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5/21

 

 

 

다 읽긴 했으나 크게 재미를 못 느꼈다. 중간쯤 등장하는 노인과의 이야기라도 없었으면 중도 포기했을지도. 폴 오스터를 많이 읽은 누군가의 말로는 그의 작품 중 이게 제일 재미없다고 하는데 작가의 다른 작품에 크게 궁금증이 일지 않아서 아마도 읽지 않을 것 같다.

 

 

빅터 삼촌은 술 취하지 않고 잔소리를 하는 도라는 견뎌 낼 수 있었지만, 그녀가 술에 취해 있을 때면 내가 느끼기엔 본래의 모습이 부자연스럽게 왜곡된, 잔인하고 참을성 없는 태도를 보였다. 그랬기에 좋은 면과 나쁜 면이 끊임없이 서로 전쟁을 벌였다. 도라가 좋을 때는 빅터 삼촌이 안 좋았고, 빅터 삼촌이 좋을 때는 도라가 안 좋았다. 좋은 도라 때문에 안 좋은 외삼촌이 생겨났고, 좋은 외삼촌은 오직 도라가 안 좋을 때에만 되돌아왔다.(18p)

 

 

어떤 의미에서는 그 느낌이 내가 경험했던 것의 실체를 바꾸었다. 나는 절벽 가장자리에서 뛰어내렸지만 떨어져 죽기 직전에 뭔가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떨어져 내리는 두려움이 줄어들지는 않았더라도 그 두려움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새로운 조망을 얻은 것이었다. 나는 가장자리에서 뛰어내렸지만 마지막 순간에 뭔가가 팔을 뻗쳐 허공에 걸린 나를 붙잡아 주었다. 나는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믿는다. 사랑이야말로 추락을 멈출 수 있는, 중력의 법칙을 부정할 만큼 강력한 단 한 가지 것이다.(76-77p)

 

 

뉴욕 사람들이 길거리를 걸을 때면 그들의 눈에는 특별한 번득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연스럽고 어쩌면 필연적인 무관심이 떠오른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어떻게 보이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터무니없는 의상, 기괴한 머리 모양, 음란한 문구가 박힌 티셔츠ㅡ그런 것에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겉모습 밑에서 우리가 행동하는 방식을 지극히 중요해서 이상한 몸짓은 무엇이건 당장 위협으로 간주된다. 소리를 내어 혼잣말을 중얼거리거나 몸의 어느 부분을 긁거나 낯선 사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거나 하는 규칙 위반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적대적이고 때로는 난폭한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85p)

 

 

대화는 누군가와 함께 공 던지기 놀이를 하는 것이나 같다. 쓸 만한 상대방은 공이 글러브 안으로 곧장 들어오도록 던짐으로써 여간해서는 놓치지 않게 하고 그가 받은 쪽일 때에는 자기에게로 던져진 모든 공을, 아무리 서툴게 잘못 던져진 것일지라도, 능숙하게 다 잡아 낸다. 키티가 바로 그랬다. 그녀는 계속해서 공이 내 글러브 안으로 곧장 들어오도록 던졌고, 내가 그녀에게 공을 던질 때는 포구 범위를 한참 벗어나는 경우라 하더라도 모든 공을 다 잡아 냈다.

(...)

그뿐만이 아니라 그녀는 기술이 너무도 뛰어나서 내가 공을 잘못 던질 때마다 일부러 그랬던 것인 양, 순전히 게임을 좀더 재미있게 만들려는 의도로 그랬던 것인 양 느끼게 해주었다. 그녀 덕분에 나는 나 자신을 실제의 나보다 더 낫게 보았고 그 때문에 자신감이 생겨서 다음에는 그녀에게 좀 더 받기 쉬운 공을 던져 줄 수 있었다. 달리 말해서 나는 그녀에게라기보다 나 자신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던 것인데, 그 즐거움은 내가 오랫동안 경험해 보았던 어떤 즐거움보다도 더 컸다.(136-137p)

 

 

나는 태평한 무관심으로부터 강렬한 놀라움의 단계를 거쳤고, 내 설명은 눈에 보이는 것에서 가능한 뉘앙스를 모두 잡아내려고 열심히 애쓰면서, 아무것도 빼먹지 않기 위해 세세한 사항들을 미친 듯이 그러모아 뒤죽박죽을 만들면서, 지나치게 정확해졌다. 내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은 기관총을 쏘아 대듯 딱딱 끊기며 연달아 터져 나왔다. 에핑은 끊임없이 내게 말을 좀더 천천히 하라며 내 말을 따라잡을 수 없다고 투덜거렸다. 문제는 내 말투보다 전반적인 접근 방식에 있었다. 나는 너무도 많은 말들을 그러모으고 있어서 눈앞에 보이는 것을 나타내기보다는 사실상 그것을 흐리는, 미묘한 의미와 기하학적인 추상의 사태 밑에 묻어 버리는 셈이었다. 명심해 두어야 할 중요한 사항은 에핑의 눈이 멀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할 일은 긴 설명으로 그를 지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사물을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결국 말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말이 할 일은 그가 사물들을 가능한 한 빨리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말이 입 밖에 나오는 순간 사라지게 해야 되었다. 내가 말하는 문장들을 단순화하고 본질적인 것으로부터 부수적인 것을 분리할 줄 알기 위해서는 몇 주일 동안의 힘든 노력이 필요했다. 나는 어떤 사물 주위로 더 많은 여유를 남겨 두면 남겨 둘수록 그 결과가 더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럼으로써 에핑이 자기 스스로 결정적인 일, 즉 몇 가지 암시를 기초로 해서 이미지를 구성하고 내가 그에게 설명해 주고 있는 사물을 향해 자신의 마음이 여행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했었기 때문이다.(179-180p)

 

 

우리는 누군가의 말소리를 듣자마자 마음속으로 말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게 된다. 그리고 불과 몇 초 내에 온갖 종류의 조용한 정보들이 흡수된다. 성별, 대략적인 나이, 사회 계층, 출생지, 심지어는 그 사람의 피부색까지도. 우리가 볼 수 있다면, 눈을 뜨고 마음속으로 그린 이미지가 실제의 인물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알아보고 싶은 것이 자연스러운 충동이다. 그 두 가지는 비교적 근접할 때가 아닐 때보다 더 많지만, 때로는 전혀 틀리는 경우도 있다. 트럭 운전사처럼 얘기하는 대학 교수, 늙은 여자로 밝혀지는 젊은 여자, 백인으로 밝혀지는 흑인,(199p)

 

 

결과, 그게 세상 돌아가는 이치야. 좋건 싫건 간에 언제나 결과가 있기 마련이지.(222p)

 

 

바버가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충분한 시간은 결코 없었다. 그는 우리의 문제를 풀기 위해 미래에 기대를 걸었지만 그 미래는 결코 오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잘못이었다고는 하기 어렵겠지만, 어쨌든 그는 대가를 치렀고 나 또한 그와 함께 대가를 치렀다. 결과가 어찌 되었건, 나는 그가 달리 어떻게 행동할 수 있었을지 알지 못한다. 아무도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를 알 수 없었고, 누구도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어둡고 끔찍한 일들을 상상할 수 없었다.(342p)

 

 

빅터 삼촌이 바버를 피하는 대신 그의 두 번째 편지에 답장을 했더라면 나는 1959년에 내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을 받아들이기가 조금이라도 더 쉬워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모두 놓쳐 버린 관계, 잘못된 시기, 어둠 속에서 생겨난 실수였다. 우리는 언제나 잘못된 시간에 옳은 곳에, 옳은 시간에 잘못된 곳에 있었다. 언제나 서로를 놓쳤고, 언제나 간발의 차이로 전체적인 일을 알지 못했다. 우리의 관계는 결국 그렇게, 잃어버린 기회의 연속이 되고 말았다. 그 이야기의 조각들은 처음부터 모두 거기에 있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어떻게 이어 붙여야 할지 몰랐다.(359p)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차이나타운으로 돌아왔지만 사정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았다. 우리 두 사람 모두 지나간 일은 잊어버릴 수 있다고 자신을 설득했음에도, 예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을 때는 그 삶이 더 이상 거기에 없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403-404p)

 

 

나는 에핑이 살던 동굴을 찾아내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맨 마지막까지 그것이 미리 정해진 결론이었다) 그 동굴을 찾아보는 행위, 다른 모든 행동을 말살시키는 행위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가방에는 1만 3천 달러가 넘는 돈이 들어 있었는데, 그것은 내가 얼마든지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다는, 모든 가능성이 다 사라질 때까지 계속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436p)

 

 

 

ㅡ 폴 오스터, <달의 궁전> 中,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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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5/16

 

 

최근 소설을 많이 읽고 있는데 고르는 족족 다 재미있네.

 

 

 

어째서 영국의 시골 마을은 종종 살인 사건의 무대가 될까? 내가 전부터 이걸 궁금해하다 해답을 깨달은 것은 치체스터 인근 어느 마을의 조그만 시골집을 임대하는 실수를 저질렀을 때였다. 찰스는 반대했지만 나는 주말에 가끔 거기로 피신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의 판단이 옳았다. 런던으로 돌아오고 싶어서 좀이 쑤셨다. 내가 친구를 한 명 사귈 때마다 적이 세 명 생겼고 주차, 교회 종소리, 반려견의 배설물, 화분을 매다는 것과 같은 문제들이 숨 막힐 정도로 일상을 지배했다. 진짜다. 혼란스러운 도시에서는 금세 잊힐 감정들이 시골에서는 광장을 중심으로 곪아터지고 사람들을 정신병과 폭력의 세계로 몰고 간다. 추리 소설 작가에게는 선물이다. 그리고 연결성이라는 장점도 있다. 도시는 익명의 공간이지만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는 서로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용의자와, 그들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훨씬 쉽게 창조할 수 있다.(70-71p)

 

 

1주일 전까지만 해도 내 주변에서는 비정상적이고 끔찍한 죽음을 맞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우리 부모님과 앨런 말고는 죽은 사람 자체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신기한 일이다. 책과 텔레비전에서는 수많은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그게 없으면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다.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문제가 있는 지역에서 살지 않는 한 그런 사건을 접할 일이 거의 없다. 살인 추리 소설의 수요가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우리는 어디에서 매력을 느낄까? 범행일까 아니면 해법일까? 우리의 일상이 너무나 안전하고 안락하기 때문에 유혈 참사에 원초적인 욕구를 느끼는 걸까? 나는 온두라스의 산 페드로 술라(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살인의 도시다)에서 앨런의 매출액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아야겠다고 기억에 담았다. 어쩌면 그곳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전혀 읽지 않을 수도 있었다.(88p)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책이 팔리길 바란다면 진실을 1백 퍼센트 공개하면 안 될 것이다. 나는 여전히 크라우치 엔드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고 출판계가 그립다. 안드레아스와 나 사이에서 돈 걱정이 끊이지 않는 것도 스트레스다. 인생이 예술을 모방할지 몰라도ㅡ대개는 거기에 못 미친다.(284p)

 

 

 

ㅡ 앤서니 호로비츠, <맥파이 살인 사건> 中,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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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5/13

 

저자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질 정도로 재미있게 읽었다. 각 작품이 다루는 시대가 모두 과거가 아니었음에도 재미있는 옛날 옛적 얘기를 읽는 느낌이었다. 동아시아권의 독자와 그 외 지역의 독자들이 책을 읽고 느끼는 바에 차이가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틸리는 단순히 알고 싶은 것만 가르쳐 주지 않아요. 뭘 생각해야 할지까지 가르쳐 준단 말이에요.(44p)

 

 

아뇨, 센틸리언은 고삐 풀린 알고리즘이에요. 사람들이 원하는 것처럼 보이는 걸 점점 더 많이 제공할 뿐이죠. 그리고 우리는,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들은, 바로 그 점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생각해요. 센틸리언은 우리를 조그만 거품 속에 가뒀어요. 그 속에서 우리가 보고 듣는 것들은 전부 우리 자신의 메아리예요. 그래서 점점 더 기존의 믿음에 집착하고, 자신의 성향을 점점 더 강화해 가는 거죠. 우린 질문하기를 멈추고 뭐든 틸리가 판단하는 대로 따르고 있어요.(56p)

 

 

중립은 지키면서 정보만 제공하는 사업 같은 건 없습니다. 사용자가 틸리한테 선거 후보자의 이름을 물어본다고 칩시다. 그럼 틸리는 그 사람을 후보자의 공식 웹사이트로 안내해야 할까요, 아니면 후보자를 비판하는 웹사이트로 안내해야 할까요? 만약 사용자가 틸리에게 ‘톈안먼’에 관해 물어보면 수백 년에 걸친 톈안먼 광장의 역사를 들려줘야 할까요, 아니면 1989년 6월 4일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만 가르쳐 주면 될까요? 검색창의 ‘너만 믿을게’ 버튼은 우리가 막중한 책임감을 안고 매우 진지하게 생각하는 기능입니다.

센틸리언이 하는 일은 정보를 조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취사선택과 유도, 고유한 주관이 필요하지요.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고 당신에게 진실인 것은, 남들에게는 중요하지도 않고 진실도 아닙니다. 그건 판단과 순위 매기기에 달렸습니다.

(...)

이렇게 전자적으로 확장된 자아 없이는 살 수가 없게 된 이상, 당신들이 센틸리언을 무너뜨려 봤자 금세 다른 대체재가 등장해서 우리 자리를 차지할 겁니다. 이미 늦었다, 이겁니다. 거인은 이미 오래 전에 램프에서 탈출했어요. 처칠이 이런 말을 했다지요. ‘건물을 만드는 것은 우리이지만, 나중에는 그 건물이 우리를 만든다.’우리는 생각하기를 돕는 기계를 만들었지만 이제는 그 기계가 우리를 대신해서 생각을 한다, 이겁니다.

(...)

피치 못할 운명과 마주쳤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적응하는 것뿐입니다.(69-73p)

 

 

멍한 기분으로 아버지의 시신을 내리는 동안, 나는 아버지와 아버지가 평생 사냥한 요괴들이 서로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양쪽 다 이미 사라져서 돌아오지 않은 낡은 요술의 힘으로 연명하는 존재였고, 그 요술 없이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알지 못했으니까.(93-94p)

 

 

나는 염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좋아 보이네라는 말은 목구멍으로 삼켰다. 염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피곤해 보였고, 수척해 보였고, 차가워 보였다. 게다가 아찔한 향수 냄새 때문에 코가 다 찡했다.

하지만 염에게 모진 낙인을 찍고 싶지는 않았다. 낙인찍는 것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지 않아도 되는 이들의 특권이므로.(97p)

 

 

음악을 사랑하는 알레시아인은 가늘고 단단한 주둥이로 자국이 남기 쉬운 표면, 이를테면 밀랍이나 진흙이 얇게 덮인 금속판을 긁어서 글을 쓴다(부유한 알레시아인은 코 끝에 귀슴속으로 만든 촉을 달기도 한다.). 글쓴이는 글을 쓰는 동안 생각을 소리 내어 말해서 주둥이가 위아래로 떨리게 하는데, 이로써 기록재의 표면에 홈이 파인다.

이렇게 쓴 책을 읽기 위해 알레시아인은 자기 주둥이를 그 홈에 대고 죽 훑어 나간다. 예민한 주둥이는 물결 모양 홈을 따라 진동을 일으키고, 알레시아인의 두개골 속에 있는 빈 공간이 그 소리를 증폭시킨다. 이렇게 하여 글쓴이의 목소리가 재현된다.

(...)

그러나 알레시아의 책이 지닌 미덕에는 대가가 따른다. 독서라는 행위를 하려면 부드럽고 연략한 기록재의 표면과 물리적으로 접촉해야 하는 탓에 읽을 때마다 본문이 손상되고, 원본의 일부 요소는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되고 만다. 내구성이 더 강한 소재로 만든 사본은 당연히 글쓴이의 목소리가 지닌 섬세함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에 기피된다.

자신들의 문자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알레시아인은 가장 소중한 원고들을 금단의 도서관에 엄중히 보관하는데, 이곳의 출입 허가를 받은 이는 거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알레시아인 작가가 쓴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작품들은 거의 읽히지 않는다. 다만 특별한 의식에서 낭독된 원본을 필경사들이 듣고 해석해서 재구성한 새 책을 통해 알려질 뿐이다.(196-197p)

 

 

루스에게는 부탁할 곳도 의지할 곳도 기댈 곳도 없다. 오로지 자신뿐, 성난, 겁에 질린, 부들부들 떠는 자신뿐이다. 루스는 발가벗겨진 채 혼자이다. 루스 자신은 항상 알고 있었듯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

이것이야말로 정상적인(regular) 세상의 모습이다. 명쾌함도, 구원도 없다. 모든 합리성의 끝에는 그저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과 품고 살아가야 할, 그러면서 견뎌야 할 믿음뿐이다.(305p)

 

 

우리가 현재에 존재하는 과거의 목소리에 어떤 역할을 부여할지는, 만약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렸습니다.(487p)

 

 

한 명의 중국인으로서 저는 개인화된 역사관을 철저히 신봉했던 에번에게 찬성하지 않습니다. 에번이 하려 했던 것처럼 모든 희생자의 개별 사연을 이야기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식으로는 결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거대한 고통 앞에서 우리의 공감 능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저는 에번의 접근법이 결국에는 감상주의와 선별적 기억에 그칠 위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침략 때문에 중국에서는 160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희생당했습니다. 그 중 절대다수는 신문 일면을 차지하고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핑팡 같은 살육 공장이나 난징 같은 학살 현장에서 희생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수없이 많은 조용한 마을과 도시와 외딴 벽지에서 죽어간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 중국인들을 학살당하고 강간당하고 또 학살당했습니다. 그들의 비명은 차가운 바람 속에 흩어져 사라졌고, 결국에는 이름조차 지워져 잊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기억될 자격은 있습니다.

모든 잔학 행위의 희생자들이 안네 프랑크처럼 유창한 대변인을 얻기란 불가능하거니와, 저는 역사 전체를 그러한 서사의 집합으로 축소하는 것 역시 옳지 않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에번은 풀 수 없는 방대한 문제들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느니 풀 수 있는 문제에 먼저 매달리는 것이 미국인이라고 제게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527-528p)

 

 

어떠한 국가도 어떠한 역사학자도, 진실의 모든 측면을 완전히 아우르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만들어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진실에서 동떨어졌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지구는 완전한 구체도 아니고 평평한 원반도 아니지만, 진실에 훨씬 더 가까운 것은 구체 모형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들보다 더 진실에 가까우며, 우리는 언제나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가장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완전하고 완벽한 지식을 결코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은 악을 심판하고 악에 맞서야 할 우리의 도덕적 의무를 면제해 주지 않습니다.(538p)

 

 

역사라는 급류 속에서 태어나는 이상 우리가 할 일은 헤엄치는 것 아니면 가라앉는 것뿐, 운이 없다고 불평하는 건 우리 몫이 아니니까요.(555p)

 

 

 

ㅡ 켄 리우, <종이 동물원> 中,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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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

 

 

이곳이 처음이시죠? 글쎄, 그러니까 전혀 이상할 게 없어요. 여기 지붕 구조물에 햇볕이 내리쬐면 뜨거워진 나무가 실내 공기를 아주 후텁지근하고 답답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여기는 사물실로 쓰기에는 별로 적합하지 않아요. 물론 그것 말고는 몇 가지 장점도 있어요. 하지만 공기에 관해 말하자면, 소송 당사자들의 왕래가 많은 날은 거의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인데, 거의 매일이 그런 날이지요. 게다가 또 이곳에는 여러 세탁물을 말리려고 널어놓는데, 세입자들에게 그걸 전혀 못 하게 할 수도 없는 일이거든요. 속이 좀 메스꺼워도 이젠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게 되니까요. 하지만 결국에는 모두 이런 공기에 익숙해져요. 두세번쯤 오시게 되면 더 이상 이곳에서 짓누르는 느낌은 받지 않을 거예요. 이제 좀 나아지셨어요?(93p)

 

 

(...) 그래서 첫 청원서를 작성할 때 무엇을 겨냥하고 써야 할지 보통 모르거나 정확히 알 수가 없으며, 따라서 첫 청원서가 소송에 뭔가 의미 있는 내용을 담는 경우는 사실 우연에 불과하다. 정말 실효성이 있는 논거를 갖춘 청원서는, 피고인에 대한 심문 과정에서 개개의 공소 사실과 그 근거 제시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거나 추측이 가능할 때 비로소 작성이 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변호는 당연히 매우 불리하고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나 이것도 다 의도된 것이다. 변호는 사실 법률에 의해 허용되지 않으며, 묵인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당 법조문이 적어도 묵인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분분하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법원의 인정을 받는 공인 변호사라는 것은 없으며, 법정에서 변호사라고 등장하는 자들은 사실 모두 무면허 변호사에 불과한 셈이다.

(...)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오직 정직한 개인적 관계, 특히 고위 관리들과의 연줄인데, 물론 여기서는 하급 법원의 고위 관리들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를 통해서만 소송의 진행에 영향을 미칠 수가 있는데, 처음에는 그 영향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나중에는 갈수록 더 뚜렷해진다.

(...)

법원의 서열과 직급 체계는 끝이 없어서 그 세계에 정통한 사람들조차 제대로 가늠하기 어렵다. 그런데 법정에서의 재판 과정은 일반적으로 하급 관리들에게도 비밀이며, 따라서 이들은 자신들이 다루는 사건의 향후 추이를 완전히 파악할 수가 없고, 따라서 재판 사건은 대부분 그것이 어디서 온 것인지도 모른 채 그들의 시야에 나타났다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계속 진행된다는 것이다. 그런즉 개별적인 소송 단계들, 최종적인 결정, 그리고 그런 결정의 근거들을 연구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 같은 것이 하급 관리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142-147p)

 

 

이 거대한 법원 조직은 말하자면 영원한 부유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만일 누군가가 자신의 위치에서 독자적으로 무언가를 바꿔버리면, 그것은 자기 발아래에 있는 지반을 없애는 행위와 같아서 자신만 추락하게 될 뿐이고, 그 거대한 조직은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사소한 장애는 다른 곳에서 손쉽게 보완하여 이전과 다름없는 상태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조직은 전보다 더 단호하고, 더 주의 깊고, 더 엄격하고, 더 악의적이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

여러 가지 면에서 관리들은 어린아이 같다고 한다. 관리들은 종종 악의 없는 일에도 마음 상하기 일쑤인데, 유감스럽게도 K의 태도는 물론 그 범주에도 속하지 않지만, 아무튼 쉽게 마음이 상해서 가까운 친구들하고도 말을 안하고 그 친구들을 우연히 만나도 외면하며 가능한 한 모든 일에서 친구들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다가도 의외로, 또 별다른 이유도 없이, 워낙 절망적인 상황에서 상대방이 아무렇게나 던져보는 대수롭지도 않은 농담에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마음을 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을 상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동시에 쉬운 일이기도 한데, 거기에 무슨 원칙 같은 건 없다. 가끔은, 여기서 성공적으로 일을 해나가는 방법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그저 평범한 삶을 사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다고 했다. 물론 누구나 그렇듯이 우울할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성취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 때, 결말이 좋은 소송은 하나같이 처음부터 특별히 손을 쓰지 않았어도 좋은 결과가 나오도록 예정돼 있던 것들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다. 반면에 다른 모든 소송들은 백방으로 쫓아다니고 온갖 애를 다 써서 작가는 해도 겉보기에는 그런대로 성공을 거둔 것 같아 기뻐했지만 결국 패소해버린 것 같은 생각이 들 때, 역시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확실해 보이는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없게 된다.(148-150p)

 

 

소송에 대해 이전에 품었던 경멸감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그가 세상에 혼자 사는 것이라면 소송 같은 건 가볍게 무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경우라면 소송 같은 건 아예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숙부가 벌써 그를 변호사에게 끌고 왔으며, 집안과 가족들도 고려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그의 직위 또한 소송 진행 상황과 완전히 무관할 수는 없었다. 조심성 없게도 그 스스로가 몇 명의 지인들 앞에서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일종의 만족감을 느끼며 소송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고,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도 소송에 대해 알게 되었다. 뷔르스트너 양과의 관계도 소송에 따라 흔들리는 것 같았다. 요컨대 그에게는 소송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는 소송의 한복판에 서서 자신을 방어해야 했다. 그가 지쳐 있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154-155p)

 

 

“그런데 이 두번째 무죄 판결도 최종적인 건 아니겠군요.” K가 냉담하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물론 아닙니다.” 화가가 말했다. “두번째 죄 판결에 이어 세번째 체포가 따르고, 세번째 무죄 판결 다음에는 네번째 체포가 이어지며 계속 그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외견상의 무죄 판결이라는 개념에는 바로 그런 것들이 포함됩니다.” K는 잠시 침묵했다. “외견상의 무죄 판결이 당신한테는 별로 유리해 보이지 않는군요.” 화가가 말했다. “아마도 당신에게는 판결 지연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판결 지연이란 소송이 가장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도록 잡아두는 걸 말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피고인과 조력자, 이중에서도 특히 조력자가 법원과 끊임없이 사적인 접촉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경우에는 외견상의 무죄 판결을 얻어낼 때만큼 노력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주의력이 훨씬 더 필요합니다. 소송에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하고, 일정한 간격으로, 그리고 특별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담당 판사를 찾아가 어떤 식으로든 호감을 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담당 판사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할 때는 잘 아는 판사를 통해 영향을 주어야 하며, 그렇다고 해서 직접 상담에 나서는 것도 아예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 점들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소송이 그 첫 단계를 넘어서는 일이 없다는 것을 자신 있게 가정할 수 있습니다. 소송이 끝나는 건 아니지만, 피고인은 유죄 판결을 받을 염려가 없기 때문에 자유로운 신분이 된 거나 다름없습니다. 외견상의 무죄 판결에 비해 판결 지연은 피고인의 미래가 덜 불안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피고인은 갑작스러운 체포로 놀라게 되는 일도 없고, 또한 가령 여타 상황이 아주 좋지 않을 때 하필 소송 관련 일이 겹쳐 외견상의 무죄 판결을 얻어내기 위해 겪어야 할 긴장이나 흥분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물론 판결 지연도 피고인의 입장에서 보면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단점들이 있습니다. 피고인이 결코 자유로운 몸이 아니라는 점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외견상의 무죄 판결의 경우에도 피고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운 몸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다른 종류의 단점입니다. 소송은 적어도 그럴듯한 이유가 없는 한 가만히 멈춰 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부에서 볼 때 소송에서 무슨 일이든지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이런저런 지시들이 내려져야 하고, 피고인은 심문을 받아야 하며, 심리가 행해지고, 그 밖의 또 다른 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다시 말해 소송은 인위적으로 제한해놓은 작은 범위 내에서 계속 맴돌아야 합니다.(197-198p)

 

 

 

ㅡ 프란츠 카프카, <소송>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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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5/5

 

 

루이즈의 얘기를 기다립니다 ㅎㅎ

 

 

 

대화는 언제나 똑같은 식이었다. 처음에는 정치, 그다음에는 경제와 사업 얘기를 하다가, 항상 여자 얘기로 끝났다. 그리고 모든 주제의 공통 인수는 물론 돈이었다. 정치 얘기는 결국 돈 좀 버는 게 가능하냐는 거였고, 경제 얘기는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느냐, 사업 얘기는 어떤 방법으로 돈을 벌 수 있느냐, 그리고 여자 얘기는 그걸 어떻게 쓰느냐 하는 거였다. 이들의 모임은 참전 용사들의 술자리와 공작새들의 경연장과도 비슷했으니, 다들 한껏 과시하고 떠벌리느라 정신이 없었다.(133p)

 

 

 

ㅡ 피에르 르메트르, <화재의 색> 中,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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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4/25

 

일련의 일들 때문에 후반부 200p 정도는 몇 달이 지나서 읽었다.

 

 

 

이 알베르라는 친구는 너무도 선의로 가득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에두아르는 그를 책망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약간의 앙금이 있었다. 결국 그를 구하려다가 지금 이 꼴이 돼버린 것 아닌가. 전적으로 자의로 한 일이 맞긴 하지만, 글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을, 이 억울한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고, 모두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상황을 책임져야 했다.(120p)

 

 

제대병들은 항상 이렇다니까! 끊임없이 전쟁 이야기를 하면서 뻐겨 대고, 언제나 모든 사람들을 훈계하려 들지. 이제는 그놈의 영웅들이 슬슬 지겨워진다니까! 진짜 영웅들은 전사했어! 미안하지만 그 사람들이야말로 영웅들, 진짜 영웅들이라고! 그리고 말이야, 어떤 친구가 참호에서 겪은 일들에 대해 너무 떠들어 대면 의심해 보는 게 좋아. 그중 대부분은 전쟁 내내 사무실에서 시간을 보냈을 거니까.(201p)

 

 

그는 항상 누군가의 우아함을 그가 얼마나 멋진 구두를 신었나를 보고 판단해 왔기 때문이다. 낡은 정장이나 외투는 용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의 멋은 그의 구두로 평가되는 법, 이것만큼은 확실하게 해야 했다. 그가 산 구두는 밝은 갈색 가죽으로 되어 있었고, 이 구두를 신는 것만이 이 소동 가운데서 느낀 유일한 기쁨이었다.(300p)

 

 

처음에는 계획의 성공으로 인한 엄청난 기쁨이었던 것이 곧ㅡ두 남자에게 서로 다른 이유로ㅡ어떤 기이한 차분함으로 변했다. 이루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지만, 한 걸음 물러서서 보니 기대했던 것만큼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게 느껴지는 어떤 중요한 과업을 끝냈을 때 사람들이 느끼는 그런 차분함 말이다.(512p)

 

 

궁핍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어디에나 따라다니면서 삶을 직조하고, 삶을 완전히 결정해 버린다. 그것은 매순간 당신의 귀에 대고 속삭이고, 당신이 무엇을 하든 더러운 액체처럼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이다. 궁핍은 오히려 극빈보다도 나쁜 것인데, 왜냐면 폐허 속에서도 위대함을 간직할 수 있는 반면, 부족함은 당신을 쩨쩨함과 치사함과 비열함과 인색함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신을 비천하게 만드는 바, 왜냐면 그것 앞에서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게, 자긍심과 존엄을 유지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536p)

 

 

 

ㅡ 피에르 르메트르, <오르부아르> 中,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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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11

 

배수아의 다른 역본도 있으니 차후에 비교해서 찾아보기 쉽도록 텍스트 번호로 남겨둔다.

 

 

 

모든 바다를 항해한 자는 자신 안의 지루함을 항해했을 뿐이다.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 많은 바다를 건넜다. 땅 위에 존재하는 것보다 더 많은 산들을 보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도시들을 둘러봤고,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거대한 간들이 나의 눈길 아래로 장엄하게 흘러갔다. 내가 만일 여행을 떠난다면, 떠나지 않고도 보았던 것들의 조악한 복사본을 볼 뿐이리라.

(...)

모든 풍경과 모든 집이 나의 상상력을 재료로 신 안에서 창조된 나였으므로, 나는 모든 것을 보았다.(138)

 

 

불행히도 지성의 병은 감정의 병보다 덜 아프고, 불행히도 감정의 병은 육체의 병보다 덜 아프다. ‘불행히도’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인간의 존엄성이 그 반대를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풀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혀 느끼는 지적인 고뇌는 사랑, 질투, 그리움 등의 감정만큼 우리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 강렬한 육체적 공포처럼 우리를 압도하지도 않고, 분노나 야심처럼 우리를 변화시키지도 않는다. 그런가 하면 영혼을 파괴하는 어떤 아픔도 치통이나 복통, 출산의 진통(상상하건대)만큼 생생할 수는 없는 법이다.(140)

 

 

나는 이루어질 리 만무하고 특별한 일을 꿈꾸는 사람들보다 접근 가능하고 합리적이고 이루어질 법한 일을 꿈꾸는 이들이 더 딱하다. 원대한 꿈을 꾸는 사람들은 좀 미쳐 있기 때문에 자기가 꿈꾸는 것을 믿으며 행복해한다. 아니면 그들은 단순한 몽상가라 영혼의 음악 같은 공상이 별 의미 없이 그들을 달래준다. 하지만 가능한 것을 꿈꾸는 이들은 진짜 환멸을 느낄 가능성이 다분하다. 로마 황제가 될 수 없는 건 크게 실망할 일이 아니지만, 매일 아침 아홉시경 거리에서 마주치는 재봉사 아가씨에게 한 번도 말을 걸지 못하는 일은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 불가능한 꿈은 처음부터 우리의 접근을 막지만, 가능한 꿈은 우리 삶에 개입하고 그 꿈을 이루려는 방향으로 삶을 진행시킨다. 불가능한 꿈은 단독적이고 독립적인 반면, 가능한 꿈은 삶에서 일어나는 우연적인 일들에 의존하게 된다.

그런 이유로 나는 불가능한 풍경과 결코 가보지 못할 넓은 평원을 사랑한다. 특히 과거의 역사 시대에 열광하는데, 거기에서 애초에 내가 이룰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꿈꾸며 잠든다.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대한 꿈은 나를 잠에서 깨운다.(143)

 

 

자신을 알려는 일 자체가 오류다. “너 자신을 알라”는 신탁은 헤라클레스의 임무보다 어려운 과제이며,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보다 더 난해하다. 의식적으로 자신을 모르는 것만이 길이다. 그리고 성심성의껏 자신을 모르는 것이 역설의 실질적인 과제다. 우리가 스스로를 모르는 방식에 대해 참을성을 갖고 설득력 있게 분석하기, 우리의 의식에 대한 무의식을 의식적으로 기록하기, 자율적인 그림자에 대한 형이상학, 환멸의 황혼을 노래한 시.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위대한 인간의 위대하고 가치 있는 특징이다.

하지만 무언가는 항상 놓치기 마련이고 어떤 분석은 항상 뒤죽박죽이 되어버리며 진실은, 심지어 그것이 가짜일 때도, 언제나 다음 모퉁이 너머에 있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우리를 지치게 하는 인생보다 더 우리를 지치게 만들고, 늘 우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지식과 명상보다 더 우리를 피곤하게 만든다.(149p)

 

 

영혼의 비극 중 하나는, 완성한 작품이 조금도 훌륭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다. 그 작품이 영혼이 이룰 수 있는 최선이었음을 깨달을 때 비극은 더욱 극대화된다. 하지만 영혼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고문이자 모욕은 글을 쓰기 시작할 때 자기 글이 불완전하고 부족할거라는 사실을 미리 아는 것, 그리고 쓰는 동안에 글이 불완전하고 결함투성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글은 만족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쓸 글 역시 결코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철학적으로 알고, 몸으로 알고, 글라디올러스 꽃 사이로 희미하게 엿보여서 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늘 포기한다고 선언하면서도 실은 온전히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와 산문에 끌리는 마음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러니 벌칙을 수행하듯 글을 쓸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장 큰 벌은 내가 쓰는 글이 완전히 쓸모없고, 결함이 많고,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시를 썼다. 엉터리 시를 많이 썼는데 그때는 완벽한 줄 알았다. 그때 느꼈던, 완벽한 작품을 썼다는 몽상에 불과한 기쁨을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내가 쓰는 글은 그때보다 훨씬 낫다. 심지어 다른 훌륭한 작가들이 쓸 수 있는 것보다 더 낫다. 하지만 왠지 모르지만, 내가 쓸 수 있을 듯한 글이나 또는 써야 할 것 같은 글 보다는 한없이 뒤떨어진다. 그래서 내 어린 시절에 썼던 형편없는 시가 마치 죽은 아이, 죽은 자식, 사라져버린 마지막 희망인 양 그 위로 눈물을 떨어뜨린다.(231)

 

 

우리에 대한 타인의 이해는 참으로 복잡한 오해들로 구성된다.

이해받기를 원하는 자는 결국 타인에게 이해받는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해주기 바라는 자들은 항상 복잡하고 난해해서 결국 그들은 이해받는 행복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이들이 쉽게 이해하는 단순한 사람들에게는 타인에게 이해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없다.(328)

 

 

타인이여, 우리 모두는 서로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적 있는가? 우리가 서로에 대해 얼마나 모르는지 깊이 생각해본 적 있는가? 우리는 마주보고 있어도 서로를 보지 못한다. 서로의 말을 듣고 있지만 각자 자기 안에 있는 말을 들을 뿐이다.

다른 사람의 말은 우리 청력의 실수이고, 우리 이해력의 난파일 뿐이다. 타인의 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이 생생한 관능을 표현한 말에서 우리는 죽음을 듣는다. 다른 이들이 심오한 뜻은 조금도 담지 않고 입술에서 떨어지게 놔둔 말에서 관능과 삶을 읽는다.(329)

 

 

가끔 나는 다른 이들의 눈에는 내가 어떤 부류의 사람으로 비칠지 궁금해하는 무의미한 상상에 빠진다. 내 목소리는 어떻게 들리는지, 그들의 무의식적이 기억 속에 나는 어떤 인상으로 남았는지, 내 몸짓과 말, 눈에 보이는 나의 인생은 다른 이들의 해석의 망막에 어떻게 새겨지는지 궁금하다. 나는 나를 밖에서 본 적이 없다. 우리로부터 우리 자신을 밖으로 데려갈 수 있는 거울은 없기에, 우리는 밖에서 보이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없다. 외부에서 보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다른 영혼, 다르게 바라보고 생각하는 방식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스크린에 나오는 영화배우가 되거나 내 높은 목소리를 녹음한다고 해도 여전히 밖에서 보이는 내 모습은 알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나를 밖에서 기록하더라도,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나는 나에 대한 나의 의식이라는 나만의 공간,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 안에 항상 머물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같은지는 잘 모르겠다. 인생의 과학은 본질적으로 인간을 자신으로부터 멀리 분리하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분리하고, 그래서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떨어져나간 상태로 삶에 참여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자신 속에 깊이 빠져서 오로지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는 미개함에 완전히 항복하고 사는 걸까. 그런 상태로 사람들은 꿀벌이나 개미처럼, 꿀벌들이 어떤 인간 사회보다 잘 조직된 사회를 형성하는 기적이나, 복잡하기만 하고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의사소통을 훨씬 능가하며 개미들이 그 작은 안테나로 소통하는 기적 따위에 의지해 살아가는지도 모른다.(338)

 

 

뭔가를 상상하면, 나는 그것을 본다. 내가 여행을 정말 떠난다면 그 이상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느끼기 위해서 장소를 옮겨야 한다면 그것은 상상력이 극도로 빈곤한 탓이다.

“여기 소박한 엔테풀의 길을 포함해 모든 길은 당신을 세상의 끝으로 데려갈 것.” 하지만 세상을 한 바퀴 돌고 나서 도착하는 끝은 결국 처음 출발했던 엔테풀이다. 사실 세상의 끝이란 세상의 시작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대한 우리의 개념일 뿐이다. 풍경이 풍경이 되는 것은 우리 안에서다. 그러므로 내가 풍경을 상상하면, 풍경을 만들어낸다. 만들어내면, 존재한다. 존재하면, 그것을 다른 풍경을 보듯이 볼 수 있다. 그러니 왜 여행을 가겠는가? 마드리드, 베를린, 페르시아, 중국, 그리고 남극과 북극, 어디서든 나는 나 자신 속에, 나만의 고유한 유형의 감정 안에 있을 뿐이 아닌가?

삶이란 우리가 삶으로 만드는 것이다. 여행이란 결국 여행자 자신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존재다.(451)

 

 

시골에 있고 싶어하는 이유는 도시에 있는 것을 좋아하기 위해서다. 그렇지 않더라도 도시에 있는 걸 좋아하지만, 시골에 있을 때는 도시가 두 배로 더 좋아진다.(459)

 

 

추상적인 생각이든 추상적인 감정이든 추상적인 세상에 계속 머물러 있다보면, 우리의 감정과 의지와는 반대로, 현실 세계의 일들이 유령처럼 느껴지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우리 자신의 성격에 따라 마땅히 더 민감하게 느껴야 하는 일마저도 그렇게 된다.

아무리 친한 친구, 정말 친한 친구라고 하더라도 그가 아프거나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 느낌은 애매하고 불분명하고 흐릿할 뿐이라서 부끄러울 정도다. 그런 일은 직접 목격해야만 어떤 감정이 살아날 것이다. 너무 상상에 의지해 살다보니, 결국 상상하는 능력을 잃었고, 특히 현실에 대한 상상력을 잃고 말았다.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할 수 없는 것들로 정신적인 삶을 영위한 결과, 우리는 존재할 수 있는 것을 성찰하는 능력을 잃었다.

오늘 나는 오래된 친구 하나가 수술하러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만난 지 오래됐지만 그리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감정으로 늘 기억하는 친구다. 그런데 그 소식이 내게 불러일으킨 확실하고 선명하고 유일한 감정은, 그를 위문하러 병원에 가야 할 터이니 성가시다는 심정과, 가기 싫지만 가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는 난처함이었다.

그것뿐이었다····· 그림자를 오래 상대하다보니 생각하고 느끼고 나로 존재하는 가운데 나 자신이 그림자가 되어버렸다. 내가 한 번도 되어보지 못한 보통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실체가 됐다. 정말 그것만을 느꼈다. 곧 수술을 받을 친구의 소식을 들었는데도 적절한 안타까움이 느껴지지 않는다. 수술을 받을 예정인 모든 사람들과 이 세상의 고통받고 동정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느껴 마땅한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는다. 나는 다만 안타까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468)

 

 

ㅡ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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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

 

한 권 남았다.

 

 

 

타라타노 교수는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껴안고 키스하려 했다.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몸을 이리저리 빼냈지만 그에게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타라타노 교수는 좀처럼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교수의 배가 내 몸에 닿는 느낌과 와인 향기 섞인 그의 숨결이 지워지지 않는다. 당시만 해도 그렇게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나이 든 남자가 그런 부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내 예비 시어머니의 친한 친구가 아닌가. 복도로 나서자 그는 황급히 내게 용서를 구했다. 와인을 많이 마신 탓이라고 하고는 서둘러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79-80p)

 

동서를 가리지 않고 어떻게 하나 같이 변명이 똑같은지?

 

 

나는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교육을 많이 받았고 어떤 면에서는 너무 무지했다. 나 자신을 통제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다른 이들의 사상과 사건을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느라 열정 없는 인생을 사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게다가 결혼과 안정적인 삶이 너무 빨리 시작될 예정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그곳에서 이미 몰락해버린 기존의 질서 체계 속에 너무 깊이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85p)

 

 

“사내란 사랑에 빠져 정신이 나가 있을 때와 네 몸에 들어와 있을 때를 빼고는 항상 겉에서 맴돌기만 하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일단 사랑이 식으면 그를 원했다는 기억만으로도 불쾌해지지. 물론 한때 그는 나를 좋아했고 나도 그를 좋아했지만 그것뿐이야. 나는 하루에도 좋아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생기는걸. 너는 그렇지 않아? 하지만 그 감정도 잠시일 뿐 결국에는 사라지고 말지. 남는 것은 아이뿐이야. 내 몸의 일부거든. 애 아빠는 타인이었으니 타인으로 되돌아간 거고. 그의 이름조차 예전처럼 느껴지지 않아. 예전에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니노라는 이름을 생각하고 생각했어. 마법의 주문처럼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그 이름을 부르면 기분이 우울해져.”(108p)

 

 

“정말 그런 곳에서 일하고 있었던 거야?”

릴라는 파스콸레의 몸이 닿자 짜증이 나서 팔을 빼내고는 발끈했다.

“그러는 너는 어떻게 일하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일하고 있는데?”

파스콸레도 엔초도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둘 다 힘겹게 일하고 있을 터였다. 적어도 엔초만큼은 릴라처럼 집안일을 감당하면서 직장에서 모멸감과 피로에 시달리는 여공들을 보아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둘은 공장에서 릴라가 처한 상황 때문에 심란해하고 있었다. 릴라가 그런 환경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사내들에게는 뭐든 다 숨겨야 해. 차라리 몰랐으면 하는 거야.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여인이 일하는 곳에서는 자기가 일하는 직장 사장의 횡포가 기적처럼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싶은 거야.’(162-163p)

 

 

“사내라면 듣고 싶어 하지 않고 여자라면 알고는 있지만 말하기 두려워하는 그런 내용 말이야.(238p)

 

 

“임신이란 말이야, 타인의 생명이 네 배에 달라붙는 거야. 고통 끝에 겨우 뱃속에서 떼어냈다 싶을 테지만 그것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너를 더 구속할 거야. 태어나자마자 널 밧줄처럼 옭아맬 거야. 아이를 낳으면 너는 더 이상 네 인생의 주인이 아닌 거야.”

(...)

“스스로 자신의 고통을 만들어낸 느낌이야.”(323p)

 

 

나는 내게 조금이라도 호감을 나타내는 모든 남자에게 끌렸다.

상대가 키가 크든 작든, 말랐든 뚱뚱하든, 잘생겼든 못생겼든, 나이 든 사람이든, 독신이든 유부남이든 상관없었다. 내 의견을 칭찬하거나 내 책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하거나 내 지성에 감탄하기라도 하면 나는 호감을 담뿍 담은 눈빛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353p)

 

 

나는 먼저 내 자신을 이해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 여성성을 탐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나는 너무 과하게 애를 썼다. 남성의 능력을 가지기 위해 노력했다. 뭐든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뭐든 다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실 정치나 투쟁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남자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을 뿐이었다. 남자들보다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수준의 기준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비이성적인 남성의 이성? 유행하는 표현을 외우려고 나는 얼마나 노력했던가.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내 사고 방식과 언어는 지금까지 내가 받은 교육에 의해 형성되었다. 남보다 뛰어나게 되려고 나는 나 자신과 어떤 비밀스런 협상을 맺었던가. 배우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는데 이제 와서 배운 것 가운데 무엇을 잊으려 애써야 하나. 게다가 나는 릴라와 닮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가지고 살아왔다.

나는 자꾸만 내 자신을 릴라와 일치시키려 했다. 릴라에게서 분리되려고 할 때마다 불구가 되는 것 같았다. 릴라가 없으면 생각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릴라 없이는 내 생각에 확신이 생기지 않았고 어떠한 그림도 그려지지 않았다. 나는 릴라와 분리된 내 모습을 받아들여야 했다. 해답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397-398p)

 

 

“너 그거 알아? 너는 언제나 ‘사실’ ‘진심’이라는 말을 참 자주하지. 말할 때도 그렇고 글을 쓸 때도 그래. 아니면 ‘갑자기’라는 말도 참 자주해. 그런데 요즘 세상에 ‘진심’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갑자기’ 일어나는 일은 또 얼마나 돼? 세상일은 다 사기야.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법이야. 이런 것은 네가 나보다 잘 알잖아. 나는 이제 어떤 일도 ‘진심’으로 하지 않아. 그리고 모든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갑작스러운’일은 멍청이들에게나 일어나는 거라고.”(450-451p)

 

 

“내 생각에는 남자가 여자를 가르치려 든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 같아. 그때 나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나를 변화시키려는 프랑코의 욕망이 사실은 그가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증거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어. 그는 내가 다른 사람이기를 원했던 거야.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단순히 여자를 원한 게 아니었어. 자기가 만약 여자라면 되고 싶은 가장 이상적인 모습의 여성을 원했던 거야. 프랑코에게 나는 자신을 여성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어. 여성성을 취해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였고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였던 거야. 자신이 남성으로서뿐 아니라 여성으로서도 완벽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존재였던 거야. 지금은 내가 자신의 일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거야.”(504p)

 

 

지금은 외모를 가꾸는 데 재미를 붙였지만 가끔은 몸단장(그렇다. 나는 그런 표현을 썼다)하는 행위 자체가 우스꽝스럽다고 느꼈다.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남성을 위해 치장해야 할 때면 그런 느낌이 더 강했다. 얼마든지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시간에 변장에 가까운 치장을 하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과 노고를 들여야 한다니. 내게 어울리는 색상과 어울리지 않는 색상을 찾고 날씬해 보이는 옷과 뚱뚱해 보이는 옷을 구분하고 예뻐 보이는 머리 모양과 그렇지 않은 머리 모양을 찾는 과정에는 시간이 오래 걸렸고 값비싼 준비 과정도 필요했다. 남자들의 성욕을 자극하기 위해 잘 차려진 식탁이나 군침 도는 요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준비를 하고도 아름다워 보이지 않을까봐 불안했다. 감정과 체취와 결함을 가진 육신의 천박함을 능숙하게 숨기지 못했을까봐 두려웠다.(525p)

 

 

 

ㅡ 엘레나 페란테,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中, 한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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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내 순례의 목적은 늘 다른 순례자다.(191p)

 

이 구절은 반복적으로 등장함.

 

 

어떤 모델이 거식증으로 사망했다. 그러자 당국은 지나치게 마른 모델들이 런웨이에 오르는 것을 금지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테러리스트에 관한 기사도 있었다. 테러가 또다시 실패했다는 내용이었다. TNT 폭탄과 기폭 장치가 어느 아파트에서 발견되었다. 방향감각을 잃은 고래들이 해변으로 몰려와서 떼죽음을 당했다는 기사도 읽었다. 경찰이 인터넷을 통해 소아 성애자들의 연결 고리를 추적하고 있다는 기사. 내일은 더 추워질 거라는 일기예보. 그리고 이동성은 현실이 된다는 광고.

이 신문은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조작되거나 거짓투성이일 터였다. 그녀가 읽은 모든 문장이 하나같이 견딜 수 없고, 가슴이 아리게 하다니.(377p)

 

 

“인생이란 우리가 오래전에 이미 통제 능력을 상실한 혐오스러운 습관 같은 거야. 담배 끊어 본 적 있어?”라는 문장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렇다. 그녀는 담배를 끊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녹록지 않은 경험이었다.(421p)

 

 

“지속적인 고통과 점진적인 마비 증세가 갈수록 심해지는 그런 상태를 한번 상상해 봐. 그래도 뭐, 어떻게든 고통을 참을 수는 있었을 거야. 이런 생각이 끊임없이 날 괴롭히지만 않았어도. 지금 겪는 이 고통 말고 다른 방법은 없으며 앞으로도 이 고통에 대해 아무런 보상도 없으리라는 생각, 매 시각 고통은 점점 더 심해질 것이며 그렇게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다는 생각, 열 개의 통증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 환각으로 지어진 지옥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 지옥의 여정 속에서 인도해 주는 안내자가 한 사람도 없고 손잡아 줄 이 또한 아무도 없다는 생각, 아무도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는 건 실은 별다른 이유가 없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 어떤 형벌도 포상도 없으리라는 그런 생각 말이야”(437-438p)

 

이 책에 가장 좋았던 구절. 인생이 이런 것이겠지.

 

 

한 남자가 대륙을 오가는 대형 비행기 안에서 불편하게 잠을 자다 깨어난다. 그리고 얼굴을 창문에 갖다 댄다. 밑으로 광활한 검은 대륙이 보인다. 그 컴컴한 심연 속에서 군데군데 희미한 빛줄기가 뻗어 나온다. 거기에 대도시들이 있다. 화면에서 펼쳐지고 있는 지도 덕분에 그는 여기가 러시아 대륙의 시베리아 중부 어디쯤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내는 담요를 끌어 올려 덮고는 다시 잠이 든다.

아래쪽, 흑점 가운데 하나에서 또 한 명의 사내가 나무로 지은 집에서 걸어 나온다. 그리고 내일 날씨를 확인화기 위해 두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만약 지구의 중심으로부터 일직선의 광선을 하늘을 향해 끌어당긴다고 가정해 보면, 몇 초 동안 비행기 안에 있는 사내와 지상에 서 있는 사내, 이 두 사람은 그 반경의 일직선상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찰나의 시간 동안 그들의 눈빛 또한 동일선상에 놓일 것이며, 그들의 동공도 직선으로 서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두 사내는 서로 수직적으로 이웃이다. 1만 1000미터란 결국 무엇인가. 그것은 10킬로미터보다 조금 더 먼 거리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은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사내의 마을에서 인근 마을까지의 거리보다 훨씬 가까운 수치다. 또한 그것은 대도시에서 서로 떨어져 있는 거주 단지들 사이의 거리보다도 훨씬 가까운 수치이기도 하다.(495-496p)

 

거리감각에 대한 신선한 접근이었다.

 

 

“어쩌면 과거를 보는 게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뒤로 돌리는 거죠. 마치 파논티콘처럼. 아니면 친애하는 여러분, 과거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간주하는 겁니다. 단지 다른 차원으로 이주해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저 우리의 시각과 관점을 바꾸기만 하면 될지도 모릅니다. 모든 걸 곁눈질로 보는 거죠. 미래나 과거가 무한하고 끝없는 것이라면 실제로 ‘언젠가’라는 시점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요. 시간의 다양한 순간이 마치 홑이불처럼 공간 속에 매달려 있거니, 아니면 여러 개의 화면 속에 특정한 순간이 동시에 투영되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움직일 수 없는 순간, 거대한 메타-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그저 깡충깡충 뛰어다닐 뿐입니다.”

(...)

“실제로는 그 어떤 움직임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논의 역설에 등장하는 거북이처럼, 우리는 어느 곳으로도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 있는 것입니다. 그저 순간의 내부를 간신히 맴돌고 있을 뿐이죠, 그러므로 애초에 목적지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공간에도 똑같은 논리를 적용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무한대에서 똑같이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어딘가’라는 표현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장소도, 어떤 날도 고정된 것은 없습니다.”(576-577p)

 

이건 다시 읽어봐도 아리송하다. 무슨 말이죠?

 

 

교수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피의 강물이 흘러넘쳐 붉은 대양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바닷물은 점차 다른 지역으로 범람했다. 먼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유럽의 한 평원을 집어삼켰다. 도시와 다리, 그리고 그의 조상들이 대대손손 어렵게 지은 댐이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바다는 갈대숲에 감춰져 있던 그들의 집 문턱까지 침범했고, 과감하게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돌바닥에 깔린 붉은 양탄자와 토요일마다 문질러 닦던 부엌의 나무 바닥을 휩쓸더니, 마지막으로 벽난로의 불을 꺼뜨리고 찬장과 테이블까지 덮쳤다. 그다음으로는 기차역과 공항, 언젠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교수가 고향을 떠난 바로 그곳을 집어삼켜 버렸다. 또한 그가 여행을 다녔던 도시들과 거리들이 전부 물에 잠겼다. 그가 임대해서 지내던 방, 싸구려 호텔, 끼니를 해결하던 음식점도 모조리 사라졌다. 붉게 빛나는 그 수면은 그가 너무도 사랑하던 도서관의 첫 번째 서가를 공격했다. 책장들이 물에 젖어 퉁퉁 불었다. 표지에 그의 이름이 적혀 있는 책들도 마찬가지였다. 검붉은 혓바닥이 문자들을 핥았고 검게 인쇄된 활자를 지워 없앴다. 자녀들이 졸업장을 받은 학교의 계단과 마룻바닥도, 교수 임명을 받기 위해 자랑스럽게 달려가던 도로도 전부 붉은 바다에 가라앉아 버렸다. 그와 카렌이 함께 누워 늙고 노쇠한 육신을 처음으로 결합했던 침대 시트도 붉게 물들었다. 붉은빛의 그 끈끈한 점성 액체는 그가 자신의 신용 카드와 비행기 표, 손자들의 사진을 넣어 둔 지갑의 칸막이도 영원히 봉인해 버렸다. 물살은 기차역과 철로, 공항과 활주로를 모조리 덮쳤고, 이제는 그 어떤 비행기도, 그 어떤 기차도 거기서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해수면은 끈질기게 상승했고, 말과 개념과 추억을 모두 집어 삼켰다. 가로등 불빛이 모조리 꺼지고 전구들이 터져 버렸다. 전선은 끊어지고 네트워크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죽은 거미줄이 되어 버렸으며 전화기는 먹통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느리고 무한한 대양이 마침내 병원 근처까지 왔다.(587-588P)

 

 

ㅡ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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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

 

 

하숙인들 중 누구도, 이곳 사람들 중 하나가 떠들어 대는 불행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일부러 애써 확인해 보려 하지 않았다. 모두가 서로에 대해 무관심과 경계심이 뒤섞인 감정을 갖고 있었다. 이때 경계심은 각자의 상황에서 오는 것이었다. 자신이 타인의 고통을 달래 줄 능력이 없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알고 있었고, 모두가 괴롭게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동정하는 것도 이제는 할 만큼 했던 것이다. 노부부들처럼, 그들은 더 이상 서로 할 이야기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들 사이에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기계적인 삶의 관계, 기름 안 친 톱니바퀴 같은 움직임뿐이었다. 그들 모두 길 가다 장님을 만난다 해도 그냥 지나칠 것이 틀림없으며, 남의 불행 이야기를 들어도 아무런 느낌이 없고, 주검을 보아도 비참한 인생고 문제가 해결되었구나 싶으니, 제아무리 끔찍한 임종의 고통 앞에서도 냉정할 수 있었다.(27p)

 

 

실제로 보케 부인은 고양이보다도 더 의심이 많은 사람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녀도, 가까운 사람은 경계하면서 처음 만나는 사람에겐 속까지 훤히 다 내보이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희한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많이 볼 수 있는 이런 정신 상태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함께 사는 사람들에게 자기 영혼의 텅텅 빈 모습을 보여 주고 나서 더 이상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게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그들은 자기가 측근의 엄격한 판단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렇게 되어 마땅하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평소 못 받아 본 아첨이나 칭찬을 아쉬워하는 마음을 걷잡을 수 없거나, 아니면 실제로는 지니지 못한 좋은 품성을 지닌 듯 보이고 싶은 마음을 견디지 못해, 그들은 낯선 사람들의 평가나 공감을 급작스레 얻어 내고자 한다. 설령 언젠가 그들 또한 실망할 우려가 있다 해도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친구나 친지들에게 좋은 일을 결코 하지 않으면서, 천성적으로 자기 이익만 챙기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런 선행은 억지로 부과된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그런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들에게 잘해 줌으로써 자존심을 충족시킨다. 애정의 원이 자신에게 가까울수록 그들은 덜 사랑하고, 그 원이 자신에게서 먼 반경을 그릴수록 더욱 친절하게 군다.(33p)

 

 

“자, 실비, 와서 나 외출복 입는 것 좀 도와줘. 전신 코르셋을 입어야겠어.”

“아, 아주머니, 전신 코르셋 말이에요? 방금 저녁 드셨는데····· 안돼요. 코르셋을 꽉 조여 줄 사람이 필요하다면 누구 딴 사람을 찾아보세요. 하필 왜 아주머니를 돌아가시게 하는 사람이 저여야 하나요. 목숨이 달린 일인데 신중하지 못하시네요”(217p)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방심하고 있다가 뜬금없이 터졌네.

 

 

ㅡ 오노레 드 발자크, <고리오 영감> 中,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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