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7/3

 

 

기술이 뛰어난 테우트여, 기술에 속하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것들이 사용하려는 사람들에게 끼치는 손해와 이익을 판단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따로 있는 법이오. 이제, 그대는 문자의 아버지로서 그것들에 대해 선의를 품고 있기에 그것들이 할 수 있는 것과 정반대되는 것을 말했소.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을 배운 사람들로 하여금 기억에 무관심하게 해서 그들의 영혼 속에 망각을 낳을 것이니, 그들은 글쓰기에 대한 믿음 탓에 바깥에서 오는 낯선 흔적들에 의존할 뿐 안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힘을 빌려 상기하지 않기 때문이오. 그러니 당신이 발명한 것은 기억의 묘약이 아니라 상기의 묘약이지요. 그대가 그대의 제자들에게 주는 것은 지혜의 겉모양이지 진상이 아니라오.(52p)

 

 

자기 연민은 자기 연민을 재생한다. 자기혐오는 자기 연민의 다른 얼굴로 자신을 혐오한다는 점 때문에 자신을 연민한다. 문학은 이 두 감정을 끊임없이 오가며 독자에게 공감, 위안 등의 수사로 설명되는 감정의 상태를 부여한다. 문학은 자기 연민을 강화하는 존재들의 상호 위안, 인간성의 연대로 구성되며 자기 연민의 바깥은 문학의 바깥이다. 다시 말해 문학은 자기 연민의 공동체다.(111p)

 

 

 

ㅡ 정지돈,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中, 워크룸 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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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21

 

 

아내의 프로그램은 ‘오랫동안 잘 알던 사람들과 있을 때 인간은 안정감을 누린다’는 것이다. 반면 나는 그렇게 만나는 친구가 한 명도 없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늘 마음의 준비를 했다. 지금은 좋아. 하지만 곧 헤어지고, 그럼 다시는 못 만날 거야. 나는 서른 살이 되던 해에 결혼을 했는데 같이 학교를 다녔던 동창생 누구에게도 청첩장을 보내지 않았고, 그래서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62p)

 

 

 

ㅡ 김영하, <여행의 이유>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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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7/1

 

 

신형철의 추천사는 과장이 심했다고 본다. 저자의 시는 안 읽어봐서 모르겠으나 이 산문집은 평범했다.

 

 

 

당신이 장소를 소유하지만, 잠과 TV 시청을 뺀 모든 활동을 ‘아웃소싱’한다면, 그곳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당신이 장소를 소유하지 않지만, 거기 거주하며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대화와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비록 이런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 테지만.(28-29p)

 

 

하지만 의도하지 않고 행해지는 인격 침해야말로 더욱 심각하다고 볼 수 있다.

의도하지 않음은 마음속에 타인의 인격에 대한 존중감이 애초부터 결여되었다는 사실, 타인의 인격을 임의로 처리할 수 있는 대상물 당연시한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고의가 아니었다”는 실은 “당신의 인격이 그토록 중요한지 몰랐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더 큰 모욕감을 불러일으킨다.(53p)

 

 

이때 그녀가 악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대단한 성찰 능력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와 같은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그들이 나와 같이 행복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 것이었다. 일상생활에서의 ‘깊이 생각함’이란, 느긋하게 산책을 할 때라면 한 송이 꽃을 보고도 쉽게 느낄 공통성의 기초를, 생존의 흐름에 내몰리고 휩쓸릴 때에도 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결국 악이란 ‘망각을 선택함’이고 지옥이란 거듭된 망각 끝에 다다르는 종착지의 이름이다. 장담컨대 그 종착지인 지옥은 끔찍하기는커녕 너무나 평범한 세계의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64-65p)

 

 

아직 알려지지 않은 진실, 혹은 이미 알려진 과거 속 알려지지 않은 진실을 불편하게 캐묻는 이야기꾼들이 있다. 도대체 언제까지 과거에 집착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답할 것이다. 계속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정권교체와 무관하게, 판결이나 사면과 무관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답할 것이다.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안도하는 순간, 망각은 거스를 수 없는 물리법칙처럼 작동하여 우리가 그토록 싸웠던 무책임과 무자비함을 어느새 승자의 위치에 되돌려놓기 때문이다. 기억의 힘을 잃은 세상이야말로 우리가 또다시 패배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드는 끔찍하도록 평화로운 지옥이기 때문이다.(262-263p)

 

 

 

ㅡ 심보선,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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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19

 

 

“미디어는 이런 얘기를 좋아해요. 이런 얘기를 선정적으로 다루죠. 왜 그러는지 잘 압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사고는 극히 드물어요.” 실제로 이 사고는 테슬라 고객들이 자율 주행 모드로 운전한 2억 1,000만 킬로미터 가운데 처음 알려진 사망 사고였다. 미국에선 1억 5,000만 킬로미터에 한 번씩 사망 사고가 일어난다. 자율주행차가 6,000만 킬로미터 더 안전한 셈이다.

래스롭은 자율주행차에 관한 세상의 수많은 메시지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자율주행차가 완벽한 거라는 기대를 낮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단점보다는 장점이 상당히 크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야 합니다.”(126p)

 

 

사회 전체가 신뢰를 잃었고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지나치게 단순화된 믿음에 이의를 제기했다. 신뢰가 클수록 좋을까?

“솔직히 신뢰를 회복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목표다. 그보다는 신뢰성 있는 대상을 더 많이 신뢰하고, 신뢰성 없는 대상을 신뢰하지 않는 데 목표를 두는 편이 낫다. 나 역시 신뢰성 없는 대상을 신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긍정적인 목표를 세워두었다.

오닐의 논점은 매우 진지하다. 신뢰trust는 신뢰성trustworthiness과 동의어가 아니다. 단순히 더 ‘잘 믿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보편적인 신뢰를 부추기는 방법은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위험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특히 탐욕에 사로잡히면 무턱대고 믿으려고 하는 경향을 보인다.

(...)

신뢰에 관한 결정을 내릴 때는 신뢰성의 대상과 측면과 이유를 확인해야 한다. 신뢰할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누구이고, 그의 어떤 면을 신뢰해야 하는가? 오닐은 이렇게 말했다. “똑똑하게 신뢰하고 똑똑하게 신뢰하지 않는 것이 이번 생의 적절한 목표다. 애초에 중요한 것은 신뢰가 아니라 신뢰성이다. 특정 측면에서 얼마나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 판단하는 것이 핵심이다.”(182-184p)

 

 

기존 시장 평점 제도를 살펴본 유사한 연구 결과, 대개의 경우 피드백은 지나치게 긍정적인 경향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이베이에서는 모든 평가의 2퍼센트 미만만 부정적이거나 중립적이다. 이런 현상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그중 하나를 보면 상품에 불만족한 고객은 아예 평가를 남기지 않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정보인 부정적인 평판 데이터는 보이지 않는다.

또한 사람들은 사회적 압력 때문에 공개 포럼에 높은 점수를 남기기도 한다.(227p)

 

 

따라서 블록체인은 법조계, 금융, 부동산, 언론, 지적재산권처럼 신뢰 문제를 해결하는 데 다층적이고 복잡한 과정이 얽히고 여러 ‘중개인’이 개입하는 업계에 방해가 될 수 있다. (...) 실용적인 결과는 한 인터넷 이용자가 다른 인터넷 이용자에게 고유한 디지털 소유권을 넘기면서 안전하고 확실하게 이전될 것으로 보장 받고, 모두가 이전된 사실을 인지하고 누구도 이전의 합법성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것이다.(346p)

 

 

블록체인에 관한 여러 개념은 모호하고 위험하고 급진적으로 보인다. 지나친 홍보와 과도한 투자 열기로 인해 결국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 다만 현재 돈을 받고 신뢰를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제 3자들(중개인이든 심판이든 감시자든 관리인이든)이 ‘변경 불가능한’원장에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갈수록 더 자기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는 것만은 명백하다.(375p)

 

 

 

ㅡ 레이첼 보츠먼, <신뢰 이동> 中, 흐름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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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19

 

 

여행지에서 행복해지는 건 의외로 어려운 일이지. 미리 돈을 지불했으니까 행복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잖아. 적어도 들인 돈만큼은 행복해야 할 것 같아서, 망치면 안 될 것 같아서 초조하잖아. 한 번도 안 배워본 춤인데도 좋은 합으로 멋지게 같이 춰야 할 것 같잖아.(112p)

 

 

내 자랑이 끝나면 웅이는 오늘의 유머 속 유머를 전한다. 복희는 어제 망원시장에서 본 웃긴 사람 얘기를 전한다. 그리고 각자의 하루 일정을 공유한 뒤 우리는 헤어진다. 이 작은 일과는 내가 온 힘을 다해서 지켜내고 싶은 일상 중 하나이다.(125p)

 

 

나는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매순간이 복희와 웅이의 최선이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만약 최선이 아니었다면 더욱 다행이었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건 얼마나 끔찍한가.(213p)

 

 

나는 찬이에게 고마워졌다. 그가 기쁜 일을 만들었기 때문에. 또한 내가 그의 기쁨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해주었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에게 영혼을 되돌려주는 일이기도 하다고 아까의 그 책은 말했다. 타인의 슬픔을 슬픔으로, 타인의 기쁨을 기쁨으로 느끼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면 그건 영혼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일이랬다. 축하와 밥과 술을 듬뿍 나눈 오늘 나는 영혼에 대해 생각하며 혼자 밤을 보낸다. 충만함이 공포를 이긴 밤이다.(341p)

 

 

그 순간 선이는 이 영화에서 가장 특별한 증언자가 된다. 누구도 단죄하지 않는 유일한 증언이기 때문이다. 사실 선이는 지아가 금을 밟았는지 아닌지 정확히 모른다. 일단 지지한 것이다. 곤란한 순간으로부터 지아를 구원하는 순간 선이의 얼굴에는 언뜻 기품이 스쳐간다. 직접 보거나 직접 들은 사실 없이도, 훔치거나 훔치지 않았다는 정확한 증거 없이도, 우선 믿고 그 앨 살리는 일을 그녀가 했기 때문이다. 당신이 틀리거나 잘못하지 않았음을 믿는 일. 앞으로도 잘못하지 않을 것임을 믿는 일. 아니면 그걸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는 일. 혹은 그 모든 잘못에도 불구하고 지지하는 일.(490p)

 

 

쓰고 싶은 이야기가 소중할수록 어떤 문장을 쓸지보다도 어떤 문장을 쓰지 말아야 할지를 골똘히 생각하며 쓰는 나를 발견했다.(528p)

 

 

일기를 써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방금 쓴 문장이 나를 배반한다는 사실을. 편지를 쓰고 자고 일어난 다음 날, 어제의 글을 본 사람은 발견한다. 내 ‘진짜’생각, ‘진짜’하고 싶었던 말이 이게 아니었다는 점을. 시간이 흘러 자기가 썼던 글을 다시 읽게 된 사람은 혼란에 빠진다. 이게 정말 내가 썼던 게 맞나? 부끄럽든 생경하든 자기가 쓴 글을 읽는 사람은 각자 다른 반응을 보인다. 그러한 반응들은 근본적으로 글을 쓰는 목소리의 타자성과 연관을 맺는다. 이 목소리는 내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 나 자신이면서 내가 아닌 목소리라는 사실을 글을 써본 이들은 누구나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561p)

 

 

 

ㅡ 이슬아, <일간 이슬아 수필집> 中, 헤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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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5/8

 

 

 

과연 그런 세상에서도 문화적 삶은 가능할까?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인간 이하의 포로 생활을 전전하던 소콜로프도 포로들의 과중한 노동량에 불평을 터뜨렸다가 결국 수용소 소장에게 불려간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지만 두려움을 내비치진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권총을 만지작거리던 소장은 그를 직접 사살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독한 술 한 잔과 비계를 얹은 빵 한 조각을 안주로 건넨다.

하지만 ‘독일군의 승리를 위해’ 건배하라는 제안에 소콜로프는 술을 마시지 못한다며 거절한다. 소장은 ‘너 자신의 죽음을 위해’ 마시라고 다시 제안하고 소콜로프는 단숨에 술을 들이켠다. 하지만 안주에는 전혀 손대지 않았다. 첫 잔을 비운 후엔 안주를 먹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소장은 둘째 잔도 따라주지만, 소콜로프는 둘째 잔을 비운 후에도 안주에는 손대지 않았다. 둘째 잔 후에도 안주를 먹지 않는 것이 그의 규칙이었다. 그는 셋째 잔을 비우고 나서야 빵 한 조각을 조금 베어 물뿐이었다. 굶어 죽을 지경이었지만 그는 그렇게 러시아인의 품위와 자존심을 지켰다. 처음엔 씨근덕거리던 독일군 소장도 그런 소콜로프를 보고서는 용감한 군인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목숨을 살려준 건 물론이고 빵 한조각과 비곗덩어리까지 손에 쥐어주었다.

문화란 무엇인가? 소콜로프의 경우에 기대어 말한다면, 아무리 비참한 조건 아래에서도 처음 두 잔까지는 안주를 먹지 않는 것이다. 그런 고집으로써 품위와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다. 생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잔혹한 인간의 운명을 피해갈 수는 없을지라도 말이다.(92-93p)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일상적인 윤리적 행위는 반사적이면서 즉각적인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윤리는 규칙보다는 습관을 따른다. 이것은 윤리적 행위를 윤리적 판단과 결부시켜서 이해하고자 하는 서구적 전통에 대한 도전을 함축한다.

이러한 저자의 입장은 ‘구성적 인지주의’ 혹은 ‘구성주의’에 토대한다. 그것은 같은 인지과학 내에서도 ‘계산주의’와는 대조되는 입장이다. 초기 인공지능 연구를 주도했던 계산주의는 지식을 추상적 논리의 대응물로 간주한 반면에 구성주의는 구체적 상황의 산물이라고 본다.

(...)

이렇듯 우리는 ‘항상’ 주어진 상황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으로 움직이며 살아간다. 이때 상황에 맞도록 적절하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은 반복적인 행동이 체화된 것이다.(115p)

 

 

 

ㅡ 이현우, <책을 읽을 자유> 中,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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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5

 

글 진짜 잘 쓴다. 지루할 틈이 없네.

 

 

 

우리는 탄광을 생각할 때 깊이와 더위를, 암흑을, 그리고 채벽을 파내는 시커메진 사람을 생각하되, 기어서 몇 킬로미터를 왔다 갔다 하는지는 생각해보지 않는다. 더구나 시간의 문제도 있다. 광부가 일곱 시간 반 단위로 근무 교대를 한다고 하면 별로 긴 것처럼 들리지 않겠지만, 거기다 매일 적어도 한 시간, 보통은 두 시간, 때로는 세 시간에 달하는 ‘여행’시간을 더해야 한다. 물론 이 ‘여행’은 법적으로는 작업이 아니며 그래서 광부는 그 대가를 받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리 상관없다 해도 그 자체로 노동에 가까운 일이다. 광부들은 그런 것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말하기 쉽다. 확실히, 그들이 당신이나 내가 느끼는 것하고 똑같이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그래 왔고, 그만큼 단단한 근육을 갖고 있으며, 너무 놀라워서 섬뜩할 정도로 민첩하게 땅속을 오갈 수 있다. 나는 겨우 비틀비틀 갈 수 있는 곳을 광부는 고개를 숙인 채 크고 활기찬 걸음으로 ‘달리듯’ 간다. 막장에서는 갱도 지주 주변을 개처럼 네 발로 뛰어다니며 일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걸 즐긴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42-43p)

 

 

우리는 모두 우리에게 ‘석탄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석탄을 얻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는 좀처럼, 또는 전혀 떠올리지 못한다. 지금 나는 따뜻한 석탄 난로 앞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사월이지만 나에겐 아직도 불이 필요하다. 2주에 한 번 집 문 앞까지 석탄 수레가 오면, 가죽조끼를 입은 남자들이 질긴 자루에 담은 타르 냄새 풍기는 석탄을 실내로 날라와 계단 밑에 있는 석탄 창고에 절거덕 소리를 내며 부려놓는다. 내가 의식적으로 노력을 기울여 이 석탄과 멀리 있는 탄광에서의 노동을 결부시키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그것은 그냥 ‘석탄’, 달리 말해 나에게 있어야 하는 무엇일 뿐이다. 그것은 신기하게도 딱히 어딘지는 모를 어딘가에서 도착하는 검은 물질이며, 지불할 필요가 있다는 것만 빼면 하늘에서 내린 만나와도 같다. 우리가 영국 북부에서 차를 몰고 가며 도로 밑 수백 미터 지하에서 광부들이 석탄을 캐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는 너무 쉽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당신의 차를 모는 것은 그 광부들인 것이다. 꽃에 뿌리가 필요하듯, 위의 볕 좋은 세상이 있으려면 그 아래 램프 빛 희미한 세상이 필요한 것이다.

(...)

나는 심지어 지금도 만일 임신한 여자들이 땅속을 기어다니지 않으면 석탄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석탄 없이 살기 보다는 그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리라 생각한다. 어떤 육체노동이든 다 그렇다. 그것 덕분에 살면서도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망각한다. 아마도 광부는 다른 누구보다 육체노동자의 전형일 것이다. 그것은 광부의 일이 더없이 끔찍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너무나 필요함에도 우리의 경험과는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 실제로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우리가 혈관에 피가 흐르는 것을 잊듯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가 지금 누리고 있는 비교적 고상한 생활은 ‘실로’ 땅속에서 미천한 고역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빚지고 얻은 것이다. 눈까지 시커메지고 목구멍에 석탄가루가 꽉 찬 상태에서 강철 같은 팔과 복근으로 삽질을 해대는 그들 말이다.(48-50p)

 

 

저열한 불편과 냉대를 당하고, 늘 기다려야 하고, 모든 걸 상대 편한 대로 해야 하는 것은 노동 계급의 생활에선 당연한 일이다. 무수히 많은 영향력이 끊임없이 노동자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피동적인’ 역할로 축소시켜버린다. 그는 행동하는 게 아니라 무엇에 따라 처신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신비로운 권위의 노예임을 자각하며, 자신이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른 그 무엇을 원해도 ‘그들’이 결코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언젠가 나는 함께 홉을 따다가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에게(그들의 수입은 시간당 6페니가 되지 않았다) 왜 노조에 가입하지 않느냐고 물어본 일이 있다. 나는 바로 ‘그들’이 절대 그걸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들’이 대체 누구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이 전능한 존재인 건 분명했다.

부르주아 출신인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합당한 한계 내에서는 얻을 수 있다는 일정한 예상을 하고서 살아갈 수 있다. 때문에 비상시에 ‘배운’ 사람들이 전면에 나서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재주가 더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교육’은 대개 그 자체로는 거의 쓸모없다. 하지만 그들은 남에게 어느 정도의 존경을 받는 데 익숙하고, 그래서 남을 부리는 위치에 서는 데 필요한 낯이 있는 것이다.(67-68p)

 

 

누구보다 시간이 많은 그들이 왜 차분히 앉아 글을 쓰지 못하는 걸까? 그것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안락과 고독뿐 아니라(노동 계급의 집에선 고독하기도 어렵다) 마음의 평화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실업이라는 암울한 그림자가 드리운 상황에서는, 무엇엔가 전념한다는 것도 무언가를 창조하는 데 필요한 ‘기대감’을 발휘한다는 것도 거의 불가능하다.(111p)

 

 

돈이 없는 사람일수록 건강에 좋은 음식에는 돈을 쓰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는 점이다. 백만장자라면 아침 식사로 오렌지주스와 리비타 비스킷을 즐길 수 있을 테지만, 실업자는 그렇지가 않다. 말하자면 실업자가 되어 못 먹고 시달리고 따분하고 비참한 신세가 되면, 몸에 좋은 음식은 심심해서 먹기가 싫은 것이다. 그보다는 먹는 ‘재미’가 있는 게 좋으며, 그럴 때 유혹하는 싸고 그럴싸한 먹을거리는 언제든 있게 마련이다.(129p)

 

 

그런데 또 하나 그보다 더 심각한 어려움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서구 계급 차별 문제의 진짜 비밀과 맞닥뜨린다. 그것이 부르주아로 자란 유럽인은 자칭 공산주의자일지라도 몹시 애쓰지 않는 한 노동자를 동등한 사람으로 여길 수 없는 진짜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요즘에는 차마 발설하진 못하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꽤 자유롭게 쓰곤 하던 섬뜩한 말 한마디로 요약된다. “아랫것들은 냄새가 나.”

그게 우리가 듣고 자란 말이다. “아랫것들은 냄새가 나.”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넘을 수 없는 장벽과 마주친다. 어떤 호감도 혐오감도 ‘몸’으로 느끼는 것만큼 근본적일 수는 없다. 인종적 혐오, 종교적 적개심, 교육이나 기질이나 지성의 차이, 심지어 도덕률의 차이도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신체적인 반감은 극복 불능이다. 살인자나 남색자에겐 호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입 냄새가 지독한(상습적으로 그렇다는 뜻이다) 사람에겐 호감을 가질 수가 없다. 어떤 사람에게 아무리 호의를 품는다 해도, 아무리 그의 정신과 성품을 존경한다 해도, 입 냄새가 고약하면 그는 끔찍한 대상이 되며 당신은 마음속 깊이 그를 혐오하게 된다. 평균적인 중산층 사람이 노동 계급은 무식하고, 게으르고, 술꾼이고, 상스럽고, 거짓말쟁이라 믿도록 교육받고 자란다 해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더러운 존재라 믿도록 교육받는다면 대단히 해로운 일이다. 그리고 내 어린 시절, 바로 우리가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랐던 것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노동 계급 사람의 신체에는 묘하게 역겨운 데가 있다는 믿음을 습득하게 되는데, 그러고 나면 자기도 모르게 그런 사람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려워진다. 길에서 덩치 큰 건설 인부가 곡괭이를 어깨에 걸치고 땀을 흘리며 걸어오는 모습을 봤다고 하자. 셔츠는 색이 바랬고, 코르덴바지는 10년 묵을 때로 뻣뻣하다. 기름때 절은 상하 누더기 속에는 벌레가 우글거리고 속옷은 말도 못할 것이며, 맨 마지막에는 씻지 않아 온통 누런 몸뚱이가 베이컨 비슷한 악취를 풍기는 것 같다. 부랑자가 시궁창에서 장화 벗는 꼴을 봤다고 하자. 우욱! 부랑자라고 해서 제 발이 시커먼 걸 딱히 즐기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심지어 제법 깨끗한 줄 알았던 ‘아랫것들’(이를테면 집안의 하인)도 어딘가 불쾌하게 느껴진다. 그들의 땀 냄새도, 피부의 질감 자체도 자기하고는 희한하게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다.(172-173p)

 

 

이제는 선거에서 노동당에, 아니면 가능한 경우 공산당에 표를 던진다는 것 말고 그에게 무슨 변화가 가능할까? 그가 여전히 습관적으로 자기 계급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와 뜻이 같을 노동 계급 사람보다는 그를 위험한 '과격분자'라 여기는 같은 계급 사람과 있는 게 훨씬 더 편하다. 음식, 와인, 의상, 독서, 그림, 음악, 발레에 대한 취향은 여전히 현저하게 부르주아적이다. 무엇보다 그는 반드시 같은 계급 사람과 결혼한다.(183p)

 

 

우리 모두 계급 차별을 맹렬히 비난하지만 그것이 정말 없어지기를 진지하게 바라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와 맞닥뜨린다. 그것은 모든 혁명적 소신이 갖는 힘의 일부는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은밀한 확신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212p)

 

 

영국에서 우리가 누리는 높은 생활수준은 우리가 제국을, 그중에서도 인도나 아프리카 같은 열대 지역에 대한 지배를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영국인이 상대적으로 안락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인도인 500만 명이 기아선상에서 허덕여야만 한다. 그것은 참으로 못된 일이지만, 우리가 택시에 발을 들여놓거나 딸기 곁들인 크림 한 접시를 먹을 때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대안은 제국을 뒤집어엎고 영국을 축소시켜, 우리 모두 아주 열심히 일해야 하고 청어와 감자를 주로 먹어야 하는 춥고 시시하고 작은 섬나라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느 좌파 사람도 원치 않는 바다. 그러면서 그는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아무 도덕적 책임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는 제국의 단물은 다 빨아들일 태세이면서, 제국을 지키는 사람들을 조롱함으로써 자기 영혼을 구제한다.

계급 문제에 대해 대다수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의 비현실성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이 지점에서부터다. 그것이 단순히 노동자의 형편을 낫게 하는 문제라면, 멀쩡한 사람치고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

그러니 보이스카우트 대장의 호령 같은 선의의 몇 마디를 외치면 계급 차별이 사라져버린다고 믿고 싶은 유혹을 느낄 만도 하다. 날 ‘나리’라고 부르지 말게. 친구! 우리 모두 같은 사람 아닌가? 우리 한데 뭉쳐 온 힘을 다하고, 우리 모두 평등하다는 걸 명심하세. 그리고 내사 어떤 타이를 매야 하는지 알고 그대는 모른다고 해서, 나는 수프를 비교적 조용히 마시고 그대는 배수관 물 빠지듯 소리를 내며 마신다고 해서, 문제 될 게 대체 뭐란 말인가! 이런 등등의 말은 대부분 대단히 해로운 쓰레기지만 그럴싸하게 표현을 하면 꽤나 마음을 끌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계급 차별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만으로는 아무 진전도 있을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이 없어지기를 바랄 ‘필요’는 있되, 그만한 대가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 바람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직시해야 할 사실은, 계급 차별을 철폐한다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는 점이다. 여기 중산층의 전형적인 일원인 내가 있다. 내가 계급 차별을 없애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거의 모든 것은 계급 차별의 산물이다. 나의 모든 관념은(선악에 대한, 유쾌와 불쾌에 대한, 경박과 경건에 대한, 미추에 대한) 어쩔 수 없이 ‘중산층’의 관념이다. 책과 옷과 음식에 대한 나의 취향, 명예에 대한 나의 감각, 나의 염치, 나의 식사예절, 나의 어투, 나의 억양, 심지어 나의 독특한 몸동작도 전부 특정한 훈육의 산물이며, 사회 위계의 윗부분에 있는 특정한 지위의 산물이다. 그런 사실을 이해할 때, 나는 프롤레타리아의 등을 두드려주며 그가 나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고 말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 그와 정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싶다면 단단한 각오가 필요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계급적 특권의 울타리 밖으로 나가기 위해, 은밀한 속물근성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취향과 편견도 억눌러야 한다. 나를 철저히 변화시켜야 하며, 결국엔 같은 사람인 줄 모를 정도로 달라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노동 계급의 현실을 개선하는 것으로도, 더 어리석은 형태의 속물근성을 억제하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삶에 대한 상류층적, 중산층적 태도를 완전히 버리기까지 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그럴 수 있느냐 없느냐는 아마도 그러기 위해 나에게 요구되는 것을 얼마나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번거롭게 자신의 습성과 ‘이데올로기’를 바꾸지 않고도 계급 차별을 철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215-218p)

 

 

개별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열등한 인간들이 너무 많다고 해서 사회주의에서 발걸음을 돌린다는 것은 차장이 꼴 보기 싫다고 해서 기차를 안 타겠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다.(296-297p)

 

 

ㅡ 조지 오웰, <위건 부두로 가는 길> 中,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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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4

 

 

 

누워 죽으려고 할 때는 마땅한 자리가 전혀 나타나지 않지만 모종삽 같은 것을 사러 나가면 죽어도 될 만한 장소가 백 군데는 나타난다. 삶의 신비라는 게 이런 건가 싶다.(47p)

 

 

주위에 있는 수백여 켤레의 신발을 보면서 내가 확신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실은, 어떤 신발을 사든 간에 그 신발은 엄청나게 흉측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난 몇 년 동안 번쩍거리는 형광색의 러닝화가 주를 이루게 되었는데, 고속도로 인부들이 입는 밝은 주황색 조끼를 만드는 사람들이 러닝화도 만드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결과적으로 신발들은 야광봉을 꾸준히 먹인 앵무새를 잭슨 폴록이 터뜨린 것 같은 모습이 되었다.(83p)

 

 

 

 

ㅡ 조엘 H. 코언, <마라톤에서 지는 법> 中, 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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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6/4

 

 

나도 20~30대엔 애매함을 배척하고 확실함을 동경했다. 표류보다 안착을 원했다. 돈 걱정 없이 원하는 글을 쓰는 안정된 집필 환경을 꿈꿨고, 내 이름으로 된 책이라도 있다면 존재 증명이 수월하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책상과 고요가 확보된다고 글이 싹 바뀌지 않았고, 책이 나온다고 삶이 확 달라지진 않았다. 아이가 기저귀만 떼면 엄마 노릇 수월할 줄 알았는데 걸으면 넘어질까 걱정, 취학하면 학교 적응 못할까봐 걱정, 성장할수록 근심의 층위도 깊어갔다. 어영부영 이만큼 떠밀려오고 나서야 짐작한다. 인간이 명료함을 갈구하는 존재라는 건 삶의 본질이 어정쩡함에 있다는 뜻이겠구나.

이제 나는 확신에 찬 사람이 되지 않는 게 목표다. 확실함으로 자기 안에 갇히고 타인을 억압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싶다.(19p)

 

 

담임과의 상담은 아이를 아는 시간이 아니라, 아이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나를 아는 자리였다.(22p)

 

 

바틀비는 왜 자기 생각과 임장을 설명하지 않을까 궁금했다가, 그럼 나는 구구절절 말함으로써 타인을 이해시키고 타인으로부터 이해받은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회의가 들었다. 말하는 대로 이해받는다는 믿음이야말로 헛것 아닌가·····.(45p)

 

 

그간은 글쓰기를 열렬히 원하는 이들만 만났다. 만사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러다 비자발적 집단과의 수업에서 난관에 봉착했고 그 와중에 나는 얼굴이 자주 화끈거렸는데, 평소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글을 쓰고 싶다고 떠들고 다닌 게 생각나서다. 실상은 목소리 없는 자를 좀처럼 못 견디고, 논리적 전개가 아니면 상황 이해에 서툴고, 원활한 목표 달성에 방해가 되면 구성원을 제쳐두기도 하는 사람이 나였다. 우선은 불안과 조급 없이 목소리 없는 이들과 ‘그냥 있는’ 연습부터 해야 했던 것이다.(47p)

 

 

궁극적으로는 영웅이 필요 없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 다양한 면이 있다. 이러한 선과 악의 복잡다단한 조합은 고정된 상태에 머물지 않는다. 인격은 극히 다양한 속성의 복합체일 뿐만 아니라 그 속성들은 해마다, 심지어 시간마다 달라진다.” 그렇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허물과 결핍의 존재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우상이 된다는 건 한 사람이 단순화·고정화·신화화된다는 뜻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현명하게도 인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그날 그는 용감했다.”(82p)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이것이다. 글을 쓸 때 나는 그나마 용감하다. 글 바깥에선 비겁하고 부산스럽지만 글 안에서만은 일관되고 침착하려 애쓴다. 글과 삶의 (불)일치는 내 삶의 영원한 화두다. 잘 존재하는 방법은 어렵고, 글 쓰는 내가 가장 나으니까, 삶에서 그 비중을 늘리는 전략을 일찍이 짰다.(83p)

 

 

‘노키즈존’이라는 말을 보고 철렁했다. 우리는 누군가의 시공간을 침해하면서 어른이 됐다. 여전히 힘 있는 어른들은 자기보다 약한 자의 시공간을 임의로 강탈하면서 자기를 유지한다. 왜 아이들을 대상으로만 권리를 주장하는 걸까? 그래도 되니까 그럴 것이다. 나 역시 양육의 책임을 나누지 않는 어른(배우자)에게 가야 할 원망이 애꿎은 아이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나곤 했으니까.(100p)

 

 

여성의 노동은 왜 기록되지 못했을까. 나부터도 여성은 임노동자 이전에 엄마나 아내로 먼저 인식했다. 노동자는 전태일이다. 노동자는 택배기사다. 남성은 허드렛일을 해도 일하는 주체로 인정받는다. 이 남성 중심의 노동사에서 여성의 노동은 늘 주변화한다.(102-103p)

 

 

이 책의 최고령 97세 소무의도 윤희분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농땡이가 최고야. 젊어서 일 많이 하지 마시오. 늙어서 이렇게 아플 줄 알았으면 그렇게 안 했어. 젊었을 때는 뼈가 나긋나긋하니까 물불 안 가렸지. 농땡이가 최고야.”(104p)

 

 

‘엄마표 김치’라는 말이 그리운 말에서 징그러운 말이 되어간다. 엄마의 자기희생이 강요된 말, 넙죽 받아먹기만 하는 자들이 계속 받아먹기를 염원하는 말이다. 어느 소설가의 문학관에는 대하소설을 쓰는 동안 사용한 볼펜과 원고지가 탑처럼 쌓여 있다고 하는 데, 엄마들이 평생 담근 김치와 사용한 고무장갑을 한눈에 쌓아놓으면 어떤 붉은 스펙터클이 나올지 상상해본다. 어머니가 해주신 밥과 김치 먹고 굴러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절대 가시화되지 않는 이상한 노동. 피와 살로 스며서 똥으로 나가버리는 엄마의 땀. 부불노동unpaid work으로서 가사노동의 불꽃인 김장.(107p)

 

 

켄 로치의 ‘되어보기의 망토’가 공용화되는 세상을 상상했다. 밥 먹는 사람이 밥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기. 이때의 밥하기는 여유 있게 놀다가 모처럼 하는 일회성 노동이 아니라 삼시세끼를 차려내는 노동이 수십 년간 누적된 상태에서 중단 없이 이어지는 반복성 노동이며, “견딜 수 없는 기분과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은 감정이 때때로 찾아왔”을 때에도 몸을 일으켜 차려야 하는 모진 노역이다.

(...)

“켄 로치의 재현은 많은 경우 본 것을 다시 보라고 요청한다”고 김현은 전한다. 엄마에게서 엄마를 지우고 한 인간으로 다시 보고, “가장 빨리 미화되고 가장 느리게 진상이 밝혀지는 가족에의 환상”을 차분하게 마주하라는 충고다.(112p)

 

 

가난은 상대적이나, 한 존재에게서 중요한 것들을 뺏어간다. 밥부터 포기시키고 밥이 매개하는 관계와 건강을 무너뜨린다. 가난은 말을 가로챈다. 감추고 싶은 것은 강제로 노출시키고, 말하고 싶은 것은 들어주지 않는다. 먹고살기 바빠 일일이 사정을 말할 기회가 없다. 설명도 간단치 않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 아마 그건 고생 끝에 낙이 온 사람에게만 발언권이 주어졌기 때문일 거다. 그들은 자서전으로, 인터뷰로 자기 말을 퍼뜨리지만 “성실한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성실했다가 개죽음을 당한”이들은 말이 없다.(124-125p)

 

 

언젠가 누가 내게 물은 적이 있다. 글 쓰는 사람이 되고서 가장 좋은 게 뭐냐고. 나는 이 얘기를 들려주었다. 타인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못하게 된 점이라고. 저마다 고유한 사정과 한계, 불가피함을 안고 살아간다는 걸 알았다고.

그리고 그때 답하지 못한 게 더 있다. 글을 쓰면서 행복이나 희망이라는 붕 뜬 단어를 내 사전에서 지워버릴 수 있었던 점이다. “행복이란 거의 없다. 나이 든 사람들은 그중에서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었을 때는 더욱 그렇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노년에 자신의 생을 되돌아본 많은 위인들은 자신들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합쳐보아야 채 하루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길 위의 철학자>의 저자 에릭 호퍼의 말에 나는 동의한다. 삶은 그저 살아가는 것이지, 불행해지기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듯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니다. 충족은 또 얼마나 금세 냉소로 식어버리는가. 읽고 쓰고 듣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서 나는 삶의 ‘행복 불가능성’을, 즉 그냥 살아감 자체를 받아들였다.

에릭 호퍼는 이런 통찰도 내놓는다. “우리는 일이란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이 세상에는 모든 이들이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마큼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이라는 건 있을 수 없어요.” 일이 의미 있기를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몰염치’라고 했다는 조지 산타야나의 말까지 덧붙이면서, 삶의 유일한 의미는 배움에 있다고 그는 말한다.(140-141p)

 

 

‘결혼은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 말 뒤에는 으레 ‘어차피 후회할 거면 결혼하는 게 낫다’는 말이 덧붙여진다. 여기엔 함정이 있다. 결혼은 누구의 좋음이고 누구의 후회인가, 주체가 생략됐다. 결혼생활로 덕을 보는 사람이 지어내고 결혼제도의 유지를 바라는 이들을 중심으로 확산됐으리라 짐작한다.

(...)

시몬 드 보부아르는 결혼을 이렇게 정리했다. “현대 여성은 결혼하거나 결혼했거나 결혼할 예정이거나 결혼하지 않아서 고통받는 존재들이다.”(230p)

 

 

“아무리 절실하게 사랑에 빠지고 싶다고 해도 그들은 끔찍한 결혼이 주는 잠재적 불행에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자신만의 충만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233p)

 

 

남성, 이성애자, 대졸자, 비장애인, 기혼 출산자 등 ‘디폴트맨’에게 세상은 수월하다. 여성보다 남성에게 장애인보다 비장애인에게 화장실도 충분하다. “남성의 권력이 언어 자체에 깃들어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므로 ‘말의 민감성’을 기르지 않아도 되는 권리가 주어진다. 그래서 남자에게 남성성을 설명하려면, 비남성이 겪는 존재의 제약을 설명하려면, “물고기들을 상대로 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애를 먹게 된다.(263p)

 

 

한 선배는 동일범죄 동일처벌의 기치를 내건 젊은 여성들의 ‘혜화역 시위’를 두고 과격하다며 도리질 쳤다. 자기 같은 여자들도 아우르려면 개방적이고 온건하게 해야 한다는 거다. 순간 선배가 기성세대로 보였다. 그건 남자가 이해하는 만큼만 허락하는 ‘오빠 페미니즘’입장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절실함 없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일은 어떤 대단한 혁명세력에게도 어려운 미션이다.(169p)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걸 말하지 않으면 모르나 싶지만 정말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것. 남의 고통을 헤아려주는 사람은 없다는 것, 그리고 내가 무얼 하지 않아도 세상엔 별일이 안 일어난다는 것이다.(173p)

 

 

성폭력 피해 사실을 말하면, 왜 수년이 지났는데 지금 말하느냐는 반응부터 나온다. 시간은 만인에게 공평하게 흐르지 않는다. 이제 와서 말하는 게 아니라 이제 겨우 말하는 것이다.(177p)

 

 

위계와 위치에 따라 각자 느끼는 감각은 이토록 다르다. 내가 안락하면 남은 그만큼 힘겨운데, 안락한 자는 그 사실을 몰라서 더 안락하다. “마음은 생각보다 훨씬 작고 좁은 곳, 무엇도 영원히 숨길 수 없”다. 그런데도 “티를 덜 내고 감정을 참고 내 자신을 속이는 게 언제부터 어른스럽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른스럽지 않게 티를 내준 친구 1이 고마웠다. 덕분에 어른스럽지 않은 행동을 자각할 수 있었으니까.(186p)

 

 

지금 와 생각하면 얼마나 올드한 당신이었나, 나는. 해보지도 않고 단정지었던 말들이 떠올라 나 혼자 머쓱하다. ‘해봐서 아는데’를 넘어 해보지 않고도 아는 척하는 사람이 되는 것, 몸보다 말이 나아가고 살아내기보다 판단하기를 즐기는 것, 그게 바로 나이듦의 징조임을 일깨워준 젊은 동료들이 귀인이다.(188-189p)

 

 

“의사들은 잠을 잘 자고 잘 먹으라고 환자에게 말하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마치 그게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인 것처럼.”(323p)

 

 

올림픽에서 스케이트 타던 선수가 팀워크만 해쳐도 60만 명이 청와대 국민청원으로 사회적 형벌을 내리는 ‘도덕의 나라’에서 삼성의 부도덕한 경영에는 죄를 묻지 않는다.(333p)

 

 

ㅡ 은유, <다가오는 말들> 中,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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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5/27

 

 

기업이 가장 애쓰는 일이 뭡니까? 어떻게 하면 소비자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그들이 선택하고 좋아할 만한 제품과 서비스를 어떻게 세상에 내놓을 수 있을까를 궁리하는 것이지요. 그들은 ‘싼값으로 품질이 좋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내놓으면 소비자들이 좋아할 거야’라고 생각하고 내내 준비하지만, 전 세계에 출시되는 신상품의 2퍼센트만이 결국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성공을 거둡니다. 다시 말하면 98퍼센트가 실패인 거예요. 왜 실패할까요? 사람들은 합리적인 접근으로는 예측이 안 되는 방식으로 소비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충동구매를 일상화합니다.(34p)

 

 

우리의 뇌가 합리적이지 않은 건 이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도 원시부족사회 때 유용했던 전략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선택하기 때문입니다.(38p)

 

 

성공확률 100퍼센트인 리더가 되는 방법은 매우 쉽습니다. 아무 의사결정도 안 하거나 아주 확실한 것만 결정하면 되거든요. 그러면 100퍼센트 정확도의 의사결정자가 될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것이 조직에 이로운 건 아니죠. 결정했어야 했던 수많은 순간들을 놓친 것도 정확도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좋은 의사결정자는 놓쳐서는 안 될 의사결정을 해내는 사람입니다.(90-91p)

 

 

나와 다른 분야에 있는, 다른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을 만날 가능성은 점점 적어집니다. 불편함을 견디면서 새로운 사람과 이야기하는 걸 즐기면서 살지 않으면, 내 삶에 새로운 생각이 유입되는 일들이 점점 줄어들 것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걸 극복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새로고침은 점점 어려워집니다. 나쁜 습관, 틀에 박힌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삶을 새롭게 뒤바꿀 수 있는 신선한 자극이 있는 곳으로 먼저 여러분이 움직여야 합니다.(144p)

 

 

후회 없는 삶을 살겠다는 건, 저 같은 뇌과학자에게는 ‘나는 내 전전두엽의 시뮬레이션 기능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 표현으로 들립니다. 자기가 선택한 것 외의 다른 선택지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겠다는 건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저는 인간이 이 시뮬레이션 능력을 통해서 다음에 유사한 선택 상황이 왔을 때 더 나은 결정을 하라는 뜻으로 후회하는 기능을 부여받은 거라 생각해요. 우리는 잘못된 선택 때문에 후회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선택을 성찰하며 점점 후회를 줄여나가는 과정이 적절한 태도이지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뒤를 돌아보지 않는 태도가 적절한 건 아닙니다.(148p)

 

 

사소한 미신이라고 해서 ‘좋은 게 좋은 거지’하면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우리가 비합리성을 미신의 영역에만 머물게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의사결정에도 비합리적 영향을 끌어들이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습니다. 신입 사원 면접을 볼 때 점술인을 곁에 두고 진행했다는 어느 재벌 총수의 얘기 잘 아시지 않습니까? 기업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점술가에게 상담한다는 대기업 오너의 사연 잘 아시지 않습니까?(168p)

 

 

음모론은 발견된 사실들 가운데 비어 있는 영역, 즉 설명이 되지 않는 영역을 메우고 싶어하는 우리 본능과 관련 있습니다. 음모론은 사건과 사건 사이에 끊어져 있는 고리를 연결해 세상을 잘 짜인 스토리로 이해하려는 노력, 이를 위해 인과 관계를 만들려는 노력의 산물입니다. 우리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 굉장히 그럴듯한 이야기를 집어넣을 수 있어요. 그래서 세상의 모든 음모론들이 굉장히 그럴싸하게 들리는 겁니다. 음모론을 쉽게 믿는 분들은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이 인과관계가 파악되어 원인을 알 수 있고 심지어 미래를 예측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 분들입니다.(176p)

 

 

‘행복은 예측할 수 없을 때 더 크게 다가오고, 불행은 예측할 수 없을 때 감당할 만하다’라는 겁니다. (...) 행복은 보상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고 기대와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미래를 알 수 있다면 행복도 사라질 겁니다.

반면 불행은 미리 안다면 그 크기가 엄청날 겁니다. 우리가 불행이 닥친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에는 결국 견디고 감내하지만, 예고된 불행은 그 순간 더 큰 불행의 시작이 됩니다. (...) 다시 말하면,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기에 행복은 크게 누리고 불행은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미신과 징크스는 미래를 통제하고 싶은 욕망에서 시작되지만, 미래를 통제하는 것이 결코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생은 알 수 없기에, 미래는 예측할 수 없기에 흥미진진한 그리고 견딜 만한 탐험인 것입니다.(179-180p)

 

 

대개 과학자들은 이렇게 신약 개발에 성공하면 자신의 특허를 제약회사에 팔아 엄청난 돈을 버는데, 그는 백신 제작 과정을 전 세계에 무료로 공개했어요. 그러니까 모든 제약회사가 소아마비 백신을 만들 수 있게 된 거예요. 그 바람에 가격이 아주 싸졌죠. 지금도 아프리카 어린이들은 1달러 이하의 가격으로 소아마비 백신을 맞을 수 있습니다. 결국 그는 지구상에서 소아마비 환자를 거의 사라지게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합니다.

이후 캘리포니아주 정부는 소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소크생물학연구소를 짓게 됩니다. 그리고 그 건축 설계를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루이스 칸에게 맡깁니다.(216p)

 

 

우리 사회가 가장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이슈는 과학기술을 잘 이해하고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사람들과 기술을 두려워하고 제대로 사용할 줄 모르는 사람들 사이의 불평등입니다. 이른바 ‘기술 계급 사회’가 저는 가장 두렵습니다. 데이터 과학자의 일자리는 늘어나고 연봉은 크게 오르겠지만, 단순노무자의 일자리는 줄어들고 연봉 또한 낮아지겠지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새로 만들어지는 일자리는 기술 관련 직종이지만 사라지는 일자리는 단순 업무라서, 사라진 일자리에 종사한 사람들이 새로 생긴 일자리로 옮겨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없어지는 일자리만큼 새로 만들어지는 일자리가 많다는 말은 공허합니다.(270p)

 

 

인간은 행복을 ‘상태’로 인식하지 않고 ‘기억’에서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시엔 힘들었지만 지나고 나면 좋은 기억으로 뇌 속에 저장됩니다. 행복한 순간을 떠올려보라고 하면 과거의 한순간에서 애써 찾지만, 당시엔 그 시간이 행복인지 인지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행복으로 덧칠된 복고의 기억은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시대가 바뀌어도 종종 소환되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때가 참 좋았지”라면서 말입니다. 실제로, 미국 작곡가 오스카 레번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행복은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다!(275-276p)

 

 

‘하나의 혁명적인 아이디어가 세상에 퍼지고 결국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기성세대가 설득되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젊은 세대가 주요 세대로 등장하면서 바뀌는 것뿐이다.’(289p)

 

 

모호한 상황과 위험한 상황은 어떻게 다를까요? 상황이 모호하면 어떤 일이 벌어진지 모르니 위험하겠지요?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두 상황은 다소 다릅니다. 내가 성공할 확률, 즉 내가 원하는 가치를 얻을 확률이 100퍼센트는 아니지만 그 확률을 알 수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위험한 상황이라고 정의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로또에 당첨될 확률은 계산할 수 있지요. 동전 던지기를 해서 앞면이 나올 확률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50퍼센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위험한 상황입니다.

반면, 우리가 그 확률을 계산할 수 없을 때 그것을 ‘모호한 상황’이라고 정의합니다. 내 성공 확률이 100퍼센트가 아닐뿐더러, 몇 퍼센트인지 계산조차 어려운 상황을 말합니다.

(...)

확률을 알 때와 모를 때 사람들의 행동은 달라야 합니다. 확률을 모르면 합리적인 판단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확률을 계산할 수 있다면, 이제 그 수치를 보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성공 확률이 높다고 여길지 낮다고 여길지는 개인마다 다르겠지요.

확률을 계산할 수 없는 상황은 어떻게 행동하든 무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흥미로운 건, 많은 사람들이 이 두 상황을 굉장히 비슷한 방식으로 처리한다는 겁니다.(321-322p)

 

 

암기하는 걸 싫어하고, 성실하지 않으며, 주체할 수 없는 아이디어가 못 말리게 떠오르는, 그런데 인성이 그다지 훌륭하진 않은 그런 천재 말입니다. 실제로 그런 천재들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걸출한 업적을 남긴 혁신가들을 대상으로 조사해보면, 그들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훈련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기초 지식과 연습을 강조했습니다.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기본이 안 된 신참자가 생산적인 아이디어를 낼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 안데르스 에릭슨의 ‘1만 시간의 법칙’이 떠오르시죠? 맞습니다. 그런 원리입니다.(325p)

 

 

정재승 교수님은 과학의 대중화가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의견을 전했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과학은 제게도 어렵거든요. 과학의 대중화라는 명목하에 과학을 쉽고 재미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은 매우 어려운 학문이며, 그 어려운 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선택받은 사람들이고 ‘누구나 다 과학을 잘하기는 힘들다’는 걸 모두가 인정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힘겨운 과학을 하려는 사람들을 우리 사회가 존중하고 격려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과학자로서 여러분과 과학에 대해 대화하려는 이유는 과학의 대중화 때문이 아닙니다. 과학은 무척 어렵지만, 수식의 숲을 지나고 어려운 개념의 바다를 넘어 결국 도달하게 되는 우주와 자연, 생명과 의식의 경이로움은 어려운 과학을 전공하지 않았더라도 인류 모두가 맛보아야 할 경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356p)

 

 

왜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할까요?

요즘 주목받고 있는 두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뒷담화가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이론과, 각자의 사회적 지위를 측정하는 장치가 된다는 이론입니다.

(...)

앞서 이야기한 ‘사회적 피질’그래프의 던바는 이 질문에 새로운 가설을 제시합니다. 뒷담화가 사회적 규범을 벗어나려는 충동을 억제한다는 것입니다.

“타인의 선행은 별로 가십거리가 되지 않잖아요. 주로 법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더라도 사회적으로 적절하지 않은 행동을 했을 때 뒷담화를 해요.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회는 소문이 날까 봐 그 행동을 못하거나 쉬쉬하도록 해서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다소 벗어난다고 간주되는 행동들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는 가설이 등장했어요.(363p)

 

 

스티브 잡스는 ‘시장 조사를 통해서는 아이디어를 얻을 수 없다’고 했잖아요? 사람들에게 일일이 물어본 뒤 그 욕망을 합해 마든 제품이 꼭 좋은 디자인은 아니잖아요. 사실 사람들은 자기가 뭘 원하는지 잘 몰라요. 하지만 아이폰이 세상에 등장하고 나서야 ‘맞아! 나 이거 원했어’라며 자신의 욕망을 이해하는 거지요. 스티브 잡스의 머리에는 아이폰 같은 제품에 대한 욕망이 있었겠죠. 그리고 그 욕망은 보편적일 거라고 생각했을 테고, 자신의 욕망을 잘 정돈된 형태로 디자인해 세상에 내놓으니 사람들이 그 안에서 자신의 욕망을 읽은 거예요. 제가 생각하는 디자인은 그동안 생각하고 표현하지 못했던 욕망을 세상에 내놓는 과정처럼 느껴져요.(391-392p)

 

 

 

ㅡ 정재승, <열두 발자국> 中,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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