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5/25

 

 

 

하지만 여행을 다니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여행이 일상을 벗어난 아주 특별한 상태가 아니라 일상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일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이른바 ‘편도행 티켓’을 끊어 어디론가 떠나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도 있지만, 그건 나의 것은 아니다. 아마 그런 여행은 나의 죽음, 그것으로 한 번일 것이다.(7p)

 

 

나는 여행을 떠나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을 싫어한다.

우리는 여행에 무엇을 가지고 가는가? 나 자신을 가지고 간다. 속옷 한 장 없이 떠날 수 있지만 나 자신이 없이는 아무 곳에도 가지 못한다.

진정한 자아는 어디 있는가? 성지에? 템플스테이에? 인도에? 내 자아는 내 집, 내 방에 있지 않을까? 전혀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서 비일상의 경험을 하며 자아를 찾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런 생활을 지속해야 할 일이다.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 왕복 여정을 떠난다면, 내 자아가 가장 오래 머무는 곳의 상황을 주시할 일이다.(13p)

 

 

내가 여행과 관련해서 유일하게 되뇌는 점이 있다면, “예정대로 되지 않는 일을 받아들일 것.” 오로지 그것을 더 여유 있게 경험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매일의 삶에서 예정대로 되지 않는 일은 내 힘으로 돌파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여행지에서라면 더 부드럽고 가볍게, 가려고 한 식당이 문을 닫거나, 박물관 입장 줄이 너무 길어서 관람을 포기하거나, 화산재가 날아와서 비행기 운항이 취소되는 일을 통해 포기하는 법을 배우고 변수를 받아들인다. 아마도 나는, 평상시에 대충 ‘해치울’수 없는 것들을 해버리기 위해 여행을 가는 것 같다. 여행지에서의 선택은 대체로 자유롭다. 여행지에서 실패해도, ‘이곳’(사실 이승이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다)에서의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아, 카드대금이 있군.(14p)

 

 

외할머니는 제주도보다 더 먼 곳으로 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다. 나는 외할머니를 모시고 일본에 가기보다 일본에서 책을 잔뜩 사오는 편을 택했다. 그때는 겨우 취직한 직후였으니까, 돈을 더 벌면 ‘나중에’라고 생각했다. 변명에 불과했다는 걸 시간이 지나고 깨닫는다. 무엇이든, 지금이 그 나중이다.(24p)

 

 

여행이야말로 우아하게 가난할 수 있는 방법이다. 집에서 가난한 것보다는, 여행지에서 가난하면 인생의 깨달음을 얻고 있다는 자위라도 할 수 있으니까. 돈이 없어서 고생을 하고 나면 정말로 뭔가 알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그게 뭔지는 결국 알 수 없었다. 정신 승리가 따로 없다.(33p)

 

 

뉴질랜드 북섬 로토루아에는 와이토모 동굴이라는 곳이 있다. 반딧불 동굴이라고도 불리는데, 동굴의 바닥까지 내려가, 마지막에는 캄캄한 가운데 밧줄을 붙잡고 동굴 바닥을 흐르는 물길 위에 뜬 쪽배에 올라탄다. 모두 안전하게 탄 게 확인되면 안전요원이 설명한다. 이제부터 불을 끌 것이다. 전혀 위험하지 않다. 당신들은 옆에 만져지는 밧줄을 당겨라. 그러면 배는 조금씩 앞으로 전진해 나가는 곳으로 갈 수 있게 될 것이다. 불을 끄면 위를 쳐다보아라. 그리고 정말 완전한 소등. 암흑. 암흑? 머리 위를 보는 순간 마치 가장 공기가 맑고 빛이 없는 지역 밤하늘처럼 반딧불 수천 마리가 빛나는 장관이 펼쳐진다. 하늘은 멀지만, 동굴 천장은 멀지 않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안전요원의 설명대로 보트를 맨 줄을 당겨가며 앞으로 이동하면서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냥 여기에 더 머물고 싶다고. 밖으로 나와 숲을 산책하면서, 반딧불은 곤충 아닌가? 그 위에 수천 마리가 그러면 어쩌고 있는거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막 떨어지고 그런 것도 있을 텐데, 어두워서 못 본 건가? 으윽. 원효의 해골물 같은 경험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렇게 관광객이 드나드는 일이 반딧불이에게는 괜찮은 것일까도 근심하게 된다. 그리고 이제 와 그 경험을 떠올려보면,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는 것, 그것뿐이다.(49-50p)

 

 

‘다름’을 접하는 방식 역시 어른의 여행에서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여행이라는 것은, 처음에는 다른 것들을 구경하기에 머물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같음에 눈이 뜨이는 법이다.(60p)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우리는, 현지 사람들이 나에게 하는 이해 못할 현지어가 내 외모에 대한 품평이나 인종차별적인 욕이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설령 내가 사용하는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 앞에서라고 해도, 굳이 나쁜 말을 할 이유는 없다. 상대는 알아듣지 못해도 그 말을 하는 나는 내가 한 말을 듣는다. 이런 일은 정말이지 하나도 재미있지 않다.(66p)

 

 

얹혀 있는 데는 사실 기술이라고 부를 만한 게 없다. 가능한 하지 않는 게 좋다. 친한 친구가 온다고 하면 반겨 맞겠지만, 그게 아닌 대부분의 경우는 오겠다고 하니 그냥 두는 것뿐이다.

당신을 반겨 맞아주는 사람이 있어서 얹혀 있게 된다면 몇 가지는 당부하고 싶다. 아래 사항에서 한 가지를 택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세 가지 전부 할 생각을 해야 한다.

 

1. 필요한 것이 있는지 물어보고 가능한 가져다준다.(외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소주나 담배, 식재료가 특히 유용할 수 있으며,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국어로 된 책이 필요한지 묻고 사다 주면 좋다.)

2. 제대로 된 식사를 현지의 친구나 친구 가족에게 최소한 한 번 이상 외식으로 대접한다.

3. 청소에 신경 쓴다. 매일 침구 정리, 욕실 정리, 집에서 식사를 하는 경우 설거지를 해야 한다. 혹시 그곳의 친구도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면 아예 현금을 주고 숙박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내가 얹혀 있기를 그만두게 된 이유는 신세지는 일은 성인이 해도 좋은 일이 전혀 아니구나 싶어져서였다. 돈이 없어서 숙소를 얻을 여력이 없다면, 차라리 여행을 가지 않는 쪽이 낫다고 마음먹기도 했고.(69-70p)

 

 

문제는, 제약조건이 없는데도 혼자 아무것도 하지 않는 휴가라는 것은 어쩐지 ‘없어 보인다’는 강박을 낳는 것이다. 바쁘게, 좋은 데서 보내는 시간이야말로 나 자신을 괜찮게 보이게 한다는 생각.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도 없는 걸 휴가라고 불러도 되는가. 남들이 물어보는 말이 귀찮아서라도 어딘가 다녀와야 하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에 시달린다.(110p)

 

 

예전 대학 선배 중에 <어린 왕자> 책을 언어별로 모으는 사람이 있었다. 언어가 다른 다양한 나라들을 여행하고 기록하는 재미있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132p)

 

 

여행지에서 가져와야 하는 것은 그곳 스타일의 옷보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는 법(여행지에는 내가 모르는 사람뿐이니까)과 타인의 스타일에 간섭하지 않는 태도(아래위로 훑어보면 실례다)일지도 모른다.(135p)

 

 

뭘 하지 않을 자유를 말하는 책의 저자는 대체로 그것을 많이 해본 사람이더라는 생각에서다. 옷장의 미니멀리즘을 설파하는 지비키 이쿠코의 <옷을 사려면 우선 버려라> 역시 읽다 보면 옷을 버리라는 저자가 누구보다 좋은 물건을 아주아주 많이 사고 써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미니멀리즘을 주장하는 책들은 많이 쌓는 삶을 살아본 뒤에 쌓지 말자고 한다. 소식을 주장하는 책을 우리가 너무 많이 먹는 게 문제라는 데서 시작한다. 과잉이야말로 금욕의 가장 소중한 식재료다. 해본 사람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 이 메시지부터 받아들이는 것에 있지 않을까.

똥을 굳이 먹어봐야 아나. 타인의 경험으로부터 배울 줄 아는 것이 문명화된 인간 아니겠는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경험이라는 것은 ‘간접’이라는 말이 붙는 순간 ‘0’에 무한히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 직접 경험이 깨달음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간접 경험은 그냥 경험을 안 해봤다는 말이다. 사랑을 글로 배울 수 없고, 여행도 글로 배울 수 없다. 한 것과 한 것 같은 것은 다르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 봐야 안다.

일본에서의 미니멀리즘이 3.11 동일본대지진으로부터 촉발된 움직임이라면, 한국에서의 미니멀리즘은 저소득을 긍정하고 받아들이게 만드는 쪽에 가까워 보인다. 사고 싶은 만큼 사보니 안 사도 되겠다는 깨달음을 얻는 것과, 원하는 만큼 사본 적 없지만 그래 봐야 부질없다고 배운 뒤 일단 아끼고 보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여행하지 않을 자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여행을 가보니 생각의 깊이란 내 집 침실에서도 얻을 수 있더라 하는 깨달음을 얻는 것과, 애초에 여행 가도 별것 없으니 안 가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것은 다르다. 사랑할 자유를 누린 뒤에 사랑하지 않을 자유를 만끽할 수 있고, 일하고 싶은 자유를 충족시킨 뒤에야 일하지 않을 자유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할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하지 않을 자유’를 가르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해보니 별것 없더라”와 “해도 별것 없대”는 다르다. 여건이 된다면, 결론을 내기 위해 직접 경험할 수 있다면, 하기를 권한다. 여행을 다녀오지 않고도 여행을 다녀온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내 안으로 여행하기’를 잘 하려면,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뭔지부터 알아야 할 것 아닌가. 하다못해 여행을 싫어한다는 사실도, 여행을 해봐야 알 수 있다. 인내와 금기는 엉뚱한 판타지만 키우더라.(155-156p)

 

 

먹어보지 않은 음식을 다짜고짜 좋아하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다. ‘진짜’ 맛있는 음식이라면 먹는 순간 눈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신의 음성이 귓가에 울릴 것 같지만, 그건 음식만화에서나 가능한 일일뿐더러, 맛을 음미하는 법을 아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지적인 쾌락이다. 미각은 다른 많은 감각처럼 훈련할수록 더 성취도가 높아진다. 미술이나 음악, 소설 같은 예술의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법을 다양한 작품을 통해 배우듯 말이다.(206p)

 

 

 

ㅡ 이다혜,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中, 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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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조각들

from Life 2018. 5. 14. 11:33

여름의 조각들

 

러닝타임도 짧고 편안한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영화였다. 영화를 보기 전에 알고 있었던 사실은 감독이 예전에 영화배우 장만옥과 함께 작업(이마 베프, 클린)을 하기도 했고, 그 인연이 결혼으로까지 이어졌다는 것. 물론 금방 헤어졌고 현재는 영화감독 미아 한센 러브와 결혼해서 살고 있다는 사실. 또 이 영화에 예술품이 등장한다는 정도였다. 영화를 보고나서 알게 된 사실은 이 영화가 오르세 미술관 20주년 기획 영화이며 그래서 영화에 나오는 예술품은 실제로 미술관 소장품이라는 것. 또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에 들어가려던 중에 실제로 어머니의 죽음을 맞이했고, 그로 인해 시나리오를 수정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이다.

 

두 가지 생각

1. 유산을 놓고 세 남매의 의견이 갈린다. 첫째는 어머니의 집과 예술품을 유지하며 후대까지 이어가자는 의견, 둘째와 셋째는 현실적인 여건상 팔자는 의견. 이 상황에서 갈등을 보여주는 가장 쉬운 방식은 한쪽이 옳고 다른 한쪽은 나쁘다는 식으로 연출을 하는 것일 텐데, 이 영화는 그러지 않아서 좋았다. 첫째의 의견에 심정적으로 동의가 되었고 그 의견이 일리가 있지만, 마찬가지로 둘째와 셋째의 의견도 현실적이며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한국영화였다면 틀림없이 감정 과잉으로 흘렀을 부분을 담담하게 연출해서 마음에 든다.

 

2. 예술품이 실제 생활에서 쓰임새를 가지고 그에 걸맞은 자리에 존재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실생활과 분리해서 엄정한 관리 하의 박물관에서 전시하는 게 좋은가. 쓰면서 드는 생각은 전자가 적절한 것 같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 영화의 결말까지 보고 난 후에 조금은 비약일 수도 있겠지만 이 생각을 적용해서 해석해보았다. 엔딩에서 작중의 배경이 되는 집을 그대로 유지(생활과 유리되어 박물관에서 전시)하는 게 아니라 젊은이들이 창조적으로 변용(실제 생활에서 쓰임을 가지고 존재)해서 새로운 공간으로 이용한다. 이를 통해 예술품이 실생활에서 계속해서 쓰이며 존재하는 게 낫다는 감독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고 예술이 그러하듯 그것을 사용하는 세대도 계속해서 어떻게든 이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ps. 클린은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던데 이마 베프는 어떨지 꼭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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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5/2

 

 

몇몇 주제들이 책 전반에 걸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공동체를 위한 노력, 감정이나 정념에 빠져들지 말고 이성에 따르는 행동의 필요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종국에는 소멸하기 마련이니 삶에 큰 미련을 가지지 말고 현재에 충실할 필요성, 관조적 태도 등을 들 수 있겠다. 조금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비슷한 주제들이 나오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이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적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고 반성하며 다짐하는, 일종의 비망록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완벽하게 떨쳐낼 수 없는 생각들이기에 이렇게 반복적인 글로 자신을 다잡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책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특정 주제의 반복적인 서술을 보며 느낀 점이 있다. 한 인간의 관심사나 인생의 화두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내가 지금까지 글이라고 적어둔 것을 읽어보니 대동소이한 주제들을 단어나 표현만 달리하여 적고 있었다. 책을 읽을 때도 느낀다. 이미 읽었던 책을 시간이 꽤 흘러 재독하면 새로운 면이나 생각할 거리가 많이 보이길 기대하지만 결국 읽고 나서 줄쳐놓는 부분은 그때나 지금이나 거기서 거기인 경우가 많다. 뭐 그렇더라고.

 

 

 

 

아름다운 것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그 자체로 아름답고,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다. 찬미는 그것을 이루는 성분이 아니다. 찬미를 받는다고 해서 더 나아지지도, 더 나빠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아름답다고 불리는 것들, 이를테면 자연의 산물이나 예술작품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실로 아름다운 것에게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그것은 법이나 진리나 선의나 겸손만큼이나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중 어느 것이 칭찬 받는다고 아름다워지고, 비난 받는다고 망가지겠는가? 에메랄드가 칭찬 받지 못한다고 더 나빠지겠는가?(58-59p)

 

 

일어나는 모든 일은 봄철의 장미나 여름철의 과일처럼 친숙하고 잘 알려진 것들이다. 병과 죽음, 중상모략과 음모, 바보들을 기쁘게 하거나 슬프게 하는 모든 것이 그와 같다.(66p)

 

 

매번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매사를 올바른 원칙에 따라 행하는데 싫증내거나 낙담하거나 포기하지 마라. 실패하면 다시 그 원칙들로 돌아가고, 네 행동이 대부분 인간의 본성에 맞는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네가 무엇을 지향하든 그것을 사랑하라.(76p)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이 소멸이 됐든 이주가 됐든 담담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가 올 때까지 어떻게 하면 만족스럽겠는가? 신들을 공경하고 찬양하는 것, 사람들에게는 선행을 베푸는 것, 사람들을 ‘참고 견디거나’ ‘멀리하는 것’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87p)

 

 

맛 좋은 요리나 그와 비슷한 다른 음식들을 보고는 이것은 물고기의 시체고, 이것은 새나 돼지의 시체라고 생각하고, 팔레르누스 산 포도주를 보고는 이것은 포도송이의 액즙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자포를 보고는 이것은 조개의 피에 담갔던 양모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성교란 것도 장기의 마찰과 진액의 발작적인 분비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멋진 발상인가. 그런 생각들은 사물들의 본질과 핵심을 건드려 그 사물들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볼 수 있게 해준다. 너도 평생 동안 그렇게 하여, 사물들이 너무 믿음직해 보이거든 옷을 벗겨 그것들의 무가치함을 꿰뚫어보고 그것들이 뻐기는 후광을 걷어내야 한다. 가식은 무서운 사기꾼이다. 그리고 네가 진지한 것들을 상대하고 있다고 굳게 믿을 때 가장 현혹되기 쉽다.(91-92p)

 

 

이 얼마나 이상한 행동인가. 인간들은 자신들과 더불어 사는 동시대의 사람들을 칭찬하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자신들이 본적도 없고 보지도 못할 후세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것은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것은 조상들이 너에 관하여 칭찬의 말을 하지 않았다고 네가 슬퍼하는 것과 대동소이한 것이다.

(...)

경기장에서 누가 우리를 손톱으로 할퀴고 머리로 받았다고 하자. 우리는 이를 나무라거나 못마땅히 여기거나 중에 그가 음모를 꾸밀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경계의 눈으로 살피되, 그를 적으로 여기거나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호의적으로 피할 뿐이다. 인생의 다른 상황에서도 그런 처신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우리의 경기 상대자들의 많은 부분을 너그럽게 보아주도록 하자. 앞서 말했듯이, 의심하거나 미워하지 않고도 그냥 피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94-95p)

 

 

원형극장이나 그와 같은 장소에서의 공연들이 똑같은 광경을 매번 되풀이하는 탓에 싫증이 나고 단조로움 때문에 구경가는 것이 싫어지듯이,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도 마찬가지다. 위로나 아래로나 모든 것이 언제나 똑같고, 똑같은 것들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그럴 것인가?

(...)

이 세상에서 단 한 가지 진실로 가치 있는 것은, 평생을 진리와 정의와 더불어 살아가며 거짓말쟁이들과 불의한 자들을 호의로써 대하는 것이다.(104-105p)

 

 

악이란 무엇인가? 네가 자주 보아온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네가 자주 보아온 것이라고 생각하라. 너는 시선을 위로 향하든 아래로 향하든 어디서나 똑같은 것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고대사도 중세사도 현대사도 그것들로 가득 차 있고, 오늘날에는 도시들과 가정들이 그것들로 가득 차 있다. 모든 것이 익숙한 것들이고, 모든 것이 무상한 것들이다.(108p)

 

 

네가 갖고 있지 않는 것들에 대해 마치 이미 갖고 있는 양 연연해하지 마라. 오히려 네가 가진 것들 중에 가장 값진 것들을 골라, 만약 네가 그것들을 갖지 못했더라면 얼마나 그것들을 갈망했을지 생각해보라. 그러나 아무리 좋아도 그것들을 과대평가하는 버릇이 들지 않도록 조심하라. 언젠가 그것들이 없어지면 너는 안절부절못하게 될 테니까.(115p)

 

 

자신의 악에서 벗어나는 것은 가능한데도 자신의 악에서는 벗어나려 하지 않고, 남의 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테도 남의 악에서 벗어나려 하니 가소로운 일이다.

(...)

네가 선행을 베풀고 남이 그것을 받았으면 그만이지 어째서 바보같이 제3의 것을 바라느냐? 선행을 베푸는 것을 남이 보아주거나 또는 선행의 보답을 받는 것 말이다.(126p)

 

 

이웃의 의지는 그의 호흡이 그러하듯 내 의지와 무관하다. 우리는 각별히 서로를 위하여 태어났지만 우리의 지배적 이성은 각기 제 주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웃의 사악함이 내게도 불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는 것을 신은 원치 않았으니, 내 불행이 다른 사람에게 달려 있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145p)

 

 

너는 누군가의 몰염치에 기분이 상할 때마다 “세상에 몰염치한자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고 즉시 자문해보라.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지 마라. 이 사람도 반드시 세상에 존재해야 할 몰염치한자들 가운데 한 명이기 때문이다. 악당이나 신의 없는 자나 잘못을 저지르는 다른 모든 자들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떠올려라. 너는 이런 부류의 인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사기하자마자 이들 한 명 한 명에 대하여 더 관대해질 것이다. “자연이 이런 잘못에 대하여 어떤 미덕을 주었을까?” 하고 즉시 생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무지한 사람에 대하여 일종의 해독제로서 온유함을 주었고, 그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또 다른 능력을 주었기 때문이다.(163p)

 

 

건강한 눈은 보이는 것은 모두 보아야 하며 “나는 초록색만 원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눈병의 징후이기 때문이다. 건강한 청각과 후각은 들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듣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냄새 맡을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건강한 위는, 마치 방아가 찧도록 되어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찧듯이, 음식물이면 무엇이든 소화해야 한다. 그와 같이 건전한 정신은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내 자식들은 안전하게 해주소서!” 그리고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만인이 칭찬하게 해주소서!”라고 정신이 말한다면, 그 정신은 초록색만 반기는 눈이나 부드러운 것만 찾는 이빨과 같다.(180p)

 

 

누군가 나를 경멸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가 알아서 할 일이다. 내가 알아서 할 일은 경멸 받을 말과 행동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가 나를 미워하게 된다면? 그가 알아서 할 일이다. 내가 할 일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호의적으로 대하고, 특히 그에게는 그의 잘못을 기꺼이 지적해주되 나무라거나 내가 참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지 말고, 저 유명한 포키온처럼ㅡ그가 진심에서 그런 말을 했다면ㅡ점잖고 신사답게 지적해주는 것이다. 인간의 내면은 그런 것이어야 하며, 어떤 일에도 화내지 않고 불평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신들에게 보여야 한다.

(...)

“나는 너에게 솔직하게 대하기로 결심했어.” 라고 말하는 자는 얼마나 썩고 불순한가. 인간이여, 너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그런 말은 미리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은 저절로 드러나기 마련이고 이마에 적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마치 애인이 애인의 눈에서 당장 모든 것을 알아내듯이, 그런 것은 목소리의 울림을 들어도 당장 알 수 있고, 눈을 보아도 당장 알 수 있다. 소박하고 선한 자는 악취를 풍기는 자와 비슷하게 그에게 다가서는 사람은 다가가는 순간 원하든 원하든 않든 그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나 위장된 솔직함은 비수와 같다. 늑대의 우정보다 더 수치스런 것은 없다. 무엇보다도 그런 우정을 피하라. 선하고 소박하고 호의적인 그 모든 특징들을 눈에 드러내며, 그런 특징들은 숨어 있지 않는다.(188-190p)

 

 

4) 넷째, 너도 많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고, 너도 그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라. 그리고 네가 어떤 잘못들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설사 비겁하기 때문에 명예욕 때문에 또는 그와 비슷한 다른 동기에서 그들과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에게도 그런 잘못을 저지를 기질은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라.

5) 다섯째, 그들이 실제로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너는 확신하지도 못하고 있음을 생각해보라. 많은 일들이 상황의 요구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남의 행동에 대하여 적절한 판단을 내릴 수 있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많은 것을 알아두어야 한다.

7) 일곱째,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람들의 행동이 아니다. 그들의 행동은 그들의 지배적 이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실은 그들의 행동에 대한 우리의 의견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견을 근절하고 그들의 행동이 끔찍하다는 판단을 버릴 각오를 하라. 그러면 분노는 가라앉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러한 의견을 근절할 것인가? 어떤 모욕도 너에게 치욕을 안겨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가능해진다. 그렇지 않다면 너는 남이 그렇다고 말하기 때문에 수많은 잘못을 저질러 강도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8) 여덟째, 우리를 화나게 하고 슬프게 하는 그들의 행동보다는 그러한 행동에 대한 우리의 분노와 슬픔이 얼마나 더 괴로운 것인지 생각해보라.

 

 

 

ㅡ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中,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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