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

 



내가 머무는 동안 알람브라 궁전이 야간 개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평생 하렘에서 인생을 보낸 이슬람 군주처럼 보름을 탕진했고, 떠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밤의 알람브라 궁전에 들어가보지 못한 채 그라나다를 떠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저 멀찌감치 그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만 보면서, 마치 궁전과 후궁을 남겨둔 채 허겁지겁 도망치는 군주처럼. 마드리드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깨달았다. 나중에 다시 와서 밤의 알람브라 궁전을 꼭 봐야지, 하는 초등학생 같은 다짐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왜냐하면 여행에서 두 번 다시란 없으니까. 다시 왔을 때 나는 그때의 그 사람이 아닐 테니까.(30-31p)

 

 

혼자서 여행하는 일의 고단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

하지만 혼자서 여행하는 일의 묘미는 바로 거기에 있다. 거기, 고단함에. 아침에 일어나면 또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막막하다. 책을 읽어도, 음악을 들어도, 걷고 또 걸어도 시간은 좀체 흐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관광지를 둘러보다 보면, 세상의 모든 관광지란 홀로 여행하는 자의 곤란을 해결하기 위해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혼자가 아니었어도 나는 그렇게 열심히 박물관과 미술관, 성과 대성당을 둘러봤을까? 어쩌면 이렇게 비뚤어진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홀로 여행하는 일의 부작용일지도. 그리하여 어느 날, 공원 벤치에 앉아 슈퍼마켓에서 산 샐러드와 빵을 먹던 나는 스트레인저stranger라는 말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게 됐다. 그건 어떤 사회적 연결 고리도 없는 단독자를 뜻한다는 것을. ()과 독(), 때로 여행은 그 단어의 뜻을 체험하기 위한 일이기도 하다.(42-43p)

 

 

모든 일이 그렇지만,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 때 조금 더 나가면 신천지다.(56p)

 

 

덕분에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중요한 것은 숨어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

(...)

그런데 이제 와 돌이켜보니 이 일은 두 사지 부작용을 갖고 있다. 우선 오만해지고 독선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 이를 선지자 콤플렉스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남의 못 보는 것을 꿰뚫어보는 자는 자기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하는 자를 낮춰볼 수밖에 없다. 싱클레어가 낮과 밤을 나눴듯이 선지자 콤플렉스에 빠진 사람 역시 세상을 이분법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어떤 이분법을 펼쳐도 자신은 좋은 쪽에 속한다는 것이 함정이다.

두 번째 부작용은 음모론 콤플렉스라고 말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불신하기 때문에 어떤 현상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분석이 필요하다. 분석이라고 썼지만, 선지자 콤플렉스와 결합되면 이는 관심법’, 즉 다른 사람의 속셈을 훤히 꿰뚫어보는 일을 뜻한다.

(...)

전문가도 아니면서 사회현상 속 숨은 뜻을 알아내려고 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은 꽤 피곤하다. 그게 대학을 졸업한 후 20년 동안 살아온 인생의 결론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피곤한 건 그게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믿는 이들의 목소리가 가장 크게 들리는 사회다. 그런 사회 말고 다른 건 없을까? 종편 채널에서는 같은 사람이 나와서 연예인에 대해서도 분석하고, 재벌에 대해서도 분석하고, 정치인에 대해서도 분석하는데, 무속인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게 가능한 일일까?(187-189p)

 

 

당시 경성에서 도쿄까지는 이틀이 걸렸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도쿄에 도착한 이상의 첫 소감은 와보니 실망이오였다. 그렇게 실망할 것이라면 왜 그렇게 도쿄에 가고 싶어했는지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려면 역시 이틀에 걸쳐 배와 기차를 갈아타면서 도쿄까지 가봐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상념 끝에 나는 잠이 들었다.(196-197p)

 

 

내게 세상의 모든 관광지는 휴일의 놀이공원과 같다. 나는 휴일의 놀이공원을 대단히 싫어한다. 거기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또 다른 한 무리의 사람들과 그보다 더 많은 무리의 사람들과, 그리고 그들 모두를 거대한 열린 지갑으로 보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란, 두 가지 유형의 사람만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지갑을 가진 사람과 거스름돈을 가진 사람.(217p)

 

 

때로 그런 모퉁이에서 길을 잃은 관광객이 내게 묻는다. 물 위의 성이 어디냐고. 그러면 나는 대답한다. 나는 모른다. 나도 이방인이다. 그 물 위의 성이라는 곳이 바로 내가 머무는 빌라 콘코르디아를 뜻한다는 사실은 며칠이 지나서야 알게 된다. 그게 바로 낯선 도시의 좁은 골목길에서 우리가 하는 짓들이다.(221p)

 

 

 

김연수, <언젠가, 아마도> , 컬처그라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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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1

 

아우스터리츠나 토성의 고리는 좀 천천히 읽어야지. .

 

 

매일 아침 이른 시간에 일어난 나는 레오폴트슈타트와 요제프슈타트를 비롯하여 이름 모를 작은 거리들을 목적도 방향도 모른 채 한없이 돌아다녔다. 그런데 나중에 지도에서 확인하고 놀란 일이지만, 정처 없는 산책중에 내 발길은 특정한 지역 테두리 안에만 머물러, 프라터슈테른 뒤편의 베네디거 아우 공원과 알저그룬트 종합병원을 기점으로 하는 초승달 내지 반달 모양 구역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았다. 만약 그때 내가 돌아다녔던 경로를 종이 위에 그려본다면, 이성과 상상력, 그리고 의지력의 경계에 가서 부딪힌 다음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는 무수한 삼각과 사각, 그리고 대각선들을 그어놓았다는 인상을 풍길 것이다.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도시를 종으로 횡으로 가로지르던 방랑은 나도 모르는 사이 그렇게 명백한 경계를 긋고 있었다. 그때의 행동에서 스스로도 잘 이해할 수 없는 두 가지는, 한 없이 걷기만 했다는 것, 그리고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러면서도 완전히 임의로 정한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조금도 침범하지 못했다는 것이다.(35-36p)

 

 

인간이 실제로 미쳐버리는 일이 흔하지는 않지만, 그럴 만한 계기는 삶의 도처에 널려 있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의 자기 자신에 아주 약간의 균열이 일어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카사노바는 인간의 명확한 판단력을 저 홀로는 깨지지 않는 유리에 비유한다. 단지 외부의 충격에 의해서만 깨지지만, 일단 깨질 또 얼마나 쉽게 깨지고 마는지. 단 한 순간만이라도 잘못 움직이면 끝이다.(57-58p)

 

 

나는 낯선 도시에서 식사를 할 만한 식당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모른다. 일단 내가 너무 까다로워서 몇 시간이고 거리와 골목을 돌아다녀도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고, 그렇게 헤매다닌 끝에 대개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서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환경에서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음식을 먹게 되어버리는 탓이다.(76-77p)

 

 

우리가 희망을 품고 기다리는 인물은 항상 간절함이 사라진 다음에야 나타난다고.(146p)

 

 

나에게 가장 친숙하다고 할 수 있는 세상의 사물 두 가지는 군사작전용 모형을 움직이는 모래상자와 군대의 전황 보고인데, 적어도 나의 생각이 맞는다면 이 두 가지 사물의 논리 사이에는 조건을 파악할 수 없는 드넓은 벌판이 가로놓여 있는 셈이다. 우리의 감각으로 잡히지 않는 사소한 요인들이 항상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세계사를 뒤바꾼 주요 전투들이 바로 그런 요인들의 작용을 받았던 것이다. 사소한, 하지만 워털루에서 전사한 오만 군사와 말들의 생명과 비견될 정도로 비중 있는 요인들. 생사를 결정짓는 것은 결국 사소하면서도 특별한 비중의 문제, 그것이다.

(...)

인간이 핸들을 한번 돌리는 것만으로, 그런 의지만으로, 수많은 변수와 연관된 사물의 행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리라는 상상은 사실 참으로 허황된 것이다.(148-149p)

 

 

K 박사는 육체를 배제한 사랑의 이론을 단편적으로 풀어놓는다. 그런 상에는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는 것 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적어도 우리가 눈을 뜨고 있는 한 행복의 근원은 자연이지 이미 오래전에 자연으로부터 유리된 우리의 육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리석은 연인들은, 사랑에 빠지면 대부분 다 어리석어지기 마련인데, 아예 눈을 감아버리거나,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지만, 욕망으로 흐려진 눈을 찢어져라 크게 떠버리기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성욕으로 그 어떤 때보다 더 대책 없는 상태로 빠져들게 된다. 이제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자라나는 상상은 걷잡을 수가 없다. 끊임없는 변화와 반복을 요구하는 강박이 인간을 굴복시킨다. 이미 그가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듯이 일단 그런 강박에 사로잡히면 모든 것이, 인간이 영원히 붙들어놓고 싶어하는 사랑하는 사람의 형상조차도, 허공에 산산이 흩어지고 만다.(150-151p)

 

 

그들은 우연히 몇몇 다른 이와 함께 있었는데, 그중 매우 부유하고 매우 우아하면서 젊은 한 러시아 여인이 한편으로는 권태롭고 한편으로는 극도의 좌절감으로 말미암아우아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면 항상 패배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고 그 역은 훨씬 드물게 성립하는 법이니까카드를 꺼내어 탁자에 펼쳤던 것이다.(151-152p)

 

 

그런데 애초에 누구의 잘못 때문에 그가 이러한 엄청난 불행을 영원히 짊어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도대체 잘못이라면 그것이 어떤 잘못인지는 전혀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구상한 작가가 다름아닌 K 박사이므로, 나는 결코 항해를 끝낼 수 없는 사냥꾼 그라쿠스의 영원한 방랑이 의미하는 것이 사랑의 갈망에 대한 속죄라는 생각이 든다. K 박사는 그 자신이 펠리체에게 보낸 수많은 박쥐-편지에 썼듯이, 언제나 외양으로도 그리고 법적으로도 향유의 여지가 없는 그런 지점에서만 사랑의 불길에 휩싸였기 때문이다.(157p)

 

 

쉰이 되던 해까지 건축용 함석 제조업체에서 일했으나 관절염으로 점점 몸이 굽는 바람에 조기 은퇴를 한 그는, 아내가 문방구점을 경영하는 동안 온종일 집안의 소파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다고, 한옆으로 일단 밀려난 사람에게 하루가, 시간이, 그리고 인생이 얼마나 느리게 갈 수 있는지를, 하고 그는 말했다.(198p)

 

 

나는 매우 장황하면서도 군데군데 모순이 섞인 대답을 했는데, 놀랍게도 루카스는 그것을 금방 이해했다. 그는 특히,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일이 내 안에서 저절로 설명되고, 그럼에도 그 일들이 더욱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더욱 수수께끼처럼 변해간다는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는 이어서 말했다. 과거에서 끌어올린 그림들을 더 많이 모으면 모을수록 그것들이 과연 내가 기억한 대로 흘러갔던 것인지가 더욱 모호해질 뿐이라고, 왜냐하면 과거에 속한 그 무엇도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또한 설사 그렇지 않다 해도 최소한 경악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199p)

 

 

1511, 페스트로 일백다섯 명이 목숨을 잃었다. 1530, 대형 화재로 일백 채의 집이 전소했다. 1569, 큰 화재로 시장이 불타버렸다. 1605, 대형 화재로 일백마흔 채의 건물이 잿더미가 되었다. 1633, 스웨덴인들이 마을을 초토화했다. 1635, 페스트로 주민 칠백 명이 사망했다. 1806년부터 1814, 독립전쟁에서 W 출신 자원병 열아홉 명이 전사했다. 1816년부터 1817, 수해로 흉년이 들었다. 1870년부터 1871, 마을 청년 다섯 명이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1893, 416일 큰불이 나서 시장 거리 전체를 태웠다. 1914년부터 1918, 고국을 위해 싸우다 이 지역의 아들 예순여덟 명이 전사했다. 1939년부터 1945, 남자 일백스물다섯 명이 이차대전에서 돌아오지 못했다.(224-225p)

 

 

W. G. 제발트, <현기증. 감정들>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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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

 

 

이런 석조 요새들 가운데 어딘가에서 삶이 다할 때까지 지나간 시간과 지나가는 시간을 연구하는 일에만 파묻혀 산다면 어떨까 상상해보았다. 하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진실로 자기 안에만 틀어박혀 살 수는 없으며, 우리 모두는 언제나 크든 작든 의미 있는 일을 계획하지 않을 수 없는 까닭에, 마지막 몇 해를 아무런 의무에도 매이지 않고 살고 싶다는 내 안에 떠오른 꿈 이미지는 벌써부터 오후를 뭐라도 하면서 보내야겠다는 욕망에 밀려나버렸다. 그리하여 어찌 된 영문인지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메모장과 연필, 입장권 한 장을 손에 들고 페슈 미술관 로비에 들어와 있었다.(10p)

 

 

누가 그들을 기억하겠는가, 누가 대관절 기억이라는 것을 하겠는가? 피에르 베르토는 삼십 년 전에 이미 인류의 변화를 내다보면서, 기억과 보관과 유지는 주거지의 밀도가 낮은 시대에만, 즉 우리가 만들어낸 물건들이 많지 않은 데 반해 공간만은 넉넉했을 시대에만 삶의 중대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당시에는 기억과 보관과 유지 중 그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었고 그건 죽은 뒤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누구든 한 시간이면 족히 타인에게 갈 수 있고 대체 가능한 존재로 사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인구 과잉에 기여하는 20세기 말 도시의 삶은, 불필요한 것을 지속적으로 내다버리는 것으로,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것 모두, 가령 청소년 시절, 유년 시절, 출생, 선조와 조상을 남김없이 잊는 것으로 귀착된다. 최근 각별한 사이였던 사람들을 웹상에서 매장하고 방문할 수 있도록 온라인에 개설된 이른바 추모 공원은 한동안 명맥을 유지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상 묘지 역시 얼마 지나면 대기 속으로 사라질 것이고, 과거 전체는 형체도 알아볼 수도 없는 말 없는 덩어리가 되어 녹아 없어지리라. 그러면 우리는 기억이란 것을 알지 못하는 어느 현재를 살아가면서, 또 아무것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는 미래를 마주하면서, 종국에는 잠시라도 머물고 싶은 또는 가끔씩이라도 되돌아오고 싶은 마음조차 품지 못한 채 삶 자체를 놓아버리게 되리라.(42-43p)

 

 

어두운 과거가 있는 정치 공동체에서 그 공동체 건립에 선행한 희생자들을 추모하려는 의지는 새로운 질서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 질서의 존립 여부는 과거를 현실이 아닌 것으로 부정하고 승자와 동일시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121p)

 

 

아메리는 연민과 자기연민 둘 다를 억제하는 절제understatement'라는 일반적인 전략을 활용한다. 이는 니덜랜드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박해 피해자들이 쓰는 글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자기에게 가해진 고문을 전하는 아메리의 보고 역시 고통의 파토스보다는 그의 몸을 상대로 진행된 절차의 어마어마한 광기를 강조하는 어조를 띠고 있다. “벙커의 둥근 천장에는 끄트머리에 강철 갈고리가 달린 사슬이 도르래에 달려 있다. 나는 그 장치로 끌려갔다. 갈고리는 등뒤로 묶인 양손 수갑에 연결되었다. 다음으로 사람들은 내가 매달린 그 사슬을 위로 잡아당겼다. 내가 바닥에서 1미터 정도 떠 있게 될 때까지 말이다. 인간은 그렇게 서서, 아니 그렇게 등뒤에 묶인 두 손에 매달려서, 반쯤 기울어진 채 근력에 의지해 아주 잠깐 버틸 수는 있다. 그렇게 몇 분 동안 마지막 힘까지 쓰고 나면, 이마와 입술에 땀이 맺히고 숨은 헐떡거리고, 어떤 질문에도 답할 수가 없게 된다. 공모자는? 주소는? 접선 장소는? 이런 말들이 거의 들리지 않는다. 단 하나의 신체 부위, 즉 어깻죽지에 모인 생명은 반응하지 않는다. 그 생명은 안간힘을 쓰느라 완전히 바닥났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체적으로 강한 체질을 타고난 사람이라 해도 오래 버틸 수 없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꽤 빨리 포기해야 했다. 그러자 내 몸이 지금 이 시각까지 잊지 못하는, 부서지고 빠개지는 소리가 어깨에서 났다. 어깨 양쪽에서 구관절이 튀어나왔다. 체중을 버티지 못하고 탈구를 일으킨 것이다. 어깨가 완전히 탈골되어 허공으로 툭 떨어진 내 몸은 머리 위 뒤쪽으로 높이 치들려 묶인 두 팔에 매달려 있었다. 라틴어 토르구에레torquere에서 온 고문tortur이란 말은 탈구되다라는 뜻이다. 어원학적으로 얼마나 명쾌한 실물교육인가!”

기묘하게 객관적인 말투로 보고하던 문단을 도발적이게도 유머 비슷하게 전환하며 마무리하는 마지막 말은, 아메리로 하여금 그토록 극단적인 경험을 복기할 수 있게 해준 무감각의 태도가 여기에서 임계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흔들릴지도 모르는 지점에서 아이러니라는 수단을 꺼내든 것이다. 그는 스스로가 언어적 전달 능력의 극한에서 작업하고 있음을 안다. “자신의 신체적 고통을 전달하고자 하는 사람자기 자신에게 고통을 가하는 고문자가 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따라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문을 받을 때 인간이 어떻게 완벽히 고깃덩이로 전락하는지, “우리 육체성이 어떻게 상상 가능한 최고의 강도로 고조되는지추상적으로 성찰하는 것뿐이다. 극한의 고문, 그리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고통의 감각을 아메리는 다른 논리적 방법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죽음에의 접근 과정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그날 이후 어디나 죽음을 끌고 다니는 사람이 출발점으로 삼는 학문이다. 아메리는 고문이 지워지지 않는 성격을 띤다고 말한다. “한번 고문을 당하면 영원히 고문당한 사람으로 남는다.” 이렇게 아메리는 자신의 사례를 일말의 비감도 섞지 않고 간단명료한 인식으로 전달한다.(178-179p)

 

 

아메리는 페터 바이스처럼 이런 위기 상황에서 빠져나와 동시대 문학 사이에서 독보적으로 언어의 정밀성에 무사히 도달함으로써 그렇지 않았다면 접근 불가능했을 자유의 공간을 쟁취했다. 하지만 아메리의 경우 이렇게 다시 얻은 언어적 능력만으로는 그 불행을 완전히 몰아내기에 충분히 않았다.

(...)

그리고 우리를 명료함의 위로로 채워주는 것처럼 보였던 그 단어들은 스스로의 불치 상태를 적시한 것일 따름이었고, “소통될 수 없는 두 세계사이를, 죽음의 감각을 지닌 사람과 그런 감각을 전혀 지니지 않은 사람 사이를”, 그리고 한 순간만 죽을 뿐인 사람죽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사이를 가르는 선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기록 행위는 죽음을 모면한 자가 더이상 살아 있지 않다고 깨달을 수밖에 없는 순간 해방이 되기도 하지만 해방의 무효화가 되기도 한다.

죽음을 경험했는데도 그 죽음을 넘어 연장되어버린 실존의 중심에 자리한 감정은 죄책감, 저 생존의 죄책감이다.(188-189p)

 

 

문학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문학의 소용은, 아마도 어떤 인과적 논리로도 해명할 수 없는 특별한 연관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파악하는 법을 배우는 것, 단지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닐까.(285p)

 

 

시행에서 죽음의 경계를 가로질러 두루 조망하는 시선에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지만, 동시에 크나큰 불의를 당한 사람들에 대한 묵념을 통해 빛을 받고 있다. 글쓰기의 형식은 많고 많다. 하지만 오직 문학적인 글쓰기에서만이 사실을 등록하고 탐구하는 것을 넘어 재건하려는 노력이 그 관건으로 대두한다.(286p)

 

 

 

W. G. 제발트, <캄포 산토>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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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9

 

 

책을 어렵다고 느끼게 하는 지점은 내용 자체의 난해함도 있겠지만 사용하는 용어의 생경함도 한 몫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도 익숙함의 문제이긴 하다. 특정한 용어나 단어를 낯설게 느끼는 이유는 그만큼 관련 주제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반증일 테니.

 

 

 

 

그러나 의료전문가들이 이처럼 광범위한 영역에 개입할 권한을 가질만한 자격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분명하게 답할 수 없는데도 의학이 관할하는 영역이 계속 확장되고 의사들이 점점 더 많은 영역에서 이익과 불이익, 특권과 배제를 둘 다 수여하는 사회적 기능에 문지기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의료화의 정의하는 능력은 실제로 그 대상자의 생존을 좌우할 수 있다.

(...)

아픈 사람이 진단명을 얻지 못하는 경우, 즉 아프다는 본인의 주관적인 경험에 대해 의학적 승인을 받지 못할 경우 아픈 사람은 아픈 몸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지원을 끊길 위험에 처한다. “보험금 청구, 보조금, 복지 수당과 장애 수당 모두가 공식적인 진단에 달려 있을 뿐 아니라, 병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프다고 거짓말하면서 제대로 일도 안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 끼치는 인간으로 낙인찍혀 결국 가족, 친구로부터 버림받는일이 드물지 않은 것이다.(25p)

 

 

의학이 도덕적 가치판단과 무관하다는 전제가 의학이 사회의 권력 구조를 강화하고 유지하는 데 일조한다는 사실을 가린다는 점을 페미니스트 의료사회학자 및 과학자들은 꾸준히 지적해왔다.

더 중요한 것은 병리화의 작동 방식이다. 강제불임시술을 받았던 정신장애인과 한센인, 교정치료라는 이름의 고문을 받았던 자폐인과 정신장애인과 퀴어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 병리화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저 단순히 아파서 병을 치료하는 문제가 아니다. 병리화는 정상성을 생산하고 강화하는 기제다. 생물학적 다양성을 정상/병리의 차등적인 위계질서 안에 촘촘하게 줄 세워 배치하면서 정상적인 몸을 구성하는 외부로서 병리적인 몸을 생산하는 것이다. 특정 몸이 정상적인 몸의 위상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에 반대되는 비정상으로서 병리화된 몸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정상성과 장애는 동전의 양면이다.(30p)

 

 

정상성에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그냥 우리도 정상인에 끼워달라는 요구가 아니다. 페미니즘이 기울어진 운동장 자체를 문제시하듯, 퀴어 장애 정치는 인간, 인간의 몸, 인간의 정신, 사회관계 모두를 정의하고 해석하고 재현하는 그 모든 방식에 특정 몸·정신·인간만 정상으로 인식/인정하고 그 외의 것들은 열등하고 일탈적이고 병리적인 것으로 배제하는 위계가 체계적으로 구축되어 있음을 비판하는 데서 시작한다.(32p)

 

 

여자아이는 얌전하고 나대지 않고 귀여운 게 최고라는 편견, 성폭력의 위험을 피해자 탓으로 돌리는 편견, 여성의 성욕을 잠재적으로 위험한 것으로 보고 여성의 성욕 표출을 문란하고 사회질서에 위배되는 것으로 보는 편견, 아동과 여성과 장애인을 독립적인 인간 존재가 아니라 부모나 보호자에게 귀속되는 물건으로 보는 편견, 장애인은 무성적인 존재이고 무성적인 존재여야 하니 싹을 잘라버려야 한다는 편견, 이 모든 편견이 총체적으로 결합하여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다.(41-42p)

 

 

정체성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진정성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유성애/무성애를 비롯해 남/, 이성애/동성애 등 우리의 성적 영역을 직조하는 수많은 이분법에 딱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의 삶과 실존을 설명하기에 입수 가능한 언어가 턱없이 부족하고, 주어진 문법은 이러한 삶과 실존에 적절하지 않다는 뜻이다. 현재의 경직된 이분법적인 정체성 정의가 자신에게 꼭 맞지 않는 사람들은 부족한 언어에 자신을 끼워 맞추거나 다른 언어와 문법을 발굴해가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과정 중에 놓여 있다. 이는 정체성이 근본적으로 불변이라고 전제하는 진정성 서사를 교란하고 인간의 가능성을 더 광범위하게 열어놓는다.(62p)

 

 

트랜스젠더 혹은 mtf/트랜스여성이 인공물이라는 인식은 트랜스젠더가 성전환 수술을 통해 몸의 형태를 바꾸고 젠더화된 외형을 갖춘다는 이해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이해는 인공물인 트랜스젠더퀴어가 아닌 여성은 진짜 여성, 자연스러운 여성이라는 이항 대립 구도를 구축한다.

(...)

페미니즘은 바로 이런 본질주의를 문제 삼으며 등장했다. 그렇기에 여성은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고 가부장제가 주장하는 그런 여성의 본질적 속성, 본질적 역할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를 질문하는 데에선 논쟁적이었다.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는 당연한 본질이라고 생각했으며 단지 사회적 성역할을 바꾸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이었다. 트랜스는 인공물이라는 언설은 바로 이러한 여성 범주를 질문하지 않는 흐름에 토대를 둔다.(84-85p)

 

 

...병에 대한 낙인과 장애에 대한 낙인이 결이 다르다는 것을 경험하는 이들도 있다. 일례로 가시적인 장애인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리라는 편견에 둘러싸여 모든 기회를 박탈당하고 친절을 가장한 간섭에 시달린다면, 아픈 사람들은 기본적인 도움조차 받지 못하고 건강한 비장애인의 기준에 맞춰 노동할 것을 강요당하며 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꾀병 부린다는 비난을 듣는다. 이 경우 장애인과 아픈 사람 둘 다 결국엔 쓸모없는 존재라는 낙인이 찍히지만, 전자는 비장애인과의 차이가 과도하게 부각되어 차별의 근거로 동원되는 반면 후자는 일상생활에 지장이 올 만큼 아파도 이 아픔이 차이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낙인으로 인한 경험이 다르다.(128p)

 

 

그러므로 아픈 사람을 정체성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그저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의 별개의 제3항으로서 범주를 하나 늘리는 일이 아니다. 아픈 사람이 나을 의지가 없거나 아픔으로부터 이득을 얻기 위해 병에 안주하는 나약하고 교활한 인간으로 쉽게 매도당하는 데에는,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엄격한 분리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 아픈 사람들은 그 이분법의 경계를 넘나들거나 경계지대에 상주함으로써 그 경계 자체가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구성적 허구라는 것을 입증하는 존재가 된다. 따라서 앞 절에서 이야기했듯 주류 사회는 물론 주유 장애학계에서도 장애인은 치료될 수 없고 의지로 극복 못하는 돌이킬 수 없는 차이인 반면 아픈 사람은 치료 가능성이 있고 따라서 나을 의지가 중요한 일시적인 위치라고 구분 지을 때, 이 구분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이분법적 분리를 공고히 하여 비장애인의 주체 위치를 안전하게 담보하는 데 이바지할 위험이 있다. 자신이 언제든 병에 전염될 수 있고 언제든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이 공포를 비장애인 중심 사회는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장애인은 영원히 비장애인과는 다른 존재여야 하고, 경계를 위태롭게 만드는 아픈 사람은 두 범주 중 어느 한쪽으로 치워져 눈에 띄지 말아야 한다는 어떤 사회적인 강제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픈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그만큼 인정받기 어려운 이유를 보여주는 동시에, ‘아픈 사람은 장애인/비장애인 이분법적 분리 체계에서 쫓겨난 비체이자 그 체계 자체를 구성하는 외부로서 체계의 내적 불안정성을 폭로하고 전복시킬 잠재력을 갖는다는 것을 보여준다.(137-138p)

 

 

아픈 사람 정체성에 대한 사유는 인식론적 전환과 광범위한 사회적 투쟁을 요구한다. 이 과도한 경쟁사회에서 자신이 건강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기에, ‘아픈 사람 정체성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아니 요즘 세상에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다고 유난이야?”라는 생각이 드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바로 그것이 아픈 사람을 정체성을 호명함으로써 노리는 효과이기도 하다. ‘요즘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어라고 말하는 순간, 이 사회가 기준 삼는 건강한 비장애인이라는 이상이 강제적인 허구라는 것이 드러나는 것이다. 즉 아픈 사람 정체성은 이 사회가 건강/-건강의 가치 위계를 자연스러운 진리이자 모두가 따라야 하는 정언명령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상 그 이면에서는 그러한 가치 기준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가혹하리만큼 배출하고 있다는 점을 폭로한다. 또한 세상에 안 아픈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다들 구조의 문제점을 사무치게 몸에 새기고 있음에도 이 사회가 그것을 개개인이 알아서 챙겨야 할 개인 건강 문제로 환원하게끔 조장함으로써 권력구조로 인한 피해를 개인에게 전가하고 그로써 이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권력구조를 영속시키는 방식을 폭로한다. 따라서 아픈 사람 정체성에 대한 진정한 인정은 단지 개인 관계에서 이뤄지는 협상과 배려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가치를 오직 노동 생산성으로만 평가하며 사람을 쓰고 버리는 소모품 취급하는 자본주의 체계와, 건강/-건강을 선/악의 이분법과 쓸모 있음/쓸모 없음의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도덕적 가치체계의 공모에 맞서 싸우는 거대한 투쟁을 필요로 한다.(149p)

 

 

범주는 한 개인이 살아온 삶의 극히 일부만 포착할 수 있으며 그 일부를 의미 있는 것으로, 가장 정치적이고 논쟁적 영역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한다. 한 개인의 범주 인식을 통해 그 개인이 이 사회의 적법하거나 위법하거나 무법한 구성원인지를 파악하도록 하고, 이를 통해 그 개인의 사회적 지위나 위치를 구성하도록 한다. 이것은 이 사회를 구성하는 권력 장치가 작동하는 방식을 폭로하는 작업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범주를 아는 것은 개인의 삶 전체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겪은 삶의 극히 일부만을 그저 짐작만 할 수 있고 그 경험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의미화되는지 논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

이 계기가 마련되지 않고 한 인간의 많은 삶의 양식 중 일부를 두고 그것이 인간 그 자체, 존재 그 자체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면 이것은 폭력으로 작동할 것이고 혐오를 생산하는 중요한 기재가 될 것이며 그 사람을 이 사회에서 추방하고 삭제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175-176p)

 

 

죽음을 어떤 식으로 사유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삶은 전혀 다르게 구성된다. 죽음을 범주의 근거로 사용할 것이냐 삶을 알아가는 자리로 사유할 것이냐에 따라 죽음, 그리하여 삶은 결코 단순하지 않은 형태로 변한다. 만약 트랜스젠더퀴어의 죽음을 그저 혐오 범죄의 증거, 그리하여 사회적 차별의 근거로만 사유한다면 이것은 삶과 죽음의 관계를 사유할 기회 자체를 박탈할 수 있다. 죽음은 범주를 정당화하는 수단, 그리하여 ㅇㅇ은 트랜스다와 같은 식으로 주장하는 계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식의 주장은 지배 규범이 비규범적 존재를 평가하는 바로 그 방식을 반복하는 재생산한다. 죽음은 고인을 특정 범주로 수렴해서 사유할 수 없도록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계기여야 하고, 지금까지 알았거나 죽음을 계기로 조우한 고인의 삶을 복잡하게 재조직하는 시간이어야 한다.(187p)

 

 

나의 젠더가 무엇이고, 내가 어떤 젠더를 가진 사람에게 어떤 방식으로 끌림을 느끼는지를 도식화하는 것만이 정체성으로,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만이 정체화로 상상되는 것에서 아쉬움을 느낀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새롭게 하나의 카테고리를 만들어 더 다양한 가짓수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고정되고, 단일하고, 일관성 있는, 통합된 하나의 정체성이라는 상상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말해질 수 없는 서사와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의미화하고, 다르게 의미화한 서사와 경험을 새롭게 구조화해 나가기 위한 출발점이기를 바란다.

말할 수 없음에 대해 고민했다. 말하는 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대치되거나, 그것은 진지하게 이야기될 주제가 아니라고 치부되거나, 내가 특정한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사람으로 위치지어지거나, 그것에 대해 말하기 위한 언어가, 체계가 부재한다고 느낄 때, 그럼에도 그것을 말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220p)

 

 

 

 

전혜은·루인·도균, <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 , 여이연

,

2019/1/18

 

 

지각의 변동가능성, 기억의 부정확에 대한 얘기가 특히 흥미로웠다.

 

 

 

우리는 모든 동물들이 주어진 시간에 지각하는 사건의 수가 거의 일정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에 지각하는 사건의 수가 동물마다 크게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할 이유는 충분하다.

(...)인간은 1초당 겨우 열 건의 사건을 지각하는데, 만약 열 건이 아니라 1만 건의 사건들을 지각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우리가 일생 동안 지각할 수 있는 사건의 수가 일정하다면, 지각하는 사건이 1,000배로 늘어났으므로 수명은 1,000분의 1로 줄어들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작 한 달 미만을 살아야 하므로, 계절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책을 통해서만 알 뿐 전혀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겨울에 태어난 사람은(석탄기라는 뜨거운 지질시대가 있었음을 믿는 것처럼) 더운 여름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세상의 움직임은 너무 느려 우리의 감각으로 보는 것은 고사하고 추론할 수도 없다. 예컨대 태양은 하늘에 그대로 떠 있고, 달의 모양은 거의 변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가정을 뒤집어, 우리가 주어진 시간에 지각하는 사건의 수가 1,000분의 1로 줄어들었다고 치자. 그러면 우리의 수명은 1,000배로 늘어나고, 겨울과 여름은 1년의 4분의 1이 아니라 한 시간의 4분의 1처럼 느껴질 것이다. 버섯과 속성 식물들은 속사포처럼 자라, 세상이 순식간에 창조된 것처럼 보일 것이다. 1년생 관목들은 펄펄 끓는 옹달샘처럼 순식간에 우거졌다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총알이나 포탄과 같은 동물의 움직임은 우리 눈에 포착되지 않을 것이다. 태양은 별똥별처럼 하늘을 가로지르며 시뻘건 꼬리만 남길 것이다. 어떤 초인간도 당해낼 수 없는 그런 가상적 사례는 동물계 어딘가에서 실현되고 있을 게 분명하므로, 그것을 덮어놓고 부인하는 것은 성급하리라.(44-45p)

 

 

기억은 고정되고 활기 없고 단편적인 수많은 흔적들을 고스란히 재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반응이나 경험들을 바라보는 전반적 태도이미지나 언어의 형태로 저장된 세부 사항을 기초로 하여 상상력이 가미되어 구성되거나 재구성된다. 심지어 가장 기초적인 암기와 반복의 경우에도 기억이 늘 정확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기억의 정확성을 절대시할 필요는 없다.(109p)

 

 

진정 나만의 것으로 보이는 열광과 충동 중 상당 부분이 실은(나에게서 의식적·무의식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 후 잊힌) 타인의 제안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그런데 그 타인이 나일 수도 있다.

(...)

이런 식의 망각은 때때로 자가표절로 이어질 수 있다. 나는 전에 사용했던 구절이나 문장을 마치 새것인 양 재생산하곤 하는데, 가끔 심각한 건망증과 뒤섞여 문제가 더욱 복잡해질 수 있다.(120p)

 

 

로프터스가 제시한 사례에서 분명한 것은 상상 또는 현실 속의 아동학대가 됐든, 진짜 기억 또는 실험적으로 이식된 기억이 됐든, 오도된 증인 또는 세뇌된 죄수가 됐든, 무의식적인 표절이 됐든, 오귀속이나 출처 혼동에서 유래하는 거짓 기억이 됐든, 외부의 확인이 없을 경우 진짜 기억(또는 아이디어)으로 느껴지는 것차용되거나 암시된 기억(또는 아이디어)’을 쉽사리 구별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도널드 스펜스는 이를 역사적 진실과 서사적 진실간의 딜레마라고 불렀다.

나는 형의 도움을 받아 소이탄에 관한 거짓 기억의 원인을 밝힐 수 있었으며, 로프터스도 대상자들에게 그들의 기억이 이식되었음을 공언함으로써 오해의 소지를 없애려고 했다. 그러나 설사 거짓 기억의 근본적인 메커니즘이 밝혀진다고 해도, 그런 기억이 갖고 있는 현실감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특정 기억이 명백히 모순되거나 터무니없다고 해도 확신감이나 신뢰감이 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컨대, 외계인에게 납치되었던 적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경험담을 이야기할 때 대부분 거짓말을 하지 않고, 그 이야기를 꾸며 냈다고 의식하지도 않으며, 그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고 진심으로 믿는다.

일단 하나의 스토리나 기억이 구성되고 생생한 감각적 심상과 강력한 감정이 동반되면, 내적·심리적 방법은 물론 외적·신경학적 방법으로도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가 없다. 일반적으로 기억의 생리적 연관성은 fMRI를 이용하여 조사될 수 있으며, 촬영된 뇌영상을 살펴보면 생생한 기억이 감각영역, 감정영역(변연계), 실행영역(전두엽)을 광범위하게 활성화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나? 어떤 기억이 실제 경험에 근거하든 말든, 활성화 패턴은 사실상 똑같이 나타나는데.

(...)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대한 착오는 비교적 드물고, 우리의 기억은 대부분 굳건하고 신뢰할 만하다니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132-134p)

 

 

과거의 일이든 미래의 일이든, 시간상으로 가까운 일이든 먼 일이든, 의식의 흐름을 구성하는 다른 부분에 대한 지식은 늘 현재의 사물에 대한 지식과 혼합되어 있다.

과거의 대상들에 대한 정보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지속되는 한편 새로운 대상들에 대한 정보가 유입됨에 따라, ‘기억 및 경험시간에 대한 전향적·후향적 감각이 탄생한다. 그런 것들은 의식에 연속성을 부여하므로, 그러한 연속성이 없다면 의식을 흐름이라고 부를 수 없다.(178p)

 

 

시각은 통상적인 상황에서 이음새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므로, 우리는 그 밑바탕에 무슨 과정이 깔려 있는지 전혀 눈치챌 수 없다. 시각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뭔지를 알려면, 실험동물이나 신경계장애 환자에서 시각의 연속성이 단절되는 장면을 관찰해야 한다. 특정약물중독 환자나 중증 편두통 환자들이 경험하는 깜박거리고 반복되고 흐릿한 이미지는 의식이 불연속적 순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아이디어의 설득력을 높여준다.

그 메커니즘이야 어찌됐든, 불연속적인 시각 프레임이나 스냅숏의 융합은 움직이며 흐르는 의식의 전제 조건이다.(194-195p)

 

 

신경학자들이 사용하는 암점이라는 용어는 어둠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에서 유래한다. 암점이란 지각의 단절이나 중단을 의미하며, 본질적으로 신경병터에 의해서 생성되는 의식의 갭을 뜻한다. 그런데 암점을 가진 환자는 자신이 경험하는 바를 타인에게 전달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스스로 부인하는 모순에 빠지는데, 그 이유는 손상된 사지가 더 이상 내적 신체상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이 실제로 경험하지 않는 이상 상대방의 암점을 액면 그대로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211-212p)

 

 

과학, 특히 심리학에서 성급한 단순화와 체계화가 과학을 얼마나 경직화시키고 발달을 가로막을 수 있는지를 역설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과학은 일종의 다락방을 갖고 있으며, ‘당장 쓸모없어 보이는 것별로 적당하지 않아 보이는 것들을 거의 반사적으로 그 속으로 집어 던진다. 우리는 수많은 보물들을 사용해보지도 않고 끊임없이 다락방에 처넣어, 결국에는 과학의 발달을 가로막게 된다.(217p)

 

 

 

올리버 색스, <의식의 강> , 알마

,

2019/1/17

 

다음은 의인법.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만 해도 1980년대에 태어났고 2010년대를 살아가며 2020년대를 코앞에 두고 있는 내가 빈곤에 대한 글을 쓰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생각은 곧 바뀌었다. 빈곤은 예나 지금이나 시의적절한 화두였다. 다만 표현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었다. 기아나 아사 같은 전형적인 이미지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고정관념만 벗어나면 빈곤은 세련된 소재였다. 이제 빈곤은 무형의 형상을 갖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이미지든지 가질 수 있었다. 빈곤은 다채로운 형상으로 삶을 다방면에서 조여오고 있었다. 외면이 아니라 내면을 황폐하게 만들어서 예전만큼 티 나지 않을 뿐이었다. 근면과 성실이 아니라 로또와 부동산 투기가 빈곤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살인과 강도가 죄가 아니라 비정규직과 흙수저가 죄였다. 진보정당을 찍어도 보수정당을 찍어도 중도정당을 찍어도 해결될 거라는 기대가 되지 않았다. 빈곤은 국가의 책임이라는 표어도 진부해졌다. 창의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그러나 대책은 공정거래, 4차 산업혁명, 정의, 욜로처럼 공허한 단어였다. 우리는 가난한 데다가 공허하기까지 했다. 확신하는데 빈곤은 100년 뒤에도 모든 글의 소재거리가 될 것이었다. 빈곤은 현재를 넘어 과거를 돌아보게 했고, 미래를 예견하게 했다. 빈곤만큼 고전적이고 동시대적이며 SF적인 건 없었다.(18-19p)

 

 

표정을 보아하니 칭찬에 익숙하지 않아서 칭찬을 받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는군요. 어릴 때 부모님이 칭찬에 인색했죠? 아니면 스킨십이 부족했었나요? 맞벌이에 외동아들 맞죠? 스킨십에 익숙하지 않은 외동아들. 작가가 될 운명을 타고난 작자들이죠. 예전에 몇몇 작가하고 함께 일한 적이 있는데 그 작가들도 다르지 않았어요. 그들은 예외 없이 꽁하고 뚱하죠.(43p)

 

 

행복+행복=행복. 행복에 행복을 더하면 두 배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의 행복이다. 행복은 점점 둔감해지니까. 그리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지금 행복한 걸까.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백이면 백 이렇게 대답한다. 넌 나에 비해 행복한 거야.

절망을 계산하는 방법도 유사하다. 절망+절망=절망. 절망에 절망을 더하면 두 배의 절망이 아니라 하나의 절망이다. 각각의 절망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 하나의 거대한 절망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하게 된다. 내가 지금 절망적인 걸까.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백이면 백 이렇게 대답한다. 넌 나에 비해 행복한 거야.(55p)

 

 

제가 겪은 가을 중 남한의 경주가 가장 아름다웠습니다. 보문호수 곁에 있는 콩코드호텔에 묵으며 불국사를 다녀온 게 기억에 남습니다.(145p)

 

 

잃을 게 없어서 무서울 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잃을 게 없는 사람에게 더욱 가혹한 게 법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잃을 게 있는 사람은 그걸 잃으면 되지만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미래를 잃어야 했다.(288p)

 

 

내 생각은 변함없다. 언제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슬프다.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아득하다.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지친다. 셋 중 제일 어려운 건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지치는 게 죽음과 가장 밀접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꾸 근황에 대해 묻는다.(355p)

 

 

 

오한기, <나는 자급자족한다> , 현대문학

,

2019/1/16

책이 정리가 안 되어 있는 느낌. 중복이 많음. 책을 읽으며 편집에 대한 아쉬움이 든 적이 거의 없었는데 이 책은 그렇게 느낌.

 

 

사전적 의미로 혐오는 매우 싫어하고 미워한다는 뜻이다. 한국어에서는 혐오는 혐오시설’, ‘혐오식품처럼 시설이나 음식을 수식하는 말로 주로 쓰여왔다. 혐오표현은 헤이트 스피치를 번역한 말인데, 영어에서 헤이트도 극도의 싫음, 역겨움, 적대감을 뜻한다. 헤이트나 혐오 모두 상당히 강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혐오표현에서의 혐오는 이러한 일상적 의미와는 조금 다르다. 여기서 혐오는 그냥 감정적으로 싫은 것을 넘어서 어떤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의 고유한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차별하고 배제하려는 태도를 뜻한다.(24p)

 

 

그러니까 동성애 반대라는 말이 실제로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할 것인지에 대한 이해가 다소 달랐던 것이다. 동성애 차별이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 반대는 결코 사소한 표현일 수 없다. 실제로 소수자 당사자와 제3 자의 입장 차이는 사회적 맥락에 대한 이해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한국에서 남녀가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개 여성혐오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반면 불평등의 현실이 심각하다고 여길수록 여성혐오의 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간주된다. 한국 사회의 맥락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소수자들이 처해 있는 불평등의 맥락 때문에 혐오표현은 그 표현 수위와 상관없이 차별을 조장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어떤 혐오표현은 특별히 대응하기도 구차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두면 고착화되어버린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김치녀, 김여사, 개념녀 같은 차별적인 언사들이 식사·술 자리에서 농담식으로 난무할 때 이를 하나하나 따지고 저항하는 것은 쉬울 일이 아니다. 문제 제기를 했다가는 너무 예민하다”, “분위기를 깬다”, “농담인데 왜 혼자 유난이냐등등의 반격을 받을 가능성도 높다. 이런 상황에서 소수자들은 침묵을 선택하곤 한다. 웃는 척하면서 넘어가기도 하고, 다른 말로 화제를 돌리기도 한다. 이때 침묵은 자발적이라기보다는 강요된 것이다. 사회생활에서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런데 이러한 침묵이 지속되다 보면 점차 그런 차별적 언사들이 정당화되고 고착화된다. 사실로 굳어지는 것이다.(40-41p)

 

 

혐오표현에 관하여 대중강연 하다 보면 남혐(남성혐오)도 문제 아닌가’, ‘개독도 혐오표현 아닌가라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핵심은 남혐이나 개독이라는 표현이 소수자 혐오의 경우처럼 차별을 재생산하고 있는지의 여부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남성이나 기독교도와 같은 다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은 성립하기 어렵다. 소수자들처럼 차별받아온 과거와 차별받고 있는 현재와 차별받을 가능성이 있는 미래라는 맥락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수자를 대상으로 하는 혐오표현은 대개의 경우 소수자를 대상으로 한 혐오표현과 같은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 “남학생들은 매일 스마트폰으로 스포츠카나 구경한다. 그래서 불행한 거다라고 말하거나 비장애인에게 장애가 없는 사람들은 밖에 나오지 말고 집에 처박혀 있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특별히 남성이나 비장애인에게 위협이 된다거나 차별을 조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에서 백인들에게 덩치만 크고 미련한 백곰 같은 놈들아라고 외쳐봐야 백인들의 정신적 고통을 야기하거나 백인=미련곰탱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고착화시켜 백인 차별을 조장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주노동자가 한국인 사장에게 한국 사람들은 사장님처럼 다 게으른 모양이네요라고 말한다고 해서 한국인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효과를 낳을 리는 없다. 이성애자가 이성을 사랑하는 건 당신 자유인데, 내 눈에 띄지는 마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이성애자의 사랑이 위축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표현들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있을지언정, ‘혐오표현이라고 이슈화할 문제라고 보긴 어렵다. 반면 똑같은 표현이 소수자를 향할 때는 사회적 효과가 완전히 달라진다. 표현 자체가 차별을 조장하고, 상처를 주고, 배제와 고립을 낳을 수 있다. 그래서 혐오표현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인 것이다.(43-44p)

 

 

무슬림이 일상적인 편견, 혐오, 차별에 노출되어 있는 사회에서 무슬림 혐오표현을 농담처럼 받아넘길 수 없다. 혐오표현이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실제로 위협하는 현실 그 자체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출근길에 차도르를 두르고 나갈까 고민이 된다. 거리에서 조금이라도 묘한 시선을 받게 되면 배제와 차별의 눈빛 같아 두렵다. 회사에서 삼삼오오 쑥덕거리는 모습을 목격하면 혹시 자신을 험담하는 게 아닐까 걱정된다. 기도를 하러 나갈 때도 무슬림 휴일에 휴가를 내는 것도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무슬림 혐오가 난무하는 인터넷을 보다 보면 차도르를 두르고 나갔다가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45p)

 

 

하지만 혐오표현의 문제에서 저자의 의도는(그를 형사처벌할 것이 아니라면)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다. 나쁜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나쁜 효과를 낳고 있다면 그 자체로 문제가 될 수 있다. 중국 동포들에게 영화를 영화로 봐달라고 요구하기 이전에 그들이 영화를 영화로만 볼 수 없게 된 사정을 헤아려야 한다. 영화와 같은 예술에서 조롱이나 희화화는 흔한 일이다. 하지만 그 집단이 사회적 강자나 권력자가 아닌 소수자일 때는 얘기가 다르다. 그 부정적 효과를 충분히 고려하고 성찰하는 것은 예술의 영역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윤리다.

다만 이런 문제에 영화 상영 허용 또는 금지와 같은 이분법으로 접근하는 것은 문제의 지형을 협소화시킬 우려가 있다. 표현과 창작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예술과 문화의 영역에서 손쉽게 규제카드를 꺼내든다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 수 있다.

(...)

무엇보다 우리 영화가 그동안 소수자를 다뤄온 방식이 너무 편의적이지 않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비하 의도가 없었음을 항변할 것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는 부정적 효과에 너무 무심하지 않았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88-89p)

 

 

그렇다면 왜 증오범죄를 특별히 이슈화하는 것일까? 혐오표현과는 달리 증오범죄는 증오범죄로 분류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처벌하는 범죄인데도 말이다. 가장 큰 이유는 증오범죄의 해악이 중대하기 때문이다. 증오범죄는 피해자 집단에게 너희들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는 피해자 집단이 평등한 사회 구성원이 아님을 선언하는 것이며, 차별과 배제를 공공연하게 예고하는 것이다. 예컨대 성소수자 환영 현수막을 훼손한 것은 이곳은 성소수자가 평등하게 대우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서다. 그렇게 직접 할 수도 있겠지만 현수막 훼손이라는 범죄를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증오범죄가 발생하면 그 피해자들은 집단적으로피해를 공유한다. 자신도 언제든 피해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극심한 공포감을 느끼고 위축된다. 혐오표현이나 증오범죄의 파급력은 상당히 유사하다.(96p)

 

 

한국 사회에도 미국식 접근을 선호하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분명히 확인해두어야 할 것은, 미국식 접근은 대통령이 수시로 차별금지에 대한 입장을 확인하고, 차별금지법이 각종 차별을 실질적으로 규제하고, 대학과 기업이 차별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표현에 관해서는 어떠한 내용 규제도 일관되게 불허하는 미국 사회의 맥락에서나 유효하다는 점이다.(141p)

 

 

혐오표현이 금지되면 사회의 담론이 합법 표현과 불법 표현으로 이분화되어 그동안 도덕·비도덕, 사회적·반사회적 등 다양한 가치 판단에 의해 논의되던 것들이 합법·불법이라는 논점으로 급격하게 빨려 들어갈 수 있다. 이전에는 반사회적이라고 비판받던 것들이 합법이라는데 뭐가 문제냐는 식의 엉뚱한 정당화 기제를 갖게 될 수도 있다. 형법의 판단은 일도양단이다. 유죄 아니면 무죄다. 이론상 무죄는 국가형벌권을 동원할 문제가 아님이 소극적으로 표명된 것에 불과하지만 현실에서의 무죄는 문제없음으로 이해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형사범죄화로 인해 문제 해결을 위한 정치적 에너지가 처벌에만 집중된다는 문제도 있다. ‘합법이라고 인정하면 사회는 그것을 문제없음으로 받아들이고 문제 해결을 위한 추가적인 노력을 회피하곤 한다. 반면, ‘불법으로 판결하여 처벌에 성공하면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착시현상이 생기고 국가는 자기 역할을 다했다는 면죄부를 얻어 더 중요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등한시할 수 있다.

법이 발화자 처벌에만 머무른다는 것도 문제다. 혐오표현의 원인에는 복잡한 정치·사회·경제적 배경이 깔려 있어서 이런 것들을 도외시한 채 혐오표현의 발화자만 처벌하는 것은 진정한 문제 해결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범죄를 낳은 것은 사회인데, 처벌받는 것은 범죄를 저지를 사람이 된다는 문제다. 금지와 처벌로 인해 겉으로는 법규제가 성공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수면 아래에 있는 혐오와 차별은 언제든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159-160p)

 

 

형사 규제, 민사 규제, 차별시정은 모두 혐오표현을 금지하는 방식인 반면 형성적formative, 촉진적facilitative, 적극적affirmative, 사전 예방적인 방식의 규제도 있다. 혐오표현의 금지, 처벌을 통한 문제 해결이 사후적·소극적·부정적negative인 조치라고 한다면, 형성적인 규제는 혐오표현이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여건을 만들어가는긍정적positive인 조치를 말한다. 혐오표현 전단지 배포자들을 형사처벌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러한 전단지가 학교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도록 학생들을 교육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한 여건을 만들기 위해 교사를 훈련시키고, 교육과정을 제공하고, 관련 수업을 진행하게 하는 것이 바로 형성적 규제다.(174-175p)

 

 

동성애를 혐오한다거나 외국인 노동자를 쫓아내자고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느끼는 사람이 세금 폭탄이나 일자리 문제가 개입되면 최소한의 윤리적인 자기 검증을 중단하게 된다. 사회경제적 위기가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난제일수록 엉뚱하게도 만만한 상대에게 손쉬운 방법으로 분노를 표출하게 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혐오의 확산을 그들 나라의 사회경제적 상황과 연결시키는 분석이 많다. 역사적으로 파시즘이 경제 위기와 함께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나치즘이 중간계층의 위기에서 싹텄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226p)

 

 

홍성수, <말이 칼이 될 때> ,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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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6




그다음은 미래에 대한 불안이다. 언제까지 이런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까 종종 걱정된다. 이 사람과 헤어지면 다시 연애를 할 수 있을까? 내일 당장 일이 끊기면 어떻게 하지? 늙거나 병들어 거동이 불편해지면 누가 나를 돌봐주나? 하지만 이내 남편과 직장도 그리 믿음직한 대책이 아니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가족도 돌아서면 남이고, 직장에 충성해봤자 회사가 망하거나 나이 들어 내쫓기면 일찍 독립한 사람들보다 나을 게 없다. 또한 나 아니고 여기 아니어도 갈 데 많은 사람이라는 긴장이 없으면 상대에게 무심해지는 게 관계의 생리라, 결혼을 하건 회사를 다니건 자립의 기반은 있어야 한다. 그럼 결국 지금과 다를 게 뭔가, 라는 의문이 든다. 그래, 돈이나 열심히 모으자, 결론은 늘 그렇게 난다.

마지막 불편은 외로움이다. 매일 얼굴 보고 시시콜콜 의논할 사람이 없다는 게 가끔은 막막하다. 상세한 설명 없이도 내가 요즘 무슨 일을 하고, 오늘 무엇 때문에 힘들었는지 알아주는 사람, 따로 약속을 잡지 않아도 매일 만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그게 가족이건 동료건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딸린 한 무더기의 부록은 원치 않는다. 누구 말마따나, 소시지 하나 먹자고 돼지를 기를 필요는 없다. 게다가 혼자 놀아버릇하면 그것만큼 편한 게 없다.(7-8p)

 

 

혼자라도 침대는 퀸 사이즈를 쓴다. 그래야 편하다.(17p)

 

이 책에서 가장 공감되는 말이다. 너무나 맞는 말이다.

 

 

혼자 산다는 건 마냥 낭만적인 일은 아니다. 그건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스스로를 보살피고, 공과금을 내고, 막힌 변기를 뚫고, 음식물 쓰레기를 치우고, 집주인이나 이웃들과 협상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35p)

 

 

우리가 인생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우리를 싫어하는 사람들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회사를 뛰쳐나가고 싶을 때, 여행을 떠나고 싶을 때, 성공 여부가 불투명하지만 흥미로운 무언가에 자원을 쏟아부으려 할 때, 우리가 실패하고 다치고 망하고 상처받을까 봐 말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머뭇거리게 한다. 내가 실패하고 망함으로써 그들을 책임지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워지는 소중한 존재들, 그들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큰 족쇄다. 가족이란 대개 그런 존재다. 그리고 그들 때문에 포기한 모든 일들은 고스란히 후회로 남는다.(79p)

 

 

해야만 하는 일들로부터 도망칠 공간이 있다는 것, 의무와 무관한 몰입의 대상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견뎌내야 하는 사람의 무게를 좀 더 가볍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나는 돈이 되지 않는 일들에 기꺼이 시간을 내고 에너지를 쏟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사람을 사랑하고 자신을 돌볼 줄 아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의 대척점에는 바로 지금 여기, 자기에게 먹이를 주는 집단이 우주의 전부인 줄 아는 터무니없이 비장한 부류들이 있다.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다. 그들과 대화하다 보면 세계가 관짝처럼 쪼그라들어 나를 짓누르는 느낌이 든다.(98p)

 

 

책을 좋아하거나 글을 쓰게 생긴 얼굴이 뭔지 정확히는 모른다. 소심하고 게으르고 내성적인 기질을 신중함으로 위장하는 데 그럭저럭 성공했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이미지는 그렇지만 사실 나는 책과 그리 친하지 않다. 집중력이 부족해서 눈으로는 글자를 더듬으면서 머리로는 딴생각을 할 때가 많다. 독서나 여행이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 백날 책 읽고 여행 다녀도 멍청하고 이기적인 사람은 언제까지나 멍청하고 이기적이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활자 시대의 사람인지 책을 읽는 동안에는 TV를 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술을 마실 때보다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덜 든다. 그게 내가 책을 읽는 유일한 이유다.

책을 모으는 데는 더 회의적이다. 나는 책의 물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책은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한다. 그것들은 원룸 생활자의 적이요, 이사의 적이다. 소파에 드러누워 책을 읽으면 이내 팔이 저려온다. 테이블에 놓고 읽으면 제멋대로 페이지가 넘어간다. 독서대에 끼워두면 페이지를 넘기기 번거롭다. 빛바래고 먼지 앉고 벌레 먹은 책들은 호흡기에도 해롭다.(103-104p)

 

 

나는 인간이 아무런 목적 없이 행하는 고차원적 활동에 쉽게 감동한다. 업무를 완수하는 데 필요한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추구한다거나 보상 없는 정의를 실천하는 식의 태도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입증하는 방식이라 믿는다. 같은 관점에서 토플 성적이나 유학 같은 실용적인 목적이 아니라 지적 유희로써 공부를 한다는 게 신선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112-113p)

 

 

한밤에 일어나 흑역사를 떠올리며 이불을 걷어차고,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사람으로 태어나 이렇게 외로워도 되나 의문이 들고, 모든 사람이 나를 비웃는 것 같고, 짧지 않은 인생에 아무것도 이뤄놓지 못한 것이 부끄럽고, 어쩌면 이런 식으로 수십 년을 더 살아야 한다는 게 지긋지긋해서 확 혀를 깨물고도 싶다. 그럼에도 우리가 죽거나 미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은 영화가 있기 때문이다, 라고 감히 말해본다.(124p)

 

 

<아멜리에>에는 지치고 정서적으로 고립된 인물이 많이 등장한다. 그들은 저마다 사소한 일에 몰입하며 고독을 견딘다. 하지만 어쩐지 서로를 돕지 않는다. 아멜리에는 다르다. 방법은 서툴지만 조금씩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상대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않되 먼저 손 내밀기, 친절하기, 무기력해지지 않기. 그것이야말로 외로움에 벗어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131p)

 

70쯤 되면 아멜리에 같이 남을 배려하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사실 여행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부분에서는 그렇다. 선택해야 할 것도 너무 많고 계획을 짜는 것도 귀찮다. 남들은 그 과정을 좋아해서 공항 갈 때까지가 여행의 하이라이트라고들 하던 데 나는 그 전에 이미 지쳐버린다.

꼭 여행할 때만 그런 건 아니다. 카메라를 사야겠다고 결심하면 나는 카테고리별 인기 기종들을 조사하고 각각의 장단점을 리스트로 만들어 비교하고 필요한 경우 새로운 광학기술에 관한 논물과 제조사의 사회공헌 여부까지 찾아볼 다음 구입할 모델을 결정한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해당 모델에 대한 국내외 온·오프라인 판매처의 가격을 비교하고 한국어와 영어로 된 구매 후기를 모두 찾아 읽은 끝에 간신히 결제한다. 한동안 식탁을 사려다 각 기후대에서 생산되는 목재의 차이, 마감도료의 종류 및 유해성 여부, 가구 디자인의 역사까지 흘러가버린 적도 있다. 그걸 지켜보던 누군가는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

그런 성격이다 보디 여행지 선정부터가 골치 아프다. 여행 잡지에 실린 멋진 사진이나 영화 로케이션, 다녀온 사람들의 추천에 혹해서 그래, 저기야! 떠나자!’ 불쑥 결심을 하는 것까지는 좋다. 이내 기왕 가기로 한 거, 근처에 더 둘러볼 데는 없을까?’ 고민한다. 가장 저렴한 항공권과 가성비 좋은 숙소를 찾아 인터넷을 헤매느라 며칠 밤을 새워놓고, 막상 신용카드 CVC 입력 단계에 가서 이게 옳은 선택일까? 하루만 더 생각해볼까? 아 몰라, 머리 아파하고 컴퓨터를 끈 다음 자고 일어나 똑같은 일을 고스란히 되풀이한다. 내가 나 자신을 좋아하는 순간은 극히 드물지만 이럴 때만큼 끔찍하게 싫은 순간도 없다.

그러다 결국 진이 빠지면 조사 기간 동안 가장 눈에 자주 걸려 익숙해진 지역과 숙소 등으로 대강 예약을 해버린다. 그때쯤이면 여행 계획은 시작과는 아주 달라져 있다.(152p)

 

 

낯선 도시에서 카페에 모여 앉아 웃으며 식사하는 무리를 보고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한 게 여러 번이다. , 서울 가면 나도 친구 있다 뭐, 그런 유치한 생각을 할 때도 있다. 다음에 누군가와 함께 여행한다면 그때는 더 참고, 더 기뻐하고, 더 의욕을 부려서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야지, 다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걸 안다.(156-157p)

 

 

우리는 여기가 싫어서 혹은 어딘가가 좋아서 떠나고 싶다고 말하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여기혹은 어디가 아니라 떠난다는 행위 자체다.(218p)

 

 

백인들은 백인이 인간의 기본형인 줄 알고, 대다수 남자들은 남자가 인간의 기본형인 줄 알고, 이성애자들은 이성애가 기본이라 생각하며, 신체에 질병이나 특이점이 없는 사람들은 그게 기본이라 생각한다. 그것이 우월주의고 차별이라는 걸 그 자신이 반대편에 서기 전에는 인식하지 못한다.(230p)

 

 

대만 총통 차이잉원이 왜 결혼을 안 하느냐는 물음에 소시지 하나 먹자고 돼지를 통째로 살 필요는 없다고 대답했다는 소문이 한때 인터넷에 떠돌았다. 결국 낭설로 밝혀졌지만 듣자마자 무릎을 쳤다.(239p)

 


이숙명, <혼자서 완전하게> , 북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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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

 

김원영 작가가 본인의 책에 인용해서 알게 된 책. 지금 이 글을 쓰며 알게 된 나에게만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 역자 중 한 분이 김현경 씨였고, 내가 아는 김현경은 한 명 밖에 없어 자연스레 사람, 장소, 환대를 쓴 인류학자 김현경 씨라고 생각했다. 그 책을 즐거이 읽었던 터라 반가운 마음과 함께 이 책을 꼭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책을 펴서 책날개의 역자 설명을 보니 동명이인의 다른 사람이었다는 사실.

 

커버링의 개념과 그 맥락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읽게 되었다. 저자가 법대 교수라 딱딱한 이론과 설명으로 가득할 거라고 지레 겁먹고 있었는데 기우였다. 학창 시절에 법학뿐만 아니라 영문학도 함께 공부했던 사람답게 게이로서의 본인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일본계 미국인으로서의 본인의 정체성 및 성별에 대한 차별 얘기를 전환, 패싱, 커버링의 개념과 함께 상세히 다루면서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책이었다. 역시 시를 썼던 그 재능은 어디 안 가겠지.

 

이 책은 법이 계속해서 진전 된다고 하더라도 법 자체의 한계로 인해 인간이 겪는 모든 차별이나 불평등을 해결해줄 수는 없을 것이며, 그 한계를 인정하되 지레 포기하지 말고 법의 진전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법이 해결할 수 없는 부분에서는 대화를 통해 풀어나가자는 어떻게 보면 원론적인 얘기를 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문제를 지적하기 위해 꼭 완벽한 해결책을 내놓아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있는 해결책이라면 누군가가 앞서 내놓았겠지. 비록 제시하는 해결책이 미흡하더라도 문제를 제기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그 문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도록 하는 계기가 될 테고,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조금씩이나마 흡족한 해결책을 모색해갈 수 있지 않을까?

 

 

 

게이 정체성에 도달하기까지 나는 3단계의 고투를 거쳤다. 이것은 동성애자 친구들의 삶에서도 똑같이 목격되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에서, 나는 이성애자가 되려고 애썼다. 옥스퍼드 대학 안에 있는 교회에 다닐 때, 나는 지금 이 모습이 아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이것을 전환(conversion)'의 욕구라고 부르고자 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 나는 동성애자임을 받아들였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이 사실을 숨겼다. 빌에게 그의 수업에 대해 이야기하던 무렵에는 더 이상 나를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학교 친구들에게는 나의 정체성을 숨기려고 노력했다. 이것을 패싱(passing)'의 욕구라고 부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내가 벽장에서 나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커밍아웃한 지 한참이 지난 후에도 동성애자를 주제로 글을 쓰거나 공개적으로 동성과 애정 표현을 하지 않음으로써 여전히 나의 성적 지향을 부각시키지 않았다. 이것은 패싱과는 달랐다. 왜냐하면 동료들은 내가 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알려진 나의 게이다움을 자제하려고 하는 이러한 노력을 어떤 단어로 설명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 후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의 저서 낙인(Stigma)에서 내가 찾던 단어를 발견했다. 1963년에 출간된 이 책에서는 장애인, 노인, 비만인 등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손상된정체성을 감당하며 살아가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고프먼은 패싱에 대해 논의한 후 자신에게 찍혀 있는 낙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은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낙인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고프먼은 이러한 행동을 커버링(covering)'이라고 명명했다. 고프먼은 패싱은 개인적 특성의 가시성과 관련되는 반면, 커버링은 두드러짐과 관련되어 있다고 언급하면서 패싱과 커버링을 구분했다. 고프먼은 커버링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보좌관들이 회의를 하러 오기 전에 왜 항상 테이블 뒤에 자리를 잡고 있게 되었는지와 연관시켜 이야기했다. 누구나 루스벨트가 휠체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가 패싱을 한 것은 아니었다. 루스벨트는 커버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장애를 대수롭지 않게 보이게 해서 대통령으로서의 탁월함에 집중하게 만든 것이다.(38-39p)

 

 

모든 민권 집단이 커버링 요구로 상처받는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백인처럼 입고’ ‘뒷골목 비속어를 쓰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아시아에서 온 티를 내지 말라는 말을 듣는다. 여성에게는 직장에서 남자처럼 행동하고, 육아에 대한 책임감을 숨기라고 한다. 유대인에게는 너무 유대인처럼보이지 말라고 한다. 무슬림에게는, 특히 9.11 이후 베일을 사용하지 말고, 아랍어를 쓰지 말라고 한다. 장애인들은 활동을 보조하는 장비를 숨기라는 말을 듣는다. 미국 사회가 수십 년간의 투쟁 후에 이 여러 집단의 사람들을 완전히 평등하게 대우하는 데 전념하는 것처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하다.

우리는 미국인들의 차별 방식이 변화하는 시점에 살고 있다. 지난 세대는 집단 전체를 차별의 표적으로 삼았다. 즉 소수 인종, 여성, 동성애자, 소수 종교인, 장애가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았다. 새로운 세대의 차별은 집단 전체가 아니라, 주류 규범에 동화되지 못한 그 집단의 일부를 겨냥한다. 이 새로운 형태의 차별은 소수자인 사람이 아니라 소수자의 문화를 표적으로 한다. 외부자들은 내부자들처럼 행동할 때만 받아들여진다. 그러니까 우리는 커버링할 때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43-44p)

 

 

커버링에 대한 강의를 하다보면 소위 성난 이성애자 백인 남성의 반발과 맞닥뜨리는 경우가 있다. 거의 예외 없이 백인 남성이며 화가 나 있는 수강생 한 명이 커버링이 민권의 이슈라는 것을 부정한다. 소수 인종이나 여성이 스스로 커버링하는 것이 왜 문제인가? 이 집단이 통제할 수 없는 것, 예컨대 피부 색깔이나 염색체, 선천적인 성적 지향으로 인해 차별을 받지 않도록 법적 보호를 받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머리카락을 흑인 스타일로 땋는다거나, ‘여성스럽게행동하거나, 성 정체성을 티 내는 것처럼, 자신들의 통제 범위 안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행동이 왜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말인가? 질문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쨌든 자신은 평생토록 커버링을 해야만 한다. 우울증, 비만, 알코올 중독, 조현증, 수줍음, 노동자 계급 출신 배경, 명칭이 없는 아노미 상태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한다. 자신 역시 조용한 절망의 삶을 사는 수많은 남성 중의 하나다. 전형적인 민권 집단은 왜 자신에게 없는 자기표현의 권리를 갖는단 말인가? 진정한 자아를 위한 자신의 고투는 왜 중요하지 않단 말인가?

내가 이들의 입장에 동의하면 다들 놀란다. 우리 시대의 민권 운동은 소수 인종이나 여성, 동성애자, 종교적 소수자, 장애인과 같은 전통적인 민권 집단의 권리 향상에만 중점을 두는 우를 범했다. 소위 주류에 속한 사람들, 예컨대 앞서 말한 이성애자 백인들은 커버링하지 않는다고 가정한 것이다. 이들은 자기 규정을 위해 분투하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막는 사람들로, 오직 방해물로만 여겨졌다. 주류 대중이 민권 활동가들에게 적대적으로 반응하는 것도 당연하다. 우리가 자신들은 거부당한 온전한 인간성을 표현할 자격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47-48p)

 

뒤이어 저자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의견을 제시하지만 소위 ‘성난 이성애자 백인 남성’들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을 것 같다. 한남들이 특히나 요즘 세상에서 더 억울해 죽으려고 하는 이유도 이런 식의 사고방식과 거의 유사할 것이다.

 

 

이들 사례에서 너무나 가슴 아픈 부분은 많은 게이들이 자발적으로전환 치료를 받았다는 점이다. 도입부에서 캐츠는 본인 스스로도 전환 치료를 시도했었다고 밝힌다. “당시 나는 근본적으로 바뀌어야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회며, 그런 사회에 결코 나를 맞추지 않겠다고 생각할 만큼 현명했지만, 그럼에도 의 문제는 동성애에 있고 목표는 이성애로의 치료라고 스스로 분석하기 시작했다미국 역사에서 이성애는 인간다움의 조건 중 하나였다. 인간이라는 종에 소속되려는 갈망 때문에, 따지기 좋아하는 급진주의자들마저도 동성애자로서의 자아를 죽이려고 했다.(60p)

 

 

세상은 바뀌고 있다. 내가 듣는 이야기도 바뀌고 있다. 한 동료는 자신의 게이 친구가 청소년 시절 부모님 손에 정신 병원으로 끌려갔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친구는 차의 앞 유리를 부숴 버릴 정도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부모는 그 친구를 정신과 의사에게 말 그대로 질질 끌고 갔다. 정신과 의사는 부모에게 아들보다는 부모가 입원해야 할 것 같다고 침착하게 말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나는 그 게이 청소년이 앞 유리가 부서진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상상해본다. 그 앞 유리는 금이 간 천국의 돔이자 자신의 세계를 열어젖힌 뚜껑이었을 것이다.

데이비드라는 친구는 열아홉 살에 커밍아웃을 하자 부모님이 자신을 가족 목사에게 데리고 갔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데이비드를 평생 보아 온 그 목사에게 데이비의 부모는 자신들의 당혹감과 사랑, 혼란을 상세히 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데이비드가 전환되어야 한다고 간청하였다. 목사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은박지를 씹었을 때의 찌릿함 같은 공포를 안고 시무룩하게 판결을 기다렸다. “제게는 아들이 세 명 있어요.” 목사는 마침내 입을 뗐다. “제 소망은 셋 모두 데이비드처럼 잘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데이비드가 변하기를 원한다면, 미안하지만 저는 당신 편이 아닙니다.” 이제는 30대 후반의 사회 복지사인 데이비드에게 어떻게 부모님이 동성애자 권리를 위해 그렇게 열심히 활동하는지 묻자, 데이비드가 해 준 이야기였다.(69p)

 

 

그러나 불변성 논리가 정교화될수록 나는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오류라는 확신이 든다. 이 논리에는 결점이 있는데, 일종의 암묵적인 변명이라는 점 때문이다. 불변성 논리는 나는 변하지 않을 거야.” 대신에 나는 변할 수 없어.”라고 말함으로써 전환 요구에 저항한다. 동성애자에 대한 전기 충격 치료는 효과가 없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치료는 효과가 있다고 해도 잘못된 것이다. 또한 불변성 논리는 이성애만 해도 되는 양성애자가 동성 욕망을 표현하는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물론 논리적 차원에서 불변성 논리와 타당성 논리는 공존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 차원에서 이 두 항변은 수사적 논증으로서 서로를 무효화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어떤 정체성이 변할 수 없다면, 이것이 타당한지 여부를 따지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 역시 사실이라면, 즉 어떤 정체성이 타당하다면, 사람들은 이 정체성이 불변적인지 여부를 따지지 않을 것이다. 문학 교수 레오 베르사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잘못된 길에 와 있다는 가정이 없다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라는 질문 자체를 도처에서 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79p)

 

인상적인 구절이다. 나 역시 성정체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인위적으로 바꾸려고 하는 시도는 의미도 없고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는데 너무 단순한 생각이었다. 이 생각에서 확실하게 한 걸음 더 나아간 접근 아닐까? 이렇게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니.

 

 

전환이 동성애자와 전() 동성애자를 구분하고 패싱이 커밍아웃한 동성애자와 그렇지 않은 동성애자를 갈랐다면, 커버링은 노멀퀴어를 가른다. 이 마지막 구분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동화주의자와 해방주의자의 구분으로, 또는 성적 보수주의자와 급진주의자의 구분으로 말이다. 우리가 뭐라고 부르든, 이것은 오늘 날 동성애자 커뮤니티의 주요 단층선이다.(120p)

 

 

쟤들이 침대에서는 뭘 하든 신경 안 써.” 캠퍼스에서 입 맞추고 있는 두 남자를 지나쳐 가며 한 친구가 말했다. “왜 공공장소에서 저러는지 이해가 안 갈 뿐이지.” 그 당시에도 나는 동성애자의 단골 답변으로 응수할 수 있었다. 그녀가 두 남성의 입맞춤을 이성애의 기준선에 어긋나는 티 내기로 보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녀 역시 남자 친구와 공공장소에서 애정 행각을 하지만, 그것은 그저 일상적인 일이었다. “나는 동성애자야.”라는 말에는 당황하지 않는 사람이 누군가가 동성애자임을 표현하는 상황을 볼 때에는 왜 그렇게 불쾌해하는지 그 당시에도 의아했다.(138p)

 

 

동성애자의 평등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문제가 되는 행동이 동성애자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 묻지 않을 것이다. 동성애자는 평등을 포함하여 많은 것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 더 나은 질문은 동일한 행동이 이성애자에게는 용납되고 동성애자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지 묻는 것이다. 샤하르의 소송에서는 이러한 이중 기준이 확실히 존재했다. 그녀가 결혼한다고 말했을 때, 콜먼은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샤하르가 여자와 결혼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콜먼은 그녀를 해고하라고 로비했다.(151-152p)

 

 

대부분은 이성애자들에게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행동이 동성애자들에게 명백히 금지된다. 법원은 동성애자들에게 법 앞에서는 단순히 커버링을 요구하는 반면, 자녀들 앞에서는 종종 패싱할 것을 요구한다. 미주리 주 항소 법원은 1998년에 자녀들이 어머니의 성적 선호를 알지 못했고, 어머니는 자녀 앞에서 성적이거나 애정을 표현하는 행동을 한 적이 없다.”라는 것을 밝히고 레즈비언 어머니에게 양육권을 부여했다. 1990년에 한 레즈비언 어머니에게 동일한 기준으로 양육권 부여를 거부한 루이지애나 주 항소 법원은 성정체성 형성기의 자녀가 있는 곳에서, 단순한 우정을 넘어선 공개적이고 무분별한 애정 표현을 했다고 언급했다. 만약 동성 커플에게 허용 가능한 성적 표현이 우정의 모습으로 제약된다면, 부모에게 기대하는 성적 지향이 확실히 중립적이지 않다.

이러한 커버링이 요구되는 이유 역시 유념하라. 바로 부모가 티를 내면 성 정체성이 형성되고 있는자녀를 전환시킬 수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동화에 대한 세 가지 요구 모두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 자녀가 전환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부모는 자녀에게 패싱을 해야 하고 법원에서는 커버링을 해야 한다. 내가 설명한 전환, 패싱, 커버링까지의 변화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체하는 범주의 변화가 아니라, 강조점의 이동이다.(156-157p)

 

 

이러한 이유로 나는 동성애자 권리를 지지한다고 말하지만 동성애자들이 커버링하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이들보다, 동성애자 평등에 반대한다고 말하고 동성애자가 전환하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이들을 지적인 측면에서 보다 더 존중한다. 동성애를 혐오하고 동화의 세 가지 형태 모두를 요구하는 것이 차라리 일관성 있는 것이다. 동성애자 평등을 지지하지만 커버링 요구를 통해 동성애자들을 이등 시민의 자리에 밀어 넣는 것은 일관된 태도가 아니다.(162p)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다른 인종보다 순수한 혈통을 지닌, 별도로 분리된 인종이라고 믿는다. 수년간 나는 일본인들의 인종 차별주의를 백인 미국인들이 분명하게 이해하는 모습을 반복적으로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일본인들이 자신의 더듬거리는 일본어를 듣고 감탄하며 칭찬을 늘어놓는 모습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나에게 와서 일본 문화에 친밀감을 느낀다며, 자기 안에 일본인의 피가 흐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나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한 달, 1, 아니면 5년 후에 자신이 결코 일본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그것은 처음 병원에 가서 의사가 자신의 버터 냄새 나는상체에 움찔하는 것을 본 순간일 수도 있다. 혹은 아주 예외적인 일본 여성들만 자신과 진지하게 사귈 것이며, 그녀의 가족은 아마도 결혼을 반대할 것이고, 만약에 자녀가 생긴다면 그 아이들이 혼혈아라고 차별받을 것임을 깨달았을 때일 수도 있다. 역설적이게도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게 될 때일 수도 있다. 외국인이 서툰 일본어로 말하면 칭찬하지만,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하면 기모치 와루이’, 즉 기분 나쁘다고 말하는 일본인들이 많다.(173p)

 

 

요즘 미국에서 나를 보는 일본인들은 백인 혼혈이냐고 자주 묻는다. 누나는 절대 이런 질문을 받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둘 사이의 신체적 차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행동, 예컨대 자세를 취하는 방식, 공간을 이동하는 방식, 말하는 방식으로 인해 내가 일본인으로서 부호화되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나와 교류했던 일본인들은 나의 다름 때문에 상처를 받는다. 그들은 내 몸에 그 차이를 입혀 본 후에야 겨우 다름을 이해한다.

일본에 있으면서 나는 인종 정체성에 행동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종이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개인의 인종에 대한 자각이 생물학 하나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보다 조심스러운 개념이다. 누나와 나 모두 일본인의 혈통과 피부색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생물학적 특질은 진짜 일본인으로서의 지위에 필수적이었지만 충분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인종은 우리의 행동에 의해서도 규정되었다.(174p)

 

 

1990년에서 1991년까지 진행된 이 연구에서 연구자들은 여성과 남성이 펜실베이니아 로스쿨에 똑같은 점수로 입학하더라도 남성이 학급의 상위 10퍼센트에 들 확률이 2~3배 높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책은 이러한 불균형의 원인이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남성적이었던 제도가 여성을 허용해도 남성에게 유리한 문화를 유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책에서는 이 문화를 분석하면서, 예일 대학교 미팅에서 드러난 커버링 요구와 역커버링 요구를 설명한다. 한편으로 펜실베이니아 로스쿨의 여성들이 얼마나 자기 자신을 탈성화(desexualize)하고, 전형적인 여성적 특질을 멀리하고, 페미니스트 액티비즘을 피하라는 압력을 받는지에 대해 짚는다. 한 교수의 말에 따르면 여성들은 훌륭한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 신사처럼 행동하라.”는 말을 듣는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반대의 압력도 받는다. 교실에서 자기 목소리를 거리낌 없이 내는 여성은 야유, 공개적인 망신, 가십을 경험한다. 전형적인 여성적 행동에 순응하지 않는 여성은 남성 혐오 레즈비언또는 페미나치 다이크라고 불린다.

성 평등을 다루는 문헌은 이러한 궁지를 진퇴양난”, “딜레마”, “외줄타기로 다양하게 설명한다. 여러 직장에서 여성들은 노동자로서 존중받기에 충분할 만큼 남성적이 되라는 압박뿐 아니라 여성으로서 존중받기 충분할 만큼 여성적이 되라는 압박을 받는다. 많은 증거를 통해 나는 여성이 되라는 순응의 요구는 여성의 속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여성을 여성으로서 대상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이러한 모순적 요구는 오늘날의 성차별 이야기가 지배 집단으로의 순응 강요라는 단순한 내러티브보다는 훨씬 복잡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215-216p)

 

 

여성의 독특한 지점은 지배 집단인 남성으로부터 커버링과 역커버링을 둘 다 꼬박꼬박 요구받는 점이다. 여성만이 이런 식의 특이한 상황에 놓인 이유는 여성의 종속이 대개 특유한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동성애자 및 인종적 소수자와 달리 여성을 억압하는 사람들은 여성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오랫동안 남성은 따스함, 공감, 돌봄 등 여성에게 있다고 여겨지는 여성적인특질에 가치를 두었다.

여성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남성이 여성을 제약하는 사고방식을 영역 분리라고 한다. 즉 남성은 일, 문화, 정치의 공적 영역에 거주하고, 여성은 따뜻한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 거주한다는 이데올로기다. 표면상 이 두 영역은 남성과 여성의 상이한 특징을 뒤따른다. 남성은 그들의 남성적인속성 때문에 공적 영역에, 여성은 그들의 여성적인속성 때문에 사적 영역에 적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남성이 여성을 속박하는 동시에 소중히 여기는 것을 가능케 한다. 즉 여성은 숭배를 받지만 오직 가정에서만이다.

(...)

미국 여성은 가정이라는 영역을 결코 떠나지 않고 어떤 면에서는 그 안에서 매우 의존적이지만, 여성이 그 이상 높은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곳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218p)

 

 

남성이든 여성이든 대부분의 노동자는 직장에 들어설 때 자녀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포기의 정도는 성 중립적이지 않다. 혹실드는 한 대기업을 연구하면서, 고위직 남성 임원은 책상 위에 자녀 사진을 일상적으로 전시해 두지만, 여성 관리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학위증과 상장을 전시하길 선호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한 여성 관리자가 말했다. “경력을 관리하는 여성들은 함께 일하는 남성들에게 나는 어머니나 아내가 아니라 동료입니다.’라고 밝히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합니다.”(223p)

 

 

나는 앞으로 한 세대가 지나도 여러 여성 법관의 초상화가 벽에 무난하게걸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르치는 여성학생이 외모나 정서적으로 더욱 남성스럽게되라는 커버링 요구 때문에 좌절하거나, 여성들끼리의 액티비즘이나 연대를 부각하지 말라는 압력 때문에 곤란을 겪을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이 여성들이 자녀 양육의 주된 책임을 맡게 될 확률이 매우 높으리라는 짐작 때문에 비관적이다.

조앤 윌리엄스와 노동조합 고문 낸시 시걸은 이렇게 썼다. “80퍼센트 이상의 여성이 어머니가 되고”, “25세에서 44세 사이의 여성 95퍼센트가 1년 내내 주당 50시간 미만으로 일한다.” 이는 내가 가르치는 여학생 대다수가, 이 초상화의 인물 중 하나가 되기까지 필요한 시간만큼 일하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뼈저리게 깨닫듯이 <뉴욕 타임스>는 변호사에 대한 기사에서 마미 트랙(mommy track)”이라는 이젠 흔해진 신조어를 만들었다. 관련 논문에서는 로펌이 하부에는 엄마 변호사들로 구성된 핑크 칼라 직종이 떠받치고 있고 상부에는 남성과 무자녀 여성으로 가득 찬조직이 되어 버릴 끔찍한 가능성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다.(237-238p)

 

 

동화 모델은 어떤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존재는 보호하지만, 그 집단과 관련된 어떤 행위는 보호하지 않는다. 법원은 피부색은 보호하되 언어는 보호하지 않고, 염색체는 보호하되 임신은 보호하지 않으며, 성적 지향은 보호하되 (2007년 현재) 동성 결혼은 보호하지 않는다.(254p)

 

 

민권을 집단 기반의 평등이 아닌 보편적 자유라는 측면에서 분석할 때의 장점은 집단 문화에 관해 가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앞서 간략히 언급했듯이, 주류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실제로는 그냥 본연의 모습대로행동하는 것일 수도 있는데 커버링 개념은 이들이 진짜 정체성을 숨기는 거라고 너무 성급하게 가정해 버릴 가능성이 있다. 한 여성 동료가 이 지적에 대해 매우 설득력 있는 견해를 제공했다. “네 연구에서 내가 싫어하는 부분은 이 점이야. 자전거를 고치는 것처럼 흔히 남성적이라고 여겨지는 일을 하면 사람들은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가장 단순한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젠더 수행성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해. 나는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감추려고 자전거를 고치는 게 아니야. 그냥 자전거가 고장 났으니까 고치는 거지.”

그 동료는 또 다른 예를 들었다. “내가 대학원에 있을 때 독일 낭만주의 시를 공부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있었어. 네 말대로라면, 그 사람이 굉장히 난해하고 고답적인 것을 공부하면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커버링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내가 볼 때 그 사람은 분명 낭만주의 시가 좋아서 낭만주의 시를 공부한 거야. 그가 백인처럼 행동하려고 낭만주의 시를 공부한다고 생각한다면 인간으로서 그의 가치를 폄하한 거야.”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네가 할 일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되도록돕는 거야. 자기 자신이 되도록 하는 능력을 박탈하고 순응하도록 요구받는 것에 맞설 수 있도록 말이야. 그런데 커버링의 개념은 네가 없애고자 한 그 고정 관념이 계속해서 이어지도록 해. 소수자가 고정 관념을 깨는 방법 중 하나가 고정 관념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것인데, 만약 소수자들이 그렇게 할 때마다 사람들이 그들이 매우 중요한 정형화된 정체성을 커버링한다고 생각한다면 고정 관념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거야.”(275-277p)

 

 

진짜 해결책은 시민인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지 우리 안의 아주 작은 집단인 법률가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법률가가 아닌 사람들은 법 밖에서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를 해야 한다. 우리는 고프먼의 용어인 커버링을 학문적 모호함에서 끄집어내어 대중적인 어휘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커버링이란 단어도 패싱이나 클로짓처럼 통용될 수 있다. 비록 법이 커버링 요구를 하는 장본인들에게까지 미치지 못하고 커버링 요구로 인해 고통 받는 집단을 인정하지 않더라도, 커버링을 요구받는 사람들은 그 요구의 근거를 찾는 과정에서 용기를 얻어야 한다. 이러한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는 법정 밖에서 일어나야 한다. 직장에서, 식당에서, 학교에서, 운동장에서, 온라인 대화방에서, 거실에서, 광장에서, 술집에서 이런 대화를 해야 한다.(282p)

 

 

켄지 요시노, <커버링>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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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9

 


아 이 유머코드 어쩔거야 ㅋㅋ

 



당신, 요즘 이상하다. 애인이라도 생겼나 봐?”

아내는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쓸데없이 발끈한 것은 나였다. ‘내가 지금 연애할 시간이 어디 있느냐, 매일매일 칼퇴근해서 아이들 씻기고 함께 방귀대장 뿡뿡이 노래 부르는 거 보면서도 그런 소리를 하느냐, 그럼 내 애인이 뿡뿡이란 말이냐나는 무슨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22-23p)

 

 

말하자면 반년이 훌쩍 지나 그 30만 원의 행방이 도착한 것이었다. 편지는 아내가 나에겐 말하지 않고 벌써 꽤 오랫동안 후원해온 우간다에 사는 카와토라는 아홉 살짜리 친구에게서 온 것이었다. 카와토는 지난 성탄절에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는 첫 문장으로 편지를 시작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겐 뜻밖의 선물이었고, 보내준 30만 원으론 암소 한 마리와 염소 두 마리를 샀으며, 자신의 운동복과 동생들의 옷을 샀다고, 띄엄띄엄 편지에 적었다. 카와토가 암소 한 마리와 염소 두 마리 옆에서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이 동봉되어 있었다.

카와토는 편지 말미에 이런 문장을 적었다.

 

뜻밖의 성탄 선물 때문에 우리 가족의 인생은 바뀌었습니다.

이제 제 동생들도 학교에 갈 수 있게 되었어요.

 

나는 그 편지를 읽고 난 뒤에도 한동안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아내는 아마도 내 이름으로 카와토에게 특별 후원금을 보낸 모양이었다. 나는 잠깐 아파트 대출 이자 때문에 오랫동안 가계부를 들여다보던 아내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트에서 팔고 있는 값비싼 유모차 앞을 서성이다가 돌아선 아내의 모습도 떠올랐다. 그리고 염소 때문에 학교에 갈 수 있게 된 저 먼 나라 친구를 생각했다. 염소 한 마리에 4만 원. 나는 어쩌면 내가 평생 꼰대가 되지 않는다면, 그건 다 아내 덕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다.(73-74p)

 

 

어른들은 아이들을 너무 모른다. 아이들을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순간 아이들은 상처를 받을지도 모른다. 아들의 여자 친구가 내게 그것을 가르쳐주었다.(93p)

 

 

다시 돌아온 두 번째 토요일 아침, 아내는 두툼한 장편소설 한 권을 들고 외출했다. 학교 다닐 때처럼 하루 내내 카페에 앉아 책 한 권 읽어보는 것, 그것 또한 아내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아내는 현관을 나서기 직전, 예의 또 괜찮겠어?” 라고 물어왔지만, 그래서 나는 씨익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그러나 속으론 좀 얇은 책이면 안 되겠니, 시집도 좋은 게 많은데생각한 것도 사실이었다.(111p)

 

 

작은아빠, 동생들이 내가 말이 많다고 싫어하죠?”

나는 조카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그렇지 않다고 동생들은 누나를 좋아한다고 동생들이 삐치는 게 더 문제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조카딸의 입에선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제가요, 우리 오빠 때문에 말이 많아졌거든요. 우리 오빠가 많이 아프잖아요. 제가 말을 많이 해야 우리 오빠가 다치지 않거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뭉클한 것이 올라왔다. 나는 조카딸의 작은 손을 꼭 잡아주었다. 말을 많이 하거라, 아이야. 말을 많이 하거라, 아이야. 온 세상이 너와 네 오빠를 도와줄 거란다. 나는 기어이 눈물까지 툭 흘리고야 말았다.(157-158p)

 

 

우리가 아직 모르는 게 많다니까.”

나는 아내의 그 말을 들으면서 내가 부모로서 성장한 것이 아닌, ‘부모로서 착각한 것들이 더 많이 쌓여왔다는 것을, 그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241p)

 

 

이기호,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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