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25
이 책으로 열린책들에서 나온 '노인과 바다', 론 마스코의 '슬픔의 위안', 박완서의 '친절한 복희씨, 다와다 요코의 '영혼 없는 작가' 등에 관심이 생겼다.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5)에서 천하의 무자비한 폭군도 극장에서는 타인의 불행을 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태생적 동정심을 긍정했다. 그런데 한 저자는 저 대목을 거꾸로 읽는다. 극장에서는 태연한 눈물을 흘리는 인간도 자신이 직접 행하는 악덕에는 무감각해질 수 있다는 뜻으로 말이다. “우리가 스스로 야기한 상처에 대해서는 아무런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야기하지 않은 고통 앞에서는 울 수 있어도 자신이 야기한 상처 앞에서는 목석같이 굴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슬픔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행동한다. 이 경우 타인의 슬픔은 내가 어떤 도덕적 자기만족을 느끼며 공감을 시도할 만한 그런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추궁하고 심문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 슬픔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나를 불편하게 할 것이다.(25p)
사건은, 그것을 감당해낸 사람만을, 바꾼다. 한수는 제가 저지른 일에서 도망쳐버리고 말았지만, 혜화는 스스로 아이를 낳았고 또 잃었다. 이런 종류의 사건이 한 사람을 어떻게 또 얼마나 변화시키는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다 알 수 없으리라.(47-48p)
이 소설을 읽으면 알게 된다. 인간의 뒷모습이 인생의 앞모습이라는 것을.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는 인간은 타인의 뒷모습에서 인생의 얼굴을 보려 허둥대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삶의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저 인생의 얼굴에 스치는 순간의 표정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표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나. 행복한 가족의 어느 가장이 아내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문득 자살을 감행할 수도 있는 게 삶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나. 그냥 보여줄 수밖에, 그 남자의 뒷모습만을 하염없이 보여줄 수밖에.
(...)
그런 소설을 좋아한다. 해석되지 않는 뒷모습을 품고 있는 소설, 인생의 얼굴에 스치는 표정들 중 하나를 고요하게 보여주는 소설. 한 사람의 표정들을 모두 모은다고 그 사람의 얼굴이 되지는 않는다. 한 소설이 건드리는 ‘작은 진실’은 독자적인 것이고, 과학이나 철학이 제시하는 ‘큰 진실’(진리)의 한낱 부분들이 아닐 것이다. 전체로 환원될 수 없는 부분들, 그런 것들의 세계이니까, 소설이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소설을 읽으면 겸손해지고 또 쓸쓸해진다. 삶의 진실이라는 게 이렇게 미세한 것이구나 싶어 겸손해지고, 내가 아는 건 그 진실의 극히 일부일 뿐이구나 싶어 또 쓸쓸해지는 것이다.(55-57p)
그러니 이 시는 결국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라는 두 문장으로 요약된다. 아니, 더 짧게는, “천진하게”와 “물끄러미”의 어긋남에 모든 게 들어 있다. 사내가 창피해했거나 화를 냈거나 혹은 허세라도 부렸다면, 그녀는 희망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내는 “천진하게” 웃었다. 그녀는 깨달았을 것이다. 이 사내는 바뀌지 않겠구나. 나는 이 천진함을 견디지 못하겠구나, 결국 이 사내를 미워하게 되겠구나. 그러니 그녀의 “물끄러미” 안에는 또 얼마나 많은 슬픔이 있었을까.(85p)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92-93p)
나쁜 소설들은 서로 닮아 있다. 떠들썩한 사고가 일어난다. 좌충우돌의 에피소드가 꼬리를 물고 나열된다, 어떤 영웅적인 인물이 이 모든 것을 처리하고 상황을 원래의 질서로 되돌린다, 이런 식이다. 한편 좋은 소설에서 인물들은 대개 비슷한 일을 겪는다. 문득 사건이 발생한다, 평범한 사람이 그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느라 고뇌한다, 마침내 치명적인 진실을 손에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자신이 더 이상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런 식이다.(115-116p)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그리움을 위하여>, 문학동네, 2013, 76쪽)
첫사랑이었던 ‘그 남자’가 이 네 문장과 더불어, 언젠가는 졸업해야 하는 ‘학교’가 되면서, 소설에서 퇴장하고 만다. 대가의 문장이다. 이별을 고하는 자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불가피한 자기 합리화의 양상을 세 개의 단문과 잔인하리만큼 정확한 비유 하나로 장악한다. 비유란 이런 것이다. 같은 말을 아름답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사실’을 영원한 ‘진실’로 못질해버리는 것이다.(131-132p)
소설에서 음악이 흐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노래는 거기 그대로 있는데 삶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사랑은 식고 재능은 사라지고 희망은 흩어진다. 삶의 그런 균열들 사이로 음악이 흐를 때, 변함없는 음악은 변함 많은 인생을 더욱 아프게 한다. 이 세상을 흐르는 음악이, 흐르면서, 인생을 관찰하는 이야기. 그러니까, 인물들이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인물들의 얘기를 듣는 이야기. 말하자면 이 책은 음악 그 자체가 서술자의 역할을 한다. ‘음악 서술자 시점’소설이랄까. 인생은 짧고 음악은 길다.(153p)
저는 모국어에 갇혀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바로 갇혀 있는 자의 생각이었군요. 세상에는 해답을 알기 전에는 문제가 뭔지조차 알 수 없는 종류의 일이 있습니다. 독일에 막 도착했을 때 당신도 그랬던가요.
(...)
외국어를 배우면 모국어를 상대화할 수 있다는 평범한 얘기가 아닙니다. 지금 이 이야기의 층위는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 ‘언어 그 자체’이니까요. 성인이 되어서 낯선 외국어를 배워본 ‘언어의 이주민’만이 ‘언어 자체’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는 것, 그를 통해 모국어가 내 온몸에 기입해놓은 온갖 생각의 코드를 비로소 의식하게 된다는 것, 그렇게 나를 먼저 타자화하지 않으면 타자와의 소통이 힘들다는 것. 당신이 ‘유창한 모국어’에 느낀 구역질이란 ‘자기가 편협함인지를 모르는 편협함’에 대한 구역질이겠지요. 세상에는 문제가 뭔지조차 몰라서 이미 오답을 말해버린 경우도 있군요.(155-156p)
여기에 한 사람을 더 추가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오스카 와일드여야 할 것이다. 출처를 확인하지 못한 그의 아포리즘 중 하나를 나는 기억한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여자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단, 영원히 사랑하는 것만 빼고.” 이런 문장은 일단 한번 듣고 나면 결코 잊을 수 없게 된다. 그의 재기발랄할 문장들을 음미하며 맞장구를 치고 있자니 짓궂은 그가 또 이런 말을 한다. “사람들이 나에게 동의할 때마다 내가 틀렸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아포리즘은 가끔 우리를 속인다. 움베르토 에코는 어떤 아포리즘들은 그것을 뒤집어도 여전히 그럴듯해 보인다고 꼬집는다. 예컨대 “무지란 섬세한 이국 과일과 비슷하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곧바로 시들어버린다”라는 와일드의 문장에서 ‘무지’대신에 ‘앎’을 넣어도 여전히 말이 되지 않는가. “뒤집기 가능한 아포리즘은 지극히 부분적인 진리를 담고 있으며, 일단 뒤집어놓고 보면 종종 거기에서 펼쳐지는 두 개의 전망에서 어느 것도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한다. 단지 재치 있기 때문에 진리처럼 보였던 것이다.”(163-164p)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 3장에서 이런 요지의 말을 한다. 중년의 나이쯤 되면 특정한 단어가 각자의 사전에서 서로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하게 된다는 것. 그래서 그는 ‘이해받지 못한 말들의 조그만 어휘집’이라는 부제하에, 자신이 창조한 주인공들이 특정 단어를 어떻게 달리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구축해낸다. 어떻게 보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전체가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어휘를 각자 달리 이해하고 살아내는 인간(삶)의 몇 가지 유형을 보여주기 위해 쓰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167p)
로버트 펜 워런은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1962)라는 글에서 이런 대답을 했다. “소설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주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소설이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을 줄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173p)
“저는 멘토가 될 자격도 능력도 없지만 이것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꽤 많은 것들이 여러분 뜻대로 안 될 겁니다. 특히 인간관계가 그렇겠죠. 아무리 조심을 해도 분명히 상처를 주거나 받게 될 거예요. 그 난관을, 여러분은 지극히 이기적인 방식으로 돌파하려 할 것이고, 마침내 돌파할 거예요. 인간이니까. 인간이란 그런 존재이니까. 그리고 훗날 회한과 함께 돌아볼 때가 올 텐데, 바로 그때, 뭔가를 배우게 될 겁니다. 그리고 아주 조금 달라질 거예요.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아주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됩니다.”
인간은 무엇에서건 배운다. 그러니 문학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 그때 우리는 겨우 변한다.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 간접 체험으로서의 문학은 다만 나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피 흘릴 필요가 없는 배움은, 이 배움 덕분에 내가 달라졌다고 믿게 할 뿐, 나를 실제로 바꾸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피 흘려 깨달아도 또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반복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러나 믿을 수밖에. 지금의 나는 10년 전의 나보다 좀 더 좋은 사람이다. 10년 후의 나는 더 좋아질 것이다. 안 그래도 어려운데 믿음조차 없으면 가망 없을 것이다. 문학은 그 믿음의 지원군이다. 피 흘리지 않으면 진정으로 바뀌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거꾸로 말하면, 피 흘리지 않고 인생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176-177p)
201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어쩌면 새로운 계몽의 시대로 접어든 것처럼 보이는데, 이 계몽의 물결은 앞서 인용한 칸트의 저 문장에서 ‘지성’의 자리에 ‘감수성’을 넣을 것을 요청한다. 오늘날 ‘미성숙한’(즉, 계몽되지 못한) 인간이라 불리는 이들의 결여하고 있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감수성이기 때문이다. 성숙한(계몽된) 인간이 갖고 있는 감수성이란, ‘젠더 감수성’이나 ‘인권 감수성’이라는 개념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이해하고 행여 그것에 대한 잘못된 지식/믿음(즉 ‘무지’와 ‘미신’)이 ‘차별’의 근거로 작동할 수 있는 상황을 예방하거나 비판할 줄 아는 민감함을 의미한다. 이런 감수성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나에게 그것이 없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와 고통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시적으로 품고 있다는 뜻이다.(188p)
타인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과 그를 외면하지 못하는 결벽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 타인에게 열려 있는 통각이 마비돼 있거나 미발달된 이들의 하는 정치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우리는 그런 시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진정성의 정치’를 믿는 것은 순진한 일일 뿐 아니라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선한 것에서 선한 것이 나오고 악한 것에서 악한 것이 나온다고 믿는 사람은 권력/폭력을 다루는 난해한 기술일 수밖에 없는 정치의 본질을 모르는 ‘정치적 유아’에 불과하다는 것 역시 베버의 가르침이다. 더 나아가 그는, 모든 행위가 그렇지만 정치가 특히 그러하다고 말하면서, 정치 안에는 ‘근본적 비극성’이 있다고 말한다. “정치 행위가 진정으로 내포하고 있는 비극성”이라는 표현에는, 정치 행위의 경우 그 결과가 의도와 동떨어져 있거나 심지어 정반대로 귀결되기도 한다는 취지가 담겨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어무나 어리석고 비열해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고 적었다. 이 말이 감동적인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진정으로 옳은 일’이라는 진리를 또 한 번 되새기게 하기 때문이다. 그 ‘정치에의 소명’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될 때 2017년 이후 대한민국은 결코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191-192p)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다. 어떤 사람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줄 아는 깊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내게는 분명한 기준이 있다. 고통의 공감은 일종의 능력인데, 그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한다. 자의든 타의든 타인의 고통 가까이에 있어본 사람, 많은 고통을 함께 느껴본 사람이 언제 어디서고 타인의 고통에 민감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202p)
저들을 ‘괴물’이라고 간주해버리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나를 그들로부터 완벽하게 구별/구원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윤리적 판타지다. 다른,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끔찍한 이들에게 나도 그런 욕망을 품는다. 비근한 예로 나는 광화문에서 단식 중이던 세월호참사 유가족 앞에서 피자를 시켜 먹는 이들을 보며 저들을 절멸시켜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나는(우리는) 그러지 않는다. 인정과 공존의 윤리를 교육받은 민주 시민이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감히 그런 욕망을 실천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질 수 없어 못 하는 것이기도 하다면?
그러므로 권력은 위험한 것이다. 배제 혹은 절명에의 욕망을 강하게 품고 있는 자가 권력을 가지게 될 때 특히 그렇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언론이 필요한 것이다. 권력자가 자신의 욕망에 패배하지 않도록 그의 욕망을 대신 감시해주는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212-213p)
언어는 문학의 매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의 매체다. 언어가 눈에 띄게 거칠어지거나 진부해지면 삶은 눈에 잘 안 띄게 그와 비슷해진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마음들이 계속 시를 쓰고 읽는다. 시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시가 없으면 안 된다고 믿는 바로 그 마음은 없으면 안 된다.(260p)
‘정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는 릴케의 시 따위를 도대체 왜 읽어야 한단 말인가?’ 나의 오랜 대답은 이렇다. ‘왜냐하면 삶이란 의미를 찾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그 순간에만 겨우 의미를 갖기 시작하는 것이니까.’(265p)
그런데 시인이 단지 어떤 것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 나는 수전 손택이 예루살렘상 수상 연설에서 소개한 일화를 떠올렸다.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시를 쓰지 않는다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비난받던 미국의 한 흑인 시인은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작가는 주크박스가 아닙니다.” 어떤 시인의 사회적 발언을 지지하는 것과 어떤 시인이 특정한 내용을 쓰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후자는 어떤 문화적 폭력의 은밀한 시작일 뿐이다.(284-285p)
토니 다키타니는 거의 평생을 혼자 살면서도 한 번도 고독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고독이 깊은 습관이 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 앞에 한 여인이 나타나고 토니는 변한다. 토니는 이렇게 생각한다. “고독이 돌연 알 수 없는 무거운 압력으로 그를 짓누르며 고뇌에 빠지게 했다.” 그녀를 만난 후에야 고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사랑은, 이제 다른 사람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지금까지의 삶은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속삭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토니 다키타니>는 그렇게 시작된다.
(...)
우리는 ‘고독이 밀려왔다’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하지만, 고독은 어쩌다가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독이 가끔 밀려오는 것이 아니고, 고독하지 않다는 착각의 시간들이 가끔 밀려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텅 빈(사실은 고독으로 가득 찬) 푸른 방에 제아무리 살림살이를 들여놔도 그 방의 빈틈을 완전히 채울 수는 없으리라. 사랑에는 증오라는 반대말이 있지만 고독에는 그 정도로 명확한 반대말이 없다. 공기처럼 늘 확실히 존재하는 어떤 것에는 반대말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일까.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어떤 분이 나에게 물었다. 행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고. 그래서 나는 행복은 그저 “불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행복은 우리가 불행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그 모든 시간의 이름이거나, 혹은 내가 불행해진 뒤에, 불행하지 않았던 시간들이 뒤늦게 얻는 이름이라고, 그래서 아도르노는 <미니마 모랄리아>(1951)에서 이렇게 말했을까.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 나는 행복했었다고 말하는 사람만이 행복에 대한 신의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291-292p)
컴퓨터가 그렇듯이 인간에게도 초기설정이라는 것이 있다.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자기중심적인 본성과 자신이라는 렌즈로 만물을 보며 해석하도록 되어 있는 경향”이 그것. 타인의 생각이나 감정은 특별히 노력하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반면 나 자신의 생각과 감정은 언제나 생생하고 절박하며 현실적이다. 그래서 대체로 우리는 나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해석한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내내 그렇게 살아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세 시간밖에 못 자고 출근해서 온종일 격무에 시달리다 퇴근했고, 쓰러지기 직전에 마트에 들러 저녁 찬거리를 사 들고 계산대에 섰는데, 계산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어 짜증이 치받쳐 오르고, 그중 어떤 아주머니는 소리를 질러가며 애원하듯이 전화를 하는 통에 견딜 수 없어져서, 나는 지금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몽땅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그래,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초기설정의 노예가 되지 않고 달리 생각하기를 ‘선택’할 수도 있다. 저 아주머니가 사실은 골수암으로 죽어가는 남편의 손을 붙잡고 사흘 밤을 한숨도 못 잔 채로 마트에 나와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녀가 그저께 내 노모가 처한 곤경을 해결해주었다는 바로 그 친절한 아주머니라면? 이런 생각은 그 상황을 변화시킬 것이다. 역지사지가 필요하다는 진부한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삶은 그 자체로 가치 있거나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어느 쪽이 될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아주 심각한 이야기다.(370-371p)
‘문학은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일이다. 아니, 단순한 것이 실은 복잡한 것임을 끈질기게 지켜보는 일이다. 진실은 단순한 것이라는 말이 있지만, 진실은 복잡한 것이라는 말도 맞다.’(387-388p)
요컨대 ‘오로지 대중들의 즐거움을 위해’ 만들었다고 겸손하게 소개되는 작품들이야말로 애초 대중에게 아무런 기대도 없이 만들어진 작품들이라면 그것들이야말로 대중을 은밀하게 무시하는 작품들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전달하기 어려운 것을 어떻게든 전달하기 위해 복잡하고 심오한 내용과 형식을 동원하는 작품들은 대중이 자신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믿음을 끝내 버리지 않고 진지하게 말을 건네고 있는 작품이라고 해야 한다. 상업적 실패를 무릅쓰면서도 그런 작품을 만드는 창작자, 그것을 열정적으로 소개하고 옹호하는 평론가들이야말로 실은 대중을 존중하는 이들이 아닌가.(395-396p)
ㅡ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中,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