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5

 

 

뻔히 책 표지에 적혀있어서 할 말은 없는데 대충 봐서 그랬는지 현대사상이라고 해놓고 프랑스 현대철학자들만 나와서 좀 당황스러웠다. 입문서에 깊이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므로 평소 여러 책에서 조금씩 접했던 프랑스 현대철학자들의 사상에 조금 더  익숙해지는 시간이었다. 데리다, 들뢰즈, 푸코로 시작하는 초반은 굉장히 간명하고도 쉽게 설명하므로 쉬이 따라갈 수 있으나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어려워진다. 철학 초심자를 위한 배려로 상이한 입장을 가진 철학자들을 하나의 큰 도식으로 뭉뚱그려 엮었다는 점은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확실히 사람은 일을 더 진척시키려면 다른 가능성을 잘라 버리고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때 무엇인가를 잘라 버렸다. 고려에서 배제해 버렸다는 것에 대해 창피하다는 생각이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때 잘라 버린 것을 다른 기회에 회복하려 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또 가고정과 차이의 이야기를 떠올려 주었으면 하는데요, 모든 결단은 그것으로 이제 아무 미련 없이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미련을 동반하는 것이고, 그러한 미련이야말로 바로 타자성에 대한 배려입니다. 우리는 결단을 거듭 되풀이하면서 미련의 거품 속에서 다른 기회에 어떻게 응할 것인가를 계속 생각해야 합니다. 탈구축적으로 사물을 봄으로써 편향된 결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항상 편향된 결단을 할 수밖에 없는데, 거기에 잠재적인 아우라처럼 타자성에 대한 미련이 뒤따른다는 것을 의식하자는 얘기입니다. 그것이 데리다적인 탈구축의 윤리이며, 바로 그런 의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친절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51-52p)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은 밖에서부터 반강제로 주어지는 모델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 속에서 여러 가지 도전을 해서 스스로 준안정상태를 만들어 나가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꽤 엄격한 요구입니다.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들뢰즈+가타리가 생각하는 것은 모종의 예술적, 준예술적 실천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활 속에서 독자적인 거처가 되는, 자신의 독자적인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활동을 여러 가지 만들어 나가자고 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도 좋고, 관엽식물을 기르는 것도 좋고, 사회 활동에 몰입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한 새로운 활동을 다양하게 조직화함으로써 인생을 준안정화해 나가면 되는 것이지, ‘진정한 나의 본모습’을 탐구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를 하자, 여러 가지를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될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상은 그렇게 낙관적이고, 행동으로 사람들의 등을 떠밀어 주는 사상이거든요.(72p)

 

 

그런데 그러한 정신분석은 어떤 식으로 현대사상과 연결되어 있을까요?

다시 말하면, 현대사상은 정신분석을 비판하지만, 원래는 정신분석에서 영감을 얻고 있습니다. 앞 장에서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를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19세기에 표면의 질서 아래 숨겨져 있는 힘의 차원이 발견되고 20세기에 이르러 그러한 탈질서적인 것의 창의성이 얘기되었습니다. 표면의 질서는 이항대립적으로 조립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도망치는 것은, 데리다라면 탈구축에 의해 질문되는 회색 지대이고, 들뢰즈라면 도주선 끝의 외부라는 것이 됩니다. 인간의 사고나 행위에는 질서 정연한 것만이 아니라 불합리한 힘의 흐름에 맡겨져 있는 면이 있고, 인간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이르려면 질서를 벗어나는 디오니소스적이고 꺼림칙한 것을 인간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정신분석은 인간에 대한 하나의 정의를 줍니다. 그것은 “인간은 과잉의 동물이다”라는 것입니다.(144p)

 

 

그런데 언어는 분별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이쪽은 이쪽, 저쪽은 저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언어습득이란 어떤 의미에서 세계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언어를 습득하지 않으면 인간은 도구를 제대로 조작할 수조차 없습니다. 아마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겁니다. 동물의 경우라면 언어를 습득하지 않고서도 일정한 행동을 취할 수 있지만, 동물이 본능적으로 사물을 구별하고 분절하여 파악하는 반면, 인간은 언어습득과의 관계에서 세계를 다시 분절하는 ‘제2의 자연’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그 안에서 목적적인 행동을 취할 수 없습니다. 언어란 들뢰즈의 어휘를 사용하면 ‘제도’의 일종입니다.

목적적, 실리적으로 사물을 구별하고 행동하는 ‘제대로 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경계를 넘어 여러 사물을 접속하는 상상력은 약해집니다.

그런데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상상력의 리좀적 전개와 언어적 분절성은 인간에게 병립되어 있습니다.(158p)

 

 

 

데리다, 들뢰즈, 푸코에서 공통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올바른 의미다”라고 확정할 수 없고 항상 취하는 관점에 따라 의미 부여가 변동한다는 의미의 결정 불가능성 혹은 상대성입니다.

다만 이것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정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물은 복잡하다”라는 것입니다. 다의적, 양의적이라는 거죠.

예를 들어 푸코라면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지배자가 지배에 가담하는 면이 있고, 그래서 단순히 어느 한쪽이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역학이 복잡하게 있다는 식으로 현실의 복잡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둘 다 그게 그거니까 “둘 다 나쁘지 않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런 현대사상의 경향은 단순화되고 소박한 상대주의로 파악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물은 어떻게든 파악된다”라거나 “그런 입장을 취하고 있으면 역사수정주의가 된다”라거나 “‘탈진실’이라고 일컬어지는 제멋대로의 사실 인식 강요나 음모론을 허용하게 되는 것 아니냐”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확실히 현대사상은 그러한 현대의 곤란한 현상을 일도양단으로 [과단성 있게] 비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의 사고·언어에는, 예를 들어 음모론에도 이르게 될 가능성이 애초에 있다는 것을 먼저 냉정하게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런 건 안 좋으니까 없애 버리세요”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어요.

인간은 애초에 정신분석적으로 말해도 ‘과잉’적인 존재이며, 일정한 의미의 틀을 벗어나 사물에 다르게 의미를 부여하려는 경향이 있기에, 그것이 뚱딴지같은 망상으로 전개되는 것은 인간의 기본 설정으로서 있을 수 있습니다.(196-198p)

 

 

다시 푸코가 등장하게 됩니다. 푸코는 왜 고대로 회귀했을까요?

3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성의 역사 Ⅳ』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마음에 해소할 수 없는 죄책감을 설치함으로써 무한하게 반성을 강요받는 주체를 정립했습니다. 이 죄책감, 즉 원죄란 바로 부정신학적 X입니다. 기독교의 주체화는 바로 부정신학적 주체화입니다. 거기서 푸코는 그 이전의, 말하자면 무한하게 반성하지는 않았던 시대의 사람들에게서 일종의 가능성을 보게 됩니다.

세네카 같은 로마의 현인들은 뭔가 잘못을 저질렀어도 그것을 근원적인 죄로 여기지 않고 하루의 일과 끝에 일기를 쓰고 반성하며 “더 이상 하지 말자”라고 스스로에게 말할 뿐이었습니다.

(...)

즉, 수수께끼의 X를 파고들지 않고, 생활 속에서 과제가 하나하나 완료되어 간다는 그런 이미지의, 담담한 유한성입니다. 주체란 우선 행동의 주체이지 정체성을 고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러 가지 문제가 반드시 하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관련된 문제는 있지만, 모든 문제가 연결되어 하나로 뭉칠 때, 사람은 엄청난 정체성의 고민으로 폐색 상태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문제는 분할해서 하나하나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데카르트도 말하지만, 바로 그 거대한 수수께끼, 거악이 일어나지 않도록 개별적으로 사물에 접근하는 것이야말로 복수성으로 향해 가는 방향 지어짐의 의미가 아닐까요?

(...)

어쩔 수 없이 고민하는 것이 깊은 삶의 방식인 것 같은 인간관이 근대에 의해 성립되고, 그것이 다양한 예술을 산출해 낸 것인데요, 그로부터 거리를 두고 세속적으로 사태와 씨름하는 것은, 인간이 변화가 없이 단조롭게 되어 버리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세속성에야말로 거대한 고민을 품고 있는 게 아닌 또 다른 인생의 깊이, 희극적이라고 할 수 있는 깊이가 있지 않을까요?

문제와 씨름한다는 것은 그저 해석을 이러쿵저러쿵 쓸데없이 만지작거리며 농락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을 하고 아주 조금이라도 세계를 움직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고뿐만이 아닙니다. 신체가, 사물이, 물질이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개개의 문제에는 물론 어려운 것이 있고, 그것은 스트레스를 강요하지만, 그 고통을 무한한 고민으로부터 구별합니다.

(...)

세계는 수수께끼의 덩어리가 아닙니다. 세계는 산재하는 문제의 장입니다.

바닥없는 늪 같은 깊이가 아닌 다른 깊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속성의 새로운 깊이이며, 지금 여기에 내재하는 것의 깊이입니다. 그때 세계는 근대적 유한성에서 보았을 때와는 상이한, 다른 종류의 수수께끼를 획득합니다. 우리를 어둠 속으로 계속 끌어들이는 수수께끼가 아닌, 밝고 맑은 하늘의 수수께끼. 맑기 때문에 수수께끼입니다.(207-213p)

 

 

ㅡ 지바 마사야, <현대사상 입문> 中, ar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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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9/22

 

 

되게 못 쓴 에세이다. 저자의 만화는 예전에 몇 권 재밌게 읽었던지라 아주 약간 기대감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재미도 감동도 웃음도 전혀 나지 않는 소소한 일상에 대한 글이 계속 이어져 읽다가 중간중간 현타가 와서 길지도 않은 책을 읽는데 오래도 걸렸다. 힘을 빼고 글을 쓰는 것과 성의 없이 글을 쓰는 것은 다르지 않을까 생각한다.

 

 

 

언젠가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되도록 일찍 시작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막상 해도 오래 못 하는 경우가 제법 있기 때문이다. 피아노는 10년 동안 계속했지만 그 사이에도 나는 다양한 것에 손을 댔다.(96p)

 

 

그러나 ‘전부 말하기족’은 죄다 끝까지 말한다. “이동해주세요”까지 말한다. 끝까지 전부 말하는 걸 듣고 조금 상처받는 건, 전부 말하지 않으면 못 알아듣는 사람으로 여겨진 것 같아서다.(103p)

 

 

2층 호텔 창에서 내려다본 한밤중의 도노역 플랫폼, 그때 무슨 생각을 했던가. 결국 잊을 것들을 위해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나.(255-256p)

 

 

 

 

ㅡ 마스다 미리, <매일 이곳이 좋아집니다> 中, 티라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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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9/20

 

 

 

“우정은 우정이고 자선은 자선이지.” 프리다가 말했다. “할머니가 어릴 때 독일에 살았던 거 너도 잘 알지, 얘기 많이 들었을 테니 또 하진 않으마. 하지만 분명히 말해두는데, 너에게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절대 네 친구가 될 수 없어. 친구한테 적선을 받는다는 건 불가능하거든.”(47p)

 

 

<솔루션>의 요체는, 게이머가 무작정 장치를 만드는 데에만 급급하지 않고 간간이 질문도 하고 정보도 얻으면 점수는 낮아지지만 자신이 독일 제 3제국에 공급되는 기계 부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 정보를 입수하고 나면 게이머는 생산량을 낮출 수도 있다. 제국이 감지하지 못하는 선에서 최소량만 만들어낼 수도 있고, 부품 생산을 아예 중단할 수도 있다. 질문을 하지 않는 게이머는 ‘선한 독일인’으로서 태평하게 최고점을 얻겠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공장이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알게 된다. 독일식 활자체 문구가 화려하게 화면을 수놓는다. 축하하오, 나치당원! 귀하는 제 3제국을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 했소! 귀하는 진정 효율화의 달인이구려! 미디로 손본 바그너가 울린다. <솔루션>의 핵심은 게임을 점수로 이기면 윤리적으로는 진다는 점이다.(59-60p)

 

 

여기에, 난관이 있었다. 샘과 세이디는 둘 다 게임에 관한 한 자신들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좋은 게임과 나쁜 게임을 금방 구별할 수 있었다. 세이디의 입장에선 그 지식이 꼭 도움이 되는 건 아니었다. 도브와 함께 보낸 시간과 게임을 공부했던 세월이 뭘 보든 비판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어떤 게임을 갖다줘도 잘못된 점은 콕 집어 말할 수 있었지만, 어떻게 훌륭한 게임을 만드는지는 꼭 안다고 할 수 없었다. 모든 풋내기 예술가들에겐 취향이 제 능력치를 앞서는 시점이 있다. 이 시기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것저것 만들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를 통과하도록 세이디를 밀어붙인 샘(이나 샘 같은 누군가)이 없었다면, 세이디는 지금과 같은 게임 디자이너가 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116p)

 

 

샘은 자신이 무척 성숙한 줄 알았지만, 그 반응은 민망하리만치 유치했고 도를 넘어도 한참 넘은 것이었다. 한번은 그때의 절교를 마크스한테 설명하려고 해봤는데, 마크스는 이해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네가 지금 이해를 못하는 거야. 그건 원칙에 관한 거라고. 세이디는 내 친구인 척했지만 사실은 봉사활동 때문에 그랬던 거잖아. 마크스는 멍하니 샘을 쳐다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동정심만으로 뭔가에 수백 시간을 쓰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 샘.(264p)

 

 

 

ㅡ 개브리얼 제빈,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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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9/16

 

개의 설계사를 읽을 때만 해도 단요 작가의 전작을 다 찾아 읽을거라곤 생각지 않았는데 출간된 책 기준으로는 이제 다이브를 제외하고 다 읽었다. 근 2년 동안 이렇게 쏟아낸 작품들이 미리 써둔 원고라기보다는 2년간 쓴 작품이라고하니 앞으로도 재미있는 작품을 많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그건 내 고질적인 문제였다. 정의의 편이 되기에는 야심이 부족하고 악당이 되기에는 겁이 많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개인적인 희비극에 실컷 도취되기에는 또 자기객관화가 잘됐다.(36p)

 

 

존엄은 돈과 맞바꾸지 못한다지만 그 말은 절반만 진실이다. 이미 팔린 낯을 돈으로 거둬들일 수는 없어도 돈을 받고 낯을 팔 수는 있기 때문이다. 어떤 부모들은 방송에 나와서 집안사정을 털어놓은 다음 무료 상담을 받고, 도박중독자는 유튜브에서 회고록을 읊어 댄다. 다들 그러고 사는데, 그래야만 앞날이 편해지는 사람도 있는데 돈에 영혼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나는 도대체 모르겠다.(50p)

 

 

돈을 벌면 앞으로 어쩌지. 잃으면 또 어쩌고. 막막하게만 들리는 문장이었지만 답은 어떻게 보면 단순했다. 그런 질문들은 내가 수익률의 세계에 머무르는 동안만 유효했고, 월급의 세계로 떠나는 순간 금방 우스워졌다. 생산직으로 공장에 입사하거나 콜센터에서 전화를 받는 건 일반적인 삶의 조건 중 하나이며 다들 슬플 것도 없이 그렇게 살고 있으므로.

그러니까 나는 정장을 입지 못하는 미래가 두려운 게 아니었다. 견고하고 안정적인 삶의 미덕이, 내가 그걸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운 거였다. 돈이 풍선처럼 부풀다가 터지고 다시 부푸는 데에는 사라질 일 없는 월급이 적금통장에 차곡차곡 모이는 것과는 다른 역동성이 있었다. 사람을 매혹시키고 사로잡는 역동성. 나는 한때 풍선을 부풀린 다음 적당히 자리에서 묶는 법을 알았다. 그것으로 남부러울 것 없는 풍선 탑을 쌓아올렸다·····. 지금도 그게 그리웠다·····. 탑의 높이가 아니라, 내가 그럴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지금 나한테는 현금 2,000만 원이 있다. 이것으로 ETN을 살 게 아니라, 월요일 장이 열리자마자 크루드오일 매도를 잡으면·····.(68p)

 

 

경상도 농가의 맏아들이었던 아버지는 서울 사람이 될 만큼 부드러웠고 폭력의 대물림을 끊고자 결심할 만큼 이지적이었지만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진정성에 대한 숭배를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서로가 마음의 문을 열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은 쌍방이 대등한 관계일 때에만 성립한다. 그러나 모든 부모는 아이를 스무 해 이상의 제작 기간을 요구하는 수공예품처럼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공예품이 자신의 형태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제작자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소통은 허위와 폭력의 게임이어야만 했다. 진의를 다정함으로 감싸고 아이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밀어 가는 것이, 그러다가도 격렬한 거부 반응 앞에서는 압도적인 차이를 드러내 기세를 꺾고 복종시키는 것이 부모의 일이었다. 진정성과 정직의 힘을 동경하는 이들은 그 역학을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악질적이었다.(71-72p)

 

 

메뚜기 떼와 코로나19는 하나님이 타락한 현대인에게 내리는 심판이라는 거였다. 심판. 또 심판이다. 그런 이야기를 기사에 옮겨 적는 걸 보면 편집국 일동도 목사에게 동의하는 모양이었다. 이 사람들은 이집트에 저주가 내리는 장면까지만 읽고 성경을 덮었나 보지.

나는 그 뒤의 내용도 알고 있다. 그중 하나는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을 잃어버린 남자의 이야기다. 이름은 욥. 친구들은 죄를 지었으니 하나님께서 불행을 내린 것이라며 욥을 탓하고, 욥은 억울해한다. 도대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욥은 잘못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에 어처구니없이 휘말렸을 뿐이다.

이야기의 교훈은 명확했다. 세상은 원래 까닭 없이 끔찍해지는 것이니까, 타인의 불행을 두고 욥의 친구처럼 굴지 말라는 거였다. 수천 년 전의 중동에도 그 교훈이 필요한 사람은 참 많았나 보다.(83p)

 

 

내 뷰가 옳기만 하면 얼마든지 나를 좋아해 주고 걱정해 주는 사람들. 조건부란 안정성의 다른 말이다. 이유 없는 것들은 그 이유 없음으로 인해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147p)

 

 

승리의 트로피를 받아 들었을지라도 그 순간을 영원히 누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충만감은 삶을 채우기에는 너무 짧고 욕망이란 이루어진 목표를 새로운 목표로 교체하는 부단한 과정이므로. 그러니까 사람에게 주어진 선택지란 사실 둘뿐인지도 모른다. 갈증 속에 내달리다가 때때로 주어지는 기쁨을 달콤하게 받아들이는 것. 혹은 갈증도 짜릿함도 내버리고 다만 평온해지기로 마음먹는 것.

후자가 마음의 문제인 이유는, 욕망하기 위해서는 투지가 필요한 반면 욕망을 멈추기 위해서는 결심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둘 중 어떤 것도 갖추지 못했다가는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생각하지도 원치도 않았던 곳에 도달해 있기 마련이었다.(218-219p)

 

 

 

ㅡ 단요, <인버스> 中, 마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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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9/8

 

 

수연의 반응은 조심스러웠다. 노인들을 주로 상대하는 수연은 다른 지역에 비해 온유에 사는 공헌자 노인들이 좀더 품위 있고, 친절하고, 대하기가 까다롭지 않은 고객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그들이 정말로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인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전부 나쁜 사람들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고 수연은 덧붙였다.

“더스트 시대에는 이타적인 사람들일수록 살아남기 어려웠어. 우리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손이니까, 우리 부모나 조부모 세대 중 선량하게만 살아온 사람들은 찾기 힘들겠지. 다들 조금씩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딛고 살아남았어. 그런데 그중에서도 나서서 남들을 짓밟았던 이들이 공헌자로 존경을 받고 있다고,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거든.”(63p)

 

 

가끔은 그런 생각을 했다. 내성을 지녔다는 것이, 조금이나마 강하다는 것과 연결되었다면 좋았을 거라고. 처음 대피소에서 진단을 받았을 때, 나와 아마라는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무척 기뻤다. 내성이 있다는 말은 모두 죽어가는 저 바깥에서도 안전하다는 뜻이고,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적어도 우리 자매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판단은 절반 정도만 옳았다. 더스트는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 아마라도 그 망할 실험을 당하기 전까지는 괜찮았다. 대신 다른 것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더스트가 아닌, 그 밖의 모든 것들이. 그래도 우리가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내성종이 아닌 사람들, 그러면서도 어리고 약한 사람들은 더 많이 죽었다. 그 모든 것이, 나는 끔찍하게 싫었다.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모든 현실이.(128p)

 

 

(...)

“모두 돔 시티 안에서는 답을 찾지 못해서, 돔 시티 밖에서 대안을 꿈꾸는 거야. 하지만 그게 뭐가 됐든 결국 무너져. 돔 밖에는 대안이 없지. 그렇다고 돔 안에는 대안이 있을까? 그것도 아니야. 나오미 네 말대로 돔 안은 더 끔찍해. 다들 살겠다고 돔을 봉쇄하고, 한줌 자원을 놓고 다른 사람들을 학살하지. 그럼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멍하니 지수 시를 보았다. 그가 나를 마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돔을 없애는 거야. 그냥 모두가 밖에서 살아가게 하는 거지. 불완전한 채로. 그럼 그게 진짜 대안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 똑같은 문제가 다시 생길 거야. 그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 뭔가를 해야 해. 현상 유지란 없어. 예정된 종말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을 계속해서 벌이는 것 자체가 우리를 그나마 나은 곳으로 이동시키는 거야.”(227p)

 

 

 

 

ㅡ 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 中, 자이언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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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9/15

 

후반부의 김영총 씨의 인터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기억해두었다가 인터뷰에서 이야기했던 다큐멘터리가 완성된다면 꼭 봐야지.

 

 

한도현: 출생부터 지금의 나를 만들어온 굵직한 사건들은 다 얘기했기 때문에 뭐라고 할까, 정말 인사이드 아웃이 돼버린 것 같아요. 좋으면서도 무섭네요. 우리 이야기 나눌 때 그런 모습은 별로다, 이런 얘기까지 나왔으니까. 당신은 지금 내 모습의 원인과 결과를 다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쟤 이상해, 하고 거리를 두진 않더라도, 굳이 가까이하진 않을 수 있겠다 싶어요. 내 모든 면을 다 보여줬으니 나한테 호감을 갖긴 어렵겠죠. 그런데 더 가까워져서 신기해요.

 

정성은: 상대의 안 좋은 모습까지 다 알게 되면 거리를 두기보다 오히려 좋아하게 되는 사람들이 더 많을걸요. 카사노바도 자신의 불우한 가정사부터 얘기한다고 하잖아요. 그 사람의 맥락을 다 알게 되면 이해 못할 일이 없고,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을 이야기하면 세상은 뭐든 이해해줍니다.(176-177p)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하면 어떤 기분이야?” 키스는 어떤 느낌이냐고 묻는 초등학생을 달래듯 그는 말했다. “그런데 있잖아, 연애한다고 해서 매일 신나는 일이 생기는 건 아니야. 그냥 같이 맛있는 거 먹고, 마음의 안정을 주는 내 편이 생기는 거지. 내가 보기엔 네가 더 재밌게 사는 거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인지 연애를 해보고 알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고, 여행을 훌쩍 떠나도 그것만으로는 기쁨이 영원하지 않다. 또다시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에서 행복을 얻기 위해 우리는 계속 움직여야 한다.(193-194p)

 

 

ㅡ 정성은, <궁금한 건 당신> 中, 안온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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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9/15

 

베스트는 배회하는 쥐.

 

 

조: 네 커피, 맛있냐고.

존: 아, 맛없어.

조: 왜?

존: 설탕을 안 넣었잖아.

조: 내 건 너무 달아.

 

숨 막힐 듯한 침묵이 흐른다.

 

존: 좋은 생각이 있어, 조!

조: 네가?
존: 그래, 내가.

조: 뭔데?

 

존은 물 잔을 하나 들더니 물을 바닥에 쏟는다. 그리고 커피 두 잔을 물 잔에 붓고는 섞는다. 섞은 커피를 커피 잔에 각각 다시 따른 다음, 한 잔은 조에게 건넨다.

 

존: 맛을 봐!

조: 뭘?

존: 네 커피!

조: 아까 맛봤는데?

존: 다시 맛을 보라고!

 

조가 커피 맛을 본다.

 

존: 어때?

조: 뭐가 어때?

존: 맛이 있냐고.

조: 아니.

존: 하지만 이젠 너무 달진 않지?

조: 응, 너무는 아냐.

존: 그럼, 뭐야?

조: 아냐, 아무것도.

존: 그런데 왜 맛이 없냐고.

조: 나도 잘 몰라.

 

존도 자신의 커피를 맛본다.

 

조: 여전히 설탕 맛이 안 나나?

존: 아니, 설탕 맛은 나.

조: 그럼, 맛이 있나?

존: 아니.(19-21p)

 

 

ㅡ 아고타 크리스토프, <르 몽스트르> 中, 제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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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9/9

 

인버스도 읽어야겠다.

 

 

전기차가 경유 승용차의 친환경적인 대안으로 제시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전기차는 실제로 더 적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하지만 생산과정마저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전기차의 리튬 이온 배터리는 양극재로 LCO(리튬·코발트·옥사이드) 혹은 NCM(니켈·코발트·망간)을 사용한다. 리튬은 대량으로 퍼 올린 지하수에서 해당 광물을 추출하여 생산되는데, 이러한 채굴 방식은 환경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주변 농작지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뿐만 아니라 리튬의 주요 산지는 칠레와 페루 같은 남미 국가들이다. 선진국의 땅은 환경오염과 정화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기에는 너무 비싼 반면, 남미의 개발업자들은 군·경과 결탁해 약탈적 채굴에 반대하는 환경운동가를 매달아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전기차는 희토류 채굴로 인한 환경오염을 제3세계에 떠넘기는 동안만 온전히 친환경적인 셈이다.(56p)

 

 

제본스의 역설이 지적한 것처럼, 세탁기와 청소기가 가사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일 것이란 전망과 달리 실제로는 가사의 기준을 높였던 것처럼, 에너지 효율이 높아질수록 전력 사용량이 더불어 증가하는 것처럼, 발전과 혁신은 새로운 욕망을 빚어낸다. 그리고 이따금 욕망은 개선과 해결을 막는다.(58p)

 

 

사회에 기여하지 않거나 덜 기여하는 행위는 무가치한가? 도덕적으로 훌륭해지는 것 이외의 자향점은 없단 말인가?

수전 울프가 1982년 발표한 논문 <도덕적 성인>은 ‘모든 행위가 가능한 최대 한도로 선한 사람’을 도덕적 성인으로 정의한 후, “도덕을 최고의 기준으로 두고 판단할 경우, 우리의 가치들은 온전히 이해될 수 없다”는 논지로 끝을 맺는다. 직관적으로 생각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도덕적 성인이 되려 한다면 세상은 훨씬 칙칙해질 게 분명하다. 이러한 논변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에게 위안을 준다. 순수수학, 이론물리학, 천문학, 고생물학···.

그 모든 일은 분명히 인류의 문명에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안겨왔다. 수레바퀴의 기준과는 다른 가치의 체계에 속하는 아름다움일 뿐이다. 수억 광년을 통과해 다가오는 빛을 포착하기, 영어의 음성체계에 대해 고민하고 구조를 분석하기, 그리고 심플렉틱 다양체에 대해 생각하기.(116-117p)

 

 

“우선순위가 뒤로 밀리는 기분? 지구 반대편에 사는 애들보다 제가 살 만한 건 맞는데, 기분이 묘한 거죠. 내가 남 도울 입장도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도움을 받을 만한 상황도 아니고. 애매하게 끼어서. 저한테 열심히 살았다고 해주는 사람도 없고, 그런데 거기에 억하심정을 가져봤자 여기 말고는 말할 곳이 없으니까···.”(123p)

 

 

지난 11월, 어느 안티휠 만화가가 수레바퀴를 조롱하는 한 컷짜리 만평을 발표했다. 수레바퀴는 악당이 지을 법한 미소와 함께 이런 말풍선을 드리운다.

“내가 바라는 것은···어느 누구도 긍지를 가지지 않는 것,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 믿지 않고 어느 무엇에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는 것, 사랑과 따스함이 아니라 원칙과 계산에 따라 행동하는 것, 가족을 내버리고 세상을 고민하는 것, 더디 기뻐하고 분노를 참고 돌처럼 무감각한 것, 더 적은 것을 누리고 거기에 만족하는 것, 너희를 이 땅에서 치워버리는 것.”

그런데 나열된 요건들은 악의적인 왜곡이기 이전에 건조한 사실이라서, 받아들이는 사람의 가치관만을 보여주는 듯하다. 스스로의 의견에 확신을 가지지 않고 항상 회의하는 것은 나쁜 일인가? 공정한 원리에 입각해 행동하는 것은 나쁜가? 얼굴 모르는 사람들을, 불행의 숫자를 눈앞의 가족과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은 나쁜가? 감정적으로 초탈하는 것은 나쁜가? 물질적으로 검소한 것은 나쁜가? 인간이 모두 천국으로 떠나는 것은 나쁜가?

나쁘다라는 서술은 특정한 가치 체계 속에서만 정확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서는 정의의 체계와 개인적인 만족감의 체계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는 분명히 내가 만족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바뀌어가고 있지만, 정의의 문제라면 반대할 이유가 부족해 보인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만족스러운 것과 옳은 것을 곧잘 혼동한다.(173-174p)

 

 

 

ㅡ 단요,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 中,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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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9/8

 

칼럼 모음집이라 그런지 각 글들이 짧아서 조금 아쉽다. 너무 긴 글도 싫지만 이건 너무 짧은 걸.

 

 

 

“말하는 데 한 푼도 들지 않은 당신의 찬사가 얼마나 가치가 있을지는 먼저 생각해 보시죠.” 18세기 영국 문인 새뮤얼 존슨 박사가 한 말이다. 여기에서 핵심은 칭찬이 모두 무가치하냐 아니냐가 아니고, 칭찬을 말한 쪽이 빠지는 고유의 착각이다. 그는 원가(=제로)와 무관하게 자신의 칭찬이 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가치가 있기 때문에 받은 쪽이 갚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수표라도 써 준 것처럼 말이다.(43-44p)

 

 

중고생 시절, 미국의 ‘물질주의’를 공격하는 사람들을 처음 의심하게 된 계기는 히틀러를 피해 건너온 망명자들이 제공했다. 그들은 걸핏하면 자기들 ‘문화’를 우리 ‘천박한 물질주의’와 대비시키곤 했다. 들여다보니 그들의 ‘문화’라는 건 유럽 시절 하인을 부리고 살았다는 것과 그들이 황홀해하는 릴케, 슈테판 츠바이크, 브루크너, 말러에 대한 지식 정도가 다였다. 그들이 말하는 ‘문화’가 신세계에서 형편만 허락한다면 제대로 누리고 싶은 중산 계급식 물질주의와 감상주의를 뜻할 뿐이라는 걸 발견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폴린 케일, 「나는 영화관에서 그것을 잃었다」, 1965)(53p)

 

 

우정의 다이내믹은 꽤 관대한 편이어서 가장 친한 친구의 순위 바꿈이나 연락의 휴지를 허용한다. 하지만 한번 금이 간 친구 관계는 다시 회복되지 않는다. 연애가 거의 무한정 누리는 사치, 즉 싸움을 우정은 한 번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친구 관계는 별로 질기지 않고, 한번 못 볼 꼴을 보면 바로 해소된다. 그런 오점만 없다면, 십 년간 겨울잠을 자던 밍밍한 친교도 나중에 잘 이어지곤 한다.(60p)

 

 

“그는 다른 작가들을 그들이 보인 업적으로 평가했지만, 그들이 그를 평가할 때는 장차 달성할 업적을 가지고 평가해 주길 바랐다.” 나는 네 겉만 보겠으나 너는 내 속을 봐 줘야 한다는 이런 태도. 내면은 오직 나만의 것이라는 태도.(71p)

 

 

 

「에지웨어로 뒷골목의 조촐한 극장」(1939)은 영국의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이 남긴 아마 단 한 편의 환상소설이다.

(...)

대영 박물관 열람실을 나와 저녁 거리를 쏘다니던 한 사람이 영화관에 간다. 가고 싶은 곳은 따로 있지만, 돈은 없고 비는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들어선 꾀죄죄한 극장은 무성영화 전용관을 표방하고 있다. 즉 ‘고급문화도 아니고 싸구려에다가 임시적이고 욕구불만에 가득 찬 어떤 시대착오적 오락’이 이미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거의 손님이 없는데, 영화에서 자살 장면이 나오자 옆자리에 앉은 사내가 말을 건다. 아니 대놓고 귀에다 속삭인다. “엉터리네.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피가 많이 나오는데.” “뭐가요?” “사람을 죽이면.” “저건 살인이 아닌데요.” “나도 알아.” “뭘 안다는 거죠?” “저런······것을.” 사내는 혼잣말로 뭔가 불길하고 낯익은 거리 이름을 중얼거리다 나간다. 불이 들어오고 사내가 앉았던 곳 스쳤던 곳 모두가 피투성이다. 최근 뉴스에 난 살인 사건이 뇌리에 스친 주인공은 달려 나가 경찰에 전화를 건다. 틀림없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자는 살인범이다·····. 흥미롭게 듣고 있던 경찰이 대꾸하는 소리가 전화기에서 들려온다. “아니요. 범인은 잡았습니다·····. 없어진 것은 시체뿐입니다.”(161-163p)

 

 

아마 한 조직이 선한지 악한지 알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두목보다 착한 부하가 생존이 가능한지를 살펴보는 것일지 모른다.

(...)

그러나 잠자코 있으면 살릴 사람들을 굳이 죽이기 위해 그가 의식적인 선택을 한 것은 분명하다. 이런 선택을 평범함이나 복종이라는 말로 포장하기는 어렵다.(분명히 그는 복종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아이히만은 이십 년 뒤 바로 평범함과 복종의 대표자로 부활하게 된다. 한나 아렌트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 때문인데,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본 그녀는 그를 사악하기보다는 평범하고, 고지식하게 명령을 수행하려 애쓴 다소 머리가 둔한 공무원적 인물로 묘사했다.

(...)

아이히만이 평범한 인물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게다가 아렌트가 말한 평범함은 보통 사람의 특출하지 못한 면을 중립적으로 묘사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녀가 견딜 수 없어 하는 모든 특성의 총합 같은 인상을 준다. 나중에 그녀는 좀 더 힌트를 주었다. “그의 특징은 천박함이었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는 그 대중성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대중화될 수 없는 전제 위에 서 있었다. 자신이 몹시 싫어하는 부류에게 ‘평범하다’는 수식어를 부여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렌트 같은 지식인 귀족이 아니라면 말이다.

(...)

내용이 없어진 개념들이 그렇듯 악의 평범성은 아무 때나 아무에게나 적용해도 되는 말이 되었다. 그것은 일방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에게만 겁을 주는 말이기 쉬웠다. 악당들도 마찬가지로 겁을 먹으면 좋을 테지만, 그 개념이 그런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인지는 조금 의문이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악당이 되는 것보다, 악당이 자신을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여기기 시작하는 것, 그게 훨씬 두려운 일이 아닐까.(190-193p)

 

 

 

ㅡ 김영준, <작가, 업계인, 철학자, 스파이>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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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9/7

 

첫 감상은 무난하고 평범한 소설이었는데, 모임을 위해 이것저것 떠올려오니 제법 공들여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쁘진 않았지만 누구에게 권할 만큼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겨우 몇 주가 아니라 몇 년은 알고 지낸 사이처럼 하워드에게 자신의 좌절감과 괴로움을 털어놓았던 자동차 안의 대화 이후로 진은 시간이 날 때마다 용납할 수 없을 만큼, 또는 현명하지 않을 정도로 그를 생각하고 있었다.(182p)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도 자신의 속얘기를 털어 놓으면 상대와 급격히 친해졌다고 착각을 하는 경향이 있다. 한술 더 뜨면 상대방 역시 그런 얘기를 나에게 해주길 원하고 그러지 않으면 섭섭해한다.

 

 

진은 슬론 광장에서부터 걸어가면서 가게 진열창에 비친 자기 모습을 흘깃 보았다가 낡은 레인코트를 입은 구부정한 중년의 여성을 보고 당황했다. 유행에 뒤떨어지는 쥐털 같은 머리카락은 곧지도 곱슬거리지도 않고 군데군데 흰머리가 있었다. 진은 스스로 활기차고 착실한 직장 여성이라고 생각했지만, 어깨가 둥글고 칙칙한 모습은 정반대였고 평소에 그녀가 왜 거울을 피하는지를 상기시켜 주었다.(305p)

 

 

“잠깐, 움직이지 말아요.” 두 사람이 소파에 반쯤 앉고 반쯤 누운 채 진이 그의 무릎을 베고 있을 때 하워드가 말했다. “들어 봐요.”

레코드가 끝나서 바늘이 판을 긁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왜요?” 진이 말했다.

“행복이에요. 안 들려요?”(389p)

 

낯 간지러. 에릭인 줄...

 

 

“비키예요, 아프기 전이죠.” 앨리스가 말했다. “정말 사랑스런 아이였답니다.”

“그런 것 같네요.”

“비키를 괴물이라 생각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비키도 그냥 아이였을 뿐이에요. 그 애가 무슨 짓을 했든, 나쁜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아파서 그런 거예요.”(444p)

 

진짜 무슨 개소리를 하는건지? 그냥 아이는 나쁜 짓을 할 수 없을거라고 생각하나? 그리고 아파서였든 뭐든 범죄를 저질렀는데 그 보호자가 저렇게 얘기를 한다고? 범죄 행위에 대해 장애로 인한 심신미약을 주장할 수는 있을지라도 저렇게 얘기라면 곤란하지.

 

 

그녀는 틸버리 가족을 만나기 전에, 겨우 6개월 전의 삶이 어땠는지 기억하려 애썼다. 그때는 감정의 정점도 바닥도 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계절마다 직장과 집에서 해야 하는 정해진 일들은 적당히 다양하고 보람이 있었기 때문에 몰두할 수 있었다. 작은 즐거움들ㅡ하루의 첫 담배, 일요일에 점심식사를 하기 전에 마시는 셰리 한 잔, 일주일 동안 쪼개 먹는 초콜릿 바 하나, 아직 다른 사람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도서관의 새 책, 봄의 첫 히아신스, 단정하게 잘 다려서 개어놓은 여름 향기 나는 빨래, 눈 덮인 정원, 보물 서랍에 넣으려고 충동 구매한 문구ㅡ로 충분히 기운을 낼 수 있었다.

그녀는 몇 년이 지나야 이미 깨어난 갈망의 괴물을 잠재우고ㅡ잠재울 수 있다면 말이다ㅡ억제된 삶을 다시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생각했다. 사랑에 빠져드는 여정은 너무나 쉽고 우아했지만, 사랑에서 빠져나오는 여정은 너무나 길고 힘든 오르막길이었다.(456p)

 

“세상에, 무슨 일 있어?”

진이 열심히 눈을 깜빡거렸다. 아무 일도 없다고 하고 얼른 나갈 수도 있고 멜섬 부인이 내미는 동정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기억이 그녀를 쿡쿡 찔렀다ㅡ리밍턴 호텔에서 만났던, 진이 내민 우정의 손길을 거절했던 만신창이의 딸. 그녀는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는 자랑스러움을 포기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날 밤 두 사람 모두 움츠러들었다. 늦었지만 눈부신 통찰 덕분에 진은 도움을 받아들이면 양쪽 모두가 더욱 풍성해진다는 사실에 눈을 떴다.

(...)

이 만남으로 인해 진의 상황이 실제로 조금 더 나아졌다. 진은 최근 틸버리 가족 때문에 겪은 슬픔을 자세히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연애가 끝나서 외롭고 후회된다고 내비쳤다.

(...)

물론 멜섬 부인은 진의 실연에 대해서 어떤 치료법도 제안할 수 없었고 그러려고 하지도 않았다. 유서 깊은 방법들ㅡ인내, 기분전환, 일ㅡ뿐이었는데, 그런 방법이라면 진도 잘 알고 있었고 예전에 프랭크와 헤어졌을 때 기대기도 했지만, 지금은 떠올려 봐도 별로 자신이 없었다. 예전의 경험은 고통이 끝없이 계속되지는 않는다고ㅡ그러나 매끄럽게 점점 더 빨리 가라앉지도 않는다고, 무서운 파도를 연달아 일으키며 가라앉는다고, 몇 번의 파도는 그녀를 쓰러뜨릴 수도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458-460p)

 

 

 

ㅡ 클레어 챔버스, <스몰 플레저> 中, 다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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