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8/27

 

자르기에서는 ‘알바생 자르기’, 싸우기에서는 ‘현수동 빵집 삼국지’, 버티기에서는 ‘모두, 친절하다’가 좋았다.

2010년대의 한국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 누군가를 쉽게 비난하고 욕할 수 있다면 속이 후련해지겠지만 일이라는 게 그렇게 쉬울 리가. 저마다의 사정과 입장이 존재하고 그 중 누구하나를 편들기 애매하다. 효율과 편리함을 추구하려고 만들어놓은 시스템이 도리어 인간을 소외 시키고, 화를 내게 만들며, 불편을 겪게 한다는 아이러니한 상황.

 

 

 

“상사가 부정행위를 저지르면 어떻게 하겠느냐 따위를 묻는 면접관 말입니다. 지원자들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서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트집 잡히지 않을 답을 합니다. 그걸 듣고 면접관은 ‘모범 답안 열심히 외워 왔네, 요즘 애들은 말하는 게 죄다 똑같아.’라며 고개를 젓고요. 어쩌란 말입니까?”(233-234p)

 

 

그렇다고 인턴 경험을 다른 데 써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금융권이 아닌 회사 입사 지원서에 K 은행 인턴 경력을 써내면 ‘얘는 1지망은 금융권인데 우리 회사도 한번 찔러 보는 거구나.’라고 여길 겁니다. 반대로 금융계 회사에서는 ‘왜 우수 인턴에는 뽑히지 못했느냐.’라고 물어볼 테고요.(242p)

 

 

“걔네들한테 나는 건 오히려 힘든 일 아닐까? 비둘기들 보면 날아도 되고 걸어도 될 때에는 걸어가잖아. 그렇게 오래 걷다 보면 타조나 닭처럼 되는 거 아닐까?”

(...)

나는 외려 새들이 날 때 상당한 기쁨을 맛볼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너무 어린 새나 늙은 새, 다친 새는 날 수 없다. 많은 새들이 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실제로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때는 한정되어 있다. 놓칠 수도 있었던 잠재력을 깨닫고 목적에 맞게 쓴다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 아닐까?

(...)

사람은 대부분 옳고 그름을 분간하고, 그른 것을 옳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능력을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

(어머니는 세상에는 정말 불의가 많고, 그 무수한 불의를 한 사람이서는 도저히 다 바로잡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조금씩 생겨날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언제 그 기회가 올까? 내게 맞는 기회가 왔다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직접 덤벼 보기 전에 그게 적당한 기회인지 과연 알아챌 방법이 있을까?(377-378p)

 

 

 

ㅡ 장강명, <산 자들>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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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23

 

 

예를 들어 특정 시대의 평범한 목소리를 재생하려면 위대한 책들만 읽는 건 문제가 됩니다. 그들은 당시의 평범성을 극복했기 때문에 지금도 읽히는 것이거든요. 위대한 빅토리아조 소설 속에 나오는 사람들 상당수는 당시의 평범한 빅토리아조 영국인들과 다른 식으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빅토리아조 여성의 표준으로 제인 에어를 끌어올 수는 없는 노릇이죠. 위대한 책들만 읽다 보면 우린 과거를 왜곡하게 됩니다.(42p)

 

 

문제는 그럴 능력이 없거나 그런 것을 이해할 생각이 없는 소비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 “여자 주인공엔 감정이입을 못 해요.”라고 아주 태평스럽게 말하는 남자들을 의외로 많이 만납니다. 모든 사람을 다 이해할 수는 없죠. 하지만 자신의 무능력과 게으름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면 그들이 뭉쳐 모인 영토가 의외로 넓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알려고 하지 않고, 비슷한 자극을 반복하고 싶어 하며, 변화를 거부하니까요. 이들을 이해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해 가능하다고 경멸하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죠.(99-100p)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하고 도전적인 작가라고 해도 자신이 속한 문화와 시대의 망점과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그 사실을 아주 늦게야 깨닫거나 영영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정교하게 만들수록 더 문제가 커집니다. 그 정교한 논리 자체가 왜곡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117-118p)

 

 

2017년에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

당시는 원래 그런 시대였고 김 첨지의 행동도 그 시대를 이해하고 봐야 하는 게 아닌가? 물론 시대를 이해하는 것은 옛날 책을 읽는 독자들이 거쳐야 할 당연한 순서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당시의 작가와 캐릭터에 무조건 관대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린 어떤 작품에도 습관적 면죄부를 주지 않고 계속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옛 책의 독서는 과거와 현대의 대화입니다. 과거를 이해하고 말고를 떠나 현대의 독자가 작가의 말을 더 이상 들을 생각이 없다면 그 대화는 그냥 끝입니다. 「운수 좋은 날」이 주는 혐오감과 불쾌함이 문학적 감흥보다 더 커진다면 그 소설이 계속 읽혀야 할 이유는 없는 거죠.(204-205p)

 

 

장르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관습과 언어를 이해하고, 최신작을 과대평가하지 않기 위해 고전을 먼저 읽으라는 것. 그리고 현재의 흐름을 따라가고 옛날 작품들에 갇히지 않기 위해 최신작도 많이 읽으라는 것.(206p)

 

 

 

ㅡ 듀나 , <장르 세계를 떠도는 듀나의 탐사기> 中, 우리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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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21

 

 

“그럼 시는 구원할 수 있나요?”

어떤 독자가 물었다.

 

“아뇨, 저는 대부분의 시간을 절벽에 매달려 있어요. 간헐적으로 돌부리 같은 게 생겨서 거기에 발을 얹은 채 매달리거나, 아니면 한 뼘 크기의 바닥이 생겨서 거기에 발을 올려 놓기도 하는데, 시가 그 돌부리나 바닥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구원이 아니고, 죽기 직전 상태가 지속되도록, 그러니까 죽지만 않도록 생명을 보전해줘요. 딱 그 정도만.”

(...)

시는 구원이 찾아올 때까지 시간을 끕니다. 그게 시라는 놈이 잘하는 짓 같아요.(6p)

 

 

어떤 것이든 극에 달하면 그 끝에는 슬픔이 있다고 했다. 즐거움도, 기쁨도, 원망도, 고통도, 재미도.

 

변기에 앉아 일기를 쓰면서 지금 이 슬픔의 끝이 행복을 끌고 가서 만난 슬픔인지, 고통을 끌고 가서 만난 슬픔인지 별로 상관이 없을 정도로 마지막에는 슬픔만 남았다.(98p)

 

 

문득, 몇 년 전 친구와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가 누굴 걱정하자 친구는 내게, 그 사람과 사랑에 빠진 거냐고 물었다. “사랑에 빠지면 나는 나를 걱정해.” 나는 대답했었다.

 

한때, 너무 망가지기 전에는 나도 누군가를 걱정할 줄 아는 인간이었던 것이다.(116p)

 

 

시간이 약이다, 라는 말은 반만 참이다. 시간은 독이고 시간을 약이기 때문에. 시간은 양날의 칼같이 무서운 놈이다. 뱀에 물렸을 때는 시간이 약이 아니다. 방치는 독이다. 마음의 병도 마찬가지다. 상처를 봉합하지 않고 방치하면 시간이 상처를 곪게 한다. 병원을 가고 약을 처방받아야 한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 운동해라, 샤워해라, 라는 말은 방금 뱀에게 물린 사람에게 운동하면 나을 거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124p)

 

 

얼그레이 잼 덕분에 문득 행복했다. 너무 오랜만에 찾아오셔서 행복인지 못 알아뵀다. 그래서 악수를 하려고 했는데 웬일인지 내 악수를 받아주셨다. 그래서 악수를 한 김에 내 오른손과 행복의 왼손을 수갑으로 채웠다. 같이 걸었다. 그런데 어느덧 혼자 걷고 있었다. 행복은 손목이 너무 가늘어 수갑이 빠져버렸기 때문이다.(128-129p)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에 확신이 있었으며, 이 말을 하는 것이 상처가 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문학 때문에, 이 망할 문학 때문에, 세상의 극소수 사람들하고만 개그 코드가 맞는 인간이 되어버렸고, 그래서 착하고 선량한 내 주변 사람들과는 사랑에 빠질 수도 없어진 거야, 그래서 내가 웃지 못하는 거야, 라는 말 또한 하지 못했다.(172-173p)

 

 

피자를 바라면 피자가 늦게 오듯, 나 자신을 희망에서 구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희망은 하기. 희망은 희미하고 가늘고 어렴풋할 때 가장 근사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곁눈질로 희망하기를 시전하려고요.(198p)

 

 

 

ㅡ 문보영,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 中, 쌤앤파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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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15

 

 

마음에 든다. 작가의 다른 작품 한 권 더 읽어봐야지.

 

 

 

그는 사과하고 화해하면 그 싸움의 페이지를 다시 들춰보지 않는 타입이었다. 대신 싸움의 원인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면서 바꾸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13p)

 

 

날이 선 말을 주고받는 동안에는 감각이 무뎌지지만 화해하고 난 뒤에는 상대가 했던 말이 남긴 상처 때문에 욱신거렸다. 그 말과 함께 이혼 얘기를 꺼낸 건 어떤 의미일까. 지원과 영진 모두 자신의 말끝에 묻은 독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상대가 뱉은 말에서 나온 독이 자신의 상처 위에 번져나가는 것만 아파했다. 화해한 뒤에도,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을 때도, 한 침대에서 잠이 드는 순간에도 다정한 얼굴 뒤에 숨은 목소리가 문득 소리쳤다.(26p)

 

 

불행과 비극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는 편이 견디기 수월하다. 딸꾹질을 하다가 죽었다거나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었다는 것보다 교통사고나 암 투병 끝에 죽었다는 얘기가 모두를 의심 없이 안전한 비극으로 이끈다.

잘 지내는 것 같던 연인이나 부부의 관계가 깨질 때 상대의 불륜이나 변심, 파산, 폭력, 중독은 선명한 파경의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로 명명하기 어려운 이유들이 자잘하게 집 여기저기에 곰팡이처럼 번져버린 경우도 있다. 볼 때마다 닦고 주기적으로 꺼내서 말리는데도 은밀하고 깊숙하게 번져나간 곰팡이를 목격할 때면 어느 순간 맥이 탁 풀리며 손을 놓고 싶어진다. 곰팡이가 관계를 삼켜버리는 것이다.(47p)

 

 

누군가에게 호감이 생긴다 싶으면 그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그러느냐는 자문이 생겼고 좀 더 알게 되면 그 앎이 초반에 생긴 호감을 지워나갔다. 어떤 앎은 무감을 호감으로 바꾸기도 하지만 애당초 무감한 사람을 알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일은 없었다.(85p)

 

 

부부싸움 앞에서 인간적인 장점은 대체로 무용했다. 결혼 전에는 장점으로 꼽히던 것들이 하나의 두드러지는 단점을 이기지 못하거나 덩달아 단점으로 변해갔다.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단순한데 함께 살 수 없는 이유는 구질구질하게 길었다. 그래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 사연들을 하나로 묶어 사람들이 성격차이라고 명명하는 것 같았다.(121-122p)

 

 

싸움이 반복되면서 지원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발을 닦지 않는 영진이 괘씸한 만큼 너그럽게 기다려주거나 쿨하게 넘겨버리지 못하는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131-132p)

 

 

지원과 영진이 알면서도 자주 잊어버리고 간과하는 것이 있다. 서로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 상대의 치명적인 단점을 바꿀 수 없다는 것. 일시적으로 변하게 하거나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완전히 바꿀 순 없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우선 자신을 바꿔보려고 노력한다. 상대의 단점 때문에 화내거나 싸우는 것보다 이 관계를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순간 그 단점을 외면하거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바꾸는 것도 어렵다. 우리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 문제로 다시 싸우지 않을 자신도 없다. 둘 다 바꿀 자신이 없다.(144-145p)

 

 

제 마음을 알 수 없고 자신할 수 없어 상대에게 솔직하게 얘기해달라고 당부한다. 사소한 감정의 변화가 존재와 관계 자체를 바꿔버릴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 결정이 일시적인 감정의 영향 속에서 이루어진 건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책임의 끈을 나누어 쥐려는 노력이 구차하게 느껴지지만 어쩔 수 없다.(151p)

 

 

요즘 지원은 매 순간 자신이 형편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에 직면하고 빠져드는 게 괴로웠다. 평범한 사람들이 만나 서로의 특별함을 알아보고 세상에 둘뿐인 것 같은 마음이 될 때 사랑에 빠진다면, 둘이 함께 지내고 싶다는 열망이 강해질 때 결혼한다. 그리고 서로에게 가장 형편없는 사람이 되었을 때 헤어지게 된다. 지원이 생각하는 이혼이란 그랬고 자신이 거기 서 있었다. 핏대를 세우며 소리치거나 삿대질하며 할퀴거나 물어뜯지 않아도, 돈과 시간을 들여 소송하지 않아도 이혼은 마음에서 진행된다. 조심스레 상대의 의견을 묻고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면서 조율해나가도 서로에 대한 마음이 빛을 잃고 마모되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점잖게 말하며 배려해도 서로에게 형편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164-165p)

 

 

선배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지원은 결혼이 왜 생활이 되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랑이 충만한 시기와 완전히 고갈된 것 같은 시기와 미움이 창궐하는 시기와 다른 욕망을 품은 채 바깥을 힐끔거리고 서성대다가 발길을 돌리는 시기까지 모두 합쳐 결혼생활이 되는 것이다.(216p)

 

 

살다 보니 누군가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러서 신뢰가 깨지고 그 때문에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고 부수고 머리끄덩이를 잡고 서로 죽일 듯이 싸워야만 헤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같은 집에 살면서도 대화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않고 서로의 뒷모습을 보며 적의가 담긴 눈길을 쏘아대는 순간 헤어짐이 시작되는 것이었다.(229p)

 

 

그때 무리해서 집을 사지 않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영진이 아이를 원했을 때 낳았더라면 뭔가 달라졌을까. 잔소리쟁이가 아니었다면······.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렇게 하는 게 지원이고 지원은 그런 사람이었다. 영진이 영진인 것처럼.(231p)

 

 

 

ㅡ 서유미, <홀딩, 턴> 中,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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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9

 

 

“도대체 누가 당신 머릿속에 그런 말도 안 되는 것들을 집어넣었죠? 당신은 작가로서의 경력, 머릿속의 생각, 성공, 이런 것에 얽매여 있어요. 당신 조건의 노예인 거지. 글을 쓴다는 건 종속된다는 거요. 당신 책을 읽은 사람들 혹은 읽지 않는 사람들한테 말이오. 자유라니, 어떻게 그런 멍청한 소리를! 이 세상에 자유로운 사람은 없어요. 당신 자유의 일부는 내 손안에 있고, 마찬가지로 내 자유의 일부는 회사 주주들의 손에 있으니까. 인생이란 그런 거요, 골드먼. 이 세상에 자유로운 사람 같은 건 있지도 않아요. 정말 자유로울 수만 있다면 모두들 행복할 테죠. 혹시 당신 아는 사람 중에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있나요?

(...)

적어도 미국 땅에선 불가능한 일이지. 선량한 미국인들은 모두 시스템에 매여 있고, 이누이트들은 정부 보조금과 알코올에 매여 있어요. 인디언들은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보호구역이라고 불리는 인간 동물원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관광객들을 앉혀놓고 그 안에서 끝없이 가련한 기우제 춤을 춰야 한단 말입니다. 자유로운 사람 같은 건 없어요, 젊은 양반. 우린 서로가 서로에게 매여 있고, 우리 스스로에게 매여 있어요.“(48-50p)

 

 

경찰이 없으면 불안하지만, 경찰이 너무 많으면 겁이 나는 법이다.(206p)

 

 

 

ㅡ 조엘 디케르, <HQ 2권>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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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5

 

호주 여행 중 읽은 책. 여행지에서 심각한 책 싸들고 가봐야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는 만고의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술술 잘 넘어간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깨우쳤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나보다 못한 사람들 틈에 있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것을. 모든 것은 겉으로 어떻게 보이느냐에 달려 있었다.(70p)

 

 

“내 형사 경험을 믿게. 사람이 어떤 일까지 할 수 있는지 그건 절대 알 수 없는 일이야. 특히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 그렇지.”(86p)

 

 

 

ㅡ 조엘 디케르, <HQ 1권>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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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2

 

 

어느 쪽이든 상수는 참아야 했고 참을 수 있었다. 어차피 문제는 굴욕의 대가이지 굴욕 자체가 아니지 않아. 상수는 옅은 후회마저 느꼈다. 왜 그때 좀 더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당할 것을 모르지도 않았는데.(9p)

 

 

꼬투리 하나 남기지 않으면서 그런 기대감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지점장이었다. 꼬투리 하나 없는데 그런 기대감을 품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수영 자신이었다. 줄 듯 줄 듯할 수 있는 것은 지점장의 유력(有力) 때문이었고, 안 줄 것을 알면서도 줄 듯 줄 듯할 때마다 입을 뻥긋거릴 수밖에 없는 것은 자신의 무력(無力) 때문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격차, 그래서 더 아프고 굴욕적인 위압, 모멸감, 창피스러움, 수영은 화장실로 갔다.(83p)

 

 

사실 수영의 말이 맞았다. 망설였다. 관계를 더 발전시킬지 말지. 수영이 텔러, 계약직 창구 직원이라는 것, 정확히는 모르지만 변두리 어느 대학교를 나온 듯한 것, 다 걸렸다. 일도 잘하고 똑똑한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그 두 가지가 상수 자신의 밑천이었기 때문에, 상수가 세상에서 지금까지 따낸 전리품이자 직장과 일상생활에서 위력과 차별을 나날이 실감하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93p)

 

 

미경은 좋은 여자였다. 좋은 연애 상대였고 아마 좋은 결혼 상대일 터였다. 좋다고 다 갖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갖고 싶지 않다고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좋다는 것은 그런 뜻이었다.

(...)

다들 개성, 특색, 자기만의 어떤 것이나 남들과는 다른, 하고 말들 했다. 하지만 상상하는 성공과 행복의 장면은 우스꽝스러울 만큼 엇비슷했다. 어차피 같은 목적지라면 왜 굳이 험한 길을 택하거나 그런 길을 택한 척 가식을 떨어야 할까.(108-109p)

 

 

사람들 남의 일에 그렇게 관심 없다고 말했지만 종현은 차갑게 웃었다. “남의 일이라서 더 잔인하고 적나라하게 벌거벗기는 게 사람들이에요. 자신과 다를수록, 위가 아니라 아래에 있을수록 더 뻔뻔하게, 무자비하게.”(116-117p)

 

 

악착같이 붙들고 버텨서 차라리 뺏길지언정 순순히 내줘서는 안 된다.

제법 살던 집이 하루아침에 망가져 가는 꼴을 보면서 수영이 몸으로 배운 것이었다. 하지만 엄두가 안 났다. 차바퀴 옆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새끼 고양이조차 한번 데려오면 돌이킬 수 없다. 종현과 함께 간다는 것은 끝까지 함께 가야 한다는 뜻이었고 종현이 쥔 것을 놓지 않게 한다는 것은 대신 수영 자신이 쥐고 있던 것을 놓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먹고 사고 쓰던 것을 한 등급씩 낮추고 한 푼 두 푼 쓰는데도 세 번 네 번씩 생각하는, 수영이 지긋지긋하게 잘 알고 있고 가까스로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생활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더는 어리숙하지조차 않은 채. 할 수 있을까?(127p)

 

 

상수는 내키지 않았다. 200만 원이 넘는 패딩을 받는 것도, 나중에 그만한 선물을 해야 하는 것도 모두 부담스러웠다.(145p)

 

 

종현은 아주 피곤한 날에도 종종 새벽까지 잠들지 못했다. 이 집이 아니면 이 넓은 서울에서 갈 곳이 없었다. 이 침대가 아니면 몸을 누일 곳도 없었다. 물 위에 뜬 이파리 한 조각, 자신의 처지였다. 불안은 자신을 매일 규칙적으로 움직이게 했지만 조금씩 부식시키기도 하고 있었다.(152p)

 

 

“남자란 간사하네. 착실하고 열심히 잘 살고 남보다 똑똑한 남자도 간사하지. 똑같거든, 멀쩡히 잘 살다가도 꼭 한 번씩 똥밭에 알몸으로 굴러 보고 싶단 말이지. 꼭지가 돼지 꼬리처럼 꼬불꼬불하게 돌아가도록 퍼마시고 지 아비, 어미도 몰라보고 싶어진다 이 말이야. 근데 또 말이지. 그렇게 퍼마시고 나면 그러는 거야. 내가 다시는 술을 마시나 봐라. 술은 쳐다도 안 본다. 술은 냄새도 맡기 싫어하고 몸에 좋고 순한 것만 먹고 마시지. 운동도 하고 등산도 다니면서 다시 멀쩡히 잘 살아. 알만 보고, 열심히 착실하게. 한동안은 말이야. 슬금슬금 이 향긋한 똥밭이 생각나기 전까지.”(173-174p)

 

 

결국 미경의 사촌오빠는 뒷조사를 한 것이고 미경의 아버지는 관계에 충실할 것을 조건으로 내 건 것이었다. 예상했고 가족의 새 일원을 맞아들이는 입장에서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뒤집어 보자면 진짜 가족은 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가족이란 무엇보다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니까. 아무도 면접보고 시험해서 가족을 고를 자격은 없었다. 자신도 동물병원 유리 상자 안의 강아지가 아니었다.(180p)

 

 

그런데 차이가 뭔지 알아? 못나고 잘난 게 아니야. 바닥이야. 디디고 선 바닥!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나처럼 유리 한 장이 바닥인 놈은 못 뛰어. 더 높게 뛸수록 와장창 박살이 나니까. 굴러떨어지면 어디로 굴러떨어질지 환히 보여서, 서 있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니까. 콘크리트 바닥인 애들은 달라. 걔네들한테는 뛰든 말든 하고 싶고 말고의 문제야. 뛰고 뛰다가 다 싫어지면 관두고 딴 거 해도 돼. 우리 엄마 같은 사람 자르고 자기네 건물 청소나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차라리 부러워나 하지.(234-235p)

 

 

상수는 홧홧한 한숨을 내쉬었다. 짜증이 치밀었지만 짜증만도 아니었다. 아팠다. 사랑한다면서, 늘 우리 애인이라고 하면서 어쩌면 이렇게 몰라줄까? 차분히 물어봐 주지조차 않을까? 서운하면서도 한편 이것도 자격지심인 것 같아 입안이 썼다.(269p)

 

 

“절대로 안 그런 남자가 어디 있어? 넌 절대로 그럴 여자였고? 똑같아, 그 문제에 있어서는 남자나 여자나 다 빈민처럼 똑같아. 기회, 외모, 돈, 능력, 시간 그 차이지 다른 거 없어. 우리 다 거지새끼들이야.”(321-322p)

 

 

늘 짓눌리고 답답하던 굴레는 미경이 자신에게 씌운 것이 아니라 지신이 스스로 뒤집어쓴 것이었다. 뭐라도 되는 줄 알고, 뭐라도 돼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렇게나 자기는 다르다고, 그저 그런 남자새끼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처참하게 똑같았다. 미경을 속였고 자신을 속인 것이었다. 행복이라는 마네킹을 비추는 것 같던 거짓의 그 밝고 좁은 조명은 기실 처음부터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325p)

 

 

다시 현실적인 걱정들이 엄습해왔다. 미경과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아 헤어지고 나면 어떻게 될까?

(...)

후회가 된다는,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 후회가 된다는 선배의 말이 귓가에서 되살아났다. 생각할수록 점점 알 수 없기만 했다. 더욱더 무력해지기만 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뭘까, 사랑이란 뭘까. 상수는 사랑하면서도 사랑일수만은 없는 자신이 나약하고 남루해 견딜 수 없었다.(326p)

 

 

 

ㅡ 이혁진, <사랑의 이해>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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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1

 

 

 

한국은 어떨까요? 에너지경제연구원에서 2017년에 발간한 「에너지 통계 연보」를 보면, 2016년 기준으로 한국의 전체 에너지에서 핵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11.6%였습니다. 고작 11%? 맞아요. 그렇다면 우리 머릿속에 박힌 ‘30%’라는 수치는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같은 보고서를 보면, 우리나라 발전량(전기) 가운데 핵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이 30.0%로 대중이 흔히 생각하는 수치와 일치합니다. 기억하세요. 핵발전소는 오직 전기만 만들 수 있어요. 더구나 난방이나 수송에 쓰이는 석유나 천연가스를 빠른 시간 안에 전기로 대체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81p)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나기 1년 전인 2010년의 원자력 국민 인식 조사 결과 ‘핵발전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89.4%였던 것을 염두에 두면, 2011년 3월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난 지 4년 만에 원상태도 돌아간 셈입니다. 하긴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난 직후인 2011년 4월의 원자력 국민 인식 조사 결과도 78.2%로 상당히 높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말고 여론조사 결과를 찬찬히 살펴보면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2015년 3월 원자력 국민 인식 조사 결과를 다시 보면, ‘자신의 거주지에 핵발전소를 지어도 되는지’를 묻는 질문에는 고작 19.6%만 찬성했어요. 후쿠시마 사고가 일어나기 전인 2010년의 원자력 국민 인식 조사 결과 때의 27.5%와 비교해도 줄어든 수치입니다.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의 여론조사 결과를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나라 시민의 대부분은 핵발전소를 어딘가 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전기에 기반을 둔 과학기술 문명을 누릴 수 있을뿐더러, 전기로 공장을 돌려야 경제도 굴러갈 테니까요. 지금 에너지 전환에 반대하는 일부 언론의 논리와 똑같습니다.

하지만 여론조사 결과만 놓고 보면, 이들은 핵발전소가 자기 눈앞에 있는 것은 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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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니 핵발전소는 항상 그 사회에서 가장 정치력이 약하고, 경제력이 보잘것없는 소외 지역에 들어설 가능성이 큽니다. 핵발전소가 대한민국에서 전기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서울, 수도권에 들어서지 못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84-85p)

 

 

데이터과학자들은 빅데이터를 이용하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도 미처 몰랐던 삶의 진실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고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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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말,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 위기가 전 세계를 덮쳤습니다. 은행에서 돈을 빌려 구매한 부동산이 폭락하고, 주식시장이 얼어붙고, 여기저기 실직자가 늘어났습니다. 그 당시 많은 전문가는 이런 경기 침체가 아동에게 미칠 영향을 걱정했어요. 직장을 잃고 돈에 쪼들리는 부모는 본의 아니게 그 스트레스를 어린아이에게 풀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이 때문에 아동 학대가 늘어날 가능성을 놓고서 많은 사람이 조마조마하며 통계를 살폈어요. 하지만 미국의 공식 데이터는 달랐습니다. 우려하던 아동 학대 증가 조짐은 나타나지 않았어요. 심지어 아동 학대 사건이 줄어드는 것처럼 보였지요. 도대체 어찌된 영문이었을까요?

세스는 이런 공식 통계가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구글 검색 데이터를 찾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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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나를 때려요!’, ‘아빠가 나를 때려요.’ 이런 검색은 2007년 말부터 시작한 경기 침체 기간에 크게 늘었습니다. 세스의 분석은 이렇습니다. 아동 학대가 준 것이 아니라 아동 학대 ‘신고’가 줄었던 거예요. 경기 침체로 아동 학대 문제를 담당하던 경찰, 교사, 공무원이 일자리를 잃으면서 아동 학대 신고 자체가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기가 막힌 삶의 진실이지요?(197-198p)

 

 

빅데이터로 사람을 들여다보는 일의 가장 큰 문제는 한 사람의 ‘정체성’이 가진 애매모호함을 포착하기 어렵다는 것이에요.

여기 아무개가 있어요. 그는 평소에 학교 수업을 성실히 따라가는 학생입니다. 한편으론 틈틈이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쏟는 열성 팬이기도 해요. 만약 아무개를 학교에서만 지켜본 사람이라면 그를 ‘모범생’으로 여기겠지요. 만약 구글 검색 데이터로만 그를 살핀다면, 아이돌 가수에 홀린 열성 팬으로 여길 테고요. 사실은 ‘모범생’과 ‘열성팬’, 또 그 밖에 다른 여러 가지 모습이 모자이크처럼 엮여서 그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데도 빅데이터는 그 모든 것을 말해 주지 못합니다.

심지어 그런 정체성은 변합니다. 사회문제에 별 관심이 없던 아무개가 어떤 계기를 통해서 불의를 참지 못하고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설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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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시기의 빅데이터로 한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한다면 이런 변화를 감지하지 못합니다.(203-204p)

 

 

오건-온-어-칩만 입으면 아바타 생쥐도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췌장을 칩 위에 올려놓은 다음, 그곳에다가 환자의 암세포를 배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배양한 암세포에다 마치 아바타 생쥐에게 했듯이 항암제도 투여하고, 방사선도 쬐입니다. 그다음에 암세포를 죽이는 데 가장 효과적인 처치 방법을 선택해서 실제 환자의 췌장암 치료에 활용하면 됩니다.

‘아이-온-어-칩’도 나왔어요. 화장품 회사는 이제 더 이상 토끼를 강제로 가둬 놓고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 다음에 3,000번이나 눈 화장품을 바를 필요가 없어요. 인간의 눈을 칩 위에 배양해 둔 아이-온-어-칩에다가 화장품을 발라서 이상 반응이 나타나는지 확인하면 되니까요. 유럽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화장품 동물실험을 금지한 것도 바로 이런 대안이 나왔기 때문이지요.(230p)

 

 

 

ㅡ 강양구, <수상한 질문, 위험한 생각들> 中, 북트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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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7/23

 

 

 

아이패드는 새로운 고무젖꼭지가 되었습니다.

모든 연령층이 보이지 않는 비용을 치르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아주 어린 아이조차 평소 디지털 자극을 지속적으로 받았을 경우에는 기기를 빼앗기면 지루함이나 따분함을 크게 느끼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디지털 기기를 많이 사용하면 할수록 온 가족이 오락과 정보, 주의분산의 디지털 원천에 접속돼 있는 주기도 길어지고, 의존도도 높아지게 되지요. 주의과잉, 계속된 주의분산, 환경에 의한 주의 ‘결여’는 우리 모두와 관련이 있습니다.(118p)

 

 

유치원에서 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기술적 명민함과 함꼐 내면화된 자식의 저장고를 발달시켜야 합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걱정을 21세기식으로 바꾼다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들로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문화에서 끊임없이 들어오는 정보와 그에 따른 주의분산이 어린아이들의 주의와 기억을 변질시키거나 저하시킬까요? 대부분의 ‘해답’을 온라인에서 바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은 스스로 지식을 쌓으려는 노력을 덜하게 될까요? 두 가지 질문 가운데 어느 하나에라도 “네”라는 대답이 나온다면, 우리 청소년들은 지식에 대한 그런 식의 수동적 반응에 길들여진 나머지 결국에는 내면의 지식 저장고는 물론, 비유와 추론을 통해 지식을 연결하는 능력마저 고갈되지 않을까요?

만약 이런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라도 현실이 된다면, 그다음 세대의 깊이 읽기 과정, 특히 연민, 타인의 관점 취하기, 비판적 분석, 보다 언어적인 유형의 창의적 사고마저 바뀌게 될까요? 혹시 시각적인 지식이 그런 상실을 보상하고, 나아가 이런 비판적 기술을 발달시킬 대안적 수단까지 제공할까요? 청소년들이 외부의 지식원에 너무 일찍부터 과도하게 의존하게 되면 지적 발달이 방해받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들이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전통적인 유형의 지식원에만 과도하게 너무 오랫동안 의존하도록 가르칠 경우엔 아이들이 디지털 문화에서 기량을 키워가는 것이 방해받게 되지요. 결국 아이들의 지적 발달은 두 원칙 사이에서 계속 진화해나가면서 사려 깊은 균형을 찾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188p)

 

 

인생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은 아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읽어줘야 할까요? 세대를 이어주는 위대한 언어의 춤은, 찰스 테일러가 썼듯이 ‘공동의 주의’(서로 관심의 초점을 맞추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강제에 의한 주의가 아닙니다. 문해력의 발달에 관한 연구 내용을 알아도 정말 좋겠지요. 하지만 자신의 자녀를 보면서 어디에 관심을 가져야 할지만 안다면, 어떤 매체나 접근법을 사용하든 제가 이야기하거나 쓴 내용은 무시해도 좋습니다.(224p)

 

 

아이들의 언어적, 인지적 발달 초창기에는 경제력이 정말 중요합니다. 간단히 말해, 생애 첫 몇 년간 투자되는 돈이 인생의 어떤 시기에 투자되는 돈보다 큰 수익을 낳는다는 거지요. 아동 발달에 관한 다양한 연구 결과가 담고 있는 의미는 더없이 명확합니다. 언어와 학습 능력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엄청난 격차가 수백만 아이들의 삶에 영구히 고착되기 전에 우리 사회가 제대로 훈련된 전문가들을 갖춘, 보다 종합적인 유년기 프로그램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33p)

 

 

 

ㅡ 매리언 울프, <다시, 책으로> 中,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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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2

 

 

이렇게 제자들은 대가만큼 빠르고 정확하게 칠 수 없으면 연주할 자격이 없다는 왜곡된 생각을 하고 있어요. 당신이 방금 했던 말과 같은 맥락입니다. 나는 내가 가진 재능을 최대한으로 펼치고 싶고, 이것은 내게 겸손을 가르칩니다. 내가 가르치거나 작곡하거나 글을 쓰는 일에서 호평을 받아 성공하면, 비록 이 분야의 최고 이름들과 겨룰 수는 없더라도 내게는 여전히 엄청난 성과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이 자랑스럽고 행복합니다.(47-48p)

 

 

내가 새로 가르치는 제자가 베토벤의 소나타를 배우고 있다면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베토벤과 연결된다는 것을 알고 있니?” 제자는 어리둥절해서는 내가 농담하는 줄 압니다. 그러면 이렇게 계속 설명합니다. “나는 알렉산드르 브라일로프스키의 유일한 제자였지. 클라라 후설한테도 배웠는데, 두 사람 모두 레셰티츠키의 제자였어. 레셰티츠키는 체르니의 제자였고, 체르니는 베토벤의 제자였어. 그러니 베토벤은 너의 고조부 하고도 아버지가 되는 셈이지. 그렇다고 그저 이름만으로 베토벤과 연결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돼. 전통은 교습을 통해 대물림되는 것이니까. 그래서 나는 베토벤이 체르니에게 무엇을 말했는지 알아. 체르니가 그것을 적어 레셰티츠키에게 물려주지 않았다면 베토벤에 대한 몇 가지 것들을 우리가 결코 몰랐을 거야. 이것이 브라일로프스키를 통해 나에게, 그리고 이제 너에게로 전달되는 거란다. 전통은 이런 식으로 돌아가지.”(98p)

 

 

내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따뜻한 관계를 알지 못했다고 생각하니 몹시 슬프군요. 그 대신 나는 매일 아버지가 행동이나 말을 통해, 혹은 그저 눈길을 통해 나에게 드러내 보인 신경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가 돌아가셨을 때 누구보다 내가 눈물을 많이 흘렸는데, 그것은 사랑이나 애정 때문이 아니라 내가 결코 가져보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나 나에게 한 일뿐만 아니라 그가 나에게서 박탈한 것까지 생각하면 그를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겠습니다.(135p)

 

 

부모가 우리에게 한 일은 우리 영혼에 흉터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아요. 영원히 그곳에 남죠. 나는 흉터를 치료하기 위해 아버지가 내게 한 일을 의도적으로 승화하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다시 말해 기억을 무의식으로 치워버리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나를 무의식적으로 괴롭힐 테니까요. 그러면 궤양이나 뇌졸중, 심하면 이른 죽음을 일으키기도 하죠. 요컨대 나쁜 것을 억누르려고 해봐야 영혼에 계속 남아서 작용을 합니다.

당신이 털어놓은 어머니와의 문제는 제가 보기에는 이렇습니다. 나는 당신이 용서를 통해 상처를 없애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많은 시간을 허비한 것 같아서 염려됩니다. 그래봐야 상처는 결코 사라지지 않으니까요. 내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에 시달리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반투명 돔을 통해 그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한 일에서 더 이상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고 그를 증오한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실이에요. 괜히 그런 척하는 것이 아니고, 바꿀 수도 없어요. 나는 앞서 말한 성적 희롱 때문에, 그리고 강제로 나를 유대인 학교에 보낸 것 때문에 그를 정말로 증오하니까요. 그를 증오하는 것을 물릴 수도 없습니다. 내가 반투명 돔을 만든 까닭은 그가 내게 한 일을 승화하기를 거부하겠다는 뜻이에요. 나는 똑똑히 그것을, 또 그를 쳐다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 운명의 통제권을 아버지가 아니라 내 손으로 가져오고 싶은 겁니다.(142-143p)

 

 

누나는 어머니를 보살피는 일에 스트레스를 너무 받았던 겁니다. 이 일과 관련해서도 어머니는 지혜로운 말을 하셨어요. “아들아, 어머니는 열두 명의 자식을 키울 수 있지만, 열두 명의 자식은 어머니 하나를 돌보지 못한다.”(163p)

 

 

ㅡ 시모어 번스타인, 앤드루 하비, <시모어 번스타인의 말> 中,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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