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4

 

 

 

업주들에게 간신처럼 행동하는 그들을 볼 때마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폴로니어스가 떠올랐다.

업주가 하늘을 보며 내일은 비가 내릴 것 같은데라고 말하면 그들은 맞장구를 쳤다. “영락없이 비가 올 날씨네요.” 그러나 업주가 또다시 그래도 먹구름은 아닌 걸, 비가 오지 않을 것도 같은데라고 말하면 재빨리 말을 바꿔 받아쳤다. “그렇구말구요, 나으리. 비가 오지 않구말구요.”

그러나 업주의 등뒤에서는 비꼬고 헐뜯었다. 업주가 발코니에 앉아 신문이라도 읽으면 그들은 이렇게 비꼬았다.(54p)

 

 

그는 점진성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선악의 문제는 모두 각자가 결정하는 것이며 전 인류가 점진적인 발전을 통해 문제의 해결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점진성이라는 것은 결국 이도 저도 아닌 것이다. 인문학적 사상이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동안에 또 다른 휴의 사상도 발전할 것이다. 농노제는 존재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라는 것이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해방주의 사상의 최고점에서는 옛날 몽고의 바투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다수의 사람들이 소수의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고 보호하게 될 것이다. 정작 그들 자신은 굶주리고 헐벗고 외부의 공격에 무기력하면서 말이다. 그러한 사회질서는 어떤 사조 속에서도 훌륭히 살아남아왔고, 그렇기 때문에 속박의 기술도 점진적으로 발전해왔던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하인들을 마구간에 재우지 않지만, 그 대신 농노제에 아주 교묘한 껍질을 씌워서 매번 어떤 식으로든 합리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우리 사회에서 이념은 이념일 뿐이고, 19세기 말인 이 시기에도 가장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할 수만 있다면, 노동자들에게 뒤집어씌우려 들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위대한 사상가나 학자들이 자신의 황금 같은 시간을 이런 일에 쓴다면 인류의 발전에 심각한 장애를 가져올 것이라며 변명할 것이다.(60-61p)

 

 

뭐니뭐니해도 가장 서러운 것은 쥐꼬리만한 임금이었다. 청부업자가 처음 일을 받고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하청을 주면 그 다른 사람이 다시 레지카에게 일을 주는 식이었다. 그들 각자 20퍼센트의 마진을 가져갔다. 공사 자체가 이미 돈이 되는 것이 아니었고, 비까지 내려 우리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일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하지만 레지카는 우리들에게 일당을 지급해야만 했다. 굶주린 도장공들은 그에게 덤벼들었고 사기꾼이니 흡혈귀니 예수를 팔아먹은 유다 놈이니 하면서 욕했다.(64p)

 

 

가장 경악했던 것은, 흔히 하느님을 잊었다라고 표현하는, 정직함의 완벽한 부재였다. 하루도 거짓말하지 않고 보내는 날이 없었다. 우리에게 니스를 팔았던 상인, 청부업자, 아이들 그리고 업주들도 거짓말을 밥 먹듯 했다.(67-68p)

 

 

당신 아버지는 돈이 많은 사람이죠. 그러나 그의 말에 의하면 그도 한때는 기계공과 기름공이었어요.(73p)

 

 

그녀는 털실로 짠 소박한 옷을 입고, 두건을 두르고, 얌전한 양산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러나 코르셋으로 몸을 꼭 죄고 비싼 외제 구두를 신은 이 날씬한 아가씨는 시골여자 역할을 맡은 재능 있는 배우일 뿐이었다.(99p)

 

 

나중에 알고 보니 스테판은 남자들하고 있을 때만 그렇게 말이 없고 느림보였지, 여자들과 함께 있을 때는 사뭇 달랐다. 그는 활개치고 다니면서 쉴 새 없이 주절거렸다.(120p)

 

 

아내를 남편의 보조자라고 하죠. 왜 내게 보조자가 필요하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는데요. 아내란 이러쿵저러쿵 재잘대기보다는 다정하게 말할 수 있는 상대라야 해요. 좋은 대화가 없는 인생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123p)

 

 

그녀는 화를 냈고 날이 갈수록 그들에 대한 증오를 쌓아갔지만, 나는 점차 그들에게 익숙해졌고 그들에게 끌리기 시작했다. 농부들은 예민하고 짜증을 잘 냈으나 대부분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억눌린 상상을 했고, 무식하고 빈약하고 흐릿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고, 이 회색 땅과 회색 인생과 검은 빵에 대해 언제나 똑같은 생각만을 했다. 그들은 교활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치 땅속에 멍청한 머리만은 처박고 다 숨었다고 생각하는 새와 같았다. 셈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들은 20루블을 받고 풀을 베지는 않아도 반 통의 보드카에는 얼씨구나 하고 나설 사람들이었다. 20루블로 보드카 네 통은 살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물론 그들은 추잡한 술주정뱅이에 어리석기 그지없었고, 늘 서로를 속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람은 무언가 건강하고 단단한 것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 그들이 아무리 고집스런 짐승 같아 보여도, 그들이 아무리 보드카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도, 그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 점점 끌리게 될 것이다. 마샤와 블라고보 같은 사람들에게는 없는 무언가 부드럽고 중요한 것이 그들 안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 땅에서 제일 소중한 것은 진리이며, 민중의 구원은 바로 이 진리 안에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무엇보다도 정의를 사랑했다. 나는 아내에게 유리에 있는 먼지 자국은 보면서 유리는 보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아무 말이 없거나 스테판처럼 울룰룰루라고 흥얼거렸다. 이 착하고 영리한 여자가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하얗게 질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블라고보에게 농부들의 술버릇과 속임수를 성토할 때면, 나는 그녀의 건망증이 놀랍기만 했다. 그녀의 아버지도 술을 많이 마시며, 두베취냐를 사들인 돈도 수차례의 파렴치한 사기를 통해 모은 것이었다. 어떻게 이 사실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런 사실을 까맣게 잊을 수 있을까?(124-125p)

 

 

우리의 만남과 결혼생활은 이 재기발랄한 여성의 삶에 앞으로도 여러 번 있을 수 있는 하나의 에피소드에 불과했던 것이다. 세상의 온갖 좋은 것은 모두 그녀의 손 안에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너무나 쉽게 가졌다. 갖가지 사상과 최신의 지성 사조까지 그 모든 것들은 그녀의 삶을 풍부하고 다양하게 해주는 즐거움일 뿐이었다. 나는 그녀를 하나의 즐거움에서 또 다른 즐거움으로 안내하는 마부에 불과했고, 더 이상 그녀에게 필요치 않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날개를 퍼덕이고 날아가버리면 나는 홀로 남겨지게 될 것이다.(136p)

 

 

우리는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나는 날이 밝아오기만을 학수고대했다. 마샤는 천장에 눈길을 고정한 채 누워 있었다. 그녀는 마치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어떻게 자기처럼 똑똑하고 교양 있고 말쑥한 숙녀가 이런 촌구석의 거칠고 볼품없는 사람들 속에 빠져버렸는지, 그리고 그런 사람들 중의 한 명에게 빠져 1년 반 이상이나 그의 아내로 살았는지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나도 모이세이도 체프라코프도 아무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술에 취해 지르는 그의 비명소리는 나와 우리의 결혼, 우리의 생활 그리고 이 가을의 질퍽한 진창과 어우러져 그녀의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였다. 한숨을 내쉬거나 자세를 바꿔 누울 때의 그녀의 얼굴에서 나는 어서 빨리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아침이 되자 마샤는 떠났다.(138-139p)

 

 

 

 

안톤 체호프, <산다는 것은> , 작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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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6

 

 

죽음은 항상 관심이 있는 주제이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중학교를 다닐 무렵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타나토노트를 대충 훑어보다가 처음으로 죽음에 대해 막연하게라도 생각을 해봤다. 당연히 깊지는 않았고 그 후 오랫동안 별 생각이 없었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들기는 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문득 이렇게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는 행위가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어차피 죽으면 다 사라질 텐데’. 빈번하게 드는 생각은 아니었지만 이런 생각이 드는 날은 힘이 빠지고 무서웠다. 마음가짐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지만 달라진 건 있다. 모두가 죽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고, 그런 생각이 불현듯 다가와도 억압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인정한다.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것을 찾는다. 성을 금기시 하는 것만큼이나 죽음에 대해 쉬쉬하며 금기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좀 더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한국정서상 얼마나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특히 가족들 사이에서는 무조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철저히 직업적인 마인드로 직장생활을 영위하는 나로서는 글쓴이의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소명의식에 온전히 동의가 되지 않아서 생각보다는 덜 좋았다. 내가 만약 죽음에 대한 책을 추천한다면 데이비드 실즈의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나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특별한 점이 있다. 위의 2권이 죽어가는 대상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느낀 지점들을 풀어낸 책이라면, 이 책은 저자 자신이 직접 죽음과 마주하며 쓴 책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담담하게 적어나가는 글이 인상적이다.

 

 

 

기술적인 탁월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레지던트로서 내가 꿈꾸었던 가장 높은 이상은 목숨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누구나 결국에는 죽는다), 환자나 가족이 죽음이나 질병을 잘 이해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환자가 치명적인 두부 출혈로 병원에 들어올 때, 신경외과의와 나누는 첫 대화는 환자의 가족이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환자를 평화롭게 보내줄 수도 있고(“천명이 다해서 떠난거야”), 아니면 결코 아물지 않는 회한으로 남을 수도 있다(“그 의사들은 우리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어! 그 아이를 구하려는 시늉조차 안 했다고!”). 메스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라면, 외과의가 선택할 수 있는 도구는 따뜻한 말뿐이다.(112p)

 

 

큰 병은 환자는 물론이고 가족 전체의 삶을 바꾸어놓는다. 하지만 뇌 질환은 거기에 난해하고 신비한 분위기가 더해진다. 아들의 죽음만으로도 부모의 정돈된 세계는 뒤집혀 버린다. 그런데 환자의 뇌는 죽었고 몸은 따뜻하고 심장도 여전히 뛰고 있다니, 이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을까? 재앙(disaster)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부서지는 별을 의미하는데, 신경외과의의 진단을 들었을 때 환자의 눈빛이 바로 그렇다. 때로는 그 소식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뇌파가 일시 중단되며 고통 받는 경우도 있다. 이런 현상을 심인성증후군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나쁜 소식을 들었을 때 경험하기도 하는 졸도의 심각한 형태이다.(116p)

 

 

수술이 끝난 뒤 우리는 다시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번엔 화학 요법, 방사선 치료, 예후에 관해 의논했다. 이 즈음 내가 이미 체득한 몇 가지 기본 원칙이 있었다. 첫째, 상세한 통계 자료는 학술회의에나 어울리지 병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권위 있는 통계인 카플란 마이어 생존분석 곡선은 시간 경과에 따른 생존 환자의 수를 보여준다. 우리는 그 분석을 척도로 삼아 병의 진행을 판단하고 병의 경중을 이해한다. 아교모세포종의 경우 생존 곡선이 급격히 떨어져 환자가 2년 후까지 생존하는 경우는 약 5퍼센트에 불과하다. 둘째, 정확한 것도 중요하지만, 희망의 여지는 반드시 남겨둬야 한다. ‘평균 생존 기간은 11개월입니다’, ‘2년 안에 사망 할 가능성이 95퍼센트입니다라고 말하기보다는 대다수 환자가 수개월부터 2~3년까지 생존합니다라고 말하는 편이 낫다. 내가 보기엔 이것이 더 정직한 표현이다. 문제는 환자가 곡선의 어디에 있다고 정확히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환자는 6개월 만에 사망할 것인가, 아니면 60개월 만에 사망할 것인가? 필요 이상으로 정확성을 기하려고 하는 건 무책임한 짓이다.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구체적 수치를 제시하는 의사들이 있는데(“의사 선생님이 나한테 6개월 남았다고 했어요”), 대체 그들은 어떤 사람이며 누가 그런 수치를 가르쳐 주는 건지 나는 너무나 의아했다.(121-122p)

 

 

나는 나 자신의 죽음과 아주 가까이 대면하면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동시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암 진단을 받기 전에 나는 내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구체적으로 언제가 될지는 알지 못했다. 암 진단을 받은 후에도 내가 언젠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지만 언제가 될지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통렬하게 자각한다. 그 문제는 사실 과학의 영역이 아니다. 죽음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죽음 없는 삶이라는 건 없다.(161p)

 

 

중병에 걸리면 삶의 윤곽이 아주 분명해진다. 나는 내가 죽으리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건 전부터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은 그대로였지만 인생 계획을 짜는 능력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됐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기만 하면 앞으로 할 일은 명백해진다. 만약 석 달이 남았다면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이다. 1년이라면 책을 쓸 것이다. 10년이라면 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삶으로 복귀할 것이다. 우리는 한 번에 하루씩 살 수 있을 뿐이라는 진리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하루를 가지고 난 대체 뭘 해야 할까?(193p)

 

 

물론 나는 신에 대해 아무것도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인생의 근본적인 현실을 생각하면 맹목적인 결정론은 정말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게다가 나를 포함해 그 누구도 계시가 인식론적 권위를 갖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이성적인 사람들이며, 계시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설사 신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망상으로 치부할 것이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자의 뜻을 품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

포기해야 할까?

거의 그렇다.

궁극적인 진리를 향해 열심히 나아가되 거기에 닿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혹은 가능하다 해도 확실히 입증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결국 우리 각자는 커다란 그림의 일부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의사가 한 조각, 환자가 다른 조각, 기술자가 세 번째, 경제학자가 네 번째, 진주를 캐는 잠수부가 다섯 번째, 알코올 중독자가 여섯 번째, 유선방송 기사가 일곱 번째, 목양업자가 여덟 번째, 인도의 거지가 아홉 번째, 목사가 열 번째 조각을 보는 것이다. 인류의 지식은 한 사람 안에 담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맺는 관계와 세상과 맺는 관계에서 생성되며,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궁극적인 진리는 이 모든 지식 위 어딘가에 있다.(203-205p)

 

 

다시 한 번 나는 의사에서 환자로, 주체에서 객체로, 주어에서 직접 목적어로 돌아왔다. 암 진단을 받기 전까지의 내 삶은 내 선택들이 쭉 이어져온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현대적 서사에서 한 인물의 운명은 그 자신과 다른 이들의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 <리어 왕>의 글로스터는 인간의 운명이 제멋대로인 아이들 손에 맡겨진 파리같다고 불평하지만, 실제 그 희곡의 극적 구조를 만들어주는 건 리어 왕의 허영심이다. 계몽운동 이후 개인이 무대의 중심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인간의 행동이 초자연적인 힘 앞에서 맥을 못 추는, 셰익스피어의 비극보다 그리스 비극과 더 닮은, 오래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오이디푸스와 그의 부모는 아무리 애를 써도 이미 정해진 운명을 벗어날 수 없으며, 그들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힘에 접근하려면 신성한 환상을 보는 예언자들을 통하거나 신탁을 받아야 한다. 내가 에마를 보러 온 이유는 치료 계획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앞으로 받게 될 의학적인 조치는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신탁과도 같은 지혜의 말을 듣고 위안을 얻고 싶었다.(213-214p)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 흐름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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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

 

 

장강명의 글을 보고 기대반 근심반으로 읽어나갔는데 생각보다 지루하지는 않았다. 막 재미있거나 흥미진진한 서사라고는 할 수 없지만 율리시즈와 피네간의 경야에 비하면 양반으로 보인다. 제목이 말하듯이 더블린이라는 공간이 주가 되고 그 곳을 배경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여주는 단편집이다. 개인적으로는 잘 나가는 친구와의 오랜 만의 만남 후 부인도 그대로이고, 아기와 물건들 모두 그대로인데 자신의 감정과 생각이 이전과는 달라져 버렸고, 앞으로는 그 감정과 생각들이 그 일이 있기 전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을 탁월하게 묘사하는 작은 구름 한 점과 대미를 장식하는 죽은 사람들이 좋았다.

 

 

 

, 딜런 너한테 단단히 부탁한다마는 제발 공부 좀 해라. 그러지 않으면·····.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들은 이런 책망 때문에 서부 개척 시대에 대한 매력이 크게 시들해졌고, 당황하여 씨근거리는 레오 딜런의 얼굴을 보자 한 줄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러나 학교의 속박으로부터 일단 벗어나면 야성의 감흥을 다시금 갈구했다. 왜냐하면 무법천지의 이야기들만이 내게 도피구를 제공해 주는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저녁마다 벌이던 전쟁놀이도 아침의 학교 수업처럼 마침내 따분해지기 시작했다. 진짜 모험이 나에게 일어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진짜 모험은 집에만 처박혀 있는 사람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모험은 밖에서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68p)

 

 

그는 사진 속의 두 눈을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두 눈도 냉정하게 그를 응시했다. 분명히 아름다운 눈이었으며 얼굴도 예뻤다. 그러나 어딘지 모자라는 데가 있어 보였다. 왜 저렇게 철이 없으면서도 고상한 척하는 것일까? 차분한 두 눈이 그를 화나게 했다. 두 눈은 그를 불쾌하게 했고 그에게 도전하는 듯했다. 두 눈에서는 정열도 환희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돈 많은 유대인 여자를 들먹이던 갤러허의 말이 생각났다. 유대인 여자의 그 검은 동양적인 눈은 정열과 육감적인 정욕으로 얼마나 가득 차 있을까·····! 왜 하필이면 사진 속의 저런 눈과 결혼했을까?

그는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가 신경질적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집안을 꾸미기 위해 월부로 사들인 아름다운 가구에서도 무언가 천한 느낌이 들었다. 애니가 손수 고른 것이다 보니 가구를 보면 그녀가 떠올랐다. 가구 또한 아내만큼이나 깔끔하고 예뻤다. 자신의 삶에 대한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분노가 그의 마음속에서 솟구치기 시작했다. 이 조그만 집에서 도망칠 수는 없을까? 갤러허처럼 용감하게 살아보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것인가? 런던으로 갈 수는 없을까? 아직도 갚아야 할 가구 대금이 남아 있었다. 책을 써서 출판한다면 길이 열릴지도 모르는 일이다.(148-149p)

 

 

그는 비아냥거림이 빗나간 데다, 가스 공장에서 일했다는 소년을 죽은 사람들 사이에서 불러낸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의 가슴이 그들 부부만의 비밀스러운 추억, 다정함, 기쁨, 욕정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아내는 마음속으로 자기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자신의 존재에 대한 수치스러운 생각이 그를 엄습했다. 그는 이모들의 심부름꾼 아이 노릇이나 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인물, 속인들에게 웅변을 토하며 광대 같은 욕정을 이상화하는 신경질적인 선의의 감상주의자, 그리고 조금 전에 거울 속에서 얼핏 보았던 가련하고 얼빠진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이마 위에서 불타는 치욕을 아내가 볼까 싶어 본능적으로 불빛 쪽으로 더 등을 돌렸다.(323p)

 

 

 

제임스 조이스, <더블린 사람들> , 펭귄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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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4

 

 

바나나가 비싸 한 송이가 아닌 낱개로 사먹던 시기, 맛을 위해서가 아닌 쌀의 부족분을 보충하기 위해 혼분식을 장려했던 시기는 지나갔다. 주말에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가족과 식사를 하고, TV에서는 각종 먹방과 음식 방송을 내보내고, 인터넷에는 맛집이 즐비하다. 그러나 정말로 잘 먹고 있는가. 배를 곯지 않는 것을 잘 먹는다고 할 수는 없다. 장담하건대 한국은 식재의 다양성이 한심한 수준이고 가격은 말할 것도 없다. 뿐만 아니라 외식수준은 어느 나라와 비교하기도 민망할 수준임에도 모두가 잘 먹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누가 만들어냈는지 알 수도 없는 문구와 그 놈의 김치 타령 및 한식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100년이 지나도 여전히 못 먹고 있을 거라고 본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이 컴퓨터의 구조에 대해 다 알아야 할 필요가 없듯이 먹고 살기 위해 모든 식재료와 음식에 대해 알 필요는 없다. 더욱이 해롤드 맥기의 1300p가 넘는 음식과 요리같은 책을 읽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음식은 우리가 죽기 전까지는 평생을 함께 해야 하며 단순히 끼니를 이어가는 차원을 넘어 미식이라는 말이 있듯이 먹는 즐거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당연하겠지만 아주 조금이라도 알아 놓으면 더욱 즐거운 식생활을 즐길 수 있다. 그 첫걸음이 되기에 충분한 책이다.

 

 

 

 

갓 구운 빵이 맛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데, 헛된 믿음이다. 돌솥밥, 뚝배기 곰탕 등 너무 뜨거워 제 맛을 느낄 수 없는 음식을 생생하다는 이유로 즐겨 먹는 우리식 문화가 가지를 잘못 친 경우다. 맛이 채 어우러지지도 않을뿐더러, 온도가 높아 맛을 제대로 느낄 수도 없다. 따라서 완전히 식힌 뒤, 먹기 전에 다시 살짝 구워야 빵의 참맛을 즐길 수 있다. 통곡식빵이라면 구운 뒤에 아예 하룻밤 정도 묵히면 맛이 더 좋아진다. 좋은 빵이라면 딱히 필요 없지만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기름이나 버터빵에는 가염한 것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와 같은 지방으로 맛을 북돋아주는 것도 좋다.(32-33p)

 

 

온도 등을 이유로 잔의 다리를 잡고 마시는 게 진짜 매너처럼 퍼져 있는데, 근거 없는 허례허식이다. 인간의 체온은 기껏해야 36.5, 와인의 1잔 표준 분량은 150ml 안팎이다. 마시지 못할 만큼 온도가 올라갈 수가 없다.(53p)

 

 

못을 박겠다. 국산 맥주는 맛이 없다. 입맛이나 취향의 문제가 절대 아니다. 굉장히 보편적이며 일관된 평가다. 비어애드버킷 같은 전문 사이트부터, 국내 거주 외국인들의 사이트까지 출처도 다양하다. 버드와이저 등과 비교해도 평균 60점대에 멀겋다 정도는 양반, 오줌에 비교한 극단적인 평가까지 돈다. 대동강 맥주보다는 당연히 맛없다. 수입이 되던 시절 여러 번 마셔 보았다. 간단히 비교하자면 대동강 맥주는 조금 더 깔끔하게 다듬은 칭다오나 하이네켄의 수준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잉글랜드의 망한 양조장(1824년 문을 연 트로브리지의 어셔)의 설비를 통째로 사서 옮겨다가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외 선전용이라거나, 잉글랜드에서 옮겨왔으므로 자국 매체가 두둔한다는 주장에 설득력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맛만 놓고 보자면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인 건 확실하다.(57-58p)

 

 

음식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참으로 다양한 소재가 짜증을 유발한다. “쫄깃한 홍합”(현실: 너무 익힘. 해산물은 절대 쫄깃하면 안 된다), “맛있게 맵다는 짬뽕(현실: 수입 캡사이신 액을 듬뿍 쏟아 부음. 게다가 매운맛은 통각, 즉 상처로 인한 고통이니, 맛있을 수가 없다), 즉석에서 레몬 세 개로 짜주는, 인심 후한 레모네이드(현실: 변질을 막기 위해 껍질에 씌운 왁스는 벗겼을까?) 등 가지각색이다. 울어야 할 시점에 웃고, 칭찬해야 할 시점에 화를 낸다. 아니라고 말해도 믿지 않는다. ‘입맛은 주관적이니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입맛의 영역에서 평가도 불가능한, 기본을 안 지켜 못 만든 음식을 놓고 그렇게들 말한다. 말을 섞기조차 피곤하다.(67-68p)

 

 

여느 육류와 마찬가지로 닭가슴살 또한 결의 반대 방향으로 썰어야 먹기 훨씬 편하다. 인터넷에 퍼진 근본 없는 레시피를 믿고 결대로 쪽쪽 찢지 않는다.(84p)

 

 

육수 온도에 얽힌 개념의 차이는 완성된 국물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무조건 펄펄 끓어야 한다. 그렇게 가마솥에서 끓은 걸 잘 식지 않는 두툼한 뚝배기에 담아내야 한다. 거기에 뜨거운 공깃밥마저 만다. 그래야 시원해서 맛있다고들 한다. 혀를 데고 입천장이 벗어지고 온도가 너무 높아서 짠지 단지 맛을 느낄 수조차 없는데도 좋아한다.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음식 문화에 우열이 없다지만 이것만은 서양식이 낫다. 따뜻하지만 뜨겁지 않아야 한다. 온기가 살아 있되, 입과 목에서 불편함 없이 삼키고 넘길 수 있어야 한다. 굳이 수치까지 들먹이자면 섭씨 60도 정도다. 잘 지키는 곳이 은근히 드물다. 손님 탓이다. 식었다며 뜨겁게 데워달라는 요구를 종종 한다고 들었다. 준다면 분명 공깃밥도 말 사람들이다. 완고한 한식의 시각으로 무장하고 양식당에 찾아가는 건 또 얼마나 폭력적인가.(91p)

 

 

회식자리의 믿음과 달리, 삼겹살이 아니더라도 고기는 자주 뒤집어 주는 게 좋다. 그래야 고기 양면의 온도차가 벌어지지 않아 더 잘 익는다. 혹 고기를 자주 뒤집어 선배나 상사로부터 구박을 당한 경험이 있다면, 이 책을 근거 삼아 반박할 것을 권한다.(206-207p)

 

 

 

이용재, <외식의 품격> , 오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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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9

 

 

지루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그런 문학은 넘쳐 난다. 평온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내 생각에는 그것이 최고의 문학이다. 슬플 때를 위한 문학도 있다. 기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지식에 갈증을 느낄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절망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이 마지막 문학이 울리세스 리마와 벨라노가 하고 싶어 한 문학이다. 곧 알겠지만 심각한 오류이다. 예를 들어 평온하고 교양 있고 대체로 건전한 생활을 하는 성숙한 독자, 즉 평균적인 독자를 생각해 보자. 책과 문학지를 구매하는 사람을. 자 그 사람이 여기 있다. 그 사람은 차분할 때를 위해, 평온할 때를 위해 쓰인 문학을 읽을 수 있다. 또한 터무니없거나 유감스러운 공모 없이 비판적인 눈으로 그리고 냉철하게 다른 모든 종류의 문학을 읽을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런 말이 누구의 감정도 상하게 하지 않길 바란다.

이제 절망하는 독자를 생각해 보자.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문학이 대상으로 하고 있을 독자를. 여러분에게 무엇이 보이나? 첫째, 절망하는 이들은 젊은 독자, 혹은 잔뜩 예민해진 성숙하지 못한 성인, 비겁한 성인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자살하는 전형적인 머저리(표현이 뭐하지만)라는 말이다. 둘째, 그들은 한계가 있는 독자이다. 왜 한계가 있느냐고? 간단하다. 그게 그거지만 절망의 문학 혹은 절망하는 사람들을 위한 문학밖에 못 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마의 산”(이 작품은 내 보잘것없는 견해로는 조용한 문학, 차분한 문학, 완벽한 문학의 패러다임이다)을 단숨에 못 읽는 자 혹은 태아일 뿐이다. 이런 사람이라면 레 미제라블이나 전쟁과 평화도 마찬가지이다. 내 이야기가 꽤 명쾌하지 않은가? 그렇다, 나는 명쾌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말하고, 경고하고, 그들이 직면할 위험을 대비시켰다. 돌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절망하는 독자들은 캘리포니아 금광과 마찬가지이다. 머잖아 고갈된다! 왜냐고? 너무나 명백한 일이다! 사람이 평생을 절망하면서 살 수는 없다. 몸이 결국 말을 듣지 않게 되고, 고통은 결국 견딜 수 없어지고, 총명함은 차가운 세찬 물줄기 속에 사라진다. 절망하는 독자는(더구나 시를 읽는 절망하는 독자는 더 견딜 수 없다. 내 말을 믿어라) 결국 책과 멀어지고, 필연적으로 절망만 하는 사람이 된다. 아니면 절망을 치료한다! 그러면 절망적인 독자는 갱생 과정의 일환으로 천천히(강보에 쌓인 아이처럼, 신경 안정제가 녹아 만들어진 비를 맞으면서) 차분한 독자, 휴식하는 독자들을 위한 문학에 집중 가능한 정신 상태로 돌아온다. 그것을 사춘기에서 성인으로의 이행이라고 부른다(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라도 그렇게 부르련다). 그러나 평온한 독자가 되었다고 해서 절망하는 독자를 위한 책을 읽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당연히 그런 책도 읽는다! 특히 그 책이 훌륭하거나 괜찮으면, 아니면 친구가 추천했다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지겨워진다! 무기나 처형당한 메시아가 난무하는 그 씁쓸한 문학은 궁극적으로 평온한 독자의 심장을 파고들지 못한다. 차분한 페이지, 성찰이 있는 페이지, 기법상 완벽한 페이지와는 달리. 나는 그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경고를 했다. 기법상 완벽한 페이지를 가르쳐 주었다. 위험에 대해 알려 주었다. 광맥을 고갈시키지 말라고! 겸허해지라고! 미지의 땅에서 찾아 헤매고 방황하라고! 그렇게 하되 빵 부스러기나 하얀 조약돌 같은 생명줄은 유지한 채! 그러나 나는 미쳐 있었다. 딸들 잘못으로, 그들의 잘못으로, 라우라 다미안의 잘못으로 미쳐 있었다. 그래서 아무도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321-323p)

 

 

나는 생물학자가 되면 시간이 있고 돈도 있을 거라고, 그 도시들과 나라들을 보고자 히치하이킹을 하고 아무 데서나 자면서 세계를 돌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 도시들과 나라들을 <> 생각이 아니라 <살아 볼> 생각이야. 멕시코에서 살았던 것처럼. 내가 말했다. 잘 살아 봐, 네가 원한다면 그런 곳들에서 살다 죽으라고. 나는 돈 생기면 그때 여행을 할 테니. 그가 말했다. 그때가 되면 시간이 없을걸. 내가 말했다. 없지 않을 거야. 도리어 나는 내 시간의 주인이 될 거야. 내 시간을 이용해 하고 싶은 것만 할 거야. 그러자 그가 말했다. 그때는 젊지 않겠지. 아르투로는 그 말을 하면서 거의 울려고 했다.(337-338p)

 

 

 

로베르토 볼라뇨, <야만스러운 탐정들 1> ,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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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3

 

 

 

과학사라는 커다란 분야를 다루는 이 책이 흥미진진한 일화를 들려주며 열심히 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은 확실하고도 완벽하게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는 생각이 든다. 과학서를 읽고 드는 생각이 이런 것이라면 허무해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과문한 내가 다른 과학 관련 책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때마다 공통적으로 드는 생각은 위와 거의 비슷했다. 과학을 공부하거나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빌 브라이슨, <거의 모든 것의 역사> , 까치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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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6

 


할례라는 지독한 악습이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많은 나라에서 만연해있다는 건 알겠다. 그러나 그건 이 책을 읽기 전에도 알고 있었고, 알 수 있는 문제다. 할례에 대한 인식제고가 이 책을 쓴 목적이라면 10페이지로 축약이 가능하다. 90년대와는 달리 2016년의 현재는 인터넷 검색만 해봐도 할례의 역사와 참상 등에 대해 훨씬 상세하게 알 수 있으며, 그걸 검색해보지 않고 관심을 가지지 않을 사람이라면 애초에 이 책을 읽을 리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기에는 지금 시점에서 이 책을 읽는 것은 정보를 얻는다는 측면에서도 실익이 없고, 정보 획득이 아닌 한 인물의 감동적인 인생역정 성공기를 보고 싶은 것이라고 해도 썩 권하고 싶지 않다. 책의 앞부분에서 개인의 기지와 재치, 순발력을 발휘하여 상황을 모면하고 담대하게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모습을 보고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 지 궁금했지만, 영국에 온 이후의 삶은 너무나 전형적이었다. 인물의 매력을 전혀 느낄 수 없었고, 불평불만 투성에 아무리 생각해도 순전히 세상 사람들의 호의와 환대에만 의존하는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런 류의 성공기에는 전혀 공감되지 않고 궁금하지도 않는 이유가 있다. 삶이란 훨씬 복잡다단한 측면이 있으며 내가 책에서 읽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런 것들이다. 아마도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없는 와스리 디리와 그를 도와준 캐틀린 밀러라는 사람이 함께 썼다는 책 자체의 한계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와리스 디리의 평면적인 모습밖에 못 드러낸 것 같다. 여기서 와리스 디리가 악한이라고 치를 떨며 묘사하는 사람들은 두둔할 필요도 없는 쓰레기 같은 인물이지만, 그건 굳이 아프리카라는 특수한 상황을 들지 않더라도 세계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인간의 유형이다. 오히려 그 정도는 애교라는 생각이 들었고, 바로 그런 생각이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인식하는 현실의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족 간의 전쟁은 남성들의 자존심과 이기주의, 공격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여성 할례와 다름없다.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이다. 두 가지 다 남자들이 자신의 영역과 소유물에 집착해서 생긴 결과다. 여자는 관습적으로, 법적으로 남자의 소유물에 속한다. 남자들의 성기를 잘라버리면, 우리나라는 살기 좋은 나라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남자들이 진정하고 세상을 좀 더 조심스럽게 대하게 될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분비되던 테스토스테론이 없어지면 전쟁도, 죽음도, 도둑질도, 강간도 사라질 것이다. 남자들의 은밀한 부분을 잘라놓고, 피를 흘리다 죽든지 살든지 내버려두면 그제야 비로소 자신들이 여성에게 어떤 짓을 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311p)

 

 

 

와리스 디리, <사막의 꽃> , 섬앤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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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1



 

미리 말해두지만, 당신의 삶과 나의 삶, 과거와 미래, 씁쓸함으로 바뀐 달콤한 것들, 그리고 기쁨으로 변할지도 모르는 씁쓸한 것들에 대해 말해야 하는 이 편지 속에는 당신의 오만함에 깊은 상처를 낼지도 모르는 이야기가 자주 나올 거야. 만약 그렇다면, 그것이 당신의 오만함을 완전히 죽여버릴 때까지 편지를 읽고 또 읽기를. 만약 편지 속에서 당신이 부당하게 비난받는다고 느끼는 무언가를 발견한다면,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부당하게 비난받는 어떤 과오가 있게 마련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만약 편지 속에 당신 눈에서 눈물을 자아내는 구절이 단 하나라도 있다면, 밤과 더불어 낮마저도 눈물을 위한 시간이 되어야 하는 감옥에서 우리가 우는 것처럼 울기를 바라. 그러는 것만이 당신을 구원할 수 있을 테니까.(44p)

 

 

궁극적으로, 결혼이나 우정과 같은 공동적인 관계를 이어주는 건 대화이고, 대화는 서로의 공통적인 기반이 있어야 가능하지. 그리고 지적 수준이 아주 다른 두 사람 사이에 가능한 공통적 기반은 가장 낮은 수준이 될 수밖에 없어. 생각과 행동에서 경박한 것은 매력적이지. 경박함은 내 극과 역설 속에 표현된 아주 멋진 철학의 핵심이기도 하고. 하지만 삶의 허황됨과 어리석음은 종종 나를 진력나게 했어. 우린 오직 진창 속에서만 만날 수 있었던 거야. 당신이 끝없이 반복했던 단 한 가지 이야기가 아무리 지독하게 매력적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조차 더없이 단조롭게 느껴졌지. 난 종종 지루해 죽을 것만 같았고, 당신이 하는 이야기를 당신과 어울리기 위해 치러야 하는 값비싼 대가의 일부로, 어쩔 수 없이 참고 견뎌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지. 뮤직홀에 빠져드는 당신의 취향이나, 먹고 마시는 데 엄청난 돈을 써대는 당신의 기벽, 또는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당신의 성격을 받아들였던 것처럼.(60-61p)

 

 

당신한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고통은 우리를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야. 고통만이 유일하게 우리가 살아 있음을 의식하게 해주기 때문이지. 과거의 고통에 대한 기억은 우리에게 꼭 필요해. 그건 우리의 지속적인 정체성에 대한 보증서이자 증서 같은 것이거든. 나 자신과 즐거움의 기억 사이에는 나 자신과 실제의 즐거움 사이만큼이나 깊은 심연이 가로놓여 있어. 세상 사람들이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당신과의 삶이 쾌락과 허랑방탕함과 웃음만으로 일관된 것이었다면, 아마 난 과거의 단 한순간도 기억해낼 수 없었을 거야.(69-70p)

 

 

전적으로 자유로우면서도 동시에 전적으로 어떤 법칙의 지배를 받는 것, 그것이 우리가 매 순간 깨닫게 되는 인간적인 삶의 영원한 모순인 것 같아. 그리고 종종 그것만이 당신 성격에 대한 유일하게 가능한 해명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인간의 영혼이 지닌 심오하고 무시무시한 미스터리에 대해 어떻게든 설명할 수 있다면 말이지.(86p)

 

 

나 역시 나만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지. 나는 내 삶이 한 편의 눈부신 희극이 될 거라고 믿었어. 당신은 그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우아한 인물 중의 하나일 거라고 생각했고. 그런데 알고 보니 내 삶은 한 편의 역겹고 혐오스러운 비극이었던 거야.(88p)

 

 

인생의 치명적인 실수는 인간의 비합리성에 기인하는 게 아니야. 비합리적인 순간이 때로는 가장 근사한 순간이 될 수도 있거든. 인생의 치명적인 실수는 인간의 논리적인 면에서 비롯되지. 둘 사이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어.(93p)

 

 

나는 불평할 생각이 전혀 없어. 감옥에서 깨닫게 되는 것 중의 하나는, 모든 것은 그대로이며, 앞으로도 그대로일 것이라는 사실이야(114p)

 

 

내겐, 이 모든 일이 어제도 아닌, 바로 오늘 일어난 것만 같이 느껴져. 고통은 하나의 긴 순간이기 때문이지. 고통은 계절처럼 나눌 수 있는 게 아니야. 우린 다만 그 다양한 순간들을 기록하고, 그 순간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라고. 우리에게 시간은 전진하는 게 아니야. 순환할 뿐이지. 이곳에서의 시간은 고통을 중심축으로 끊임없이 회전하는 것처럼 느껴져. 삶을 마비시키는 부동성, 일상의 세세한 상황까지 불변의 패턴에 따라 규제하기. 먹고 마시고 걷고 눕고 기도하거나 또는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는 행위까지 빠짐없이 지배하는, 철의 공식으로 이루어진 가차없는 법칙. 이러한 삶의 부동성은 끔찍한 각각의 날들을 아주 작은 디테일에서까지 형제처럼 닮게 만들어버리면서,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는 외적인 힘들에까지 그 부동성을 전염시키는 것처럼 보이지. 파종기나 수확기, 허리를 굽혀 곡식을 수확하는 사람들이나 포도나무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면서 포도를 따는 사람들, 떨어진 꽃잎들로 새하얗게 변하거나 떨어진 과일들이 흩어져 있는 과수원의 풀밭에 관해서 우린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 수 없어. 우리에겐 오직 한 가지 계절, 고통의 계절만이 존재하기 때문이지.(117-118p)

 

 

내가 두 명의 경관 사이에서 파산 법정으로 향할 때, 음울한 긴 복도에서 나를 기다리던 로비는 수갑을 차고 고개를 숙인 채 지나가는 내게 엄숙하게 모자를 들어올려 경의를 표했어.

(...)

지혜가 내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고, 철학은 불모지와 같고, 내게 위안을 주고자 했던 이들의 격언이나 문구가 내 입속에서 티끌과 재처럼 서걱거릴 때, 그 조용히 침묵하던 작은 사랑의 행위에 대한 기억은 나를 위해 모든 연민의 우물을 막아놓았던 봉인을 풀고, 사막을 장미처럼 활짝 꽃피우게 하며, 고독한 유배의 씁쓸함으로부터 나를 끌어내 세상의 상처받고 망가진 위대한 영혼들과 조화를 이루게 했지.(122p)

 

 

그리고 이 모든 것에서 얻은 결론은, 나는 당신을 용서해야 한다는거야. 나는 반드시 당신을 용서해야만 해. 지금 이 편지를 쓰는 것도 당신 마음속에 씁쓸함을 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그런 감정을 뽑아내기 위해서야.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당신을 용서해야하는 거야. 가슴속에 독뱀을 품은 채 자신을 갉아먹고 자라게 하거나, 매일 밤 일어나 자기 영혼의 정원에 가시를 심을 수는 없으니까.(134p)

 

 

고통은 영구적이고, 모호하고, 어두우며 무한성을 띠고 있다.(138p)

 

 

나는 내가 평범한 교도소의 평범한 죄수였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받아들여야만 해. 그리고 당신한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가 배워야 하는 것들 중 하나는 그런 사실을 부끄럽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야. 나는 그 사실을 하나의 벌로 받아들여야 해. 만약 벌 받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벌 받는 게 아무 소용 없겠지. 물론 난 내가 저지르지 않은 일들 때문에 유죄판결을 받기도 했고, 내가 한 행동들 때문에 유죄판결을 받기도 했지.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내가 저지르고도 한 번도 벌을 받지 않은 것들이 그보다 훨씬 더 많아.(145p)

 

 

즐거움과 웃음 뒤에는 거칠고 엄혹하고 냉담한 기질이 있을 수 있어. 하지만 고통 뒤에는 언제나 고통이 있을 뿐이지. 기쁨과는 달리 고통은 가면을 쓰지 않아.(153-154p)

 

 

어느 한순간에 무언가를 깨달았다가는, 이내 무거운 걸음으로 뒤따르는 긴 시간 동안 그것을 잊고 살기 때문이지.(156p)

 

 

다른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162p)

 

 

시적인 심성을 지닌 모든 이들처럼 그는 무지한 사람들을 사랑했어. 그는 무지한 사람의 영혼 속에는 언제나 위대한 생각을 위한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하지만 그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참을 수가 없었어. 특히 교육에 의해 바보가 된 사람들을. 매사에 왈가왈부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현대인들. 그리스도는 그들을 이렇게 묘사했지. 앎의 열쇠는 갖고 있지만, 자신이 사용할 줄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하도록 허용하지도 않는 유형이라고.(179-180p)

 

 

내가 여기서 나간 후에 한 친구가 파티를 열어 나를 초대하지 않는다 해도 난 조금도 서울해하지 않을 거야. 나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어. 자유와 책과 꽃과 달이 있는데 어떻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어? 게다가 이제 파티 같은 것은 내 몫이 아니야. 그런 건 이미 신물이 날 만큼 해본 터라 더이상 아무런 흥미도 없어. 이제 내겐 그런 식의 삶은 완전히 끝났어. 아주 다행스럽게도 말이지. 하지만 여기서 나간 후에 어떤 친구가 슬픔에 처했는데 그것을 나와 함께 나누기를 거부한다면, 그때는 정말 더없이 씁쓸하게 느껴질 것 같아. 만약 그 친구가 내게 애도의 집의 문을 닫아버린다면, 나는 몇 번이고 다시 돌아가 들어가게 해달라고 애원할 거야. 내가 함께 나눌 자격이 있는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만약 그가 나를 그러기에 적절하지 않고, 자신과 함께 눈물 흘릴 자격이 없는 존재로 여긴다면, 나는 그 사실을 가장 사무치는 수치이자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내게 가해진 불명예로 느끼게 될 거야.(189p)

 

 

감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눈물은 매일 겪는 일상의 한 부분이지. 감옥에서 울지 않는 날은 마음이 행복한 날이 아니라, 마음이 돌처럼 굳은 날이야.(192p)

 

 

예전에 사람들은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라며 나를 비난하곤 했지. 지금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한 개인주의자가 되어야만 해.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도 나 자신으로부터 많은 것을 이끌어내고, 그 어느 때보다도 세상에 적게 요구해야만 해. 사실, 나의 몰락은 삶에 개인주의를 지나치게 요구해서가 아니라 너무 적게 요구한 데서 비롯된 거야. 내 삶에서 유일하게 수치스럽고 용서받을 수 없고 경멸할 만한 행위는 당신 아버지로부터 나를 지켜달라며 마지못해 사회에 도움과 보호를 요청했다는 거야. 누군가에게 그런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개인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충분히 잘못된 것일 수 있어. 하지만 당신 아버지 같은 성격과 면모의 사람 때문에 그랬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떤 구차스러운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을까?

물론 내가 사회의 힘을 작동시키자마자, 사회는 나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지. “당신은 지금까지 나의 법들을 무시하며 살아와놓고, 이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 법들에 호소한다는 건가? 그렇다면 당신은 그 법들이 최대한으로 적용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오, 당신이 법에 호소를 했으니, 그 법을 따라야만 하오.” 그 결과, 나는 지금 감옥에 있지.(194-195p)

 

 

내가 정말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신이 당신 아버지의 특징적인 성격을 똑같이 따라 하려고 했다는 거야. 그는 당신에게 하나의 경고가 되었어야 하는데 어째서 당신이 모방하고자 하는 본보기가 되었는지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서로 증오하는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유대감이나 동료애 같은 게 존재할 수도 있다는 예외 때문이 아니라면 말이지. 아마도 비슷한 이들이 서로에게 적대감을 느끼는 기이한 법칙에 의해, 당신과 당신 아버지는 여러 면에서 아주 달라서가 아니라 아주 비슷하기 때문에 서로를 증오하는 게 아닐 까 생각해.(197-198p)

 

내가 당신이라면, 누군가가 가식적인 것들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걸 원치 않았을 거야. 누구라도 자신의 삶을 세상에 드러내 보여줘야 할 이유는 없어. 세상은 어차피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자신이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하고는 얘기가 달라지지. 예전엔 언젠가 나와 아주 가까운 친구10년 동안 알고 지낸 친구가 나를 보러 와서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자기는 세상 사람들이 나에 대해하는 나쁜 말들을 한마디도 믿지 않으며, 나를 완전히 결백한 사람으로, 당신 아버지가 꾸민 비열한 흉계의 희생자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내가 알기를 바란다고 말이지. 나는 그의 말에 울음을 터뜨리면서 이렇게 말했어. 당신 아버지의 결정적인 비난 가운데는 거짓된 것들과 역겨운 적의에 의해 내게 전가된 것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내 삶이 비뚤어진 쾌락들과 기이한 열정들로 가득했던 것 또한 사실이라고. 그러니 그가 그 사실을 나에 관한 기지의 사실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는다면 나는 더이상 그의 친구가 될 수 없고, 그와 어울릴 수도 없다고 말했지. 그는 내 말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만 우린 여전히 친구로 남았어. 나는 가식으로 그의 우정을 구하지 않았던거야. 당신에게도 말했듯이, 진실을 말하는 것은 고통을 동반하는 법이야. 하지만 거짓을 말하도록 강요받는 것은 더욱더 고통스러운 일이지.(217-218p)

 

 

본래 비밀이란 언제나 그 구체적인 발현들보다 훨씬 작은 법이거든. 원자의 위치를 옮기는 것만으로도 온 세상이 흔들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지.(226p)

 

 


오스카 와일드, <심연으로부터>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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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0



기대하던 긴 휴식을 맞이하여 서면 교보에서 다 읽었다. 앉아서 3시간의 보라카이 여행을 다녀온 느낌. 보라카이가 작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도 작다는 걸 알게 됐고, 역시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휴양지를 찾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휴가를 이용해서 유럽 여행을 다녀오는 것도 좋지만 난 역시 휴양지의 바닷가와 수영장이 있는 곳에서 마냥 선베드에 누워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책이나 읽다가 심심하면 수영을 좀 하고 힘들면 누워서 쉬는 걸 반복하는 게 완벽한 휴식이라는 생각을 굳혔다. 이보다 더 좋은 휴가를 생각해낼 자신이 없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 한 일주일 정도만하면 힐링 될 것 같은데 ㅋㅋ.

 

. 꼭 에세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이 작가의 글이 전반적으로 쉽게 읽히는 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책 보기가 질릴 때 '한국이 싫어서'도 한 번 읽어봐야겠다.





선량한 부모들이 자식에게 모험을 허락하는 순간은, 자식에게 닥칠 최악의 위험도 자신들이 수습할 수 있을 때이다. 그래서 부자 부모 아래서 자란 젊은이가 더 많은 모험을 누리게 되고, 더 진취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게 된다.(40p)

 

 

한국식 결혼식은 우리 생각에 그런 허세와 불필요한 지출의 결정체였다. 내 생각에는 전형적인 한국식 결혼식은 빼빼로데이와 매우 비슷하다. 언젠가부터 점점 호사스러워지고 있고, 장식이 본질을 압도하고 있으며, 이제는 거대 산업이 되어버렸다. 업체들이 호사스러움을 부추기고 있으며, 소비자들은 모두 그게 허세이고 바보 같다는 걸 알면서도 그 상술에 넘어가고야 만다. 여자들은 싫다고 하면서도 그 호사스러움에 은근히 끌리고, 남자들은 그래도 평생에 한 번인데······”라는 권유 겸 협박을 이기지 못한다. 남들의 시선이 자식의 행복보다 중요한 부모들은 요즘 이거 안 하는 분은 정말 안 계세요라는 말에 넘어간다. 그리하여 그 괴상망측한 예식을 치르고 난 다음에는 합심해서 다른 희생자들을 찾아 나선다. “너희는 몇 평이니? 혼수는 어떻게 했니? 꾸밈비는 얼마나 받았니?” 따위를 물어보면서. “그래도 호텔에서 하는 게 보기에 낫긴 하더라라거나 장남이고 개혼인데 최소한은 받아야지라거나 남들 시선도 있는데라고 핀잔을 주고, 때로는 위협하면서.

왜 이런 미친 짓거리가 사라지지 않을까?

내 생각에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이 미친 짓거리에 협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세대가 미친 짓거리의 뼈대를 세우고, 신세대가 거기에 살을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미친 짓거리에 협조하지 않는 자들을 걔 원래 좀 특이하잖아라며 이단자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 미친 짓거리를 성대하게, 무의미하게 치러낼수록 찬탄을 사고 그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기 때문이다.(48-49p)

 

 

여행을 갈 때 들고 가는 책을, 가벼우면서도 진도 안 나가는 물건이 최고다. 글이 너무 재미있고 감동적이면 여행의 감흥이 반감된다. 내가 강력히 추천하는 여행용 서적은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이다. 얇은데 정말 더럽게 지루하다. 여행 중에 이 소설을 읽으면 여행의 재미가 틀림없이 배가된다. ‘내가 어디에 있건 더블린에 있는 것보다는 낫겠지하는 마음이 절로 드니까.(62p)

 

 

그렇게 말하고서 HJ는 한숨을 쉬었다.

왜 한숨을 쉬어?”

이렇게 여행 구상을 해도 막상 가보면 또 실수할 거 같아서. 큰 구조는 비슷하다 해도 세세한 디테일은 다르잖아. 예를 들어 우리가 코타키나발루의 어느 호텔을 가게 되면, 거기에는 또 나름의 특성이 있을 텐데 우리는 그걸 모르고 부딪치게 되겠지. ‘아니, 여기 왜 이래?’, ‘어라, 여기에 이런 길이 있었네?’, ‘아 이 수영장은 아침에 와야 그늘이 져서 좋구나’, ‘이 수영장은 오후에 한가하구나이런 걸 4일째에야 겨우 알게 될 텐데, 그러면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지.”(195p)

 

 

 

장강명, <5년 만에 신혼여행> ,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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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14

 

 

저의 궁극적인 목적은 극우파에게 유머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남을 웃기는 데는 선수지만 정작 자신은 어디에서 웃어야 하는지 모르죠.(32p)

 

 

나는 가끔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했다. 아무 말이나 하고 싶지만 아무 말이나 들어줄 사람이 없다고 했다. 에리크는 자신도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모두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내게 글을 쓰라고 말했다. 글을 쓰면 삶이 조금 더 비참해질 거라고, 그러면 기쁨을 찾기가 더 쉬울 거라는 게 그의 말이었다. 나는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고 했다.(34p)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약속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책은 어디서나 읽을 수 있고 언제나 덮을 수 있다. 나는 책을 한 번에 세 페이지 이상 읽는 일이 드물다. 좋은 책은 대부분 세 페이지 안에 좋은 부분이 나온다. 또는 세 페이지 안에서 좋음을 얻는다. 그렇다면 더 이상 독서를 지속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책을 덮는다. 좋지 않은 책은 세 페이지가 넘도록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책을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있을까. 나는 책을 덮는다. 책과 달리 영화와 공연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공간으로 가야 하며, 표를 끊고(심지어 대부분 예매를 해야 한다!) 줄을 서서 모르는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정해진 시간 동안 작품을 관람한다. 이런 특성은 점점 나를 지치게 했고, 최근에는 참지 않게 되었다. 다행인 것은 지난 시대에 비디오가 나왔고, 지금은 컴퓨터로 영화를 보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하루에 십 수 편의 영화를 보는데, 한 영화당 짧게는 30초, 길어도 10분 이상 보는 일이 드물다. 나는 서재에서 책을 꺼내 보듯 하드에 담긴 영화를 보며 영화를 보다가 다른 영화의 장면이 생각나면 그곳으로 옮겨간다. 좋은 부분이 느껴지면 플레이를 정지하고 방 안에 잠시 서 있거나 귤을 꺼내 손 위에서 가지고 논다. 어떤 영화감독이나 소설가도 임의로 작품을 펼쳐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공들여 보길 바란다. 나는 그런 태도가 강하게 배어나는 작품일수록 지루함을 느낀다. 책은 내 손안에 있다. 나는 언제든 책을 열거나 덮을 수 있고, 책 역시 언제나 내게서 달아날 수 있다.(125-126p)

 

 

나는 여행을 잘 가지 않는데 누군가와 여행을 갔다 오면, 그 뒤로 그 사람이 다시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더욱 갈 일이 없는데, 내게는 이곳과 저곳이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또한 멀리 가면 피곤함을 느끼고 피곤함을 느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늘 가까운 곳만 가는 편이며 어딜 가든 곧 돌아오곤 했다.(137-138p)

 

 

영화는 어떤 이미지에 대한 어떤 이미지에 대한 어떤 이미지입니다. 무슨 말이야. 나는 이것도 책에 나오는 말이라고 했다. 부르주아적인 쓰레기에 대한 말이야? 아니. 나는 이건 삶에 대한 말이라고 했다. 삶은 어떤 이미지에 대한 어떤 이미지고 고다르에 따르면 영화는 현실과 차이가 없고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라는 현실이기 때문에 어떤 이미지에 대한 어떤 이미지에 대한 어떤 이미지가 영화라면 삶이 곧 그 어떤 이미지라고 말했다. 친구는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시고 자신이 왜 책을 읽지 않거나 책 읽는 걸 좋아하지 않는지 너를 보면 알겠다고 말했다.(144p)

 

우리는 모두 자신의 목소리를 처음 듣는 순간 자신이 생각했던 종류의 사람이 아님을 깨닫지 않는가, 내가 생각하는 나는 가장 왜곡된 형태의 나 아닌가 따위의 생각을 했다.(206p)

 

 

케이프타운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 중 하나로 대부분의 사람이 총을 들고 다니며 수틀리면 총질을 하고 도적질을 하는 곳인데,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이를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지만 자신은 이미 애틀랜타의 현대건설 지점에서 일할 당시 살던 아파트 입구에서 자그마한 흑인에 의해 강도질을 당한 경험이 있었고, 그때 자신의 등에 권총으로 생각할 만한 차가운 금속 물체가 닿았다며 총이 몸에 닿는 것을 상상해보았는지 자신은 오직 한 가지만 생각했다고 혹시 이 멍청한 새끼가 실수로 방아쇠를 당기면 어떡하나, 얘가 나를 죽이려 한다면 어차피 나는 죽는 거지만 죽일 생각도 없는데 오발 사고가 나서 죽으면 어떡하나, 총은 생각이 없고 총은 의지가 없고 총은 실수와 의지를 동일하게 받아들이는 기계니까 이 새끼가 내 지갑을 받아 들다가 아이코 이러면서 방아쇠를 당기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 때문에 오금이 저렸다고,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아찔하다고, 그러니까 너도 케이프타운에 올 거면 각오하라고, 너는 의도적으로 죽을 수도 있지만 실수로 죽을 수도 있다고, 꽃가루처럼 날아든 총알에 비명횡사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말했다. 나는 재경에게 비명횡사 따위는 전혀 두렵지 않고 케이프타운에 가고 싶다고 답했지만 어쩌면 한 번도 그런 상황에 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223p)

 

 

 

ㅡ 정지돈, <내가 싸우듯이> 中,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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