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5/27

 

미루기에 대한 각종 사례와 분석도 재밌었지만 부수적으로 박혀있는 유머가 더 눈에 띤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자기 불구화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주저앉히는 방식을 뜻한다. 당장 해야 하는 일이 뭐든 간에 그 일에 실패하는 게 두려워서일 수도 있고 성공하는 게 두려워서일 수도 있다. 자기 불구화 전력으로서 일을 미루는 사람은 일이 자기 능력을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을 미룬다. 이들은 그저 두려움 때문에 마비되어 있는 게 아니다. 미루는 행동이 이들을 실패로부터 보호해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실패한다면 그건 열심히 달려들지 않았기 때문이고, 최후의 최후의 최후의 순간까지 기다렸기 때문이고, ‘될 대로 되라’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미루는 행동은 이들에게 실패의 원인인 동시에 실패에 대한 변명이 된다.(54-55p)

 

 

혹시 미루기 연구자들 사이에 열띤 논쟁이 벌어지도록 불을 붙이고 싶다면, 만성적인 미루기가 시간을 관리하지 못하는 무능함과 더 관련이 있는지 아니면 감정 조절 실패와 더 관련이 있는지만 슬쩍 물어보면 된다.

페라리는 후자를 지지한다. “만성적으로 일을 미루는 사람에게 ‘그냥 하라’라고 말하는 건 우울해하는 사람에게 ‘이봐, 기운 내!’하는 것과 같습니다.”(57p)

 

 

티머시 피칠은 기분이 행동을 좌우하게 놔두지 말고, 대신 행동이 기분을 좌우한다는 점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여태껏 미뤄왔던 일을 하면 기분이 나아진다. 실제로 미뤄왔던 일을 하는 건 기분을 나아지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미뤄왔던 일이라는 게 내가 한다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바로 그 일이기도 하다는 거다.

내 패턴은 보통 이렇다. 글을 쓰려고 책상 앞에 앉았다가 내게 정말 간절히 필요한 건 방금 내린 커피 한 주전자라는 결론을 내린다. 커피를 내리려면 부엌으로 가야 한다. 일단 부엌에 가면 싱크대 위의 전구가 나갔다는 걸 알아채지 않을 수 없다. 전구를 갈려면 모퉁이에 있는 가게에 가야 한다. 그러나 새 전구를 사러 모퉁이까지 걸어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글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전구를 파는 가게는 정말 훌륭한 베이글을 파는 가게 바로 옆에 있고, 커피를 내리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베이글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반박이 어렵다. 또한 전구 가게와 베이글 가게가 있는 바로 그 블록에는 선집을 훑어보며 약간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서점이 있다. 그래, 서점이 글쓰기에 영감을 불어넣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59-60p)

 

 

일을 미루는 이유가 얼마나 많은지를 알면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나는 스스로에 대한 높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완벽주의자이기 때문에 일을 미루는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당연히 실패하리라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실패의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일을 미루는 핑계꾼이거나.

아니면, 내가 해낸 일에 대한 다른 이들의 평가가 무서워서 일을 미룬다거나.

아니면, 특정 날짜까지 뭔가를 하라고 요구하는 상사나 배우자나 카드회사나 다른 권위자에게 고분고분 대응해야 하는 게 분해서라거나.

아니면, 최후의 순간에 일을 끝내려고 애쓸 때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는 게 즐겁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해야 할 일의 규모와 가짓수에 압도당해서거나.

아니면, 그냥 너무 귀찮아서일 수도.

더 복잡한 경우를 생각해보자면, 직업적 의무라는 측면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지만 집안일에 관해서는 언제나 굼뜬 경우일 수도 있다.

(...)

사실, 내가 알게 된 설명 하나하나는 전부 나름의 설득력을 갖는다. 심리학자 피어스 스틸은, 이 모든 미루기의 핵심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선호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일을 미루는 것은 대개 현재는 구체적으로, 미래는 추상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61-62p)

 

 

우리는 지금 일할 것이다. 아아, 하지만 너무 늦었다.(71p)

 

 

모두가 가끔은 이런 설명 불가능한 늑장에 푹 빠져버리고 만다. 스스로 뭘 해야 하는지 잘 안다고 생각할 때조차 우리 안의 무언가가 그걸 방해한다.(83p)

 

 

내 낙관주의는 아침에 일어난 직후 거의 정점을 찍는다. 나는 늘 아침을 사랑해왔다. 아침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자기 연민과 심술이 덜하다. 아침에는 모든 게 가능해 보인다. 아이디어로 넘쳐흐른다! 가능성! 타인을 향한 사랑! 아무도 나를 멈출 수 없다. 하지만 오후 4시쯤 되면 나 자신과 인류에 대한 기대를 깨끗이 단념한다. 그렇게 미루기는 늦은 오후에 정점을 찍는다. 자포자기한 상태로 하루를 내려놓고 모든 걸 내일로 미루는 시간. 그때쯤 되면 예외 없이 현재에서 빠져나와 내일 아침을 위해 산다.(91-92p)

 

 

어느 날 한 신부가 신도들에게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한 사람을 빼고 모두가 손을 들었다. 신도들을 바라보던 신부는 손을 들지 않은 사람에게 정말 천국에 가고 싶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신부님, 물론 천국에 가고 싶지요. 하지만 신부님께서 오늘 당장 보내버리려고 하시는 것 같아서요.”

(...)

우리에게는 가장 완벽한 상황에도 저항하고자 하는 타고난 양가감정이 있다.

천국은 좋은 곳 같아 보인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93-94p)

 

 

그러는 사이 마감은 다가왔고, 나는 점점 더 깊은 구덩이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텅 빈 구덩이로 떨어지며 당장 해야 하는 일에서 필사적으로 멀어져갔다. 갑자기 트위터 프로필 업데이트야말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업무처럼 보였다. 그동안 수집한 디지털 음원들을 정리하며 하루를 다 보내기도 했다. 요즘은 그런 일을 ‘큐레이팅’이라고 하던데.(100p)

 

 

내게, 그리고 장담하건대 모든 미루기 장인들에게, 투두 리스트는 일을 미루면서 더 큰 만족감을 느끼게 해준다는 데 그 존재 가치가 있다. 지금 미루고 있는 일의 리스트를 먼저 작성하지 않는다면 그 일을 안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할 텐데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101p)

 

 

일을 미루는 사람으로서, 나는 게으름을 피우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먼저 내키는 대로 책도 한 권 더 읽고, 콜트레인 음반도 듣고, 샤워도 하고, 공원도 산책한다. 이 모든 건 ‘글쓰기’라는 항목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 나는 술 한 잔을 손에 들고 누워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글을 쓰고 있는 거야. 때가 되면 ‘글쓰기’를 멈추고 진짜 글을 쓰기 시작할 거야.(107p)

 

 

무언가를 미룬다는 것이 자신의 이익과 상반되는 행동을 하는(또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라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겠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일부러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겠는가? 고대 그리스에는 이런 행동을 의미하는 단어가 있었다(당연하다, 그리스인에겐 없는 게 없다). 그 단어는 아크라시아로, 고의로 자신의 판단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아크라시아는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유익한지를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그 일을 하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일부러 나쁜 쪽을 향해 가는 사람은 없다”라고 소크라테스는 주장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크라시아가 정확하게는 자제력의 실패를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욕구나 욕정이 이성을 넘어서는 상황. 나는 진심으로 탄탄한 몸매를 원하지만 내 몸매는 탄탄하지 않다. 운동하는 대신 인터넷으로 영화 <탈레디가 나이츠>를 보며 솔티드 캐러멜 하겐다즈를 한 통 다 퍼먹는 것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하겐다즈가 주는 즐거움을 누리지만, 건강은 잃는다. 나는 내게 가장 유익하다고 여기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리 유익하지 않은 동물적 욕망을 채우는 데 열심히라는 점을 고려하면 아크라시아를 이해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엉뚱한 사람과의 하룻밤, 술집에서 다 보내버린 오후, 솔티드 캐러멜 아이스크림 한 통을 떠올려보라. 우리는 건강하지 않다는 걸, 합리적이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행동을 하고는 후회한다. 그런 다음엔 스스로 인간만도 못하다고 생각하며 “돼지처럼 먹었어” 라거나 “나는 똥멍청이야”라고 말한다. 이런 유해한 행동의 결과로 몸에 탈이 나기도 한다.(112-113p)

 

 

내 작업 습관을 개선시키려는 노력 차원에서 로라는 컴퓨터가 30분마다 시간을 알려주게끔 설정해두었다. 컴퓨터는 스티븐 호킹이 사용한 기계와 비슷한 소리를 냈다. “2시입니다.” 가짜 스티븐 호킹이 시간을 공표하고 몇 분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온라인으로 사랑스러운 코기 사진 좀 봤을 뿐인데, 가짜 스티븐 호킹이 또다시 시간을 공표했다. “2시 30분입니다.” 컴퓨터가 시간을 선언하며 내게 보내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또 하루가 사라져감. 넌 망하는 중.”(137-138p)

 

 

리히텐베르크는 열심히 일했지만 절대로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내 생각에 그는 성취 자체를 싫어했다기보다는 특정 방식으로 이룬 성취만 가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지적인 면에서 스프레차투라, 그러니까 어려운 것을 쉽게 해낸 듯이 보이는 능력을 추구했다. 본인의 노고를 드러내는 건 무성의해 보이는 효과를 망칠 뿐이다.(152p)

 

 

주방 직원들도 이 개를 잘 알고 있는 듯, 한명씩 나와서 개를 쓰다듬어주거나 놀아주고 개 얼굴에 코를 마구 비볐다. 다들 꽤나 귀여웠다. 물론 손으로 개털을 만지던 이 사람들이 내 다음 코스 요리를 만들 거라는 생각에 이르렀지만 문제될 건 없었다. 개털은 음식을 더욱 맛있게 만들 뿐이다.(160p)

 

 

꾸물거리기와 미루기, 주저하기는 전부 창의적인 과정의 한 단계다. 데일은 한 가지 일을 미루면 종종 다른 일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꼭 해야 하는 일이 아니었던 그 두 번째 일이 결국은 꼭 해야 했던 일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일 경우가 많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런 의미에서 눈을 가늘게 뜨고 잘 보면, 미루는 행동은 적극적인 성취의 매개물일 수 있다.(166-167p)

 

 

“게을러질 수밖에 없는 그날들이 사실은 정말 심오한 활동을 하고 있는 때인 건 아닌지, 나는 종종 되묻게 돼.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돌아보면 사실 위대한 도약의 마지막 잔향일 뿐이고, 위대한 도약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보낸 시기에 발생하는 게 아닐까.”

이것이야말로 모든 미루기 전문가가 배우고 익혀야 할 마법 같은 생각이다.(171-172p)

 

 

어떤 일을 하기 직전의 상태는 곧 끝없는 과정과도 같다. 가능성은 절대로 소진되지 않는다. 어떠한 과정의 시작은 가장 힘겨운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희망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처음이야말로 우리가 한없는 잠재력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

작가는 실패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좋은 소식은, 오래도록 글을 붙잡고 마무리하지 않는 한 굉장한 작품이 나올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무엇이든 가능하다.(175-176p)

 

 

라이트가 최후의 순간이 되어서야 설계안을 종이에 옮기긴 했지만 아마 아이디어는 그전부터 쭉 흘러나오고 있었으리라고 주장했다. 머릿속에 이미 디자인이 완성되어 있었을 거라는 얘기다. 놀랍게도 바로 내가 소파에서 눈을 붙일 때 와이프에게 하는 말과 꼭 같다. 내가 지금 낮잠 자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글을 쓰고 있는 거야. 난 언제나 글을 쓰고 있다고.(199p)

 

 

생각이 너무 많은 게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다소 자기애가 과한 설명이다. 마치 탁월한 지적 능력이 주인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움직여서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 일 미루는 사람의 진짜 문제인 것처럼 보이게 하지 않는가. 망설임은 사고의 방향이 행동에서 무위 쪽으로 바뀌는 것뿐이다. 어떤 사안에 대해 충분히 오래 생각해보라. 그러면 대개 그 일을 꼭 할 필요는 없게 된다.(209p)

 

 

다운하우스의 수석 정원사인 로언 블레이크는 다운하우스 부지에 머물며 다윈이 생전에 사랑했던 나무와 산울타리와 잔디를 손질한다. 로언이 이런 생활에 대해 들려주었을 때 나는 꽤나 로맨틱한 삶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가 실제로 허리를 굽히고 육체노동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발언이었다. 정원은 남의 정원이 가장 아름다운 것 같다.(221p)

 

 

당연히 나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미 후회 머신이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다 끝내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충분히 체계적이고 이성적으로 살아간다면 100퍼센트 만족스러운 상태로 죽을 수 있다고 믿는가? 나는 결코 스스로 원하는 만큼 완벽할 수 없을 것이고, 스스로 원하는 만큼 끝내주게 멋질 수도 없을 것이다. 나에겐 둘 다 필요하다. 해야 하는 일에서 도망가는 것도, 흠잡을 데 없는 착실함도. 후회도, 실천도.(226p)

 

 

 

ㅡ 앤드루 산텔라, <미루기의 천재들> 中, 어크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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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5/24

 

막 재밌지는 않은데, 앞으로 쓰는 작품이 어떻게 변화해갈지 궁금하긴 하다. 그건 그렇고 창비의 외국어 표기법은 언제까지 저 혼자 이렇게 표기할지 지켜보겠다.

 

 

베이루트의 성벽 앞에 현자라 알려진 노인이 있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그에게 물었다.

“왜 신은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을까요? 왜 그의 뜻을 전달하지 않는 걸까요?”

그 말을 들은 노인은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벽을 따라 날고 있는 나방이 보이시오? 저 나방은 벽을 하늘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요. 당신이 만약 벽을 하늘로 생각한다면, 저것은 나방이 아니라 새겠지. 그게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소. 하지만 나방은 우리가 그것을 안다는 것은 물론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지. 당신은 나방에게 그것을 알려줄 수 있겠소? 나방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당신의 뜻을 전달할 수 있겠느냔 말이오.”

“모르겠습니다. 나방에게 어떻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겠습니까.”

노인은 남자의 말이 끝나자 손바닥으로 나방을 탁 쳐서 죽였다.

“보시오. 이제 나방은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과 나의 의사를 알게 되었소.”(10-11p)

 

 

그때쯤 되니 다들 취해 있었다. (...) 그러면서 보르헤스가 어떻다느니 옥따비오빠스가 어떻다느니 하더니 이어서 제삼세계의 향취가 나는 작가들의 이름을 나열하기 시작했는데(알베르또 푸겟이니 오라시오 끼로가니······ 기억도 잘 안 난다) 평소 대화를 나눠본 바로 나는 그놈이 그들의 작품보다는 그저 발음하기 어렵고 어딘지 그럴듯해 보이는 이름들을 들먹이는 걸 좋아할 뿐이라는 데 전 재산도 걸 수 있었다.(38p)

 

 

세상에서 소문이 가장 빠른 곳이 있다면 바로 학교일 것이다.(47p)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맥주를 많이 마시고는 신나게 떠들어댔다. 주이에게 이 모임을 사랑하게 된 것 같다고, 바르샤바 낭독회의 정식 멤버가 되어서 기회가 될 때마다 낭독에 참여할 거라고 거창하게 선언까지 했다. 그런데 그렇게 떠들고 나서 심야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웬일인지 갑자기 우울해졌다. 불현듯 회의가 밀어닥쳤다.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말들이 모두 헛소리처럼 느껴졌다. 외로운 사람 몇 명이 모여서 사회적 활동이랍시고 음침한 지하 방에 모여서 희곡이나 읽는 게 아마추어 예술가들끼리 하는 부흥회랑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집에 와서 샤워를 한 뒤 이불 속에 들어가 몸을 웅크린 채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 다시는 그런 머저리 같은 모임에 나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나는 다음에도 그 모임에 나가고 말았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나갔다.(68p)

 

 

우리는 뜻하지 않은 삶의 위기에는 전혀 대비를 하지 않은 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흔한 실비보험 하나 없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은 일상을 무너뜨릴 수 있는 무언가가 우리에게 닥치면 그걸로 끝인 위태로운 것이었다.(116p)

 

 

어쩌면 우리는 무언가 발견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유별나게 운이 좋거나 남의 곡을 그럴듯하게 베낄 재능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때 뭐라도 발견했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알고 있는 삶의 비밀 같은 거.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어도 무언가 하나는 발견하지 않았을까····· 하다못해 체념하는 방법 같은 것이라도 말이다. 우리가 음악에서 즐거움이라도 발견했다면 어땠을까. 곡을 쓰거나 공연을 할 때 언젠가 한번쯤 그런 것의 파편 정도는 발견한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어렴풋한 희열의 순간은 분명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염병하게도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이제는 다 잊어버렸다. 그 파편을 잡고 늘어졌다면 혹시 아나? 3단계를 넘어섰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우리가 끝내 발견한 것은 전립선암의 위험성뿐이었다.(122-123p)

 

 

그러니까 처음에는 우연한 계기로 대학원에 들어가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공부하게 되었고 번역작업을 하다가 중간에는 이 일이 자신의 인생에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믿게 되었는데 평생을 살아보니 지금은 어떤 일을 하든 그것이 인생에 큰 의미를 부여해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150p)

 

 

신부님은 삶이 지루하지 않나요? 매일 엄숙한 목소리로 설교를 늘어놓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죄인지 아닌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는 뭔가를 털어놓는 것을 듣고, 그렇게 사는 것이 지루하지 않나요? 저는 이제 스무살에 불과한데도 삶이 너무 지루합니다.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지루해요. 시간은 개같이 느리게 흐르고요. 이걸 언제까지 견뎌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그런데도 제 할아버지는 죄를 지은 건가요? 단지 지루함을 견디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요?(153-154p)

 

 

우리는 일년 정도 사귀다가 헤어졌다. 이별에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서로의 취향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가다가 나중에는 점차 서로의 성격이 놀라울 정도로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뿐이다. 나는 어느정도 나이가 들고 나서야 모든 연인이 그런 이유로 만나고 또 그런 이유로 헤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183-184p)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소설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자식이 우리의 말을 따르는 건, 까놓고 말해 우리가 그 아이의 팔을 부러뜨릴 수 있기 때문이야.” 경제적 독립이란 아버지나 어머니가 더 이상 내 팔을 부러뜨릴 수 없다는 말과 같다.(190p)

 

 

ㅡ 정영수, <애호가들>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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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5/15

 

 

 

아무리 훌륭한 증거를 제시한다고 해도 과학 이론을 진리라고 입증할 수는 없다. 아무리 엄밀히 이론을 검증한다고 해도 ‘이론은 그저 이론일 뿐’이다. 논리적으로는 언제든 새로운 데이터가 등장해 이론을 반증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과학 이론이 정당성이 떨어진다거나 신뢰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과학자가 아무리 강력한 설명을 내놓더라도 그것이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으며 단지 증거를 기반으로 보증된 ‘믿음’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과학 논증의 약점을 지적하면서 자신들도 진정한 과학자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학이 정말로 열린 공간이라면 자신들이 제시하는 대안 이론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어떤 이론이 완벽하게 증명되지 않은 이상 경쟁 이론은 언제나 참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과학이 전제하는 인식론적 한계를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진실을 탐구하는 사람이 갖춰야 할 미덕으로 여겨야 한다. 어떤 과학 이론이 증거를 기반으로 충분히 보증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다. 사실 실증적인 방법론이 지닌 높은 표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과학 이론을 대체하겠다고 등장한 유사과학 이론에도 동일한 입증 책임을 요구해야만 한다. 설령 ‘논리적 증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증거’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과학을 부정하는 사람에게도 “당신의 증거는 어디 있나요?”라고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처럼 엄격한 기준을 들이댈 때마다 과학부인주의자들은 늘 흐지부지 대답을 회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작동하는 원리를 전혀 또는 거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진화를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엄밀히 따지면 지구가 둥글다는 명제조차 증명할 수는 없다)이 과학의 심각한 결함이라고 착각하면서 대안 이론을 꺼내 들 준비를 한다.(38-39p)

 

 

더닝-크루거 효과는 저능한 사람이 자신의 저능함을 인식하지 못하는 현상과 관련된 인지 편향이다(때때로 ‘너무 멍청해서 멍청한 줄도 모르는 현상’이라고도 한다). 물론 모든 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는 더닝-크루거 효과에 쉽게 빠질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77p)

 

 

가장 눈에 띄는 결과는 최하위권 학생들에게서 나타났다. “이들은 평균적으로 상위 88퍼센트에 해당하는 점수를 받았는데도 자신의 전반적인 논리력이 상위 32퍼센트에 해당한다고 확신했다.” 더닝-크루거 효과가 충격적인 이유는 바로 이 지점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은 수행 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사람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79p)

 

 

집단은 개인을 능가한다. 신중하게 상호작용하는 집단은 수동적인 집단을 능가한다. 집단이 함께 문제를 검토하는 시간에 구성원들이 각자의 생각을 터놓고 얘기한다면 정답을 찾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진실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충분히 의심하며 다른 사람의 검토를 받을 때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상호작용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져 있다. 정치적 신념이 어떻든지 간에 본인이 원하는 ‘뉴스 사일로’속을 살아갈 수 있다. 페이스북에서 누군가가 남긴 댓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친구 삭제’를 하거나 ‘숨기기’기능을 이용하면 된다. 음모론에 한껏 심취하고 싶다면 종일 음모론을 소개해주는 방송 채널을 찾아보면 된다. 자신과 생각이 같은 사람들로만 주위를 가득 채우기가 이전 어느 때보다 쉬워진 것이다. 게다가 일단 사일로 속에 들어가고 나면 자신의 생각을 집단의 생각에 맞춰야 한다는 압력이 더욱 강해진다. (87p)

 

 

처음에는 ‘절대적인 객관성’을 달성할 수는 없다는 합리적인 시각에서 출발했을지 모르지만, 이제 폭스뉴스와 MSNBC는 객관성을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다. 그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대신 정치적으로 양극단에 속하는 지지자들(결국 충성스러운 시청자들)이 보고 싶어 하는 세상을 보여준다.(103p)

 

 

풍자는 본질적으로 현실이라고 받아들여지면 안 된다. 어떤 면에서는 그게 풍자의 요점이기도 하다. 풍자는 일부러 현실을 비꼼으로써 현실 세계의 불합리성을 돋보이게 하는 장르다. 그런 풍자를 진짜라고 받아들인다면 아무 의미도 남지 않는다. 풍자의 목표는 남을 웃기는 것이지 남을 속이는 것이 아니다. 마시 본인도 이렇게 지적한다. “어떻게 보면······ 정치 풍자는 가까 뉴스의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풍자 작가는 언론 특유의 가식을 벗어던짐으로써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내용을 드러내고자 한다. 반면 가짜 뉴스 사이트는 언론 특유의 가식을 활용함으로써 이미 거짓임을 알고 있는 내용을 퍼뜨리고자 한다.” 하지만 마시는 설령 둘의 의도가 다르다고 할지라도 결과는 똑같다고 주장한다.(106p)

 

 

언론이 객관성에 집착한 결과, 사실 문제를 전달할 때조차 모든 입장에 ‘균등한 시간’을 배정하고 양쪽 이야기 모두를 공평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만약 찬반 의견이 갈리는 주제였다면 이러한 태도가 합리적이라거나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문제를 전달하는 보도에서는 재앙과도 같았다. 언론은 실제로는 믿을 만한 양쪽 입장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주제를 다룰 때도 ‘동일 시간 배분’의 원칙을 따르느라 양쪽 입장 사이에서 ‘기계적 중립성’을 지키게 되었다.

(...)

어떤 과학적인 주제에 대해 ‘다른 연구’가 존재하는데도 언론이 해당 연구를 다루지 않으면 그것은 그 언론이 편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라고 겁박을 주기만 하면 되었다. 미끼를 물어버린 언론은 기후변화나 백신과 같은 과학적인 문제조차 ‘논란이 많은 이슈’라고 착각하면서 양쪽 입장을 모두 보도하기 시작했다.(110p)

 

 

‘균형 잡힌 보도’라는 개념이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LA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로 하여금 대중이 기후변화 문제를 완전히 오해하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거론되는 문제는 정치적 편향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학자들이 ‘정보 편향’이라고 부르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정보 편향이란 기자들이 정보를 수집하고 뉴스를 보도하는 방식이 전달해야 할 진실을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현상을 말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객관성, 공정성, 정확성, 중립성이라는 저널리즘의 가치에 고착하는 것이 어째서 진실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낳을 것일까? 균형 잡힌 보도를 해야 한다는 압력에 굴복한 언론이 열성 당원들(결국 언론을 진실로부터 떨어뜨려 놓을 때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제공하는 정보마저 모두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극단적인 의견에도 지나친 신뢰성을 부여하는 ‘반대 담론’이 형성되었다. 균형 잡힌 보도 때문에 소수의 지구온난화 회의론자들이 내놓은 의견이 다수의 의견처럼 확장되어 보였다.(116-117p)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전체주의 지배가 노리는 가장 이상적인 대상은 확신에 찬 나치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사실과 허구 혹은 참과 거짓을 더 이상 분간하지 못하는 일반 사람들이다.”(153p)

 

 

1. 뜬금없는 문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라.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더라.”라거나 “신문에서 읽은 내용 그대로 말하는 거다.”라는 식으로 밀어붙이면 된다. 예를 들자면 오바마가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거나 오바마가 트럼프를 도청했다고 주장하라.

2. 자신의 확신 외에는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말라. 어차피 증거는 존재하지도 않으니까.

3. 언론이 편향되어 있으니 믿을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하라.

4. 그러다 보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언론에서 접한 내용이 정확한 것인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아니면 적어도 해당 문제에 논란이 많다고 결론 내리게 된다.

5. 불확실함에 직면하면 사람들은 자기 선입견에 들어맞는 내용만 믿으려고 하다가 점점 더 자신의 이념에 고착하고 확증 편향에 빠져들게 된다.

6. 이제 가짜 뉴스를 퍼뜨리기에 훌륭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가짜 뉴스는 1~5번 과정을 더욱 강화할 것이다.

7. 결국 사람들은 내가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말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믿음은 집단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주위에 같은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 존재하고 신뢰할만한 반대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믿음을 조종하기가 더욱 쉬워진다. 때로는 반대 증거가 존재하더라도 쉬울 수 있다.

 

어차피 진실이 온갖 헛소리 밑에 파묻혀 있는데 굳이 진실을 검열할 필요가 어디 있을까? 정확히 이 지점이 탈진실 현상의 핵심이다. 진실보다 감정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상황,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간도 가지 않는 상황 말이다.(155-156p)

 

 

박사 과정에 있는 순진한 미국 학생들은 아직도 진리는 지어내는 것이라는 점, 간섭이나 편견 없이 자연스럽게 진실에 닿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점, 우리는 늘 언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는 점, 우리는 특정한 입장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가며 배우고 있다. 바로 그 동일한 사회구성주위 논리를 사용해 위험한 극단주의자들이 우리가 힘들게 얻어낸 사실, 우리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사실마저 파괴하려고 하는데도 말이다. 내가 과학학이라는 분야가 만들어지는 데에 기여한 것은 잘못이었을까? 이런 상황을 의도하지는 않았다고 변명하는 것만으로 용서가 될까? 좋든 싫든 지구온난화는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들까? 왜 그냥 논의가 완전히 끝났다고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까?(190p)

 

 

철학은 진실과 사실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면에서 썩 성공적이지 못했다. 어쩌면 이제 사람들은 철학자들이 꽤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철학적 견해는 때때로 실제 현실에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이 저지른 일은 정말 악랄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들 때문에 진실과 사실을 무시하는 태도가 남부끄럽지 않은 일로 여겨지는 지적 풍조가 생겨났다. 이제 주위에서 이런 말이 들려올 것이다. “아직도 사실이 존재한다고 믿는 부류가 있다던데 그쪽 분이신가 보네요.”(194-195p)

 

 

이 책을 통해 탈진실 현상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아마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탈진실의 근원에 대한 이해가 탈진실에 맞서 싸우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만주가 지적한 대로, 탈진실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을 깨우칠 수는 있을까?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내게 중요한 문제는 진실이 하찮게 여겨지는 세상에 적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진실 개념을 옹호하면서 탈진실에 맞서 싸우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가 받아들이려고 애써야 하는 실용적인 조언 하나를 살펴보자.

(...)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거짓말에는 언제나 맞서 싸워야 한다는 점이다. 어떤 주장이 아무리 터무니없다고 할지라도 아무도 믿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거짓말쟁이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누군가 그 말을 믿을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충분한 상식을 갖추고 있어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더 이상 그러한 가정을 해서는 안 된다. 탈진실 시대에는 당파적인 힘이 개입해 사람들을 조종하고 정보의 출처가 파편화되어 있어서 누구든 의도적 합리화에 쉽게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거짓말에 맞서야 하는 이유는 거짓말쟁이를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어차피 거짓말쟁이는 이미 자신의 검은 속내에 너무나 깊이 빠져서 갱생의 여지가 없을 수 있다. 그보다 우리는 모든 거짓말에 관객이 존재한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거짓말과 맞서 싸워야 한다. 우리가 거짓말에 맞서지 않는다면, 단지 무지한 상태에 있던 사람들이 의도적 인식 회피 단계를 지나 본격적인 부인주의 단계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어떠한 사실이나 증거도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가 될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거짓말을 마주하면 거짓말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탈진실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사실 문제를 모호하게 만들려는 그 어떤 시도에도 의문을 제기해야 하며 어떠한 거짓에도 맞서 싸워야 한다.

거짓이 내는 목소리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진실’은 우리에게 맞서 싸울 힘을 준다. 당파적인 주장이 끝없이 이어지고 회의론이 시끄럽게 울려퍼지는 시대라고 할지라도 ‘진실’은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다.(205-207p)

 

 

특히 상대편이 어리석거나 완고하게 행동한다고 느끼는 경우, 정치색을 완전히 뺀 채로 사실 관계를 묻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럴 때는 우리 역시 똑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또 있다. 탈진실에 맞서 싸우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 하나는 우리 속에 있는 탈진실적인 경향성을 물리치는 것이다. 진보주의자든 보수주의자든 우리 모두는 탈진실로 이어질 수 있는 다양한 인지 편향을 타고난다. 따라서 탈진실이 다른 사람에게만 나타난다거나 다른 사람에게만 문제를 초래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에게만 문제를 초래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이 외면하려고 하는 진실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우리 속에서도 그러한 진실을 발견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어차피 우리가 모든 사실을 파악할 수는 없다고 마음속 목소리가 속삭이더라도 ‘자신이 믿고 싶어 하는 사실’을 의심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215p)

 

 

모든 뉴스는 그 새로움에 의해 차이로서 인식된 정보이며, 일차적으로 그것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정보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정보로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이 진실이냐, 사실이냐, 얼마나 정확하냐, 만약 정확하지 않다면 얼마나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조성된 것이냐 등등은 냉정히 말해서 2차적인 문제다.

그런 이유로, 가짜 뉴스는 정교한 외과적 시술을 통해 ‘병든 부위만 적출해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완전히 악의적인 허위와 완벽한 선의의 진실 사이의 느슨하고 넓은 스펙트럼 가운데 어느 지점에서 계속 자리를 옮겨가고 있는, 탈진실 시대의 사회정치적·문화적 커뮤니케이션 양식의 특정 조합이기 때문이다.(254p)

 

 

 

ㅡ 리 매킨타이어, <포스트트루스> 中, 두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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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5/22

 

 

“최후의 상륙지가 지옥의 도시일 수밖에 없다면 모든 게 부질없는 짓이지. 바로 그곳에서 강물이 나선형으로 점점 더 좁게 소용돌이치며 우리를 빨아들이고 말테니.”

그러자 폴로가 대답한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위험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201-202p)

 

 

ㅡ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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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5/21

 

 

평균의 시대를 특징짓는 2가지 가정은 평균이 이상적인 것이며 개개인은 오류라는 케틀레의 신념과 한 가지 일에 탁월한 사람은 대다수의 일에서 탁월성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는 골턴의 신념이다. 저자는 이 평균이라는 개념을 비판하며 대안을 제시한다. 평균은 어떤 대상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는 값이기 때문이다. 대신 개개인을 중심에 놓고 분석하여 의미 있는 데이터를 이용할 수 있기를 권하며, 기존 시스템의 평균주의 구조에서 학생 개개인을 중요시하는 시스템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개념을 3가지 제시한다.

 

1. 학위가 아닌 자격증 수여

2. 성적 대신 실력의 평가

3. 학생들에게 교육 진로의 결정권 허용하기

 

참 좋은 말이지만 그렇게 좋은 대안인지는 의문이다. 각 항목에 대해 내 나름의 이유를 들어보면 좋을 텐데 번거롭고 귀찮다.

 

 

 

평균의 시대를 특징짓는 2가지 가정은 무엇인가? 평균이 이상적인 것이며 개개인은 오류라는 케틀레의 신념과 한 가지 일에 탁월한 사람은 대다수의 일에서 탁월성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는 골턴의 신념이다. 그러면 이번엔 개개인의 과학이 내세우는 주된 가정은 뭘까? 개개인성이 중요하다는 신념이다. 즉 개개인은 오류가 아니며 개개인을 (재능, 지능, 인성, 성격 같은) 가장 중시되는 인간 자질에 따라 단 하나의 점수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107-108p)

 

 

성격심리학자들이 생각하기에 쇼다의 결론대로라면 인간의 성격에는 일관적인 면이 없으며 인간의 행동은 소용돌이처럼 끊임없이 변화해서 그때그때마다 이렇게 저렇게 변한다고 암시하는 것이었다. 또 성격론자들로선 특성이 더 이상 안정적이지 않다면 모델을 세울 기반이 흔들리는 셈이었다. 하지만 쇼다는 성격의 개념을 폄하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과 맥락을 결합시킴으로써 성격론에 활력을 불어넣어줬다. 사실 쇼다는 우리 인간의 정체성에는 어느 정도의 일관성이 있음을 증명했다. 다만, 그것이 사람들이 으레 생각하는 그런 일관성이 아닌 특정 맥락 내에서의 일관성일 뿐이었다. 쇼다의 결론에 따르면 당신이 오늘 운전하는 동안 신경과민일 정도로 조심스럽게 행동했다면 내일 운전을 할 때도 신경과민일 정도로 조심스럽게 행동할 것이 아주 확실하다. 한편 당신은 일관적이지 않은 모습의 당신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인근 호프집이라는 맥락에서 같은 밴드 멤버들과 비틀스의 리메이크 곡을 연주할 때는 신경과민일 정도로 조심스럽지 않은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식이다.(157-158p)

 

 

오랜 세월에 걸쳐 인간의 성품은 뼛속 깊이 뿌리박힌 천성이라는 것이 통설로 굳어져왔다. 예를 들어 이웃집 아들이 동네 편의점에서 사탕을 몰래 훔치려다 들켰다는 얘기를 들으면 본능적으로 그 아이가 다른 물건을 또 훔칠 것이라고 넘겨짚는다. 그 아이가 집에 놀러 오면 아이 혼자만 두고 자리를 뜨기가 꺼려지기 십상이다. 심지어 그 아이에게 도덕성의 결함이 있다고 여기면서 앞으로 또 도둑질을 할 것이 뻔할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부정행위를 하고 어른에게 거짓말을 하는 등 다른 비도덕적인 짓도 얼마든지 벌일 만한 아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성품은 인간의 모든 행동과 다를 게 없다. 즉 맥락과 분리시킨 채로 이러니저러니 떠들어봐야 헛소리일 뿐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공감력, 존경심, 자제력 같은 도덕성을 어떻게 심어주느냐를 놓고 여전히 뜨거운 논쟁을 벌이고 있는 시대에, 또 전적으로 성실하거나 전적으로 불성실한 사람도 있다고 믿는 시대에 이런 중요한 도덕적 자질 모두가 아주 개별화된 상황 맥락별 기질에 따라 특징지어진다는 개념은 도발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성품이 맥락적이라는 이런 개념은 사실 새로운 것도 아니다.(163p)

 

 

다른 사람의 성격이 고정적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이와는 다르다. 즉 우리는 대다수 사람들과 한정된 범위의 맥락 내에서만 상호 교류를 나누는 편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동료와는 직장 내에서만 알고 지낼 뿐, 집에 놀러 가 그 동료의 가족들과도 알고 지내는 사이는 아닐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친구와는 주말마다 쇼핑하고 술을 마시지만 회의실에서 만나 함께 회의할 일은 없는 사이일 수도 있다. 자녀들과는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 학교에서 보거나 자녀의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는 경우는 드물기 십상이다. 사람들의 행동을 특성처럼 느끼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당신이 그 사람들의 맥락에서 일부분만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직장 상사가 옆에 있을 때에만 소심해지는 것뿐인데 직장 상사는 당신을 소심한 사람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한편 당신은 직장 상사가 고압적이고 오만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상사는 당신이 주위에 있을 때만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아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다양한 맥락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이들의 경우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런 탓에 제한된 정보를 기반으로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한다.(176-177p)

 

 

타인의 상황 맥락별 기질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특히 더 중요한 경우는 타인이 잘하도록 돕는 역할이 주어질 때, 즉 관리자, 학부모, 상담가, 교사 등등의 역할을 맡게 될 때다.

(...)그 사람이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지를 따지는 대신 맥락의 관점에 따라 ‘저런 맥락에서 저런 식으로 행동하는 이유가 뭘까?’라는 의문을 품게 된다. 또한 자신이 판단할 때 좋지 않게 생각되는 행동을 보면 잠시 반응을 보류하며 먼저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이 적용되지 않는 사례를 찾아볼 수도 있다. 아니면 셀레스트 키드의 모범을 따라볼 수도 있다. 키드는 무지막하거나 분별없게 여겨지는 행동을 바탕으로 누군가를 판단하게 될 때마다 스스로를 다잡으며 그 행동이 지각 있고 분별 있게 느껴질 만한 상황들을 상상해보려 애쓴다. 그러면 대체로 상대편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맥락을 그 상대편에게 투영하려고 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깨닫게 된다.

(...)

그 사람에게는 당신과 그 사람 둘이 함께 놓여 있는 그 순간의 맥락만이 전부가 아님을 명심한다면 마음의 문이 열려 본질주의 사고로는 어림없는 수준의 넓은 도량으로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게 된다.(178-180p)

 

 

인간의 발달은 그 종류를 막론하고 단 하나의 정상적인 경로라는 것이 없으며 이 사실은 개개인성의 세 번째 원칙인 경로의 원칙에서 근본을 이루는 토대다.

(...)

즉 개개인은 들쭉날쭉의 원칙과 맥락의 원칙에 따라 당연히 진전의 속도와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순서가 다양하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190p)

 

 

우리는 흔히 어떤 특정 목표에 이르는 경로는 저 밖의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걸어갔던 여행자들이 닦아놓은 숲속의 보행로 같은 경로가 있다고 여기며 삶에서 성공하는 최선의 길은 그런 잘 닦인 보행로를 따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경로의 원칙은 우리에게 다른 얘기를 전해준다. 우리는 어떤 경우든 자신만의 경로를 처음으로 내고 그 길을 닦으며 나아가는 것이라고. 우리가 내리는 모든 결정이나 우리가 겪는 모든 일에 따라 매번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능성에 변화가 생기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203-204p)

 

 

ㅡ 토드 로즈, <평균의 종말> 中, 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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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5/17

 

 

그러나 정작 둘의 연결이 끊어졌을 때 나타난 결과는 이성이 감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해방을 맛본 것이 아니었다. 이로써 드러난 충격적 사실은 오히려 합리적 추론에는 감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

주인(열정)이 갑작스레 운명을 달리하여 세상을 떠나도 하인(이성)에게는 통치의 능력도 통치의 욕구도 없다.(84p)

 

 

인간은 판단이 내려지면(판단 차제도 뇌 속의 비의식적인 인지 장치를 통해 일어나기 때문에, 옳을 때도 있고 옳지 않을 때도 있다), 그 근거를 하나둘 만들어내 그것들이 자신이 내린 판단의 설명이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근거라는 것들은 사실(해당 주장에 대한) 사후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97p)

 

 

그러나 어떤 경우에서든 기본이 되는 심리는 패턴 연결이다. 이런 식의 인지는 별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순식간에 자동적으로 일어나고, 우리는 여기에 떠밀려 뮐러·라이어의 착시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착시를 경험할지 말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저 한쪽 선이 다른 선에 비해 더 길게 우리 눈에 ‘보이기’때문이다. 마골리스는 이런 식의 사고를 ‘직관적 사고’라고 부르기도 했다.

반면 ‘이유를 찾아내는 인지 과정’은 “우리가 어떤 사고를 거쳐 특정 판단에 이르렀는지 설명할 때, 혹은 내가 보기에 다른 사람이 어떻게 그런 판단에 이를 수 있었는지 설명할 때”이용된다.

(...)

우리 머릿속에서는 직관적 판단이 먼저 일어나고(“그건 당연히 잘못이죠!”), 그런 다음에야 천천히, 때로는 고문과도 같이 정당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음, 둘의 피임 방법이 모두 실패할 수도 있고, 그러면 둘 사이에서 나는 아이는 기형아일 겁니다”). 직관은 추론을 일으키는 추동력이지만, 추론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상관하지 않는다.(98-99p)

 

 

언뜻 보면 피험자들이 하버드의 재학생인 만큼 허술한 이유보다 그럴듯한 이유에 더 많이 설득되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 둘 사이에는 차이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학생들의 코끼리는 몸을 틀어버렸고, 이어서 기수가 제시된 논거(그럴듯하든 허술하든)를 반박할 방법을 찾아내면서 두 경우 모두에서 피험자들은 이야기를 똑같이 비난했다.

(...)

다시 말해 통상적인 상황에서라면 기수는 변호사가 고객의 지시에 따르듯 코끼리로부터 신호를 전달받는다. 그러나 기수와 코끼리를 강제로라도 데려다 한자리에 앉히고 몇 분 동안 이야기를 시키면, 코끼리는 기수의 충고나 외부의 논거에 개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에게는 분명 직관이 먼저 일어나고, 통상적인 상황에서는 사회생활의 전략적 추론도 직관이 일으킨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둘 사이의 쌍방향 소통을 더 증가시킬 수 있다.(143-144p)

 

 

IQs는 내 편의 논거를 얼마나 많이 만들어낼 수 있는가, 오로지 그것만을 예측해줄 수 있었다. 즉, 똑똑한 사람들은 훌륭한 변호사나 훌륭한 공보관 역할을 더없이 훌륭히 해내지만, 상대편의 논거를 찾아내는 데에서는 다른 이들보다 나을 게 없다는 뜻이었다. 이에 대해 퍼킨스는 “사람들은 전체 쟁점을 좀 더 온전하고 공평하게 탐구하는 데 IQ를 쏟아붓기보다는 자신의 논변을 더 든든히 떠받치는 데 IQ를 쏟아붓는다”라고 결론을 내렸다.(163-164p)

 

 

정직한 사람들도 기회만 주어지면 상당수가 남을 속이려 든다. 우리의 연구 결과를 보면, 나쁜 놈 몇이 보통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사람들 대다수가 남을 속이는 것으로 나타났고, 남을 속이는 것은 소소한 수준이었다.

(...)

위의 실험실 연구를 종합하면 결국 사람들은 남의 눈에 띄지 않고 또 발뺌의 여지만 있으면 대부분이 남을 속인다는 것이다. 우리의 공보관은 정당화를 하는 데에는 누구보다 명수이다. 그래서 이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도 대부분은 남을 속인 후 실험실을 나가면서 애초 실험실에 발을 들일 때와 똑같이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 믿고 있었다.(167p)

 

 

옛날에는 많은 정치학자가 삶들이 표를 던질 때 개인적 이익에 따라 움직인다고 가정했다. (...) 그러나 자녀를 공립학교에 보내는 부모라고 해서 그 사람이 다른 시민들에 비해 정부가 주는 학교 지원금을 더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또 군대에 징집될 젊은이라고 해서 그가 징집 가능성이 전혀 없는 노인보다 전쟁 장기화에 더 반대하고 나서는 것도 아니다. 마찬가지로 건강보험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들이 보험 혜택이 있는 이들에 비해 정부에서 발급하는 건강보험을 더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개인적 이득보다 사람들은 인종, 지역, 종교, 정치와 관련해 자신이 어느 집단에 속했는지를 더 신경 쓰는 경향이 있다.(171-172p)

 

 

그렇다고 이성적 추론은 접어두고 직감만 따라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소비자 선택이나 대인 관계 판단에서는 때로 직감이 더 나은 안내자이기는 해도, 공공 정책·과학·법에서는 직감을 기초로 삼았다간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 그보다 이 대목에서 내가 내거는 핵심은, 개개인이 가진 이성적 추론 능력을 과대평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개인이 가진 능력을 우리는 제한적인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179p)

 

 

물론 이 신성함의 윤리에도 어두운 면은 있었다. 자신의 비위에 거슬린다는 느낌만을 바탕으로 신의 뜻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간, 다수에게 약간의 모멸감을 일으킬 수 있는 소수 계층(이를테면 동성애자나 비만인)이 사회에서 심한 배척과 잔혹한 대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성함의 윤리는 더러 자비, 평등, 인간의 기본적 인권과 양립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206p)

 

 

그러나 타인이 품은 신념이라도 우리에게 유용한 부분이 있다. 사물에 관한 그들의 신념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순간, 우리의 합리성 안에 잠자고 있던 여러 가능성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 우리는 난생처음, 아니 다시 한 번, 그런 신념들이 가진 힘을 몸소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똑같이 한 가지 ‘배경막’만 쳐 있지는 않은 것이다. 애초 우리 안에는 많은 것이 들어 있다.(212-213p)

 

 

자연이 초고를 주면, 경험이 그것에 수정을 가한다. ······ ‘내장’이라는 말은 변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저 경험 이전에 구조화되어 있다는 의미이다.(247p)

 

 

그러나 최근 10년 사이 진화 이론가들이 새로이 깨달은 바에 따르면, 인간 이외의 종에서는 호혜적 이타주의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전에만 해도 흡혈박쥐의 경우 다른 박쥐에게서 피를 얻어먹으면 그것을 기억했다가 자신도 피를 나눠 준다는 보고가 널리 있었으나, 이는 호혜적 이타주의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닌 혈연선택에서 비롯된(친족 박쥐와 피를 나누어 먹는) 행동인 것으로 밝혀졌다. 침팬지와 흰목꼬리감기원숭이의 경우 다른 동물에 비해 호혜성의 증거가 잘 발견되기는 하지만 여전히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어 확신할 수는 없는 형편이다. 호혜적 이타주의 체계는 단순히 고차원의 사회성 지능이 있다고 해서 돌아가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324p)

 

새로운 사실. 나도 저자가 말한 것과 비슷하게 알고 있었는데 지식을 수정함.

 

 

물론 여러분은 생면부지의 남을 평생 돕고 사는 정도는 되어야 이타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서 그런 사람들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혹시 그런 이들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찾아가 취재를 하고 그 소식을 저녁 뉴스거리로 전할 정도이다. 그러나 다윈이 그랬던 것처럼,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같은 목적과 가치를 지니고 집단적으로 하는 행동에 이타주의의 초점을 맞추면 이야기가 달라진다.(357p)

 

 

옥시토신은 사람들을 자기 집단에 엮어주지, 인류 전체에 엮어주지는 않는다. 겨울 뉴런은 사람들이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자신과 같은 도덕 매트릭스를 가진 사람에게 특히 잘 공감하도록 한다.

‘우리 인간은 누구든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다’라고 믿을 수 있다면야 더없이 좋겠지만,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별로 개연성 없는 이야기이다. 그보다는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한 편향적 사랑, 즉 서로에 대한 동질감,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 무임승차자에 대한 억제, 이 세 가지를 통해 강화되는 그 편향적 사랑이, 인간이 이룩할 수 있는 최대치의 사랑이 아닐까 한다.(436p)

 

 

그렇다면 종교가 있는 사람들이 이웃과 시민으로서 더 나은 자질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

연구 결과, 종교인의 훌륭한 자질에 있어 종교적 생활이나 믿음은 거의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즉, 지옥을 믿는가, 매일 기도하는가, 가톨릭·개신교·유대교·모르몬교 중 무엇을 믿는가 등의 이 모든 것은 종교인이 베푸는 아량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종교가 이루어내는 도덕적 선행과 확실하고 강하게 연관된 사실은 단 하나, 바로 사람들이 동료 종교인과의 관계에 얼마나 단단히 얽혀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도덕 매트릭스 안에서 맺어지고 이루어지는 우정과 집단 활동이 이타심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에게서 최선을 이끌어내는 힘도 바로 그것이었고 말이다.

퍼트넘과 캠벨은 믿음을 강조했던 신무신론파의 입장을 거부하고 마치 뒤르켐의 입에서 나온 듯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다른다. “이웃을 사랑하는 데에서 중요한 것은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바로 종교적 소속감이다.”

퍼트넘과 캠벨의 연구를 보면 종교가 오늘날 미국에서 하고 있는 역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미국에 엄청난 양의 사회적 자본이 쌓이게 된 것은, 나아가 그 혜택이 흘러넘쳐 외부인에게까지 미치게 된 것은, 결국 종교 덕분인 것이다. 그러나 이를 가지고 종교가 어느 때나, 또 어느 곳에서나 대체로 주변과의 경계를 허물고 많은 이에게 선행을 베풀어왔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나는 종교가 일련의 문화적 관습이며, 나아가 그것이 다차원 선택을 통해 우리 안의 종교적인 마음과 서로 공진화해왔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따라서 집단 차원의 선택이 어느 정도 일어나는 한, 종교도 우리의 종교적인 마음도 당연히 편향적이 될 수밖에 없다.(즉, 집단 내부를 돕는 데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종교가 아무리 보편적 사랑과 자비를 설파하더라도 말이다.(474-475p)

 

 

도덕성 정의에 대한 내 작업이 다음과 같은 뒤르켐의 말로 시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결국 사람들 간에 연대를 형성시키는 모든 것, 나아가·····자신의 자아보다·····커다란 무엇을 통해 인간이 스스로의 행동을 규제하게 만드는 모든 것, 그것이 바로 도덕이다.” 뒤르켐은 사회학자였던 만큼 개인의 자아를 제약하는 사회적 사실들(개인의 마음 바깥에 존재하는 것들)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다. 그런 사회적 사실들의 실례로는, 종교·가족·법률을 비롯해 내가 도덕적 매트릭스라고 칭했던 공통의 의미 네트워크를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심리학자인 만큼 도덕성과 관련한 요소가 마음 바깥은 물론 우리의 마음 안에도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이 책에서 소개한 갖가지의 진화한 심리 기제들, 즉 도덕적 감정들, 내면의 변호사(혹은 공보관), 여섯 가지 도덕성 기반, 군집 스위치 등이 이러한 내적인 요소에 해당한다.(479p)

 

 

나는 상대주의자가 아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일은 없다. “나는 커피에 우유 넣는 걸 좋아하지만 당신은 빼는 걸 좋아하지요. 그렇듯이 내가 따뜻한 심성을 선호해도 당신은 강제수용소를 선호할 수 있어요.” 이 말은 곧 우리에게는 저마다 중시하는 가치가 따로 있고, 그 가치는 다른 무엇에 침해되거나 통합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생각을 나는 틀렸다고 본다.

 

그 대신 벌린은 다원주의에 대한 지지를 표하는데, 그것을 정당화하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문화와 기질이 여러 가지로 존재하듯이, 이 세상에는 본보기가 되는 이상도 여러 가지로 존재한다는 결론에 나는 이르게 되었다. ······(가치라는 것은) 무한정 존재하지는 않는다. 인간적인 가치들, 그러니까 내가 인간 본연의 외관과 성격을 유지한 채 추구할 수 있는 가치는 그 수가 한정되어 있다. 그것은 74개일 수도 있고, 혹은 122개일 수도 있으며, 혹은 27개일 수도 있으나, 그 개수가 어떻든 한정적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원주의의 중요한 특징은 바로, 어떤 이가 그러한 가치 중 하나를 추구할 때 나는 그 가치를 따르지 않는다 해도 왜 그 사람이 그 가치를 따르는지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그가 처한 상황에서라면 나 역시 그 가치를 따르게 될 것임을 인정할 수 있다. 바로 여기서부터 인간적 이해의 가능성이 싹튼다.(558p)

 

 

 

ㅡ 조너선 하이트, <바른 마음> 中, 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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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5/16

 

 

읽기 전부터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가 컸는데, 생각보다 새로운 내용을 알려주는 책은 아니었다.

가장 인상적인 내용은 가난한 아이를 구하는 게 당장은 총 인구를 늘리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인구를 감소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 막연히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가능한 한 가난한 아이를 구하는 게 좋다는 도덕적인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극빈층을 없애고, 교육과 피임을 비롯해 더 나은 삶을 제공하여 자연히 인구 감소로 이어지는 현실적인 결과를 도출한 것. 이런 상식적이면서도 당연할 수도 있을 생각을 왜 여태 해보지 못했을까?

 

 

 

 

 

인류의 85%가 소위 ‘선진국’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다. 나머지 15% 중 상당수는 두 사각형 사이에 있고, 세계 인구의 6%에 해당하는 13개 나라만 여전히 ‘개발도상국’ 안에 있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는데, 적어도 서양인의 머릿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대로다. 서양인 대부분은 시대착오적 생각에 사로잡혀 서양 이외의 세상을 바라본다.

(...)

한마디로, 세상은 더 이상 예전처럼 둘로 나뉘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다수가 중간에 속한다. 서양과 그 외,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부자와 빈자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간극을 암시하는 이쪽 또는 저쪽이라는 단순한 분류는 쓰지 않는 게 옳다.(46p)

 

 

그렇다면 부자와 빈자 사이에 간극이 존재한다는 오해는 왜 그토록 바뀌기 어려운 것일까?

내 생각에 인간에게는 이분법적 사고를 추구하는 강력하고 극적인 본능이 있는 것 같다. 어떤 대상을 뚜렷이 구별되는 두 집단으로 나누려는 본능인데, 두 집단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실체 없는 간극뿐이다. 우리는 이분법을 좋아한다. 좋은 것과 나쁜 것, 영웅과 악인, 우리 나라와 다른 나라. 세상을 뚜렷이 구별되는 양측으로 나누는 것은 간단하고 직관적인 뿐 아니라, 충돌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극적이다. 우리는 별다른 생각 없이 항상 그런 구분을 한다.

언론인도 이를 잘 안다. 이들은 전달하려는 이야기를 서로 반대되는 두 부류 사람들, 반대되는 두 시각, 반대되는 두 집단 사이의 갈등으로 구성한다. 이들은 절대다수 사람들이 서서히 더 나은 삶으로 편입되는 이야기보다 극빈층과 억만장자의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언론인은 이야기꾼이다. 다큐와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다큐는 힘없는 개인을 거대하고 사악한 기업에 맞서게 한다. 블록버스터 영화는 악에 맞서는 선을 주요 인물로 다룬다.(60p)

 

 

이처럼 서로 반대되는 이야기는 흥미롭고 도발적이며 솔깃해서 간극 본능 매우 쉽게 촉발하지만,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 세상에는 늘 억만장자도 있고 극빈층도 있으며, 최악의 정권도 있고 최고의 정권도 있다. 그러나 극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다수는 대개 중간에 속하고, 그런 점에서 보면 아주 다른 이야기가 전개된다.(65p)

 

 

그런 식의 생각은 대개 부정 본능 때문이다. 좋은 것보다 나쁜 것에 더 주목하는 본능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원인이 작용한다. 하나는 과거를 잘못 기억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언론인과 활동가들이 사건을 선별적으로 보도하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상황이 나쁜데 세상이 더 좋아진다고 말하면 냉정해 보이기 때문이다.

 

경고: 기억은 대상을 미화한다

 

예나 지금이나 나이 든 사람은 유년 시절을 미화하면서 세상이 예전 같지 않다고 우긴다. 어느 면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그들의 의도와는 다른 쪽에서 그렇다. 세상은 예전 같지 않다. 하지만 예전은 대부분 더 좋았던 게 아니라 더 나빴다. 그럼에도 인간은 옛날의 ‘진짜 모습’을 너무나 쉽게 잊는다.(95p)

 

 

그렇다. 만사 오케이는 아니다. 여전히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항공기 사고가 일어나고, 막을 수 있었던 사고로 아이가 죽고, 어떤 것은 멸종위기에 처하고,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사람이 있고, 남성우월주의자가 있고, 미친 독재자가 있고, 유독성 폐기물을 버리고, 언론인을 수감하고, 성차별로 여자아이가 교육을 받지 못한다. 이런 심각한 일이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안심할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이룩한 발전을 외면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터무니없고 스트레스다. 사람들은 내가 그들이 몰랐던 거대한 발전을 보여준다는 이유로 나를 종종 낙천주의자라고 말한다. 그럴 때마다 화가 난다. 나는 낙천주의자가 아니다. 순진한 소리나 떠벌리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아주 진지한 ‘가능성 옹호론자’다. 이는 내가 지어낸 말인데, 이유 없이 희망을 갖거나 이유 없이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에 끊임없이 저항하는 사람을 뜻한다. 나는 가능성 옹호론자로서 이 모든 발전을 바라보고, 앞으로도 더 발전하리라는 확신과 바람을 갖고 있다. 낙천주의가 아니라 상황을 명확하고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세계를 건설적이고 유용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아무것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지닌 사람은 인간의 노력이 이제까지 아무런 결실도 거두지 못했다고 판단한 채 그러한 결실을 증명하는 수치를 믿으려 하지 않는 것 같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을 자주 만나는데, 그들은 인류에 대한 희망을 모두 잃었다고 말한다. 아니면 우리가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데도 역효과를 보여주는 극적 수치만 믿는 것 같다.(100-101p)

 

 

끔찍한 소식을 들었을 때 침착하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라. 이 정도의 긍정적 발전이 있었다면 내가 그 소식을 들었을까? 대규모 발전이 수백 건 있었다 한들 내가 그 소식을 들었을까? 아이가 익사하지 않았다는 소식은? 창밖이나 뉴스에서, 자선단체 홍보물에서 아동 익사 사고나 결핵 사망이 줄었다는 소식을 볼 수 있을까? 긍정적 변화는 훨씬 흔하지만 그 소식은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하라. 우리가 직접 찾아봐야 한다(104p)

 

 

그들의 논리는 이렇다. “가난한 아이들을 계속 살리면 인구 과잉으로 지구가 멸망할 것이다.”

(...) 절대 아니다! 완전히 틀린 말이다.

극빈층 부모는 내가 앞서 말한 이유로 자녀가 많아야 한다. 아동 노동력 때문만 아니라 일부 아이가 죽을 경우를 대비해서다. 여성이 자녀를 5~8명 정도로 매우 많이 낳는 나라는 소말리아, 차드, 말리, 니제르 등 아동 사망률이 아주 높은 나라다. 그러나 아이들의 생존율이 높아지면, 아이들을 노동에 동원할 필요가 없어지면, 여성이 교육받고 정보를 얻어 피임할 수 있으면, 문화와 종교에 상관없이 남성과 여성 모두 자녀를 적게 낳아 제대로 교육할 꿈을 꾸기 시작한다.

“가난한 아이를 구하면 인구는 ‘단지’ 늘어난다”는 말은 옳은 것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극빈층 탈출이 늦어질 때 인구는 ‘단지’ 늘어난다. 극빈층에 갇힌 세대가 오히려 다음 세대 인구를 더 증가시킬 것이다. 인구 성장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하게 증명된 방법은 극빈층을 없애고, 교육과 피임을 비롯해 더 나은 삶을 제공하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삶이 나아진 부모는 자녀를 더 적게 낳는 쪽을 선택했다.(130-131p)

 

 

1단계와 4단계 나라에서는 낮은데, 중간 단계 나라에서는, 그러니까 다수 나라에서 높게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예를 들어 치아 건강은 1단계에서 2단계로 옮겨가면서 오히려 나빠지고, 4단계로 가면 다시 좋아진다. 사탕이나 과자 등을 사먹을 여유가 없다가 형편이 되면 곧바로 사 먹지만, 3단계 전까지는 정부가 충치 예방 교육에 우선순위를 둘 형편이 못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실한 치아는 4단계에서 상대적 가난함을 보여주는 지표이지만, 1단계에서는 정반대의 지표가 된다.

교통사고도 비슷한 낙타 혹 모양이다. 1단계 나라는 1인당 자동차 수가 적어 교통사고도 적다. 2단계와 3단계 나라에서는 가장 가난한 사람은 걷고, 그 밖의 사람은 승합차는 오토바이·자동차로 다니기 시작한다. 하지만 도로와 교통 규제, 교통안전 교육이 여전히 부족해 교통사고는 정점에 이른다. 그러다가 4단계에 오면 다시 줄어든다.(137-138p)

 

 

2006년에는 세계보건기구가 드디어 모든 과학적 검토를 마치고 질병통제예방센터와 마찬가지로 DDT를 인간에게 ‘미약하게 해로운’ 물질로 분류하며, 많은 상황에서 건강에 해로운 점보다 이로운 점이 많다고 보고했다.

DDT는 대단히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찬반이 동시에 존재한다. 예를 들어 모기가 창궐하는 난민촌에서 DDT는 목숨을 구하는 가장 빠르고 가장 값싼 방법일 경우가 많다. 미국인, 유럽인 그리고 공포에 사로잡힌 로비스트들은 질병통제예방센터와 세계보건기구가 내놓은 장문의 연구 결과와 짧은 권고안을 읽으려 하지 않을뿐더러 DDT 사용에 대해 토론할 준비조차 하지 않는다.(166-167p)

 

 

“찢어지게 가난한 상황에서는 무엇이든 완벽하게 하려 하면 안 돼요. 그러면 더 좋은 곳에 쓸 자원을 훔치는 꼴이니까요.”

수치보다 눈에 보이는 피해자 개개인에게 지나치게 주목하면 우리 자원을 문제의 일부에만 모두 쏟아부을 수 있고, 따라서 훨씬 적은 목숨을 구할 뿐이다. 이런 원칙은 부족한 자원을 어디에 쓸지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 경우에 모두 해당한다.(181p)

 

 

우리는 나열된 모든 문제를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그중 더 중요한 문제가 몇 개 있다. 사망 원인에 관한 문제든, 예산에 관한 문제든 나는 전체의 80%를 차지하는 문제에 먼저 주목한다.(191p)

 

 

개인 식별 부호인 핀 코드를 응용해 세계 핀 코드를 1-1-1-4로 만들어보자. 세계 인구 지도를 외우는 방법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왼쪽에 놓고,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10억의 개수로 만든 핀 코드다. 아메리카 1, 유럽 1, 아프리카 1, 아시아 4(반올림한 값). 다른 모든 핀 코드처럼 이 핀 코드도 바뀔 것이다. 유엔은 21세기 말이 되면 아메리카와 유럽 인구는 거의 변하지 않겠지만, 아프리카는 30억이 늘고 아시아는 10억이 늘 것으로 예상한다. 따라서 2100년이면 세계의 새로운 핀 코드는 1-1-4-5가 될 것이다. 세계인구의 80% 이상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살게 된다는 이야기다.(194p)

 

 

사람들은 ‘밖에’ 있는 온갖 위험을 걱정한다. 자연재해로 많은 사람이 죽고, 질병이 퍼지고, 비행기가 추락한다. 이 모든 일이 밖에서, 수평선 저 너머에서 늘 일어난다.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 끔찍한 사건은 우리가 사는 안전한 장소인 ‘여기’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저 밖에서는 날마다 일어나는 것만 같다. 하지만 기억하라. ‘저 밖’은 무수히 많은 장소의 합이고, 우리는 한곳에 산다. 물론 나쁜 일은 저 밖에서 일어난다. 저 밖은 여기보다 훨씬 크다. 따라서 저 밖에 있는 모든 장소가 우리가 사는 이곳만큼 안전해도 끔찍한 사고 수백 건은 여전히 저 밖에서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그 장소를 하나하나 따로 추적해보면 대부분이 얼마나 평화로운지 깜짝 놀랄 것이다. 그러다 끔찍한 일이 벌어진 그날 하루가 뉴스에 나온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날은 그곳 소식을 들을 일이 없다.(200p)

 

 

국가는 달라도 소득수준이 같으면 삶이 놀랍도록 닮았고, 국가는 같아도 소득수준이 다르면 삶의 방식이 천차만별임을 보여주는 사진으로 책 전체를 채울 수도 있다. 사진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주된 요소는 종교나 문화, 국가가 아니라 소득이라는 점이다.(220p)

 

 

어떤 나라에 대한 고정관념은 그 나라 내부의 상당한 차이를 보는 순간, 그리고 문화나 종교에 상관없이 소득수준이 같은 여러 나라 사이에서 상당한 유사점을 보는 순간 무너져버린다.(223-224p)

 

 

전체 집단의 특징을 설명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화학물질 공포증은 강렬한 인상을 주는 예외적인 해로운 물질 몇 가지를 일반화한 데서 생긴다. ‘화학물질’이라고 하면 무조건 겁부터 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화학물질로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천연 제품도 그렇고, 공산품도 그렇다. 비누, 시멘트, 플라스틱, 세탁 세제, 화장실 휴지, 항생제 등은 내가 가장 좋아하거나 없어서는 안 될 화학물질이다.(226p)

 

 

“가족을 꾸릴 계획이신가요?” 내가 물었다. 무례하게 행동할 뜻은 없었다. 우리 스웨덴 사람은 (요즘) 그런 주제를 즐겨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여성도 내 솔직한 질문을 문제 삼지 않았다. 여성은 웃음 띤 채 내 어깨 너머로 바닷가의 지는 해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가 있으면 어떨까 날마다 생각해요.” 그리고 내 눈을 똑바로 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남편을 상상하면 참을 수가 없어요.”(253p)

 

 

우리는 단순한 생각에 크게 끌리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통찰력의 순간을 즐기고, 무언가를 정말로 이해한다거나 안다는 느낌을 즐긴다. 주의를 사로잡는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해, 그것이 다른 많은 것을 훌륭하게 설명한다거나, 다른 많은 것의 훌륭한 해결책이 된다는 느낌까지 매끄럽게 쭉 이어지기 쉽다. 세계가 단순해지고, 모든 문제는 단 하나의 원인이 있어 항상 그것만 반대하면 그만이다. 또 모든 문제는 하나의 해결책이 있어 항상 그것만 지지하면 그만이다. 모든 것이 단순하며, 사소한 문제 하나만 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세계를 완벽하게 오해한다. 나는 단일한 원인, 단일한 해결책을 선호하는 이런 성향을 ‘단일 관점 본능’이라 부른다.

(...)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시간이 많이 절약된다. 어떤 문제를 밑바닥부터 배우지 않고도 의견과 답을 낼 수 있고, 따라서 다른 문제에 신경 쓸 여유도 생긴다. 하지만 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올바른 방법이 못 된다. 특정 생각에 늘 찬성하거나 늘 반대한다면 그 관점에 맞지 않는 정보를 볼 수 없다. 현실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런 식의 접근법은 대개 좋지 않다.

그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생각에 허점은 없는지 꾸준히 점검해보라.(266-267p)

 

 

뭔가 잘못되면 나쁜 사람이 나쁜 의도로 그랬으려니 생각하는 건 무척 자연스러워 보인다. 우리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누군가가 그걸 원해서 그리되었다고 믿고 싶고, 개인에게 그런 힘과 행위능력이 있다고 믿고 싶어진다. 그러지 않으면 세계는 예측 불가능하고, 혼란스럽고, 무서울 테니까.

비난 본능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중요성을 과장한다. 잘못 한 쪽을 찾아내려는 이 본능은 진실을 찾아내는 능력,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이해하는 능력을 방해한다.(294-295p)

 

 

나는 앞에서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는 비난할 사람을 찾기보다 시스템을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일이 잘 풀릴 때도 두 종류의 시스템에 더 많은 공을 돌려야 한다.

인간의 성공 뒤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배우들은, 위대하고 전능한 지도자에 비해 평범하고 지루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을 칭송하고 싶다. 자, 그럼 세계 발전에 기여했지만 찬양받지 못한 영웅을 위한 퍼레이드를 벌여보자. 그 영웅은 제도나 체계 같은 사회 기반, 그리고 기술이다.(310-311p)

 

 

ㅡ 한스 로슬링, <팩트풀니스> 中,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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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5/9

 

몇몇의 언어유희는 조금 과했지만 근자에 읽을 책 중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낄낄거리며 웃기다가도 어느새 감동을 주는 부러운 글 솜씨다. 읽고만 있어도 술 생각이 절로 나도록 하는 책이라 집에서 혼술 했음 ㅋㅋ

 

 

 

나에게는 어떤 대상을 말도 안 되게 좋아하면 그 마음이 감당이 잘 안 돼서 살짝 딴청을 피우는, 그리 좋다고는 하지 못할 습관이 있다. 말도 안 되게 좋아하다 보면 지나치게 진지해지고 끈적해지는 마음이 겸연쩍어 애써 별것 아닌 척한다. 정성을 다해 그리던 그림을 누가 관심 가지고 살펴보면 괜히 아무 색깔 크레파스나 들어 그림 위에 회오리 모양의 낙서를 마구 해서 별것 아닌 것처럼 만들던 여섯 살 적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말도 안 되게 좋아하는 걸 말이 되게 해보려고 이런저런 갖다 붙일 이유들을 뒤적이기도 한다. 그래서 술을 좋아하는 것 같다. 술은 나를 좀 더 단순하고 정직하게 만든다. 딴청 피우지 않게, 별것 아닌 척하지 않게, 말이 안 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채로 받아들이고 들이밀 수 있게.(13-14p)

 

 

그는 예상보다 훨씬 좋은 술 친구였다. 정치적 성향과 세계관이 비슷했고, 무엇보다 유머 코드가 잘 맞았다. 사실 웃을 수 있는 포인트가 비슷하다는 건, 이미 정치적 성향과 세계관이 비슷하다는 말을 포함하고 있다. 무엇을 유머의 소재로 고르는지 혹은 고르지 않는지(후자가 좀 더 중요한 것 같다), 그걸 그려내는 방식의 기저에 깔린 정서가 무엇인지는 많은 것을 말해주니까.(77p)

 

 

냉장고 문을 닫는 순간 몇 시간 후 시원한 술을 마실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듯이, 신나서 술잔에 술을 따르는 순간 다음 날 숙취로 머리가 지끈지끈할 가능성이 열리듯이, 문을 닫으면 저편 어딘가의 다른 문이 항상 열린다. 완전히 ‘닫는다’는 인생에 잘 없다. 그런 점에서 홍콩을 닫고 술친구를 열어젖힌 나의 선택은 내 생애 최고로 술꾼다운 선택이었다. 그 선택은 내 생애 최고로 술꾼다운 선택이었다. 그 선택은 당장 눈앞의 즐거운 저녁을 위해 기꺼이 내일의 숙취를 선택하는 것과도 닮았다. 삶은 선택의 총합이기도 하지만 하지 않은 선택의 총합이기도 하니까. 가지 않은 미래가 모여 만들어진 현재가 나는 마음에 드니까.(90p)

 

 

그날 이후 몇 달 간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어쩐지 나는 좀 힘을 내기 시작했다. 당장에 나아진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무너지기 직전의 다리를 가까스로 건너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힘내라는 말과 그 비슷한 종류의 말들을 더 이상 싫어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할 수도 있게 되었다. 아무런 힘이 없어 누군가의 귀에 가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툭 떨어지는 말일지라도, 때로는 해야만 하는 말이 있다.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쉬운 말 밖에 없을지라도, 이런 쉬운 말이라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언젠가 가닿기를, 언젠가 쉬워지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소망이 단단하게 박제된 말은 세상에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바닥에라도 굴러다니고 있으면 나중에 필요한 순간 주워 담아갈 수 있으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우리는 언젠가 힘을 내야만 하니까. 살아가려면.(61-62p)

 

 

그래서 우리는 재작년부터 ① 가급적 평일에는 마시지 말 것, ② 마시더라도 새벽 1시 전에는 끝낼 것, ③ 마시더라도 (1인당) 소주 한 병/맥주 세 병/와인 한 병/위스키나 보드카 넉 잔을 넘기지 말 것(/ 표시는 ‘or’이다. ‘and’가 아니니 착오 없길 바란다···) ④ 마시더라도 괜찮은 안주를 곁들여 마실 것, 이라는 규칙을 정했다. 건강에 신경을 쓰는 거라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잘 모를 규칙이다···. 게다가 ‘마시더라도’에 해당하는 상황이 지나치게 세분화 되었다는 점에서 결국 마시게 될 거라는 패배주의가 짙게 깔려 있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가급적’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편리한 말인지. ‘하지 말라’는 말을 꾸며주는 척하지만 슬그머니 ‘해도 된다’의 편도 들어주니 말이다.(93p)

 

 

“나는 처음부터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에 상응하는 경로를 골랐어. 하지만 지금 나는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아니면 고통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이건 바로 내가 술집에 들어갈 때마다 겪는 딜레마다. 특히 음주를 시작하기 애매하디애매한 함정 같은 시간에, 환희의 극치일까, 고통의 극치일까, 가는 기차는 천국행이고 돌아오는 기차는 지옥행일 이상한 왕복 기차권을 끊을지 말지, 그냥 얌전히(?) 걸을지 오늘도 목하 고민 중이다.(100p)

 

 

지난주는 요가의 완패이자 나의 완패였다. 전어회가 제철이라, 막장과 마늘을 살짝 올린 기름진 전어에 소주를 마시느라고, 아버지가 담가준 김치가 막판이라, T가 신김치를 바닥까지 싹싹 긁어 스팸과 집에 있는 모든 야채를 다 넣고 볶은 뒤 흰자는 튀기듯이 바삭하게 노른자를 톡 치면 흘러내리게 익힌 달걀프라이를 얹어 내온 김치볶음밥에 소주를 마시느라고,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 날 으슬으슬한 게 오뎅 바가 제격이라, 무가 적당히 우려진 국물에 담겨 푹 익기 직전의 오뎅 꼬치를 쏙쏙 빼어 먹으며 온 사케를 마시느라고, 외근이 끝나니 광장시장 근처라, 빈대떡과 고기완잔에 막걸리 두 병을 비우고 두 번째 시킬 때 넉넉히 담아 주셔서 아직도 많이 남은 큼직큼직 썬 양파를 툭툭 넣은 간장만으로 막걸리 한 병을 더 비우느라고, 금요일이라, 매주 듣는 강의가 끝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자카야에 들어가 내가 굴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인 바삭한 굴튀김과 어떻게 해 먹어도 기본은 가는 가라아게에 하이볼을 마시느라고.

이게 지난주의 전적이다. 주말에 마신 와인은 쓰지 않겠다. 사이사이 마신 맥주는 아예 써주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지지난주라고 뭐가 달랐을까? 답하지 않겠다···.

솔직히 이번 주도 완패할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오늘은 요가가 술을 이겼다. 무려 홍어회를 이겨내고 요가를 다녀온 것이다! 갑자기 강철 의지력이 생겨났을 리는 없고 어제 이미 질릴 정도로 많이 마셨기 때문이다. 역시 ‘오늘의 술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건 그나마도 ‘어제 마신 술’밖에 없다.

앞으로도 퇴근길마다 뻗쳐오는 유혹을 이겨내고 술을 안 마시기 위해서라도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렇다.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일을 위해 오늘도 마신다.(103-104p)

 

 

테이크가 거듭될수록 선배는 우리가 더 앙칼지게 고함을 쳐주기를 바랐다. 사전 의논 때는 요구하지 않았던 쌍욕도 마구 섞어보기를 바랐다. 여자들이라고 업신여기다 혼쭐이 나는, 얌전해 보였던 여자들이 사실은 싸움꾼이었다는, ‘전복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장면이 되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전복이라··· 이런 사소한 시비에서 전복 같은 걸 이루려면 여자들이 남자 차를 뒤집어버리는, 말 그대로 차를 전복시키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물론 우리는 차를 뒤집지 않았다. 대신 감독의 속을 뒤집었다.(110p)

 

 

한때는 두 달에 한 번은 만났던 넷이서 다 같이 모이기까지 2년이 걸렸다. 주인이 직접 빚고 발효시키는 수제 막걸리집에서 만났다. 네 종류의 막걸리가 피처에 담겨 나오는데 계절의 이름을 따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했다. 그동안 만나지 못한 2년을 상쇄하자는 뜻에서 사계절을 두 바퀴 돌아 여덟 피처를 마시기로 다짐하고 시작했건만, 여섯 번째 피처에서 실패했다. 모두 이제 주량도, 상황도 예전 같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가을과 겨울, 두 계절을 함께하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모두가 “가을, 겨울도 다 마셨어야 했는데!”라며 계속,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해가면서 아쉬워했던 것은, 이 가게를 나가는 순간, 함께하지 못할 더 많은 계절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사실에서 애써 고개를 돌리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121-122p)

 

 

향을 맡을 때까지만 해도 큰 기대는 없었다(‘맛있는 와인 맛’, 딱 그거겠지). 하지만 첫 모금을 입에 머금는 순간, 나는 나의 시간에 어떤 선이 그어지는 것 같은 선명한 기분을 느꼈다. 넘기 전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할 선. 한 모금씩 천천히 마실 때마다 와인에 완전히 혀를 붙들리는 바람에 말을 잃어갔고, 붙들린 혀에서는 둔한 감각을 찢고 들어온 핏빛 액체에 놀란 1만 개의 미뢰가 번쩍번쩍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맛이 주는 충격이었다. 아무리 기분 좋은 감각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충격’이라고 부를 만한 강도를 갖고 있다면 어느 정도는 난폭할 수밖에 없어서,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페트뤼스에 그동안 마셔왔던 와인의 기억들이 조금씩 부서지고 깎여나갔다. 나는 그 맛과, 내 몸속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들의 감각을 최대한 느끼고 싶어서 한동안 조용히 와인만 마셨다.(131p)

 

 

그날 나는 처음으로 취향의 확장과 감당의 깜냥에 관해 생각했다. 그동안 돈이 많이 나가는 취미를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던 데다가, 취향이라는 것은 경험, 사유, 지식, 능력, 근육량과 함께 확장하면 할수록 좋은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던 나에게는 새로운 종류의 고민이었다. 따져봐야 할 것들이 많았다. 이 취향의 세계에서 지속적 만족을 얻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지속적 만족이 불가능하다면 그 반작용으로 생길 지속적 결핍감에 대처할 수 있는가. 취향 확장비(혹은 유지비)를 나의 노동력과 시간으로 환산했을 때,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는가. 취향 확장비로 얻을 수 있는 다른 것들과 비교했을 때,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게 확실한가.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너는 취향의 확장을 감당할 깜냥이 되는가!

취향의 확장과 함께 넓어지는 세계. 멋진 말이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그게 와인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돈으로 결코 환산할 수 없는 충만한 기쁨과 소중한 기억들을 안겨줄 테고, 그건 분명 멋진 세계일 것이다. 하지만 그 멋짐을 마음 편히 누릴 수 있는 사람에 나는 해당하지 않는 것 같았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대개의 취향은 돈을 먹고 자란다. 그 때문에 어떤 취향의 세계가 막 넓어지려는 순간 그 초입에 잠시 멈춰 서서 넓어질 평수를 계산하고 예산을 미리 짜보지 않고서는 성큼 걸어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확장공사 다 해놨는데 잔금 치를 돈이 없으면 그때 가서는 어떡해? 그 돈으로 다른 좋은 걸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깊이 고민한 끝에 나는 초입에서 돌아 나오기로 결정했다. 계속 걸어갈 자신이 없었다.(134-135p)

 

 

무엇보다 만취 상태로 곧바로 건너뛰기에는, 술 동무와 함께 서서히 취기에 젖어드는 과정이 주는 매력을 무시할 수 없다. 때로는 이게 내가 술을 좋아하는 이유의 전부 아닐까 생각할 정도로. 뾰족하게 깎아놓은 연필을 백지에 쓱쓱쓱쓱 계속 문지르다 보면 연필심이 점점 동글동글 뭉툭해지는 것처럼, 어른으로서, 사회인으로서, 그 밖의 대외적 자아로서 바짝 벼려져 있던 사람들이 술을 한 잔 두 잔 세 잔 마시면서 조금씩 동글동글 뭉툭해져가는 것을 보는 것이 좋다. 술이 우리를 조금씩 허술하게 만드는 것이 좋다. 그래서 평소라면 잘 하지 못했을 말을 술술 하는 순간도 좋다.(165-166p)

 

 

ㅡ 김혼비, <아무튼, 술> 中, 제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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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5/8

 

 

절대로, 말도 안 돼요! 이걸 직업으로 하라고요? 빅토르처럼 예술학자나 문학자가 되라고요?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아빠. 아빠는 절 존중하지 않는군요. 말재주가 좀 있고, 그림을 잘 안다는 이유만으로 평생을 예술과 함께하라고요? 오, 아녜요. 괜찮아요. 예술에 온전히 몰두한다는 건 뭔가 자신만의 것을 만들 때만 가능한 거라고요. 이해력이라는 건 나쁘지 않은 머리에 불과해요. 예술에 대한 이해라는 게 직업이 될 수 있나요? 게다가 예술학자라는 말을 들을 때면 웃음이 나온다고요.(15p)

 

 

처음에 난 그렇게 집이 밀집해 있는데 왜 그녀가 커튼을 달지 않았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이쪽 벽에서 저쪽 벽까지 슬픈 철골 침대와 유모차가 자세히 보이는데 말이야. 얼마 후에야 난 알게 되었어. 그녀는 그럴 여력이 없었던 거야. 매일 밤마다 배고픈 아이의 울음소리에 깨어 베개에서 무거운 머리를 겨우 떼내고, 온몸이 솜 같다가도 동시에 납 같고, 이건 몇 달 동안 매일,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매일 잠 반복되는 거야. 그렇다면 창문을 통해 이웃들이 무엇을 보든 말든 신경 쓸 여력이 없어지고, 본다 하더라도 될 대로 되라는 식이 되어버리는 거지.(25p)

 

 

맞아요, 당신은 떠나진 않았어요. 그렇지만 남지도 않았죠. 그게 가장 무서웠어요. 당신은 지난 오 년간 매일 절 처형했다고요. 전 당신이 떠나기만을 매일같이 기다렸어요. 처음엔 기대하는 구석도 있었죠. 당신이 그렇게도 아이를 사랑하니 언젠간 이해해서 저를, 그의 엄마를 용서해줄 것 같았거든요. 이해와 용서요.

매일 밤 전 마비된 심장을 안고 긴장한 채 누워 복도에 울려 퍼지는 당신의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방으로 들어오면 전 당신에게 몸을 던지고, 당신의 무릎을 붙잡고 당신이 절 용서할 때까지 울부짖고, 또 울부짖으며, 기어 다니려고 기다렸다고요. 그러면 우리 사이는 다시 좋아질 테니까요.

아뇨! 당신의 발자국 소리는 변함없이 문 옆을 지나쳤고, 낮에 당신은 방으로 들어오기 전 노크를 했어요. 당신은 정중하게 노크했다고요. 오, 사랑하는 여보. 당신은 예의 바른 사람이에요. 오 년간 우리 아파트는 하숙집이었어요. 그래도 전 여전히 기다렸어요. 그리고 빅토르를 끊임없이 밀어냈죠. 전 어떤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사 년 동안에는 혐오스러운 그를 밀어냈어요. 그리고 결국 포기했죠.(75p)

 

 

이 정류장에는 8번 트롤리 버스와 11번 트롤리 버스만이 섰다. 그녀는 11번 트롤리 버스를 기다렸고, 매번 그렇듯이 그녀가 11번 트롤리 버스를 기다릴 땐 8번 트롤리 버스만이 한두 대씩 왔고, 11번 트롤리 버스는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8번 트롤리 버스는 백 대나 다니고, 11번 트롤리 버스는 단 두 대만 운행되지만, 그마저도 운전수가 모두 술에 취해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196p)

 

 

누군가 아주 멋진 말을 했죠. ‘인생이란 복잡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모두를 지켜주는 방패막이 역할을 하는 말이에요. ‘인생이란 복잡한 것이다.’ 이 말이면 충분해요! 세상의 모든 실수나 잘못에 대한 완벽한 변명. 전 비난할 수 있는 재판관도, 용서할 수 있는 예수님도 아니에요, 아빠. 저는요 아빠, 그저 무관심한 사람에 불과해요···.(209p)

 

 

꽤 오랜 시간 동안 선생님의 남편은 내게 사고의 대상이었다. 포도를 선물한다는 사실 그 자체와 포도를 선물할 때 따라오는 그의 얼굴 표정 사이의 간극이 놀라웠다. 나는 그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 생각했다. 뭔지 모를 힘으로 이끌기 위해 나에게 포도를 선물하는 악당인지, 아니면 바보 같은 바지와 셔츠를 입고 악한 힘이 아닌 다른 힘에 의해 침묵하며 포도를 건네는 면도하지 않은 시무룩한 얼굴을 한 선량한 사람인지···.(226p)

 

 

중요한 건 이 사건 이후 몇 년 내내, 어른이 된 후에도 내 악행에 대한 무서운 비밀을 안고 다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어디서 누군가가 강도를 당해 귀중품 삼천 루블어치를 잃었다는 이야기를 내 앞에서 할 때면 나는 속으로 움찔하며 ‘나도 그랬는 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단 일 분이라도 남의 집에 홀로 남겨지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내 안에서 비밀스러운 백작의 병이 깨어날까 봐 두려웠다.(238p)

 

 

예기치 못한 나의 콘서트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의 마음에 큰 반전을 일으켰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예술이 갑자기 인간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예술은 단 한 방울로 인간을 유혹해 곱사등으로 만들어 끌고 가려는 악의 바위를 조금씩 허물어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동년배 빡빡머리 중 한 명이 복역을 마치고 위대한 힘으로 자신의 운명의 관성에 맞서 싸워 보통의 삶의 궤도로 탈출한다면, 나는 오래 전 그 예술의 한 방울이, 순진했던 나의 그 콘서트가 구제불능이었던 인간의 귀중한 노력에 힘을 보탰다는 생각에 흐뭇할 것이다.(351p)

 

 

ㅡ 디나 루비나, <토요일에 눈이 내리면> 中, 이야기가있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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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5/4

 

 

 

 

리베로 파르리가 무신론자도 사회주의자도 아닌 것은 그저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한두 시간을 내서 조금 알아볼 기회가 있었다면 그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 되었을 터였다. 아무튼 그는 신부들을 좋아하지 않았다.(37p)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리기 위해서든 아들이 계속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든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한 치의 의심도 배어 있지 않은 그 엄격한 태도에서 그는 아버지가 되는 법을 배웠다.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갈 줄 아는 것, 어른의 큰 걸음으로 무정하게 걸어가되 아들이 이해하고 작은 걸음으로도 따라올 수 있도록 분명하고 규칙적인 걸음으로 걷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아이의 앞에서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되 아이가 길을 잃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게 하고 함께 걷는 것이 땅에 쓰여 있는 것처럼 의심할 바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40p)

 

 

어쨌거나 당신 말이 맞아요. 나는 안 된다고 말했지만 속으로는 좋다고 생각했어요. 이유는 말하지 않겠어요. 설령 당신이 모든 것을 알고 싶다고 해도, 나 자신에게조차 말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야 우리 모두의 마음이 더 편할 테니까요.(67p)

 

 

어느 날 리베로 파르리는 종이 한 장을 가져다가 아들에게 굽이들을 그려주었다. 먼저 산을 그리고, 산꼭대기에 이르는 길을 나타냈다. 그는 산길이 얼마나 구불구불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굽이들을 일일이 강조해서 그렸다. 울티모는 실망하기는커녕 그 그림에 매혹되었다. 울티모는 탁 트인 지평에 변화를 주는 것이라고는 피아세베네 둔덕밖에 없는 평원에서 자랐다. 이런 아이에게는 차가운 뱀처럼 구불거리며 산꼭대기로 올라가는 도로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곡선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그 곡선에 손가락을 대고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갔다.

“산 너머도 이와 비슷해. 다만 그쪽은 내리막길이지.”(69-70p)

 

 

이야기야말로 아들과 이렇게 가까이 있는 시간을 길게 늘이는 방법이었다. 그는 울티모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신 자기 어머니 얘기를 꺼냈다. 어머니가 호두를 깰 때 아주 독특한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이며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기상천외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또 어머니가 강물에 빠진 아버지를 건져 올렸던 일이며 아버지랑 다시는 자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연도 이야기해주었다. 이어서 그는 길에 관한 추억을 떠올렸다.

(...)

어찌 보면 우리가 하는 일이란 그저 남들이 다 끝내지 못하고 남겨둔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거나 다른 사람들이 우리 대신 마무리할 일을 시작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91-93p)

 

 

다른 곳에서는 죽음이 하나의 사건이라면 전선에서는 죽음이 하나의 질병, 그것도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살아 나가더라도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을 거야. 아마 영원히 그럴걸, 하고 그는 말했다.(143p)

 

 

이 유형에서 그들이 알고 있는 기하학은 오로지 적을 앞쪽에 두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유일한 도식에 너무 많은 시간과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바쳤다. 급기야 그 도식은 존재의 한 형식이 되고 지각의 확고부동한 틀이 되고 말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선험적으로 주어진 그 기하학의 틀 안에서 벌어졌다.

(...)

그래서 적이 뒤쪽에서 공격 해온다는 가정은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의 목록에서 빠지게 되었다. 완전한 고립이라는 비현실적인 맥락에서 실제로 적의 후방 공격이 벌어졌을 때, 그들이 대응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아마도 그것을 전투 상황으로 해석하기보다 전투 자체가 마법적으로 중단되거나 모든 것이 갑자기 붕괴된 것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158-159p)

 

 

도로 하나를 건설하려고 해요. 어디에다 낼지는 모르지만 길을 하나 낼 거예요. 아무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 길입니다. 시작하는 곳에서 끝나는 길이죠. 아무것도 없는 땅, 막사나 울타리 따위도 없는 땅의 한복판에 닦을 거예요.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길이 아니라 일종의 경주로입니다. 그 길은 세상 어디로도 통하지 않아요. 자기 자신에게로 통하는 길이니까요. 그 길은 세상 밖에 있게 될 것이고 일체의 불완전함에서 멀리 벗어나게 될 거예요. 그것은 지상의 모든 길을 하나로 아우른 길이며 언젠가 길을 떠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다르기를 꿈꾸는 곳이 될 것입니다. 제가 직접 그 길을 설계할 거예요. 그리고 이거 아세요? 저는 그 작업을 아주 오랫동안 하면서 제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굽이 한 굽이를 차례차례 담을 겁니다. 제 눈으로 본 건, 제 눈이 잊지 않은 것을 모두 거기에 담으려고 해요. 그 어느 것도 빠뜨리지 않을 거예요. 서산에 지는 해의 곡선이나 어떤 미소의 주름까지 말입니다. 제 인생을 수놓은 그 어떤 일도 제가 헛되어 겪은 일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특별한 땅이 되고 영원한 그림이 되고 고스란한 자취가 될 테니까요. 말씀드리고 싶은 게 한 가지 더 있어요. 그 길이 완성되면, 저는 혼자 자동차를 타고 그 길을 달릴 생각입니다. 처음엔 천천히, 그러다가 점점 빠르게 달릴 거예요. 두 팔에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 돌 겁니다. 그러고 나면 제가 하나의 완전한 고리를 주파했다는 확신이 들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면 저는 제가 출발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멈출 거예요. 그런 다음 자동차에서 내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겁니다.(230-231p)

 

 

내가 보기에 그건 어리석은 짓이야. 우리를 배신하는 사람들은 많아. 그들 모두에게 계속 신경을 써야 한다고 생각해봐. 그건 영리한 일이 아냐. 울티모, 그들을 용서하는 게 현명해.

그건 용서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냐. 나는 카비리아를 용서했어. 하지만 나에게 그는 이제 존재하지 않아. 누구에게 기억된다는 것은 중요한 거야. 죄인은 없어. 존재하기를 멈추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지. 누군가를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야. 그건 정당해.(282-283p)

 

 

우리의 삶은 은둔자들의 삶만큼이나 단조로웠다. 우리는 기이한 망명 생활을 하듯 젊은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었으랴. 그저 우리가 가지지 않은 것을 상상할 수밖에.(301p)

 

 

나는 이제 사람들의 고상함에 대해 환상을 갖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의 불완전함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그 놀라운 기술을 높이 평가할 줄 안다. 이제 나는 관대하다. 타인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그러니까 나는 과도하거나 어리석은 짓을 하면서 늙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 셈이다.(304p)

 

 

아무튼 과거의 숱한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그 시절의 일은 다 끝난 이야기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건 나도 잘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늙어가면서 어느 날 문득 자신의 과거를 또렷하게 인식하는 현상과 관계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예전에는 빛이 거의 비치지 않는 무대 뒤쪽의 실루엣이었던 것들이 갑자기 우리에게 다가와 마치 뒤늦게 시작되는 공연처럼 환한 빛을 받으며 그 형체를 온전히 드러낸다. 그러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치 뜻밖의 손님을 맞이하듯, 마치·····(304-305p)

 

 

우리 인간에게는 신비로운 능력이 있는 것 같아. 우리의 현재 상태를 불완전함이나 실수로 돌려버리고 갑자기 성장하는 능력, 부끄러움은 남겠지만 다른 건 문제될 게 없다는 듯 지금까지의 우리 자신에게서 훌쩍 벗어나는 능력 말이야. 인생의 그런 이행기에는 뭔가 장엄한 것이 있어. 자기가 쓸 수 있는 에너지를 한데 모아 어마어마하게 용을 쓰면서 어른이 되는 것이거든. 그들이 젊은 시절에 보여주었던 기괴한 면모는 경이로운 형태와 비율로 훌륭하게 재구성 돼. 그 형태와 비율을 규정하는 것은 책임감과 경험의 깊이와 성숙한 육체의 느긋한 움직임이야.

(...)

사실 그런 시기를 보낸 뒤에도 대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해동이 멀어지고 겨울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허다하지.(339-341p)

 

 

어머니는 괜찮다고 이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했어, 어머니는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해내지 못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므로 예를 들어 내가 신발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어도 문제 될 게 없다고 했어, 어머니는 우리가 현실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을 해내지 못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므로 설령 내가 신발을 신지 못하고 그냥 바라보고만 있다 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했어, 어머니는 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겪는 바이므로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그저 신발을 신는 것이라고 해도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라고 했어. 그러면 나는 신발을 신을 수 있었어.(355-356p)

 

 

그러면서 다른 분야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 서킷 쪽에서도 벌어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떤 사람이 직관적으로 떠올린 아이디어가 아무리 기발하고 천재적이라 해도, 세상 전체를 놓고 보면 언제나 똑같은 발상을 한 사람이 쌔고 쌨다는 사실이었다. 개중에는 비슷한 발상에서 출발하여 훨씬 놀라운 변종을 개발해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었다.(425p)

 

 

그러고는 연인들은 누구나 사랑은 자기들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어떤 사랑도 유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려고 애썼다.(438p)

 

 

 

ㅡ 알레산드로 바리코, <이런 이야기> 中,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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