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2/11

 

 

현실을 주의 깊게, 집요하게 들여다볼수록 실제 현실과 모든 사람이 현실에 대해 품고 있는 생각이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카프카의 오랜 응시 속에서 현실은 점점 비상식적이고, 따라서 비이성적이고, 따라서 비개연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현실 세상에 대한 이 길고 게걸스러운 시선이 바로 카프카와 그 후의 다른 위대한 소설가들을 개연성의 국경 너머로 이끈 것이다.(103p)

 

 

어리석음이란 대체 무엇인가? 이성은 그럴듯한 거짓말 뒤에 숨어 있는 악을 폭로할 수 있다. 그러나 어리석음에 직면할 때 이성은 속수무책이다. 폭로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리석음은 가면을 쓰지 않는다. 그것은 결백하다. 솔직하다. 벌거벗었다. 그리고 정의할 수 없다. (...) 털끝만 한 의심도 없이, 털끝만 한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사상을 고수할 힘을 주는 것, 그게 바로 어리석음 아닐까? 대리석에 조각된 듯 당당하고 위엄 있는 어리석음 아닐까?(180p)

 

 

자유의 개념. 측량사 K에게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기관은 없다. 그러나 정말로 완전히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까? 모든 권리를 가진 시민이라 해도, 가장 가까운 자기의 환경, 자기 집 밑에 지어진 주차장과 창문 바로 맞은편에서 웅웅거리는 확성기를 과연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그의 자유는 무한하지만 그만큼 무력하다. (...)

시간의 개념.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대립할 때는 동등한 시간 두 개가 대립한다. 덧없는 인생의 제한된 시간 두 개.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사람 대 사람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행정과 맞닥뜨린다. 젊음도, 노화도, 피곤도, 죽음도 모르는 존재. 인간의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 인간과 행정은 서로 다른 시간을 산다. 채무자가 빚을 갚지 않아 파산하게 된 프랑스인 소기업가의 평범한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을 수 있다. 그는 자기에게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고 법정에 나가 변호하려고 하다가 곧 포기하고 만다. 그의 사건이 해결되려면 4년은 더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소송은 길고 인생은 짧다. 이 이야기는 카프카의 「소송」에 나오는 상인 블로크를 떠올리게 한다. 그의 소송은 아무런 판결 없이 5년 반 동안 질질 끌려다닌다. 그사이에 그는 사업을 포기해야 했다. “소송을 위해서 뭔가 하려면 다른 것은 전혀 신경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측량기사 K를 짓누르는 것은 잔인성이 아니라 성의 비인간적 시간이다. 인간은 면담을 요청하고 성은 그것을 뒤로 미룬다. 소송은 길어지고 삶은 끝이 난다.(187-189p)

 

 

위대한 소설가의 주검 위에 오줌을 갈긴다고 해서 이 젊은 시인들이 진정한, 경탄할 만한 시인들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들의 천재성과 어리석음은 같은 샘에서 뿜어져 나온다. 과거에 대해서 난폭하게(격정적으로) 공격적인 만큼, 즐거운 집단 오줌 누기로 축복하며 스스로 그 위임자가 된 듯이 여기는 미래에 대해서도 똑같이 난폭하게(격정적으로) 헌신한다.(196p)

 

 

누구나 이와 같은 일들을 경험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대화 도중 당신이 했던 말을 인용해도 당신은 그게 자신이 했던 말인지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한 말들은 아주 좋은 경우라면 거칠게 단순화되거나, 때로는 (사람들이 당신이 한 조소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면) 왜곡되기도 하고, 아주 빈번한 경우에는 당신이 말했을 법한 혹은 생각했을 법한 것과는 정말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 되어 있을 테니까. 그렇다고 놀라거나 화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명한 이치 중에서도 자명한 이치이니 말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바로 작동하면서 상호 협력하는, (지우는) 망각의 힘과 (변형시키는) 기억의 힘이라는 두 가지 힘에 의해 과거(단 몇 초 후의 과거일지라도)와 단절되기 마련이니까.(202-203p)

 

 

그런데도 예술에 대한 인식 역시 망각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다. 예술은 망각에 직면하여 각기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게 분명하다. 이런 관점에서 시는 특권을 누린다. 보들레르의 소네트 한 편을 읽는 사람은 거기서 단 한 자도 건너뛰고 읽을 수 없다. 그가 그 소네트를 좋아한다면 몇 번씩 되풀이해서 읽을 것이다. 그것도 어쩌면 큰 소리로 말이다. 그가 그 소네트에 정신 없이 빠져 든다면 소네트를 암송할 것이다. 서정시는 기억의 성채다.

이와 반대로 소설은 망각에 직면하여 별 힘을 못 쓰는 견고하지 못한 빈약한 성이다. 만일 내가 스무 쪽을 읽는 데 한 시간이 걸린다면 사백 쪽 분량의 소설을 읽으려면 스무 시간이 걸릴 것이니, 그럼 보자, 일주일이 걸리는 셈이다. 일주일 내내 소설책만 읽을 정도로 한가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니 책을 읽는 중 며칠은 책을 펴 보지도 않고 지나가는 날이 있게 마련인데, 바로 그 공백의 시간에 망각이 곧장 껴들어 와 작업을 개시한다. 그렇다고 망각이 꼭 독서를 하지 않는 공백의 시간에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이 망각은 잠시도 쉬지 않고 책을 읽는 와중에도 끼어든다. 책장을 넘기면서도 나는 방금 읽은 부분을 그새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다음에 나올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이전 이야기의 일종의 개요만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고, 세밀한 묘사, 자잘한 관찰, 경탄해 마지않는 형식들은 이미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다. 수년이 지난 어느 날 한 친구에게 이 소설에 대해서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독서로 얻은 몇몇 기억의 파편들로 각자 아주 다른 책 두 권을 만들어 버리고 만 우리 자신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204-205p)

 

 

어느 날 소설의 역사가 끝이 난다면 끝난 이후에도 남아 있을 위대한 소설들은 어떤 운명을 맞이하게 될까? 어떤 소설들(「팡타그뤼엘」, 「트리스트럼 섄디」, 「운명론자 자크」, 「율리시스」와 같은 소설들)은 줄거리를 말하는 게 불가능하고, 또 그런 이유로 각색도 안 된다. 이 소설들은 있는 그대로 살아남거나 아니면 사라져 버릴 것이다. 다른 소설들(「안나 카레니나」, 「백치」, 「소송」과 같은 소설들)은 품고 있는 ‘스토리’덕택에 줄거리를 말할 수 있는 듯이 보이므로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연극, 만화로 각색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불멸’은 한낱 공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한 소설을 연극이나 영화로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그 소설의 구성을 해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단순한 ‘스토리’만 남게 된다. 형식은 포기하고 말이다. 아니, 예술 작품에서 형식을 제하고 나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사람들은 각색을 통해서 위대한 소설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화려한 무덤을 만들 뿐이다. 그 무덤의 대리석 묘비의 짧은 글귀만이 존재하지 않는 이의 이름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211-212p)

 

 

 

ㅡ 밀란 쿤데라, <커튼> 中,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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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9

 

 

내가 온종일 물리를 공부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동의하지 못할 것이 뻔하다. 따라서 만약 당신이 아이의 행복을 위해 교육한다면 이미 뭔가 잘못된 거다. 왜냐하면 그 행복이란 당신이 정의한 행복이기 때문이다. 행복이 무엇인지는 아이가 직접 결정해야 한다. 동물들이 그러하듯, 결국 인간에게도 교육의 목적은 아이의 독립이다. 행복한 삶을 정의하고 그것을 찾는 것은 부모, 교사, 사회의 몫이 아니라 바로 아이 자신의 몫이다. 아이의 인생은 아이의 것이기 때문이다.(69p)

 

 

만약 누군가 자신은 공중부양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고 하자. 그런데 다른 사람이 보면 할 수 없고 혼자 있을 때만 된다. 이 사람의 말이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은 적어도 과학적이지는 않다. 보편적으로 재현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뉴턴의 중력이론에 따르면 지구 표면에서 모든 물체는 1초에 4.9미터 낙하한다. 이것은 지구상 모든 장소에서 어떤 사람이 하더라도 그러하다. 오늘 해봐도, 내일 해봐도 마찬가지다. 이런 의미에서 뉴턴의 이론은 과학적이다. 바로 이런 속성 때문에 과학이 예측가능성을 가질 수 있게 되고, 가장 합리적인 방법론이 되었다고 믿는다. (..) 과학의 재현가능성에 대한 요구는 예측가능성과도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아무리 유명한 과학자의 이론이라도, 실험결과가 예측한 것과 다르면 그의 이론은 폐기된다. 물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뉴턴이지만, 빠른 속도로움직이는 물체에서 그의 이론은 잘못된 예측을 내놓는다. 특허청에서 일하는 말단 직원이라도, 그의 이론이 재현가능한 예측을 내놓는다면 그가 맞는 거다. 바로 아인슈타인이다. 그래서인지 물리학자들은 권위주의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이론이 옳다면 재현가능한 증거를 보이면 그만인 것이다. 증거가 불충분할 때는 모른다고 말하며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과학적인 자세이다.(126-127p)

 

 

ㅡ 김상욱, <김상욱의 과학공부> 中, 동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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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

 

 

화가들이란 얼마나 기이한 족속이란 말인가! 자네들은 명성을 얻으려고 무엇이든 하지. 그러면서 명성을 얻고 나면 그걸 즉시 내팽개친단 말이야. 그건 어리석은 짓일세. 왜냐하면 세상에서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보다 나쁜 건 단 하나뿐이니 말일세. 그건 남의 입에 전혀 오르내리지 않는 거라네.(45p)

 

 

자넨 모든 사람을 좋아하지, 그 말은 곧 자네가 모두에게 무관심하단 걸세.(53p)

 

 

종류를 불문하고 낭만적인 것의 가장 나쁜 점은 결국 그것이 사람을 낭만적이지 않게 만든다는 거지. (...) 충직한 사람들은 사랑의 변변찮은 면밖에 알지 못하지만, 충직하지 않은 사람들은 사랑의 비극까지도 알거든.(59p)

 

 

“젊은이란 간직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 중 하나라오.”

“난 그렇게 느끼지 않아요, 헨리 경.”

“물론, 지금은 느끼지 못할 거요. 장차 나이가 더 들어 주름이 지고 추해지면, 당신의 생각이 이마에 선을 그어놓고, 당신의 열정이 추악한 불길로 입술에 낙인을 찍어놓으면 느끼게 될거요. 끔찍하게 절감하게 될 테지. 지금은 당신이 어디를 가든 세상을 매료시킬 수 있을 거요. 그게 언제까지 계속될까?····· 당신은 놀라울 만큼 아름다운 얼굴을 지녔어요, 그레이 씨. 인상을 찌푸리지 말아요. 그게 사실이니까. 아름다움은 재능의 한 형태라오. 사실상 재능보다 더 고상한 것으로, 설명조차 필요 없는 것이지. 마치 태양처럼 혹은 봄날처럼, 혹은 검은 물에 비친, 우리가 달이라 칭하는 은빛 조개처럼 말이오. 그 점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가 없다오. 그 속에는 통치자의 신성한 권리가 담겨 있거든. 그것을 소유한 사람은 왕자가 되죠. 당신의 미소는? 그렇지, 젊음을 잃어버리면 당신은 더는 미소를 짓지 않을 테지·····. 혹자는 아름다움이란 단지 피상적일 뿐이라고 말한다오.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요. 하지만 적어도 사람의 사고만큼 피상적이지는 않아요. 내게는 아름다움이야말로 경이로움 자체와도 같다오. 외양을 보고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이야말로 천박하거든. 세상의 진정한 수수께끼는 눈에 보이는 것이라오.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래요, 그레이 씨, 신은 당신에게 관대했어요. 그러나 신은 그것을 곧 도로 빼앗아갈 거요. 당신은 불과 몇 년 동안 참되고 완벽하며 충만한 삶을 살겠지. 그 젊음이 사라지면 당신의 아름다움도 따라서 사라지고, 그때가 되면 당신은 어떤 것에도 승리하지 못했다는 것을 불현 듯 깨닫게 될 거요. 혹은 지난 과거의 기억이 패배보다 훨씬 더 쓰라리다는 사소한 깨달음에 만족해야 할 거요. 매번 달이 기울러갈수록 당신은 더욱 두려운 어떤 것과 가까워질 거요. 세월은 당신은 질투해서, 당신의 백합과 당신의 장미를 위협할거요. 당신은 안색이 창백해지고 뺨이 꺼지고 눈이 탁해질 거요. 끔찍한 고통을 느끼겠지·····. 아! 젊은 시절에 그 젊음을 만끽하시오. 지루한 것들에 귀를 기울이느라 황금 같은 시절을 허비하지 말라고요. 가망 없는 실패를 돌이키려 애쓰지도 말고. 당신의 인생을 어리석고 흔해빠진 저속한 것들에게 내줘서도 안 돼요. 그런 것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그릇된 이상이자 타락한 목표라오. 삶을 살아가시오. 당신에게 주어진 멋진 삶을 살아요! 그런다고 해서 잃을 것도 없으니까. 언제나 새로운 감각을 추구해요.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말고·····. 새로운 쾌락주의, 그것이 우리 시대의 바람이라오. 당신은 바로 그러한 것의 가시적인 상징일 수 있어요. 당신 같은 인물이라면 못 할 게 없겠지. 세상은 한동안 당신에게 속할 거요·····.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난 당신이 스스로 어떤 존재인지, 혹은 진정으로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을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오. 당신에게는 나를 매료시키는 것들이 아주 많아서 난 당신에게 반드시 뭔가를 말해 줘야 한다고 느꼈어요. 당신이 인생을 허비한다면 그야말로 비극일 거라고 생각해요. 젊음이 지속될 시간은 조금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아주 조금 남았지. 언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은 시들어도 다시 피어나지요. 금련화는 내년 6월에도 지금처럼 노랗게 피어날 거요. 몇 달이 지나면 자줏 빛 별이 모습을 드러낼 거요. 그렇지만 젊음은 되찾을 수 없는 것이라오. 스무 살 때 기쁘게 박동 치던 맥박은 점차 약해지겠지. 팔다리의 힘이 빠지고 감각도 무뎌지지. 우린 결국 추악한 인형으로 쇠퇴하고 말 거요. 우리가 그토록 겁냈던 열정에 대한 기억, 우리가 굴복할 용기를 낼 수 없었던 격렬한 유혹에 사로잡힌 채로 말이오. 젊음! 젊음! 세상에서 젊음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단연코 없다오!”(72-74p)

 

 

변덕과 평생의 열정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변덕이 조금 더 오래 지속한다는 거요.(76p)

 

 

내 소중한 친구 바질은 그 자신의 매력적인 모든 것들을 작품 속에 담아내지. 결과적으로 그의 삶에는 그가 지닌 편견과 원칙, 상식밖에 남지 않게 돼. 내가 아는 예술가 중에 인간적으로 유쾌한 이들은 모두 서툰 예술가들이라네. 뛰어난 예술가들은 단지 그들의 작품 속에 존재하고, 결과적으로 그들 자신은 완전히 지루한 사람으로 남거든. 훌륭한 시인, 참으로 훌륭한 시인은 모든 존재 중에서 가장 시적이지 않은 것처럼 말일세. 그렇지만 평범한 시인들은 대단히 매력적인 사람들이라네. (...)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시에 담아내지 못하는 삶을 살지. 그 반대쪽은 자신이 감히 실현하지 못하는 것을 시로 써낸다네.(122p)

 

 

경험이란 양심과 마찬가지로 행동의 적극적인 동기가 될 수 없다. 경험이 보여 주는 모든 것이란 실상 우리의 미래가 우리의 과거와 같을 것이라는 점, 우리가 한 때 저지른 죄악을 우리가 혐오하지만, 다시 기꺼이 반복하리라는 점이었다.(125-126p)

 

 

제임스는 몇몇 낯선 사람들의 호기심 많은 시선을 접하면서 이따금씩 인상을 찌푸렸다. 천재에게는 인생의 말년에 찾아오고, 평범한 사람에게는 평생 떠나는 법이 없는 남의 눈초리가 그는 무척 싫었다.(135p)

 

 

아이들은 처음에는 부모를 사랑하지만 점차 커가면서 판단을 하게 되고 어떤 때는 부모를 용서하기도 한다.(137p)

 

 

가난이 문으로 기어 들어오면 사랑은 창을 통해 달아나 버린다지.(139p)

 

 

더는 사랑하지 않게 된 상대의 감정에는 항상 뭔가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에게 시빌 베인은 터무니없이 신파적으로 보였다. 그녀의 눈물과 흐느낌은 그를 짜증나게 했다.(169p)

 

 

절제는 치명적인 겁니다. 충분함이 한 끼 식사에 불과하다면, 지나친 충분함은 향연과도 같은 것이죠.(295p)

 


“안다는 건 치명적이지. 사람을 매료시키는 건 불확실함이란다. 안개가 끼면 사물이 훌륭해 보이거든.”(331p)

 

 

ㅡ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中, 펭귄클래식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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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

2017/6/30

 

 

재독. 여행이라는 단어와 관련 있는 몇 가지 주제를 뽑아 그 중심으로 여행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느슨하게 전개하는 책이다. 알랭 드 보통의 교양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분야의 인용은,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쉽게 접하기 힘들었을 인물에게 한층 쉽게 접근하도록 도움을 준다. 단적인 예로 존 러스킨을 들 수 있겠다. 이런 이유로 알랭 드 보통은 유시민이 지향한다는 ‘지식소매상’이라는 명칭에 가장 걸맞는 양반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의 퇴폐적이고 염세적인 주인공인 귀족 데제생트 공작은 런던 여행을 기대하면서, 그 과정에서 우리가 어떤 장소를 상상하는 것과 실제로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 사이의 차이에 대하여 매우 염세적인 분석을 내놓는다.(19p)

 

 

그러나 기차를 탈 시간이 다가오면서, 그와 더불어 런던에 대한 꿈이 현실로 바뀔 시간도 다가오면서, 데제생트는 권태에 사로잡혔다. 실제로 여행을 하면 얼마나 피곤할까. 역까지 달려가야 하고, 짐꾼을 차지하려 다투어야 하고, 기차에 올라타야 하고, 익숙하지 않은 침대에 누워야 하고, 줄을 서야 하고, 약한 몸에 추위를 느껴가며 베데커가 그렇게 간결하게 묘사한 볼거리들을 찾아 움직여야 하고······. 그렇게 그의 꿈들은 더럽혀졌다. ‘의자에 앉아서도 아주 멋진 여행을 할 수 있는데 구태여 움직이며 다닐 필요가 뭐가 있는가? 런던의 냄새, 날씨, 시민, 음식, 심지어 나이프와 포크까지 다 주위에 있으니, 나는 이미 런던에 와 있는 것 아닌가? 거기 가서 새로운 실망감 외에 무엇을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데제생트트는 탁자에 앉은 채 생각했다. ‘나의 유순한 상상력이 알아서 갖다 바치는 광경들을 거부하고 늙은 멍텅구리들처럼 해외여행이 필요하고, 재미있고, 유용할 것이라고 믿다니, 내 정신이 잠시 착란을 일으켰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데제생트는 셈을 하고 선술집을 떠나, 트렁크, 짐 보따리, 대형 여행 가방, 바닥 깔개, 우산, 지팡이와 더불어 그의 별장으로 돌아가는 첫 기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집을 떠나지 않았다.(21-22p)

 

 

이렇게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자세하게 전해주는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는 금세 미쳐버릴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삶 자체는 그런 이야기 양식을 따라, 반복과 엉뚱한 강조와 논리가 서지 않는 플롯으로 우리를 지치게 만들곤 한다. 삶은 우리에게 바르닥 전자, 차 안의 안전 손잡이, 길을 잃은 개, 성탄 카드, 꽉 찬 재떨이의 가장자리에 앉았다가 중앙으로 자리를 옮긴 파리만 보여주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귀중한 요소들은 현실보다는 예술과 기대 속에서 더 쉽게 경험하게 된다. 기대감에 찬 상상력과 예술의 상상력은 생략과 압축을 감행한다. 이런 상상력은 따분한 시간들을 잘라내고, 우리 관심을 곧바로 핵심적인 순간으로 이끌고 간다. 이렇게 해서 굳이 거짓말을 하거나 꾸미지 않고도 삶에 생동감을 부여하는데, 이것은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보푸라기로 가득한 현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 현재를 긴 영화에 비유한다면, 기억과 기대는 거기에서 핵심으로 꼽힐 만한 장면들을 선택한다. 내가 이 섬에 오기까지 9시간 30분이 걸렸는데, 기억은 불과 예닐곱 장의 정적인 이미지만 남겨놓았다.(27-28p)

 

 

실제 경험에서는 우리가 보러 간 것이 우리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 때문에 희석되어 버린다. 우리는 근심스러운 미래에 의해 현재로부터 끌려나온다. 당혹스러운 신체적, 심리적 요구들 때문에 미학적 요소들의 감상은 방해를 받는다.(43p)

 

 

“삶은 모든 환자가 자리를 바꾸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 병원이다. 이 환자는 난방 장치 앞에서 아프고 싶어 하며, 또 저 환자는 창가에 누워 있으면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늘 여기가 아닌 곳에서는 잘 살 것 같은 느낌이다.”(51-52p)

 

 

턱수염: 힘의 상징. 턱수염을 너무 많이 기르면 대머리가 된다. 넥타이를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된다. 플로베르는 루이스 콜레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나는 본질적으로 진지한 사람이지만, 나 자신이 매우 우스꽝스럽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스스로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슬랩스틱 코미디처럼 좁은 의미에서 우스꽝스럽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 삶에 내재하는 가장 단순한 행동과 가장 평범한 몸짓으로 표현되는 우스꽝스러움이라는 의미에서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면도를 할 때면 웃음을 터뜨리곤 합니다. 너무 백치 같아 보여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설명하기가 몹시 어렵군요.”(111-112p)

 

 

노인: 홍수, 폭풍 등을 이야기할 때마다 늘 더 심한 경우는 본 기억이 없다고 말한다.(113p)

 

 

그가 가본 곳을 그보다 먼저 여행한 유럽인은 거의 없었다. 덕분에 훔볼트는 상상력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는 아무런 자의식 없이 자신의 관심을 끄는 것을 따라갈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설정한 위계를 따르거나 의도적으로 거부하지 않고, 스스로 가치의 범주들을 만들 수 있었다.(159p)

 

 

여행자가 “19세기 벽화와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는” “교회의 벽과 지붕”에 개인적인 관심이 생긴다면(무슨 죄를 지은 사람처럼 유순하게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실들ㅡ파리처럼 따분한 사실들ㅡ을 크게 뭉뚱그린 질문들, 진정한 호기심이 닻을 내리고 있는 질문들 가운데 하나와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훔볼트에게 그런 큰 질문은 ‘왜 자연이 지역마다 다를까?’하는 것이었다. 이글레시아 데 산 프란시스코 엘 그란데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그 질문은 ‘왜 사람들은 교회를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일 수도 있고, 심지어 ‘왜 우리는 신을 섬기는가?’일 수도 있다. 이런 소박한 출발점으로부터 시작해서 호기심이 사슬처럼 연결되어 ‘왜 지역이 달라지면 교회도 달라질까?’ ‘교회 건축의 주류 양식은 어떤 것이었을까?’ ‘주요한 건축가들은 누구였고, 그들은 어떻게 성공을 거두었을까?’ 하는 질문들을 포괄할 수도 있다. 호기심이 이렇게 느릿느릿 진화한 상태에서만 여행자는 이 교회의 거대한 신고전주의적 양식의 정면을 만든 사람이 사바티니였다는 정보를 권태와 절망이 아닌 다른 감정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여행의 위험은 우리가 적절하지 않은 시기에, 즉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물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로운 정보는 꿸 사슬이 없는 목걸이 구슬처럼 쓸모없고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된다.(171-172p)

 

 

우리는 눈이 차갑다거나 설탕이 달다고 느낄 때처럼 어떤 장소가 아름답다는 것도 즉시, 또 언뜻 보기에는 자연발생적으로 느끼는 것 같다. 따라서 우리가 느낀 매력이 바뀌거나 커질 것이라는 상상은 해보기 힘들다. 아름다움에 대한 느낌은 어떤 장소 자체에 내재한 특질들에 의해 또는 우리 심리의 내부 회로에 의해 결정이 나는 것 같다. 따라서 어떤 아이스크림이 특히 맛있다고 느끼는 것을 어쩔 수 없듯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장소에 대한 느낌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방금 비유적으로 이야기한 것들과는 달리 심미적인 취향은 그렇게 굳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장소를 그냥 지나쳐버리는 것은 이렇다 할 자극이 없어 그곳이 제대로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는 어떤 불행하지만 무작위적인 연상에 의해 등을 돌리게 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와 올리브 나무와의 관계도 그 잎의 은빛 광택이나 가지의 구조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달라질 수 있다. 밀이 바람결에 낟알이 가득한 머리를 숙일 때 이 연약하지만 순수한 작물의 페이소스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 밀을 둘러싼 새로운 연상이 형성될 수도 있다. 아주 서툰 표현으로라도 프로방스의 하늘에서 중요한 것이 파란색의 색조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그 하늘에서 뭔가 눈여겨볼 만한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251-252p)

 

 

러스킨의 생각에 따르면, 데생이 아무런 재능이 없는 사람도 연습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었다. 즉 그냥 눈만 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피게 해준다는 것이다.(300p)

 

 

러스킨은 빨리, 그리고 멀리 여행하고 싶어 하는 소망이 한 곳에서 제대로 된 기쁨을 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즉 바구니 가장자리에 걸린 파슬리의 작은 가지 하나처럼 세밀한데서 기쁨을 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302p)

 

 

두 사람이 산책을 나간다고 해보자. 한 사람은 스케치를 잘하는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그런 데는 취미가 없는 사람이다. 그들은 녹색 길을 따라 걸어간다. 이 두 사람이 지각하는 경치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한 사람은 길과 나무를 볼 것이다. 그는 나무가 녹색임을 지각하지만, 그것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나무가 녹색임을 지각하지만, 그것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태양이 빛나는 것을 보고, 기분이 좋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반면 스케치를 하는 사람은 무엇을 볼까? 그의 눈은 아름다움의 원인을 찾고, 예쁜 것의 가장 세밀한 부분까지 꿰뚫어 보는 데 익숙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햇빛이 소나기처럼 잘게 나뉘어 머리 위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는 잎들 사이로 흩어지고, 마침내 공기가 에메랄드빛으로 가득 차는 모습을 관찰한다. 그는 여기저기에서 가지들이 잎들의 베일을 헤치고 나오는 모습을 볼 것이다. 보석처럼 빛나는 에메랄드색 이끼와 하얀색과 파란색, 자주색과 빨간색으로 얼룩덜룩한 환상적인 지의류가 부드럽게 하나로 섞여 아름다운 옷 한 벌을 이루는 것을 볼 것이다. 이어 동굴처럼 속이 빈 줄기와 뱀처럼 똬리를 틀고 가파른 둑을 움켜쥐고 있는 뒤틀린 뿌리들이 나타난다. 잔디가 덮인 비탈에는 수많은 색깔의 꽃들이 상감 세공처럼 새겨져 있다. 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스케치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녹색 길을 통과하여 집에 돌아왔을 때 할 말도 없고 생각할 것도 없다. 그저 이러저러한 길을 따라 걸어갔다 왔을 뿐이다.(310-312p)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329p)

 

 

여행의 심리를 우리 자신이 사는 곳에 적용할 수 있다면, 이런 곳들도 훔볼트가 찾아갔던 남아메리카의 높은 산 고개나 나비가 가득한 밀림만큼이나 흥미로운 곳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여행을 하는 심리란 무엇인가? 수용성이 그 제일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장소에 다가가게 된다. 어떤 것이 재미있고 어떤 것이 재미없다는 고정관념은 버리게 된다. (...)

이와 대조적으로 집에 있을 때는 기대감이 별로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동네에서 흥미 있는 것은 모두 발견했다고 자신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그곳에 오래 살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이다. 우리가 10년 이상 산 곳에 뭔가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는 생각은 하기 힘들다. 우리는 습관화되어 있고, 따라서 우리가 사는 곳에 대해 눈을 감고 있다.(334-335p)

 

 

혼자 여행을 하니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함께 가는 사람에 의해 결정되어버린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도록 우리의 호기심을 다듬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특정한 관념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어떤 측면이 나타나는 것을 교묘하게 막을 수도 있다. 동행자에게 면밀하게 관찰을 당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는 일이 억제될 수도 있다. 또 동행자의 질문과 언급에 맞추어 우리 자신을 조정하는 일에 바쁠 수도 있고, 너무 정상으로 보이려고 애를 쓰는 바람에 호기심을 억누를 수도 있다.(341-342p)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ㅡ하찮고 일상적인 경험ㅡ을 잘 관리함으로써 그것을 경작 가능한 땅으로 만들어 1년에 세 번 열매를 맺게 한다. 반명 어떤 사람들ㅡ그 숫자는 얼마나 많은지!ㅡ은 운명의 솟구치는 파도에 휩쓸리거나 시대와 나라가 만들어내는 혼란스러운 물줄기 속으로 밀려들어가면서도 늘 그 위에 코르크처럼 까닥거리며 떠 있다. 이런 것을 관찰하다 보면, 우리는 결국 인류를 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 즉 적은 것을 가지고 많은 것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아는 소수(극소수)와 많은 것을 가지고 적은 것을 만들어내는 방법을 아는 다수로 구분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343p)

 

 

 

ㅡ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 中, 이레

,

2016/11/29

 

 

한편 미뢰는 우리가 어릴 때 배웠을 혀지도에 따라 분포하는 게 아니다. 네 가지 기본맛ㅡ신맛, 짠맛, 단맛, 쓴맛ㅡ은 혀 전체에서 감지될 뿐 아니라 어떤 세포는 다섯 번째 기본맛인 감칠맛을 감지한다. 그리고 어떤 미각 연구자들은 기본맛이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후보 가운데 하나가 코쿠미, 즉 지방맛이다.(222p)

 

 

두 번째 잔을 한 모금 마실 때쯤 특이한 변화가 일어난다. 따뜻하고 얼얼하면서 눈이 딴 데로 돌아간 뒤에도 뇌는 여전히 뭔가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약간 든다. 자신감이 더 생기고 행복해진다. 좀 전까지는 긴장해 있었지만 이제 느긋해진다. 친구들도 더 괜찮아 보인다. 한 잔 더 하는 게 좋은 생각 같다.(253p)

 

 

논문으로 나온 게 아니라 학회에서만 발표된 거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한 연구에서 여러 술들을 숙취의 정도에 따라 순서를 매겼다. 브랜디, 레드와인, 럼, 위스키, 화이트와인, 진, 그리고 마지막이 보드카였다.(295p)

 

 

 

ㅡ 아담 로저스, <프루프 술의 과학> 中, 엠아이디

,

2016/11/29

 

 

어떤 백신이라도 특정 개인에게서는 면역을 형성하는데 실패할 수 있다. 인플루엔자 백신 같은 일부 백신은 다른 백신들보다 효과가 좀 떨어진다. 하지만 효과가 상대적으로 적은 백신이라도 충분히 많은 사람이 접종하면, 바이러스가 숙주에서 숙주로 이동하기가 어려워져서 전파가 멎기 때문에 백신을 맞지 않은 사람이나 백신을 맞았지만 면역이 형성되지 않은 사람까지 모두 감염을 모면한다. 자신은 백신을 맞았지만 미접종자가 많은 동네에서 사는 사람이 자신은 맞지 않았지만 접종자가 많은 동네에서 사는 사람보다 홍역에 걸릴 가능성이 더 높은 건 그 때문이다.(35p)

 

 

과학은 <대단히 집단적인 사업이다>. 그것은 집단의 생산물이다.(39p)

 

 

<위험 인식, 즉 사람들이 주변 환경의 위험 요소에 대해 내리는 직관적 판단은 전문가들이 제공하는 증거에 완강하게 저항하곤 한다.> 역사학자 마이클 윌리히는 그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를 해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들은 오히려 겁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운전을 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한다. 술을 마시고, 자전거를 타고, 너무 오래 앉아 있는다. 그러면서 오히려 통계적으로 따져서 별달리 위험하지 않은 것들을 걱정한다. 우리는 상어를 무서워하지만, 순 사망자 수로 따지자면 지구에서 제일 위험한 생물은 모기일 것이다.(59p)

 

 

슬로빅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학 물질의 위험을 평가하는 데 쓰는 방법을 가리켜 직관적 독성학이라고 불렀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이 접근법은 독성학자들이 사용하는 방법과는 다르고 대체로 그것과는 다른 결과를 낳는다. 독성학자들은 <용량이 독을 결정한다>고 본다. 어떤 물질이든 과잉으로 쓰이면 독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물은 아주 많은 용량일 때는 인체에 치명적이라, 2002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주자가 수분 과잉으로 죽은 사건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을 용량과는 무관하게 안전한 것 아니면 위험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사고방식을 노출에 대해서까지 확장하여, 화학 물질에 노출되는 것은 아무리 짧거나 제한적이라도 무조건 해롭다고 여긴다.

슬로빅은 이런 사고방식을 조사한 뒤, 독성학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은 독성에 대해서 <전염의 법칙>을 적용하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작디작은 바이러스에 잠깐 노출된 것만으로도 평생의 질병에 걸릴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해로운 화학 물질에 아주 조금만 노출되더라도 몸이 영구적으로 오염된다고 사정한다. 슬로빅은 이렇게 말했다. <살아 있는 상태나 임신한 상태와 마찬가지로, 오염된 상태는 모 아니면 도의 성질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게 분명하다.>

오염에 대한 두려움은, 다른 문화들처럼 우리 문화에도 널리 퍼진 믿음, 즉 무언가가 접촉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것의 성질을 옮길 수 있다는 믿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우리는 오염 물질과 접촉함으로써 우리가 영원히 오염된다고 여긴다. 그리고 우리가 제일 두려워하게 된 오염 물질은 바로 우리가 직접 만들어 낸 제품들이다. 독성학자들은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지만, 많은 사람은 인공 화학 물질보다 천연 화학 물질이 본질적으로 덜 해롭다고 여긴다. 그렇지 않다는 온갖 증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연이 전적으로 선하다고 믿는 듯하다.(62-64p)

 

 

백신 접종의 가장 부자연스러운 특징은, 매사가 순조로울 경우 그 때문에 접종자가 질병에 걸리거나 질환을 드러내는 일이 없다는 점이다.(67p)

 

 

우리 몸은 분명 경계가 아니지만, DDT는 카슨의 우려와는 좀 다른 물질이었다. 카슨은 DDT가 널리 암을 유발하는 발암 물질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침묵의 봄’ 출간 후 몇십 년에 걸쳐 시행된 DDT 연구는 그 가설을 지지하지 않았다. DDT에 심하게 노출된 공장 및 농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숱한 연구가 이뤄졌지만, DDT와 암의 연관성은 확인되지 않았다. 특정 암을 살펴본 연구에서도 DDT가 유방암, 폐암, 고환암, 간암, 전립샘암 발병율을 높인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내가 이 이야기를 종양학자인 아버지에게 했더니, 아버지는 어릴 적 마을에 트럭이 와서 온 동네에 DDT를 살포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아버지와 형제자매들은 살포 중에는 집 안에 있어야 했지만, 트럭이 지나가자마자 뛰쳐나가 놀았다고 한다. 여태 나뭇잎에서 DDT가 똑똑 떨어지고 화학 물질 냄새가 공기에 감도는데도 말이다. 카슨이 DDT의 위험 중 일부를 과장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리고 몇몇 사실을 틀리게 말했다는 것에 대해 아버지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는 <할 일을 제대로 했으니까>. 카슨은 우리를 일깨웠다.(70-71p)

 

 

나는 내 아이를 사랑하니까 내가 내다볼 수 있는 재앙을 예방하기 위해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지만(백신을 맞히지만), 그럼으로써 내가 내다보지 못하는 재앙의 위험을 감수하는 셈이야.(103p)

 

 

백신 속 포름알데히드가 암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미량의 물질에 대한 공포라는 점에서, 즉 사람들이 해당 물질의 다른 흔한 공급원들을 통해 접하는 양보다 상당히 더 작은 양을 두고 형성된 공포라는 점에서 수은이나 알루미늄에 대한 공포와 비슷하다. 포름알데히드는 자동차 배기가스와 담배 연기에 들어 있을뿐더러 종이 가방과 종이 타월에도 들어 있고, 가스 난로나 벽난로에서도 나온다. 많은 백신에 바이러스를 불활성화하는 데 쓰이는 포름알데히드가 미량 들어 있는데, 포름알데히드를 유리병에 담긴 죽은 개구리와 결부시켜 떠올리는 사람이라면 경각심을 느낄 법도 하다. 고농도라면 정말 유독하지만, 포름알데히드는 인체가 만들어 내는 물질인 데다가 대사 활동에도 꼭 필요한 물질이다. 게다가 애초에 우리 몸에서 순환하고 있는 포름알데히드의 양은 백신 접종으로 얻는 양보다 상당히 더 많다.

수은으로 말하자면, 아이가 백신 접종보다 주변 환경에서 접하는 수은이 더 많다는 게 거의 늘 확실하다. 백신의 면역 반응을 강화하는 증강제로 자주 쓰이는 알루미늄도 마찬가지다. 알루미늄은 과일과 곡물을 비롯한 많은 것에 들어 있고 물론 모유에도 들어 있다. 알고 보니 모유는 전반적인 주변 환경만큼 오염되어 있는 물질이었다. 모유를 분석한 실험실들은 그 속에서 페인트 희석제, 드라이클리닝 용액, 내연제, 농약, 심지어 로켓 연료를 검출해 냈다. 저널리스트 플로렌스 윌리엄스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 화학 물질들은 대개 극미량만 들어 있지만, 그래도 만일 사람의 젖이 동네 피글리위글리 슈퍼에서 팔린다면 일부 제품은 DDT나 PCB(폴리염화바이페닐) 잔류량에 대한 연방 식품 안전 기준에 걸릴 것이다.>(114-115p)

 


순수함, 특히 신체적 순수함은 언뜻 무해한 개념으로 보이지만, 실은 지난 세기의 가장 사악한 사회 활동들 중 다수의 이면에 깔린 생각이었다. 신체적 순수함에 대한 열정은 맹인이거나 흑인이거나 가난한 여자들에게 불임 시술을 실시했던 우생학 운동의 동기였다. 신체적 순수함에 대한 걱정은 노예제가 폐지된 뒤에도 한 세기 넘게 살아남았던 인종 혼합 결혼 금지법의 이면에 깔린 생각이었으며, 최근에서야 위헌으로 판정된 남색 금지법의 이면에 깔린 생각이기도 했다. 모종의 상상된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노력 때문에, 그동안 인류의 유대는 적잖이 희생되어 왔다.(117-118p)

 

 

그는 B형 간염 백신에 대해서 <이 백신은 공중 보건의 관점에서는 중요하지만 개인의 관점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 말이 말이 되려면, 우리는 개인이 공중의 일부가 아니라고 믿어야만 한다.(166p)

 

 

오늘 날 주로 전쟁과 결부되어 쓰이는 <양심적 거부자>란 용어는 원래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179p)

 


양심적 거부자는 늘 전염병에 기여할 잠재력을 품은 위태로운 위치에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경제학자들이 도덕적 해이라고 부르는 상황, 즉 보험으로 보호받는 사람은 현명하지 못한 위험을 감수하는 성향이 있다는 상황에 처한 셈일지도 모른다. 법률은 일부 사람들이 의학적, 종교적, 철학적, 이유에서 백신 접종으로부터 면제받을 수 있도록 허락한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하는 문제는 정말로 양심의 문제다.(186-187p)

 

 

오늘날의 미디어 문화는 과학적 이해의 씨앗을 왜곡시킴으로써 비만 유전자나 언어 유전자 혹은 동성애 유전자가 발견되었다는 선정적이고 단정적인 기사 제목으로 바꿔 내고, 사랑이나 공포나 제인 오스틴을 감상하는 자질이 뇌의 어느 부위에 있는지 알려 주는 뇌 지도를 그려 낸다. 과학의 원동력은 답에 매달리는 게 아니라 무지를 받아들이는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213p)

 

 

불확실한 종말의 시대에, 아버지는 스토아 철학을 읽는 데 취미를 붙였다. 종양학자의 취미로서 별로 놀랍진 않다. 아버지가 스토아 철학에 끌린 이유는, 내게 설명하신 데 따르면, 우리가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을 통제할 순 없지만 그 일에 대한 감정은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230p)

 

 

사람들이 편견으로 기우는 경향성은 스스로가 특히 취약하다고 느끼거나 질병에 대해서 위협을 느낄 때 좀 더 강화된다고 한다. 일례로 한 연구에 따르면, 임신한 여성은 임신 초기 단계에서 외국인 혐오를 좀 더 많이 드러낸다. 슬프게도 우리는 자신이 취약하다고 느낄수록 좀 더 편협해지는 것이다.(239p)

 

 

19세기 의사들은 암을 문명과 연결짓곤 했다. 급하고 복잡한 현대 생활이 어떤 방식으로든 인체에 병리적 성장을 촉진하는 탓에 암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연결은 옳았지만, 인과는 틀렸다. 문명이 암을 일으키는 건 아니다. 문명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함으로써 암을 드러낼 뿐이다.(272-273p)

 

 

 

ㅡ 율라 비스, <면역에 관하여> 中, 열린책들

,

2016/11/24

 

 

할아버지는 돈 대신에 미래를 선택했어. 어떤 선택을 해야 할 때마다 할아버지를 생각해. 미래는 돈이 될 수 있지만, 돈은 절대 미래를 보장해 주지 않거든.(78-79p)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어요?(139p)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랑은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아, 진짜 명언입니다. 사랑을 해 본 사람이면 이 말에 동의할 거예요. 왜 같은 곳을 바라보는가. 마주 앉아서 얼굴 보는 게 지겹기 때문이죠. 서로 얼굴을 계속 보다보면 싫증이 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같은 곳을 보게 되는 겁니다. 섹스를 할 때도 나이가 들수록 뒤로 하는 걸 좋아하게 되는 겁니다. 같은 곳을 바라보잖아요. 지금 커플들이 나란히 앉아서 제 얼굴을 바라보는 것, 이게 사랑입니다.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웃잖아요. 제가 무대를 끝내고 들어가도 여러분은 텅 빈 무대를 계속 보세요. 같은 곳을 보는 게 바로 사랑입니다.(178p)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감정이나 편지는 다락에 넣어 두는 게 아니야. 무조건 표현하고 전달해야 해. 아무리 표현하려고 애써도 30퍼센트밖에 전달 못 한다니까.(212p)

 

 

 

ㅡ 김중혁, <나는 농담이다> 中, 민음사

,

2016/11/22

 

 

 

결국 부서에서 사용하고 관리하는 서류란 서류 자체의 필요, 불필요에 따른 것이 아니라 부서장의 입맛과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부서장이 자주 들춰보는 것들만 서류로 남아 있다 보니 불출 대장처럼 매일 쓰는 기초 자료는 엉성하거나 아예 없는 곳이 허다했고 공정 진도율처럼 고급 자료 역시 부서에서 작업 관리를 위해 사용하는 것, 부서의 담당 임원이 사용하는 것, 그 자료를 모두 취합해 주간 공정 회의에서 보고하는 생산관리 팀에서 사용하는 것이 제각각이었다.(32p)

 

 

회사란 집단이 원래 포기가 빠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돈이 나가도 내 돈이 아니고 책임을 져도 나 혼자 지는 책임이 아니니까요.

(...)

잘 생각해보십시오. 책임은 나중 일이고 나중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겁니다. 또 나중에 책임을 지더라도 그때는 자기만 책임지는 게 아니라 자기 위 지사장까지, 조직 전체가 나눠 지는 겁니다. 뭐하러 지점장이 긁어 부스럼 만들겠습니까? 이래서 내가 회사란 포기가 빠른 집단이라고 말한 겁니다.(43-44p)

 

 

이것으로 나도 회장의 줄 안에 들어간 것이었다. 안심이 됐다. 그 힘, 눈먼 힘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경멸했지만 두려워했고 혐오했지만 동경했다. 팀장과 팀이 그렇게 된 것은 슬프고 갑갑했지만 내가 이렇게 된 것은 기쁘고 다행스러웠다. 나는 두 겹으로 나뉘어 있었다. 힘에 사로잡힐 때 사람은 그렇게 되기 마련 아닐까? 갇힌 기분은 들었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견디고 버티는 회사 생활, 그것밖에 없었다. 당연한 귀결이었다. 나는 도망쳐왔다. 도망친 곳에 자유가 있을 리 없다고 말들 하지 않는가? 실은 도망쳐온 것조차 아닐지 몰랐다. 상관없었다.(141p)

 

 

나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위에 있는 늙은이들은 모든 것이 지금처럼 흘러가기만을 바라고 연급 받듯 월급을 받으려 들고 그렇게 돌아가지 않으면 되려 분노하고, 두려움으로 주름진 몸을 부들부들 떨며 원칙을 뭉개고 규칙을 악용하며 쥐어짤 수 있는 것을 모두 쥐어짜 단 즙만 빨아먹으려고 하는 거라고. 또 젊은이들은 일의 의미와 즐거움을, 남들의 욕망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한 기대와 희망을 인생이 주는 진짜 꿈이라는 걸 잃어버린 채 어서 편해지기를, 저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늙은이들의 높은 연봉과 권세를 부러워하며 쾌락을 보상이 아닌 목적으로, 생활의 한 부분이 아닌 근거로 삼은 채 어서 늙어가기만을 바라느라 인생의 금화 같은 젊음을 지폐 몇 장에 너무나 쉽게 바꿔버리는 거라고 말입니다.

(...)

사장실을 나서기 전, 나는 황사장에게 왜 불쑥 자기 얘기를 했는지 묻고 싶었으나 짬을 찾지 못했다. 인생의 많은 순간처럼, 그 순간도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278-230p)

 

 

책임이 모든 사람에게 있었으므로 어느 한 사람도 책임질 필요가 없었고 책임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문제로 모습을 바꾸며 다시 예전처럼 묻히고 덮였으며 그 위로 다른 문제들이 또 쌓였다.(286p)

 

 

그래서 가는 것이기도 했고 그런데도 가야 하기도 했고 어쨌든 가야 했다.(293-294p)

 

 

월급이란 젊음을 동대문 시장의 포목처럼 끊어다 팔아 얻는 것이다. 월급을 받을수록 나는 젊음을 잃는다. 늙어간다. 가능성과 원기를 잃는 것이다. 존재가 가난해진다. 젊음이 인생의 금화라던 황사장의 말 역시 수사가 아니다. 이대로 10년, 20년 또 어느 회사에서 삶을 보내든 그 회사가 모두 이렇다면 내 인생의 금화는 결국 몇 푼 월급으로, 지폐로 바뀌어 녹아버릴 테고 나는 그저 노인이 돼 있을 터였다. 그다음은 끔찍하다. 명예퇴직, 권고퇴직, 그런 말 아닌 말로 수십 년 회사 일에만 길들고 늙은 사람인 채 양계장에서 풀어준 노계처럼 세상에 나올 것이다. 남는 것도 끔찍하기는 마찬가지다. 잘해야, 그것도 아주 잘해야 조 상무나 곽 상무 같은 사람이 될 터였다. 그 사람들은 그 방면에서 운과 능력이 모두 탁월한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그 나이가 되도록 그 지위와 권세로 회사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황 사장은 어떤가? 불굴의 투사, 불요의 혁신가는? 결국 싸움에서, 이 끝없는 전쟁에서 내쫓기고 내쫓겨 패배하고 실패한 것이 황 사장의 종말이었다. 그래도 어떤 사람이 된다면, 황 사장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렇게 쫓기든, 저렇게 쫓기든 다 그만 아닌가? 모두 늙고 쭈그러든다. 희미하게 옅어지고 사라진다. 그렇지 않은가? 결국 모든 것이 허무할 따름이고 그 허무야말로 모든 것을 축축하게 짓누르고 있는 현실의 중량이었다.(301-302p)

 

 

회사가 그저 월급이나 주고 괴롭기만 한 곳처럼 말하고 떠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정말 그렇기만 한 걸까? 하루에 열 시간 넘게 붙박여 있는 곳에서 푼돈에 그저 인생을 끊어 파는 것에 불과하다면, 아무 정도 남기지 않는 것이라면 얼마나 쓸쓸하고 허망할까?(320p)

 

 

 

ㅡ 이혁진, <누운 배> 中, 한겨레출판

,

2016/11/21

 

 

어떤 사람이 제멋대로 나를 침범하고 휘젓는 것을 묵묵히 견디게 하는 건 사랑이지만, 또 그 이유로 떠나기도 하지.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31p)

 

 

막 엄마가 된 당신을 위한 임신과 출산의 모든 것은 집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사이에 그들은 네다섯 번의 이사를 했으므로 책이 언제 어떤 경로로 분실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미숙아에 대한 설명이 그 어디쯤에 나왔는지도 이제 지원은 가물가물했다. 아니다. 조산을 막기 위한 운동법에 대해서라면 몰라도, 미숙아에 대해 다루는 부분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기를 기다리는 여자 중에서 미숙아의 삶에 관심이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건 운전면허를 따려는 이들이 교통사고 피해자의 사고 이후의 삶에 무관심한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58p)

 

 

그는 아버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구체적으로 말한 적이 없었고 나도 묻지 않았다. 아버지라면, 내 아버지에 대해서도 전혀 궁금하지 않은데 남의 아버지를 궁금해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77p)

 

 

내가 잠시 한눈을 팔아도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죄가 또 유예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하고 절망했다. 극적인 파국이 닥치면, 속죄와 구원도 머지않을 텐데.(97p)

 

 

새로운 부임지를 기다리면서 엄마는 신혼 시절 살았던 에든버러에 대해 부쩍 자주 이야기했다. 무엇보다 자유로워서 좋았다고 했다. 자유로웠다는 게 무슨 뜻인지 묻지 않았다. 그녀가 대뜸, 네가 없었다는 뜻, 이라고 말할까 보아서였다. 그러면 나도, 아예 태어나지 않았을 때가 제일 자유로웠다고 응수해야 할 것 같았다. 그땐 영원히 지속될 줄 알았어, 행복이, 우린 참 사랑했거든. 젊은 시절의 부모가 얼마나 뜨겁게 사랑했는지, 무엇에 이끌려 국적과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결합하게 되었는지 미안하지만 나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과거의 정열과 무관하게 현재 그들의 삶은 몇 모금 마신 다음 뚜껑을 열어놓고 방치한 페트병 속 탄산수 같았다.(106p)

 

 

박이 그녀의 인격을 비하하거나 비아냥거리는 태도를 취한 적은 없었다. 그는 도우미에게 아무런 태도도 취하지 않았다. 말년의 그가 모든 사람에게 그러했듯이. 타인에게 아무 태도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태도를 완성시키는 방법은 오랫동안 몸에 밴 박의 습관처럼 보였고, 번번이 타인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많은 이들이 박의 과묵을 고압적이거나 권위적인 성격의 일단이라고 받아들였다. 그의 그런 모습은 노회한 정치인의 한 전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136p)

 

 

 

정이현, <상냥한 폭력의 시대> ,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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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8

 

 

삶에서 취소할 수 있는 건 단 한가지도 없다. 지나가는 말이든 무심코 한 행동이든, 일단 튀어나온 이상 돌처럼 단단한 필연이 된다.(136p)

 

 

자기가 달을 용서하고 말고 할 계제가 못되는 애송이 소설가에 불과하다는 것과 자신이 때로 낯선 이들의 삶에 깜짝 놀라곤 하지만 낯선 눈으로 보면 허구한 날 술만 마시는 그녀 자신의 삶이야말로 가장 경악할 만한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157p)

 

 

“이를테면 과거라는 건 말입니다.”

마침내 경련이 잦아들자 그가 말했다.

“무서운 타자이고 이방인입니다. 과거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도 수정이 안되는 끔찍한 오탈자, 씻을 수 없는 얼룩, 아무리 발버둥쳐도 제거할 수 없는 요지부동의 이물질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기억이 그렇게 엄청난 융통성을 발휘하도록 진화했는지 모릅니다. 부동의 과거를 조금이라도 유동적이게 만들 수 있도록, 육중한 과거를 흔들바위처럼 이리저리 기우뚱기우뚱 흔들 수 있도록, 이것과 저것을 뒤섞거나 숨기거나 심지어 무화시킬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의 기억은 정확성과는 어긋난 방향으로 그렇다고 완전한 부정확성은 아닌 방향으로 기괴하게 진화해온 것일 수 있어요.”(167-168p)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176p)

 

 

자기 취향에 충실할 때 사람들은 그만큼 한가한 것이고, 부고나 채무, 마감 같은 긴급성이 앞서면 누구라도 메시지를 남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180p)

 

 

 

ㅡ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中,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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