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6/2

2020/10/9


독서모임이 있어서 다시 읽었는데 역시 좋다.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문체와 늘어짐 없는 내용 전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측면과 가독성까지 흠 잡을 곳이 없는 소설이다. 이 소설을 흥미 있게 읽었다면 작가의 다른 작품인 “나를 보내지마”도 좋아할 것 같다. 감상은 책을 읽으면서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던 구절들로 갈음한다.


즉 ‘품위’는 자신이 몸담은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집사의 능력과 결정적인 관계가 있다. 모자라는 집사들은 약간만 화나는 일이 있어도 사적인 실존을 위해 전문가로서의 실존을 포기하게 마련이다.(23p)


여러분을 둘러싼 세계가 어떻게 변해 가고 있는지 혹시 아십니까? 여러분의 그 고상한 직관으로 활약할 수 있었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 의도는 선량하지만 순진하기 짝이 없는 공론들이었죠.(132~133p)


익살이란 그 자체의 속성상, 예상되는 다양한 반응들을 제대로 따져 볼 새도 없이 입으로 내뱉게 되어 있다. 따라서 필요한 기술과 경험을 먼저 습득해 놓지 않으면 온갖 부적절한 말들을 내뱉게 될 위험이 엄청나게 크다.(165p)...


그러니 관심의 초점을 현재로 맞춰야 한다. 또한 과거에 이룬 것들을 가지고 자기 만족에 빠지지 않게 경계해야 한다. 지난 몇 달을 돌아볼 때 달링턴 홀의 상황이 예전과는 달라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175p)


“엄청나게 어리석은 짓이기도 하죠. 이제 그 처녀는 금방 실망하게 될 거예요. 인내하고 견뎠더라면 훌륭한 인생이 펼쳐졌을 텐데. 1~2년 지나면 어디 작은 저택에 총무 자리라도 알아봐 줄까 했었는데․․․․․․. 그건 너무 무리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스티븐스씨, 지난 몇 달 동안에 그 애가 얼마나 발전했었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지금 와서 그걸 송두리째 내던졌어요. 그 모든 걸 아무 소득 없이.”(195p)


그러나 이런저런 순간에 다르게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고 앉아 있어 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음만 심란하게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사실, ‘전환점’이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내가 그런 순간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돌이켜 볼 때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늘날 그런 상황들을 되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순간들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물론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와 켄턴 양의 관계에서 엉뚱한 것들을 솎아 낼 수 있는 날이, 달이, 해가, 끝없이 남아 있는 줄만 알았다. 이런저런 오해의 결과를 바로잡을 기회는 앞으로도 무한히 많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처럼 사소해 보이는 일들이 모든 꿈을 영원히 흩어 놓으리라고 생각할 근거가 전혀 없는 것 같았다.(221p)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이 나라의 중대한 결정들을 여기 이 사람과 그의 동류인 수백만 대중의 손에 맡겨야 한다고 고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과 같은 의회 제도에 묶여 있는데도 수많은 난제의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한다는 게 좀 놀랍지 않습니까? 뭐, 전쟁캠페인이라도 기획하신다면 ‘어머니 연맹 위원회’에 물어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245p)



ㅡ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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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5/12

유치하다고 말한 게 미안해서 그건 엄마 취향도 아니잖아, 했을 때 너의 엄마는 아니다, 엄만 이런 옷이 좋아, 입을 수 없었을 뿐이다, 했다.(17p)

아주 옛날부터 엄마 입에 붙은 말이잖아. 내가 묻고 싶어, 대체 엄마가 왜 오빠한테 미안한데?(88p)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공손한 말씨를 쓰다가도 아내에게만 오면 말투가 퉁명스럽게 변했다. 가끔은 이 지방 사람들만이 쓰는 욕설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당신은 공손한 말투는 아내에게 써서는 안된다고 어디 책에 나와 있는 것처럼 굴었다. 그랬다.(148p)

ㅡ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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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5/19

“그냥 일일 뿐이니까. 어떤 영화든 출연료를 준다는 것은 다 맡지. 그리고 최선을 다하는 거야. 물론 가끔 그다지 맘에 들지 않는 영화를 만날 수도 있지만 크게 손해 볼 일은 없잖아? 공짜로 일하는 게 아니니까. 나는 예술가들을 잘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영화 기법이니 방식이니 하는 것들도 잘 몰라. 그냥 서라는 곳에 서서 대사를 읊고는 끝나면 집에 가는 거지. 그냥 연기일 뿐이야.”(23p)

“싫지는 않아. 이렇게 오랫동안 해온 일에 대해서 그 정도만 말할 수 있으면 더 바랄 게 없는 거지.”(24p)

지난 2년 동안 스카이다이빙과 베이컨 축제, 회원 활동을 유지하기도 벅찰 정도로 어렵고 복잡한 인터넷 가상현실사회에 관한 기사들을 써온 버스터는 탈진한 끝에 글 쓰는 일을 포기하려 하고... 있었다. 이런 일들은 직접 경험해보면 애초에 품었던 기대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이런 일들이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인생을 바꿀 만한 굉장한 경험이라고 거짓 기사를 써야 했다. 사륜차를 타고 사막을 달리는 것은 그로서는 이제껏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이지만 골연 그가 꿈꾸던 일로 바뀌어야 했다. 하지만 운전대를 잡은 후 그는 사륜차 운전이 즐거움을 주는 행위보다는 전문적이고 복잡한 일이라는 것을 즉시 깨달았다. 참을성 있게 사륜차를 운전하는 법, 속도를 높이는 법을 설명하는 강사 옆에 앉아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를 운전하려 고생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차라리 집에 돌아가 사륜차를 몰고 다니며 해변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해결하는 탐정소설을 읽는 편이 훨씬 낫겠다고 생각했다. 자동차를 뒤집어엎고 난 후 운전연습장에서 쫓겨난 그는 바로 호텔로 돌아와 한 시간 만에 뚝딱 기사를 써 재낀 다음 마리화나를 피우다 곯아떨어졌다.(34~35p)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는 세상을 올려다보며 이젠 더 이상 내려갈 데 없이 견고한 맨바닥 위에 서 있다고 생각했던 애니의 발밑이 한 번 더 꺼져 내렸다.(140p)

이 집안의 누군가 한 사람은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비록 제대로 내린 결정은 요란한 폭발이나 비명, 절규, 심리적 상처 같은 것으로 끝나지 않아 좀 시시하더라도 말이다.(218~219p)

부모가 그들의 인생을 망쳐놓은 것도 사실이고 그들을 자신들의 집에 거두어준 것도 사실이었다.(223p)

“당신은 마치 모든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날이 올 것처럼 말을 하지만, 이제까지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고려해보면 그런 날이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건 별로 상관없다는 거예요.(350p)

정신적 외상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렇게 작용하는 것인가? 직접 외상을 겪었던 당사자들은 현장에 함께 있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그들의 경험에서 의미를 찾는 것을 보고 할 말을 잃게 된다.(368p)

ㅡ 케빈 윌슨, <펭씨네 가족> 中,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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