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

 

 

 

이 책은 이렇게 반응이 나뉘는 주된 이유가 여러분이 받은 음악 훈련의 수준이나 10대에 어울렸던 친구들, 심지어 여러분이 태어난 연도도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여러분에게 최고의 만족을 선사하는 음악은 음악 청취의 중요한 일곱 가지 차원으로 정해진다. 진정성, 사실성, 참신성, 멜로디, 가사, 리듬, 음색이다. 이런 각각의 차원에 여러분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합쳐져서 여러분만의 독특한 '청취 프로필'이 만들어진다. 여러분의 청취 프로필은 여러분이 음악을 들을 때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고 몸으로 반응하는지를 결정한다.(36-37p)

 

 

사실적 예술을 선호하느냐 추상적 예술을 선호하느냐가 그 사람의 지성이나 성숙도, 세련된 문화적 소양에 관한 뭔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각자의 뇌가 만족스럽게 여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정신적 활동을 비출 뿐이다. 슬프게도 그리고 부정확하게도 인상파나 입체파 같은 여러 추상예술 운동을 문화의 '진전'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마치 전기자동차와 아이폰이 기술의 진전을 나타내는 것처럼 말이다. 앞서 있었던 것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추상화가 사실주의 회화보다 지적으로 뛰어나다는 말을 종종 하는데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은 소리다. 얀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고 절묘하게 세공한 디테일에 놀라든, 피터르 몬드리안의 「구성 10」에 표현된 번뜩이는 기하학적 구성에 감탄하든, 그것은 회화가 내 안에 불러일으킨 감흥을 나의 신경 연결망 배치가 어떻게 즐기는지 반영하는 것이다.

(...)

개인의 성향을 연구한 흥미로운 자료를 보면 사실성에 대한 욕구는 예술 형식마다 다르다고 한다. 인간의 시각 회로는 미각 회로와 대체로 독립적으로 발달하며, 미각 회로는 청각 회로와, 청각 회로는 후각 회로와 대체로 독립적으로 발달한다. 이 말은 여러분이 시각적 자료에서 얻는 보상이 맛, 촉감, 냄새, 소리를 통해 경험하는 보상과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생물학적 사실은 우리의 개인 성향에서 놀랍도록 모순적인 대목을 설명할 수 있다. 내 경우를 말하자면 사실적 음반을 대단히 선호하는 편이지만, 장미셸 바스키아와 사이 트웜블리의 추상적인 그림을 무척 좋아한다.(101-102p)

 

 

음악에 한정시키자면 익숙함과 참신함은 주관적인 속성이다. 여러분에게 음악적으로 익숙한 것이 나에게는 전례 없이 새로울 수 있으며, 반대도 마찬가지다. 특정 문화의 음악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그 문화에 속하는 곡을 듣고 일반적인 쪽인지 아방가르드한 쪽인지를 분류하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각각의 음반은 동일한 음악 규칙을 따르는 다른 음반들과의 관계로 듣게 된다. 특정한 음악 체계에 익숙하지 않은 청자라면 그런 양식으로 된 모든 곡이 참신하게 들릴 것이다.

중동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전설적인 레바논 가수 파이루즈의 음울하고 딴 세상 같은 노래들은 미국인의 귀에 이국적으로 들린다. 인도의 라가 음계는 미분음(피아노에서 인접한 검은건반과 흰건반 사이에 놓이는 음)을 사용하는데 서양 음악에서는 극도로 드물다. 라가에 익숙한 청자라면 이를 듣고 참신성의 정도에 따라 쉽게 분류할 수 있겠지만, 서양의 청자에게는 모든 라가가 똑같이 낯설게 들릴 것이다.(110p)

 

 

지금까지 우리는 청취 프로필의 세 가지 차원인 진정성, 사실성, 참신성을 알아보았다. 이 셋은 음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진정성, 사실성, 참신성은 감각 양식에 특화된 단일한 연결망을 가동하는 것이 아니라 뇌의 여러 연결망을 동시에 가동하여 처리된다. 각각을 처리하는 뇌의 연결망은 비단 우리가 음반을 들을 때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영화, 소설, 춤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창작 예술에 대한 반응에 관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성, 사실성, 참신성을 청취 프로필의 미적 차원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어지는 네 개의 장에서 우리는 음악에 국한된 청취 프로필의 네 가지 차원을 살펴볼 것이다. 멜로디, 가사, 리듬, 그리고 과소평가되는 차원인 음색이다. 미적 차원과 음악적 차원 사이에는 두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다. 미적 차원은 두 개의 항으로 구성된다. 우리는 각각의 미적 차원에서 최적 지점이 양쪽 극단(목 위와 목 아래, 사실성과 추상성, 참신성과 익숙함) 사이를 오가는 하나의 축에 놓인다고 상상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음악적 차원은 두 개의 항이 아니다. 우리는 멜로디를 별개의 여러 특질을 가진 것으로 인식하며 특질마다 나름의 축이 있다.(엄격히 말하자면 청취 프로필의 네 가지 음악적 차원은 실은 '음악적 공간'이라고 해야 옳지만, 명료함과 일관성을 위해 차원이라고 하겠다.) 예를 들어 멜로디는 넓은 음역을 가질 수도, 좁은 음역을 가질 수도 있다. 스타카토 양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레가토 양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말소리를 흉내 내서 특정한 감정을 부를 수도 있고, 모호하게 들리는 방식으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둘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멜로디의 차원에서 여러 특질에 대응하는 여러 개의 최적 지점을 갖는다. 마찬가지로 가사, 리듬, 음색의 차원에서도 여러 개의 최적 지점을 가질 수 있다.(144-145p)

 

 

송라이터나 프로듀서가 새로운 노래를 평가하면서 이런 음악적 차원 중 어느 것을 앞세워야 청자에게 최고의 보상을 안겨줄지 알아보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샤워하면서 흥얼거리기 쉬운가? 그렇다면 이 노래는 멜로디가 좋은 것이다. 종이에 써놓고 봐도 좋은가? 그렇다면 가사가 괜찮은 것이다. 운동하면서 들을 때 머릿속에 들어오는가? 그렇다면 이 노래의 으뜸가는 특징은 그루브가 된다.(146p)

 

 

음악을 듣는다는 기대도 안 했는데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소음의 불협화음에서 아무렇지 않게 피아노 음만을 따로 떼서 듣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복잡한 소리의 망에서 특정한 음색 하나를 골라내는 것은 시야에서 어디에 집중할지 선택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정신적 도전이다. 시야에 있는 대상들은 각자의 위치가 있다. 빛이 여러 대상의 표면에 맞고 반사되면 그 위치에 따라 망막의 여러 부위가 활성화된다. 뇌는 위상적으로 구별되는 이런 시각적 경계들을 가지고 시각적 광경을 구성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청각적 대상들ㅡ달그락거리는 식기, 잡담하는 목소리, 멜로딕한 피아노ㅡ은 하나의 복합적인 음파로 묶여 여러분의 고막에 도달한다. 만약에 시각이 청각과 같다면, 여러분은 고양이, 자동차, 신발, 입, 노트북, 피아노의 이미지가 모두 한데 겹쳐진 모습으로, 마치 여러 장의 슬라이드 필름을 겹쳐서 프로젝트에 영사하는 것처럼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소리의 속성들은 음파에 담긴 세 가지 유형의 정보로 추출된다. 멜로디, 가사, 리듬, 음색, 세기, 공간의 위치, 움직임 모두 주파수, 진폭, 위상으로 결정된다.

(...)

이제 여러분의 뇌는 어떤 흐름에 집중할지 선택해야 한다. 음향의 출처 가운데 일부, 예를 들어 교통, 에스프레소 기계, 에어컨, 보행자는 혼란스럽고 체계적이지 않은 소리 패턴을 만들어낸다. 여러분의 뇌는 평범한 환경 소음은 무시하도록 배운다. 하지만 흐름에 정렬된 주파수 패턴이 들어 있으면 여러분의 뇌는 주목한다. 일차 청각피질은 체계적인 소리 패턴을 더 주목해서 처리할 대상 후보로 올려둔다. 더 강력하게 나서는 다른 흐름이 없다면, 체계적인 흐름은 의식적으로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선택된다. 전경의 흐름foreground stream이 되는 것이다.

음악을 듣는 것이 옆자리의 대화를 엿듣는 것보다 흥미롭다면 피아노 소리가 전경의 흐름이 된다. 피아노 흐름은 이제 음악적 차원(멜로디, 가사, 리듬)를 처리하고 소리 위치를 파악하는 일을 전담하는 고차적인 뇌 연결망으로 보내지고, 마침내 미적 평가(진정성, 사실성, 참신성)를 전담하는 연결망으로 넘어간다. 그 전에 먼저 전경의 흐름이 가는 곳은 음색 지각 연결망이다. 여기서는 여러 가지 소리(예컨대 '삐걱거리는 의자' '화난 고객' '짹짹거리는 참새')를 학습하고 범주화하는 일을 맡는다.

음색 연결망은 전경의 흐름을 일으킨 출처가 악기임을 알아본다. 이렇게 흥미로운 소리의 출처가 확인되고 나면 우리는 "피아노 소리가 들려!" 하며 소리를 의식하게 된다. 소리가 의식 속으로 뛰어들어 책을 향하던 우리의 주목을 낚아채고 다른 소리의 출처들을 모두 잠재우는 것이다.(273-277p)

 

 

 

 

 

ㅡ 수전 로저스, 오기 오가스, <당신의 음악 취향은> 中, 에포크

,

2024/9/22

 

 

소세키의 미완성 유작. 소세키의 어느 작품보다 분량이 많아 두어번 시도했다가 포기하곤 했었는데 이번 주말에 마음 먹고 읽었다. 읽어 본 소세키 소설 중 가장 심리묘사에 치중하고 관념적이었다. 소세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화를 좋아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각 인물들이 본론을 얘기하기까지 말을 빙빙 돌리는 게 지나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너무 질질 끈달까. 기존의 소세키 소설이 남성 화자의 심리만 묘사되고 상대방의 심리는 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낼 뿐이었다면, 이 소설에서는 화자의 아내인 여성의 심리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는 게 특기할 만한 점.

 

 

실제로 세상에 나가서 단적인 사실과 격투를 하며 일한 경험이 없는 숙부는 한편으론 당연히 어두운 인생비평가여야 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론 매우 예리한 관찰자였다. 그리고 그 예리한 부분은 모두 그의 어두운 곳에서 파생되고 있었다. 바꿔 말하면 그는 세상물정에 어두운 덕택에 기발한 말을 하기도 하고 행동을 하기도 했다.

그의 지식은 풍부한 대신에 조잡하였다. 그래서 그는 많은 문제에 참견을 하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방관자의 태도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의 위치가 그를 제약할 뿐만 아니라 그의 성질이 그를 그쪽으로 몰아넣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어느 정도의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혹은 방법이 있어도 그것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팔짱을 끼고 그대로 있고 싶어 했다. 일종의 노력가임과 동시에 일종의 게으름뱅이로 태어난 그는, 결국 활자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운명의 소유자에 지나지 않았다.(57p)

 

 

"그렇게 싫은가? 나와 함께 술을 마시는 게.“

실제로 그렇게 싫었던 츠다는 이 말을 듣자 그대로 멈췄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반대의 결단을 외부로 나타냈다.

"그럼 마시자."(91p)

 

 

 

ㅡ 나쓰메 소세키, <명암> 中, 범우사

,

2024/9/19

 

 

작가 이름 좀 통일해. 이게 뭐야.

 

 

특히 도시빈민 최후의 피난처라 불리는 쪽방의 역사는 미국에서 슬럼을 착취해온 역사와 닮았다. 서울 등 대도시의 쪽방은 감옥보다 좁고 열악하나, 건물주들은 노숙 외에 대안이 없는 세입자들의 처지를 악용해 (평당 기준으로) 일바 아파트보다 훨씬 비싼 임대료를 현금으로 챙긴다. 정부나 기업의 쪽방 리모델링 사업은 임대업자에게 보조금을 주는 수단으로 전락했고,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가 받는 주거급여가 인상되면 임대료도 동반 상승했다.(23p)

 

 

가난에 대한 책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책일 때가 많다. 100년 넘게 이런 식이었다. 1890년 제이컵 리스는 뉴욕의 세입자들이 처한 혹독한 환경을 기록하고 골목에서 잠든 꼬질꼬질한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서 "세상의 절반은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글을 남겼다.

(...)

거부할 수 없는 증거를 내세운 이런 책들은 우리가 가난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왜?라고 하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사실 대답할 수 없다. 미국에는 왜 이 모든 가난이 존재하는가? 나는 이 질문은 다른 접근법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가난의 원인을 이해하려면 가난한 사람들 너머를 들여다봐야 한다. 특권과 풍요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스스로를 살펴봐야 한다. 우리ㅡ안정되고 보장된 삶을 사는 사람들, 집이 있고 대학을 나온 사람들, 보호받고 운이 좋은 사람들ㅡ가 이 모든 불필요한 시련에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닐까? 이 책은 이 "우리"를 중심에 놓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는 나의 시도다. 그러므로 이 책은 가난에 대한 책이지만 가난한 사람들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대신 가난하지 않은 반대편 절반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가에 대한, 어떤 이들의 삶을 살찌우기 위해 어떻게 다른 이들의 삶을 위축시키는지에 대한 책이다.(38-40p)

 

 

크리스털, 그리고 그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가난은 물론 돈 문제이지만 온갖 문제들이 가차 없이 눈동이처럼 커지는 것이기도 하다.

가난은 통증, 육체적 통증이다. 몸을 굽혀서 노인과 환자를 침상과 변기에서 들어 올려야 하는 재택 간병인과 공인 간호조무사에게는 허리통증으로 체감된다. 우리의 주문을 받고 물건의 바코드를 찍는 동안 서 있어야 하는 계산원들에게는 발과 무릎의 고통으로 체감된다. 암모니아와 트리클로산이 들어 있는 제품으로 우리의 사무실 건물, 집, 호텔 객실을 청소하는 청소원들에게는 피부발진과 편두통으로 체감된다.

(...)

가난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그런데 사회는 그걸 치료하는데 투자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고통에 대처할 때가 많다. 내 친구 스콧은 어릴 때 성폭력을 당했다. 성인이 된 그는 알약들을, 그 다음에는 펜타닐을 발견했다. 그는 한 번에 20달러를 내고 평화를 구입했다. 40대가 된 그는 약을 끊고 몇 년을 그렇게 버티다가 다시 약에 빠져서 호텔 방에서 혼자 죽어 갔다.

(...)

가난은 통증일 뿐만 아니라 불안정이기도 하다. 지난 20년동안 임차인들의 소득은 하락했지마 임대료는 치솟았다.

(...)

빈곤선 이하인 임대주택 가정 대부분은 최소한 소득의 절반을 주택비로 지출하고, 네 곳 중 한 곳은 임대료와 공과금에만 소득의 70퍼센트 이상을 지출한다. 이런 여러 가지 요인들이 겹치면서 미국은 저소득 임차인들이 퇴거를 비일비재하게 겪는 나라가 됐다. 아비규환이 일상이 됐다.

(...)

가난은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질 거라는 끊임없는 두려움이다. 미국인의 3분의 1은 버스 운전사, 농부, 교사, 계산원, 요리사, 간호사, 경비,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이렇다 할 만한 경제적 안정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간다. 아직도 많은 이가 "빈민"으로 공식 집계되고 있지 않은데, 그렇다면 마이애미나 포틀랜드에서 1년에 5만 다러로 두 아이를 키우려고 발버둥 치는 이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주택바우처를 받을 자격은 안 되지만 주택담보대출도 받을 수 없을 때는 뭐라고 말해야 할까? 임대료가 월급의 절반을 가져가 버리고, 학자금대출을 갚느라 월급의 4분의 1을 써야 하는 상황은? 어떤 달엔 빈곤선 저 아래로 추락했다가 다음 달에는 뭐가 더 나아졌다는 느낌도 없이 그 위로 조금 올라갈 때는? 실제 현실에서는 빈곤선 위에도 숱한 가난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훨씬 아래에도 많은 가난이 있다.

(...)

최신 국가 데이터에 따르면 미국인은 열여덟 명 중 한 명꼴로 "지독한 빈곤"속에 살고 있다. 이는 지면을 파고들어 가는 수준의 결핍을 말한다. 빈곤선의 절반 이하에 해당하면 지독한 빈곤으로 간주한다. 2020년에는 이 지독한 빈곤의 기준선이 1인의 경우 연간 6380달러, 4인 가족의 경우 1만 3100달러였다. 그해에 미국인 약 1800만 명이 이 조건 밑에서 목숨을 부지했다. 미국에서 지독한 빈곤을 겪는 어린이는 500만 명 이상으로 그 비중이 다른 어떤 선진국 보다도 많다.

(...)

가난은 당혹감과 수치심을 일으킨다. 과거 프랑스 사회학자 외젠 뷔레는 비참함은 "가난이 안긴 도덕적 감정"이라고 말했다. 한나절을 기다렸는데 당신이 등장하자 짜증을 부리는 사회복지사와는 10분짜리 면담을 하는 게 고작인 복지 사무소의 새로울 것도 없는 수모 대행진 속에서, 당신은 비참함을 느낀다. 창문에는 금이 가고 찬장에는 바퀴벌레가 버글대는데 집주인은 그 책임을 당신에게 뒤집어씌우는 아파트로 귀가할 때, 당신은 비참함을 느낀다.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손쉽게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대중음악과 아동 도서에서 누락되는지를 볼 때, 그리고 이런 말소가 당신이 더 넓은 사회와는 무관한 사람임을 상기시킬 때 당신은 비참함을 느낀다. 사위가 적막해지면 당신은 당신에 대한 거짓말을 믿기 시작할는지 모른다. 당신은 공공장소가 당신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고 믿고 공원과 해변을, 쇼핑 지구와 스포트 경기장을 피한다. 가난은 당신의 삶을 소진시킬 수 있지만, 가난이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은 거의 없다. 오늘날에는 누군가에게 당신이 파산했다고 털어놓는 것보다는 차라리 정신질환을 고백하는 게 사회적으로 더 용납받을 만한 행동이다.

(...)

가난은 쪼그라든 삶과 인성이다. 그것은 당신의 사고방식을 바꾸고 당신이 잠재력을 온전히 발현하지 못하게 막는다.

(...)

가난 앞에선 누구든, 결핍에 시달려 본 적이 없는 우리에게는 무분별해 보이는, 심지어는 명백히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병원 대합실에서 시계를 쳐다보며 좋은 소식이 전해지기를 기도하며 앉아 있어 본 적이 있는가? 그렇게 응급실 앞에 붙들려 있다 보면 다른 모든 걱정과 책임은 사소하게 느껴진다(실제로도 그렇다). 이런 경험은 가난한 삶과도 비슷하다. 행동과학자 센딜 멀레이너선과 엘다 섀퍼는 이것은 "대역폭 세금"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가난함은 밤을 꼬박 새우는 것보다 사람의 인지능력을 더욱 감소시킨다"라고 말한다. 가난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삶의 나머지 부분에 마음을 쓸 여력이 없다". 가난은 사람들에게서 안정과 안락만 박탈하는 게 아니라 지적 능력 역시 앗아 간다.

하지만 가난은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인종적 약점 때문에 심해지거나 인종적 특권 때문에 약화될 수도 있다. 흑인의 가난, 히스패닉의 가난, 미국 선주민의 가난, 아시아계 미국인의 가난, 백인의 가난은 모두가 다르다. 흑인과 히스패닉계 미국인은 백인 미국인에 비해 가난할 가능성이 두 배 높다. 켜켜이 누적된 인종적 유산도 문제지만 오늘날의 차별 역시 무시 못 할 원인이다.

(...)

가난은 물질적 결핍과, 만성통증과, 투옥과, 우우증과, 중독 등등이 겹겹이 누적된 형태일 때가 많다. 가난은 직선이 아니다. 사회적 병폐들이 단단하게 엉킨 매듭이다. 가난은 범죄, 건강, 교육, 주택 등 우리가 관심을 갖는 모든 사회문제와 관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미국에서 가난이 끈질기게 이어진다는 것은 수백만 가정이 세계 역사상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 안전과 안정, 품위를 거부당한다는 뜻이다.(49-62p)

 

 

하지만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됐다고 해서 빈곤이 줄어들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40년 전에는 돈이 많은 사람들만 핸드폰을 살 수 있었지만 지난 몇십 년을 지나며 핸드폰 가격은 전보다 감당할 만해졌고, 이제는 많은 빈민을 포함해서 미국인 대부분이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 점차 핸드폰이 일자리, 주택, 연인을 찾는 데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부 관찰자들은 "일부 소비재에 대한 접근은 가난한 사람이 어쨌든 그렇게까지 가난하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그건 오해다. 핸드폰은 먹을 수 없다. 핸드폰을 생활임금과 맞바꿀 수도 없다. 핸드폰은 안정된 주택, 적정가격의 의료서비스, 적합한 양육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사실 핸드폰과 세탁기 같은 물건의 가격이 떨어지는 동안 생필품 중에서도 의료비와 임대료 같은 가장 필수적인 항목들의 가격은 올랐다.

(...)

마이클 해링턴이 60년 전에 표현한 대로 "미국에서는 괜찮은 집에 살거나 괜찮은 음식을 먹거나 괜찮은 치료를 받는 것보다는 괜찮은 옷차림을 하는 게 훨씬 쉽다".(66-67p)

 

 

미국에서는 결혼이 사치품 비슷한 것이 됐다. 결혼은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런 "결혼 관문"을 넘지 못하면 결혼의 연을 맺지 않는다.

(...)

주택 보유는 경제적 안정으로 귀결되는 게 아니라, 더 큰 경제적 안정으로 귀결된다. 보통은 자신이나 부모가 어느 정도 돈을 모은 뒤에야 집을 살 수 있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결혼은 이미 안정된 사람들의 안정을 더 강화하는 경향이 있다. 양친으로 이루어진 가정이라는 부르주아적 모델은 부르주아를 만들어 낸 바로 그 물건, 그러니까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

만일 우리가 실제적인 경제 기회를 가난한 미국인들에게 확대할 경우 결혼은 보통 자연스럽게 뒤따른다.(81-83p)

 

 

이주나 가족과의 관계 속에서 빈곤에 대한 다양한 설명 방식들의 장점을 평가하는 것은 유용한 훈련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다 보면 언제나 다른 모든 곁뿌리들의 근원인 중앙의 원뿌리로 돌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책에서 그 원뿌리란 바로 가난이 상처이고 고난이라는 단순한 진실이다. 수천만 미국인이 가난해진 것은 역사의 실수나 개인적인 행동 때문이 아니다. 가난이 끈질기게 이어지는 것은 그걸 바라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86p)

 

 

우리는 보통 가난이 누군가에게는 이익이 되는 상황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보다는 책임 소재를 흐리는 이론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

미국의 빈곤을 설명하는 인기 있는 이론으로는 공장폐쇄와 그 주변 지역공동체의 황폐화를 유발한 탈산업화가 있다. "탈산업화"라니 이런 유체 이탈 화법이 또 있을까. 이 표현은 마치 숲이 나무좀의 공격을 받듯 미국에서 탈산업화가 이루어졌다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뭐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식의 인상을 준다. 이런 화법에서 가난은 사회학자 에릭 올린 라이트의 표현을 빌리면 "사회적 원인의 부산물"이다. "누구도 이 재난을 의도하지 않았고, 사실상 그 누구도 여기서 이익을 얻지 않는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 불리한 환경이 수십 년 동안 지속되었다면 의도적으로 설계된 거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시스템 차원의"문제들ㅡ시스템 차원의 인종주의, 빈곤, 여성혐오ㅡ은 결국 현실적이든 관념상이든 자기 이익이라는 동기에서 조용히 내려진 숱한 개별 결정들로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시스템"은 우리로 하여금 웨이터에게 팁을 주지 않거나, 우리 동네에 저렴한 주택이 들어서는 걸 반대하는 투표를 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가난에서 온갖 방식으로 이익을 얻는다. 이보다 명백한 사회적 진실은 없다. 하지만 누군가 이런 말을 입에 올리면 긴장감이 가득해진다. 그걸 거론한 삶은 무례한 사람이 된다. 사람들은 의자에서 자세를 고쳐 앉고,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을 조용히 시키려 할 것이다. 마치 공공장소에서 모든 사람의 눈에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무언가를 지적하는 어린이를 어머니가 쉿 하며 조용히 시키려 하듯, 또는 유리창에 던져진 벽돌처럼 난폭할 정도로 선명하고 깊은 도덕적 진실을 헤집는 포괄적인 자본주의 비판을 들먹이는 청년을 진지한 어른들이 조용히 시키려 하듯.

(...)

과거애 일어난 착취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토론할 수 있으면서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서로를 쥐어짜고 있는가로 대화가 넘어가면 자꾸 버벅대며 난감해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아마 우리가 매우 화가 나고 극단적인 형태의 착취만 떠올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농장에서 일하는 흑인 노예나, 광산에 보내진 어린 소년들이나, 면직물 공장에서 일하는 어린 소녀들처럼 말이다.

(...)

미등록 노동자들이 그런 노동조건을 스스로 선택했을까? 성인일 때 이주했다면 그렇다, 자신들이 선택한 게 맞다. 하지만 절박한 삶들이 착취적인 조건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그걸 찾아 나선다고 해서 그 조건이 착취가 아닌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의자에서 더욱 들썩인다. 어떤 사람은 그것보다 더 복잡한 문제, 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사회문제 대부분이 복잡하지만 복잡함 속에 몸을 숨기는 것은 비판적 지성의 증거라기보다는 사회적 지위의 반영에 더 가깝다. 배고픈 사람들은 빵을 원한다. 부유한 사람들은 전문가 집단을 불러 모은다. 복잡함은 강자의 피신처다.(89-93p)

 

 

미국에서 뇌에 여유 공간이 있고 목소리가 큰 일부 대중은 빈곤에서 벗어나려면 당사자들이 행동을 바꿔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 더 좋은 일자리를 얻어라. 아이를 그만 낳아라. 돈 문제에 대해 더 똑똑한 결정을 내려라. 하지만 실은 그와 정반대다. 더 나은 선택의 발판은 경제적 안정이다.(117-118p)

 

 

 

 

 

ㅡ 매슈 데즈먼드, <미국이 만든 가난> 中, arte

,

2024/9/19

 

 

그때는 그런 게 날 행복하게 해줬다. 이 글을 쓰면서 느끼는 건데, 나이가 드는 건 일상의 행복을 느끼는 마음이 조금씩 줄어드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마치 당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인슐린 저항성이 높아지는 것처럼, 이미 너무 많은 경험을 한 탓에 행복을 느낄 수 있는 행복 저항선이 높아져버린달까?(8p)

 

 

그래도 이 책을 쓰기 위해 밤마다 새로운 드라마를 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재미있는 시리즈를 많이 발견했는데, <더 나이트 오브>는 이제 한국에서는 볼 수가 없어져서 아쉽다. <하우스>의 휴로리를 좋아한다면 <로드킬>을 추천한다. <부통령이 필요해>를 재미있게 봤다면 이 제작진이 그 이전에 영국에서 만든 <더 씩 오브 잇>을 보면 절대 후회 안 할 것이다. <더 오피스>나 <팍스 앤드 레크레이션>을 좋아한다면 <시트 크릭>을 추천하고 싶다. 영국 의료보험의 명암을 다룬, 벤 위쇼 주연의 <조금 따끔할 겁니다>도 무척 재밌다). 소설이 그렇듯, 세상에는 재밌는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그건 정말 좋은 일이다.(20-21p)

 

 

삶의 실패를 똑바로 직시하는 것은 어렵다. 내가 겪고 있는 삶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때때로 사람들은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말한다. 이 문장을 이런 식으로 다르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저지른 삶의 실수(실패)는 더 나은 삶, 그러니까 일종의 성공적인 삶(물론 여기서 말하는 성공은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을 위한 밑거름이 되리라고. 그러므로 우리의 실패를, 좌절을, 고통을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고. 하지만 때때로 그런 궁금증이 든다.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성공적인 삶의 밑거름이 되지 못한 실패는 어떻게 되는 걸까? 성공의 어머니가 되지 못한 실패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실패는 그저 실패, 고통은 그저 고통, 잘못된 선택은 그저 잘못된 선택이라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침대에 충분히, 정말로 충분히 머무는 것이다. 그렇게 충분히 침대에 머문 뒤 몸을 일으켜 빠져나갈 만큼의 힘을 얻었을 때 비로소 우리 역시 캐런처럼, 단 하나의 벽돌을 제거하고 거기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돌멩이 같은 실패를 슬쩍 바라보는 용기를 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36-37p)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그 당시 팸과 짐의 선택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대체 그들은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한 거야? 같은 식으로, 나는 과거의 나 자신의 선택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짐과 팸이 그리고 내가, 우리가 다른 식의 선택을 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든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 아닐까 하는. 누군가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사랑할 수는 있다. 아, 이건 내가 한 말이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한 말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44-45p)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의 세계는 다르다. 아무리 합리적인 결정을 한다 해도 우리는 그 일의 진짜 의미를 그 당시에는 알 수 없다. 그런 식으로 <브레이킹 배드>는 매끈하지 않은, 비합리적이고 설명할 수 없는 이 세계의 무언가를 남겨놓는다.

(...)

나는 이 드라마를 보다가 이렇게 메모했다.

"불행이 닥친 후, 우리가 하는 선택이 우리 자신이다." 하지만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될 수 있을까? 이 문장은 조금 더 복잡한 경로를 지나야 한다. "불행이 닥친 후, 우리가 한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 우리가 하는 선택이 우리 자신이다."(132-133p)

 

 

 

ㅡ 손보미, <아무튼, 미드> 中, 제철소

,

2024/9/12

 

 

몽테뉴의 에세를 들여다봐야겠다.

 

 

 

몽테뉴에게 자연스럽다는 건, 솔직하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바로 나'를 알아보는 일, 그토록 까다로운 작업을 몽테뉴는 어떻게 해낸 걸까?

내가 운영하는 글방의 합평 시간에도 '솔직하다'는 좋은 에세이를 칭찬하는 표현으로써 빈번하게 등장한다. 여러 용례를 관찰한 바 '솔직하다'에는 다양한 함의가 있다. 사회적으로 지탄받거나 삼가야 한다고 여겨지는 행동, 신념, 욕망 따위를 드러냈다는 의미일 때도 있고, 일반적으로는 좋아할 만한 대상을 싫다고 했거나 일반적으로 싫어할 만한 대상을 좋다고 했다는 의미일 때도 있다. 그도 아니면 그냥 섹스 얘기를 자주 하신다는 말의 완곡한 표현일 수도 있다.

'솔직하다'는 표현이 가장 흥미로울 때는 작가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있는 그대로 적었음이 느껴진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경우다. 이 말은 정말 묘한데, 왜냐하면 타인으로서는 결코 알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분명 좋은 글에는 독자가 작가의 '있는 그대로'를 만나는 대목, 너무나 생생하고 구체적인 나머지 이야기가 작가의 현실을 넘어 독자의 현실이 되어버리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대목이 작가로서는 가장 '있는 그대로' 쓰지 않기 위해 저항한 흔적이라는 고약한 주장도 해봄 직하다. 우리는 경험을 스스로 인식하는 단계에서조차 진부한 틀을 적용한다. 제아무리 독특한 고난이 찾아온다 한들, 그 경험을 '산전, 수전, 공중전을 다 겪었다'는 수사를 통해 감각하는 게 정확하다고 믿는 상투적 자아를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편안하고 익숙한 방향으로 굳어 있는 경험을 진실에 가까울 때까지 구부리는 게 작가의 주된 업무라면, 에세이를 쓰려는 사람에게 '솔직하게 쓰라'는 조언이 알려주는 것은 거의 없다.

대신 '솔직하다'의 용례들은 에세이 읽기에 관한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알려준다. 에세이를 읽는 독자는 이렇게 전제한다. 에세이란 작가가 실제로 경험한 일을 적는 글이다. 에세이의 서술자는 작가의 일상적 자아와 일치한다.

이런 전제는 에세이스트들을 아주 곤란하게 한다.

에세이의 서술자인 '나'는 과연 지금 책상에 앉아 있는 '나'와 일치하는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것이 버지니아 울프의 대답이다.

 

자아란 문학에서 본질적이면서도 가장 위험한 적수이다. 결코 자기 자신이 되지 않되 항상 자기 자신이라야 한다는 것이 문제이다.(182-184p)

 

 

어떤 머리는 딸의 이름으로 아버지를 죽이자고 말하고, 어떤 머리는 우리들 딸의 과업이란 게 아버지는 죽이는 것밖에는 없느냐고 말한다. 어떤 머리는 남자의 펜과 이성을 갈취하여 자매들에게 쥐여주고, 어떤 머리는 마녀의 피와 광기를 보전했다가 귀신과 짐승에게 잉크로 준다. 어떤 머리는 분명하고 건조하게 웅변하길 좋아하는가 하면 어떤 머리는 사유를 뒤집고 접고 꺾어 소문으로도 못 쓸 말을 중얼거린다. 한 여자는 어느 저녁 농담의 기능이란 공동체 내부의 문법을 공고히 하고 착취를 은폐하는 것일 뿐이라고,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우스워지지 말고 있는 힘껏 진지해지자고 말한다. 여자는 같은 날 새벽에 일어나 우리 같은 존재들은 농담을, 유머를 잃는 순간 끝장나는 거라고,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다 바쳐 우스워지자고 오직 우리만이 우리를 웃음거리로 만들자고 말한다. 하나도 안 야했어, 그런 말에 안도하는 가슴이 있고, 야해 너도 야해, 그런 말에 비로소 불을 켜보는 등도 있다.

(...)

그러므로 나는 대개 지쳐 있다. 웬만하면 자가당착에 빠져 있다. 아무것도 쓰지 않기를 원한다. 되도록 입을 다물고 싶다. 참다 못해 말을 하게 된다면 그 중 어느 것도 기록되지는 않기를 바란다. 더 좋은 말이 나타날 테니까.

(...)

이론과 사상의 층위를 떠나도 분열은 여전하다. 나와 지극한 편애를 주고받는 여러 우정 공동체의 모습 또한 제각각이다. 운동화 끈을 탄탄하게 묶고 늘 어딘가로 사뿐히 뛰어가는, 유리병을 소독해서 토마토 절임을 만들고 그걸 내게도 한 병씩 선물하는 애들이 있다. 반대로 씻어러 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냥 누워 있는 애들도 있다.

(...)

복싱 선수가 줄넘기 하듯 글 쓰기는 애도 있고 환자가 토하듯 글 쓰는 애도 있다. 그들은 한 명이고 또 만 명이다.(192-195p)

 

 

그러므로 윤리적 삶을 산다는 것은 몸이 가벼워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타인과 상호의존관계를 맺는데서 오는 온갖 지리멸렬함, 가령 비굴함이나 빚을 졌다는 느낌, 홀로 서는 데에 실패했다는 이 모든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한 결백의 상태에 놓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윤리적 삶을 산다는 것은 도리어 그 지리멸렬의 소용돌이로 기꺼이 뛰어드는 일, 타인과 나를 잇는 끈을 더 촘촘하게 인지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나는 용기를 내어, 혼자서 말끔한 비건이 되려고 노력하는 대신 아무것도 혼자서는 못 하는 사람이기를 자처하고 싶다. 어떤 깨끗함과 홀가분하다는 느낌을 '잘' 살고 있음의 징표로 간주하는 일을 멈추어야만 보이기 시작하는 관계들, 마치 빠르게 저은 낫또를 한 스푼 떠올릴 때 생겨나는 끈적하고 무수한 실타래와 같은, 존재들 사이에서 찰랑이는 섬세하고 연약하며 복잡한 냄새가 나는 관계들을 더 많이 감각하고 싶다. 그 일은 충분히 마르지 않은 몸을 가지고도 충분히 잘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진다.(232-233p)

 

 

 

ㅡ 안담, <친구의 표정> 中, 위즈덤하우스

,

2024/9/11
 
 
소설의 전 과정을 바쳐 뜸 들이는 것에 비해 결과로 드러내는 비밀은 겨우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이렇게 돌아 돌아왔나 싶어 허탈하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되고 불가능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던 시절이었다."(51p)
"단 하루 만에 모든 것이 바뀔 수도 있다."(283p)
 
이렇게 깔아 놓고 뭐 대단할 것 없는 얘기로 끝난다. 이야기의 전말을 다 알고 사후적으로만 이해함 직한 문장을 작품 전체에 흩뿌려놓는 것도 그냥 과시적 기교 뽐내기로 보인다. 두 번 읽으라고? 독자들이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는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걸 복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쓸데없이 빈번하며 직접적이다. 이렇게 말하면 완전 말도 안 되는 완성도의 소설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정도로 허접한 책은 아니다. 꽤나 공들인 노작이다. 읽는데 인내심을 제법 요구하지만 아름답고도 시적인 문장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에 들어 할 것 같다. 나는 그래서 덜 좋았지만...
 
 
 
 
라헬은 공항 라운지에서 빈 의자 쪽으로 걸어가는 승객처럼 결혼으로 흘러들어 갔다. '그냥 자리에 앉는다'는 기분으로.(34p)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좌절은, 그가 발견한 나방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지 않은 일이었다.(74p)
 
 
벨리아 파펜은 아들에게 주의를 주려 애썼다. 그러나 벨리아는 자신이 왜 심기가 불편한지 딱 짚어낼 수 없었기에 그의 혼란스러운 걱정을 벨루타는 오해했다. 벨루타는 자신이 짧게나마 받았던 교육과 타고난 재주를 아버지가 시샘한다고 생각했다. 벨리아 파펜의 선의는 곧 잔소리와 언쟁, 그리고 부자간의 불화롤 변질되었다. 벨루타는 집에 가는 것을 피해 그의 어머니를 크게 실망시켰다. 늦게까지 일을 했다.(110p)
 
 
큰 꿈과 작은 꿈이 있다. "'큰 사람 랄타인' 사히브, '작은 사람 몸바티'" 하고 늙은 비하르인 쿨 리가 소풍 때문에 기차역에 온 에스타 학교의 아이들을 보고 (변함없이 매년) 꿈에 대해 하곤 했던 말이다.
'큰 사람'은 '랜턴', '작은'사람은 '촛불'.
'거대한 사람은 플래시라이트', 그가 미처 못한 말이다. 그리고 '작은 사람은 지하철역'.
그가 아이들의 짐을 가지고 뒤에서 터벅터벅 걷는 동안 '선생님들'이 그와 값을 흥정했는데, 그의 휘어진 다리는 더 휘어졌고, 잔인한 아이들은 그의 걸음걸이를 흉내냈다. 아이들은 그를 '괄호 안의 불알'이라고 불렀다.
'가장 작은 사람은 정맥류', 그는 그 말을 하는 것은 완전히 잊은 채, 요구했던 금액의 반도 못 되는, 실제로 받아 마땅한 금액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돈을 들고 휘청휘청 자리를 떴다.(127-128p)
 
 
어린아이였을 때, 그녀는 읽으라고 받은 '아빠 곰 엄마 곰' 이야기를 곧 무시하게 되었다. 그녀가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서 '아빠 곰'은 '엄마 곰'을 놋쇠 꽃병으로 때렸다. '엄마 곰'은 조용히 체념하고 그 구타를 겪어냈다.
암무는 크면서 자신의 아버지가 무서운 거미줄을 잣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 그는 손님들에겐 매력적이고 세련된 사람으로 처신했고, 손님들이 어쩌다 백인일 때는 거의 아첨에 가깝게 행동했다. 그는 고아원과 나환자 진료소에 기부를 했다. 자신을 교양 있고 관대하며 도덕적인 사람으로 대중에게 알리고자 상당히 애썼다. 그러나 아내와 아이들뿐일 때면 엄청나게 의심 많고 흉포하고 교활하게 변했다. 그들은 구타를 당했고 모욕을 당했으며, 훌륭한 남편과 아버지를 두었다고 친구와 지인들에게 부러움을 받아야만 했다.
(...)
더 자라면서 암무는 이 차갑고 계산적인 잔인함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다. 부당함을 용서하지 않는 고결한 판단력을, 그리고 '누군가 큰 사람'에게 평생 괴롭힘을 당해온 '누군가 작은 사람'에게서 나타나기 마련인 고집스럽고 무모한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다툼이나 대립을 피하기 위한 그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그러한 것을 찾아냈고, 어쩌면 즐기기까지 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251-252p)
 
 
‘위대한 이야기들’은 이미 들은 것이고 다시 듣고 싶은 것이다. 어느 부분에서든 이야기로 들어가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것이다. 스릴과 교묘한 결말로 현혹하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내용으로 놀래키지도 않는다. ‘위대한 이야기들’은 지금 사는 집처럼 친숙하다. 혹은 연인의 살냄새처럼, 결말을 알면서도 모르는 것처럼 귀기울인다. 언젠가 죽을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위대한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누가 살고, 누가 죽고, 누가 사랑을 찾고, 누가 사랑을 찾지 못하는지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다시 알고 싶어한다
그것이 ‘위대한 이야기들’의 신비이자 마법이다.(319p)
 
그렇다면 이 소설은 위대한 소설은 아니라 하겠다.
 
 
벨루타는 필라이 동지의 몸이 문간에서 흐릿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실체는 없는, 높은 목소리만이 남아 슬로건들을 외쳤다. 텅 빈 문 입구에서 깃발들이 펄럭였다.
(...)
그리고 또 늘 같은 이야기였다. 스스로에게 등을 돌리는 또하나의 종교. 인간의 정신이 만들고 인간의 본성이 훼손하는 또하나의 체계.(394p)
 
 
 
 
 
1. 전체적인 느낌 및 감상
2.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나 인상적인 구절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3. 이 책의 구조는 비선형적이며 시간 순서에 따라 진행되지 않습니다. 이 구조가 여러분이 책을 이해하거나 감정을 느끼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야기해봅시다.
4. 이 책에는 복잡한 내면을 가진 여러 인물들이 나옵니다. 그 중 특히 베이비 코참마의 말과 행동으로 사건이 파국으로 치닫는데요. 이 인물이 그런 행동을 한 동기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 더 이야기해보고 싶은 인물에 대해 이야기해보기.
5. 이 책에는 책의 제목이기도 하고 제목의 일부이기도 한 '작은 것들의 신'과 '작은 것'과 관련된 표현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이 단어의 의미하는 바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만일 그가 그녀를 만지면 그녀에게 말을 걸 수 없었고, 그가 그녀를 사랑하면 떠날 수가 없었고, 그가 말을 하면 들을 수가 없었고, 그가 싸우면 이길 수가 없었다.
그는, 외팔이 남자는 누구였을까? 누구일 수 있었을까? ‘상실의 신?’ ‘작은 것들의 신?’ ‘소름과 문득 떠오르는 미소의 신?’ '시큼한 쇠냄새ㅡ버스의 쇠난간 그리고 그 난간을 잡았던 버스 차장의 손냄새 같은ㅡ의 신?'(303p)


그는 누구였나? 그는 누구일 수 있었나? ‘상실의 신’. ‘작은 것들의 신’. ‘소름과 문득 떠오르는 미소의 신’. 그는 한 번에 한 가지만 할 수 있었다.
그녀를 만지면 말을 걸 수 없었고, 그녀를 사랑하면 떠날 수 없었고, 말을 하면 귀 기울일 수 없었고, 싸우면 이길 수 없었다.(450p)

6. 이 책에서는 아래와 같이 후각과 관련된 서술이 종종 등장하며 소설의 특이한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한몫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냄새나 향기는 기억이나 감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야기해봅시다.

어떻게 그애는 그 냄새를 견딜 수 있었을까? 못 느꼈어요? 저들에겐 특이한 냄새가 있어요, 저 파라반들에겐.(355p)


'두 번째 교훈'.
그래도, 냄새는 난다.
역겨운 달콤함.
바람에 실려 오는 오래된 장미향 같은.(423p)

 
 
 
ㅡ 아룬다티 로이, <작은 것들의 신> 中, 문학동네

,

2024/9/9

 

난 이런 시적이며, 기독교적 상징이 많고, 우화가 등장하는 이야기가 재미가 없다. 분량은 많지 않았으나 굉장히 힘들었다.

 

 

 

 

어머니가 전에는 알지 못했던 느낌을 경험하게 된 것이 바로 그때였다. 속이 부글거리고 귓속이 윙윙거리는 어떤 아찔함. 피에르와 함께일 때뿐 아니라, 언제 어디에 있을 때나 찾아 왔던 그 느낌.

"사랑에 빠진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지."

(...)

피에르와 함께 지낸 며칠 후, 어머니는 죄의식에 시달리다 충동적으로 병원에 갔다. 어머니가 소파에 누워 있는 동안 의사는 어머니의 배, 가슴을 찌르며 아찔한 느낌이나 복부에 거품이 이는 느낌이 없었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수줍어하며 자신은 사랑에 빠졌으며, 종종 이상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것 때문에 병원에 온 건 아니라고 설명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무방합니다만·····." 의사가 말했다.

"위에 종양도 있군요.“

어머니가 얼머나 경악했을지 상상해 보라. 어머니는 병을 고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양보했다. 약을 먹고, 식이요법에 따르고, 방문하러 오겠다는 피에르의 간청도 거절했다. 두말할 나위 없이, 다음번 우연히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어머니에게는 아무 느낌도, 전혀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를 피하기 위해 즉시 그 나라를 떠났다.

(...)

"그러니까 조심해. 네가 심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기관일 수도 있어."(153-154p)

 

 

"돌아가고 싶었던 적 없어요?"

하릴없는 질문. 당신이 돌아가는 길을 찾도록 도와주는 실이 있다고 하자. 그리고 당신을 되돌리려 하는 실이 있다. 마음은, 끄는 힘에 이끌린다. 떨쳐 버리기 힘들다. 나는 항상 돌아가는 것을 생각했다. 구약 성서에 나오는 룻의 아내는 뒤돌아보고 소금 기둥으로 변했다. 기둥은 천장을 지탱해 주고 소금은 청결하게 해 주지만, 당신 자신과 맞바꾸는 것은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결국 되돌아간다. 그리고 살아남지 못한다. 두 가지 현실이 동시에 권리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너무도 힘든 일이다. 당신은 심장을 소금으로 절이거나 심장을 죽이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여기에는 많은 아픔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당신이 두 가지 현실을 다시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디선가 곰팡이가 필 것이고 사람들은 그 냄새에 숨이 넘어갈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돌아간다면 당신은 미칠 것이다. 당신이 남겨 두고 온 사람들은 변한 당신을 생각하지 않고 전과 똑같이 당신을 대할 것이고, 당신은 이를 무관심하다고 비난할 것이기 때문이다.(266-267p)

 

 

 

 

ㅡ 지넷 윈터슨,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 中, 민음사

,

2024/9/7

 

 

사람들은 세계의 어느 지역은 사회적이고 다른 지역은 자연적이라는 생각을 당연하게 여긴다. 극단적인 폭력, 대량 실업과 투옥, 소비 문화는 사회적 문제이고 사회적 불의다. 기후, 생물 다양성, 자원 고갈은 자연의 문제이고 생태의 위기다. 사람들은 세계를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회'와 '자연'이 따로 작동하는 것처럼, 생명망이 인간의 권력관계와는 접촉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함으로써 세계를 그렇게 만든다.

우리 저자들은 '자연'과 '사회'라는 두 단어를 이러한 일상적인 용법과는 다르게 쓰려고 한다. 우리가 '자연'과 '사회'라고 강조해 표기하는 것은 이 두 단어가 세계를 묘사하는 것뿐 아니라 지금과 같은 인간과 세계를 형성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 개념임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학자들은 이런 개념을 '실질적인 추상'이라고 부른다. 이런 추상은 존재론적 질문(그것은 무엇인가)과 함께 인식론적 질문(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도 제기한다. 실질적인 추상은 세계를 묘사하는 동시에 세계를 만든다. 실질적인 추상은 잘 드러나지 않으므로 우리는 세계 생태계라는 아이디어를 활용해 폭력의 숨은 형태인 '자연'과 '사회'를 독자들에게 드러내고자 한다. 이 둘은 아직도 건재하다. 그리고 실질적인 추상은 결백하지 않다. 실질적인 추상은 권력층의 이익을 반영하고 그들이 세계를 조직하도록 허용한다.(72-73p)

 

 

나는 신의 도움으로 우리가 (너희 나라로) 강력하게 진입할 것임을 너희에게 확언한다. 우리는 또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 전쟁을 벌여 너희를 복종시키고 교회와 폐하들의 신민으로 삼을 것이다. 우리는 너희와 너희 부인들과 아이들을 취해 노예로 삼고 폐하들의 명령에 따라 그들을 팔고 처분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너희 소유물도 취하겠다. 주군을 받들어 모시기를 거부하고 저항하며 부인하는 신민에게는 모든 괴로움과 손상을 가할 것이다. 그에 따른 죽음과 손실은 너희 잘못이지, 폐하들의 책임이 아니다. 우리 또는 우리와 함께 온 사람들 탓도 아니다.(129p)

 

 

임금노동은 인간의 지능, 힘, 기술을 취한 뒤에 또 다른 '현대 발명'을 활용해 규율 속에서 만들어낸 생산적인 노동이었다. 여기서 현대 발명이란 시간을 측정하는 새로운 방식을 가리킨다. 토지 생산성보다 노동의 실행이 자본주의 생태를 형성한다면, 이 과정에서 불가결한 것이 기계식 시계다. 돈이 아니라 시계가 노동의 가치를 측정하는 핵심 기술로 등장했다. 이 구분이 중요하다. 흔히들 임금을 위한 노동이 자본주의의 표징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13세기 잉글랜드의 경제활동인구 중 3분의 1이 이미 생존을 임금에 의존했다. 임금이 삶과 공간과 자연을 조직하는 결정적인 방식이 된 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시간 모형 덕분이다.

14세기 초에 이르면 새로운 시간 모형에 따라 산업 활동이 모양을 갖춰가고 있었다. 현재 벨기게에 속한 이프르 같은 지역에서 직물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은 계절이나 활동의 흐름이 아니라 추상적이고 선형적이고 반복적인 새로운 종류의 시간에 따라 규율되었다. 이프르에서 노동시간은 종소리로 측정되었다. 각 근무조의 작업 시간이 시작되고 끝날 때 종이 울렸다. 16세기에 이르면 꾸준히 째깍대는 분과 초로 시간을 측정했다. 노동과 놀이, 수면과 기상, 신용과 화폐, 농업과 공업, 모든 것은 이 추상적인 시간에 따랐다.

(...)

그러므로 아메리카 정복은 공간뿐 아니라 시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주민에게 주입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유럽인이 침략한 곳마다 '게으른' 토착민이라는 이미지가 함께 들어갔다. 토착민이 예수와 시계의 가르침에 무지하다는 것이었다. 시간 정책의 실행은 자본주의 생태에서 중심에 놓였다. 이미 1553년부터 스페인 왕은 주요 식민지 도시마다 공공 시계를 적어도 한 대씩 설치해나갔고, 다른 뭉명들도 스스로 정교한 시간 규칙을 만들어 활용했다. 이 새로운 노동 체제가 토착민의 속도, 비인간과의 관계를 대체했다. 마야 캘린더는 시간과 천문 판독의 복잡한 위계에 따른다. 그래서 우주 속에 놓인 인간의 질서를 다양하게 제시한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이런 질서를 존중한 것은 오로지 마야 캘린더의 신성한 시점에 맞춰 식미지를 공격할 때뿐이었다.(134-135p)

 

 

산업혁명과 관련해 화석연료가 18세기에 발명되었다고 상상하곤 한다. 사실 화석연료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긴 16세기의 산물이었다. 최초의 대규모 산업화는 1450년 이후 1세기가량 진행되었다. 산업화는 거대한 설탕공장과 은 광산의 프런티어뿐만 아니라, 우리가 본 것처럼 조선, 양조, 유리 제조, 인쇄, 직물, 철·구리 제련에서도 펼쳐졌다. 그리고 이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했다.(225-226p)

 

 

 

 

ㅡ 라즈 파텔, 제이슨 무어 ,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 中, 북돋움

,

2024/9/4

 

 

아무리 주거비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도 1997년 이후로 밀워키와 다른 거의 모든 지역의 복지수당은 동결되었다. 이미 수년 동안 정치인들은 복지수당만으로 생존 가능한 가정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2000년대 내내 임대료와 각종 제반 비용이 치솟기 전에도 그랬으니, 그 후로는 상황이 더욱 열악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다.(88p)

 

 

한 건의 퇴거는 퇴거당한 가족이 원래 살던 구역뿐 아니라 마지못해 옮겨가야 하는 새로운 구역까지 여러 도시 구역들을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강제 이주는 이주의 속도를 높이고 원망과 투자 회수의 속도를 훨씬 더 빠르게 가속화하여 제이콥스가 말한 "영구적인 슬럼"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 "영구적인 슬럼의 핵심 고리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너무 빠르게 그곳으로 흘러들어가고 그와 동시에 거길 빠져나가겠다는 꿈을 꾼다는 데 있다." 도린이 퇴거당하면서 32번가는 꾸준히 존재하던 한 사람(동네를 사랑하고 여기에 정성을 쏟음으로써 안전한 동네를 만드는 데 기여했던 사람)을 잃었지만, 라이트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103p)

 

 

임대료를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다보니 세입자 가족들은 때로 어쩔 수 없이 다른 장소로 이사 갈 돈을 충분히 모으면서 퇴거를 먼저 유발하기도 했다. 이쪽 집주인의 손실이 저쪽 집주인의 소득인 것이다.

(...)

당시 밀워키에서 침실 두 개짜리 아파트의 임대료 중간 값은 600달러였다. 480달러 이하에 임대되는 집과 750달러 이상에 임대되는 집이 각각 10퍼센트였다. 270달러 차이로 밀워키 시에서 가장 싼 집과 가장 비싼 집이 갈렸다. 이는 가장 열악한 동네의 임대료가 그보다 훨씬 나은 지역의 임대료보다 크게 싸지도 않다는 뜻이다. 가령 최소한 40퍼센트의 가정이 빈곤선 이하에서 살아가는 밀워키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 침실 두 개짜리 아파트의 임대료 중간값은, 밀워키 시 전체의 임대료 중간 값보다 겨우 50달러 적었다. 셰리나는 이를 이렇게 표현했다. "방 두 개짜리는 다 그게 그거야.“

오래전부터 그랬다. 1800년대 중반에 뉴욕 시에서 공동주택이 등장하기 시작할 무렵, 최악의 슬럼가 임대료는 시 외곽보다 30퍼센트 더 높았다.

(...)

빈민들이 슬럼에 모여드는 건 임대료가 싸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게 허락된 곳이 거기뿐이기 때문이다. 특히 가난한 흑인들은 더욱 그렇다.(109-110p)

 

 

가난한 흑인 동네 출신 남성들의 삶을 규정하는 것이 투옥이었다면, 여성들의 삶을 좌우하는 것은 퇴거였다. 가난한 흑인 남성들은 잠긴 문 안에 갇혀 살았고, 가난한 흑인 여성들은 잠긴 문밖으로 내몰렸다.(140p)

 

 

하지만 러레인에 관한 한 대릴 목사는 사람들이 많은 고난을 자초하기도 한다고 믿었다. "그 여성은 자기 돈을 허투루 쓰면서 몇 가지 어리석은 선택을 했죠··· 잠시 좀 없이 지내보는 게 그녀에겐 최고의 상태일지 몰라요. 그러면 이런 생각이 날 수도 있겠죠. '아, 내가 멍청한 선택을 하니까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구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이야기하는 건 쉬웠다. 하지만 이름과 얼굴과 역사와 많은 필요를 가진 어떤 가난한 한 사람을 돕는 것은, 우리가 그 사람이 어떤 실수를 저지르고 어떤 판단 착오를 범했는지를 아는 상태에서 그 사람을 돕는다는 것은 그보다 더 어려운 문제였다.(179p)

 

 

스콧은 팸과 네드가 퇴거통지서를 받고서 소파와 침대·서랍 같은 큰 물건들을 놔두고 급하게 집을 떠나기 직전까지 함께 어울리며 약에 취하곤 했다. 스콧은 네드와 팸이 당연한 벌을 받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락으로 굴러떨어지기 전이었다면 그는 좀 더 동정심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그는 동정을 일종의 순진함으로, 미숙한 중산층들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드러내는 감상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는 이동 주택단지에서 살지 않는 자유주의자들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들이 동정할 수 있는 건 자기들한테는 다른 선택지가 있기 때문이지." 네드와 팸의 경우, 스콧은 이들의 퇴거는 간단히 말해 크랙 습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헤로인 수지 역시 스콧과 같은 생각이었다. "모든 퇴거에는 공통분모가 있지." 그녀가 말했다. "나도 거의 퇴거당할 뻔 한적이 있었어. 돈을 다른 데 썼거든.“

이동주택단지 거주민들은 이웃이 퇴거당할 때 그 사람이 소문난 약물중독자든 그렇지 않든 간에 거의 법석을 떨지 않았다. 퇴거는 개인의 실패가 가져온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여졌다. 누군가는 퇴거가 "쓰레기들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된다"라고 말했다. 그 누구보다 가난한 사람들 자신이 가난을 당연하게 여겼다.

(...)

하지만 부정의를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대중 저항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변화를 일으킬 집단 역량이 있다고 믿을 때만 가능하다.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는 스스로를 피억압자로 여겨야 하는데, 대부분의 이동주택단지 거주자들은 절대로 그럴 의사가 없었다.

(...)

대부분의 거주자들에게, 그 가운데서도 특히 스콧에게 목표는 그곳을 뜨는 것이지 뿌리를 내리고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부 거주자들은 스스로를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아무리 자신들이 거의 평생 동안 스쳐 지나기만 하고 있어도 말이다.

(...)

사람들이 자신의 동네를 궁핍과 부덕이 넘치고 '모든 종류의 부서진 인간'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 정치적 역량에 관한 자신감을 잃게 된다. 동네의 트라우마 수준이 높다고 인식한(즉 동네 사람들이 투옥과 학대·중독 등 끔찍한 일을 겪었다고 믿는) 밀워키의 세입자들은 동네 사람들이 힘을 합쳐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고 믿을 가능성이 훨씬 낮았다. 이 같은 신뢰 부족은 동네의 실제 빈곤 및 범죄율보다는 사람들이 주위에서 인지한 밀도 있는 고난의 수준과 더 관계가 있었다. 자신의 고통을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는 지역공동체는 스스로의 잠재력을 감지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토빈의 세입자들은 종종 토빈이 남기는 이윤에 관해 지나가는 말을 던지거나 그를 탐욕스런 유대인이라고 부르곤 했다.

(...)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세입자들은 불평등에 높은 관용을 보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가난과 토빈의 부유함을 가로지르는 널찍한 계곡에 의문을 제기하지도, 어째서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낡은 트레일러의 임대료를 내느라 소득의 많은 부분을 희생해야 하는지 따지지도 않았다. 이들의 관심은 그보다 더 작고 더 구체적인 문제에 집중되었다.

(...)

밀워키에서는 대부분의 세입자들이 집주인을 존경했다. 딸내미가 다시 발이 빠지기 전에 썩어서 구멍 난 마룻바닥을 때워야 하는 데 누가 불평등에 저항할 시간이나 있겠는가? 내가 다시 자립할 때까지 집주인이 나에게 일을 시켜줄 의향이 있는데 누가 집주인이 얼마나 버는지 관심을 가지겠는가?(249-253p)

 

 

새미나 대릴 목사 같은 사람들이 보기에 러레인이 가난한 것은 돈을 막 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진실에 가까운 건 그와 정반대였다. 러레인이 돈을 막 쓰는 것은 가난하기 때문이었다.

러레인이 퇴거당하기 전에는 월세를 내고 나면 164달러가 남았다. [유료] 케이블 텔레비전과 월마트를 멀리하면 이 가운데 일부는 모을 수 있었다. 러레인이 월세를 내고 난 뒤 남는 소득의 3분의 1에 달하는 50달러를 어떻게든 남기며 1년이면 600달러를 모을 수 있었다. 이 돈이면 한 달 치 임대료를 낼 수 있을 정도였다. 여기엔 상당한 희생이 뒤따랐다. 때로 그녀는 온수나 옷 같은 것들을 포기해야 했기 때문이다. 케이블로 지출되는 돈을 아끼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수 있었다. 하지만 자가용도 없이 도시에서 외따로 고립된 이동주택 단지에서 사는 나이 든 여자에게, 인터넷 사용법도 모르고, 전화도 가끔만 쓰고, 일은 없고, 때로 섬유근육통 발작과 군집형 편두통에 시달리는 나이 든 여자에게 케이블은 소중한 친구였다.

러레인 같은 사람들의 삶에는 복합적인 제약이 워낙 많아서 좋은 행동 혹은 자기통제를 얼마나 많이 해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헤어날 수 없는 가난과 어느 정도 안정된 가난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너무 멀어서, 어쩌면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자린고비처럼 굴어도 가난에서 헤어날 가망이 거의 없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자린고비처럼 굴지 않기로 선택한다. 돈 한 푼에 벌벌 떠느니 고통에 즐거움이라는 양념을 곁들여 화려한 생존을 시도한다. 마약에 약간 취하기도 하고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하거나 텔레비전을 사기도 한다. 식료품 구매권으로 랍스터를 살 수도 있다.

러레인이 현명하지 못한 방식으로 돈을 쓴다면 그건 수당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라 너무 적어서였다. 러레인은 랍스터 정찬을 먹기 위해 구매권을 써버렸다. 이제 남은 한 달은 얻어온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러다 언젠가 허기를 느낄 수도 있다. 그건 그렇게 감당하면 되는 일이다. "나는 내가 한 짓에 만족해."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남은 한 달 동안 국수만 먹는다 해도 기꺼이 감당할 거야."(298-299p)

 

 

하지만 아무리 평등한 대우를 해도 사회가 불평등한 이상 여전히 불평등을 양산하는 데 기여할 수 있었다. 투옥의 경험은 흑인 남성들에게, 퇴거의 경험은 흑인 여성들에게 기형적으로 집중되었기 때문에 최근 범죄 기록이나 퇴거 기록이 있는 사람의 주거 신청을 균등하게 거부하는 경우라도 여전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과도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크리스털과 바네타 역시 어포더블렌탈로부터 자신들의 체포와 퇴거 이력 때문에 신청이 거부되었다는 답을 들었다.(343-344p)

 

 

집주인들이 부동산을 어떻게 소유하게 되었든지 간에(땀·지능·독창성의 덕을 본 사람도 있겠고, 유산이나 운·사기의 덕을 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임대료 상승은 집주인들에게는 더 많은 돈을, 세입자들에게는 더 적은 돈을 의미한다. 이들의 운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이해관계는 배치된다. 도시 임대없자들의 이윤이 변변치 못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렇지가 않다. 미국에서 네 번째로 가난한 도시의 가장 열악한 이동주택단지를 소유한 임대업자의 연소득은 최저임금을 받으며 전일제로 일하는 그의 세입자보다 서른 배가, 복지 수당이나 SSI를 수령하는 세입자보다는 쉰다섯 배가 더 많다. 여기서 두 가지 자유, 즉 임대료에서 이윤을 얻을 자유와 안전하고 적정한 가격의 주택에서 살 자유는 상충한다.

(...)

이 두 가지 자유의 균형을 재조정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저소득 가구가 수혜를 받을 수 있도록 주택바우처 프로그램을 크게 확대하는 것이다.

(...)

기본 개념은 간단하다. 일정한 소득 수준 이하의 모든 가정에 주택바우처를 받을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마치 식료품 구매권이 있으면 사실상 아무 데서나 식료품을 구매할 수 있듯, 이 바우처가 있으면 주택이 너무 비싸거나 크거나 호화롭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허름하고 황폐한 경우가 아닌 이상 원하는 어디서든 살 수가 있다. 이들의 집은 대단하지는 않아도 품위 있고 가격이 적정해야 할 것이다. 프로그램 관리인들은 민간시장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알고리즘 등의 수단을 차용하여 정교한 분석을 진행하고, 이를 통해 집주인들이 너무 높은 집세를 매기거나 저소득 가정들이 필요 이상의 큰 집을 선택하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다. 바우처를 소지한 가구들은 소득의 30퍼센트만 주거비로 지출하고 나머지는 바우처로 부담한다.(416-417p)

 

 

 

 

ㅡ 매튜 데스몬드, <쫓겨난 사람들> 中, 동녘

,

2024/8/31
 
 
이 책을 읽는 사람이 트위터를 이용하고, 최근 문학을 따라 읽으며, 문학을 둘러싼 논의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이 재미없기는 힘들 것 같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 모두에 해당하지 않으면 덜 재밌을 수도 있겠다.
 
 
 
 
우리는 지금 권력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책을 더 낫게, 더 이해하기 쉽게, 더 간결하게 만들고 있었다. 원래의 작품은 독자가 스스로 멍청하다고 느끼게 했고, 가끔은 소외감마저 들게 했다. 전체적으로 흐르는 독선적인 분위기 때문에 독자에게 좌절감을 안겨줄 가능성이 컸다. 아테나의 글에서는 그녀의 온갖 짜증스러운 점이 악취처럼 풍겼다. 반면에 내가 쓴 새로운 버전은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 누구든지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그런 이야기였다.(67-68p)
 
 
출구 전략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법처럼 모든 걸 멈추게 할 사죄의 방법이나 방어책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이 난장판에 휘말려봐야 다 소용없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을 내놓든 결국 나한테 불리하게 쓰일 증거만 추가하는 꼴이 될 게 뻔하다. 그리고 온라인에서 승리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미 폭로된 내용을 되돌릴 방법, 인터넷이 나를 잊게 만들 방법은 없다. 나는 영원히 각인되어버렸다. 누구든 구글에서 내 이름을 검색하거나 문학 행사에서 내 이름을 꺼낼 때마다 표절 스캔들을 끈질기게 나오는 방귀처럼 내게 붙어 다니며 분위기를 망칠 것이다.
이 스캔들, 저 스캔들에 시달리면서도 명성을 완벽하게 유지하는 작가들도 있기는 했다. 대부분 백인이고, 대부분 남성 작가였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연쇄적으로 성희롱을 저질렀다. 할란 엘리슨도 마찬가지였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메리 카를 학대하고 희롱하고 스토킹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천재로 칭송받고 있다.(210p)
 
 
그때는 아테나가 왜 그냥 오프라인에만 머물면서 자기가 부유하고 예쁘고 성공한 작가라는 사실에만 집중하지 못할까 하는 심술궂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테나가 한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분명히 안다. 온라인을 완전히 끊는 건 불가능하다.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잠들어 있든, 깨어 있든, 아니면 샤워하기 위해 잠시 휴대폰을 내려놓든 매 순간 수십, 수백 아니 수천 명의 낯선 이들이 저 밖에서 당신의 개인 정보를 뒤지며 당신 삶에 교묘히 파고들어 조롱하고, 욕보이고, 심하면 위험에 빠트릴 방법을 찾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온라인에 올린 사진과 밈, 유튜브 영상에 단 댓글, 생각 없이 올린 트윗 하나하나가 후회됐다. 악플러들은 그런 것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찾아낼 테니까. 나는 첫 하루 동안 많은 디지털 흔적들을 삭제했지만, 웹 기록 보관소에 있는 것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
아니, 트위터는 현실이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현실이다. 왜냐하면 그 영역에 출판이라는 사회경제가 존재하기 때문이고, 업계는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오프라인에서 작가들은 모두 얼굴을 감추고 서로에게서 고립된 채 단어들을 쏟아내는 가상의 생명체들이다. 우리는 누구의 어깨 너머도 엿볼 수 없다. 다들 멋진 척하고 있지만 정말 실제로 그렇게 멋진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온라인에서는 한창 뜨겁게 달아오르는 가십을 접할 수 있다. 실제로 그 일이 벌어지는 곳에 한 자리 차지할 만큼 중요한 사람이 아니어도 가능하다. 온라인에서는 스티븐 킹에서 엿 먹으라고 할 수도 있다. 온라인에서는 현재 가장 인기 있는 스타 작가가 실제로는 출간한 작품 모두 절판시켜야 할 정도로 너무나 문제가 많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출판계의 평판이 끊임없이 구축되고 파괴되는 곳이 바로 온라인이다.(214-216p)
 
 
이런 일들을 누가 제대로 알까? 트위터는 자격이 없으면서도 우리 모두를 열심히 판단한다. 제프리는 누구를 상대하느냐에 따라 기만적이고 폭력적이며 마음대로 상대를 조종하려하는 불안한 거머리가 될 수도 있었고, 피해자가 될 수도 있었다. 아테나는 꽤 깔끔하게 상황에서 벗어났지만 그럴 수 있었던 건 아름답고 재능 있는 아테나 리우와 사귀는 게 끔찍하다는 제프리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았고 이성애자 백인 남성을 동네북으로 삼는 편이 항상 더 쉽기 때문이었다.(250p)
 
 
"나한테서도 훔쳤어." 제프리가 말했다. "끊임없이.“
정신이 멍했다. "지금 그 말은 네 이야기가ㅡ“
"아니, 내 말은ㅡ 그게, 좀 복잡해." 제프리가 주변을 흘깃 둘러봤다. 누가 엿듣기라도 할까 봐 두려운 듯했다. 그는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는 어떤 거냐면ㅡ 좋아, 봐봐, 예를 들어볼게. 우린 종종 싸웠거든? 개털 알레르기나 공동 자금 문제 같은, 뭐든 말이 안 되지만 당시엔 되게 중요하게 느껴졌던 그런 걸로 말이야. 그러다 내가 뭔가 절박해서 아무 말이나 막 하잖아? 그러면 바로 그 다음 달 단편소설에 내가 한 말이 그대로 나와. 가끔 다툴 때마다 아테나가 나를 아주 냉정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드고 보곤 했는데, 난 그 표정이 뭔지 알고 있었어. 왜냐하면 아테나가 초고를 구상할 때의 표정이랑 똑같았거든. 그리고 사귀는 내내 난 아테나가 정말 우리 관계에 진심인지, 아니면 모든 게 집필 중인 소설을 위한 건지, 어떤 행동이든 내 반응을 끄집어내 소설에 쓰려고 그러는 건지 알 수 없었어. 미쳐버릴 것 같더라고."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콧대를 눌렀다. "가끔 나를 화나게 하는 말을 하거나 내가 겪은 일에 관해 묻곤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왠지 조사당한다는 생각, 아테나가 나를 먹잇감으로 삼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어.“
제프리한테 진심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 남자는 아테나한테 <로커스>의 평론가와 맞서는 걸 지원해주지 않으면 레딧에 누드사진을 유출하겠다고 협박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의 눈에 담긴 진심과 고통을 볼 수 있었다. 아테나는 늘 자기가 한 건 상대에 대한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트라우마에서 정수를 뽑아내 영원한 것으로, 즉 '고통과 상처를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준다'는 것이었다. 일단 작품을 완성해 개인적인 이야기를 대단한 구경거리로 만들고나면, 고통이 여전히 남아 있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384-385p)
 
 
스토리텔링의 핵심은 무엇보다 자신의 실제 경험 이외의 것을 상상하고,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며, 연민을 가지고 다양한 캐릭터를 진실하게 그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출판할 수 있는 것은 회고록과 자서전뿐일 텐데, 그런 걸 원하는 사람은 없다. (···) '말할 수 있는 권리'는, 소외된 작가를 위한 지원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소외된 경험만을 쓰도록 만드는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기도 한다.(439-440p)
 
 
 
ㅡ R. F. 쿠앙, <옐로 페이스> 中, 문학사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