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5/17

 

 

죄의식은 우리가 우리의 연인들에게 이런 비밀들을, 이런 진실들을 말하는 이유다. 이것은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며, 그 이면에는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떻게든 일말의 죄의식을 덜어줄 수 있으리라는 추정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죄의식은 자초하여 입는 모든 상처들이 그러하듯 언제까지나 영원하며, 행동 그 자체만큼 생생해진다. 그것을 밝히는 행위로 인해, 그것은 다만 모든 이들의 상처가 될 뿐이다. 하여 나는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 역시 내게 그러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128~129p)

 

 

 

ㅡ 앤드루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中, 21세기북스

,

2016/5/13

 

 

대립이나 증오는 나라와 나라뿐만 아니라, 상이한 종교 간에도 이어진다. 종교의 차이가 어제, 여성 수상의 죽음을 낳았다. 사람은 사랑보다도 증오에 의해 맺어진다. 인간의 연대는 사랑이 아니라 공통의 적을 만듦으로써 가능해진다. 어느 나라건 어느 종교건 오랫동안 그렇게 지속되어 왔다.(293p)

 

 

 

ㅡ 엔도 슈사쿠, <깊은 강> 中, 민음사

,

2016/5/14

 

 

읽음.

 

 

 

ㅡ 이기호,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中, 마음산책

,

2016/5/2

 




모두가 알지만, 누구나 읽지는 않는 고전 중 하나인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읽었다.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책을 쓴 많은 저자 중에서 굳이 플로베르의 책을 읽은 이유는 별거 없다.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책을 이야기하는 책을 좋아하는데 가령 "작가란 무엇인가”, “작가의 책과 같이 작가들의 인터뷰를 담은 책은 작가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어서 좋아하고, “이모부의 서재”, “서서비행”, “난폭한 독서와 같은 서평집은 독서욕을 자극하므로 좋아한다. 유혹하는 글쓰기”, “소설가의 각오와 같이 글 쓰는 방법을 알려준다고 해놓고 정작 소설 작법에 대한 배움보다는 그들의 인생사를 들려주는 책도 좋다. 이런 책을 읽던 와중에 서평가 금정연의 난폭한 독서라는 책에서 플로베르의 부바르와 페퀴셰를 언급하는 부분을 보게 되었다. 이 책은 책과 독서를 통해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달으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하는 부바르와 페퀴셰라는 두 인물의 이야기로 애석하다면 애석하고, 우스꽝스럽다면 우스꽝스러운 그들의 여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흥미로운 얘기로 느껴져 읽고 싶은 마음에 부바르와 페퀴셰를 샀으나, 책장에 고이 모셔두고 정작 읽게 된 것은 도서관에서 빌린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다. 인생이 늘 그런 식이다.

흔히 좋은 평가를 받으나 쉬이 읽어내기에 버거울 정도의 두께를 자랑하는 책들 대부분이 지루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렇다면 이 책들은 왜 지루하고 그 지루한 것을 왜 읽는가. 나는 방금 읽어야 한다고 하지 않고 읽는가라고 했다. 모든 사람이 이런 책을 읽을 필요도 없고 세상에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책이란 없는 법이다. 허접한 비유를 들어 얘기해보자면 일반냄비와 뚝배기의 차이다. 두 냄비에 우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목적이 다를 뿐이다. 우리는 라면이 먹고 싶을 때 뚝배기에 끓이지 않는다. 라면을 먹는 이유는 빠르고 간편하게 식사를 해결하려는 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물을 빠르게 끓일 수 있는 일반 냄비를 사용한다. 온기가 오래 가지 않고 뚝배기보다는 빨리 식는다는 점을 단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모든 음식이 온기가 오래갈 필요는 없으므로 금방 식는다고 단점이라 불평할 일은 아니겠다. 그저 목적에 맞게 사용하면 된다. 반면에 뚝배기에서는 물이 비등점에 도달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므로 라면을 끓이기에는 적합하지 않고 비교적 오랫동안 온도가 유지되는 음식에 적합하다. 즉 짧은 순간의 몰입과 집중적인 재미를 원한다면 그에 부합하는 비교적 짧은 분량의 책을 읽으면 되고, 발동이 걸리는 데 시간이 필요하며 무한정 지루할 수도 있으나 차곡차곡 쌓아가는 재미를 느끼고자 한다면 그런 책을 읽으면 된다. 그러므로 지루하다는 평가를 받으나 세월을 견디며 많은 사람에게 충분한 인정을 받게 된 소위 말하는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을 읽는 이유라면 지루함을 참고 읽어낸 독자에게 그것을 만회할만한 경험을 제공할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해놓으니 모든 책이 다 가치가 있고 읽을 만하다는 PC하지도 않을뿐더러 하나 마나 한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결코 그런 식으로 얼버무리는 것은 아니다. 당연한 소리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좋은 책이 좋지 않은 책에 비해 드물었다. 이것은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다. 위의 비유는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은 논외로 하고 소위 말하는 좋은 책에 적용할 수 있는 기준으로 하는 말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기준과 포부를 가지고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간의 경야를 읽으려는 사람이 있을 텐데 아무리 한가롭기로서니 부러 자신을 학대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재미도 없는 딴소리를 계속하고 있는데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책의 대강의 줄거리는 엠마 보바리라는 한 여자가 결혼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륜을 통해 생의 활력을 찾지만 결국에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는 지극히 통속적이고도 평범한 이야기이다. 그도 그럴 것이 플로베르가 처음 마담 보바리를 쓸 때 당대의 흔한 사건을 소재로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도 평범한 통속소설이 왜 그렇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지 궁금해서 책을 읽은 후에 역자의 해설, 평론가들의 분석 등 이것저것을 찾아보았다. 책을 읽으며 어렴풋하게나마 느꼈던 것을 예리하게 짚어주는 것도 있었고, 전혀 생각지 못한 지적도 있었다. 직접화법도 간접화법도 아닌 자유간접화법을 통해 화자가 물 흐르듯이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하고, 운율과 리듬감을 중시한 단어(솔직히 이건 번역본을 읽으니 제대로 느낄 수 없었다)를 보여준다고도 하며, 여러 가지 상황과 등장인물을 통해 작품 전반에 깔아놓은 아이러니를 드러내기도 한다. 풍부한 함의를 가지며 여러 층위로 읽을 수 있는 이 소설에서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아이러니다. ‘마담 보바리라는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자 지배적인 정서는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든다. 플로베르는 이 작품에 무려 4년의 기간 동안 몰두했다. 4년이라는 기간 중 짧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을 집에 거주하며 마담 보바리를 썼다고 하며, 초고 작성과 그 후에 이어지는 지난하고도 끝없는 퇴고 과정으로 완성한 작품이다. 집필 중의 편지왕래를 통해 당시의 퇴고 과정과 그 방향에 대한 플로베르의 의견을 엿볼 수가 있다. 플로베르는 마담 보바리가 부분으로 나누어서 분석할 수 있는 텍스트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온전한 형태로 이해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전후 맥락 없이 특정 대목을 인용해봤자 작가가 원하는 형태로 그 아이러니를 온전히 느끼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옮겨보자면 이런 식이다.

 

이리하여 결국 그녀는 한 주일에 한 번씩 애인을 만나러 시내로 나가는 허락을 남편에게서 얻어내고야 말았다. 한 달이 지나자 심지어 사람들은 그녀가 놀랍게 발전했다고까지 말했다.(378p)”

 

이 부분은 엠마가 피아노 레슨을 핑계로 불륜의 상대와 만나러 가는 장면이다. 당연하게도 피아노 레슨 따위는 1초도 받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그녀의 실력이 늘었다고 평한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면서도 사람들이 흔히 남에게 하는 말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사람들은 피아노 레슨을 받는다고 들었으니 그저 실력이 향상됐을 거라고 짐작했겠고 자연스럽게 그런 말들을 별 생각 없이 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정말이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당신을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으며 남 일에 별 관심이 없다는 동서고금의 지혜를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나만 더 옮겨보자.

 

전나무 숲속의 무덤가에서 한 아이가 무릎을 꿇고서 울고 있었다. 흐느낌으로 찢어질 듯한 그의 가슴은 달빛보다도 더 부드럽고 칠흑 같은 밤보다도 더 헤아릴 길 없는 엄청난 회한에 짓눌려 어둠 속에서 헐떡이고 있었다. 갑자기 철책문 소리가 삐걱하고 났다. 레스티부드와였다. 그는 잊고서 두고 간 삽을 찾으러 온 것이었다. 담을 기어올라 도망가는 쥐스텡을 알아본 그는 그제서야 언제나 그의 감자를 훔쳐가는 도둑놈이 누군지 알아냈다고 생각했다.(490~491p)”

 

이 부분은 엠마의 독촉에 못 이겨 간접적이나마 엠마의 죽음을 방조한 쥐스텡이라는 사람이 죄책감에 무덤가에서 울고 있는 것을 보고 레스티부드와라는 성당지기가 도둑놈으로 오해하는 장면이다. 살아가면서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날까? 레스티부드와에 대해 혀를 차며 성급한 사람으로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이와 같은 순간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 어디 레스티부드와에게만 해당되는 말일까. 자신이 당하는 오해만 억울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오해로 얼마나 많은 타인을 억울하게 했을까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모든 이해의 과정을 거치면 오해 따위는 없는 관용과 이해의 삶을 살 수 있느냐고 플로베르에게 물을 수 있을 텐데 우리네 인생사가 말처럼 그리 쉽지도 않을뿐더러 플로베르의 생각이 그럴 것 같지도 않다.

언급한 부분들 이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삶이라는 아이러니를 충실히 담고 있는 소설이며 충분히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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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풍습에 따라 그녀는 뭘 좀 마시라고 권했다. 그가 사양하자 그녀가 다시 강권했다. 그리고 마침내 웃으면서 자기도 마실 테니 리큐어를 한잔 마시라고 제안했다. 그래서 그녀는 찬장에서 퀴라사오 병을 꺼내오고 손을 뻗쳐 조그만 유리잔 두 개를 집어다가 하나에는 가득히, 다른 하나에는 살짝 붓는 척만 하고는 잔을 맞부딪친 다음 입으로 가져갔다. 거의 빈 잔이었으므로 그녀는 마시기 위하여 몸을 뒤로 젖혔다. 그렇게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입술을 내민 채 목을 길게 늘여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자 그녀는 웃으면서 예쁜 이빨들 사이로 혀끝을 내밀어 컵 밑바닥을 몇 번씩이나 날름거리며 핥았다.(39p)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일수록 그녀의 생각은 그것에서 멀어져 갔다. 그녀를 가까이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 권태로운 전원, 우매한 소시민들, 평범한 생활 따위는 이 세계 속에서의 예외, 어쩌다가 그녀가 걸려든 특수한 우연에 불과한 반면, 저 너머에는 행복과 정열의 광대한 나라가 끝간데 없이 펼쳐져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녀는 욕망에 눈이 어두워진 나머지 물질적 사치의 쾌락과 마음의 기쁨을 혼동하고, 습관에서 오는 우아함과 감정의 섬세함을 혼동하고 있었다. 인도산 식물의 경우가 그렇듯이 연애에도 그것을 위해 준비된 땅과 특수한 기온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달빛 아래서의 한숨, 긴 포옹, 내맡긴 손에 떨어지는 눈물, 육체의 뜨거운 흥분과 우수에 젖은 애정 같은 모든 것은 한가로움으로 가득한 거대한 성관의 발코니, 두꺼운 융단이 깔리고 가득한 꽃 바구니, 단 위에 침대가 놓이고 비단 장막이 드리워진 규방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고 거기에다 보석의 광채와 하인들이 입은 제복의 장식끈의 빛을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90p)

 

 

고개를 돌리자, 샤를르가 거기에 있었다. 그는 챙달린 모자를 눈썹께까지 푹 눌러 쓰고 위아래의 두터운 입술을 덜덜 떨고 있었기 때문에 한층 더 바보스럽게 보였다. 그의 잔등을, 그 태연한 잔등을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났다. 그녀의 눈에는 프록코트에 덮인 그 잔등 위에 그의 사람됨의 진부함이 온통 다 진열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짜증스러운 기분 속에서도 일종의 잔인한 쾌감을 맛보면서 그녀가 남편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레옹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는 추위로 창백해졌지만 그 때문에 얼굴엔 한층 더 감미로운 우수가 서린 것 같아 보였다. 넥타이와 목 사이로 조금 느슨해진 셔츠의 칼라가 살을 드러내보이고 있었다. 한쪽 귀의 끝이 머리칼 다발 밑으로 나와 있고 구름을 쳐다보고 있는 크고 푸른 두 눈이 엠마에게는 산속의 하늘 비친 호수보다도 더 맑고 더 아름답게 보였다.(149~150p)

 

 

주고받는 대화는 활기가 없었다. 보바리 부인은 매번 말을 꺼내는 듯하다가 스스로 그만둬 버리곤 했고 레옹 자신도 몸둘바를 모르겠다는 듯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그는 벽난로 옆 낮은 의자에 앉아서 상아 바느질 상자만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바늘을 놀리면서 가끔 손톱으로 천에다 주름을 잡곤 했다.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마치 그녀의 말에 사로잡혔다면 그랬을 것처럼, 그녀의 침묵에 발목이 잡힌 채 말이 없었다.

딱한 사람이군!”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나의 어떤 면이 맘에 안 들어서 저럴까?”하고 그는 자문해보았다.(154~155p)

 

 

사실하고 그는 엠마 곁으로 되돌아와서는 커다란 사라사 손수건을 이빨로 물어 펴면서 말했다. “농민들은 정말 불쌍해요

그들 말고도 또 있어요하고 그녀가 말했다.

물론이지요! 예를 들어서 도시의 노동자들이 그렇죠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실례지만 말입니다, 내가 아는 불쌍한 가정의 어머니들은, 정숙한 여성들은, 정말이지 거의 성녀라고 해도 좋을 사람들인데 빵 한 조각 없이 헐벗고······”

하지만 저어······”하고 그녀는 말을 받았다(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입술 양쪽 끝이 일그러졌다). “신부님, 빵은 있어도 여전히 뭔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여자들이······”

겨울에 불이 없는 여자들하고 신부가 말했다.

아니! 그런 거야 아무러면 어때요?”

뭐라고요! 아무러면 어떠냐고요? 내가 보기엔 사람이란 몸 따뜻하고 배불리 먹기만 하면······왜냐하면······결국······”

아아 어쩌면 좋아. 어쩌면 좋아하고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가 안 좋으신가요?”하고 그는 걱정스러운 듯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혹시 소화 불량이 아닐까요? 보바리 부인, 빨리 집에 돌아가셔서 차를 좀 드세요, 그러면 기운이 납니다. 아니면 흑설탕을 탄 냉수를 한잔

왜요?”

그녀는 어떤 몽상에서 막 깨어난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인께서 손으로 이마를 짚기에 그랬죠. 현기증이 나는 줄 알았거든요

그러고는 문득 생각난 것처럼,

그런데 방금 나한테 뭔가 물어보지 않았어요? 그게 뭐였지요? 생각이 안 나네요

제가요? 아무것도 아녜요······ 아무것도하고 그녀는 되풀이했다.(167~168p)

 

 

사랑은 부재로 인하여 조금씩 꺼져 갔고 미련은 습관 속에서 질식해 버렸다. 그녀의 창백한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불길의 남은 빛은 더욱 어두운 그림자에 덮여 점점 사라져갔다. 의식이 몽롱해진 탓인지 그녀는 남편에 대한 혐오를 연인에 대한 동경으로 착각했고 불타오르는 증오를 새로이 뜨거워지는 애정으로 오해했다. 그러나 여전히 폭풍은 휘몰아쳤고 정열은 타오를 대로 타올라 재가 되었지만 아무런 구원도 오지 않고 햇빛은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은 채 어디를 향해도 캄캄한 밤이었으므로 그녀는 뼛속으로 스며드는 무서운 추위 속에서 길을 잃은 채 갈 곳 몰라하고만 있었다.(182p)

 

 

로돌프는 부드러운 가죽장화를 신고 있었다. 저 여자는 분명 이런 것을 본 적이 없으리라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과연 그가 커다란 우단 저고리에 흰 털로 짠 바지를 입고 층계참에 나타나자 엠마는 그 풍채에 매혹되었다.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229p)

 

 

그래서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자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어졌고 그리하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태도가 달라져 갔다.

그는 이미 옛날처럼 그녀를 울리던 저 감미로운 말을 더 이상 입에 담지 않게 되었고 그녀를 미치게 하던 저 열렬한 애무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그녀가 그 속에 흠뻑 빠져 지내고 있었던 그들의 엄청난 사랑이, 마치 강바닥으로 빨려 들어가는 강물처럼 그녀의 발밑에서 줄어들어 가는 것 같았고 마침내 그녀의 눈에 강바닥의 개흙이 보였다. 그녀는 그걸 믿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더욱더 많은 애정을 쏟았다. 그러자 로돌프 쪽에서는 점차 무관심을 감추려 하지 않게 되었다.(247p)

 

 

그러나 살구 때문에 졸도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죠! 어떤 종류의 냄새에 극도로 민감한 체질의 사람들이 있거든요! 이건 병리학적 견지에서나 생리학적 견지에서나 연구해 볼 만한 흥미로운 과제가 될 겁니다. 신부들은 그 중요성을 알고 있어서 옛날부터 종교의식에는 향료를 써왔던 겁니다. 그 목적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황홀한 기분을 자아내는 데 있죠. 게다가 남성보다 더 섬세한 여성들의 경우는 효과를 거두기가 쉽죠. 그중에는 뿔을 태우는 냄새나 부드러운 빵 냄새만 맡아도 기절하는 예까지 있다고 하거든요······”(301p)

 

 

그들은 둘다 자기들의 과거가 이랬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었다. 각자가 하나의 이상을 만들어가지고 이미 지나간 과거의 생활을 거기에 맞추고 있었다. 게다가 말이란 언제나 감정을 길게 늘이는 압연기 같은 것이다.(340p)

 

 

 

샤를르는 그녀가 그토록 말이 없는 것을 보고 그녀도 슬퍼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감동적인 그녀의 고통을 더 이상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면서 자기의 슬픔을 털어버리면서,

어제는 재미있었어?”하고 그는 물었다.

”(365p)

 

 

그녀는 그를 보고 <키가 커지고 말랐다>고 했다. 그와 반대로 아르테미즈는 <튼튼해지고 볕에 그을렀다>고 했다.(374p)

 

 

이리하여 결국 그녀는 한 주일에 한번씩 애인을 만나러 시내로 나가는 허락을 남편에게서 얻어내고야 말았다. 한 달이 지나자 심지어 사람들은 그녀가 놀랍게 발전했다고까지 말했다.(378p)

 

 

처음 한동안 그것은 엄청난 행복이었다. 그러나 조금 지나자 그는 숨기지 않고 솔직히 말했다. , 그의 주인은 이렇게 일에 지장이 생기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는 것이었다.

, 어때요! 그냥 나와요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러면 그는 몰래 빠져나왔다.

그녀는 레옹에게 검은색 옷만 입으라고 했고, 그가 루이 13세의 초상처럼 턱수염을 뾰족하게 기르기를 원했다. 그러고는 그의 거처를 알고 싶어했고 직접 보고 나자 초라해 보인다고 했다. 그 말에 레옹은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거기에 개의치 않고 곧 그에게 자기네 것과 같은 커튼을 사서 달라고 권했다. 그가 돈이 든다고 반대하자,

어마! 어쩌면 그렇게 쩨쩨해요!”하고 그녀는 웃으면서 말했다.

만날 때마다 레옹은 지난번 밀회 이후의 모든 행동을 낱낱이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녀는 시를, 그녀를 위한 시를, 그녀를 찬양하는 사랑의 시를 받고 싶다고 했다. 그는 첫줄을 쓰고 나면 아무리 해도 둘째 줄의 운을 맞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선물용 시집에서 십사 행 시 하나를 베껴 보냈다. 허영심 때문이라기보다는 오로지 엠마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녀의 생각에 대하여 이러니저러니 하지 않았다. 그녀의 취미는 모두 받아들였다. 그녀가 그의 정부라기보다는 그가 그녀의 정부가 되었다. 그녀의 정다운 말과 키스는 그의 혼을 쏙 빼놓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깊고 은밀한 나머지 물질 세계의 것이 아니라고 여겨질 정도인 이런 퇴폐적 기교를 그녀는 대체 어디서 배운 것일까?(401~402p)

 

 

사실 애써 찾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 다 거짓이다! 미소마다 그 뒤에는 권태의 하품이, 환희마다 그 뒤에는 저주가, 쾌락마다 그 뒤에는 혐오가 숨어 있고 황홀한 키스가 끝나면 입술 위에는 오직 보다 큰 관능을 구하는 실현 불가능한 욕망이 남을 뿐이다.(410p)

 

 

이런 옷감을 미터당 칠 수에 염색 보증한다며 팔고 있으니 원! 그래도 사람들은 믿는다니까요! 아시겠지만, 정직하게 다 말하며 장사할 수야 있나요그는 이렇게 다른 손님들에게는 속임수를 쓴다고 고백함으로써 그녀에 대한 자신의 에누리없는 정직성을 납득시키려 했다.(414p)

 

 

결국 레옹은 엠마를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리고 아침이면 난로 옆에서 동료들이 떠들며 놀려대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장차 그 여자 때문에 얼마나 난처한 일을 당할지, 또 어떤 소문이 퍼질지를 생각하자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은 자신이 후회되었다. 게다가 그는 곧 수석 서기가 될 참이었다. 자중해야 할 때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풀루트 연습도 집어치우고 감정의 흥분이나 공상의 세계와도 인연을 끊었다.속된 부르주아도 젊음의 피가 끓어오르면 단 하루, 단 일분 간일망정 자기가 위대한 정열을 바칠 수 있고 드높은 일을 해낼 수가 있다고 믿는 법이니 말이다. 가장 보잘것없는 바람둥이도 동방의 황후를 안아보는 꿈을 꾸어본 적이 있는 법이고 일개 공증인도 가슴속에는 시인의 잔해를 간직하고 있는 법이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그런 분에 넘친 꿈들을 접었다.

이제 그는 엠마가 갑자기 가슴에 매달려 흐느껴 울기라도 하면 지겹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음악도 일정량이 넘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의 마음은 시끄러운 사랑타령엔 무관심하게 졸기만 할 뿐 이제는 그 미묘한 맛을 식별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두사람은 서로를 너무나도 알아버려서 기쁨을 백 배나 더해주는 저 경이로운 소유의 맛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레옹이 그녀에게 싫증이 난 것만큼 그녀 역시 상대에게 물려버렸다. 엠마는 간통 속에서 결혼 생활의 모든 진부함을 그대로 발견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하면 그 따분한 간통의 유혹을 물리칠 수가 있을까? 그런데 그녀는 이러한 행복의 저속함에 굴욕을 느끼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습관 때문에 혹은 타락했기 때문에 그녀는 거기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너무 큰 행복을 기대하다가 오히려 행복의 샘을 송두리째 고갈시켜 놓으면서 그녀는 날이 갈수록 더욱더 열을 올리고 있었다. 마치 레옹이 자기를 배반하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의 실망을 그의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 자기가 먼저 헤어질 결심을 할 용기가 없기 때문에 두 사람의 이별을 가져올 파국이 일어나주기를 바라기까지 했다.(419~420p)

 

 

전나무 숲속의 무덤가에서 한 아이가 무릎을 꿇고서 울고 있었다. 흐느낌으로 찢어질 듯한 그의 가슴은 달빛보다도 더 부드럽고 칠흑 같은 밤보다도 더 헤아릴 길 없는 엄청난 회한에 짓눌려 어둠 속에서 헐떡이고 있었다. 갑자기 철책문 소리가 삐걱하고 났다. 레스티부드와였다. 그는 잊고서 두고 간 삽을 찾으러 온 것이었다. 담을 기어올라 도망가는 쥐스텡을 알아본 그는 그제서야 언제나 그의 감자를 훔쳐가는 도둑놈이 누군지 알아냈다고 생각했다.(490~491p)

 

 

미망인 뒤피 부인이 그에게 영광스럽게도 <그녀의 아들인 이브토의 공증인 레옹 뒤퓌 씨와 봉드빌의 레오카디 르뵈프 양의 혼약> 소식을 전하게 된 것은 바로 그 무렵이었다. 샤를르는 그녀에게 보낸 여러 가지 축하의 말들 가운데 이런 말을 썼다.

<가엾은 나의 아내가 살아 있었다면 대단히 기뻐했을 것입니다!>(492p)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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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4/27

 

 

읽는 즐거움을 주는 책이다. 지금 봐도 이럴진대 출간 당시 찬사 일색이었다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작품을 구성하는 내용과 형식 모두 흥미로웠으나 역시 형식적인 측면이 더 놀랍다. 다루는 내용에서는 별다를 것 없는 플로베르에 대한 평전이라면, 형식에서 내용을 압도하는 성취를 보여준다. 플로베르의 평전이라는 외양을 띠고 시종일관 플로베르의 문장을 인용하여 플로베르에 대해 흥미로운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으나, 플로베르에 대한 정보 제공이 이 책을 쓴 목적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플로베르라는 특정 개인의 입을 빌려 보편적인 독자들에게 자기 생각을 들려준다. 이 생각은 문학 비평에 대한 작가 자신의 흥미로운 견해로 나타나기도 하고,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각도(시대적 맥락, 주체)에 따라 달라지는 해석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유머와 아이러니는 덤이다. 한 작가의 책을 여러 권 읽어 좋은 점이라면 그들이 천착하는 주제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고, 미묘할지라도 달라지게 마련인 그 주제를 표현하는 형식의 변화와 생각의 변화 과정 모두를 볼 수 있다는 점일 텐데 이것이 비단 책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혹자는 비슷한 소재로 톤만 달리해서 책을 쓴다고 비아냥거릴 수 있겠지만, 정말이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비근한 예로 영화를 들어보자. 한국의 평론가들이 사랑해마지않는 홍상수의 영화는 어떤가. 흔히 홍상수의 영화는 욕망의 4원소(남자, 여자, , 침대)를 통해 섹스, 지식인의 허위 허식, 권력관계의 모순성을 드러낸다고 한다. 게다가 배우만 달리하여 지겹도록 똑같은 영화를 찍어 낸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백번 양보해서 내용이 동일하다해도 예술에는 형식이라는 것이 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나 강원도의 힘까지 거슬러 갈 것도 없이 최근작 두 편만 살펴봐도 그 변화라는 것을 두드러지게 느낄 수 있다. 자유의 언덕(순차적으로 에피소드가 나열되는 방식이 아니라 편지가 흩어짐으로써 순서를 알 수 없도록 파편적으로 나누어 제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비슷한 만남의 순간이 두 번 반복되는데 미묘하게 다르게 진행)는 내용도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표현하는 형식의 측면에서도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이걸 어떻게 똑같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얘기가 좀 샜는데 결론은 이 책은 포스트모던이라는 철 지난 용어를 어색하지 않게 붙일 수 있는 남다른 형식미를 뽐내고 있으며, 잘 써도 보통 잘 쓴 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나는 인생에 대한 완벽한 예감을 갖고 있었다. 인생은 환기창을 빠져나가는 구역질나는 요리 냄새 같았다. 그 냄새 때문에 구토를 하게 되리라는 것은 먹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40p)

 

 

? 나란 음식은 여러분이 맛을 들이기 위해서는 여러 번 먹어야 하는 끈적끈적하고 역겨운 냄새가 나는 마카로니 치즈와 같다. 여러분은 마침내 나를 좋아하게는 되겠지만, 그것은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몇 번쯤 겪고 난 후일 것이다.(42p)

 

 

많은 것들이 나를 화나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무엇에도 화내지 않는 그날, 나는 버팀목을 뽑아낸 인형처럼 고꾸라지고 말 것이다.(45p)

 

 

플로베르는 키가 크고, 뚱뚱하며, 미친 사람이었다. 그리고 플로베르와 관련된 색깔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보바리 부인을 위하여 자료를 준비하고 있을 때 플로베르는 색유리창을 통하여 시골 마을을 관찰하는 데 오후를 몽땅 허비한 적이 있다. 그가 본 것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었을까?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 정보는 어떠한가? 1853, 트루빌에서 플로베르는 바다 위로 떨어지는 태양을 보다가, 붉은 포도 잼으로 만든 커다란 원반 같다고 소리친 적이 있다. 아주 생생한 표현이다. 그러나 1853년 노르망디에 있던 그 붉은 포도 잼은 지금과 같은 색깔이었을까(우리가 대조해 볼 수 있도록 잼 단지가 하나라도 남아 있을까? 그리고 그동안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색깔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그런 것들이 걱정되는 것들이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해 식료품 회사에 편지를 써서 물어보려고 마음먹었다. 다른 통신자들과는 달리 그들은 바로 답장을 보냈다. 그 내용 역시 고무적이었다. 붉은 포도잼은 가장 순수한 잼이어서, 1853년산 루앙의 것은 정제되지 않은 설탕을 사용했기 때문에 오늘날의 것처럼 맑지 않아도, 색깔은 거의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최소한 색깔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 석양을 상상할 수가 있다. 그런데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다른 곳에 질문한 답장에 따르면, 실제로 잼 단지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해도 건조가 잘되고, 공기가 잘 통하는 어두운 방에 완전히 봉인되어 보관되어 있지 않았다면 갈색으로 변했을 것이 거의 분명 하다는 것이다)?(115p)

 

 

솔직함은 혼란스럽다. 나는 당신에게 나의 이름을 말했다. 제프리 브레이스웨이트. 그것이 도움이 되는가? 조금은 그럴 것이다. 적어도 <B><G> 또는 <그 남자><치즈 애호가>보다는 낫다. 나를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 이름에서 무엇을 추론할 수 있었겠는가? 중류층 전문직 남성, 어쩌면 사무 변호사, 소나무와 히스 숲이 있는 고장의 주민. 희고 검은 점이 뒤섞인 트위드 복장. 군대 경력을아마도 눈속임으로나타내는 콧수염. 똑똑한 아내를 둔 사람. 아마도 주말에 보트 타기를 약간 즐기는 사람. 위스키보다는 진을 즐겨 마시는 남자. 그리고?

나는 전문직 계급의 제 1세대에 속하는 의사이다. 아니 의사였다. 당신이 알다시피 콧수염은 기르지 않았지만 내 나이 또래 남자라면 피할 수 없는 군대 경험을 갖고 있다. 나는 에섹스에 살고 있다. 이곳은 아주 특색이 없는 곳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홈 카운티> 중에서는 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다. 위스키는 마시지만, 진은 마시지 않는다. 트위드 복장도 하지 않고, 보트도 타지 않는다. 가깝게는 맞추었지만 그렇다고 충분히 근접한 것은 아니다. 내 아내에 대해서라면, 그녀는 똑똑하지 못하다. 똑똑하다는 말은 누구라도 그녀와 결부시키고 싶지 않은 단어일 것이다. 내가 전에 말했듯이 사람들은 치즈가 너무 빨리 숙성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부드러운 치즈에 방부제를 넣는다. 그렇지만 치즈는 숙성되기 마련이다. 그것이 치즈의 본래 성질이다. 부드러운 치즈는 흐물흐물해지고 단단한 치즈는 딱딱해진다. 그러나 결국에는 둘 다 곰팡이가 핀다.(128p)

 

 

한 인간의 삶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렇다고 한 인간의 삶에서 성공적으로 숨겨진 것 또한 전부는 아니다. 한 인간의 삶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거나 성공적으로 숨겨진, 이제는 믿을 수 없는, 거짓들이 전부는 아니다. 실현되지 못한 것 또한 삶이다.(151p)

 

 

그 대신 그는 무엇을 배웠는가? (...) 살지 않은 삶이란 것은 이미 살아온 삶의 어느 특정한 괴로운 문제점을 딱 해결할 수 있도록 항상 바뀐다는 사실을 배웠다.(152p)

 

 

내가 당신의 남편이었더라면, 우리는 모두 행복했을 것이다. 그리고 행복한 다음에는 서로를 미워했을 것이다. 그것이 정상이다.(153p)

 

 

그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어요. 크루아세에 있을 때는, 뜨거운 모래와 나일 강의 환영을 꿈꾸었고, 나일 강가에 있을 때는 습기 많은 안개와 크루아세의 환영을 꿈꾸었어요. 물론 그는 여행을 진정으로 좋아하지는 않았어요. 그는 여행이라는 관념과 여행의 기억만을 좋아했을 뿐, 여행 그 자체는 좋아하지 않았어요.(178p)

 

 

엘렌. 나의 아내. 죽은 지 백 년 되는 어느 외국 작가에 대해서 이해한 것보다도 더 이해하지 못한 사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것인가. 정상인가? 책은 그녀가 이러저러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삶은 그녀가 한 행동만 말한다. 책은 일어난 일을 설명해 주는 곳이고, 삶은 설명이 없는 곳이다. 삶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에 대해 나는 놀라지 않는다. 책은 삶을 의미 있게 한다. 유일한 문제는 책이 의미를 부여하는 삶은 당신 자신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이라는 점이다.(209p)

 

 

줄리언 반스, <플로베르의 앵무새> ,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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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패터슨은 남부인들의 자유에 대한 사랑 역시 노예제의 효과라고 보았다. “명예와 자유에 대한 남부인들의 고도로 발달된 감각에는 기만적이거나 비정상적인 데가 하나도 없다. 타인에게 속박과 굴욕을 가하는 자들일수록, 그들이 남들에게 갖지 못하게 한 것을 자기들은 갖고 있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깨닫고 있을 테니 말이다.” 이것은 에드먼드 모건이 미국의 노예제도, 미국의 자유의 마지막 장에서 피력한 견해이기도 하다. 버지니아 식민지의 초기 역사를 세밀하게 그린 이 책에서 모건은 자유와 평등에 대한 공화주의적 열정이 어떻게 노예제도에 대한 지지와 양립할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그가 보기에 워싱턴과 제퍼슨을 비롯하여, 미국의 독립에 사상적 기초를 제공했던 버지니아인들이 모두 대농장주이자 노예 소유주였다는 사실에는 어떤 역설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노예제도가 도입된 후 버지니아에서 성장한 많은 사람들이, 그 이전 세대와 달리 열렬한 공화주의자가 되었다는 사실에는 단순한 우연 이상의 무엇이 있는데, “적어도 법률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뜻에 거의 전적으로 굴종하는 사람들의 존재는,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제군주에 지배받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노예의 존재는 버지니아인들에게 자유의 소중함을 일깨웠을 뿐 아니라, 평등의 감정을 북돋우었다.(62~63p)

 

 

의례적 평등의 실현은 경칭의 인플레이션을 수반하곤 한다. 몇 해 전 뉴욕에 갔을 때 길에서 핫도그를 파는 남자에게 손님들이 sir’라는 경칭을 붙이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한국의 경우, 마트의 계산원이나 중환자를 돌보는 간병인들이 여사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평등의 제스처에는 현실적인 불평등을 은폐하는 효과도 있다. 간병인들을 여사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들이 처한 열악한 노동조건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153p)

 

 

한국 사회가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다루는 또 하나의 방법은 효도나 돌봄 같은 전통적인 가치를 강조하면서 가족에게 짐을 떠넘기는 것이다. 조금 전에 생활보호 대상자를 애완동물에 비유했지만, 한국에서는 애완동물이 될 자격조차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폐지를 주워 팔면서 혼자 사는 노인이 장성한 자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초생활수급권을 얻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이런 사례를 조명할 때 언론은 이 장성한 자녀에게 실제로 부양 능력이 있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만일 부양 능력이 있는데도 노인을 모시지 않는 거라면, 그 자녀는 인륜을 저버렸다는 비난을 받는다. 요컨대 문제는 시스템이 아니라 도덕과 풍습이라는 것이다. ‘시스템의 한계가 논의되는 것은 자녀 역시 막노동을 하거나 몸져 누워 있는 등 극단적인 빈곤 상태에 처해 있을 때뿐이다.(184p)

 

 

부모는 아이가 자기들로부터 나왔고, 한때 자기들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잊어야 한다. 부모는 무엇보다 아이에게 생명을 준 사람이 자기들이고, 그들이 아이를 죽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야 한다. 이 망각으로부터 사회의 가능성이 생겨난다.(217p)

 

 

즉 벌은 계약의 일부이며, 벌을 받는 동안에도 계약은 유지된다. 이것은 축구 경기에서 레드 카드를 받은 선수가 운동장 바깥으로 나간 뒤에도 여전히 규칙의 지배 아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벌이 보복이라고 말한다면, 벌이 지니는 이 계약적인 속성이 깨어진다. 보복이란 본래 보복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보복은 상대방의 인격에 대한 공격을 내포한다. 그 결과, 보복당한 사람은 보복한 사람과 예전의 관계로 완전히 돌아갈 수 없다(복수가 복수를 부르는 건 그 때문이다. 보복당한 사람이 다시 반격하지 않으면, 그는 상대방보다 낮은위치로 떨어진 채 남아 있게 된다). 반면 현대 사회에서 형벌은 규칙의 위반에 대해서만 책임을 묻고, 위반한 사람의 인격을 문제 삼지 않는다. 형기를 마친 사람은, 레드 카드를 받은 선수가 다음 경기에 출전하는 것처럼, 명예에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고 자연스럽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그 사람이 사회계약에 계속 참여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모든 계약은 주체들의 인격적 동등성을 전제하는 까닭이다.(232p)

 

 

우리는 죽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야말로 도덕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죽은 사람은 우리가 무엇을 준들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맺었던 관계의 본질은 우리가 더 이상 남들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게 되는 시점에 받게 될 대접을 통해 확인된다.(256p)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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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읽음

 

알랭 드 보통, <뉴스의 시대>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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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읽음

 

데이비드 보더니스, <시크릿 하우스> , 생각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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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읽음.

 

얄고도 얕다. 내가 대단한 교양인이라서 얕다고 생각하는게 아니라 도대체 겨냥한 독자층이 누구인지 궁금할 정도다.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 읽기에는 어려워 보이고 고등학생이나 성인이 읽기에는 애매하다. 게다가 설명이 너무나도 도식적이고 이분법적이다. 세금, 국가, 자유, 직업, 교육, 정의 미래 등으로 구색을 갖추어서 설명하고 있으나 결국 주된 논지는 시장주도냐 아니면 정부의 개입이냐로 나눈다. 그러나 세상 돌아가는 일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나눠지는 게 결코 아니다. 이천십몇년을 대한한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사실을 누구한테 배우지 않아도 알고 있다. 딴소리를 조금 늘어놓자면 이 책을 읽고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사실은 이런 곳이었구나. 난 이 책을 읽었으니 이제 사회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를 이해했고 시민으로서의 기본적인 교양과 덕목을 갖췄군.”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있을 거라고 본다. 나꼼수나 황우석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이 썰전의 청취자들이 이 프로그램을 보는 자기네들만 정치에 대한 엄청난 식견과 지식을 가진다고 생각하는 걸 보면 빤하다. 광자여 자신을 돌아보라.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네가 아는 것을 왜 남들이 모를 거라고 생각하나? 겨우 너조차도 아는 사실을 남들은 자신보다 접할 수 있는 정보가 부족해서, 무식해서, 팟캐스트(자기들이 듣는 팟캐스트)를 듣지 않아서, 관심이 없어서 그럴 거라고 본다. 과연 그럴까? 네가 아닌 특정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데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을까? 한국의 정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TV프로그램, 팟캐스트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채사장, <시민의 교양> , 웨일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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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부모들은 아이들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 모르고 병원에 데려오기 일쑤였다. 그 바람에 나도 거기에서 유행성감기와 백일해에 감염된 적이 있지만 나는 여전히 그곳에 갔다. 대기실에 앉아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이 좋았다. 진료실 문이 열리고 하얀 가운을 입은 카츠 선생님이 나와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기분이 좋아졌다. 의학은 바로 이런 때 소용 있는 것이다.(74p)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그 영화를 보고 너무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화면을 돌려서 처음까지 가게 할 수도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중 털보 하나는 재밌다는 듯이 낄낄거리면서 그러다가 에덴동산까지갈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가 덧붙여 말하기를, “불행하게도, 다시 시작해봤자 결국 그게 그거야라고 했다.(138p)

 

 

로자 아줌마는 사람들이 점점 더 자기에게 친절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168~169p)

 

 

아아, 세상에는 관심을 끌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산과 바다로 동시에 바캉스를 갈 수 없어서 한군데를 선택해야 하듯이 사람들도 그렇게 선택당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관심을 끌지 못하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한다. 사람들은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고, 수백만 명의 희생자를 낸 나치나 베트남전쟁처럼 가장 비싼 대가를 치른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엘리베이터도 없는 칠층에 사는, 과거에 너무 고통스럽게 살았기 때문에 지금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닌 유태인 노파 같은 건 누구의 관심사도 될 수 없다. 그런 사람이 관심을 끌 일은 없다, 절대로.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수백만 이상의 수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다. 그 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만큼 중요하지 않은 일이니까······(250p)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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