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1/16

 

 

 

민권운동이 성공적이었던 이유는 텔레비전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비폭력은 카메라가 촬영할 때만 가치 있는 전략입니다. 끔찍한 공격을 당했는데 증인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보세요. 모든 게 허사입니다. 누군가 증인이 있을 때 비폭력이 중요해집니다. CBS나 ABC 방송국 카메라가 촬영해 전 세계에 보도된다면 더 좋겠죠.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그뿐입니다.(394p)

 

 

 

ㅡ 이주희, <강자의 조건> 中, 엠아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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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1

 

 

특히 말투에 관해서 말하자면, 가까운 사람들의 말투가 나에게 전염되어 지금은 이즈미 씨와 스가와라 씨의 말투를 섞은 것이 내 말투가 되어있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전에 스가와라 씨의 밴드 동료들이 가게에 얼굴을 내밀었을 때 그 여자들의 옷차림과 말투는 스가와라 씨와 비슷했고, 사사키 씨도 이즈미 씨가 들어온 뒤로는 수고하십니다!”하는 말투가 이즈미 씨와 똑같아졌다. 이즈미 씨가 전에 일했던 가게에서 친하게 지냈다는 주부가 일을 도우러 왔을 때는 옷차림이 이즈미 씨와 너무 비슷해서 착각할 뻔했을 정도다. 내 말투도 누군가에게 전염되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전염하면서 인간임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35-36p)

 

 

같은 일로 화를 내면 모든 점원이 기쁜 표정을 짓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직후의 일이었다. 점장이 버럭 화를 내거나 야간조의 아무개가 농땡이를 부리거나 해서 분노가 치밀 때 협조하면, 불가사의한 연대감이 생기고 모두 내 분노를 기뻐해준다.(39p)

 

 

성 경험은 없지만 성욕을 특별히 의식한 적도 없는 나는 성에 무관심할 뿐 특별히 괴로워한 적은 없었지만, 모두 내가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설령 정말로 그렇다 해도, 반드시 모두가 말하는 그런 알기 쉬운 형태의 고뇌라고는 할 수 없는데, 아무도 거기까지는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그쪽이 자기네한테는 알기 쉬우니까 그런 걸로 해두고 싶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 내가 삽으로 남학생을 때렸을 때도, 어른들은 모두 분명 가정에 문제가 있다면서 근거도 없는 억측으로 우리 가족을 비난하고 괴롭혔다. 내가 학대당한 아이라면 그 행동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고 안심할 수 있으니까, 그런 게 틀림없다, 순순히 인정하라고 다그치는 것 같았다.(49p)

 

 

이상한 사람한테는 흙발로 쳐들어와 그 원인을 규명할 권리가 있다고 다들 생각한다. 나한테는 그게 민폐였고, 그 오만한 태도가 성가시게 느껴졌다. 너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초등학교 때처럼 상대를 삽으로 때려서 그러지 못하게 해버리고 싶어질 때가 있다.(70p)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으면 그런 곳에서 일한다고 멸시당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나는 그게 몹시 흥미로워서 그렇게 깔보는 사람의 얼굴 보는 걸 비교적 좋아한다. , 저게 인간이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자기가 하는 일인데도 그 직업을 차별하는 사람도 가끔 있다. 나는 무심코 시라하 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깔보는 사람은 특히 눈 모양이 재미있어진다. 그 눈에는 반론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계심, 또는 상대가 반발하면 받아쳐줘야지 하는 호전적인 빛이 깃들어 있는 경우도 있고 무의식적으로 깔볼 때는 우월감이 뒤섞인 황홀한 쾌락으로 생겨난 액체에 눈알이 잠겨서 막이 쳐져 있는 경우도 있다.(81p)

 

 

정상 세계는 대단히 강제적이라서 이물질은 조용히 삭제된다. 정통을 따르지 않는 인간은 처리된다.

그런가? 그래서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고치지 않으면 정상인 사람들에게 삭제된다.(98p)

 

 

방금까지 트집을 잡고 시비를 거는 상대에게 화를 내고 있었는데, 자기를 괴롭히고 있는 것과 같은 가치관의 논리로 나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시라하 씨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제 인생이 강간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남의 인생을 똑같이 공격하면 마음이 다소 개운해지는지도 모른다.(110p)

 

 

 

무라타 사야카, <편의점 인간> ,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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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1

2019/1/10 

 

다시 읽어도 첫째 밤의 얘기가 가장 좋았다.

 

 

나 자신만이 깨달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사실 자신만이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평범하고 꼴불견인 게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조금은 힘들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습니다. 자신의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정보를 차단하여 정보가 전혀 없다는 것은, 지금 시대에서는 어리석게 보인다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어리석음을 선택했습니다. 무지를. 이것은 꽤 짊어지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왜일까요? 정보가 없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어리석게 보인다는 것보다 힘든 일이 있습니다. 자신이 정말 옳은지 어떤지를 알 수 없게 된다는 겁니다. 대체 이렇게 있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질문에 시달립니다. 정보가 말해주는 대로 행동하면 그 질문을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정보를 모으고 무엇보다 먼저 정보통이 되려고 합니다. 게다가 정보를 무시하는 척하기 위해서 말이지요.(19p)

 

 

즉 대학의 교양학부 커리큘럼이 가장 빈곤한 의미에서의 비평가를 낳는 시스템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 속하는 지인이나 친구가 많았습니다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무척 기묘하게 생각되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화요일에 영국 낭만주의 시에 대해 발표해야 합니다. 다음 날에는 장 마리 스트로브와 다니엘 위예의 영화에 대해 발표해야 합니다. 목요일에는 석사 논문 수업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프랑스 현대사상, 예를 들면 레비나스에 대해 코멘트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금요일에는 독일 현대 건축에 대해 토론해야 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무엇이 단련되겠습니까? ‘모든것에 대해 조금은 재치 있는 말 한마디를 해낼 수 있는 기술입니다. 눈을 칩떠 사방을 잘 둘러보는 것만을 연마할 뿐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곳은 축소 재생산의 장소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다들 희희낙락하며 쇠약해져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쭐해하며 떠들면서 뭔가 깊은 불안에 젖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도저히 진심으로 세계를 즐기고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이것이 제가 속해 있던 짧은 시대, 그리고 좁은 장소에 한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온갖 것들, 모든 것에 대해 그거야 알고 있지. 이러이러한 거잖아, 그건 그런 것에 지나지 않아라고 반사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에 의해 메타 레벨에 서서 자신의 우위성을 보여주려는 것. 이것이 사상이나 비평이라 불린 것이고, 지금도 그렇게 불리고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누구나가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게 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무척 기묘한 일입니다. 사상이나 비평이라는 좁은 원에서 한 발짝만 바깥으로 나가면 모든 것에 대해 뭐든지 알고 있고 설명할 수 있는, 전지전능에 가까운 그런 자아를 추구하고자 하는 환상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 제 친구였던 화가들, 댄서들, 기타리스트들, 피아니스트들, 가수들, 래퍼들은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20-21p)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자신에 도달하기 위해 지식과 정보를 얻지 않으면 안 되고, 매일 최신의 정보로 갱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겁에 질린 강박관념에는 사실 아무런 근거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자아를 지향하며 모든 것의 환상 아래 살포되어 있는 정보를 악착스럽게 긁어모으는 것. 그것이 뭐가 될 것인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22p)

 

 

사상, 비평, 학문, 지식이나 정보를 둘러싼 이런 분야에서는 두 가지의 전형적인 형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쪽을 비평가라고 부르고 다른 한쪽을 전문가라고 부릅시다. 현재 대부분의 사회과학이나 심리학적인 지식을, 그것도 위에서 강림한 것 같은 그런 지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비평가들은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또 그렇게 말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 무엇에 대해서도 재치 있는 코멘트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초조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전문가들은 한 가지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환상에 매달립니다. 결국은 둘 다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환상에 대한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벗어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

라캉은 모든 것에 대해 모든 것은’, 그리고 하나에 대해 모든 것을이라는 욕망은 결국 팔루스적 향락으로 귀착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사실 그것은 과격하게 보이고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며 아무것도 산출하지 않는, 방종한 안일함에 푹 빠진 향락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23-24p)

 

 

여러 가지로 이야기해왔습니다만 쓴다는 것, 읽는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접속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거지반 카프카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에서 자연스러운 자기 방어가 작동하는 것도 당연하겠지요. 그것은 본질적인 난해함이나 무료함이지, 결코 난해한 체하는 것도 아니고 번역이 나쁜 것도 아니며 재미있게 읽을 수 없는 자신이 열등한 것도 아닙니다. 알아버리면 미쳐버립니다. 정당하게도 어딘가에서 그것을 느꼈기 때문에, 우리의 무의식에서 읽을 수 없는 것처럼, 모르는 것처럼, 모르는 것처럼 검열하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독서의 묘미가 되는 것입니다.

역시 니체를 인용할까요. 니체 왈, “자신이나 자신의 작품을 지루하다고 느끼게 할 용기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예술가든 학자든 하여튼 일류는 아니다.” , 우리는 이미 여기까지 왔으므로 이 한마디는 이해할 수 있겠지요. 알아버리면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정도의 것이 아니면 일류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방어기제를 가동시키고, 따라서 기묘한 무료함이나 난해함을, ‘기분 나쁜 느낌을 느끼게 하지 못하는 것은 책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사람을 몰아넣지 않고 안이하게 진행된 책이 과연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인지 어떤지. 그런 책을 읽는 것보다는 카프카의 무의식에 자신의 무의식을 비춰보고 자신의 무의식과 함께 변혁시키는 위험한 모험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더 즐겁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다들 읽는 것이 무서운 겁니다. 그것은 정상적인 겁니다. 필터를 끼워 정보로 환원된 것만 상대하면 무서울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정보라면 한 번 읽으면 됩니다. 또는 저장해두고 검색기만 돌리면 됩니다. 그러나 지금 말한 의미에서 읽는다는 것을 행사하려고 하면 그렇게는 안 됩니다. 바로 앞에서 후루이 요시키치도 말했습니다만 니체도, 쇼펜하우어도, 나쓰메 소세키도. 스탕달도, 롤랑 바르트도, 헨리 밀러도, 그리고 마르틴 루터도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책은 적게 읽어라. 많이 읽을 게 아니다라고요.

다시 말해 책이란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라는 겁니다. 싫은 느낌이 들어서, 방어 반응이 있어서, 잊어버리니까, 자신의 무의식에 문득 닿는 그 청명한 징조만을 인연으로 삼아 선택한 책을 반복해서 읽을 수밖에 없습니다. 왕왕 대량으로 책을 읽고 그 독서량을 자랑하는 사람은, 사실 똑같은 것이 쓰여 있는 책을 많이 읽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즉 자신은 지를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착취당하는 측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읽은 책의 수를 헤아리는 시점에서 이미 끝입니다. 정보로서 읽는다면 괜찮겠지만, 그것이 과연 읽는다는 이름을 붙일 만한 행위일까요.(40-42p)

 

 

책이라는 것은 한 장의 종이를 여러 번 접고 재단하여 만듭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접어 이 되면, 급하게 한 장의 종이로 만든 문서나 두 장으로 접어서 펼친 서류와 달리 몇 번 읽어도 알 수 없게 됩니다. 몇 번 읽어도, 몇 번 눈을 집중해도 모든 지식을 자기 것으로 했다는 확신이 별안간 완전히 사라져버립니다. 신기한 일입니다만 이것은 사실입니다. 반복합니다. 책은 읽을 수 없습니다.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으로 만들자마자 몇 번 읽어도 알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책만이 책입니다.(79p)

 

 

이런 표현을 해봅시다. 자신이 하는 일을 종교라고 생각하는 종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종교 법 인인 것에 안심하고 인가를 받아 세제상의 우대 조치라는 은혜에 만족하며 기뻐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120-121p)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말해왔습니다. 텍스트를 잃는다는 것은 광기의 행위라고. 책을 읽으면, 읽고 말면, 아무래도내가 잘못된 건지 세상이 잘못된 건지, 몸과 마음을 애태우는 이 물음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게 된다고. 사람들은 모릅니다. 읽을 수 있을 리가 없는 책을 그래도 읽는다는 것, 그 안에 있는 텍스트의 이물감, 외재성, 생생한 타자성을 모릅니다. 가혹하기까지 한 그 무자비함을 모릅니다. 그에 대한 두려움을 모릅니다. 그 놀랄 만한 읽어라라는 명령의 열정을 모릅니다.(153p)

 

 

완전히 병들어 있습니다. 이리하여 읽을 수 없는 읽는다는 고난과는 반대인 어차피 읽히는, 읽히는 것밖에 읽지 않는, 읽지 않아도 이미 안다며 얕보고 읽지 않는 안일함이 죽음을, 한없는 죽음을 낳는 것입니다. 루터나 무함마드와 달리 아무것도 낳지 않는, 뒤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그저 무익한 대량의 죽음을 말이지요.(157p)

  

 

조금은 자신이 얼마나 저열하고 무참하며 조악한 사고의 형태에 알랑거리고 있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봤으면 합니다.(162p)

 

 

 발터 벤야민이 말했습니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다”(271p)

 

 

사사키 아타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자음과모음

,

2016/11/6

 

 

하지만 난 그 충고를 해줄 수 없다. 그리고 내가 그런 충고를 해줄 거라고 네가 믿었는지도 확신할 수 없구나.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니? 사실 난 아내가 살길 바란다. 내 아들이 살길 바라고, 나도 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무슨 일이라도 할 거야. 상황을 정리해보니 이건 목숨 하나에 세 목숨이 걸린 일이구나. 미안하다. 내 그릇이 더 크길 네가 기대했던 건 안다. 하지만 우린 늙었어, 레오. 우린 강제노동수용소에 가면 살아남지 못할 거다. 우린 헤어져서 홀로 죽게 될 거야.”

아버지가 젊으셨다면 그땐 어떤 충고를 하셨을까요?”

스테판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옳다. 내 충고는 그래도 변함없었을 거야. 하지만 내게 화내지 마라. 여기 올 때 뭘 기대하고 온 거니? 우리가 그래 좋아, 죽는 건 상관없어, 그럴 줄 알았니? 그리고 우리가 죽는다고 뭐가 달라지니? 네 아내의 목숨을 구할 수 있는 거야? 너희 둘이 행복하게 계속 살 수 있는 거니? 그랬다면 너희 둘을 위해 기꺼이 내 목숨을 내놨을 거다. 하지만 일이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잖아. 결국에 우린 죽겠지, 우리 넷 다, 하지만 넌 네가 옳은 일을 했다는 걸 알고 죽겠지.”(156-157p)

 

 

내가 당신과 결혼했던 건 두려웠기 때문이야. 당신의 구애를 거절하면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어떤 구실을 붙여서든 날 체포할까 봐 무서웠기 때문이야. 나는 어렸어, 레오. 당신은 권력이 있었고. 그래서 우리가 결혼한 거야. 내 이름이 레나인 척했다고 당신이 한 이야기 있지? 당신은 그 이야기가 재미있다고,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지? 내가 당신에게 가명을 댄 이유는 당신이 날 추적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야. 당신은 유혹이라고 생각했지만 난 감시라고 생각했어. 우리 관계는 공포를 토대로 만들어진 거야. 당신 관점에선 안 그렇겠지. 당신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으니까. 도대체 내게 무슨 힘이 있어? 내가 한 번이라도 힘을 가진 적이 있나? 당신이 내게 청혼했을 때 내가 받아들인 이유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기 때문이야.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아주 많은 일들을 참아가면서 살고 있어. 당신은 한 번도 날 때린 적도 없고, 소리도 지르지 않았고, 폭음을 한 적도 없어. 그런 걸 생각해보면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운이 좋았다는 건 인정해. 당신이 내 목을 죄었을 때, 당신은 내가 당신과 지냈던 유일한 이유를 없애버린 거야.”

기차가 떠나기 시작했다. 레오는 기차가 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방금 한 말을 받아들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머릿속에 담아뒀던 것들을 쉬지 않고 쏟아냈다. 둑이 터진 것처럼 그 말은 자유롭게 풀려나왔다.

지금 당신처럼 권력이 없어지면 사람들이 당신에게 진실을 말한다는 문제가 생길 거야. 당신은 그런 상태에 익숙하지 않겠지. 당신은 당신이 발산하는 공포로 둘러싸인 세계에 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함께 지내려면 그 망상에 찬 낭만주의는 접어둬야 해. 우리가 같이 지내는 건 상황 때문이야. 당신에겐 내가 있고 내겐 당신이 있지. 그것 외에는 사실 별게 없어.(249p)

 

 

 

톰 롭 스미스, <차일드 44> , 노블마인

,

2016/11/6

 

 

앎이나 깨달음은 늘 그렇게, 한발짝 늦게 그녀를 찾아왔다. 똑같은 거리가 등하교 때마다 오분가량 차이나듯, 그녀가 아무리 아등바등 따라잡으려 해도 삶과 그녀의 박자도 그렇게 어긋났다.(19p)

 

 

나는 벗을 고르는 데 까다로운 편이다. 물론 내가 남들의 까다로운 기준을 충족시킬 만한 좋은 벗이 못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내 덕목이랄 수 있는 것은, 별 볼일 없는 인간들과 사귀느니 차라리 혼자 있는 게 낫다고 자위할 줄 아는 능력에 있다. 눈은 다락같이 높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는 자의 외로움을 견딜 줄 안다는 뜻이다. 그렇듯 하는 일이 없이 만나는 사람 없이 빤하고 투명한 삶을 살았는데도 내 서른 즈음이 그녀들과의 만남을 피하지 못했다는 건 차라리 경이롭다.(44-45p)

 

 

죽음을 앞둔 사람이 곰곰이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리라는 생각, 그 사람의 눈앞에 지나온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가리라는 편견은 참으로 낭만적인 상상이었다. 살아갈 날이 충분할 때에만 무엇인가를 열심히 지키고 보존하는 일이 중요했다. 미래가 적은 사람들에게는 과거나 기억도 적었다. 상욱이 이제껏 지켜봐온 노인이나 폐인 들은 집요하게 현재적이었다. 죽음에 가까울수록 그들은 현재에만, 오직 찰나에만 집착했다.(102p)

 

 

 

ㅡ 권여선, <분홍 리본의 시절>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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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31

 

 

각 시대는 수많은 의견을 잉태하는데, 시간이 지나다보면 그런 의견들이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것이라고 판명 나는 경우도 많다. 과거가 현재에 의해 부정되듯이 현재는 미래에 의해 번복될 것이다. 그래서 현재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생각들 가운데 상당수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폐기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46-47p)

 


인간이 내리는 판단의 힘과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판단이 잘못되었을 때 그것을 고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잘못된 판단을 시정할 수단을 언제나 손쉽게 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판단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어떤 사람의 판단이 진실로 믿음직하다고 할 때, 그 믿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의 비판에 늘 귀를 기울이는 데서 비롯된다. 자신에 대한 반대 의견까지 폭넓게 수용함으로써, 그리고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어떤 의견이 왜 잘못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해줌으로써, 옳은 의견 못지않게 그릇된 의견을 통해서도 이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 가능한 한 가장 정확한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상이한 의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나아가 다양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그 문제를 이모저모 따져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현명한 사람 치고 이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 지혜를 얻은 사람은 없다. 인간 지성의 본질에 비추어볼 때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지혜를 얻을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틀린 것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보충하는 일을 의심쩍어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오히려 이를 습관화하는 것이 우리의 판단에 대한 믿음을 튼튼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자기 생각에 명확하게 맞설 수 있는 모든 의견들에 대해 소상하게 잘 파악하고 이런저런 반박에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힐 수 있는 사람ㅡ즉 자신에 대한 반대 의견이나 듣기 싫은 소리를 피하기보다 그것을 자청해 나서고, 다양한 측면에서 제기될 수 있는 수많은 비판을 봉쇄하지 않는 사람ㅡ은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은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자신의 판단에 대해 더 자신감을 가질 만하다.(50-51p)

 


적군이 시야에서 사라지면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 모두 공부를 집어치우고 낮잠이나 자러 가게 마련이다.(86p)

 


우리는 지금까지 네 가지 분명한 이유 때문에 다른 의견을 가질 자유와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인간의 정신적 복리를 위해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정신적 복리는 다른 모든 복리의 기초가 된다). 그 내용을 다시 한번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첫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모든 의견은, 그것이 어떤 의견인지 우리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하더라도, 진리일 가능성이 있다. 이 사실을 부인하면 우리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음을 전제하는 셈이 된다.

둘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틀린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일정 부분 진리를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일이 아주 흔하다. 어떤 문제에 관한 것이든 통설이나 다수의 의견이 전적으로 옳은 경우는 드물거나 아예 없다. 따라서 대립하는 의견들을 서로 부딪치게 하는 것만이 나머지 진리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셋째, 통설이 진리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하자. 그렇다 하더라도 어렵고 진지하게 시험을 받지 않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 진리의 합리적 근거를 그다지 이해하지도 느끼지도 못한 채 그저 하나의 편견과 같은 것으로만 간직하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네 번째로, 그 주장의 의미 자체가 실종되거나 퇴색되면서 사람들의 성격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선을 위해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하나의 헛된 독단적 구호로 전락하면서, 이성이나 개인적 경험에서 그 어떤 강력하고 진심어린 확신이 자라나는 것을 방해하고 가로막게 되는 것이다.(102-103p)

 


그러나 지금까지 예를 든 모든 것들보다도 더욱더 결정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유사성을 촉진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영국을 포함한 다른 자유 국가에서 여론이 국가를 움직이는 중요한 변수로서 절대적으로 확실히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특별한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그 특별함 때문에 다수 대중의 생각을 무시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것들이 점차 사라지고 모두가 평등한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대중들도 나름대로 의지를 가져야 한다는 적극적인 생각이 확산되면서 정치 일선에 있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대중의 의지에 맞선다는 생각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그 결과 통념을 뛰어넘으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그 어떤 사회적 후원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대중이 수로 밀어붙이는 것에 대항하면서 대중과 다른 자신만의 생각이나 경향을 지키려는 강력한 사회 세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런 모든 이유들이 서로 합쳐져서 개별성에 대해 대단히 적대적인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다. 따라서 개별성을 어떻게 보존할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래도 대중보다 앞서 있는 지식인들이 개별성의 중요성, 즉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것이 비록 상황을 낫게 만들지는 못하더라도ㅡ더 낫게 만들기는커녕 일부 사람들의 눈에는 오히려 더 악화시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ㅡ그래도 다들 똑같은 것보다는 낫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한, 사정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사람들을 아직 완벽하게 하나로 묶지 못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개별성의 중요성을 환기시킬 수 있는 최적의 시기이다. 초기가 지나면 병을 확실히 고치기 어려운 법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도 우리처럼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이 바로 그 병을 키우는 뿌리이다. 우리 삶이 획일적인 하나의 형태로 거의 굳어진 뒤에야 그것을 뒤집으려 하면, 그때는 불경이니 비도덕적이니, 심지어 자연에 반하는 괴물과도 같다는 등 온갖 비난과 공격을 감수해야 한다. 사람들은 잠시만 다양성과 벽을 쌓고 살아도 순식간에 그 중요성을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138-139p)

 

 

 

 

ㅡ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中,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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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2

 

 

내가 섭섭하다고 한 거 그동안 등장 인물들에게 정이 들었기 때문이야. 그런데 막상 영화가 끝나니까, 모두가 죽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발렌틴, 너도 조금은 정이 있는 사람이네

그런 건 어디에선가 드러나게 되어 있어····· 내 말은 인간의 나약함을 뜻하는 거야

그건 나약함이 아니야

사람이 정을 붙이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은 참 이상한 현상이야····· 그건····· 마치 우리의 정신이 쉴새없이 그런 감정을 분비해 내는 것 같아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위에서 소화액이 나오는 것처럼 말이야

그런 것 같아?

그래. 그건 잘못 잠긴 수도꼭지 같아. 그러면 물방울들이 아무것에나 마구 떨어지지만, 그걸 멈추게 할 수는 없거든

?

나도 잘 모르겠지만······ 컵에 물이 가득 차면, 넘치는 법이니까(61-62p)

 

 

아주 이상하게 끝나지?

아니, 아주 멋진데. 그 부분이 영화에서 가장 멋진 부분이야

왜 그렇게 생각해?

그녀는 모든 것을 다 잃었지만 적어도 일생에 한번은 진정한 관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에 만족한다는 의미니까. 비록 그와의 관계는 끝이 났을지언정·····

행복하다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면 더욱 고통스럽지 않을까?

몰리나, 한 가지 명심해 두어야 할 게 있어. 사람의 일생은 짧을 수도 있고 길 수도 있지만, 모두 일시적인 것이야. 영원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

그래, 맞아. 하지만 조금 더 오래가는 것은 있어

우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돼. 좋은 일이 일어나면 오래 지속되지 않더라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돼.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말하기는 쉬워. 하지만 그걸 진정으로 느낀다는 것은 다른 문제야

그러면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자기 자신을 납득시켜야 되는 거야

그래, 맞아. 하지만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가슴속의 이성이 있지. 아주 유명한 프랑스의 철학자가 한 말이야. 그래서 내가 널 비웃고 있는 거야. 그가 누군지 이름까지도 기억할 수 있어. 바로 파스칼이야. 어때 졌지!(341-342p)

 

 

 

마누엘 푸익, <거미여인의 키스>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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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2

2019/8/1

 

 

 

너무 싫을 땐 애원하지도 않게 되는 법이었으니까(218p)

 

 

사람들과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길은 내겐 없었다. 어쩌면 나는 수도사가 되어야 할지도 몰랐다. 나는 신을 믿는 척하면서 좁은 방에 살면서 오르간이나 연주하고 와인에 취해서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 아무도 나하고 섹스하려 하지 않을 테니까. 내가 명상을 위해 몇 달씩이나 좁은 방 안에 들어가면 아무도 볼 필요가 없을 테고, 사람들은 내게 와인이나 보내 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검은 수사복은 순수 모직 100퍼센트라는 것이었다. 그건 학군단 제복보다 더 나빴다. 난 그런 옷은 입을 수 없었다. 다른 것을 생각해야 했다.

(...)

어째서 나는 여기 왔을까? 나는 생각했다. 어째서 항상 나쁜 일과 더 나쁜 일 사이에서 고르는 문제가 될까?(235p)

 

 

생각과 단어는 끝내 쓸모없을지라도 매혹적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238p)

 

나이 스물다섯에 대부분의 사람이 끝장난다. 자동차를 몰고, 밥을 먹고, 아기를 갖고, 자기랑 비슷한 대통령 후보에게 투표하는 등 가능한 최악의 방식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머저리들이 가득 찬 망할 나라.

 

나는 아무런 흥미가 없었다. 어떤 것에도 아무 흥미가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탈출할 수 있는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은 인생에 어떤 취미가 있었다. 그들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내가 모자라서였다. 그럴 수도 있었다. 나는 종종 열등하다고 느꼈다. 나는 사람들에게서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갈 데가 없었다. 자살? 하느님 맙소사, 그저 귀찮을 일만 더할 뿐이지. 나는 5년 동안 잠이나 자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나를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첼시 고등학교, 학군단에 남아 있었다. 여전히 내 부스럼과 함께. 그 때문에 항상 완전히 망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248p)

 

 

내 앞에 뻗은 길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가난했고 앞으로도 계속 가난하게 살 것이었다. 하지만 딱히 돈을 원하지는 않았다. 내가 뭘 원하는지 몰랐다. 아니, 알았다. 나는 숨을 수 있는 곳,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곳을 원했다. 무언가 된다는 생각은 소름 끼칠 뿐만 아니라 구역질까지 났다. 변호사나 지방 의원, 기술자나 뭐 그런 게 된다는 생각은 얼토당토않아 보였다. 결혼하고, 아이를 갖고, 가족 구조의 덫에 갇히고. 매일 어디론가 일하러 나가고 돌아오고. 얼토당토않았다. 단순한 일이라도 뭔가 한다는 것, 각종 행사에 참여한다는 것, 가족 소풍이나, 크리스마스, 독립 기념일, 노동절, 어머니날·····. 인간은 이런 것들을 견디기 위해 태어났다가 죽는 것인가? 차라리 접시 닦이가 되어 작은 방으로 홀로 돌아가서 나 혼자 술 마시다 죽는 편이 나았다.(275p)

 

 

쟤들이 부자라고 욕할 순 없지.” 지미가 말했다.

아니, 난 씨팔 쟤들 부모를 욕하는 거야.”

쟤들 할아버지 할머니도.” 지미가 말했다.

그래, 쟤들처럼 새 차와 예쁜 여자 친구가 생기면 나라도 기분 좋겠다. 그럼 사회 정의 같은 것 따위에는 개뿔 신경도 안 쓸걸.”

그래.” 지미가 말했다. “사람들이 불의에 신경 쓰는 때는 오직 지들이 당했을 때뿐이지.”(283p)

 

 

작업복을 입은 채로 나는 거기에 서 있었다. 이게 보통 일이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주지사든 환경미화원이든, 외줄타기 곡예사든, 은행 강도든, 치과 의사든, 과일 농장 인부든, 이런 식 아니면 저런 식이었다. 우리는 훌륭한 일을 하길 바란다. 자기 자리에 배치받지만 서서 어떤 얼간이를 기다려야 한다. 거기서 나는 엘리베이터 운전사가 똥 싸러 간 동안 작업복을 입고 녹색 카트 옆에 서 있었다.

그때 어째서 부자로 태어난 운 좋은 남녀 아이들이 항상 웃고 있는지를 명확히 깨달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297p)

 

여자들은 돈 잘 버는 남자를 원했다. 여자들은 지위가 있는 남자를 원했다. 얼마나 많은 품격 있는 여자들이 밑바닥 건달들과 살고 있을까? , 어쨌든 나는 여자를 원하지 않았다. 같이 사는 것도 싫었다. 어떻게 남자들은 여자들과 살 수 있었을까? 그게 무슨 뜻이었을까? 내가 원하는 건 3년 치 식량이 있는 콜로라도의 동굴이었다. 엉덩이는 모래로 닦으면 된다. 무엇이든, 이 지루하고, 사소하고 비겁한 존재 속에서 익사하지 않을 수 있는 무엇이든.(302p)

 

 

 

찰스 부코스키, <호밀빵 햄 샌드위치> ,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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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2

2018/8/1



굉장히 관념적인 소설이라 어렵게 느껴지고 실제로도 그러하지만, 앞쪽 절반 정도는 중학생 정도면 충분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 시기에 뭔들 지대한 영향을 끼치지 않겠냐만 청소년기에 읽는다면 머리 속을 복잡하게 하는 많은 고민거리를 해결하는데 일정부분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신성함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다. 내 유년 생활을 떠받치고 있는, 그리고 누구든 자신이 되기 전에 깨뜨려야 하는 큰 기둥에 그어진 첫 칼자국이었다. 우리들 운명의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선은 아무도 보지 못한 이런 체험들로 이루어진다. 그런 칼자국과 균열은 다시 늘어난다. 그것들은 치료되고 잊혀지지만 가장 비밀스러운 방 안에서 살아 있으며 계속 피흘린다.(26p)

 


데미안이 나를 크로머의 손아귀에서 구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평생 병들고 상했을지도 모른다고 지금도 나는 확신한다. 당시에도 이 구원을 나는 내 짧은 인생의 가장 큰 경험으로 느꼈다. 그러나 구원해 준 사람을, 그가 기적을 완수하자, 나는 곧 제쳐두었다.(59p)

 


생각이란, 우리가 그걸 따라 그대로 사는 생각만이 가치가 있어, 너의 <허용된 세계>는 세계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것을 넌 알았어. 그리고 두번째 절반을 감추려고 했어. 신부님들과 선생님들이 그러듯이. 넌 그걸 감추지 못할 거야! 누구도 안 돼, 한 번 생각하기를 시작하고 나면 말이야(85p)

 


베아트리체 시절의 저 몇 주일, 몇 달의 다정한 안정이 오래전에 사라졌다. 하나의 섬에 도달했고 평화를 찾아냈다고 그때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늘 그랬다. 하나의 상태가 나에게 좋아지자마자, 하나의 꿈이 내게 편안해지자마자, 그것은 어느새 벌써 시들고 흐려졌다. 부질없다, 그 뒷모습을 보며 탄식함은!(129p)

 


당시에 나는 흔히들 말하는 대로 <우연>에 의해서 특이한 도피처를 찾아냈다. 그러나 그런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을 찾아내면,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우연이 아니라 그 자신이, 그 자신의 욕구와 필요가 그를 거기로 인도한 것이다.(131p)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우리는 그의 모습 속에, 바로 우리들 자신 속에 들어앉아 있는 그 무엇인가를 보고 미워하는 것이지. 우리들 자신 속에 있지 않은 것, 그건 우리를 자극하지 않아(152p)

 


당시에 나는 얼마나 간절히 소망했던가. 그가 화를 냈으면 하고, 그가 자신을 방어하고 나한테 소리쳐주었으면!하고.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

그리고 피스토리우스가 주제넘고 배은망덕한 제자의 공격을 그렇게 소리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침묵하고 내가 옳다고 인정함으로써, 그가 나의 말을 운명으로 인정함으로써 그는 내가 나 스스로를 미워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나의 경솔함을 천배 더 크게 만들었다. 때리려 달려들었을 때 나는 방어력 있는 강한 사람을 쳤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맞은 사람은 인고하는 고요한 인간, 말없이 항복하는 무방비한 사람이었다.(169-170p)

 

 

 

헤르만 헤세, <데미안>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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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22

 

 

그랑의 말에 따르면, 나머지 이야기는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모든 사람의 경우가 다 그렇다. 즉 결혼하고, 계속해서 또 조금 사랑하고 일을 한다. 사랑한다는 사실을 깜박 잊어버릴 정도로 일을 한다. 잔도 일을 해야만 했다. 국장이 그랑에게 한 약속이 이행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대목에서 그랑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려면 어느 정도 상상력이 필요했다. 피로해진 탓도 있고 해서 그는 무심한 사람이 되었고, 점점 더 말이 적어졌으며, 젊은 아내가 자기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끔 계속 이끌어 나가지 못했다. 일하는 남자, 가난, 서서히 막혀 가는 장래, 식탁에 앉아도 할 말이 없는 저녁때의 침묵, 그러한 세계에 정열적 사랑이 파고들 여지란 없다. 필시 잔은 고민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 여자는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고통을 고통인 줄도 모른 채 오랫동안 괴로워하는 일이 사람에겐 흔히 있는 법이니 말이다. 몇 해가 지났다. 그 후 그 여자는 떠나고 말았다. 물론 그 여자가 혼자서 떠나간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당신을 무첫 사랑했어요. 그렇지만 이제는 나도 피곤해요. 떠나는 것이 기쁘지는 않아요. 꼭 기뻐야만 새 출발을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이것이 대략, 그 여자가 그랑에게 써 보낸 편지의 내용이었다.(112p)

 

나는 그 호의적인 열정을 이해한다. 재앙이 시작될 때와 그것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으레 약간의 수사를 농하는 법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아직 습관을 털어 버리지 못해서 그렇고 후자의 경우에는 습관이 이미 회복 되어서 그렇다. 불행의 순간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진실에, 즉 침묵에 익숙해진다.’(156~157p)

 

초기에 그들이 이번 질병도 딴 질병이나 다름없는 흔한 것이리라고 생각했을 때에는, 종교도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향락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던 것이다. 낮에 사람들 얼굴에 그려져 있던 그 모든 고뇌는 뜨겁고 먼지투성이인 황혼 녘이 되면 일종의 흉포한 흥분이나 모든 시민을 열에 들뜨게 하는 서투른 자유로 낙착되고 만다.(162~163p)

 

그러나 서술자는 차라리 훌륭한 행동에다 너무나 지나친 중요성을 부여하다 보면 결국에 가서는 악의 힘에 대해 간접적이며 강렬한 찬사를 바치게 되는 것이라고 믿는 편이다. 왜냐하면, 그런 훌륭한 행동이 그렇게도 대단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그 행위들이 아주 드문 것이고, 인간 행위에 있어서 악의와 무관심이 훨씬 더 빈번하게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라는 말밖에는 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것은 서술자가 공감할 수 없는 생각이다. 세계의 악은 거의가 무지에서 오는 것이며, 또 선의도 총명한 지혜 없이는 악의와 마찬가지로 많은 피해를 입히는 수가 있는 법이다. 인간은 악하기보다는 차라리 선량한 존재지만 사실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들은 다소간 무지한 법이고 그것은 곧 미덕 또는 악덕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가장 절망적인 악덕은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믿고서, 그러니까 자기는 사람들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 인정하는 따위의 무지의 악덕인 것이다. 살인자의 넋은 맹목적인 것이며, 가능한 한의 총명을 다하지 않으면 참된 선도 아름다운 사랑도 없는 법이다.(176~177p)

 

같은 시내에서도 특히 피해가 심한 구역을 격리하고 직무상 불가피하다고 생각되는 사람 이외에는 외출을 금하는 조치가 내려졌다. 그때까지 그 지역에 살던 사람들로서는 그러한 조치가 유난스럽게 자기네들에게만 불리하게 취해진 일종의 약자학대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자신들과 비교해 보면서 다른 지역의 주민들을 마치 무슨 자유민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반면에 다른 지역 주민들은 곤란한 순간에 부닥쳐도, 다른 사람들은 그래도 자기네들보다 덜 자유롭다는 것을 상상하고는 어떤 위안을 얻는 것이었다. ‘항상 나보다 더 부자유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 무렵에 품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을 요약하는 표현이었다.(223p)

 

재앙만큼이나 보잘것없는 구경거리는 없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불행은 오래 끌기 때문에 오히려 단조로운 것이다. 그런 나날을 겪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페스트를 겪는 그 무시무시한 나날들이 끝없이 타오르는 잔혹하고 커다란 불길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발바닥 밑에 놓이는 모든 것을 짓이겨 버리는 끝날 줄 모르는 답보 상태 같아 보이는 것이었다.(236p)

 

 

 

 

알베르 카뮈, <페스트> ,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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