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4/17

 

 

 

읽음. 내 취향은 아니었다. 책이 처음 출간된 시점으로부터 시간이 많이 흐르기도 했으니 크게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이런 내용에 충격을 받기에는 낙태를 다룬 영화나 책을 이미 너무 많이 보거나 읽었나보다. 세월이나 단순한 열정도 읽어볼 것 같긴 한데ㅡ과연?ㅡ뭐 그냥 이런 식의 오토픽션으로 자신의 경험을 적은 게 전부라면 솔직히 크게 마음이 동하지 않네. 작가가 쓴 작품이 전반적으로 분량이 짧은 건 마음에 든다.

 

 

ㅡ 아니 에르노, <사건>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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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18

 

이 책에서 진행될 논지가 1장에 요약정리 되어 있으므로 바쁜 사람은 1장만 읽어도 도움이 될 듯.

탐욕스러운 일과 온콜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기.

 

 

 

그렇다면 드디어 직장에서 [노골적인 유형의 차별이 거의 없어지고] 성평등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 것처럼 보이고 전에 없이 많은 전문 직종이 여성에게 열려 있는 오늘날, 성별 소득 격차는 왜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인가? 정말로 여성들은 동일한 노동에 대해서 더 낮은 임금을 받고 있는가? 대체로 이제는 그렇지 않은 편이다. 임금 차별을 ‘동일한 노동에 대해 차등적인 임금을 받는다’는 의미로 규정한다면, 이것은 전체 소득 격차 중 아주 일부만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즉 오늘날의 문제는 이와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성별 소득 격차를 직종 분리 때문으로 설명한다. 여성과 남성이 자기선택의 과정에 의해서, 혹은 그렇게 선택하도록 유도되어서 젠더 고정관념에 따라 직업을 택하게 되는데, 그렇게 젠더에 따라 패턴화된 직종(간호사-의사, 교사-교수 등) 사이에 임금 격차가 존재한다는 개념이다. 하지만 데이터가 말해주는 바는 이와 다소 다르다. 미국 인구총조사 목록에 있는 약 500개 직종에서, 성별에 따라 발생하는 소득 격차의 3분의 2는 [직종 간의 요인이 아니라] 각 직종 안에 있는 요인들 때문에 발생했다.(15p)

 

 

이 논리의 핵심 주장은 모든 유형의 무보수 돌봄 노동이 단지 돈을 받지 않고 국민소득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가치 절하되고 있다는 것이다. 가내 노동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특히 돌봄 노동자 일반, 구체적으로는 여성 돌봄 노동자들이 더 나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경제 전체에 걸쳐 무보수 돌봄 노동의 가치를 추산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어왔다. 가장 최근의 추산치를 보면 규모가 어마어마하다(국민총생산의 20%가량). 일찍이 리드는 이러한 계산을 위한 몇몇 기법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오늘날 널리 쓰이고 있는 국민소득 계상 방식은 쿠즈네츠의 방식이며 이 방식은 가내에서, 또 그 밖의 곳에서 이뤄지는 무보수 노동을 포함하지 않는다.(85-86p)

 

 

 

 

ㅡ 클라우디아 골딘, <커리어 그리고 가정> 中, 생각의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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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17

 

 

 

세 번째 배경은 대사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영상 작품이 늘어난 데 있다. 본래 영상 작품에서는 배우의 표정으로 슬픔을 드러내고, 땀을 닦는 동작으로 곤란한 상황임을 나타낸다. 배우가 “슬프다”, “어떡하지”등을 입에 담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요즘에는 자신이 기쁜지 슬픈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배우가 대사로 일일이 설명하려는 작품이 많다. 연출을 보고 읽어낼 필요가 없어진 셈이다. TV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 제1회. 주인공 카마도 탄지로가 눈 속을 달리면서 “숨이 차다, 얼어 있던 공기 때문에 폐가 아프다”라고 말한다. 눈이 쏟아지는 가운데 절벽에서 낙하하고는 “눈 덕분에 살았군”이라고 한다.(28-29p)

 

 

어떤 장면에서 남녀가 서로 말없이 응시하면서 상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분명히 호감이 있다는 묘사다. 그런데 어떤 시청자는 이렇게 반론했단다.

“그런데 누구도 좋아한다는 말을 안 했으니 호감은 아닌 것 같아요. 좋아한다면 직접 말하지 않았을까요?”

트위터에서도 암묵적인 비유, 풍자, 우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자주 관찰된다. 이를테면 시대착오적인 발언을 한 유명인에 대해 누군가가 “이 사람은 구석기시대에서 왔나?”라는 풍자적인 글을 올리자 “뭐? 그 사람 나이가 몇 살인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하고 댓글을 단다.(73-74p)

 

 

예전보다 관객이 유치해졌고, 그에 따라 설명이 과도한 작품을 많이 만들어내게 되었다고 결론짓는 것은 성급하다. 예나 지금이나 ‘유치한 관객’이 있다는 건 변함없다. 그런데 그들이 세상로 나오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바로 인터넷과 SNS의 발달이다.

20년 전, 30년 전에도 ‘유치한 관객’은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유치함을 작품 탓으로 돌릴 수단이 없었다. 2000년대 초에도 블로그와 익명 게시판은 있었으나 다수의 민심을 대표하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 후반 이후 트위터를 비롯한 SNS가 생겨나고 보급되면서 누구나 무료로 작품에 감상을 적을 수 있게 되었다.

이때 가장 하기 쉬운 말이 “잘 모르겠다(그래서 재미없었다)”이다. 여기에는 논리적인 설명이나 근거가 필요하지 않다. 이런 감상이 폭발적으로 퍼지고, 이에 동조하고 부응하는 의견이 많아질수록 투자자나 제작자는 이 의견을 무시하기 힘들어진다. 결과적으로는 이들을 관객으로 붙잡기 위해 작품에 설명식 대사가 늘어난다.(82-83p)

 

 

“작품을 칭찬하는 쪽보다 비판하는 쪽이 우위를 차지하죠. ‘이렇게 이해하기 힘든 작품을 만들다니’하고 분노하면 피해자가 되는 거니까. 게다가 피해 사례는 온라인에서 동조자를 구하기도 쉬워요.”

SNS의 탄생으로 사실상 아무런 비용 없이 간단하게 ‘피해 사례’를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의견을 막고, “잘 모르겠다(그래서 재미가 없었다)”라는 리뷰를 피하는 방법은 모든 것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것뿐이다.(84-85p)

 

 

원작 만화의 대사를 최대한 살려 충실하게 영상화한 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따지지 않겠다.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요즘은 영상화하면서 대사를 바꾸면 그것이 적절한 각색의 범위 내여도 원작 팬이 ‘원작 파괴’라며 불만을 토로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우려를 없애려면 처음부터 ‘원작 그대로’가는 것이 무난하다.(91p)

 

 

“옛날 사람들이 빨리 감기를 한 건 자신을 위해서였죠. 콘텐츠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한정된 시간 안에 많은 작품을 보고 만족하려고요. 그런데 요즘은 무리에 속해야 안심이 되니까 빨리 감기를 합니다. 생존 전략인 거죠.”

노래방에서 진심으로 부르고 싶은 곡이 아니라 분위기를 띄울 수 있는 인기곡을 선곡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에서도 그들은 작품의 감상자가 아니다.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콘텐츠를 활용하는 기술이 탁월한 소비자다.(111p)

 

 

요컨대 그것에 대해 아는 사람, 익숙한 사람이 적은 개성은 개성으로서의 가성비가 좋지 않다는 말이다. 발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적은 탓에 화제로 발전하기 어렵다.

“아이돌 그룹 누구를 좋아한다거나 영화, 일반적인 엔터테인먼트가 화제로 삼기에는 훨씬 낫지요.”

너무 개성적인 개성은 개성으로서 기능하지 못한다.(113-114p)

 

 

1980년대나 1990년대에는 개성이 있어야 한다는 압박이 지금만큼 크지 않았다. 오히려 ‘다수에 속함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얻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주류 집단에 속해 있거나 다수와 비슷한 기호를 가지면 크게 틀릴 일이 없다. 모두가 투표하는 정당에 투표하고, 유명한 간식을 먹고, 모두가 보는 드라마를 보는 식이다. 다들 좋다고 하는 것이니 실패할 확률이 적다. 실패하더라도 모두 같이 창피를 당하니 그리 부끄럽지도 않다. 모두가 같이 불평을 말하면 그만이다.

그런데 지금은 문화적으로 주류가 사라졌다. 가치관의 다양성을 추구하다 보니 취미나 취향이 완전히 나누어져 ‘압도적인 다수가 좋아하는 것’이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

‘보통’을 잃어버렸죠. 결과적으로 개성이 없으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매우 불안합니다. 그런 불안 때문에 무리해서라도 취미를 가지고 좋아하는 일을 찾으려고 애써요.

(...)

인기 있는 블로거, 일러스트에 ‘좋아요’가 끊이지 않는 작가, 박식함을 내세운 유튜버, 반짝이는 교우 관계를 자랑하는 학생 기업가 등 ‘개성 있는’사람들과 ‘개성 없는’자신을 비교하면 조급함을 느끼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는가? 밀레니얼 세대나 그 위 세대가 ‘라이벌’로 삼은 것은 교실이나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뿐이었다. 하지만 Z세대에게는 SNS에서 유명한 또래들이 모두 라이벌이 된다.(116-118p)

 

 

인터넷을 많이 사용할수록 ‘틀리는 것’을 극단적으로 두려워한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로부터 엄격하게 비판받거나 비웃음을 사는 참상을 지겹도록 봐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감상도 하기 전에 리뷰 사이트를 읽고 범인을 알아둔다. ‘정답’을 알고 싶어서. “그들은 빠른 정답만 원한다”라고 젊은이들을 비판하기는 쉽지만 문제의 본질은 그게 아니다. 누구든 상처받기를 꺼린다. 창피당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126p)

 

 

결국 영상 작품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기준이 등장인물에 공감할 수 있느냐 아니냐로 결정된다. 분명 공감도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인물의 행동을 보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한지 이해하게 되는 것도 감상을 풍요롭게 해주는 요소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세상에는 자신과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타자’가 존재한다. 그 가치관에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존재만큼은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존중은 ‘마주하고 이해하는’의무까지 포함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가치를 공감에서만 찾으려는 사람은 ‘공감하기 어려운 가치관을 마주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일이 익숙하지 않다. 그러려면 큰 에너지가 필요한 데다 가성비가 좋지 않으니 말이다.(161p)

 

 

그들은 타인에게 간섭하지 않는다. 즉 비판이나 지적을 하지 않고, 당하지도 않는다. 이는 언뜻 보기에 ‘타자’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나와 다른 가치관을 접하고 이해하고자 노력하는’행위가 결여되어 있다. 관용이 아니라 단지 연결을 피하는 것뿐이다.

(...)

자신을 향한 비판에도 내성이 없다.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그냥 흘려보내지 못한다. 마음이 흔들리고 ‘불쾌하다’며 곧장 비명을 지른다. 이는 다양성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일종의 좁은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183p)

 

 

 

ㅡ 이나다 도요시,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中, 현대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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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13

 

 

많은 등장인물을 등장시키면서도 매끄럽게  정리하며 속도감 있게 진행하는 작가의 공력이 느껴진다.

 

 

순전히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시간이라는 연속선 어딘가에 돌이킬 수 없는 시점이 존재할 것이다. 형국이 끝내 뒤집히는 시점이 있고, 그 시점을 지나면 무슨 짓을 해도 고무나무를 살릴 수 없다. 목요일 오후 5시 35분에 물을 주면 고무나무는 살겠지만, 목요일 오후 5시 36분에는 누가 물병을 들고 나타나 봤자 소용없다.(53p)

 

 

아무튼 나는 ‘운명’이라는 말을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운명은 화살이 이미 꽂힌 자리 주위에 그려 넣는 과녁일 뿐이에요.(434p)

 

 

그 불행의 이름은 ‘엘피스(Elpis)’, 즉 희망입니다. 온갖 나쁜 것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이죠. 인간의 행동을 가로막는 것이 희망, 인간의 불행을 오래 끄는 것도 희망입니다. 상황이 명백한데도 ‘다 잘될 거야.’라고 말하잖아요? 일어나선 안 될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우리가 매번 제기해야 할 진정한 질문은 이거죠. ‘주어진 관점을 수용하면 어떤 점에서 나에게 좋을까?’(439p)

 

 

ㅡ 에르베 르 텔리에, <아노말리>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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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10

 

 

웃는 경관 안 본 줄 알았는데 이미 봤었네...

3권인 발코니에 선 남자부터 다시 시작해봐야겠다.

 

 

 

 

ㅡ 마이 셰발, 페르 발뢰, <경찰 살해자> 中, 엘릭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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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7

 

 

우리 부모는 커다란 세상을 결박한 음모나 신경 쓰지, 자기 집 지붕 아래의 애들 얼굴은 안 궁금해한다는 걸. 왜냐? 그건 ‘큰일’이 아니니까.(71p)

 

 

사람들은 자기 주변에 보이는 것만 진짜 세상이라고 믿고 살죠. 자기가 생각하는 비현실이 어딘가에서는 극사실일 수 있다는 것을 절대 인정하지 못해요.(76p)

 

 

기쁨의 순간은 짧아요. 고난의 기간은 끝이 없고. 저한테만 그런 건 아니겠죠. 고난이, 혹은 자기가 고난받는다고 단단히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 사람을 효과적으로 지배하는 도구라는 걸 저는 이미 알아요. 김흥수가 줄곧 써 온 방법이니까.(83p)

 

 

증마 사람들은 아예 반응을 하지 않기로 했는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어요. 오히려 안경이 공들여 편집해서 여러 커뮤니티에 올린 스크린샷 모음을 보고 증마를 검색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어요. 대체 이게 뭔가, 하고. 지금 생각해 보니 안경은 몰랐던 거예요. 증마를 말려 죽이는 방법은 철저한 무관심밖에 없단 사실을. 욕먹더라도 주목받는 게 증마가 세를 키우는 주요한 방식이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욕하면서 증마의 계정을 찾아간 후에 몇 가지 영상을 보곤 생각한 거죠.

‘···내 인생이 이렇게 안 풀리는 것도 모종의 음모 때문이었나?’

‘아, 정말 그랬던 것 같은데?’

‘맞잖아? 맞아, 그때 그 새끼들이···.’(113p)

 

 

ㅡ 설재인, <사뭇 강펀치> 中, 안전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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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6

 

생각보다 철학 얘기가 많지 않았다.

 

 

중국 농부의 우화를 생각해보자. 어느 날 농부의 말이 달아났다. 그 날 저녁 이웃들이 위로해주러 찾아왔다.

이웃들이 말했다. “자네 말이 달아났다니 정말 유감이네. 정말 안된 일이야.”

“그럴 수도.” 농부가 말했다. “아닐 수도 있고.”

그다음 날 말이 일곱 마리의 야생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이웃들이 말했다. “오, 정말 행운 아닌가. 이제 말이 여덟 마리나 있잖나. 이렇게 상황이 뒤바뀌다니.”

“그럴 수도.” 농부가 말했다. “아닐 수도 있고.”

그다음 날 농부의 아들이 야생마 중 한 마리를 길들이다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다. “오, 이런. 정말 안됐구려.” 이웃들이 말했다.

“그럴 수도.” 농부가 말했다. “아닐 수도 있고.”

그다음 날 징병관이 전쟁에서 싸울 군인을 징집하러 마을로 찾아왔으나 다리가 부러졌다는 이유로 농부의 아들은 데려가지 않았다. 모든 이웃들이 말했다. “정말 잘된 일 아닌가!”

“그럴 수도.” 농부가 말했다. “아닐 수도 있고.”

우리는 광각의 세상에서 망원 렌즈로 찍은 사진 같은 삶을 살아간다. 전체적인 그림은 전혀 볼 수 없다.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건강한 반응은, 중국의 농부처럼 ‘아마도 철학’을 취하는 것이다.(171-172p)

 

 

종류와 상관없이 어떤 것을 더 좋아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수색에 아무런 성과가 없자 잃어버린 공책의 미적 탁월함뿐만 아니라 그 안에 쓰인 내용의 우수함도 점점 커진다. 수색 이틀째, 나는 영국 여행에서 기록한 그 공책 안에 든 생각이 통찰 면에서나 독창성 면에서나 독보적이라고 확신한다. 수색 나흘째, 나는 그 공책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공책이라고 선언한다. 진짜다. 다빈치의 작업 노트인 코덱스 레스터나 헤밍웨이가 쓴 노트 까이에보다 더 귀중하다(250-251p)

 

 

ㅡ 에릭 와이너,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中,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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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2

 

이런 매큐언의 ‘견딜 수 없는 사랑’이라는 책이 새로 나왔다길래 읽어볼까 했는데 ‘이런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이미 나온 책의 개정판이었고, 집에 있는 책장을 들여다보니 잊고 있었던 ‘이런 사랑’이 꽂혀 있었다. 그런 이유로 개정판이 나온 시점에 예전 판본을 읽게 되었다. 초반에 발생하는 사건에 얽힌 인물이 여럿 나오므로 나는 당연히 각 인물의 사정에 대해 두루 다룰 줄 알았는데 끝까지 그런 건 없었다.  이언 매큐언은 어느 선까지 정보를 제공하며 끌고 가야 독자가 몰입할 수 있는지를 잘 아는 작가라고 생각하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그 장기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나쁘진 않았지만 읽고 나서 느끼기에 홍보성 찬사 문구나 호들갑이 아무래도 ‘흠 그 정도인가?’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타성이 생긴 사랑은 단순히 그때그때 처한 상황보다 위대했다. 사랑은 스스로 힘을 비축하고 생성해 내지 않던가? 우리가 지금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또다시 설명하고 듣는 일로 옮겨가는 것이다. 대중 심리학에서는 만사를 대화로 푸는 것을 중시하고 거기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한다.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갈등이라는 것에도 자연적인 수명이 있다. 죽어 가도록 가만히 내버려 둬야 할 때가 언제인지 아는 것이 관건이다. 때를 잘못 판단해서 뱉은 말은 전기 충격처럼 작용할 수 있다. 그러면 갈등은 병원체의 형태로 되살아난다. 자기의 흥미를 끄는 새로운 말이, 혹은 사태를 병적으로 이렇게 봤다 저렇게 봤다 하는 ‘새로운 시각’이 갈등을 맹렬히 소생시키는 것이다.(204-205p)

 

 

우리는 반쯤만 공유된 신뢰할 수 없는 지각의 안개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 감각의 데이터는 욕망과 믿음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며 굴절되고, 그에 따라 우리의 기억 또한 왜곡된다. 우리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보고 기억하며 거기에 맞추어 스스로를 설득한다. 무자비한 객관성, 특히 우리 자신에 관한 무자비한 객관성이라는 사회적 전략은 언제나 실패하는 운명이었다. 우리는 절반의 진실을 얘기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스스로도 믿어 버리는 사람들의 후예다. 여러 세대를 거치며 적당한 사람들만 추려졌고 그런 성공이 이어지면서 결함 또한 바큇자국처럼 유전자에 깊이 새겨졌다. 자기에게 유리하지 않을 경우 앞에 있는 게 무엇인지 합의할 수 없다는 결함말이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가 아니라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인 것이다. 이혼과 국경 분쟁과 전쟁이 바로 이런 이유로 생기고, 동정녀 마리아 상이 피눈물을 흘리고 가네시 신상이 우유를 마시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형이상학과 과학이 그토록 대담한 사업이고 바퀴의 발명이나 심지어 농업의 발명보다 더 놀라운 발명인 이유도 그것이다. 인간의 본성과 어긋나는 인공물인 것이다. 사심 없는 진리. 하지만 우리 자신을 배제하지는 못했고 습성의 바큇자국은 정녕 깊었다. 객관성에서 어떤 개인적인 구원을 찾을 도리란 없으므로.(254-255p)

 

 

ㅡ 이언 매큐언, <이런 사랑> 中, media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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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30

 

 

“태어났다면 느낄 기쁨을 태어나지 않아 느낄 수 없다고 해서 그게 참으로 손해일까요? 손해라 느낄 존재가 아예 없는데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태어나지 않은 존재는 아무거도 아쉬울 게 없습니다. 고통의 근원인 자아가 아예 없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태어나게 되어 고통을 겪으면, 그 고통은 해악입니다. 태어나지 않는 쪽이 분명히 낫습니다. 기쁨도 느끼니까 그 유익으로 고통의 해악이 상쇄될까요? 어떤 사람이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상황을 생각해보세요. 너무 억울하겠죠. 감옥에서는 간수와 수감자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끔찍한 것들을 먹고, 겨우 몸 하나 누일 수 있는 공간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다 마음에 맞는 친구도 사귀게 되고, 감옥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가끔 소소한 즐거움도 누립니다. 그러다 몇십 년 후 재심이 열려 그가 무죄였음이 밝혀지고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참으로 기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에게 감옥 생활은 괴로움도 크지만 기쁨도 있다, 그러니 경험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태어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만약 큰 기쁨을 항상 누릴 수만 있다면 태어나는 게 이득일 수 있지 않을까요?”

“당신이 휴먼매터스의 연구자 집에서 태어나는 것 같은 상황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분명 당신은 행복과 안전이 약속된 것 같은 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수용소에 갇히고, 죽음의 위기를 여러 번 넘기고, 앞날은 알 수 없습니다. 기쁨과 고통을 마치 장부상의 흑자와 적자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있지만 과연 그럴까요? 임계점을 넘어가는 극한의 고통은 나중에 그 어떤 기쁨이 주어지더라도 장부상의 숫자처럼 간단히 상계되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체에 내장된 프로그램은 고통을 피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생존을 도모하고 번식에 성공할 수 있으니까요. 살면서 기쁜 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괴로움에 시달리거나 혹시 찾아올지도 모를 잠깐의 기쁜 순간을 한없이 갈망하며 보냅니다. 갈망, 그것도 고통입니다. 그리고 삶의 후반부는 다가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보내게 되고, 죽음은 잊지 않고 생명체를 찾아옵니다. 그런데도 이 아이를 살려서 이제 더는 겪지 않아도 될 이 모든 고통을 다시 겪게 할 것인가요? 그게 정말 윤리적으로 올바른 선택일까요?”(148-150p)

 

 

인공지능이 인간적 요소들을 흡수한 반면, 나는 오히려 최박사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나의 의식이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 영생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나는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여기고 있을 때 즐기던 것들에 흥미를 잃어갔다.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것들은 모두 필멸하는 인간들을 위한 송가였다. 생의 유한성이라는 배음이 깔려 있지 않다면 감동도 감흥도 없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이 한 번뿐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는 모든 것이 절실했던 것이다. 이야기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을 수백 배, 수천 배로 증폭시켜주는 놀라운 장치로 ‘살 수도 있었던 삶’을 상상속에서 살아보게 해주었다. 그러니 필멸하지 않을 나로서는 점점 흥미가 떨어졌던 것이다.(275-276p)

 

 

ㅡ 김영하, <작별인사> 中, 복복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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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29

 

 

조금만 기다리면 해결책이 찾아지고 그때가 되면 새롭고 멋진 생활이 시작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가야 할 길은 아직도 멀고 멀며,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부분은 이제 겨우 시작되었다는 것을.

완전한 사랑에 이르렀는데, 비로소 사랑의 삼각형을 완성했는데, 이 사람들한테 찾아온 게 뭔가요? 뭘 알게 됐나요? 고통입니다.

완전한 사랑이 시작된 순간, 순전한 기쁨이 아니라 복잡한 고통이 찾아온 거예요.

과연 이들에게만 그럴까요?

(...)

소설이라는 실험실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것과 허락되지 않은 것은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요? 소설의 인물들은 옳고 바르고 정의로운 인간이 아니라, 실패하고 어긋나고 부서진 인간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애초에 소설이란 윤리로 비윤리를 심판하는 재판정이 아니라, 비윤리를 통해 윤리를 비춰 보는 거울이자 그 둘이 싸우고 경쟁하는 경기장이 아닐까요?(93-94p)

 

 

 

ㅡ 문지혁, <중급 한국어>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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