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7

 

검색을 통해 이기호 작가의 다른 책을 확인하고 빌리러 갔는데, 그 사이에 누군가 빌려가서 대신 집어왔다. 이기호 작가가 쓴 것 같은 책이다. 시종 경쾌한 문체로 유쾌한 느낌이 들지만 그것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묘한 울림을 주는, 그런 책.

 

 

 

그거 알아요? 애들은요, 아빠가 없어서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구요, 문제가 생긴 다음부터 아빠가 없다는 걸 알게 된다구요. 그게 어떤 차이인지 잘 모르시죠?(68p)

 

 

내가 최근직을 그렇게 죽음에서 구한 것 같더냐? 말도 안 되는 소리. 최근직은 손순녀를 만나기 이전부터 이미 살려고 했던 사람이니라. 네가 그것을 알더냐? 가족을 다 잃어도 제 목숨을 스스로 끊기 어려운 것이 사람이니라. 슬픈 것은 슬픈 것이요, 살고 싶은 것은 살고 싶은 것. 최근직은 자기 의지로 산 사람이니라.(154-155p)

 

 

 

이기호, <목양면 방화 사건 전말기> ,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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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6

 

 

, 저게 저렇게 된 것도, 이게 이렇게 된 것도 내 탓 아닐까. 전생의 인연이 어쩌고저쩌고. 그런 사고방식은 요컨대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에서만 나올 수 있는 거라고. 바꿔 말하면 자기를 과대평가한다는 거지. 전봇대가 큰 것도 우체통이 빨간 것도 전부 내 죄입니다, 하는 건 자기를 비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세상과 마주 보길 포기한 어리광쟁이가 하는 말이야.(43p)

 

 

하마터면 연설을 할 뻔했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이야기를 끝맺었다. 헤어진 아내가 말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잘난 척하면서 설명하지 않아도 돼. 감탄이 나오게 설명해주는 평론가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입 다물고 할 일을 하면 되는 거야. 그게 의지가 되는 남편 아냐?(97p)

 

 

가나와 함께 살게 된 아버지는 아침 일찍 펑소와 빨래를 시작해 오전 중으로 집을 구석구석 깨끗이 치우고 나면, 전철을 갈아타고 경로 우대 할인이 되는 영화를 보러 가거나 백화점 국숫집에서 점심을 먹거나 공원을 산책하고 그 김에 동물원에 가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오거나 가나가 부탁한 장을 보거나 한다. 저녁이 되면 마음에 든 동네 주점에서 가볍게 요기하고 가볍게 마시고, 가나가 집에 올 즈음에는 직접 물을 받아 목욕하고 NHK<뉴스워치 9>를 보고 나서 취침. 이렇게 규칙적으로 생활했던 모양이다. 가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고 결심한 듯했고 간섭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딸이라기보다 셰어하우스의 주민 같은, 어딘지 모르게 담백한 관계였다.(103p)

 

부녀간의 관계만 담백할 뿐만 아니라 노년이 꿈꾸는 이상적인 생활 형태 중 하나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건강하게 늙어야 할 테고, 그러자면 역시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력이란 신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겠지. 운동을 합시다.

 

 

아들에게도 언젠가 배우자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나 자신은 이제 새로운 만남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우연히 호감 가는 여자가 나타난다 해도 그 뒤 식사에 초대하고, 두 사람의 개인사며 취향, 사고방식, 라이프스타일을 맞춰보고, 메일 등등을 주고받으며 호의를 전할 생각을 하면 다소 귀찮다. 타인과 한 지붕 밑에서 살아갈 자신도 별로 없다. 나는 가족이 아니라 좋은 집을 원하는 게 아닐까. 그런 의심이 고개를 쳐들었다.(119-120p)

 

 

가나를 도와주는 게 싫은 것은 아니다. 앞으로도 부르면 달려 올 것이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누가 답해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내 감정에 화살표를 붙일 수 있는 어떤 전망이나 방향성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 상황에 맡기고 그때그때 대응해봤자 이내 지칠 대로 지쳐 진이 빠질 것이다. 공중에 뜬 상태에서 발을 움직인들 허공을 저을 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134p)

 

 

 

마쓰이에 마사시,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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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5

 

평소에 고민하던 부분도 다루었고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이었다.

 

 

우리의 부모는 우리의 존재에 죄책감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 당신과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혹은 열등한혹은 잘못된어떤 속성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도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이 당신을 더 화나게 할지도 모른다. 나는 왜 하필 이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거지? 왜 나는 이렇게 키가 작지? 왜 내 지능은 좋지 않지? 왜 나는 아토피성 피부염이나 만성피로증후군을 타고난 거지?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싶겠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할 수 없다. 잘못된상태가 아니라면 우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118-119p)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더는 가진 자들의 은혜적 배려가 아닌 전 국민이 함께 고민하며 풀어가야 할 사회적 책무로서 막연히 예산상의 이유만을 들어 그러한 의무를 계속적으로 회피할 수는 없다. ····· 모든 인간은 자신이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권리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방법으로 일상생활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켜왔다. 그런데 일상생활에 있어 아무런 제약이 없어 비장애인에게는 그 존재의 가치조차 논의하지 아니하는 이동권이 단순히 예산상의 이유만으로 제약을 받는 것은 이 시대의 모순일 수밖에 없는 바, 이러한 모순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해결할 문제로서 조그마한 노력과 비용의 부담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것이므로 더는 비장애인을 기준으로 판단하여 그 시기를 늦출 수는 없다고 할 것이고, 인간에게 있어 가장 기초적인 이동권마저 비장애인과의 형평성 및 예산상의 문제 등을 거론하며 그 시기를 늦추려고 하는 것은 비장애인들의 편의적인 발상에 불과하다고 할 것이다.(233p)

 

 

스티브는 디보티devotee’로 분류되는 사람이다. 디보티란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사람들을 지칭하며, 이들이 장애에 대해 보이는 태도와 욕망을 디보티즘이라 부른다. 스티브는 다리 부분이 절단된 장애 여성이라는 사실 외에 앨리슨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반적으로 어떠한 사람인지를 전혀 모르지만 그녀에게 매력을 느낀다. 디보티즘을 가진 사람들의 취향은 저마다 다르지만, 신체 일부가 절단된 몸에 이끌리는 사람들이 특히 많다. 마비가 있거나 근육이 적은 신체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보청기나 휠체어같이 장애인들의 보장구에 끌린다. 주로 이성애자 남성 디보티가 많지만 동성애자도 있고 성별이 반대인 경우도 있다. 학자들은 디보티즘을 장애에 대한 일종의 페티시즘으로 분류하며, 이를 장애가 있는 사람을 욕망하는 디보티, 장애가 있는 척하는 사칭가pretender, 아예 장애인이 되고 싶은 워너비wannabe라는 세 범주로 나눈다. 귀가 안 들리는 척 보청기를 끼고 살아가고, 실제로 장애인이 되기 위해 신체 일부를 절단하거나 청력 손실을 시도하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257p)

 

 

장애인의 신체에 부여된 아름다움, 즉 일종의 숭고미에 대한 관심은 타자의 숭고함에 대한 관조와 사색의 과정이다. 관조가 가능하려면, 그 대상이 내 삶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절대로 허락해서는 안 된다. 닉 부이치치의 이야기에 감동하고, 아이들에게 그의 이야기를 마치 위인전 읽히듯 전하는 사람들도 장애 아동을 위한 특수학교 설립에는 반대한다. 교회에서 단체로 봉사활동을 가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후원금을 내는 사람들도 자기 윗집에 장애인이 이사 오는 것은 반대한다. 이들이 장애인의 신체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그런 종류의 미적 경험은 그 대상이 전적으로 타자일 때에만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나의 삶과 무관한 장애인의 신체, 주름지고 지혜가 가득한 노인의 얼굴, 아침 일찍 출근해 거리를 청소하는 노동자의 땀방울 같은 것. 타자를 미적으로 숭배하는 태도는 자기기만을 불러온다.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내 삶으로 들어올 때면, 그것을 거부하고자 하는 충동이 우리를 괴롭힌다.

(...)

에드워드 사이드가 이 책에서 강조한 것 중 하나는 오리엔탈리즘이 비서양 사회의 인간을 그 인간의 지적, 도덕적 실존을 무시하고 사회과학적으로 분석될 대상으로 보는 데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서양인을 확실히 지적, 도덕적으로 열등한 자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지적, 도덕적으로 열등한 바로 그 타자를 미적으로 숭배하는 태도에도 오리엔탈리즘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오리엔탈리스트 또는 오리엔탈리즘적 태도를 가진 자에게서 제거하기 힘든 자기기만을 가져온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신은 비서양인을 대당 이상의 존재로 다루고 있다고 믿는다.”(261-262p)

 

 

 

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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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4

 

적지 않게 웃었고 많은 부분에서 찡했다.

 

 

 

아아, 어떡해·····. 저거 되게 크게 다친 거 같은데?”

감싸고 있는 모양 보니까 아무래도 십자인대 같은데.”

전방인가?”

아니야, 후방 같아.”

십자인대 아닐 가능성은 없어? 의료 팀이 저길 누르는 거 보면 연골일 수도 있지 않아? 그렇지? 그렇지? 아직 모르겠지?”

·····. 제발 십자인대는 아니어야 되는데·····. 제발, 제발.”

무심코 대화를 듣다가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서 당황했다. 아무도 울지 않는데 이 중에서 가장 이방인인 내가 대체 왜. 대화 속에서 흘러나오는 어떤 간절함 때문이었을까. 저 묵직한 간절함이 말의 마디마디에 배어 나오기까지 그들이 겪었을, 그들만이 알고 있을 시간들 속에서 그들이 우는 것을 본 것만 같았다. 저기 쓰러져 있는 저 선수는 언젠가의 누군가였을 것이고, 언제나 모두의 공포 속 바로 자신이었을 것이다.(213p)

 

 

무언가를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상상도 못하고 살아오다가 그 현실태를 눈앞에서 본 순간, ‘나도 하고 싶다.’를 넘어서 내가 이걸 오랫동안 기다려 왔었구나.’를 깨닫게 될 때 어떤 감정이 밀려드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때로 운명적인 만남은 시간을 거슬러 현재로부터 과거를 내어놓는다. 생전 처음 가 보는 낯선 장소에서 오랫동안 품어 온 향수나 그리움을 느끼는 역설적인 감정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마음으로 쑥 들어와 오랜 세월 잠자고 있던 어떤 감정을 흔들어 깨우면서 일어나는 그리움. 아마도 그 감정이 깊은 잠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어 묻혀 버리기 이전의 세월에 대한 향수, 어쩌면 회한.(236-237p)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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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5

 


이 책으로 열린책들에서 나온 '노인과 바다', 론 마스코의 '슬픔의 위안', 박완서의 '친절한 복희씨, 다와다 요코의 '영혼 없는 작가' 등에 관심이 생겼다.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5)에서 천하의 무자비한 폭군도 극장에서는 타인의 불행을 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태생적 동정심을 긍정했다. 그런데 한 저자는 저 대목을 거꾸로 읽는다. 극장에서는 태연한 눈물을 흘리는 인간도 자신이 직접 행하는 악덕에는 무감각해질 수 있다는 뜻으로 말이다. “우리가 스스로 야기한 상처에 대해서는 아무런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야기하지 않은 고통 앞에서는 울 수 있어도 자신이 야기한 상처 앞에서는 목석같이 굴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슬픔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행동한다. 이 경우 타인의 슬픔은 내가 어떤 도덕적 자기만족을 느끼며 공감을 시도할 만한 그런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추궁하고 심문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 슬픔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나를 불편하게 할 것이다.(25p)

 

 

사건은, 그것을 감당해낸 사람만을, 바꾼다. 한수는 제가 저지른 일에서 도망쳐버리고 말았지만, 혜화는 스스로 아이를 낳았고 또 잃었다. 이런 종류의 사건이 한 사람을 어떻게 또 얼마나 변화시키는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다 알 수 없으리라.(47-48p)

 

 

이 소설을 읽으면 알게 된다. 인간의 뒷모습이 인생의 앞모습이라는 것을.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는 인간은 타인의 뒷모습에서 인생의 얼굴을 보려 허둥대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삶의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저 인생의 얼굴에 스치는 순간의 표정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 표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나. 행복한 가족의 어느 가장이 아내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문득 자살을 감행할 수도 있는 게 삶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나. 그냥 보여줄 수밖에, 그 남자의 뒷모습만을 하염없이 보여줄 수밖에.

(...)

그런 소설을 좋아한다. 해석되지 않는 뒷모습을 품고 있는 소설, 인생의 얼굴에 스치는 표정들 중 하나를 고요하게 보여주는 소설. 한 사람의 표정들을 모두 모은다고 그 사람의 얼굴이 되지는 않는다. 한 소설이 건드리는 작은 진실은 독자적인 것이고, 과학이나 철학이 제시하는 큰 진실’(진리)의 한낱 부분들이 아닐 것이다. 전체로 환원될 수 없는 부분들, 그런 것들의 세계이니까, 소설이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소설을 읽으면 겸손해지고 또 쓸쓸해진다. 삶의 진실이라는 게 이렇게 미세한 것이구나 싶어 겸손해지고, 내가 아는 건 그 진실의 극히 일부일 뿐이구나 싶어 또 쓸쓸해지는 것이다.(55-57p)

 

 

그러니 이 시는 결국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라는 두 문장으로 요약된다. 아니, 더 짧게는, “천진하게물끄러미의 어긋남에 모든 게 들어 있다. 사내가 창피해했거나 화를 냈거나 혹은 허세라도 부렸다면, 그녀는 희망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내는 천진하게웃었다. 그녀는 깨달았을 것이다. 이 사내는 바뀌지 않겠구나. 나는 이 천진함을 견디지 못하겠구나, 결국 이 사내를 미워하게 되겠구나. 그러니 그녀의 물끄러미안에는 또 얼마나 많은 슬픔이 있었을까.(85p)

 

 

폭력이란? 어떤 사람/사건의 진실에 최대한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데서 만족을 얻는 모든 태도.’(92-93p)

 

 

나쁜 소설들은 서로 닮아 있다. 떠들썩한 사고가 일어난다. 좌충우돌의 에피소드가 꼬리를 물고 나열된다, 어떤 영웅적인 인물이 이 모든 것을 처리하고 상황을 원래의 질서로 되돌린다, 이런 식이다. 한편 좋은 소설에서 인물들은 대개 비슷한 일을 겪는다. 문득 사건이 발생한다, 평범한 사람이 그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느라 고뇌한다, 마침내 치명적인 진실을 손에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자신이 더 이상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런 식이다.(115-116p)

 

 

나도 따라 울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그리움을 위하여>, 문학동네, 2013, 76)

 

첫사랑이었던 그 남자가 이 네 문장과 더불어, 언젠가는 졸업해야 하는 학교가 되면서, 소설에서 퇴장하고 만다. 대가의 문장이다. 이별을 고하는 자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불가피한 자기 합리화의 양상을 세 개의 단문과 잔인하리만큼 정확한 비유 하나로 장악한다. 비유란 이런 것이다. 같은 말을 아름답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사실을 영원한 진실로 못질해버리는 것이다.(131-132p)

 

 

소설에서 음악이 흐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노래는 거기 그대로 있는데 삶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사랑은 식고 재능은 사라지고 희망은 흩어진다. 삶의 그런 균열들 사이로 음악이 흐를 때, 변함없는 음악은 변함 많은 인생을 더욱 아프게 한다. 이 세상을 흐르는 음악이, 흐르면서, 인생을 관찰하는 이야기. 그러니까, 인물들이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인물들의 얘기를 듣는 이야기. 말하자면 이 책은 음악 그 자체가 서술자의 역할을 한다. ‘음악 서술자 시점소설이랄까. 인생은 짧고 음악은 길다.(153p)

 

 

저는 모국어에 갇혀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바로 갇혀 있는 자의 생각이었군요. 세상에는 해답을 알기 전에는 문제가 뭔지조차 알 수 없는 종류의 일이 있습니다. 독일에 막 도착했을 때 당신도 그랬던가요.

(...)

외국어를 배우면 모국어를 상대화할 수 있다는 평범한 얘기가 아닙니다. 지금 이 이야기의 층위는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 언어 그 자체이니까요. 성인이 되어서 낯선 외국어를 배워본 언어의 이주민만이 언어 자체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는 것, 그를 통해 모국어가 내 온몸에 기입해놓은 온갖 생각의 코드를 비로소 의식하게 된다는 것, 그렇게 나를 먼저 타자화하지 않으면 타자와의 소통이 힘들다는 것. 당신이 유창한 모국어에 느낀 구역질이란 자기가 편협함인지를 모르는 편협함에 대한 구역질이겠지요. 세상에는 문제가 뭔지조차 몰라서 이미 오답을 말해버린 경우도 있군요.(155-156p)

 

 

여기에 한 사람을 더 추가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오스카 와일드여야 할 것이다. 출처를 확인하지 못한 그의 아포리즘 중 하나를 나는 기억한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여자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 영원히 사랑하는 것만 빼고.” 이런 문장은 일단 한번 듣고 나면 결코 잊을 수 없게 된다. 그의 재기발랄할 문장들을 음미하며 맞장구를 치고 있자니 짓궂은 그가 또 이런 말을 한다. “사람들이 나에게 동의할 때마다 내가 틀렸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아포리즘은 가끔 우리를 속인다. 움베르토 에코는 어떤 아포리즘들은 그것을 뒤집어도 여전히 그럴듯해 보인다고 꼬집는다. 예컨대 무지란 섬세한 이국 과일과 비슷하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곧바로 시들어버린다라는 와일드의 문장에서 무지대신에 을 넣어도 여전히 말이 되지 않는가. “뒤집기 가능한 아포리즘은 지극히 부분적인 진리를 담고 있으며, 일단 뒤집어놓고 보면 종종 거기에서 펼쳐지는 두 개의 전망에서 어느 것도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한다. 단지 재치 있기 때문에 진리처럼 보였던 것이다.”(163-164p)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 3장에서 이런 요지의 말을 한다. 중년의 나이쯤 되면 특정한 단어가 각자의 사전에서 서로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하게 된다는 것. 그래서 그는 이해받지 못한 말들의 조그만 어휘집이라는 부제하에, 자신이 창조한 주인공들이 특정 단어를 어떻게 달리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구축해낸다. 어떻게 보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전체가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어휘를 각자 달리 이해하고 살아내는 인간()의 몇 가지 유형을 보여주기 위해 쓰였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167p)

 

 

로버트 펜 워런은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1962)라는 글에서 이런 대답을 했다. “소설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주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소설이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을 줄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173p)

 

 

저는 멘토가 될 자격도 능력도 없지만 이것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꽤 많은 것들이 여러분 뜻대로 안 될 겁니다. 특히 인간관계가 그렇겠죠. 아무리 조심을 해도 분명히 상처를 주거나 받게 될 거예요. 그 난관을, 여러분은 지극히 이기적인 방식으로 돌파하려 할 것이고, 마침내 돌파할 거예요. 인간이니까. 인간이란 그런 존재이니까. 그리고 훗날 회한과 함께 돌아볼 때가 올 텐데, 바로 그때, 뭔가를 배우게 될 겁니다. 그리고 아주 조금 달라질 거예요. 내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아주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됩니다.”

인간은 무엇에서건 배운다. 그러니 문학을 통해서도 배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결정적으로 배우고, 자신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로부터 가장 처절하게 배운다. 그때 우리는 겨우 변한다. 인간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만 가까스로 바뀌는 존재이므로 나를 진정으로 바꾸는 것은 내가 이미 행한 시행착오들뿐이다. 간접 체험으로서의 문학은 다만 나의 실패와 오류와 과오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피 흘릴 필요가 없는 배움은, 이 배움 덕분에 내가 달라졌다고 믿게 할 뿐, 나를 실제로 바꾸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읽고 써도 피는 흐르지 않는다.

피 흘려 깨달아도 또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반복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그러나 믿을 수밖에. 지금의 나는 10년 전의 나보다 좀 더 좋은 사람이다. 10년 후의 나는 더 좋아질 것이다. 안 그래도 어려운데 믿음조차 없으면 가망 없을 것이다. 문학은 그 믿음의 지원군이다. 피 흘리지 않으면 진정으로 바뀌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거꾸로 말하면, 피 흘리지 않고 인생을 시뮬레이션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176-177p)

 

 

2010년대 이후 한국 사회는 어쩌면 새로운 계몽의 시대로 접어든 것처럼 보이는데, 이 계몽의 물결은 앞서 인용한 칸트의 저 문장에서 지성의 자리에 감수성을 넣을 것을 요청한다. 오늘날 미성숙한’(, 계몽되지 못한) 인간이라 불리는 이들의 결여하고 있는 것은 지성이 아니라 감수성이기 때문이다. 성숙한(계몽된) 인간이 갖고 있는 감수성이란, ‘젠더 감수성이나 인권 감수성이라는 개념에서 그 용례를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들을 이해하고 행여 그것에 대한 잘못된 지식/믿음(무지미신’)차별의 근거로 작동할 수 있는 상황을 예방하거나 비판할 줄 아는 민감함을 의미한다. 이런 감수성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나에게 그것이 없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와 고통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시적으로 품고 있다는 뜻이다.(188p)

 

 

타인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과 그를 외면하지 못하는 결벽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다. 타인에게 열려 있는 통각이 마비돼 있거나 미발달된 이들의 하는 정치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우리는 그런 시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진정성의 정치를 믿는 것은 순진한 일일 뿐 아니라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선한 것에서 선한 것이 나오고 악한 것에서 악한 것이 나온다고 믿는 사람은 권력/폭력을 다루는 난해한 기술일 수밖에 없는 정치의 본질을 모르는 정치적 유아에 불과하다는 것 역시 베버의 가르침이다. 더 나아가 그는, 모든 행위가 그렇지만 정치가 특히 그러하다고 말하면서, 정치 안에는 근본적 비극성이 있다고 말한다. “정치 행위가 진정으로 내포하고 있는 비극성이라는 표현에는, 정치 행위의 경우 그 결과가 의도와 동떨어져 있거나 심지어 정반대로 귀결되기도 한다는 취지가 담겨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어무나 어리석고 비열해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고 적었다. 이 말이 감동적인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진정으로 옳은 일이라는 진리를 또 한 번 되새기게 하기 때문이다. 정치에의 소명이 우리 모두의 것이 될 때 2017년 이후 대한민국은 결코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191-192p)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다. 어떤 사람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줄 아는 깊이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는가. 내게는 분명한 기준이 있다. 고통의 공감은 일종의 능력인데, 그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한다. 자의든 타의든 타인의 고통 가까이에 있어본 사람, 많은 고통을 함께 느껴본 사람이 언제 어디서고 타인의 고통에 민감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202p)

 

 

저들을 괴물이라고 간주해버리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나를 그들로부터 완벽하게 구별/구원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윤리적 판타지다. 다른,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끔찍한 이들에게 나도 그런 욕망을 품는다. 비근한 예로 나는 광화문에서 단식 중이던 세월호참사 유가족 앞에서 피자를 시켜 먹는 이들을 보며 저들을 절멸시켜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나는(우리는) 그러지 않는다. 인정과 공존의 윤리를 교육받은 민주 시민이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감히 그런 욕망을 실천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질 수 없어 못 하는 것이기도 하다면?

그러므로 권력은 위험한 것이다. 배제 혹은 절명에의 욕망을 강하게 품고 있는 자가 권력을 가지게 될 때 특히 그렇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언론이 필요한 것이다. 권력자가 자신의 욕망에 패배하지 않도록 그의 욕망을 대신 감시해주는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212-213p)

 

 

언어는 문학의 매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의 매체다. 언어가 눈에 띄게 거칠어지거나 진부해지면 삶은 눈에 잘 안 띄게 그와 비슷해진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마음들이 계속 시를 쓰고 읽는다. 시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시가 없으면 안 된다고 믿는 바로 그 마음은 없으면 안 된다.(260p)

 

 

정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는 릴케의 시 따위를 도대체 왜 읽어야 한단 말인가?’ 나의 오랜 대답은 이렇다. ‘왜냐하면 삶이란 의미를 찾기 위해 질문을 던지는 그 순간에만 겨우 의미를 갖기 시작하는 것이니까.’(265p)

 

 

그런데 시인이 단지 어떤 것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아도 되는 것일까? 나는 수전 손택이 예루살렘상 수상 연설에서 소개한 일화를 떠올렸다. 인종주의를 비판하는 시를 쓰지 않는다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비난받던 미국의 한 흑인 시인은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작가는 주크박스가 아닙니다.” 어떤 시인의 사회적 발언을 지지하는 것과 어떤 시인이 특정한 내용을 쓰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후자는 어떤 문화적 폭력의 은밀한 시작일 뿐이다.(284-285p)

 

 

토니 다키타니는 거의 평생을 혼자 살면서도 한 번도 고독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고독이 깊은 습관이 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 앞에 한 여인이 나타나고 토니는 변한다. 토니는 이렇게 생각한다. “고독이 돌연 알 수 없는 무거운 압력으로 그를 짓누르며 고뇌에 빠지게 했다.” 그녀를 만난 후에야 고독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사랑은, 이제 다른 사람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지금까지의 삶은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속삭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 <토니 다키타니>는 그렇게 시작된다.

(...)

우리는 고독이 밀려왔다라는 표현을 흔히 사용하지만, 고독은 어쩌다가 밀려오는 것이 아니라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독이 가끔 밀려오는 것이 아니고, 고독하지 않다는 착각의 시간들이 가끔 밀려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텅 빈(사실은 고독으로 가득 찬) 푸른 방에 제아무리 살림살이를 들여놔도 그 방의 빈틈을 완전히 채울 수는 없으리라. 사랑에는 증오라는 반대말이 있지만 고독에는 그 정도로 명확한 반대말이 없다. 공기처럼 늘 확실히 존재하는 어떤 것에는 반대말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일까.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어떤 분이 나에게 물었다. 행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고. 그래서 나는 행복은 그저 불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대답했다. 행복은 우리가 불행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그 모든 시간의 이름이거나, 혹은 내가 불행해진 뒤에, 불행하지 않았던 시간들이 뒤늦게 얻는 이름이라고, 그래서 아도르노는 <미니마 모랄리아>(1951)에서 이렇게 말했을까.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 나는 행복했었다고 말하는 사람만이 행복에 대한 신의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291-292p)

 

 

컴퓨터가 그렇듯이 인간에게도 초기설정이라는 것이 있다.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자기중심적인 본성과 자신이라는 렌즈로 만물을 보며 해석하도록 되어 있는 경향이 그것. 타인의 생각이나 감정은 특별히 노력하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반면 나 자신의 생각과 감정은 언제나 생생하고 절박하며 현실적이다. 그래서 대체로 우리는 나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해석한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내내 그렇게 살아도 좋다는 것은 아니다. 세 시간밖에 못 자고 출근해서 온종일 격무에 시달리다 퇴근했고, 쓰러지기 직전에 마트에 들러 저녁 찬거리를 사 들고 계산대에 섰는데, 계산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어 짜증이 치받쳐 오르고, 그중 어떤 아주머니는 소리를 질러가며 애원하듯이 전화를 하는 통에 견딜 수 없어져서, 나는 지금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몽땅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그래,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초기설정의 노예가 되지 않고 달리 생각하기를 선택할 수도 있다. 저 아주머니가 사실은 골수암으로 죽어가는 남편의 손을 붙잡고 사흘 밤을 한숨도 못 잔 채로 마트에 나와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녀가 그저께 내 노모가 처한 곤경을 해결해주었다는 바로 그 친절한 아주머니라면? 이런 생각은 그 상황을 변화시킬 것이다. 역지사지가 필요하다는 진부한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삶은 그 자체로 가치 있거나 무의미한 것이 아니며, 어느 쪽이 될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아주 심각한 이야기다.(370-371p)

 

 

문학은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일이다. 아니, 단순한 것이 실은 복잡한 것임을 끈질기게 지켜보는 일이다. 진실은 단순한 것이라는 말이 있지만, 진실은 복잡한 것이라는 말도 맞다.’(387-388p)

 

 

요컨대 오로지 대중들의 즐거움을 위해만들었다고 겸손하게 소개되는 작품들이야말로 애초 대중에게 아무런 기대도 없이 만들어진 작품들이라면 그것들이야말로 대중을 은밀하게 무시하는 작품들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전달하기 어려운 것을 어떻게든 전달하기 위해 복잡하고 심오한 내용과 형식을 동원하는 작품들은 대중이 자신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믿음을 끝내 버리지 않고 진지하게 말을 건네고 있는 작품이라고 해야 한다. 상업적 실패를 무릅쓰면서도 그런 작품을 만드는 창작자, 그것을 열정적으로 소개하고 옹호하는 평론가들이야말로 실은 대중을 존중하는 이들이 아닌가.(395-396p)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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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4

 

 


미인의 기준은 상대적인 거지요, 하고 남자가 말한다. 사람마다 다 미인이라고 느끼는 대상이 다른 법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하고 여자가 물으며 다시 남자를 빤히 쳐다본다. , 그럼요, 아주 못생긴 사람이나 조금 못생긴 사람이나 평범하게 생긴 사람이나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다 포함해서요, 하고 양말 파는 남자가 말한다. 그렇지만 아주 못생긴 사람이 조금 못생긴 사람을 미인으로 느낀다고 해서 그 조금 못생긴 사람이 미인이 되는 건 아니지요.(125-126p)

 

 

너희 오빠는 나쁜 사람이야.” 언니가 말을 이었다.

사사건건 불만투성이면서도 자기가 무얼 원하는지 몰라. 자기 혼자 행복하자고 다른 사람 인생을 엿 먹이기 일쑤인데 정작 본인이 어떻게 해야 행복한지를 모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니.”(164p)

 

 

한마디로 빈털터리라는 소리네.”

그런 셈이지.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상황이랄까.”

그 순간에 웬일인지 그들이 잘생겨 보였다. 두 사람은 막 샤워를 끝낸 터였다. 토메의 머리카락에는 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는데 젠체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만만한 태도가 느껴졌다. 오빠나 나에 비해서 그들은 모든 일을 더 단순하고 명쾌하게 받아들인다는 생각이 들었다.(166p)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며칠이나 우리 집에 있을 생각이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 멀리 나가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한 것과 무례한 것은 완전히 다른 거니까 말이다. 공격적인 것과 호의적인 것도 완전히 다른 것이다.(167p)

 

 

한마디로 우리 가족은 늘 중산층이었고 각자 다양한 위치에서 시작해 때로는 모순적인 선택까지 해가며 신분 상승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정의와 윤리의 상징적인 담보자인 굳건한 상류층의 장벽에 진입하는 데는 실패했던 것이네. 우리가 끝끝내 벗어날 수 없었던 그 사회 계층은 우리에게 안락한 삶을 보장해 주었지만 동시에 씨족의 가장 깨어 있는 영혼들(이를테면 나 같은 사람 말일세)을 끊임없는 불안에 시달리게 만들었지. 나는 겨우 열세 살이었던 그때 우리 가족의 소유가 아닌 그 농장에서 바로 그 불안의 실체를 엿볼 수 있었다네. 그것은 아찔한 신기루와 같은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 자체가 무화되는 시간 속의 공간이었지.(174-175p)

 

 

 

로베르토 볼라뇨, <악의 비밀> ,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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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10

 

 

1/3 정도는 인터넷에서 읽었던 내용이었고 나머지는 처음 읽는 글이었다. 칼럼의 특성상 호흡이 짧아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는 편했다. 저자가 영화와 만화를 좋아한다고 알고 있어서 그걸 다루는 글을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얘기를 하지 않아서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가장 좋았던 부분은 23p의 행복과 불행에 대한 이야기.

 

 

역사상 가장 뛰어난 권투 선수 중 한 사람이었던 마크 타이슨은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처맞기 전까지는.” 사람들은 대개 그럴싸한 기대를 가지고 한 해를 시작하지만, 곧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지는지 깨닫게 된다. 링에 오를 때는 맞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 같은 건 없다.

행복의 계획은 실로 얼마나 인간에게 큰 불행을 가져다주는가. 우리가 행복이라는 말을 통해 의미하는 것은 대개 잠시의 쾌감에 가까운 것. 행복이란, 온천물에 들어간 후 10초 같은 것. 그러한 느낌은 오래 지속될 수 없기에, 새해의 계획으로는 적절치 않다. 오래 지속될 수 없기에, 새해의 계획으로는 적절치 않다.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을 바라다보면, 그 덧없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쉽게 불행해진다. 따라서 나는 차라리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 이를테면 왜 만화 연재가 늦어지는 거지’, ‘왜 디저트가 맛이 없는 거지라고 근심하기를 바란다. 내가 이런 근심을 누린다는 것은, 이 근심을 압도할 큰 근심이 없다는 것이며, 따라서 나는 이 작은 근심들을 통해 내가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22-23p)

 

 

설거지의 윤리학. 설거지는 밥을 하지 않은 사람이 하는 게 대체로 합리적입니다. 취식은 공동의 프로젝트입니다. 배우자가 요리를 만들었는데, 설거지는 하지 않고 엎드려서 팔만대장경을 필사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귀여운 미남도 그런 일은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40p)

 

 

(...)

나는 그저 평소처럼 행동했다. 우리는 서로 맡은 역할을 수행하여, 논문 심사라는 부실한 역할극을 완성했다. 위력이 왕성하게 작동할 때는, 인생이라는 극장 위의 배우들이 이처럼 별생각 없이 자기가 맡은 배역을 수행한다. 당시 교수들도 자신이 위력을 행사하고 있으리라고는 새삼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위력이 왕성하게 작동할 때, 위력은 자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위력은 그저 작동한다. 가장 잘 작동할 때는 직접 명령할 필요도 없다. 니코틴이 부족해 보이면, 누군가 알아서 담배를 사러 나간다.(131p)

 

 

선거가 끝났다는 것은, 자신의 당선이야말로 불행을 끝내고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무책임한 말들을 당분간 듣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오늘날 투표하는 사람들에게 영웅적인 면이 있다면, 그 모든 허황된 약속의 역겨움에도 불구하고 투표장에 가고자 한 결단에 있다.(187p)

 

악이 너무도 뻔뻔할 경우, 그 악의 비판자들은 쉽게 타락하곤 한다. 자신들을 저 정도로 뻔뻔한 악은 아니라는 사실에 쉽게 안도하고, 스스로를 쉽사리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악과 악의 비판자는 일종의 적대적 의존관계에 있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때로 악을 요청한다. 상대가 나쁘면 나쁘다고 생각할수록 비판하는 자신이 너무나 쉽게 좋은 사람이 된다.(189p)

 

 

그 고약한 신과 피조물 간에 존재하는 위계질서는, 더 행복한 존재 대 덜 행복한 존재 간이 아닌, 더 도덕적인 존재 대 덜 도덕적인 존재 간이 아닌, 더 아름다운 존재 대 덜 아름다운 존재 간이 아닌, 똑똑한 존재 대 바보 간의 위계질서다. 이 고약한 신은 세상의 미만한 사랑과 도덕이 모두 해석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는 점에서, 진열장 안의 피조물들보다 똑똑하다. 하지만 그러한 지력이 그를 더 행복하게 만들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마치 실연 끝에 오는 허망한 지력과도 같은 것이다. 실연 끝에 오는 연애에 대한 통찰이 그다음 연애를 보장하지 않듯이, 불행히도 그러한 지력이 우리 삶에 줄 수 있는 대안은 많지 않다.(271p)

 

 

대상에 대한 모든 정서적 집착과 매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라면 그것은 아마도 부처이거나 기계일 것이다.

(...)

하지만 기계로서 사는 인생에 대가로 다가오는 것은 엄청난 권태다. 오랜 결혼생활에 이른 부부가 더 이상 상대의 육체에 매혹되지 않을 때처럼. 그 부부는 상대의 육체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울지 모르나, 그들의 인생이 행복으로 채워지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냉정한 지식은 지식 소유자의 대상에 대한 통제력을 높여주고, 대상의 마법으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하지만, 그 인간을 구원하지는 않는다. 즉 한니발의 지식은 한니발로 하여금 세상으로부터 짓밟히지 않고 유유히 살아가게 만들지만, 그를 궁극적으로 구원하지는 않는다.(285-286p)

 

 

우리가 가장 상관하는 것은 늘 자신의 삶이며, 삶이란 저녁식사와 같은 일상의 집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저녁식사 순간이 예술의 경지가 된다면, (바로 그 부분의) 삶이 예술이 되는 것이다(한니발은 그러한 순간을 망가뜨리는 무례한놈들을 싫어하며, 그들을 먹어치운다). 즉 예술의 인간에 대한 궁극의 공헌은, 만들어내거나 향수하기 위해 사들인 예술품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러한 예술품을 만들거나 향수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고양된 자신의 생 자체 있다. 가장 위대한 예술가는 예술이 궁극적으로 실현되는 장소가 일상임을 아는 사람이다.(292p)

 

 

(...) 그는 단순히 자신이 무엇인가를 잘못 계산하고 잘못 측정하고 잘못 수행했다는 점에서 좌절하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던 현실 자체가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지, 그리고 그 현실을 대면하고 있다는 그 자신이란 과연 통합된 주체인지, 나는 나인지, 세계는 세계인지······. 많은 것이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도 실패를 통해 얻은 깨달음이라면 깨달음일 것이다. 하지만 그 깨달음은 그 깨달은 자를 한층 더 좌절케 하는 종류의 깨달음이다. 그는 햄릿처럼니체와 해럴드 블룸의 해석을 따르면(우유부단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더욱 깊이 있는 인식에 이르렀으므로 더 이상 행동할 수 없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295-296p)

 

 

민정: 사람들이 쓰신 글을 좋아해주니까 솔직히 좀 좋지 않으세요?

영민: 좋긴 한데 그렇다고 춤을 추거나 그러지는 않습니다.(306p)

 

 

전 인생의 확고한 의미에 대해서 설파하는 책이나, 한국을 부흥시킬 분명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책이나, 인류 문명의 향방에 대해 확실한 예측을 하는 책 따위는 읽고 싶지도 쓰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많은 것들에 대해 확신이 없지만, 그러한 책들의 주장에는 특히 확신이 없거든요. 그런 책들은 확신한 근거나 없는 것들까지 확신하기에, 그런 책들을 확신할 수 없죠. 저는 차라리 불확실성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며, 그나마 큰 고통 없이 살아가기를 원해요.(340p)

 

 

 

김영민,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 어크로스

,

2018/11/23

 

 

과학에서의 중요한 계기들은 바로 이런 식으로 나타났습니다. 과학에서는 답을 주는 것뿐 아니라 그 답의 부족한 부분도 굉장히 중요하죠. 어떤 종류의 질문에 대한 명료한 답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반면 굉장히 새로운 질문을 끄집어내고 난해한 문제를 점차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내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부족한 부분은 답을 찾기 전에 답을 찾는 데 필요한 틀을 만들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83p)

 

 

마지막으로 확률에 대한 수수께끼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수수께끼는 이겁니다. 지능이 굉장히 높은 여자들은 대부분 자기보다 지능이 낮은 남자와 결혼한다고 해요. 통계적으로 그렇다고 합니다. 왜 그럴 것 같아요? 여기에 대해서 보통은 별의별 답이 다 나옵니다. 가령 여자가 원래 남자보다 지능이 높다라든지, ‘똑똑한 남자는 똑똑한 여자를 싫어한다라든지. 진짜 이유는 뭘까요?

정답은 바로 확률적으로 대부분 남자들이 지능이 굉장히 높은 여자보다 멍청하니까입니다. 제가 앞에서 지능이 굉장히 높다고 했을 때는, 확률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보다 지능이 낮다는 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능이 굉장히 높은 사람은 웬만해서 자기보다 지능이 낮은 사람과 결혼하게 되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대체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뭔가 사회적인 편견에 입각해서 답을 찾게 되지요.(138-139p)

 

 

사람들은 아마 과학 혹은 확률론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답을 할 겁니다. 사람이 그 도구를 가지고 좋은 일도 할 수 있고 나쁜 일도 할 수 있지, 그것 자체가 선하거나 악하다고 할 수도 없다고 말이죠. 저는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확률론이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선하고 악한 것도 확률론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엘리엇이 묘사한 베켓 대주교의 주장처럼 우리가 선하다고 결정한 것도 악한 결과를 가지고 올 확률이 있고, 악하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약간의 선한 효과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 것들도 확률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140-141p)

 

 

수학적인 사고가 사회에 어떻게 적용되느냐는 질문에 답할 때, 수라는 개념 안에서만 생각한다면 굉장히 제한적인 관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 생각에 건전한 과학적 시각이란 근사approximation'해가는 과정이라는 걸 처음부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완벽하게 할 수 없다고 해서 포기하기보다는, 제한적인 조건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나중에 뒤집어지더라도 현재의 조건 안에서 이해해나가는 것이죠. 애로의 경우도, 뉴턴의 경우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근사해가는 과정, 항상 바꿀 수 있는 것, 그리고 섬세하게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를 학문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겁니다.(179p)

 

 

 

김민형, <수학이 필요한 순간> , 인플루엔셜

,

2018/12/1

 

 

쇼코는 할아버지에게 늘 밝은 내용의 편지를 적어 보내는 것 같았다. 달리기경주에서 일등을 했다. 고모와 맛있는 카레집을 찾아갔다, 휴일에 친구들과 보트놀이를 했다. 북해도를 여행했다. 할아버지에게 보내는 쇼코의 이야기는 그림엽서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이야기들이었다.

반면 내가 받은 편지에는 어두운 이야기뿐이었다.

할아버지의 돈을 훔쳤지만 할아버지는 모른 척했다. 그 돈을 하수구에 버려버렸다. 가끔씩 할아버지의 음식에 독을 타고 싶다, 아빠가 보내는 양육비를 고모가 허비해버리는 걸 알고 고모의 속옷을 하나둘씩 찢어서 거리에 내던졌다, 가끔씩 소독한 칼로 자신의 골반 근처를 찌른다.

당시에는 쇼코의 모순된 말들에 혼란을 느꼈다. 할아버지에게 하는 말이 진짜인지, 아니면 내게 하는 말이 진짜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두 종류의 편지가 모두 진실이었으리라고 짐작했다. 모든 세부사항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모두 진실된 이야기였을 거라는 걸. 아니, 모든 이야기가 허구였더라도 마찬가지다. 할아버지의 편지에서 보이는 것처럼 남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었을 것이고, 내 편지에 썼듯이 자신을 포함한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었겠지.(16-17p)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24p)

 

 

그래. 나는 겁쟁이야. 하지만 증오할수록 벗어날 수 없게 돼.(27p)

 

 

나는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기 전까지 친구라고 부르던 사람들을 거의 다 잃어갔다. 기다려준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림자를 먹고 자란 내 자의식은 그 친구들마저도 단죄했다. 연봉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는 친구는 볼 것도 없이 속물이었고, 직장생활에서 서서히 영혼을 잃어간다고 고백하는 친구를 이해해주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고소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의 끔찍함에 놀랐으나 그조차 오래가지는 못했다.

점점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을 때가 많았고, 엄마와 할아버지를 찾아가지도, 따로 전화하지도 않았다. 그나마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과도 거리를 두면서 영화를 통해 인간 내면의 깊은 곳을 그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오만이 그 사람들을 얼마나 쓸쓸하게 했을지 당시의 나는 몰랐다.(34-35p)

 

 

가끔씩 할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오면 받지 않거나 건성으로 받곤 했다. 할아버지는 늘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냥 당연히, 원래 그렇게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내 상황이 나아지고 자리를 잡아서 떳떳해져야 한다고만 생각했었다. 할아버지는 건강에 대해서 가타부타하지 않았고, 되려 나이가 드니 감기도 잘 안 걸린다고 말했었다.(43p)

 

 

“난 정말이지 괜찮을 줄 알았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턱도 벌릴 수가 없었다. 턱을 벌려 입을 열면 눈물이 쏟아져내릴 것 같아서였다. 그제야 할아버지의 마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몸이 말라가고, 피부가 누렇게 변해가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건 그냥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인 줄로만 알았다. 단지 그 노화가 조금 빠르게 진행된다고만 생각했다. 나 자신에게는 그리도 예민했으면서 할아버지의 상황에는 왜 그토록 무뎠었는지.

할아버지는 베레모를 벗어서 무릎에 올려놨다. 숱이 적은 흰 머리카락이 모자에 눌려 있었다. 할아버지는 마치 애인에게 이별을 고하는 남자처럼 변명했다.

“정말이다. 이렇게 심해질 걸 알았으면 너에게 진작 말했을 거다. 자주 얼굴이나 보자고.”

할아버지는 안간힘을 써서 웃고 있었다.

“내가 말했으면 나 자주 보러 왔을까.”

나는 대답 대신 할아버지의 머리를 꼭 안았다. 정수리에서 머릿기름 냄새가 났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예순다섯 밤을 더 보내고 영면하셨다.(45-46p)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

나는 줄곧 그렇게 생각했다. 헤어지고 나서도 다시 웃으며 볼 수 있는 사람이 있고, 끝이 어떠했든 추억만으로도 웃음지을 수 있는 사이가 있는 한편, 어떤 헤어짐은 긴 시간이 지나도 돌아보고 싶지 않은 상심으로 남는다고.(89-90p)

 

 

그녀는 세상 사람들이 지적하는 엄마의 예민하고 우울한 기질을 섬세함으로, 특별한 정서적 능력으로 이해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아줌마의 애정이 담긴 시선 속에서 엄마는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보였었다.

아줌마라고 해서 엄마의 모든 면이 아름답게 보였을까, 엄마의 약한 면은 보지 못했을까. 아줌마는 엄마의 인간적인 약점을 모두 다 알아보고도 있는 그대로의 엄마에게 곁을 줬다. 아줌마가 준 마음의 한 조각을 엄마는 얼마나 소중하게 돌보았을까. 그것이 엄마의 잘못도 아닌 일로 부서져버렸을 때 엄마가 느꼈던 절망은 얼마나 깊은 것이었을까. 내가 아는 한, 엄마는 그 이후로도 마음을 나눌 친구를 쉽게 사귀지 못했었다. 그리웠을 것이다. 말로는 그때의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엄마를 엄마 자신으로 사랑해준 응웬 아줌마를 엄마는 오래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저, 가끔 말을 들어주는 친구라도 될 일이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곁을 줄 일이었다. 그녀가 내 엄마여서가 아니라 오래 외로웠던 사람이었기에. 이제 나는 사람의 의지와 노력이 생의 행복과 꼭 정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엄마가 우리 곁에서 행복하지 못했던 건 생에 대한 무책임도, 자기 자신에 대한 방임도 아니었다는 것을.(91-92p)

 

 

이모에게 의지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엄마의 마음을 시리게 했다.(104p)

 

 

할머니는 일생 동안 인색하고 무정한 사람이었고, 그런 태도로 답답한 인생을 버텨냈다. 엄마는 그런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런 태도를 경멸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난 뒤 그 무정함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상대의 고통을 같이 나눠 질 수 없다면, 상대의 삶을 일정 부분 같이 살아낼 용기도 없다면 어설픈 애정보다는 무정함을 택하는 것이 나았다. 그게 할머니의 방식이었다.(105p)

 

 

이모와 엄마는 살해당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모는 최종 재판에 참석했었다고 말하고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주제를 돌려야 하는데 그 생각에 부딪히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그럴 때면 엄마는 어색하게나마 엄마의 이야기를 했다. 엄마의 결혼생활의 한심한 점들을 조목조목 이야기하고 친정 친구들과 절연한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식으로 말했다. 사실 엄마는 행복한 편이었지만 조금이라도 그 행복을 드러냈다간 이모가 박탈감을 느낄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다. 엄마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런 태도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기만하는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엄마는 처음에는 한 달에 두 번 이모를 찾아가다가 나중에는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 계절에 한 번 안양에 찾아갔다. 가끔씩 통화를 하면 더 이상 할말이 없어서 피상적인 이야기만 주고받았다. 이모는 엄마에게 솔직하지 못했고 엄마 또한 그랬다. 엄마는 살얼음판을 딛듯이 이모의 상처가 달지 않은 마음들만을 디디려 했고 이모는 엄마가 이모를 조금이라도 가여워할까봐 애써 아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엄마는 심지어 이모가 안양에서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사는지조차 몰랐다. 서로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던 그런 태도가 서서히 그들의 사이를 멀게 했고, 함께 살았던 시간 동안 쌓아왔던 마음들도 더 이상 그 관계를 지탱해주지 못했다. (113-114p)

 

 

크게 싸우고 헤어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주 조금씩 멀어져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더 오래 기억되는 사람들은 후자다.

이십대 초반에 엄마는 삶의 어느 지점에서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만난 인연들처럼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할 수 있는 얼굴들이 아직도 엄마의 인생에 많이 남아 있으리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다. 하지만 어떤 인연도 잃어버린 인연을 대체해줄 수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의외로 생의 초반에 나타났다. 어느 시점이 되니 어린 시절에는 비교적 쉽게 진입할 수 있었던 관계의 첫 장조차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생의 한 시점에서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었다. 그리고 그 빗장 바깥에서 서로에게 절대로 상처를 입히지 않을 사람들을 만나 같이 계를 하고 부부 동반 여행을 가고 등산을 했다. 스무 살 때로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그때는 뭘 모르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하면서.(115-116p)

 

 

할머니의 바람대로 엄마는 이모와 관계없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그런데도 가끔 엄마는 이모를 떠올렸다.

(...)

살면서 몇 번은 이모에게 다시 연락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실행한 적은 없었다. 시간을 이모를 한때 엄마의 삶에 머물렀다 스쳐간 사람으로 기록했고 엄마는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120p)

 

 

한지도 한지의 이야기를 해줬다. 나이로비에 살고 있는 삼백만 명의 사람들 중에 이백오십만 명이 빈민가에 산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한지는 그런 극단적인 부조리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부모님을 이해하지 못하며 자랐다고 말했다. 교회에 가서 가족의 평안만을 비는 부모님을 보면서 한지는 그 교회에서 고작 몇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지는 아버지의 돈으로 좋은 교육을 받았고, 가족에게 헌신적인 어머니의 사랑으로 안정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자신이 누려왔던 삶은 부모님의 부로 인한 것이었고, 그 부가 누군가를 착취한 결과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면 눈을 감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자신이 진정으로 믿고 의지하는 건 결국 돈뿐이라고 고백했다.(144p)

 

 

“기억은 재능이야. 넌 그런 재능을 타고났어.”

할머니는 어린 내게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고통스러운 일이란다. 그러니 너 자신을 조금이라도 무디게 해라. 행복한 기억이라면 더더욱 조심하렴. 행복한 기억은 보물처럼 보이지만 타오르는 숯과 같아. 두 손에 쥐고 있으면 너만 다치니 털어버려라. 얘야, 그건 선물이 아니야.”

(...)

시간은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억은 현재를 부식시키고 마음을 지치게 해 우리를 늙고 병들게 한다.(164-165p)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때 나는 나보다 약한 누군가를 도와주는 내 모습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말로는 친구라고 하면서도 내가 미진보다 더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너는 나 없이 아무것도 못해, 라고. 미진이 점점 더 러시아 말을 잘하게 될수록, 저의 도움이 필요 없어질수록, 매력적인 친구들과 어울릴수록 미진에게 화가 났습니다. 미진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요. 넌 아무것도 아니야. 넌 아무것도 아니야. 그게 날 견딜 수 없게 하더군요. 이타심인 줄 알았던 마음이 결국은 이기심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건 미진이 떠난 이후였습니다.(193p)

 

 

사람들의 말이 맞았다. 미카엘라는 언제나 든든한 딸이었다. 고생해서 제힘으로 서울에 뿌리를 내린 딸이 여자는 고맙고도 안쓰러웠다. 남들 다 보내는 학원 학 번 보내지 못했고 비싼 메이커 교복 대신 시장 교복을 사다 입혔던 여자였다. 통장에 부어놓았던 돈으로 미카엘라의 대학 입학금과 첫 학기 등록금을 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첫 여름방학에 고향에 내려온 아이가 이제부터 학비는 제 손으로 벌어 낼 테니 몸을 그만 혹사시키라고 했다.

그런 딸 앞에서 여자는 언제나 면목이 없었다. 엄마로서 제대로 해준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면 짐이라도 되지 말자고 다짐하게 됐다.

(...)

여자는 걸음을 옮겨서 지하철을 탔다. 딸이 사는 망원동으로 가서 숙소를 찾아볼 요량이었다. 어쩌면 미카엘라가 내일 아침에 전화를 할지도 모르고, 같이 점심을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카엘라에게 먼저 전화를 걸 용기는 나지 않았다. 광복절 날에도, 토요일에도 회사에서 일을 하는 아이가 아닌가. 바쁜 아이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얼굴이라도 한번 보면 좋겠다 싶었지만 그것도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220-221p)

 

 

그녀 나이 서른하나, 그녀 또래의 이들은 함께 힘을 모아 무엇 하나 바꿔보지 못했다. 세상은 그녀가 온몸을 던져도 실금하나 가지 않을 것처럼 견고해 보였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안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그녀는 그녀의 이십대를 통해 깨쳤다.(235p)

 

 

여자는 옆에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노인을 바라봤다. 이 노인은 얼마나 여러 번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어버렸을까. 여자는 노인들을 볼 때마다 그런 존경심을 느꼈다. 오래 살아가는 일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고 오래도록 남겨지는 일이니까. 그런 일들을 겪고도 다시 일어나 밥을 먹고 홀로 길을 걸어나가야 하는 일이니까.(238-239p)

 

 

ㅡ 최은영, <쇼코의 미소>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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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7

 


수치심, 죄책감, 창피함 등의 감정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좀 더 상세히 논의를 전개했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좀 가벼움.





많은 사례들에서 수치와 수치 주기는 부당한 비난을 받고 있다. 사실 수치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수치를 유발하는 규범인데 말이다. 의사들이 실수를 저질러 놓고 너무 수치스러워서 그것을 인정하거나 털어놓지 못한다면 진짜 문제는 수치가 아니다. 의사는 실수를 해선 안 되며 실수를 하지도 않는다고 규정하는 규범이 문제라는 얘기다(이는 주로 소송의 위협 때문일거라고 나는 생각한다).(56p)

 

 

창피함과 수치심 둘 다 누군가가 지켜볼 때 나타나는 감정이지만 수치심의 경우 목격당하는 것이 좀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습적인 규범을 모르고 위반했을 때에는ㅡ어떤 행사에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했거나 신발에 화장지가 붙어 있는 것을 누군가가 봤을 때ㅡ창피함을 느끼겠지만,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저질렀을 경우에는 그것을 실패로 간주하는 좀 더 확실한 사회적 기준이 존재하기 때문에 수치심을 느낀다. 동료 학생들 앞에서 암산을 하게 한 UCLA 실험에서 학생들이 보인 감정은 창피함보다는 수치심에 가까웠다. 암산 능력은 자아와 관련된 무언가를 말해주기 때문이다. 창피함은 개별 사건과 관련되기 때문에 좀 더 쉽게 잊히는 반면, 수치심은 그 사람의 정체성과 관련되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오래 지속된다.(64p)

 

 

외모를 통제하는 것은 개인의 역량에 달린 일이지만 대기나 여타의 환경 문제에 대한 개인의 영향력은 그렇게 크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자유 시장 논리에 따라 그 비용은 소비자에게 전가되기 때문에 죄책감을 덜어주는 제품들은 대부분 가격이 더 비싸다. 따라서 과거에 부자들이 돈을 내고 면죄부를 사서 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듯이, 이제 부자들은 돈을 내면 환경 파괴와 그에 관한 죄책감에 벗어날 수 있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75p)

 

 

물론 친환경 소비자운동은 조금 거슬리거나 실망스럽긴 해도 분명히 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알렉스 윌리엄스는 2007년 「뉴욕 타임스」패션과 스타일 면에 실린 기사에서, 환경 운동가들이 친환경 제품을 구매하면서 그러한 행동이 실제로 큰 차이를 만든다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은 아니라고 썼다. 친환경 제품을 구매하는 것은 그저 ‘선한 첫걸음’일 뿐이며 ‘종착점이 아닌 출발점’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도덕적 면허’에 관한 연구들은 친환경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선한 첫걸음이 된다는 가정에 부합하지 않는다. 친환경 제품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그 후 탐욕과 거짓말, 도둑질을 좀 더 쉽게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79p)

 

 

대부분의 사회 및 환경 라벨들의 경우, 해당 산업의 일부, 즉 죄책감을 느끼기 쉬운 양심 있는 소비자들의 구미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일부만 변화하면 된다. 나머지는 계속해서 살충제를 사용하거나 불공정 무역을 하거나 파괴적인 조업 장비를 사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제품들은 더 낮은 가격에 판매하면 된다. 그 다음 단계, 즉 규칙을 제정하여 업계 전체를 바꾸는 단계는 생략된다. 이 모든 게 사실은 계획의 일부이다. 생산자들이 올바른 일ㅡ유기농 식품을 재배하거나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물고기를 잡는 것ㅡ을 하게 만드는 주요 인센티브는 물건 값을 올릴 수 있다는 점이니까 말이다. 프리미엄 가격을 받기 위해서는 해당 제품이 규칙이 되어선 안 되고 예외가 되어야 하며, 따라서 해당 시장은 극소수 소비자들의 가책을 덜어주되 해당 업계에 장기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일은 피해야 한다. 이른바 ‘죄 세탁’ㅡ죄책감과 죄책감 완화 시법을 기만적으로 활용하여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고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차별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ㅡ을 하는 셈이다.(81-82p)

 

 

2009년 미국 7개 도시의 시민 50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가장 효과적인 에너지 절약 방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가장 많이 나온 응답은 ‘전깃불을 끄는’ 것이었다. 조명을 언급한 응답자는 20퍼센트에 가까웠던 반면, ‘자동차 사용을 줄인다’고 답한 사람은 13퍼센트에 불과했다. 개인의 차량 사용으로 인한 탄소 배출량은 전체 미국 가정의 탄소 배출량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며 미국 전체의 탄소 배출량 가운데서도 무려 15퍼센트를 파지하는데 말이다. 미국 가정의 에너지 사용량 가운데 자동차 사용으로 인한 소비량이 조명에 비해 6배 이상 더 많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정작 문제로 지적해야 할 것은 조명이 아니라 자동차였다.

(...)

“영국에서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한 번 탈 때 마다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은 비닐봉지를 73만 개 사용하거나 주전자에 물을 17만 6천 번 넘치게 받는 것과 똑같다.”

(...)

영국은 휴대전화 충전기의 플러그를 뽑아 놓으라고 자주 권고하지만 이를 통해 절약되는 에너지는 평균 자동차를 1초 동안 몰지 않았을 때 절약되는 에너지와 비슷한 양이므로 오히려 정신만 산만해질 뿐이라고 시사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다. 매케이는 정작 필요한 것은 개인의 행동이 아니라 법안이라고 말했다.(83-85p)

 

 

수치 주기를 지속 가능하게 만들어 미래에도 사용할 수 있게 하려면 폭로 대상인 개인이나 기업에게 집단에 다시 편입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도 중요하다. 가장 효과적인 수치 주기의 경우에는 행동 변화에 대한 보상으로 명예가 따라오기도 한다.(161p)

 

 

플로리다 주 범인 식별 사진을 올리는 웹사이트들이 있는가 하면, 이들과 공모하여 돈을 받고 사진을 내려주는 사이트들도 있다. 돈을 받고 웹에 있는 콘텐츠를 삭제해주는 시장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241p)

 

 

우리는 개인주의 정신과 자유 시장 이념에 사로잡혀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최대의 방법은 바로 소비자로서 참여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로 인해 죄책감이 패권을 장악하면서 지속 가능한 해산물과 유기농 식품, 탄소 계측기 같은 제품의 판매를 장려해왔다. 소비자들은 재활용 봉투와 머그컵을 사용하고 전깃불을 끄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이는 교통사고로 머리가 깨졌는데 비타민 C를 섭취하는 것과도 같다.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것과는 거리가 먼 일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대규모 협동의 딜레마들은 소수의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끼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이 소수의 사람들이 소비자로서 죄책감을 갖고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분명히 충분하지 않다. 좀 더 신속하게 그리고 좀 더 대규모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하다.

(...)

수치는 규범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우리의 미래에 수치가 어떤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는 미래에 어떤 규범이 남을 것인가에 달려 있다.

(...)

이러한 상황에서는 새로운 규범, 좀 더 중대한 규범들이 요구된다. 수치를 현명하게 활용한다면 그러한 규범을 만들고 시행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269-271p)

 

 

 

ㅡ 제니퍼 자케, <수치심의 힘> 中, 책읽는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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