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7/25

 

 

끝으로 한 가지 비밀을 말해주자면, 편의점의 영수증 하단 귀퉁이에는 ㅇㅇ두 자리 숫자가 찍혀 있는데 이는 객층 분류 번호다. 주민등록증 번호처럼 앞자리 1은 남자, 2는 여자를 나타내고 뒷자리는 1부터 5까지 어린이, 중고생, 젊은, 중년, 노인 순으로 표기된다. 이 말인즉, 근무자가 내 나이를 어떻게 판단했는지 알 수 있다는 뜻이다. 구매 영수증이 편의점에서 발급하는 나이 평가표 되시겠다. 자신 없으면 보지 말 것이며 혹여 보게 되더라도 결과에 대한 클레임은 노노.(94p)

 

 

 

ㅡ 유철현, <어쩌다 편의점> 中, 돌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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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3

 

 

구성에 공을 많이 들였네. 재밌다. "자연에 이름 붙이기"도 읽어봐야지

어류라는 전통적인 분류 체계가 고정불변한 게 아니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며 전통적인 성별이분법에 속하지 않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긍정하고 세계속에서 사물에 강박적으로 질서를 구축하려고 했던 시도의 무의미함을 생각하게 됨. 

 

 

 

 

 

"넌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은 아버지의 모든 걸음, 베어 무는 모든 것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너 좋은 대로 살아.“

(...)

아버지는 언제나 게걸스러운 자신의 쾌락주의에 한계를 설정하는 자기만의 도덕률을 세우고 또 지키고자 자신에게 단 하나의 거짓말만을 허용했다. 그 도덕률은 "다른 사람들도 중요하지 않기는 매한가지지만, 그들에게는 그들이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라"는 것이었다.(57p)

 

 

늘 자신의 선지자로 모시던 루이 아가시의 제자답게 데이비드는 자신이 관찰하는 생물에게서 도적적 교훈을 찾으려 했다. 아가시의 흐릿한 "퇴화"개념에 다윈의 진화론을 함께 버무린 것을 가지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느는 미끌미끌한 먹장어를 나태함이나 기생충 같은 "나쁜 버릇"이 한 종을 퇴보 또는 타락시키거나, "더 나쁜 쪽으로 변화시킬"수 있다는 증거로 보았다. 한 과학 논문에서 그는 한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주머니 모양의 몸으로 여과 섭식을 하는 멍게가 한때는 더 고등한 물고기였지만 "게으름", "무활동성과 의존성"이 더해진 결과 현재와 같은 형태로 "강등"된 것이라는 의견을 냈다. 그러한 쇠퇴를 초래하는 정확한 메커니즘은 알지 못했지만, 데이비드에게 멍게는 명백한 경고이자 게으름에 대한 교훈담이고, 말 그대로 멍청하기 짝이 없는 주머니였다.(74p)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데이비드는 청교도답게 손을 게으름에서 벗어나게 하라고 권한다. "활동적인 야외 생활과 그로 인해 얻게 되는 건강과 함께" "영혼의 고통은 사라진다."

(...)

그러면 나쁜 나날을 보내고 있으면 어떻게 하라는 걸까? 데이비드는 나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동정심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절망의 철학>의 최종 결론은 절망이 선택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절망이 청소년기에 자연스럽게 거쳐 가는 단계라고 생각하기는 해도 그런 감정을 떨쳐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경멸한다. 그는 그런 사람들은 "축 늘어진 정신의 유행"을 따르고, 문학 속 "슬픈 왕들"을 흉내 내는 게으른 모방자들이며, 그들이 "지옥불 같은" 숨결을 내뿜는다고 비난한다. 죽음의 냄새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기를, 그 모든 것의 허망함을 곱씹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몹쓸 짓인 이유는, 진화가 선물한 그 소중한 전기를, 너무나 많은 경이로운 감각들은 느끼고 너무나 많은 과학적 수수께끼를 푸는 데 써야 할 그 신성한 이온들을 실존적 탐구라는 하수구로 흘려보냄으로써 글자 그대로 "몸이 아직 살아 있는데도 죽은 사람"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

"이러한 인생관은 염세주의로 이어지는가?" 강의가 끝나갈 무렵 그는 학생들에게 일종의 마술 같은 주문을 걸었다. 혼돈이 주는 냉기를 떨쳐버리는 한 가지 방법을 말이다. 특별한 활자체로 된 여덟 개의 단어.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어떤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127-128p)

 

 

이 문제에 관해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자기기만이 데이비드와 내 아버지가 경고한 것만큼 그렇게 위험한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오랫동안 사회의 도덕적 권위자들은 그렇다고 말해왔다. 내가 알기로 성서는 자기기만을 경멸하고, 오만을 대죄라 부르고, 오만을 부리지 않는다면 가장 좋은 것을 얻게 될 거라면서, 온유한 자가 땅을 상속받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고대 그리스인들도 오만에 반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카로스는 태양에 밀랍으로 만든 날개 깃털이 녹는 바람에 하늘에서 떨어졌다. 계몽주의 시대에 볼테르는 낙관주의가 고통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음흉한 해악이라고 비난했다. 20세기에는 의학 전문가들이 일치된 의견을 내놓았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에이브러햄 매슬로, 에릭 에릭슨 같은 영향력 있는 심리학자들은 자기기만을 정신적 결함이자 시각에 생긴 문제여서 치료로 교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반면 정확한 시각은 "정신의 건강을 보여주는 표지라고 여겼다.

그러나 20세기가 기운차게 달려가는 동안, 임상심리학자들은 이상한 일들을 목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볼 때 더 건강한 환자들, 인생을 더 쉽게 살아가는 사람들, 좌절을 겪은 뒤에도 재빨리 회복하는 사람들, 직업과 친구, 연인을 얻고 인생이라는 회전목마에서 황금기를 달리고 있는 사람들은 장밋빛 자기기만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1970년대부터 연구자들은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해보기 위해 실험을 시작했다. 실제로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자신을 실제보다 더 매력적이고, 남들을 더 잘 도우며, 더 지적이고, (주사위를 던지거나 복권 번호를 뽑는 것 같은) 우연한 사건들을 가능한 정도보다 훨씬 더 잘 통제하는 사람으로 평가한다는 것이 꾸준히 확인됐다. 그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볼 때도 자기가 실패한 것보다 성공한 것들을 훨씬 더 쉽게 기억해냈다. 미래를 내다볼 때는 친구들이나 급우들보다 자신이 성공할 가능성을 훨씬 더 크게 잡았다.

반면 그토록 칭송받던 정확한 인식이라는 미덕을 지닌 사람들은 어떨까? 짐작했겠지만 그들은 병적인 수준의 우울증에 걸렸다. 그들은 살아가는 일을 힘들어했고, 좌절을 겪은 뒤에는 회복이 더 어려웠으며, 일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종종 더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그리하여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은 몇 차례에 걸쳐 수정되었다. 몇 가지는 건강하지 않은 특징들 항목에서 건강한 특징들 항목으로 옮겨졌다. '기만'이라는 용어는 '긍정적 착각'이라는 중립적 표현으로 바뀌었다. 1980년대 말에 이르자 약간의 자기기만은 강한 정신력에 더 유익하다는 사실이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는 주로 심리학자 셸리테일러 Shelley Taylor와 조너선 브라운Jonathon Brown이 쓴 매우 영향력 있는 논문 덕분이다. 이 논문에서 그들은 긍정적으로 왜곡된 세계관을 갖고 살아갈 때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이점을 보여준 200가지가 넘는 연구를 검토하고 정리했다.

여기까지는 이미 많이 들어본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다음 이야기는 모를 수도 있다. 현실에 대해 건강한 태도를 취하는 관점이 바뀌면서 심리치료 방법에도 변화가 생겼다는 것 말이다. 많은 치료사들이 "스토리 에디팅" 또는 "리프레이밍reframing" 이라는 기법을 사용해 환자가 자신에 대한 인식을 좀 더 긍정적인 빛으로 물들이도록 부드럽게 유도하기 시작했다. 이때 핵심은 자기기만이 적당한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수의 연구가 밝혀낸바, 극단적 부인이나 기만은 오히려 적응에 해롭다고 나타났다. 그러나 순한 거짓말, 하얀 거짓말, 작은 장미봉오리 같은 거짓말은 무척 이로운 효과를 낼 수 있다. 요컨대 힘들어하는 어떤 사람을 붙잡고 그 사람이 자신에 관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약간 더 긍정적인 이야기그가 실제보다 조금 더 강한 사람, 실제보다 더 친절한 사람으로 그려지는 이야기, 연인과의 이별에서 자신의 잘못이 겉보기만큼 그렇게 크지 않게 보이는 이야기로 이끌어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에 심오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버지니아대학의 심리학자 팀 윌슨Tim Wilson은 이야기를 살짝 조정하는 것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점에 감명받아 그중 가장 극적인 결과들을 모아 《방향 바꾸기Redirect》라는 책을 펴냈다. “스토리 에디팅"을 받은 대학생들은 더 높은 학점을 받고, 중퇴하는 비율이 줄었으며, 심지어 여러 해 뒤에는 건강이 더 좋아졌다. 직장인들은 출근하는 비율이 더 높아졌다. 또 정신적 충격을 입은 사람들에게 자신에게 벌어진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수정하도록 가르치자 평온한 감정을 회복하는 시간이 더 빨라졌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괜찮을까요?" 내가 윌슨에게 물었다.

"해로울 게 뭔가요? 두려움을 잠재워주고, 미래에 적응을 방해하는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 문제 될 게 없다고 봐요.“

"작은 거짓말이 큰 효과를 낸다고요?“

"물론이죠!"(138-141p)

 

 

2000년대 초에 앤절라 더크워스라는 한 고등학교 수학교사는 심리학 박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여러 해 동안 더크워스는 왜 어떤 학생은 다른 학생들보다 공부를 더 힘들어하는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성취도가 높은 학생들에게는 무슨 비밀이 있는지 알아내고 싶었다. 몇 년 뒤 더크워스는 그 비밀의 요소라 여겨지는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하고 그 특징에 '그릿Grit'(끈질긴 투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릿. 끈질김을 뜻핮디만 그보다 귀에 착 붙는 단어, 그릿. "긍정적 피드백"이 없는데도 "매우 장기적인 목표"에 로봇처럼 뛰어들게 해주는 것, 그릿. 머리로 벽을 반복적으로 들이받을 수 있는 능력. 더크워스는 웨스트포인트(미 육군사관학교) 사관생, 촤고경영자, 뮤지션, 운동선수, 셰프 등 거의 모든 직업에서 정상에 선 사람들에게서 그릿을 발견했다. 재능, 창의력, 친절함, IQ는 다 잊어라. 순수한 그릿이야말로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바로 그것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떤 인지적 결함이 그릿을 획득하는 데 도움이 될까? 바로 긍정적 착각이다. 다른 연구들도 마찬가지로 긍정적 착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좌절을 겪은 뒤에 낙담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릿이란 여러 특성들이 섞인 칵테일 같은 것이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이것이다. 좌절을 겪은 뒤에도 계속 나아갈 수 있는 능력,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증거가 전혀 없는데도 계속 해나갈 수 있는 능력, 또는 더크워스의 표현을 빌리면 "실패와 역경, 정체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노력과 흥미를 유지하는 것"말이다.(142-143p)

 

데이비드가 하는 짓을 보고 있으면 비판받을 때 그 비판의 따가움을 한 번이라도 느낀 적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혹시 그 믿음직한 방패로 막아내는 데 너무 능숙해져서 비판의 가시가 한 번도 그의 심장에 가닿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어느 쪽이든 그 방패는 그에게 효과가 있었다. 그는 아내 수전을 잃고 재빨리 또 다른 아내 제시를 얻었다. 물고기 컬렉션을 잃었지만 규모가 더 큰 컬렉션을 재구축했다. 그리고 점점 더 높은 직책으로 승진했다. 가르치는 일에 대해, 어류학에 대해, 고등교육에 기여한 일에 대해 상들과 메달들이 요란하게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만의 기이한 연금술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졌다. 작은 거짓말들이 동으로, 은으로, 금으로 변했다. 겸손을 유지하라는 수천 년 이어져온 경고는 잊어라. 어쩌면 이것이 신이 없는 세계의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지속적으로 오만을 복용하는 것이야말로 실패할 운명을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임을 보여주는 증거인지도 모른다.(146p)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이 나라는 우리 아이들에게 현실을 무시하는 게 편리할 때는 무시하도록,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데 필요하다면 어떤 말이든 자신에게 속삭이도록 프로그래밍하고 있다. 그런데 장밋빛 렌즈를 끼고 살아가는 일이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할까?

알고 보니 어느 작은 연구자 집단이 세계 곳곳에서 바로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조사를 하고 있었다. 이들이 쓴 방법을 상상해보면 재미있다. 이 연구자들은 클립보드를 손에 들고 자만심 강한 사람들을 직장과 학교에서 따라다니며 그들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보이는 모든 사소한 기벽들을 기록하고 집계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내놓은 결과를 보면, 긍정적 착각이 순전히 좋은 결과만 가져온다고 믿기가 꺼림칙해진다.

델로이 폴허스는 대학생들이 처음에는 자존감이 높은 학생들에게 끌리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들에게 싫증을 내고 그들을 더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토마스 차모로-프레무지크는 직장에서 과도한 자신감을 보이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고용 안정성을 더 떨어뜨릴 수 있음을 알게 됐다. 긍정적 착각이 더 나은 신체 건강과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연구들 중 가장 널리 인용되던 한 연구는 그 결과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많은 오류를 담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자기고양self-enhancement”에 관한 수백 건의 연구를 메타 분석한 마이클 더프너는 과도한 자신감을 보이는 사람들의 자기과시가 다른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지만 정작 자신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결국 공동체 안에서 좋은 평판을 받을 때 얻을 수 있는 혜택을 놓치기도 한다는 걸 발견했다. 이를테면 도구를 빌리거나 파티에 초대받거나 좋은 일자리를 소개받을 기회가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다.

(...)

리처드 로빈스와 제니터 E. 비어는 4년에 걸쳐 대학생들을 관찰하면서, 긍정적 착각을 더 많이 하는 학생들이 단기적으로는 (자신이 과제에서 실제로 낼 수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결과를 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행복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평온 지수가 급감한다는 걸 밝혀냈다. 로빈스와 비어는 그들이 스스로 실망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즉 "단기적으로 혜택을 얻는 대신 장기적으로 비용을 치르는"것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서 기만은 나중에라도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이다. 장밋빛 렌즈의 힘에는 한계가 수반된다. 그리고 그 힘이 떨어지면 자신이 무력하다는 사실을 정말로 받아들여야 한다.(147-148p)

 

 

쉽게 말해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자신을 우월한 존재라고 보는 사람들이라기보다 자신을 우월한 존재로 보고 싶다는 욕망이 강한 사람들이다. (...) 거창한 자기상을 확인받는 일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비판당하는 것을 몹시 괴로워하며 자기를 비판한 사람을 사납게 공격하는 것으로 보인다.(151p)

 

 

내가 받은 전체 교육과정 가운데 이 나라가 우생학 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전혀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나 우생학은 미국식 신여성과 포드 모델T 못지않게 미국 문화의 두드러진 한 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것은 비주류가 아니었고, 당파를 가리지 않았으며, 20세기의 첫 다섯 대통령이 모두 우생학의 밝은 전망을 찬양했고, 하버드부터 스탠퍼드, 예일, 캘리포니아 버클리, 프린스턴까지 전국의 모든 명망 있는 대학들에서 우생학을 가르쳤다. 우생학 잡지, 우생학 화장품, 심지어 우생학 경진 대회도 있었다. 주 박람회의 축제 분위기 물씬 나는 흰 천막 아래서 가장 적합한 가족과 최고의 아기를 뽑는 콘테스트가 종종 열렸다. 호박의 크기와 무게를 재듯 아기들의 무게와 치수를 쟀다. 흰 피부, 둥근 두상, 가장 대칭이 잘 이뤄진 이목구비에 파란 리본이 주어졌다.

(...)

그러나 모든 미국인이 유전적 정화를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자는 계획에 열성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매우 큰 목소리로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185-186p)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알려주려고 그토록 노력했던 점이다. 사다리는 없다. 나투라 논 파싯 살툼Natura non facit saltum,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고 다윈은 과학자의 입으로 외쳤다. 우리가 보는 사다리의 충들은 우리 상상의 산물이며, 진리보다는 "편리함"을 위한 것이다. 다윈에게 기생충은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라 경이였고, 비범한 적응성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크건 작건, 깃털이 있건 빛을 발하건, 혹이 있건 미끈하건 세상에 존재하는 생물의 그어마어마한 범위 자체가 이 세상에서 생존하고 번성하는 데는 무한히 많은 방식이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데이비드는 왜 그걸 보지 못한 걸까? 사다리에 대한 그의 믿음을 반증하는 증거들이 이렇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식물과 동물이 배열되는 방식에 관한 이 자의적인 믿음을 왜 그토록 보호하려 한 걸까? 그 믿음에 도전이 제기되면 왜 더욱 강하게 그 믿음을 고수하고 폭력적인 조치를 합리화하는 데 그 믿음을 사용했을까?

아마도 그 믿음이 그에게 진실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단지 페니키스 섬에서 젊은 그에게 처음으로 불꽃을 당긴 목적의식만도, 경력과 대의와 아내와 편안한 생활에 대한 보장만도 아니었다. 훨씬 더 심오한 무엇, 그것은 바다와 별들과 현기증 나는 그의 인생을 휘몰아가는, 소용돌이치는 늪을 깔끔하고 빛나는 질서로 바꾸는 방법이었다.

처음 다윈을 읽을 때부터 마지막으로 우생학을 밀어붙일 때까지 어느 시점에서든 그 믿음을 놓아버리는 것은 다시 현기증을 불러들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방금 자신의 형을 앗아간 세상 앞에서 상실감에 가득 차 떨고 있던 어린 소년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세상 앞에서, 그 세상을 전혀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겁에 질린 무력한 아이로.

(...)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나는 그가 자연의 질서라는 비전을 그토록 단단하게 붙잡고 늘어졌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도덕과 이성과 진실에 맞서면서까지 그가 그렇게 맹렬하게 그 비전을 수호한 이유를. 바로 그 때문에 그를 경멸했음에도 어느 차원에서는 나 역시 그가 갈망한 것과 똑같은 것을 갈망했다.(206-207p)

 

 

어떤 사람에게 민들레는 잡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똑같은 식물이 훨씬 다양한 것일 수 있다. 약초 채집가에게 민들레는 약재이고 간을 해독하고 피부를 깨끗이 하며 눈을 건강하게 하는 해법이다. 화가에게 민들레는 염료이며, 히피에게는 화관, 아이에게는 소원을 빌게 해주는 존재다. 나비에게는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며, 벌에게는 짝짓기를 하는 침대이고, 개미에게는 광활한 후각의 아틀라스에서 한 지점이 된다.

그리고 인간들, 우리도 분명 그럴 것이다.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금세 사라질 점 위의 점 위의 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있는 한 아파트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그 한 사람은 훨씬 더 많은 의미일 수 있다. 어머니를 대신 해주는 존재, 웃음의 원천, 한 사람이 가장 어두운 세월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근원.

이것이 바로 다윈이 독자들에게 그토록 열심히 인식시키고자 애썼던 관점이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하나의 계층구조에 매달리는 것은 더 큰 그림을, 자연의, "생명의 전체 조직"의 복잡다단한 진실을 놓치는 일이다.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

이제야 나는 나의 아버지에게 할 반박의 말을 찾아냈다.

우리는 중요해요. 우리는 중요하다고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이 지구에게, 이 사회에게, 서로에게 중요하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질척거리는 변명도, 죄도 아니다. 그것은 다윈의 신념이었다! 반대로,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만 하고 그 주장만 고수하는 것이야말로 거짓이다. 그건 너무 음울하고 너무 경직되어 있고 너무 근시안적이다. 가장 심한 비난의 말로 표현하자면, 비과학적이다.(226-228p)

 

 

"어류"가 견고한 진화적 범주라는 말은 실제로 완전히 헛소리라는 진실 말이다. 윤의 설명을 빌리면, 그것은 마치 "빨간 점이 있는 모든 동물"이 한 범주에 속한다는 말이거나 "시끄러운 모든 포유동물은 한 범주"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뭐, 원한다면 그런 범주를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과학적으로는 무의미하다. 진화적 관계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하는 범주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헷갈리는가? 그러면 달리 설명해보자. 수천 년 동안 우리 어리석은 인간들이 산꼭대기에서 사는 모든 생물을 진화적으로 동일한 '산어류'라는 집단에 속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왔다고 상상해보자. 산에 사는 어류, 그러니까 산어류에는 산염소와 산두꺼비, 산독수리, 그리고 건강하고 수염을 기르고 위스키를 즐기는 산사람이 포함된다. 그러면 이제는 이 모든 생물이 서로 너무나 다르지만, 우연히도 그 고도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비슷한 외피를 갖도록 진화해왔다고 가정해보자. 그 외피가 비늘이 아니라 격자무늬라고 해보자. 모두가 격자무늬를 갖고 있다. 격자무늬 독수리, 격자무늬두꺼비, 격자무늬 사람. 이렇게 서식지(산꼭대기)와 피부 유형(격자무늬)이 같다 보니 이들은 동일한 종류의 생물처럼 보인다. 모두 산어류인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모두 한 종류라고 착각한다.

우리가 어류에 대해 해온 일이 바로 이와 똑같다. 수많은 미묘한 차이들을 "어류"라는 하나의 단어 아래 몰아넣은 것이다.

(...)

이를테면 육기어류ㅡ폐어와 실러캔스ㅡ는 우리와 상당히 가까우며,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진화적 사촌, 허파가 위에 꼬리가 저 아래 있는 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거대한 진화의 분계선 너머에 조기어류가 있다. 연어, 농어, 송어, 장어, 가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겉보기에는 물고기처럼 미끌미끌하고 비늘이 있어 육기어류와 쌍둥이 같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다를 수가 없다.

(...)

“어류”라는 범주가 이 모든 차이를 가리고 있다. 많은 미묘한 차이들을 덮어버리고, 지능을 깎아내린다. 그 범주는 가까운 사촌들을 우리에게서 멀리 떼어놓음으로써 잘못된 거리 감각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상상 속 사다리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제일 윗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다.(240-242p)

 

 

그 “질서”라는 단어도 생각해보자. 그것은 오르디넴이라는 라틴어에서 왔는데, 이 단어는 베틀에 단정하게 줄지어 선 실의 가닥들을 묘사하는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단어는 사람들이 왕이나 장군 혹은 대통령의 지배 아래 얌전히 앉아 있는 모습을 묘사하는 은유로 확장되었다. 1700년대에 와서야 이 단어가 자연에 적용되었는데, 그것은 자연에 질서정연한 계급구조가 존재한다는 추정ㅡ인간이 지어낸 것, 겹쳐놓기, 추측ㅡ에 따른 것이었다. 나는 이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계속 그것을 잡아당겨 그 질서의 짜임을 풀어내고, 그 밑에 갇혀 있는 생물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믿게 되었다. 우리가 쓰는 척도들을 불신하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특히 도덕적·정신적 상태에 관한 척도들을 의심해봐야 한다. 모든 자ruler 뒤에는 지배자Ruler가 있음을 기억하고, 하나의 범주란 잘 봐주면 하나의 대용물이고 최악일 때는 족쇄임을 기억해야 한다.(267-268p)

 

 

 

ㅡ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中, 곰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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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3

 

나와는 많은 부분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공감되는 부분이 상당했다. 공산당에 투표하던 노동 계급이 왜 우파 혹은 극우파에게 표를 주는 일이 발생하는지를 프랑스의 맥락에서 논한 3부가 제일 힘들고, 나머지는 사회학적인 지식이 조금 부족해도 중간중간 이해가 안 되면 적당히 넘어가도ㅡ물론 맥락을 다 알면 좋겠지만ㅡ내용에 파악에 어려움은 없을 듯하다.

 

 

 

그는 아버지가 심하게 편찮으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문병을 최대한 미루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덧붙였다. "어머니에게는 내가 아버지를 증오했기에 그랬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진실은 내가 그를 증오했었고 그 증오를 계속 간직하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나는 폐허로 변해버린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증오했던 것은 폐허가 아니다."

다음과 같은 설명이 더욱 마음을 흔들었다.

"사람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증오의 감정에 그토록 집요하게 매달리는 이유는 증오가 사라지고 나면 고통에 직면할 것임을 예감하기 때문이다."(32-33p)

 

 

학업에서의 도태는 마치 스스로의 선택과 요구에 따라 이루어진 것인 양, 많은 경우 자발적인 도태의 과정을 거친다. 학업 기간의 연장은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형편이 되는'사람들을 위한 것인데, 이들이 '학교에 가고 싶어 하는'사람들과 결국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가능성의 장ㅡ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은 고사하고, 단순히 구상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조차ㅡ은 계급 위치에 의해 엄격하게 제한된다. 마치 각각의 사회세계가 거의 물샐틈없이 가로막혀 있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54-55p)

 

 

사회적 운명은 일찌감치 결정된다. 모든 것이 미리 작동된다! 우리가 미처 의식하기도 전에 판결은 이미 내려져 있다. 태어나는 순간 선고문이 우리 어깨에 낙인처럼 새겨지고, 우리가 차지할 자리도 우리에 앞선 것들, 그러니까 우리가 속한 계층과 가족의 과거에 의해 규정되고 제한된다.(57p)

 

 

실제 가족은, 법적인 가족뿐만이 아니라 생물학적 가족과도 겹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른바 '혼합'가족은 1990년대에 와서야 생겨난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이 세계에서 부부와 가족의 구조는 아주 오래전부터, 좋고 나쁨을 떠나 복잡성, 다양성, 절연, 잇단 선택, 재구성 등으로 특징지어져 왔다('동거하는'남녀, '배다른'아이들, 이혼하지 않은 채 각각 다른 여자, 다른 남자와 사는 유부남, 유부녀 등등). 외할머니와 그녀의 새 남자친구는 결혼하지 않았다.(77p)

 

 

누군가가 내게 외할머니가 레지스탕스였다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들을 숨겨주었다고, 혹은 그저 자기가 일하던 공장의 설비를 일부러 파손했다고, 아니면 그 밖에 우리가 뽐낼 만한 또 다른 무언가를 알려주었더라면 물론 더 좋았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영예로운 가족을 꿈꾼다. 그 영예의 이름이야 무엇이든 간에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뿐이다.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역사와 맺는 관계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87p)

 

 

수프를 준비하면서 사용하고 있던 전기 믹서기 손잡이를 아버지에게 던진 것이다.

(...)

어머니의 관점에서 그것은 그녀가 결코 "호락호락 끌려다니는"스타일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하지만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기 이전에, 이러한 분위기를 매일매일 살아내는 것은 힘겹고 고통스러웠다. 아니,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부부 전쟁의 풍토, 반복되는 말싸움 장면, 고함, 아이들을 증인으로 삼는 이 두 사람의 광란은 아마도 주변 환경과 가족으로부터 도망치려는 내 의지를 굳히는 데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91p)

 

 

"난 어머니의 사랑과 그 부당성을 확신했다. 그녀는 내가 플라톤 강의를 들으러 대강당에 앉아 있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감자와 우유를 손님들에게 내놓았다." 오늘날 어머니를 볼 때면, 나는 사회적 불평등이 구체적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 무슨 의미를 띠는지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는 거의 15년 동안 이어온 고된 작업에서 비롯된 고통 때문에 몸을 움직이기 힘들어하신다. 그녀는 오전 오후 각각 10분씩 화장실에 가기 위한 교대시간 말고는, 계속 조립 라인 앞에 서서 유리병에 뚜껑을 끼워야 했다. 내겐 '불평등'이라는 말조차, 착취라는 적나라한 폭력의 실상을 현실감 없게 만드는 완곡어법처럼 비친다.

(...)

솔직히 말하자면, 이 시절 공장의 세계를 지배하는 무자비한 노동 강도는 추상적인 방식이 아니라면,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나는 문화와 문학, 철학의 발견에 너무나 매료되어 있었던 나머지, 내가 그것들에 접근할 수 있게 해준 조건들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는 우리 부모님이 내가 꿈꾸던 부모가 아니라는 것을, 혹은 반 친구들 몇몇의 부모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녀의 좋은 대화 상대가 아닌 그냥 부모일 뿐이라는 것을 많이 원망했다.(95-97p)

 

 

나는 이 시절의 이미지들을 얼마나 간직하고 있는가? 그것들은 듬성듬성하고 흐릿하며 불확실하다. 내 머릿속을 끈질기게 괴롭힌느 정확한 하나의 이미지만 제외하면. 아버지가 2~3일 동안 사라졌다가 술에 취해 거의 실신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는 발 끄트머리에 자리 잡고서, 기름병, 우유병, 포도주병 등 병이란 병은 다 손에 잡히는 대로 하나씩 쥐고서 반대편 벽을 향해 던져 깨뜨리기 시작했다.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 돼서 나는 어머니에게 내가 왜 장례식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 설명하기 위해 다른 것들과 함께 이 장면을 상기시켰다. 그러자 어머니는 깜짝 놀란 듯했다. "너 그걸 기억하니? 너 아주 어렸을 때였는데." 그렇다. 기억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기억하고 있었다. 그 기억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것은 '원초경'과 관련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처럼,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 있다.(106-107p)

 

 

그보다는 내가 사회적인 거울 단계라고 일컫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자기에 대한 의식, 그리고 일정한 유형의 행동과 실천이 펼쳐지는 환경에 대한 소속 의식이 확보된다. 하나의 자리와 정체성을 지정하는 계급의 사회학적 상황을 발견함으로써 일어나는 사회적인ㅡ심리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은ㅡ호명의 장면. 우리가 되어야 하는 타자에 의해 되비쳐진 이미지를 매개로 한, 우리의 현재 모습과 미래 모습에 대한 자기 인지··· 내게 예정된 미래를 거역하려는 완고하고 집요한 의지가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사회적 출신의 흔적이 내 정신 속에 영원히 새겨져 있었다. 장차 나라는 존재가 겪을 어떤 전환도, 어떤 문화적 학습도, 어떤 가면이나 책략도 지워내지 못할 "네가 어디에서 왔는지 기억하라"는 주문.(108-109p)

 

 

"사회학 교육을 받기 전에 내가 어떠한 '계급의식'을 갖고 있었는지 떠올려보려고 해도, 나는 거기에 어렴풋하게만 다다를 수 있을 뿐이다. 시간적인 간격 때문에 대상이 명료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하면, 근대 사회의 개개 구성원이 전체 사회에 내재하는, 계급이라는 이름의 명확히 규정된 집단에 소속 의식을 가진다는 사실은 제대로 입증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계층화된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객관적 현실이지만, 자의식을 가진 계급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내가 보기에는 계급 소속감의 부재가 부르주아의 유년기를 특징짓는다는 점이야말로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지배자들은 그들이 특정한 세계 안에 위치지어져 있다는 것을 지각하지 못한다(이는 백인이나 이성애자가 스스로 백인이나 이성애자로서의 자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러한 언급은 있는 그 자체 명백한 의미를 갖는다. 즉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기술하고 있을 뿐이면서 사회학을 하고 있다고 믿는 어떤 특권층 인사가 내놓는 순진한 고백인 것이다.(112-113p)

 

 

우리 가족의 사회적 동질성에서 변한 것은 거의 없었다.

(...)

그 중 세무서에 취직한 사촌 여동생이라든가 비서로 일하는 제수씨 등이 사회적 상승을 체현한 인물이었다. 우리 가족은 내가 어린 시절 겪었던 과거의 비참한 생활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었다. "얘네들은 불행하지 않지" "얘는 잘 벌어." 어머니는 내가 가리킨 사람들의 작업을 알려준 뒤에, 확실하게 덧붙였다. 하지만 사회 공간 안에서 우리는 동일한 위치로 되돌아간다. 가족집단 전체의 상황과 계급 구조 내에서의 상대적 위치는 조금도 이동하지 않았다.

(...)

예술에 대한 취향은 학습되는 것이다. 나는 배워서 얻었다. 그것은 내가 다른 세계, 다른 계급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리고 내 출신 계급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 수행해야 했던, 나 자신에 대한 거의 완전한 재교육의 일부였다. 예술적·문학적 대상에 대한 흥미는 언제나, 의식적이든 아니든 간에 이에 접근 기회가 없는 사람들과 자신을 차별화하고, 자기-구성적인 간격을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 '구별짓기'를 함으로써, 타인들ㅡ'열등한''교양 없는'계급ㅡ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의해 스스로를 가치 있게 정의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나중에 나는 '교양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며 전시회나 음악회, 오페라 공연에 참석하게 되었을 때, 가장 '고상한'문화적 실천에 열심인 사람들이 이러한 활동으로부터 자신에 대해 엄청난 만족감과 우월감을 이끌어낸다는 것을 수없이 자주 확인했다. 그러한 사실은 그들의 입을 결코 떠나지 않는 사려 깊은 미소와 몸가짐, 전문가로서 말하고 여유로움을 드러내는 방식 속에서 그대로 읽혔다. 이 모든 것은 '세련된'예술의 향유를 뽐낼 수 있는 특권적인 세계에 속해 있다는 데서, 또 그 세계의 기대에 부응하는 데서 비롯하는 사회적 기쁨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119-121p)

 

 

이후 나는 이런 질문들에 직면했다. 만일 내가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그들이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왔더라면? 그들이 책 읽기에 흥미를 갖도록 해주었더라면? 공부의 당위성, 책에 대한 애정, 독서 욕구는 보편적으로 분포된 성향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개인이 속한 환경과 사회적 조건들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 성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사회적 조건들이, 나와 같은 환경에 놓여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듯, 일종의 기적이 나를 추동하는 쪽을 향해 가는 것을 거부하고 포기하도록 부추긴다. 나는 그런 그런 기적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자각을 가져야 했을까? 우리 가운데 한 명이 이미 그것을 성취했으니, 그 한 명ㅡ바로 나!ㅡ이 그를 뒤따르는 이들에게 그가 배운 것, 배우려는 욕망을 전수해주는 일도 개연성이 전혀 없지는 않다고 말이다. 하지만 내가 가족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하려면 적지 않은 인내와 시간을 들여야 했을 것이다. 교육 제도에서의 탈락에 내재하는 무자비한 논리를 저지하는 데 그것으로 충분했을까? 사회적 재생산 메커니즘에 맞서 싸우는 일이 우리에게 허용되었을까? 그 메커니즘의 효능이 대부분 계급 하비투스의 관성에 기초해 있는데도? 나는 어떤 면에서도 동생들의 '보호자'가 아니었고, 그 이후로ㅡ때늦은 일이긴 하지만ㅡ죄책감을 느끼지 않기는 어려웠다.(132-133p)

 

 

어쨌든 우리는 투표가 대개 우리가 표를 주는 정당이나 후보자의 담론 혹은 프로그램에 대한 부분적이거나 삐딱한 지지에 지나지 않는다ㅡ그리고 이는 모든 이들이 마찬가지다ㅡ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어머니가 낙태한 적이 있음을 알고 있었던 나는, 르펜에 투표함으로써 그녀가 낙태의 권리에 결사반대하는 정당을 지지한 셈이라고 지적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대답했다. "아! 그건 아무 관계없어. 내가 르펜에 투표한 건 그래서가 아니야." 이 경우에 우리가지지 결정에 고려하고 영향을 끼친 요인들과 의식적으로 한쪽에 제쳐둔 요인들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아마도 핵심은 개인적으로 혹은 집합적으로, 비록 불완전하거나 불충분할지언정, 우리가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해 지지받고 대표된다는 것을 알거나 그렇게 믿는 감정에 있을 것이다. 선거에서의 이러한 몸짓과 단호한 행동을 통해, 정치적 삶에서 존재감과 중요성을 인정받는다는 감정 말이다.(157-158p)

 

 

학교에서 "모종의 문화적 특징들"을 발견하고 불편하게 여겼던 베아른 시골 마을의 소년이, 파리 제일의 엘리트 그랑제콜 입시 준비반에 들어가고 윌므 가의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러한 변환은 왜, 어떻게 일어났을까?(183p)

 

 

우정도 역사라는 중력을 벗어나지 않는다. 두 친구는 공존을 시도하는 두 개의 체화된 사회적 역사이다. 얼마나 친밀하든 간에, 관계가 진행되는 동안 하비투스의 관성 효과에 의해 두 계급이 맞부딪힌다. 태도나 발언은 엄밀한 의미에서 공격적이거나 의도적으로 무례하지는 않다 할지라도, 본의 아니게 상대에게 그렇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부르주아나 평범한 중산층 정도의 환경에서 지내다보면, 우리도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일 것이라는 추정에 맞부딪힌다. 이느느 이성애자가 자기와 대화하는 상대가, 자신이 조롱하고 비방하는 낙인찍힌 종에 속할 수도 있다는 상상은 해보지도 않고 동성애자에 관해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지의 구성원들은 자신이 교분을 나누는 사람에게, 마치 그 역시 예전부터 자신과 동일한 실존적·문화적 경험을 해왔다는 듯이 말한다. 그들은 바로 그렇게 전제함으로써 상대를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195-196p)

 

 

그랑제콜 입시 준비반이라든가 고등사범학교 선발시험을 치르기 위해 거쳐야 하는 입시 준비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고등학교 최종반일 때도 그러한 준비반의 존재조차 몰랐다. 과거나 현재나, 그리고 아마도 미래에는 한층 더 그렇게 될 텐데, 이러한 기관들에 들어갈 가능성은 (나아가 그러한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한 단순한 지식조차) 민중 계급 출신이 아닌 학생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주어져 있다. 따라서 내게는 질문의 여지조차 없었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때에도 대입자격시험에 붙은 뒤에도 [그랑제콜 입시 준비반에 들어가] 고등학교의 틀 안에서 계속 공부하는 학생들이 이상해 보였고, 그들에 대해 우월감까지 느꼈다ㅡ얼마나 순진했던가! 내 눈에는 '대학에 가는 것'만이 모든 학생이 마땅히 열망해야 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교육의 위계서열 구조에 무지하고 선발 메커니즘에 숙달되어 있지 못한 학생은 가장 역효과를 내는 선택, 가장 나쁜 결과가 예정된 경로를 고르도록 이끌린다. 미리 알고 있는 누군가는 조심스럽게 피해 가는 것에 다가가는 스스로에 감탄하면서 말이다. 빈곤층은 이전에는 배제되었던 것들에 비로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는다. 그런데 실상은 다르다. 그들이 어느 위치에 접근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그 위치가 체계의 이전 단계에서 갖고 있던 위상과 가치를 상실한 뒤다. 유배는 더 느리게 이루어지고 배제는 더 나중에 일어나겠지만,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격차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것은 자리를 옮겨가며 재생산된다. 부르디외는 이를 "구조의 평행이동"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가리키는 것, 그 변화의 외양 바깥에서, 경직된 구조는 전과 다름없이 유지, 영속되며 평행이동을 한다.(203-204p)

 

 

나는 어떤 유형의 철학적 사유를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었지만, 사실 그것은 내 사회적 위치에 의해 추동된 결과였다. 내가 파리의 대학생이었더라면, 혹은 이론과 사유의 새로운 노선들이 정교화되는ㅡ또 높이 평가받는ㅡ중심 가까이에 있었더라면, 내 선택은 사르트르가 아닌 알튀세르, 푸코 또는 데리다에게로 향했을 것이다. 어쩌면 사르트르를 경멸적으로 바라보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나중에 알게 된 파리 지식사회의 규칙대로 말이다.(211p)

 

 

모욕은 과거로부터 나온 인용이다. 그것은 이전에 수많은 발화자에 의해 반복되었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의미를 지닌다. 장 주네의 시구가 잘 표현하고 있듯, 그것은 “시대 깊숙이에서 온, 현기증 나는 단어"이다. 그런데 모욕어는 또 그것이 겨냥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래를 표상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말들과 거기 담겨 있는 폭력이 그들이 살아가는 내내 따라붙을 것이라는 끔찍한 예감. 게이가 된다는 것은 표적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기도 전에, 즉 그러한 의식을 갖기도 전에, 그동안 숱하게 들어왔고 오래전부터 그 모욕적인 힘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는 그 어휘를 통해 스스로가 이미 잠재적인 표적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우리에 앞서, 낙인찍힌 정체성이 있다. 우리는 그 속으로 들어가 거기에 신체를 부여하며, 그것과 함께 어떤 식으로든 세상을 헤쳐나가야 한다. 그것과 더불어 살아나갈 수 있는 방식은 다양할 테지만, 거기엔 하나같이 모욕하기의 구성적인 힘이라는 인장이 새겨져 있다. 사르트르는 주네에 관한 수수께끼 같은 경구에서 동성애는 누군가가 질식하지 않기 위해 창안한 출구라고 주장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그보다 동성애는 누군가가 질식하지 않기 위해 출구를 발견하도록 강제한다. 나는 내 사회적 환경과 나 사이에 만들어진ㅡ내가 애써 정초한ㅡ거리,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나의 자기-창조가 모두 내가 되어가고 있던 존재[즉 동성애자]를 맞이하기 위해 창아한 하나의 방식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을 주변 사람들과 다르게 발명하지 않고서는 내가 되어가고 있던 존재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226-227p)

 

 

'규범'에 편입되지 않은 이들에게는 어디에서 어떻게 사는가가 문제가 된다. 마찬가지로 이 시공간에 의해 부분적으로 그 존재를 규정당하는 사람들일지라도 그 안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도 의심의 여지 없는 사실이다. 게이나 퀴어의 삶을 특징짓는 것은 차라리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 하나의 시간성에서 또 다른 시간성으로 (비정상의 세계에서 정상의 세계로, 또 그 반대로) 계속해서 옮겨갈 수 있는 능력ㅡ혹은 그래야 할 필요성ㅡ일 터이다.(244-245p)

 

 

절대적인 '전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방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무언가를 전복한다고 해도 그것은 특정한 시점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우리는 살짝 이동하고 옆으로 한 보 옮겨 편차를 만들어내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푸코식 용어로 말해, 불가능한 '해방'을 꿈꾸지 말아야 한다. 기껏해야 우리는 역사 속에서 제도화되어 우리 존재에 속박을 가하는 몇몇 경계를 돌파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사르트르의 주네에 관한 책에 나오는 다음 문장이 내겐 핵심으로 다가왔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우리에게 행한 것을 가지고서 우리가 스스로 하는 것이다." 그것은 금세 내 존재의 원칙을 구성했다. 자기에 대한 자기의 작업으로서 수행의 원칙.

그런데 이 문장은 내 삶에서 이중적 의미를 띠었으며, 성적인 영역과 사회적인 영역에서 서로 모순된 방식으로 적용되었다. 즉 성적 영역에서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모욕당한 성적인 존재로서 자기 주장을 했다면, 사회적 영역에서는 나 자신의 계급적 출신 조건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내 본래 모습대로 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되어야 했을 모습을 거부한 것이라고 말이다. 이 두 가지는 함께 작동했다.(258-259p)

 

 

 

ㅡ 디디에 에리봉, <랭스로 되돌아가다> 中,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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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1

 

두 권 중 한 권만 읽을 거면 '커리어 그리고 가정'에 한 표.

 

 

특히 호주 연방 의회의 성폭력 스캔들이 터져 나온 때와 집필 시기가 겹치며 나의 격분과 화는 절정에 치달았다. 여성 보좌관에 대한 강간으로 추정되는 스캔들이 의회 한가운데에서 터졌고, 피해자는 혐의를 일체 부인하는 장관을 전례 없이 고발했지만 이후 자살했다.(13p)

 

남성 종특인가. 세계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행태가 똑같네.

 

 

두 차례의 세계 대전 이후 공장에서 일하는 백인 남성을 대체하며 블루칼라로서 전후 노동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앞서가게 된 것은 여성이 아니라 흑인 남성이었다.

(...)

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처럼 미국의 공공 정책은 여성보다 남성, 특히 퇴역 군인의 이익에 집중됐다. 실업 회계의 역사적 기록이 보여 주듯 이런 공적 노력은 차별적인 임금 조건에도 보람 없는 구직을 이어 나간 여성의 의지를 거스른 일이었다.

하지만 여성의 상황은 다른 수단을 통해 진화했으며, 여성 노동에 관한 사회적 관습과 규범이 지속적으로 영향 받았다. 여성 노동자의 아들은 전쟁 동안 여성이 공장에 나갔을 때도 바깥 세상과 가정이 여성의 가사 노동 덕에 멈추지 않았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를 당연시했다. 하지만 문화적 변화는 시작되었고, 이 책에서 수업이 확인하듯 여성 진보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이 문화적 변화다. 전시에 엄마가 공장에서 일했던 미국 남성은 여성 노동에 더 우호적이며 아내가 노동하는 것에 더 개방적이다. 게다가 일하는 여성과 결혼할 가능성이 더 크다.(37p)

 

 

피임약이 섹스의 가격을 상당히 낮추면서 약을 먹는 여성들이 결혼 내 협상력은 줄어들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를 설명하기 전에 내가, 그러니까 사회 과학 연구자들이 섹스의 가격이라는 표현으로 무엇을 말하려는지 설명해 보겠다.

여기서 엄밀한 의미의 성매매를 대상으로 하는 제한된 시장을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경제학자들의 관념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교환되고, 모든 것은 시장이며, 이 모든 것에 수요와 공급이 존재한다. 분명 환원주의적인 시각이지만 이런 관점을 탈규제 시장에 동조하려는 새로운 시도로 봐서는 안 된다. 환원주의적 시각은 몇몇 특정한 동역학을 더 정확히 이해하는 것만을 위한 단순화일 뿐이다.

시장을 적절히 규제하려면 서로 다른 재화를 대상으로 한 각 시장의 경계를 인식해야 한다. 모든 것이 시장이고 모든 것에 수요와 공급이 존재한다는 단순화 속에서 동의하에 이루어지는 모든 성관계는 시장 교환의 대상으로 개념화된다. 여기에 특히 중요한 것은 동의 여부다. 성폭력과 섹스 시장의 관계는 노예제가 노동 시장과 맺는 관계와 같이 순수하게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제약적인 지배 관계라는 점에서 시장 개념에 반대된다. 성관계의 대가가 반드시 돈은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미지나 섹스 파트너, 친구를 비롯한 타인이 내게 품는 이미지, 애정, 더 나아가서는 결혼 기회 등이 존재한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성매매의 대가가 바로 돈인 셈이다. 경제학자들은 섹스 시장을 남성의 수요가 여성의 공급보다 높은 시장으로 모델화한다. 대부분 남성인 내 경제학과 동료들이 때로는 성차별적이지만 이런 예시와 관련해 꼭 그렇지는 않다는 점에 주의하자.

경제학자들이 섹스의 수요를 남성에, 공급을 여성에 귀속시키는 이유는 남성이 자연적으로 섹스를 더 많이 원한다거나 섹스를 선호한다거나 섹스에서 더 큰 이득을 본다고 가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학자들이 고려하는 것은 섹스를 원하는 성향이 아니라 섹스의 비용이다. 여성이 섹스에서 얻는 이득이 남성과 같다고 하자. 하지만 이 경우에도 섹스의 가격은 같지 않다. 여성에게 비용이 전가될 수밖에 없는 잠재적 임신이라는 요인이 있어서다. 잠재적 임신은 생리학적일 뿐 아니라 경제학적이기까지하다. 남성이 임신한 상대와 결혼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이득은 남성과 여성이 같으나 비용은 남성이 적으므로 남성이 여성보다 섹스를 더 많이 욕망한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 만약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면 비용은 자연히 상승한다. 여기에서 여성이 결정하는 섹스의 가격은 잠재적 임신에 대한 경제적 비용 혹은 이에 가장 가까운 것, 곧 결혼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성매매를 제외하고서 섹스에 접근하기 위해 그토록 오랜 시간 남성은 여성과 결혼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경구용 피임약은 피임을 일반화해 여성의 임신 위험과 여성에게 최종적으로 전가될 비용을 줄여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이뤘고, 섹스의 비용을 감소시켰다. 이로써 결혼은 더 이상 필수가 아니게 되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 일반화된 임신 중절 접근권이 지닌 효과 역시 같았다. 경구용 피임약이 약속하는 성 해방은 섹스를 위해 남성이 지불하는 가격을 낮춘 동시에 결혼 자체가 크게 줄어드는 것을 의미했다. 일반적으로 미혼 여성이 더 많이 일하므로 이러한 추세는 자동적으로 여성의 노동 시장 참여를 증가시켰다. 피임약이라는 기술은 다른 모든 여성의 섹스 공급을 늘려서 결혼 관계 내에서 여성의 협상력 또한 감소시켰고, 여성의 노동 공급에 추가적인 긍정적 효과를 이끌어 냈다.(48-51p)

 

 

프랑스는 유럽의 이웃 국가에 훨씬 앞서 1946년 이미 '여성 임금'이라는 통념을 폐지했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로 임금을 더 적게 받는 것은 법적으로 정당했다. 고용주들은 여성 임금을 후려치는 조항이 폐지된 것에 손쉬운 노동과 고된 노동을 구분하는 여러 단계를 만드는 식으로 응수했다.

(...)

이들은 여성과 남성의 평등을 요구하는 최저 임금법을 우회하고자 온갖 종류의 수당을 만들고 필요 숙련도를 설정하는 등 고용과 관련된 변별적인 범주와 단계를 고안하기 시작했다.(54p)

 

 

여러 연구는 이 해방의 기계들과 여성의 노동 시장 참여 증가를 연결 짓는다. 몇몇 연구는 심지어 해방의 기계들이 베이비 붐을 촉발했다고 보기도 한다. 여성의 시간이 해방되면서 이들이 더 많이 일할 뿐 아니라 더 많은 자녀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최근 연구들은 이러한 상관관계가 오류일 가능성을 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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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최근에 내 동료 세라 워커와 고탐 보즈, 테런 제인은 여성 노동과 가전제품 채택 사이의 인과성이 실은 반대로 향한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연구에 따르면 여성의 노동과 소득 덕분에 이런 기계를 살 수 있었지 그 역이 아니다. 가전제품이 늘린 시간상 이득도 생각만큼 놀랍지 않았다. 기계 사용은 여성을 해방했다기보다는 가사 노동을 둘러싼 상황과 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기준을 바꿔 놓았다. 청결한 의복과 신선한 음식을 향한 사회적 기대치가 커지면서 기계가 여성에게 주었을 혜택의 상당 부분이 제거되었다.(56-58p)

 

 

미국 미시간 대학 법학 전공 학위가 있는 여성 변호사와 남성 변호사는 동일한 임금 수준에서 시작해 곧 자녀를 가질 나이가 된다. 여성 변호사는 장기 프로젝트를 거절하고 미국에서 특히 더 짧은 육아 휴직을 써 탁아소에서나 유모에게서 자녀를 데려온다. 이 모든 상황 때문에 야근을 할 수 없다. 여성은 자녀를 돌보려 일정 기간 일을 쉬고 또 파트타임으로 일한다. 자녀가 있는 여성의 42%가 그러한 반면 동일 표본에서 남성은 어떨까? 고작 0.68%가 그렇다. 또한 이들은 변호사로서의 삶과 엄마로서의 삶을 양립할 수 있는 환경을 지닌 팀에 합류하려 회사를 옮긴다. 이렇게 15년이 지나면 같은 시기 경력을 시작한 남성 동료보다 50% 더 적은 돈을 벌게 된다. 여성은 더욱이 경력을 유지하는 데 드는 개인적 비용이 더 크다. 이 연구에서 여성 중 70%가 결혼하고 남성 중 85%가 결혼한 것처럼 여성은 남성보다 덜 결혼하고, 자녀가 더 적고, 자녀가 없을 확률이 남성의 두 배다. 여성은 자녀가 평균 1.31명, 남성은 1.86명이었고 여성의 36%가 자녀가 없는 데 반해 남성은 19%가 그러했다. 자녀가 없는 여성 변호사의 보수 수준은 남성 변호사의 일반적인 보수 수준과 일치했다. 자녀는 여성에게만 경력상 비용으로 작용한다.

이렇듯 1980년대에 여성은 직업 영역에서 진보했지만 보수가 가장 좋은 직업에서는 꾸준히 배제되었다. 최소한 엄마인 여성은 그랬다.

(...)

여성의 진보는 항상 자녀의 유무와 연결되어 있다. 아이가 있는 노동자에게 경력 단절, 일정이 유연한 일터 찾기, 노동 시간 단축, 파트타임 노동은 불가피하다. 불행히도 이 모든 책임은 불균등한 방식으로 엄마에게 전가된다. 앞서 살핀 변호사 표본에서 엄마가 파트타임으로 일할 가능성은 아빠보다 62배 더 높았다.(63-64p)

 

 

그렇다면 오늘날 여성-남성 불평등 설명에서 '전통적인' 요인이 차지하는 몫은 매우 적다고 볼 수 있다.

(...)

여성과 남성은 서로 다른 영역에 고용되었고 지금도 변함 없이 그렇다. 경제 영역의 상당수는 초등 교육처럼 여성화되었다. 여성은 법관, 의사, 고등 교육자, 연구자가 되었고 정치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다음 두 요인이 여남 소득 평등화에 제동을 걸었다. 첫째, 여성은 특정 영역에서 다수 혹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지만 여전히 위계질서상 유리 천장 아래 직급을 차지하고 있다. 의회에는 입성했지만 대통령 집무실까지 진입하지는 못한 것이다.

(...)

유리 천장은 거의 완전히 여성화된 직업군에조차 존재한다. 학교 교사의 82%가 여성임에도 교육 감독관에서 그 비율은 20.5%에 불과하다.

둘째, 여남 소득 격차는 여성화된 직능이 종종 본래 갖고 있던 명예와 보상을 상실하면서 유지되었다. 지난 몇십 년간 언론인 직군에서 일어난 변화가 대표적이다.(79-80p)

 

 

2013년 출간된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 셰릴 샌드버그의 저서 「린 인」에서 그는 여성이 책임을 지는 직책을 맡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하며 성공과 야망을 여성적 자질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지적했다. 내가 보기에 그 추론은 심각하게 제한적이고 근본적인 오류가 있다. 특히 「99%를 위한 페미니즘」의 저자들은 이 같은 주장이 여성이 가장 큰 책임을 지는 직책을 맡으면 여성-남성 불평등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경제 체제에서 낮은 임금을 받을 수밖에 없는 99%의 다른 여성의 존재를 무시할뿐더러 데이터에 의해 완전히 반박된다. 일반적으로 직업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서는 여성은 임금 사다리의 아래에 있는 여성에게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거나 그들을 위한 행동을 전혀 하지 않는다.

(...)

그의 생각은 부당하거니와 순진할 따름인데, 여성적 또는 남성적이라 간주되는 특성은 부분적으로 사회적 구성물로부터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항상 결정된 방식으로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회적 구성물은 굳어진 것이 아니다.(82p)

 

 

또 허위 이력서에 기반한 연구는 여성에 대한 체계적 차별을 보이지 않지만 엄마에 대한 차별이 있다는 점은 분명히 드러낸다. 다른 어떤 실험은 고용주들에게 모든 점에서 비교 가능하며 부모인지 아닌지 여부가 포함된 여남 지원자의 허위 이력서를 보냈다. 그 결과 여성이 엄마인 것은 고용 전망뿐 아니라 임금 측면에서도 상당한 불이익을 주었고, 그와 달리 남성이 아빠인 것은 이득이었다! 엄마들은 이력이 같음에도 덜 유능하고 업무에 덜 헌신적이라 인식되었으며 더 낮은 임금을 제안받았다. 반면 업무에 더 헌신적이라 판단된 아빠들은 더 높은 임금을 제안받았다. 아빠는 영웅으로 인식된 것이다.

나 또한 임신했을 때 학생들로부터 완전히 바닥인 강의 평가를 받은 적이 있다. 나 자신은 처음이 아닌 그 강의의 질이 특별히 나빴다고 인지하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반면 육아 휴직을 치고 복귀했을 때는 밤에 잘 잠들지 못하는 딸을 돌보느라 완전히 녹초가 된 상태로 저녁 수업을 해야 했지만 평가는 평소 거의 다름없이 좋았다. 이러한 차이는 임신해 불룩해진 배가 생산한 효과다.(90p)

 

 

앞으로 사회적 규범과 그 규범에 따른 유형화, 가정 및 교육 환경이 이 문제에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강하고 용감하고 경쟁적인 남자아이, 수줍고 얌전한 여자아이라는 구분은 클리셰에 불과하다. 이는 결국 스테레오 타입을 만드는 유형화이며, 고정관념이 만든 예언이 실현되게끔 한다. 여자아이는 부드럽고 수줍음이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녀를 경쟁적인 환경에 밀어 넣지 않는다. 이들은 소녀를 가여워하고 그들의 아픔을 달래 주지만 남자아이에게는 울지 말고 일어나라고 말한다.

(...)

학력이 같을 때 임금이나 전일제 일자리에 대한 접근권에서 나타나는 불평등 등을 보면 말이다. 우리는 이런 측면을 설명하고자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일자리가 더 많고 보상이 더 큰 이공계에 진학하는 경향이 더 짙다는 점을 관찰했다. 남학생들은 프랑스의 HEC나 미국과 중국의 엘리트 대학 입시처럼 빛나는 커리어를 약속하며 학생을 선발하는 시험에서 더 성공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시험의 본성은 여학생에게 불이익을 주며 고소득층에서 여남 불평등을 재생산한다.(104-105p)

 

 

자녀 출산과 관련한 소득 불이익은 엄마의 역할과 노동에 관한 사회적 규범 및 기대에 따라 각 국가에서 달라진다. 더욱이 한 국가에서도 이 불이익은 여성이 가정을 지탱해야 하고 자녀가 태어나면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도식에 가족들이 순응하는 정도에 따라 달라지며, 이러한 가족 내에서 세대를 거쳐 전승된다.(114p)

 

 

애초에 여성이 다수였지만 기술 발달로 보수 수준이 높아지면서 남성적으로 변한 영역도 있다. 사람들은 정보공학이 바로 그런 사례라는 것을 잘 모른다. 오늘날 남성 지배적인 직업의 본보기인 정보공학은 원래 여성이 많은 직군이었다. 1940년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개발한 초창기 컴퓨터 중 한 대는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팀이 만들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이 활용한 에니그마 암호를 해독해 낸 연합군 통신 센터 블레츨리 파크의 직원 1만 명 중 3분의 2는 여성이었다. 1967년 《코즈모폴리턴》에 실린 기사 「컴퓨터 소녀들」은 정보공학이 전형적으로 여성적인 자질을 요구한다고 설명했다. 프로그래밍과 코딩은 정확히 다음과 같은 일로 묘사되었다. "저녁 식사 준비하기 : 미리 생각하고, 무언가가 필요할 때 쓸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계획해두어야 한다. 인내심을 갖고 세부 사항에 주의해야 한다. 프로그래밍은 여성에게 본성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심지어 여성은 이 직군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다. 자료 처리와 관리 분야 최초의 직능 단체가 1969년 처음으로 수여한 '올해의 남성'(!)상을 받은 사람은 여성인 그레이스 호퍼였다.

1940년대에 여성은 최초의 컴퓨터를 프로그래밍할 수 있었고 사람들은 이를 쉬운 일로 여겼다. 노동, 그러니까 컴퓨터를 만드는 '진짜' 노동은 남성의 일이었다. 하지만 프로그래밍과 코딩이 사소한 작업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지고 프로그래밍이 권위를 얻게 되면서, 프로그래밍에 요구되는 자질이 저녁 식사 준비에 필요한 것보다 천재적인 특성에 가깝다고 간주되면서 남성이 이 영역에서 지배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됐고 여성은 사라졌다. 비율로 보자면 오늘날 정보공학을 공부하는 여성은 40년 전보다 더 적다!" 이제 집단적 상상계와 대중문화, 영상에서 컴퓨터 괴짜는 오로지 남성으로 표현된다. 그 결과 이 분야에 요구되는 자질은 전형적으로 남성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이제 정보공학 분야의 천재는 약간의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자신의 감정과 거리를 두고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항상 남자인 논리적 존재로 등장한다. 그는 사회적으로 유복한 환경의 백인이기도 하다.

서로 연결된 두 물병 속 물이 '남성' 직업과 '여성' 직업 사이에서 움직일 때마다 그 직업의 사회적 이미지는 달라진다. 따라서 여성이 특정 직군에 진출하기 시작하면 시소 효과가 관찰된다. 어떤 산업에서 여성 참여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그 산업이 빠르게 여성화하는 것이다. 클로디아 골딘은 남성의 이러한 집단 탈출을 오염으로 인한 분리 이론으로 설명한다. 여성적 자질과 결부된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를 고려하면 어떤 직능의 사회적 이미지는 여성이란 존재 때문에 손상되고 오염된다.

요약하자면 여성이 어떤 직능을 수행할 수 있으면 이는 그 일이 어렵지 않고 높은 신체적·지적 자질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에 프로그래밍은 저녁 식사를 계획하는 것 정도의 숙련이 필요한 쉬운 일로 취급되었으나 이제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천재로 불린다. 초등학교 교사는 존경받고 보수가 좋은 엘리트 직종이었지만 지금은 존경도 못 받고 보수도 적다. 만약 어떤 직능이 여성이 할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고 많은 자질을 요구하지 않는다면 그런 일을 왜 굳이 존중하겠는가?

여성이 어떤 직능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이 일의 사회적 이미지는 변한다. 이러한 변화로 이 직능에 속한 남성이 품는 자기 이미지가 손상될 수도 있다. 같은 남자들 사이에서 남자는 남성의 일을 하는 쪽이 편할 것이다. 모두 각자에게 어울리는 자리가 있는 법이니까. 그런 이유로 이들은 여성의 일을 맡길 거부한다. 이 해석은 성차별적인 사회일수록 여성화하는 직종에서 남성의 이탈이 더 빨리, 아마 여성이 맨 처음 진입하는 때부터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보고 있는 현상이다.

자신이 속한 직군에서 자기 이미지와 관련된 이득을 보는 여성에게도 똑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여자들이 더 여성적인 직군에서 여성을 채용하길 선호한다는 점을 관찰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한 번 더 짚자면 이는 정확히 앞서 살펴본 채용에 관한 성차별 데이터와 그러한 차별의 동역학이 보여 주는 바다.(119-121p)

 

 

사람들은 자기 어필을 열심히 하고 나흘에 한 번씩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경쟁적이고 야심 있는 여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런 여성은 '섹시'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경쟁적이고 야심 있고 잘 뽐내는 남성은 가치를 인정받고 섹시하다고까지 생각하는 것과 달리 말이다.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진행한 스피드 데이트 실험은 이 점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남성은 자기보다 더 야심차거나 똑똑한 여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들은 이런 상대의 연락처를 묻지 않는다. 또 일터에서 협상을 하는 여성은 남성보다 체계적으로 좋지 않은 평가를 받게 된다.

여성들은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친애하는 셰릴 샌드버그 여사님, 여자들은 미치지 않아서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반드시 경쟁심이나 야심이 덜한 것이 아니다. 여성은 야망을 드러내면, 자기 자신을 뽐내면, 경쟁에서 이기면 남들에게 안 좋은 시선을 받고 부정적인 결과를 겪게 되리라는 점을 정확히 알고 있을 뿐이다. 여러 영역에서 나타날 부정적 결과들을 말이다.(141-142p)

 

 

'진보'는 농업의 등장과 정주화, 더 나아가 농업의 기술적 집약화와 쟁기 발명으로 여성을 급격히 퇴보시켰다. 여성은 가정에 유폐되었고 자율성과 경제적 독립을 잃었다. 생산의 성별 전문화는 수렵과 채집에서보다 농업에서 훨씬 두드러지며, 이러한 경향은 쟁기와 같은 기술이 남성 노동 생산량을 특권화하거나 증가시키면서 더 강해진다. 이에 따라 남성은 밭에서의 노동을, 여성은 가사와 자녀 돌봄을 할당받는다.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농업 도입을 인류가 저지른 '최악의 실수'로 꼽는다. 농업은 경제적 부정의, 정치적 계층화와 전제 정치, 전염병 그리고 여성과 남성 사이 불평등의 악화를 의미했다.

(...)

농업의 집약화 이전에 잉여를 생산하고 비축하지 못한 무능력은 그 사회의 평등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음식 생산에서 여성의 지배적 역할은 이들에게 사회적 지위는 물론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해 주었다. 하지만 축적과 함께 불평등이 나타났다. 더욱이 농업의 집약화와 노동 생산성 증가는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게 했고 노동력에 대한 수요를 키웠는데, 노동력은 여성만 만들 수 있다. 이 때문에 여성은 노동력을 생산하는 역할로 길들여지고 강등되었으며 심지어 이런 역할에 전문화되기도 했다. 남성은 재산을 생산하고 소유하며, 여성은 자녀를 재생산한다. 농업의 발명이 인류의 비극적인 실수라면 여성에게는 훨씬 심각한 잘못이었다.

또 이 현상은 수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매우 긴 시간에 걸쳐 우리의 습관이 형성되었고, 이를 통해 문화가 만들어졌다. 우리는 오늘날까지 그 결과를 경험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농업에 기초하지 않은 산업 사회에서조차 말이다.(168-169p)

 

 

 

ㅡ 폴린 그로장, <가부장 자본주의>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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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1

 

 

초반부 읽으면서 제목이랑 내용이 너무 안 어울려서 원제를 찾아보니 uncivilised. 그렇다면 책 내용이 이렇게 전개되는 게 이해가 간다. 다만 지금까지 서양 문명이 사람들에게 전달했던 것 중 많은 부분이 거짓이며, 사실은 이런거라고 호들갑을 떨려면 뭔가 대단한 주장을 해야 할 거 아닌가. 프로이트 보고 심리학의 아버지라고 하질 않나, 심리학계에서 중요하게 언급되지도 않는 매슬로 욕구위계설이 대단한 뭔가고 그것에 너희들이 모르는 비밀이 있다고 얘기하는 걸 읽으며 짜게 식는다. 아는 얘기만 하든지 아니면 적어도 본인이 알고 있는 사실을 과장하지 말고 담백하게 적어 보는 건 어떨지? 근래에 읽은 책 중에 눈에 띄게 별로다.

 

 

 

 

합리적 사고, 인류의 진보, 법 앞의 자유와 평등. 사랑하지 않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이런 전제들(전제인 동시에 약속이다)은 우리 사회의 핵심이요, 우리를 제자리에 묶어두고 붙들어두는 맹세이자, 우리를 통치하는 법이다. 그렇지만 잠시 생각을 해보자. 이 신념들이 사실인지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런 내용을 우리에게 가르쳐준 이는 누구일까? 이런 얘기는 진짜일까? 믿을 수 있는지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문명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생각들이 사실은 거짓말이라면, 이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왜 이런 질문을 던지는지를 이해하려면, 이런 이상 너머에서 서양 문명을 유지시키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해야 한다. 실마리는 '서양'이라는 말 속에, 그리고 서양과 비서양이 구분은 단 한 번도 순수하게 지리적인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 속에 있다. 유럽의 작은 왕국에서, 북아메리카의 탁 트인 평원을 거쳐, 오스트레일리아를 지나, 전 세계 소수 민족 거주지까지, 서양 문명의 심장부 곳곳을 살펴본다면, 이 모두가 지닌 단 하나의 공통점은 자명하다. 서양이란 바로 백인이 있는 곳이다.

서양 문명이 의미를 띠게 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서양 문명과 연관 짓는 관행과 가치들(몇 가지만 언급해보자면, 민주주의, 정의, 과학의 합리성 등이다)은 점점 커져가는 유럽 제국의 야망과 권력에 발맞춰 나타났다. 어디가, 또 무엇이 문명화되었는가를 결정한 것은 바로 식민지 통치자들이었으며, 이들은 자신들만의 프레임 속에서 문명을 규정했다. 그리하여 유럽 바깥에, 그러니까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있는 정착형 식민지, 사실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서구인 이곳들은 현재 서양의 문명 세계를 이루는 곳들이라 여겨지고 있다.

(...)

서양이 자칭 우세를 점하게 되면서, 세계의 나머지 지역들은 지적으로 뒤처진 곳으로 강등되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문명이라는 커다란 '거짓말'이었다.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후진적인 생각을 품고 있는 후진적인 사람들이며, 인류와 인류의 진보에 제대로 공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거짓말'이었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 비서구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비서구적이라 여겨지고 따라서 비문명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줄곧 여기 존재해왔다.(14-15p)

 

 

무엇이 문명화된 것이고 무엇이 미개한 것인지를 나누고 규정하는 프레임은 권력 게임의 승자가 결정한다.

(...)

문명화된 서구와 비문명적인 '타자'사이에 그어진 선은 우리가 어떻게 그리겠다고 결정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보는지,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보는지를 얘기한다. 또, 이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아주 특수한 시각에서 제외된 사람들에 관한 책이며, 그렇게 제외되었던 사람들을 다시 포함한다면 세상이 어떻게 보일지를 담은 책이다.(18p)

 

 

1735년, '분류학의 아버지'라 알려진 스웨덴의 생물학자 칼 린나이우스(칼 린네)는 중요한 저작인 「자연의 체계」를 발표한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을 'Anthropomorpha'(인간 형상)라는 용어로 묶어 분류했으며, 인간을 다시 네 집단으로 나눴다. 바로 유럽인, 아메리카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이었다. 린나이우스의 분류는 외양을 문화와 행동과 연관지었다. 예를 들어, 유럽인은 "예민하고, 창의적이고, 법에 따라 행동한다"라고 설명했다. 반면 아프리카인은 "교활하고, 나태하고, 느긋하며, 변덕스럽게 행동한다"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백인 우월주의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유럽 사상의 선구적인 지성이라고 일컬어지던 사람의 책이 백인 우월주의를 지지했던 것이다.

애석하게도 칼 린나이우스 한 사람만의 일은 아니었다.(35p)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누가 썼는가라는 흥미로운 사안을 제기할 수 있었던 까닭은, 어느 정도는 그가 문서 기록에는 비교적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가능했다. 이렇게 남은 공백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으로 채워질 수가 있었다. 스스로의 글을 발표할 수 있는 사람들의 생각도 포함해서 말이다. 이런 점은 글이 지닌 힘과 생각의 본성에 관해 무언가를 알려준다. 살아남는 생각, 전해지는 이야기,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그렇게 되지 못하는 것들에 관해서 말이다. 현실에서는 글은 글 자체만을 들려주는 것이 아니다.(98-99p)

 

 

블레어는 자신이 바라본 언어와 문화의 진보를 바탕으로 역사의 발전을 세 가지 단계로 나누었다. 원시, 고대, 그리고 현대였다. 블레어의 정의에 따르면, 원시적인 사람들은 문자가 없고 구어와 몸짓 언어에만 의존했다. 이 몸짓 언어는 북아메리카 일부 토착민들이 사용하던 수어부터 지중해 문화권에서 사용하는 폭넓은 제스처까지 광범위했다(이탈리아 사람들은 손으로 말한다는 스테레오타입은 여기까지 거슬러가는 것 같다). 블레어는 언어를 도덕성과 인지 능력과 결부시켰다. 이에 따라 중국인, 이집트인, 히브리인, 그리스인, 로마인 같은 고대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두 번째 단계에서는 문자가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이는 블레어가 명시적으로 밝힌 지도 지침이라기보다는, 별다른 의문 없이 받아들여지는 암묵적인 논리에 가깝다. 자신만의 가정으로 뒷받침하는 주장인 것이다. 블레어는 세 번째 단계에 이르렀다. 현대인, 그러니까 별로 놀라울 것도 없겠지만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현대 유럽인들은 구어와 문자 모두를 발전시켰다. 그는 현대 유럽인들이 인간의 발전의 정점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언어가 역사상 가장 복잡하고 질서가 뚜렷하기 때문이라며 말이다.(104-105p)

 

진짜 지 마음대로 생각하는구나. 오만함이 하늘을 찌른다...

 

 

이러한 명백한 모순은 오랫동안 '잉카 패러독스'라고 불렸다. 잉카가 그 어떤 것들을 기록하는 체계 없이도 건축, 공학 기술, 관료제와 같이 복잡한 필수 조건들을 모두 거느리고 문명을 건설했다는, 이해하기 힘든 인류학적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사실이라기에는 너무 이상한 소리처럼 들린다면, 그 이유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잉카에는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서 알고 있는 문자, 그러니까 종이에 쓰인 흔적은 없었지만, 매듭을 지은 실을 사용하는 '키푸'라는 고유한 기록 시스템이 있었따. 비교적 최근까지도, 그러니까 누군가 굳이 키푸에 관해 생각 해보기 전까지는, 키푸는 일반적으로 수르르 세거나 계산할 때 쓰는 기초적인 시스템이라 여겨졌다. 메소포타미아의 초기 설형 문자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최근 10년 동안 이뤄진 연구들은 잉카의 키푸가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전 세계 여느 문자만큼이나 복합적인 기록 시스템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

재료, 색깔, 가닥의 방향, 매듭의 방향이 이루는 수없이 많은 조합 방법이 서로 다른 소리와 모든 단어를 가리킨다는 것이었다. 2차원이 아니라 3차원으로 읽는, 표음문자와 그림문자가 혼합된 알파벳이었다.

(...)

연구자들이 큰 도약을 일궈내며 키푸를 해독하는 점은 훌륭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초에 왜 우리가 키푸를 간과했는지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학자들은 무언가 발견할 것이 있으리라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은 채로 키푸를 쳐다보기만 했다. 자신만의 이미지 속에서 문명을 일굴 때면, 다른 문화에 있는 흥미롭고 가치 있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심각하게 희생되는 것 같다.(111-115p)

 

 

 

 

ㅡ 수바드라 다스,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 中, 북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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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21

 

 

나폴레옹이 패배하자 프랑스인들은 그를 폐위시켰다. 그리고 나폴레옹에게 엘바라는 작은 섬을 영지로 주고는 그곳에서 조용히 지내길 바랐다. 하지만 그를 격퇴한 유럽의 제후와 황제들은 1814년 빈에서 회의를 열고 유럽을 다시 분할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의 판단에 따르면, 계몽주의 기본 원칙, 이른바 인간의 자유라는 이념이야말로 수차례의 혁명과 나폴레옹의 등장을 낳은 것이고 이런 사건들로 인해 온갖 무질서와 희생이 초래된 것이었다. 이들은 모든 혁명을 완전히 무효로 만들고 싶었다. 특히 메테르니히는 모든 것을 혁명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고 다시는 혁명이 일어날 수 없게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정부나 황제의 허락을 받지 않은 인쇄물이나 저작물을 금하는 정책을 주도적으로 펼쳤다.

프랑스에서는 혁명의 불씨가 완전히 꺼져 버렸다. 단두대에서 처형된 루이 16세의 동생이 루이 18세로 즉위했다. 이 새로운 루이왕은 26년에 걸친 혁명과 황제 시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 불행한 죽음을 맞은 형과 다름없이 사치스럽고 몰지각한 궁정 생활을 했다.(353-354p)

 

 

 

 

ㅡ 에른스트 H. 곰브리치, <곰브리치 세계사> 中, 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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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18

 

 

친구 둘의 우정이 아닌 셋의 관계는 여러모로 복잡하다. 그 미묘한 감정의 역학관계를 섬세하게 묘사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사실 좀 간지러웠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단편이나 중편 분량으로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굳이 늘리고 늘렸다고 느낌.

 

 

아주 옛날부터 나는 내게 친구가 딱 두 명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운데서 단단히 팔짱을 끼고 싶었다. 그건 생각보다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남들은 몰라도, 친구들에게 너무 쩔쩔매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친구 되기'가 가장 어려웠다. 같은 일을 하는 동료가 아니어도 선배에게 나는 친구일까? 함께 사진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해든에게 나는 친구일까? 나는 그런 것이 궁금했다.

아름다운 삼각형을 원하는 건 나만의 꿈일까. 언제나 삼각형을 상상하며 살아온 것 같았다. 둘은 너무 적고 넷은 너무 많으니까. 나에게 둘이 의미하는 것은 애인이었고 넷이 의미하는 것은 가족이었다. 셋은 친구였다. 나는 둘이나 넷보다 언제나 셋만을 바라왔다.(23p)

 

 

내가 스스로 낸 상처들을 발견할 때마다 엄마는 울기 직전의 얼굴이 되고 가끔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었다. 엄마가 지닌 슬픔의 녹는점 중 하나가 나였던 것이다. 왜 그래 민아야····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와 말투는 또다시 내 슬픔의 녹는점이 되고. 엄마가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를 때의 목소리, 빈정거리고 짜증낼 때의 목소리를 싫어했으나 가장 싫은 것은 슬픔을 녹인 것 같은 목소리를 낼 때였다. 떼어낸 마음이 금방 다시 돌아가 붙어버리니까. 엄마를 싫어하려고 애썼는데 도저히 그게 되지 않게 만드니까.

(...)

아무래도 슬픔은 고체다. 내가 제일 많이 떠올리는 형태는 어릴 적 봤던 바이올린 활에 바르는 송진덩어리다. 슬픔은 마음 한구석에 송진 같은 고체 형태로 존재하다가 어떤 녹는점에서 녹아 흐른다. 액체가 되어 온몸으로 퍼지기도 하고 자칫하면 눈물이 되어 쏟아지기도 한다. 슬픔의 녹는점은 누군가의 한마디나 체온, 혹은 해질녘의 버스 정류장이나 혼자 멍하니 보내는 주말의 긴긴 낮일 수도 있다.(65-67p)

 

 

나는 민아 언니의 수업에 성실하게 참여했다. 사람은 신기하게 한쪽에 성실해지면 다른 한쪽에도 성실해지기 쉬운지, 작은 인형을 붙들고 고민하는 동안 다시 카메라를 드는 일도 잦아졌다.(109p)

 

 

무엇보다 그들은, 셋이어서 좋았다. 길이 좁아서 가끔 삼각형으로 걸어야 할 때, 뒤처진 자리에 있어도 불안하지 않았고 의도했는지 의도하지 않았는지 번갈아 뒤처졌다. 뒤처진 사람은 앞선 두 사람의 등을 보고 먼저 남겨진 발자국을 보며 기쁘게, 딴생각 없이 걸었다. 세 사람 모두 우리가 셋이라는 사실을 더없이 잘 알고 있어서, 가끔 둘이고 자주 둘이고 영원히 혼자이지만 우리는 셋이라는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관계가 된 게 좋았다. 언제나 곁눈질을 하던 관계에서 드디어 셋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순간이 온 것이 좋았고 셋이서 오지 않았다면 의미가 없었음을 알고 있는 상태가 좋았다.(172p)

 

 

그들이 이루는 삼각형은 각자가 선 자리에 따라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두 점이 유독 가깝고 한 점이 비교적 멀 때는 그 모양이 변했으나, 삼각형은 삼각형이었다. 아닌 적은 없었다.(200p)

 

 

 

ㅡ 김화진, <동경>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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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17

 

 

도입부에 편의상 제법 복잡한 가계도를 첨부해두었으나 읽으면서 이름이 헷갈려서 뒤적여 본 적은 없다. 소설 속에서 각 인물을 묘사하고 사건을 진행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등장인물을 독자에게 각인시키고 구별시키는 것을 보며 이런 게 솜씨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스킬과는 별개로 이야기 자체가 재밌는지는 모르겠다.

 

 

 

부잣집 딸아이들을 위한 그 여학교들은 복종과 비겁함이 강제되는 곳이었고, 완전히 무지한 여자는 면하되 질문을 해 댈 정도로 똑똑하지는 않을 만큼 가르치는 것이 그 학교들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문화적인 광택을 입히는 것이 결혼 시장에서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집단의 선을 위해 개인의 의지를 굴복시키고, 훌륭한 가톨릭인이자 헌신적인 어머니, 순종적인 아내를 만든다는 목표를 의미했다. 수녀들은 먼저 허영과 다른 죄업들의 원천적인 우리의 육체를 통제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웃거나 뛰어다니거나 실외에서 노는 건 허락되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목욕할 때도 사방에 임하시는 하느님 눈에 우리의 치부가 드러나지 않도록 기다란 속옷을 입어야 했다.

(...)

우리는 하느님과 사탄과 어른들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우리의 손가락을 내리치는 손들과 벌 받을 때 꿇어앉는 자갈밭을 무서워하게 되었고, 스스로의 생각과 욕구들에 대해서도 겁을 내게 되었다. 우리가 자만심을 키우게 될까 봐 칭찬의 말을 하는 일은 결코 없었지만, 고집을 꺾기 위해 벌주는 일은 넘치고도 남았다. 그 두터운 벽 안에서 우리는 모두 똑같이 머리 밑에 피가 날 정도로 팽팽히 머리를 땋아야 했고, 뼛속까지 얼어붙을 듯한 추위로 인해 손에 동상이 걸리기도 했다. 방학이 되어 집에 돌아와 공주처럼 귀여움 받는 생활과는 너무 대조적이어서 제아무리 사려 깊은 아이도 미치고 말 정도였다.(206-207p)

 

 

혁명군은 몇 달 전에는 정부군을 환호했던 바로 그 시민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수도로 진격했다. 몇 시간 만에 산티아고 시민들은 팔에 붉은 띠를 두르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

파면당한 발마세다 대통령은 아르헨티나 공관의 한 방에서 거리의 시끄러운 소요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정치적인 내용의 유서를 작성한 후 가족들이 죗값을 치를 것을 두려워하며 이마에 권총을 쏘고 말았다.

(...)

한 발의 총탄으로 당장에 순교자가 되었고 그 후 몇 년간 자유와 민주의 상징이 되어, 가장 비웃었던 적들조차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할머니 말씀대로 칠레는 기억력이 나쁜 나라인 것이다.(254-255p)

 

 

처음 시작은 이반 라도빅에게 보여 주었던 가족사진이었다. 후안 리베로 선생님의 말처럼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습성 때문에 얼핏 봐서는 분명하지 않았던 것이 인화지 위에 흑백으로 나타나 있었다. 틀림없는 몸의 언어들, 동작, 시선 등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367p)

 

 

 

 

ㅡ 이사벨 아옌데, <세피아빛 초상>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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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16

 

 

일단 이까지 정리

 

 

채굴 과정은 19세기 채굴업자들의 기술을 그대로 답습한 방식으로 간단한 편이었다. 단지 그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는 점만 달랐다. 땅속의 암반층을 폭파하여 작은 바위로 쪼개고, 갈아서 고운 가루로 만든 다음, 시안화물 용액과 혼합해 금을 추출했다.

이것이 21세기에 천연자원을 개발하는 현장의 현실이었다. 그러니까 엄청난 양의 암석을 작게 쪼개 화학적으로 가공하는 것이다. 그것은 경탄을 자아냈지만, 동시에 심란한 장면이기도 했다. 추출 과정에서 사용한 시안화물과 수은이 주변 생태계로 흘러들어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

계산해보니, 골드바 표준 중량인 400트로이온스(약 12.4킬로그램) 하나를 만들려면 5,000톤의 흙을 파내야 했다. 이는 세계 최대 여객기인 A380 10대가 만석일 때의 무게와 비슷하다.

어쩌면 당신은 금이 오늘날 이런 식으로 채굴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연에 금덩어리가 묻혀 있다거나 대자연 속 금맥에서 그대로 채금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혹자는 금이 독성 혼합물을 사용한 화학 작용으로 만들어진다는 것, 단순히 땅속에서 캐내는 것이 아니라 산 전체를 폭파하여 얻어낸다는 사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내가 순진한 편이었을지도 모르겠다.(12-13p)

 

 

연필에 쓰이는 나무는 미국 서부에서 자라는 삼나무이다. 용광로에서 만든 강철로 삼나무를 베고 작업장에서 마무리한다. 그러고는 다시 잘라서 작은 조각으로 만들어 건조하고, 염색한 뒤 또 말린다. 작은 조각에 홈을 낸 뒤 서로 이어 붙여서 고정한다. 연필의 핵심인 연필심은 스리랑카에서 채광한 흑연에 미시시피주의 흙, 동물성 지방과 황산으로 만든 화합물을 섞어서 만든다. 피마자 씨앗에서 추출한 피마자 유로 만든 액체로 연필의 나무와 심을 코팅하고, 수지를 써서 라벨을 붙인다. 연필 끝에는 지구 반대편에서 채광한 구리와 아연으로 만든 놋쇠를 붙인다. 지우개는 인도네시아의 유채씨유, 그리고 염화황부터 황화카드뮴에 이르는 수많은 화학물을 사용하여 만든다.

연필처럼 매우 간단한 물건을 하나 만드는 데도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 각각의 부품을 만드는 제조업자들로부터 제조 공정에 에너지를 제공하는 발전소 근무자들까지 "수백만 명의 사람이 나(연필)의 탄생에 참여하지만,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극히 일부밖에 알지 못한다"라고 리드는 썼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 번째, 일상용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하여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이토록 복잡한 제조 과정을 단 한 사람이 맡거나, 더 나아가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냉전이 한창이던 시대에 집필된 <나, 연필>은 특히 두 번째 교훈을 강조한다. 자유시장경제를 옹호하는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은 이 에세이를 예로 들면서 소련 경제학자들이 주장, 즉 중앙위원회에서 경제 전체를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잘못됐다고 반격했다.(20-21p)

 

 

여기에 매우 중요한 아이러니가 있다. 단기적·중기적으로 환경 보호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화석연료를 대체할 전기차, 풍력발전 터빈, 태양광 패널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상당히 많은 물질에 의존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결론이 나온다. 앞으로 수십 년간 이전보다 지표면에서 더 많은 물질을 추출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기나긴 이야기 중 가장 최근에 일어난 일일 뿐이다. 이런 일은 그 전에도 이미 존재했다. 인류 역사 초창기부터 1950년까지 캐낸 물질의 총량보다 더 많은 물질을 우리는 2019년에 채광, 채굴, 폭파를 통해 얻었다. 단 한 해만에 인류사 대부분의 시기 동안 채굴한 것보다 더 많은 양을 채굴한 셈이다. 광산업 초창기부터 산업혁명, 1~2차 세계대전, 그리고 이후 시간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물질을 말이다. 비단 2019년 한 해에 그친 단발성 사건이 아니었다. 2012년 이래로 거의 해마다 같은 일이 반복됐다. 원자재를 얻으려는 인간의 욕구는 줄어들기는커녕 계속 늘어나서 2019년에는 2.8퍼센트나 상승했고, 광물업 전 분야, 그러니까 모래, 금속, 석유, 석탄 분야에서 단 하나도 감소하지 않고 계속 상승했다.

아마도 당신에게는 낯선 소식일 테다. 만약 이야기를 들어봤더라도 화석연료라는 프리즘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여전히 채굴 중인 탄화수소에 많은 관심이 쏠리는 이유가 있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가 지하에서 엄청난 양의 석탄과 석유를 캐냈다는 사실을 모두 잘 알 것이다. 화석연료 사용을 서서히 줄여나가고 있다는 사실도. 그리고 지하에서 화석연료를 채굴하는 속도를 조금씩 늦추고 있다는 사실도 알 것이다.

그래서 광물에 대한 광범위한 욕구 역시 줄어들고 있는 게 아닐까 짐작하기 쉽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석유를 비롯한 화석연료는 지하에서 채굴하는 천연자원의 전체 양에서 적은 부분만 차지하기 때문이다. 화석연료 1톤을 기준으로 모래, 돌, 금속, 소금, 기타 화학물질 같은 다른 물질들은 6톤을 채굴한다. 비물질 세계의 시민들은 화석연료 소비를 줄이는 대신 다른 물질에 대한 소비를 몇 배나 늘렸던 셈이다. 실상이 이런데도 우리는 그와 정반대의 행동을 하고 있다는 망상에 빠져 있다.(26-27p)

 

 

모래알의 주성분은 실리카이다. 이산화규소나 석영으로 알려져 있다. 더 좋은 표현이 있으면 좋겠지만, 유리는 녹인 모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실리카는 유리의 기본 요소가 된다. 유리는 종류에 따라 실리카 함량이 매우 다른데, 물컵이나 유리창에 들어가는 유리는 통상적으로 약 70퍼센트의 실리카를 포함한다. 흑요석은 65퍼센트, 텍타이트는 80퍼센트이다. 반면에 리비아사막유리의 실리카 함량은 놀랍게도 98퍼센트이다. 리비아사막유리는 자연에서 발생한 유리 중에서 가장 높은 순도를 지니며, 인간이 만들어낸 그 어떤 유리보다 더 순수하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47-48p)

 

 

기후변화가 심해지고 해수면이 상승할수록 장벽 건설이나 홍수 방지에 쓰이는 모래를 구하려는 경쟁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21세기 내내 해수면이 상승하면 물밑으로 가라앉으리라고 과학자들이 예측하는 몰디브는 수도 말레 주위에 거대한 장벽을 세우기 위해 엄청난 양의 모래와 바위를 사용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간척이야말로 기후변화, 해수면 상승, 수자원 고갈에 대비한 최선의 방어책이라고 선언했고, 그리하여 세계 최대 모래 수입국의 자리에 올랐다. 국토는 10년 동안 26제곱킬로미터 이상 늘었다.

(...)

사람들은 모래를 거의 무제한으로 존재하는 흔한 물질로 생각한다. 만약 모든 모래가 똑같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

이에 대해 가장 간단한 답은 어떤 모래가 다른 모래보다 더 유용하다는 것이다. 거대한 모래 바다에는 엄청나게 많은 실리카 결정이 있지만, 로칼린이나 퐁텐블로의 모래 순도에는 미치지 못한다.(87-89p)

 

 

모로코와 사하라 서부 일대의 기다란 해안 지역이 모래를 준설하는 바람에 사라졌다. 여기서 나온 모래는 유럽과 카나리아 제도로 운반되어 관광 명소로 유명한 해변의 모래를 보충하는 데 사용됐다. 유럽의 해변이 실제로는 수입 모래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당신은 크게 놀랄지도 모르겠다. 수천 년에 걸쳐서 자연적으로 조성된 폭풍우 방파제가 모래 준설로 다 깎여 나간 셈이다.(91p)

 

 

모래는 중요한 비즈니스다. 유엔환경계획에 따르면, '모래 위기'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모래를 흔해 빠진 천연자원이 아니라 전략적 광물로 여겨야 한다. 그러니까 리튬 같은 배터리 원료 또는 구리 등과 비슷한 수준의 광물 취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잠시 한 걸음 물러서서 모래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기 전까지는 그저 평범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래가 없다면 건설 환경도 경제 성장도 성립할 수 없다. 모래는 수백만 명의 사람을 결핍과 가난으로부터 구해내어 함께 잘 살도록 돕는 물질이다.(93p)

 

 

중국은 유령 도시와 유령 마천루가 잔뜩인 데다가 콘크리트 생산량이 더는 기하급수적인 증가율을 보이지 않았지만, 사용량을 보면 눈이 휘둥그래진다. 당신이 이 책의 한 페이지를 읽는 동안 중국에서는 손수레 12만 대 분량의 콘크리트가 타설된다. 2018년부터 2020년까지 3년간 중국이 타설한 콘크리트 양은 미국이 콘크리트를 발명하여 지금까지 타설한 양보다 더 많다. 그러니까 조지프 애스피딘이 특허를 낸 포틀랜드시멘트의 발명 이래로 미국에서 후버 댐 건설, 고속도로 완공, 맨해튼 지구 및 기타 중요한 시설물을 짓는 데 사용한 콘크리트 보다 더 많은 양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

부실 시공의 문제는 콘크리트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콘크리트의 또 다른 저주는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탄소를 배출하는 물질 중 하나라는 점이다. 온실가스 배출의 주범으로 항공업과 삼림 파괴가 집중포화를 맞고 있지만, 시멘트 산업은 이 두가지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있다. 시멘트 산업은 전체 탄소 배출량의 무려 7~8퍼센트를 차지한다.

시멘트 산업에서 배출하는 탄소량 중 60퍼센트는 백악이나 석회가 가마에서 시멘트로 바뀌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화학반응이고, 나머지 40퍼센트는 가마를 가열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차지한다.(103-105p)

 

 

 

ㅡ 에드 콘웨이, <물질의 세계> 中, 인플루엔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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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7/16

 

 

이걸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물에 대한 최소한의 설명도 없고, 그저 마지막 반전을 실어 나르기 위해 330페이지를 낭비한다. 얼마 전에 나온 십계도 이런 식일 것 같아서 그냥 패스하기로.

 

 

 

"그거, 우리 가운데 제일 나쁜 사람을 희생시킨다는 거잖아. 그런데 범인을 알아냈다고 치고 만약 그 사람이 스스로 모두를 위해 희생하겠다고 하면, 정말로 제일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글세.“

그렇게 된다면 범인은 나머지 일곱 명의 목숨을 구하는 셈이다. 우리는 아무도 구하지 못하는데.

"반대로 범인이 죽기 싫다는데 억지로 닻감개를 돌리게 하면 우리가 범인을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모두 살인범이 돼버리는 거야.“

"그건, 그렇지.“

우리 일곱 명이서 범인을 죽이는 셈이다. 안 그러면 모두 죽는다고는 하나, 틀림없이 살인이다.

그때 우리 각자가 죽이는 건 7분의 1명, 범인은 이미 두 명을 죽였다. 그러니 범인이 죽는 게 옳다. 어쩐지 묘하다. 이 계산법은 정말로 올바른 걸까?

마이가 힘없이 웃었다.

"궤변이라는 건 나도 알아. 이 사건의 범인은 체포되면 사형당하겠지? 어차피 죽어야 할 범인의 목숨을 이용해 모두를 구하지 않으면, 무고한 사람이 한 명 죽는 셈이잖아.

그래도 절대로 살인범이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닻감개를 돌리겠다고 자원해야 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

(...)

"아, 여기서 말고. 왜, 경찰은 위험한 임무에 독신 경찰관을 투입한다는 이야기 못 들어봤어?“

"아아, 알아.“

알 뿐만 아니라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픽션이라면 가족이 있는 사람을 위해 고독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희생한다. 하나의 이야기를 들을 때 뇌리를 스친 생각이다.

"슬퍼하는 사람이 적은 편이 좋다는 거겠지. 하지만 그래서야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보다 살 가치가 없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야.“

마이는 씁쓸한 듯이 말했다.

"영화에도 나오잖아. 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이 자기는 연인이 있다든가 가족이 있다면서 목숨을 구걸하는 장면. 그거, 가족이나 연인이 없으면 죽어도 된다는 소리잖아. 이 세상 사람 모두에게 인권이 있다지만, 개중에서 희생자를 뽑는다면 제일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뽑히겠지?

그건 데스 게임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지혜나 체력이 모자란 사람이 탈락하는 데스 게임이 있잖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죽어야 하는 건, 그것과 마찬가지로 잔혹한 일 아닐까.(228-230p)

 

 

 

ㅡ 유키 하루오, <방주> 中, 블루홀식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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