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9/25

 

 

 

 

국화는 알고 보면 선배가 굉장히 유아적이라고 했다. 자기 말만 떠드는 것, 타인을 박하게 평가하는 것, 그러면서 자신에 대한 평가에는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것, 애정을 갈구하는 것, 오토바이를 샀다가 중고로 팔고 또다른 오토바이를 타는 것, 소비에 열을 올리는 것, 거기에는 돈부터 사람까지 다 해당하는 것. 그리고 국화가 가장 못 견뎌한 건 함께 무언가를 먹고 더치페이할 때 잔돈을 돌려주지 않는 선배의 습관이었다.(21-22p)

 

 

나는 사랑에서 대상에 대한 정확한 독해란, 정보의 축적 따위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완수였다.(26-27p)

 

 

어떠냐고····· 은수가 어떻긴 뭐가 어떤가. 그냥 잘생기고 가난하고 우울하고 뭔가 일이 안 풀리고 불안정하고 종종 죽고 싶고 그런데도 일은 나와야 하고 꿈은 멀고 다 귀찮고 때론 내 몸이라는 것 자체가 귀찮아서 버리고 싶고 길바닥에 버리고 줄줄 새어나오게 심장이랑 머리랑 손톱이랑 발목이랑 벗어두고 홀가분해지고 싶지. 그렇게 젊은 게 좋으면 니들이나 가져라, 하면서 젊다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버리고 눕고 싶지. 아무데나 누워서 구름이나 세고 싶지.(46-47p)

 

 

 

ㅡ 김금희, <오직 한 사람의 차지> 中,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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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9/18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책이었다. 그냥 짧은 호흡의 에세이네. 그림은 그야말로 구색 갖추기로 보인다.

 

 

 

부당한 일을 당한 피해자에게 마음 아파하고 나와 상관없는 가해자에 분노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 피해자를 구하기 위해, 또는 더 이상의 피해자를 방지하기 위해 내 편의와 즐거움을 감소시키는 구조적 변화가 필요할 때 거기 동참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오멜라스 사람들이 결국 아이를 구하지 못하는 것처럼.(77p)

 

 

“부모들은 자녀를 자신의 일부로 생각해서 자녀를 다루는 데 법이 간섭하는 것을 경계하곤 한다. 그러나 이이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해놓고 그 아이가 먹고살 가망 없이, 또 정신 함양을 위한 가르침과 교육 없이 두는 것은 그 아이와 사회에 도덕상의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부모가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국가가 책임지고 의무가 이행 되도록 해야 한다. (중략) 국가는 빈곤 가정이 학비를 대도록 돕고, 필요하다면 전액 지원해야 한다.”(93p)

 

 

“진정한 사랑은 스스로 마음에서 우러나야지 강요해서 되는 것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그럴진대, 왜 오로지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 말했다는 이유로 내 뜻을 억지로 굽혀 그를 사랑해야 한다고 하는 겁니까? (...) 나는 자유롭게 태어났고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 고독을 선택했습니다. (...) 나는 그것을 그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욕망이 희망으로 지탱된다고 한다면, 나는 그리소스토모(상사병으로 죽은 청년)에게 아무런 희망도 준 적이 없으므로, 나의 잔인함이 아니라 그 자신의 집착이 그를 죽인 것입니다.”(130p)

 

 

 

ㅡ 문소영, <광대하고 게으르게>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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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9/10

 

soso.

 

 

 

생각해보면 차별은 거의 언제나 그렇다.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차별은 차별로 인해 불이익을 입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차별 덕분에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나서서 차별을 이야기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차별은 분명 양쪽의 불균형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모두에게 부정의함에도, 희한하게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만의 일처럼 이야기된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산술적으로 생각해도 내가 차별을 당할 때가 있다면, 할 때도 있는 게 아닐까?(7p)

 

 

사람들은 고통받고 억압받는 상태에서도 부정의를 잘 인식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부정의를 의식하는 때는 기존에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했던 상태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변할 때이다. 만일 상대적으로 특권을 가지고 있어 현 체제가 편안하게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평등으로의 진보가 그냥 달갑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옳지 않다’고 생각될 수도 있다.(34-35p)

 

 

범죄자를 생각할 때 사람들은 영화에서 본 극단적인 악인을 상상한다. 실제로 범죄가 발생했을 때 가해자를 보고 “그럴 사람이 아닌데”라고 반응하는 것은 자신이 범죄자에 대한 과장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차별도 마찬가지다. 백인우월주의 단체인 KKK와 같이 살인과 방화를 저지르는 악랄하고 기괴한 모습을 생각하고 있다면, 자신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차별은 생각보다 흔하고 일상적이다. 고정관념을 갖기도, 다른 집단에 적대감을 갖기도 너무 쉽다.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다.(59-60p)

 

 

성별과 전공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할까? 산술적으로 8:2와 1:9라는 비율은 분명 수상하다. 이건 차별일까? 학생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대다수가 차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의 강요가 아닌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걸 누군가 성별을 이유로 못하게 한다면 차별이지만, 스스로 선택한 전공에 어떤 성별이 더 많은 건 딱히 문제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정말 그럴까?

여성의 입장에서 왜 특정 전공에 몰리는 ‘선택’을 하는지 생각해보자. 우선 흥미나 적성이 그 이유일 것이다. 여성이 사람을 돌보고 가르치는 일에 더 소질이 있고 보람을 느끼는 성향이 있다면, 교육이나 간호 분야에 몰리는 현상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실제로 여성에게 이런 성향이 있다 하더라도 그 배경에는 사회문화적인 영향이 크게 작용한다. 여러 나라를 비교해보면, 성별 고정 관념에 따라 진로 선택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

성차별적 문화가 강한 국가에서 여학생의 수학 성적이 더 낮았다. 여성이 수학에 소질이 없다는 문화적 고정관념을 받아들여 자신의 능력을 저평가하고 수학 관련 진로 선택을 피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

한국의 성별임금격차는 실제로 심각한 수준이다. OECD 자료에 따르면, 한국 여성의 임금이 남성에 비해 34.6퍼센트 적어, OECD 국가 중에 그 격차가 가장 크다. 교육수준을 고려해도 차이는 여전하다. 교육수준이 낮은 경우에 성별임금격차가 더욱 크지만, 대학 졸업 이상인 사람으로 한정해서 보아도 동등한 교육수준을 가진 남성에 비해 여성의 임금이 28퍼센트 적었다.

그러니 성별에 따라 달라지는 전공과 진로의 ‘선택’이 과연 사회적 차별과 무관할 수 있을까? 여성으로서 어떤 전공이 취업에 유리할지, 결혼을 하고 자녀를 양육하게 되어도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어떤 직업이 좋을지 등의 선택은 이미 노동시장과 사회 전반의 차별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여성뿐만이 아니다.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등 이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리한 조건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그 조건에 맞추어 행동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결과는 차별적인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직업시장이 성별에 따라 분리되면 여성에게 이로워 보이기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임금이 낮아지는 현상은 계속된다. 노동의 가치에 대한 평가는 사회 전반의 성차별 의식 그리고 정치적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다. 여성이 많은 직업은 여성이 많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노동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현상이다. 여성이 남성과 같은 일을 하면서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 상황은 직관적으로도 부당한 차별로 여겨진다. 하지만 여성이 애초에 임금이 낮은 직종에 진출하는 상황은 다르다. 어떤 면에서 여성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노동시장으로 자발적으로 진입한 셈이 되었으니, 여성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구조적 차별은 이렇게 차별을 차별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미 차별이 사회적으로 만연하고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어서 충분히 예측 가능할 때, 누군가 의도하지 않아도 각자의 역할을 함으로써 차별이 이루어지는 상황이 생긴다. 차별로 인해 이익을 얻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불이익을 얻는 사람 역시 질서정연하게 행동함으로써 스스로 불평등한 구조의 일부가 되어간다.(70-74p)

 

 

구조적 차별은 우리의 감각으로는 자연스러운 일상일 뿐이다. 그래서 인식하기 어렵다. 노예제 시대에는 노예를 자연스럽게 여겼고,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는 시대에는 그것이 당연해 보였다. 오즐렘 센소이와 로빈 디앤젤로의 말을 빌리면, “우리의 시야는 제한적이고, 우리는 더 크고 서로 교차하는 패턴보다는 한가지 상황, 예외, 일회성 증거에 집중하게끔 사회화되었다.”(78-79p)

 

 

비하성 표현의 문제를 피하기 위해, 때로 사회는 단어를 교체한다. ‘장애자’나 ‘불구’를 ‘장애인’으로, (...) 이런 단어의 교체는 그 단어 안에 담긴 무의식적 편견과 낙인을 반성하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단어의 교체로 낙인이 온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장애인’ ‘다문화’ 등의 용어가 다시 낙인을 담은 비하성 용어로 사용되는 것처럼 단어를 바꾸어도 그 대상을 비하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낙인을 지워지지 않고 다시 살아난다.

그래서 어떤 소수자 집단은 낙인이 부착된 단어를 그들 스스로 전유reappropriation해버리기도 한다. 아예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호명하는 단어로 사용하면서 긍정적 의미를 부여해버리는 전약이다. 대표적인 단어가 성소수자를 지칭하는 ‘퀴어’다. 퀴어는 본래 ‘기괴한’이란 뜻으로, 성소수자를 조롱하는 용어였다. 그런데 성소수자 당사자들이 이 단어를 전유해버렸다. ‘기괴하다’는 뜻은 그대로 가져가면서, 기괴함은 나쁜 것이 아니라 특별하고 독창적인 것이며 다양성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오히려 자랑스러운 특징이라고 선언해버렸다.(93-94p)

 

 

한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다. 유머의 중요한 속성 중 하나는 청중의 반응에 의해 성패가 좌우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누가 웃는가?”라는 질문만큼 “누가 웃지 않는가?”라는 질문도 중요하다. ‘웃찾사’의 흑인 분장 사건처럼 웃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 그 유머는 도태된다. 누군가를 비하하고 조롱하는 농담에 웃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런 행동이 괜찮지 않다”는 메시지를 준다.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달려들어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어야 할 때가, 최소한 무표정으로 소심한 반대를 해야 할 때가 있다.(98-99p)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은 주요 고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가치에 편승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주요 고객들의 편견과 혐오감에 부응하기 위해 특정 집단을 거부하거나 분리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미국이 민권법을 제정하여 차별을 금지시킨 것은 기업이라도 사회정의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이윤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만든 것이었다. 대중을 상대로 영업을 하여 얻은 이익을 오롯이 사유재산이라고 주장할 수만은 없다. 크든 작든 기업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와 책임이 있다.

(...)

어떤 집단에 대한 혐오감을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며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할 때 불평등은 더욱 깊어진다.(126-127p)

 

 

싫은 걸 싫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건 권력이다. 이 권력이 잘 쓰이면 매우 의미 있다. 권력자를 향해 싫다고 표현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시민이 권력을 획득하는 데 있어 굉장히 중요하다. 여성이 남성에게 싫다고 말할 수 있을 때, 부하가 상사에게 싫다고 말할 수 있을 때, 권력관계는 기존과 달라진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이 사용하는 싫다는 표현은 다르다. 사장이 어떤 직원을 싫다고 말할 때, 교사가 어떤 학생을 싫다고 말할 때, 이건 단순한 개인 취향이 아니며 권력관계의 변동도 아니다. 바로 권력 그 자체이다. 무수한 차별이 싫다는 감정에서 나오고, 그 감정이 누군가의 기회와 자원을 배제할 수 있는 권력으로 작동한다. 주류 집단이 누군가를 싫다고 지목함으로써 ‘낯선 것’을 솎아내는 판옵틱한 감시체제가 작동을 시작하고 공공의 공간을 통치한다.(142-143p)

 

 

만일 다수가 받아들이는 조건에서만 소수자 집단이 (유럽인권) 협약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면, 이는 협약에 담긴 가치에 위배되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소수자 집단의 종교의 자유나 표현과 집회의 자유에 대한 권리는 협약이 요구하는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권리가 아니라, 그저 이론에 지나지 않는 권리가 될 것이다.(145p)

 

 

노예라는 지위는 그 명칭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노예는 사람으로서의 권리 없이 노동의 필요만이 요구되는 상태를 의미한다. 울타리 안에 존재하지만 그 땅의 ‘주인’과 평등하지 않은 사람, 정치적 권리가 박탈되어 권리를 요구할 수 없는 사람, ‘주인’이 필요로 하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흔적 없이 소멸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현대사회에서 부르는 이름이 무엇이든 그는 ‘노예’가 된다.(148p)

 

 

세계적으로 이미 실험은 시작되었다.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는 ‘모든 젠더 화장실’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트랜스젠더나 젠더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외양을 가진 사람들, 보호자와 피보호자가 서로 다른 성별인 경우 등 다양한 조건에서 화장실의 접근 가능성을 높였다.(179p)

 

 

 

ㅡ 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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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9/10

 

몇 권 읽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읽어본 은희경의 작품 중 ‘태연한 인생’이 가장 좋았다. 그 생각은 이 책을 읽고도 변함이 없다.

 

 

 

남자친구의 부탁으로 미팅할 여학생들을 물색 중이었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다. 남자의 외모나 조건을 따지지 않고 지성인의 양심과 진실함에 더 가치를 두는 현명한 여성이어야 하며 그 현명함 안에는 남자들이란 타고나기를 여자의 외모를 따지도록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지혜로움도 포함되어야 했다.

“그러니까 결국 예쁘고 똑똑한 여자를 찾는다는 거야? 남자 쪽은 전혀 아니면서?”(80-81p)

 

 

늘 자기 체격보다 작은 사이즈의 옷을 찾고 자기 나이보다 귀여워 보이는 스타일을 추구하는 그녀는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많이 먹었다.(83p)

 

 

혼자라는 건 어떤 공간을 혼자 차지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익명으로 존재하는 시간을 뜻하는 거였다.(84p)

 

 

사실 사는 2학기 들어 학보사 일에 더욱 의욕을 잃었다. 내 능력 이상의 영역이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하지만 새로운 영역에 도달하도록 더욱 노력해야 하는 건지, 내 길이 아니라는 결론을 받아들이고 한시바삐 그만두는 게 시간 낭비에서 벗어나는 일인지는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247p)

 

 

젊고 희로애락이 선명하고 새로 시작하는 일도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인생이 더 나았을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욕망이나 가능성의 크기에 따라 다른 계량 도구를 들고 있었을 뿐 살아오는 동안 지녔던 고독과 가난의 수치는 비슷할지도 모른다. 일생을 그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해도 나에게만 유독 빛이 들지 않았다고 생각할 만큼 내 인생이 나빴던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제 세상이 뭔가 잘못됐다면 그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나의 수긍과 방관의 몫도 있다는 것을 알 나이가 되었다.(277-278p)

 

 

비관은 가장 손쉬운 선택이다. 나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기 때문이다. 에너지가 적게 소모되므로 심신이 약한 사람일수록 쉽게 빠져든다. 신체의 운동이 중력을 거스르는 일인 것처럼, 낙관적이고 능동적인 생각에도 힘이 필요하다. 힘내라고 할 때 그 말은 낙관적이 되라는 뜻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낙관과 비관의 차이는 쉽게 힘을 낼 수 있는지 아닌지의 차이인지도 모른다. 역설적인 점은 비관이 더 많은 희망의 증거를 요구한다는 사실이다. 어둡고 무기력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비관을 일삼는 사람이야말로 그것이 깨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자신 같은 비관론자도 설득될 만큼 강력한 긍정과 인내심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 유일하게 그 희망을 줄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히게 된다.(319-320p)

 

 

정확한 관찰력은 그게 결여된 사람들이 흔히 냉소주의라고 부르는 그것이다.(329p)

 

 

열여덟 개의 식기와 마흔두 개의 접시를 사용하며 자신의 사교성에 만족감을 느꼈던 그날 밤 그녀는 자신이 그와 같은 부류라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그녀가 어떤 권력을 부조리하다고 생각한 것은 단지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330p)

 

 

우리가 아는 자신의 삶은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334p)

 

 

우리 둘 중 누군가의 기억이 틀린 것일까. 아닐지도 모른다. 기억이란 다른 사람의 기억을 만나 차이라는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한 사람의 기억도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차이 나는 것만이 반복되어 돌아온다”라는 말처럼.(337p)

 

 

 

ㅡ 은희경, <빛의 과거> 中,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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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9/4

 

 

2, 30대엔 내 욕망을 헷갈렸다. 불안을 결혼으로 해결하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내가 갖고 싶었던 건 언제나 남편이 아니라 아파트였다고. 이제라도 정확한 진단이 이루어졌으니 해결책도 분명해진다. 필요한 건 결혼이 아니라 적금이고 펀드고 재테크다. 세대주로서의 감각이다.(68p)

 

 

ㅡ 김진아,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 中,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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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9/1

 

재치 있는 대사로 인해 밝고 경쾌한 느낌이 드는 한편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한 편의 소설이 끝나고 나면 먹먹한 느낌이 든다. 좋다.

 

 

 

원래 집단의 속성이라는 게 웃겨서 한때 그 집단의 일부였다 튕겨져 나온 사람이 더 맛 좋은 제물이 되기 마련이었다.(13p)

 

 

철구 미친 새끼가 나한테 자자고 하는 거 있지. 뒤에서 내 욕하고 다니는 거 뻔히 아는데, 얼굴과 마음이 골고루 역겨운 새끼·····(19p)

 

 

재희의 말을 들은 의사는 피임과 정결한 삶의 중요성에 대해 20분도 넘게 일장 연설을 했다고 했다. 차트를 넘겨보며 주기적으로 방광염에 걸리는 것도 무분별한 성관계가 원인일 수 있다며 재희의 느슨한 순결 의식과 주색에 경도된 망나니 같은 삶 전반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재희는 벽에 걸린 십자가를 보며, 분노를 꾹꾹 눌러 삼키며, 말했다.

ㅡ저같은 애도 있어야 선생님이 먹고살죠.(37p)

 

 

재희 역시 때때로 내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문자를 보냈는데, 나는 재희가 도대체 무엇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53p)

 

 

재희가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누구보다 평범하지 않게 자라난 여자라고 생각했던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사회적 통념 같은 것을 코 푸는 휴지처럼 여기며 자라날 수 있었던 건 어쩌면·····(62p)

 

 

나라는 존재로 말미암아 인생이 예상처럼, 차트의 숫자처럼 차곡차곡 정리되는 않으며, 오히려 가장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핏줄이 연결된 것처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존재가, 실은 커다란 미지의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는 포기해야 하는 때가 온다는 것을. 그래서 인생의 어떤 시점에는 포기해야 하는 때가 온다는 것을.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생각을 멈추고, 고작 지고 뜨는 태양 따위에 의미를 부여하며 미소 짓는 그녀를 그저 바라보는 일. 그녀의 죽음을 기다리는 일. 그녀가 아무것도 모른 채 죽어버리기를 바라는 일뿐이다.(181p)

 

 

다른 술은 다 잘 마셔도 맥주만큼은 약한 내가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인생에서 그래선 안 될 일 빼면 남는 게 없다. 술 취하면 쓸데없이 솔직해지며, 불필요하게 개가 되곤 하는 나는 그날도 어김없이 아무도 묻지 않은 얘기를 털어놓았다. 그중 최악은 내 지난 연애사를 구구절절 읊어대며 신세한탄을 한 거였다.(199p)

 

 

뭐야, 계곡물이야? 뭔데 이렇게 투명해. 또 내가 복잡한 가정사에 약하다는 건 어떻게 알고 갑자기 훅 들어와. 왜 다 보여줘.(215-216p)

 

 

그러거나 말거나, 너였으니까.(228p)

 

 

최저 시급을 받으며 일하는, 찢어지게 가난한 나를 위해 주로 규호가 밥을 사주고는 했다. 빨리 성공해서 갚으라고 말하는 규호에게 언제나 큰소리로 당연하지,라고 대답했지만 우리 둘 다 그럴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231p)

 

 

반짝, 애틋한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나는 감히 규호를 따라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설렘도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에. 밤이 끝나는 시점과 해가 뜨는 시점은 이어져 있으니까. 지금 이렇게 설레는 감정이 이는 것은, 결국 우리가 완벽히 끝날 때가 되어간다는 의미겠지.(248-249p)

 

 

규호가 침대에 앉아 초밥을 집어 먹다 (평소처럼) 접시를 엎어, 내가 얼른 옷자락으로 간장을 닦는다. 찰나의 순간이었음에도 매트리스에 얼룩이 남아버린다.(258p)

 

 

가끔은 내가 모든 걸 다 잘못한 것만 같고, 때로는 이유 없이 모든 게 다 억울했다.(273p)

 

 

ㅡ 박상영, <대도시의 사랑법>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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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9/1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조금은 익숙해서 새로움이 덜 했고, ‘출판하는 마음’이 더 흥미롭다. 내가 출판 과정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런거겠지?

 

 

ㅡ 김필균, <문학하는 마음> 中, 제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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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31

 

공쿠르 상을 받았다고 해서 읽어봤는데 인상적이진 않다.

 

 

 

사람들은 역사를 무겁게 짓눌러서 우리 고통의 책임을 역사의 주역들에게 지우려고 한다. 우리는 결코 옷 주름에 낀 때, 누렇게 바랜 식탁보, 수표책에 붙은 쪽지, 커피가 남긴 얼룩을 보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사건의 그럴듯한 측면만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다.(128p)

 

 

ㅡ 에리크 뷔야르, <그날의 비밀> 中,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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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29

 

단편은 그냥 흔한 한국 단편소설이었다. 좀 아쉽네.

 

 

밤의 결심은 아침의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낮의 후회만을 몰고 왔다. 밤의 나는 아침의 나를 증오했고 낮의 나를 겨우 견뎠고 밤을 두려워했다. 시간은 의미 없이 흘러가 해는 금세 저물었고 쉽게 밤이 되었다.(60p)

 

 

ㅡ 서유미,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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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8/27

 

 

25년쯤 지난 책이라 2019년인 지금 읽기에는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문제들이 현재에도 형태만 달리하여 아직도 많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가 빠르게 변하는 것 같다가도 어떤 부분에서는 굉장히 더디 바뀐다는 생각을 했다.

등장인물이 너무 매력이 없고 납작했다. 특히 화자인 강민주는 좀 우스꽝스럽고 읽는 내가 민망해지는 구석이 있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세상의 보통 사람은 사랑도 하고 결혼도 한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결코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나는 세상 그 자체를 초월해 있다. 나는 그 위에 있는 것이다.”

 

“나는 슈퍼마켓에서 영화배우에 대해 떠들고 있는 저런 여자들과는 확실히 다른 존재다. 나는 결코 굳은 살 하나 없이 인생을 공짜로 살고 있는 그런 부류들과 같은 궤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나는 신의 자식이었다.”

 

“이미 여러 차례 말한 바가 있지만 나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두뇌의 소유자이다. 게다가 최근에 나는 심리학으로 석사학위까지 받은 사람이다.”

 

“백승하에게 폭력을 휘두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인간의 가학 취미에는 어마어마한 가속력이 따라붙는다는 사실이다. 나처럼 스스로를 통제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도 그 상승하는 가속력을 제어하는 데 늘 당혹감을 느끼는 편인데 범상한 족속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나머지 인물들은 철저히 기능적인 역할을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집착과 오지랖을 기본으로 깔고 가는 한남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적절한 것이다.

 

 

 

 

얼굴이 예쁜 여자들이 빠지기 쉬운 세상의 함정은 또 오죽 많은가. 그녀들이 풍겨주는 그 백치미는 또 어떤가. 평생 자신의 외모를 가꾸며 살아가도록 태어나지 않고 평생 자신의 두뇌를 의지하며 살도록 운명 지워진 것은 나는 하늘에 감사한다.(38p)

 

 

그 누구도 어떤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방식대로 살뿐이다. 선각자는 있어도 지도자는 없는 것이다. 자신을 내던져 새로운 것을 깨우치는 일은 존중받을 수 있으나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은 채 남을 지도하려 드는 일은 업신여김을 받아 마땅하다.(85p)

 

 

남자가, 이미 검은 발톱을 드러내고 있는 남자가 ‘뜻밖에’ 회개하는 경우는 결코 많지 않다. 아니, 절대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남자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다. 모든 것을 다 잃고 나면 여자의 마음에 기대보려는 것이 남자들의 속성이다.

검은 발톱은 부러진 것이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부러진 발톱은 다시 자란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특히 남자는 여자에 대해 스스로 반성할 줄 모른다. 알고 있더라도 실천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것이 남자란 존재들이다.(106p)

 

 

“하지만 요즘에 와서는 많이 달라진 것도 사실 아니오? 예를 들면 여자들이 경제권을 쥐고 있는 핵가족 형태의 가족 구성도 그렇소. 우리 남자들은 그동안 많이 내주었다고 보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오? 남자들이 지난날처럼 일방적으로 횡포를 부리지 못하도록 법적인 장치도 많이 고안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소만.”

“달라졌지요, 물론. 그러나 그것은 개량하고는 거리가 멀어요. 보다 은밀하고 교활해졌다고나 할까. 그리고 여자들이 쥐고 있는 것은 경제권이 아니라 소비권 정도겠지요. 법적인 장치도 확실히 예전에 비하면 나아진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법은 인간의 정서를 일일이 반영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어요. 여자와 남자의 문제만큼 심정적인 것이 또 있을까요? 사회의 지배심리가 남자에게 유리하게 통용되고 있는 한은 어떤 완벽한 법도 여자들의 고통을 보상해줄 수 없는 거예요.”(211p)

 

남자들이란 정말 피곤한 존재다.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는 인간의 필수적인 기능조차 습득하지 못한 미개인들, 큰 일을 도모하다 결국은 작은 이익에 빠져 일을 그르치는 반란자들, 이것이 바로 남자들이란 존재의 속성이다.(222-223p)

 

 

조금만, 아주 조금만 깨어나면 되는 것이다. 어려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갖춰야 할 사전 지식이나 배움도 필요없다. 단지 아주 조금만 이 세상을 바로 보면 된다. 남자가 여자의 위에 있다는 논리가 허위사실의 유포였다는 것만 알아도 반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언제나 시작이 어렵다는 말은 진리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역시 새겨둘 만하다. 누군가 시작을 해야한다. 언제까지나 책상 앞의 토론으로 머물러 있을 것인가. 언제까지나 시기상조론에 파묻혀 있을 것인가. 기회는 누군가 시작할 때, 바로 그때가 적당한 시기인 것이다.(256p)

 

 

강민주는 백승하를 납치한다. 그는 인기 절정의 영화배우이다. 그는 뭇 여인의 우상이기도 하다. 여성을 향해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았다고 소문난 애처가인 그가 강민주의 제 1의 공격 대상이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모순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가장 적절한 공격 대상이다. 그는, 남성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 자체를 은폐하면서, 이미 남성이라는 사실 자체로 그 폭력에 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직접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자보다 더욱 교활하게 폭력을 행사한다. 후자는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반항을 유발시키지만 그는 여자들로 하여금 남자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게 하고, 여성에게 주어진 가혹한 운명이 단지 남성을 잘못 택했기 때문일 뿐이라는 환상을 갖게 한다. 백승하라는 인간을 굴복․변화시키고 그에 대해서 세상이 갖고 있는 환상을 깨버릴 수만 있다면, 남성에 대한 복수와 아울러 여성이 남성에 대하여 갖고 있는 환상을 깨버릴 수 있는 이중의 효과를 낳을 수 있다.(340-341p)

 

 

 

ㅡ 양귀자,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中,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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