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2/11

 

의미 있는 연구를 하고 있는 성실한 학자의 책을 실시간으로 만나볼 수 있어 너무나 좋았다. 전작과 논의하는 내용이 많이 겹치지만 앞으로도 저자의 저작물을 관심을 가지고 읽을 생각.

 

 

 

인간의 몸에 대한 지식이 생산되는 과정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객관적이라 생각되는 질병에 대한 생물학적인 정보 역시 그 지식을 만들어낸 사회의 편견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노란 벽지주인공의 이야기처럼 여성은 오랜 기간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쓰지 못하도록 침묵을 강요받았고, 여성의 질병은 남성이 생산해낸 의학지식으로 진단되고 치료 받았습니다.

그동안 실내 온도를 21도로 맞추었던 관리인과 과도한 용량의 수면제를 처방했던 의사는 여성을 차별하거나 아프게 할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보고 배운 매뉴얼과 교과서의 내용에 충실하게 행동했을 뿐이지요. 문제는 매뉴얼과 교과서 역시 누군가의 관점에서 생산된 과거의 지식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지식의 생산 과정에는 과거의 편견과 권력 관계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여성과 같은 사회적 약자의 몸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사실로 여겨지는 상식에 대해 우리가 왜 의심하고 질문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29-30p)

 

 

혈액형은 적혈구에 붙어 있는 단백질의 종류에 따라 달라질 뿐이니까요. 당연히 그 단백질의 종류는 사회에서 우월성이라고 불리는 어떤 형질과도 관계가 없습니다.(82p)

 

 

가난은 대뇌 회백질과 해마를 모두 축소시킵니다. 일상적인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하는 저소득층 아이들이 뇌는 가난으로 인해 자신의 잠재적인 역량 자체를 발휘할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의 문제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는 이유입니다.(137p)

 

 

2002, <사이언스>에 출판된 논문은 전 세계 52개 인구집단에서, 1,056명의 사람을 골라 377개의 유전자 분석을 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 결과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유전자의 차이 중 최소 93%는 집단 내부의 차이이고, 집단 간 차이는 최대 5%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황인종이자 한국인인 제 유전자의 구조가 같은 지역에 거주하는 한국인보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미국에 거주하는 흑인 노인과 더 유사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둘째로, 유전자 변이에 따라 인류를 6개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결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6개의 인구집단 구분과 오늘날 우리가 피부색이나 국적에 따라 나누는 인종 구분은 연관성이 없습니다. 이러한 구분에 이름을 붙이자면 피부색이나 생김새로 구분되는 인종이 아닌 유전적 계통이나 인구집단으로 부르는 게 마땅합니다.(159p)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외국인과 범죄를 연결 짓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

<9>는 그 결과입니다. 21,866건의 범죄 기사 중 1,690(7.7%)이 피의자가 외국인임을 명시한 기사였습니다. 같은 기간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686,629명이 범죄를 저질렀고 그중 6,508(0.9%)이 외국인이었습니다. 한국인의 범죄 중에서는 3.0%, 외국인의 범죄 중에서는 26.0%를 언론에서 보도한 것입니다. 외국인 범죄에 대한 보도 비율이 8.67배 높은 것입니다.

실제 2011, 2012년 내국인과 외국인의 범죄율을 비교해보면 어떤 기준으로 하더라도 내국인의 범죄율이 외국인보다 높습니다.

(...)

외국인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다거나 한국인보다 선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한국인의 범죄율이 외국인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상황에서 외국인 범죄에 대한 두려움이 한국사회에 널리 퍼진 데에는 언론의 편향적인 보도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부정적인 모습으로 외국인을 묘사하거나 언론을 통해 외국인의 범죄가 더 부각되거나 빈번하게 보도되는 것은 이러한 편견을 강화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161-163p)

 

 

한 무대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제도적 차별을 인지하기가 상대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비교해서 볼 수 있는 다른 세상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165p)

 

 

인종은 오늘날 생물학적으로 폐기된 개념입니다. 인종은 인간을 이해하는 데 있어 편리한 개념이지만 과학적으로 근거 없는 잘못된 편견이기 때문입니다.

(...)

인종이 사람 종의 자연적인 구분단위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인종이란 무엇일까? 인종은 고정관념이다. 실제로 직접 알아보지 않고, 누군가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위해 사람들이 사용하는 많은 방법 중 하나다.

 

하지만 인종차별은 인종과 달리 명백하게 실재하는 개념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인종차별은 정치적·사회적으로 거대한 힘을 발휘하고 인간의 몸과 삶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예외일 리 없습니다. OECD 국가 중 다른 인종에게 가장 적대적인 한국인들이 한국사회의 인종차별을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가해 행위가 문제로 인지되지 않을 만큼 한국사회에 인종차별이 깊게 스며들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차별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언어입니다. 나쁜 의도가 아닐지언정 흑인 남성을 두고서 흑형이라고 부르는 일은 사라져야 합니다. 콩고 출신 난민인 한 젊은이는 할아버지, 아저씨 할 것 없이흑형이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상황에 맞지 않고 거북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을 지칭하는 혼혈이라는 단어는 서로 다른 피가 섞였다는 뜻입니다. 이는 뒤집어보면, 한국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다른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한국인이라고 가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잘못된 명칭이지요. ‘순수한 피를 가진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

혹시라도 왜 그리 불편한 긴장을 계속 감당해야 하느냐고 묻는 다수자인 한국인이 있다면, 한반도만 벗어나면 한국인은 전 세계 모든 곳에서 소수자라는 사실을 함께 기억했으면 합니다.(176-178p)

 

 

인간의 모든 행동은 사회적 환경의 영향을 받습니다. (...) 저소득층 여성이 흡연을 하게 되는 이유를 정리합니다. 아이를 직접 돌보며 일을 해야 하고, 항상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며, 인간관계에서 감정적 지지를 받기 어려운 상황에서, 저소득층 여성에게 흡연은 이러한 사회적 압박을 감당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결론입니다. 이러한 인식이 중요한 이유는 그라함 교수가 말하듯이, 흡연을 하게 되는 사회적 환경을 바꾸지 않고 저소득층 여성에게 금연을 권하는 것은 효과적인 대책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다른 선택이 가능한 고소득층 여성의 경우에만 효과가 있기에, 소득수준에 따른 흡연율의 불평등이 커지는 효과를 낳을 뿐인 거지요.(191p)

 

 

이런 상황에서 1348년 독일에서 한 유대인 의사가 체포됩니다. 잔혹한 고문을 받은 그는 마침내 자백을 합니다. 랍비의 지시로 우물에 흑사병을 퍼트리는 독을 풀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자백을 계기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기 시작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 자백을 믿지는 않았겠지요. 가해자들은 그렇게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그 자백의 타당성에 대해 무지해집니다. 그렇게, 양심의 가책을 덜어낸 것이지요.(222-223p)

 

 

질병의 원인에 대한 비과학적 설명이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맞물려 당시 사회적 소수자였던 유대인 학살로 이어졌던 사례를 보며, 저는 오늘날 한국에 만연한 HIV 감염에 대한 공포와 낙인을 떠올립니다. 지난 30년간 의학의 발전으로 인해 HIV 감염은, 20세에 HIV에 감염되더라도 평균 70세까지 살 수 있고 약을 꾸준히 먹어 체내 바이러스 농도가 일정 수준 미만으로 떨어지면 콘돔 없이 성관계를 해도 상대방에게 전염되지 않는 관리 가능한 만성질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HIV 감염인은 AIDS 합병증이 아닌 자살로 죽고 있습니다. 한국의 HIV 감염인들의 자살로 인한 사망은 동일 연령 비감염인에 비해 10배 이상 높습니다. 질병에 대한 비과학적인 낙인과 혐오 때문입니다.(226p)

 

 

많은 사람들이 과학은 진리를 찾아내고 질문에 대한 정답을 알려준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학의 목소리를 신뢰하는 것은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합리적 사고 과정 때문이지, 그 결론이 진리를 담보하기 때문이 아닙니다.(241p)

 

 

당대에 가능한 최선의 연구 결과를 모두 모아서 원칙에 따라 검토해 그 결과를 공개하고, 그렇게 모은 데이터로도 확실히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을 내기 어렵다고 말하는 것, 저는 이런 과정이 과학적이라고 생각합니다.(292p)

 

 

간혹 모든 치료 효과에 대한 통계적 검증을 이야기할 때, 이러한 접근을 동양 과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제에 대한 서양 과학의 폭력이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저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한된 지식 속에서 최대한 세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동양의 과학자들을 모독하는 일이니까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20세기 제국주의가 들어오면서 퍼트린 서양의 합리와 구분되는, 동양의 신비를 강조한 오리엔탈리즘과 닿아 있는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저는 허준이나 정약용이 21 세기에 살고 있다면 당연히 동양의학의 여러 치료법에 대한 투명한 역학적 검증에 찬성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293-294p)

 

 

 

김승섭, <우리 몸이 세계라면> ,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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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9

 

크게 나쁘지 않았는데 뭐 대단한 게 있지도 않았던 것 같다. 뭘 기대 했길래? 여러 책이 생각나기도 했다. 빅데이터 인문학, 대량살상 수학무기, 틀리지 않는 법 등등. 읽으면서 조금 불만이었던 점은 글이 산만했다.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바로 제시하는 게 아니라 비슷한 사례를(그렇게 의미 있는 사례라는 생각도 들지 않음) 줄줄 늘어놓으며 미루고 미루다가 한참 뒤에야 짠하며 풀어놓는 식이라 왜 글을 이런 식으로 구성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구글 검색의 힘은 하나님을 많이 찾는 곳이 남부이고, 닉스가 뉴욕에서 인기가 많으며, 사람들이 어디에서도 나를 검색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데 있지 않다. 그런 것은 설문조사로도 알 수 있다. 구글 데이터가 가진 힘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는 하지 않을 이야기를 이 거대 검색엔진에 한다는 데서 비롯한다.(16p)

 

 

왜 출판물은 좌나 우로 편향할까?

경제학자들은 주요 요소, 즉 해당 지역의 정치 성향으로 곧장 나아갔다. 필라델피아나 디트로이트처럼 어떤 지역이 전반적으로 진보적이면 그곳의 1등 신문은 진보적이다. 어떤 지역이 빌링스나 텍사스 애머릴로처럼 보수적이라면 그곳의 1등 신문은 보수적이다. 달리 말해, 신문은 독자가 원하는 것을 주고자 한다.

신문사의 사주가 입김을 행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보통 신문사를 소유한 사람은 우리 생각만큼 정치적 편향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

이 연구는 우리가 뉴스 매체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법에 큰 영향을 끼친다. 많은 사람들, 특히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중에게 영향을 주려는 기업이나 부자들이 미국의 저널리즘을 지배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정치적 견해를 강요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겐츠코프와 사피로의 논문은 소유주의 두드러진 동기는 그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소유주는 대중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줘서 더 큰 부를 쌓고자 한다.

의문이 하나 더 있다. 더 중요하고, 더 도발적이고 논란거리가 될 의문이다. 미국 뉴스 매체들은 평균적으로 우편향인가 좌편향인가? 매체는 평균적으로 진보적인가 보수적인가?

겐츠코프와 사피로는 신문들이 좌편향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아하!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보수적인 독자는 이렇게 외칠 것이다.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오랫동안 신문이 좌익의 견해를 지지하도록 대중을 움직이려 한다고 의심해왔다.

하지만 이 논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사실, 진보 편향은 신문 독자들의 요구에 맞춘 결과일 뿐이다. 신문 독자층은 평균적으로 약간 좌편향이다(겐츠코프와 사피로는 이에 대한 데이터를 갖고 있다). 신문이 평균적으로 좌편향인 이유는 그것이 독자들이 원하는 견해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음모 따위는 없다. 그저 자본주의가 존재할 뿐.

겐츠코프와 사피로의 연구 결과는 뉴스 매체가 지구상의 다른 산업과 같은 방식으로 운영된다고 암시한다. 슈퍼마켓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으로 선반을 채우고, 신문은 사람들이 원하는 견해가 무엇인지 파악해서 그것으로 지면을 채운다.(119-120p)

 

 

구글을 이용한 경험을 떠올려보자. 추측건대 당신은 고상한 사람들 앞에서는 인정하기 어려운 행동이나 생각을 검색창에 입력하곤 할 것이다. 사실, 미국인 대다수가 구글에 매우 사적인 사항을 이야기한다는 너무도 강력한 증거가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인들은 날씨보다 포르노를 더 많이 검색한다. 남성 25퍼센트와 여성 8퍼센트만이 포르노를 본다고 인정한 설문조사 데이터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133p)

 

 

도대체 누가 여자아이에 대한 편견을 만들까?

바로 부모다.

부모는 아이에게 뛰어난 재능이 있다는 생각에 종종 흥분한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사실 두 살 난 내 아이가·····’로 시작하는 모든 구글 검색에 따라붙는 가장 흔한 말은 재능이 있어요. 하지만 여아와 남아에 관한 이런 질문이 똑같지는 않다. 부모는 내 딸이 재능 있나요?’보다 내 아들이 재능 있나요?’라는 질문을 2.5배 많이 한다. 지능과 관련된 문구를 사용할 때도 비슷한 편견이 나타난다. 이를테면 내 아들이 천재인가요?’ 같은 대놓고 물어보기에는 쑥스러운 문구가 그렇다.

(...)

사실, 지능이 낮다는 검색을 비롯해 지능과 연관 있는 모든 검색에서 부모는 아들에 관한 질문을 더 많이 했다.

(...)

그렇다면 부모가 딸에게 우선적으로 갖는 관심사는 무엇일까? 주로 외모와 관련 있다. 체중과과 관련된 질문을 생각해보자. 부모가 구글에 하는 질문 중 내 딸이 과체중인가요?’내 아들이 과체중인가요?’보다 거의 두 배 많다. 딸의 체중을 줄이는 방법 역시 아들의 체중을 줄이는 방법보다 약 두 배 많다. 재능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성 편견은 현실에 근거하지 않는다. 여아의 28퍼센트가 과체중인 반면 남아의 35퍼센트가 과체중이다. 체중계는 여아보다 남아가 체중이 많이 나간다고 말하지만, 부모의 눈에는 딸이 아들보다 과체중으로 보인다.

부모는 내 아들이 잘생겼냐는 질문보다 내 딸이 예쁘냐는 질문을 1.5배 많이 한다. 또한 딸이 못생겼냐는 질문을 아들이 못생겼냐는 질문보다 거의 세 배 많이 한다.

일반적으로 부모는 아들에 관해 질문할 때 긍정적인 단어를 사용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부모는 아들이 행복한지를 자주 묻고 우울한지는 잘 묻지 않는다.

진보적인 독자들은 이런 편견이 보수적인 지역에서 더 흔할 것이라고 상상하겠지만 그런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다. 사실, 이런 편견과 지역의 정치적 또는 문화적 구성 사이의 유의미한 관계를 찾지 못했다. 구글 검색 데이터를 처음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된 2004년 이후 이런 검색이 감소하고 있다는 증거도 없다. 여아에 대한 편견은 우리가 믿고 싶어 하는 것보다 더 광범위하며 더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 같다.(160-162p)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에게 맞춰진 사이트에 숨는다. 인터넷이 미국인을 분열시키는 상황을 하버드법학대학원의 캐스 선스타인은 이렇게 묘사했다. “커뮤니케이션 시장은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에 스스로를 가두는 상황으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진보주의자는 대체로 또는 오로지 진보주의적인 것을 읽고 보며, 중도주의자는 중도주의적인 것을, 보수주의자는 보수주의적인 것을, 신나치주의자는 신나치주의적인 것을 읽고 본다.”

(...)

스스로의 생각에만 맡겨두면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것을 확인해주는 견해를 찾는다. 이처럼 인터넷은 분명 극단적인 정치적 분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 견해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데이터에 따르면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166p)

 

 

하지만 이야기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페이스북 친구들이 나와 같은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을 확률은 대단히 높지만, 일단의 데이터 과학자들은 사람들이 페이스북에서 얻는 놀라울 정도로 많은 정보가 반대 견해를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평균적으로 사람들은 오프라인 친구보다 페이스북 친구가 훨씬 많다. 페이스북에서 맺기 쉬운 약한 유대는 반대되는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할 가능성을 높인다.

페이스북에서 우리는 고등학교 때 알던 사람, 먼 친척, 친구의 친구의 친구 등 약한 사회적 관계에 노출된다. 함께 볼링을 치거나 고기 구워 먹을 일은 절대 없는 사람들이다. 저녁식사에 초대할 일도 없다. 하지만 그들과도 페이스북 친구를 맺는다. 그러고 그들이 링크한 기사를 본다. 다른 때라면 고려조차 하지 않을 입장의 기사를 말이다.

요컨대, 인터넷은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화합하게 한다.

(...)내가 브룩클린의 단골 커피숍에서 백인 민족주의자를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나와 바이킹메이든88은 둘 다 뉴욕타임스닷컴에 자주 들른다.(170-171p)

 

 

페이스북은 친구들에게 내가 얼마나 괜찮게 사는지 자랑하는 디지털 허풍약이다. 페이스북 세상에서 보통의 성인들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카리브해로 휴가를 가고, <애틀랜틱>을 정독한다. 실제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화가 잔뜩 난 채 슈퍼마켓 계산 줄에 서 있고, <내셔널인콰이어러>를 몰래 보고, 수년간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은 배우자의 전화를 무시한다. 페이스북 세상에서는 가정생활이 완벽하다. 실제 가정생활은 엉망이다. 얼마나 엉망인지 아이 가진 것을 후회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페이스북 세상에서는 토요일 밤이면 모든 젊은이들이 근사한 파티에 간다. 실제로는 대부분이 집에서 혼자 넷플릭스 드라마를 몰아서 본다. 페이스북 세상에서 여자친구는 남자친구와 다녀온 행복한 휴가 사진을 26장 올린다. 실제 세상에서는 이런 사진을 올린 직후, 구글에 남자친구가 나와 성관계를 갖지 않으려 해요라는 질문을 올린다. 이때 그 남자친구는 <최고의 몸매, 최고의 섹스, 최고의 구강성교>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179-180p)

 

 

이 과정에서 당신은 성인의 여러 가지 행동과 관심사 그리고 자신의 모습을 형성하는 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조차 우리가 태어난 때나 어린 시절의 중요한 시기에 생긴 일 같은 임의적인 사건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197p)

 

 

그들은 무엇을 발견했을까? 일부 실험들이 보여주듯이 폭력적인 영화가 개봉한 때에 범죄가 늘어났을까? 아니면 차이가 없었을까?

연구팀은 폭력적인 영화가 주목을 받은 주말에 범죄율이 떨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당신이 읽은 그대로가 맞다. 인기 있는 폭력 영화가 상영된 주말에, 미국인 수백만 명이 사람을 죽이는 이미지에 노출된 때에 범죄율은 오히려 떨어졌다. 눈에 띄게 말이다.

이런 이상하고 예상치 못한 결과를 얻으면 처음에는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두 연구자는 코딩을 면밀히 검토했다. 실수는 없었다. 그다음에 이들은 이 결과를 설명할 다른 변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시기가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아니었다. 날씨가 이 관계를 얼마간 주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 날씨 데이터를 수집했다. 날씨도 아니었다.

(...)

여러 일화와 연구실에서 나온 여러 증거와 매우 찜찜한 느낌이 남긴 했지만 폭력적인 영화를 시청하면 어쩐 일인지 범죄 발생률이 떨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

인기 있는 폭력 영화가 상영될 때에는 다른 주말에 비해 범죄율이 이른 저녁부터 감소했다. 달리 표현하면, 범죄율은 관객들이 영화관에 들어서고 있을 때, 즉 폭력적인 장면이 나오기 전에 평소보다 더 낮다.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겠는가? 우선, 폭력적인 영화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보자. 젊은 남성, 특히 젊고 공격적인 남성이다.

다음으로 범죄가 어디에서 발생하는 경향이 있는지 생각해보자. 영화관에서 범죄가 발생하는 경우는 드물다.

젊고 공격적인 남성에게 <한니발>을 볼 기회가 생기면 그는 영화를 보러 갈 것이다. 젊고 공격적인 남성에게 <런어웨이 브라이드>를 볼 기회가 생긴다면 그는 그 기회를 버리고 대신 술집, 클럽, 당구장처럼 폭력적인 범죄의 발생 빈도가 높은 곳에 갈 것이다.

폭력적인 영화는 폭력성이 잠재된 사람들이 거리에 나가지 못하게 만든다.

그럼 수수께끼는 풀린 것일까? 아직은 아니다. 데이터에는 이상한 점이 하나 더 있다. 이런 영향은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바로 나타났고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이 문을 닫은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인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범죄율은 자정부터 새벽 6시까지도 낮게 유지 됐다.

젊은 남성들이 영화관에 있는 동안은 범죄율이 낮더라도, 그들이 영화관을 나와서는 다시 올라가야 하지 않을까? 그들은 방금 여러 심리 실험이 사람들을 화나게 하고 폭력적으로 만든다고 말한 폭력 영화를 보지 않았는가?

숙고 끝에 범죄 전문가인 연구자들은 또 다른 유레카를 외쳤다. 그들은 알코올이 범죄의 주요한 원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연구자들은 미국의 거의 모든 영화관에서 주류를 판매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정도로 영화관에 가봤다. 실제로 연구자들은 폭력적인 영화가 끝난 후 늦은 밤에 알코올 관련 범죄가 급격히 감소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221-225p)

 

 

그는 인터넷의 특정 사이트에 방문하지 않고 견디기가 그토록 힘든 이유를 설명한다. “스크린 뒤편에는 당신의 자기관리능력을 허물어뜨리려는 전문가 1,000명이 있다.”(252p)

 

 

대학을 한번 생각해보자. 하버드대학교처럼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대학을 다녔는지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교 같은 견실한 학교를 다녔는지가 그렇게 큰 문제일까?(272p)

 

갑자기 이런 당연한 소리를 하는 이유는 무슨 문제 때문일까?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 <모두 거짓말을 한다> , 더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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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8

 


저자가 평소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짐작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죽음을 마주하는 인간은 많은 부분이 바뀐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생각이든, 행동이든, 말이든.

 

 




아침 산책. 또 꽃들을 들여다본다. 꽃들이 시들 때를 근심한다면 이토록 철없이 만개할 수 있을까.(97p)

 

 

한동안 눈뜨면 하루가 아득했다. 텅 빈 시간의 안개가 눈앞을 가리고 그 안개의 하루를 건너갈 일이 막막했다. 그러나 오늘은 아침에 눈떠서 문득 중얼거린다. “안개를 통과하는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그건 일상이다. 일상을 지켜야 한다, 일상이 길이다.”(99p)

 

 

돌아보면 살아오는 내내 나는 겁쟁이였다. 불편함, 괴로움, 고통들 앞에서 늘 도피했다. 그래도 큰 탈 없이 여기까지 온 건 모두가 착하고 친절했던 주변의 타자들 덕이었다. 이제 그런 시간은 지나갔다. 다가오는 시간들, 다가오는 것들 앞에서의 인내와 힘을 스스로 키워야 한다. 새로운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니 노래하자.(120p)

 

 

내 안의 텅 빈 곳이 있었다, 돌아보면 그 텅 빈 곳을 채우기 위해 돌아다녔던 세월이 나의 인생이었다. 도서관을 헤매던 지식들, 애타게 찾아다녔던 사랑들, 미친 듯이 자기에게 퍼부었던 히스테리들, 끝없이 함몰했던 막막한 꿈들····· 그것들은 모두가 이 텅 빈 곳을 채워서 그 바람 소리를 듣지 않으려는 몸부림들이었다. 그러나 그 무엇도 그 텅 빈 곳을 채우지는 못했다. 이제 또 무엇이 내게 남아 있는 걸까. 무엇으로 이 텅 빈 곳을 채울 수 있는 걸까. 이제 남은 시간은 부족한데 과연 나는 그 텅 빈 곳의 주인을 찾을 수 있을까.(144p)

 

 

경계의 시간 위에서 산다는 건 양자택일을(연속성이냐 불연속성이냐)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삶을 이어갈 것인가(물론 일상에 대한 자세는 달라지고 살아온 삶에 대한 정리 작업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겠지만)아니면 그 삶으로부터 완전히 돌아서서 다른 삶을 살 것인가. 논리적으로 존재론적으로 당연한 건 후자의 선택이다. 하지만 삶은 오래된 습관이어서 시간이 갑자기 달라졌다고 삶도 그렇게 단숨에 달라질 수는 없다. 새로운 나무를 심자면 오래된 습관의 나무를 캐어내고 토양을 비워야 하는데 질기고 깊은 과거의 뿌리를 캐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새로운 삶을 단호하게 선택한 사람도 그 결단과 기획을 즉각 실현할 수가 없다. 경계의 시간 위에서 우선 가능한 삶은 지난 삶의 연속성이냐 불연속성이냐가 아니라 또 다른 양자택일이다. 하나는 이전의 삶을 자세와 태도를 달리하면서 이어 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삶을 위해서 토양을 비우는 작업, 오래된 습관의 뿌리를 캐어내는 우회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남겨진 시간 안에 그 우회 작업이 마무리될지는 미지수다. 뿌리는 깊고 질겨서 쉽게 토양을 비워주지 않는데 작업의 시간은 하루하루 빠르게 줄어든다.(169-170p)

 

 

프루스트의 소설 공간은 둘이다. 하나는 생의 공간. 이 공간은 점점 더 수축하고 그 끝에 침대가 있다. 이 침대보다 더 작은 공간이 관이다. 또 하나의 공간은 추억의 공간. 이 공간은 생의 공간이 수축할수록 점점 더 확장되어서 마침내 하나의 우주를 연다. 그것이 회상의 공간이고 소설의 공간이다.(184p)

 

 

지금이 가장 좋은 때다. 지금이 가장 안전한 때다. 지금은 아직 그때가 아니기때문이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은 힘이 없다. 지금 여기가 아닌 것은 힘이 없다. 지금과 그때 사이에는 무한한 지금들이 있다. 그것들이 무엇을 가져오고 만들지 지금은 모른다.(252p)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 한겨레출판

,

2019/2/2

 

 

제가 일종의 가짜라는 건 알아요. 내장 깊은 곳에서 혐오로 글을 쓴다고나 할까요, 거의 전적으로 말이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면, 저도 계속해나갑니다. 달리 할 게 뭐 있습니까?(29p)

 

 

찰스 부코스키, <글쓰기에 대하여> , 시공사

,

2019/2/2

 

 

여성을 비롯한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가 늘어나고, 극단주의가 영토를 넓혀가고 있지만 미래를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겪은 일을 기억하고, 또 기록하는 것입니다. 벽 속에 숨어 있을지언정 이러한 기록은 그 누구도 사라지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343p)

 

 

2-3킬로그램이 되는 소의 혀를 입에 물고 먹, 기름 등을 부어 만든 액체에 적신 뒤, 종이 위에 끝이 보이지 않는 붓질을 해야 하는 예술. 서경식 선생님의 지난 목격 덕분에 보지 못했으나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못한 이로 버티는 삶. 자신의 진정한 언어로 말하지 못하는 것. 그건 입안의 소 혀를 구역질이 나도 참으며 정체불명의 언어를 쓰는 일이었다.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오늘은 꼭 이 책을 일기로 쓰고 싶었다. 이 일기를 보는 이들도 당신이 모르던 세상의 옆면을 보여줄 수 있는 한 권의 책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오래된 책들도, 혹은 방금 갓 나온 책들도 읽어야 하는 이유다.(384p)

 

 

김유리, 김슬기, <읽은 척 하면 됩니다> , 난다

,

2019/2/1

 


몇 년 전 제임스 설터의 책이 한 번에 출간 되었을 때 가벼운 나날, 스포츠와 여가, 어젯밤 이렇게 3권을 사두었는데 지금까지 그 중 한 권인 어젯밤만 읽었다. 그리고 어젯밤은 굉장히 훌륭한 단편집이었다. 다른 두 권은 장편이라 이리저리 밀리다가 지금까지 안 읽고 있는데, 이 책을 계기로 가벼운 나날과 올 댓 이즈를(스포츠와 여가는?) 꼭 읽어봐야겠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나는 책을 읽지 않거나 읽어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과 오랫동안 정말 친하게 지내거나 편안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습니다. 나에게는 독서가 필수적인 것입니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선 뭔가 빠진 게 있지요. 언급하는 말의 폭, 역사 감각, 공감 능력 같은 게 부족해요. 책은 패스워드지요. 영화는 너무 단순해요. 어쩌면 내 생각이 틀렸는지도 모르겠군요.

(...)

모든 책을 읽는 건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책을 잘 읽는 사람이라 해도 읽지 않고 남아 있는 책들이 엄청나게 많기 마련입니다. (...) 우리는 늘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흥미로운 작가들을 만나게 됩니다.(16p)

 

 

내가 마침내 인생 경로를 바꾸어 군대를 떠나 다른 삶을 시작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것은 육체적으로는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나는 전역 지원서를 써서 직접 제출했지요. 난 어떤 반응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누군가는 내가 장교로서의 생활을 끝내고 12년 동안 복무한 군대를 떠난다는 사실에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섭섭해할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일은 마치 군화를 반납하는 일처럼 사무적으로 받아들여졌지요.(65-66p)

 

 

그때 그렇게 해서 장편소설을 하나 써냈습니다. 그 작품이 가벼운 나날입니다. 언젠가는 나는 그것을 부부 생활의 닳아빠진 돌 같은 것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평범한 모든 것, 놀라운 모든 것, 삶을 충만하게 만들거나 쓰라리게 만드는 모든 것그것들은 수년 동안, 수십 년 동안 계속되지만 결국 기차에서 보이는 것들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아요. 그곳의 초원도 나무도 집도 어두워진 마을도 기차역도 다 지나가지요. 어떤 영속적인 순간들, 어떤 사람들, 어떤 날들을 제외하곤 기록되지 않은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동물들은 죽고 집은 팔리고 아이들은 자라고 심지어 부부도 사라집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이 시가 남아 있습니다.

(...)

우리가 글로 쓴 것들은 우리와 함께 늙어가지 않습니다. 적어도 내 경우는 그런 것 같아요. 그것들에도 시간의 흔적이 어리는 것 같긴 해요.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최신 상태가 되는 것과 같은 일은 없지요. 그것들은 시간 바깥으로 나가서 존재하거나 아니면 소멸됩니다. 문학은 이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작품은 시대와 장소를 드러내 보여준 다음, 점차 그 시대와 장소가 됩니다.(74-75p)

 

 

글쓰기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 처음 그걸 적어 내려가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대개는 우리가 쓴 글이 아주 형편없어서 낙담하게 되고 계속 써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으니까요. 내가 어렵게 생각하는 부분은 그거예요. 우리가 쓴 글을 보고 있을 때 생기는 좌절감 말입니다.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나 하는 마음이지요.(102p)

 

 

나는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생각하고 그걸 되살려내는 데 기쁨이 있다고 생각해요. 거기엔 전반적인 진실의 문제가 있어요. 우리에겐 우리의 삶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진실이라고 주장할 권리가 충분히 있어요. 우린 이미 사실과 허구가 모호하게 뒤섞인 것을 보아왔어요. 자신들의 책을 논픽션 소설이라고, 즉 논픽션 허구라고 설명한 작가들을 보아왔어요. 나는 다소 고전적인 관점을 지지해요.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객관적 진실 같은 게 있다고 믿지요. 빅토르 위고의 관찰한 것들이 하나의 예랍니다. 아무도 신의 진실을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쓰고 있는 것은 신의 진실이 아니에요. 그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으로서의우리가 관찰한 것으로서의진실인 거죠. 나는 틀릴 수 있어요. 우리 모두가 다 그래요. 그 안에 실수가 있을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의도적인 실수나 부주의함에서 비롯된 실수는 아니에요. 그건 단지 우리 모르게 기어든 실수죠.(162p)

 

 

아주 많은 시간을 글쓰기에 사용해야 하고, 생활 대신 글쓰기를 해야 합니다. 뭔가를 얻어 내려면 아주 많은 것을 글쓰기에 바쳐야 해요. 그렇게 해서 얻어내는 것은 아주 소소한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건 의미 있는 거죠.(196p)

 

 

설터는 소설은 삶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삶을 예리하게 관찰하여 그것을 작가 자신의 목소리로 담아내는 것이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소설을 허구를 뜻하는 픽션이라 부르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말하며, 모든 것은 상상력에서 나온다고 주장하는 작가들을 무시한다. 설터에게는 본질적으로 진실인 이야기만이 중요했다. 당연히 그는 자신이 체험하지 않은 이야기는 소설로 만들어내지 않았다. 소설로 만들어내지 못했다.(205p)

 

 

 

제임스 설터, <소설을 쓰고 싶다면> , 마음산책

,

2019/2/1

 

미세먼지 문제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만들어 준 것에 의의를 둔다.

 

 

발암물질과 독성 물질은 역치에서 차이를 보인다. 역치란, 어떤 반응이 일어나게 만들기 위한 최소한의 자극 세기값이다. 독성 물질은 분해되든, 축적되든 일단 그 총체적인 값이 역치보다 낮은 수준에 있으면 해당 개체에 독성을 나타내지 않는다.(71p)

 

 

엉뚱하게 터진 환경부 고등어 구이 보도자료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고등어구이=PM2.5 주범이 아닌, ‘고등어 구이=환기였다.

(...)

고등어와 삽겹살 중 어떤 것을 굽더라도 주방 환기 설비(레인지후드)를 켜지 않으면 안 될 수준으로 PM이 과하게평소보다 10~70배 이상발생한다는 것은 이미 다양한 실험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실내 조리법에 따른 PM 농도는 삶기, 튀기기, 굽기 순으로, 굽기가 가장 높다. 고등어냐 삼겹살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촉촉한 찜이냐 바삭한 구이냐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다만, 지져 먹든 볶아 먹든 일단 가스 불을 켜기 전에 레인지후드부터 켜는 것은 필수다. 소리만 시끄럽고 별일 안 하는 것 같아 보일지 몰라도, 후드를 켜는 것만으로도 조리시 발생한 오염 물질 농도를 최대 10분의 1로 줄일 수 있다.조리가 끝난 후에도, 조리시 발생한 오염 물질은 여전히 존재하므로, 후드나 공기청정기를 30분 이상 틀어둘 필요가 있다. 따라서, 평소에 레인지후드의 필터를 주기적으로 청소하는 것이 주방 관리의 기본이자 곧 건강 관리의 시작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95-96p)

 

 

도로 위의 주요 PM2.5 배출원은 바로 자동차 부품인 브레이크 패드 및 라이닝’, 그리고 타이어. 자동차가 도로 위를 달리면 마찰로 인해 아스팔트와 타이어, 그리고 브레이크 패드 및 라이닝이 마모되면서 PM2.5가 대량 발생한다. 타이어 PM은 수은, , 카드뮴, 6가크롬 등 발암 중금속을 포함하고 있는 데다 굉장히 미세하다. 또 차량 속도를 줄이거나 정지할 때 브레이크 패드와 디스크가 서로 마찰해 발생하는 PM2.5의 양도 상당하다. 게다가 아스팔트 자체가 타이어와의 마찰로 마모되어 발생하는 PM도 적지 않다. 이처럼 도로 위는 다양한 부위에서 발생한 PM들이 모이고 또 모여 일종의 거대한 PM 저장소 역할을 하고 있으며, 1제곱미터당 수백 억 개의 PM이 상존하고 있다. 차량이 지날 때마다 PM이 공중으로 날리고 또 날리며 호흡기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101-102p)

 

 

현재로선 교통량이 많은 지역은 정기적으로 물청소 차량과 분진 흡입 청소 차량을 동시에 사용하여 도로 청소를 되도록 자주 시행하는 것이 주민 건강을 위한 거의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122p)

 

 

측정값이 이렇게 차이 나는 이유는 왜일까? 각 지역의 PM2.5 관측소가 어디에 어떻게 설치되었는지를 살펴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자치구마다 설치된 PM2.5 관측소는 단 한 곳뿐이며, 그마저도 시청, 구청, 주민 센터 등 관공서의 옥상이나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경우가 많다. 환경부는 정확한 PM 농도 측정을 위해 1.5~10미터 높이에 시료 채취구를 설치하도록 권고하고 있지만, 전국의 도시 대기 측정소 264곳 중 무려 82.6퍼센트인 218곳이 지상 10미터가 넘는 곳에 설치돼 있다(20181월 기준). 상대적으로 대기질이 그나마 나은 높은 위치에 관측소를 설치한 것이다. 따라서 그간 PM 농도 정보가 국민에게 잘못 전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실제 측정 결과, 광명시 측정소와 마찬가지로 PM10, PM2.5 모두 옥상보다 지상이 높게 나왔다. 정부가 야외 활동하기 괜찮은 날이라고 해도 목이 따끔따끔하고 답답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127-128p)

 

 

황사나 PM 차단용 마스크(이하, 황사 마스크)를 살 때는 제품 겉포장에 KF80, KF94, KF99란 표시 중 하나가 있는지 분명히 확인해야 한다. KFKorea Filter의 약자고, 그 옆에 표시된 숫자는 미세입자의 차단 효율(퍼센트)를 나타낸다. 따라서 숫자가 클수록 PM 차단 효과도 크다. 구체적으로, KF80는 평균 크기 PM0.6의 미세입자를 80퍼센트 이상 걸러낼 수 있다는 의미다.

(...)

황사 마스크를 세척하면 모양이 찌그러지고, 기능도 떨어져 얼굴에 밀착되지 않는다. 이미 사용한 황사 마스크는 겉보기엔 깨끗해 보일지언정, 마스크 틈 사이사이는 각종 미세한 오염 물질로 더러워진 상태이므로 일회용임을 존중해 과감히 버려야 한다.(200-201p)

 

 

필터식 공기청정기의 심장은 필터, 그중에서도 바로 헤파필터. 헤파HEPAHigh Efficiency Particulate Air(고효율미립자공기)의 줄임말로, 미국에서 원자력 연구 초기에 방사성 미립자를 제거하기 위해 처음 개발된 필터다. 꼬불꼬불한 라면같이 생긴 알루미늄 분리판과 무작위로 엉켜 있는 부직포 섬유를 겹겹이 교차시켜 만들었으며 현재까지는 PM 제거에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알려져 필터식 공기청정기의 핵심 필터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다.

공기청정기의 성능을 결정하는 헤파필터도 황사 마스크처럼 집진 효율에 따라 등급이 매겨진다. H10 등급부터 H14 등급까지 5단계로 나뉘어져 있으며, 헤파필터 등급이 한 단계 높아질 때마다 PM을 통과시키는 비율이 최대 10배씩 줄어든다. (...) 이처럼 헤파필터의 등급은 효율 차이가 굉장히 크기 때문에 제품을 선택할 때 반드시 참고할 필요가 있다.(208p)

 

 

CA 인증과 헤파필터 등급에 이어, 공기청정기 구매시 확인해야 할 마지막 사항은 공기청정기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정화 면적이다. 일반적인 환경이라면 공기청정기는 공간 면적 전체의 3분의 1 면적용 제품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

공기청정기를 사용하는 공간은 빈 창고 같은 곳이 아니라 가구도 있고, 칸막이나 벽도 있고, 방으로 나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정화 면적이 넓은 것 한 대만 두기보다는 정화 면적이 적은 것 여러 대를 갖추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 따라서 거실에는 용량이 큰 제품을 두고, 방에는 용량이 작은 제품을 별도로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211p)

 

 

 

김동환, <오늘도 미세먼지 나쁨> , 휴머니스트

,

2019/2/1

 

그냥 평범했다.

 

사랑이 시작하는 과정은 우연하고 유형의 한계가 없고 불가해했는데, 사라지는 과정에서는 정확하고 구체적인 알리바이가 그려지는 것이 슬펐다. (...) 그렇게 소멸은 정확하고 슬픈 것이었다.(35p)

 

 

여름밤 사람들이 집어들고 나가는 아이스크림도 술을 마신 뒤에는 늘 달고 차가운 것을 사 먹던 산주의 표정을 떠올리게 했다. 경애는 산주가 그것을 차가워서 먹는 건지 달콤해서 먹는 건지 궁금했다. 언젠가 산주는 단지 빨리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라고 한 적이 있었다. 술을 마시고 난 뒤에 사람들과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그런다고.(60p)

 

 

그러니까 인생은 손쓸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냥 포기해버려야 하는 것이었다. 마음의 번뇌와 갈등, 고통, 어떤 조갈증, 허기 같은 건 지병처럼 가져가야 하는 것이었다.(143p)

 

 

한 개인에 대해 이렇게 폭풍처럼 많은 것들을 알아버리는 건 기이한 경험이었다.

(...)

그때는 페이스북을 통해 편지를 보내는 다른 회원에게 그랬듯이 자신이 상대방보다 낫고 더 많이 알고 강인하며 깨어 있다고 여겼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이 힘을 잃기 시작했다. 경애가 더이상 익명의 페이스북 회원이 아니게 되면서 상수의 그런 우쭐함은 사라져버렸다. 경애를 돕는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상수는 경애가 자신이 파괴되었다고 생각했다며 이메일을 보내왔을 때 평소처럼 정신 차리라든가, 그거 정말 똥 밟는 일이에요, 남자들은 원래 다 그럽니다, 성욕을 채우려면 어떤 사탕발림도 마다하지를 않아요, 아주 시를 쓰지요, 릴케가 따로 없어요, 라고 말하지 못했다. 상수는 그렇게 양말 하나 벗지 않고 앉아 있던 산주 앞에서 경애가 느꼈을 모욕감을 떠올리며 조용히 분노했을 뿐이었다. 아마 경애가 그랬을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차가운 물을 뒤집어 쓴 듯 마음이 오므라들었다. 기가 죽고 축소되었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이란 그렇게 함께 떨어져내리는 것이었다.(207-208p)

 

 

경애씨, 내가 영업 비밀 하나 가르쳐줄까? 동생 같아서 그러는 거야.”

뭔가요?”

여기서는 절대 금방 떠날 사람처럼 굴면 안돼. 떠나는 사람들한테 사이공은 지쳤거든. 일주일 있더라도 이십년 있을 것처럼 행동해야 해.”

알겠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기 마음속으로는 어떻게 해야 여기서 버티는 줄 알아?”

어떻게 해야 버틸 수 있는데요?”

내가 한 이삼일 내로라도 짐 싸서 한국 갈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해. 안 그러면 못 버텨.”(218p)

 

 

나는 지금 네가 얼마나 외로울지 짐작이 간다.

얼마나 외로운데?

내가 12월의 마지막 날, 그러니까 새해의 첫날로 넘어가는 딱 그 자정에 물류센터에서 지금처럼 야근하고 있었거든.

넌 특근비 나온다고 늘 그때 야근하니까.

그래, 그러다보면 나도 카운트다운을 한단 말이야. , , , , , ····· , 하는데 상품이 뚝 떨어져내리는 거야. 바로 배송하는 상품은 이미 포장까지 다 돼서 창고에 있다가 전산으로 주문하면 컨베이어 타고 오니까. 보니까 100개들이 지퍼백이야. 내가 그거 바코드 찍어서 옮기면서 야너도 여간 외로운 인간이 아니구나 했지. 새해가 되자마자 한 일이 지퍼백 주문이라니. 사람 다 외롭다, 100개들이 지퍼백처럼 다들 외로워.(226p)

 

 

에일린은 푸미흥에 올 때마다 이곳의 클린함에 큰 인상을 받는다고 했다. 전봇대도 노점상도 오토바이도 없다면서. 신도시를 만들면서 전기시설을 모두 지하에 매립했기 때문에 호찌민의 좁고 어지러운 거리에 마치 새둥지처럼 전선과 케이블이 마구 엉켜 있는 전봇대들이 여기에는 없었다. 푸미흥에 살면서도 이 동네가 호찌민의 풍경과 유독 다른 이유를 깨닫지 못했던 경애에게는 그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발견의 눈을 갖지 못한다면 삶이 다르게 보일 가능성은 제로가 되는구나 싶었던 순간이었다. 경애는 궁금했다. 그것이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적용되는지. 이를테면 주말 내내 틀어박혀 어떤 감정기복을 이기며 있다가 갑자기 문밖에 못 나가겠다고 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272p)

 

 

경애는 자기가 인생을 길게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기회라는 것은 그렇게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타인의 불행을 담보로 만들어낸 것은 기회가 아니라 일종의 시험에 가깝다고.(285p)

 

 

김금희, <경애의 마음> , 창비

,

2019/1/23

 

 

 

한편 우리는 타인의 신중한 행동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처신에 매혹당하거나 호의를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매혹은 결과적으로 반대의 결과를 낳기도 한다. 남들이 드러나지 않게 처신하고 함부로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모습은 마냥 좋게만 보인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꿍꿍이 없는 미덕만을 본다. 그러나 무엇이 우리에게 그처럼 안이한 확신을 주는가? 왜 엄청난 은폐, 완벽한 위선, 각별히 세련된 형태의 나르시시즘이나 단순한 비겁함을 보지 못하는 걸까?(35-36p)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마땅히 경이롭고 현명하며 올바른 태도이지만 반대로무분별하게 굴거나 교만과 허영을 떠는 것도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다. 드러내지 않기가 드러내지 않기와 반대되는 것의 조건이기 때문이다.(91p)

 

 

특히 성 토마스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인간은 이웃에게 자기는 갖지 못한 좋은 면이 있다거나 이웃에게는 없는 나쁜 면이 자기에게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겸손하게 이웃을 섬길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그렇게 낮춘다는 것은 범상치 않은 사유다. 사실 겸손에는 자기모욕이 없다. 심리적인 자기모욕이든 사회적인 자기모욕이든 그런 것은 겸손과 무관하다. 겸손은 그저 타자가 가장 형편없는 인간일지라도 그에게 아직도 가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섬세한 지각일 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 우리가 오늘날 드러내지 않기라고 부르는 것의 기원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드러내지 않기라는 경험의 중추는아직은 그 경험이 겸손이라는 이름으로 불릴지라도자기증오나 자기에 대한 염려와는 무관하다. 그 중추는 순전히 타자들에게로, 대타자에게로, 피조물들에게로, 세계로 향해 있다.(91-92p)

 

 

사실 끊임없이 감시당하고 통제당하는 것보다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더 이상 숨을 곳, 자기만의 아지트, 한순간이라도 타인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이 아무 데도 없다면, 자기 생각을 아무 위험 없이 있는 그대로 글로 쓸 수 없다면, 친아버지, 아내, 어릴 때부터의 친구가 스파이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때문에 그 누구에게도 비밀스러운 속내를 털어놓을 수 없다면 그 이상 끔찍한 일이 있을까? 전체주의는 각 사람의 비밀을 파내기 위해서 신체 안까지, 꿈속에서까지 밀고 들어온다. 물론 더 극악무도한 일들도 있었다. 이름 없는 가혹 행위, 대량 학살,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콜리마 수용소. 그러나 파렴치함으로 따지자면 자신을 숨길 수 없다는 이 불가능성은 어마어마하고 잔악한 학살 바로 다음 순위에 올 만하다. 비밀도, 미스터리도, 한 점 그림자도 없는 삶, 자기와 타자 사이에나 자기와 자기 사이에 아무런 틈이 없는 삶은 절대적인 무한 공포로 치닫게 마련이고 장기적으로는 우리 안의 인간성을 모조리 말살할 터이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미 1940년대 말에 그 점을 강력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전체의 공포는 모든 인간을 서로가 서로에게 떠밀리게 압박함으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간을 말살한다.”(130-131p)

 

 

드러내지 않기와 공적인 장은 이중적인 상호전제 관계에 있다. 공적인 장이 있어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 거기서 물러나거나 접근하거나 할 수 있지만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공적인 장을 예정된 파괴에서 보호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입을 다물어야 공적인 발언이 경청될 수 있지만 사람들이 말을 해야만 고독이 고립으로 변질되지 않을 수 있다.(134p)

 

 

드러내지 않기는 주기적인 방식으로만 행복을 줄 수 있다. 미결 상태, 정지와 재개이 지점, 생산적인 공백, 새로운 확장을 기다리는 수축, 새로운 쟁취를 기다리는 이탈로서.

물론 이러한 시각에서라면 영원하고 결정적이며 확고한 행복은 없다. 그리고 행복을 삶의 궁극 목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이제는 불가능하다. 행복은 고된 노력들 틈에서 잠시 느끼는 기대에 불과하다. 그러한 행복은 삶 속에 있지 삶의 끝에 있지 않다. 하지만 그게 나쁜가? 장담하건대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행복의 추구에 전념하는 사회들은 어차피 행복에 도달하지 못할 뿐 아니라 속까지 병으로 곪은 사회들이다. 오히려 행복보다 높이 있지만 한정되어 있는 목표들, 가령 자유, 아름다움, 정의, 진실, 창조, 위대함 등에 전념하는 편이 건강하다. 그런데 그렇게 건강한 사회 안에서도 우리에게 유일하게 허락되는 행복의 순간들은 드러나지 않게 처신할 줄 알고, 남들이나 자기 자신을 내버려둘 줄 알고, 인생의 일요일에 맘 편히 초원에 드러누우러 떠날 줄 아는 순간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빠져나옴의 행복에 붙일 수 있는 또 다른 이름은 유연성이다.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심오한 내면생활을 위해서 세계와 타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둘러싸고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 좋고 나쁜 일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다. 유연성이란 끊임없이 자기를 포기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만 그 포기는 어디까지나 일시적이다.(160-162p)

 

 

사랑의 유일한 방식은 들뢰즈가 말한 대로 타자를 그의 미지의 공간과 더불어사랑하는 것, 다시 말해 침범이나 집착 없이, 드러나지 않게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자식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식은 자식에게 집착하지 않고 그 아이가 장차 부모를 떠나서, 혈연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인생을 잘살 수 있도록 기르는 것 아닐까? 부모 입장에서 자식들 사는 모습은 늘 궁금하겠지만 그런 물음을 조금씩 줄여나가고 부모의 개입도 조금씩 줄여나가면서 그저 자식의 자유에 맡겨야 하지 않을까? 마찬가지 맥락에서, 친구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식은 그들이 나의 현존이나 나의 편의에 맞춰주기를 바라지 않고 카프카가 심판에서 여자들의 매력을 두고 말하듯 다가오면 취하고 떠나가도 말리지 않는것밖에 없지 않을까? 좀 더 일반적으로는 세계와 자연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식 또한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내재적인 세계와 자연 그 자체로서, 자기 아닌 모든 것에 종속되지 않는 세계와 자연으로서 사랑하는 것 아닐까?(163-164p)

 

 

반대로 진정한 드러내지 않기에서 중요한 것은 나를 보이지 않게 하면서 남을 보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볼 수 있는데도 보지 않고, 때로는 보기는 보되 타자의 자유를 조금이라도 침해하거나 위에서 내려다보거나 앗아가는 일이 없게끔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데 대개 바로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그 자리에 있어주되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자신을 내주되 드러내지 않으며, 알아차려주되 지배하지 않는 것을?(164-165p)

 

 

 

피에르 자위, <드러내지 않기> , 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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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

 

이상우의 소설은 어떨까?

 

 

유리와 나는 너무 달랐다. 날이 지날수록 말이 통하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W에 대한 이야깃거리도 금세 떨어지고 말았다. 유리가 어떤 책에 대해 말하면 나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 고개만 끄덕이는 식이었다. W가 말없이 자신을 따르는 미란다를 왜 사랑했는지 알 것 같았다. 유리도 내 심경을 눈치챘는지 예전처럼 모질게 굴진 않았다. 아니, 표독스러운 말버릇은 여전했지만 유리에 대한 환상을 버린 나는 상처받지 않았다. 우리는 최소한의 대화만을 나눈 채 각자가 고른 책에 빠져들었다.(26-27p)

 

 

책들은 W의 아버지처럼 때리지 않는다. 브룩스 일당처럼 괴롭히거나 같이 할래?”라는 달콤한 말로 기만하지도 않는다. 책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처럼 우리에게 속삭인다. 파라솔 그늘 밑에서도 넌 혼자가 아니라고.(31p)

 

 

미란다의 장례를 치든 뒤 상심에 잠겨 있던 W는 돌연 인스부르크로 떠났다. 고향만은 언제든지 자신을 받아줄 거라고 확신해왔던 터였다.

(...)

얀코가 어떻게 하고 마을을 떠난 줄 알아요? 우리에게 사기를 쳤어요. 농토와 가축이 전부 팔려나갔지. 빈털터리가 돼 자살한 사람도 있었어요. 우리가 W를 내쫓은 건 당연했지요. 당신이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더 이상 그 집안 얘기는 꺼내지도 말아요.” 아가타 부인은 액땜이라도 하듯 땅에 침을 뱉고 다시 뜨개질을 하기 시작했다. 고향에 대한 W의 환상은 착각이었다.(34-35p)

 

 

포르노 소설을 쓴다고 우리가 방탕할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내가 아는 포르노 작가들은 하나같이 비실비실한 샌님이었다.

(...)

그러나 포르노 소설을 쓰기 위해선 연애를 멀리할수록 유리하다는 게 정설이다. 불가능의 영역을 모르니까.(50-51p)

 

 

사장 아저씨 말로는 이 동네는 터가 좋지 않다고 한다. 좀도둑과 사기꾼이 들끓어서 자신이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거라나. 옆집 아저씨도, 앞집 아줌마도 똑같이 말한다. 좀도둑과 사기꾼만 아니었으면 자신은 진작 이곳에서 벗어나 부자가 됐을 거라고 말이다. 나는 여기 오기 전에도 다른 동네 사람들에게 비슷한 말을 들었기 때문에 이어지는 아저씨의 말이 무엇일지 짐작하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아저씨는 이 동네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구체적으로 무슨 노력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아저씨는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 듯 머뭇거렸다.(216p)

 

 

돈을 벌지 않으면 영감이 몰아닥치거나 직장이 없으면 글 쓸 시간이 솟아날 것 같았지만 겪고 보니 둘 다 아니었다. 삶은 의미 있지도 않고 무의미하지도 않다. 그동안 내가 깨달은 거라곤 이게 유일했다.(278p)

 

 

르네 도말은 아내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이렇게 썼습니다. 주려고 한다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손에 무언가 넣으려고 한다. 손에 무언가 넣으려고 하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무언가가 되려고 욕망한다. 무언가가 되려고 욕망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살게 된다.(309p)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그는 현실의 시간을 쫓아오지 못한 인간이고 현실에 발을 붙이지 못한 인간이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오한기 소설의 동시대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조언.

아감벤은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동시대인을 참으로 자신의 시대에 속하는 자란 자신의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자, 하지만 그 간극과 시대착오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더 그의 시대를 지각하고 포착할 수 있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정지돈이 말했다. 아감벤에 따르면 특정 시대에 너무 잘 맞아떨어지는 사람, 모든 면에서 완벽히 시대에 묶여 있는 사람은 동시대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은 시대를 쳐다보지도, 확고히 응시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동시대인은 시대의 빛이 아니라 어둠을 인식하기 위해 그곳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말장난이 아닙니다. 그들은 실제로 서로 다른 현실을 보는 것입니다.(323p)

 

 

오한기, <의인법> ,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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