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5/3

산시로는 이런 경우 대답을 잘 못한다. 순간의 기회가 지나가고 머리가 냉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 과거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면 좋았을걸, 그렇게 했으면 좋았을걸, 하고 후회한다. 그렇다고 이렇게 후회할 것을 예상하고 억지로 임기응변식의 대답을 아주 자연스럽고 자신 있게 지껄일 만큼 경박하지는 않다. 그래서 그저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얼간이 같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155~156p)

산시로는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다. 용무가 있어 다른 사람과 만날 약속을 했을 때는 그쪽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 하는 것만 상상한다. 자신이 이런 표정으로, 이런 일을, 이런 목소리로 말해야지 하는 것은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더구나 만나고 나면 나중에 반드시 ...그것을 떠올리며 생각한다. 그리고 후회한다.(220p)

다들 딱한 사람들뿐인 것 같지만 실제로 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사자뿐이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사실을 좋아하지만 사실에 수반되는 정조는 잘라버리는 습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잘라버려야 할 정도로 세상이 각박하니 어쩔 수가 없다. 그 증거로 신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신문의 사회면 기사는 열에 아홉이 비극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비극을 비극으로 체험할 여유가 없다. 다만 사실에 대한 보도로 읽을 뿐이다. 자기가 보는 신문에는 사망자 수십 명이라는 제목으로 하루에 변사한 사람의 연령, 호적, 사인을 6호 활자로 각각 한 줄씩 싣는 일이 있다. 간단명료함의 극치다. (...) 당사자에게는 비극에 가까운 사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다지 절실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고 각오해야 할 것이다.(267~268p)

ㅡ 나쓰메 소세키, <산시로> 中,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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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4/20

나는 더 이상 아버지가 그립지 않다. 보통은 그렇다. 나도 그리워하고 싶다. 그리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시간이 모든 것을 치유해준다는 말은 진실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사실이며,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조심하지 않으면, 시간은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가져가버리고, 그 자리에 이해만을 채워 넣는다. 시간은 기계이다. 시간은 고통을 경험으로 바꾸어놓는다. 순수한 정보를 가져다 편집하고, 보다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번역해놓는다. 우리 삶의 사건들은 기억이라고 불리는 다른 물질로 변형되며, 이 과정에서 손실되는 것들은 결코 다시 되돌릴 수 없다. 다시는 편집되지 않은, 가공되기 전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로 인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선택권이 없다.(88p)

나는 잊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느낌이라는 것을. 앞으로 나아가는 일, 절벽에서 아래의 암흑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일, 놀랍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갑자기 착륙하는 일. 그리고 이어지는 매 순간순간마다 그런 똑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는 일. 매 순간마다 추락한 다음 다시 기어 올라와 똑같은 상황을 반복해서 겪는 일. 나는 이 윙윙대고 흐릿한 풍경, 잠망경을 통해 보는 것 같은 의식, 내 자신의 삶을 누리는 것의 마찰력과 견인력, 그 삶의 소모를 거의 그리워했었나보다. 나는 현재라는 이름의, 혼란스럽고 즉흥적이지만 과도하게 제작된 매 순간의 무대에 대해서, 만들어졌다 부서지는, 매번 스스로를 분해하는, 시간의 매 순간마다 부서진 후 다시 만들어지는 그 무대가 가져다주는 위험과 즐거움에 대해 거의 잊어버렸던 것 같다.(101~102p)

어쩌면 내가 원한 것이 바로 이런 상황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사람을, 모든 존재를 나로부터 밀어내는 것. 나는 언제나 이런 일을 저질러버린다. 진짜로 선택을 할 만한 기회가 오는 경우는 너무도 드물다. 보통은 이 세계의 줄거리가 나를 앞으로 가도록 밀어낸다. 그러나 가끔 중요한 갈림길, 시간의 나뭇가지가 갈라지는 지점에서, 내가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때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언제나 이런 결과가 나와버린다.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 내가 보호해야 할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만다. 나는 자기 타임머신을 망가뜨리는 고객들이나 돈을 구걸하는 지나가는 섹스봇 따위에게는 친절하지만,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일에서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 엄마, 필, 아버지에게도.(147p)

ㅡ 찰스 유, <SF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 中,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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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4/3

갈보 집은 우울해요. 뭔가를 집어넣으러 가는 곳은 다 그렇죠. 은행, 우편함, 무덤, 자동판매기.(33p)

호머는 파리들의 편이었다. 이따금씩 허공에서 맴돌던 파리 한 마리가 너무 멀리 돌아 선인장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호머는 마음속으로 그 파리가 그대로 날아가거나 되돌아가기를 빌었다. 파리가 선인장에 내려앉으면 도마뱀이 살금살금 다가갔고, 호머는 녀석이 파리를 잡아먹을 때까지 숨을 멈춘 채 지켜보면서 제발 무슨 일이 일어나서 파리가 위험을 알아차리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렇게 파리가 무사히 도망치기를 바라면서도 자기가 개입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거나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도마뱀은 이따금씩 거리 조절에 실패했고 그때마다 호머는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71~72p)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일부만을 욕망에 바친다. 머리나 가슴만 훨훨 타오르는데 그나마도 완전히 몰두하는 건 아니다. 더욱더 운이 좋은 사람들은 백열등의 필라멘트와 같아서 맹렬히 타오르지만 조금도 닳지 않는다.(95~96p)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은 사람들만이 눈물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울고 나면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그러나 호머처럼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사람들, 그저 영구불변의 번민이 전부인 사람들은 울어 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울지 않을 수도 없다.(98p)

여기서 누군가를 체포해야 하는 경우에도 그들은 일단 범인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이 행동하다가 모퉁이를 돌아간 뒤에야 비로소 경찰봉으로 마구 두들겨 팼다. 범인을 점잖게 대하는 것은 군중 속에 있을 때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243p)

토드는 그 사람들이 군중에 합류하자마자 변모하는 과정을 목격했다. 줄을 서기 전까지만 해도 눈치를 살피듯 조심스러운 모습이었지만 군중의 일부가 되는 순간부터 뻔뻔스럽고 공격적인 태도로 돌변했다. 그들이 순진한 호사가라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했다. 그들이 순진한 호사가라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했다. 그 사람들은 잔인하고 사나웠으며 특히 중년층이나 노년층은 더욱더 심했다. 그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권태와 실망 때문이었다.
그들은 책상이나 계산대, 밭이나 각양각색의 단조로운 기계 따위에 매달려 따분하고 힘겨운 노동과 함께 한평생을 보낸다. 그렇게 한 푼 두 푼 모으면서 언젠가 돈이 좀 넉넉해지면 여유를 얻게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날이 온다. 주급 10달러 또는 15달러를 받게 되었다. 그럴 때 햇빛과 오렌지의 땅 캘리포니아가 아니면 또 어디로 가랴?
그러나 막상 이곳에 도착하면 햇빛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 마련이다. 오렌지에도, 심지어 아보카도와 패션 푸르트에도 싫증이 난다. 재미있는 일도 없다.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할 길이 없다. 여가를 즐길 만한 정신적 여건을 갖추지도 못했고 자금력도 부족하고 신체적 여건도 쾌락을 추구할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따금씩 고작 아이오와로 소풍이나 가려고 그토록 오랫동안 노예처럼 일했나? 뭐 또 없을까? 그들은 베니스에 가서 밀려드는 파도를 구경한다. 대부분은 바다가 없는 곳에 살던 사람들이지만 파도는 하나만 보아도 모두 본 것과 다름없다. 글렌데일의 비행기도 마찬가지다. 어쩌다 한 번씩 비행기가 추락하기라도 하면 신문의 표현처럼 <불구덩이 속에서> 몰살당하는 승객들을 구경할 수 있다. 그러나 비행기는 좀처럼 추락하지 않는다.
권태는 점점 더 심해진다. 그들은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원한을 불태운다. 날이면 날마다 신문을 읽고 영화를 보러간다. 이 두 가지는 그들에게 폭행, 살인, 성범죄, 폭발 사고, 충돌 사고, 밀회 사건, 화재 사건, 혁명, 전쟁 따위를 가르쳐준다. 날마다 그런 정보를 주식으로 먹으면서 그들은 점점 더 약아진다. 태양도 웃음거리로 전락한다. 오렌지도 그들의 지친 입맛을 자극하지 못한다. 제아무리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도 그들의 느슨해진 몸과 마음을 팽팽하게 긴장시킬 수는 없다. 그들은 사기를 당하고 배신을 당했다. 죽도록 일하며 저금한 보람이 없다.(245~247p)

ㅡ 너새네이얼 웨스트, <메뚜기의 날> 中,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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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4/2

나이가 들면 아버지처럼 정원에서 신문이나 주간지를 읽을 거라 상상했지요. 뭐 재수가 없지 뭐! 미래나 앞날을 상상하면 항상 풍요로울 거라 생각하죠? 그런데 그저 다른 것들이 있을 뿐이죠. 그것도 기대하지 않았던 것들 말입니다. 내 자신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뿐 아니라 50년 후면 내 세대에 대한 기록조차 없을 겁니다. 박물관에 있는 쓸데없는 것들이 돼버리겠죠. 할 수 없지, 뭐. 가는 데까지 가보는 수 밖에요.(69p)

ㅡ 대니얼 클로즈, <윌슨> 中, 세미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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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3/28

“자네가 뉴욕에서 일주일에 15달러를 받는 일을 얻었다고 생각해보게. 여기서 우리와 함께 20주를 보냈으니 다 합치면 300달러를 잃은 셈이 되는군. 하지만 여기서는 하숙비도 없었으니 일주일에 7달러 정도를 아꼈다고 치면 총 140달러를 번 셈이야. 결국 자네는 고작 160달러만 손해 본 거네. 게다가 이를 모두 뽑는 비용으로 최소한 200달러가 든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은 40달러가 남는 장사지. 아, 또 있군. 내가 자네한테 새것은 20달러나 하고 지금 상태로도 최소한 15달러가 나가는 의치를 공짜로 주었다는 것을 잊지 말게. 이렇게 따지면 자네 이익은 55달러가 돼. 이 정도면 자네 나이에 20주를 날렸다 해도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닐 걸세.”(66p)

비참할 때는 동행이 있으면 나은 법이다.(131p)

ㅡ 너새네이얼 웨스트, <거금 100만 달러> 中,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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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와 재능과 노력만으로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다. 모든 것은 무위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내가 성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내 친구들이 다들 실패해야 한다는 거지. 혹은, 내가 똥을 싸면 남들이 죄다 맞을 정도로 높은 곳까지 올라가고 싶다는 거지.(91p)

 


“원시 사회 사람들에게 여론 조사를 했다면, 행복이란 불을 좀더 쉽게 피우는 거라는 답이 나왔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생각의 지평을 넓혔습니다. 이제 그런 종류의 행복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지식을 넓히는 것, 의식의 그물을 더 넓게 던지는 것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그는 살고 싶다기보다는 죽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는 내게 지구에서 가장 슬픈 사람처럼 보인다....
나는 그에게 완벽하게 공감한다.(102p)

 


정원에는 큼지막한 바위가 하나 있다. 당신이 그것을 위에서 응시하든 다른 어떤 각도에서 응시하든, 그것을 치워버릴 방법은 없다. 그리고 모든 바위는 똑같이 중요하고 똑같이 무의미하다. “당신과 당신의 사람들이 아무리 최면에 걸려 있다 한들, 당신도 그들의 전쟁에서, 우리의 전쟁에서 똑같이 죽을 것이다. 그 무슨 새로운 지혜를 무덤으로 가져가서 벌레들에게 해독시키겠는가?”(122p)

 


그녀와 그녀가 만난 모든 사람은 서로를 오해하며, 애들러는 그 오해를 칠흑같이 캄캄한 인식론적 어둠으로 묘사한다. 세 번째 부분은 그 어둠이 사회와 문명 전체에서도 역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간의 모든 상호 작용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다.(153~154p)

 


내가 머지않아 죽을 거라는 사실이 한 가지 좋은 점은 무엇에든 가짜로 흥미 있는 척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이봐, 나는 죽어가고 있다고! 조지프 헬러의 회고록 <때때로 Now and Then>를 보면, 마리오 푸조가 조지프의 병실에 찾아와서 부러움을 드러내면서 ‘자네는 남은 평생 그 진단을 사회적 변명으로 내세울 수 있겠군’하고 말하는 장면이 나와요.(205p)


 


ㅡ 데이비드 실즈,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中,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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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6




선택은 외부로부터 집단에 가해지는 메커니즘이 아니다. 선택은 과정이다. 특정 유전자의 빈도가 시간에 따라 높아짐으로써 더 잘 적응하게 되는 과정일 뿐이다. 생물학자들이 어떤 특질에 대해 선택이 작용한다고 말할 때는 그 특질이 그 과정을 겪는다는 말을 줄인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종들은 환경에 적응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적응은 의지가 개입되거나 의식적으로 추구하는 일이 아니다. 환경에 대한 적응은 그 종이 적절한 유전적 변이를 갖고 있을 때 필연적으로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171p)

 


그런데 명심할 점이 하나 있다. 다윈의 생각과는 달리, 종들은 자연의 빈 생태 지위를 채우겠다는 목적으로 생겨나는 게 아니다. 자연에 다양한 종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런 종들이 생겨나는 게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종 분화를 연구해 보면, 종들은 진화적으로 우연한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자연의 '무리'들은 생물 다양성 면에서 아주 중요하지만, 그것들이 다양성을 높이고자 진화한 것이 아닐뿐더러 균형 잡힌 생태계를 만들고자 진화한 것도 아니다. 그것들은 공간적으로 격리된 집단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화함으로써 생긴 유전적 장벽의 필연적 결과일 뿐이다. (250p)

 


인류 진화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질문을 받는다. 우리는 아직도 진화하고 있나요? 젖당 내성이나 아밀라아제 유전자 중복을 보면 틀림없이 지난 수천 년 동안에 우리에게 선택이 작용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떨까? 정확한 답은 내리기 어렵다. 선조들에게 가해졌던 선택압 중 많은 종류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게 사실이다. 선조들을 죽였던 많은 질병과 환경이 영양, 위생, 의학의 개선으로 말미암아 사라졌고, 자연 선택의 잠재적 원천이던 요인들이 제거되었다. 영국 유전학자 스티브 존스가 지적했듯이, 영국에서 태어난 아기가 생식 연령까지 생존할 확률이 5백 년 전에는 겨우 50퍼센트였지만 지금은 99퍼센트로 높아졌다. 인류의 진화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에는 선택에 의해 가차 없이 솎아졌을 듯한 개체들이 요즘은 의학의 개입으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이나 이빨이 나빠서 사냥이나 씹기에 서툴렀던 탓에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죽어 갔을까?(당시라면 나도 분명히 부적응자였을 것이다.)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항생제가 없다면 죽어 버렸을 감염을 겪었던가? 어쩌면 요즘 우리는 문화적 변화 때문에 여러모로 유전적 내리막길을 걷는지도 모른다. 한때 해로웠던 유전자가 더 이상 나쁘지 않아서(안경이나 솜씨 좋은 치과 의사로 '나쁜'유전자를 간단히 보완하니까) 인구에 계속 남는다는 뜻이다.

 거꾸로, 한때 유용했던 유전자가 문화적 변화 때문에 지금은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단것과 기름기를 좋아하는 우리의 성향은 선조들에게는 적응적 특질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런 음식이 귀중하고 희귀한 에너지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때 귀했던 음식들이 지금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물려받은 유전적 유산 때문에 충치와 비만과 심장 질환에 시달린다. 기름진 음식을 먹은 뒤 몸에 지방을 축적하는 성향도 과거에는 적응적 특질이었을 것이다. 식량 사정이 들쭉날쭉하여 풍요와 기근을 오가는 상황에서는 보릿고개에 대비하여 칼로리를 저장해 두는 개체들에게 선택적 이점이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304~305p)

 


진화의 교훈이 윤리, 역사, '가정생활' 영역으로 넘쳐흐르고야 말리라는 피어시의 생각은 지나친 걱정이다. 어떻게 진화에서 삶의 의미, 목적, 윤리를 끌어낸단 말인가? 불가능하다. 진화는 생명이 다양해진 과정과 패턴을 설명하는 이론이지, 삶의 의미를 말해 주는 거창한 철학적 체계가 아니다. 진화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에게는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그들은 우리의 기원에 관한 설명에서 우리의 존재의의와 행동 규범을 찾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314~315p)

 


진화는 도덕적이지도, 비도덕적이지도 않다. 진화는 존재할 뿐이고, 우리는 우리가 좋을대로 그것을 생각할 뿐이다. 나는 '우리가 진화를 이렇게 생각했으면 좋겠다'하는 두 가지 방향을 보여 주려 애썼다. 그것은 진화가 단순하다는 것, 또한 경이롭다는 것이다. 진화 연구는 우리의 행동을 구속하기는커녕 우리의 마음을 해방시킨다. 우리는 방대한 진화 계통수에서 하나의 잔가지에 불과할지도 모르나, 그렇다고는 해도 아주 특별한 동물이다. 자연 선택은 우리의 뇌를 정련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세상을 펼쳐주었다. 우리는 질병, 불편, 부단한 식량 탐색에 시달렸던 선조들의 삶을 그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개선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우리는 높은 산맥 위를 날고, 깊은 바닷속을 잠수하고, 심지어 다른 행성으로 여행한다. 교향곡, 시, 책을 지어 미학적 열정과 감정적 욕구를 채운다. 다른 어떤 종도 이것과 비교될 만한 일을 해낸 적이 없었다. (325p)

 



ㅡ 제리 코인, <지울 수 없는 흔적> 中,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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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보면 모든 생물체가 요행이랍니다, 놀랍도록 총명하신 군주여. 필연적인 형질이란 없습니다.

- 우리 스퀸치는 우리 행성에서 요행히도 특정 사건들이 특정 순서대로 발생한 결과입니다. 우리 선조가 살았던 독특한 환경 조건에서 번성했던 독특하고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들을 포함해서 말입니다.(145p)

 




ㅡ 제이 호슬러&케빈 캐넌,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진화> 中, 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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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읽은 소설 중 가장 잘 읽혔다. 그게 단점이냐 하면 그건 아니다. 그저 거창한 제목을 봤을 때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전개, 굳이 이렇게 길고도 긴 소설로 만들어야 했느냐는 의문이 들었을 뿐이다. 소설 보다는 하루키의 에세이와 여행기를 찾아봐야겠다. 기억에 남는 구절은 딱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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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7




지난번에 나이를 먹으니 밸런타인데이가 하나도 재미없다는 이야기를 썼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서 재미없어지는 건 밸런타인데이만이 아니다. 생일도 영 재미가 없어지고 만다. 자랑할 건 못 되지만, 최근의 내 생일에는 재미있는 일이 한 가지도 없었다.

 물론 선물을 받지 못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내 마누라는 선심 쓰기를 꽤 좋아하는 편이라 "선물 뭐가 좋아요? 뭐든 사줄게요!"라고 말하고, 또 대개는 실제로 사준다. 그러나 말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그녀가 사든 내가 사든 돈 나오는 구멍은 똑같은 것이다. 10만 엔짜리 카세트덱을 사다줘서 우아! 하고 당장은 기뻐 날뛰어도, 월말이 되면 "저기, 이번 달 생활비가 모자라는데" 할게 불 보듯 뻔하다. 그런 걸 생각하면 생일선물로 무얼 받든 기쁘지 않고 감동도 없다.(107~108p)

 


센다가야에 살던 시절, 집 근처 킬러 거리에 맛있기로 평판이 난 라면집이 두 곳 나란히 있었는데, 그 앞을 지나면 싫어하는 라면 냄새가 풀풀 풍기는 터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늘 고생스러웠다. 어느 친구는 그 앞을 지날 때마다 라면이 먹고 싶은 격렬한 욕망을 억누르느라 굉장히 고생한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라면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 하는 차이만으로도 인생살이의 양상이 꽤 달라지겠구나 싶은 기분이 든다.(228~229p)



ㅡ 무라카미 하루키,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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