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책 모임에서 첫 번째로 읽은 책. 평생 잊히지 않을 듯.
불행에 익숙해진 사람은 운명의 무게를 받아들인다. 그런 점에서 내 고향 마을 사람들은 모두들 운명론자들이었다. 그들은 도대체 진보라고 하는 것을 믿지 않았다. 내 유년의 고향 마을은 물처럼 고여 있었다. 운명은 방죽에 고인 물과 같은 것이었다.(19p)
회고컨대 학교가 파하고 두 개나 되는 재를 넘어 마을로 돌아가는 일이 즐거움이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집은 그런 곳이어선 안 될 것이다. 아니, 그런 곳일 수가 없을 것이다.(77P)
고향이란 하나의 산천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이 만들어 낸 관계이다. 인연이다. 그 때문에 고향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82P)
고향, 곧 관계의 늪. 그 파리지옥 같은 인정의 끈끈함. 늪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사람은 세상을 보지 못한다.
그만한 매정함, 그만한 모욕을 감당할 체질을 익히지 못해서 대개의 사람들은 고향(의 인정)을 끌어안고 산다.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82~83P)
사람은 현실에 대해 절망하면 신화에 기대고 싶어한다. 신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의 부드러운 왜곡이다. 반영이라면 왜곡의 반영이다. 개별적인 무의식의 꿈을 공식화함으로써 현실을 넘어가려는 욕망, 그것이 신화를 탄생시키고, 신화를 받아들이게 만든다. (...) 신화는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에 있다. 여기서는 진짜냐, 가짜냐 하는 논쟁은 의미를 잃는다.(84p)
노동력을 제공하면 언제든 숙식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도시에 대한 믿음에도 조금씩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 그는, 오래지 않아 자신의 노동을 제공할 자리를 스스로 가려 택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또 그는 깨달았다. 어울림의 유무와 상관없이 그가 손쉽게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취직 자리가 중국 음식점이라는 사실을.(94p)
충격이나 통증은 빈도와 반비례한다. 처음이 가장 어렵다. 익숙해지는 단계를 거치면서 충격이나 통증은 저절로 내면화한다.(95p)
아름다움에 대한 반응이 전적으로 인간 종족의 본능이며 따라서 선천적이라는 생각에 나는 동조하지 않는다. 그 감각 역시 상당 부분은 길러지는 것이다.(113p)
기억은 사실의 편이 아니라 편들고 싶은 자의 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는 것을 사실이 아니라는 이유로, 편들고 싶은 자를 편들고 있다는 이유로 거부하여서는 안 된다.
진실이 반드시 사실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진실은 사실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내가 어떤 글을 읽다가 붉은 볼펜으로 줄을 그었으며, 그 붉은 줄을 여태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책의 저자가 조이스라고 할 때, 제임스 조이스를 빌려서 발언한다는 뜻이다. 조이스를 읽음으로써 비로소 세상이 악몽임을 깨달은 것이 아니다. 나는 붉은 볼펜으로 줄을 그었다. 그것은, 그를 알기 전부터 이 세상에서의 나의 삶이 바동거리는 악몽에 다름 아님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제임스 조이스를 빌려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제임스 조이스에게서 내 말을 발견한 것이다. 그가 내 말을 먼저, 대신해 버린 것이다.
글들은, ‘내 말’의 대언일 때만, 진실로 의미를 가진다. 그 밖에 다른 글들은 쓰레기거나 허수아비이다. 쓰레기는 용도가 폐기되어 버려진 것이고, 허수아비에게는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다. 삶, 곧 악몽, 눈 뜨고 꾸는, 그래서 더 끔찍한.(139~140P)
언제나 상황이 더 힘이 세다. 어떤 일은 예정 없이 일어나지만, 그러나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은 있게 마련이다. 특정한 상황이 특정한 목적지를 향해 내모는 것이다.(143P)
언제나 표현된 것이 전부는 아니다. 아니, 어차피 전부는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안다. 때로는 감추기 위해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쨌든 표현된 것들을 통해서만 진실에 이를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지, 전체가 아니다. 크든 작든 모든 역사는 의미와 진실에 대한 기록이지,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사실적인 기록이 아니다. 입장과 세계관에 따른 선택과 배제, 굴절과 왜곡의 과정을 우리는 해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말한다. 역사는 결국 해석이다. 우리는 그 진실을 안다.(196P)
고향이란,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낱 산천이 아니라 사람인 것이다.(207P)
따라서 어디에 자리를 잡고 있든 언제나 떳떳할 수는 없었다. 한곳에서 치켜세워지는 자는 다른 자리에서 내리깔릴 것을 각오해야 했다. 모든 자리에서 모든 사람으로부터 환영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거니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도 없었다. (227P)
종교는 신념과 믿음의 영역이다. 그 안에 나름대로의 체계가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 무엇보다 정교한 체계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체계는 엄밀하게 말해서 주관적인 것이다. 절대적 신뢰와 전적인 헌신을 전제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 없이 신앙인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나는 알지 못한다. 특정한 종교에 몰두한다거나 그렇지 않다고 할 때에는, 이 전제가 지켜지고 있다. 요컨대 자신의 신념과 믿음을 바칠 수 있다거나 또는 그럴 수 없다는 차원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신과 인간, 영혼과 육체, 하늘과 땅 사이에 갈등과 회의가 생기고 반항과 구원의 드라마가 탄생한다.(234p)
그는 종종 학자의 자세를 내세우곤 하는데, 학문이란 신념이나 믿음의 영역이 아니다. 합리성과 이성을 유일한 규칙으로 삼는 이 영역은 믿음의 있고 없고를 따지지 않고, 믿음의 내용이 어떠한지만을 해부하려고 한다. 학자는 모든 형태의 믿음에 관심을 보이지만, 그 관심은 해부용 칼을 손에 쥔 의학도의 그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종교에 체계가 없지 않지만, 그것은 지극히 사적이고 주관적일 뿐 아니라 신봉하는 자의 절대적 헌신을 전제로 하고 있는 체계이기 때문에, 합리와 이성의 칼날 앞에서는 당황하게 마련이다. 종교에 몰두한 자는 전부를 본다. 그러나 종교를 해부하는 자는 부분을 본다. 부분을 보는 자는 부분의 결함에 눈이 가면 끝내 전부를 보지 못한다. 그리하여 신봉자에게는 모든 것이지만, 해부자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235P)
생각이 한쪽으로 몰리면 다른 출구들이 닫혀 버린다. 이게 아닌데, 이럴 필요가 없는데,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길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이 있다. 그곳 말고는 달리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갈 길이 아닌 줄 알면서도 막무가내로 내달린다. 그리하여 고무지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 상식은 선 위에 있는 것이고, 그러므로 안전하다. 그러나 그 선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파격이 상식이 된다. 편집적인 생각은 편집적인 길을 뚫는다. 그런 일이 발생하려는 순간에도 자각이 아주 없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렴풋하지만,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다는(또는 하려 한다는) 걸 인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힘을 막으려는 희미한 반동도 일어나기는 한다. 그런 뜻에서 술꾼들이 경험하는 ‘필름이 끊어지는’상태와 이것은 다르다. 여기서는 필름이 돌아간다. 단지 필름을 중지시키기가 어려울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문제다. 길이 아닌 곳을 향해 몸을 던지는 난처한 상황을 빤히 목도하면서도 말리지 못하는 상황이란 절망이다.(254~255P)
그는 그 순간에 자기가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멈출 수가 없었다. 마음과는 상관없이 거친 행동이 가속화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의 몸속에 악마가 들어 있는 것일까, 하고 질문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그것은 모든 악덕의 책무로부터 인간을 건지고 그 짐을 모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악마라는 추상에게 지우려는 목적으로 사람들이 고안해 낸 간교한 술수에 지나지 않는다. 악마라면, 그 악마는 인간일 것이다. 인간보다 더 악마다운 악마가 어디 있겠는가.(256P)
ㅡ 이승우, <생의 이면> 中, 문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