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6/1

 

다른 아이스크림은 다 먹어봤는데, 아이스팜 자두맛은 대충 예상이 되는 맛이지만 그래도 궁금하다. 오늘 아이스크림 사러 가야지.

 

 

 

젤라토는 맛있었다. 단맛과 신맛의 조화가 놀랍도록 절묘해 입안에서 사르르 녹을 때마다 기품이 느껴졌다.

(...)

하지만 뭐랄까, 분명 맛있었지만 그게 아이스크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젤라토와 아이스크림은 다르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얼린 주스도, 냉동 블루베리를 섞은 요거트도 아이스크림으로 치는 관대한 입맛을 가진 사람이니까. 다만 그건 너무 대단했다. 너무 맛있고, 너무 비싸고, 너무 귀했다. 한 번 맛보기 위해 지도를 보고 찾아가 줄을 서고, 이 돈으로 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을 떠올리며 야금야금 아껴 먹어야 한다면 그건 내게 더 이상 아이스크림이 아니다. 아무리 아이스크림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그저 고급 디저트쯤으로 기억될 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은 약간은 하찮은 음식이다. 그다지 훌륭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대수롭지 않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기쁘고 맛있고 소중하지만 결코 중요해서는 안 된다. 언제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고 주머니가 가벼울 때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크게 특별할 것도 새로울 것도 없는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나는 비로소 만족한다.(11-12p)

 

 

이 영화를 처음 봤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런 사람들’이 따로 있는 줄 알았다. 집이 없어 매일 다른 곳에서 잠을 청하는 사람들,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 책임지지 못할 아이를 낳는 사람들, 일하지 않는 사람들,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 것 같으면 고래고래 소리부터 지르는 사람들. 하지만 직접 집을 구해보니 알 것 같았다. 평범한 삶에서 발을 살짝 삐끗하면 누구나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63p)

 

 

다시 맛본 피카츄 돈가스는 뭐랄까, 한없이 가짜에 가까운 맛이었다. 그걸 먹는 내내 내가 좋아하는 일식집의 바삭하고 두툼한 수제 로스가스가 떠올랐다. 이제 나는 그런 걸 진짜라고 생각하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

영란 언니는 바나나가 그렇다고 했다. 어릴 때 그 귀한 걸 동생과 반씩 나눠 먹으면 혀가 녹아내릴 것처럼 맛있었는데 얼마든지 먹을 수 있게 되니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다고. 눈을 감고 안마의자에 누워 있던 희숙 언니도 덜덜거리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나는 그 알록달록한 제사 젤리. 서로 더 먹겠다고 오빠들이랑 아주 피터지게 싸웠어. 여기 흉터도 그러다 생긴 거잖아. 순맛대가리 없는 게 그땐 왜 그렇게 좋았나 몰라.”

다른 듯 비슷한 언니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나는 조금 쓸쓸해졌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런 걸까. 마음을 다해 좋아했던 것들이 하나씩 시시해지며 나를 둘러싼 세계 역시 천천히 빛을 잃어가는 걸까.(108p)

 

 

ㅡ 하현, <아이스크림> 中, 세미콜론

 
,

2023/5/31

 

 

 

그는 2021년에 60세를 맞아 스스로 통과의례를 기획했다. ‘돌아온 말들’이라는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가 당신에게 했던 말 중 기억에 남아 있는 말을 나에게 들려주세요”라고 요청한 것이다.

(...)

혼자 앉아 생각만 해서는 모르잖아요. 일반적인 생애 경로와 다른 삶을 살수록 여행이든 이벤트든 스스로 인생의 매듭을 만들어서 자기를 낯설게 보는 훈련을 해보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31p)

 

 

‘소신 있게, 자기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에이징 솔로 여성이 많음에도, 주변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그러한 자기 인식과 격차가 크다. 성인이 된 지 한참 지난 중년인데도 혼자 사는 것을 일시적 상태라고 간주하거나 혼자서 일상을 제대로 챙기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시선이 여전하다.(35p)

 

 

사실 나는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비혼주의자도 아니다. 결혼과 비혼이라는 삶의 방식에 어떠한 신념을 갖고 굳게 지키겠다는 ‘~주의’를 붙이는 사람을 존중하기는 해도 좀 어색하다고 느낀다. 자기 삶에서 친밀한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 꾸려가느냐 하는 문제는 때와 상황에 따라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이 선택하기 나름이다. 나는 오래 혼자 살아왔지만 누군가와 함께 살게 될 수도 있고 다시 혼자 살게 될 수도 있으며, 친밀한 누군가와 함께 살지는 않되 가까이에서 지내고 싶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삶 안에서도 살아가는 방식은 다양하고 언제든 바뀔 수 있다.(38p)

 

 

“1990년대 후반 PC통신에서 만난 친구들과 쭉 같이 놀았어요. 우리 사이의 제일 큰 공감대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었어요. 사실 허세죠. 다 적당한 형편에서 자랐고, 대학교를 다녔던 1990년대 초반 개방적이었던 사회 분위기의 수혜자들이니까요. 그러다가 IMF 외환위기 이후 자산 축적을 최고로 치는 사회가 됐잖아요. 그런 변화가 못마땅하지만 강력하게 저항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나는 하기 싫어’ 같은 태도로 살던 친구들이었죠. 주제 파악은 잘되는데 개선하려는 의지는 없고, 인생을 사는 태도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순응적이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어요. 이 친구들 중에 비혼이 많아요.(48-49p)

 

 

지금 생각해보면 집안 사정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원가족이 경제적으로 어렵고 가족 중 장애를 가진 사람도 있어요. 저는 결혼이 자본과 집안 간 결합, 계약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주위 결혼한 사람들을 봐도 그렇지 않은가, 하는 의심도 있고요. 나 스스로는 팔릴 만한 학벌이나 직장을 가졌다고 해도 나의 원가족이 평가받을지도 모르는 자리에 가고 싶지 않았어요. 계약에서 꿀리고 들어가는 손해를 보고 싶지 않았던 거죠. 그래서 내 자유의지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을 선택했어요.(53p)

 

 

“나는 비혼을 선택한 게 아니라 결혼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다들 결혼하는 게 기본이고 결혼하지 않는 게 선택인 양 말하는데, 거꾸로 아닌가요? 뭔가를 하겠다고 하는 게 선택이죠. 저는 비혼을 선택한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결혼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고 그냥 그 상태로 쭉 사는 거예요.(54p)

 

 

‘결혼과 출산 적령기’를 지난 50대 중반이 되어서도 공식 석상에서까지 아이를 낳지 않은 것에 대한 비난과 훈계를 듣는다. 여성의 자궁이 마치 공공재이고 개인의 생식활동이 공적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1인 가구의 수가 역대 최대로 늘어났지만 아이를 낳지 않고 혼자 사는 여성들은 여전히 ‘제 할 일을 하지 않았다’라는 비난에 시달린다. 여성이라는 존재를 아이, 가족과 한 묶음으로 바라보는 밧줄 같은 시선은 내가 할머니가 되어도 올가미처럼 따라다닐 것만 같다. 청년기와 중년기에 다짜고짜 ”자녀가 몇 살이냐?, “왜 아이를 낳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을 숱하게 들어왔는데, 노년기에는 자연스러운 순서라도 되는 것처럼 “손주는 몇 살이냐?”라는 질문을 받게 되려나.

비혼 여성이 출산하지 않은 이유는 각자의 사정마다 다르다. 아이를 낳고 안 낳고는 순전히 개인적 사정이므로 “왜 아이를 낳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은 대답할 가치가 없다.

(...)

이 질문은 “세상에는 하나의 여자만 있다는 생각에서, 그 여자는 종 전체를 위한 엘리베이터처럼 반드시 결혼하고, 번식하고, 남자를 받아들이고, 아기를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다. 이러한 질문은 “질문자 입장에서는 정답이 하나뿐인” 닫힌 질문이고, “사실 질문이라기보다 단언”이다. “스스로를 개인으로 여기고 자신의 앞길은 자신이 개척한다고 생각하는 우리더러 너희가 틀렸다고 단언하는 말”이다.

이 해로운 단언의 흔한 변주는 “자식을 낳아봐야 진정한 어른이 된다”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자식을 여럿 두고도 어른이 되기는커녕 성숙한 면모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생생한 사례가 현실에 넘치도록 많아서, 나는 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다. 자식을 낳아봐야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서 독립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면서 관계 맺을 줄 알게 될 때 어른이 되는 것이다.(63-64p)

 

 

아이를 낳으려면 남녀가 필요한데 애 여성만 비난하는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저출생의 주요 원인을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은 채 혼자 사는 여성의 증가에서 찾는 것은 진단이 잘못되었다. 예컨대 프랑스는 1인 가구 비율이 37.8%, 스웨덴은 45.4%(2020년 기준)로 한국보다 훨씬 높다. 그러나 같은 기간 합계출산율도 프란스의 경우 1.8명, 스웨덴은 1.66명으로 한국보다 훨씬 높다. 혼자 사는 사람이 늘어나기 때문에 저출생 현상이 가속화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의 기록적인 저출생 현상의 구조적 원인은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들의 이기심과 페미니즘이 아니라, 뿌리 깊은 성차별과 가부장 문화에 있다.

(...)

전미경제연구소는 출산율이 높은 선진국의 특징으로 남성의 적극적인 가사·육아 노동 참여, 워킹맘에 우호적인 사회 분위기, 정부의 적극적 가족정책, 육아를 마친 남녀의 취업 문턱이 낮은 유연한 노동시장 등을 꼽았다.

특히 남성의 적극적 가사·육아 노동 참여가 관건이다.(72-73p)

 

 

병원이 보호자로 법적 가족을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해서 법적 근거가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의료법에는 병원에서 관행적으로 사용하는 수술 동의서나 입원 동의서에 관한 세부 규정이 없다. 응급 상황에도 항상 법정대리인이나 보호자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

그런데도 직계가족인 보호자를 찾고 동의서를 요구하는 관행은 여전하다. 의료사고가 나거나 수술비를 청구할 때 분쟁이 날 것에 대한 병원 측의 우려 때문이다.

(...)

“병원의 과도한 ‘보호자 찾기’는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며 “‘환자 중심’의 사고가 아니라 ‘의료현장의 편의성’중심 사고”라고 짚었다.

이 관행 때문에 1인 가구, 동성 커플 등 소위 ‘정상가족’의 틀을 벗어난 사람은 실제 일상을 함께하는 이가 실질적 보호자가 될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이 보고서는 “이는 단순히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존재 조건이 사회에서 체계적으로 무시되고 인정받지 못하는”현실을 뜻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96-97p)

 

 

서로의 꼴을 봐주는 것. 서로 신세 지는 것을 받아 주고 나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 혼자서 오래 살아온 솔로에게는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마음이다. 예컨대 나는 남에게 폐 끼치는 상황을 극도로 꺼린다. 누구에게 무엇을 도와달라고 요청하거나 부탁하는 게 어렵고 싫어서 어지간한 일은 혼자 해결하는 데에 이골이 났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내가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부탁하는 것을 싫어하는 만큼 다른 사람이 나에게 폐를 입히는 상황이나 부탁해 오는 것,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받는 것조차 꺼린다는 사실을. 이야말로 ‘인색한 사람’의 정의가 아닌가. 나는 스스로 나와 타인 사이에 넓은 거리가 필요한 성향일 뿐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나도 모르게 영화 <크리스마스 캐럴> 속 ‘스크루지 영감’을 닮아가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쫙 끼쳤다.

(...)

그런 점에서 “폐 끼치고 다른 사람이 내게 기댈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것에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건 정말 연습이 필요한 일”이라는 주얼의 말에 크게 공감했다. 마을도 “특히나 1인 가구로 오래 살아온 사람이 못하는 말이 ‘도와줘’라는 말”이람 거들었다.(168-169p)

 

 

혼자 사는 것은 가능하지만 역설적으로 혼자서만 살아가기란 불가능하다. 관계 속에서 살아가려면 비비 구성원들의 말마따나 “서로 꼴을 봐주고”, “폐 끼침을 주고받는” 연습이 필요하다. 내가 잘하지 못하는 일이지만 꼭 연습해야 한다고, 비비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노후 계획 1번으로 마음에 새긴 일이다.(171p)

 

 

내가 만난 에이징 솔로들은 비혼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거 안정성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현실의 불안, 미래를 바라보고 계획하는 시야를 좌우하는 가장 큰 요소도 소득 또는 일자리보다 주거 안정성이었다.

(...)

“불안정한 비정규직으로 살다 보니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남한테 손 벌리지 않고 최소한의 품위와 자존심을 지키면서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예요. 그걸 보장해 준 게 집이었어요.(196-197p)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돌보셨습니다. 그렇게 끝까지 자신의 존엄을 지키셨습니다.

 

선배의 사무치는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나는 이 문장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묘한 반발심이 싹텄다. 스스로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면, 구체적으로 말해 자기 손으로 배변과 배뇨를 처리할 수 없게 되면 존엄을 잃는 것이라는 가치판단이 그 말에 배어 있는 듯해서였다.

선배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기본적인 생리 현상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서 살아가는 상태를 존엄이 훼손된 삶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인간의 존엄이 생리 현상과 위생에 좌우되는, 그렇게 하찮은 가치인가? 주변을 조금만 돌아보면 이미 상당히 많은 중증환자, 노인, 장애인들이 배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삶에서는 존엄이 다 사라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

그는 치매에 대한 공포의 대안으로 안락사를 제시하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그런 생각의 배후에는 ‘살아 있을 가치’가 있는 생명과 없는 생명을 구별하는 생각이 깔려 있고” 이것이야말로 “우생 사상 그 자체”라고 비판했다.

우생 사상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아버지의 발병 이후 ‘기-승-전-스위스’를 들먹여 오던 것에 대해 살짝 죄책감을 느낀 적이 있다. 안락사를 원한다고 거침없이 말해온 내 마음속에서는 인지증이나 다른 질병 등으로 자기 결정권을 잃어버린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보는 사고방식이 자리 잡고 있지 않았나, 하는 자각이 들어서였다.(232-234p)

 

 

아버지를 보며 에이징 소로인 내가 느끼는 또 하나의 암담함은 “‘나 같은 딸’이 없는 나는 자중에 어떻게 하나”같은 걱정이었다.

노화로 인지기능을 잃게 된다면 길게 와병하고 삶을 마무리할 때, 누가 나 대신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려줄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

“아버지를 간병하다 보니 이 상태면 어떤 치료가 필요하고, 어디를 가야 하고, 간병인은 어디서 구하고 등등 처리해야 할 사무적 절차가 많다는 걸 절감했어요. 그 일이 주는 피로도도 상당하고요. 내가 나이 들었을 때 친구들과 서로 의지해 산다고 해도 이건 친구가 맡아서 처리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

박진영도 돈 말고 필요한 노후 준비로 “인생 막바지에 나를 대리해 줄 사람”을 꼽았다.

 

“대개 자녀가 그 역할을 할 텐데, 전 자식이 없기도 하지만 만약 있다고 해도 자식에게 그런 일을 시키고 싶지 않을 거 같아요. 차라리 그런 일을 해주는 대리인에게 합당하게 비용을 지불하고 맡길 수 있으면 좋겠고, 자식한테는 안 시키고 싶어요. 내가 정신이 멀쩡할 때 그런 일을 위임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 제도적으로 가능해지면 좋겠어요.”(238-239p)

 

 

1인 가구와 다인 가구의 세율 격차보다 되레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다인 가구의 각종 공제 항목이 법적 가족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함께 살면서 혈연가족보다 더 긴밀하게 서로를 부양하며 경제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비혼 동거 가구나 생활공동체는 법적 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더 큰 문제다.(280p)

 

 

어딜 가도 사람들이 모두 당연하다는 듯 중년 여성을 “사모님”, “어머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타인의 정의 중 한 예일 것이다. 중년 여성은 거의 늘 누군가의 배우자, 누군가의 엄마처럼 관계적 호칭으로 불린다. 그 관계가 없는 여성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있어서는 안 된다는 듯 말이다.(284p)

 

 

현행법에는 유언과 관계없이 유족이 일정한 유산을 상속할 권리를 정해둔 유류분제도가 있다. 부모를 여의고 배우자와 자녀가 없는 솔로가 함께 살던 친구에게 재산을 주겠다고 유언을 남겨도 형제자매가 권리를 주장하면 유류분제도에 따라 3분의 1을 줘야 한다.

정부는 이 조항이 1인 가구가 늘고 형제자매가 각자 독립적인 생계를 유지하는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보고, 유류분 조항에서 형제자매를 삭제하는 민법개정안을 2022년 4월 5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했다. 이 민법 개정안에는 결혼하지 않은 독신자도 친양자를 입양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방안도 포함되었다. 이 글을 쓰는 2023년 1월 현재 해당 개정안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된 상태다. 이 개정안이 확정되리라 장담할 수 없지만, 변화의 필요에 대한 문제 제기는 이루어진 셈이다.

(...)

장사 등에 관한 법률은 사망한 사람의 시신을 인수해 장례를 치를 수 있는 순서를 정해두었는데, 배우자·자녀·부모·형제자매 등 법적 가족에 집중되어 있어서 혈연관계와 법적 관계를 서류로 입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장례를 치를 방법이 없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무연고 장례를 지원해 온 사단법인 ‘나눔과나눔’ 등이 꾸준히 노력해 온 결과 보건복지부는 2020년 지침을 수정했다. 사실혼 관계, 친구, 지역공동체 등 삶의 동반자였던 사람도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한 것이다. 2022년에는 제삼자가 가족 대신 장례를 치르려 할 때 지방자치단체의 심의를 거치게 했던 규정도 삭제했다. 이제 사실혼 관계에 있는 사람이나 조카·며느리 같은 친족, 장기간 혹은 지속적으로 동거·부양·돌봄 관계에 있는 사람도 장례를 치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개선된 방침이 법 개정이 아니라 행정부 지침 변경에 불과하다는 한계가 있다.(289-290p)

 

 

협소하게 정의된 가족의 중요도가 커질수록, 가족의 역할이 확대될수록 가족을 구성하고자 하는 의지도 꺾이기 마련이다. 원가족의 풍부한 지원이 없는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가족이 사회보장과 복지의 기본 단위인 한, 이미 부유한 가족은 점점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가족은 점점 더 가난해질 것이다.

가족이 짊어진 짐을 덜어내고 사회의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으로 사회복지학자 김진석은 책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에서 현재의 ‘국가-가족-개인’ 복지국가에서 중간의 ‘가족’을 뺀 ‘국가-개인’복지국가로의 전환을 제안했다.

국가-가족-개인 모델은 가족-개인 사이에 부양과 돌봄이라는 가족 기능을 전제하고, 그 기능이 부족하거나 없는 경우에만 국가가 보충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이다. 반면, 국가-개인 모델은 개인의 사회권 보장을 위한 국가의 개입이 가족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개인에게 직접 작용하는 방식이다.(311-312p)

 

 

고백하자면 ‘홀로이면서 함께’는 내가 오래 붙들고 있는 인생의 화두다. 온전히 ‘홀로’도 아니고 늘 ‘함께’도 아닌, ‘홀로이면서 함께’하기. 단독자로서의 영역을 지키면서 연결의 감각을 잃지 않기. 나는 삶을 꾸리고 관계를 맺을 때 늘 나의 태도를 결정하는 방향키와도 같다.(316p)

 

 

 

ㅡ 김희경, <에이징 솔로> 中, 동아시아

,

2023/5/25

 

근자의 독서 중 가장 즐거웠다. 왜 멀쩡한 사람들이 다단계나 사이비 종교에 빠지는지 늘 궁금했는데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정서적으로 취약한 상태에 있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특수한” 상황의 사람보다는 평범한 나날을 보내지만 비교적 “낙관적인” 성향의 사람이 이런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저자의 논지가 수긍할만했다. 또 나조차도 평소 사이비 집단=세뇌라는 공식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렸는데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하긴 단지 세뇌만으로 집단의 인원을 조종하는 게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 외에는 지금까지 살아오며 그들이 건네는 온갖 달콤한 말을 절박하게 믿지 않아도 되었던 "운 좋은" 나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종교의 역할은 의미, 목적, 소속감, 의례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더 자주 교회 밖에서 이런 필요를 충족하고 있다.

현대의 컬트적인 집단에서 위안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어떤 사람이 될지 너무나 많은 가능성이 있는(적어도 그런 환상으로 가득한) 세상을 살면서 느끼는 불안한 혼란을 덜어 주기 때문이다.

(...)

이런 어마어마한 선택지 앞에서 젊은이들은 마비된다. 특히 전 세대보다 기본적인 생존이 위태롭고 사기가 저하되었다고 느끼는 동시에 인상적인 ‘퍼스널 브랜드’를 구축하라고 압박받는 극단적인 자기 정체성 창조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흔히 하는 이야기처럼, 밀레니얼 세대의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원하는 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끝없이 이어지는 ‘만약에’와 ‘가능성’의 충격 속에서, 밀레니얼들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짚어주는 구루를 원하게 되었다.(38p)

 

 

사람들의 행동과 신념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특별한 언어를 고안하는 일이 그토록 효과적인 이유는 꽤 단순하다. 말은 우리가 가장 먼저 바꿀 준비가 되어 있으면서도·····마지막으로 포기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

당신이 궁금증을 못 이겨 영성 행사에 참석했다고 생각해 보자. 주최자가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주문을 외우라고 시킨다. 아마 당신도 틀림없이 따라 하게 될 거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주위의 압박 대문이라고 느끼겠지만, 평생 모은 재산을 내놓으라거나 다른 사람을 살해하라고 요구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위험해 봤자 얼마나 위험하겠나? ‘컬티시’언어는 매우 효율적으로(눈에 보이지 않게)작동해 우리의 세계관을 구루의 틀에 맞추기 때문에, 한번 우리 안에 인식되면 꼼짝하지 않는다. 다시 머리를 기르든, 집으로 돌아가든, 앱을 지우든, 무슨 짓을 해도 특별한 단어들만은 사라지지 않는다.(58p)

 

 

악랄하지 않은 코드스위칭은 대화를 더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가지고 있는 모든 언어학적 자원을 활용하려는 효과적인(그리고 대부분 무의식적인) 방식이다.

(....)

심지어는 생존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계 미국인 영어처럼 소수민족의 억양을 사용하는 화자의 경우, 편견의 대상이 되거나 박해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표준 영어’로 전환한다. 한편, 앞의 경우와는 달리 코드스위칭을 통해 상대의 신뢰를 얻어 낼 수도 있다. 짐 존스의 특기가 바로 이것이었다. 친구네 대형 교회에서 복음주의자 행세를 하던 열두 살 나처럼, 하지만 훨씬 마키아벨리적인 방식으로, 존스는 모든 추종자를 그들 각자의 언어 수준에 맞추어 대하는 데 능했고 이를 통해 자신이 그들과 그들의 삶을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라는 즉각적인 인상을 주었다.(75-76p)

 

 

해마다 우리는 묻고 또 묻는다. 사람들은 왜 존스타운이나 헤븐스 게이트 같은 컬트 집단에 들어갈까? 왜 그곳에 남을까? 그들이 거칠고 이해할 수 없는, 때로는 섬뜩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뭘까? 그 대답은 다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언어라는 궁극적인 권력 도구를 바탕으로, 전향, 조건형성, 강제라는 체계적인 기술을 활용한 덕에 존스와 애플화이트는 털끝 하나 직접 건드리지 않고도 추종자들에게 어마어마한 폭력을 가할 수 있었다.

(...)

영향력의 스펙트럼 안에서, 컬트적 언어는 세 가지 역할을 한다. 첫째, 사람들이 스스로 특별하고 인정받는다고 느끼게 만든다. 러브바밍이 여기에 속한다. 자신에게만 쏟아지는 것 같은 관심과 이해, 용기를 북돋는 말, 취약함에 대한 요구, “바로 당신, 당신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왕국으로 향하는 엘리트 원정 팀에 합류하도록 지명되었습니다”라는 말. 이런 언어를 들으면 즉각 사기 경계 태세에 돌입하는 사람도, 혹은 그저 빈말이라는 사실을 간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갑자기 ‘딸깍’하고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들은 어느 순간 이 집단이 유일한 해답이며 다시는 뒤로 돌아갈 수 없다고 느낀다.

(...)

컨트적 언어의 첫 번째 핵심 요소는 무엇일까? 바로 ‘우리 vs 저들’ 이분법을 만드는 것이다.

(...)

컬트가 처음부터 자체적인 은어를 사용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약어나 내부자 전용 만트라, 심지어는 ‘파이버랩’ 같은 단순한 명칭까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런 단어를 접한 잠재적 회원은 좀 더 알아보고 싶어진다. 일단 집단에 소속되면 회원들은 은어를 통해 동료의식을 다지고, 그들만의 암호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을 멸시하기 시작한다. 언어는 또한 잠재적 불순분자를 찾아낼 수 있는 기준이 된다. 누군가 새로운 용어를 거부한다면 그가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온전히 순응하지 않으므로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는 신호일 수 있기 때문이다.(97-99p)

 

 

일반적으로 지적 능력이 부족하고 심리적으로 불안한 사람이 컬트에 오래 몸담는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학자들은 그게 사실이 아님을 증명했다.

(...)

우리는 흔히 컬트 집단이 ‘심리적 문제’가 있는 개인을 노린다고 믿는다. 그들이 더 잘 속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 컬트 포교자들은 사실 선량하고, 서비스 정시니 있으며 예리한 사람들이야말로 이상적인 후보군이라고 말한다.

(...)

“내가 무니 간부였을 때, 우리는 신중히······강인하고, 배려심 있고, 의욕적인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새로운 회원을 모집하는 데 상당한 시간과 돈이 들기 때문에, 그는 당장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사람에게 자원을 낭비하는 일은 피했다.(마찬가지로, 다단계 마케팅 상급자들은 신입 회원 중에서도 당장 현금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 장기전을 할 만큼 결단력 있고 낙관적인 사람이 가장 돈이 된다고 말한다.) 에일린 바커의 무니 연구는 지적이고 강직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충직한 회원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이들은(우리 부모님 같은 경계심 강한 과학자가 아니라) 활동가, 교육자, 공무원 등의 자녀였다.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보도록 길러진 사람들인 것이다. 설령 그게 자신에게 해를 입힐지라도.

이처럼 사람들을 착취적인 집단으로 끊임없이 끌어들이는 건 절박함이나 정신 질환이 아니라 과도한 낙관성이다. 물론 정서적인 혼란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컬트 환경이 매혹적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삶의 전환기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에게 러브바밍은 특히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어딘가에 이끌린다는 것은 자아나 절망감보다 더 복잡하며, 애초에 건네받은 약속에 걸린 이해관계와 더 관련이 있다.(118-120p)

 

 

일반적인 전문 분야에서 특수 용어는 더 명료하고 구체적으로 정보를 교환하는 데, 즉 명확한 소통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컬트 환경에서 특수 용어는 정확히 반대 역할을 한다. 화자가 혼란에 빠지고 지적 능력을 발휘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럼, 그들은 순응할 수밖에 없다.

(...)

평생 사용해 온 언어를 의심할 정도로 방향을 잃었다는 느낌이 들면, 옳은 길을 보여 주겠다고 약속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에게 더욱 헌신하게 될 수 있다.(160p)

 

 

내가 아는 한, 다단계 마케팅 회사와 피라미드 사기의 관계는 스타벅스의 바닐라빈 크림 프라푸치노와 밀크셰이크의 관계와 같다. 전자는 아름답게 채색된 후자일 뿐이라는 말이다.(184p)

 

 

다운라인 세대가 확대되면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인 공동체를 갈퀴로 긁어모아 자기 아래 신입을 등록하려고 애쓰다가 실패하는 이들과 그 어머니들(말 그대로다)로 빠르게 과밀화된다. 희망을 품은 회원의 수는 상위 극소수에서 서로를 밟고 올라서려는 최하 단계까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업라인 회원들과 창립자가 사업 프레젠테이션과 수백만 달러짜리 워크숍을 통해 반복적으로 주입하는 MLM 모델이 정말로 계획대로 돌아간다면, 그렇다, 당신도 1년 이내에 부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간단한 산수로 그 12개월이 지났을 때 당신의 다운라인에 들어와야 할 회원이 몇 명일지 계산해 본다면? 1조가 넘는다. 세계 인구의 142배이자 그 많은 다이어트 약보다도 많은 수다.

수많은 연구에서 MLM 회원 99퍼센트는 땡전 한 푼 벌지 못하고, 최상위 1퍼센트만이 다른 이들 모두의 희생으로 이익을 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수치는 자명하다. 그러나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고 가진 거라곤 아무도 원치 않는 아이크림으로 가득한 서랍과 텅 빈 통장뿐일지라도, 당신은 적어도 팀의 일부로 남아 있을 수 있다. 당신이 자매라고 부르는 동료 셀러들이나 심지어 엄마, 아빠라고 부르는 상급자들로 이루어진 ‘가족’말이다. 여기에 이르면, 당신은 이들과 감정적으로 서로 깊이 의존하게 된다.

(...)

그래서 당신은 결국 손해를 못 본 체하고, 산수 결과는 잊고, 버틴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나면 커다란 보상을 받게 되리라는 확실한 약속을 받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당신 아래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 기대어 돈을 벌고 있다. 지금 포기하면 다이아몬드 스쿼드는 크게 실망할 것이다. 당신의 가족과 또 다른 ‘가족’도 마찬가지다. 주님께서도 실망하실 테고, 더는 #걸보스가 되지도 못할 거다. 당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이런 압박 아래서, 상황은 여지없이 컬트적이 된다.(189-190p)

 

 

사실이라기엔 지나치게 좋은 수사를 들으면, 내 본능은 죽기살기로 도망치라고 외친다. 그러나 직접판매가 늘어놓는 휘황찬란한 헛소리를 믿는 사람이 구제할 길 없는 멍청이라고 비난하는 게 마음이 편할지는 몰라도, 사실 이 유해하게 낙관적인 수사법은 미국 사회에 근본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196p)

 

 

MLM의 이상적인 신입 회원은 경제적인 안정을 간절히 추구하는 동시에 삶에서 확고한 신념과 낙관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이다. 그게 다른 나라에서 새롭게 출발하려는 희망이든, 미래를 향한 젊은 열정이든, 높은 권능에 대한 믿음이든 말이다. 전형적인 MLM 회원은 빠르게 일확천금을 벌려는 욕심 많은 얼간이가 아니라, 기본적인 생활비를 벌고자 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재정적인 어려움과 돈독한 공동체, 그리고 이상주의가 합쳐지면 업라인 셀러에게는 잭팟이 터지는 셈이다.(198-199p)

 

 

그러나 스트레스나 경제적 어려움 같은 요소가 추가되었을 때, 회의적인 본능을 무시하고 사기에 깊이 휘말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피라미드 사기를 경멸하는 내 태도에는 사기의 냄새를 극도로 민감하게 구별하는 지능적인 코의 역할만큼이나, 그들의 약속을 절박하게 믿지 않아도 될 만큼 내가 혜택받았다는 사실이 작용한다는 것을 잘 안다.(221p)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다.

 

 

사회학자들은 또한 고등교육과 과학적 방법에 대한 훈련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사기에 덜 속아 넘어가게 만든다고 말한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나쁜 상태일 때도 마찬가지다. 연구자들은 다수의 실험을 통해 사람들이 기분이 좋을 때 더 순진해지고 의심도 덜 하는 반면, 우울할 때는 기만의 낌새를 더 잘 알아차린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들어 본 중 가장 까칠한 초능력이 아닐 수 없다.(221p)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최고 경영진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조심하지 않으면 반향실 안에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

“사람들은 그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할 테고, 그럼 그는 점점 미쳐 가기 시작합니다. 그의 광기는 매우 빠르게 제도화되지요.”(227p)

 

 

오글거림을 견디는 역치가 낮아 불신하는 마음을 오래 억누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광적인 구호와 환성은 종교적 극단주의와 피라미드 사기 집회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외부인들은 또한 자신의 친구나 가족이 그런 행위에 순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불편해진다.(251p)

 

 

그러나 우리가 쭉 봐 왔듯, 의미를 미끼로 돈을 청구하는 매혹적인 지도자가 있는 곳에는 항상 일이 잘못될 가능성이 있다. 컬트 피트니스 언어가 온통 다른 세상의 말처럼 들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수업이 회원들의 건강뿐 아니라 인생 전반에도 필수적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서다. 추종자들에게 자극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것만큼이나, 그들을 강사에게 심리적으로 밀착시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마치 피트니스 수업이라는 구루가 회원들의 행복을 위한 궁극적 해답을 쥐고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말이다.

(...)

각 브랜드는 언어가 이런 목표를 이룩하기 위한 핵심 요소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망설이지 않는다.(253-254p)

 

 

펠로톤이나 소울사이클 같은 회사는 JSS 같은 대스타의 컬트적 신비로움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따라서 고위급은 매혹적인 강사를 고용하고 그들이 독특한 바이브를 풍기며 독특한 언어를 쓰도록 훈련하는 데 전력을 기울인다. 회사 내의 또 다른 작은 컬트인 셈이다.

(...)

그리고 각 회사는 이런 매력을 발견하기 위한 환상적인 고용 전략을 고안해 냈다. 소울사이클은 피트니스 트레이너가 아니라 연기자ㅡ댄서, 배우, 인플루언서ㅡ를 스카우트한다. 대중을 사로잡는 방법을 알고 그 역동을 한껏 즐기는 영리한 ‘인싸’를 찾는 것이다.(265p)

 

 

얼핏 보면 신비주의 인스타 사기꾼이 그렇게 큰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저런 사람들을 진심으로 믿을 정도면 심각하게 뭘 모르는 거 아닌가? 하지만 연구자들은 뉴에이지 수사법에 가장 이끌리는 건 생각보다 최신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

셔머가 언급한 연구에서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교육 수준이 가장 낮은 미국인 피실험자들은 귀신 들린 집이나 악마 빙의, UFO 착륙설 등 특정한 초자연적 신앙을 구독할 확률이 가장 높았다. 그러나 질병을 치료하는 마음의 힘 같은 뉴에이지 사상을 믿을 확률이 가장 높은 피실험자 집단은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이들이었다. 심리학자 스튜어트 바이스는 뉴에이지 운동으로 인해 “예전에는 미신에 면역되었다고 여겨지던 인구 집단, 즉 높은 지능과 사회경제적 지위, 교육 수준을 갖춘 이들 사이에 [초자연적] 사상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따라서 그가 말하듯, ‘이상한’것을 믿는 사람이 신앙이 없는 이들보다 덜 똑똑하다는 아주 오래된 믿음은 어쩌면 틀릴 수도 있다.

(...)

똑똑한 사람들이라고 컬트적인 사상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다. 셔머는 오히려 똑똑한 사람들이 “똑똑하지 않은 이유로 도달하게 된 신념을 방어하는 데” 뛰어나다고 말한다. 심지어 회의론자와 과학자를 비롯한 대다수 사람이 뭔가를 믿게 되는 이유는 경험적 증거가 아니다.

(...)

“오히려 유전적 소인, 부모의 선호도, 형제자매의 영향, 또래 압력, 교육 경험, 그리고 인생에 대한 인상 등의 변수가 다양한 사회 문화적 영향과 맞물려 개인의 선호와 감정적 성향을 형성하고, 특정 믿음을 선택하도록 이끈다.”

이 말인즉슨, 똑똑하고 시대의 유행에 예민하다고 해서 온라인 컬트의 영향으로부터 안전한 건 아니라는 뜻이다.(308-309p)

 

 

 

 

ㅡ 어맨다 몬텔, <컬티시> 中, arte

,

2023/5/24

 

 

변이가 누적되어 종의 진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변이가 유전되어야만 한다. 다윈은 일찍이 <종의 기원>에서 표현형의 변이를 품종에 의한 변이(유전변이)와 환경에 의한 변이로 구분했고 야생에서나 인간에 의한 품종 개량 과정에서 관찰되는 많은 변이 중에서도 유전변이에 주목했다. 그리고 유전변이만이 환경의 동요에도 흔들리지 않고 새로운 종을 탄생시킬 수 있는 유일한 재료임을 분명하게 제시했다.

(...)

생명의 연속성은 유전의 성공으로부터 나오며 생명의 다양성은 유전의 실패에서 나온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세포도 실수를 하고 실패를 한다. DNA 복제 과정에서 실수를 하거나 DNA를 그대로 보존하는 데 실패하기도 한다. 진화란 이러한 유전의 실수와 실패를 창의적으로 응용하여 새로운 프로그램을 창조해낸 생명의 프로그래머라고 할 수 있다. 수십억 년 동안 생명체의 실수와 실패가 진화 프로그래머에 의해 창조적으로 누적되며 지구상에 무수히 다양한 유전체의 생명 프로그램들이 등장했다.(29-30p)

 

 

한때 높은 치사율로 악명을 떨쳤던 HIV 바이러스 감염은 흔히 ‘칵테일 요법’이라고 불리는 고활성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법을 통해 일종의 만성질환처럼 관리 가능한 대상으로 자리 잡았고 감염자들의 생존 기간도 훨씬 길어지게 됐다. 하지만 동시에 HIV 바이러스를 가진 사람들이 수십 년 동안 생존하면서 HIV도 숙주의 몸에서 진화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게 됐다.(72p)

 

 

그러나 지능 연관 유전변이의 발견이 곧 ‘유전자 결정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우선 지능의 유전율은 100퍼센트가 아니라 절반 정도이다. 즉, 지능 차이의 상당 부분은 환경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더 중요한 점은 유전율과 유전변이의 효과 또한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암기 중심의 교육 과정이라는 ‘환경’에서 기억을 강화시키는 유전변이는 학력을 늘리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지만 암기에 덜 의존하는 교육 과정으로 환경이 변하면 유전변이의 효과 또한 감소될 수 있다. 따라서 지능의 유전학은 우생학적으로 해석될 위험성이 있지만 오히려 유전적 다양성을 반영하는 새로운 교육 환경을 마련하기 위한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 국가가 장애 아동에게 특수 교육을 제공할 의무를 지니는 것처럼, 유전적 차이가 교육을 통해 불평등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교육 시스템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집단유전학은 유전자와 교육 환경의 상호작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여 ‘유전적으로 정의로운’ 교육 시스템을 찾아 나가는 데 기여할 수 있다.(88-89p)

 

 

암세포는 왜 그리고 어떻게 출현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세포 생물의 몸에서 끊임없이 작용하는 진화의 압력 때문이다. 변이와 경쟁으로 생식의 차별적 성공이 이뤄지는 곳에서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필연적으로 진행된다. 다세포 생물의 몸은 바로 이 조건을 완벽히 충족한다. 체세포들은 같은 수정란에서 만들어진 ‘클론’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DNA를 지닐 수 있다. DNA 복제 과정에서 생기는 오류, 방사선, 활성산소, 화학 물질 등으로 인한 손상으로 DNA 염기서열이 변화하는 돌연변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DNA 메틸화와 염색질을 구성하는 히스톤 단백질의 변화 등을 통한 후성유전적 변이가 일어나기도 한다.

문제는 변이 중 일부는 세포 증식을 증가시키며 이러한 변이를 획득하여 주어진 의무를 저버리고 세력 확장에 골몰하는 세포들이 몸속에서 더 높은 적응도를 지닌다는 것이다.

(...)

복잡한 대도시에서 무수히 많은 신호등이 체계적으로 작동하여 교통의 흐름을 조절하는 것처럼 다세포 생물의 몸에서 성장 촉진 신호와 성장 억제 신호는 정확한 때와 장소에서 만들어지고 전달되어 조직을 이루는 세포의 분열을 통제한다.

(...)

따라서 무한히 증식하는 암세포가 되기 위해서는 세포 분열을 조절하는 신호 체계의 통제를 벗어나거나 이를 조작해야 한다. 암의 두 가지 특징, ‘성장 촉진 신호의 자기 충족’과 ‘성장 억제 신호에 대한 둔감화’는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전환이다.

(...)

앞의 세 가지 전환을 모두 이뤄내더라도 세포 군집이 폭발적인 증식 능력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장벽을 더 넘어야 한다. 바로 텔로미어의 마모다. 정상 세포는 무한히 분열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섬유아세포를 체외에서 배양하면 세포들은 분열을 거듭하다 점점 그 속도가 느려지면서 결국 증식을 멈추고 세포 노쇠 단계에 접어든다.

(...)

세포 분열 신호등을 조작하더라도 무한대의 증식을 이어가지 못하고 위기에 빠지는 이유는 세포 분열을 거듭할 때마다 염색체 양 끝 DNA를 이루는 텔로미어 사슬이 점점 짧아지다 완전히 마모되기 때문이다. 텔로미어가 다 닳아버린 세포는 염색체 간의 비정상적인 융합을 막지 못해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위기 단계에 빠진 세포 중 극소수가 이 위기를 극복하고 무한히 분열하는 ‘불멸의 세포’가 된다.(208-214p)

 

 

인간에서도 다른 모든 조절 기제와 마찬가지로 성별 결정 체계 또한 완벽하지 않다. 유전변이 등으로 성별 결정 기작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성염색체, 생식선, 생식기 등에서 양성의 특징이 혼재되어 나타나는 성 발달 이상(DSD)이 일어날 수 있다.

성별 구분이 모호한 DSD가 드물게 일어나는 ‘몸’의 성별과 달리 ‘마음’은 오히려 본질적으로 성별 구분이 모호하다. 마음의 성별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려면 여성과 남성의 생식기 사이에서 관찰되는 것처럼 마음의 물리적 기반인 ‘뇌’에 불연속적이고 분명한 차이가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해 뇌를 이루는 세포의 수, 종류, 그리고 이들 사이의 연결, 즉 ‘신경회로’의 구성과 작동에 있어 ‘여성의 뇌’와 ‘남성의 뇌’가 구분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차이는 기술적으로 검토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분석하기 난해하다. 신경회로는 다른 어떤 생물학적 체계보다도 환경적인 요소, 특히 ‘경험’에 의해 큰 영향을 받으며 시시각각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호르몬이 뇌의 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고 또 인지와 행동에 있어서 양성 간의 평균적인 차이가 분명 관찰되지만 이러한 ‘평균적인’차이로부터 마음의 성별을 이분법적으로 규정하는 것에는 많은 위험이 따른다. 오히려 마음의 성별은 마치 ‘키’처럼 연속적인 스펙트럼으로 바라보는 것이 실제 관찰되는 현실에 더 가깝다.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성’과 ‘젠더’의 불일치다. 일반적으로 성과 젠더가 구분되어 사용될 때 전자는 생식 기관을 비롯한 ‘신체적인’ 성별을 의미하고, 후자는 자신을 스스로 어떤 성별이라고 느끼고 표상하는지에 의해 결정되는 ‘심리적인’ 성별에 해당한다. 몸의 성별과 마음의 성별, 즉 젠더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을 시스젠더로, 서로 상반되는 사람을 트랜스젠더라고 분류할 수 있는데 미국에서 진행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인 10만 명당 약 390명이 트랜스젠더로 추정된다고 한다. 전체 인구로 환산하면 미국에서만 무려 100만 명 내외의 사람이 성과 젠더가 불일치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성적 지향성의 다양성 또한 몸의 성별에서는 관찰하기 어려운 특징이다. 정자와 난자의 이형접합만이 성체로 발생할 수 있는 수정란을 형성하는 것과 달리 심리적인 차원에서의 성적 지향성은 다른 성별뿐만 아니라 같은 성별 혹은 두 성별 모두를 향할 수도 있다. 이러한 성적 지향성의 다양성은 젠더 정체성의 차이보다 훨씬 빈번하게 나타난다. 인구의 2퍼센트에서 10퍼센트 정도가 동성애 혹은 양성애 성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39-241p)

 

 

 

 

ㅡ 이대한, <인간은 왜 인간이고 초파리는 왜 초파리인가> 中, 바다출판사

,

2023/5/19

 

 

음식 얘기는 한 권의 책을 위한 구색이고 생각보다 너무 기초적인 얘기를 함. 대상 독자가 내 예상보다는 어리거나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쓴 책인 듯.

 

 

요즘 미국을 비롯한 부자 나라 사람들은 ‘바나나 리퍼블릭’을 의류 브랜드 이름으로만 알고 있다. 하지만 이 표현은 원래 부자 나라의 거대 기업들이 가난한 개발도상국을 거의 완전히 장악했던 어두운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였다. 이 의류 브랜드의 이름은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 좋게 봐 줄 수도 있지만 나쁘게 보자면 굉장히 모욕적이고 불쾌하다. 뭐랄까, 커피 원두를 갈아 주는 힙한 가게를 ‘사탄의 공장’이라고 부르거나 고급 선글라스 가게를 ‘암흑의 대륙’이라고 부르는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사탄의 공장’은 영국 산업 혁명 초기에 노동자 착취가 심한 공장들을 일컬은 말이다. 이 시기에 공장들이 물레방아를 이용한 수력을 쓴 곳이 많아서 공장을 ‘물레방앗간’이란 뜻의 ‘Mill’이라고 많이 불렀다.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시 <예루살렘>에서 ‘dark satanic mills’라는 표현을 써서 유명해졌다. ‘암흑의 대륙’은 유럽인이 19세기 이전의 아프리카를 부르는 표현으로 유럽 중심적 무지함이 배어 있다)(188p)

 

 

요컨대 서로 다른 필요를 가진 사람들을 모두 똑같이 대하는 것ㅡ채식주의자에게 닭고기 요리를 준다든지, 복강병을 가진 사람에게 밀가루 빵을 준다든지, 남녀 화장실을 같은 크기로 만든다든지 하는 것ㅡ은 근본적으로 불공평한 일이다. 아에로플로트 승무원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서로 다른 필요를 가진 사람을 다르게 대하는 것은 특별 대우가 아니다. 그것은 공평함의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다. 기내식 메뉴에 채식 요리를 포함시키는 것, 글루텐이 들지 않은 빵을 준비하는 것, 여자 화장실을 더 크게 더 많이 짓는 것은 채식주의자나 만성 소화 장애를 가진 사람이나 여성을 특별 대우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들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서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위치를 보장해 주는 일일 뿐이다.(238-239p)

 

 

우리는 우리 주변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은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뭔가를 당연시하면 그것의 중요성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된다.

(...)

경제학에서 일어나는 비슷한 현상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우리 가정과 공동체에서 행해지는 무보수 돌봄 노동이다.

가장 널리 쓰이는 경제 척도인 GDP(국내총생산)는 시장에서 교환되는 것만 포함한다. 경제학에서 사용되는 모든 측정법과 마찬가지로 GDP도 여러 문제점이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 극도의 ‘자본주의적’관점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다양한 가치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뭔가가 사회에서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를 결정할 때 시장에서 어떤 가격에 거래가 되는지를 기준으로 삼을 수 밖에 없다는 관점이다.

시장 활동만을 계산하는 관행은 경제 활동의 엄청나게 큰 부분을 보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개발도상국에서는 농업 생산물의 큰 부분이 계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많은 농민이 자기가 기른 작물을 팔지 않고 일정량을 소비하는데 농산물 생산량에서 이 부분은 시장에서 교환되지 않으므로 GDP 통계에 포착되지 않는다. 가정과 공동체에서 임금을 받지 않고 행해지는 돌봄 노동 역시 이런 식으로 시장에 기초해 생산량을 측정하면 부자 나라와 개발도상국 모두에서 GDP에 포함되지 않는다. 아이를 낳아서 기르고 그들이 학습을 도와주고, 노인과 장애인을 돌보며, 음식을 만들고, 청소와 빨래를 하고, 그에 더해 가정을 꾸려 나가는 일 말이다. 이런 활동을 시장 가격으로 환산하면 GDP의 30~40퍼센트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GDP에 전혀 포함되지 않고 있다.

(...)

무보수 돌봄 노동을 담당하는 사람 중에는 여성이 큰 비율을 차지한다. 따라서 돌봄 노동을 경제 활동으로 계산하지 않으면 여성이 우리 경제ㅡ그리고 사회ㅡ에 하는 공헌이 과소평가될 수밖에 없다. 가사 노동의 존재 자체를 ‘보지 않으려는’경향은 ‘직장맘’ 또는 ‘워킹맘’이라는 표현에도 드러난다. 마치 집에 있는 엄마들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기본으로 ᄁᆞᆯ고 있는 말 아닌가. 이런 잘못된 표현 때문에 집에서 여성이 감당하는 돌봄 노동의 양이 밖에서 남성 배우자가 하는 임금 노동의 양보다 더 많은 경우가 빈번함에도 집에 있는 여성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성차별적 편견이 강화된다.(255-257p)

 

 

 

 

ㅡ 장하준,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中, 부키

,

2023/5/18

 

 

“그럴 때는 그 사람을 떠나면 돼?”

“가출 숙련자의 입장으로 볼 때, 어떨 것 같아?”
“언제나 도망치는 게 가장 편하지. 하지만 내가 더 오랫동안 그 사람과 지내고 싶다면, 그리고 이해를 받고 싶다면, 그땐 이야기를 해야지.”

“그렇게 잘 알면서 왜 애인이랑은 그걸 못 해.”

“그게 달라. 나도 머리로는 아는데 쉽게 안 되더라고. 네가 대본을 외우긴 다 외우는데 몸으로는 못 하는 것처럼.”(115p)

 

 

 

ㅡ 이은용,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中, 제철소

,

2023/5/19

 

조금 뒤죽박죽인 순서였지만 이제 출간된 9권은 다 읽었다. 인물들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니 너무 재밌네. 마이클 코널리의 시리즈를 시작할지 헨닝 만켈의 시리즈를 시작할지 생각해봐야겠다.

 

 

ㅡ 마이 셰발, 페르 발뢰, <잠긴 방> 中, 엘릭시르

,

2023/5/18

 

굉장히 과격한 주장인 듯하나 읽어보면 수긍되는 지점들이 있다.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사적인 핵가족과 오이디푸스 서사(어머니, 아버지, 아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통해 자아가 형성된다는 걸 상상하기가 어렵다.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아가 항상 이런 식으로 형성된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원한다면 다른 방식으로도 자아를 형성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만약 당신이 “가족을 폐지하라”는 표현에 거의 반사적으로 “그치만 난 우리 가족을 사랑한다구”같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행운아라는 걸 알아둘 필요가 있다. 당신이 가족을 사랑한다니 참 다행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운이 좋은 건 아니다, 그렇지 않겠는가?

가족을 사랑한다는 건 가족 폐지에 찬성하는 것과 상충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상대가 충분한 돌봄뿐만 아니라 자율성을 만끽할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다ㅡ자본이 숨통을 조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이런 풍요가 가능하기만 하다면 말이다. 만약 이런 사랑의 정의가 옳다면, 내가 “진짜” 어머니라는 사실을 근거로 아이가 접근할 수 있는 어머니(어느 젠더든 간에)의 수를 제한하는 건 이름값을 제대로 하는 사랑이라고 하기 힘들다. 어쩌면 당신은(핵가족에서 성장했다면)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할당된 기능이 얼마나 억압적인지 은연중에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10-11p)

 

 

요컨대 가족이 없으면 부르주아 국가도 없다. 가족의 기능은 복지를 대신 수행하고 채무자의 보증을 서는 것이다. 가족은 개인의 선택이니, 개인의 탄생이니, 개인의 욕망 같은 허울을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국가의 노동력 재생산을 저렴하게 관장하고 빚을 확실하게 갚게 하는 수단이다.

하지만 잠깐, 가족은 이미 위태롭지 않은가! 혹은 그렇다는 전설이 있다. 요즘 애들은 자식을 낳으려고 하질 않아, 요즘 애들은 가족을 돌보질 않아, 그냥 부모 집에서 살아, 집 나가면 전화도 안 하고, 자기 집을 사려는 꿈을 안 꿔, 결혼도 안 하려고 하고,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가정을 꾸릴 기반을 다지지도 않고. 하지만 생각해보라. 가족은 위태롭지 않은 적이 없었다.(19p)

 

 

장담하건대 당신은(특정한 계급에 속한) 한 명, 두 명, 세 명, 또는 네 명의 개인에게 임의로 신생아를 떨어뜨리는 복권 시스템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다. 그들에게 아기를 삶에서 가장 중요한 20여 년 동안(아기 자신의 동의도 없이) 맡겨놓고, 아기가 자신의 육체적 생존, 법적인 존재 상태, 경제적 정체성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만들고, 또 그들의 자기 인생을 노동에 바치는 이유가 되게끔 강제하는 시스템 말이다. 당신은 사랑하는 아이에 대한 헌신이 성인들(특히 여성)의 족쇄가 되는 규범보다 나은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다. 함께 머리를 맞대면 우리는 인간“본성”에 대한 다른 설명을, 사회적 재생산을 조직하는 다른 방식을 발명할 수 있다. 오늘날에 가족은 허울을 걷어내고 보면 국가와의 경제적 계약 또는 노동자 교육 프로그램일 뿐이다. 힘을 합치면 우리는 합의에 기반한 세대 초월적인 공동 거주 양식을, 일상의 노동이라는 부담을 분배하고 최소화하는 대대적인 방법들을 확립할 수 있다.(38-39p)

 

 

ㅡ 소피 루이스, <가족을 폐지하라> 中, 서해문집

,

2023/5/17

 

 

 

“살면서 말이지,” 그가 말한다. “난 내가 뭘 안 원하는지밖에 몰랐어. 늘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 하나가 있거든, 그래서 항상 생각을 해, 이 가시만 빠지면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 생각을 해보겠다고. 한데 막상 그 가시가 빠지고 나면 또 텅 빈 기분이 되더라고. 그러다 금세 또 새로운 가시가 옆구리를 파고들지. 그러면 또다시 그 가시에서 벗어날 생각밖에 할 수가 없는 거야. 도무지 내가 뭘 원하는지 생각할 시간이 없어.”(31p)

 

 

“어떤 무리에 속한 사람이든 여느 누구만큼이나 똑같이 좋은 사람들이다.” 키츠가 스물다섯도 되기 전에 알았던 사실을 나는 영영 깨닫지 못할 것이었다. 이제 나를 기다리는 건 셰익스피어식 인생이었다. 그렇게 경험을 확실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키츠는 최소한의 인간적 교류만으로도 스스로 확보해둔 명료한 내면에 가닿을 수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과 그게 가능했다. 자기와의 대화가 자양분이 되는 정신의 천국에 그는 살았던 것이다. 나는 망명이라는 연옥에 갇혀 앞으로도 평생 마침맞은 대화 상대를 찾아 헤맬 텐데.(65p)

 

 

 

ㅡ 비비언 고닉, <짝 없는 여자와 도시> 中, 클항아리

,

2023/5/11

 

 

‘잠긴 방’ 한 권 남았다. 테러리스트는 내년에 나올려나?

 

 

그런데도 콜베리는 두 사람을 가급적 빨리 붙잡아야 할 것 같다는 직감을 떨칠 수 없었다.

왜?

나도 어느새 경찰관의 직업병에 잡아먹힌 거지, 콜베리는 우울하게 생각했다. 이십삼 년 동안 일하다 보니 인간이 완전히 망가진 거지. 더는 보통 사람처럼 생각하지 못하는 거지.

이십삼 년간 매일같이 경찰관들과 접촉하다 보니, 이제 그는 다른 세상과 제대로 된 관계를 유지할 능력을 잃었다.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에도 솔직히 완벽하게 자유로운 기분은 아니었다. 마음속에 늘 뭔가 찜찜한 것이 있었다. 콜베리가 가족을 이루기까지 아주 오래 기다렸던 건 경찰이 여느 직업과는 다르기 때문이었다. 경찰은 전적으로 헌신해야 하는 일이었다. 한순간도 맘 편히 쉴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비정상적인 상황에 놓인 사람들과 매일 대면하다 보면 결국 자신도 비정상이 되기 마련이었다.

압도적인 다수의 동료들과는 달리 콜베리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명료하게 꿰뚫어 보고 분석할 줄 아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놀랍고 또한 안타깝게도, 그는 또렷한 시각으로 그렇게 했다. 콜베리의 문제는 관능주의자인 동시에 책임감 있는 인간이라는 점이있다. 그럼에도 감수성이나 개인적 관여 따위는 열의 아홉의 경우에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없는 직종에서 일한다는 점이었다.

왜 경찰관은 대체로 다른 경찰관하고만 어울릴까?

그러는 편이 더 쉽기 때문이다. 그래야 시민들과의 거리를 지키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경찰 내부의 기괴한 동료애를 간과하기도 쉬웠고, 실제로 그런 현상이 오랫동안 억제되지 않고 커져만 왔다. 그것은 곧 경찰관들이 자신이 보호해야 하는 사회, 무엇보다 자신도 그 일원이어야 하는 사회로부터 동떨어져서 산다는 뜻이었다.

예를 들면, 경찰관은 다른 경찰관을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예외가 있어도 극소수였다.(205-206p)

 

 

 

ㅡ 마이 셰발, 페르 발뢰, <폴리스, 폴리스, 포타티스모스!> 中, 엘릭시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