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22

 

 

귀에 익숙지 않은 것들은 왠지 모두 고상하게 들린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지만 말이다.(26p)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무언가를 행한다. 그러니까 말이다, 그게 훨씬 더 필요한 일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머리들이 쓸데없이 일하고 있다. 그것은 너무나,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학술적으로 다루고, 이해하고, 지식을 갖게 되면서 인류는 삶에 대한 용기를 서서히 잃어버리고 있다. 예를 들어 벤야멘타 학원의 한 훈련생이 자신이 점잖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점잖은 학생이다. 만약 그가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무의식중에 했던 얌전하고 점잖은 그의 행동들이 전부 사라지면서 그는 뭐가 됐든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101p)

 

 

 

 

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학교>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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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9

 

 

역사를 읽으면 읽을수록, 2차 대전에 관해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전쟁의 분위기가 거기에 말려든 모든 사람을 야수로 만들고, 양편 모두가 자행하는 잔학행위 더미의 맨 밑바닥에 애초의 도덕적 요인이 파묻혀 버리는 광신을 낳게 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137p)

 

 

 

 

하워드 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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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4

2023 발췌

 

 

아름다운 글 한 편을 읽었다. 건축가 김원 선생이 돌아가신 대학 시절의 은사를 그리워하며 쓴 글이다. 그 교수는 정년퇴직하고 집에서 책 읽는 것으로 소일하셨다고 한다. 건축과 교수라면 은퇴하여 당연히 서울시나 건설부의 자문위원, 전문위원, 심의위원이라는 자리에 앉아 대형 건설 프로젝트의 수주에 직간접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보통인데 일절 그런 자리를 마다한 분이라고 한다. “은퇴는 은퇴여야지·····” 하셨다는 것이다. 자장면과 삼판주라는 글의 일부를 옮겨본다.

·····아마 꽤 심심하셨을 것이다. 그래선지 가끔 나에게 전화를 거셔서 김군, 나 점심 좀 사주려나. 자장면도 좋고·····” 하셨다. 나는 이분이 짜장면이라 하지 않고 자장면이라고 천천히 발음하시는 게 듣기 좋았다. 내가 차로 모시러 가겠다고 하면 아니야, 내가 나가서 버스를 타면 되네하셨다. ‘뻐스버스로 하시는 것도 듣기 좋았다. 어느 핸가 정초에 세배를 드리려고 가뵙겠다고 전화를 드렸더니 무척 좋아하시면서 집을 알겠느냐 얼마나 걸리느냐 물으셨다. 그날은 폭설이 내려서 그 집까지 가는 데 애를 먹었다. 골목길에 들어서니 교수님이 부인과 함께 우산을 쓰고 대문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니 썰렁했고 난방도 시원치 않았다. 음식 준비나 누가 다녀간 흔적도 없었다. 그날 밤 교수님은 내가 사간 샴페인을 다 잡수시고 기분이 좋아서 여보, 김군이 가져온 삼판주가 아주 좋구먼하셨다. 샴페인을 삼판주라고 하는 것이 아주 듣기 좋았다. 몇 년 뒤에 교수님은 조용히 돌아가셨고 장례식도 조촐하게 치러졌다·····(87~88p)

 

 

그런데 이들의 공존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이야기에는 끝이 있지만 삶에는 끝이 있을 수 없다는 것. 이야기는 시작되기가 어렵지 일단 시작되면 무조건 끝을 향해 가야 하지만, 삶을 다르다. 삶은 언제든 중단될 수 있고 멈출 수 있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중단이고 멈춤이다. 말하자면 죽음은 이야기의 끝에 찍히는 마침표 같은 것이 아니다. 죽은 자들이 모두 삶을 마무리한 자들이라고 볼 수 없으며, 삶을 마무리한 자들이 그 순간에 바로 죽음을 맞는 것도 아니다. 모든 죽음은 예기치 않은 것이며 사건이다. 그러니 이야기로 치자면 마무리를 해야 할 순간에 사건이 터지는 꼴이다. ‘삶의 한가운데라는 표현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삶의 모든 순간은 다 삶의 한가운데이고, 따라서 죽음은 늘 삶의 한가운데서 맞닥뜨리는 것이다. 이야기와 삶이 드러내는 이러한 편차로 인해 둘의 공존은 서로를 지치게 만든다.(250~251p)

 

 

아무 데로나 가려는 자는 그 어느 곳에도 가지 못하는 법. 그 어떤 항구도 목적지로 삼지 않는 사람에게는 바람도 아무 쓸모가 없다.(290p)

 

 

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몽테뉴는 문필가가 되었다. 출판이 그를 문필가로 만들었고, 그래서 뒷날의 수필에서는 자신의 그림자를 분명히 드러냈다. 모든 공공성은 거울이다. 인간은 자신이 관찰당한다는 것을 알면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정말로 책들이 나오자마자 몽테뉴는 다른 사람을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수필들을 고치기 시작했다. 보르도 판본은 그가 죽는 순간까지 모든 표현을 갈고 닦았으며 구두점을 바꾸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뒷날의 판본들은 수많은 끼워 넣기를 보여준다. 그것들은 인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자기가 책을 많이 읽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언제나 거듭 자신을 중심에 두었다. 이전에는 자신을 알기 위해서 자신을 탐색했다면, 이제는 자기가 누군지를 세상에 보여주려고 하며, 가장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정밀한 자신의 초상화를 내놓으려 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처음 판본에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적다는 것이 더 많은 말을 해준다. 그 모습이 진짜 몽테뉴, 탑 속의 몽테뉴이며, 자신을 모색하는 몽테뉴이다. 처음 판본에는 더 많은 자유와 정직함이 있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조차 유혹을 피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자신을 알고자 하지만 나중에는 자신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다.(291p)

 

 

임호부, <이모부의 서재> , 산과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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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4

 

 

에스키모 어휘에 관한 이야기가 내 연구계획의 한 부분을 차지할 것입니다. <100년 동안의 인류학적 과오>라는 제목으로 집필중인 책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고약한 전문적 무능력의 사례를 수집해 왔습니다. 사실이 아니라고 판명됐지만, 해당 분야의 상투적 지식으로 둔갑해 알게 모르게 각종 교과서에 수록된 인류학의 진부한 이야기들 말입니다. 사모아에는 프리섹스 관습이 있어서 범죄와 스트레스가 없다는 이야기, ‘점잖은아라페쉬족과 같이 성이 반전된 문화(남자들은 사람 사냥꾼임), ‘석기시대의 생활에 머물러 있는원시적인 타사다이족(부패한 필리핀 문화부장관이 모계사회 원주민이라고 조작한 부락민들), 문명의 여명기에 존재했던 모계사회, 근본적으로 상이한 호피족의 시간개념, 모든 것이 이곳과는 반대하고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문화, 기타 등등···.

이것들을 하나로 꿰는 하나의 맥락이 있습니다. 철저한 문화상대주의에 물든 인류학자들은 오직 상식만을 갖춘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쉽게 터무니없는 것들에 현혹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마치 카스테녜다의 돈주안 이야기와 흡사한 것들내가 정말로 재미있게 읽었던 이야기들이 수많은 교과서에 엄연한 사실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직업적 전문성이 그들을 완전하고도 철저한 얼간이로 만들어 왔던 셈입니다. 근본주의가 기적에 대한 설명을 수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과 똑같이 훈련된 인류학적 신념을 가진다는 것은 다른 지역의 그 어떤 이국적인 설명들도 믿게끔 해 줍니다. 실제로 이러한 많은 엉뚱한 것들이 모든 학식 있는 사회과학자들의 표준적인 지적 장치의 일부가 되어 다양한 정신적·사회적 현상에 대한 균형 있는 추리에 영구적인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내 생각에 이것은 나를 영구적인 고용불능자로 만들 것이라 생각하므로 나는 이것을 조만간에 끝낼 계획이 없습니다.(628~629p)

 

 

 

스티븐 핑커, <언어본능> , 동녘사이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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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4

 

 

그러면 이제 왜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가 하는 에피쿠로스의 물음으로 돌아가자. 하나는 우리가 그것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죽음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이 일어날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20세기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철학 논고>에서 죽음은 삶에서의 사건이 아니다고 씀으로써 이러한 견해를 메아리치게 한 셈이다. 사건들이란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지만, 우리 자신의 죽음은 경험 가능성의 제거일 뿐 우리가 의식할 수 있고 따라서 어떻게든 살아서 겪는 무언가가 아니다.

(...)

에피쿠로스가 죽음의 공포로부터 추종자들을 치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 또 다른 방법은 우리가 미래와 과거에 관해 느끼는 것이 각각 다름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미래를 염려하지만 과거를 염려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시간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이 있었다. 좀더 일찍 태어날 수도 있었겠지만 어머니의 태내에 있었던 몇 달간이나, 심지어 임신 전이어서 단지 부모들에 대한 가능성일 뿐이었던 순간들, 그뿐만 아니라 억겁의 시간이 우리가 출현하기 전에 흘러갔다. 우리는 보통 태어나기 전의 모든 시간동안 존재하지 않은 것은 걱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존재하지 않았던 모든 시간을 어째서 염려해야 한단 말인가? 그것이 참이라면 어째서 죽음 이후 우리가 존재하지 않을 영겁의 시간을 그토록 염려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의 생각은 균형 잡혀 있지 않다. 우리는 태어나기 전의 시간보다 죽은 후의 시간을 걱정하는 쪽으로 치우쳐 있다. 에피쿠로스는 이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이것을 알고 나면 우리는 죽음 이후의 시간을 탄생 이전의 시간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별다른 관심거리일 수가 없다.(36~37p)

 

 

 

나이절 워버턴, <철학자와 철학하다> , 에코리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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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9/29

 

 

2001년 유럽연합(EU)의 한 보고서는 15년에 걸친 81건의 조사 프로젝트를 검토한 결과 유전자 조작 곡물이 인간의 건강과 환경에 새로운 위험을 가한다는 증거를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것은 생물학자에게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유전자 조작 식품은 결코 자연식품보다 위험하지 않다. 기본적으로 자연 식품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건강 식품점에서 판매하는 거의 모든 동물과 야채는 수천 년 동안 선택적인 품종 개량과 이종 교배를 통해 유전적으로 조작된것들이다. 야생에서 자라던 당근의 조상은 가늘고 쓴맛이 나는 흰색 뿌리였다. 옥수수의 조상은 쉽게 부서지는 속에 돌처럼 단단하고 작은 낱알 몇 개가 붙어 있던 1인치 길이의 보잘것없는 품종이었다. 다윈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식물들은 먹히겠다는 특별한 욕구를 갖지 않은 생물이어서 맛있다거나 건강에 좋다거나 인간이 재배해서 수확하기 쉬운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인간에게 먹히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자극물, 독성, 쓴맛이 아는 성분 등을 진화시켰다. 따라서 자연 식품이라고 해서 특별히 안전한 점은 없다. 유해물에 저항하기 위해 선택적으로 교배하는 자연의 방법은 식물의 독성 농도를 증가시키기만 한다. 자연 감자의 한 품종은 인간에게 해로운 독성이 발견되어 시장에서 퇴출당했다. 천연 향료한 식품 과학자의 정의에 따르면 구시대 기술로 얻어낸 향료도 화학적으로 인공 감미료와 구별하기 어려울 때가 많고, 구별이 가능할 때에도 때로는 천연 향료가 더 위험하다. “천연아몬드 향료인 벤즈알데히드를 복숭아 씨에서 추출하면 시안화물이 함께 나오지만, 그것을 합성해 인공 감미료를 만들면 그렇지 않다.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두려움은 건강의 측면에서 보자면 명백히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식품 가격을 더욱 올려서 가난한 사람들이 이용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다.

(...)

이렇게 볼 때 유전자 조작 식품에 대한 두려움은 더 이상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생물에는 어떤 본질이 있다는 표준적인 직관에 불과하다. 자연 식품에는 그 식물이나 동물의 순수한 본질이 있고 그와 함께 그것이 성장한 시골 환경의 건강한 힘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유전자 조작 식품이나 인공 첨가제를 함유한 식품은 역한 실험실이나 공장에서 만든 오염 물질이 의도적으로 첨부된 식품이라 생각한다. 유전학, 생화학, 진화, 위험 분석 등에 의존해서 아무리 합리적인 주장을 제기해도 이 뿌리깊은 사고 방식 앞에서는 소 귀에 경 읽기일 뿐이다.(404~407p)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모두 저능아라거나 전문가들이 복잡한 기술적인 용어를 자제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위험을 완전히 이해하는 합리적인 사람들조차도 진보한 기술을 외면하기로 결정할 수 있다. 만약 어떤 것이 본능적으로 역겹다고 느껴지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그것이 합리적이든 아니든 자신의 심리적 기준에 따라 거부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위생적으로 복원된 쓰레기장에서 재배한 야채를 거부하고 바닥이 유리로 된 승강기를 피하는 것은, 그것이 위험하다고 믿어서가 아니라 그런 생각이 두려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유전자 조작 식품을 먹거나 원자력 발전소 옆에서 사는 것에 대해 똑같은 감정을 느낀다면,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거나 비용을 다른 사람들에게 지우려고 하지 않는 한, 그런 것을 거부할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409p)

 

 

자연은 교수형을 좋아하는 재판관이라는 속담이 있다. 수많은 비극이 우리의 신체적인지적 본질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몸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물질의 배열로 이루어져 있어서, 잘못될 경우는 수없이 많고 잘될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우리는 틀림없이 죽고, 또 그 사실을 알 정도로 영리하다. 우리의 마음은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에 맞추어지고, 지독한 교육에 의해서만 바로잡을 수 있는 오류에 잘 빠지고, 마음에 품을 수 있는 가장 심오한 의문에 사로잡혀 속이 썩는다.(424p)

 

 

부모가 아무리 잔소리를 하고, 아첨을 하고, 모범적인 행동을 보여도 아이들의 성격은 절대로 부모의 의도대로 형성되지 않는다. 어린이에 관한 장에서 보겠지만, 동일 문화권이란 조건에서 한 쌍의 부모가 자식을 양육하는 효과는 놀라울 정도로 작다. 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의 성격 차는 태어날 때부터 떨어져 자란 아이들의 성격 차보다 더 크게 나타난다. 입양된 아이들은 서로 너무 다르게 자라나서, 오히려 생면부지의 사람과 더 비슷할 정도이다.

(...)

아이들이 부모의 뜻대로 크지 않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부모 노릇을 하면서 직접 알게되는 씁쓸한 교훈 중 하나이다. 시인 칼릴 지브란은 이렇게 썼다. “우리의 자식은 우리의 자식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수는 있지만 생각을 줄 수는 없다. 아이들에겐 그들 자신의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437p)

 

 

 

스티븐 핑커, <빈 서판> , 사이언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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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8/19



토머스 쿤이 이 문제를 더 깊이 파고들어갔을 때, 그는 과학의 발전이란 여태까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아주 다르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과학의 발전이란 더 많은 진리의 끊임없는 축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난폭한 선거전과 정권 교체를 동반하는, 임기가 있는 일련의 정부들로 이루어진다.
쿤은 어떤 과학에서나 하나의 지배적인 학설이 있으며, 이 학설은 서로 보완하는 주도적 개념들과 배후의 가설들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이런 가정들은 당연하고도 의문의 여지가 없으며, 논증도 필요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것들은 과학적 합의를 떠받친다. 그러한 주도 개념과 가정들의 네트워크는 하나의 이론보다는 규모가 크고, 세계관보다는 규모가 작다. 쿤은 이것을 모델을 뜻하는 그리스 단어에서 차용해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이 지배적 패러다임을 확증하는 데에 몰두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정부를 구성하고 통상적인 과학을 운영한다.
그러나 언제나 소수의 비추종자들이 있다. 그들은 지배적 패러다임으로 설명될 수 없는 문제에 매력을 느낀다. 당연히 그들은 정부로부터 불신임을 당하고 반대의 길로 나아간다. 이때 그들은 더 많은 사실, 더 많은 추종자를 모아 마침내 지배적 패러다임을 총공격하고 심지어 정부도 인수하고 또 과학적 도그마로서 그들의 새로운 학설을 창설하고, 과학의 ‘새로운 언어’를 널리 보급한다. 쿤은 이러한 과정이 진행될 때 과학혁명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또한 오랜 선거전을 치른 후 반대당이 정부를 전복시켜 결국 정부를 이양 받는 민주적 정권 교체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은 기존 정부의 구성원들에게는 상당히 고통스럽다. 그 이유는 그렇게 됨으로써 그들의 과학자로서의 업적은 평가절하되고, 또 폐물로 간주되어 더 이상 사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마지막 숨이 넘어갈 때까지 옛 패러다임을 방어하는 것이다. 플로지스톤이 자발적으로 소멸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그것을 포기했다. 기성 과학의 이러한 끈질김은 얼핏 보기에, “기득권자는 각성시키지 힘들다”는 속담에 대한 증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끈질김은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는 생산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특히 반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반론을 제기할 때 물샐 틈 없이 이론을 구성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새로 성립되는 정부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통치하기 시작한다. 물론 거기에 부합하지 않는 새로운 인식이 또다시 모아진다면 정권 인수과정은 새롭게 시작된다.(522~523p)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을 생각은 없으나 아주 대략적으로라도 그가 논의하는 주장이 어떤 것인지 궁금한 사람이라면 위의 2p 분량의 내용만 읽어봐도 대충 가닥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막상 무엇을 읽어야 할지 마음속으로 결심이 서지 않았는데 도서관 사서가 성가시게도 “무엇을 찾으시나요?”라고 채근하듯이 묻는다면, 이런 말로 대응하면 된다. “18세기 후반부에 있었던 회중시계의 대중적 확산에 관한 연구서들을 찾습니다.” 그러면 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잠잠해질 것이다.(621p)

-작가 양반이 이런 유머를 좋아 하는 것 같은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ㅡ 디트리히 슈바니츠, <교양> 中, 들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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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9/27

 

 

여쭈고 싶었던 건 경험에 관해서예요. 흔히 그러잖아요. 나이를 먹으면 경험이 늘어난다고. 그래서 좋다는 뜻이잖아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말 경험이 쓸모 있나요?”

어떤 경험?”

, 다녀온 곳, 만난 사람. 이미 겪은 상황. 그래서 다시 그 상황에 마주칠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아는 것. 그런 것들요. 나이가 들어서 현명해진다고 말할 때, 사람을 현명하게 만들어 줄 그런 것들요.”

글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전혀 현명해지지 않았어. 내가 이런저런 일들을 겪은 건 사실이지. 그런 일을 다시 마주하면, 혼잣말을 하겠지. ‘또 나타났군이라고. 그래도 도움은 안 될걸. 내 견해로는, 내 개인적으로 보자면, 나는 계속 점점 더 철없고 또 철없고 또 철 없어져. 그게 사실이야.”

설마요. 정말이세요, 선생님? 젊었을 때보다 철없다고요?”

훨씬 훨씬 더 철없지.”

그럼, 경험은 아무 쓸모도 없나요? 경험을 쌓은 뒤나 아무 일도 겪지 않았을 때나 마찬가지라는 말씀이세요?”

아니, 그런 말은 아니야. 내 말은, 경험을 이용할 수 없다는 뜻이야. 과거의 경험을 이용하지 않으려 하면, 다시 말해서, 어떤 일에 맞닥뜨렸을 때 그 일을 그때그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게 오히려 경이로울 수 있지.”(182~183p)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싱글맨> , 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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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9/12

 

 

1. 어렸을 때 판타지 소설과 무협 소설을 즐겨 읽었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그 외에는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읽지 않은 것 같다. 그 책 중에는 떠올려보면 지금도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있는 책들과 시간 때우기 용이나 남 앞에 내놓고 얘기하기 부끄러운 책이 있다. ‘이르나크의 장’은 전자에 해당하는 책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스토리 전개나 같은 사건을 화자를 달리해서 보여주는 구성 같은 것들이 구태의연해 보이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는 걸 보면 어렸던 나에게는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도대체 어떤 점이 인상적이었냐면 하나의 사건을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침 없이 완전히 객관적으로 서술하기는 불가능하고 보는 관점이나 의도, 입장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거나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정말이지 ‘쌀로 밥 짓는다’는 말 만큼이나 당연하다면 당연하고 역사책 몇 권만 뒤적거려봤어도 깨달을 수 있는 생각이었을 텐데 그때의 나는 위의 책으로 비로소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해보게 됐다.

 

2. 호모 속에 속하는 여러 종 중 멸절하지 않고 유일하게 살아남아 번성한 것을 넘어 지구의 생태계를 좌지우지하고 있는 호모사피엔스의 탄생에서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에 대한 예측까지를 3개의 핵심적인 사건을 이용하여 큰 시각에서 흥미진진하게 조망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가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나 비교적 과학 분야에 치중되어 있으나 거시사를 다루는 측면에서 비슷한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보다는 수월하게 읽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효율성이 굉장히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투입에 대한 산출의 비율이 높은 것을 효율이 좋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책 한 권을 제대로 소화한다면 여러 권의 책을 읽은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가축화된 동물에 대한 견해나 인간이 밀을 필요에 맞게 개량하고 길들인 게 아니라 밀이 자신의 번식을 위해 인간을 이용하고 길들였다는 견해는 마이클 폴란이 쓴 여러 저작물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마이클 폴란이 ‘욕망하는 식물’에서 사과, 감자, 대마초, 튤립 4가지 작물을 통해 인간이 일방적으로 작물을 선택하고 개량하는 것이 아니라 식물이 인간을 길들인다는 주장을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또한 행복을 논하며 불교사상과 명상기법에 대단히 우호적인 모습이 보였는데 이 모습은 쇼펜하우어를 떠올리게 하며, 과거와 비교 했을 때 오늘 날의 평화에 대해 비교적 낙관적인 분석을 하는 모습은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간략하게 요약해놓은 느낌을 받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독자들에 따라 얻어갈 수 있는 부분이 많아 보인다. 단점이라면 자신의 전공분야인 역사에 대한 전문성은 차치하더라도 그걸 제외한 광범위한 학문 분야에 대한 정보의 엄밀성에 의문이 들고, 최대한 중간자적 위치에서 역사를 서술하고 있으나 제국주의에 대해 우호적인 관점이 좀 걸린다. 본문에서 이런 언급이 있다. “어쨌든 거의 모든 제국은 유혈사태 위에 세워졌고 압제와 전쟁으로 권력을 유지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오늘날의 문화 대부분은 제국의 유산을 기초로 하고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나라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고 해서 그 유혈사태를 긍정하고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우리는 피상적인 지식만으로 그들을 부정하거나 이상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아체족은 천사나 악마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고대 수렵채집인도 마찬가지였다.(89p)

 

하지만 양치기가 아닌 양 떼의 입장에서 보자면, 대다수의 가축화된 동물에게 농업혁명은 끔찍한 재앙이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이들의 진화적 ‘성공’은 무의미하다. 아마도 좁은 상자 안에 갇혀서 살을 찌우다가 육즙이 흐르는 스테이크가 되어 짧은 삶을 마감하는 송아지보다는 멸종 위기에 처한 희귀한 야생 코뿔소가 더 만족해할 것이다. 만족한 코뿔소는 자신이 자기 종족의 마지막 개체라는 데 아무 불만이 없다. 송아지의 종이 수적으로 성공한 것은 개별 개체들이 겪는 고통에 그다지 위안이 되지 못한다.(147p)

 

이렇게 빼앗은 잉여식량은 정치, 전쟁, 예술, 철학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들은 왕궁과 성채, 기념물과 사원을 지었다. 근대 후기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90퍼센트는 아침마다 일어나 구슬 같은 땀을 흘리며 땅을 가는 농부였다. 그들의 잉여 생산이 소수의 엘리트를 먹여 살렸다. 왕, 정부 관료, 병사, 사제, 예술가, 사색가······ 역사책에 기록된 것은 이들 엘리트의 이야기다. 역사란 다른 모든 사람이 땅을 갈고 물을 운반하는 동안 극소수의 사람이 해온 무엇이다.(153p)

 

자연의 질서는 안정된 질서다. 설령 사람들이 중력을 믿지 않는다 해도 내일부터 중력이 작용하지 않을 가능성은 없다. 이와 반대로 상상의 질서는 언제나 붕괴의 위험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화에 기반하고 있고, 신화는 사람들이 신봉하지 않으면 사라지기 때문이다. 상상의 질서를 보호하려면 지속적이고 활발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이런 노력 중 일부는 폭력과 강요의 형태를 띤다. 군대, 경찰, 법원, 감옥은 사람들이 상상의 질서에 맞춰 행동하도록 강제하면서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다. 어떤 바빌론 사람이 이웃의 눈을 멀게 했다면 그에게 ‘눈에는 눈’ 법을 강제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모종의 폭력이 필요하다. 1860년 미국인 대다수가 아프리카인 노예 또한 사람이며 자유권을 누려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을 때, 남부 주들이 이를 지키게 하기 위해서 피비린내 나는 내란을 치러야만 했다.(167p)

 

사람들이 가장 개인적 욕망이라고 여기는 것들조차 상상의 질서에 의해 프로그램된 것이다. 예컨대 해외에서 휴가를 보내고 싶다는 흔한 욕망을 보자. 이런 욕망은 전혀 자연스럽지도, 당연하지도 않다. 침팬지 알파 수컷은 권력을 이용해 이웃 침팬지 무리의 영토로 휴가를 갈 생각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엘리트들은 피라미드를 짓고 자신의 시신을 미라로 만드는 데 재산을 썼지만, 누구도 바빌론에 쇼핑하러 간다거나 페니키아에서 스키 휴가를 보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늘날 사람들이 휴가에 많은 돈을 쓰는 이유는 그들이 낭만주의적 소비지상주의를 진정으로 신봉하기 때문이다.(173p)

 

편견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굳어졌다. 좋은 직업은 모조리 백인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흑인들이 실제로 열등하다고 믿기가 쉬워졌다. 평균적인 백인 시민은 이렇게 말한다. “보라고, 흑인이 해방된 지도 여러 세대가 지났어. 하지만 교수나 법률가나 의사가 된 흑인이 얼마냐 되냐고. 심지어 은행 출납계원이 된 사람도 드물어. 이건 그들이 지능이 떨어지고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닐까?” 흑인들은 악순환에 빠졌다. 그들은 지능이 떨어진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이미 백인들이 차지해버린 직업을 구할 수 없었는데, 그들이 열등하다는 증거는 백인들이 차지한 직업을 가진 흑인이 드물다는 바로 그 점이었다.(208~209p)

 

이런 악순환은 수세기 수천 년 지속되면서 역사적으로 우연히 발생한 질서에 불과한 상상의 위계질서를 지속시킬 수 있다. 부당한 차별은 시간이 흐르면서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심해질 수 있다. 돈은 돈 있는 자에게 들어고, 가난은 가난뱅이를 방문하는 법이다. 교육은 교육받은 자에게, 무지는 무지한 자에게 돌아가게 마련이다. 역사에서 한번 희생자가 된 이들은 또다시 희생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역사의 특권을 누린 계층은 또다시 특권을 누릴 가능성이 크다.

대부분의 사회정치적 차별에는 논리적, 생물학적 근거가 없으며, 우연한 사건이 신화의 뒷받침을 받아 영속화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훌륭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만일 흑인과 백인의 구분, 브라만과 수드라의 구분이 생물학적 실체에 근거를 두었다면 어떨까? 만일 브라만이 정말로 수드라보다 더 나은 뇌를 가지고 있다면? 그렇다면 인간사회를 이해하는 데는 생물학으로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호모 사피엔스의 각기 다른 집단이 지니는 생물학적 차이는 사실상 무시할 만한 수준이므로, 생물학으로는 인도 사회의 곡절이나 미국 인종차별의 역사를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상상의 산물을 잔인하고 매우 현실적인 사회구조로 바꿔놓은 사건들, 조건들, 권력관계들을 연구해야만 비로소 그런 현상들을 이해할 수 있다.(211~212p)

 

엘리자베스 여왕의 치세였던 45년 내내 모든 의원들은 남자였고, 육군과 해군의 모든 장교는 남자였고, 모든 판사와 변호사, 주교와 대주교, 신학자와 사제는 남자였으며, 모든 의사와 외과의사, 모든 대학과 칼리지의 학생과 교수도 남자였고, 모든 시장과 주 장관, 거의 모든 작가, 건축가, 시인, 철학자, 화가, 음악가, 과학자도 남자였다.(223p)

 

기원전 첫 밀레니엄 동안, 보편적 질서가 될 잠재력이 있는 후보 세 가지가 출현했다. 세 후보 중 하나를 믿는 사람들은 처음으로 세계 전체와 인류 전체를 하나의 법 체계로 통치되는 하나의 단위로 상상할 수 있었다.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모두가 ‘우리’였다.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최초로 등장한 보편적 질서는 경제적인 것, 즉 화폐 질서였다. 두 번째 보편적 질서는 정치적인 것, 즉 제국의 질서였다. 세 번째 보편적 질서는 종교적인 것, 즉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보편적 종교의 질서였다.(246~247p)

 

인도 사람에게 금을 사용할 실용적인 용도가 없더라도, 지중해 사람들이 이것을 원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인도 사람들은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게 된다. (...) 철학자와 사상가와 예언자는 수천 년에 걸쳐 돈을 흉보면서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매도했다. 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한편 돈은 인류가 지닌 관용성의 정점이다. 돈은 언어나 국법, 문화코드, 종교 신앙, 사회적 관습보다 더욱 마음이 열려 있다. 인간이 창조한 신뢰 시스템 중 유일하게 거의 모든 문화적 간극을 메울 수 있다. 종교나 사회적 성별, 인종, 연령, 성적 지향을 근거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유일한 신뢰 시스템이기도 하다. 돈 덕분에 서로 알지도 못하고 심지어 신뢰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266p)

 

어떻게 하면 모든 것을 집착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고타마는 집착 없이 실체를 있는 그대로 느끼게끔 훈련하는 일련의 명상기법을 개발했다. 이 방법은 우리 마음이 “지금과 다른 어떤 경험을 하고 싶은가?”보다 “지금 나는 무엇을 경험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온 관심을 쏟도록 훈련시킨다. 이 같은 마음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321p)

 

사실 그 시대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 다시 말해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야말로 그 시대를 가장 모르는 사람들이다. 사후의 깨달음에 의해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정작 그 시대에는 전혀 명백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 역사의 철칙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글로벌 경제위기에서 벗어난 것인가, 아니면 최악의 위기가 곧 닥쳐올 예정인가? 중국이 성장을 계속해서 선도적 초강대국이 될까? 미국은 헤게모니를 잃을까? 일신론적 근본주의가 급증하는 것은 미래의 파도일까 아니면 장기적 중요성은 별로 없는 국지적 소용돌이일까? 우리는 환경적 재앙으로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기술적 파라다이스로 향하고 있는가? 어느 쪽이든 이를 뒷받침하는 훌륭한 주장이 존재하지만, 확실히 알 방법은 없다. 그러나 불과 몇십 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이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은 명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338~339p)

 

사실은 압제와 착취의 이야기도, 백인의 짐 이야기도 현실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유럽 제국들은 너무나 큰 규모로 다양하고 수많은 일들을 했기 때문에, 무슨 주장에 대해서든 그에 맞는 사례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이 제국들은 세계 곳곳에 죽음과 압제와 불의를 퍼뜨리는 사악하고 기괴한 집단이었을까? 그렇다고 믿는 사람은 이들이 저지른 범죄로 백과사전이라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제국이 사실은 새로운 의학, 더 나은 경제적 형편, 더 큰 안보를 제공해서 피지배인들의 삶의 조건을 개선했다고 주장하고 싶은가? 그런 업적으로 채워진 백과사전도 너끈히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제국들은 과학과 긴밀히 협력했던 덕에 엄청난 힘을 발휘했고 세계를 엄청나게 바꾸어놓았으므로, 이들에게 간단히 선하다거나 악하다는 딱지를 붙일 수는 없다. 제국들은 우리가 아는 세상을 창조했고, 여기에는 우리가 그들을 평가하는 데 사용하는 이데올로기도 포함된다.

하지만 제국주의자들은 과학을 좀 더 사악한 목적에도 사용했다. 생물학자, 인류학자, 심지어 언어학자들까지 유럽인들은 다른 모든 인종에 비해 우월하며 따라서 이들을 지배할 권리(아마도 의무는 아닐지도 모르지만)를 가진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느 과학적 증거를 제공했다.(426~427p)

 

최근 몇십 년간 국가 공동체는 소비자 집단에 의해 점점 더 빛을 잃어왔다. 소비자 집단은 서로 직접 잘 알지는 못하지만 소비 습관과 관심이 동일하고,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동일한 공동체의 일부라고 느끼며 자신을 그렇게 규정한다. 이것은 아주 이상하게 들리는 이야기이지만, 우리 주변에는 그런 예가 너무나 많다. 가령 마돈나의 팬들도 그런 소비자 공동체를 구성한다. 그들은 주로 구매 패턴으로 스스로를 규정한다. 마돈나의 공연 티켓, CD, 포스터, 셔츠, 휴대전화 벨소리 음악을 구매하며 이를 통해 자신이 누구인가를 규정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팬들, 채식주의자들, 환경주의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들 역시 무엇보다 자신들이 소비하는 것에 의해 규정된다. 소비가 그들 정체성의 중추를 이룬다. 독일인 채식주의자는 독일인 육식주의자보다는 프랑스인 채식주의자와 결혼하는 쪽을 선호할 가능성이 크다.(514~515p)

 

이런 전쟁이 몇몇 국가들 사이에서 발발한 위험은 있다. 예컨대 이스라엘과 시리아,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아, 미국과 이란이 그렇다. 하지만 이는 법칙을 증명하는 예외일 뿐이다. 물론 미래에는 규칙이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의 세계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진했다는 깨달음이 뒤늦게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순진함 자체가 더없이 매혹적이다. 평화가 너무나 널리 퍼져 있어서 사람들이 전쟁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대는 과거에는 달리 없었다.

이처럼 행복한 진전을 설명하기 위해서, 학자들은 우리가 결코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책과 논문을 써서 이 현상에 기여하는 요인을 몇 가지 확인했다. (...)

첫 번째이자 다른 무엇보다, 전쟁의 대가가 극적으로 커졌다.

둘째, 전쟁의 비용이 치솟은 반면 그 이익은 작아졌다.

마지막 요인은 세계 정치 문화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는 점이다. (...)

세 요인 사이에는 양의 되먹임 고리가 존재한다. 핵무기에 의한 대량학살 위협은 평화주의를 육성한다. 평화주의가 퍼지면 전쟁이 물러가고 무역이 번창한다. 무역은 평화의 수익과 전쟁의 비용을 모두 늘린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되먹임 고리는 전쟁에 또 다른 장애물을 만들어내는데, 궁극적으로는 이것이 모든 장애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판명될지도 모른다. 점점 치밀해지는 국제적 연결망은 국가들의 독립성을 서서히 약화시켜, 어느 한 나라가 일방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줄인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더 이상 전면전을 벌이지 않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이제 독립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이스라엘, 이탈리아, 멕시코, 타이 국민들이 독립성이라는 환상을 품고 있을지라도, 사실 그들의 정부는 독립적인 경제, 외교 정책을 수행할 수 없으며 혼자 힘으로는 전면전을 벌이고 수행할 능력이 없는 것도 확실하다. 3장 <제국의 비전>에서 설명했듯, 우리는 지구 제국의 형성을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이전의 제국들과 마찬가지로 이번 제국 역시 그 국경 내에서 평화를 강제한다. 그리고 그 국경이 지구 전체를 아우르기 때문에, 세계 제국은 세계 평화를 효과적으로 강제한다.(526~529p)

 

우리가 중세 사람들에게 “당신의 삶 전체에 대해 만족하십니까?”라고 물었다면, 이들은 주관적 행복의 수준이 매우 높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중세 조상들이 행복했던 것은 사후의 삶에 대한 집단적 환상 속에서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라는 말인가? 그렇다. 환상에 구멍을 뚫어 파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행복하지 않을 리가 없다. 우리가 아는 한, 순수한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은 절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류는 목적이나 의도 같은 것 없이 진행되는 눈먼 진화과정의 산물이다. 우리의 행동은 뭔가 신성한 우주적 계획의 일부가 아니다. 내일 아침 지구라는 행성이 터져버린다 해도 우주는 아마도 보통 때와 다름없이 운행될 것이다. 그 시점에서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인간의 주관성을 그리워하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가치는 그것이 무엇이든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중세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발견한 내세의 의미는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인본주의적, 혹은 민족주의적 의미보다 더 심한 망상이 아니었다. 어떤 과학자가 자신은 인간의 지식을 증가시키므로 자신의 삶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자. 어떤 병사는 자신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싸우므로 삶에 의미가 있다고 하고, 어느 기업가는 새로 회사를 세우는 데서 자신의 의미를 발견한다고 하자. 이들이 찾는 의미가 중세 사람들이 경전을 읽거나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고 새로운 성당을 짓는 데서 찾았던 의미보다 더 환상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관건은 의미에 대한 개인의 환상을 폭넓게 퍼진 집단적 환상에 맞추는 데 있을지 모른다. 내 개인적 내러티브가 주변 사람들의 내러티브와 일치하는 한 나는 내 삶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으며, 그 확신을 통해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꽤 우울한 결론이다. 행복은 정말로 자기기만에 달려 있는 것일까?(552~553p)

 

 

 

ㅡ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中,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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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9/7

 


즉 크게 두 가지만 생각하면 된다. ‘물건을 버릴지 남길지 결정하는 것’과 물건의 제 위치를 정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두 가지만 할 수 있으면 누구나 완벽하게 정리할 수 있다. 물건은 정확히 숫자를 셀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씩 버릴지 남길지를 구분하고, 물건마다 바른 위치를 정해 주면 반드시 ’정리의 끝‘은 찾아오게 마련이다. 정리 리바운드 되지 않는 상황을 위해서도 이 두 가지 원칙은 반드시 필요하다.(29p)

 

정리 요령은 간단하다. ‘한 번에, 짧은 기간에, 완벽하게’ 정리하는 것이다. 그리고 ‘버리기’를 먼저 끝내면 된다. 이것이 나의 결론이다.(50p)

 

 

ㅡ 곤도 마리에, <인생이 빛나는 정리의 마법> 中, 더난출판

 



 

어찌 보면 이상한 말로 들리겠지만, 일하는 것보다 어떻게 일할 것인지 계획을 세우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기도 하다.(203p)

 

오랜만에 만난다면 각자 지난 한 해의 10대 뉴스, 혹은 올해의 새로운 목표 3가지를 준비해서 발표해보자. 의외로 친구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될 것이다.(248~249p)

 

 

ㅡ 윤선현, <하루 15분 정리의 힘> 中,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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