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5/11

권태가 생겨나게 되는 필수조건 중 하나는 어쩔 수 없이 상상하게 되는 지금보다 바람직한 상황과 현재 상황의 대조에 있다. 또한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필요가 없을 때에도 사람은 권태를 느끼게 된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적에게서 도망치는 일은 불쾌한 일이지, 분명 권태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 초인적인 담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사형을 당하는 순간 권태를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64p)

사회적 계층이 높을수록 자극의 추구는 점점 강렬해진다. 형편이 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니고, 가는 곳마다 춤도 추고 술도 마시며 즐거움을 만끽한다. 하지만 이들은 어떤 이유에선지 늘 새로운 곳에서 이런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한다.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사람들은 근무시간 중에는 권태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일을 할 필요가 없을 만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조금도 권태롭지 않은 삶을 이상으로 여긴다. 그것은 멋진 이상이며, 나도 그것을 비난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것은 다른 이상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이상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에 비해서 그런 이상을 달성하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점이다. 전날 밤의 즐거움이 크면 클수록 아침의 권태는 더 깊어지게 마련이다. 결국 중년 시절도 오고, 노년 시절도 올 것이다. 스무 살 때는 서른 살이 되면 인생은 끝날 거라고 생각한다. 쉰여덟 살이 된 나로서는 그런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 생각은 인생이라는 자본을 금전적인 자본처럼 소비하는 것으로 결코 현명하지 못하다.(67p)

나의 행동은 내가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며, 결국 내가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또한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인간은 아무리 큰 슬픔도 이겨낼 수 있다. 마치 인생의 행복을 끝장나게 할 것처럼 보이던 심각한 고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사그라져, 나중에는 그 고민이 얼마나 강렬했는지조차 거의 기억할 수 없게 된다.(81p)

명예욕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폴레옹을 부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카이사르를 부러워했고, 카이사르는 알렉산드로스를 부러워했으며, 알렉산드로스는 틀림없이 실재하지 않는 인물인 헤라클레스를 부러워했을 것이다. 어떤 일에 성공했다는 것만으로는 질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역사나 전설 속에는 늘 당신보다 더 성공한 사람이 있을 테니까 말이다. 자신에게 찾아오는 즐거움을 누리면서,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대부분 착각이겠지만 자신보다 훨씬 행복할 거라고 상상하는 사람들과 비교하는 버릇을 버려라. 이렇게 한다면 당신은 질투에서 벗어날 수 있다.(98p)

모든 사람이 마술처럼 상대방의 생각을 훤히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처음에는 거의 모든 친구 관계가 깨지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멋진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친구 한 명 없는 세상은 도저히 참고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서로를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숨기기 위한 눈속임을 할 필요 없이, 서로를 좋아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친구들이 단점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마음에 드는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친구들이 자신에 대해서 똑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자신을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아무런 결점도 없는 사람으로 봐주기를 바란다. 자신에게 결점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 이 당연한 사실을 지나치게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인다. 완벽한 인간이 되고 싶다는 희망을 버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심한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124p)

인간에 대해서 따뜻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소유하기를 원하며, 언제나 명확한 반응이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랑과는 전혀 다르다. 이런 사랑은 불행의 원천이 되는 경우가 많다. 행복을 가져오는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기를 좋아하고 개인들의 특성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랑이며, 만나는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거나 열광적인 찬사를 받아내려고 하는 대신, 그들의 관심과 기쁨의 폭을 넓혀주려고 하는 사랑이다. 이런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원천이 될 것이며, 그 대가로 친절을 되돌려받을 것이다.
중요한 관계든 사소한 관계든, 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는 그 사람 자신의 흥미와 사랑을 만족시켜준다. 그는 호의를 베풀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는 일도 거의 없지만, 설령 그런 일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남의 신경을 거슬러 격분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하는 이상한 인물조차도 점잖은 재밋거리일 뿐이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 같으면 오랫동안 애를 써도 손에 넣지 못한 성과도 굳이 애쓰지 않고 충분히 달성할 것이다.(169p)

사랑을 얻기 위해서 유달리 친절한 행동을 하는 데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방법으로는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 그렇게 친절을 베푸는 것은 그 동기가 상대방에게 간파되기 쉬운데, 인간의 본성은 사랑을 조르지 않는 사람에게 가장 쉽게 사랑을 베풀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친절한 행동의 대가로 사랑을 사려고 애쓰는 사람은 은혜를 모르는 인간의 배은망덕을 경험하면서 환멸에 빠지게 된다. 그는 자신이 대가를 치러서라도 얻으려고 애쓰는 사랑이 자신이 베푸는 물질적 혜택보다 훨씬 값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지만, 사실상 그의 행동은 이런 생각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191p)

자녀 양육도 큰 문제다. (...) 결국 이 여성은 엄청난 양의 자질구레한 일들에 치이게 되고, 얼마 가지 않아 모든 매력을 잃고 지성의 4분의 3을 잃게 된다. 그렇게 살면서도 매력과 지성을 잃지 않는 여자가 있다면, 퍽이나 운이 좋은 여자다.
꼭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할 뿐인데도 이런 여성들은 남편에게는 따분한 아내, 자녀에게는 귀찮은 존재가 되는 경우가 많다. 저녁이 되어 남편이 직장에서 돌아왔을 때, 낮에 겪었던 이런저런 문제들을 이야기하는 여자는 따분한 여자고,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여자는 얼빠진 여자다. 자녀들과의 관계를 보면, 이 여성은 자녀를 위해서 자신이 치러야 했던 여러 가지 희생들이 마음에 남아 있어서 지나친 보상을 요구하게 되기 쉽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질구레한 일에 신경을 쓰는 것이 몸에 배어 쩨쩨하고 까다롭게 굴게 된다. 이 여성이 겪어야 하는 부당한 대접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가족들 옆에서 충실하게 의무를 수행한 대가로 가족의 사랑을 잃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 여성이 가족을 소홀히 여기고 쾌활하고 매력적인 생활을 유지했다면 아마 가족들은 이 여성을 사랑했을 것이다.(204~205p)

사소한 문제들이 생겼을 때 참을성 있게 버티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이런 사소한 문제들은 자칫 그대로 놓아두면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기차를 놓쳤다고 씩씩거리고, 저녁 식사가 맛이 없다고 노발대발하고, 연기를 뿜는 굴뚝을 보고 절망에 빠진다. 세탁소에 맡긴 옷이 분실되면, 전체 경제체제에 대해 앙갚음을 하겠다고 별러댄다. 만일 이들이 사소한 문제에다가 퍼붓는 정력을 좀 더 현명하게 사용한다면, 제국을 세우고 다시 무너뜨릴 수도 있을 것이다. (...) 개인적인 일의 실패나, 불행한 결혼 생활의 고통을 참아낼 수 있게 하는 것은 비개인적이며 원대한 희망에 집중하는 태도다. 이런 태도를 가지면 기차를 놓치거나 진창 속에 우산을 떨어뜨렸을 때도 참을성 있게 버틸 수 있다. 이것은 성격이 까다로운 사람이 성격을 고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걱정의 지배에서 벗어난 사람은 늘 짜증을 내던 때에 비해서 인생이 훨씬 즐겁다는 것을 알아채게 될 것이다. 예전 같으면 비명을 지르고 싶게 만들던 친구들의 개인적 특성들도 이제는 그저 재미있게 여겨질 것이다. 아무개가 티에라델푸에고 섬의 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삼백마흔일곱 번째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는 이번에 들으면 몇 번째나 듣는 걸까 헤아리며 재미있어 할 뿐, 쓸데없이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해서 말을 가로채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른 아침에 기차를 타려고 서둘러 가고 있을 때 구두끈이 끊어지는 일이 있어도, 그는 몇 마디 투덜거리고 나서는 우주의 광대한 역사에 비추어보면 이런 일쯤은 너무나 사소하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청혼을 하고 있는 중요한 순간에 성가신 이웃이 찾아와 훼방을 놓더라도, 그는 이 정도의 재난은 아담 말고는 모든 인류가 겪어온 것이니 자신이라고 문제가 없겠느냐고 생각한다.(255~257p)

ㅡ 버트런드 러셀, <행복의 정복> 中, 사회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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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5/3

산시로는 이런 경우 대답을 잘 못한다. 순간의 기회가 지나가고 머리가 냉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 과거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면 좋았을걸, 그렇게 했으면 좋았을걸, 하고 후회한다. 그렇다고 이렇게 후회할 것을 예상하고 억지로 임기응변식의 대답을 아주 자연스럽고 자신 있게 지껄일 만큼 경박하지는 않다. 그래서 그저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얼간이 같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155~156p)

산시로는 원래부터 이런 사람이다. 용무가 있어 다른 사람과 만날 약속을 했을 때는 그쪽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 하는 것만 상상한다. 자신이 이런 표정으로, 이런 일을, 이런 목소리로 말해야지 하는 것은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더구나 만나고 나면 나중에 반드시 ...그것을 떠올리며 생각한다. 그리고 후회한다.(220p)

다들 딱한 사람들뿐인 것 같지만 실제로 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사자뿐이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사실을 좋아하지만 사실에 수반되는 정조는 잘라버리는 습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잘라버려야 할 정도로 세상이 각박하니 어쩔 수가 없다. 그 증거로 신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신문의 사회면 기사는 열에 아홉이 비극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비극을 비극으로 체험할 여유가 없다. 다만 사실에 대한 보도로 읽을 뿐이다. 자기가 보는 신문에는 사망자 수십 명이라는 제목으로 하루에 변사한 사람의 연령, 호적, 사인을 6호 활자로 각각 한 줄씩 싣는 일이 있다. 간단명료함의 극치다. (...) 당사자에게는 비극에 가까운 사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다지 절실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고 각오해야 할 것이다.(267~268p)

ㅡ 나쓰메 소세키, <산시로> 中,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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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4/20

나는 더 이상 아버지가 그립지 않다. 보통은 그렇다. 나도 그리워하고 싶다. 그리워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시간이 모든 것을 치유해준다는 말은 진실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사실이며,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조심하지 않으면, 시간은 우리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가져가버리고, 그 자리에 이해만을 채워 넣는다. 시간은 기계이다. 시간은 고통을 경험으로 바꾸어놓는다. 순수한 정보를 가져다 편집하고, 보다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번역해놓는다. 우리 삶의 사건들은 기억이라고 불리는 다른 물질로 변형되며, 이 과정에서 손실되는 것들은 결코 다시 되돌릴 수 없다. 다시는 편집되지 않은, 가공되기 전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로 인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는 선택권이 없다.(88p)

나는 잊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느낌이라는 것을. 앞으로 나아가는 일, 절벽에서 아래의 암흑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일, 놀랍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갑자기 착륙하는 일. 그리고 이어지는 매 순간순간마다 그런 똑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는 일. 매 순간마다 추락한 다음 다시 기어 올라와 똑같은 상황을 반복해서 겪는 일. 나는 이 윙윙대고 흐릿한 풍경, 잠망경을 통해 보는 것 같은 의식, 내 자신의 삶을 누리는 것의 마찰력과 견인력, 그 삶의 소모를 거의 그리워했었나보다. 나는 현재라는 이름의, 혼란스럽고 즉흥적이지만 과도하게 제작된 매 순간의 무대에 대해서, 만들어졌다 부서지는, 매번 스스로를 분해하는, 시간의 매 순간마다 부서진 후 다시 만들어지는 그 무대가 가져다주는 위험과 즐거움에 대해 거의 잊어버렸던 것 같다.(101~102p)

어쩌면 내가 원한 것이 바로 이런 상황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사람을, 모든 존재를 나로부터 밀어내는 것. 나는 언제나 이런 일을 저질러버린다. 진짜로 선택을 할 만한 기회가 오는 경우는 너무도 드물다. 보통은 이 세계의 줄거리가 나를 앞으로 가도록 밀어낸다. 그러나 가끔 중요한 갈림길, 시간의 나뭇가지가 갈라지는 지점에서, 내가 자유의지를 행사할 수 있는 때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언제나 이런 결과가 나와버린다.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 내가 보호해야 할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만다. 나는 자기 타임머신을 망가뜨리는 고객들이나 돈을 구걸하는 지나가는 섹스봇 따위에게는 친절하지만,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일에서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행동한다. 엄마, 필, 아버지에게도.(147p)

ㅡ 찰스 유, <SF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 中,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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