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26

 

 

“오해가 없도록 말해두지만 문윤은 강간 장면은 쓰지 마라, 라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강간은 범죄이므로 결과적으로 강간을 비난하는 내용이면 허용됩니다. 즉 작품 속에서 범죄를 정당화하지 않고 고발하는 내용이면 되는 겁니다. 선생 작품은 마치 강간이 옳은 행위인 양 그려져 있어요.”

“말도 안돼요. 소설은 옳다 그르다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건을 있는 그대로 쓸 뿐, 사건을 심판하는 게 아니에요. 진실은 당신이 말하는 올바름과는 다른 곳에 있으니까요. 그건 독자에게도 전해질 겁니다. 왜 당신들은 요즘 헐리웃 영화처럼 정치적 올바름에 갇힌 듯한 멀쩡한 말만 하는 겁니까. 어째서 그런.”(71-72p)

 

 

ㅡ 기리노 나쓰오, <일몰의 저편> 中, 북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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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0

 

 

그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쩌다 슈거하이츠에서 난장판을 벌였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 속에 남은 것이라고는 시커모어가에 있는 그의 집뿐이었다. 그리고 트렁크도, 트렁크를 묻은 것도. 존 로스스타인에게서 뺏은 200달러가 주머니에 있었고 그는 머리가 아프고 외로워서 맥주를 사러 조니스에 갔었다. 점원에게 뭐라고 말을 걸었던 건 분명한데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야구 얘기를 했나? 그건 아니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그라운드로그스 야구모자가 있었지만 야구에 대한 관심은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그이 후로는 거의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뭔가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따름이었다. 주황색 점프슈트를 입고 눈을 뜨면 누구라도 쉽게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그는 침대로 기어가서 그 위로 올라가 무릎을 가슴에 대고 끌어안았다. 유치장 안이 추웠다.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 점원한테 좋아하는 술집이 있느냐고 물어봤을지 몰라.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데가 있느냐고. 그리고 거기 갔겠지, 안 그래? 가서 퍼마셨겠지.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뻔히 알면서. 그냥 몇 잔 마신 것도 아니고 일어나려고 했다가 고꾸라지면서 얼굴을 갈아먹을 정도로 마셨겠지.

분명 그랬겠지.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뻔히 알면서. 그것만으로도 심란한데 그 뒤로 어떤 미친 짓거리를 벌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으니 더욱 심란했다. 그는 세 잔 마시고 나면(두 잔 만에 그렇게 될 때도 있었다.) 시커먼 구멍 속으로 추락해서 다음 날 숙취는 있지만 정신은 멀쩡하게 깨어날 때까지 밖으로 기어나오지 못했다. 이른바 필름이 끊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필름이 끊기면 십중팔구···· 깽판을 쳤다. 그는 깽판을 치다 리어뷰 소년원 신세를 졌고, 여기 신세를 지게 된 것도 분명 그 때문일 것이었다. 여기가 어딘지는 알 수 없었지만.

(...)

하지만 그가 무슨 수로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는 술에 취하면 어느 날이건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날’로 변신했다. 그 검은 짐승이 등장했다. 십 대 때는 그 짐승이 슈거하이츠의 그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고 무음 도난 경보에 반응해 출동한 경찰에게 야경봉으로 맞아서 기절할 때까지 반항했었다.(116-119p)

 

 

 

ㅡ 스티븐 킹, <파인더스 키퍼스> 中,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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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4/20

 

 

어떤 곳을 지옥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그 지옥에서 어떻게 빼내 올 수 있는지, 그 지옥의 불길을 어떻게 사그라지게 만들 수 있는지까지 대답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타인과 공유하는 이 세상에 인간의 사악함이 빚어낸 고통이 얼마나 많은지를 인정하고, 그런 자각을 넓혀 나가는 것도 아직까지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일인 듯하다. 이 세상에 온갖 악행이 존재하고 있다는 데 매번 놀라는 사람, 인간이 얼마나 섬뜩한 방식으로 타인에게 잔인한 해코지를 손수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증거를 볼 때마다 끊임없이 환멸을 느끼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인물이다.

나이가 얼마나 됐든지 간에, 무릇 사람이라면 이럴 정도로 무지할 뿐만 아니라 세상만사를 망각할 만큼 순수하고 천박해질 수 있을 권리가 전혀 없다.(185-186p)

 

 

 

ㅡ 금정연, <그래서... 이런 말이 생겼습니다> 中, 지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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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4/13

 

 

읽음.

 

 

 

ㅡ 노지양, 홍한별, <우리는 아름답게 어긋나지> 中,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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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4/12

 

 

오랜만에 짧은 책 한 권을 읽었다.

책을 의식적으로 읽기 시작한 이후로 이렇게까지 장기간 책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적은 처음인 것 같다. 처음에는 걱정도 되고 의무적으로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이번에는 그 스트레스가 오히려 더 꺼리게 만든 것 같다. 책 안 읽는 게 뭐 대수라고 정 읽고 싶다면 자연스레 다시 펼쳐들겠지.

 

 

우리가 영화사의 공부를 통해 배우는 걸작들의 계보는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계보가 아닙니다. 끊임없는 양의 되먹임을 통해 강제적으로 만들어진 탑이죠. 그래서 중요해요. 모두가 공유하는 일반 교양이니까요. 하지만 그 작업 바깥엔 이들만큼, 심지어 이들보다 더 훌륭한, 적어도 더 재미있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

걸작만으로 이루어진 영화 경험은 그냥 빈약해요. 이건 여러분도 알고 있습니다. 걸작만 보시나요? 그러고 싶으신가요? 아니잖아요. 하지만 옛날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갑자기 까다로워집니다. 세월의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영화들은 볼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그럴 리가요. 모든 경험은 어느 정도 잡다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한 것도 보고 나쁜 것도 봐야 자신의 경험을 통제할 수 있지요. 그리고 형편없는 영화, 평범한 영화를 보는 것 역시 중요한 경험입니다. 전 과거의 평범한 영화들을 보는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편입니다. 종종 이들의 역사적 데이터로서의 가치는 걸작보다 더 큽니다.

(...)

그중에는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경험도,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경험도 있습니다. 모험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요.(32-34p)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영화를 보다 보면 작품을 만든 사람에게 경외감 같은 걸 느낄 때가 종종 있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그런 마음은 작가가 아닌 작품을 향하도록 해라.(설사 대단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해도) 인간은 그리 대단하지 않다.’”(112p)

 

 

 

ㅡ 듀나,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 中, 구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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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1

 

 

1990년대에 캐나다에서 통계학을 공부하던 알라나는 아직 성경험이 없고 외로우며 섹스 파트너나 애인을 찾지 못하는 모든 남녀를 위한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플랫폼에 ‘알라나의 비자발적 독신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붙였고, 이 이름은 곧 인셀incel이라는 약어로 축약되었다. 자존감이 낮은 외로운 개인들에게 자신감과 위로를 전하자는 선의에서 나온 계획이었다. 그러나 인셀은 20년이 조금 안돼서 완전히 다른 곳으로 변해버렸다.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아진 이 커뮤니티는 여성을 매력적인 ‘스테이시’와 덜 매력적인 ‘베키’로 나누고 남성을 매우 남자다운 ‘알파메일’과 남성성이 약한 ‘제타메일’, 또는 ‘소이보이’로 나누고 시작했다. 처음에 알라나는 ‘러브 샤이’와 ‘에프에이FA’ 같은 용어를 사용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비인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언어가 더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제 여성은 ‘여성’과 ‘휴머노이드’를 합쳐서 만든 ‘피모이드’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긍정적인 의도에서 시작된 알라나의 자기 계발 커뮤니티는 사실상 여성을 증오하고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외로운 개인들의 위험한 에코체임버로 변했다.(87p)

 

 

다른 온라인 상담 게시판과 달리 본인이 겪는 문제의 조언을 구하려고 레드필 커뮤니티를 방문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결국 이곳에서 꽤 오랜 시간을 머무르게 된다. 이들은 점차 세뇌되어 코치와 다른 회원들이 규범과 이념을 내면화한다.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정체성과 태도, 행동의 변화는 이러한 온라인 사회화 기구가 얼마나 효과적이고 위험한지를 잘 보여준다. 나는 트래드와이브즈에서의 경험을 통해 정반대의 이념 성향도 극단주의자들이 조종 전략을 확실히 막아주지 못한다는 것을 배웠다. 나의 이념 성향은 트래드와이브즈의 성향과 이보다 다를 수는 없을 만큼 달랐다. 그러나 그런 나도 이들의 강력한 집단 역동에 거의 말려들 뻔했다. 나는 극단주의자에게 뚜렷한 특성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계급이나 젠더, 인종, 정치적·종교적 견해는 그 사람이 극단주의자에게 길들여질지 아닐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약해진 시기에는 모두가 극단주의자에게 이용당할 수 있으며 취약함은 상당히 일시적인 개념일 수 있다. 유일하게 효과적인 방패는 바로 정보다. 우울과 공황 발작 같은 다른 무의식적 과정과 마찬가지로 각 단계와 약한 부분, 사고의 왜곡을 인지하는 것은 머릿속에서 시작된 인지적 악순환을 끊는 데 매우 중요한 도구다. 결국 내가 트래드와이브즈를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레드필위민 게시판에 들어가기 전에 급진화의 단계와 징후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98-99p)

 

 

2017년 여름 이후 이슬람국가는 지하드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정책을 크게 바꾸었다. 이제 이슬람국가는 여성을 무하지랏(여성 이민자)으로 보지 않고 무자히닷(여성 전사)으로 인정한다. 처음에 여성 전투원에 반대했던 <루미야>는 2017년 7월 호에서 여성들에게 우후드 전투에서 선지자 무함마드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었던 움 아마라의 선례를 따르라고 권고했다. 2017년 10월 이슬람국가는 여성의 지하드 참여가 의무라고 공식 선언하기까지 했다. 전례 없는 조치였다.

지하드가 더는 물리적 폭력의 형태를 띨 필요가 없다는 사실 덕분에 여성들은 가상의 전선에서 온라인 회원 모집과 미인계, 심지어 해킹 같은 핵심 임무를 맡을 수 있게 되었다.

(...)

온라인 에코체임버의 등장은 극단주의 운동이 신입 회원을 세뇌시키고 집단 의존성을 강화하고 집단 가치를 내면화시키는 방식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정체성이나 불안과 관련된, 극도로 개인적인 문제에 대처하는 방식을 조언하는 플랫폼들은 유해한 이념으로 향하는 흔한 관문이다. 레드필위민처럼 공공연하게 연애 관계에 대해 조언하는 게시판과 ‘테러를 실행하는 자매들’처럼 비밀리에 여성에게 상담을 제공하는 채팅방은 모두 극단주의 네트워크로 이어지는 문턱 낮은 입구 역할을 한다. 개인의 성생활과 연애 생활보다 더 사적인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이러한 장소들은 신입 회원을 끌어들일 뿐만 아니라 친밀한 내집단 관계를 형성하고 신입의 정체성을 다른 회원의 정체성과 결부시킴으로써 강력한 잠금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 목표는 신입 회원이 집단에 감정적으로 얽매이게 함으로써 그곳을 나가는 것을 최대한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115-117p)

 

 

대략 온라인 사용자의 40퍼센트가 가볍거나 심각한 온라인 괴롭힘을 당했으며 70퍼센트 이상이 괴롭힘을 목격했다. 뉴스 기사의 댓글창을 조금만 읽어보아도 혐오 표현이 디지털 시대에 어디에나 존재하는 현상이라는 환상에 굴복하기 쉽다. 그러나 소셜미디어 어디에서나 보이는 혐오는 현실을 심각하게 호도한다. 많은 경우 혐오 콘텐츠를 퍼뜨리는 것은 일반적인 온라인 사용자가 아니며 극단주의 비주류인 극우가 뉴스 기사의 혐오 댓글을 거의 독점하고 있다.

실제로 아주 적은 소수가 대부분의 온라인 혐오 표현을 생산한다. 페이스북 커뮤니티 #ichbinhier(이히빈히어)와 함께한 연구에서 전략대화연구소는 모든 활성화 계정의 5퍼센트가 페이스북의 독일 뉴스 기사 댓글란에 있는 혐오 댓글의 ‘좋아요’ 중 50퍼센트 이상을 눌렀음을 발견했다. 이러한 현상이 페이스북 사용자 수백만 명의 머릿속에서 현실을 왜곡하고 온라인 담론에 영향을 미치며 정치인과 언론인에게 압박을 가한다.(166p)

 

 

ㅡ 율리아 에브너, <한낮의 어둠> 中,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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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6

 

나는 딱 여기까지만.

 

 

 

다차원의 다중 우주는 실제로 관측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과학자들이 다중 우주론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중 우주론을 전제할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점 때문이다. 인류가 현재까지 답하지 못한 우주에 대한 수많은 질문이 다중 우주를 가정할 때 강력한 정합성으로 설명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질문은 이 것이다.

“왜 우주는 다른 모습이 아니라 하필이면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물리학자들에게 매우 난처한 질문이다. 그것은 우리 우주의 모습이 매우 임의적이기 때문이다.(77p)

 

 

예상 가능한 일이지만, 창조론을 옹호하는 종교인들에게 미세 조정 문제는 환영할 만한 논쟁점이었다. 그들은 이것이 신이 우주에 개입한 결정적인 증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많은 이가 지금까지도 미세 조정 문제를 신 존재 증명에 활용하고 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미세하게 조정되어 있는 우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이것을 그저 ‘우연’으로 치부하는 것은 전혀 과학적이지 않다.

다행인 것은 다중 우주론이 과학을 구원할 구세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다중 우주론에 따르면 미세 조정은 신에 의한 조율도, 단순한 우연도 아니다. 이것은 우주가 무수히 많기 때문에 발생하게 되는 필연이다. 다중 우주론은 저마다 물리량의 값이 다른 무한히 많은 우주가 존재할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가능한 우주가 있다. 그 수많은 우주는 저마다의 상수 값과, 저마다의 힘의 종류와 세기, 그에 따른 형태, 그에 따른 역사를 가진다. 이러한 다채로운 우주들은 무한한 시간 동안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우리 우주는 그저 수많은 가능성 중 다만 한 가지 형태를 가진 우주일 뿐이다. 지금과 같은 물리량을 가진 까닭에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과 생명이 탄생했고, 지능을 가진 존재가 태어나 자기 우주에 대해 질문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설명 방식을 인간 중심 원리라고 한다.

(...)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왜 우주는 다른 모습이 아니라 하필이면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다음의 질문을 함의한다. ‘왜 오직 우리 우주만이 존재하는가?’‘왜 극도의 우연적인 확률로 인류가 탄생했는가?’ 다중 우주론에 기반을 둔 인간 중심 원리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신의 개입 혹은 우연으로 우리 우주와 인류의 탄생을 설명하는 것은 과학적이지 않다. 우리 우주 외에 다른 우주 전체를 포함하는 ‘대우주’를 고려할 때, 이 질문은 쉽게 해소된다.(80p)

 

이러한 결론이 어떻게 느껴지는가? 상식적이고 타당하다고 생각되는가? 인간 중심 원리와 다중 우주론의 결합은 인류에게 우주와 인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시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정말 과학인가 하는 의심을 품게 만들기도 한다. 영국의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과학과 유사 과학을 나누는 기준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반증가능성이라는 기준을 제시한다. 어떤 이론이 과학의 범위 안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이론이 스스로 틀릴 가능성, 즉 반증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증가능성을 가진 이론이 여러 번의 검증을 거쳐서도 살아남았을 때, 그 이론은 좋은 과학 이론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증가능성은 과학과 유사 과학을 구분하는 좋은 기준처럼 보인다.

(...)

과학과 유사 과학의 차이는 그 이론이 많은 것을 맞히느냐가 아니라 반대로 그 이론이 틀릴 가능성을 갖느냐, 즉 반증될 가능성을 갖고 있느냐에 있다. 점성술과 사주가 과학이 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틀릴 가능성 자체가 없어서다.(82-83p)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자연이 종의 진화 방향을 선택했다는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자연의 손을 빌려 신이 진화에 손을 댄다거나, 혹은 자연이 뛰어난 존재의 탄생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종을 발전시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인공선택과 자연선택의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목적의 유무다. 인간은 이익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생물의 번식에 개입하지만, 자연선택의 주체로서의 자연은 어떠한 목적도 갖지 않는다. 자연은 그 자체로 펼쳐진 환경일 뿐이다. 진화는 목적 없이 이루어진다.(141p)

 

 

 

ㅡ 채사장,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제로 편학> 中, 웨일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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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6

 

하지만 이렇게 혁명의 조건이 무르익어도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아요. 천동설을 신봉하는 과학자들은 자신의 패러다임 안에서도 밤하늘의 움직임을 아무런 모순 없이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지금 봐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복잡한 가정들을 도입함으로써 천동설로 당시의 밤하늘을 완벽하게 그렸고요.

그러니 과학 혁명의 과정은 비판-토론-승복과 같은 이상적인 과정이 아닙니다. 마치 현실의 프랑스 혁명(1789)이나 러시아 혁명(1917)과 같은 정치 혁명이 전쟁을 동반한 피 튀기는 과정이었듯이, 과학 혁명 역시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따르는 과학자 공동체 간의 때로는 죽음도 감수해야 하는 큰 갈등을 거쳐야 합니다.(37p)

 

 

나는 우리 과학자들이 하는 일을 사랑하며 이 점에서 과학이 뭔가 줄 것이 있다고 믿지만, 과학의 힘에 대해서는 덜 오만한 태도를 선호한다. 우리는 과학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에 대해 좀 더 겸손해야 하며, 과학의 객관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과학을 사회 문제들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선언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

“과학은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없다. 그러나 과학이 어느 정도의 지침을 제공하고 특정한 가설을 제외시킬 수는 있다. 과학의 추구에 관여하는 것은 우리가 실수를 덜 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도박이다.” 이 정도면 나를 만족시키기엔 충분하다.(109p)

 

 

ㅡ 강양구, <강양구의 강한 과학> 中,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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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30

 

나쁘지는 않았는데 저자가 예전에 기고했던 아래의 글만 읽었어도 충분했을 것 같다. 이 책은 안 읽어도 저 글은 모두가 읽어보면 좋겠다.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freely465&logNo=222021137517&categoryNo=¤tPage=&sortType=&isFromSearch=true

 

 

 

어른 되기, 나아가 ‘해야 할 일’ 목록을 완료하는 것이 어려운 까닭은 현대 세상에서 사는 일이 그 어떤 시대보다도 쉬운 동시에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해서다. 이 틀을 통해 보니 내가 ‘해야 할 일’ 목록에 붙박아 놓은 일들을 기피해 왔던 이유가 뚜렷해졌다. 우리에겐 매일 해야만 하는 일들의 목록이, 우리의 정신적 에너지가 제일 먼저 할당되어야 하는 영역이 있다. 정신적 에너지는 유한하다. 아닌 척하려고 애쓰다 보면, 그때 번아웃이 찾아온다.(17p)

 

 

문제는 우리가 모든 면에서 흘러내리는 모래 위에 견고한 토대를 지으려 애쓰는 기분이 든다는 점이다.

(...)

우리는 열심히 일해야 하지만, ‘워라밸’을 잘 잡고 있다는 분위기도 함께 풍겨야 한다. 우리는 아이에게 대단히 세심한 어머니여야 하되, 헬리콥터 부모가 되어선 안 된다. 남자들은 아내와 동등한 반려 관계로 지내면서도, 남성성을 유지해야 한다. SNS에서 자기 브랜드를 구축해야 하지만, 삶을 진정성 있게 꾸려나가야 한다. 숨 가쁘게 터져 나오는 뉴스들을 시시각각 알고 의견을 표해야 하지만, 뉴스에서 다루는 현실이 앞서 말한 해야 하는 일 중 하나라도 저해하게끔 놔두어선 안 된다.

우리는 사회적 지원이나 안정망을 거의 누리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 일을 전부 해내려고 아등바등한다. 그래서 밀레니얼 세대는 번아웃 세대가 된다.

(...)

현대사회로부터 ‘경이’라고 불러 마땅한 것들을 선사받았음에도, 우리에겐 잠재력이 막혀버렸다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고투한다. 다른 방법을 모르니까. 밀레니얼에게 번아웃은 밑바탕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길러졌는지, 우리가 세상과 어떻게 상호작용했고 세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일상을 살아가는지 가장 잘 묘사하는 말은 번아웃이다. 번아웃은 우리를 둘러싼 기온과도 같다.(26-28p)

 

 

부머가 나이 먹고 쿨하지 못하다는 게 문제가 아니다. 날이 갈수록 나이 먹고 쿨하지 못해지는 건 모든 세대가 똑같다. 하지만 현재 밀레니얼에게 부머는 점점 더 위선적이고, 공감 능력이 떨어지며, 자신들이 얼마나 쉽게 모든 걸 손에 넣었는지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 자기가 3루타를 쳤다고 생각하는 세대랄까.

(...)

나 역시 이런 반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부머들에게서 온 허다한 이메일을 읽고 나니 분노에 더욱 불이 붙었다. 그러나 미국 중산층의 대확장에 기여한 흐름들에 대해 더 많은 자료를 찾아 읽고 나니 입장이 조금 달라졌다. 베이비붐 세대 전체가 전례 없는 경제적 안정기에 성장하긴 했으나, 그들의 성년기는 우리 세대가 겪고 있는 것과 똑같이 여러 압박들로 얼룩져 있었다. 베이비붐 세대 역시 그들이 부모 세대에게 싸잡아 조롱 받았고, 특히 특출난 권리 인식을 지닌 듯 보였다. 또한 부모들은 삶에 뚜렷한 목적이 없다고 사회로부터 경멸받았다. 중산층 자리를 유지하려는 (혹은 차지하려는) 능력을 두고 공황에 빠지기도 했다.

부머들은 불안했고, 과로했으며, 자신들을 겨냥한 비판에 대해 마음 깊이 분노했다. 그럼에도 부머들은 너그럽게 여기기가 어려운 것은, 그들이 우리와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도 우리 세대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불안이나 일을 대하는 태도가 밀레니얼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80~90년대 베이비붐 세대의 정신은 우리 유년기의 배경에 스며들었다. 우리가 우리의 미래에 대해 품었던 기대들의 토대에도 녹아들었고, 그 미래를 쟁취하기 위한 로드맵이 되기도 했다. 그러니 밀레니얼 세대의 번아웃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우리를 만든 베이비붐 세대가 어떤 배경에서 어떻게 자라왔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번아웃에 빠졌는지 이해해야 한다.(39-41p)

 

 

엄마의 잘못은 아니지만, 우리 가족의 경제적 불안에 대한 나의 반응은 ‘나는 이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라는 결심을 굳히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나는 이별로 인해 커리어와 재정적 안녕이 위태로워지게 두지 않을 것이며, 실제로 그런 적이 없다. 대학원에 가고 싶을 때 대학원에 갔다. 결혼의 필요성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며 여전히 그렇다. 그리고 나는 계속 일하는 것이야말로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패닉하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이런 대응기제는 겉보기엔 논리적으로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수많은 밀레니얼이 증언할 수 있듯, 건강한 대응기제이거나 감당할 수 있는 대응기제이긴 어렵다.(97p)

 

 

좋아할 수 있는 직업은 사람들이 무척 탐을 내기에, 그만큼 지속 불가능하다. 너무나 적은 자리를 두고 너무나 많은 사람이 경쟁하는 상황에서는, 보상 기준이 점차 낮아져도 별다른 여파가 없다. 당신만큼 열정을 불태우며 당신의 자리를 대체할만한 누군가가 언제나 있기 때문이다. 복지를 대폭 축소하거나 없애도 된다. 연봉을 입에 겨우 풀칠한 수준으로 낮춰도 된다. 특히 예술계라면 더 문제없다. 웹사이트에서 콘텐츠 작가에게 돈을 주는 대신, 역으로 작가가 웹사이트에 이름을 올릴 기회를 얻기 위해 무급으로 노동하는 경우도 많다. 한편으로 고용주들은 구직자의 최소 자격 조건을 상향시킨다. 업무에 필요한 조건인지는 상관없다. 더 높은 학력, 더 많은 학위, 더 많은 훈련을 지닌 자만이 후보에 오를 수 있다.

그리하여 ‘멋진’ 직업 및 인턴십은 수요-공급의 법칙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직업 자체가 근본적으로 보람이 없거나, 알량한 보수에 비해 너무 많은 노동을 요구해 있던 열정도 사그라지게 만든대도, 1000:1의 경쟁률을 뚫고 그 일을 해낼 사람으로 어렵게 뽑혔다는 사실 자체가 그 일자리를 더더욱 열망의 대상으로 만든다.(135-136p)

 

 

‘좋아하는 일을 해라’ 윤리에 대한 자라나는 밀레니얼들의 환멸과, 매력 없는 일에 대한 꾸준한 수요 증가가 합쳐져 이런 직업들은 새로운 종류의 광채를 얻고 있다. 나는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 사이에서 직업의 조건과 야망에 관한 “개종”의 순간이 퍼져나가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들은 더 이상 꿈의 직업을 원하지 않는다. 보수가 너무 적지 않고, 과로하지 않아도 되고, 죄책감을 주입해 자신의 권익을 주장하지 못하게 하지 않으면 된다. 어쨌거나, 그들은 모두 좋아하는 일을 하려다가 번아웃에 빠져 하나의 잿더미가 되어버렸으니까. 그들은 이제 그냥 일을 한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일과 맺은 관계를 재설정하고 있다.(159-160p)

 

 

너무나 오랫동안 너무나 열심히 일한 끝에 큰 행운이 따랐고, 나는 임시적 안정에 다다랐다. 일자리가, 사생활이, 연애 관계가 안정되었다. 그리고 나는 많이 읽고 많이 관찰했기에 내가 처한 시나리오에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안정이 물거품이 되리라는 걸 안다.

정말 분명하게 말해두고 싶다. 아이들 자체는 사회적 문제가 아니다. 아이들은 훌륭하다. 부모들에게 번아웃에 대해 물을 때, 나는 그들에게 크나큰 즐거움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도 반드시 물었고, 돌아온 답변들은 매우 숭고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의 구조로 인해ㅡ학교와 일 그리고 젠더가 그 둘과 교차하는 방식으로 인해ㅡ아이들은 소형 폭탄이 되어 버렸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들 자체보다는, 아이들에게 수반되는 기대와 재정적 현실, 노동의 현주소가 폭탄이 되었다.(373p)

 

 

 

ㅡ 앤 헬렌 피터슨, <요즘 애들> 中, 알에이치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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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5

 

 

 

“약한 증거는 더 강한 증거를 결코 이길 수 없다”라는 것이다.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증거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증거보다 늘 약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기적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믿을 만한 근거가 있을 수 없다는 논리다. 기적을 옹호하는 증거가 믿음을 줄 만큼 강력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흄이 내세운 반론의 핵심은 “기적이 자연법칙을 위반한 것”이라는 점이다. 단지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한 사건을 기적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비행기에서 추락해 죽을 상황인데, 기이한 돌풍이 불고 아주 푹신한 곳에 떨어져서 그가 살아남았다면 이는 놀라운 행운이지만 기적은 아니다. 반면 비행기에서 추락한 사람이 날아오른다면 그것은 기적일 수 있다. 흄의 반론에 따르면, 인간은 경험상 자연법칙에 늘 예외가 없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연법칙이 통하지 않았다는 주장, 즉 기적이 일어났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증거는 “경험을 통해 나온 다른 모든 주장만큼 완벽하고 흠이 없다.” 우리의 일관된 경험에 따르면, 중력은 늘 효력을 발휘하고, 열은 늘 얼음을 녹이며, 죽은 자는 부활할 수 없다. 기적을 반박하는 증거는 도처에 있다. 일관된 경험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적의 존재를 반박하는 증거로 손색이 없다. 기적이 일어났다는 증거는 절대로 강력할 수 없다. 기적은 늘 한 사람이나 소수의 증언에 기반을 두고 있기 마련이고, 그러한 증언은 자연의 일관성에 대한 가정을 뒤흔들 만큼의 신빙성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논증도 마찬가지다. 좋은 논증의 전형적인 특징은 규정할 수 있지만, 어떤 논증이 통하고 통하지 않는지를 확정해주는 완벽한 규칙이란 없다. 특정 논증의 타당성을 알아보는 방법은 그것을 다른 논증들과 비교해 검증하는 것이다. 흄이 지식인들과의 우정을 중시하고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도 귀하게 여겼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라플레슈의 예수회대학 교정을 거닐면서 수도사들과 나눈 대화는 흄이 자신의 논증을 검증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논증의 타당성을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은 없다. 최상의 논증은 그저 더 우월한 경쟁 상대를 찾지 못한 논증일 뿐이다.

 

 

의지라는 말의 의미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몸을 다르게 움직이거나 뭔가를 새로 지각한다고 할 때 우리가 느끼고 의식하는 내적인 인상 그 이상은 아니다. — 데이비드 흄, 『인성론』 중

 

흄은 자유의지에 관한 우리의 무분별한 생각의 원인 중 하나가 “자발적 자유”와 “무차별적 자유”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자발적 자유는 행위자가 강요 없이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다. 반면 무차별적 자유는 인과의 필연성에서 벗어나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다. 무차별적 자유는 불가능하다. 인간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자유는 자발적 자유뿐이다. 진정한 의미의 유일한 자유는 “의지의 결정에 따라 행동하거나 행동하지 않을 힘이다. 가령 내가 움직이지 않은 채 계속 있기로 결정한다면 움직이지 않을 수 있고 움직이고자 하면 또 그렇게 할 수 있다. 죄수거나 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러한 자유는 보편적으로 모든 이에게 허용된다.”

 

 

 

ㅡ 줄리언 바지니, <데이비드 흄> 中, AR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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