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10

 

 

“사람이 원한 것이 곧 그의 운명이고, 운명은 곧 그 사람이 원한 것이랍니다. 당신은 곰스크로 가는 걸 포기했고 여기 이 작은 마을에 눌러앉아 부인과 아이와 정원이 딸린 조그만 집을 얻었어요. 그것이 당신이 원한 것이지요. 당신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면, 기차가 이곳에서 정차했던 바로 그때 당신은 내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기차를 놓치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 모든 순간마다 당신은 당신의 운명을 선택한 것이지요.”

“그건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말했다.

“의미없는 삶이 아니에요. 당신은 아직 그걸 몰라요. 당신은 이것이 당신의 운명이라는 생각에 맞서 들고 일어나죠. 나도 오랫동안 그렇게 반항했어요. 하지만 이제 알지요. 내가 원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이후에는 만족하게 되었어요.”

(...)

나는 곰스크로 갈 때를 대비해 항상 돈을 저축했다. 일이년 후에 아이가 좀더 자라면 출발하려고 했다. 적당한 일자리를 구하는 동안 배를 곯지 않을 정도의 돈도 충분히 모았다. 물론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는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우리의 둘째가, 이번에는 여자아이가 태어나자 내 계획은 좀더 뒤로 밀려났다.

(...)

오늘까지도 여전히 그것은 나를 사로잡는다.(59-62)

 

 

 

ㅡ 프리츠 오르트만, <곰스크로 가는 기차> 中, 북인더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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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8

 

 

 

“조사관님은 대통령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사람이 자기 주변의 객관적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믿으실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모든 객관적 사실들이 우리에게 다 똑같은 수준으로, 필수불가결하게 중요한가요? 내가 만약 태양광발전 사업자라면, 햇빛을 많이 받아야 잘 자라는 작물을 키우는 농부라면 하늘이 흐린지 아닌지 정확히 알아야 할거예요. 하지만 그저 산책을 즐기는 행인이라면 밖에 나가 있는동안 비가 올지 안 올지만 알면 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이 흐리면 기분이 가라앉죠. 우리가 그런 동물이니까. 그렇게 진화한터라. 그럴 때 하늘을 파란색으로 보이게 해주는 색안경을 쓰면 기분이 좋아질 겁니다. 그런 색안경을 쓰면 안 될 이유가 뭐죠? 색안경이 외부의 객관적 사실을 왜곡한다고?”(22p)

 

 

그러나 아무리 우호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수정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과 자아 정체감을 잃게 될 가능성이었다. 다른 사람이 알려준 정답과 스스로 고른 오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후자다. 사람은 오답을 선택하면서 그 자신이라는 한 인간을 쌓아가는 것이다.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약’을 먹고 올바른 판단을 하게 되더라도, 누군가 몰래 물에 타놓은 그 약을 모르고 먹게 되는 것과 스스로 복용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84-85p)

 

 

「뉴요커」에 원고를 보내는 순간까지 내가 체험 기계의 의미를 파악하게 될 것 같지는 않다(아마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누구도 모를 것이다). 이 기계가 인류에게 축복인지 저주인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나는 마지막으로 하버드대 철학과 폴 레비나스 교수의 주장을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레비나스 교수는 프랑스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달리, 타자화와 배제는 인간존재와 인간적 사유의 본질이라고 역설한다. 인간성은 숭고하고 근원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거기에 속해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한 거듭되는 부정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픽션이라는 말이다. 인류의 윤리는 모두 그런 타자화와 배제를 통해 발전돼왔다는 것이다.

연쇄살인마, 성폭력범, 아동 학대범들에게도 각각의 사연이 있다. 그러나 그 사연을 굳이 귀기울여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래야 한다면 어떤 이유에서인가? 단순히 그들이 우리와 닮은 존재여서인가? 아니면 인간의 한계가 안 좋은 방향으로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인가? 다른 인간에 대한 이해는 때로 인간성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게 레비나스 교수의 관점이다. 레비나스 교수는 하버드대 신문에 발표한 특별 기고문에서 이렇게 썼다.

"종종 타인은 지옥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지옥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곳에 있음에 우리는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171p)

 

 

그렇다면 자연적으로 자란 식용식물을 채취해서 먹는다면? 그리고 배양육은? 여기서 나는 다른 질문을 던지고 싶다. 술에 몹시 취했거나 깊이 잠든 사람을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성폭행하는 일은 나쁜가? 청각장애인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시각장애인의 얼굴 앞에 가운뎃손가락을 세우는 일은 나쁜가? 신경계가 다 자라지 않은 태아를 총름파나 방사선으로 원거리에서 조각조각내는 일은 나쁜가? 나쁘다면 왜 나쁜가?

즉, 내가 묻고 싶은 바는 이것이다. 내가 어떤 도덕적 명령을 지키고자 할 때 그 대상이 고통을 느끼느냐의 여부가 과연 중요한가?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싶고, 내가 의심 없이 믿을 수 있는 확실한 도덕적 명령은 '살생하지 말라'는 것이다. 식물 역시 생명이므로 나는 식물을 죽이고 싶지 않다. 동물의 알을 먹지 않는 것처럼 곡물이나 씨앗을 먹는 일도 피하고 싶다.(187p)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측이나 분석이 아니라 행동이다. 언제나. 그날 마콘도의 주방에서 그 단순한 진실을 알았던 사람은 송유진이 아니라 대리였다. 그녀는 송유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몸을 던지기로 했다. 그녀는 얼굴을 들고 눈을 감은 채 송유진에게 다가갔다.(380p)

 

 

ㅡ 장강명,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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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

 

 

올해 노벨상 수상 작가의 작품 성향이 딱 봐도 내가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아 보여서 읽지 않으려다가 마침 모임 책으로 선정되어 읽어보았다.

아침과 저녁의 순환을 인간의 삶과 죽음으로 빗대며 담담하고도 차분하게 풀어나가는 짧은 소설이었다. 크게 재밌다거나 와닿지는 않았다. 저자의 다른 소설인 멜랑콜리아는 안 읽어도 되겠다. 영화 멜랑콜리아는 정말 재밌는데...

 

 

 

ㅡ 욘 포세, <아침 그리고 저녁>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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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

 

 

어떤 한 가지에 집중한다는 것은 다른 것들을 무시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어떤 책이나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깊이 몰입한 나머지 옆에 앉은 사람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집중의 힘을 뒤집어서 말하면 다른 것들을 지우는 힘이다. 결핍이 ‘집중하게 한다.’고 말하지 않고 결핍이 사람들로 하여금 터널링을 하도록, 즉 임박한 결핍을 제어하는 데만 오로지 모든 초점을 맞추고 집중하게끔 유도한다고 쉬운 말로 말할 수 있다.(60-61p)

 

 

결핍도 사람의 정신적인 프로세서에 비슷한 짓을 한다. 다른 처리 사항들을 정신에 끊임없이 짐 지울 때 정신은 긴급한 과제를 수행할 여유가 적어진다. 이로써 우리는 이 장의 중심적인 가설인 ‘결핍은 대역폭을 직접적으로 축소한다.’에 도달했다. 개인이 처음부터 타고난 능력이 중요한 게 아니라 현재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얼마이냐가 중요하다.(94-95p)

 

 

그렇다면 무엇이 결핍에 대해서 그렇게 특별할까?

결핍은 기본적인 속성상 여러 중요한 근심거리가 다발로 한 데 뭉친 것이다. 어느 곳 혹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부부싸움과 다르게, 돈 문제나 시간 문제와 관련된 몰입은 가난한 사람과 바쁜 사람 주변에 꼬여서 좀처럼 떠나지를 않는다. 가난한 사람은 끊임없이 돈과 관련된 근심거리와 씨름해야 하고, 바쁜 사람 역시 시간과 관련된 근심거리와 씨름해야 한다. 결핍은 다른 근심거리들보다 우선되는 짐을 추가로 생성한다. 그리고 당연하게 지속적으로 대역폭에 세금을 부과한다. 모든 사람이 같은 상황에 놓일 수 있다. 부자든 빈자든 자기 배우자와 싸울 수 있고, 또 자기 상사로부터 질책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풍족함을 경험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일부만 이런 문제에 사로잡히는 반면에 결핍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이런 문제에 사로잡힌다.(123p)

 

 

패스트푸드 가게의 매니저는 자기 직원들이 보이는 행동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숙련된 기술이 부족하다거나, 동기부여가 되어 있지 않다거나, 손님 응대 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거나 하는 등의 일상적인 대상으로 눈을 돌린다. 사실상 세금이 부과된 대역폭은 실제 현실에서 이런 식으로 비쳐질 수 있다. 즉, 회사일로 급하게 준비해야 하는 프레젠테이션 작업에 사로잡힌 아버지가 딸에게 퉁명스러운 말을 쏘아붙일 때 이 사람은 나쁜 아버지로 보인다. 돈에 쪼들리는 대학생이 시험에서 쉬운 문제 몇 개를 틀렸을 때, 이 학생은 게으르거나 무능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업무에 숙련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부주의한 것도 아니다. 단지 무거운 대역폭 세금에 짓눌려 있을 뿐이다. 문제는 그 사람 개인이 아니라 결핍이다.(127p)

 

 

덜 바쁜 사람의 경우, 느슨함은 실수를 흡수해서 부정적인 결과를 최소화한다. 이에 비해서 바쁜 사람은 실수의 부정적인 결과를 쉽게 떨쳐내지 못한다. 추가되는 시간만큼 다른 것을 희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동일한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대가를 훨씬 더 크게 치러야 한다. 우리는 조금 전에 느슨함이 얼마나 비효율적일 수 있는지 살펴보았다. 우리는 한 번도 쓰지 않을 물건을 사며 돈과 시간을 비효율적으로 사용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느슨함에 감추어져 있는 어떤 유효성을 발견할 수 있다. 느슨함은 실수를 저질렀을 때 만회할 수 있는 여지, 실패를 해도 괜찮을 여유 공간을 제공한다.(157-158p)

 

 

 

ㅡ 센딜 멀레이너선·엘다 샤퍼, <결핍의 경제학> 中, R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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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7

 

 

숨가쁜 추모와 기간을 정한 애도를 하며 ‘슬픔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고 자못 엄숙한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본 뒤 슬픔에만 머무르라고 강요하는 건 이상하다. 구경하는 눈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많으니까. 본 뒤에는 우리끼리 눈을 마주치고 우리가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할지를 함께 고민하는 일이 남아있으니까. 어쩌면 이런 선언은 참사의 책임을 묻기 위해 정치가 가동되는 순간을 원천 봉쇄하는 커다란 부작용을 낳고 있지는 않을까?

우리가 고통을 보는 이유는 다른 이의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연대를 통해 느슨한 공동체를 일시적으로나마 가동하여 비슷한 아픔을 막아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34p)

 

 

이 모든 것으로 인해 날씨는 경제이기도 한데, 농업과 어업 같은 1차 산업은 물론, 물류의 흐름과 인력의 출퇴근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날씨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가혹하고 무정해 보이지만, 실은 차별 없음과 거리가 멀다. 날씨가 몰고 오는 위험함과 불쾌함은 일정 부분 값비싼 주거 환경이나 적절한 냉난방 시설로 다스릴 수 있다. 그러니 날씨로 인해 가장 먼저 취약해지는 건 약자들이다.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그리고 노인.(77p)

 

 

기후 위기를 취재해 온 미국 언론인 제프 구델은, 폭염 같은 기후 위기가 가장 약한 사람들을 약탈적으로 추려내던 시기가 곧 지나갈 것이라고 예견한다. 위기가 심화될수록, 앞으로는 훨씬 더 공평하고 민주적으로 이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89p)

 

 

문제는 산업재해라는 고통의 흔함이다. 흔한 고통은 문제가 아닌 문화가 되어 사회 안에 천연덕스럽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통계는 이 기사 저 기사에 인용되며 산업재해가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보여주기도 하지만, 잘 정리된 숫자 속으로 진짜 이야기들을 빨아들여 감춰버리기도 한다. 산업재해가 흔하면 흔할수록 ‘끊이지 않는 산재’같은 제목을 단 기사를 계속해서 만들기도 새삼스러워진다.

흔한 사고일수록, 어디서나 보이는 사고일수록 그 고통을 보는 일에 능숙해지고, 주기적으로 비슷한 소식을 들은 나머지 거의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결국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되지 않는다는 패러독스에 빠진다.(94p)

 

 

보도란 ‘누군가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말하는 일이고, 그 하나하나의 고통 역시 누군가에게 속한 것이기에, 취재를 통해 소통에 침범하는 일은 결국 누군가의 삶에 침입하는 일이었다. 어떤 고통이 문제라고 말하는 건, 고통이지만 끝내 당신의 것인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이걸 취재하는지 잘 이야기하고 동의를 받은 것만으로는 다 무를 수 없는, 취지가 좋은 것만으로는 다 메울 수 없는, 취재 자체가 사람들에게 남기는 상처가 있었다.(120-121p)

 

 

그런데 취재에 응하는 미화원들의 표정이 좀 떨떠름해 보였다. 지하에 휴게실이 있었을 때가 낫다는 것이었다. 무슨 말인가 싶어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보니, 미화원들이 쉬는 모습이 지상으로 나와 ‘눈에 띄게’되자 입주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이었다.(123p)

 

 

강자들의 선행만큼은 아니겠지만, 약자들의 선행은 종종 스포트라이트를 받곤 한다. 물론 약자들의 선행이 과다 재현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

다만 약자들이 선행이 뉴스가 될 때는, 이들이 약자라는 부분에 뉴스 가치가 실린다. 약자라는 점이 필요 이상으로 강조될 때도 있다. 내가 느끼는 불편함은 공동체의 도덕심을 환기하는 역할까지 약자들에게 과다 부여된 것은 아닌가 하는 노파심에서 온다. 연말이면 자기 재산을 다 기부하는 ‘착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뉴스에 등장한다. 이런 뉴스들에는 “아직 회망이 있다”, “사람 사는 사회다”, “따스한 온전을 느꼈다”는 반응들이 따라오곤 한다.

이들이 겪는 ‘불우함’, 그걸 견뎌낸 ‘근면함’과 ‘베푸는 마음’이 순차적으로 조명될 때, 이런 뉴스들은 누구를 향해 어떠한 메시지를 보내게 될까? 뉴스 매체의 메시지 주입 능력을 과신하는 건 아니지만, 혹여 이런 뉴스가 약자들의 도덕성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고 행동의 폭을 더 옭아매는 것은 아닐까?(132p)

 

 

앞서 말했듯 특혜에서 배제된 집단으로 묘사되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은 선한 일을 하는 경우에도 악한 일을 하는 경우에도 약자라는 맥락 안에서 조명받곤 한다. 약자의 선행을 바라볼 때는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이나 계층의 특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한 개인의 독특한 선함의 질감을 놓치지 않도록, 악행을 바라볼 때는 개인의 악함으로는 다 포착되지 않는, 그가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영향을 미친 사회적 요인과 모순에 고루 책임을 묻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136p)

 

 

<공감의 배신>에서 폴 블룸이 이야기했듯, “공감은 형편없는 도덕 지침”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공감은 지금 여기 있는 특정 인물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스포트라이트”와도 같아서 “그 사람들에게 더 마음을 쓰게 하지만, 그런 행동이 야기하는 장기적 결과에는 둔감해지게 하고, 우리가 공감하지 않거나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은 보지 못하게 한다”.(148p)

 

 

 

ㅡ 김인정, <고통 구경하는 사회> 中, 웨일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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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7

 

 

 

나는 이 취미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게 있어 취미란 단어는 악취미의 줄임말과 같은 뜻으로 종종 사용된다. 사람들이 진짜로 즐기는 유희는 고상한 것보다는 다분히 악의적인 것들이 훨씬 많다. 실제로 언제 어디서든 당당하게 클래식 음악 감상이 취미라고 말하던 커피 전문점 사장의 진짜 취미는 유부녀 홀리기였다. 사장 말을 그대로 옮기면 이 취미는 돈도 들지 않고, 위험 부담도 없는 데다, 짜릿한 재미까지 철철 넘친다고 했었다. 이 취미에 문제가 있다면 신상카드에 떳떳이 기록할 수 없다는 것뿐이다.

(...)

사람들이 때때로 어떤 거래나 협상의 자리에서 아주 진지한 얼굴로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절대 믿지 않는다. 그런 말은 기교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결국 돈이라는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다.(13-14p)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21p)

 

 

영화를 볼 수도 있고 보지 않을 수도 있다면 훨씬 흥미로울 것이었다. 설령 영화를 보았다 하더라도 그 다음의 시간들이 백지 상태로 놓여 있다면 그만큼 더 흥미가 발생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영규라면 절대로 시간을 그런 식으로 방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영화를 보아야 하는 사람이고, 마음에 정해둔 음식점에서 정해진 메뉴대로 식사를 해야 할 사람이며, 역시 마음에 계획한 도로를 달려서 나를 집에 데려다주는 것으로 오늘의 일과를 끝내려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76p)

 

 

“내 이름은 안진진. 돈 갚을 때는 조용히 안진진을 찾으세요. 아셨죠?”(113p)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127p)

 

 

‘8월 27일. 밤 10시 정도. 장소는 유리 천장이 있는 환상적 분위기의 카페로 정한다. 먼저 여자의 손을 잡는다. 별다른 저항이 없으면 십 분쯤 후 청혼한다·····.’

그것은 나영규가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작성해온 8월 27일자 인생계획서 중의 한 부분일 것이었다. 그의 청혼에는 놀라지 않았지만, 상상 속의 이 인생계획서는 나를 전율케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

그리고 나는 또 보았다. 조금 전 상상 속에서 보았던 그의 인생계획표 다음 구절을.

‘성공적인 청혼 후에 기회를 봐서 기습적인 키스 감행. 서두르지 말고 자연스럽게 할 것······’

(...)

그런데 그것도 모두 미리 짜놓은 인생계획서대로 움직인 것이라면? 여자에게 샌드위치를 먹인다, 약 한 달간 매일 함께 먹는다, 그리고 말한다, 자꾸 좋아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라고 메모하고 있었던 일이라면·····.

(...)

나는 몹시 궁금했다. 그가 나영규이든 김장우이든 아니면 전혀 다른 사람이든 간에, 이 사람과 결혼하고야 말겠어, 라는 결심은 언제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지금 결혼하여 살고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160-165p)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은 말이 아니었다. 상처는 상처로 위로해야 가장 효험이 있는 법이었다. 당신이 겪고 있는 아픔은 그것인가, 자, 여기 나도 비슷한 아픔을 겪었다, 어쩌면 내 것이 당신 것보다 더 큰 아픔일지도 모르겠다, 내 불행에 비하면 당신은 그나마 천만다행이 아닌가·····.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188p)

 

 

선운사 도솔암 가는 길에서 처음으로 나, 안진진의 사랑을 상면한 이후 내 기분은 급격히 저조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다. 나는 다만 이것이 사랑인가, 하고 사랑을 묻다가 이것이 사랑이다, 라고 스스로에게 답했을 뿐이었다.

오직 그것이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점점 가라앉기만 했다. 걸음은 자꾸 허방을 디뎠고, 눈길은 쓸쓸하게 텅 빈 허공을 헤매었다.

(...)

나는 당황했다. 누구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사랑을 만난 다음이 이렇다는 고백을 나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 자매에게서 물려받은 기질로 잡다한 책들을 제법 많이 읽었다고 자부하는데, 영화광은 아니더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영화도 많이 보았는데, 그렇다면 모든 책과 영화들이 나를 속인 것이었을까. 사랑을 맞은 후의 느낌이 이토록 황폐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거짓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나에게, 이 안진진에게 문제가 있음이 확실했다.(195-196p)

 

 

나에게 있어서 결혼은 전력투구할 내 삶의 중대한 출발점이었다. 스물다섯의 나이에 가질 수 있는 여러 가지 결단 중에서 나는 결혼을 선택한 것이었다.

내가 결혼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 제발, 부탁이니, 누구도 비난하지 말기를 바란다. 여자 나이 스물다섯에 할 수 있는 결단이 꼭 결혼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나처럼 결혼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결혼 대신 공부를 택하는 사람도 있고, 결혼 대신 자기만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도 있으며, 결혼을 비웃으며 결혼할 나이에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는 여자도 분명 있다. 나라고 해서 그 모든 길들에 대해 충분히 사색하지 않았겠는가. 이미 섭렵은 끝났다. 사색이 깊은 나머지 인생 자체가 졸렬해지고 말았다면, 이젠 이해할 수 있을까.(217p)

 

 

그러다가 나는 마침내 중요한 단서 하나를 찾아내었다. 김장우와 나영규에게로 향하는 화살표의 모양이 어떻게 다른지 변별해낼 수 있는 하나의 단서.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유사 사랑인지 알 수 있는 하나의 단서.

미리 말하지만 이것은 나에게만 해당하는 특별사유일지도 모른다.

(...)

사랑은 그 혹은 그녀에게 보다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으로 시작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보다 ‘이랬으면 좋았을 나’로 스스로를 향상시키는 노력과 함께 사랑은 시작된다. 솔직함보다 더 사랑에 위험한 극약은 없다. 죽는 날까지 사랑이 지속된다면 죽는 날까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지 못하며 살게 될 것이다. 사랑은 나를 미화시키고 나를 왜곡시킨다. 사랑은 거짓말의 유혹을 극대화시키는 감정이다.(218p)

 

 

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지난 늦여름 내가 만난 주리가 바로 이진리의 표본이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준 주리였다. 인간을 보고 배운다는 것은 언제라도 흥미가 있는 일이었다. 인간만큼 다양한 변주를 허락하는 주제가 또 어디 있으랴.(229p)

 

 

나는 내게 없었던 것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전에도 없었고, 김장우와 결혼하면 앞으로도 없을 것이 분명한 그것, 그것을 나는 나영규에게서 구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이모가 그토록이나 못 견뎌했던 ‘무덤 속 같은 평온’이라 해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삶의 어떤 교훈도 내 속에서 체험된 후가 아니면 절대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이 모순, 이 모순 때문에 내 삶은 발전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296p)

 

 

 

ㅡ 양귀자, <모순> 中, 도서출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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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4

 

하루키 신간 읽고 나서 뭔가 허전해서 옛날 작품 중 한 권과 비교하며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알아봤다. 데미안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감상과 비슷한 느낌이 이 책에 들었다. 어떤 책은 특정한 시기에 읽는 것이, 아니, 오직 특정 시기의 독서에서‘만’ 영향을 발휘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나는 항상 가벼운 혼란에 휩싸인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명제에 따라다니는 고전적인 패러독스에 발목을 붙잡히기 때문이다. 즉, 순수한 정보량을 두고 말한다면 나 이상으로 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내가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 거기에서 설명되는 나는 필연적으로 그 설명을 하는 나에 의해(그 가치관이나 감각의 척도, 관찰자로서의 능력, 여러 가지 현실적 이해 관계에 의해) 취사 선택된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설명되는 ‘나’의 모습에 어느 정도의 객관적 진실이 있을까? 나는 그 점이 늘 마음에 걸린다. 아니, 예전부터 일관성 있게 마음에 걸렸던 문제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 대부분은 그런 공포나 불안을 거의 느끼지 않는 듯하다. 사람들은 기회가 있으면 놀라울 정도로 솔직한 표현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하려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나는 바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정직하고 개방적인 사람입니다.”

“나는 쉽게 상처받기 때문에 사람들과 유대 관계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상대의 마음을 간파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하지만 나는, 쉽게 상처받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히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았다. 정직하고 개방적인 사람이 자기는 깨닫지 못하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변명과 거짓말을 하는 모습을 보았다. 사람의 마음을 간파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교언영색에 너무나 쉽게 속아넘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런 점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만약 그럴 필요가 있을 경우라 해도)보류하고 싶어진다.(79p)

 

 

나는 그때 이해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멋진 여행의 동반자이지만 결국 각자의 궤도를 그리는 고독한 금속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것은 멀리서 보면 유성처럼 아름답지만 실제로는 각자 그 틀 안에 갇힌 채 그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죄인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두 개의 위성이 그려 내는 궤도가 우연히 겹쳐질 때 우리는 이렇게 얼굴을 마주볼 수 있죠. 또는 마음을 합칠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건 잠깐, 다음 순간에는 다시 절대적인 고독의 틀 안에 갇히게 되는 거예요. 언젠가 완전히 연소되어 제로가 될 때까지 말이에요.(161-162p)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물의 이면에는 우리가 모르는 사항이 거의 같은 비율로 감추어져 있으니까.

 

이해는 항상 오해의 전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여기에서의 이야기지만) 내가 세계를 인식하는 작은 방법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은 사실 샴쌍둥이처럼 숙명적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혼돈으로서 존재한다. 혼돈, 혼돈.

대체 누가 바다와, 바다가 반영시키는 그림자를 구분할 수 있을까? 또는 비와 외로움을 구분할 수 있을까?(182p)

 

 

 

ㅡ 무라카미 하루키, <스푸트니크의 연인> 中, 자유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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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8

 

장편은 7년 만에 읽는 듯.

 

 

 

“뭐가 있었냐고? 아아, 그걸 설명할 수 있다면 오죽 좋겠나.”

(...)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ㅡ거기 있던 게 결코 사람이 봐서는 안 되는 세계의 광경이었다는 걸세. 그러나 한편으로는 누구나 자기 안에 품고 있는 세계이기도 하지. 내 안에도 있고, 자네 안에도 있어. 그럼에도 역시, 사람이 봐서는 안 되는 광경이라네. 그렇기에 우리는 태반이 눈을 감은 채로 인생을 보내는 셈이고.”

(...)

“이해하겠나? 그걸 보면, 사람은 두 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해. 일단 눈으로 보면····· 자네도 모쪼록 조심하게나.”102p)

 

 

매일 먹을 음식을 직접 만들고, 헬스장에 가서 건강을 챙기고, 일상을 청결히 유지하고, 남은 시간에는 책을 읽는다. 독신 생활에는 규칙성을 중시하는 것이 제일이다ㅡ규칙성과 단조로움 사이에 선을 긋기가 가끔 어렵다 해도.

주위에는 내 생활이 자유롭고 속 편하게 비쳤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나는 그 자유를, 일상의 평온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라는 인간이 어찌어찌 감당할 수 있는 유의 삶이지, 다른 이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삶이었을 것이다. 너무 단조롭고, 너무 고요하고, 무엇보다 고독했으므로.(193-194p)

 

 

“나는 내 그림자가 아무래도 신경쓰여. 특히 최근 들어서. 자기 그림자에 대해 인간으로서 져야 할 책임 같은 걸 느끼지 않을 수가 없어. 과연 나는 내 그림자를 지금껏 정당하게, 공정하게 대해왔을지.”(247p)

 

 

“기다리는 것엔 익숙해”라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내뱉는 숨이 딱딱한 물음표가 되어 허공에 하얗게 떠오른다.

나는 기다리는 것에 익숙한 게 아니라, 그저 기다리는 것 말고는 아무런 선택지도 주어지지 않았던 게 아닐까?

게다가 애당초 나는 지금껏 대체 무엇을 기다려왔다는 건가?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정확히 알고나 있었을까? 자신이 무엇을 기다리는지 명확해지기를 그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게 전부인 건 아닐까? 나무상자 하나에 들어간 더 작은 나무상자, 그 나무상자에 들어간 더 작은 상자. 끝없이 정묘하게 이어지는 세공품, 상자는 점점 작아진다ㅡ그리고 또한 그안에 담겨 있을 것도. 그것이야말로 내가 지금껏 사십몇 년을 살아온 인생의 실상이 아닐까?(681p)

 

 

“어느 쪽이 본체고 어느 쪽이 그림자냐 하는 건 큰 문제가 아니라고?”

“그렇습니다. 그림자와 본체는 아마 서로 교체되기도 할 겁니다. 역할을 교환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본체가 됐건 그림자가 됐건, 당신은 당신입니다. 그 사실은 틀림이 없어요. 어느 쪽이 본체고 어느 쪽이 그림자인가를 따지기보다, 각자 서로의 소중한 분신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오히려 맞을지도 몰라요.”(751-752p)

 

 

 

 

ㅡ 무라카미 하루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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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9

 

 

은주와의 대화 이후, 그제야 기본을 다 갖춘 삶 이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밥벌이해 먹고사는 데야 이 월급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그 이후는 어떻게 꾸려나갈 건가.

(...)

또 기계처럼 일했고 공장에서 열두 시간을 보냈다. 힘들진 않았다. 다만 허무했다. 집에 돌아와 샤워하고 영화 한 편이나 애니메이션 네 편 보면 또 회사. 맘놓고 쉴 수 있는 날은 고작 하루. 그나마도 야간에서 주간 전환 시엔 반나절 남짓. 이 굴레 안에 청춘을 계속 가두어놓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47p)

 

 

그제야 나 자신의 안일함을 깨달았다. 내가 누린 일상이란 그저 불행이 닥치지 않았기에 유지됐을 뿐. 나 또한 언제든 다칠 수 있으며, 사고로 인해 삶이 끝날 수 있단 생각이 들자 온갖 나쁜 미래상이 그려졌다. 일상이 무너진 현실을 상상하니 두려워졌다. 누가 중소기업의 이런 현실을 알아줄까? 기자? 정치가? 금속노조? 진보 지식인? 아니다. 당사자의 목소리가 없는 공론은 허상일 뿐. 그날부터 현장의 모습을 촘촘하게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211-212p)

 

 

냉소는 인간의 가장 나쁜 감정입니다. 분노나 증오마저 마음먹기 따라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지만 냉소는 그저 사람을 게으르게 만들 뿐이에요. 대상을 이해할 생각도 없고 공감하지도 못하니 무슨 발전이 가능하겠습니까.(272p)

 

 

ㅡ 천현우, <쇳밥일지>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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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16

 

 

제목만 보고 예상했던 내용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그러니까 나는 대충 멋진 신세계의 ‘소마’와 같은 약물을 모두가 사용하는 세계를 다룬 작품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는 말. 오히려 그런 약물을 원래 의도했던 목적과는 다른 의도로 사용하는 사이비 집단과 그에 얽힌 인물들의 이야기에 더 가까웠다. 정보라 작가가 쓴 작품 중 처음으로 읽은 책.

 

 

인간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여 삶을 견딥니다. 고통에 초월적인 의미는 없으며 고통은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의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생존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인간은 의미와 구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284-285p)

 

 

 

 

ㅡ 정보라, <고통에 관하여> 中,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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