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4/10

 

 

 

음악을 이해하는 지름길이 있다고 믿는 작곡가는 하나도 없습니다. 듣는 이를 위해 그들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작품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그것이 거기에 있는 이유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오롯이 듣는 이의 몫으로 남습니다.(52p)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음악을 듣는 방식은 세 가지 개별적인 층위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용어가 썩 만족스럽진 않지만, 이 세 층위를 각각 (1)감각적 층위, (2)표현적 층위, (3)순수 음악적 층위로 부르기로 합시다.

음악을 듣는 가장 단순한 방식은 음향 그 자체가 주는 순수한 즐거움을 좇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음악 감상의 감각적 층위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 어떤 방식의 사고도 배제한 채로 음악을 듣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음악이 존재하는 두 번째 층위는 표현적 층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문제와 마주하게 됩니다. (...) 저는 모든 음악은 표현적인 힘을 가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음악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음악은 음표 이면에 특정한 의미를 함유하고 있고 또한 그러한 의미가 모여서 결국에는 그 작품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 작품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를 구성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음악에 의미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물음입니다. 거기에 대한 제 답변은 “예”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라는 것이 무엇인지 낱낱이 언명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어본다면 거기에 대한 내 답변은 “아니요”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갈림길에 어려움이 있는 겁니다.

(...)

음악이 기거하는 세 번째 층위는 순수 음악적 층위입니다. 듣기 좋은 음향, 음악이 표현하는 느낌을 옆으로 치워놓고 봅시다. 음악은 음표 그 자체와 그들의 다양한 집합체로서 존재합니다.(53-60p)

 

 

머리를 이용해 음악을 듣는 사람은 음악적 재료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선율, 리듬, 화성, 음색을 의식적으로 들어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음악의 형식입니다. 곡을 쓴 사람의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려면 형식 원칙에 대한 이해가 필수입니다. 이 모든 요소를 들을 수 있어야 비로소 순수하게 음악적인 층위의 감상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61-62p)

 

 

그저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들어 내려 노력해야 합니다.(64p)

 

 

공개강좌 때의 일인데, 영감이 오길 기다리는 편이냐고 어느 수강생이 제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매일 기다립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스러운 계시가 찾아올 때까지 마냥 멍하니 앉아만 있다는 이야기는 절대로 아닙니다. 취미로 곡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래도 될지 모르겠지만 직업 작곡가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직업 작곡가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책상머리에 앉아 어떤 종류가 되었든 음악을 써내는 사람을 의미하니까요. 당연히 오선지가 술술 채워지는 날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우여곡절이 있더라도 곡을 쓰는 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영감은 그저 곁가지인 경우가 많습니다.(66-67p)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주제가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니면 지닐수록 그것을 다양하게 뒤바꿀 가능성은 오히려 줄어든다는 점입니다. 이는 대부분의 작곡가가 체험을 통해 아는 사실입니다. 만약 주제의 원형이 길고 완전하다면, 달리 말해 이미 그 자체로 확정적인 형태를 지닌 주제라면 그것을 달리 볼 수 있는 여지는 많지 않습니다. 주제만 놓고 보면 시시해 보이지만 정작 그 주제를 사용한 작품 전체는 위대한 걸작으로 인정받는 곡이 많은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주제가 시시하고 불완전할수록 새로운 의미를 품을 여지가 커진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니까요.(70p)

 

 

어떤 곡을 평가할 때든 마찬가지지만, 아름다운 멜로디 역시도 만족감을 주는 균형 감각이 생명입니다. 듣는 이로 하여금 완결감을 느낄 수 있게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방법 말고 달리 쓸 수는 없었겠구나 하는 필연성이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97p)

 

 

 

 

ㅡ 에런 코플런드, <음악에서 무엇을 들어 낼 것인가> 中, 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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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4/6

 

칼 세이건의 강연을 책으로 옮긴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이 생각났다.

 

 

한 분야의 아이디어나 생각이 다른 분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분명 바보가 되기 십상이다. 요즘처럼 전문화되어 있는 시대엔 양쪽 분야 모두에서 바보 취급을 받지 않을 만큼 두 분야의 지식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무척 드물기 때문이다.(10-11p)

 

 

어떤 규칙이든 예외는 그 자체로 무척 흥미롭다. 우리가 믿고 있던 예전 규칙이 옳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기존 규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예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예외까지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옳은 규칙을 찾아야 하는데, 이 과정이 아주 재미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외적 상황이나 그것과 유사한 효과를 제공하는 다른 상황들을 연구해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 과학자들은 더 많은 예외적인 경우들을 발견하게 되고 예외적인 상황들이 갖는 공통된 특징들을 끄집어내기 위해 노력하게 되는데, 이 과정이 전개될수록 연구는 더욱 흥미로워진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설령 자신이 발견한 것이라 하더라도, 규칙이 틀렸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데 주저해선 안 된다. 오히려 반대로 그것을 발견하는 데 적극적이어야만 과학이 발전하고 더 재미있어진다. 결국 과학자들은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최대한 빨리 증명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인 것이다.(28p)

 

 

우리가 과학을 통해 얻어 낸 모든 결론들은 그저 반증되지 않고 아직까지 살아남아있는 잠정적인 결론이며, 불확실함은 피할 수 없는 요소이다. 우리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추측을 할 뿐이며, 완벽한 실험을 하진 못했기에 진실이 무엇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

지금 옳다고 믿는 것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지금 알고 있는 해답을 법칙이라 굳게 믿고 있으면, 영영 문제를 못 풀 수도 있다.

(...)

만약 새로운 길을 탐색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다면, 또 만약 우리가 더 이상 의심하지 않거나 무지함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진실이라 확신하고 있다면 그 어떤 것도 힘들여 검사해 볼 생각을 안 할 테니까. 지금 우리가 과학적 지식이라 부르는 것들은 확실한 정도가 제각기 다른 여러 진술들의 집합체라고 볼 수 있다. 그중 어떤 것들은 매우 불확실하며 또 거의 확실한 것들도 있긴 하겠지만, 그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완전히 확실하지는 않다. 과학자들은 이 점에 매우 익숙해 있다. 모르는 채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혹자는 어떻게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살아갈 수가 있죠?”라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도무지 이런 질문이 이해가 안 된다. 당신은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는가? 내 경우 대부분을 정확히 모르는 채로 살아왔다. 쉬운 일이다. 내가 진정 알고 싶은 것은 우리가 어떻게 점점 알아가게 되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42-44p)

 

 

세상에 모든 비과학적이며 이상한 것들이 만들어 내는 문제점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중 많은 것들이 미처 생각하기 어려운 문제들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저 부족한 정보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점성술을 믿는 사람들이 많다. 분명 이곳에도 많이 있을 것이다. 점성술사들은 치과에 가는 일에도 다른 날보다 더 좋은 날이 있다고 말한다. 만약 당신이 몇 월, 며칠, 몇 시에 태어났다면, 당신이 비행기를 타기에 더 좋은 날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별들의 위치에 따라 아주 세심하게 결정된다고 말한다. 그게 만약 사실이라면, 세상은 아주 흥미로울 것이다.(126p)

 

 

리처드 파인만, <과학이란 무엇인가> , 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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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4/6

 


쉽다. 그리스 로마 문명, 기독교, 게르만의 침입이라는 3가지 키워드를 이용해서 유럽역사를 훑는 1부가 특히 인상적이다. 세계사에 크게 관심이 없거나 이 짧은 책조차 다 읽기 버겁다면 1부만이라도 읽어보면 어떨까 싶다. 옮긴이의 말마따나 근대부터 조금씩 힘이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

 

 

 

게르만족은 평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명예는 위험 속에서 더 쉽게 쟁취할 수 있으며, 당신은 폭력과 전쟁 없이 대규모 동료들을 유지할 수 없다. 동료들은 항상 자기 족장에게 물건을 요구한다. 내게 그 군마를 주시오. 아니면 내게 그 피로 물든 승리의 창을 주시오. 식사는 일종의 보수로 소박한 음식이지만 풍족하게 먹는다. 이런 좋은 인심은 전쟁과 약탈이 있어야 충족된다. 당신은 게르만족 사람을 설득하여 밭을 갈게 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그해의 생산물을 기다리게 만들기란 적에게 도전하고 싸우다 입은 상처에 대한 보상을 얻게 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는 피로 얻을 수 있는 것을 땀으로 얻는 것은 기백이 없으며 비천한 짓이라고 생각한다.(27-28p)

 

 

그러나 히포크라테스 역시 다른 그리스인들처럼 단순함을 추구하다가 중대한 오류를 저질러 서양의학을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신체의 건강은 네 가지 체액, 즉 혈맥, 점액, 황담즙, 흑담즙이 균형을 유지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가르쳤다. 이로 인해 19세기까지도 피가 너무 많은 것이 병의 원인이라고 생각될 때는 거머리를 붙이는 치료법이 허용되었다. 이런 점에서 히포크라테스는 너무나 오랫동안 고전으로 받아들여졌다.(79p)

 

 


ㅡ 존 허스트, <세상에서 가장 짧은 세계사> 中,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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