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책 모임에서 첫 번째로 읽은 책. 평생 잊히지 않을 듯.

 

불행에 익숙해진 사람은 운명의 무게를 받아들인다. 그런 점에서 내 고향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운명론자들이었다. 그들은 도대체 진보라고 하는 것을 믿지 않았다. 내 유년의 고향 마을은 물처럼 고여 있었다. 운명은 방죽에 고인 물과 같은 것이었다.(19p)

 

 

회고컨대 학교가 파하고 두 개나 되는 재를 넘어 마을로 돌아가는 일이 즐거움이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집은 그런 곳이어선 안 될 것이다. 아니, 그런 곳일 수가 없을 것이다.(77P)

 

 

고향이란 하나의 산천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이 만들어 낸 관계이다. 인연이다. 그 때문에 고향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82P)

 

 

고향, 곧 관계의 늪. 그 파리지옥 같은 인정의 끈끈함. 늪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사람은 세상을 보지 못한다.

그만한 매정함, 그만한 모욕을 감당할 체질을 익히지 못해서 대개의 사람들은 고향(의 인정)을 끌어안고 산다.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82~83P)

 

 

사람은 현실에 대해 절망하면 신화에 기대고 싶어한다. 신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의 부드러운 왜곡이다. 반영이라면 왜곡의 반영이다. 개별적인 무의식의 꿈을 공식화함으로써 현실을 넘어가려는 욕망, 그것이 신화를 탄생시키고, 신화를 받아들이게 만든다. (...) 신화는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에 있다. 여기서는 진짜냐, 가짜냐 하는 논쟁은 의미를 잃는다.(84p)

 

 

노동력을 제공하면 언제든 숙식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도시에 대한 믿음에도 조금씩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 그는, 오래지 않아 자신의 노동을 제공할 자리를 스스로 가려 택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또 그는 깨달았다. 어울림의 유무와 상관없이 그가 손쉽게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취직 자리가 중국 음식점이라는 사실을.(94p)

 

 

충격이나 통증은 빈도와 반비례한다. 처음이 가장 어렵다. 익숙해지는 단계를 거치면서 충격이나 통증은 저절로 내면화한다.(95p)

 

 

아름다움에 대한 반응이 전적으로 인간 종족의 본능이며 따라서 선천적이라는 생각에 나는 동조하지 않는다. 그 감각 역시 상당 부분은 길러지는 것이다.(113p)

 

 

기억은 사실의 편이 아니라 편들고 싶은 자의 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을 사실이 아니라는 이유로, 편들고 싶은 자를 편들고 있다는 이유로 거부하여서는 안 된다.

진실이 반드시 사실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사실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내가 어떤 글을 읽다가 붉은 볼펜으로 줄을 그었으며, 그 붉은 줄을 여태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책의 저자가 조이스라고 할 때, 제임스 조이스를 빌려서 발언한다는 뜻이다. 조이스를 읽음으로써 비로소 세상이 악몽임을 깨달은 것이 아니다. 나는 붉은 볼펜으로 줄을 그었다. 그것은, 그를 알기 전부터 이 세상에서의 나의 삶이 바동거리는 악몽에 다름 아님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제임스 조이스를 빌려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임스 조이스에게서 내 말을 발견한 것이다. 그가 내 말을 먼저, 대신해 버린 것이다.

글들은, ‘내 말’의 대언일 때만, 진실로 의미를 가진다. 그 밖에 다른 글들은 쓰레기거나 허수아비이다. 쓰레기는 용도가 폐기되어 버려진 것이고, 허수아비에게는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다. 삶, 곧 악몽, 눈 뜨고 꾸는, 그래서 더 끔찍한.(139~140P)

 

 

언제나 상황이 더 힘이 세다. 어떤 일은 예정 없이 일어나지만,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은 있게 마련이다. 특정한 상황이 특정한 목적지를 향해 내모는 것이다.(143P)

 

 

언제나 표현된 것이 전부는 아니다. 아니, 어차피 전부는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안다. 때로는 감추기 위해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쨌든 표현된 것들을 통해서만 진실에 이를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지, 전체가 아니다. 크든 작든 모든 역사는 의미와 진실에 대한 기록이지,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이 아니다. 입장과 세계관에 따른 선택과 배제, 굴절과 왜곡의 과정을 우리는 해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말한다. 역사는 결국 해석이다. 우리는 그 진실을 안다.(196P)

 

 

고향이란,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낱 산천이 아니라 사람인 것이다.(207P)



따라서 어디에 자리를 잡고 있든 언제나 떳떳할 수는 없었다. 한곳에서 치켜세워지는 자는 다른 자리에서 내리깔릴 것을 각오해야 했다. 모든 자리에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환영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거니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도 없었다. (227P)

 

 

종교는 신념과 믿음의 영역이다. 그 안에 나름대로의 체계가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 무엇보다 정교한 체계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체계는 엄밀하게 말해서 주관적인 것이다. 절대적 신뢰와 전적인 헌신을 전제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 없이 신앙인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나는 알지 못한다. 특정한 종교에 몰두한다거나 그렇지 않다고 할 때에는, 이 전제가 지켜지고 있다. 요컨대 자신의 신념과 믿음을 바칠 수 있다거나 또는 그럴 수 없다는 차원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신과 인간, 영혼과 육체, 하늘과 땅 사이에 갈등과 회의가 생기고 반항과 구원의 드라마가 탄생한다.(234p)

 

 

그는 종종 학자의 자세를 내세우곤 하는데, 학문이란 신념이나 믿음의 영역이 아니다. 합리성과 이성을 유일한 규칙으로 삼는 이 영역은 믿음의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고, 믿음의 내용이 어떠한지만을 해부하려고 한다. 학자는 모든 형태의 믿음에 관심을 보이지만, 그 관심은 해부용 칼을 손에 쥔 의학도의 그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종교에 체계가 없지 않지만, 그것은 지극히 사적이고 주관적일 뿐 아니라 신봉하는 자의 절대적 헌신을 전제로 하고 있는 체계이기 때문에, 합리와 이성의 칼날 앞에서는 당황하게 마련이다. 종교에 몰두한 자는 전부를 본다. 그러나 종교를 해부하는 자는 부분을 본다. 부분을 보는 자는 부분의 결함에 눈이 가면 끝내 전부를 보지 못한다. 그리하여 신봉자에게는 모든 것이지만, 해부자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235P)

 

 

생각이 한쪽으로 몰리면 다른 출구들이 닫혀 버린다. 이게 아닌데, 이럴 필요가 없는데,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길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 있다. 그곳 말고는 달리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갈 길이 아닌 줄 알면서도 막무가내로 내달린다. 그리하여 고무지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 상식은 선 위에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안전하다. 그러나 그 선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파격이 상식이 된다. 편집적인 생각은 편집적인 길을 뚫는다. 그런 일이 발생하려는 순간에도 자각이 아주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렴풋하지만,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또는 하려 한다는) 걸 인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힘을 막으려는 희미한 반동도 일어나기는 한다. 그런 뜻에서 술꾼들이 경험하는 ‘필름이 끊어지는’상태와 이것은 다르다. 여기서는 필름이 돌아간다. 단지 필름을 중지시키기가 어려울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문제다. 길이 아닌 곳을 향해 몸을 던지는 난처한 상황을 빤히 목도하면서도 말리지 못하는 상황이란 절망이다.(254~255P)

 

 

그는 그 순간에 자기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멈출 수가 없었다. 마음과는 상관없이 거친 행동이 가속화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의 몸속에 악마가 들어 있는 것일까, 하고 질문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그것은 모든 악덕의 책무로부터 인간을 건지고 그 짐을 모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악마라는 추상에게 지우려는 목적으로 사람들이 고안해 낸 간교한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 악마라면, 그 악마는 인간일 것이다. 인간보다 더 악마다운 악마가 어디 있겠는가.(256P)



 

ㅡ 이승우, <생의 이면> 中, 문이당

 

,

2015

 

 

작년 겨울쯤에 읽었던 것 같다. 표시해놓은 구절을 적어놓고 잊어버렸다가 생각난 김에 올린다. 볼라뇨의 책 중에서 비교적 분량이 짧아 편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으나 읽기가 쉽지는 않았다. 이게 다 ‘나의 문해 능력이 부족한 탓이려니’라고 생각하고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 책을 써냈을 당시의 시대상과 중남미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한 지식이 전무 할 뿐만 아니라 거론하고 인용하는 작가들의 생소함으로 인해 완벽한 몰입과 이해에 어려움이 따랐다. 여러 핑계로 카라마조프가네 형제들도 못 읽고 있는데 2666은 그냥 닥치고 있어야겠다.

 

 

물론 페어웰은 자신이 소문의 엔진이나 뇌관이나 불씨라는 사실을 부인했고 나는 그를 탓할 기운도 의욕도 없었다. 그저 전화기 앞에 앉아 친구들이나 옛 친구들의 전화, 경솔함을 탓하는 오이도 씨와 오데임 씨와 페레스라루체의 전화, 혹은 원한을 품은 익명의 전화나 파다한 소문 중에서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지 알고자 하는 교회 당국의 전화, 그것도 아니면 산티아고의 문화계에서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도 내게 전화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 침묵이 나라는 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거부감의 표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윽고 사람들이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어안이 벙벙했다. 이 땅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그저 아련한 햇빛과 번개와 연기가 어렴풋이 보일 뿐인 미지의 잿빛 지평선을 향해 묵묵히 가고 있는 중이었던 것이다.(122~123p)

 

삶은 계속되고 계속되고 계속되었다. 마치 알갱이마다 미세하게 풍경을 그려 넣은 쌀알 목걸이 같은 삶이었다. 모든 사람이 그런 목걸이를 하고 있지만, 그 누구도 목걸이를 벗어 눈에 가까이 대고 알갱이마다 담겨 있는 풍경을 해독할 충분한 인내심이나 용의가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쌀알 미니어처가 살쾡이나 독수리의 눈을 요하는 측면도 있고, 그 풍경들이 관, 공동묘지 조감도, 인적 없는 도시, 심연과 정상, 존재의 하찮음과 그 존재의 우스꽝스러운 의지,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들, 축구 시합을 하는 사람들, 칠레의 상상력을 순회 항해하는 거대한 항공모함을 방불케 하는 권태 등의 불쾌한 놀라움을 안겨 주곤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실이었다. 우리는 권태에 찌들어 있었다. 우리는 책을 읽었고, 권태를 느꼈다.(126~127p)

 

습관은 모든 조심스러움을 무디게 하고 일상은 모든 끔찍함을 누그러뜨리는 법이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에게 다음 질문을 던졌다. 그 당시 왜 누구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을까? 답은 간단했다. 그 손님도 겁을 먹었고, 다른 사람들도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나는 겁을 먹지 않았다. 뭔가 말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너무 늦게 그 사실을 알았다. 시간이 자애로이 감추어 버린 것을 무엇 때문에 들쑤신단 말인가?(149p)

 

해결책이 있을까?(155p)

 

 

ㅡ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 中, 열린책들

,

2016/7/11

 


기차로 이동할 시간이 많이 생겨서 그 시간을 이용해서 읽었다. 대단히 잘 쓴 책은 아니다. 비슷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비교한다고 했을 때 데이비드 보더니스의 “시크릿 하우스”가 훨씬 잘 쓴 책이라고 생각한다. 다루는 항목을 좀 줄이더라도 각 항목의 내용을 좀 더 충실히 설명해줬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너무 얕은 감이 있다. 이른바 상식이라 불리는 정보들 중에서도 잘못 알려져 세간에 퍼져있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런 오류를 바로 잡아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정확히 같은 분야는 아니라도 이런 식의 정보를 제공하는 책들은 많이 나와 있고 언제 손에 들어도 반가운 분야의 책이다. 최근에 읽은 책을 들자면 대릴 커닝햄의 “정신병동 이야기”, “과학 이야기”가 있다. 이 두 책은 각각 정신질환과 과학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오류와 맹신을 펼쳐 보인다. 다음은 “의학 상식 대반전”을 읽어볼까?

 


ㅡ 칼 크루스젤니키, <엉터리 과학 상식 바로잡기 1> 中, 민음인

,

2016/7/15

 

 

오늘날 두 번의 잘못two wrongs이 옳은 것a right을 불러오지는 못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너무 많은 잘못many wrongs은 권리 운동right movement을 만들어낸다.

 

 

ㅡ 에레즈 에이든 & 장바티스트 미셸, <빅데이터 인문학: 진격의 서막> 中, 사계절

,

2016/7/13

 

만일 다윈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그의 책장에는 어떤 책들이 꽂혀 있을까라는 흥미로운 생각을 가상으로 꾸며보는 책이다. 진화론에 한정된 책만 언급되는 게 아니라 관련 있는 여러 분야의 책들을 간략한 설명과 함께 소개해주기 때문에 책 욕심을 자극한다. 참으로 큰일이다. ‘판타스틱 과학 책장’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소개를 해주면 그 책들을 찾아 읽어야 할 텐데 이런 소개 해주는 책을 읽는 것에 그치고 만다.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저자와 책들을 외우지 않아도 어느 정도 알게 돼서 언제든 찾아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애써 책장을 덮는다.

 

ㅡ 장대익, <다윈의 서재> 中, 바다출판사

,

2016/7/11

 

한 인간의 수기를 통해 인간이라는 종의 모순적이고도 다채로운 특성을 드러내는 책이다. 근자의 독서 중 가장 압도적인 책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쉼표로 이어지는 만연체의 장광설을 보노라면 ‘난 누구, 여긴 어디’라는 생각이 들 법하다. 한 번 읽어서 이해가 안 되면 나의 부족한 문해 능력을 탓하며 문장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찬찬히 읽어보기도 하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문장과 사유에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인간의 찌질하면서도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모습, 결코 온전히 이해하기 힘든 불가해한 모습을 묘사하는 모습을 보면 작가의 인간에 대한 수준 높은 통찰과 그 깊이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이번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포함하여 ‘죄와 벌’까지 총 2권을 읽었다. 5대 장편(악령, 백치, 미성년, 카라마조프가네 형제들, 죄와 벌) 중 죄와 벌을 제외한 다른 작품은 언제쯤이면 읽을 수 있을까? 솔직히 카라마조프가네 형제들이 가장 읽고 싶은 마음이 커서 욕심을 내서 샀으나 아직 못 읽었다. 앞부분을 조금 읽어봤는데 띄엄띄엄 읽으면 제대로 이해를 못할 것 같아서 한 번에 집중해서 읽어보려고 미루고 또 미루고 있다.

어쨌든 모임을 계기로 사놓고 안 읽은 책을 남들에게 소개하며 나도 함께 읽을 수 있는 보람찬 기회였다.

 

 

 

하기는 근본 이유 같은 건 따지지 말고 잠시 의식을 물리치고 맹목적으로 자기 감정에 이끌려가는 것도 좋다. 팔짱을 끼고 멍청히 앉아 있지 않기 위해서, 증오하든 사랑하든 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아무리 늦어도 사흘째에는 자기 자신을 경멸하게 될 것이다. 뻔히 알면서 자기 자신을 기만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나중에 남는 것은 비누 거품과 타성뿐이다.(29p)

 

인간이 추악한 짓을 하는 것은 오직 자기의 참 이익을 모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것은 대체 누구인가? 이들의 생각에 의하면 인간이란 그 지성을 일깨워주고 자기의 진짜 이익이 무엇인가를 알도록 눈뜨게 해주기만 하면, 이내 더러운 행위를 집어치우고 선량 결백한 인간이 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계몽된 지성을 지니게 되고 자기의 진짜 이익을 알게 되면, 선행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자기 이익에 반대되는 짓을 일부러 할 리는 만무하므로 필연적으로 선을 행하게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식의 논리일 것이다. 아아, 이 얼마나 유치한 생각인가! 순진무구한 젖먹이의 꿈이랄밖에!(31~32p)

 

너무 길어 전부 옮겨 적는 것은 의미가 없어 뒷부분은 생략 했으나 이 부분 뒤로 제시하는 주장은 1부의 백미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여기서 당신들에게 묻거니와, 이런 기묘한 성질을 타고난 동물인 인간으로부터 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한 번 시험삼아 지상의 온갖 행복을 인간의 머리 위에다가 한꺼번에 퍼부어, 행복 속에 풍덩 가라앉아버리게 하여, 그 행복의 표면에 물거품 같은 것이 꾸럭꾸럭 떠오르도록 해보라. 아니면, 인간에게 충분하고도 남을 만한 경제적 만족을 주어, 실컷 잠이나 자고 꿀떡이나 먹고 세계사의 영속이나 염려하는 따위 일밖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처지에 놓아보라. 그래도 인간은, 오직 배은망덕의 습성 때문에, 더러운 고집 때문에,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고야 말 것이다. 꿀떡이 주는 행복조차도 희생할 각오로 자기를 파멸시키는 비경제적이고 바보스런 넌센스를 기어이 원할 것이다. 그것도 다만 이 분별에 찬 질서정연한 세계에 파멸과 환상의 분자를 혼합시키고 싶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이와 같은 터무니없는 공상과 비천하기 짝이 없는 욕망을 언제까지나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게 인간인 것이다. 결국 그것은 인간이란 어디까지나 인간일 뿐, 피아노의 건반은 아니라는 걸 스스로 확인하고 싶은 데 지나지 않는다.(46p)

 

도대체 당신들은 무슨 이유에서 그토록 확고하게, 그토록 자랑스럽게, 오직 정상적이며 긍정적인 것만이, 이를테면 오직 무사안일만이 인간에게 유익하다고 확신하고 있는가? 정말로 이성은 이해의 판별을 절대 그르치는 일이 없을까? 실은 인간이 사랑하는 건 무사안일뿐만은 아닌지 모르잖는가. 인간은 고통이란 것도 그만큼은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닐까? 사실 인간은 미칠 듯이 고통을 사랑하는 수가 있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여기에 대해선 새삼스레 세계사를 들춰볼 필요도 없다. 만약에 당신들이 인간이고 얼마만큼이라도 생활한 경험이 있다면, 자기 가슴에 물어보라. 내 의견으로는 오직 무사안일만을 사랑한다는 건 어쩐지 추한 것 같다. 좋건 나쁘건 뭔가 파괴한다는 건 때로는 몹시 유쾌한 일이다. 내가 여기서 특별히 고통의 편을 드는 것도 아니고 무사안일을 변호하려는 것도 아니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자기의 변덕은 물론이요, 그 변덕을 필요할 때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까지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이다.(51~52p)

 

 

ㅡ 도스토옙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中, 문예


,

2016/7/4

 

우리는 도대체 그가 어떤 기분으로 사는지 알고 싶었다. 그는 체격도 좋고 건강한데다가 일종의 동물적인 강인함과 에너지의 소유자였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무기력하고 활발하지 않은 면이 있었다. 게다가 누구나 느끼듯이 매사에 무관심했다. 옆에서 보더라도 ‘어딘가 모자라는 데가 있다’고 느껴졌지만, 본인이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도 알 수 없었다. 설령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에는 ‘무관심’했다.(78~79P)

 

더 나아가 이러한 임상례에서는 심각한 역행성 기억상실이 있을 수도 있다. 게다가 내 동료인 레온 프로타스 박사가 최근 접한 다음과 같은 병례도 있다. 아주 지적이고 능력 있는 남성이 몇 시간 동안 자신의 부인과 아이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자신에게 아내나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30년에 걸친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잃어버린 꼴이 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서너 시간 만에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곧 회복되고 더구나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고는 해도 그것은 생각할수록 끔찍한 이야기이다. 풍요롭게 살고 많은 일을 했으며 또한 온갖 추억이 서린 30년의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말살되어버린 것이다. 더구나 이렇게 무서운 증상에 빠졌다는 것을 타인만 알고 당사자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본인은 건망증에 걸렸다는 사실도 모르고 아무런 불안도 느끼지 못한 채 하던 일을 계속했다. 하루가 아니라(보통 알코올에 의한 의식상실은 하루 정도이지만)생애의 절반가량을 잃어버리고 그러한 사실조차 몰랐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된 것이다. 인생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낯설고 기분 나쁜 공포를 안겨준다.

나이가 들면 중풍이나 노쇠, 뇌 손상 등으로 그때까지의 생활 즉 고도의 정상생활이 예상치 않게 빨리 종지부를 찍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을 겪는다 해도 자신이 인생을 살아왔고 자신의 등 뒤에 과거가 있다는 기억은 남으며, 그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 있다. ‘적어도 내가 뇌를 다치기 전 또는 발작을 일으키기 전에는 힘껏 노력하면서 살았다.’라고. ‘인생을 살았다’라는 의식은 인간에게 때로 위안을 주기도 하고 때로 쓰디쓴 회한을 주기도 하지만, 역행성 기억상실증에 걸리면 이러한 의식조차 없어진다. 부뉴엘이 말한 ‘일체의 기억상실, 전 생애를 지워버리는 최후의 상실’은 말기 치매증에서라면 아마 틀림없이 일어날 것이다.(87~88p)

 

그러나 우리는 신경기능과 신경계의 변화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복잡한,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사고에 의해 결정되는 존재하고 여긴다. 대개의 경우 이러한 사고는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때때로 기질적인 병의 개입으로 변화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때는 생리학적·신경학적인 상관관계를 고려해서 인생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245p)

 

강제회상은 편두통과 간질이 발작했을 때 그리고 최면 상태에 빠졌을 때, 나아가 정신병에 걸렸을 경우 등에 일어난다. 대개는 전에도 언젠가 보았던 장면이라는 느낌이 들며, 잭슨식으로 말하면 의식의 중복이 일어난다. 그것은 특별한 말, 음, 장면, 특히 냄새 등과 같이 강렬한 기억항진성 자극을 받으면 그다지 극적이지 않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일어난다.(284p)

 

결함이 있다고 여긴 부분의 교정에 있는 힘을 모두 쏟아붓고 때로는 잔혹할 정도의 작업을 부과했지만, 결과는 허사였다. 나는 이런 방법이 적절한 치료법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환자의 결함에 너무 많은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그래서 변화하지 않는 상실되지 않고 남아 있는 능력을 거의 간과했다. 내게 이 점을 처음으로 깨닫게 해준 사람이 리베커였다. 우리는 소위 ‘결함학’에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여서 ‘이야기학’ 쪽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야기학’이야말로 지금까지 무시되었지만 반드시 필요한 ‘구체성의 과학’인 것이다.(339~340p)

 

하지만 이러한 연구야 어찌되었든 간에, 현실은 그보다 훨씬 불가사의하고 복잡하며 그렇게 간단히 설명할 수가 없다. 어느 한쪽으로 몰아가는 형식적인 테스트나 흔히 보는 <심층취재 60분> 따위의 인터뷰 프로그램으로는 진실의 일단을 엿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물론 이러한 연구나 텔레비전 방송이 ‘틀렸다’는 건 아니다. 그것들은 그런대로 조리가 서 있고 때로는 많은 내용을 가르쳐주기 때문에 참고가 되기도 한다. 다만 그러한 노력들은 밖에서도 잘 보이므로 접근이 손쉬운 ‘표면’만을 다루고 있을 뿐 심층에까지 도달하지는 못하고 있다. 심층 아래의 좀 더 깊은 곳에 대해서는 언급은커녕 생각조차 한 적이 없다는 결점이 있는 것이다.(361p)

 

 

덧. 다른 걸 다 떠나서 번역이 정말로 거지같다. 앞으로 조석현은 피하는 걸로.

 

 

ㅡ 올리버 색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中, 이마고

,

2016/7/6

 

180p 남짓한 분량으로 몇 줄의 발췌문으로 몽테뉴의 “수상록”을 다루는 책이다. 이 책으로 몽테뉴와 그가 쓴 수상록에 대한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출판 의도도 아닐뿐더러 불가능하다. 그와 그의 책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성취는 이루었다고 본다.

 


몽테뉴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자신이 보다 진중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의 영혼은 몰두하는 대신 동요하고 “고삐 풀린 말”처럼 사방으로 날뛰며, 그가 직무에 짓눌려 지내던 법관 시절보다 더 산만해졌다. “기괴하기 그지없는 키메라와 괴물들”이 그의 정신을 지배했고, 기대했던 평화 대신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명화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에서처럼 악몽과 혼란이 자리 잡았다.

몽테뉴는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애초에 그가 은퇴한 것은 집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을 읽고 명상을 하고 묵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집필은 불안을 잠재우고 괴물들을 다스리기 위한 자구책으로서, 치료약으로서 고안된 것이었다. 몽테뉴는 그 상념들을 글로 쓰기로, “기록부에 남기기로” 결심했다고 밝힌다. 기록, 장부, 커다란 출입 목록 기록부. 그는 상념들을 정리하고 자신을 다시금 통제하기 위해 생각과 망상의 장부를 쓰기로 작정한 것이다.

요컨대 몽테뉴는 고독 속에서 지혜를 구하려다 광기에 발을 살짝 디뎠다. 그리고 이를 기록함으로써 환상과 망상에서 벗어나 치유될 수 있었다. <수상록> 집필은 몽테뉴가 자신을 통제하는 수단이었다.(54~55p)

 

몽테뉴가 프랑스어로 책을 쓰기로 결정한 것은 바로 그가 바라는 독자층이, 남자들에 비해 고대 언어에 익숙지 않은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몽테뉴가 그의 책에서, 특히 ‘베르길리우스의 시에 대하여’에서 지극히 내밀한 자기 이야기를 하기 위해 라틴어 시구를 잔뜩 인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지 않았느냐는 지적이 나올 수 있겠다. 사실이다. 그는 모순 덩어리 인간이었다.(72~73p)

 

“저는 남의 말을 하지 않지만 혹시 하게 된다면 저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몽테뉴는 이 말을 통해 타인이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임을 상기시킨다. 그가 다른 이의 글을 읽고 인용하는 것은, 그 글을 통해 자신을 더 잘 알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을 돌아보면 또한 남도 보인다. 자신에 대한 깨달음은 타인에 대한 깨달음의 서곡이다. 그는 타인 덕분에 자신에 대해 알게 되고, 나아가 타인도 더 잘 알게 된다고 말한다.(90~91p)

 

나의 이해력은 노상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뒷걸음질 치기도 한다. 나는 나중에 한 사색이라고 해서 처음에 한 것보다 결코 덜 의심하지 않는다. 과거의 생각이건 현재의 생각이건, 불확실하기는 매한가지다. 우리는 남을 교정하듯 스스로를 교정하는 우를 범한다. 1580년에 내 첫 책이 출간된 이후로 수년이 흘렀고, 그만큼 나도 늙었다. 그러나 내가 조금이라도 더 현명해졌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현재의 나와 잠시 뒤의 나는 확실히 둘이다. 어느 편이 더 나은가? 나로서는 대답할 길이 전혀 없다.(96p)


이 두 가지 교제(사랑과 우정)는 우발적이고 타인의존적이다. 하나는 드물어서 곤란하고, 다른 하나는 나이와 더불어 시들어버린다. 따라서 이 두 가지는 나의 필요를 충분히 채워주지 못한다. 세 번째는 바로 책과의 친교인데, 이것이 가장 확실하고 우리와 가깝다. 앞의 우 가지가 가진 장점을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책은 꾸준히 그리고 손쉽게 누릴 수 있다는 그것만의 장점이 있다.

(...)

책은 나와 전 여정을 함께하며 어디서나 나를 돕는다. 나의 노화와 고독을 위로하고, 권태로운 무위의 짐을 덜어주고, 성가신 친구들을 언제라도 떼어내주고, 극단적이거나 치명적이지만 않다면 고통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해준다. 괴로운 생각에서 벗어나려면 책을 집어들기만 하면 된다. 책은 이내 나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고 고통을 덜어준다. 또한 내가 보다 실제적이고 생생하고 자연스러운 다른 편익이 없을 때에만 찾더라도 이를 전혀 문제 삼지 않고, 언제나 똑같은 얼굴로 나를 맞아준다.(116~118p)



 

ㅡ 앙투안 콩파뇽, <인생의 맛> 中, 책세상

,

2016/7/5

 

식료품점에 가서 사온 오이를 식초 통에 넣는다면, 오이가 “안 돼, 나는 단맛을 지키고 싶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헛된 외침이다. 그 통은 오이를 피클로 만들 것이다. 식초 통에서는 오이로 있을 수가 없다. 나는 우리가 전쟁이라는 나쁜 통을 지니고 있으며, 그 속에 이 교도소라는 나쁜 통을 집어넣으면, 그렇지 않았을 때에는 선량했던 사람이 타락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95p)

 

이 모든 이야기에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방치의 악’이다. 나는 가해자에게 초점을 맞추어왔지만, 내 연구와 앞으로의 저술에서 더욱 초점을 맞추고 싶은 두 중요한 집단이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지켜보면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어떠한가? 아부그라이브에는 의사, 간호사, 기술자도 있었다. 두 군인이 죄수들을 피라미드처럼 쌓아올리고 찍은 사진을 보면 주위에 둘러서서 지켜보는 사람이 12명이나 되었다. 이런 짓을 지켜보면서 “이건 잘못된 일이야! 당장 그만둬! 너무 끔찍해!”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암묵적인 동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들은 그 끔찍한 일을 용인하는 침묵하는 다수에 속한다. 내가 뉴욕에서 택시를 탔는데 운전사가 인종차별적이거나 성차별적인 농담을 꺼낸다고 생각해보자. 내가 그의 말을 중단시키지 않는다면, 그는 승객이 그런 농담을 좋아한다고 짐작하고서 계속 떠들어댈 것이다. 그는 내 침묵을 자신의 인종차별주의를 승인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방치의 악은 그 교도소에 있던 모든 사람들만이 아니라, 악을 보면서도 반대하지 않아서 그것이 계속되도록 허용하는 사회 전체의 사람들에게도 존재한다.

 

세계적인 석학들로 이루어진 엣지 재단에서 나온 첫 번째 책이다. 스티븐 핑커를 위시한 각 분야의 논쟁적인 학자들의 참신한 의견들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위의 인용은 그 중 스탠포드 감옥 실험(루시퍼 이펙트라는 책과 여러차례 영화화도 됨)으로 유명한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가 이야기하는 내용 중 한 부분이다. 뒷부분에는 이런 내용도 나온다. 부부 중 한 명이 자식을 학대하는 것에 대해 다른 한 쪽이 적극적으로 안 된다고 막지 않는 것은 직접적으로 아동을 학대하지 않았어도 학대를 조장했고 오히려 그 또는 그녀도 가해자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다시 한 번 언급하지만 잘못된 사안에 대해 “이건 잘못된 일이야! 당장 그만둬! 너무 끔찍해!”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암묵적인 동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귀찮고 성가실뿐더러 내가 원하는 수준의 응징이 가해지지 않아도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나마 향해 가고 있는 이유는 지속적으로 행동하는 누군가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거창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초면에 반말하는 택시기사를 만나면 얘기해봐야 들어먹지 않을 면전에서 싸우지 말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 신고하면 된다. 밤늦은 시간에 술 처먹고 주택가에서 깽판 치는 것을 봐도 마찬가지로 전화기를 들면 된다. 서로 얼굴 붉힐 일 없이 얼마나 산뜻한가. 이런 일들을 귀찮다고 참고 넘어가니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만연하고, 상식 있는 사람들이 비상식적인 대우를 받는다.

 

 

ㅡ 스티븐 핑커 외, <마음의 과학> 中, 와이즈베리

,

2016/6/22

 

엘슨 자신이 건축가라는 사실, 두 사람이 클라우디오 실베스트린이나 빈센트 반 뒤센이나 소투 드 모라의 작품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초반의 끌림에 다소간 작용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엘슨은 의문이 든다. 그 끌림은 이제 어떻게 변했나? 하루를 끝내며 갖는 별 의미 없는 몇 시간. 술 몇 잔 또는 영화. 대부분은 섹스. 이젠 그마저도 의례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그들이 막 사귀기 시작했던 얼마간은ㅡ이게 정말 사귀고 있는 게 맞는다면ㅡ둘이 함께 로나 친구들의 집에 놀러가기도 했다. 그리고 대학 시절 그랬던 것처럼, 모두들 술에 취해 모여 앉아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예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인 이들 대부분이 그보다 어렸고 몇몇은 자식뻘이었음에도 그는 그런 자리가 즐거웠다. 깜빡이는 촛불과 벽에 어룽거리는 그림자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막연한 흥미, 아니 어쩌면 질투 같은 것을 느끼며 신중하게 거리를 두고 대화를 듣는 것이 좋았다. 그런 식의 신념을 타인과 공유해본 게 얼마 만이었던가? 나중에 그는 심지어 담배까지 다시 피우기 시작하여, 저녁식사 후 담배를 피우러 마당으로 나가는 작은 무리에 합류했다. 그리고 거기 현관의 전등 밑, 또는 정원의 그림자 속에 서서 로나 쪽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으면 그녀도 항상 미소로 답해주었다.

그때 이후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10~11p)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며 그는 생각한다. 일 년 전만 해도 삶이 얼마나 달랐던가, 모든 것이 얼마나 달랐던가. 졸업까지 겨우 몇 달을 남겨둔 그때는 창창한 앞날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명문대학의 학위, 자신을 사랑해주던 남자친구, 아직은 기능을 하고 있던 가족, 행복하게 대학을 다니던 여동생. 그런데 열두 달이 지난 지금 무엇이 남아 있나?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요리를 배우겠다며 한국으로 떠난 마코스는 처음엔 잠시 떨어져 있는 거라더니 몇 주후 완전히 헤어지자고 했다. 클로이는 대학에서 퇴학을 당했다. 부모는 이혼했다. 그리고 대학의 학위는 생각했던 만큼의 가치가 없었다. 카페 브라질에서 시급 육 달러를 받고 일하는 것은 결코 그가 생각한 전도유망한 삶은 아니었다.(90~91p)

 

 

ㅡ 앤드루 포터, <어떤 날들> 中, 문학동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