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6/29

 

여자, 과일, 이상·····. 이 세상에 기쁨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따사로운 가을날 낯익은 섬의 이름을 외며 바다를 헤쳐 나가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쉬 천국에다 데려다 놓을 수 있는 것이어서 나는 좋아한다. 그곳만큼 쉽게 사람의 마음을 현실에서 꿈의 세계로 옮겨 가게 하는 곳은 없으리라. 꿈과 현실의 구획은 사라지고 아무리 낡은 배의 마스트에서도 가지가 뻗고 과물이 익는다.(26p)

 

·····그래요, 젊은것들은 양도 처먹고 닭도 처먹고 돼지도 처먹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처먹지 않으면 배가 차지 않는다는군요·····.(35p)

 

다른 정열, 보다 고상한 정열에 사로잡히기 위해 쏟아 왔던 정열을 버리는 것. 그러나 그것 역시 일종의 노예근성이 아닐까? 이상이나 종족이나 하느님을 위해 자기를 희생시키는 것은? 따르는 전형이 고상하면 고상할수록 우리가 묶이는 노예의 사슬이 길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좀 더 넓은 경기장에서 찧고 까불다가 그 사슬을 벗어나 보지도 못하고 죽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건 무엇일까?(38~39p)

 

두목, 사람들 좀 그대로 놔둬요. 그 사람들 눈뜨게 해주려고 하지 말아요! 그래, 뜨여 놓았다고 칩시다. 뭘 보겠어요? 비참해요! 두목, 눈 감은 놈은 감은 대로 놔둬요. 꿈꾸게 내버려 두란 말이에요·····.

(...)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타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그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낡은 세계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우리는 그 세계를 살며 순간순간 그 세계와 싸운다·····. 그 세계는 존재한다. 미래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았다. 환상적이고 유동적이며 꿈이 짜낸 빛의 천이다. 보랏빛 바람(사랑, 증오, 상상력, 행운, 하느님)에 둘러싸인 구름·····. 이 땅의 아무리 위대한 선지자라도 이제는 암호 이상의 예언을 들려줄 수 없다. 암호가 모호할수록 선지자는 위대한 것이다.(92~93p)

 

나는 어느 날 아침에 본, 나뭇등걸에 붙어 있던 나비의 번데기를 떠올렸다. 나비는 번데기에다 구멍을 뚫고 나올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기다렸지만 오래 걸릴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나는 허리를 구부리고 입김으로 데워 주었다. 열심히 데워 준 덕분에 기적은 생명보다 빠른 속도로 내 눈앞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이 열리면서 나비가 천천히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날개를 뒤로 접으며 구겨지는 나비를 본 순간의 공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엾은 나비는 그 날개를 펴려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나는 내 입김으로 나비를 도우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번데기에서 나와 날개를 펴는 것은 태양 아래서 천천히 진행되어야 했다. 그러나 때늦은 다음이었다. 내 입김은 때가 되기도 전에 나비를 날개가 쭈그러진 채 집을 나서게 한 것이었다. 나비는 필사적으로 몸을 떨었으나 몇 초 뒤 내손바닥 위에서 죽어 갔다.

나는 나비의 가녀린 시체만큼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누른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에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를 깨닫는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안다.(178p)

 

나는 당신의 소위 그 <신비>를 살아 버리느라고 쓸 시간을 못 냈지요. 때로는 전쟁, 때로는 계집, 때로는 술, 때로는 산투르를 살아 버렸어요. 그러니 내게 펜대 운전할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요? 그러니 이런 일들이 펜대 운전사들에게 떨어진 거지요. 인생의 신비를 사는 사람들에겐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는 사람들은 살 줄을 몰라요.(315p)

 

조르바, 우리는 구더기랍니다. 엄청나게 큰 나무의 조그만 잎사귀에 붙은 아주 작은 구더기지요. 이 조그만 잎이 바로 지굽니다. 다른 잎은 밤이면 가슴 설레며 바라보는 별입니다. 우리는 이 조그만 잎 위에서 우리 길을 조심스럽게 시험해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잎의 냄새를 맡습니다. 좋은지 나쁜지 알아보려고 우리는 맛을 보고 먹을 만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이 잎의 위를 두드려 봅니다. 잎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소리를 냅니다.

어떤 사람은(겁이 없는 사람들이겠지요) 잎 가장자리까지 이릅니다. 거기에서 고개를 빼고 카오스를 내려다봅니다. 그러고는 부들부들 떱니다. 밑바닥의 나락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게 되지요. 멀리서 우리는 거대한 나무의 다른 잎들이 서그럭거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는 뿌리에서 우리 잎으로 수액을 빨아올리는 걸 감지합니다. 우리 가슴이 부풀지요. 끔찍한 나락을 내려다보고 있는 우리는 몸도 마음도 공포로 떨고 맙니다. 그 순간에 시작되는게·····.

나는 말을 멈추었다. 나는, 그 순간에 시작되는 게 바로 시(詩)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조르바가 알아들을 것 같지 않아 말을 끊어 버린 것이었다.(387p)

 

 

 

ㅡ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中,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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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6/24

 


무릎을 치는 구절도 있고, 이건 너무 갔다 싶은 주장들도 있으나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공부에 힘쓴 철학자의 흥미로운 통찰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인간의 모든 소원이 곧 충족된다면 인생의 여백을 무엇으로 메꿀 수 있으며 인간은 무엇을 하면서 세월을 보내야 하겠는가? 이 인류를 공상의 천국에 옮겨 놓으면 어떻게 될까? 모든 것이 스스로 잘 성장하고, 종달새가 뭇 사람의 귀에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 주고, 저마다 즉석에서 애인을 얻어 손쉽게 동거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은 권태를 느껴 죽어버리든가, 혹은 싸움과 살해를 일삼아 지금보다 더 많은 고뇌를 초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에게는 이런 고뇌의 세계가 안성맞춤이며 그 밖의 어떠한 무대나 장소도 적합하지 못하다.(7~8p)

 

즉, 자연은 개체의 삶과 죽음이 자신에게 하등의 관심이 없다고 언명하고 있다. 그 증거로는 동물이나 인간의 생명을 사소한 우연의 농락에 맡겨 죽은 것을 보고 외눈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당신이 걸어가는 길바닥에 벌레가 기어가고 있는 것을 보라. 당신의 발길에 무심코 한 발짝만 어긋나면 그 벌레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달팽이를 보라. 도망갈 수도, 몸을 말을 수도, 그리고 거처를 속일 수도, 숨을 수도 없는 몸으로 모든 강적의 희생이 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물고기가 움켜잡을 수 있는 개울에서 유유히 꼬리치고 있는 것을 보라. 몸집이 둔하여 도망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두꺼비며, 높은 하늘에서 솔개가 노리고 있는 줄도 모르는 새 새끼며, 산림 속에서 늑대에게 발견된 산양ㅡ이 모든 희생은 연약하고 무기가 없어, 시시로 닥쳐오는 위험을 눈앞에 바라보면서도 무심히 걸어다니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자연은, 대단히 정교한 피조물인 유기체를 저항할 힘이 없는 알몸으로 내버려둔 채 보다 강한 자의 밥이 될뿐더러 맹목적인 우발사건, 즉 길을 지나가고 있는 바보들이나 아이들의 희롱에 맡겨두는 것이다.

거기에는 자연의 이 생물들이 멸망하여도 자기에게는 하등의 영향을 끼치지 않으며, 그 죽음은 자기에게 무의미하여 그 삶이라는 원인도 죽음이라는 결과도 아랑곳하지 않는다고 간명하고도 신성한 언사로 성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연이라는 우주의 어머니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자기자식을 허다한 위난 앞에 버려 두는데, 그것은 결국 그들이 죽더라도 자기 품안에 되돌아올 따름이며 그들의 죽음은 당초에 태어난 고장에 되돌아가는 유희, 즉 하나의 조그마한 손장난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동물에 대하여 말한 것은 인간에게도 해당된다.

즉, 자연의 엄위가 우리에게도 비치고 있으며, 우리의 생사는 자연의 마음에 아무런 타격을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도 역시 그 때문에 상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도 실은 자연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113~114p)

 

모든 욕망은 필요와 결핍과 가난과 괴로움에서 일어난다. 욕망을 충족시키면 그것을 일단 진정시킬 수 있으나, 한 가지 욕망이 충족된 반면에 충족을 느끼지 못하는 욕망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더구나 욕망은 오래 계속되며 욕구는 무한히 전개되는 반면에 향락은 짧고 적은 분량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욕망을 충족시켜 쾌락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쾌락은 한낱 외형적인 환상에 불과하며, 그 후에 제2의 쾌락이 대신 나타나면 전자는 소실되어 버리고 후자는 후자대로 환상이 계속되는 데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의지를 진정시켜 잠재우거나 계속해서 붙잡아 매어 둘 힘은 찾아 볼 수 없다. 우리가 운명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대의 선물도, 거지의 발 아래 던져진 푼돈과 마찬가지로 오늘의 목숨에 풀칠을 하여 그 괴로운 생존을 내일까지 연장시킬 따름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욕망의 지배와 의지의 주권 아래 놓여 있는 한, 그리고 우리가 희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한, 계속해서 안식이나 행복을 손에 넣을 수는 없는 것이다.(117p)

 

친구가 많다고 해서 그에게 참된 역량과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학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인간이 남의 진가를 인정하고 거기 비례하여 우정을 베푼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발이다. 인간도 또한 개와 마찬가지로 이쪽에서 별로 수고도 하지 않는데 어루만져 주거나 먹다가 남은 뼈다귀라도 던져 주는 자를 따르는 것이다.(162p)

 

한 인간이 누리는 행복이 어느 정도인가를 측정하려면, 그 즐거움보다도 우환을 살펴보아야 한다. 우환의 내용이 사소할수록 그가 누리는 행복은 크기 때문이다. 즉, 사소한 일에 대하여 한탄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행복을 이미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큰 불행이 닥치면 사소한 걱정은 거들떠볼 경황이 없는 것이다.(259p)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교적인 것은 고독을 감당치 못하여 자기 자신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교와 여행과 구경을 즐기는 것이, 요컨대 내면적인 자아의 공허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에 정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신 속에는 자발적인 활동을 할 만한 탄력이 없으므로 술에서 흥분과 자극을 구하여 음주가의 레테르가 붙은 사람도 있다. 그들은 외부에서 끊임없이 자극을 구하여, 최대의 자극으로서 자기와 동등한 인간과 접촉하려고 하지만 이것 역시 자신이 공허하여 자기 자신에게 정떨어진 까닭이다. 그들이 자극을 얻지 못하면 정신은 자체의 중압으로 해서 깊숙이 침몰되어 나중에는 혼미상태에 빠져 버린다. 그들에게는 인간이라는 개념의 적은 분수가 있을 뿐이므로 남들과 접촉하지 않고서는 ‘인간으로서의 개념’을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나 친분이 뛰어나 스스로 인간이 되어 있는 사람은, 분수가 아니라 하나의 단위로서 완성되어 있고 충족되어 있다.(273p)

 

한편 더욱 엄밀히 생각해 보면, 고독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화에 나오는 아담에게는 부모가 없었지만, 인간은 적어도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부모 형제를 갖게 마련이다. 따라서 고독을 사랑한다는 것은 성격이라기보다 경험과 사고의 소산으로 정신력의 발달과 상당한 나이를 기다려야 하므로, 사교성은 연령에 반비례한다. 즉, 소년 시절에는 혼자 있는 것이 큰 고통이고, 청년기에는 기꺼이 친구나 동료와 교제하려고 하며(다만 그 중에서 비범한 천성을 지닌 자만이 고독을 구하는데, 그것도 보기 드물며 하루 종일 혼자 있게 되면 이들도 좀처럼 견디지 못한다) 장년 이상이 되면 혼자서 곧잘 지내게 된다. 이리하여 고독은 나이를 먹을수록 오래 감당할 수 있으며, 늘그막엔 자기도 이미 과거의 골동품으로 인생의 즐거움은 다 누렸다는 마음에서 오히려 고독을 업으로 여기게 된다.(276p)

 

누구나 자기 이상의 세계를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은 제3자에 대하여 단지 자기가 알 수 있는 면만을 헤아릴 뿐이다. 그러니까 타인에 대한 이해나 인식은 자기 자신의 지능 정도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다.(299p)

 

그리고 인간은 사소한 일에 대하여 조심하지 않으므로 이런 데서 자기의 적나라한 성격을 곧잘 드러낸다. 따라서 남의 입장을 전연 염두에 두지 않는 그들의 철저한 이기주의는 이런 사소한 행위나 거동을 통하여 쉽사리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작은 일에 대한 이기주의는 나중에 큰 일을 처리할 경우에도 나타나며, 이 경우에 다만 그 거죽만이 위장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제3자의 마음을 간파하려면 먼저 사소한 일에 대한 그들의 거동에 주목하여 그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만일 어떤 자가 ‘법은 사소한 죄를 문책하지 않는다’는 말을 적용할 수 있는 일상적인 사소한 일에 대하여, 파렴치한 행동을 하여 남을 무시하고 자기만이 이익을 취하거나 공적인 소유를 독점한다면, 그는 정의나 인도를 존중하는 사람이 아니며, 큰일을 수행할 경우에도 법률이나 권력의 제지를 받지 않는다면 불의와 부정도 얼마든지 저지르는 자로 인정하여 숫제 문전에 얼씬도 못하게 해야 한다. 예컨대 친구의 의리를 저버리는 사람은, 자기 한 몸에 위험이 닥칠 염려가 없으면 국법도 얼마든지 짓밟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306~307p)

 

 

 

ㅡ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 인생론> 中, 집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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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6/22

 

내가 20살에 읽었다면 덮어놓고 좋아했을법한 책이다. 나꼼수가 그렇게나 인기 있는 이유와 비슷하다. 객관적인 사실만을 나열하고자 하는 책이 아니라 저자의 편견을 오롯이 담아 자칭 ‘전복과 반전’을 말한다. 낄낄거리며 읽으면 그만이지만 여기서 설명하는 것이 전부라고 믿으면 심히 곤란하다.

 

 

 

ㅡ 강헌, <전복과 반전의 순간> 中,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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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6/21

 

골고루 재미있게 읽었는데 화라지송침이 가장 좋았다.

 

 

 

ㅡ 이기호, <김 박사는 누구인가?> 中,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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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6/17

 

만약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가족이나 지인, 이웃들(특히 남자들) 중 누군가, 제3의 인물이 동석하면 이야기하는 사람은 나와 단둘이 있을 때보다 덜 진실해지고 덜 솔직해진다. 이미 대중을 의식한 대화가 돼버린다. 관객을 위한 대화. 당사자의 솔직한 감정과 생각을 얻어낼 길은 요원해진다. 강력한 자기방어에 부딪친다. 자기통제. 끊임없이 이야기가 다듬어진다. 일종의 패턴까지 생겨난다. 듣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차분하고 깔끔한 이야기가 된다는 것, 신중하게 해야 할 말만 골라 한다는 것. 참혹한 일이 위대한 일로, 인간 내면의 불가해하고 어두운 면이 순식간에 이해가 되고 설명 가능한 것으로 둔갑한다.(188p)

 

우리 딸내미들 중에는 불행하게 사는 아이들이 많아요. 그건 전쟁터에 나가 싸운 엄마들이 자기들이 살았던 전선의 방식으로 딸들을 키웠기 때문이오. 아빠들도 마찬가지고. 전선의 윤리로 말이오. 전쟁터에서 사람은, 당신한테 이미 말했듯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가치를 지닌 사람인지 단박에 드러났소. 그곳에선 감출 수가 없거든. 우리 딸들은 세상엔 다른 방식의 삶도 있다는 걸 상상도 못했소. 부모들이 딸들에게 이 세상의 감춰진 추악한 이면은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결국 우리 딸들은 사기꾼 같은 작자들의 좋은 먹잇감이 돼 결혼했고, 그 사기꾼들은 우리 딸들을 잘도 속여넘겼소. 속이기가 식은 죽 먹기였을 테니 말이오. 우리 전우들의 아이들이 참 많이도 그런 일을 당했소. 우리 딸도 그랬고·····.(198~199p)

 

나는 전쟁의 소리를 기억해. 사방에서 으르렁, 쾅쾅, 쨍쨍 불을 뿜어대던 그 소리들····· 전쟁터에서는 사람의 영혼마저 늙어버리지. 전쟁이 끝나고 나는 다시는 젊음으로 돌아갈 수 없었어····· 그게 제일 중요한 점이지. 내 생각엔 그래·····(267p)

 

셋이서 손잡고 걸어가면 가운데 사람은 한두 시간쯤은 눈을 붙일 수 있었어. 그렇게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걸었지.(353p)

 

오히려 전투에 나가는 건 무섭지 않았어. 전투가 끝나고, 특히 전선을 재정비하면서 쉴 때가 무서웠지. 총탄이 빗발치고 포탄이 불을 뿜을 땐 나를 ‘누이! 누이!’라고 부르다가도 전투만 끝나면 나를 어떻게 해보려고 다들 기회만 엿봤으니까····· 밤이면 막사에 틀어박혀 아예 나가질 않았어·····(411p)

 

 

ㅡ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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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6/14

 

읽음. 다른 질병이나 증상은 평소에 알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른 부분이 없었으나 자해에 대한 설명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과 다른 부분이 있어서 꽤나 흥미로웠다. 

 

ㅡ 대릴 커닝엄, <정신병동 이야기> 中, 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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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6/14

 

읽음. 이런 주제를 다루는 다른 책을 더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듦.

 

ㅡ 대릴 커닝엄, <과학 이야기> 中, 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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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6/15

 

혹시 지금 자기계발서를 쓰고 있는 사람이 들으면 섭섭한 얘기겠지만, 자기계발서라는 말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자기계발서를 읽는 이유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서 도움을 받아보겠다는 이야기인데, 그 누군가는 바로 그 책을 쓴 사람이다. 이것은 자기계발이라는 분야 전체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하는 법’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책이 그렇다. 개인적인 발전을 도와준다는 책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이들은 종교서 역시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또 일부에서는 이런 소리를 지껄이는 사람들은 땅바닥에 눕혀놓고 칼로 목을 벤 뒤 피를 말려 죽여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니 이 분야에 대해서는 아주 다양한 견해가 있다는 정도만 언급하고 얼른 넘어가는 게 좋겠다.(11p)

 

부를 향한 길에는 가끔 갈림길이 나오는데, 그 향배를 좌우하는 건 선택이나 욕망, 노력 등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순전한 우연이다. 당신의 경우 출생 순서가 그 향배를 결정한다. 셋째로 태어났다는 사실인즉 조만간 시골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페인트공의 조수로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기도하다. 또한 세상을 일찍 떠난 당신 집안의 넷째와는 달리, 어느 나무 밑동의 조그만 무덤 속에 유골이 돼 누워 있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사실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40p)

 

사실 유명세란 일정한 정도를 넘어서면, 마치 구름처럼 높은 상공에 저 혼자 떠 있거나 더욱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확장된 일부일처제라는 속박에 얽매이지 않는 대신, 유명세를 영구화하겠다는 목표를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떠받쳐 줄 시청자들에게 헌신한다.(134p)

 

아내와 함께 침대에 나란히 누운 당신은 그녀의 몸에는 손도 대지 않는다. 정전 사태에 대비해 최근 아래층에 설치한 소형발전기가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목뒤가 자꾸 뻣뻣해지는 탓에 목에 수건을 받치고 누운 당신은, 아내의 사랑이 점점 멀어지고 있으며 그 사랑이 영영 사라지고 나면 그제야 못 견디게 그리워질 거라는 사실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다.(143p)

 

 

 

ㅡ 모신 하미드,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 中, 문학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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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6/13

 

‘화려한 싱글’이라는 거짓말과 ‘행복한 결혼’이라는 거짓말은 모두 사실을 숨긴다. 두 가지 거짓말이 은연중 강요하는 사고의 틀에 갇혀 있는 한 우리는 ‘혼자 사는 것’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이 두 가지 거짓말은 모두 은밀하게 생략법을 사용한다. ‘화려한 싱글’이라는 거짓말은 화려하지 않은, 아니 비참하게 보호받지 못하는 홀로 버려진 사람들을 생략한다. 세상에는 분명 결혼 따위는 우습게 알아도 괜찮은 화려한 싱글도 있지만, 생존마저 위협받는 한계적 상황에 놓여 있어도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는 처참한 싱글도 있다. 결혼할 이유를 찾지 못해 결혼하지 않은 싱글에게는 비혼의 상황이 불행의 지름길이 아니지만, 결혼하고 싶은데 결혼하지 못한 싱글에게는 비혼이란 인생의 참사에 가깝다.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사람에게 혼자 산다는 것은 여유로움이지만, 자립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혼자 산다는 것은 버림받음 혹은 뿌리 뽑힘에 가깝다. ‘화려한 싱글’이라는 첫 번째 거짓말 속에는 이렇게 생략된 많은 사람들이 들어 있다. 화려한 싱글을 주로 내세우는 마케팅 담당자는 독거노인과 노숙자와 같은 완벽하게 혼자 사는 사람들을 생략한다. 또한 ‘결혼은 항상 행복’이라는 거짓말 역시 ‘결혼했지만 불행한 사람 혹은 심지어 결혼으로 인해 불행해진 사람’을 생략한다. ‘행복했던 결혼 생활이 이혼이라는 파국’으로 끝난 불행한 사람도 생략한다. 생략된 대상에는 남편에게 매 맞고 사는 여성도 있고, 돈 버는 기계로 전락한 남편도 있다.(28~29p)

 

최악의 것은 청소죠. 그건 정말 끔찍해요. 매일 해봐야 진짜로 알 수 있을텐데. 이를테면 당신이 금요일 날 무엇을 닦아 놓아도 다음 주 똑같은 시간, 똑같은 곳에 똑같은 먼지가 앉아 있을 거예요. 그러니 지겹지 않겠어요. 최소한 맛이 가게 하는 일임엔 틀림없죠. (...) 이건 거의 바다 한복판에서 걸레질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요.(96p)

 

1인 가구는 밖의 경제활동과 안의 가정활동을 관할하는 주체가 동일하다. 1인 가구는 능력 있는 가장이어야 하는 동시에 자애로운 안사람이어야 한다. 연말소득공제 업무를 처리하고 자동차세를 납부하고 가장 경제적인 자동차 보험회사를 찾는 사람과, 마트의 할인 정보를 수집하고 포인트 카드를 챙기고 원플러스원 상품을 찾아내는 사람이 동일하다. 이 식탁에 필요한 돈을 제공하는 사람이 이 식탁에 올릴 음식을 요리하고, 이 식탁에서 나온 음식물 쓰레기까지 처리한다. 1인용 테이블에 식사를 제공하는 능력은 TV의 케이블 채널에서 보는 것처럼 멋지게 요리의 레시피를 재현해낼 수 있는 즐거운 능력이 아니다. 이 모든 귀찮은 과정을 혼자서 처리해야 하는 자립의 능력이다. 이런 자립의 능력이 없으면, 아무리 밖에서 돈을 많이 번다고 하더라도 1인용 테이블에는 온갖 배달음식 전단지만 올라갈 뿐이다.(99p)

 

속설은 속설을 만들었던 조건들이 이미 한참 전에 사라지고 난 뒤에도 ‘옛말’이라는 이유나 ‘삶의 지혜’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언급되고 통용된다. 이 시대에 결혼이라는 것은 과연 성숙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성숙과 미성숙의 기준을 결혼이라는 제도에 진입했는지 여부에 의해 결정하는 가장 단세포적인 생략법이 여전히 지배하는 사회가 우리 사회이다.(122p)

 

일반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위협하는 적은 고통과 권태라는 두 가지다. 그리고 이 둘 가운데 어느 하나에서 적당히 멀어지게 되면 그만큼 다른 하나가 가까이 다가온다. 또한 그 반대의 경우도 있어 우리의 일생은 거의 이 양자의 중간에서 때로는 강하게 진동하고, 때로는 약하게 진동하고 있는 격이라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192p)

 

자기계발서들은 독립과 의존 그 사이에 ‘의지’가 있다고 가르치지만,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독립과 의존 사이에서 돈의 힘을 느낀다. 자유는 의지만으로 채워진 공간 속에서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자유의지는 실행되는 순간 자원을 요구한다. 자원 없는 자유의지는 가능태일 뿐이다. 모든 노력에는 자원이 필요하다.(224p)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로 두려움이 커질 때, 자신이 영원히 젊을 수 없다는 평범한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공포로 다가올 때, 가족관계로의 재진입은 달콤한 유혹으로 다가온다. 미혼이라면 뒤늦었지만 가족관계로의 진입을 새삼 고민하고, 이혼 또는 사별로 인해 혼자 사는 경우라면 가족의 재구성을 심각하게 검토한다. 그렇기에 나이가 들수록 혼자 사는 사람이 처한 딜레마는 더욱 커진다. 계속 두려움을 가슴 속에 앉고 혼자 살 것인가? 아니면 가족관계로 진입할 것인가? 아니면 가족관계로 진입할 것인가? 이 두려움이 어느 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면 정말 탈출구는 짝을 찾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가슴 속에서 어느 순간 켜진 두려움이라는 경고등에도 불구하고 계속 혼자 사는 사람은, 경고등을 무시한 대가로 앞으로 부딪히게 될 모든 어려움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가? 두려움이 커질 때 가족으로의 진입은 두려움을 다스리는 훌륭한 처방 같지만,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

가족은 훌륭한 관계를 서로 맺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힘을 발휘하는 제도이다. 만약 한 개인이 속한 가족이 형편없는 가족이라면 그 가족은 가장 든든한 배경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어둡고 깊이조차 알 수 없는 근심의 기원일 수도 있다. 모든 가족이 훌륭한 것은 아니다. 형편없는 가족도 있다. 그러니까 가족으로의 편입이 두려움을 다스리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형편없는 가족, 아니 없는 것보다 못한 가족 속에서 억압받으며 억지로 가족의 구성원으로 사는 사람도 있다. 개인들이 획득한 정치적 자유가 문화적 자유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하여 혼자일 수 있는 능력이 정치적 억압에서 자유롭다는 의미의 소극적 자율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결정할 수 있는 적극적 자율의 토대가 되기 위해서는, 단지 경제적 능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자기만의 치타델레로 못 들어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들이 인생 계획을 세우기 위해 필요한 자원을 사회가 제공해줄 것을 요구”하는 아이디어는 충분한 의미를 지닌다.(232~234p)

 

 

ㅡ 노명우,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中, 사월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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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6/12

 

소설가로 적합한 사람은 이를테면 ‘이건 이렇다’라는 결론이 머릿속에서 내려지더라도, 혹은 자칫 내려질 것 같더라도, ‘아니, 잠깐, 어쩌면 이건 나 혼자만의 억측일 수도 있어’라고 멈춰 서서 다시 생각해보는 사람입니다. ‘세상일이란 그리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지. 나중에 뭔가 새로운 요소가 불쑥 튀어나오면 얘기가 백팔십도 달라질지도 모르잖아’라는 식으로.(120p)

 

‘시간이 있었으면 좀 더 잘 썼을 텐데ㅡ. 나는 소설 쓰는 친구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정말 깜짝 놀랐다. 지금도 그 일을 떠올리면 아연해진다. (중략) 만일 그가 써낸 이야기가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면 대체 무엇 때문에 소설 따위를 쓰는가. 결국 우리가 무덤까지 가져갈 것은 최선을 다했다는 만족감, 힘껏 일했다는 노동의 증거, 그것뿐이다. 나는 그 친구를 향해 말하고 싶었다. 제발 부탁이다, 지금 당장 다른 일을 찾아봐라, 라고. 똑같이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번다고 해도 세상에는 좀 더 간단하고 아마 좀 더 정직한 일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너의 능력과 재능을 최대한 쏟아부어 글을 써라. 그리고 변명이나 자기 정당화는 안 돼. 불평하지 마. 핑계 대지 말라고.(168p)

 

모든 일에는 ‘물때’라는 게 있고, 그 물때는 한번 상실되면 많은 경우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습니다. 인생이란 때때로 변덕스럽고 불공평하며 어떤 경우에는 잔혹한 것입니다. 나는 우연히 그 호기를 제대로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건 지금 돌아보면 그야말로 행운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행운이란 말하자면 무료 입장권 같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유전이나 금광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그걸 찾아내고 일단 손에 넣으면 그다음은 만사 오케이, 살살 부채질이나 해가며 안일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라는 건 아닙니다. 그 입장권이 있으면 당신은 행사장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ㅡ하지만 그냥 그것뿐입니다. 입구에서 입장권을 건네고 행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다음에 어떤 행동을 취할지, 거기서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취하고 혹은 버릴지, 거기서 생기게 될 몇 가지 장애물을 어떻게 뛰어넘을지,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재능이나 자질이나 기량의 문제고, 인간으로서의 기량의 문제고, 세계관의 문제고, 또한 때로는 극히 심플하게 신체력의 문제입니다. 어쨌든 그건 단순히 행운이라는 말만으로는 미처 다 처리되지 않는 사안입니다.(196~197p)

 

단지 내가 작가가 되고 정기적으로 책이 출간되는 동안에 한 가지 몸으로 배운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쓰든 결국 어디선가는 나쁜 말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긴 소설을 쓰면 ‘너무 길다.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반으로 줄여도 충분하다’라고 하고, 짧은 소설을 쓰면 ‘내용이 얄팍하다. 엉성하다. 명백히 태만한 티가 난다’라고 합니다. 똑같은 소설을 어떤 곳에서는 ‘같은 얘기를 되풀이한다. 매너리즘이다. 따분하다’라고 하고, 또 다른 곳에서는 ‘전작이 더 낫다. 새로운 시도가 겉돌고 있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이미 이십오 년 전쯤부터 ‘무라카미는 시대에 뒤떨어진다. 이제 끝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불평을 늘어놓는 쪽에서야 간단하겠지만(생각나는 대로 입에 올릴 뿐 구체적인 책임은지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 말을 듣는 쪽에서는 일일이 진지하게 상대했다가는 우선 몸이 당해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절로 ‘뭐든 상관없어. 어차피 나쁜 말을 들을 거라면 아무튼 내가 쓰고 싶은 것을 쓰고 싶은 대로 쓰자’라고 하게 됩니다.(269p)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지요. 일본이라는 토양에서, 그 딱딱한 틀에서 도망치고 싶어 이른바 ‘국외 유출자’로서 해외에 나갔는데 그 결과 원래 있던 토양과의 관계성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셈이니까요.(313p)

 

 

 

ㅡ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中,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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