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4/16

 

 

 

내가 이 책에서 필요로 했던 부분은 유럽사의 흐름이었기 때문에 각장의 마지막 부분과 조금은 음모론적이라고 저자도 인정한 부록은 적당히 생략하고 읽었다. 수요일전까지 유럽사 관련으로 뭐하나 더 읽으면 좋을 거 같은데.

 

 

 

도시국가 로마의 시작은 기원전 75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로마의 종말을 서로마제국의 멸망 시점인 476년으로 잡으면 그 역사는 1,000년을 넘어선다. 제국의 법통을 이어받은 비잔티움 제국이 15세기 중엽까지 존속했다는 사실에 기초한다면 전체 역사는 2,000년을 넘어선다. 중국과 인도를 제외하면, 어떤 나라도 1,000년 이상 정체성을 유지하며 존속한 경우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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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문명의 두 뿌리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라고 일컫는데, 저자는 그리스 문명, 후자는 유대 전통과 기독교를 뜻한다. 그리고 이 두 사상적 기둥을 내부에서 통합·부흥시키고 유럽 대부분 지역에 퍼트리기 시작한 것이 바로 로마제국이다.(21p)

 

 

유대교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모세다. <구약성서>의 처음 다섯 장,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는 모세가 직접 썼다 하고, 이를 ‘모세5경’ 혹은 ‘토라’라고 부른다. 우주의 창조와 에덴동산, 노아의 방주, 아브라함과 이삭, 십계명 등 <성서>의 고전적인 이야기가 모두 들어 있는,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경전이다.

이집트 왕가에서 자란 사람으로서 혈통이 모호한 인물인 모세는 기원전 1,300년경 노예로 살고 있던 동족을 모아 이집트를 탈출,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을 찾아 떠나는데 이때가 일신교로서의 유대교가 성립되는 시점이다. 유대교 신앙은 그 오래전부터 이미 존재했지만 이를 구체적이고도 강력한 형태로 정리하고 고착시킨 것이 모세이기 때문이다.(40p)

 

 

그래도 유대인의 피를 타고난 예수인데 그를 신으로 믿는 기독교인들이 예수의 동족을 그토록 혐오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텐데, 이 대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반적인 민족 개념과는 다른 유대인의 정의에 대해 알아보아야 한다.

대개 민족은 특정 지역·언어·문화에 근거해 분류된다. 한민족은 한반도와 그 주변에 거주하면서 한국어와 전통문화를 공유한 사람, 혹은 그들의 직계 후손이라 말할 수 있다. 허나 유대인의 경우는 이런 관점이 적용되지 않는다. 이미 2,000년 전에 근거지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로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처음 중동과 유럽 지역으로 옮겨간 유대인들은 이후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등 신세계에도 대거 진출했고 그 과정에서 현지인과 혈연으로 엮이면서 인종적으로 동화된 경우도 많다. 이런 사람들은 외형적으로 게르만, 앵글로색슨, 슬라브계 백인과 잘 구별되지 않는다. 따라서 현대의 유대인은 혈연이나 지연의 개념이 아니라 유대교를 믿고 그 전통과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을 총체적으로 의미한다. 정식 유대교도로 인정되면 누구나 유대인의 법적 지위를 갖고 이스라엘 영주권을 받을 수 있다. 그런 이유로 혈연적으로 유대인과 무관한 이디오피아의 흑인 유대교들도 이스라엘로 이주했던 바 있다.(51p)

 

 

아랍은 아라비아어를 공유하는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일대의 사람들을 뜻하고 종교의 의미는 없다. 그들은 떠돌아다니는 상인들로 부족을 이루고 있었고 국가체제를 거의 갖추지 못했다. 물론 현재까지도 무슬림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아랍인이지만, 이란의 경우 고대 페르시아에서 이러진 다른 문화적인 배경과 언어를 가진 민족이고 실제로 가장 많은 무슬림 인구를 가진 나라는 인도네시아다.(99-100p)

 

 

이런 점들은 한 가지 면에서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사람이라도 다른 면에서는 여전히 광신적인 열정과 잔인한 광기에 휩싸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의 도그마에서 빠져나오면서 실은 다른 도그마로 이행하는 상태는 역사의 여러 지점에서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예컨대 1950년대 미국의 공산주의자 검거 광풍, ‘매카시즘’은 수호의 가치가 기독교에서 자본주의로 바뀌었을 뿐 기본 양태는 중세의 마녀사냥과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마녀사냥이 가장 오래 살아남았던 미국에서 20세기 중반에 들어 현대판 마녀사냥이 재현되었던 것이다. (138p)

 

 

예를 들어 교육으로 얻은 반인종주의적인 관점과 현실에서 실제 상황을 겪을 때의 반응은 전혀 다를 수 있다. 이익이 걸린 중요한 문제에서 좋지 않은 경험을 한 후에도 계속 공정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개인의 특별한 경험을 특정 인종 전체에 확대함으로써 스스로의 문제를 합리화하려는 유혹을 과연 이겨낼 수 있을까. 동족이 모여 자기 경험을 열거하며 특정 인종을 비난하는 분위기 속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을까.

이라크 고문으로 악명을 떨쳤던 미국의 스물한 살 여성 린다 잉글랜드 이병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젊은 여성이 처음부터 고문을 할 마음을 먹고 이라크에 갔을 리 없고, 언론에서 전하듯이 고향에서는 순진하고 착실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절대적인 무력과 권위를 가진 미군의 일원으로 생활하면서, 현실에서 무력하기 그지없는 이라크인을 대하면서 급성 인종주의자가 되고 말았다.

일종의 자기 최면에 걸려 분별력을 잃어버린 그녀에게 이제 이라크인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일종의 고깃덩어리로 보이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심리 상태만이 성기를 손가락질하고 목줄을 잡아끌면서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그녀를 설명할 수 있다. 사진이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는 고향의 지인들은 인간의 이런 심리가 얼마나 강하고 무서운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문제는 잉글랜드 이병뿐 아니라 성찰과 통제력이 부족한 사람은 특정한 환경에서라면 누구라도 이런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이고, 이것이 인종주의 같은 배타적인 집단의식을 극복하기 어렵게 만드는 부분이다. 삶의 개별적인 조건이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인종주의와 집단주의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끊임없는 자각과 노력, 원칙의 수립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노력을 게을리한다면 과거 히틀러와 나치의 오류를 또다시 범하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149-150p)

 

 

그러나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의 상황은 영광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세 이탈리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국가 개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는데 그 이유는 로마 멸망 후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는 통일 국가로 존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1,500년에 가까운 기간 내내 이탈리아라는 이름은 단지 지명에 가까운 상태였다. 현대 독일의 모태라고 할 신성로마제국의 영향하에서 이탈리아 지역은 제후들이 분할해 다스리는 형태로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오스트리아·에스파냐·프랑스 등이 차례로 이탈리아 반도를 점령·지배했으며 반도 남부와 시칠리아 섬은 한때 이슬람의 지배하에 놓이기도 했다.

이는 혼란과 분열을 조장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강력한 전제 군주의 부재를 통해 새로운 기운이 움트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런 흐름이 기독교 도그마에 사로잡힌 경직된 유럽의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태동할 수 있었던 배경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160-161p)

 

 

이 문건(마그나 카르타)의 원래 목적은 민주주의나 일반 백성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왕과 귀족 간의 권력 관계를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유럽에서 왕의 역할은 귀족·제후 사이에서 대표의 역할에 가까웠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왕이 권력을 지나치게 탐할 경우 귀족들의 견제가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이런 견제는 이해 당사자들 간의 무력 투쟁이나 담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았지만 백성을 등에 업고 보다 큰 규모로 벌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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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400여 년이 지나 1689년에는 권리장전이 제정되었다. 권리장전은 피를 흘리지 않았다는 의미인 명예혁명을 통해 제정된 문서로 의회와 왕권에 우선하는 권리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 민주주의의 시발점으로 거론되곤 한다. 그 대략적인 내용은 의회의 승인 없이 왕이 법을 정지시키거나 세금을 징수하거나 군대를 모을 수 없다는 것과 언론의 자유 등이었다.

당시의 관점에서 그 의미는 아주 크지만 명예혁명 자체는 구신교의 갈등에 원인을 둔 것으로 의회주의의 실현은 그 부산물이었다. 왕이 임의로 나라를 다시 구교 국가로 되돌리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로 의회의 권력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권리장전을 통해 권한이 보장된 당시의 의회도 보통 선거로 의원을 뽑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민중의 지지를 대변한다기보다는 소수 권력 기관에 가까웠다는 점에서 현대의 의회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특히 상원은 귀족 간의 세습을 통해 구성되었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평민에 의한 하원 역시 비록 귀족은 아니더라도 각 지역에서 부와 권력을 쌓아온 소수 실력자 가문에서 배출되었다. 게다가 귀족 세습의 상원에 대한 하원의 정치적 우위가 확정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였다. 이런 점을 고려해본다면 명예혁명이나 권리장전이 가지는 의미가 있음에도 근대 초기 영국의 모습은 우리가 익숙한 의회제도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명예혁명이라는 단어가 가진 한계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피를 흘리지 않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한편 명예혁명의 모든 과정이 왕·귀족·부르주아 실력자 등 당대 힘 있는 사람들끼리의 담합과 권력 재분배의 과정이었다는 점은 명예라는 단어의 그림자 속에서 놓치기 쉬운 부분이기 때문이다.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평민은 명분을 과시하기 위해 도용되거나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통해 물리적인 압력을 행사할 필요가 있을 때 동원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217-220p)

 

무엇보다도 프랑스 혁명은 근대의 사상적 기반인 계몽주의자들의 철학을 근간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가진 자의 담합이었던 명예혁명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물론 프랑스 혁명은 명예혁명 후 100년이 지나 벌어졌기에 그 영향을 받지 않았을 수 없었고, 삼부회 소집 등 프랑스 혁명의 초기 상황이 영국과 비슷하게 진행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지울 수 없는 생각은, 명예혁명은 종교분쟁의 틈바구니에서 너무 일찍, 진정한 근대와 민주주의의 사상 기반이 제대로 무르익을 틈도 없이 벌어졌던 것은 아니었나 하는 점이다. 서둘러 모든 것이 규정되는 바람에 진정한 사회변화와 미래를 창조해낼 기회와 동력을 상실해버렸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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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여성 참정권을 인정한 것은 1928년에 이르러서였고 프랑스는 그보다 늦은 1944년이었다.(222-223p)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화파는 의회를 점거하고 루이 16세를 폐위시키는 혁명 속의 혁명을 단행했다. 그 후 한 달여간의 혼란기를 거쳐 탄생한 것은 1792년 9월 20일 설립된 국민공회였고 목적은 왕정의 완전한 폐지를 통한 공화제의 수립이었다. 이때부터 유명한 자코뱅 당과 지롱드 당의 대립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좌익과 우익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 두 정치세력을 지칭하기 위해 생겨난 말이다. 의장석의 관점에서 급진파인 자코뱅 당은 왼쪽에, 온건주의자인 지롱드 당 의원들은 오른쪽에 앉았기 때문인데, 이렇게 쓰던 표현이 전 세계로 퍼져 지금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성향의 사람을 가리키는 의미로 굳어졌다.

자코뱅과 지롱드는 둘 다 공화제를 지지하는 세력이었지만 전자가 소시민·농민·무산계급을 기반으로 삼은 것에 비해 지롱드는 부르주아와 자유경제체제를 지지하는 입장으로 지금의 좌파·우파와 근본적인 면에서 공통점이 많았다.(260-261p)

 

 

그의 외골수에 가까운 이상주의와 청렴함은 달리 보자면 지나친 독선과 아집에 가까운 것이고 이런 사람은 자기와 다른 성향들을 유연하게 받아들여 설득과 통합을 꾀하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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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로베스피에르의 결벽증은 절제와 수양의 결과였지만 문제는 도가 지나치다는 데 있었다. 이런 사람이 자기 기준에 맞는 세상을 만들려 하는 경우 그 엄격함의 수준은 보통 사람이 견뎌낼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선다. 약간의 호의호식도 인격파탄이나 부패로 보이고 자신의 생각과 생활방식만이 선이며 악마의 유혹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자기처럼 살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지나친 단호함과 이에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과격함이다.(268p)

 

 

 

ㅡ 원종우,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유럽편> 中, 역사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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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4/13

 


so-so.

 


 

기분은 좋지만 슬프다는, 슬프지만 우유는 맛있다는, 이 복잡한 감정을 알게 된 걸 성장이 아니면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48p)

 

 

나는 주인공이 약점을 극복하고 가족을 지키며 세계를 구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 등신대의 인간만이 사는 구질구질한 세계가 문득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을 그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를 악무는 것이 아니라, 금방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약함이 필요한 게 아닐까. 결핍은 결점이 아니다. 가능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게 된다.(59-60p)

 

 

점이나 혈액형에 관한 이야기는 싫어한다. 별자리와 전생, 사후세계도 전혀 믿지 않는다. 그런 사고방식은 당장 눈앞에 있는 어찌하기 힘든 현실, 인간관계, 그리고 나 자신을 외면하는 역할밖에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79p)

 

 

딸기라면, 유치원 때 가장 사이가 좋았던 이발소의 앗짱네 놀러가, 처음으로 연유를 넣은 우유에 담가서 먹었던 기억이 있다. ‘아, 이렇게 하는구나’하고 배우면서 숟가락으로 그 딸기를 짓이겨 모두 먹어치우고서, 남은 분홍빛 우유를 마셨다. 충격적인 맛이었다. 잠자코 있을 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재빨리 엄마에게 보고했지만, 앗짱의 엄마와 사이가 나빴던 우리 엄마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딸기는 딸기의 단맛만으로 그 상태 그대로 먹는 게 가장 맛있는 거야”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곧 고레에다 집안의 찬장에도 바닥이 평평한 숟가락이 준비되었다. 어째서인지 연유가 아닌 설탕을 우유에 섞어 먹는 방법으로 정착됐지만, 나에게는 어떤 케이크보다도 그 딸기우유가 줄곧 최고의 간식이었다.(112-114p)

 

 

자신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의 결함은 문제 삼지 않고, 상대를 이해력 없는 바보라고 생각한다.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결여된 이러한 품위 없는 태도가 부시의 본질이라면, 설사 부시를 향한 것이라 할지라도, 이쪽은 결코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진정한 의미의 ‘반 부시’가 아닐까.(160p)

 

 

사실 내가 봤을 때 <화씨 9/11>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그것이 아무리 숭고한 뜻에 힘입었대도, 찍기 전부터 결론이 먼저 존재하는 것을 다큐멘터리라고 부르지는 않으련다. 찍는 것 자체가 발견이다. 프로파간다와 결별한 취재자의 그런 태도야말로 다큐멘터리라는 방법과 장르를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 고이즈미 총리를 공격하는 것 같은 작품을 만들어, 잠깐 동안 보는 이의 가슴을 후련하게 한다고 해도, 그것은 고작 제작자의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오히려 진짜 적은, 이러한 존재를 허용하고 지지한 이 나라의 6할에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은 ‘고이즈미적인 것’이고, 그 병소를 공격하지 않고 안전지대에서 고름(고이즈미)만을 찔러 짜낸대도 병세는 결코 나아지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왔다.(161p)

 

 

 

ㅡ 고레에다 히로카즈, <걷는 듯 천천히>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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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기

from Life 2018. 4. 12. 13:26

1. AI니 사물인터넷이 등장하는 최첨단 과학시대에 아직도 지구의 나이가 6천년이라 믿는 자들이 세를 불려가고, 평평한 지구를 믿는 자들의 컨퍼런스가 공공연하게 열리고 있는 걸 보면 과학업적이 쌓이는 것과 사회 구성원이 그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무지가 억지를 부리기 시작하면 온갖 일들이 다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공교육이 철저히 실패했다는 명백한 증거 아닐는지. 과학사를 다루는 어떤 책을 들여다봐도 지구가 구 형태라는 것 정도는 금방 알 수 있을진대, 난 그런 건 모르겠고 그냥 나의 길을 가겠다고 우기는 걸 보면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아니, 조금 솔직하게 얘기하면 그네들이 뭘 하건 내 알바도 아니고 크게 관심도 없다. 문제는 이들이 혼자만 그러거나 공통된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이뤄 살다가 죽는 게 아니라 굳이 사회일반에 등장하여 해악을 끼치기 때문에 발생한다. 왜냐하면 이 양반들은 정도라는 걸 모르기 때문인데 조금 있으면 지구평평설도 교과서에서 함께 가르치라고 주장하고 있을 모습이 상상이 되는 것이다. 이게 단순한 기우가 아닌 게 미국에서도 자칫했으면 진화론과 더불어 창조론을 가르치게 될 뻔했다.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는 다원화된 시대에 걸맞은 교육과정이 운영될 수 있었는데 아쉽게도 무산되어 얼마나 안타까운지.

멍청하면 가만히라도 있거나, 배울 자세를 보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노오력이라도 해야 할 텐데 그 어떤 것도 하지 않는다. 그런 게 있을 리가. 왜냐하면 모두가 평균 이상의 지적능력과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군가가 평균이상이라면 어느 누군가는 평균이하라야 평균이라는 말이 성립한다는 사실과 자기가 평균이하에 속할 수 있을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는다.

'과학은 항상 틀릴 수 있을 수 있으며 잠정적 결론에 불과하다는 말'을 오독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생각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오해하기 딱 좋은 문장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절대 불변하는 어떠한 진리도 없으니 아무 것이나 믿고, 우기며 시간을 뭉개고 있으면 언젠가는 사실이 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아주 만약이라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겠지. 과학은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빼액빼액 소리만 지르며 억지주장만 할 게 아니라 기존의 입장이 왜 틀렸는지 그 근거를 들며 조목조목 반박을 해야 한다. 하지만 사이비과학이나 유사과학을 신봉하는 자들은 주장만 하고 왜 그런지에 대한 근거를 절대 들지 않지. 하긴 갖다 댈 근거가 있어야 들지. 이게 내가 자연이라는 가치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여 신성시 여기는 자들과 혈액병 좀비, 사이비과학 및 유사과학 신봉자 등을 언제나 비웃는 이유다.

 

 

2. 나는 눕는다고 해서 바로 잠들지 못한다. 일이 그렇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대략 중고등학생 때부터 수면에 좋지 않은 습관이 생겼다. 자기 전에 항상 이어폰을 귀에 꽂고 무언가를 들으며 잠을 청한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는 음악과 라디오, 대학 때는 강의 오디오 파일, 지금은 잡다하게 듣는다. 근데 회사 생활을 하면서 조금 바뀌긴 했다. 스마트폰에 이어폰이 꽂힌 채로는 그 기기의 거의 유일한 기능인 알람을 이용하기 어렵다. 혹시라도 알람을 듣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금요일이나 토요일과 같이 다음 날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는 날을 제외하고는 불안해서 뭔가를 들으며 잘 수가 없다. 이게 또 문제인데, 그렇다고 해서 오지 않았던 잠이 금방 쏟아지진 않기 때문이다. 어차피 잘 수 없는 없는 상황에서 눈을 감은 채로 이것저것 생각한다. 담배를 피우면서도 스마트폰을 쳐다보는 삶을 살다보니 생각이라는 걸 할 시간이 거의 없는 내게 언제부턴가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하루를 떠올려본다. 일어난 일에 대해 내가 다르게 대응했다면 어땠을 까라고 생각해보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은 일에 상상의 나래를 펼쳐 사건을 전개 해보기도 한다. 읽은 책이나 영화를 떠올려보기도 하며 내일 일어나서 해야 할 것이나 내일의 업무에 대해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머리는 맑아지며 날이 밝아 온다.

 

 

3. 나이가 들수록 젊었을 때에 비해 기초대사량이 떨어져 동일한 음식량을 섭취해도 살이 찌게 된다. 요즘 들어 새삼 느끼고 있는데 나는 한 술 더 떠 동일한 양을 먹는 것도 아니라 부쩍 살이 찌고 있음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외관상 살이 빠져 보인다는 소리를 듣는 걸 보면 체중에 큰 변화가 없더라도 근육량이 줄고 지방이 늘어났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게 아니라면 역시 사람들은 타인의 변화에 그렇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사례로 볼 수 있을지도. 크게 활동적이진 않더라도 가까운 거리는 걸어 다니는 습관과 엘리베이터보다는 계단을 이용하는 게 자연스러울 정도로 몸에 배서 살면서 큰 체중변화는 없었는데 덜 움직이고 더 먹는 시간이 누적되니 이건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난 밥도 얼마 안 먹는데 왜 이렇게 살이 찌는거지라는 말을 하며 돌아서서 쿠크다스 100개씩 먹는 사람을 비웃었는데 요즘 내가 그러고 있다. 확실히 담배는 덜 피우게 되는데 담배를 끊을 생각이 없는 내게 이게 무슨 효용이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관성이 된 군것질을 어떻게 해야겠다. 일단 하나만 더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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