕적인 관점에서, 상속받는 사람은 그 부를 상속받을 자격이 전혀 없고, 상속하는 사람은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 자신의 소비를 줄여가며 저축을 늘린 것에 대해 인정을 받아야 한다. 이 두 가지를 모두 고려해서, 내 제안은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받을 수 있는 상속과 증여에 제한을 두고 그것을 넘으면 모두 조세 수입으로 귀속시켜 그 국가의 시민들에게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국가는 상속세 세수를 다른 세원에서 나온 것과 함께 일반 세수로 합쳐서 도로, 학교 등 공공 지출에 쓸 수도 있지만, 또 다른 그리고 아마도 더 나은 대안도 있다. 상속세고 들어온 돈은 국가의 모든 젊은이에게 재분배하는 용도로 지정해 모든 젊은이가 이전 세대의 부를 나누어 받게 하는 것이다.

(...)

두 번째 이유는 상속세 수입은 젊은 층에게 재분배하면 현재 심각한 수준인 세대 간 불평등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많은 연구자가 세대 간 불평등 때문에 젊은이들이 크게 불리한 처지에 있게 되었다고 우려한다. 종종 상속은 80대인 사람이 사망하면서 50대인 자녀에게 물려준다. 상속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들은 상속 재산을 실제로 받기 전에 이미 상당한 이득을 누린다. 나중에 돈이 생길 것을 알기 때문에 학자금 대출이나 모기지 대출을 더 쉽게 결정할 수 있다. 또 이들은 부모 생전에 상당한 증여도 이미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상속세로 거둔 세수를 20대 중반인 사람들에게 재분배하면 전체 인구의 번영에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모든 젊은이가 성인으로서의 삶을 돈에 대한 부당한 걱정 없이 시작할 수 있게 될 것이다.(348-349p)

 

 

 

ㅡ 잉그리드 로베인스, <부의 제한선> 中,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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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

 

이 책을 통해 궁금해 진 책은 존 케이지의 '사일런스', 롤랑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 일레인 스캐리의 '고통 받는 몸'. 그 중 존 케이지 책이 제일 궁금함.

 

 

 

 

예전에 현대소설강독 수업을 들었을 때가 기억난다. 에세이는 아니고 소설가에 대한 얘기였지만, 소설가에게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강렬한 원체험 같은 것이 있는데, 그 자전적인 요소를 너무 성급하게 소설로 써버리면 이제 다음 소설을 써 나가기가 난망하다는 것이었다. 교수님은 그것을 '씨암탉 잡기'에 비유했다. 크게 대접해 보겠다고 집에 하나 있는 씨암탉을 잡고 나면 더 이상 대접할 게 남아 있질 않는 것이다.(15p)

 

 

쓸 것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써야 한다. 그런데 왜 쓰고 있는 거지?

이 '왜'라는 질문이 늘 골칫거리다. 누군가는 돈 때문이라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즐거움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단 나는 돈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나는 아직 그 단계까지는 오르지 못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되고 싶긴 하다······) 글쓰기가 전혀 돈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

그렇다면 즐거움 때문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고통과 불안, 초조함, 답답함, 민망함과 절망, 기타 등등을 섞은 이 감정이 마냥 즐거움인 것 같지만은 않다.

최근에는 더욱 글쓰기의 즐거움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돈이나 문학적 명성, 권위 등에서 자유로워져야 하며, 글쓰기라는 활동이 주는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즐거움이라는 것을 별로 믿지 않는다. 물론 나도 글쓰기를 비롯한 이런저런 일들에서 때때로 즐거움을 느끼며 그럴 때 매우 기쁘고 만족스럽다. 내가 의심하는 것은 어떤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즐거움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즐거움 때문에 한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내적인 충만함, 즉 외부의 간섭 없이 주체적으로 시작되며 동시에 그것 자체만으로 만족스러운 어떤 활동이라는 환상이 필요하기 때문일 때가 많다.

'스스로의 즐거움이 가장 큰 동력이어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어떤 활동을 하는 사람을 북돋아 주는 말이라기보다 순수한 즐거움을 동력으로 삼지 못하는 주체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말일 가능성이 높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는 익숙한 호통과도 닮아 있다. 그런데 왜 하지 말라는 것일까? 사람들은 때때로 하기 싫은 것을 하고 싶어 한다. 더 단순히는 하기 싫어서 하고 싶어 하기도 한다. 때때로 우리는 괴로움을 원하며 그것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아니다.

동시에 그런 말은 행위에 내재한 어떤 근본적인 이유 없음을 은폐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유라는 건 뭔가를 하지 않으려고 할 때 필요한 것이다. 뭔가를 하는 데에는 큰 이유가 필요하지 않고 사실 이유가 거의 혹은 전혀 없을 수도 있다. 글을 쓰는 사람한테 왜 이런저런 종류의 글을 쓰냐고 물어보면 이런저런 이유들을 열심히 떠올려 보고 짜맞춰 보지만 잘 맞아떨어지지가 않고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글을 쓰지 않는 사람에게는 항상 완벽한 이유들이 있다. 그 이유들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언제나 맞아떨어진다.

(...)

어디서 어떤 경로로 글쓰기의 의무가 찾아오는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느 순간 글을 쓰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글쓰기라는 의무를 부여하며, 그 이후로는 의무에 충실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선택이 남아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무의 특성은 그것이 나에 의해 부과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일단 부과되고 난 후에는 나의 타자가 되어 나의 바깥에서 나를 강제한다는 점에 있다. 그것이 나의 바깥에 있기에, 나는 내가 왜 그러한 의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했는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이 의무는 여타의 이유 없이도 글쓰기라는 행위를 지속할 수 있게 해 준다. 푸코는 글쓰기의 즐거움이 존재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질문에 대해서는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는 다만 글쓰기란 그것이 존재하는지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글쓰기의 동기가 자신의 즐거움이나 괴로움, 기쁨, 슬픔 등의 감정과 무관한 층위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다.(27-31p)

 

 

재능이란 질리기의 능력이다. 질린다는 건 아주 중요한데, 왜냐면 사람은 질리지 않으면 절대 다른 것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뭔가를 패배 때문에 그만둔다는 건 낭설이다. 나는 패배 때문에 그만두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사람들은 질리지만 않으면 아무리 많이 져도 그것을 계속한다. 때문에 빨리 질리는 것만이 다른 것을 시도해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천재들은 뭔가를 해 보기도 전에 벌써 질려 한다. 벌써 재미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재미있는 부분으로 곧장 진입할 수 있다.

(...)

그렇다면 노력은 무엇인가? 극장에 가는 걸 싫어한다는 정지돈에게 금정연은 묻는다. “싫어하는 것치고 극장에 너무 자주 가는 거 아니에요?” 그러자 정지돈은 이렇게 대답한다. “정연 씨,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사는 사람은 없어요.” 이게 노력이다. 하기 싫어도 하는 것.(41-42p)

 

 

나는 모든 글쓰기가 그 자체로 소중하며 가치 있다는 식의 말이 그다지 사실에 가깝지 않고 별로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글쓰기는 그 반대의 사실에 접근해 가는 과정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존 케이지는 연주자들에게 자유를 부여한 자신의 작업이 종종 형편없이 연주되는 것을 듣는다고 이야기한다. 자유롭게 하면 되는 것인데 거기에 어떻게 좋고 나쁨이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는 아무렇게나 한다는 것은 결국 신중하지 못한 것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만약 연주가 잘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연주자들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자신의 익숙한 취향이나 기억에 의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49p)

 

 

사실 예전에 나는 꼰대와 호구라는 주제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당시 내게는 사람들이 가장 되기 싫어하는 두 개가 꼰대와 호구인 것처럼 보였다.

(...)

시절이 바뀌어서 요즘에는 자신을 꼰대라고 부르는 것이 어느 정도는 스스럼없는 분위기도 생겨난 것 같다. 물론 자신을 ‘젊은 꼰대’라고 부르는 경우는 대부분 좋지 않다. 어떤 사람이 사십 대인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영 포티’에는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기에는 말하자면 체리피킹을 하려는 얄미운 셈속 같은 것이 느껴진다. 어쨌든 내가 꼰대와 호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꼭 남들과 다른 방향을 무조건적으로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다. 거기에는 실질적인 이유가 있다.

 

꼰대의 좋은 점: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감각이 있다.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다.

·····장점이 두 개면 충분히 많은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정말 만족을 모른다. 정말이지, 이래서 세상이·····

 

하지만 장점이 두 개뿐이라도 꼰대적인 것은 글쓰기에 필수저인 어떤 측면을 가지고 있다. 사실 많은 작가들이, 아니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꼰대였다.(106-107p)

 

 

그것이 우리가 또한 호구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일단 여기에는 늘 그렇듯 실용적인 장점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호구가 되기 너무 싫어하는 나머지, 호구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피해마저도 감수하려 한다.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기꺼이 감수하는 피해의 양은 가끔 보면 기가 질릴 정도이다. 내 생각에는 그냥 호구가 되는 것이 낫다·····

그리고 그건 전혀 나쁜 일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이다. 역사상 가장 잘 알려진 호구의 사례를 참조해 보자.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내놓으라고 한 사람, 그러니까 예수.

(...)

그런데 이런 말을 하면 지금은 시대가 훨씬 삭막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럴 수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말하자면 예전에는 한쪽 뺨을 맞았을 때 다른 쪽 뺨을 내놓으면 상대가 거기서 더 때리지 않을 정도의 도리라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 존재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그러니까 어떤 좋은 것이 예전에는 가능했지만 이제는 가능하지 않으므로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변명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존재해 왔던 사람의 유형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이 다른쪽 뺨을 내놓으라고 했을 때도 이미 그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그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향해 말을 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때도 사람들은 그렇게 착하지 않았다. 착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으면 애당초 예수님이 그렇게 죽지 않았겠지····· 그렇지 않나?

구체적으로 호구의 덕목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는 우선 수용하는 사람(자신의 뜻을 현실로 관철할 힘이 없음)이다. 그리고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귀가 얇고 잘 속아 넘어감)이며, 용서하는 사람(복수를 할 역량이 결여되어 있음)이다····· 물론 조금 그렇다. 딱 보기에 별로 좋아 보이지만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원치 않게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좋은 일 아닐까?(111-112p)

 

 

내가 생각하기에 한국에는(한국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단지 내가 외국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뭘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심지어 뭘 하는 방법을 알아보려고 유튜브를 찾아봐도 태반이 하지 말라는 말들이다.

(...)

얼마 전에는 출판을 전제로 쓴 일기가 언제나 보기 흉한 나르시시즘으로 빠질 수밖에 없으니 하지 말라는 요지의 글을 읽었다.

(...)

사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싫어하는 것이 있고 거기엔 아무 문제도 없다. 출판을 의식하며 쓴 일기에는 실제로 위와 같은 단점이 어느 정도는 있을 것이다. 물론 꼭 출판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하더라도 타자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글을 쓰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문제 제기도 가능하겠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 이전의 문제이다. 말하자면 글을 쓰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싫어하는 것에 아주 거창한 이유를 붙이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경향이 있다는 것 같다. 마치 내가 무엇을 싫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윤리적이거나 미학적인 근거가 있어야 하기라도 한 것처럼, 혹은 내가 무엇을 싫어한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윤리적이거나 미학적인 근거가 있다고 말하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이러저러해서 난 별로던데'라고 쓰는 경우는 별로 없다. 언제나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심각하고 중대하며 근본적인 문제가 숨겨져 있다. 하지만 정말 늘 그런 것일까? 일레인 스캐리는 한 글에서 예술가들이 괴로움을 표현하는 일에 대한 경계를 표현한 적이 있는데, 나는 그것이 보다 일반적으로 글을 쓰는 이들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스캐리는 이렇게 썼다.

 

예술가들이 성공적으로 괴로움을 표현한 탓에 예술가 집단이 가장 진정으로 고통받는 사람들로 여겨지고, 그래서 도움이 절박하게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서 의도치 않게 관심을 빼앗을 위험이 있음을 창작자는 인지해야 한다.(125-127p)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세상에는 사소한 일들도 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들ㅡ그중에서도 특히 비평가라고 불리는 이들ㅡ에게 사소한 것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내가 겪었던 일이기도 한데, 예전에는 누군가가 무슨 글이나 생각을 옹호하면 곧바로 그 사람을 아우슈비츠의 옹호자로 만들어주는 일종의 거대한 비평적 미끄럼틀 같은 것이 있었다. 잘 세워진 도미노처럼 작은 블록 하나를 건드리면 그것이 다른 블록들을 무너뜨리면서 곧장 대학살의 현장으로까지 향하는 것이다. 이 도미노는 완벽한 간격으로 세워져 있어서 결코 도중에 멈추는 법이 없다. 은유를 좋아한다고요? 은유가 얼마나 폭력적인지 아시나요?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 것인지? 그러한 작동 방식을 옹호하던 사람들이 바로·····

(...)

게다가 무엇이 정말 나쁜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구제할 수 없이 불의에 속할 것이 매우 확실한 몇몇 사례나 억압의 장치들이 있기는 하지만, 전면적이고 근본적으로 악을 단언할 만한 것이 얼마나 많을까? 미셸 푸코는 이 주제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해 온 사람 중 한 명이다.

나는 어떤 것은 '해방'의 층위에 속하고 또 어떤 것은 '억압'의 층위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강제수용소처럼 확신을 가지고 그것이 해방의 도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주어진 체계가 얼마나 공포를 부추기든 간에, 어떠한 저항도 사전에 막아 버리는 고문과 처형을 제외한다면, 언제나 저항과 불복종, 대항 세력화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ㅡ이는 일반적으로 간과되는데ㅡ고려해야만 합니다.(128-129p)

 

 

우리는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플로베르에게 이 자가당착은 다름 아닌 예술과 글쓰기가 시작되는 곳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결코 피할 수 없는 어떤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가 종종 사용하고는 하는 '내로남불'이라는 비난은 대부분 적절하지 않다.

(...)

이런 비난의 문제는 우리가 마치 자가당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 준다는 데에 있다.

결국 모두가 똑같으니 누군가를 절대 비판해서는 안 된다거나, 혹은 손바닥 뒤집듯 그때그때 마음 편하게 말을 바꿔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나는 우리가 자가당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 달라지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

그러니, 맞다. 문제는 누가 태도를 바꾸고, 이전과 다른 이야기를 하고, 혹은 자신이 하는 말과 들어맞지 않는 행동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그런 일은 결국 누구에게나 일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무엇이 싫다고 하기 전에 내가 언젠가 그것을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 비판은 어딘가 다르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그것은 어쨌든 사태에 대해 조금 더 다각도로 생각하는 한 방법일 것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언제나 그 조금의 차이가 매우 중요하게 느껴진다.(133-135p)

 

 

어떤 작가가 작품집을 내고 나면 뭔가 다음 작품집에서는 다른 것을 보여 주기를 바라는 심리가 있다. 자신이 '이미 본 것'에는 더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심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반대의 경우 또한 고려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볼 때 그것이 달라지기를 바라면서 보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실제로는 보았던 것을 또 보고 싶어서 보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 예컨대 부코스키의 새로운 책을 읽을 때 나는 그 사람이 뭔가 다른 걸 보여 주리라 생각하기보다는 저번 책에서 보여 줬던 걸 또 보여 주기를 바란다. 종종 도가의 일화를 인용하기 좋아하는 존 케이지는 이렇게 쓴다. "선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무언가를 하다가 2분 후 지루해지면 4분을 더 시험해 보아라. 그래도 지루하다면 8분, 16분, 32분 등등으로 시간을 늘려라. 마침내 그것이 절대 지루하지 않으며 아주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는 꼭 감상의 영역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글쓰기가 자신의 고유성을 주장하는 방식, 즉 우리가 스타일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반복과 관계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역시 한 벌의 옷만 입고 다녔다.

(...)

나는 체구가 아주 작다. 그래서 대부분의 여자들이 입는 옷을 입지 못한다. 평생 동안 그 난관, 그 문제와 싸웠다. 너무 작은 여자라는 사실에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도록 옷이 절대 눈에 띄지 않게 할 것. 늘 똑같이 입어서 사람들이 나의 키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도록 할 것. 늘 똑같이 입어서 사람들이 나의 키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도록 할 것. 똑같이 입는 이유가 아니라 그냥 똑같이 입는다는 사실이 눈에 띄도록 할 것. 이제 나는 가방도 들지 않는다. 늘 같은 옷을 입고 다닌 뒤로 삶이 달라졌다.

종종 변화에 대한 압박감은 새로운 글을 쓰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뒤라스에게 스타일의 반복은 스타일 그 자체를 달라지게 하지는 않지만, 그것 외의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할 수 있는 것이었다.(157-159p)

 

 

조금 이상한 말일 수 있지만, 나는 나와 관련된 것이라면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위험한 것 같다. 그러한 생각은 자체로 권리라는 개념을 가리키고 있는데, 시몬 베유는 이 개념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에겐 권리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겐 그런 것을 표현할 단어들이 없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정의라는 단어로 만족을 했지요." 시몬 베유는 우리가 그리스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이 지점에서는 나도 그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현재 우리의 상황에서 중요한 건 오히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늘어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혹은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영역을 축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사례에 한정해서라면, 나는 작가가 자신의 텍스트에 대해서 그 정도의 권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고, 작가가 텍스트를 써서 발표한 이상 어떤 통제 불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영역이 있다고 생각한다. 저작권이란 좋게 봐주더라도 편의상의 조치에 가깝지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일 수 없다. 더군다나 사후까지 자신의 텍스트가 자신이 생각했었던 방식으로만 유통될 수 있어야 한다는 발상은······ 아무래도 누군가의 작가적 세계라는 것이 그 정도로까지 중요한 것일 수 있을까 싶은 것이다. 물론 이것이 어느 정도는 이상적이고 또 위험성도 있는 생각이라는 것은 나도 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통제해야 할까?(175-177p)

 

 

그런데 통제를 하지 말라는 말이 꼭 무엇인가를 더 자유롭게 해야 한다는 말,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

요점은 반대에 가깝다.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자연스러운' 경향성이며,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작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연스럽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물에 빠지면 가라앉는다.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물에 뜨게 만들어져 있는데도 말이다. 자유라는 말도 비슷한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해야만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들이야말로 거기서 거기이며 대개 비슷하고 진짜로 흥미롭지 않다. 우리는 종종 어딘가에 갇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실일지 모르지만, 문제는 대개 같은 곳으로 탈출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

"거듭 말씀드리지만 내가 폭력적이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일반적으로 평가라는 것은 꼭 자동차와 같죠. 차종을 선택할 수도, 나아갈 방향을 택할 수도 없어요. 제일 먼저 도착하는 걸 빼앗아 잡아타야 해요. 폭스바겐이면 폭스바겐을 타고, 택시면 택시를 타고 가는 거예요. 비행기가 도착하면 비행기를 타야 하죠. 중요한 것은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나에 대한 첫 평가는 말하자면 폭력적이라는 일련의 해프닝을 통해 이루어진 거예요. 그건 오해죠. 하지만 차가 없다면, 먼저 오는 차를 탈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만약 백남준이 자신의 작업이 오해받는 것을 두려워했다면 그는 계속 기다려야 했을 것이고 어쩌면 그 상태로 영영 움직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즉 오해 가능성이란 이동 가능성이기도 하다ㅡ우리는 오해 가능성으로부터 열린 공간 속에서만 움직인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상황을 비관적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오해가 진실과 대립하는 것이라기보다, 진실이 표현되는 특정한 형식 중 하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오해는 가장 자주 오는 차이고 진실은 그 차를 잡아탄다ㅡ오해는 진실을 훼손한다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삶이 우리의 통제 바깥에 훨씬 많은 것처럼, 진실은 오해 속에 훨씬 더 많다.(183-185p)

 

 

 

 

ㅡ 강보원, <에세이의 준비>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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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

 

제목 그대로 일급의 사회학자와 역사학자가 다섯 번 만나 나눈 대담을 묶은 책.

이 책이 부르디외의 생각을 느껴보기 가장 좋은 입문서(?)라니... 말랑말랑한 책들만 읽다가 이런 책을 오랜만에 읽어서 어려웠다.

5번의 대담을 묶은 책이라 분량이 많진 않으나 밀도가 상당했다. 하비투스니 사회적 자본이니 몇몇 개념은 평소에 주워들은 적이 있었는데 장(field)은 처음 들어보는 개념이라 신선했다.

 

 

 

부르디외의 관점에서 사회학은 사람들에게 그릇된 환상을 심어 주는 오인을 걷어 내면서 지배와 예속을 작동시키는 매커니즘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게 해 준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환상에서 벗어나는 고통을 겪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학자는 참을 수 없는 인간이다." 그런데 사회학자는 다른 사람들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참을 수 없는 인간이다. 자신이 분석하는 사회공간에 그 자신 또한 위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르디외의 말에서, [사회공간에 대한] 인식을 생산하는 주체가 인식의 대상 속에 갇혀 있는 사회과학이 벗어날 수 없는 이런 위치를 알게 되며, 바로 그런 위치에서 부르디외 자신이 언급하듯 고통스런 '정신분열'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18-19p)

 

 

제가 보기에 선생님의 작업 속에는 푸코식으로 말해서 확실성의 껍질을 벗겨 내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사회학의 문제들」에서 그런 주장과 거의 비슷한 문장이 발견됩니다. "언어적이고 정신적인 자동성을 파괴하기." 사회세계에서 외견상 당연해 보이는 모든 사실을 문제화한다는 것이죠. 이는 이를테면 "이것은 지금과 다르게 존재할 수 없어. 이것은 언제나 그래 왔어·····" 같은 식으로 자명성을 전제하는 모든 주장과 단절하게 합니다. 선생님이 증명하듯이 자명성은 언제나 특수한 내기물 및 세력관계와의 관련 속에서 구성됩니다.

(...)

아무튼 확실성의 껍질을 최대한 벗기는 작업에서 선생님이 취한 방식 중 가운데 하나는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된 경계, 분할, 구획들이 사실은 언제나 사회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드러내면서 말이죠.(35p)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이 반드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사회학자는 이런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지요. 사회학자의 모든 작업은 행동의 관찰, 담론, 문서 자료 등에 기초해서 진실의 도출에 필요한 조건을 구축하는 데 있습니다. 물론 언제나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그들은 민중이 다른 사회집단에 비해 훨씬 더 참된 말을 한다고 믿지요. 사실 민중은 각별한 피지배 상황에 처해 있는데, 특히 상징적 지배의 메커니즘에 의해 지배받고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는 광부들의 입에 마이크를 들이대고는 그들이 진실을 수집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의 발상이 좌파가 권력을 잡은 시기에 한창 유행했지요.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수집한 것은 앞선 30년 동안 노동조합이 유포한 담론들에 불과합니다. 한편 농부들을 상대로 똑같은 일을 한다면, 우리는 약간의 변형이 있긴 해도 초등학교 교사들의 담론을 수집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회세계 안에서 지식인의 것이건 프롤레타리아의 것이건 혹은 다른 누군가의 것이건 간에 일종의 본원적인 [진실의] 장소를 찾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이 같은 발상 속에는 일종의 신비주의적 사고가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57-58p)

 

 

엘리아스는 저에 비해서 훨씬 더 연속성에 민감합니다. 제가 볼 때는 그렇습니다. 스포츠 사례를 들자면, 고대의 올림픽에서 현재의 올림픽까지 연속적 계보를 구축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스포츠사가가 그렇게 하는데요, 저는 이런 작업에 위화감을 느낍니다. 외양상 연속성이 존재하지만, 이는 19세기에 일어난 거대한 단절을 은폐합니다. 그 당시 영국에서 엘리트 기숙하교가 유행했고, 교육체계가 변화했으며, 스포츠 공간이 출현했습니다···· 달리 말해, 술과 같은 전통 게임과 근대 축구 사이에는 공통점이 없습니다. 전혀 없어요. 이는 완전한 단절입니다. 예술가에 대해서도 우리는 동일한 문제를 발견합니다. 정말 놀랍게도 이것은 사실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미켈란젤로와 율리우스 2세 사이의 관계가 피사로와 강베타 사이의 관계와 같다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엄청난 불연속이 존재하며, 불연속성의 기원 또한 존재합니다.(106-107p)

 

 

문학 분야에 대해서도 우리는 동일한 분석을 할 수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플로베르 이전에는 예술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지요. 여기서 저는 의도적으로 과장을 하고 있습니다. 역사학자들이 충격을 받도록 말입니다. 미켈란젤로가 예술가라는 식의 주장은 시대착오[의 오류]를 범하는 일입니다. 물론 역사학자들이 그렇게 순진하지는 않겠죠.

(...)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장인은 언제부터 예술가로 변모했는가?" 그런데 예술가는 사실 장인에서 탄생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는 하나의 소우주에서 다른 소우주로의 이행이 일어난 것이죠. 이행 이전의 소우주에서 사람들은 경제의 규범에 따라 무언가를 생산합니다. 거기에서는 일반적인 [상품] 생산의 규범을 따릅니다. 반면에 이행 이후의 소우주는 경제세계 내부에서 하나의 고립된 독자적 소우주, 일종의 전도된 경제세계입니다. 거기서는 사람들이 시장 없이 무언가를 생산합니다. 즉 그들은 어떤 경우엔 평생동안 한 작품도 팔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생산합니다. 또 그들은 작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자본[특히 문화자본]을 충분히 갖춰야 합니다. 말라르메를 비롯한 수많은 시인의 경우가 그랬죠. 좀 더 깊은 분석이 필요하지만, 대체로 1880년대 이전의 시기에 예술가나 작가라는 개념을 투사할 때, 우리는 엄청나게 부정확한 용어를 쓰는 야만을 저지르는 셈입니다.

 

 

 

ㅡ 피에르 부르디외, 로제 샤르티에,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中, 킹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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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30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 방문객수는 좀 놀라웠다.

 

 

오히려 우리를 놀라게 한 기록은 2022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이 방문한 미술관 5위에 대한민국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이 그 이름을 올렸다는 사실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508만 명이 방문해 2위에 랭크된 바티칸 박물관, 409만 명이 방문해 3위를 한 영국박물관, 388만 명이 방문해 4위에 자리 잡은 테이트 모던에 이어 한 해 341만 명이 방문하여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많은 관람객이 찾은 미술관으로 기록되었다.(26p)

 

 

뮤지엄이 가진 자들의 과시와 사치, 허영의 공간이 아닌 대중을 위한 공간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시점을 확인하기 위해선 17세기 영국을 살펴봐야 한다. 1677년 영국의 정치인이자 수집가였던 일라이어스 애슈몰이 옥스퍼드 대학교에 기증한 호기심의 방의 수집품을 수용하기 위해 1683년 건립된 애슈몰린 박물관은 시민혁명의 시대를 겪으며 1845년 의회가 제정한 박물관령에 따라 시민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와 영국을 중심으로 퍼져나간 자유와 평등의 시민혁명 정신은 권력과 부의 상징과도 같았던 뮤지엄을 대중을 위해 전시를 선보이고 대중이 함께 향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화시켰다. 물론 시민의 권리를 가질 수 없었던 하층민은 이 역시 누릴 수 없는 시대였기에 현재의 모습과 완벽히 일치한다고 할 순 없겠으나, 과거에 비하면 진일보한 것이었다.(31p)

 

 

안토니 곰리는 과거의 방식으로 돌을 깎거나 흙을 조형해 조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석고붕대를 이용해 자신의 몸을 직접 본을 떠 주물하는 방식으로 조각 작품을 선보여왔다. 얼굴까지 석고로 뒤덮어 몸의 본을 뜨는 과정은 그 자체로 생명을 담보로 하는 수행에 가깝지만, 그렇게 떠낸 인체 조형물을 미술관뿐만 아니라 도시 곳곳에 전시하는 설치 프로젝트를 통해 거대한 세상 속에 던져져 실존하는 인간 군상을 표현해온 곰리의 작품은 단순해 보이는 과정 속에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다.(329p)

 

 

 

 

ㅡ 김찬용, <미술관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中, 땡스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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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9
 
 
예술에 대한 사랑이니 뭐니 아무리 떠들어대 봐야 면세점에서 절도를 저지른 시점에서 그냥 상습적으로 도둑질을 일삼는 흔한 범죄자다. 자기는 예술품을 팔기 위해 훔친 게 아니라지만 그것도 자타에 의해 큰 씀씀이가 없는 삶을 살고, 주변의 경제적 원조까지 받으니 그런 헛소리를 하는거지. 웃기지도 않는다. 역시나 말년에는 훔친 물품을 팔려다 딱 덜미를 잡혔죠?
83살에도 절도 습관을 못 버려 17번째로 감옥으로 간 '대도' 조세형이 떠오른다. 대도같은 소리하고 앉아있네.
 
 
 
브라이트비저는 어디에 가든 눈에 보이는 박물관 안내 책자를 가져오는 오랜 습관이 있다. 관광 안내소나 호텔 로비에서 한 아름 모아오곤 한다. 도서관이나 신문 가판대에서도 미술 잡지는 모조리 훑어보고 프랑스 미술 주간지 <라 가제트 드로우트>도 정기 구독한다.
때로 이런 안내 책자나 잡지에서 유난히 브라이트비저의 눈길을 끄는 사진이 있다. 그러면 떨리는 손으로 사진에 대한 기사나 설명을 읽고는 그 작품이 어디에 있는지 기억 해둔다. 아주 어릴 때 가본 박물관이라도 그곳에서 가장 좋아했던 작품을 생각하면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날 보러 온 작품들 역시 '마음속 목록'에 올라가 있다. 브라이트비저와 앤 캐서린은 최대한 자주 이 마음속 목록의 작품을 보러 간다. 앤 캐서린이 병원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주간에는 목록에 있는 몇몇 작품을 한데 묶어 동선을 짜서 자동차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이 정도가 계획의 전부로, 이미지가 떠오르면 갈 곳을 정한다. 나머지는 거의 즉흥적으로 결정한다.(65p)
 
 
하지만 박물관 절도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사전 준비나 도주 경로가 아니다. 보안 시스템을 휘저어 진열장 문을 따고, 경비원을 따돌려 작품을 밖으로 빼내고 나면 그때부터 진짜 골치 아픈 일이 시작된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고 추적이 가능한 물건인 데다, 뉴스에도 사진이 뜰 테니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것조차 위험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작품은 결국 짐짝으로 전락하고 만다. 훔친 물건을 내보일 수도 없고 내다 팔려고 하면 더욱 위험해진다.(74p)
 
 
사실 박물관 보안에는 모순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박물관은 작품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유하기 위해 존재하며 관람객은 거창한 보안 장치의 방해 없이 가능한 한 작품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박물관 절도 사건을 거의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 있다. 작품을 저장고에 넣고 문을 잠근 뒤 무장 경비를 세우면 된다. 하지만 이러면 당연히 박물관도 사라진다. 박물관이 아니라 은행이 된다.
(...)
소규모 박물관의 관장들은 보안에 대해 이야기하길 꺼린다. 이들은 그나마 부족한 예산을 최신 보안 장치(예를 들면 실처럼 얇아서 화판에 꿰매 넣을 수 있는 추적 장치)에 배정하느니, 그 돈으로 차라리 더 많은 작품을 사들이고자 한다. 관람객을 끌어모으는 것은 새로운 작품이지 이전보다 견고한 보안 체계가 아니다.
지역 박물관에는 박물관과 관람객 사이에 암묵적 규칙이 존재한다. 박물관은 거창한 보안 장치 없이도 귀중한 작품이나 유물을 가까이에서 관람하게 하고, 우리는 누구나 인류 전체의 유산을 보존하는 데 동참한다. 이런 측면에서 브라이트비저와 앤 캐서린은 공익에 해가 되는 암적인 존재다. 공동의 유산을 혼자만 누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배제한다.(86-87p)
 
 
'아트 로스 레지스터'는 런던에 본부를 둔 세계 최대 규모의 도난 작품 데이터베이스로, 50만 건이 넘는 품목이 등록돼 있다. 이 총계는 매일 늘어나는 중이며 이를 통해 얼마나 많은 예술품이 사라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지 알 수 있다. 작품 회수율은 전체 도난 작품 중 10퍼센트 미만이라고 한다. 사건을 완벽하게 해결하여 범인도 잡고 작품도 회수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박물관에서 도난당한 경우는 그래도 회수율이 상당히 높다. 대략 잡아 약 50퍼센트 정도이며 일부 수사대는 열 건 중 아홉 건을 회수할 때도 있다고 주장한다.(144p)
 
 
앤 캐서린은 이제 차도 있고 집도 있으며 매일 출근할 직장도 있다. 브라이트비저만 없으면 특별한 변수 없는 무난한 삶이다. 하지만 앤 캐서린의 지인들은 지속적인 흥분감이 그녀에게 마약 같은 존재였다고 말한다. 브라이트비저와 함께라면 비밀스러운 보물 창고도 있고 매주 떠나는 예술품 절도 여행도 있다. 브라이트비저의 광기 어린 열정, 아니 어쩌면 그냥 그의 푸른 눈동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앤 캐서린은 그 모든 것을 이대로 끊어낼 수 없다.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손을 올리면 그때는 영원히 나를 못 볼 줄 알아."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앤 캐서린도 이제는 안다. 하지만 자신이 적극적으로 도둑질을 돕고 싶지도 않다.(190-191p)
 
 
더 심각한 문제는 이제 브라이트비저가 작품을 제대로 돌보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예술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큰 사명이라고 늘 주장해왔지만, 그뤼예르성의 섬세한 융단을 창문으로 던지고 침대 밑에 처박아두는 것은 보호와는 거리가 멀다. 르네상스 시대 그림들은 어떠한가. 거의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벽에서 잡아채 급하게 액자에서 빼내고 차 트렁크에 실어 덜컹거리는 길을 이동한다. 보안 카메라를 등지고 훔쳤던 약제상 유화는 나무판 세 개가 결합되어 있는데, 다락에서 이미 화판 사이가 벌어지고 뒤틀리기 시작했다.(197p)
 
 
"브라이트비저가 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앤 캐서린은 경찰 조사에서 폰데어뮐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하나의 작품 같은 거였어요." 브라이트비저는 앤 캐서린이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
하지만 2005년 후반, 앤 캐서린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낸 지 얼마되지 않아 그녀를 대체할 다른 '작품'을 찾아낸다.
(...)
처음 앤 캐서린을 만났을 때처럼 이번 새 인연도 만나자마자 강렬하게 빠져들었다.(274-275p)
 
 
책의 마지막 장에 쓴 대로 브라이트비저는 예술품 보안 컨설턴트로 일할 계획이다.
(...)
2006년 6월 29일 브라이트비저는 파리 오를리 공항에 도착한다. 출판사에서 돈도 받았겠다. 마침 스테파니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으므로 면세점에서 옷가게에 들른다. 보안 컨설턴트 일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보안상 취약한 부분이 "2초 만에" 눈에 들어온다. 보안 카메라도 없고 보안 요원도 없다. 그 순간 이상한 본능이 치민다. 브라이트비저에 따르면 "몸이 기억했다", 그는 스테파니에게 선물할 캘빈 클라인 흰색 바지와 프랑스 디자이너 소니아 리키엘의 티셔츠 한 장을 골라 여행 가방 안에 집어 넣고는 그대로 면세점을 빠져나간다.
그러다 책 홍보를 다닐 때 새 옷을 입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괴로웠던 시절 옆에서 응원해준 아버지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브라이트비저는 면세점을 빠져나온 지 1분도 안 돼 다시 돌아가서 옷을 일곱 개 정도 더 집어 들고 나온다. 가격으로는 총 1,000달러 정도 된다.
브라이트비저는 면세점의 보안 요원 수를 잘못 파악했다. 박물관 경비원과 달리 그들은 사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
어머니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브라이트비저를 용서한다. 다시 심리 치료를 받겠다고 약속하자 스테파니도 떠나지 않기로 한다. (275-278p)
 
 
삶에서 브라이트비저가 만난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리만큼 그의 도둑질에 관대했다. 어머니와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메쉴르, 그리고 앤 캐서린도 모두 그랬다. 관대한 정도가 아니라 브라이트비저만큼 예술을 사랑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던 듯하다. 예술 전문 기자 노스는 "이 무리에는 부모 역할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지적한다. "'도둑질을 멈춰라', '작품을 돌려 놓아라', '어른답게 행동해라'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바로 이 점이 브라이트비저의 문제였다."(280p)
 
 
 
 
 
ㅡ 마이클 핀클, <예술 도둑> 中, 생각의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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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9

 

 

 

나는 불안했다. 그 불안의 근원은, 샴페인 거품 같은 환희가 순식간에 스러질 수 있다는 사실, 저 걸인이 엄마에게 감사하는 것도 덤벼드는 것도 어디까지나 초라한 충동에 달린 일이라는 사실, 엄마는 그걸 알면서도 마님 소리에 한껏 의기양양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도련님 소리를 들으며 사탕을 핥는 것 외에 없다는 사실.(75p)

 

 

세계의 치명적인 진실은, 모두의 망상이 서로 단절되어 있으며 정신병자조차 다른 정신병자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뭐랄까, 물과 물 아닌 것들의 관계와 비슷하다. 청산가리와 메탄올은 둘 다 인간을 죽이지만, 죽음이라는 공통점을 근거 삼아 두 물질이 중화되어 물로 바뀌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군산복합체 음모론을 믿는 정치꾼 노인은 자신이 나폴레옹의 환생이라 믿는 여자를 비웃고, 나폴레옹의 환생은 유대교 카발라와 베다 점성술에 심취한 학생을 조롱한다. 나폴레옹은 역사적 인물이지만 점성술은 미신이니까. 심지어 상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조차 모르면서 싸우는 경우도 잦다.

(...)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들이 상징계에서는 완전히 다른 영토를 밟고 있음을 보게 되면, 뒤엉킨 대화를 풀어내기가 훨씬 쉽다.

(...)

중추가 아닌 부분은 호흡이나 살덩어리나 경험 따위고, 중추는 그들 각각의 믿음이다. 영혼은 몸의 유일한 형상이라고 아퀴나스가 말했듯, 그들의 육신과 기억은 현실에 비스듬하게 걸친 믿음의 퇴적물이다.(111-112p)

 

 

어떤 사람의 믿음은 그가 태어난 곳과 불가분의 관계이며 상징계의 주소는 그 믿음의 내력이다. 회복주의 기독교 교파의 조기교육 과정을 통해 종말론을 배웠는지, 통제광 할머니와 게으른 아버지 사이에서 이중구속을 겪으며 칼 세이건의 책을 피난처 삼았는지, 금융위원회 위원장인 아버지에게 얻어맞으면서 자랐는지 같은 것들이 한 사람의 좌표를 결정한다. 이는 인간이 다음 세대를 낳는 과정이자 개인이 자기 자신을 퇴적시키는 방식이다. 가령 내가 방구석에 틀어박힌 상태로 컬트적인 정치-신학-금융 블로그를 운영한다는 사실에서 아버지의 영향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자존심이 상하긴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나고 아버지는 아버지인 것과 별개로.(131-132p)

 

 

아무튼 나는 인간이 좋고, 윤리와 정치와 기술과 경제(그중에서는 계급보다는 화폐와 금융과 시장)가 좋고, 사람들이 마주치며 발생하는 관계들이 좋고, 이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이 좋다.(176-177p)

 

 

 

ㅡ 단요, <한 개의 머리가 있는 방> 中, 트리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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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4

 

 

영감은 있다. 그렇지만 글을 쓸 때 그걸 찾아서는 안 된다.

무슨 말이냐고요? 글을 '쓸 때'라는 부분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글을 '쓰기 이전에' 영감을 찾아놓아야 합니다. 책상에 앉기 전에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 해요. 어디에?

바로 우리 내면의 냉장고에요.(33p)

 

 

글쓰기에 있어 장애물과 방해 세력은 기본값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고상하게 글을 쓰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예전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작가들은 어디에서나 씁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며 그들은 쓰고자 했기 때문에 작가가 되었습니다. 역사 속 작가들이, 작가들의 역사가 그 사실을 증명합니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장례식장에서, 신혼여행지에서, 키즈 카페에서, 직장에서, 화장실에서, 지하철과 버스, 비행기에서, 아픈 와중에도 그냥 썼습니다. 쓸 시간이 없다고, 방해하는 사람이 많다고 불평하는 대신 말입니다.

글 쓰기 좋은 날은 없습니다. 내가 글을 쓰는 날이 좋은 날입니다.(66-67p)

 

 

소설을 영화나 드라마로 옮길 때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원작보다 못하다." 왜 이런 말이 나올까요? 영화나 드라마를 만든 창작자의 실수나 부족함 때문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소설에서 다룬 '언어화된 내면'이 결코 화면으로 옮겨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상 언어는 원칙적으로 '카메라'의 시선으로만 인물을 보여줄 수 있고, 거기에 내면은 포함되지 않으니까요.(130p)

 

 

그렇다면 이야기에 깊이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토리텔링에서 가장 오랜 시간 동안 검증된 방식은 주인공의 외면적 목표와 내면적 목표를 엇갈리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의 주인공은 100억 원을 모으고 싶습니다. 이것을 스토리텔링에서는 외면적 목표라고 부릅니다. 물질적이고, 구체적이고, 숫자나 물건으로 표현할 수 있는 목표. 이런 목표를 가진 사람은 대단히 많겠지요. 이것만 있다면 우리의 주인공은 세상의 다른 많은 사람과 변별되지 못할 겁니다.

여기서 주인공의 내면적 목표가 등장합니다. 내면적 목표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대신 주인공 안에서 아주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목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주인공의 과거, 상처, 가치관이나 세계관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요.

다시 말해 내면적 목표는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영수증이자 카드 명세서, 자기소개서나 이력서 같은 것입니다. 주로 주인공의 욕망과 두려움이 어떤 커다란 사건을 만날 때 만들어지곤 하죠.

(...)

따라서 주인공의 목표는 늘 이중적이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깊이를 만드는 중요한 전제 조건이에요. 이제 남은 일은 이 두 가지를 어떻게 '겹'과 '층'으로 만드느냐에 대한 문제죠. 이런 결말을 생각해 봅시다. '주인공은 옛사랑을 되찾기 위해 100억 원을 모았고, 결국 옛사랑을 되찾았다!' 어떤가요? 이런 이야기는 매우 표면적입니다. 외면적 목표와 내면적 목표가 모두 이뤄졌기 때문이죠. 겉과 속이 너무 쉽게 일치해 버리면 곤란합니다. 깊이가 생기지 않거든요.

핵심은 엇갈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엇갈리게 하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희극을 만들고 싶다면, 외면적 목표를 좌절시키고 내면적 목표를 성취시키세요. 비극을 만들고 싶다면 반대로 하면 됩니다. 외면적 목표를 성취시키고 내면적 목표를 좌절시키는 것이죠.(171-172p)

 

 

서사를 기술하는 서술은 기본적으로 이야기에 시간을 흐르게 하는 일입니다. 시간을 뒤로 밀어내어 인물이 움직이게 하고 사건을 앞으로 진행시키는 거죠. 그렇다면 시간의 측면에서 묘사는 서술과 무엇이 다를까요?

묘사는 시간을 멈추는 일입니다. 서술과는 반대되는 개념이죠. 되도록 시간이 흐르지 않게 하는 거예요.

자, 어떤 인물이 방에 들어갔다고 생각해 봅시다. '들어갔다'는 것은 서술입니다. 밖에서 안으로 인물의 위치가 바뀌었고, 이러한 행동을 통해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제 방에 들어간 인물은 그곳을 둘러보기 시작합니다.

천장에는 18세기 스타일의 샹들리에가 달려 있고, 벽에는 누렇게 변색된 인물화가 여러 점 걸려 있습니다.

(...)

이것이 묘사입니다.(178p)

 

 

작가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최대한 감각 가능하게 만들어 독자에게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게 작가가 해야 할 일이고, 임무이고, 역할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어떤 감각을 잘 쓰고 있는지, 혹은 못 쓰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학생들에게 자주 추천하는 연습이 있는데요, 여러분도 시도해 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일단 다섯 가지 색깔의 펜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내가 쓴 소설을 출력해서 앞에 두고, 읽어 내려 가면서 다섯 가지 감각적 디테일(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이 등장할 때마다 표시해 두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소설이 끝날 때까지 가장 적게 사용한, 혹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색깔의 펜이 나올 겁니다. 그게 바로 내가 잘 사용하지 못하는 감각입니다.(188-189p)

 

 

'하지 못해서 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아마추어라고 부르지요. 그렇다면 프로페셔널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는 사람'일 것 같지만, 아닙니다.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사람'이 진짜 프로입니다. 프로페셔널은 '무엇을 더해야 할지'가 아니라 '무엇을 빼야 할지'아는 사람이니까요. 이건 글쓰기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예술에 적용되는 원칙이기도 합니다.(201p)

 

 

한 줄의 대사가 많은 의미를 품은 채 농축된 형태로 표현된다면, 긴 대화는 의미를 희석시켜 흩어버립니다. 역시 뭐가 좋고 뭐가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다만 이 둘의 차이를 잘 알고, 필요할 때 적절한 방식을 골라 쓰는 것이 소설 쓰는 사람에게는 더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218p)

 

 

많은 사람이 자기가 그 소설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합평 자리에서 주인공이 되려고 합니다.

(...)

작가는 의도에 관해 말하지요. 하지만 독자에게 도달하는 것은 언제나 효과입니다. 의도와 효과 사이에는 대체로 아주 길고 복잡한 터널이 연결되어 있고······ 때로는 중간에 막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도가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일은 매우 빈번하게 일어납니다.(242p)

 

 

"내 생각에는 두드릴 고가 더 좋겠네."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뜻밖에도 퇴고의 핵심이 바로 '선택'이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착각은 퇴고가 원고를 '고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고친다는 건 때로 막막하고 불투명하고 추상적인 작업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퇴고라는 단어의 연원을 살펴보면 우리는 이 작업의 본질을 알 수 있습니다. 밀 퇴와 두드릴 고.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하는 것입니다.(251p)

 

 

저는 왜 버틸 수 있었을까요?

나는 왜 견딜 수 있었을까?

이제 와 드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그 긴 실패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저에게 재능이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말하자면 데뷔하고도 다시 14년이 흘러 2024년이 되어서야 저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재능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재능이라고요.

제가 좋아하는 영어 표현 중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이뤄 내기 전까지 이룬 척해라(Fake it till you make it.)". 이건 사기꾼이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작가가 되려는 사람은 작가처럼 읽어야 합니다. 작가처럼 써야 합니다. 작가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짜 작가가 될 수 있습니다.(265p)

 

 

그렇다면 이를 위해서 우리는 습작기에 무엇을 해야 할까요?

역시 당연한 말이지만 써야 합니다. 작가는 쓰는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중요한 점은 계속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간혹 수업에서 단편 한 편을 쓰고 그걸 몇 년째 계속해서 고치고 있는 분들을 봅니다. 그 소설의 완성도와는 무관하게, 이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실에서 제가 자주 하는 충고는 일단 단편이 열 편이 될 때까지는 퇴고도 하지 말고 돌아보지도 말고 그냥 다음 소설을 쓰라는 이야기입니다. 나에게 어떤 장점이, 어떤 가능성이, 어떤 이야기가 내장되어 있는지는 나 자신도 모릅니다. 질은 양에서 나오고, 여러 편을 써봐야만 그중에 더 나은 것을 가려낼 수 있습니다.(302-303p)

 

 

 

 

ㅡ 문지혁, <소설 쓰고 앉아 있네> 中, 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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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3

 

 

혹시라도 이 책이 문제 있는 예술가의 창작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길 내심 기대했지만 역시나 그런 건 없는 것 같고, 앞으로도 어떤 책이나 글에서도 모든 상황에 적용 가능한 일관성 있는 해결책을 찾는 건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마이클 슈어도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에서 아래와 같이 말하지 않았나.

 

 

지난 20년간 소장해온 DVD로 <애니 홀>을 본다고 해서 우디 앨런에게 새로 돈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최신 영화 티켓을 사서 앨런의 주머니에 새로 돈을 넣는 것도 아니다. 물론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을 한 사람이 만든 작품을 보기로 한 결정을 자각하고 계속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큰 의미였고 내 삶과 작가로서의 경력에 직접 공헌한 영화라면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시 말하지만 자기 행동이 선한지 악한지에 주의를 기울여 옳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문제가 있는 사람 혹은 어떤 것을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거기에서 떨어질 수 없다면 동시에 아래 두 가지를 생각해야만 한다.

 

1. 나는 이것이 좋다.

2. 이것을 만든 사람은 문제가 많다.

 

1번을 잊으면 자기 자신의 한 조각을 잃고 만다. 2번을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이 초래한 분노를 부정하는 셈이며 끔찍한 행동의 피해자에게 공감하지 못한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생각해야 한다.

(...)

아무리 좋아해도 더는 소비할 수 없을 때가 오게 마련이다. 그 예술가의 행동이 참을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서 너무 추하고 고약해 몰래라도 더 이상은 그를 지지하는 데 시간과 돈을 쓸 수 없을 때다. 그렇지만 무언가가 어쩔 도리 없을 만큼 내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를 잡았고 그것이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다면, 위의 두 가지 개념을 동시에 잘 간직함으로써 그것과 내가 연결된 모든 끈을 잘라내는 고통없이 여전히 자기 수양에 정진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문제에 해답은 없다. 철학을 논할 때 ‘휴리스틱’이라는 단어를 쓸 때가 있다. 휴리스틱은 문제를 제공해 해결책을 찾게 하는 일종의 도구로 행동 지침이 되는 경험적 지식을 의미한다. ‘예술을 예술가에게서 분리할 수 있는가’라거나 ‘아기 기린 목을 조르면서 성적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소유한 스포츠팀을 응원해도 될까’같은 질문에는 휴리스틱을 활용한 대답이 불가능하다. 이 모든 상황에 윤리 이론을 적용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하지만 어떤 때는 그저 행동해야 한다. 선택해야 한다. 삶에서 ‘이것’과 ‘이 사람’은 떨쳐내야 하지만 ‘저것’은 그냥 둬도 괜찮다고 하는 결정은 단지 우리 자신의 추론과 본능적 판단을 바탕으로 할 수 밖에 없다. 이런 복잡한 문제를 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흔히 “어디다 선을 그어야 하지?”하고 물으며 마치 사안의 모호함을 지적하기만 하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말한다.

(...)

어딘가에 선을 긋자. 사람마다 다른 위치에 선을 그을 수 있지만 각자 서로를 위해 선을 그어야 한다.

그 선을 긋는 순간 모순에 빠진 자신을 발견할 것이 분명하다. 두 예술가의 행동이 얼추 비슷한데도 이 사람은 계속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떨쳐내는 탓이다. 당신 친구들은 방방 뛰고 웃으면서 왜 이 영화는 보면서 저 영화는 안 되는지, 왜 이 야구 선수는 응원하면서 저 선수는 비난하는지 지적해댈 것이다. 이러한 모순이 있을지라도 포기하거나 ‘전체적이고 분열되지 않은 존재로서의 감각’인 도덕적 완결성을 이뤄가는 작업을 그만두면 안 된다. 모순을 발견하면 되돌아가 더욱 파헤치고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필요하면 처음 그은 선을 지우고 다른 곳에 선을 다시 그려야 한다.

 

ㅡ 마이클 슈어, <더 좋은 삶을 위한 철학> 中,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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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3월 10일ㅡ나는 지금 이 날짜를 외워서 쓰고 있다ㅡ로만 폴란스키는 서맨사 게일리를 자기 친구 잭 니컬슨의 할리우드 힐스 집으로 데려왔다. 그는 서맨사를 자쿠지로 데리고 가 옷을 벗게 한 다음 퀘일루드를 먹였다. 잠시 후 그는 서맨사가 앉아 있던 소파로 가서 그녀의 질에 삽입을 하고 그녀의 몸을 뒤집어 항문에 삽입을 한 후에 사정했다. 이 모든 세부 사항들을 종합한 후 매우 단순한 사실 하나만이 남겨졌다. 열세 살 소녀가 항문 강간을 당함.

그러나 여기서 잠깐. 나는 폴란스키의 중죄를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그의 작품을 소비할 수 있었다. 아니 소비하고 싶었다. 2014년 봄과 여름에 그의 영화 몇 편을 보았고, 그 작품 자체의 미학에 몰두한 나머지 그의 범죄에 휘둘리지 않을 정도였다.

(...)

그래, 이제부터 로만 폴란스키의 문제를 풀어 보자. 너무도 끔찍한 일을 저지른 인간을 사랑하는 문제에 관해 생각해 보자. 나는 의식 있는 소비자이자 바람직한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었지만 그와 동시에 예술이라는 세계의 시민이고 싶었고 교양 없는 속물의 반대편에 서고 싶었다. 나에게 이 문제, 이 수수께끼란 쌍둥이처럼 닮았으면서도 모순적인 기준 앞에서 무엇이 올바른 행동인지 밝혀내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해결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다각도로 생각해 보면 반드시 답은 나올 터였다.

(...)

폴란스키의 범죄를 자세히 알게 된 지금 이 영화에 대한 나의 평가가 180도 바뀔 것이라 예상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지식은 그냥 어딘가에 떠돌고 있을 뿐이었다.(17-18p)

 

 

그의 범죄를 용서했기에 그의 영화를 사랑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용서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그 사건이 일어난 시대적 조건과 개인사를 이해한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

폴란스키의 인생에 드리운 비극을 부정할 수는 없다. 결국 20세기를 대표하는 두 비극이 그에게, 한 개인에게 일어났다. 그래도 이런 맥락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고 해서 용서 쪽으로 마음이 기울지는 않았다. 이 문제를 앞뒤로 꼼꼼히 따져 보니 참작이 되어 그의 범죄가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었다고 결정 내린 것도 아니었다. 사실 나는 그의 영화가 그저 훌륭해기 때문에 더 보고 싶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폴란스키는 천재이고 그것이 문제 해결의 전부라고 말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볼수록 찌릿한 통증에 가까운 불쾌한 느낌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아니 진실을 말하자면 찌릿한 통증 이상이었다. 내 양심이 나를 방해하고 있었다. 폴란스키의 죄라는 망령이 이 방을 떠나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생각만으로 로만 폴란스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알았다. 시인 윌리엄 엠프슨은 인생이란 결국 분석으로 풀 수 없는 모순 사이에서 자신을 지키는 일의 연속이라고 했다. 나도 그 모순 한가운데에 있었다.

폴란스키의 영화가 형편없었다면 그는 관객에게 아무 고민거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블랙홀이 되어 버린 수많은 남자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가 안다.

 

현대 인물들 중에서 명징한 괴물성과 명징한 천재성이라는 두 가지 힘을 평등하게 만들어 조화를 이룬 인물은 한 명도 없다.

폴란스키는 세기의 명작이라 불리는 작품 중 하나인 <차이나타운>을 만들었다.

폴란스키는 열세 살 서맨사 게일리에게 약물을 먹여 성폭행을 했다.

이렇게 화해할 수 없는 두 사실이 존재한다.

이 모순 사이에서 어떻게 나를 온전히 지킬 수 있을까?(20-21p)

 

 

나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저울, 보편적인 답변이 어딘가에 존재하기를 바랐다. 물론 사람마다 다른 저울을 갖고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 집단 성폭행을 당한 친구는 여성을 유린하고 학대한 창작자의 모든 작품이 폐기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청소년기에 예술로 구원받았다고 하는 게이 친구는 작품과 창작자는 완전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두 사람 말이 모두 맞을 수도 있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사랑해야 마땅한 것이나 사랑해야 마땅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24p)

 

 

남자들은 우디 앨런이 왜 그렇게까지 여자들을 화나게 하는지 알고 싶다고 말한다. 결국 위대한 예술 작품이란 우리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이니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든 말든 자유가 아닌가. 그런데 내가 <맨해튼>을 보고 약간 짜증이 났다고 하면 남자들은 말한다. "그 감정 말고요. 그건 틀린 감정이에요." 그는 권위를 갖고 이야기한다. <맨해튼>은 천재적인 걸작이 맞습니다. 하지만 누가 그렇게 말할 수 있나? 권위가 말하길, 작품은 작가의 삶에 의해 훼손되지 않은 채 순수하게 남아 있어야 한다고 한다. 권위가 말하길, 자서전은 오류라고 한다. 권위는 작품이란 이상적인 상태(역사를 초월한 곳, 고산, 설원, 순수) 위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권위는 창작자의 이력과 과거사를 알면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는 감정을 무시하라 말한다. 권위는 그런 것들에 코웃음을 친다. 권위는 자서전과 역사와 상관없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권위는 남성 제작자의 편을 든다. 관객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역사에 무관심할 수 없고 인물의 이력에 면역되어 있지 않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바로 역사의 승리자들이다. (지금까지는) 그 승자는 남성이다.

여기서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관객이다. 이 상황과 현실을 순순히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순이 사건은 <맨해튼>의 감상을 분명히 방해한다. 또한 영화자체로도 근시안적이고 한계가 있다. 물론 영화에는 추앙받을 요소들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사실이다. 단순히 앨런의 개인사가 상관없어야 한다는 말로 상관없게 만들려는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다.(58-59p)

 

내가 우디와 순이를 험담할 때 느끼는 정당한 분노 속에서 나 또한 어떤 수준에서는 내가 완전히 올곧은 시민이 아님을 알고 있다. 일상적인 행동과 생각 안에서 나는 충분히 상식적인 인간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무엇이기도, 어딘가 불쾌한 사람이기도 하다.

(...)

나는 인간의 조건이 자신 안의 사악함과 나약함을 은밀하게 의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왜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에게 매혹되곤 할까? 우리 안에, 내 안의 무언가가 그 끔찍함에 공명하면서 내 안에 그 끔찍함이 있음을 인식하는 동시에, 그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문제의 괴물을 요란하게 비난하는 드라마에 짜릿함을 느끼는 건 아닐까.

(...)

다른 사람을 비난하려는 충동은 사실 정치적 충동이다. 앞서 나는 '우리'라는 단어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는 책임에서 벗어나는 탈출구가 될 수도 있다. 확성기가 될 수도 있다. 편 가르기가 될 수도 있다. 우리 대 그들. 도덕적인 사람들 대 비도덕적인 사람들. 어떤 사람을 더 잘못되고 그릇된 사람으로 만들면서 어쩌면 우리를 더 옳은 사람, 괜찮은 사람, 도덕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60p)

 

 

문제는 우리가누군가의 인생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 수 있는지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그냥 우리에게 일어난다. <사인펠드>를 켜면 원하건 원치 않건 마이클 리처즈의 인종차별적 발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앎을 향한 이러한 움직임은 대중문화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어 지난 세기에 급성장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점점 더 번성하고 있다. 이제 스타의 개인사를 피할 방법은 없다. 내 생애 동안에도 어마어마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전까지 개인의 이력은 누군가 찾아내고 원하고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얻을 수 있는 정보였다. 이제 그것은 사람들 머리 위로 폭격기처럼 떨어진다.(69p)

 

 

우리는 개인사가 노출된 시대에 살고 있고, 누군가를 유심히 살펴보면 적어도 하나의 얼룩은 찾아낼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 살아온 이력이 있다. 다시 말해서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취소(캔슬) 당했거나 취소당할 예정이다.(73p)

 

 

동료 평론가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여기 오래 앉아 있다 보면 정작 내 인생은 지나가버려." 진짜 인생이 찾아오길 기다리면서 어둠 속에서 앉아만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성싶었다. 밖으로 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까 밖으로 나가서 인생을 '살아야'하는 것 아닐까. 중재인으로 사는 건 그만하자. 나의 낮이 캄캄한 밤으로 채워지는 것도 지겨웠다. 그러던 중에 서서히 변화가 일어났다. 영화는 내게 정확히 인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선물하지는 않았지만 환한 전구가 하나 더 달린 것 같은 삶을 선사했다.(90p)

 

 

하나의 작품을 소비한다는 것은 두 전기가 만나는 일이다. 예술가의 전기가 예술 감상을 방해할 수도 있고, 수용자의 전기가 예술 감상을 다르게 만들 수도 있다. 이는 모든 경우마다 일어난다.(109p)

 

 

예술가는 어느 정도까지 사회적 관습뿐만 아니라 정신적 혹은 정서적 올바름에서 벗어나야 할까? 사회적 관습을 넘어서는 예술가라는 개념은 자유로운 영혼의 이미지, 즉 바이런식의 영웅 이미지 안에서 마취되거나 매끄러워지거나 예쁘게 다듬어진다. 다시 말하지만 이 이미지는 특정 사람에게만 열려 있고 그 사람들은 어쩌다 보니 다들 남자다.(138p)

 

 

생각은 행동이 아니다. 주제가 시험대에 올라온 적은 많았다. 필립 로스는 (다른 많은 작품을 썼지만) 성차별적인 남자에 대해 썼다는 이유로 성차별주의자로 불렸다. 제임스 설터는 마지막 소설에서 성인 남성과 어린 소녀의 성관계를 묘사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남성 욕망의 가장 시커먼 강물에서 나온 기록들이지만 그것을 기록하는 것 자체가 범죄는 아니다.(190p)

 

 

예술을 창작한다는 것과 부모가 된다는 것은 서로에게 매우 효율적인 방해 요인으로 작용하며,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를 속이고 있거나 자녀가 없거나, 남자다.(206p)

 

 

소설가 존 밴빌은 「아이리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약간 거칠게 말하자면 자기는 형편없는 아빠고 그에 더해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럴 거라고 말했다. "(글쓰기는) 너무나 고달픈 일이고····· 내 주변 사람들과 나의 아이들고 고달프게 한다. 나는 좋은 아빠가 아니었다. 작가 중에 좋은 아빠가 얼마나 될지도 모르겠다. 작가란 너무 많은 것을 취하고 너무 많은 산소를 빨아들인다. 이는 사랑하는 이들을 고달프게 한다." 타협에 대한 중언부언은 없다. 그는 더 일반적인 작가론을 펼친다. "우리는 무자비하다. 우리는 좋은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재미있는 사람일 수 있고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킬 수는 있지만 대체로 (우리와 사는 것은) 고역이다."(210p)

 

 

두 가지 방식의 읽기ㅡ"삶에서부터 읽기"와 "시를 위한 읽기"ㅡ가 분리될 수 있다는 개념은 터무니없다. 파델이 말했듯이 두 가지 형태의 작품 감상은 결투를 벌이는 권투선수인 걸까? 지각 있는 사람은 이 두 방식이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못된 분리라는 것을 안다. 그렇다. 현실 속 플라스의 신화가 그녀의 작품을 읽는 데 방해되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 우리는 작품 자체도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그렇다. 가끔은 그녀의 신화가 진지하고 면밀한 독서를 힘들거나 복잡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시를 읽는 더 정확한 방법이 있다는 논리는 어리석다.(270p)

 

 

"모든 사람이 재활용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정치적 성향에 상관없이 누구도 이 명령에는 저항할 수 없다. (···) 재활용을 '모든 사람'의 책임으로 만들면서 구조는 그 책임을 소비자에게 떠넘기고 자신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물러난다. (···) 모든 사람ㅡ개인 한 명 한 명ㅡ에게 기후변화에 대한 책임이 있고 우리 모두 각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대신, 아무도 책임이 없고 그것이 문제라고 말하는 편이 낫다.“

기후변화와 환경문제를 늦추기 위해 해야 할 일의 규모는 너무 방대하기 때문에 개인이나 기관이 감당할 수 없다. 결국 재활용하고 물병을 재사용하고 플라스틱 빨대를 사용하지 않는 등 개인의 책임이 강조되고 있다. 집단적 힘이 없는 우리 원자화된 개인은 매우 용맹스러워 보이는 우리 소비, 우리 행동, 우리 결정이 실은 궁극적으로 의미 없다는 감각만을 갖게 된다.

피셔는 책에서 고립된 소비자로서의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바로 거기서부터 우리 소비의 비도덕성을 받아들이라 요청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계속해서 소비를 윤리적 선택의 장으로 바라보지만 사실 정답은 이 안에 있지 않다. 우리의 판단은 우리를 더 나은 소비자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광경에 갇히게 만든다. 그래서 피셔가 후기 자본주의의 공기라 부르는 이 분위기에 더 연루되고 만다.

예술은 특별한 위치를 갖고 있다. 미술관에서 전시를 관람하는 경험은 이를테면 드라이버 하나를 사는 것과는 다른 문제일 수 있지만, 우리는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해야 할 때도 소비자의 역할에서 문제에 접근한다. 소비자란 근본적으로 타락한 역할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아래에서 괴물성은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

사건이 터지면 비평가들은 곧바로 "그래서 그 X의 작품은 다 버릴 겁니까?"라고 물으면서 자본주의의 시녀가 되어 문제의 초점을 가해자와 가해자를 지지하는 시스템에서 개인 소비자로 옮긴다.

개인의 해결은 자유주의적 계몽주의자들의 이상이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선하게 태어났기에 더 좋은 결정을 한다는 것이다. 자유주의는 시스템에서 시선을 돌려 개인 선택의 중요성에 더 집중하기를 원한다. 후기 자본주의에서 이러한 개인의 선택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소비자의 선택과 연동된다. 당신의 소비가 당신이다. 당신은 결국 당신의 팬덤이다.

(...)

우리는 물건을 살 때 판단력을 발휘하여 도덕성을 구현하려고 하지만 우리의 판단이 우리를 더 나은 소비자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사실상 우리는 통제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 광경에 더 갇히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이 광경의 허구성을 완전히 받아들이면 어떨까?

유명인을 비난하고 퇴출시키는 일은 결국 얼룩이 없는 긍정적인 유명인이 있다는 개념을 강화한다. 나쁜 유명인이란 존재하지 않는 좋은 유명인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주입한다. 유명인이란 도덕성의 주체가 아니고 재현 가능한 이미지일 뿐이다.

사실 우리가 작품을 소비하거나 소비하지 않는 것은 윤리적 행위로서 본질적으로 의미가 없다.

결국 우리에게는 감정이 남는다. 사랑이 남는다. 예술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세계를 환히 밝히고 넓게 확장한다.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사랑한다. 우리가 원하건 원치 않건 얼룩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

다시 말해서 정답은 없다. 당신이 그 정답을 찾아야 할 책임도 없다. 책임감이란 케케묵은 생각이며 비극적으로 제한된 소비자의 역할을 강화할 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권위자도 없고 권위자가 있어서도 안 된다. 이제 당신은 곤경에서 벗어났다. 당신은 일관적이지 않다. 당신은 마이클 잭슨을 어떻게 들어야 할지에 대해 거창하고 통일된 이론 같은 걸 가질 필요가 없다. 당신은 계속해서 위선자로 살 것이다. 당신은 <애니 홀>을 사랑하지만 피카소의 그림을 한 점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당신은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을 해결해야 할 책임이 없다. 사실 소비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당신이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막다른 골목을 만날 뿐이다.

당신이 예술을 소비하는 방식이 당신을 나쁜 사람 혹은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아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294-297p)

 

 

"당신이 1990년에 마일스와 여성들과의 관계를 자세히 다룬 책 「마일스에게 화나다: 진실을 향한 흑인 여성의 가이드」를 읽고는 마일스 데이비스를 이전처럼 듣지 못했다는 재즈 팬들이 정말 많다. 그런데도 그의 음악을 듣고 싶다면 스스로 죄책감을 느껴야 할까?“

클리지는 대답했다. "아니다. 전혀 죄책감을 가질 필요 없다. 마일스는 오래전에 죽지 않았나. 그리고 고백하건대 나 또한 그의 <카인드 오브 블루> 음반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인터뷰를 사랑한다. 우리와 작품과의 관계에서 열린 결말을 말하고 있어서다. 우리는 변하고 작품과 우리의 관계도 변한다. 권위에 또다시 대항할 수 있다. 클리지는 마일스를 사랑하다가 미워하다가 이제는 조금 다르게, 알면서도 사랑한다. 우리의 관계 또한 성장하면서 변한다. 하지만 그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척하거나 사랑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스티븐 프라이는 바그너를 사랑하고, 나에게 데이비드 보위를 들어도 되냐고 묻는 대학생들은 데이비드 보위를 사랑하고, 나는 폴란스키를 사랑한다.

이 사실들이 이상적이지도 않고 때로는 우울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진실임에는 틀림없다.(310p)

 

 

 

ㅡ 클레어 데더러, <괴물들> 中,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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