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30

 

읽음

 

김영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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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9

 

읽음

 

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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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4

 

윌리엄 스토너는 1910,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 그는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했으며,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들 중에도 그를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동료들이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중세 문헌을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다. 이 문헌은 지금도 희귀서적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명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영문과 교수 윌리엄 스토너를 추모하는 뜻에서 그의 동료들이 미주리 대학 도서관에 기증.”

가끔 어떤 학생이 이 이름을 우연히 발견하고 윌리엄 스토너가 누구인지 무심히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 이상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애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스토너의 동료들은 그가 살아있을 때도 그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의 이름을 잘 입에 올리지 않는다. 노장교수들에게 스토너의 이름은 그들을 기다리는 종말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고, 젊은 교수들에게는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일깨워주지 않고 동질감을 느낄 구석도 전혀 없는 단순한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8~9p)

 

그는 어머니를 아버지와 나란히 묻어주었다. 예배가 끝나고 몇 명 되지 않는 조문객들도 돌아간 뒤, 그는 11월의 차가운 바람 속에 혼자 서서 두 개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하나는 아직 열려 있었고, 다른 하나는 봉분 위에 가느다란 솜털 같은 잔디가 덮여 있었다. 그는 자기 어머니나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묻혀 있는 이 황량하고, 나무 하나 없는 작은 땅으로 시선을 돌려 평평한 땅 너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태어난 집, 아버지와 어머니가 평생을 보낸 집이 있는 방향이었다. 그는 해마다 땅에 들어가는 비용을 생각했다. 땅은 옛날과 다름없었다. 아니, 그때보다 조금 더 척박해지고, 소출도 조금 더 인색해진 것 같았다.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즐거움이 없는 노동에 평생을 바쳤다. 그들의 의지는 꺾이고, 머리는 멍해졌다. 이제 두 분은 평생을 바친 땅 속에 누워 있었다. 땅은 앞으로 서서히 두 분을 자기 것으로 만들 것이다. 습기와 부패의 기운이 두 분의 시신이 담긴 소나무 상자를 서서히 침범해서 두 분의 몸을 건드리다가, 마침내 두 분의 마지막 흔적까지 모조리 먹어치울 것이다. 그렇게 해서 두 분은 이미 오래전에 자신을 바쳤던 이 고집스러운 땅의 무의미한 일부가 될 것이다.(152~153p)

 

그레이스가 왔다. 하지만 그는 결국 그레이스에게 할 말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레이스는 세인트루이스가 아닌 다른 곳에 가 있다가 어제야 돌아와서 이디스의 편지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지치고 긴장한 모습이었으며, 눈 밑에 검은 그림자가 져 있었다. 스토너는 딸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고 싶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380p)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그는 우정을 원했다. 자신을 인류의 일원으로 붙잡아줄 친밀한 우정. 그에게는 두 친구가 있었지만 한 명은 그 존재가 알려지기도 전에 무의미한 죽음을 맞았고, 다른 한명은 이제 저 멀리 산 자들의 세상으로 물러나서······. 그는 혼자 있기를 원하면서도 결혼을 통해 다른 사람과 연결된 열정을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그 열정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열정이 죽어버렸다. 그는 사랑을 원했으며, 실제로 사랑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을 포기하고, 가능성이라는 혼돈 속으로 보내버렸다. 캐서린.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캐서린.”

그는 또한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지만, 거의 평생 동안 무심한 교사였음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언제나 알고 있었다.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굼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387~388p)

 

 

존 윌리엄스, <스토너> , R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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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

 

물론 돈은 절대로 돈 그 자체만이 아니다. 돈은 언제나 돈 이외의 것이고, 돈 이상의 것이다. 그리고 돈은 언제나 최종 결정권을 쥐고 있다.(10~11p)

 

나는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잡문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결국 그것 때문에 인생의 낙오자가 되었지만, 거기에는 어떤 낭만적인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가령 나 자신을 아웃사이더로 선언하고, 훌륭한 인생에 대한 일반 통념에 휩쓸리지 않고 혼자 힘으로 해나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은 욕구 같은 것. 내 입장을 고수하고 물러서지 않으면, 아니 그렇게 해야만 내 인생은 훌륭해질 터였다. 예술은 신성한 것이고, 예술의 부름에 따르는 것은 예술이 요구하는 어떤 희생도 치르는 것, 목적의 순수성을 끝까지 지키는 것을 뜻했다.(62p)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꼴이 말이 아니군요. 정말 형편없어요.”

그래. 자네가 먼저 말을 꺼냈으니 말인데, 자네가 해줄 수 있는 일이 하나 있다네.”

이렇게 말하고는 느닷없이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내 눈을 들여다보면서 감정에 떨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자네 집으로 데려다주게. 그리고 침대에 누워서 자네와 사랑을 나눌 수 있게 해주게.”

너무나 뜻밖의 요구여서 나는 깜짝 놀랐다. 기껏해야 커피 한 잔이나 수프 한 그릇 정도를 예상하고 있었다.

안돼요, 그건. 내가 좋아하는 건 여자지 남자가 아니라고요. 미안하지만 그런 짓은 안해요.”

그가 다음에 꺼낸 말은 내가 이제껏 들은 말 중에 가장 훌륭하고 재치있는 말로 아직도 내 마음에 남아 있다. 그는 1초도 낭비하지 않고, 낙담하거나 섭섭해하는 기색은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고, 어깨만 한번 으쓱하는 것으로 내 대답을 받아넘기고는, 쾌활하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물었고, 그래서 대답한 걸세.”(91p)

 

 

폴 오스터, <빵굽는 타자기> ,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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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

 

 

노련한 조련사처럼 이모는 끊임없이 울고, 손을 쓸어주며 마치 노래를 부르듯 길고 긴 얘기를 늘어놓았다. 립 서비스처럼 느껴지는 의례적인 위로의 말이... 그러나 인간에겐 없어선 안 될 소중한 것임을 안 것도 그때였다.(53p)

 

죽은 황후가 살았던, 이제는 죽은 잔디와... 죽은 나뭇잎들이 뒹구는 그 뜰은, 그래서 내가 접한 새로운 세계의 첫 페이지였다. 이뻐와 착해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그 페이지를, 그러나 실은 누구나 건너야 한다는 사실을 안 것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그것이 인생이다. 어떤 인간도 돈 있어, 만으로는 스스로의 인생을 책임질 수 없으며 어떤 여자도 오빠, 나 오늘 이뻐? 로 평생을 버틸 수 없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내가 아는 어떤 여자와도 달랐고... 나는 그런, 그녀를 만난 지극히 평범한 또래의 남자일 뿐이었다. 믿음에 관해서라면(172p)

 

놀이기구 앞엔 언제나 길고 긴 줄이 이어져 있었고, 둘 다 그런 줄 앞에서 두 말 없이 발길을 돌리는 성격임을 안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두 시간을 기다려 5분 열차를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을 보며 아마도, 하고 나는 얘기했었다. 그런 걸 거야. 여기까지 왔는데 이건 꼭 타고 가야지, 그런 심리가 되는 거지. 두 시간 줄서서 5분 열차, 두 시간 줄서서 5분 회전바퀴, 두 시간 줄서서 5분 바이킹... 우와, 거의 하루인 걸. 한적한 느낌의 참으로 시시한 회전 커피 잔에 앉아 나는 생각했었다. 누구나 그럴 듯한 인생이 되려 애쓰는 것도 결국 이와 비슷한 풍경이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이왕 태어났는데 저건 한 번 타봐야겠지, 여기까지 살았는데... 저 정도는 해봐야겠지, 그리고 긴긴 줄을 늘어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버리는 것이다. 삶이 고된 이유는... 어쩌면 유원지의 하루가 고된 이유와 비슷한 게 아닐까, 나는 생각했었다.(200p)

 

그게 인간이야, 하며 요한은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팡이로 바다를 갈라 보여준다 한들 내일 아침이면 또 다른 기적을 원하는 게 인간이지. 끝없이 자위를 해야 하고 끝없이 손을 씻어야 하는 게 인간이야. 그리고 또, 자위를 너무 하면 몸에 해롭지 않나요 걱정하는 게 인간이지. 그러고 돌아서면 자위도 안 하는 척, 하는 게 인간이야. 휴지는 휴지대로 진창 써놓고 뭐야 휴지가 떨어졌잖아, 하는 게 인간이라구.(225p)

 

뭐야 바보잖아 싶겠지만 그게 인간이야. 현실적으로 살고 있다 다들 생각하지만, 실은 관념 속에서 평생을 살 뿐이지. 현실은 절대 그렇지가 않아, 라는 말은 나는 그 외의 것을 상상할 수 없어라는 말과 같은 것이야. 현실은 늘 당대의 상상력이었어. 지구를 중심으로 해가 돈다 거품을 물던 인간도, 아내의 사타구니에 무쇠 팬티를 채우고 십자군 원정을 떠나던 인간도, 결국 아들을 낳지 못했다며 스스로 나무에 목을 맨 인간도... 모두가 당대의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아>를 벗어나지 못했던 거야. 옛날 사람들은 대체 왜 그랬을까 다들 낄낄거리지만, 그리고 돌아서서 대학을 못갈 바엔 죽는 게 나아! 다들 괴로워하는 거지. 돈이 최고야 무쇠 같은 신앙으로 무정하고, 예쁘면 그만이지 더 이상 뭐가 있어당대의 상상력에 매몰되기 마련인 거야. 맞아,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아. 지금의 인간은 그 외의 것을 상상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그 <현실>은 언젠가 결국 아무도 입지 않는 시시한 청바지와 같은 것으로 변하게 될 거야. 늘 그랬듯(226~227p)

 

그리고 다시는 나는 그런 식으로 세상을 상상할 수 없었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 보았지만... 그런 식으로 세상을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는 생각이다. 아마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그 순간>이 지난 후의 사랑은... 사랑이란 이름의 경제활동으로 변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세상임을, 그것이 보편적인 인생의 길임을 그 순간의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신의 힌트는, 늘 숲 속에 떨구어진 작은 빵부스러기와 같은 것이었다.(231p)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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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6

 

 

나는 타인이 내 삶에 개입되는 것 못지않게 내가 타인의 삶에 개입되는 것을 번거롭게 여겨왔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그에게 편견을 품게 되었다는 뜻일 터인데 나로서는 내게 편견을 품고 있는 사람의 기대에 따른다는 것이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할 일이란 그가 나와 어떻게 다른지를 되도록 빨리 알고 받아들이는 일뿐이다.(229p)

 

 

 

은희경, <타인에게 말걸기>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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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5

 

요셉은 B가 사용하는 초기 단편이라거나 말년의 문제작이라는 식의 표현을 싫어했다. 종교가 무엇이냐는 단순한 질문에 여러 종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자신에게는 초기 불교의 소승주의가 맞는 것 같다고 대답하는 종류의 사람들에게 느끼는 거부감과 비슷했다 그런 사람들은 왕의 파티에 가서 오줌을 참다가 방광이 터져 죽은 튀코 브라헤 같은 특이한 이름을 외우고 다닌다.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자신이 여섯 살 칠개월과 일곱 살 석달 사이 였을 때의 후견인이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은 고유명사나 특별한 숫자의 인용이나 디테일로 독자를 현혹할 뿐 자기만의 사유체계는 없다. 분명 책은 안 보고 서평만 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셉이 생각하기에 한국문학에 필요한 소설은 틀에 갇힌 바보들을 화나게 만들 수 있는, 그러니까 패턴을 벗어난 소설이었다. 바보들도 읽게 하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92~93p)

 

류와의 재회라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으며 조금 전까지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이 그렇게나 지겨웠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95p)

 

본 것이 적을수록 이상한 것도 많아지는 법이야. 사물은 이상할 게 없는데 그런 사람일수록 공연히 제가 화를 내고 한 가지만 자기가 아는 것과 달라도 만물을 온통 의심하지. 이거, 내 말이 아니고 박지원이야.(109p)

 

 

은희경, <태연한 인생>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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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

 

여름 대목이 다가오면 대형서점의 여행서 매대는 전쟁터가 된다. 매대의 여행서들은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여름휴가를 집에서 보내는 것은 죄악이라고. 어떤 위험과 부담을 감수하고라도 여름휴가를 멋진 여행지들에서 보내라고. 인도양의 산호초, 뉴욕의 5번가, 프로방스의 작은 마을, 미얀마의 석불이 당신을 기다린다고.

언젠가부터 여행은 신성불가침의 종교 비슷한 것이 되어서 누구도 대놓고 저는 여행을 싫어합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혹시 신입사원 모집 공고마다 나오는 해외여행에 결격사유가 없을 것이라는 문구의 영향일까?). 여행을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쩐지 나약하고 게으른 겁쟁이처럼 보인다. 폰 쇤부르크처럼 명문가의 자손으로 태어났더라면 우리 귀족들은 원래 여행을 안 좋아해라고 우아하게 말할 수 있겠지만 그건 우리 같은 평민들이 쓸 수 있는 레토릭이 아니다. (...) 새삼 당연한 얘기지만, 여행을 하고 안 하고는 단지 선택의 문제일 뿐이었고 지금도 그렇다.(57~58p)

 

성장은 끝나지 않는다. 모든 비극과 희극이 여기에서 시작된다. 배를 타고 고향을 떠나는 것, 술을 만들어 먹는 것만으로 온전한 성인이 될 수 있었다면 아마 문학과 연극, 영화 같은 것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82p)

 

책값은 패스트패션의 가장 저렴한 옷값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싸다. 지난 십 년간 우리나라의 물가는 36퍼센트가 올랐는데 책값은 불과 18.5퍼센트밖에 오르지 않았다. 실제 가치로 본다면 책값은 십 년 사이에 더 떨어진 것이다. 종잇값도 오르고 인건비도 오르는 판에 책은 왜 더 싸지는 것일까. 스위스 명품 시계 회사 사장의 인터뷰에 힌트가 있다. 당신네 회사 시계는 왜 그렇게 비싸냐고 묻는 기자에게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필요가 없으니까요.”

의아해하는 기자에게 이렇게 부연했다.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은 값이 떨어집니다. 많은 회사들이 뛰어들어 서로 경쟁하며 값싸게 생산할 방법을 결국 찾아내거든요. 저희가 만드는 시계는 사람들에게 필수품이 아닙니다. 그러니 값이 떨어지지 않습니다.”(160p)

 

 

 

김영하, <보다>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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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

 

저를 포함한 문학작품의 독자들은 예상치 못한 찬란한 실패를 욕망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존재들입니다. 시장에 가서 잘 익은 사과를 골라 바구니에 담으면서도 막상 집에 와서 장바구니를 풀었을 때 그 사과가 여전히 그저 잘 익은 사과에 불과하면 실망을 합니다. 그것은 사과 이상(옥은 그 이하)의 전혀 예기치 못한 그 무엇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엇을 소비자는 미리 알 수가 없습니다. 미리 안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겠지요. ‘내가 뭘 원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잘 모르는 바로 그것을 내놓으라는 게 문학 독자의 욕망인 것처럼 보입니다.(168~169p)

 

한 권의 책과 그것을 읽은 경험은 독자 개인에게만 고유한 어떤 경험으로 남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독서를 왜 할까요? 그것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는 바로 그 점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거의 모든 것이 공개돼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하루하루는 시작부터 끝까지 공유되고 공개됩니다. 웹과 인터넷, 거리의 CCTV, 우리가 소비한 흔적 하나하나가 다 축적되어 빅데이터로 남습니다. 직장은 우리의 영혼까지 요구합니다. 모든 것이 털리는시대. 그러나 책으로 얻은 것들은 누구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독서는 다른 사람들과 뭔가를 공유하기 위한 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공유할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 내면을 구축하기 위한 것입니다.(180~181p)

 

 

 

김영하, <말하다>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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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6

 

 

이 말을 하기에 조금은 늦은 감이 있지만 SNS시대다. 페이스북을 위시한 SNS사이트를 훑어보면 어떤 것에 대해 좋다고 칭찬하고 찬양하는 경우는 볼 수 있으나, 어떤 것이 구리다고 적극적으로 구림을 표출하는 경우는 드문 것 같다. 왜 자신의 에너지를 그런 부정적인 곳에 써야 하냐고? 세상에 많고도 많은 구림을 감지하고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면 왜 안 되나. 나쁜 것을 넘어 형편없는 것들이 버젓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 말할 가치가 없다고 내버려두니 그 형편없음이 계속해서 존재하고 기승을 부리는 것이다. 제발 모든 취향은 존중 받을 가치가 있다는 PC한 말은 하지말자. 그렇게 모든 걸 개인 기호의 문제로 환원해 버리면 예술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우리는 그것에 대해 무엇을 얘기할 수 있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세상에는 형편없는 기호와 취향이 수두룩하고 그것을 이용해 이지성, 김난도 같은 자들이 계속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전부는 무시해도 사는데 아무 문제 될 게 없으며 오히려 그 돈을 친구와 술 먹으며 얘기를 나누는 데 사용하는 것이 사는데 더 많은 도움이 될 거라는데 내 손모가지라도 걸 수 있다.

이 얘기를 왜 하냐고? 이 글의 제목으로 써놓은 책도 별반 다를 바가 없어서이다. 어떻게 생각해봐도 자기계발서 따위는 안 읽어도 될 것 같다. 자기계발서로 계발이 되는 사람은 그걸 읽는 사람이 아니라 그 책을 사주는 사람으로 인해 돈을 버는 자들이다. 해마다 쏟아져 나오는 자기계발서들이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하면 된다.’ 이거 아닌가? 하면 되기는 개뿔 되면 하겠다. 이딴 식의 긍정주의를 사회에 만연하게 해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나 불합리한 것들은 도외시하고 네가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남들보다 열심히 살지 않아서이고, 열심히만 살면 성공할 수 있다는 헛소리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책이 자기계발서 아닌가 말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또 얼마나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께서 친히 양비론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중용의 미덕을 설파하시겠지.

 

 

하야마 아마리,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 , 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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